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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드라마 촬영 중 1명 사망·40명 부상

    최근 중국에서 드라마 촬영 중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연이어 터져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8일에는 드라마 ‘나의 연대장, 나의 연대’(我的團長我的團)의 전쟁신을 촬영하던 도중 포탄 파편에 의해 스태프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중국 윈난(雲南)성 바오산(保山)시에서 촬영중인 이 드라마는 일본군과 맞서는 인민해방군의 비애를 담은 드라마로 전쟁신이 유난히 많다. 이 드라마는 인민해방군과 윈난성 등이 3000만 위안(42억 7000만원)의 자금을 공동 투자한 블록버스터 급 드라마로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스태프가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한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은 지난 20일에도 촬영도중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로 38명이 부상해 또 한번 충격을 주고 있다. 무너진 다리는 바오산 텅충(騰沖)현의 관광 명물로 제작팀은 촬영을 위해 다리를 일부 개조했다. 다리 위에 목재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또 하나의 다리를 만들어 얹는 공사를 한 것. 일본군에 쫓겨 다리를 건너는 신을 찍는 도중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다리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 사고의 원인이 됐다. 리허설 당시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다리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결국 붕괴됐고 배우들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다리에 깔리는 부상을 당했다. 부상당한 배우들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배우들 모두 엑스트라로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제작자 우이(吳毅)는 “제작사측에서 치료비용과 생활비 등을 배상할 것”이라며 “절대 피해보상금에 대해서는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큰 사고가 잇따라 2번이나 발생했지만 다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꼭 드라마 촬영을 마무리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한편 제작진은 주·조연급 배우들의 심각한 부상이 없는 관계로 조만간 촬영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삼면초가’에 몰린 미국의 중동정책

    ‘삼면초가’에 몰린 미국의 중동정책

    1. ‘전쟁불사’ 최후통첩 이라크에 전운이 다시 짙어지고 있다. 반미 강경 시아파 지도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친미 정부에 자신의 추종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라크내 수니파 무장단체인 알 카에다도 이라크 주둔 미군을 상대로 한달 동안 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19일(이하 현지시간) BBC, 워싱턴포스트 등 외신에 따르면 알 사드르는 이날 “이라크 정부가 제 정신으로 돌아와 평화의 길을 찾지 않는다면 자유를 찾을 때까지 전쟁을 선언하겠다.”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사담 후세인 정권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알 사드르의 이같은 강경 발언은 친미 온건 시아파인 누리 알 말리키 총리가 알 사다르의 무장조직인 마흐디 민병대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다시 벌인 직후에 나온 것이다. 이라크 정부는 이날 새벽 미군과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마흐디 민병대의 근거지인 남부 항구도시 바스라 시에 진격, 통제권을 장악했다. 압둘 카림 칼리프 내무부 대변인은 “우리 군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바스라 시의 중심지인 하야니야 지역에 주둔했다.”고 말했다. 알 사드르측의 바스라 시 책임자인 하리스 알 이드하리는 “알 사드르의 휴전 명령으로 정부군의 공격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라크 정부는 지난달 25일 바스라 시를 선제 공격해 6일간 마흐디 민병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알 사드르가 철수를 선언해 무력충돌이 잠정 중단됐었다. 이라크 정부는 이와 더불어 이날 새벽 마흐디 민병대의 또다른 근거지인 바그다드 사드르 시티를 공격,12명이 죽고 130여명이 다쳤다. 미군은 사드르 시티를 고립하기 위해 이 지역의 남쪽 경계에 장벽을 설치 중이다. 알 말리키 총리는 지난 7일 “마흐디 민병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알 사드르 추종세력은 선거 등 모든 정치일정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알 사드르는 2004년 두차례 무장투쟁을 선동해 미군과 충돌을 빚었으나 2006년에는 정치 무대로 진입해 알 말리키 총리의 집권을 도왔다. 현재 이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알 사드르는 “지난해 8월 휴전을 선언하고 정부군과의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정부군은 암살로 보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권력을 장악한 시아파 내부의 충돌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수니파 무장단체인 알 카에다 조직도 공격을 선언했다. CNN은 이날 미국의 테러감시단체인 SITE를 인용, 아부 함자 알 무하지르라고 자신을 밝힌 이라크내 알 카에다 지도자가 인터넷 성명을 통해 “한달간 미군을 공격하겠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인물은 2006년 미군의 공격을 받아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사망한 뒤 이라크내 알 카에다의 지도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2. TV나온 군사전문가들도 알고 보니 군수업자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가 주요 TV에 소속된 군사문제 평론가들을 배후 조종해 이라크 전쟁에 대한 우호적인 보도를 이끌어 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0일 폭로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들 대부분이 전쟁과 직접 이해관계가 얽힌 군수업체와 연계돼 있다는 점에 착안해 예산 등 자금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활용, 언론에 영향을 미쳤다고 신문은 전했다. NYT는 국방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확보한 이메일이나 의사록 등 수년에 걸친 8000여쪽의 자료를 분석해 이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논평을 위해 TV에 출연하는 군전문가들은 퇴역한 군 고위 관리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로비스트나 업체 중역, 컨설턴트 자격으로 군수업체를 대변한다는 내용은 시청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신문은 지적했다. 이들은 이라크 등의 방문을 지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비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고 백악관과 국무부, 법무부 관리들로부터 상황 설명을 듣기도 했다. 국방부 내부 자료는 이들을 ‘메시지 확대론자’나 ‘대리인’으로 언급했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연합뉴스 3. 아프간 “기형아 늘어” “미군은 단 한 번도 열화우라늄탄 사용 여부를 통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미군이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2001년 탈레반 정권 축출 전쟁 당시 미군의 열화우라늄탄 사용 여부를 조사키로 했다고 20일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아프간 보건부의 파이줄라 카카르 차관은 19일(현지시간) “2001년 말 미군이 집중 공격했던 토라 보라 지역에서 기형아 출산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며 이같이 발표했다. 아프간 정부는 전쟁 지역의 흙과 물 등을 채취하고 전쟁 전·후의 기형아 출산 비율 등을 추적 조사할 계획이다. 그러나 카카르 차관은 “열화우라늄탄 사용이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다는 직접 증거는 아직 없는 상태다.”라고 했다. 유전적 문제나 식료품 부족 등 다른 원인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현재 미군은 열화우라늄탄의 피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열화우라늄탄은 ‘걸프전 증후군’으로 불리는 참전 미군 질환의 주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걸프전 증후군’은 방사능 피폭현상과 동일하다. 기형아가 태어나고 암 발생률이 급증한다. 유엔도 ‘사용금지 대상무기’로 분류했다. 미군은 1991년 걸프전쟁에서 처음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해 이라크 전차 1200여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열화우라늄탄은 원전연료 제조과정에서 생기는 열화우라늄을 사용해 만든 포탄이다. 금속의 밀도가 높아 두꺼운 장갑도 쉽게 뚫는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美軍, 이라크 바스라 폭격 초토화

