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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평도 포격 1주년] 北 방사포탄 170여발 상흔 남은 연평부대는 지금…

    [연평도 포격 1주년] 北 방사포탄 170여발 상흔 남은 연평부대는 지금…

    포성도, 포연도 멈춘 연평도 상공 헬기에서 내려다본 섬 전경은 그저 한가롭게만 보였다. 바닷물이 물러난 갯벌 위에는 지난밤 꽃게잡이에 나섰을 어선 몇 척이 기우뚱하게 걸터 앉아 모자란 잠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헬기가 고도를 낮출수록 눈앞에 들어오는 마을과 부대 곳곳의 풍경은 한가롭다기보다는 황량해 보였다. 1년 전인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부터 쏟아진 북한의 방사포탄 170여발이 남긴 상흔을 지우기 위해 민·군을 가릴 것 없이 공사장으로 둔갑한 연평도는 메마른 먼지가 포연을 대신하고 있었다. 지난 15일 서울에서 국방부 출입기자단을 싣고 떠난 CH47 치누크 헬기가 50여분 간의 짧은 비행 끝에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도착했다.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의 충격은 가시지 않은 듯했다. 헬기가 내려앉은 연평부대의 초입 건물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상상조차 못했던 전쟁의 위압감이 눈에서 머리로, 가슴으로 차올랐다. 헬기장에서 불과 50m 아래쪽, 지금은 안보전시관으로 쓰이는 서해 최전방 연평부대 내 이발소는 1년 전 북한 포격 도발의 상흔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말끔했던 벽은 파편으로 누더기가 됐고 122㎜ 방사포탄이 관통한 천장에는 지름이 1.5m쯤 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건물의 뼈대를 이뤘던 철근들만 앙상하게 드러나 녹슬어 있었다. 또 건물 안 구석 한편의 유리 전시관에 진열된 방사포탄 탄두에는 포의 구경을 뜻하는 ‘122’라는 숫자가 쓰여 있다. 지난해 3월 천안함 피격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어뢰 몸통에 쓰여 있던 숫자 ‘1번’이 순간 머릿속에서 오버랩됐다. 연평부대와 마을을 잇는 길가 한편의 소나무에는 해병대 모표가 꽂혀져 있었다. 그날 휴가를 받아 부대를 떠나던 고(故) 서정우 하사가 포격당하고 있는 부대 모습을 보고는 발길을 되돌려 부대로 뛰어들어 오다가 적의 포탄에 맞아 숨을 거두는 순간 서 하사의 정모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다. 해병대는 이런 쓰라린 흔적들을 고스란히 남겨 두기로 했다. 그날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를 새기기 위해서다. 기자단과 동행한 해병대 김정수 대위는 “당시 점점 다가오는 공룡 발자국 소리처럼 들렸다.”고 말했다. 지난 2월 해병대사령부로 자리를 옮긴 김 대위는 당시 반격에 나섰던 K9 자주포 부대인 포 7중대 중대장이었다. 그와 함께 7중대를 다시 찾았다. 북한군 포문이 첫 번째 목표로 겨눴던 포 진지 주변은 화염에 그을린 얼룩과 포탄 자국, 포탄에서 튕겨져 나온 피탄들이 박힌 흔적들이 또렷이 남아 있었다. 해병대원들의 눈빛만은 더 매서워졌다. 포탄이 빗발치는 순간에도 움츠리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어 13분 만에 반격에 나섰지만, ‘늑장 대응’이라는 누명(?)을 썼던 그들은 속 모를 비난을 가슴에 삭이는 대신 복수를 다짐하며 포술을 더 갈고닦았다. 기자들 앞에서도 보란 듯 시연해 보였다. “전투 배치”라는 지휘관의 구령에 복명복창이 끝나기도 전에 포상 안에 웅크리고 있던 K9 자주포가 ‘부르릉’ 울어대더니 이윽고 육중한 포체가 포상을 빠져나왔다. 곧이어 자주포 조종석 앞 모니터에 전달된 가상 적의 도발 원점을 향해 ‘위이잉’ 하며 포신이 맞춰지는가 싶더니만 곧바로 포 안 쪽에서 “전투 배치 끝!”이란 함성이 짧게 울려 퍼졌다. 지금도 연평 부대 곳곳에는 ‘11월 23일,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는 문구가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연평 해병대원들은 한결같이 “한 번 더 도발해 온다면 도발 의지까지 꺾어 놓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연평도 포격 1주년] “北 또 도발땐 확실하게 보여주겠다”

    “쓰라린 포흔보다 더 깊은 투혼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지난 15일 연평 해병부대가 북한의 포격 도발이 있은 지 1년 만에 언론에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화염 속에서 북쪽으로 다시 포를 겨눴던 장병들이 죽어도 잊지 못할 그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갚아 주겠다는 각오를 풀어놓았다. 포술 교관이던 김상혁(32) 중사는 “‘13분’(대응사격까지 걸린 시간)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는 억울함도 있었다.”면서 “그 때문에 ‘한 번만 더 건드려 봐라’ 하는 각오를 부대원 전체가 품게 됐다. ‘이번엔 확실히 보여 주자’는 생각이 앞섰다.”고 말했다. 그는 도발 전 연평도 남동쪽 해상을 향한 사격훈련 때 4포상에서 불발탄 제거를 돕고 있었다. 그러다가 3포상에 적의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포탄 속을 헤쳐 반격이 가능한 5포로 뛰어들어 사격을 지휘했다. 그는 포탄 속을 헤치던 당시를 떠올리며 “겁은 나지 않았다. 빨리 응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고 말했다. 당시 7중대 6포 가운데서는 2·5·6포가 피격 13분 만에 첫 번째 반격에 나섰다. 이어 포탄에 맞아 자동조준이 불가능했던 3포가 수동 조종으로 반격에 가담했다. 당시 장병들은 중대장인 김정수 대위의 침착한 지시에 맞춰 반격에 나섰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연평도 사태 훈장 받은 사람 겨우…불공평 수훈 논란

     ‘12대2’  지난 1월 아덴만 여명 작전 때는 장교 12명이 무공훈장을 받은 데 비해 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때 훈장을 받은 장병은 단 2명에 불과했다. 연평도 사태로 훈장을 받은 2명도 전사한 고(故) 서정우 하사·문광욱 일병뿐이다. 북한의 빗발치는 포격에도 목숨을 걸고 반격에 나섰던 해병대원들에게는 너무 박한 대접이 아니냐는 지적이 군 안팎에서 제기되는 이유다.  포상 내역에서도 두 작전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아덴만 작전 때는 훈장 수훈 12명을 포함해 무공포장 13명, 대통령 표창 10명, 국무총리 표창 11명, 국방부장관 표창 28명, 합참의장 표창 46명, 해군참모총장 표창 10명 등 모두 130명이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반면 연평도 사태 때는 51명이 각종 표창을 받았지만, 대통령 표창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시 화재 진압에 나섰던 이충민 병장의 공적이 뒤늦게 인정돼 지난 10월 1일 국군의 날에 맞춰 대통령 표창을 받았을 뿐이다.  상대적으로 인색한 연평도 사태 공적 평가에는 ‘북한의 기습에 당한 뒤 대응한 것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군 안팎에선 단 13분 만에 반격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무훈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 포병 간부는 “기본 포병 전술에 따르면 적의 공격이 있을 때는 분산해서 피한 뒤에 반격에 나서는 게 기본”이라면서 “그런데 연평도 사태 때 해병대원들은 단 13분 만에 반격 준비를 마치고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반격했는데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난 행위”라고 평가했다.  군의 한 관계자는 “비록 북한의 기습 도발에 맞선 수동적 대응이라고 하지만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투혼을 존중하고 귀감을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기고] 연평도 1주기와 김정일/림일 탈북작가 ‘소설 김정일’ 저자

