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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해부대 소말리아로 출항

    사상 첫 전투함 파병으로 기록되는 ‘청해(靑海)’부대가 13일 작전 지역인 소말리아 해역으로 출항했다. 첫 파병함정인 한국형 구축함(KDX-Ⅱ) 문무대왕함은 이날 오전 경남 진해에서 출항 환송식을 가졌다. 환송식은 파병신고, 지휘봉과 태극기 수여, 격려사, 함정 환송 등으로 진행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행사에 직접 참석해 장도에 오르는 청해부대 장병을 격려했다. 청해부대는 4500t급 문무대왕함과 대잠헬기, 고속단정(RIB)과 특수전 요원(UDT/SEAL) 등 장병 300명으로 구성됐다. 소말리아 인근 해역인 아덴만을 통과하는 한국 선박의 해적 피해를 차단하는 활동을 주 임무로 한다. 문무대왕함(함장 장성우)은 분당 4500발을 쏴 6㎞ 앞으로 다가온 미사일을 명중시킬 수 있는 근접방어무기인 30㎜ 골키퍼 2문과 32㎞까지 포탄을 날릴 수 있는 5인치 함포 1문, 함대함유도탄인 하푼 8기, 함대공유도탄인 SM-2 32기를 각각 장착하고 있다. 장병용 개인화기인 K-1, K-2 소총을 확보하고 있고, 대잠헬기는 K-6 중기관총 1정과 공대함 유도탄(Sea Skua) 4기, 대잠어뢰(MK44) 1기를 장착하고 있다. 청해부대는 바레인에 있는 연합해군사령부(CFM)와 공조해 해적 차단 및 테러 방지 임무에 나선다. 다음달 중순쯤 아덴만에 도착해 선박 호송 임무를 시작할 예정이다. 문무대왕함은 4개월 후 같은 KDX-Ⅱ급인 충무공 이순신함, 대조영함, 왕건함, 강감찬함, 최영함 중 1척과 임무 교대를 한다. 청해부대의 파병활동 시한은 올 연말까지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의심받는 외환보유고 2000억弗

    의심받는 외환보유고 2000억弗

    ■고개드는 거품론 “공포탄이 적지 않다.” “무슨 소리냐. 전부 실탄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외환보유액 거품 논란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규모로 따지면 세계 6위이지만 실제 사용 가능한 금액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게 거품론의 핵심이다. 외환당국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당국이 실탄을 아끼기 위해 현금화를 기피하는 것일 뿐, 가용성(可用性) 자체는 더이상 의심할 거리가 못 된다는 견해가 더 지배적이다. 무의미한 가용성 논란에 휘둘리기보다는 섣부른 시장 개입을 통한 실탄 소진을 더 우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허경욱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5일 SBS전망대에 출연해 “지난달 말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2015억달러”라면서 “외환시장에서 행동을 할 경우에는 2000억달러 수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최근 이틀 동안 당국이 15억달러를 개입했다는 것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최근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600원선을 위협하면서 당국이 상당량의 달러를 풀었고, 이 때문에 이달에는 외환보유액이 2000억달러에 못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외환보유액은 빚 갚을 능력과 직결된다. 우리나라가 1년 안에 갚아야 할 해외빚(유동외채)은 지난해 말 현재 1940억달러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이 돈이 전액 상환 요구된다고 해도 현재로서는 수중에 가진 돈(외환보유액)이 더 많으니 문제될 게 없다. 외채 문제를 집중 부각시키는 외신들과 일부 국내 전문가들은 이 돈의 실체에 의심의 시선을 보낸다. 김광수경제연구소는 지난 2일 한 인터넷 토론방에 ‘가용 외환보유고 이미 바닥났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는 “외환보유액 2000억달러는 장부상 숫자일 뿐 실제 현금화할 수 있는 돈은 얼마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김익주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장은 “최근 미국 국채 금리 하락 등으로 외환보유액에 편입된 채권가격이 대부분 올랐다.”면서 “(장부가가 시가를 밑돈다는) 허수 주장은 난센스”라고 일축했다. 이광주 한은 국제담당 부총재보도 “외환보유액의 정의 자체가 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가용자산”이라면서 “그렇지 않은 자산을 외환보유액에 넣어 발표했다면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에서 가만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처분이 쉽지 않은 회사채를 제외하면 외화보유액이 1700억달러에 그친다는 주장도 있다. 외환보유액 가운데 회사채 비중은 2007년 말 기준 15%대다. 임지원 JP모건 이코노미스트는 “일각에서는 외환당국이 지난해 가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현금화가 쉬운 국채 등은 많이 팔고 회사채는 상대적으로 많이 들고 있을 것으로 짐작해 가용성을 의심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회사채 비중이 한 자릿수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돼 가용성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한은이 조만간 연차보고서를 발표하면 가용성 논란은 자연스럽게 불식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한국계 신석기토기 4000여점 일본 오키나와서 무더기 발굴

    한국계 신석기토기 4000여점 일본 오키나와서 무더기 발굴

    일본 오키나와에서 한국 신석기 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국계 토기 4000여점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한국 신석기 문화가 영향을 미친 남방한계선이 한반도에서 1500㎞나 떨어진 오키나와까지 뻗쳤음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임효재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3일 “일본에 반환된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일부를 최근 발굴한 결과 이레이바루(伊禮原) 신석기 유적지에서 한국계 소바타 토기군 4000여점과 함께 타제석기, 골제품, 빗 모양의 목제품 등이 한꺼번에 출토됐다.”고 밝혔다. 최근 오키나와 발굴 현장을 다녀온 임 교수는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이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남방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 주는 자료로 신석기 문화 연구의 신기원”이라고 말했다. 국내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는 포탄 모양에 빗 같은 시문구(施文具·작은 사진)로 토기 표면을 그어서 만든 물고기뼈 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반면 일본 신석기 토기는 새끼를 꼬아 토기 표면에 눌러 장식하는 승문(繩文) 토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오키나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빗 모양의 목제품, 토기를 빚을 때 들어간 안산암(오키나와에 없는 돌)을 빻아 섞은 것 등은 이번에 무더기로 발굴된 토기들이 한국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임을 정확히 증명하고 있다. 오키나와 정부는 오는 7월 이레이바루 유적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해 보존·연구함은 물론 자료전시관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이레이바루 유적에서는 이밖에 청동기시대 구멍 뚫린 공열 토기도 발견됐다. 이 공열 토기는 한반도 청동기시대(무문토기시대)에 대동강 유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된 것과 똑같다. 이후에도 고려시대의 종, 조선시대의 표류기록 등이 나와 선사시대에는 물론 역사시대에도 한반도와 오키나와가 빈번하게 교류했음이 확인됐다. 임 교수는 “한반도와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는 교류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짐작과는 달리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부는 북서계절풍을 타면 5~6일만에 한반도 남단에서 오키나와에 닿을 수 있다.”면서 “일본 규슈를 거치지 않고 한반도에서 직접 오키나와와 빈번히 교류하며 문화를 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덕유산 향적봉~구천동계곡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 덕유산 향적봉~구천동계곡

