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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 국민은행 한국바둑리그-14라운드 4경기 5국] 강동윤,이세돌과 도전기 2연승

    [KB 국민은행 한국바둑리그-14라운드 4경기 5국] 강동윤,이세돌과 도전기 2연승

    <하이라이트> 최근 이세돌 9단을 상대로 천원전과 명인전에서 결승전 10번 승부를 벌이고 있는 강동윤 8단이 먼저 2승을 따내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앞서 벌어진 천원전 결승1국을 승리로 장식했던 강동윤 8단은 1일 한국기원 바둑TV스튜디오에서 열린 명인전 결승1국에서도 백을 잡고 5집반승을 거두었다. 특히 이 바둑을 관전한 동료기사들은 초반의 불리함을 딛고 이세돌 9단의 빈틈을 낚아채 역전승을 거둔 강동윤 8단의 뒷심을 높이 평가했다.또한 강동윤 8단은 이날 승점을 보태며 이세돌 9단과의 상대전적에서도 4승5패로 바짝 따라붙었다. 백이 1로 찝은 수는 보통의 경우 금기시되는 행마지만 흑이 ‘가’로 끼우는 수를 선수로 예방하기 위한 고육지책.물론 흑2와 교환되어 상당한 손해지만 백3으로 공격을 하면서 대가를 찾겠다는 전략이다.이때 흑4,6으로 붙이고 젖힌 것이 백의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한 멋들어진 행마. 흑6 다음 언뜻 백에게는 <참고도1> 백1로 건너붙이는 수가 있어 흑이 차단되는 듯하지만,흑은 4까지 고분고분하게 응수한 다음 6으로 치고 나가는 수가 있다.계속해서 흑10까지 진행되면 흑이 A로 먹여쳐 백 석점을 잡는 수와 B로 끊는 수가 맞보기로 백이 곤란하다.따라서 백은 장면도에 이어 <참고도2> 백1로 뻗을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흑이 2로 붙인 수가 또 한번의 배워둘 만한 맥점으로 흑6까지 무사히 중앙탈출에 성공한 모습이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병자호란 다시읽기] (97) 가도의 동강진 무너지다