    美軍, 이라크 바스라 폭격 초토화

    석유에 눈먼 미국이 이라크 제2의 도시인 바스라를 초토화했다. 미군은 친미 이라크 정부군과 강경 반미 시아파무장조직인 마흐디민병대가 치열한 교전을 벌이는 이 도시를 처음으로 공습했다. 28일(이하 현지시간) BBC,AP 등 외신들은 “미군 전투기들이 27일 밤과 28일 새벽에 걸쳐 두 차례 폭탄을 쏟아부었다.”고 전했다. 이번 전면 공습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승전선언 이후 5년 만의 일로 미군의 본격 개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석유 수출의 관문인 바스라는 반미 아이콘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이끄는 마흐디 민병대가 주요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바스라가 있는 남부지역엔 민병대의 세력권에 드는 시아파의 집단거주지가 많이 있다. 또한 남부는 세계3위를 자랑하는 이라크의 원유 매장량 가운데 60% 이상이 있는 ‘검은 황금’지대다. 특히 지표에 가깝게 원유가 묻혀 있고 질도 좋아 배럴당 생산단가가 1달러밖에 되지 않는 최적 지대이다. 이들 유전지대가 이라크 종전 후 반미세력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 미국은 공습이란 강경책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공습 이외의 카드로 친미노선인 누리 알 말라키 총리를 이용하고 있다. 그를 반미세력 제거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부채질하고 있다. 그동안 알 사드르의 위세에 눌려 미국의 ‘얼굴 마담’ 노릇을 했던 말라키 총리도 이번 기회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키울 기회로 삼으려 미국에 적극 협력하고 있다. 그는 이라크군 3만명을 바스라에 투입해 25일부터 민병대에 대한 대대적 소탕에 나섰다. 말라키 총리는 28일 “민병대의 항복 시한을 당초 29일 자정에서 4월8일까지 연장한다.”며 “투항하는 민병대원에게는 현금을 주겠다.”고 밝혔다. 앞서 그는 “민병대와 협상은 없다.”며 단호한 입장을 밝혔었다. 무력 충돌이 확산됨에 따라 이라크 전역은 포탄의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더 이상 안전지대가 없는 내전 모드로 진입했다.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바그다드의 미군 특별경계구역인 ‘그린 존’에도 마흐디 민병대의 로켓포와 박격포가 연일 날아들고 있다. 미국 대사관과 이라크 정부청사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이 지역은 이번주 들어서만 4일째 공격을 받고 있다. 수도 바그다드엔 시민 안전을 이유로 30일 새벽 5시까지 3일 동안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통금령 때문에 바그다드에서의 전투는 일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25일부터 바스라에서 시작된 양측의 무력충돌로 지금까지 14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교전은 각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어 희생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라크 의회는 28일 오후 긴급회의를 소집, 이번 사태에 대한 대책 모색에 들어갔다.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말라키의 강경 노선은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는 마흐디 민병대에 타격을 주기 위해 미국이 조장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라크의 내전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61) 반란자와 귀순자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61) 반란자와 귀순자들 Ⅱ