    덕유산(德裕山)은 덕이 넉넉하다는 이름처럼 품이 넓은 산이다. 전북 ‘무진장 고을’의 무주와 장수, 경남의 첩첩 산마을인 거창과 함양 등에 걸쳐 있다. 남녘의 지리산에 가려 평상시엔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지만 겨울철에는 달라진다. 지리적으로 금강의 본류와 가까운 데다 서해의 습한 대기가 이 산을 넘으면서 많은 눈을 퍼붓는다. 게다가 날이 추워지면 습한 대기가 산을 넘다가 그대로 얼어버려 나뭇가지마다 환상적인 상고대(얼음꽃)가 피어난다. 그래서 덕유산의 겨울은 눈꽃산행 인파로 늘 북적거린다. 덕유산은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1614m의 고도와 지리산보다 험한 산세 때문에 일반인들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무주리조트의 스키 곤돌라가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 턱밑까지 파고들면서 산꾼은 물론 아이들도 쉽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곤돌라를 이용해 향적봉만 찍고 내려오는 것은 눈앞에 보물을 두고 돌아서는 것과 마찬가지다. 향적봉에서 부드럽게 이어진 중봉까지 갔다가 오수자굴을 거쳐 구천동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아 보자. 이 길은 걷기에도 좋고 덕유산 최고의 보물인 덕유평전과 구천동계곡을 둘러볼 수 있는 환상적인 산길이다. ●남한서 4번째 높은 해발1614m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5분여 오르면 갑자기 설경이 펼쳐진다. 뽀드득 소리 내며 걷는 눈길은 언제나 싱그럽다. 15분가량 오르면 설천봉(1530m)이다. 여기서 향적봉까지는 쉬엄쉬엄 가도 2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등산로 양옆으로 빽빽이 늘어선 나무들이 가지를 드리우고 연출하는 눈꽃터널 사이로 저 멀리 향적봉이 눈에 들어온다. 눈꽃터널을 벗어나면서 강풍이 몰아치자 정신이 번쩍 든다. 향적봉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온 이나 구천동계곡에서 걸어온 산꾼들이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이다. 덕유산은 남한 산줄기들의 중심에 놓인 만큼 탁월한 조망을 보여 준다. 남쪽의 지리산, 동쪽의 가야산, 서쪽의 대둔산 등 고산준령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특히 거창의 첩첩 산줄기 뒤로 소머리처럼 솟은 가야산에서 떠오르는 일출은 산악 사진가들 사이에서 소문난 명장면이다. 향적봉에서 지척인 대피소 건물로 내려가니 박봉진 산장지기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는 덕유산이 좋아 1997년부터 구천동에 들어와 살다가 2000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덕유산에 조난자가 생기면 구조대보다 항상 그가 먼저 달려간다고 한다. 산에서 살면서 산을 닮아가는 탓일까. 덕유산의 너른 품처럼 마음씨가 넉넉하고 따뜻하다. 대피소에서 언 몸을 녹이고 중봉(1594m)으로 향한다. 이 길에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의 가지마다 새 생명처럼 싱그러운 눈꽃이 가득하다. 중봉은 덕유연봉이 기막히게 보이는 전망대다. 발아래 펼쳐진 평평한 땅이 덕유평전인데, 봄여름가을 야생화가 그득하고 겨울이면 눈꽃으로 은세계를 이루는 곳이다. 덕유평전에서 미끄러져 삼각뿔처럼 치솟은 무룡산(1492m)과 삿갓봉(1264m)을 넘어 남덕유산(1507m·봉황산)으로 흘러가는 산세는 백두대간 능선 중에서 가장 역동적이다. 거기에다 무룡산 왼쪽 멀리 허공에 일필휘지로 피어난 지리산 능선에 입이 떡 벌어진다. ●중봉서 내려다보는 덕유평전 전망 하산은 중봉에서 오수자굴 방향을 잡는다. 내려오다 뒤돌아보면 주목으로 가득 찬 향적봉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오수자굴 안은 각양각색의 얼음 기둥 전시장이다. 굴 안 낙숫물이 얼어붙으면서 얼음 종유석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수자굴에서 백련사까지는 참으로 호젓한 길이 이어진다. 길섶에 푸른 산죽들이 눈을 맞은 모습은 태초의 시간처럼 고요하다. 백련사 입구에 도착하면서 구천동계곡과 합류한다. 이 길은 널찍한 비포장도로가 나 있어 걷기에 수월하다. 이어 금포탄, 사자담, 인월담 등의 명소를 지나게 된다. 겨울이라 계곡의 빼어난 맛은 없지만 눈과 어우러진 풍경은 심신을 포근하게 정화한다. 설천봉~향적봉~중봉~오수자굴~구천동계곡의 거리는 약 10㎞, 4시간가량 걸린다. 향적봉대피소는 난방 장치가 잘 갖추어진 현대식 건물이다. 이곳에서 1박 하면서 장엄한 해돋이를 구경하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산악전문작가 #교통과 맛집 서울에서 무주리조트 가는 버스는 대원고속(02-575-7720)이 사당, 양재, 잠실 등에서 오전 시간에 운행한다. 무주리조트(063-322-9000)의 곤돌라는 오전 9시~오후 4시까지 다닌다. 왕복 1만 1000원. 편도 7000원. 향적봉 대피소 063-322-1614. 금강이 굽이쳐 도는 무주 지역에는 민물고기 요리가 유명하다. 동자개 등 민물 잡어로 죽을 쑨 어죽, 쏘가리매운탕 등을 맛볼 수 있다. 읍내 금강식당(063-322-0979)이 유명하다.
  • 이-하마스 다시 공습 긴장 고조

    이스라엘 공군이 28일(현지시간) 가자지구를 3차례 공습한 데 이어 하마스도 이스라엘에 3발의 포탄을 발사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이날 AP통신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이집트와 가자지구 국경지대의 밀수땅굴을 대상으로 3차례 공습을 퍼부었다. 주민들은 황급히 집 밖으로 피신하는 등 공포에 떨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스라엘의 일간 하레츠는 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 “전날 매설 폭탄으로 인해 이스라엘 병사 1명이 숨지고 3명이 부상한 것에 대한 대응”이라고 밝혔다.이에 하마스도 이스라엘을 향해 3발의 박격포를 발사해 휴전 중인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관계는 다시 얼어붙고 있다. AFP통신은 목격자의 말을 인용, “4대의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박격포가 발사됐다.”고 밝혔다.한편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조지 미첼 중동특사는 이날 이스라엘에 도착, 사흘간 머물며 올메르트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마무드 아바스 수반 등을 차례로 만날 예정이다. 미첼 특사는 “이집트의 중재안을 통해 휴전과 협상이 계속돼야 한다.”고 밝혔다.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이軍, 가자지구 유엔 건물 또 포격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20일째를 맞은 15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 탱크와 무장병력이 가자지구 북부의 가자시티에 대한 총공세에 나서면서 유엔(UN) 기구 단지와 병원, 언론사 입주 건물 등을 무차별적으로 포격해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구호품 창고에 화염… 반 총장 항의가자시티의 중심부로부터 1.5㎞ 근방까지 진입한 이스라엘군은 이날 도심 내 주요 건물들에 포탄을 마구 쏘아댔고, 이 과정에서 700여 명의 난민이 피난해 있던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기구(UNRWA) 본부 건물이 피폭돼 직원 3명 이상이 부상하고 수 백톤(t) 분량의 구호품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포격 직후 유엔은 “가자 지구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단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AP통신에 따르면 휴전 중재차 중동 지역을 방문 중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포격 소식을 접한 뒤 “(UNRWA의 본부를 포격한 이스라엘에) 강한 항의와 분노를 표한다.” 면서 “이번 포격에 대한 진상조사를 (이스라엘 측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어 반 총장은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내게 ‘(이번 포격은) 중대한 실수를 했다.” 고 말했다고 전했다. ●유럽의회 휴전촉구 결의안 채택 한편 유럽의회는 1월 본회의 최종일인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본회의장에서 표결이 아닌 ‘거수’ 만장일치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양측에 즉각적이고 항구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하지만 전날까지만 해도 가자지구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에 가자 지구 전투를 10일간 중단하자는 내용의 임시 휴전안을 제의한 가운데 14일 하마스 측이 종전의 강경 태도를 바꿔 이를 원칙적으로 수용하겠다는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 AP통신에 따르면 임시 휴전안은 하마스가 휴전 조건으로 내세운 이스라엘군 철수와 국경봉쇄 해제를 철회하는 대신 이스라엘군을 잔류시킨 채 ‘10일 휴전’ 기간 중 이집트-가자 지구 국경지대를 통한 무기밀수 방지와 라파 국경통과소를 개방하는 논의를 벌인다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하마스가 임시 휴전안을 원칙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사실상 가자사태 해결의 공은 이스라엘로 넘어갔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 안팎에서 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양측 휴전 합의는 임박해 보인다고 전망했다. ●가자사태 해결 이스라엘 손에 이스라엘 일간지인 하레츠는 이날 수뇌부 3인 중 올메르트 총리를 제외한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과 치피 리브니 외무장관은 이미 하마스의 세가 충분히 약해졌고,국제사회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휴전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즉각 휴전’의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이스라엘이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하는 오는 20일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작전을 종료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또 이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가 가자 지구 공격에 항의해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단절키로 하는 등 갈수록 거세지는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도 이슬라엘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5일 국방부의 아모스 길라드 외교군사정책국장을 카이로로 보내 협상을 벌였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이 “휴전협상 실패땐 가자 재점령”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공습 17일째인 12일(현지시간) 하마스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이스라엘측은 전날 수천명의 예비군을 가자지구에 투입했으나 병력 증파를 통한 지상전 확대를 뜻하는 ‘3단계 작전’에는 아직 돌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AFP통신에 따르면 마크 레게브 이스라엘 정부 대변인은 이날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무장조직 파괴와 로켓 공격 종식, 재무장 방지라는 3가지 목표에 “매우 근접했다.”면서도 ‘3단계 작전’의 돌입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로이터통신은 서방 외교관들의 말을 인용해, 이스라엘측이 ‘3단계 작전’ 중 하나로 휴전안 협상이 실패할 경우 이집트와 가자지구간 14km에 달하는 국경지대인 피라델피 회랑과, 라파 일부를 재점령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군은 이곳 땅굴지역에서 하마스세력이 재무장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팔레스타인 최소 905명 사망 이에 따라 12일 새벽 이스라엘 해군은 인구밀집지역인 가자지구 도심부에 위치한 AP통신 지사와 사무실 건물 등에 25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했다. 탱크를 앞세운 이스라엘군은 무장 헬리콥터의 지원을 받으며 가자시티 동·남부 지역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마스 지도부의 자택과 무기고 등 12개 지역에 대한 공습도 계속됐다.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가자지구 내 전체 300개 땅굴 중 200여곳을 파괴시켰다고 AFP통신에 밝혔다. 이날까지 최소 905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하고 3950여명이 부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자지구 보건당국은 이중 절반이 여성과 어린이 등 민간인이라고 밝혔다. 예비군 투입으로 출구 없는 연안의 밀집지역에 놓인 150만 팔레스타인인들의 민간인 사상 위험은 더 커질 전망이다. ●중동특사 블레어 “며칠 내 휴전 가능” 한편으론 종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동특사로 활동 중인 토니 블레어 전 영국총리는 12일 호스니 무라바크 이집트 대통령과의 회담 직후 “휴전협정의 구체적인 조항들이 진행되고 있다. 며칠 내로 휴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 수뇌부에서는 외교적 위험수위가 높아지자 종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일간 하레츠에 따르면 이스라엘 수뇌부는 종전 시점을 두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올메르트 총리는 지상공격을 확대해 하마스를 압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리브니 장관과 바라크 장관은 각각 외교적 폐해와 이스라엘군 및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인명 피해를 이유로 들어 가능한 한 빨리 종전할 것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군의 지상작전 강화로 수세에 몰린 하마스도 내부에서 휴전 요구가 불거지고 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 국장은 전날 안보내각회의에서 “하마스 지도자들이 양보할 준비가 됐다.”고 보고했다. 이집트 국영통신 메나는 이집트가 제시한 휴전안에 하마스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이 언론은 이집트 정부관리의 말을 인용해 오마르 슐레이만 이집트 정보국장과 하마스 대표단이 유혈사태를 조속히 끝내는 데 동의했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측이 이집트가 가자지구로의 무기 유입을 저지하면 군대를 철수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유학생 타메르 “가자 참상에 관심을”