    [병자호란 다시읽기] (97) 가도의 동강진 무너지다

    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여러 가지를 얻었다. 우선 자신들을 끝까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조선을 굴복시킴으로써 대외적으로 ‘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다른 측면의 소득도 짭짤했다. 망해가고 있던 명에게 조선은 가장 충성스러운 번국(藩國)이었다. 그런데 청이 조선마저 제압함으로써 명은 이제 고립무원의 상황이 되고 말았다. 청은 또한 조선을 끌어들여 명을 공략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군사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지만, 수군과 화기수들은 만만치 않았다. 청은 조선 수군과 화기수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 첫 결과가 가도( 島)의 함락으로 나타났다. ●조선, 명 배신 위기에 처해 전세가 기울어 청에게 항복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을 때에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오는 것만은 피하려 했었다. 하지만 인조는 결국 출성하여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데 항복한 이후에도 인조나 조선 조정이 끝까지 피하려 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이 군사를 내어 청군을 원조하고, 명을 공격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1637년 2월3일, 용골대와 마부대는 창경궁으로 인조를 찾아왔다. 그들은 조선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가도 정벌에 협조하고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인조나 조정은 서슬퍼런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조선은 당장 황해도의 병선 100척과 수군 3000여명을 징발했다. 징발 과정에서 민폐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평안병사 유림(柳琳)을 주장으로,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을 부장으로 삼아 병력을 이끌고 철산 앞바다로 진격하도록 했다. 청군의 수군 지휘관은 이신 공유덕과 경중명이었다.1633년 명에서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두 사람은 청군 가운데는 드물게 바다와 해전을 아는 장수들이었다. 홍타이지의 두 사람에 대한 총애는 각별했다.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것에 감격하여 공유덕 휘하의 병력을 천우병(天佑兵), 경중명 휘하의 병력을 천조병(天助兵)이라 불렀다. 두 사람을 위해 심양에 거대한 저택도 새로 지어주었다.‘천우’,‘천조’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홍타이지에게 두 사람은 ‘하늘이 청을 돕기 위해 보내준 장수들’이었다. 바야흐로 천우군과 천조군을 본격적으로 활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홍타이지는 조선에서 철수하면서 두 사람을 조선에 남겨 수군 전력을 정비하도록 했다. 용산과 강화도 일대에서 함선을 새로 건조하거나 수선하고, 조선 수군의 협조를 얻어내는 임무를 맡겼다. 조선을 굴복시킨 여세를 몰아 가도의 동강진을 제거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1622년 모문룡이 처음 들어가 동강진을 설치한 이후 가도는 청의 서진(西進)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지척에서 빤히 바라보면서도 수군이 없고 해전에 익숙하지 못하여 발만 동동 굴렀던 지난 15년이었다. 그런데 이제 동강진을 쳐 없앨 절호의 기회가 왔다. 공유덕과 경중명의 역량은 물론, 해전에 뛰어난 조선 수군까지 동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홍타이지는 ‘가도 함락’이라는 승전보를 기대하면서 철수 길에 올랐다. 조선은 ‘오랑캐’에게 붙어 명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맞았다. ●明 도독 심세괴의 순국 청군은 가도를 곧바로 함락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사정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형이 험하여 전함의 접근이 어려운 데다 명군이 섬 주위에 화포를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가도에는 도독 심세괴(沈世魁)가 군민 5만여명을 이끌고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조·청 연합군은 1637년 4월9일, 철산 앞바다를 출발하여 총공격을 개시했다. 선단을 셋으로 나눠 상륙을 시도했지만 험한 지형과 명군의 사격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공략이 여의치 않자 청군 지휘관 마부대 등은 임경업 등에게 묘안이 있는지를 물었다. 애초부터 내키지 않는 싸움에 동참하게 된 임경업 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마부대 등은 회유와 협박을 반복했다. 임경업은 협박에 밀려 결국 묘안을 제시했다.‘지형이 험한 북쪽 해안을 버리고 남쪽 해안으로 우회하여 공격하자.’는 것이 핵심이었다. 마부대는 임경업의 계책에 따라 자신과 공유덕 등이 이끄는 청 수군을 남쪽으로 우회시켜 동강진을 배후에서 공격토록 하고, 조선군은 의연히 북쪽 해안에서 동강진의 정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당시 명군은 철산 등 육지를 마주보고 있는 북쪽 해안의 방어에 주력하여 남쪽 해안에는 병력을 거의 배치하지 않았다. 청군은 결국 별 어려움 없이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여 동강진의 배후를 기습했고, 그와 동시에 조선군이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남과 북에서 협공을 받은 명군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상태에서 심세괴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소달금(小達金)이라는 봉우리로 퇴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청군의 철기(鐵騎)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마부대는 소달금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는 한편, 섬 안에서 대대적인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청군에게 떠밀려 들어온 조선군은 고민에 빠졌다. 청군과 함께 살육과 약탈에 동참할 것인가? 아니면 옛정을 생각하여 시늉만 할 것인가? 조선군은 애초 섬에 도착했을 때, 배에서 내리는 것도 미적거렸었다. 그런데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조선군이 청군보다 더 심하게 한인들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했다고 적었다. 작전권이 청군 지휘부에게 있고 그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이상 조선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심세괴는 항복을 권유받았지만,‘대명(大明)의 신하가 개돼지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며 청군의 칼날 아래 쓰러졌다. 휘하 병력 1만명가량도 목숨을 잃었다. 조선군의 공격에 놀란 일부 한인들은 ‘명이 조선에 무슨 잘못이 있기에 우리를 배반하고 적에게 붙어 우리를 참혹하게 죽이느냐?’며 절규했다. 가도 함락 소식이 서울로 전해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한 시대의 종언 심세괴의 죽음과 함께 가도의 동강진은 결국 무너졌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명나라의 군진(軍鎭)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조선과 명, 그리고 후금이 뒤얽혀 있던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가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인조대 내내 가도는 ‘뜨거운 감자’였다. 모문룡을 비롯한 가도의 역대 지휘관들은 조선을 몹시 괴롭혔다. 수시로 군량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가도의 한인들은 무시로 청북 지역에 출몰하여 조선을 곤혹스럽게 했다. 정묘호란 이후에는 조선을 오가는 후금 사신들을 체포하려 드는가 하면,‘조선이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에게 붙었다.’고 북경 조정에 참소했던 것도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명을 ‘상국’이자 ‘부모국’으로 섬기던 조선은 싫은 내색 없이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고 편의를 봐주었다. 가도의 교란 작전과, 그것을 용인하는 조선의 태도에 후금은 격앙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데는 가도의 존재도 분명 한 몫을 했다. 그런데 가도가 붕괴되기까지의 과정은 철저하게 명이 자멸(自滅)해 가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애초 모문룡은 가도에 들어가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그저 말뿐이었다. 감시의 사각지대에 안주하면서 막대한 부를 챙기고, 안일에 빠져들었다. 자연히 후금(청)과 맞서겠다는 본래 목표는 실종되었다. 명 조정은 그것도 모르고 엄청난 군자금과 물자를 가도에 퍼부었다. 목표는 사라지고 부만 늘어나면서 자연히 파벌 다툼이 잦아졌고, 그 와중에 수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이제 가도는 청의 서진을 견제하는 거점은커녕,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날로 역량이 커진 청이 가도를 장악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가도의 붕괴는 조선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명의 분신’이자 ‘충성의 대상’이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가도에 상륙한 조선군이 살육과 약탈에 가담했던 것은 기존 조·명관계의 파탄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조선이 ‘새로운 상국’ 청에게 서서히 길들여져 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조계사 촛불’ 짐칸 도주