    공유덕과 경중명이 이끄는 반란군이 후금으로 도주하려 하자 명에는 비상이 걸렸다. 명 조정은 주문욱(周文郁)에게 수군을 이끌고 공경(孔耿) 일당을 저지하도록 지시했다. 주문욱은 나름대로 분투했지만 반란군의 도주를 차단하지 못했다. 급기야 공유덕 일당이 계속 달아나 압록강 쪽으로 갈 기미를 보이자 명은 조선을 끌어들이려 했다. 병력을 동원하여 공경의 도주로를 막고, 군량을 마련하여 추격하는 명 수군에게 공급하라는 요구가 날아들었다. 주문욱은 1633년(인조 11년) 1월부터 수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추격했다. 그는 수차례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공유덕 일당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가도 등지에 있는 다른 명군 부대와의 협력 작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요동반도 연안에 흩어진 섬 지역에, 명에 반기를 들고 있는 세력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도 걸림돌이었다. 상가희(尙嘉喜)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었다. 상가희는 본래 모문룡의 부하였다가 모문룡이 죽은 뒤 요동반도 연해의 도서 지역을 전전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주문욱으로부터 공경 일당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사태를 관망하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상가희는 오히려 공경 일당이 후금으로 귀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주문욱, 끝내 조선을 끌어들이다 3월30일, 주문욱이 이끄는 명군은 공경 일당을 추격하여 장자도(獐子島)까지 이르렀다. 장자도는 동쪽으로 가도( 島)를 거쳐 조선의 평안도와 압록강으로 연결되고, 서남쪽으로는 녹도(鹿島), 석성도(石城島), 장산도(長山島)를 거쳐 여순(旅順)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공유덕 등은 장자도에서 여순으로 가는 길이 명군에 의해 차단되자, 압록강을 통해 후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을 굳힌다. 주문욱은 조선에 글을 보내 병력을 동원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평안도의 지방관들이 공유덕 일당에게 양곡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주문욱은 장자도 부근에서 공경 일당을 차단하려고 분전했지만,4월4일 공경의 반란군은 주문욱의 저지를 뚫고 압록강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공경 일당이 명군의 추격권에서 벗어난 4월5일에야 오안방(吳安邦)과 도증령(陶曾齡)이 수군을 이끌고 각각 등주(登州)와 천진(天津)으로부터 합류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뒷북치기’이자 당시 명군이 처해 있던 총체적인 난맥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공경 일당이 압록강으로 진입하자 주문욱 등은 조선을 들볶아대기 시작했다. 공유덕 일당이 후금군과 연결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조선에 강요했다. ●후금과의 절교(絶交) 가까스로 막아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공유덕의 반란’ 사건이 일어날 무렵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했다. 후금으로부터 ‘명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대접해 달라.’고 요구받았을 때, 조선은 ‘내키지 않는 형제관계’를 당장 파기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주문욱 등으로부터 참전을 요구받기 직전인 1633년 1월에도 조선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사건이 있었다.1월25일, 심양에서 돌아온 회답사 신득연(申得淵)은 홍타이지의 국서를 내놓았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은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명에는 공손히 예물을 바치면서 후금에는 약속한 수량도 채워주지 않는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는 이어 자신이 곧 가도를 정벌할 것이라며 큰배 300척을 빌려주고 의주에 있는 포구(浦口)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거부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배를 빌려달라고 다시 요구한 것은 사실 조선으로부터 더 많은 세폐를 받아내기 위한 포석이었다. 인조와 조정은 격앙되었다. 후금과의 화호(和好) 유지를 강조했던 비변사조차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인조는 후금과의 관계를 끊고 선전포고할 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조정은, 세폐를 더 내놓으라는 후금의 요구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내용으로 답서를 썼다. 배를 빌려줄 수도, 세폐를 늘려줄 수도 없다는 답서의 내용은 사실상 ‘절교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2월2일 회답사 김대건(金大乾)이 답서를 가지고 심양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김대건은 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 도강 직전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 김시양(金時讓)과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김대건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김대건을 의주에 대기시켜 놓고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1년 동안 군사를 동원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수년 동안 오랑캐에게 세폐를 보내는 비용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김시양 등은 이어 ‘세상일을 통쾌하게 하려고만 하면 후회가 따르는 법’이라며 후금과의 절교 방침을 재고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격노했다. 그는 두 사람을 붙잡아다가 하옥시키라고 지시하면서 ‘무신들은 춥지도 않은데 떨고, 문신들은 천장만 바라보며 날을 보낸다.’고 통탄했다. 사실 당시 비변사도 처음에는 격앙되었지만 속으로는 김시양 등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면전에서는 인조의 명을 어기지 못하고 ‘회답사를 즉시 출발시켜야 한다.’고 동조했지만, 속으로는 후금과의 절교가 몰고 올 파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유독 최명길(崔鳴吉)만이 ‘후금의 원한을 사서 화를 재촉해서는 안 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김시양 등이 김대건의 도강을 저지하자 비변사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일선에 있으면서 우리의 방어태세가 형편없는 것을 알고 있는 김시양 등의 조처를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비변사는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국서를 부드러운 내용으로 수정하자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김시양 등에게 ‘무장은 화의(和議)를 말하지 않는다.’는 대의를 어긴 죄만 묻자고 했다. 사실상 처벌하지 말자는 주장이었다. 인조는 불만을 터뜨렸지만 결국 비변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인조 또한 후금과의 전쟁까지 감내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의 관계가 또다시 한 고비를 넘는 순간이었다. ●유보된 척화론(斥和論)에 불을 붙이다 하지만 ‘첩첩산중’이었다. 비변사가 인조를 다독여 후금과의 파국을 가까스로 막았던 직후 명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날아들었다.3월13일, 가도의 심세괴(沈世魁)가 ‘공유덕 등이 등주의 반군을 이끌고 여순 쪽으로 도주하고 있으니 조선 해안으로 숨어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으로 표문(票文)을 보내왔다. 4월6일에는 공경의 반군이 장자도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조선도 병력과 군량을 보내 협공하라는 내용을 담은 주문욱의 자문(咨文)이 도착했다. 주문욱은 ‘수군과 전선(戰船)이 후금의 수중에 들어가면 조선도 위험해 진다.’는 경고를 곁들였다. 실제로 4월9일에는 후금 기마병 50명이 중강(中江)에 나타났다. 공유덕 등을 맞이하려고 준비하는 한편, 조선의 동향을 탐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주문욱의 자문은, 어렵사리 유보되었던 후금에 대한 조선의 적개심에 다시 불을 붙였다. 조선은 임경업(林慶業) 등이 이끄는 화기수를 압록강 연안으로 보냈다. 당시 후금군은 압록강에 닿아 있는 구련성(九連城,鎭江)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공유덕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4월10일, 압록강 부근의 탁산(卓山)이라는 곳에서 주문욱 휘하의 명군과 공유덕의 반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주문욱 군이 밀어붙이자 공유덕 등은 천가장(千家庄)을 거쳐 마타자( ) 쪽으로 물러났다. 천가장은 압록강에서 후금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후금군은 두 곳에 홍이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배치하여 주문욱의 공격에 대비했다. 4월13일 주문욱이 마타자를 공격할 때 조선군도 동참했다.300여명의 조선군 화기수들은 공유덕의 반군을 향해 진격하면서 조총을 쏘았다. 후금군 진영으로부터 홍이포의 포탄이 날아 왔다. 조선군은 어느 순간 명과 후금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이다. 김대건의 도강을 멈춰 ‘절교’를 유보시킨 지 불과 두 달 남짓이었다.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은 만주병과 몽골병, 그리고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합쳐 모두 4만명 가까운 병력이었다. 누르하치 시절 이래 후금군은 요동 지역의 명군을 공격할 때마다 항상 수적 우세를 유지해 왔다. 명군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병력을 집중시키는 작전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대릉하 원정에서도 어김없이 그 원칙을 지켰다. ●홍타이지,4만 병력으로 1만5000 대릉하성 포위 휘하 병력의 수가 명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음에도 홍타이지는 신중했다. 그는 과거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던 전철을 뒤풀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병사들을 성을 향해 돌격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격할 경우, 후금군의 인명 손실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명군이 갖고 있는 화포의 위력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성을 포위한 뒤, 성 주위에 두 겹으로 참호를 파라고 지시했다. 참호의 바깥에는 담을 쌓았다. 성과 후금군의 참호 사이의 거리는 약 3리(里) 정도였다.3리 정도면 명군 화포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리였다. 대릉하성에서 금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만주와 몽골군 분견대(分遣隊)와 한인 포병대를 배치하여 바깥 지역으로부터 명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도록 했다. 성을 완전히 고립시킨 상태로 장기전을 펼침으로써 명군을 고사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8월8일과 9일, 포위망을 뚫어 보려고 명군 기마병 600여 명이 성 바깥으로 나왔다가 모두 패하여 도주했다. 후금군은 명군의 출격에 대비하여 곳곳에 복병을 배치했다. 이후에도 명군은 간헐적으로 병력을 내보냈지만 그 때마다 후금군에 격퇴되었다. 홍타이지는 물 샐 틈 없는 포위 상태를 유지하는 한편, 대릉하성 바깥에 위치한 명군의 독립 성보(城堡)들을 각개 격파하려고 시도했다. 대(臺)라고도 불리는 개별 성보들을 향해 홍이포를 비롯한 화포들을 쏘아 타격을 가한 뒤,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작전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각 대에 머물던 많은 명군 장졸들과 백성들이 포격을 받고 전사하거나, 투항해 왔다.10월12일에는 대릉하성 주변의 성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우자장대(于子章臺)가 함락되었다. 후금군은 홍이포 6문, 대장군포 54문을 이용하여 3일 동안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성첩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와중에 남녀 587명이 투항해 왔다. 우자장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주변의 각 대들에도 연쇄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겁을 집어먹은 장졸과 백성들의 도주와 투항이 이어졌다.10월14일에는 대릉하성 외곽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흥보대(陳興堡臺)마저 무너졌다. ●명 대규모 지원군마저 참패 포위를 통해 명군의 목줄을 조여들어 가는 한편, 홍타이지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8월13일부터 수 차례에 걸쳐 조대수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과 투항을 촉구했다. 때로는 투항한 한군(漢軍) 장수들을 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처음 홍타이지로부터 화친과 투항을 요구받았을 때 조대수는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과 상황은 조대수의 편이 아니었다. 8월15일, 포위된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송산(松山) 방면에서 명군 지원군 2000명이 달려 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후금군 병력에 의해 격퇴되었다.25일에도 금주성으로부터 6000명의 원군이 출격했지만 역시 후금군에 차단되어 도주했다.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병력이 번번이 패퇴하자 9월24일 명군은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었다. 산해관으로부터 대규모의 구원군을 다시 보낸 것이다. 감군도(監軍道) 장춘(張春), 총병 조대락(祖大樂) 등이 병력 4만명을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명군은 소릉하(小凌河)를 지나 주둔지에 참호를 파고 화기 등을 정렬 배치하는 등 후금군과 전면전을 벌일 태세였다. 하지만 3일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다시 패하고 말았다. 전투 도중 후금군 진영 쪽으로 불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었다. 날씨도 철저히 후금군 편이었다. 명군은 결국 사령관 장춘을 비롯한 33명의 지휘관이 포로가 되는 등 참패하고 말았다. 전투를 감독하던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은 산해관으로 패주했다. 구원군이 오는 족족 패주했던 데다 외곽에서 전초 기지 역할을 하던 각 대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자 대릉하성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외부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땔감, 마초(馬草)가 고갈되고 있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성밖으로 몰래 나오는 명군 병사들은 매복하고 있던 후금군에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8월24일, 포로로 잡힌 명군 병사로부터 ‘성을 쌓는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가운데 이미 30명 가까이 굶어 죽었다.’는 진술이 나왔다.9월19일에는 ‘성안에 남은 곡식이 불과 100석뿐이고, 탈 수 있는 말은 70마리밖에 없다. 인부들의 절반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병사들은 말고기로 버티고 있으며 말 안장을 쪼개 불을 피우고 있다.’는 형편이었다. 장춘이 이끄는 구원군이 패하고 우자장대마저 무너진 10월 이후의 상황은 절망과 처참 그 자체였다.10월10일, 성을 탈출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투항한 왕세룡(王世龍)의 진술은 충격적이었다.‘성안의 양식은 다 떨어졌고, 인부와 상인들은 모두 죽었으며, 남아 있는 병사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릉하성은 마침내 ‘서로를 잡아 먹는(人相食)’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고립된 명군과는 달리 후금군은 금주를 거쳐 심양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양으로부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시로 실어올 수 있었다. 조대수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고 말았다. ●‘부메랑’된 홍이포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1626년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명군의 홍이포(紅夷砲)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절명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大將軍砲)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佛狼機砲)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 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홍이포를 주조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이었다는 점이다. 홍이포 주조의 총감독이자 나중에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이끌었던 동양성은 원래 무순(撫順)에서 한족 상인들과 오랫동안 거래했던 인물이다. 절반은 한족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는 이후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홍이포 주조의 실무를 감독했던 정계명(丁啓明)은 원래 명군 부장(副將)이었다가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에 투항했던 인물이다. 주조를 직접 담당했던 장인(匠人) 왕천상(王天相)과 두수위(竇守位) 등도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이 획득했던 한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화포 주조의 공을 인정하여 이들 장인을 노비 신분에서 모두 해방시키고 많은 상을 내렸다. 귀순한 한인들의 협조 덕분에 대릉하 공격 당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더 많은 수의 대형 화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명 출신 장인들이 만든 홍이포에서, 명 출신 포병들에 의해 발사된 포탄은 견고한 대릉하의 성보들을 파괴하고 용장(勇將) 조대수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무너져 가고 있던 명으로부터 유출된 인력과 최신 기술들이 ‘부메랑’이 되어 명군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하나로텔 인수해도 시장점유율 38%밖에 안돼”