    [기고] 연평도 1주기와 김정일/림일 탈북작가 ‘소설 김정일’ 저자

    간 크게 남한영토에 대고 백주에 무려 170여발의 포 사격을 가한 북한군의 무모한 행위가 있은 지 1년이다. 세계가 놀란 연평도 포격은 김정일 신하들의 절대 충성심이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끔찍한 그림이다. 민간인들이 사는 평화로운 섬을 겨냥한 연평도사건 이후 가장 크게 눈에 띈 것이 남한의 강경한 대북제재 조치이다. 민족을 향해 포탄을 쏘는 이성을 잃은 북한집단과는 그 어떤 대화나 교류도 안 하겠다는 방침이다. 북한에 지원하던 인도적 지원마저 끊긴 상태이다. 지난 8월 초, 수해를 맞은 북한에 초코파이, 라면 등 50억원어치의 물품을 전달하겠다고 통보하였으나 답변도 없는 그들이다. “그래? 주겠다는 것도 안 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아?” 연평도사건 이후 북한당국의 나쁜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겠다는 정부의 태도도 만만치 않다. 언젠가는 김정일이 항복할까? 남쪽에 제대로 된 사과와 사전방지대책 같은 특단의 조치라도 혹시 있을까? 천만에. 하늘이 무너져도, 지구가 깨져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이다. 정부의 대북정책과 관련하여 오히려 햇볕정책의 찬반과 마찬가지로 남남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한 이것도 없어질 그림이 아니다. 북한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특수집단이다. 2000만 인민이 모두 굶어 죽어도 지도자와 정부 비판을 엄두도 못 내는 괴상망측한 국가다. 벙어리 2000만 인민의 지도자 김정일에게는 어쩌면 지금의 빈곤상태가 독재정치에는 더더욱 유리할 것이다. 항상 배를 곯아야 잡생각을 못하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자기만을 따르며 충성하는 머저리 같은 인민은 그에게 외화를 벌어주는 동물원의 짐승이나 다름없다. 일각에서는 지난 정부에서 지원한 쌀이 군부나 당간부들에게 들어가 실망이라는데 크게 보면 당간부도, 군인도 엄연히 인민이다. 예전에는 간부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로 인민들이 시장에서 돈을 주고 ‘한국산 쌀’을 사 먹었으나 지금은 그림의 떡이다. 역설적으로 북한주민들의 굶주림을 가중시키는 지금의 대북정책도 어쩌면 희대의 독재자 김정일을 돕는 또 하나의 작태이다. 사실 남한에서 북한에 식량과 물자를 줘도, 안 줘도 김정일을 도와주는 꼴이다. 그렇다면 이왕 주면 어떨까? 통 크게 말이다. 김정일이 화가 나서 “제발 보내지 마라. 인민들이 배부르니 내 말을 안 듣는다.”라고 해도 “그래도 받아라. 어차피 여기서는 쓰레기로 버리는 것들이다.”라고 하며 말이다. 뵈는 게 없는 깡패한테서 사죄를 받는다? 미친 놈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소가 웃다 꾸러미 터질 일이라고, 김정일이 코웃음 치고도 남을 일이다. 남한의 대북정책 관계자들이 김정일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김정일에게도 인간적으로 한마디 하고 싶다. 그깟 알량한 자존심에 목숨 걸지 마라. 일국의 지도자답게 화끈한 모습을 보여라. “죄송하다. 연평도포격 1주기를 맞아 대한민국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다시는 그런 비극적인 일이 안 생기도록 온 힘을 쏟겠다.”라고 해보라. 작은 것에 감동하여 뭐든 더 주는 남측의 지원물자를 전부 받아라. 그것을 총명한 당신의 은덕으로 치사하고 인민들에게 줘서 지금의 국가적 빈곤에서 탈출하라. 차라리 그게 인민을 위한 지도자의 모습이다.
  • “섬 떠날까 했는데 포격 뒤 맘바꿔…신도 수도 더 늘었죠”

    “섬 떠날까 했는데 포격 뒤 맘바꿔…신도 수도 더 늘었죠”

    “1년 동안 섬을 지키면서 절망도 고생도 참 많았습니다. 악몽을 딛고 새 희망을 찾는 주민들을 보니 가슴이 뿌듯합니다.” 인천 옹진군 연평도 연평장로교회 송중섭(45) 목사는 17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교회 앞에 서서 지난 시간을 돌이켰다. 섬 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기도했던 송 목사에게 지난 1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북한군의 포탄이 쏟아진 다음 날인 지난해 11월 24일. 교회에서 열린 수요 저녁 예배 시간에는 미처 섬을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이 속속 모였다. 피난길에 나서지 못한 주민 수십명의 두려움과 고립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송 목사는 주민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잠깐만 떠났다가 꼭 다시 돌아옵시다.” 다음 날 주민들을 이끌고 인천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인천의 한 찜질방에 머물면서 주민들을 돌보다 열흘 만에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다시 찾은 마을은 ‘유령의 섬’이었다. “포격으로 예배당의 유리창이 깨져 도리 없이 비좁은 교육관으로 예배 장소를 옮겨야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섬에 남은 주민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예배를 보러 오는 주민이 4~5명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송 목사는 섬에 남은 주민과 뭍에서 온 자원봉사자, 복구 인력, 공무원 등에게 교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주민들의 외로움을 달래 주고 공포감을 덜어 주는 일은 송 목사의 몫이었다. 송 목사는 주민들에게 “마을 주민 모두가 무사한 건 기적입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렇게 연평교회는 섬에 남은 주민들의 안식처로 자리 잡았다. 지난 2월 김포에 머물던 주민 800여명이 섬으로 돌아오면서 현재 연평교회를 찾는 주민은 70여명에 이른다. 포격 이전보다 더 늘었다. 송 목사는 “예전에는 안 보이던 분들도 교회를 찾는다.”고 말했다. 송 목사는 “포격 전에는 ‘자연에 감사하고 열심히 살자’는 말씀을 드렸으나 지금은 ‘포격이라는 시련을 겪었지만 두려움을 잊고 담대하게 살아가자’고 당부한다.”고 했다. 포격 사건은 송 목사의 목표도 바꿔 놓았다. 지난해 3월 연평교회에 부임한 송 목사는 때때로 섬을 떠날 고민을 하곤 했다. 그러나 포격 이후에는 은퇴할 때까지 섬에 남겠다고 결심했다. “연평도를 지키는 게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글 사진 연평도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해병 1000명 증강… 방어작전서 도발지 응징 거점으로

    해병 1000명 증강… 방어작전서 도발지 응징 거점으로

    “단 한 뼘의 영토, 풀 한 포기도 내줄 수 없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1주년(23일)을 앞두고 김관진 국방장관이 18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1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지휘서신 8호를 전군에 시달하며 이처럼 결연한 의지를 강조했다. 김 장관은 “그동안 피땀 흘려 훈련해 온 대로, 철저하게 준비해 온 대로 제대별 전력과 합동 전력을 총동원해 도발 원점은 물론 지원세력까지도 응징해야 한다.”면서 “다시는 도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와 군은 북한의 추가 도발을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로 그동안 서북도서를 중심으로 한 전력 증강을 통해 방어 태세를 보완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우리 군의 가장 큰 변화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서방사)의 창설이다. 해병 6여단이 서방사 예하로 재편되며 연평부대 등에 병력 1000여명이 추가 배치됐다. 그동안 서북도서에 대한 작전 개념이 북한의 기습상륙 저지 등 방어적이었다면, 서방사 창설을 중심으로 한 전력 증강은 김 장관이 수차례 강조한 대로 도발 원점 및 지원세력에 대한 공격 거점 개념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작전지침 유형도 제1, 제2 연평해전 때의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해상 작전 중심에서, 포격 도발에 의한 영토 침범에 대응한 육·해·공군 합동작전 체제로 바뀌었다. 즉시 대응을 위해 서북도서 내륙과 인근 해역에 관한 작전권도 서방사를 책임진 해병대사령관이 주관하도록 했다. 해상, 육상 등 북한의 도발 형태에 따라 작전권한이 나뉘어 혼선을 빚을 수 있었던 문제를 보완하고 합동화력 지원을 위한 보고라인을 간편화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군은 서방사 창설과 함께 화력을 대폭 보강했다. 전차와 다연장포, 신형 대포병레이더 아서 등 8개 전력이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북도서로 전환 배치됐다. K9 자주포, K10 포탄운반차, AH1S 코브라 공격헬기, 링스헬기 등도 새로 배치됐다. 연평도만을 놓고 보면 K9 자주포의 전력이 3배쯤 증강된 것으로 전해졌다. 기존의 105㎜나 81㎜, 벌컨포 등은 최대 사거리가 13㎞에 불과해 북한의 방사포가 몰려 있는 황해 개머리기지를 직접 타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최대 사거리가 40㎞인 K9자주포와 155㎜ 견인포는 북한 해안까지 직접 타격이 가능하다. 여기에 공군력을 이용한 원점 타격 작전, 갱도 속에 숨겨진 북한 해안포를 직접 때릴 수 있는 정밀타격 무기(스파이크 미사일)를 이용한 작전 등도 새로 추가될 예정이다. 해병 6여단이 있는 백령도는 서방사의 화력거점으로 탈바꿈했다. 30㎜ 다연장 로켓(구룡)은 사거리 23~36㎞에 달하는 직경 130㎜ 로켓 발사관 36개를 한 다발로 묶어 트럭에 탑재하고 다니며 발사하는 무기로, 북한의 122㎜ 방사포보다 위력이 강하다. 백령도에 새로 배치된 AH1S 코브라 공격헬기는 대전차 미사일인 토를 장착하고 있어 북한의 공기부양정 부대를 이용한 상륙 시도에 1차적인 대응 전력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아서 레이더와 함께 음향표적 탐지 장비 ‘할로’도 추가 배치됐다. 군은 내년까지 903억원을 들여 전술비행선과 전방관측(FO)용 주야관측장비, 고성능영상감시체계, 해군 정보함의 무인정찰기(UAV) 등 여섯 가지 탐지 장비를 전력화한다는 계획이다. 군 관계자는 “북한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 넘는 기습적인 도발을 항상 준비하고 있다.”면서 “전력 보강과 반복적인 훈련을 통한 내실 있는 준비로 맞서 도발의 대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겠다.”고 강조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커버스토리] 23일 ‘포격 1년’…잘 지내나요! 연평도