    유학생 타메르 “가자 참상에 관심을”

     “사나흘에 한 번씩은 가족과 통화했는데,요즈음은 매일 수십 차례 시도하는데도 잘 안 돼요.”  팔레스타인에서 한국으로 유학온 타메르 아부메드(26)의 말입니다.그의 가족은 가자지구 안의 칸 유니스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이스라엘군과 이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무장정치조직 하마스가 첫 교전을 벌인 가자시티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습니다.이스라엘군의 침공 이후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고향 땅에 가족들이 있는 이 청년을 지난 9일 인천 인하대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그는 2년 전부터 이 학교에서 IT(정보통신)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전액 장학금에 매월 6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대학으로부터 지원받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아랍계 특유의 길고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가족들과 언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느냐는 질문에 “그저께 겨우 한 번 통화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수십번 전화 걸어 한번 통화될까 말까  현재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기와 수도는 물론 통신시설까지 거의 마비됐습니다.그나마 아직까지는 휴대전화 기지국이 몇 남아 있어 다행이지만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안위와 친구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한꺼번에 몰리는 관계로 통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타메르도 10여번 시도하면 한 두번 겨우 통화에 성공하곤 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마지막 통화 시점까지 아무 일 없었다고 합니다.교사인 아버지(55)와 역시 교사직에서 은퇴한 어머니(50), 3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남동생들은 각각 24, 22, 20세이고 여동생은 각각 23,19세라고 했습니다.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은 가자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각각 영어와 IT(정보통신)를 전공한답니다.평소 같으면 기말고사 기간인데 이스라엘의 만행 때문에 학교가 문을 열지 않아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있고 아버지 역시 출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통화 때는 바로 집 근처에서 포탄이 터졌다는 가족들의 전언에 요즈음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틈날 때마다 인터넷을 접속해 혹시 가족이나 친지,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검색하곤 한답니다.  간간이 이뤄진 전화 통화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타메르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는 듯했습니다.이미 그의 집이 있는 칸 유니스에도 지난 6일 이스라엘군이 진입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이역만리 먼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기도를 하는 것과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2년 전 한국에 온 타메르는 떠나기 1년 전부터 사귀었던 여자친구 목소리를 최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고 했습니다.그러나 그 말 끝에 “우리 이웃들이 많이들 죽었다.지금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겠다. 나는 가자의 미래에 대해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침울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속의 우리  기자는 이날 타메르를 만나기 전 서울 이태원에 들렀습니다.매주 금요일 무슬림들의 합동예배(줌마)가 있는 이슬람 서울성원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하지만 그곳에서도 직접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그렇기에 기자는 인천에 있는 타메르를 수소문해 찾아가 만난 것입니다.  기자는 인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거듭하며 질문거리를 정리했습니다.묻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하지만 정작 그에게 던진 질문은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영어가 ‘짧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요.하지만 가자지구의 역사를,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는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를 수 없었던 탓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아직 이렇다하게 정확하게 정리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국교도 없는 상태에서 들어온 그들의 숫자가 얼마인지조차 그들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누구는 100명이라 했고 누구는 그보다 훨씬 적다고 했습니다.타메르의 경우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와는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하지만 유학생 신분인 다른 3명과는 어쩌다 들려오는 소식을 듣는 정도라고 했습니다.  타메르는 부패 때문에 총선에서 심판받아 쫓겨난 파타 대신 하마스가 통치하게 됐다며 이를 이유로 이스라엘이 침공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매우 불공정한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2시간여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자유’와 ‘평화’였습니다.그가 바라는 건 그리 큰 게 아니었습니다.가족의 안녕을,친구들의 안전과 건강을 바랄 뿐이라고 했습니다.  ●타메르 “자유와 평화를 위한 행진에 함께 해달라”  나와는 상관없다고,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함께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은 ‘한국이 보탬이 되지 못해 유감이다.미안하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한답니다.  한국 정부가 가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고 있는지 12일 전화를 통해 물어보았습니다.타메르는 “일단 한국은 가자와 너무 멀고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지 않나.그래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이런 현상은 한국뿐 아니고 전세계의 문제다.전세계가 가자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가자에서 공격은 계속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그에 따르면 가자지구에는 일단 외교관계가 수립돼 있지 않아 대사관도,기업 등의 현지 법인도 없습니다.주민들은 국내 기업의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하지만 삼성이나 LG 등 한국 기업 브랜드를 모르는 주민은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근래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가자지구 돕기 모금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 물었습니다.그는 “전세계적인 연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세계 정부는 무관심하지만 시민들은 매우 액티브하다.주로 아랍사람, 유럽사람들이 활동을 많이 하는데 한국 웹사이트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인터넷을 사용하는 게 매우 효과가 크다고 느낀다.인터넷을 통해 연대와 저항을 표출할 수 있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타메르는 기자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한국 정부나 국민들이 가자지구에 인도주의적인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무엇보다 식품과 약품,교육에 대한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한 가지는 알아뒀으면 좋겠습니다.지금 가자지구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생명들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을요.거리에서 뛰놀던 아이들이,남편의 밥을 준비하던 아낙들이 굉음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요.  이 짧은 글에 담긴 그의 메시지가 팔레스타인에,이스라엘에 그리고 당신에게 닿기를 기도해 봅니다.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희망에 함께 하시고자 하는 분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홈페이지(http://pal.or.kr)를 꼭 한 번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글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eji@seoul.co.kr 영상 나우뉴스팀 김상인VJ bowwow@seoul.co.kr [서울신문 다른기사 보러가기] ☞임산부들 국민은행에 분노하는 이유 ☞[20&30] 불안한 미래에 점집 찾는 청춘들 ☞미네르바 말 한마디에 딜러들 달러 사쟀다? ☞발가벗은 동상에 옷 입혀준 사람을 찾습니다
  • 유학생 타메르 “가자 참상에 관심을”