    SK텔레콤이 공격을 받고 있다. 하나로텔레콤 인수에 대한 정보통신부 인가와 관련해서다. 포탄을 퍼붓는 쪽은 KTF와 LG텔레콤 등 후발사업자들이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공세를 강화하고 있으나 인수 자체의 봉쇄보다는 정통부를 압박해 ‘실리’를 얻어내려는 전략적인 포석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정통부는 일단 다음달 17일까지 결론을 내겠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 물론 추가시한이 있다. 현행법상 30일이다. SKT는 하나로텔레콤 인수에 경쟁업체들이 기를 쓰고 반발하는 것은 ‘떼쓰기’라고 일축한다. 정권 교체기에 이슈화하는 것은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황금의 주파수로 일컬어지는 800㎒ 대역의 주파수 공동 사용과 시장점유율 제한 등이 포함된다. 이와 관련,SKT측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21일 “전체 통신시장을 100으로 놓고 볼 때 KT그룹이 45를 차지하고 있고 SKT와 하나로텔레콤을 합해도 38밖에 안 된다.”면서 “시내 및 시외전화·국제전화·초고속인터넷 등 4개 부문에서 1위 사업자인 KT의 자회사(KTF)가 시장지배력 심화를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했다.LG통신계열사측의 주장엔 “LG통신그룹도 유무선 통신은 물론 단말기·장비·시스템까지 다 갖춘 통신전문기업”이라며 “경쟁기업의 인수 및 합병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억지”라고 강조했다. 800㎒ 주파수에 대해서도 이미 끝난 얘기라는 반응이다. 이 주파수는 경쟁사들의 PCS의 주파수 대역인 1.8㎓에 비해 전파도달거리, 굴절성 등이 뛰어나다.KTF와 LG통신계열사들은 하나로텔레콤 인수문제를 지렛대 삼아 SKT의 800㎒ 주파수를 사용하겠다는 계산이라는 것이다. SKT측은 “800㎒ 주파수는 정부가 2011년까지 사용권한을 부여해준 것”이라면서 “사용권한 기간이 만료되면 정부에서 재할당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35) 명과 후금의 정세 Ⅲ

    1626년(인조4, 천계6) 1월23일 누르하치는 영원성으로 들이닥쳤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20만이라는 설도 있고,13만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누르하치의 대병력이 나타나자 영원성의 전면에 머물던 명의 관민(官民)들은 경악했다. 대릉하(大凌河), 소릉하(小凌河), 행산(杏山), 탑산(塔山) 등지의 명군 지휘관들은 가옥과 곡식을 불태우고 도주했다. ●영원대첩(寧遠大捷)의 실상 누르하치는 영원성에 대한 공격에 앞서 자신이 데리고 온 한인(漢人) 포로를 풀어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를 통해 누르하치는 원숭환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우리는 20만의 대군이다. 성은 분명히 함락될 것이다. 여러 관인들이 항복한다면 높은 관작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환의 회답은 간단했다.“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공격해 왔는가? 나는 성을 사수할 것이다.” 1월23일, 누르하치는 공격을 명령했다. 후금이 자랑하는 철기(鐵騎)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방패를 손에 쥔 경보병(輕步兵)들을 비롯하여 후금군 병사들이 성을 향해 개미 떼처럼 몰려들었다.20만이라고 큰 소리치는 대병력이었다. 영원성의 원숭환 병력은 대략 1만 정도에 불과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병력 수만 보면 승패는 이미 끝난 셈이었다. 성으로부터 홍이포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사격은 정확했다. 포탄은 벽력같은 굉음을 내며 돌격해 오는 누르하치 병사들의 대열 중간으로 떨어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성벽을 기어오르던 병사들도 쏟아지는 화살 앞에 나가 떨어졌다. 후금군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1월24일, 누르하치는 전차(電車)를 투입해 다시 총공격에 나섰다. 포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를 파야 했지만 날은 춥고 땅은 꽁꽁 얼어 있었다. 다음날에도 후금군은 희생을 무릅쓰고 돌격을 계속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흥분했다. 그는 병사들의 선봉에 서서 전투를 독려했다. 홍이포의 포탄은 누르하치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않았다.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누르하치는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스물 다섯부터 전장을 주유했던 누르하치였다. 그동안 누르하치는 명군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연전연승했다. 거기에 철기의 기동력이 더해지면서 명의 오합지졸들은 후금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1619년 사르후 전이 그러했고, 이후 줄곧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홍이포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는 후금군의 신속한 기동과 병력의 집중 전략이 통하지 않았다. 더욱이 원숭환은 그동안 상대했던 명군 지휘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그 스스로 영원성을 점찍어 성벽을 수축하고 군량을 비축해온 ‘준비된 지휘관’이었다. 그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여러 장수들과 혈서를 써서 수성(守城)을 맹세했다. 원숭환의 탁월한 영도 아래 만계(滿桂), 조대수(祖大壽) 등 부하 장수들도 선방했다. 연이은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자 누르하치는 병력을 거둬 심양으로 철수 길에 올랐다. 청실록에서는 유격(遊擊) 2명, 비어(備禦) 2명이 전사하고 500명의 병사들이 죽었다고 적었다. 영원성의 승리가 남긴 영향은 컸다. 이후 후금은 함부로 산해관을 넘보지 못했다.1641년(崇禎 14) 홍승주(洪承疇)가 송산과 행산전투에서 무너질 때까지 산해관 앞의 영원을 거쳐 금주(錦州)에 이르는 요새와 성채들은 후금의 서진(西進)을 차단했다. ●전투 부상 후유증으로 누르하치 사망 1626년 8월, 누르하치는 영원성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윽고 후금의 버일러(貝勒)들은 홍타이지(皇太極)를 새로운 한(汗)으로 옹립했다. 그는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이었다.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여덟 번째 아들이 최고 권력자로 즉위했다는 사실 자체가 명이나 조선의 눈으로 보면 이채로운 것이었다. 무조건 장자가 계승하는 관행으로 보면 말이다. 홍타이지(1592~1643)는 잘 알려진 것처럼 훗날 제위에 올라 태종(太宗)이 되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서 치욕적인 항복을 이끌어냈던 인물이다. 그의 모친은 몽골족 여자였다. 누르하치가 1615년 황(黃), 홍(紅), 남(藍), 백(白) 등 사기(四旗)를 확대하여 팔기(八旗)를 창설했을 때, 스물 두 살의 홍타이지는 정백기(正白旗)를 관할하는 버일러가 되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다이샨(代善), 아민(阿敏), 망굴타이(莽古爾泰) 등 그의 형들과 더불어 ‘사대 버일러(四大貝勒)’로 불리면서 정무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수행하여 전장을 누비면서 탁월한 전공(戰功)을 쌓았다. 특히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그가 세운 전공은 혁혁하여 누르하치는 ‘내 아들 홍타이지는 사람들이 의지하기를 인체로 치면 마치 눈과 같은 존재’라고 찬양했다. 홍타이지는 무략(武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여진족의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한문에도 능통했다. 홍타이지가 개인적으로 탁월한 인물이고, 추대에 의해 한으로 즉위했지만 즉위 직후 그의 위상은 보잘것이 없었다. 일견 만장일치에 의해 옹립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즉위 직후 당장 그의 사촌형 아민이 삐딱하게 나왔다. 아민은, 홍타이지를 한으로 인정하지만 자신은 소속 기인(旗人)들을 이끌고 독립하겠다고 통보했다. 홍타이지는 긴장했다. 아민의 독립을 허락하면 나머지 각 기들도 전부 이탈하려 들 것이고, 그럴 경우 후금의 연맹 조직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즉위 직후 그는 아민을 설득하는 데 진땀을 흘려야 했다. ●권력강화를 위한 홍타이지의 노력 아민을 겨우 설득했지만 홍타이지의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누르하치 시대 만주족은 분권(分權), 합의제(合議制)에 기초한 전통적인 부족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각 버일러들은 자신의 권력이 왜소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당연히 누르하치를 견제하려 들었다. 부족제의 전통이 강한 상황에서 홍타이지는 더욱이 서열상 사대 버일러 가운데 맨 꼴찌였다. 나머지 버일러들이 누르하치의 후계자로서 막내인 홍타이지를 옹립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한의 권력을 억제하고 전통적인 부족제 본래의 통치체제로 돌아가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즉위 직후 홍타이지는 백관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을 때 세 명의 형들과 나란히 앉아 남면(南面)했고, 제례(祭禮)를 거행할 때도 그들과 동렬(同列)에 섰다. 그것은 사실상 공동 집정이었다. 홍타이지는 이름만 한일 뿐 실제 가지고 있는 권력 면에서는 세 명의 버일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나섰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에게 주목했다. 당시 후금 사회에는 많은 한인과 몽골인들이 있었다. 정복 과정에서 포로로 획득하거나 귀순해 온 사람들이었다. 누르하치는 한인들을 좋게 봐주지 않았다. 그들을 복속시키려고 위해 탄압을 일삼았다. 만주인들이 그들에게 약탈을 자행해도 그다지 문제삼지 않았다. 자연히 만주인들과 한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한인들은 침학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물론, 만주인 관인들을 암살하거나 우물에 독을 풀기도 했다.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켰다. 홍타이지는 한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책을 바꾸었다. 만주인 귀족이나 관원들이 한인들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인과 만주인들을 분리시켰다. 한인들의 거주 지역에 만주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한인 관리들을 시켜 그들을 통제하도록 했다. 능력 있는 한인들을 발탁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홍타이지의 포용정책에 힘입어 많은 한인들이 관직에 진출했다. 한인 관료들의 경륜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홍타이지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1627년 무렵, 홍타이지는 산해관을 향한 서진을 잠시 멈추고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다. 동시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그것은 조선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4) 명과 후금의 정세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34) 명과 후금의 정세 Ⅱ