    [커버스토리] 23일 ‘포격 1년’…잘 지내나요! 연평도

    해가 수평선 너머로 막 잠긴 지난 16일 저녁, 연평도 중부리 주민 김영길(49)씨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며칠 전 이사 온 새집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1년 전, 북한의 포격으로 김씨네 집은 지붕이 내려앉을 정도로 참혹하게 파괴됐다. 그 자리에 붉은 벽돌집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들어섰다. 김씨는 “국민의 성원으로 지은 집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며 허허허 웃었다. 평화롭던 연평도가 북쪽 포대에서 날아온 포탄 170여발로 순식간에 쑥대밭이 된 것이 지난해 11월 23일. 벌써 계절이 네번이나 바뀌었다. 한순간에 ‘피란민’ 신세가 된 주민들은 옷가지도 챙기지 못한 채 섬을 빠져나와 도회지의 찜질방과 임대주택을 전전하다 섬으로 돌아왔지만 한동안 절망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랬던 연평도가 겉으로는 빠르게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선착장은 외투와 모자로 감싸고 이른 아침부터 잰걸음으로 일터로 향하는 주민들로 붐볐다. 집 앞 계단이며,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정자 근처에서는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갓 따온 굴을 까고 있었다. 꽃게잡이도 한창이어서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물에서 꽃게를 떼어내는 어민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마을회관에서는 부녀회원들이 홀로 사는 노인들에게 드릴 김장을 담그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주민들은 바닷가 쓰레기를 줍거나 도로를 청소하고 일당 3만 5000원을 받는 일자리사업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연평도 포격 후 생긴 또 다른 풍경이다. 이 일을 하는 한 할머니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외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지. 일도 하고 서로 얘기도 나누니 포격을 기억할 틈도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겉으론 평온했지만 상처가 다 아문 것은 아니었다. 포격에 대한 공포심은 여전히 주민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또 도발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져 있었다. 바다 건너 북쪽 황해도 강령군 해안가에 해안포 진지 수십곳이 새로 구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불안감은 더 커졌다. 어디선가 큰 소리만 들려도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김상숙(80) 할머니는 “군인들 사격훈련은 물론 누가 문만 세게 닫아도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포격 이후 국민과 정부의 도움과 지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고 치유할 수는 없었다. 관심이 시든 뒤에 남은 것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주민들의 고달픔이다. 꽃게와 굴을 따서 생계를 잇는 주민들은 하나같이 “생산량이 부쩍 줄었다.”며 한숨을 토했다. 안정적 수입원인 일자리사업이 다음 달에 끝나는 것도 고민이다. 달리 먹고살 방법이 없어서다. 뭍보다 물가는 비싼 데다 뭍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의 학비까지 대야 하는 섬사람들은 겨울을 날 걱정에 잠이 오지 않는다. 실향민이나 낚시꾼들이 종종 찾던 연평도는 이제 통일교육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연평중·고교 교사들은 포격 당시의 흔적을 한번에 돌아볼 수 있는 ‘연평 통일올레길’을 조성, 9월에 개장했다. 김영호 연구부장은 “올레길을 걷는 이들이 다시는 포성이 들리지 않는 평화의 세상을 기원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연평초등학교 복도에 걸린 통일 포스터 아래에 누가 비뚜름한 글씨로 이렇게 써놓았다. ‘남북이 통일해야 포격 같은 일이 사라진다.’ 연평도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경찰 입으로 ‘조폭 부실 대응’ 밝힐까

    경찰이 지난 21일 인천 남동구 길병원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조직폭력배들의 유혈사태와 관련, 조직폭력 조직원 35명을 검거해 조사하고 있다. 또 경찰관이 한 조직원을 붙잡고 있을 때 다른 조직원이 쫓아와 흉기를 휘둘렀다는 의혹과 달리 경찰차와 벽 사이로 피했던 조직원을 상대편 조직원들이 양쪽에서 막고 두 차례 찌른 사실도 조사결과 드러났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경찰들이 공포탄 발사 등 상황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사실도 속속 밝혀짐에 따라 경찰의 부실 대응에 대한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인천경찰청 ‘조직폭력배 척결을 위한 수사본부’는 이르면 27일 관련자 검거 및 당시 상황 점검과 관련된 종합수사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 경찰은 사건 당시 현장 폐쇄회로(CC)TV를 분석, 조직폭력 크라운파 조직원 A(34)씨를 흉기로 찌른 신간석파 B(34)씨와 난투극에 가담한 양쪽 조직원 35명을 입건해 조사 중이라고 26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관련자들의 진술이 엇갈려 당시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면서 “확인 결과 경찰관이 붙잡고 있던 조직원을 다른 조직원이 쫓아와 찔렀는데 막지 못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130명의 조직원 역시 민간인과 섞여 있어 인원수가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면서 “실제로는 절반 정도도 안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조현오 경찰청장의 ‘조폭과의 전쟁’ 선포와 관련, 지방경찰청들의 조폭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됐다. 부산경찰청은 관할 폭력조직 23개파 397명과 추종 폭력배 297명을 중점 감시대상에 올려놓고 연말까지 불법행위에 강력 대응하기로 했다. 전북경찰청도 전담수사체제를 구축하는 등 조폭 특별 단속에 나섰다. 경찰은 조폭 간의 충돌이 예상될 때, 폭력배들의 경조사 모임 등의 현장에 출동할 경우 38구경 권총을 비롯해 고압전류 방전총인 테저건, 전기충격기, 가스총 등 모든 제압용 장비를 휴대하도록 했다. 현장에는 전담 형사팀을 3중 배치하고 필요하면 방범순찰대까지 동원할 방침이다. 또 예식장이나 장례식장 등 공공장소에서 집단 도열해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는 이른바 ‘굴신인사’, 문신노출, 위력과시 등도 경범죄로 단속하기로 했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지방행정의 달인] “작은 아이디어도 ‘제안서’작성부터…”

    [지방행정의 달인] “작은 아이디어도 ‘제안서’작성부터…”