    “사나흘에 한 번씩은 가족과 통화했는데,요즈음은 매일 수십 차례 시도하는데도 잘 안 돼요.” 팔레스타인에서 한국으로 유학온 타메르 아부메드(26)의 말입니다.그의 가족은 가자지구 안의 칸 유니스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이스라엘군과 이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무장정치조직 하마스가 첫 교전을 벌인 가자시티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습니다.이스라엘군의 침공 이후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고향 땅에 가족들이 있는 이 청년을 지난 9일 인천 인하대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그는 2년 전부터 이 학교에서 IT(정보통신)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전액 장학금에 매월 6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대학으로부터 지원받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아랍계 특유의 길고 짙은 눈썹에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가족들과 언제 마지막으로 통화했느냐는 질문에 “그저께 겨우 한 번 통화했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수십번 전화 걸어 한번 통화될까 말까 현재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인해 전기와 수도는 물론 통신시설까지 거의 마비됐습니다.그나마 아직까지는 휴대전화 기지국이 몇 남아 있어 다행이지만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의 안위와 친구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한꺼번에 몰리는 관계로 통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타메르도 10여번 시도하면 한 두번 겨우 통화에 성공하곤 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행히도 가족들은 마지막 통화 시점까지 아무 일 없었다고 합니다.교사인 아버지(55)와 역시 교사직에서 은퇴한 어머니(50), 3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남동생들은 각각 24, 22, 20세이고 여동생은 각각 23,19세라고 했습니다.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은 가자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각각 영어와 IT(정보통신)를 전공한답니다.평소 같으면 기말고사 기간인데 이스라엘의 만행 때문에 학교가 문을 열지 않아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있고 아버지 역시 출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통화 때는 바로 집 근처에서 포탄이 터졌다는 가족들의 전언에 요즈음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틈날 때마다 인터넷을 접속해 혹시 가족이나 친지,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검색하곤 한답니다. 간간이 이뤄진 전화 통화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 타메르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는 듯했습니다.이미 그의 집이 있는 칸 유니스에도 지난 6일 이스라엘군이 진입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이역만리 먼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기도를 하는 것과 인터넷을 들여다보는 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2년 전 한국에 온 타메르는 떠나기 1년 전부터 사귀었던 여자친구 목소리를 최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기뻤다고 했습니다.그러나 그 말 끝에 “우리 이웃들이 많이들 죽었다.지금 상황이 더 나빠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겠다. 나는 가자의 미래에 대해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침울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팔레스타인 속의 우리 기자는 이날 타메르를 만나기 전 서울 이태원에 들렀습니다.매주 금요일 무슬림들의 합동예배(줌마)가 있는 이슬람 서울성원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하지만 그곳에서도 직접 그들의 말을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그렇기에 기자는 인천에 있는 타메르를 수소문해 찾아가 만난 것입니다. 기자는 인천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거듭하며 질문거리를 정리했습니다.묻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하지만 정작 그에게 던진 질문은 몇 개 되지 않았습니다.영어가 ‘짧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지요.하지만 가자지구의 역사를,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는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를 수 없었던 탓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아직 이렇다하게 정확하게 정리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국교도 없는 상태에서 들어온 그들의 숫자가 얼마인지조차 그들 스스로도 정리가 안 된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누구는 100명이라 했고 누구는 그보다 훨씬 적다고 했습니다.타메르의 경우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와는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하지만 유학생 신분인 다른 3명과는 어쩌다 들려오는 소식을 듣는 정도라고 했습니다. 타메르는 부패 때문에 총선에서 심판받아 쫓겨난 파타 대신 하마스가 통치하게 됐다며 이를 이유로 이스라엘이 침공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매우 불공정한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2시간여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자유’와 ‘평화’였습니다.그가 바라는 건 그리 큰 게 아니었습니다.가족의 안녕을,친구들의 안전과 건강을 바랄 뿐이라고 했습니다.   ●타메르 “자유와 평화를 위한 행진에 함께 해달라” 나와는 상관없다고,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함께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은 ‘한국이 보탬이 되지 못해 유감이다.미안하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한답니다. 한국 정부가 가자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알고 있는지 12일 전화를 통해 물어보았습니다.타메르는 “일단 한국은 가자와 너무 멀고 정치적으로도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지 않나.그래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이런 현상은 한국뿐 아니고 전세계의 문제다.전세계가 가자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가자에서 공격은 계속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그에 따르면 가자지구에는 일단 외교관계가 수립돼 있지 않아 대사관도,기업 등의 현지 법인도 없습니다.주민들은 국내 기업의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하지만 삼성이나 LG 등 한국 기업 브랜드를 모르는 주민은 거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근래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가자지구 돕기 모금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도 물었습니다.그는 “전세계적인 연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세계 정부는 무관심하지만 시민들은 매우 액티브하다.주로 아랍사람, 유럽사람들이 활동을 많이 하는데 한국 웹사이트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인터넷을 사용하는 게 매우 효과가 크다고 느낀다.인터넷을 통해 연대와 저항을 표출할 수 있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날 타메르는 기자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한국 정부나 국민들이 가자지구에 인도주의적인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무엇보다 식품과 약품,교육에 대한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한 가지는 알아뒀으면 좋겠습니다.지금 가자지구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생명들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을요.거리에서 뛰놀던 아이들이,남편의 밥을 준비하던 아낙들이 굉음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요. 이 짧은 글에 담긴 그의 메시지가 팔레스타인에,이스라엘에 그리고 당신에게 닿기를 기도해 봅니다.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희망에 함께 하시고자 하는 분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홈페이지(http://pal.or.kr)를 꼭 한 번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글 /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김상인VJ bowwow@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이·하마스 결의안 거부 “공격 지속”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8일(현지시간) 휴전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가자 지구의 운명이 새 국면을 맞았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하마스 모두 유엔 결의안을 거부하며 공습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외려 지상작전 확대를 군에 지시했다고 일간 하레츠가 전했다. 이에 따라 양측의 지상전은 기존의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 일대에서 남부 라파와 칸 유니스 등에까지 파고들 전망이다. 공습 14일째인 9일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800여명. 이 중 257명이 어린이들이다. 부상자는 3200여명을 넘어섰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외국인 사망자도 처음 발생했다. 우크라이나 국적의 여성이 이스라엘군의 탱크 공격으로 2살 난 아들과 함께 희생됐다고 현지언론이 전했다. ●美 상원,이스라엘 지지 결의안 통과 이날 안보리는 이스라엘군의 완전한 퇴각과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 1860호를 채택했다. 15개 이사국 중 14개국이 찬성했다. ‘이스라엘 편들기’를 계속해온 미국이 기권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유엔 관계자는 이번 결의안은 “유엔 헌장 7조의 군사력을 동원한 강제력은 없지만 ‘법적 구속력’을 지닌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효성은 없었다. 결의안 채택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죽음의 공습을 퍼부었다. 9일 오전 안보내각회의를 가진 이스라엘정부는 공격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하마스도 휴전안을 거부했다. 하마스 대변인은 이날 알 자지라 방송에서 “가자 지구 내 팔레스타인인들의 이해와 요구가 고려되지 않은 결의안에는 관심이 없다.”고 강조했다.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는 이날 성명에서 “이스라엘은 시민을 보호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결코 외부의 영향에 좌우된 적이 없다.”며 “이스라엘군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과 주어진 임무를 계속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지난 40여년간 유엔 결의안을 무시해온 전력(?)이 있다. 미국의 기권도 구속력을 떨어뜨린다. 같은 날 미 상원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며 여전히 ‘하마스 책임론’에 집착했다. ●‘무용지물’ 된 국제기구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에 국제기구들은 힘을 못 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나비 필레이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9일 열린 유엔인권위 긴급회의에서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에서 자행되는 전쟁범죄 가능성을 감시하는 독립 조사단 파견을 요구했다. 8일 이스라엘군의 유엔 트럭 공격이 대표적인 예다. 유엔 트럭은 구호품을 받으러 가자 지구 북부에서 이스라엘의 에레즈 국경통과소로 향하다 포탄 두발을 맞았다. 운전사가 숨지고 두명이 다쳤다. 트럭은 유엔 마크와 깃발을 달고 있었다. 피격은 심지어 휴전시간대에 자행됐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사건 직후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기구(UNRWA)측은 “유엔 건물과 직원 등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적대행위 때문에 가자 지구에서 벌여온 모든 구호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도 같은 날 이스라엘군의 비인도적 처사에 ‘충격’을 표시했다. ICRC측은 알 자지라 방송에서 “이스라엘이 공격으로 다친 팔레스타인 어린이 등 민간인들의 구조를 방해했다.”며 “이는 명백한 국제 인도주의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레바논 주둔 동명부대 경계태세 ‘레드’로 상향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 유엔평화유지군(UNIFIL) 소속으로 주둔 중인 동명부대가 중동 사태 악화로 영외(營外)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위협에 대비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합참 관계자는 9일 “이스라엘에서 레바논으로 발사한 박격포탄이 지난 8일 동명부대 주둔지에서 10여㎞ 떨어진 지역에 떨어졌다.”며“위협을 의미하는 ‘레드’ 상태로 경계태세를 상향 조정했다.”고 말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이-하마스 가자시티 시가전 치열