    천계 연간 격렬한 당쟁이 빚어지고 결국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이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그 불똥은 곧바로 산해관 바깥으로 튀었다. 요동, 요서(遼西)의 방어를 책임진 최고위 지휘관들 또한 당쟁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 당파에 속하느냐가 경략(經略), 순무(巡撫) 등의 운명을 결정했다. 설사 뛰어난 전공이 있더라도 엄당의 눈밖에 나면,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동림당과 연결되어 있던 웅정필(熊廷弼)과 원숭환(袁崇煥)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쟁에 희생된 웅정필과 원숭환 웅정필(1569∼1625)은 1619년 명의 대군이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요동경략으로 흐트러진 요동 지역의 방어태세를 수습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친히 무순 지역까지 순시하면서 요동의 형세와 후금의 동태를 파악한 뒤, 후금군의 서진(西進)을 막기 위해 이른바 삼방포치책(三方布置策)을 제시했다. 산해관 지역의 방어를 굳건히 하고, 천진(天津)과 등래(登萊) 등지의 수군을 활용하고, 조선의 도움을 받아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한다는 복안이었다. 웅정필의 계책은 광녕순무(廣寧巡撫) 왕화정(王化貞)의 반대에 밀려 실현될 수 없었다. 왕화정은 병부상서 장학명(張鶴鳴)의 지원을 받았고 엄당 쪽에도 줄을 대고 있었다. 웅정필과 왕화정의 대립은 결국 동림당과 엄당의 대립이었던 셈이다. 두 사람의 불화 속에 1622년 광녕이 함락되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두 사람 모두 체포되었지만 1625년 웅정필만 사형이 집행되었다. 참수된 웅정필의 목은 변방으로 조리돌려졌다. 광녕이 함락된 데는 왕화정의 과오가 훨씬 컸음에도 정작 웅정필만 처형된 것은 엄당의 농간 때문이었다. 당쟁, 그리고 엄당의 전횡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였다. 웅정필이 사라진 이후 나타났던 영웅이 원숭환(1584∼1630)이다. 원숭환은 명과 후금 사이의 군사적 대결, 궁극에는 명청교체(明淸交替)라는 격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천계 연간 명이 엄당의 전횡에 휘말려 안으로 휘청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후금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냄으로써 국가안보를 책임졌던 동량(棟樑)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도 원숭환이 버티고 있던 영원성(寧遠城·오늘날 요녕성 興城市 소재)을 넘지 못했고, 끝내는 패전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원숭환이 1626년 영원성에서 승리를 거두자 명의 조야는 감격했다.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연전연패했던 명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원숭환은 일약 ‘하찮은 여진 오랑캐’ 때문에 구겨진 중화(中華)의 자존심을 살린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이 ‘중화의 영웅’ 또한 1630년 비명횡사했다. 전장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명 조정이 스스로 죽였다. 후금의 반간계(反間計)와 명 조정의 당쟁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나타난 결과였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학자 옌충녠(閻崇年) 등이 중심이 되어 원숭환을 추모하고 그의 시대를 재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자못 활발하다. 일찍이 마오쩌둥(毛澤東)도 민족의 기절(氣節)과 애국주의를 선양하려는 차원에서 원숭환 관련 사적을 정비하라고 직접 지시했을 정도였다. ●영원성에 방어의 거점을 마련하다 원숭환은 호(號)가 자여(自如), 자(字)가 원소(元素)로 광동성(廣東省) 출신이다. 그는 1597년(만력 25) 수재(秀才)가 되고,1606년(만력 34)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원숭환은 36세 때인 1619년(만력 47) 북경에서 과거에 최종 합격하여 벼슬에 진출했다. 그가 조정으로부터 처음 임명된 관직은 복건(福建) 소무현(邵武縣)의 지현(知縣)이라는 자리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방의 군수급 관직이었다. 일개 지방관에 불과했던 원숭환의 운명이 바뀐 것은 1622년이었다. 지현 재직 시의 근무 성적에 대한 고과(考課)를 위해 북경에 왔는데, 그의 능력을 알아본 어사 후순(侯恂)이 원숭환을 천계제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후순은 동림당 계열이었다. 천계제는 원숭환을 병부 직방주사(職方主事)로 발탁했다. 지방관에서 일약 중앙관으로 변신시킨 파격적인 인사였다. 1627년까지 승진을 거듭한 원숭환은 이후 요서 지방의 방어 대책을 마련하여 북경과 산해관의 안전을 지키는 최일선에서 활약하게 된다. 산해관 방어를 위해 고심하던 원숭환은 영원을 주목했다. 영원은 산해관에서 20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산해관의 현관’이었다. 요동, 요서 지역에서 육로로 산해관이나 북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전략 요충이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동쪽으로는 발해만에 접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더욱이 해안에서 15리 정도 떨어진 바다에 각화도(覺華島)라는 섬이 자리잡고 있어서 배후의 지원 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원숭환은 산해관을 지키려면 영원에 제대로 된 중진(重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명 조정의 관인들 가운데는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1618년 이래 거듭되었던 요동에서의 패전 때문에 병력이 격감하고 성지(城池) 등 방어 시설이 퇴락한 데다, 주민들이 이산했기 때문이었다. 영원을 방어해야 한다는 원숭환의 주장은 왕재진(王在晉) 등의 반대에 밀려 채택될 가능성이 별로 없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를 설득하여 원숭환의 손을 들어준 사람은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이었다. 손승종의 지원을 얻어낸 원숭환은 1623년 영원성 수축에 감독관으로 직접 참여했다. 그는 조대수(祖大壽)와 만계(滿桂) 등을 지휘하여 담장을 높이고, 포대(砲臺)를 개수하는 등 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1624년 9월, 영원성의 수축 공사는 완료되었다. 원숭환은 이후 성 외곽의 유민들을 불러모아 농경지를 개간토록 하고, 산해관과 해로를 통해 상인들도 끌어들여 성에 대한 물자 공급도 원활하도록 조처했다. 버려졌던 영원성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물자가 활발하게 유통되면서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살상력 뛰어난 홍이포(紅夷砲)를 거치하다 영원성을 정비한 이후 원숭환이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명군의 화력을 증강시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목한 것이 바로 홍이포였다. 명 조정에는 일찍부터 서양의 새로운 화포인 불랑기(佛狼機)나 홍이포 등을 활용하여 후금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관료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선구자는 유명한 서광계(徐光啓·1562∼1633)였다. 일찍이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에 눈을 떴던 그는 서기(西器), 그 가운데서도 서양식 화포의 활용을 열렬히 주장했다. 천계제는 서광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르투갈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마카오(澳門)로부터 30문의 홍이포를 구입하여 북경의 도성과 산해관 등지에 배치했다. 홍이포는 기존의 중국식 화포에 비해 사정 거리가 길었을 뿐 아니라 살상력이 월등했다. 영원성 전투 이전에 요동에서 벌어진 후금군과의 전투에서도 명군은 화포를 사용했지만 그 위력은 신통치 않았다. 처음 사격 후, 두 번째 포탄을 발사하기 전에 후금군의 날쌘 기마대는 이미 명군 진영을 덮쳤다. 그런 전철을 뒤풀이하지 않으려면 훨씬 강력한 위력을 지닌 화포가 필요했다. 원숭환은 손승종과 상의하여 산해관에 배치되어 있던 홍이포 11문을 영원성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성밖이 아닌 성루(城樓) 위로 옮겨 배치했다. 원숭환은 병사들에게 홍이포를 조작하는 기술을 숙달시키기 위해 손원화(孫元化) 등을 불러들였다. 훗날 등래순무(登萊巡撫)로 활약했던 손원화는 당시 손꼽히는 화기 전문가였다. 그는 일찍부터 포르투갈 기술자들에게 홍이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손원화는 영원성의 포병들을 훈련시켰다. 원숭환의 혜안과 손원화 등의 노력을 통해 영원성의 방어 태세는 일신되었다. 1626년 1월, 누르하치는 팔기군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 영원성을 향해 진군했다.1618년 이후 거침없이 승전을 구가해 왔던 누르하치였다. 하지만 곧 그의 머리 위로 홍이포의 불벼락이 날아든다. 누르하치의 운명이 종착역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美연구팀 “초소형 핵폭탄으로 암 치료”