    조계사에서 장기 농성을 벌이다 잠적한 ‘촛불 수배자’들이 대낮에 차량을 이용해 경찰 포위망을 뚫었던 것으로 드러났다.4일 경찰과 조계사 등에 따르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박원석 공동상황실장 등 수배자 6명은 지난달 29일 낮 12시20분쯤 조계사 지하주차장에 서 있던 1t트럭 짐칸에 타고 조계사를 빠져 나갔다. 짐칸에는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넓은 합판이 설치돼 있었으며 합판 위에는 사과상자가 여러개 놓여 있어 경찰의 눈을 쉽게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전 2국] 바둑,온라인 전략게임으로 재탄생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전 2국] 바둑,온라인 전략게임으로 재탄생

    제8보(95~119) 바둑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온라인게임‘바투´가 전략게임시장에 출시된다. 11줄의 바둑판에서 진행되는 바투는 동시에 3개의 돌을 놓은‘베이스빌드´,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돌인 ‘히든´ 등 다양한 게임적 요소를 바둑의 전략성과 결합시켰다. 바둑TV의 모기업인 온미디어에서 개발한 바투는 2년여의 준비기간 동안 수백 명의 한·중 프로기사들과 보드게임전문가들이 테스트에 참여했다. 바투는 11월 오픈 서비스에 맞추어 조훈현 9단, 이세돌 9단 등 유명 프로기사 8명이 참여하는 바투인터내셔널을 개최하며,2009년 초부터 총상금 30억원 규모의 바투월드챔피언십을 개최할 예정이다. 흑95,97은 모양은 다소 사납지만 흑대마의 삶을 확인하며 백모양에 단점을 만들어 두려는 의도. 덕분에 흑99로 끊는 수가 선수로 듣고 있어 백의 포위망이 상당히 엷어졌다. 백110으로 들여다본 다음 백112로 씌운 것이 상당한 강수. 흑대마를 쉽게 살려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두터움에서 약간 앞서고 있는 백으로서는 <참고도1> 백1로 잇고 흑에게 백 석점을 내주더라도 충분한 형세지만, 여기서 흑의 추격을 완전히 따돌리고자 강공책을 선택한 것이다. 흑이 113으로 찌른 후 흑117까지는 필연의 진행. 김기용 4단은 백118로 이은 다음 <참고도2> 백A로 들여다보는 수와 B로 잇는 수가 맞보기로 흑이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전 흑119가 백의 의표를 찌른 호착으로 이제는 거꾸로 백의 응수가 궁해졌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女談餘談] KBS,그리고 어떤 화해/ 강아연 문화부 기자