    이-하마스 가자시티 시가전 치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지상전에 돌입한 지 사흘째인 5일(현지시간) 가자지구내 최대 도시인 가자시티에서 이스라엘군과 하마스가 첫 교전을 벌인 데 이어 시가전으로 확전되고 있다고 AFP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AFP는 또 주로 도심 및 북부지역에서 공격을 가하던 이스라엘 탱크부대와 포병대가 전투헬기의 공중 지원을 받으며 6일 새벽 가자지구 남쪽의 가장 큰 도시인 칸유니스 지역 및 중부의 데이르 알 바라흐 마을, 부레이즈 난민촌 등으로 이동, 진입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교전으로 지난달 27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이후 팔레스타인인 사망자수는 550명, 부상자수는 25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AP와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본격적인 시가전을 앞두고 이스라엘 탱크부대와 포병대는 하마스 주요 거점에 잇달아 포탄을 발사했다. 또 지상전이 시작된 이후에는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가자시티 외곽 지역에서 하마스가 진지를 구축한 고지대를 중심으로 양측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스라엘군은 특히 팔레스타인인 450여명이 이스라엘 공습을 피해 피란을 와있던 유엔 학교 2곳을 공격, 40명을 숨지게 해 무차별 공습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자국군의 오폭으로 인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방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스라엘군이 하마스에 대한 지상 공격을 개시한 이후 발생한 전사자 5명 중 가자시티 동쪽 셰자이야 마을에서 희생된 3명의 경우 자국군 탱크의 오폭으로 사망한 데다, 가자지구 북부 지역에서 전투중 사망한 공수여단 소속 예호나탄 네타넬(27) 대위도 후방에서 지원 사격한 포탄에 잘못 맞아 숨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6일 휴전 조건으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재무장을 방지하고 팔레스타인 로켓포 공격을 금지하기 위한 국제기구 창설 등을 모색 중이라고 밝혀 이번 전쟁의 수습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AP와 AFP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이날 마크 레게프 이스라엘 총리실 대변인은 “지난달 28일부터 미국과 유럽연합(EU), 일부 아랍 국가 등 동맹국들과 대화채널을 가동, 가자지구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합의안 도출에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이 검토 중인 휴전조건은 하마스 군사력에 대한 실질적인 해체작업, 이스라엘 남부지역에 대한 로켓공격 중단, 터널을 이용한 하마스의 재무장을 막기 위한 국제기구 창설 등이다. 이스라엘 국방부의 한 고위 관계자도 이날 현지 일간 예루살렘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것이 계획된 대로 진행된다면 이번 캐스트 레드 작전은 향후 72시간내에 끝날 수 있다.” 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지난달 31일 프랑스 정부의 48시간 휴전안을 거부했던 이스라엘 정부가 7일 만에 입장을 바꿔 조건부 휴전을 검토하게 된 이유로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희생자수에 따른 부담감과 국제사회의 비난 압박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11일째 계속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으로 30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 BBC방송 인터넷판은 5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잇단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면서 이스라엘의 국제법 위반 논란도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제법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구별해 민간인 희생자를 최소화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국제사회의 이스라엘 비난 목소리 또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날 팔레스타인 임시 수도인 요르단강 서안의 라말라와 예루살렘을 방문, 양측에 폭력 중단을 촉구했다. 아랍권 국가들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 결의안을 채택하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등 국제 사회의 압박 수위를 높여가고 있으며 7만명 이상의 이란 학생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살폭탄 테러에 자원했다고 AP통신이 이란 국영 IRNA통신을 인용해 보도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이스라엘-하마스 지상전] 4개여단 진입…로켓발사대 밀집 북부 사실상 고립

    [이스라엘-하마스 지상전] 4개여단 진입…로켓발사대 밀집 북부 사실상 고립

    3일(현지시간) 시작된 이스라엘의 대 하마스 지상전은 어둠과 함께 시작됐다.가자 지구의 불이 거의 꺼진 시각인 저녁 8시쯤,야간 투시경을 쓴 보병들과 탱크가 가자 지구와 인접한 국경을 넘어섰다. 칠흑 같은 가자 지구의 밤을 뒤흔든 지상전은 이스라엘군의 포탄과 화염이 하늘을 ‘불꽃놀이’ 하는 것처럼 밝히기 전까지 눈보다는 귀로 확인됐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이에 대해 이스마일 라드완 하마스 대변인은 알-아크사 TV에 나와 “이스라엘군은 쥐새끼처럼 들어왔다.”고 비꼬았다. 이날 가자지구로 들어간 이스라엘군은 최소 4개여단.이스라엘군 관계자는 현지 일간 예루살렘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작전 목표는 로켓 발사대가 있는 가자 지구 북부를 공략하는 것”이라면서 “가자 시내나 난민 캠프쪽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실제로 교전은 자발리야,베이트 하눈,베이트 라히야 등 가자 지구 북부 지역에서 주로 이뤄졌다. 이스라엘군은 지상군 투입에 앞서 북부 지역에 포격을 가해 이 지역 광산과 하마스 방어시설을 파괴했고 가자 지구 북부와 남부로 연결된 도로와 다리도 끊어 놓았다.해안지역에는 해군도 배치됐다.베이트 라히야 마을 인근에 자리잡은 가스 저장소도 공습했다.이로 인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고 그 화염은 가자 지구 전역을 밝힐 수 있을 정도였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이처럼 이스라엘군이 북부 지역을 치밀하게 공격함에 따라 이 지역으로의 무기 및 군수품 공급과 무장 대원 투입이 어려운 고립상태에 처하게 됐다.여기에 탱크와 불도저가 가자 지구 중심인 가자시티 남쪽에 있는 넷자림까지 진입,사실상 가자시티가 사방으로 포위됐다.폭 5~8㎞의 길쭉한 모양의 가자 지구가 (남북으로) 쪼개진 형국이라고 예루살렘포스트가 보도했다. 지상전에 앞서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했다.200명이 기도를 하고 있던 모스크를 공격,아이들 4명을 포함해 최소 16명이 사명했고 수십명이 다쳤다.또 아부 자카리아 알 자말을 비롯한 하마스 고위 지도자 3명도 공습으로 사망했다.또 요르단강 서안에서 반이스라엘 집회에 참여한 시위자 한사람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사살됐다.지상전 개시 이후 사망한 팔레스타인 민간인은 최소 31명이라고 AP가 보도했다.여기에는 일가족 5명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군은 마을로 진입하면서 전단지를 뿌리거나 대형 스피커를 동원해 주민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또 방송국에 침입해 “하마스 지도부는 당신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지금 병원에 숨어 있다.”는 등의 자신들에게 유리한 메시지를 내보내기도 했다. 현재 외국인 기자들의 가자 지구 출입이 통제되고 있고 가자 지구를 나올 수 있는 사람도 220명의 외국인과 응급 환자 외에는 없다.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구급차는 전투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지상군과의 교전에 응수하면서 동시에 로켓포로 반격했다.이날 하마스는 평소보다 많은,약 40차례 로켓포를 쏘아 올렸고 이스라엘인 6명이 다쳤다.하마스는 “가자는 당신(이스라엘군)들이 오는 길에 꽃을 뿌리지 않을 것이다.그 길은 화염과 지옥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경기북부 발전 발목잡는 軍시설 해법은