    美연구팀 “초소형 핵폭탄으로 암 치료”

    핵폭탄을 몸 안에? ‘초소형 핵폭탄’을 몸 안에 넣어 암 세포를 파괴하는 새로운 치료법이 미국에서 개발됐다. 미국 라이스대학교 연구팀은 최근 DNA크기의 방사능 입자를 미세한 탄소튜브에 담아 암치료에 이용하는 치료법을 발표했다. 체내에서 방사선을 방출해 소형 암세포나 백혈병 세포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 이 방법은 지난해 말 전직 러시아 스파이 알렉산더 리트비넨코가 방사능 주입에 의한 체내 세포 파괴로 암살된 것과 같은 원리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연구팀 발표에 따르면 이번에 개발된 치료법은 방사능 알파입자를 이용하는 것으로 체외에서 베타입자를 이용해온 기존 방사선 치료법 보다 뛰어난 암세포 파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연구팀은 “하나의 암세포를 파괴할 때 수천개의 베타입자가 필요했던 것에 비해 알파입자는 단 하나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알렉산더 암살 사건 당시와 같은 위험성은 없을까? 연구팀을 이끈 론 윌슨 교수는 “포탄과 장난감 BB탄의 차이”라며 “강도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암세포에만 방사선의 영향이 미치도록 부가적인 시술도 병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핵폭탄 암치료’에 대해 전문가들은 “아직은 위험한 기술”이라고 경고했다. 또 “앞으로 몇년간 여러 실험들을 통해 안정성을 확인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림 = 라이스대학교 자료 그림 나우뉴스 박성조 기자 voicechord@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홍두식의 루어낚시 따라잡기] 충주호 배스낚시

    햇살이 뜨거워지는 여름철이면 배스의 활성도는 뚝 떨어진다. 수온이 상승함에 따라 수중의 산소량이 저하되면서 배스도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 이 시기에는 수온이 조금이라도 낮은 장소, 즉 새물 유입구나 그늘진 곳, 곶부리의 끝처럼 물흐름이 원활한 곳을 공략하는 것이 좋다. 뜨거운 한낮보다는 수온이 낮은 아침과 저녁에 입질이 빈번하기 때문에, 이 시간대를 집중 공략하는 것도 요령이다. 포인트는 수온이 낮은 곳, 그 중에서도 아침, 저녁에는 스왈로(얕은 지역)를 노리는 것이 좋다. 평평한 스왈로보다는 한번쯤 뚝 떨어지는 브레이크 라인이 있거나, 장마로 인해 육초가 물에 잠긴 곳 등이 최적의 포인트다. 밋밋한 곳보다는 장애물이 있는 지역에 베이트 피시(먹이 고기)가 머물 수 있는 환경이 생기고, 주로 깊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배스는 브레이크 라인을 따라 얕은 곳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반드시 깊은 곳과 연결되어 있는 스왈로 지역에 더 좋은 포인트가 형성되는 것이다. 한여름철 루어로는 톱워터 플러그가 월등하다. 수면에서 루어를 덮치는 광경을 눈으로 보면서 잡기 때문에, 루어 운용이 쉽다. 게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루어를 공격하는 배스의 환상적인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다. 포퍼나 프롭베이트의 액션은 연속적으로 포핑하는 것보다 ‘스톱 앤드 고’ 기법을 불규칙하게 응용하는 것이 좋다. 지금 시기에 쓸 수 있는 톱워터 종류로는 포퍼, 펜슬베이트 등이 대표적이다. 육초가 잠긴 곳이나, 장애물 지역에서는 버즈베이트가 효과적이다. 현재 충주호에서 배스낚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은 하류의 목벌리, 포탄리, 서운리 등이다. 바위가 무너져내린 곳에서는 쏘가리도 기대할 수 있다. 워낙 광대한 면적의 호수이기 때문에 수온, 스트럭처 등을 감안할 때 배스가 일정 지역에 몰려있는 경우도 생긴다. 한두시간 낚시를 하다 입질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보는 것도 좋다. 최하류쪽 유람선 선착장을 따라 댐 위쪽 물가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포인트 이동이 용이하다. 배스보다는 같은 루어낚시 대상어인 강준치가 더 많이 잡히고 있다는 것이 현지 소식통의 전언이다. 하지만 물이 맑고 깨끗한 충주호 배스 손맛은 그 어느 호수보다도 강하고 파워 넘친다. (사)한국스포츠피싱협회 홍보이사
  • 유럽 100년만의 ‘살인 폭염’

    유럽 100년만의 ‘살인 폭염’

    기록적인 ‘살인 폭염’으로 유럽 대륙에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BBC방송 등 언론들은 25일(이하 현지시간) “유럽이 불타고 있다.”고 전하는 등 ‘기상 난동’을 보도했다. 지난 2003년에도 유럽 대륙을 강타한 폭염으로 전역에서 3만 5000여명이 사망했었다. 뜨거운 아열대 공기가 밀려든 발칸 반도부터 그리스, 이탈리아 등 대륙의 절반이 몸살을 앓고 있다. 곳곳에서 사망자가 발생하고 대형 산불, 전력 중단 사고, 관광객 대피 등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각국 정부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외출을 자제하고 실내에 머무르라고 권고하고 있다. ●마케도니아·보스니아 국가비상사태 선포 현재까지 5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된 헝가리는 40℃를 웃돌면서 나라가 찜통 상태이다.15∼22일 중부 지방에서만 230명이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남부도시 키슈쿤헐러는 24일 41.9℃를 기록했다.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도 연일 최고 기온을 오르내리고 있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수은주가 43℃를 가리켰고, 불가리아는 평균 45℃로 나타났다. 지난 120년 중 관측 사상 최고기온인 45℃를 기록한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스 기상청은 이날 낮 최고 기온이 45℃이며 100년 만에 찾아온 가장 혹독한 여름이라고 발표했다. ●폭염으로 발생한 산불 군동원 진화 안간힘 루마니아에서는 현재까지 불볕더위로 30명이 숨졌다. 이달 들어 폭염으로 1만 9000명이 병원에 실려가는 등 혹독한 기상 이변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스는 75세 노인 1명이 숨지고 13명이 병원에 실려갔고 크로아티아에서도 2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대부분은 노인이나 심혈관 질환을 가진 병약자였다. 전력 공급이 중단된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에서는 폭염으로 발생한 산불 때문에 군대 동원령이 내려지는 등 진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산불은 마케도니아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비토라시 인근을 태우고 있다. 세르비아 정부는 올해 추수 예정인 콩, 채소 등 전체 농작물의 30%를 손쓸 새도 없이 잃었다고 밝혔다. 이탈리아에서는 소방 항공기가 추락,3명이 숨졌고 가르가노 반도에서는 주민과 호텔에 투숙하던 관광객 등 수백명이 대피했다. 또 산불에 포위된 피서객 250명이 구출됐다. 그리스는 최악의 산불 피해로 지금까지 총 3만 2000ha의 산림을 잃었고 소방 헬기 조종사 2명이 사망했다. 유럽 지역 중 영국은 60년 만의 홍수로 이재민이 넘쳐나는 등 물난리를 겪고 있다. ●1·2차 세계대전 불발탄 폭발 사고도 산불이 번지면서 1·2차 세계대전 당시 땅에 묻힌 불발탄이 폭발하는 사고까지 빈발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서는 1차 세계대전 때 묻은 포탄이 폭발했고, 그리스 북부 카스토리아 지방에서는 2차 세계대전과 그리스 시민전쟁 때로 추정되는 불발탄이 잇따라 폭발해 산불 진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해군, 한달여 은폐 의혹