    [女談餘談] KBS,그리고 어떤 화해/ 강아연 문화부 기자

    그곳을 다녀온 날이면 어김없이 심장이 벌렁거렸다. 마치 하드고어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이라도 한 것처럼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지난 8일 KBS에 18년 만에 공권력이 투입되던 날도 그랬다. 이사회 예정시간보다 1시간 전인 오전 9시쯤 KBS 본관에 당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의장 주변엔 청원경찰과 사원 몇 명만이 있을 뿐, 조용했다. 나는 취재 구상을 하며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그때 비상구 쪽에서 갑자기 “다다닥!”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KBS 사원들이 청원경찰의 봉쇄망을 뚫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 내 쪽을 향해 길게 뻗은 한 사원의 손.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한 무리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철문을 경계로 밀고 당기는 한판의 난장(亂場)이 벌어지고 나서야, 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봤자, 기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오가는 고성을 수첩에 받아적는 일 뿐.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향해 뻗어진 그 손은 두고두고 잊혀지지가 않았다.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 일은 또 있다.27일 KBS가 새 수장을 맞던 날. 사원들의 환호가 아닌 청원경찰의 호위 속에 첫 출근을 치른 그분의 심경도 말이 아니었겠지만, 취임식 내내 제 직장에 들어설 수도 없이 셔터문과 경찰들 사이에 갇혀 있어야 했던 사원들의 기분도 엉망이었을 테다. 덩달아 기자들도 죽을 맛이었다. 무기만 안 들었지,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은 그대로 전쟁의 축소판이었다. 하지만 취임식이 끝나고 포위망이 풀렸을 때, 한 사원과 청원경찰이 나누는 대화는 내 귀를 의심케 했다.“우리 매번 부딪치네요.”“그러게요.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으니, 이해하세요.”“저도요. 미안합니다.” 좀 전까지 험악하게 멱살을 잡았던 이들의 화해 치곤 심하게 ‘쿨’했다. 아니 눈물이 났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정작 원인 제공자들은 이런 비애를 코끝으로나 느끼고 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강아연 문화부 기자 arete@seoul.co.kr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전 1국] 도요타 덴소배,한·중전 완패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전 1국] 도요타 덴소배,한·중전 완패

    제2보(13∼23) 25일 도쿄 일본기원에서 열린 도요타 덴소배 16강전에서 한국은 32강전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이세돌 9단, 조한승 9단, 목진석 9단 등 3명만이 8강에 올랐다. 이창호 9단이 박문요 5단에게 불계패당한 것을 비롯해 한국은 4차례의 한·중 맞대결에서 모두 패하는 부진을 보였다. 중국은 한국전의 완승으로 한층 기세가 오른 가운데 16강에 오른 4명의 기사가 그대로 8강에 진입했다. 반면 일본은 장쉬 9단이 러시아의 샤샤 3단을 꺾으며 간신히 전원 탈락의 수모를 모면했다. 8강전에서는 이세돌 9단과 셰허 7단, 조한승 9단과 구리 9단, 목진석 9단과 박문요 5단, 장쉬 9단과 류싱 7단이 각각 맞붙는다. 흑이 좌하귀를 직접 움직이지 않고 먼저 흑13과 같이 우하귀를 굳힌 것이 최근 들어 유행하는 수법. 백으로서도 흑이 손을 뺀 만큼 14로 협공한 것은 당연한 돌의 흐름이다. 백20은 언뜻 발이 느린 수처럼 보이지만 자체로 한수의 가치가 충분한 곳. 백이 이곳을 게을리 하면 흑이 (참고도1) 흑1로 붙이는 수가 통렬해진다. 계속해서 백이 2로 막아 버티는 것은 상당한 무리. 흑3,5로 뚫고 나오는 순간 백의 포위망은 속절없이 돌파 당한다. 흑21을 선수한 뒤 다른 큰 곳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흑의 자랑. 좌하귀는 백이 (참고도2)와 같이 삶을 추궁해도 흑4로 찌르는 수가 항상 선수로 듣고 있어 흑이 두 눈을 만드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85) 남한산성의 나날들(Ⅳ)