    수도권 규제완화 문제를 놓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경기 북부지역에 의정부와 구리시 면적을 합친 넓이와 비슷한 규모의 군 사격장과 훈련장이 들어서 있어 지역 발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내 군 사격장과 훈련장은 모두 117곳 135㎦으로, 이중 93곳 116.7㎦이 파주·포천·가평 등 경기 북부지역 10개 지자체에 몰려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경기 북부지역의 사격장과 훈련장은 의정부시(81.6㎢)와 구리시(33.3㎢)를 합한 면적(114.9㎢)에 버금가는 것이다. 시·군별 면적을 보면 파주가 44.5㎢(12곳)로 가장 많고, 포천 37.2㎢(9곳), 연천 26.4㎢(21곳), 양평 16㎢(2곳), 가평 4㎢(16곳), 여주 1.1㎢(2곳), 양주 0.9㎢(18곳), 남양주 0.8㎢(7곳) 등이다. 도는 “도내 31개 시·군 가운데 수원, 부천, 안양, 군포, 김포, 광주, 하남, 과천, 구리 등 9곳을 제외한 모든 지자체에 크고 작은 군 사격장과 훈련장이 들어서 있어 지역발전에 지장을 줄 뿐 아니라 각종 민원을 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양평군에서는 군 사격장에서 쏜 포탄이 민가에 날아드는 등 주민 피해가 잇따르면서 시민단체까지 가세, 사격장 이전을 촉구하고 있다. 경기개발연구원 오관치 연구위원은 최근 열린 학술 토론회에서 “군사시설 보호구역 지정으로 해당 지역 주민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다.”며 “도내 주한미군 반환공여구역 무상증여, 수도권 규제해제, 통제보호구역 지가차액 보전 등 보상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문수 지사도 최근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동두천의 경우 도시 면적의 42%가 미군시설이고, 연천은 98%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분단국가로서 국가가 떠맡아야 할 희생을 대신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지사는 “그럼에도 정부는 용산 미군기지에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1조 5000억원을 주면서도 낙후지역에는 한 푼도 지원하지 않고 있다. 경찰서도 없는 지역을 대도시와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분명 잘못됐다.”며 규제완화를 촉구했다.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2) 조선,항복하기로 결정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92) 조선,항복하기로 결정하다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정은 이 때 청군이 또 다른 조건으로 제시한 척화신(斥和臣)을 잡아 보내는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적진에 당도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몇 명이나 묶어 보낼 것인가? 인조나 비변사 신료들에게나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不忍之事)’이었다. 하지만 앞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청군은 연일 인조의 출성을 독촉해댔고, 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민심도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었다. 결국 최명길과 김류 등이 이 끔찍한 ‘불인지사’의 총대를 멨다. ●척화신들에게 자수를 권하다 1월22일, 김류와 이성구(李聖求), 최명길 등이 입시했다. 척화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김류는 ‘척화신들의 논의가 과거에는 정론(正論)이었지만, 결국 나라를 그르친 죄를 범했으니 그들 스스로 적진으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최명길은, 자신이 홍익한(洪翼漢)과 같은 집안이지만 종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를 묶어보낼 수도 있다고 거들었다. 이성구 또한 ‘홍익한의 죄가 무겁다며 청군으로 하여금 처치하도록 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인조는 너무 참혹한 일이라며 입장 결정을 유보했다. 삼사(三司)를 비롯하여 신료들로부터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인조와 대신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윽고 조정에서는 척화신들에게 자수하라고 촉구했다.‘불인지사’를 밀어붙이는 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비롯된 고육책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척화신 박송(縛送) 문제로 조정이 뒤숭숭할 때, 산성을 지키는 군관들과 병사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1월23일, 수원과 죽산(竹山) 출신의 초관(哨官) 수백 명이 행궁 앞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척화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체찰부(體察府)로 몰려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겁에 질린 체찰사 김류는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며 속히 해산하라고 종용했다.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이 날의 시위는 하급 지휘관들의 본심이 아니라 고위 무장들의 사주에 따른 것이었다고 적었다. 어쨌든 산성의 분위기는 내부 분열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척화신들을 내 놓으라.’는 시위가 위력을 발휘했던 것일까? 이 날 조정은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척화신의 ‘처리’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국서에서 척화신으로 확실하게 언급된 인물은 홍익한이었다. 그는 당시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산성에는 없었다. 국서에서는 ‘홍익한이 당초 가장 열렬히 척화를 주장했기에 평양을 맡김으로써 그로 하여금 대국 군대의 예봉을 스스로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청군이 철군하는 날 평양 부근에서 그를 체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실상 홍익한을 잡아 가라는 내용이었다. ●청군의 양동작전과 최후 통첩 1월23일, 청군은 양동작전을 펼쳤다. 조선이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남한산성에 대해 최후의 공세를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날 자정 무렵, 청군은 먼저 서문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그들은 운제(雲梯-성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을 넘으려고 시도했다. 당시 서문 방면의 조선군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청군을 발견한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의 군관이 병사들을 깨웠다. 병사들은 올라오는 청군을 돌로 내려치고, 화포를 이용하여 공격했다. 새벽 두 시 무렵에는 망월대(望月臺) 쪽으로 몰려오는 청군을 신경진(申景 ) 휘하의 병력들이 물리쳤다. 서문과 망월성을 공격하다가 적지 않은 수의 청군이 죽었다. 1월24일에도 청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구굉(具宏)이 지키고 있는 남성(南城)을 공격해 오자 아군이 조총을 쏘아 물리쳤다. 남성에서 물러난 청군은 망월봉(望月峯) 아래 홍이포를 설치해 놓고 산성을 향해 포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포격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포탄은 행궁(行宮)까지 날아와 천장을 뚫고 바닥으로 깊이 처박힐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보였다. 행궁뿐 아니라 성첩의 많은 부분이 포탄에 맞아 허물어졌다. 산성 안 사람들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했다. 1월25일, 청군은 사람을 서문으로 보내 사신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덕형(李德泂)과 최명길 등이 청 진영으로 가자 용골대와 마부대는 협박을 늘어 놓았다.‘황제가 내일 귀국하실 것이니 국왕이 출성하지 않는다면 사신은 다시 오지 말라.’며 그 동안 받았던 국서를 모두 돌려 주었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최명길 등은 변변하게 이야기를 꺼내 보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 최명길 등이 돌아온 뒤, 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무렵 청군은 한편으로는 포격을 통해 산성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 몇 명을 다그쳐 산성 쪽으로 급히 이동시키고 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인조를 끌어 내려는 작전이었다. 이 같은 와중에 산성에서는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빚어지고 있었다.1월26일, 이번에는 훈련도감과 어영청(御營廳)의 장졸들이 행궁으로 몰려와 무력시위를 벌였다. 역시 척화신들을 붙잡아 청군 진영으로 보내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인조실록’에 따르면 그들을 배후에서 사주한 주체도 신경진, 구굉, 홍진도(洪振道) 등 고위 무장들이었다. 시위를 벌이는 병사들은 해산하라는 명령에도 따르지 않았다. 승지 이행원(李行遠)이 나서 나무라자 군사들은 눈을 부릅뜨며 ‘승지를 모시고 가면 적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라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김류는 ‘그들은 부모와 처자가 살육당했기 때문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원수처럼 여긴다.’고 나름대로 진단했다. 군사들이 난을 일으킬 기미까지 보이자 인조는 다급해졌다. 인조는 세자를 청군 진영에 보내겠다며 사신을 보내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세자의 출성을 통해 수습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강화도 함락’을 통고받다 이 날 저녁 최명길, 김신국, 홍서봉 등이 청군 진영으로 갔다. 왕세자가 출성한다는 사실을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청군 지휘관들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전히 선을 그었다. 이윽고 용골대 등은 최명길 일행에게 충격적인 내용을 통고했다. 그들은 강화도에서 급히 데려온 종실 진원군(珍原君)과 내관 나업(羅業)을 보여 주면서 강화도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들이 들고 온 봉림대군의 친필 편지와 윤방(尹昉)의 장계도 전해 주었다. ‘강화도 함락’ 소문이 전해지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다. 인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최명길은 봉림대군의 편지와 윤방의 장계가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편지가 봉림대군이 쓴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분위기는 한 순간에 바뀌었다. 홍서봉, 김류, 이홍주, 최명길 등은 모두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신하된 자로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머뭇거리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저들에게 화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인조는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왕실의 가족들까지 모두 인질로 잡혀 버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함의 표현이었다. 이 무렵 구원군이 끊어진 것은 물론,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당시 청군의 일부 부대는 이미 경기도를 넘어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을 비롯하여 목천(木川), 청주 등지까지 출몰하여 겁략을 자행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은 청주에 있다가 청군의 습격을 받아 옥천으로 피신해야 했다. 인조와 조정의 입장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강화도 함락’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인조의 면전에서 물러난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남한산성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佛 ‘앙골라게이트’ 연루 미테랑 아들 등 법정에