    한국형 구축함인 4000t급 문무대왕함(KDX-II)의 포신이 폭발하는 사고가 지난 5월말 발생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해군 관계자는 17일 “문무대왕함이 지난달 말 진해 앞바다에서 사격훈련 도중 5인치 포에서 발사한 포탄이 포신 안에서 폭발했다.”면서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밝혔다. 해군 관계자는 “5인치 포신이 깨져 새것으로 교체해 작전에 투입했다.”며 “현재 포탄 또는 포신 결함 여부에 대해 정밀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해군은 2003년 4월11일 진수한 최신예 구축함인 문무대왕함에서 발생한 이번 사고를 1개월이 넘도록 은폐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문무대왕함은 길이 150m, 폭 17.4m, 높이 7.3m에 최대 29노트(시속 54㎞)의 속도를 낼 수 있으며 5인치 포, 대공(對空) 및 대함(對艦) 유도탄 수직 발사대, 대함유도탄 방어용 무기, 잠수함 공격용 어뢰, 해상작전 헬리콥터 등을 탑재하고 있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레바논 혼미… 팔 난민 수천명 탈출행렬

    |파리 이종수특파원|지난 20일 레바논 북부 나흐르 알바리드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벌어진 레바논 군과 팔레스타인 민병조직 파타 알이슬람 사이의 교전이 사흘째 이어지면서 내전으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양측은 난민촌 주변에서 22일(현지시간) 새벽과 오후 두 차례 충돌했다. 파타 알이슬람측은 이날 오후 2시 “휴전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레바논 군이 거부했다. 난민 수천명은 전투가 잠시 주춤한 사이에 탈출에 나서는 등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영국 BBC 인터넷판은 “이번 교전이 17년 전 내전이 종식된 이후 가장 큰 유혈 사태”라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80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이번 사태는 지난 19일 레바논 군이 북부 트리폴리 인근에서 발생한 은행강도 사건 용의자를 검거하기 위해 나흐르 알바리드에 근거지를 둔 팔레스타인 민병대 파타 알이슬람측을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150∼200명 정도의 민병대원을 거느린 파타 알이슬람이 반격하면서 무력충돌로 비화됐다. 양측의 교전으로 생필품 공급이 중단된 구호품을 전달하려던 유엔 차량 행렬 근처에 포탄이 떨어져 난민 2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알자지라 방송은 “주민들이 유엔 구호품을 받으려고 할 때 포탄이 떨어져 여러 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또 난민촌 인근 트리폴리 시내의 한 건물에서는 파타 알이슬람 요원 1명이 레바논 군과 대치하던 중 몸에 두르고 있던 폭탄 띠를 터뜨려 사망했다. 한편 다른 난민촌 주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교전이 확산되며 ‘제2의 레바논 내전’ 우려가 제기되자 미국은 레바논 정부군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사이의 충돌 사태에 간접 개입할 의사를 밝혔다. 레바논측이 사태해결을 위해 2억 8000만달러 추가지원을 요청하자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레바논에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기구가 관리하는 12개의 난민촌이 있다. 이 난민촌에는 레바논 전체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35만여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거주하고 있다.vielee@seoul.co.kr
  • 국부유출 갈수록 지능·첨단화

    국부유출 갈수록 지능·첨단화

    국내 기업이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돈을 들여 개발한 첨단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는 ‘기술유출 범죄’가 해마다 늘고 있다. ●감청대상 안돼 예방·적발 어려워 20일 검찰에 따르면 수사기관이 적발한 기술유출 범죄가 1999년 39건에 머물던 것이 2004년 165건,2005년 207건, 지난해 237건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유출 위기에서 건진 기술도 휴대전화·와이브로 등 IT 기술에서부터 자동차 조립기술, 헬기·포탄·미사일 등 군사 장비 관련 등 다양하다. 하지만 수법이 지능화·첨단화하면서 이를 막아내기가 역부족이다. 특히 이번 기술유출 수법처럼 국내에 서버를 두지 않은 해외 사이트 이메일이나 인터넷폰 등이 이용되면서 수사가 더욱 어려워진다. 검찰은 “현행법에서 규정한 감청 대상 범죄에 기술유출 범죄가 빠져 있어 범죄 예방과 적발이 어렵다.”면서 “국회에 제출돼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빨리 통과돼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검찰과 국정원은 “2003년부터 올해 4월까지 막아낸 기술 유출사건의 피해 예상액만도 118조 2000억원에 달한다.”면서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도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와이브로 세계 시장 24조규모 예상 이번에 유출위기에서 막아낸 와이브로 기술도 우리나라가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15조원가량의 해외 수익이 기대되는 분야다. 정부가 “앞으로 우리나라가 10년 동안 먹고살 기술”이라고 말할 정도다. 2002년부터 기술 개발에 착수한 S사의 경우 5000억원을 투입했고, 포스데이타도 900억원을 투자해 지난해 6월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다. 한편 2005년 12월에는 국내 와이브로 표준 규격이 국제 표준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원천기술을 보유한 퀄컴사가 지난 한해 동안 27조원(한국은 1조 5000억원 지불) 상당의 로열티 수입을 얻은 것을 감안할 때, 이보다 진일보한 와이브로 기술은 통신시장의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불릴 만하다. 정보통신부는 2010년까지 와이브로 산업의 국내 서비스 시장 규모를 8조 1000억원, 장비 시장 규모를 5조 8000억원 정도로 예측한다. 세계 와이브로 시장의 시스템 및 단말기 시장 규모는 24조원 정도로 예상된다. ●인사 불만 도화선… 돈 유혹에 넘어가 국정원 산업기밀유출센터가 2003년부터 최근까지 적발한 101건 중 돈이 회사를 배신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으로 나타났다. 개인 영리 목적이 42건으로 가장 많았고, 금전유혹 31건, 처우·인사 불만이 20건, 비리 연루가 4건 등으로 나타났다. 이번 포스데이타 출신 연구원들의 기술 유출 시도도 1차적인 이유가 인사불만으로 시작해 엄청난 부를 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포스데이타의 미국내 연구소 실장(상무급)으로 근무하던 김모씨가 알력다툼이 있던 한 간부에 밀려 원하던 연구소장직에 임명되지 않자 퇴사를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미군, 이라크 전투장면 유튜브 게재 논란

    이라크 철군 압박 등 사면초가에 놓인 미군이 이라크에서의 전투 영상을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게재해 논란이 일고 있다. 더욱이 영상 대부분은 미군이 차량폭탄 희생자를 도와주거나 석방된 인질을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장면 등 미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한 ‘선전의 장’으로 유튜브를 활용한다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이라크 주둔 다국적군은 지난 3월부터 유튜브에 ‘MNFIRAQ’라는 자체 채널을 만들어 실전에 투입된 미군의 전투 장면을 담은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고 AFP통신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게리 케크 미 국방부 대변인은 채널 운영에 대한 명확한 의도는 밝히지 않은 채 “이라크전에 관한 정보를 널리 알리려는 특별한 노력”이라고 언급했다.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은 유튜브에 이라크 전투영상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좀더 자세하게 보는 것도 때로 중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바쿠바에서 벌어진 아침 전투’,‘하이파 거리에서의 전투’,‘박격포 대항 작전’ 등의 제목으로 게재된 영상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순간들을 담고 있다.‘박격포 대항 작전’은 박격포탄 발사에 실패한 뒤 탈출하려고 승용차 속으로 몰려 들어가는 무장괴한 6명의 모습을 공중에서 포착했다. 이들이 시골길로 접어들어 속력을 낮추자 미사일이 등장해 폭발하는 장면이 이어진다.이어 ‘연합 공군이 차량과 박격포, 저항세력을 궤멸시키고 있다.’는 자막이 흐른다. 미군은 채널 안내문을 통해 “이라크 자유화 작전을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이 작전에 대한 전망을 전 세계 네티즌 시청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유튜브 채널을 설치한다.”면서 “시간 및 안전상의 이유, 자극적이거나 공격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영상을 편집하겠다.”고 설명했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사설] 軍 총기·병력 관리 다시 살펴라