    조선이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처음으로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호칭을 쓰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지만 청군 진영에서는 회답이 없었다. 조선 조정은 초조해졌다.‘황제’로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면 화친이 쉬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청군의 입장에서는 바로 답장을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조선의 국서 내용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다.‘황제’로 불렀으되 심복(心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간은 청군 편이었다. ●그 많던 닭들은 어디로 갔을까? 청측의 회답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1637년 1월6일, 강원도관찰사 조정호(趙廷虎)와 함경도관찰사 민성휘(閔聖徽)가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조정호 휘하의 군병이 용진(龍津)에 머물며 대오를 수습하고 있다는 것, 함경도의 병력이 김화(金化)에 도착하여 산성을 구원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내용이었다.1월7일에는 도원수 김자점, 황해병사 이석달(李碩達),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이 보낸 장계도 도착했다. 하지만 모두 ‘남한산성을 구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언제, 어떻게 산성 쪽으로 진군해 온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1월8일, 답답해진 인조는 영의정 김류 등을 불렀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비변사에서 마련한 대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김류가 나섰다.“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대책이 없습니다. 그저 바깥의 구원을 기다릴 뿐입니다.” 김류는 그러면서 적진에 사람을 다시 보내 회답을 독촉하자고 건의했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신료들의 이야기에 인조도 할 말이 없었다.“병졸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급선무일 뿐이다.”라고 말했지만 도무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병사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식량을 비롯한 물자들은 하루하루 떨어져 가고 있었다.‘병자록(丙子錄)’‘양구기사(陽九記事)’ 등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들을 보면 예외 없이 ‘닭다리’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이때 전하께서도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주무셨다. 밥상에도 반찬으로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았다. 전하께서 전교하시기를,‘처음에 들어왔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다. 그것은 필시 나에게 닭을 바쳤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반찬이 닭다리 하나뿐인 처지에서 어느 겨를에, 또 무엇으로 장졸들을 어루만질 것인가? ●참혹한 소식들 산성 안에서는 추위와 물자의 고갈을 걱정하고 있었던 데 비해 산성 바깥의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바깥소식을 전했던 사람들의 증언 내용은 참혹했다. 적진에는 포로로 잡힌 부녀자들이 무수히 많고, 적진 바깥에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이 수도 없이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병자년 연말 이후 몽골병을 비롯한 청군의 겁략(劫掠)이 본격화되면서부터 나타난 참상이었다. 당시 청군은 서울 주변에서 포로를 획득하는 데 열중했다. 그 와중에 성인 남자들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지는 부녀자와 아이들 상당수가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청군은 특히 젊은 여자들을 사로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시 서술하겠지만, 인조에게 항복을 받고 심양으로 귀환했던 청군 지휘부 내부에서 나중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 ‘조선 여성 포로’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청군의 대소 지휘관들 사이에서, 조선에서 포로로 잡아 끌고 온 젊은 여성들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젊은 부녀자를 데려가려는 그들에게, 여자에게 딸린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어미는 진중으로 끌고 들어가고 아이는 죽이거나 바깥에다 유기하는 참혹한 상황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에서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적과 결전을 벌일 능력도, 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가 되자 신료들은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시도했다.1월8일, 예조는 온조왕(溫祚王)에 대한 제사를 다시 지내자고 청했다. 이미 한 번 지냈지만 정성이 부족했다며 중신을 보내 성의를 다하여 온조왕에게 가호(加護)를 빌자고 청했다. 예조는 또한 원종(元宗·인조의 生父 定遠君)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숭은전(崇恩殿)에도 신료를 보내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인조는 숭은전에서 올리는 제사는 자신이 직접 주관하겠다고 나섰다. 포위된 성에서의 곤경이 길어지자 이러저런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도 나타났다.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琳)이 보인 행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1월9일 밤, 청군 진영을 습격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오겠다며 성을 내려갔다. 이튿날 새벽, 그는 수급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인조는 그가 세운 공을 가상히 여겨 면주(綿紬) 세 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수급 하나가 이상했다. 수급의 살은 얼어 있었고, 피를 흘린 흔적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수급의 모양이 청군의 머리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 의아해하고 있는데 출신(出身) 권촉(權促)이 수급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형 권위(權偉)의 수급이라는 것이었다. 권위는 며칠 전 북문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당시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권촉은 형의 수급을 자신이 모셔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주변의 장졸들은 경악했다. 김언림은 청군의 수급이 아니라 조선군 시신에서 목을 베어 왔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김언림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효시경중(梟示警衆·목을 베어 매달아 군사들을 경계함)’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다 할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성안의 장졸들에게는 여전히 용맹함이 강조되고 있던 분위기에서 빚어진 참혹한 ‘해프닝’이었다. ●다시 ‘재조지은’을 강조하다 1월 초 남한산성의 동문(東門) 부근으로 진출하여 탐색전을 벌이던 청군은 1월11일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농성 중인 조선 조정의 의도와 예상되는 향후 동향을 분석하는 한편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1월11일부터 산성 주변에 대한 압박을 다시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릉(獻陵)과 탄천 일대에 있던 병력 가운데 1만여명을 차출하여 수원과 용인, 여주와 이천 방면으로 각각 다시 배치했다.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접근하는 것을 더 확실하게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동시에 산성의 북문과 서문 앞에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상황은 더 엄혹해졌다 1월12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군 진영으로 갔다. 앞서 전달한 국서에 대한 회답이 없던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다시 써서 들고 간 국서의 내용 또한 공순했다.‘소방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 약국이 강국에 복종하고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맞서겠습니까? 잘못을 용서하고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대국을 받들고 자손 대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였다. 문제는 명과 관련된 사항을 언급한 부분이었다.‘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이 곧 망할 뻔했을 때 명의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조선은 ‘명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듯이 청도 그렇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청은 이미 ‘명=천하’라는 인식을 팽개쳐 버린 지 오래였다. 어렵사리 고쳐 쓴 국서 속에 담긴 ‘재조지은’을 해석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과 청은 새로운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경찰 ‘초강수’