    “인터넷 농업방송을 하려고 하는데, 콘텐츠 개발이 고민입니다.”(강진군 정보통신팀 마종선 주무관) “직접 농가를 찾아가서 농사 현장을 촬영해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온라인 쇼핑과 연결하면 소비자들은 안심하고 농산물을 살 수 있고 농가도 소득을 더 올릴 수 있을 겁니다.”(대구 달성군 정보통신과 채해수 달인) 지난 5일 전남 강진군청과 농업기술센터 2곳에서 친환경농업, 농자재개발, 정보통신 등 3가지 주제로 ‘지방행정의 달인, 행정자문회의’가 열렸다. 올 3월 서울신문과 행정안전부가 공동 주관한 제1회 지방행정의 달인에 선정된 채해수 달인과 강보원(충남 보령 농업기술센터) 달인, 류정기(경북농업기술원 작물연구과) 달인 등 3명이 ‘지방행정 고민 해결사’로 나섰다. 미리 전해 받은 현장고민에 대해 달인들이 자신들의 ‘행정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참석자들과 달인이 서로 질의응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날 오후 농업기술센터에서 열린 ‘친환경 농업’을 주제로 한 자문회의에서 강진농업기술센터 한상춘 친환경농업차장은 “친환경 인증을 받으려면 무농약 농가를 확대해야 하는데, 비료·농약 등 친환경 자재 가격이 다른 자재에 비해 4배 이상 비싸고, 판로 확보도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이에 강 달인은 현재 보령시에서 시행하고 있는 유용미생물(EM·Effective Microorganism)농법을 어떻게 정착시켜 왔는지, 그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강 달인은 보령시에서 2009년부터 EM 공장 설립을 주도했다. 무농약 농업에서 비용을 절감할 방법은 지자체에서 직접 친환경 자재를 개발해 싼 가격으로 농가에 보급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공장에서 하루에 생산되는 EM은 5t이다. 또 EM을 활용해 발효비료·활성액·농약·아미노액비 개발에 성공, 목록공시를 통해 유기농 자재 인증을 앞두고 있지만 도입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EM 비료공장이 들어선다고 하자 주민들은 혐오시설이라고 반대했다. 강 달인은 이에 직접 16명의 통장은 물론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또 공장부지가 군사시설 통제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이라 직접 해당 군부대를 찾아가 ‘훈련 중 포탄에 의해 공장이 부서져도 손해배상 청구를 안 하겠다.’는 각서까지 썼던 경험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또 생협이 친환경 농산물을 구매할 때 자신들이 지정한 업체의 농자재를 구매하도록 강권할 때의 대처방법, 영농일지 쓰기를 어려워하는 농가를 돕는 방법, 수도권 학교들과 납품 계약 체결 방법 등 생생한 현장 경험도 소개했다. 질문자는 “(달인이)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잘 알고 꼭 짚어주니 앞으로 친환경 농업정책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류 달인은 ‘농자재 개발 방법’에 대한 질문에 “작은 아이디어가 좋은 제품이 될 수 있으니 자신의 생각을 ‘제안서’로 옮기는 일부터 연습하라.”고 조언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태양광 농기계 안전 후미등과 근체수확기의 개발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농자재 개발의) 답은 현장에 있다.”면서 “자기가 잘 만들 수 있는 걸 개발하려고 하지 말고, 주민들이 필요한 게 뭔지 살펴보고, 물어보면서 개발해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다.한편 제2회 지방행정의 달인은 올 12월까지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선발되고 내년 1월 발표된다. 글 사진 강진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살레 대통령 ‘피의 귀환’… 예멘 내전 격화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이 3개월 만에 귀국하면서 “평화의 비둘기”를 거론한 지 하루 만에 박격포까지 동원해 민주화 시위대와 근처에 주둔하던 반정부군을 무차별 공격했다. 24일(현지시간) 하루 동안 유혈 진압으로 죽은 사람만 40명을 넘어섰다. 혁명기념일(26일) 전날인 25일 저녁 살레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하기 수 시간 전에도 시위대를 공격해 최소 4명이 숨졌다. 리비아에 대해서는 신속한 제재 조치를 단행했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예멘 정부와 시위대에 “폭력 중단과 자제를 촉구한다.”는 면피성 발언만 되풀이하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예멘 정부군은 이날 시위대가 점거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수도 사나의 ‘변화 광장’에 박격포를 퍼부었다. 도심 건물 지붕 곳곳에 배치된 저격수들은 시위대를 조준 사격했다. 살레 대통령의 아들인 아메드가 이끄는 정예부대인 공화국수비대와 중앙보안부대는 정부군에서 이탈해 변화 광장 북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알리 오센 알아마르 소장 휘하 제1기갑사단을 기습공격했다. 부대 대변인은 60발이 넘는 포탄이 떨어졌으며 이로 인해 11명이 전사하고 112명이 부상했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지난 한 주간 양측 충돌로 14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AP통신에 따르면 알아마르 소장은 살레 대통령을 “병들고, 복수심에 불타는 영혼”이라고 표현하면서 그가 예멘을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25일 정부군이 살인자 처벌을 요구하던 시위대를 또다시 공격했다. 미니밴에 올라 확성기를 들고 시위대 수만명을 이끌던 시민이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것을 비롯해 최소 4명이 죽고 17명 이상이 다쳤다. 예멘 제2의 도시 타이즈에서도 정부군과 시위대가 충돌해 세 명이 숨지고 최소 일곱 명이 부상했다. 예멘 국영 뉴스통신 사바(SABA)의 한 관계자는 살레 대통령이 1962년 9월 26일 혁명 49주년을 하루 앞둔 25일 저녁에 “중요한 연설을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아직 이에 대한 공식 발표는 전혀 없는 상태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금강산 계류 절경 양구 1경 ‘두타연’

    금강산 계류 절경 양구 1경 ‘두타연’