    지난주 강원도 횡성 육군부대에서 발생한 총기 사고는 새삼 군의 총기·병력 관리에 의문을 던지기에 충분했다. 현장에 있던 병사 두 명이 모두 숨져 사고 경위가 어디까지 밝혀질지 모르지만 경계를 서다 사고가 일어난 점에서 먼저 군의 병력 관리에 소홀한 데는 없었는지 묻고 싶다. 군은 2005년 김동민 일병 GP 총기 난사사건 이후 군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병사를 가려내는 데 주력했다. 육군이 부적응자를 대상으로 운영 중인 ‘비전 캠프’에는 지난해 8609명이 입소했다. 놀라운 것은 자살 우려자로 분류된 병사가 전체 입소자의 10.8%나 된다는 것이다. 이 캠프는 3박4일로 운영된다. 짧은 기간에 군 부적응과 자살 우려가 해소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다. 국가인권위의 군복무자 인권실태 조사를 보면 병사 10명에 1명꼴로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병영문화가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학교나 사회와는 전혀 딴판인 군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정신적·육체적 고민을 부대가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음을 이 조사는 여실히 드러내 보여 준다. 총기 관리에도 문제는 있다. 총기탈취 사건이 끊이지 않자 군은 지난해 4월 전·후방 가릴 것 없이 경계근무자에게 실탄 휴대를 의무화했다. 그러자 지난해 말까지 19건의 총기사고로 16명이 사망했다. 사고가 속출함에 따라 실탄 휴대를 지휘관 재량으로 완화했으나 이번에 사고가 난 부대는 탄약고 경계병에게 실탄을 지급했다. 공포탄으로 대처하자니 경계가 허술해지고 실탄을 주자니 사고나 빈번해지니 군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버지니아 공대 참사에서 보듯이 사회든 군이든 부적응자에게 총기를 쥐여 주는 일은 큰 위험을 부를 수 있다. 아까운 젊은이들의 희생이 없도록 군은 총기와 병력 관리를 보다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다.
  • 후방 영내초소 실탄지급 논란

    20일 강원 횡성군 공병부대에서 발생한 총격 사망사건으로 군부대의 총기·실탄관리 실태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지난해 군이 후방부대까지 경계근무자의 실탄휴대를 의무화하면서부터 총기사고가 급격히 늘었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발생한 총기사고 21건 가운데 19건이 실탄휴대가 의무화된 4월 이후 발생했다. 반면 1∼3월에 발생한 사고는 단 2건에 불과했다. ●잇단 총기탈취에 실탄지급 확대 합참은 당초 최전방 GP(전초)나 GOP(전방 관측소), 해안 부대 등을 제외한 후방부대 경계근무자에 대해서는 실탄지급 여부를 장관급 지휘관(준장 이상)에게 위임했다. 이후 총기탈취 사건 등이 잇따르자 지난해 4월 경계지침을 바꿔 모든 부대에 경계근무자의 실탄휴대를 의무화했다. 합참은 그러나 이에 따른 부작용으로 총기사고가 잇따르자 지난달 탄약고와 무기고 등 군 중요시설을 제외한 일반적 경계임무를 수행할 경우엔 실탄휴대 규정을 완화해 지휘관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이번에 총격사건이 일어난 부대도 탄약고 경계근무자에게 공포탄 5발이 든 탄창과 함께 실탄 15발이 든 탄창을 함께 지급하고 있었다. 육군은 “해당 부대는 경계근무를 설 때 공포탄이 든 탄창을 총에 끼우고 조정간을 ‘안전’상태에 놓고 실탄 탄창은 탄입대에 휴대하도록 돼 있었다.”면서 “실탄 휴대 지침은 해당 부대의 장성급 이상 지휘관의 재량으로 판단하게 돼 있는 만큼 문제될 것은 없다.”고 밝혔다. ●“실탄 아닌 고성능 진압장비 지급 필요” 부대 외곽초소가 아닌 영내 초소 근무자에게까지 실탄을 지급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자신을 예비역 대위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전방 GP 등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실탄지급은 신중히 재고해야 한다.”면서 “전기충격기 등 성능이 뛰어난 진압장비를 지급하는 것도 대안”이라고 말했다. 홍성태 상지대 사회학과 교수도 “CCTV도입 등을 통해 위험지역에서 총을 다루는 장병들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면서 “현실적으로 이들은 굉장히 충동적이기 때문에 장전된 총기를 사용하는 것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학적 차원에서는 우리 사회의 폭력문화 범람을 이유로 볼 수 있다.”면서 “온라인 게임, 폭력적 영화 등에서 총이 살상무기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등 총기가 얼마나 위험한 지에 대한 인지도가 심하게 떨어져 있다.”고 우려했다. 횡성 조한종·서울 이세영 임일영기자 sylee@seoul.co.kr ●1990년 이후 軍 주요 총기사고 ▲1994.10.31 경기도 양주군 육군 모 부대 사격장에서 문모 일병이 소총 난사, 중대장 김모 대위 등 2명 사망,7명 중경상. ▲1996.9.22 강원 양구군 육군 모 부대 김모 이병, 부대내 취사장과 내무반에 수류탄 2발 투척하고 소총 난사해 9명 중경상. ▲1996.10.1 강원 화천군 육군 모 부대 김모 상병이 행정반 총기난사,3명 사망,1명 중상. ▲2005.5.19 경기 연천군 육군 모 부대 전방초소 내무반에서 김모 일병이 소총 난사하고 수류탄 투척해 8명 사망,2명 중상. ▲2006.8.10 경기 가평군 육군 모 부대서 이모 이병이 동료 병사 2명에게 총격,1명 사망.
  • 병사2명 군부대서 총격사망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사건이 전 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는 가운데 강원도 횡성의 군부대에서 선·후임병간 갈등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총격사건으로 병사 2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던지고 있다. 20일 오전 11시 50분쯤 강원 횡성군 횡성읍 학곡리에 있는 모 공병부대 탄약고 경계초소에서 총격사건이 발생, 경계근무 중이던 병사 2명이 숨졌다. 육군은 “점심식사를 하러 부대식당으로 이동중이던 장비운전병 권모 상병이 총성을 듣고 초소에 도착해보니 이모(22)·한모(21) 상병이 각각 목과 배에 관통상을 입고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상황실로 보고했다.”고 밝혔다. 사고 당시 이들은 부대 안에 있는 탄약고 앞에서 오전 10시부터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으며, 실탄 2발은 모두 이 상병의 K-1 소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확인됐다. 군 관계자는 “당시 근무자들은 공포탄 5발이 든 탄창을 삽입하고 실탄 15발이 든 탄창을 휴대하고 있었다.”면서 “누군가 소총에 삽입된 공포탄을 제거한 뒤 실탄이 든 탄창을 삽입해 총을 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들은 사망자들의 입대시기가 3개월 차이인 점으로 미뤄 선·후임병간 갈등이 원인이 돼 우발적으로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제3자에 의한 범행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횡성 조한종·서울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Local] 광주 어등산 개발 탄력

    광주시 광산구 어등산 관광단지 조성사업이 ‘불발탄’ 제거 문제가 해결되면서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광주시는 16일 국방부에서 최근 불발 포탄 제거를 위해 95명으로 ‘어등산산업단’을 구성해 피탄지 11만평에 대한 포탄제거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사업은 당초 지난해 10월 공사에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어등산 일대에 산재한 다량의 불발포탄과 탄피 제거 문제로 공사 추진이 지연됐다. 어등산은 1951년부터 1994년까지 40여년간 육군포병학교 포 사격장 탄착지로 불발탄 2300여발, 파편 수천만 개 등이 매몰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방부는 불발탄 제거를 위해 35억원을 들여 특수장비를 확보한 뒤 올해부터 3년 동안 불발탄 제거 작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국제플러스] 소말리아 시가전… 주민 150명 사망

    동부아프리카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소말리아 과도정부-에티오피아 연합군과 반군 사이에 나흘째 시가전이 벌어져 주민 150여명이 사망했다. 지난 1991년 정부 붕괴 이후 최대 규모의 교전이다. 현지 인터넷 언론 소말리넷 등은 1일 탱크와 야포 공격까지 동원한 교전으로 주민 150여명이 사망했으며 400여명이 부상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거리엔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널려 있어 사상자 규모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1일엔 대통령궁에 11발의 포탄이 날아들었으며, 궁에 있던 에티오피아군은 도시 여러 곳을 향해 야포 공격을 가했다. 앞서 압둘라히 유수프 대통령은 에티오피아 헬리콥터를 이용해 모가디슈에서 북서쪽으로 240㎞ 떨어진 바이도아로 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소말리넷은 덧붙였다. 이번 교전은 에티오피아 과도정부 연합군이 모가디슈에 잔존하고 있는 이슬람급진세력 민병대를 소탕하기 위해 공격한 데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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