    |파리 이종수특파원|프랑스 고위층 42명이 앙골라와 불법 무기거래에 개입한 혐의로 6일(이하 현지시간) 무더기로 법정에 선다. ‘앙골라 게이트’로 불리는 이 의혹은 2000년 말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아프리카 담당 대통령 자문관을 지낸 장 크리스토프 미테랑(61)이 체포되면서 불거졌다. 장 크리스토프는 앙골라 내전이 한창이던 1993∼1998년 7억 9000만달러어치의 무기를 앙골라에 판매하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프랑스 무기중개회사 브랑크 앵테르나시오날로부터 260만달러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무기거래상 피에르 팔콘(54)과 이스라엘로 도피한 억만장자 아르카디 가이다막(56) 등의 경제인들도 지위남용 및 불법 무기판매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장 크리스토프는 불법무기 거래 공모와 횡령 혐의로 5년형, 팔콘과 가이다막은 10년형을 각각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프랑스 법조계 안팎의 관측이다. 미테랑 재임 당시 두차례 내무장관을 지낸 샤를 파스콰와 그의 측근 장 샤를 마르시아니는 앙골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밖에 스릴러 소설작가인 폴 루프 슐리처, 미테랑 대통령의 고문을 지낸 자크 아탈리 전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총재 등도 실형을 선고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앙골라 게이트’는 탱크 420대, 포탄 15만발, 지뢰 17만개, 헬기 12대, 군함 6척 등이 앙골라에 판매되는 과정에서 프랑스 정관계 고위층이 거액의 뇌물을 챙긴 사건이다. vielee@seoul.co.kr
  • 中어선, 北경비정 추정 선박에 피격