    짧지만 인상적인 숲길로 갑니다. 강원 양구의 민간인통제선 안쪽. 북녘에서 흘러와 비무장지대(DMZ) 일대를 굽이쳐 흐르다 남녘의 파로호로 들어가는 물줄기와 함께하는 숲길입니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금강산에 가 닿지요. 반세기 넘는 시간, 철조망 둘러친 숲길의 주인은 지뢰였습니다. 그러다 몇 해 전, 무시무시한 주인과 공생하던 숲은 끝자락에 숨겨뒀던 풍경의 보물 하나를 사람들에게 내어줬습니다. 그 숲뿐 아니라 양구 전체를 통틀어 제1경으로 꼽히는 두타연입니다. 예로부터 금강산의 여러 계류들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절경으로 칭송받았다지요. 빗장이 단단히 채워져 있던, 하지만 그 덕에 싱싱한 자연이 오롯이 남아 있는 그 숲길로 지금 갑니다. 방산면 송현2리 ‘소지섭 갤러리’. 옛 백석산지구 전투기념관을 리모델링한 곳이다. 두타연 인근에 5.1㎞씩, 2012년까지 총 51㎞에 걸쳐 조성될 ‘소지섭길’의 출발지다. 현재는 갤러리 겸 두타연길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길은 적막강산이다. 어디서도 긴장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을 뿐 긴장은 늘 길 양편에 똬리를 틀고 있다. 군인들조차 길 밖의 숲 속으로는 일절 접근하지 않는다. 오래전 이 길은 금강산, 정확히는 북한 지역 속사리와 현리, 그리고 내금강의 장안사로 향하던 길이었다. 공식 명칭은 31번 국도. 부산에서 출발해 울산~청송~영양~태백~평창~인제를 거쳐 양구로 이어진다. 현재는 대부분이 포장됐고, 6·25전쟁 전의 금강산 가던 길 모습을 잃지 않은 곳은 이 구간이 유일하다.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 군 검문소에서 신분확인 절차를 마친 뒤 차로 터덜터덜 비포장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이목교에 이른다. 민간인통제선 북쪽 문등리에 내려온 문등천이 금강산에서 내려온 수입천과 몸을 섞는 다리다. 다리 왼쪽 물길이 문등천이다. 문등천 상류엔 분단 전 양구읍에 견줄 만큼 큰 마을이었다는 문등리가 있다.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형석 광산이 있었다는 곳. 6·25전쟁 전까지 대대손손 두타연 인근에서 살았다는 윤교성(58)씨는 “집안 어르신들 말씀에 따르면 일제시대 때 상당히 큰 금광이 있었다.”며 “문등리와 이웃한 건솔리 등이 방산면 소재지보다 몇 배는 더 번성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의아하다. 이목교에서 두타연에 이르는 길 어디에도 옛 영화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지역은 6·25전 당시 격전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최근 개봉됐던 영화 ‘고지전’의 모티프가 된 ‘피의 능선’이나 ‘백석산 전적지’ 등이 모두 인근에 있다. 그런데 아무리 격전이 펼쳐졌다 한들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번성했던 마을들이 통째로 사라질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세상 집착 하얀 거품 물살에 버리고… 숲길을 대표하는 풍경의 주인은 두타연이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만든 3단폭포와 그 밑의 널찍한 물웅덩이를 일컫는다. 오래전 주민들은 드렛소(드래소) 또는 용소라 불렀다. 이곳의 예전 지명인 건솔리 드렛골에서 따온 이름이다. 현재 이름은 소 위쪽에 있었던 절집 두타사에서 비롯됐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어(범어)를 음역한 말로,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윤씨는 “예전엔 속초 쪽 상인들이 해산물을 지고 와 드렛골에서 쌀 등 뭍의 산물들과 바꿔 가곤 했다.”며 “문등리 못지않게 번화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20m 높이의 두타연 암벽 위에 세워진 전망대에 서면 우렁찬 물소리와 함께 한반도 모양으로 돌아가는 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남과 북을 자연스럽게 잇는 물길이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던 물줄기는 암벽에 막혀 이리저리 용틀임하다 10m 아래 검푸른 웅덩이로 쏟아져 내려간다. 웅덩이 둘레가 족히 50m는 넘어 보인다. 두타연 물은 열목어의 국내 최대 서식지답게 맑고 차다. 냉수성 토종 어종인 금강모치, 쉬리, 꺽지, 버들치 등도 이 물길의 주인들이다. 물고기들은 북에서 흘러온 물줄기를 따라 오가며 살을 찌운다. 맞은편 암벽엔 커다란 동굴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다. 보덕굴이다. 입구 지름이 10여m, 길이는 20m쯤 된다. 양구군청 자료는 ‘신라 헌강왕 때 금강산 장안사의 고승이 꿈에 남쪽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두타연 보덕굴에 들어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뒤 이곳에 두타사라는 절을 창건했다.’고 적고 있다. 두타연 주변엔 생태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총 3㎞쯤 된다. 탐방로는 대부분 흙길이다. 부분적으로 나무판자를 깔아 편안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참나무류와 당단풍 등 활엽수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간혹 키다리 소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탐방로 좌우엔 철조망이 이어진다. 철조망 군데군데에 녹슨 철모와 포탄 탄피, 지뢰 등을 모아뒀다. 일종의 설치미술인데, 탐방로 조성 당시 실제 출토된 것들을 재료로 삼았다. 산책로를 이탈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만큼 아찔한 산책길인 셈이다. 탐방로에서 위로 4㎞ 더 가면 하야교 건너 왼쪽 취수장 옆으로 ‘금강산 가는 길’이 나온다. 예서 30㎞쯤 더 가면 내금강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다. 발걸음은 멈춰 섰지만 시선은 그 너머를 넘나든다. 두타연을 탐방하려면 하루 전 낮 12시까지 양구군 문화관광사이트(www.ygtour.kr) ‘두타연 관광출입신청’란에 신청하면 된다. 하루 2회 오전 10시, 오후 2시 읍내 명품관(관광안내소) 앞에서 모여 문화해설사와 함께 각자의 차량으로 출발한다.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월요일은 쉰다.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양구군청 경제관광과 관광지운영계 (033)480-2251. ●놓쳐선 안 될 쏠쏠한 볼거리들 민통선을 벗어난 수입천 물길은 서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다 상무룡리에서 파로호로 흘러든다. 물길은 산간 마을을 돌아나오며 곳곳에 볼거리를 만들어 뒀다. 첫손에 꼽히는 게 직연폭포(직소폭포)다. 방산자기박물관에 차를 대고 물가로 내려가면 검푸른 소와 거센 물살의 폭포를 만날 수 있다. 국토 정중앙점을 찾는 것도 좋겠다. 류호영 양구군청 재정운영과장은 “우리나라 동서남북의 끝을 기준으로 경도와 위도의 중앙을 교차시키면 국토의 정중앙에 해당되는 지역이 나온다.”며 “그곳이 양구군 남면 도촌리 산 48번지”라고 설명했다. 국토 정중앙점에는 상징조형물인 ‘휘모리’를 세워뒀다. 읍내에선 한반도 섬이 볼 만하다. 양구읍을 가로지르는 서천과 파로호가 만나는 습지에 우리나라 모양으로 조성한 인공 섬이다. 한반도 섬을 중심으로 서천 양쪽이 연결돼 있어 산책 삼아 걷기 좋다. 한반도 형태를 제대로 조망하자면 주변의 산에 올라야 한다. 가장 좋은 곳은 사명산 활공장. 차를 타고 쉽게 오를 수 있다. 월명리 쪽 비봉산에 전망대도 만들어뒀다. 글 사진 양구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서울~춘천 고속도로가 가장 빠르다. 춘천나들목에서 46번 국도로 바꿔 타고 계속 직진하면 양구로 이어진다. 양구군 관광안내소 480-2675. ▲잘 곳 KCP호텔(482-7700)은 양구 유일의 호텔이다. 하리에 있다. 읍내에선 센츄럴모텔(481-2121)이 깔끔한 편. 숲에서 묵고 싶다면 남면의 광치자연휴양림(482-3115)이 좋다. ▲맛집 광치막국수(481-4095)는 막국수와 돼지고기 편육을 잘한다. 방산자기박물관 인근 청수골(481-1094)은 산채비빔밥이 맛있는 집. 읍내 동문식당(481-1057)은 값싸고 영양가 높은 콩탕으로 이름났다. ‘특산’ 강된장을 얹어 먹는데, 참 별미다.
  • 영화 같은 한밤 도심 차량 추격전, 총격전으로 막내려

     한밤중 경기도 성남 도심에서 훔친 차량을 몰던 20대 남성이 경찰의 정차 지시를 무시하고 달아나다 실탄까지 발사한 경찰에 붙잡혔다. 성남 중원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28일 오후 8시 25분쯤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남한산성유원지 입구 근처에서 이모(27)씨가 도난 신고된 그랜저 승용차를 몰고 가다 순찰 중이던 경찰 차량조회에 적발됐으나 그대로 도주했다. 20분 넘게 도주하던 이씨는 단대동 단대오거리 부근에 이르러 교통체증에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자 인도 쪽으로 차를 몰아 60대 할머니와 손녀를 들이받았다. 이런 상황에도 이씨는 멈추지 않고 뒤따르던 경찰차를 피해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계속 달렸다.  시민들의 피해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경찰은 하늘을 향해 공포탄 1발을, 이씨 차량 앞바퀴와 뒷바퀴를 향해 각각 실탄 1발씩을 발사했다. 그래도 이씨가 차를 멈추지 않자 경찰은 운전석 문을 향해 다시 실탄 1발을 발사했고, 문을 뚫고 나간 실탄은 이씨의 오른쪽 종아리에 명중했다.  이씨는 상대원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차를 버리고, 단지 안 테니스장 근처에 숨어 있다가 오후 8시 45분쯤 경찰에 붙잡혔다. 이씨와 피해자 모두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사기 혐의로 수배 중인 이씨가 차를 훔쳤다고 진술했다.”며 정확한 경위와 도난 차량을 이용해 다른 범행을 저질렀는지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조현오 경찰청장은 “일부 단체나 개인이 반대한다고 해서 경찰이 당연히 수행할 임무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발언했다. 경찰의 ‘총기 적극 사용방침’을 강행하겠다고 시사한 후 첫 실탄 사용이다.  한편 이날 저녁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단대오거리에서 조직폭력배들끼리 총격전을 벌였다는 등 근거 없는 소문들이 퍼졌지만 경찰이 역시 SNS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성민수PD globalsms@seoul.co.kr
  • [지금&여기] 조급증 그 결과는?/박승기 정책뉴스부 기자

    [지금&여기] 조급증 그 결과는?/박승기 정책뉴스부 기자

    도로에서 신호 대기 중인 자동차의 운전자를 보면 마치 자동차 경주에 출전, 0.1초라도 먼저 출발하기 위해 전방을 응시하는 레이서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야간에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하다. 신호위반에, 옆차에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하듯 대기 중에도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굉음을 낸다. 슬금슬금 앞으로 나가는 차량도 많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늦게 출발했다간 뒤따르는 경적 포탄을 맞기 십상이다. 출발하면 급차선 변경에 끼어들기까지 ‘1등’이라는 가치 없는 만족(?)을 위한 과정치고는 위험천만하다. 그 소란을 떨며 질주한 차량을 다음 신호에서 만나게 되면 나오는 건 코웃음뿐이다. 일상생활 곳곳에서도 이 같은 조급증을 흔히 접할 수 있다. 조급증을 관심과 준비성, 부지런함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병폐가 되고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고속열차(KTX)의 안전성 논란은 우리 사회, 국민의 조급증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갖게 한다. 코레일과 로템이 차량에 대해 위기감을 갖고 대책 마련에 나서게 한 것은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두 기업이 초기 문제 제기 시 안전에 대한 조급증을 발동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스마트폰 보급 및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구축되고, 국민의 조급증이 더해지면서 작은 고장이나 지연 상황이 가감 없이 노출됐다. 이로 인해 국민 불안감은 커졌고, 한국의 대표상품으로까지 불리던 ‘고속철도’의 위상은 말이 아니게 됐다. 그러나 위험한(?) 고속철도 이용객은 줄지 않고 있다. ‘300㎞’에 익숙해진 또 다른 조급증이다. 안전은 관심이 아무리 지나쳐도 과하지 않다. 사고 예방을 위한 관심은 당연한 권리다. 차량의 고장 원인이 밝혀졌고 대책이 발표된 만큼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하다. 철도가 제대로 개선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 수많은 철도인이 여름 휴가까지 반납한 채 현장을 지키고 있다. 기계는 언제든지 고장이 날 수 있고, 위험을 감추거나 은폐할 수도 없다.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 skpark@seoul.co.kr
  • 軍, 北 NLL 포격 때 ‘先조치 後보고’ 지키지 않았다

    북한군이 지난 10일 서해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에 해상으로 포격했을 때 우리 군의 대응이 허술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난해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강조됐던 ‘선(先)조치, 후(後)보고’ 방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보고·지휘 라인에도 혼선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18일 국회 국방위 소속 민주당 신학용 의원이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제출받은 사건 당시 일지에 따르면 지난 10일 오후 1시쯤 북한군이 쏜 포탄 3발 중 2발은 NLL 인근 북측 해역에, 1발은 NLL을 넘어 0.6㎞ 거리의 남쪽 해역에 떨어졌다. 군은 폭음 청취 후 11분 뒤에 착탄 지점을 확인했고, 포격 1시간 2분 만인 당일 오후 2시 2분에야 NLL 선상에 K9자주포 3발을 발사했다. 군은 1시간여의 공백 동안 북한군의 의도를 분석하는 한편 서북도서방위사령부(서방사)와 연평부대, 제2함대사령부, 합참을 화상회의 시스템으로 연결해 대응 방안을 논의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또 연평도에서 2㎞ 밖 해상에 대한 평시 작전 담당인 제2함대사령부는 ‘3배 대응’ 원칙에 따라 모두 10발을 사격하도록 연평부대에 지시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이후 합참과의 화상회의 후에야 NLL을 넘은 포탄 1발에 대해서만 포격 이후 3발의 대응 사격을 하기로 결정됐다. 이와 관련,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사격훈련으로 보고 어떻게 대응할지 토의한 만큼 1시간이 걸린 건 문제가 없으며, 우리 측 피해가 없는 만큼 ‘선조치 후보고’ 제외는 맞다.”고 밝혔다. 또 “이번 포격은 훈련을 가장한 새로운 형태의 도발로, 아군의 대응 능력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김 장관은 이어 “서북 도서 및 해안 2㎞ 이내를 기준으로 하는 거리 개념은 상징적일 수 있어서 혼선이 없도록 (서방사와 2함대사의) 책임 지역 범위를 구역 개념으로 묶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에 대한 북한의 암살조가 국내에 잠입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다. 추측성 보도다.”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발파작업 오인” 또 안쐈다 억지

    “발파작업 오인” 또 안쐈다 억지

    군은 지난 10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의 포격과 관련, ‘발파 작업을 오인한 것’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탐지 장비로 확인했기 때문에 포격이 확실하다는 게 우리 군의 확고한 입장이다.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11일 “당시 폭음이 북한 용매도 인근에서 들렸다는 초병의 보고가 있었고, 탐지장비로 낙탄지점을 확인했다.”면서 “두 차례 사격으로 발사된 5발 가운데 3발은 용매도와 가까운 NLL 북쪽에, 2발은 NLL 인근 해상에 떨어진 것을 정확히 확인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앞서 남북 군사실무회담 북측 단장과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인터뷰 형식을 빌려 “10일 서해 5개 섬과 가까이 하고 있는 황해남도 일대에서 인민생활 향상을 목표로 대상물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이에 따른 정상적인 발파작업이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또 오전 8시 40분쯤 이 단장 명의의 전통문을 우리에게 보내 우리 군의 대응 사격을 문제 삼으며 “대화 분위기를 파괴하고 악화된 남북관계를 유지하려는 남측의 고의적인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명의로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중지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이번 사건을 날조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북한의 전통문은 상투적인 억지 주장이어서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군은 전날 용매도 인근에서 폭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지난달부터 서북도서방위사령부에 배치된 최신 음향 표적 탐지장비 ‘할로’(HALO)를 통해 포탄의 탄착지점 등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할로는 포 사격 때 발생되는 폭음 등을 추적해 탄착 및 발사지점을 분석해내는 장비다. 군 관계자는 “1·2차 포격 때 음향 표적 탐지장비를 통해 포탄의 궤적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과 미국 정부는 10일(현지시간) 이번 북한의 연평도 포 사격의 의미를 축소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워싱턴에서 미국 당국자들과 만난 뒤 기자들에게 “이번 포 사격은 선박이나 영토에 대한 포격과 같은 충돌이 아니기 때문에 천안함 공격 같은 차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한·미 간에 큰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인명 피해나 물질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안보상 중요한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얘기”라고 부연했다.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에서 “남북 간 포 사격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는 바람직한 일”이라면서 “이번 사태가 종료된 만큼 이제는 현안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북한에 우려를 표시해 왔고, 계속 자제를 촉구할 것”이라면서 “우리의 메시지는 북한이 한국에 손을 내밀고 대화 진전을 위한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서울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北 해안포 3발 또 쐈다”…軍 대응사격

    “北 해안포 3발 또 쐈다”…軍 대응사격

    북한군이 10일 낮과 밤 두 차례에 걸쳐 연평도 동북쪽 인근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역으로 포 사격을 해와 우리군이 대응사격을 했다고 군이 밝혔다. 북한군의 해안포 사격은 오후 1시와 오후 7시 46분쯤 NLL 인근 해역을 목표로 이뤄졌다. 합동참모본부는 “오늘 오후 1시 북한 용매도 남쪽에서 북한군의 해안포 사격으로 추정되는 3발의 폭음이 들렸고, 그중 1발이 NLL 인근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돼 오후 2시쯤 K9 자주포 3발을 NLL선상으로 대응사격했다.”고 말했다. 합참은 또 북한의 2차 포 사격과 관련, “오후 7시 46분쯤 북측에서 해안포 사격으로 추정되는 두 차례 폭음이 들려 확인한 결과, 해안포 포탄 한 발이 1차 사격 때 탄착점보다 서쪽으로 1㎞ 이동한 NLL 인근 해상으로 떨어진 것으로 밝혀져 오후 8시 2분쯤 같은 지점으로 K9 자주포 3발을 대응 사격했다.”고 밝혔다. 북한군은 꼭 1년 전인 지난해 8월 9일 두 차례로 나눠 백령도와 대청도, 연평도 사이 NLL 인근 해상에 해안포 130여발을 쏘아, 이 가운데 10여발이 NLL 남쪽 해상으로 넘어왔다. 우리군은 북한군의 두 차례 사격 직후 신형 대포병탐지레이더 아서(Arthur-K)와 기존의 대포병레이더(AN/TPQ37)를 이용해 발사 지점과 탄착점을 추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1차 사격 때 발사된 3발 가운데 1발, 2차 때 2발 가운데 1발이 NLL선상에 떨어진 것으로 분석됐다. 발사 지점은 북한 황해도 연안군 해안포 기지로 추정됐다. 군 관계자는 “1·2차 포격 때 용매도 남쪽 해안을 넘은 포탄들이 NLL을 넘었는지는 기상악화로 인한 시계 불량으로 정확히 식별하기 어려웠다.”면서도 “NLL 남쪽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탐지장비의) 오차 범위 내여서 단정할 순 없다.”고 말했다. 합참 정진섭(해군 준장) 작전2처장은 “연평도나 함정 근처에 포탄이 떨어졌다면 즉시 조치를 취했겠지만, NLL 해상에 떨어져 탄착점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동시에 북한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했다.”고 밝혔다. 한편 군은 연평도 주민에게 대피 안내방송을 했으며, 조업 중인 어선 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대응태세 떠보기·UFG 견제 등 다목적 포석