    서해안의 북한 수역에서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이 북한 경비정으로 추정되는 함정에 피격된 뒤 부상자가 우리 영해로 넘어온 사건이 발생했다. 29일 해양경찰에 따르면 지난 27일 오전 9시30분쯤 백령도 북서방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중국어선 ‘요동운 146호’ 선장이 부상당했다며 구호요청을 해와 해군 측에 통보했다. 해군 함정은 오전 11시쯤 중국 선박으로 가 부상당한 선장 쿵모(44) 등 2명을 인계받아 백령도로 이송했다. 사고 해역은 북방한계선(NLL) 북쪽 수역인 것으로 알려졌다.중국어선에는 7명이 타고 있었으며 선장 등을 인계한 뒤 어디론가 떠났다. 중국 선원들은 해경에게 “백령도 북서방 해역에서 대기 중 소형 목선이 다가와 포탄 2발을 발사했다.”고 진술했다.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89) 강화도가 함락되다(Ⅰ)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가는 문제를 놓고 마지막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던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왕실 가족들과 조정 신료들의 처자들, 그리고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가 피란해 있던 곳이 강화도였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조선 군신들은 ‘변변한 수군도 없고 바다에도 익숙지 못한 청군이 강화도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는 무너졌고 피란해 있던 피붙이들은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강화도를 장악하라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도발하면서 가장 크게 우려했던 상황이 바로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조의 입도(入島)를 막지 못할 경우 전쟁은 분명 길어지게 될 것이고, 속전속결로 ‘조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구상도 헝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홍타이지는 청군 본진의 출발에 앞서 선봉 부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했던 것이다. 1637년 1월 중순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한편,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수 있는 묘수를 찾기 위해 부심했다. 묘수란 다름 아닌 강화도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강화도만 공취(攻取)하면 인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청태종실록’에는 홍타이지가 일찍부터 강화도 공략을 염두에 두고 병선(兵船)을 제작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부하들에게 1월21일 전까지 병선 제작을 완료하라고 독촉했다. 홍타이지의 지시를 받은 청군은 심양에서 철장(鐵匠)을 비롯한 장인들을 데려오는 한편 병선 제작에 돌입했다. 한강과 임진강 일대에 흩어져 있던 선박들을 끌어 모아 수리하고, 주둔 지역 주변의 민가를 헐어 뗏목과 배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 병선을 운반하기 위해 동거(童車)라 불리는 작은 수레도 제작했다. 수군이 미약하고 해전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청군이 이렇게 병선을 제작하여 강화도를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그들은 강화도 주변에 대한 세심한 정찰을 통해 섬을 공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섬 주변에 배치된 조선군의 방어 태세가 그다지 견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청군 가운데는 수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장수들이 있었다.1633년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명에서 귀순해 왔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에게 수군을 이끌게 하고 홍이포(紅夷砲)의 화력을 적절히 활용하면 강화도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무사안일에 젖은 강화도의 조선 지휘부 홍타이지는 1637년 1월18일까지는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유보했다. 적어도 이날까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조가 나오지 않자, 홍타이지는 구왕(九王) 도르곤(多爾袞)에게 강화도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1월19일, 청군은 자신들이 제작한 작은 배 80척을 수레에 싣고 강화도로 출발했다. 당시 강화도 건너편에는 도르곤, 호게(豪格), 공유덕 등 청군 지휘부가 1만 6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21일까지 강화도를 공략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면 강화도에 있던 조선군의 방어 태세는 어떠했을까? 당시 강화도 방어와 왕실 가족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인물은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는 강화도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일가와 친지들만을 노골적으로 챙겨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다. 강화도로 들어온 뒤에도 김경징의 행태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강화도를 그야말로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거의 팽개치다시피 했다. 청군이 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청군 내부에 해전을 경험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김경징은 광성진(廣城津) 부근에 약간의 수군을 배치했을 뿐,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 강화도의 대안인 김포 주변을 감시하고, 그곳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대비하는 것이 절실했지만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병자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보면, 김경징은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일이었다.‘금성탕지’에서 오래 버틸 요량으로 주변의 육지 고을에서 곡식을 운반해 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저 강화도에서 오래 버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주변의 신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그는 참견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일의 효종(孝宗))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인조의 어명에 의해 검찰사로 임명된 데다 그의 부친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체찰사(體察使) 김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상 강화도로 피신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존재였다. 검찰사 김경징을 보좌해야 할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李敏求) 또한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근왕병을 이끌고 왔다가 죽자, 남한산성의 조정은 이민구를 대신 충청감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강화도에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민구는 갖은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충청도로 부임하는 것을 회피했다.‘병자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처삼촌(妻三寸)인 전 영의정 윤방(尹昉)의 ‘백’까지 이용하여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정작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한 조처에는 손을 놓았던 것이다. ●무너지는 강화도 김경징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가 여전히 안일에 젖어 있던 1월21일, 심상치 않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통진가수(通津假守) 김적(金迪)으로부터 청군이 강화도를 향해 배를 운반하면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던 것이다. 김경징은, 강물이 언 상태에서 배를 운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김적의 목을 베려고 덤볐다. 그가 허위 보고를 통해 군정(軍情)을 어지럽혔다는 명목이었다. 김경징은 청군이 동거를 이용하여 배를 육로로 운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곶(甲串)을 지키는 장수로부터도 똑같은 보고가 들어오자 김경징은 다급해졌다.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인 장신(張紳)의 수군을 광성진에 배치하여 갑곶 연안까지를 방어토록 하고,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수군을 연미정(燕尾亭) 아래 갑곶에 배치하여 가리산(加里山)부터 월곶(月串)에 이르는 해안을 방어토록 했다. 또 한흥일(韓興一),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종묘령(宗廟令) 민광훈(閔光勳),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등을 차출하여 강화성과 주변 포구 등지의 수비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강화도 수비군 1000여명을 이끌고 진해루(鎭海樓)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육지를 방어하는 지휘관들은 김경징 자신을 포함하여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문관과 종실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리 방어 훈련을 실시해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임기응변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김경징은 장병들에게 무기와 화약 등을 나눠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였다. 화약을 조금씩 분급하면서 그것을 일일이 기록했다는 것이다. 적의 상륙 시도가 임박한 위기 상황을 고려하면 문제가 있는 조처였다. 강화도가 함락될 경우, 화약 분급량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1월22일 새벽, 청군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청군은 새로 건조하거나 수리한 선박 100여척에 50∼60명씩의 병력을 분승시켜 공격을 개시했다.‘청나라 오랑캐는 바다에 약하다.’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청군의 일부 선박에는 홍이포까지 거치되어 있었다. 홍이포에서 포탄이 발사되자 조선군의 사기는 이내 꺾이고 말았다. 전투 경험도 없고, 사전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철옹성’ 강화도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87) 최명길 국서를 쓰고, 김상헌 그것을 찢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과의 교섭은 조선의 ‘항복 조건’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변해갔다.1627년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홍타이지는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인 신속(臣屬)을 요구했다.‘오랑캐’를 황제로 섬겨야 하는 ‘현실’을 코앞에 두고 신료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신속’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것, 자신들과의 화의를 배척한 척화파(斥和派)들을 묶어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홍이포(紅夷砲)을 발사하는가 하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참담한 사신들 이렇다 할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청군 진영에서는 홍타이지의 ‘노여움’을 풀고, 항복 조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아부와 상찬(賞讚)을 늘어놓아야 했다. 자연히 산성의 척화파들로부터는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자’,‘대의명분을 저버린 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1월13일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조선 사신들은 청 측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최명길은 ‘황제는 참으로 관대하고 도량이 넓은 분입니다. 진실로 남한산성을 공격하여 도륙(屠戮)하고자 한다면 청군 또한 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임금과 신료들은 저항하다가 힘이 미치지 못하면 자결할 것이니 그대들이 입성하는 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시체 더미뿐일 것입니다. 그대들이 죄를 뉘우치는 조선을 용서한다면 영원히 은인이 되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라고 청군 지휘부를 달래려고 시도했다. 홍서봉(洪瑞鳳)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그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홍서봉은 직접 마른 풀을 집어 태우면서 청군 지휘관들에게 ‘이 풀이 비록 바짝 말랐지만 하늘이 비와 이슬로써 적셔준다면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오늘 조선이 그대들로부터 허물을 용서받는다면 황제는 하늘이 되고, 그대들은 비와 이슬이 되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눈물겨운 노력이자 몸짓이었다. 산성에 대한 포위를 풀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호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1월17일에 보내온 회답서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신속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청의 신속(臣屬) 요구를 받아들이다 1월18일, 논란 끝에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의 초안을 완성했다. 비변사 신료들이 그것을 돌려보며 문구를 수정했다. 신료들은 초안 가운데 홍타이지를 ‘폐하(陛下)’라고 호칭한 것을 지웠다. 내용은 당연히 지난번 보냈던 것보다 더 공손해지고, 스스로를 더 낮추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소방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대국의 운세(運勢)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舊習)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命)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儀式)을 따를 것입니다.’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입니다.’라는 구절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아직 ‘신(臣)’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홍타이지를 ‘황제’로, 청을 ‘황제국’으로 섬겨 군신(君臣) 관계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조선 스스로 접는 대목이기도 했다. 사실상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인조가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최명길은 이렇게 썼다.‘성에서 나오라고 하신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시는 뜻이긴 합니다만,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계시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 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 또한 서글픕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을 나가서 항복하는 대신 청 태종이 회군하는 날,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나마 인조의 체면과 위신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려는 몸짓이었다. ●김상헌 국서 내용 보고는 통곡 국서의 최종본을 완성하기 위해 최명길은 비변사에 머물면서 내용을 가다듬었다. 이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와 내용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버렸다. 김상헌은 인조에게 달려갔다.‘저들과의 명분이 정해지고 나면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성문을 나서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적군이 성 밑에까지 이르고서 그 나라와 임금이 보존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정강(靖康)의 변(變)을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정강의 변’이란 1126년 금군(金軍)이 송(宋)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함락시킨 뒤, 태상황(太上皇) 휘종(徽宗)과 황제 흠종(欽宗)을 붙잡아 간 사건을 가리킨다. 휘종은 금의 오지인 만주로 끌려가 눈이 먼 상태에서 객사했고, 흠종 역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은 ‘정강의 변’ 때 송이 처한 상황과 여러모로 흡사했다. 더욱이 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은 금군의 후예였고, 조선은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도 송을 존모(尊慕)해 왔다. 김상헌은, 신속하겠다고 약속할 경우 분명 성을 나가야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조와 왕세자 또한 휘종과 흠종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김상헌은 일단 군신의 명분을 받아들이면 그나마 남아 있는 성 안의 결전 의지는 급속히 해체되어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군신 관계’에 반대하는 대다수 신료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식(李植)은 ‘우리가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보이면, 저들이 도륙하여 입성한 이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아 포위를 풀고 물러갈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국서를 바로 보내지 말고 하루 정도 시간을 두고 내용을 다시 수정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조는 반문했다.‘양식이 지탱하기에 충분하고, 병력이 적을 막을 만큼 강하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그러면서 인조는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탄식했다. 주변에 있던 신료들이 일제히 눈물을 떨구고, 인조 옆에 앉아 있던 소현세자의 통곡 소리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청군, 무력 시위를 벌이다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이제 신속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서를 보내는 것을 늦추자는 주장도 일축했다. 늦추자고 주장하는 신료들에게 ‘그대들이 사소한 것에 매달려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다.’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몽롱한 상태에서 국사를 논할 수는 없다고 일갈했다. 1월18일, 논란 끝에 완성한 국서를 갖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하지만 청군 지휘부는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인조의 출성(出城)을 거부하는 내용 때문이었다. 사신들이 하릴없이 돌아오자, 비변사는 삭제했던 ‘폐하(陛下)’라는 글자를 추가하여 다시 보냈다. 1월19일, 홍이포 포탄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였다. 처음으로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 산성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강화도를 공략할 준비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조선 왕실의 가족들과 고관들의 처자식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미 강화도를 공략할 배를 만들어 두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였다. 인조가 나오지 않으면 항복을 받아줄 수 없다며 병선(兵船)을 건조하고 있던 청군의 압박 속에서 남한산성의 운명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봉석의 스크린 엿보기] 어째서 인간은 폭력을 휘두를까

    때로는 노래 한 곡만으로도 영화가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 지방 대학에 진학한 시이나는 밥 딜런의 노래 ‘블로인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부르다가 옆집에 사는 가와사키와 친구가 된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가와사키는 시이나가 어떤 인간인지 직감한다.1960년대에 발표된 이 곡이 대표적인 반전 노래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시이나는 운동권도 좌파도 아니다. 시이나가 그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서정적인 정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와사키는 시이나의 노래를 듣는 순간, 그가 어떤 차별이나 편견 없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인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을 각색한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 로커’는 묘한 사건으로 출발한다.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부탄인 도르지가 친구를 잃어 슬퍼한다며, 그를 위해 일본어 사전을 훔치자고 제안하는 가와사키를 따라서 시이나는 서점 습격사건에까지 따라간다. 그리고 가와사키가 어떤 인간인지,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게 되었는지 차츰 알게 된다. 가와사키는 부탄인 도르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지만, 우연히 공원에서 동물학대범들을 만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그저 자신들이 즐겁다는 이유만으로 동물들을 괴롭히고 죽이던 동물학대범들은 그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들은 왜, 아무런 죄도 없는 동물과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일까. 왜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것일까. ‘Blowin’ in the wind’의 가사는 이렇다.‘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흰 갈매기는 사막에서 잠들 수 있을까/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야/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바람만이 알고 있지’ 어째서 인간은 계속해서 전쟁을, 폭력을 저지르는 것일까. 언제야 인간은 폭력을 멈추고,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영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 로커’는 우리에게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진리를 알려준다. 편견 없이 타인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정의를 위해 싸웠을 때 비로소 폭력은 멈춘다는 것을….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 로커’는 소설의 원작자 이사카 코타로가 가장 만족스러워한 영화라고 한다.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기묘한 사건이 좌충우돌하는 속에서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소설처럼, 영화 역시 어딘가 어긋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운율이 맞아 들어간다. 시이나와 가와사키의 기묘한 관계에 과거의 이야기가 끼어들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에 따라 사건들이 변형되면서 관객을 수수께끼 속으로 빨아들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사카 코타로와 밥 딜런의 메시지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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