    10일 북한군의 두 차례에 걸친 서해 연평도 동북쪽 북방한계선(NLL) 포격은 한·미·북 간 식량지원 협의와 유해 발굴을 위한 협의 속에서 이뤄져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군 당국은 오후 1시와 오후 7시 46분 두 차례에 걸친 북한군의 포사격은 확인해 주었지만, NLL 남쪽을 정밀 겨냥했는지에 대해선 기상 조건 등을 이유로 명확한 분석을 보류했다. 다만 NLL 남쪽 해상을 넘긴 포격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진 않았다. 합참 관계자는 공식 브리핑을 통해 “1차 포격 때 3발 가운데 1발, 2차 포격 때 1발이 NLL선상에 떨어졌다.”면서도 “정확한 탄착점이 NLL 남쪽일 가능성이 높지만 기상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단정할 순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 황해도 연안군 해안지역에 위치한 해안포 부대에서 포탄을 NLL선상 인근에 쏜 사실 자체가 북한군 지휘부의 사전 승인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군과 정보당국의 분석이다. 특히 1차 사격 이후 우리 군의 대응 사격에 다시 맞대응하는 식의 2차 사격은 북한군 내부에서도 상부 지휘부의 지시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이에 대해 군 안팎에서는 우선 북측이 지난 6월 창설한 서북도서방위사령부의 대응태세를 떠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포격 도발을 감행했을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11월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후속조치로 창설된 서북도서방위사령부의 출범 때까지 10개월 동안 북한군의 도발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후계자인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지난달 해군사령부를 시찰한 것도 이번 사격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최근 남북 간 6자 회담 재개 분위기와 북·미 간 대화 모색 기류 속에서 존재감이 약화되고 있는 북한 군부의 독자적인 도발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난해 130여발의 포탄을 NLL 인근에 쏟아부은 것과 달리 서해부대 해안포 사격 훈련 기간을 빌미로 단지 3발만 NLL선상을 타격한 게 ‘실수를 위장한 위협’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와 별개로 오는 16일부터 실시되는 한·미 연합사령부의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에 대한 경고 차원의 포격도발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북측은 매년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경계하며 ‘상응한 군사적 조치’를 공공연히 밝혀 왔다. 군과 정보당국 계통에선 이번 포격 사건이 북·미 간 직접 대화를 앞둔 위협용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군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 비춰 북한의 도발 수위가 미온적이긴 하지만 그 시기나 전술 측면에서 나름대로 철저히 계산한 흔적이 있다.”면서 “내부적으로 결속을 다지는 한편 국제적인 협상과정에서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해 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분쟁은 가라앉고 화해는 떠오르다

    분쟁은 가라앉고 화해는 떠오르다

    인천시 해안동에 자리잡은 인천아트플랫폼은 풍경이 특이하다. 한쪽으로는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 화려한 중국집이 여럿 보인다. 그 반대편이나 뒤쪽으로는 적산가옥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있다. 옛 일본풍 집들이다. 이승미 인천아트플랫폼 관장은 “개항 때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가 맞붙어 있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니 옛 일본과 중국 풍경이 고스란히 겹친다. 전시장 건물도 부둣가에 늘어선 창고들을 재활용했다. 옛 조선소를 활용한 베네치아비엔날레(이탈리아) 전시장 아스날레와 닮았다. ●새달 28일까지… 국내외 예술가 60여명 참여 이곳에서 다음 달 28일까지 제1회 인천평화미술프로젝트 ‘분쟁의 바다, 화해의 바다’전이 열린다. 전함이 침몰하고, 해전이 벌어지고, 포탄이 날아드는 곳에 인접한 위치에 걸맞은 주제다. 인천지역 작가뿐 아니라 국내외 예술가 60여명을 3월에서 5월까지 백령도, 대청도, 연평도 등 서해 5도를 답사토록 한 뒤 그 느낌을 작품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이 관장은 “인천하면 자꾸 서울에 묶인 수도권이라 생각하는데, 인천은 서해 5도를 비롯해 바다를 끼고 있다는 점을 우리 스스로 깨우친다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설치작가 차기율은 ‘순환의 여행 화해’를 선보인다. 검은 삼각대 위에 이승만, 맥아더, 마오쩌둥, 마르크스, 스탈린 등 격동의 한국사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상들을 배치했다. 앞에는 서해 5도 섬을 상징하는 돌들을 놔뒀다. 카론(죽은 자를 저승으로 건네준다는 그리스신화 속의 뱃사공)의 배만이 건너갈 수 있을 법한 음울함이 있는 반면, 바다는 그렇게 이 역사를 껴안고 있다는 비장함도 느껴진다. 스피커 수천개를 함께 배치해 둔 한원석 작가의 설치작품 ‘화해’도 마찬가지다.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는 서해 5도 주민들의 육성인데, 그 수많은 입들이 풀어내는 얘기들이 구성지다. ●현빈·北 김정은이 해변에서 마주친다면? 이명복 작가의 ‘두 남자’는 웃음을 자아낸다.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 화제를 모았던 배우 현빈과 북한 권력자의 아들 김정은을 나란히 붙여놨는데 인물의 특성을 콕 찍어 잘 끌어냈다. 이 작가는 “두 사람이 해변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면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어 봤다.”고 말했다. ‘붉은 산수’로 유명한 이세현 작가도 ‘비트윈 레드’(Between Red) 시리즈를 내놨다. 남북한 사이에 놓인 서해 5도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겹쳐 보여주면서 우리 마음 속의 긴장감과 두려움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해외 작가 가운데는 중국 허원주에의 ‘물’이 눈에 띈다. 짙은 코발트 블루 바닷속을 유영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모든 것을 넉넉히 받아주는 바다, 그 바다에 비하자면 한없이 작은 인간이 함께 있는 풍경이 평화가 아니겠느냐는 얘기로 들린다. 서해 5도 얘기에서 심청도 빠질 수 없다.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는 백령도 부근으로 추정된다. 심청을 주제로 한 홍지윤 작가의 ‘푸른 심장’ 등 화려한 꽃문양을 내세운 작품들도 눈을 사로잡는다. (032)455-7135. 인천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정 이병 “성경 태우고 전투복에 불… 가혹 행위 당했다”

    정 이병 “성경 태우고 전투복에 불… 가혹 행위 당했다”

    해병2사단 총기사건 수사본부는 7일 해병대 총기 사건의 공모 혐의로 전날 긴급체포한 정모(20) 이병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총격으로 병사들을 살해한 김모(19) 상병은 수류탄에 의한 파편상이 심해 대전 국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수사를 받고 있다. 수사본부는 이번 사건이 소속부대원과 무기, 부대 내 관리가 허술해 발생한 총체적 문제로 잠정 결론냈다. 부대 내 가혹행위와 부대관리가 허술했던 점 등에 대한 조사도 강도 높게 진행 중이다. ●가혹행위·총기관리 허술 고강도 조사 수사본부 관계자는 브리핑을 통해 “김 상병과 정 이병이 지난 6월 초순께 ‘힘들다. 휴가 때(7월 말) 사고 치고 도망가자’는 내용의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사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번 사건의 실질적인 범행 모의는 사건 발생 당일인 4일 오전 이뤄진 것으로 두 사람의 발언이 일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상병은 사고 당일 오전 7시 30분께 창고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신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김 상병은 정 이병을 창고로 불러내 함께 범행을 모의했다. 김 상병이 “○○○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자 정 이병은 처음엔 “그러지 마십시오.”라고 말렸지만, 잠시 후 “소초원들 다 죽이고 탈영하자.”고 제안했다. 자신 역시 평소 괴롭힘과 무시당한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금 죽이자.”면서 함께 창고 밖으로 나왔다. 당초 고가초소의 경계 근무자로부터 총기를 탈취하려 했지만 실패 가능성이 크자 상황실로 향했다. 김 상병은 오전 11시 20∼35분께 K모 일병의 K2소총과 탄약(실탄 75발, 공포탄 2발, 수류탄 1발)을 훔쳤다. 초기 조사과정에서 발표된 탈취 시간 ‘오전 10시∼10시 20분’은 김 상병과 정 이병의 진술 없이 다른 병사들의 진술에 의존해 추정한 것이라고 조사본부 측은 설명했다. 당시 상황실 근무자는 3명이었지만 2명은 자리를 이탈해 있었다. 생활관 복도에 있던 총기 보관함은 근무자 교대를 위해 열려 있었다. 관행대로였다. 실탄이 들어 있는 탄통은 간이탄약고 안이 아닌 위에 놓여 있었다. 역시 근무자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수사본부는 판단하고 있다. 당직병인 슈미트(관측장비의 일종) 운용병은 김 상병의 절취 상황을 알아채지 못했다. 김 상병은 정 이병에게 수류탄 1발을 주고 고가초소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정 이병은 고가초소 근처까지 갔지만 총성을 듣고는 두려움에 돌아왔다. 공중전화 부스 부근에서 김 상병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 이승렬 상병을 발견하고는 고가초소 근무자에게 이를 알려준 뒤 계속 피해 다녔다. 정 이병과 만나 그가 수류탄을 터트리지 못한 것을 안 김 상병은 “너랑 나랑 같이 죽자.”면서 안전핀을 뽑았다. 하지만 정 이병은 순간적으로 문을 열고 달아났다. 정 이병은 현재까지 “김 상병과 대화를 나누고 수류탄을 받아 들었지만 실제 범행을 실행할 것에 대해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범행을 제의한 정 이병은 그동안 자신이 당한 가혹행위에 대해 진술했다. ●김 상병, 소주 한 병 마시고 범행 수사본부의 조사에서 정 이병은 “김모 병장이 병장은 하나님과 동급”이라면서 “성경책을 읽지 말라고 압박하고 성경책에 불을 붙였다.”고 밝혔다. 또 “성기를 태워버리겠다.”면서 전투복 지퍼에 살충제를 뿌린 후 불을 붙이는 가혹행위를 했다고 진술했다. 정 이병이 당한 가혹행위에 대한 진술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또 다른 김모 상병은 이유 없이 정 이병을 상황실에 3시간 정도 앉혀 놓고 자극적인 연고를 목과 얼굴에 바르고 씻지 못하게 했다. 신모 상병은 자신이 몇 번째로 좋아하는 선임이냐를 묻고 이모 상병을 좋아한다고 답한 정 이병을 폭행했다. 조사본부는 이어 김 상병에 대한 2차 조사에서 “처음에 기수열외와 구타, 왕따가 없어져야 한다고 답한 것은 조만간 자신이 기수열외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후임병들에게 무시당하는 등 기수열외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란 것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그날 몸을 던져서라도 나도 함께 데려가라고 매달렸어야 하는 건데…. 내무서 앞에 끌려나온 남편 모습을 보니 정신이 핑 돌면서 가슴이 울렁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 24일 서울 청량리동에서 만난 김항태(83) 할머니는 말문을 열자마자 흐느꼈다. 주름이 조글조글한 손으로 가슴팍을 연신 내리쳤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듯 보였다. “그때 내가 임신 1개월째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 남편은 우리 딸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갔으니…. 딸은 남편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야.” 결혼 1년 5개월 만에 스물두 살의 새댁은 남편을 북으로 떠나보냈다. 할머니의 남편 김재봉(91) 할아버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말 강화군 교동도의 신혼집에서 인민군과 마을 좌익 청년들에게 잡혀 북한 황해도로 끌려갔다.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전쟁통에 홀로 낳은 딸이 올해로 환갑이 됐다. 4년 전부터 할머니를 괴롭히는 고관절 디스크의 고통은 가슴을 까맣게 태운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그냥 끊어지는 전화가 오면 남편이 나를 찾아 전화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런 전화가 올 때면 가슴이 떨려.” 북녘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올해로 아흔 살이 넘었을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할머니는 아직 체념하지 않았다. ●서울 수복 직후 남편과 생이별 할머니는 남편과 헤어진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충격으로 날짜 감각을 잊은 채 멍하니 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할머니는 국군이 서울을 되찾은 지 며칠 뒤라고 기억했다(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도 되찾아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북으로 간 남편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쾅, 쾅쾅’ 그날 새벽녘 귓전을 울리는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북한군이 다시 내려온 건 아닐까….’ 정신을 차려 보니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집 대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미처 몸을 숨길 새도 없이 거센 발길질에 대문이 부서졌다. 십수명의 정체 모를 청년들이 들이닥치자 무서움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들은 내무서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반동 세력이니 내무서로 함께 가야겠다.’면서 다짜고짜 남편의 팔을 붙들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남편의 가슴팍에 내무서원은 기다란 총부리를 들이댔다. 남편은 그렇게 내무서로 끌려갔다.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희뿌옇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내무서 앞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포승줄에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다른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매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방안 끝에서 끝을 가리키며) “그때 남편이랑 같이 붙들려 간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될 거야. 두 줄로 섰으니 한 스무명 정도…. 맘에 안 드는 사람들은 죄 끌고 간 거지.” 내무서원들은 남편과 청년들을 교동도 항구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울먹이며 남편의 뒤를 따라갔지만 함께 배에 오를 수는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그 순간이 진짜로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편이 탄 배는 건너편 황해도 연백군이 바라다보이는 교동도 항구를 떠났다. 배를 타고 30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를 건너가는 남편의 뒷모습,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김 할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소식은 남편이 끌려간 지 이틀 만에 보낸 작은 쪽지 한 장이었다. 함께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면 서기와 이웃 청년 2명이 풀려 나오면서 전해준 것이었다. 손바닥 반만 한 작은 종이엔 ‘내 걱정하지 마세요. 배 타고 건너와 잘 있습니다. 당신의 남편 김재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단정하게 또박또박 적힌 이 세 문장이 60년이 넘도록 김 할머니 가슴에 박혀 있다. 조심스레 쪽지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작은 종이 쪼가리, 귀퉁이가 다 닳도록 만지고 보면서 35년을 간직했는데, 80년대 중반에 이사하다 모두 태워버렸어. 그때는 ‘어차피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인데 갖고 있은들 뭐하나’ 이런 심정이었지.” ●쪽지 35년 간직하다가 불 태워 할머니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남편 김 할아버지는 서울농고를 졸업하고 교동도 금융조합(현재의 농협) 서기로 입사한, 똑똑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사랑방에 둘러앉아 시국 토론도 하는 열혈 청년이었다. 전쟁 전에는 뜻 맞는 마을 청년들과 청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념 대립이 팽팽하던 전쟁 직전, 남편은 좌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공산당이 득세한 교동도에서 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원 가입도 거부했다. 할머니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동네 빨갱이들이 명부를 들고 다니면서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는데 그게 공산당 가입 명부였다.”면서 “교동도에는 빨갱이들이 많았는데, 그게 다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공산당에 넘어갔던 탓”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자상함은 한도 없었다. “이 양반은 이렇게 내 가슴을 아프게 하려고 그랬는지 그렇게도 별났다. ‘김치도 맛있다, 빨래도 잘 넌다’ 하면서 항상 칭찬해줬다. 무거운 것도 하나 못 들게 했다. (주먹 쥔 손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탕탕 내리치면서) 그런 말을 바로 엊그제 한 것 같고, 아직도 생생한데….” 할머니는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남편이 북으로 간 뒤에도 김 할머니는 교동도를 떠나지 못했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농사일로는 커 가는 딸과 생활하기가 벅찼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딸에게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딸이 10살이 되던 1961년 서울로 왔다. 외삼촌이 살고 있던 답십리에 방을 구했다. 다른 환경에서도 남편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딸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이 조용해지면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남편과 함께 자식 기르는 재미로 살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벼락을 맞았으니…. 죽어야 잊지 그전엔 못 잊어.” 80년대 중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자 남편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납북자는 대상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납북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북에서 저렇게 뻗대니 어떻게 햐. 절대 용서가 안 돼.” 할머니는 남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을 저몄다. 인고의 세월은 끝이 없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방문 상봉이 합의되자 김 할머니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불편한 다리로 이북5도청에 마련된 이산가족 민원 창구를 찾았다. “교동도 지도를 가져가 여기서부터 저기로 내 남편이 끌려갔다고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내 절절한 심정을 이해나 해줄는지. 못 만나게 할 거면 살아 있는지 말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北서 납북자 인정 안 해줘 분통 “몇 년 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남편을 꼭 찾아주겠다며 걱정 말라는 서신도 보내왔는데 결국 허사였어. 내 남편은 납치돼 간 건데 정부에서 책임지고 찾아줘야 해.”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결기가 느껴졌다. “60년 동안 남편이 딱 한 번 내 꿈에 나온 적이 있어. 교동도 안방 아랫목에 앉아 내 이름을 부르기에 화들짝 놀라 깼는데 꿈이지 뭐야. 꿈인 걸 안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뒤로 꿈에도 한 번 안 나오니 야속한 사람이지. 내 마음에는 그 사람의 사랑이 불에 넣어도 안 탈 거 같고 물에 넣어도 안 떠내려갈 거 같고 그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가슴을 후비는 탓이리라. 김 할머니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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