    경찰 ‘초강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 5일 서울 청계광장을 비롯한 도심 곳곳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경찰은 집회 초반부터 마구잡이식 연행에 착수해 100여명을 붙잡았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이날 오후 7시 청계광장에서 2700여명(경찰 추산, 주최측 추산 1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부시 방한 반대 집중촛불문화제’를 열었다. 경찰은 경찰버스를 이용해 청계광장 주변을 원천봉쇄한 채 집회 초기 해산 명령을 내린 뒤 색소를 섞은 물대포를 쏘는 등 진압에 들어갔다. 집회 참가자들은 경찰 포위망을 피해 거리행진에 나서 종로 일대와 퇴계로, 명동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펼쳤다. 경찰은 참가자들이 거리 행진에 나선 지 40여분 만에 민주노동당원 20여명을 포함해 60여명을 붙잡는 등 100명 이상을 연행했다. 오마이뉴스 최모 기자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국민대책회의 박원석 공동상황실장은 “경찰이 부시 방한에 맞춰 작심하고 무조건 연행, 원천봉쇄 등 초강수를 두고 있다.”면서 “부시 방문에 이처럼 과민하게 대응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정당성을 빈약하게 하는 자충수”라고 비판했다. 서울 강남역과 노원역, 신림역 그리고 부산, 인천, 수원, 대전, 대구,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도 촛불집회가 열렸다. 파병반대 국민행동,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등도 종로 보신각 앞에서 ‘한·미동맹, 해외파병 반대 집회’를 열고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의 철수를 촉구했다. 한편 뉴라이트전국연합,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등 374개 보수단체로 구성된 ‘부시 환영 애국시민연대’는 오후 6시 1만여명(경찰 추산)이 참가한 가운데 구국 기도회 및 부시 대통령 환영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Welcome President Bush (부시 대통령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양국 국기와 함께 띄워 놓았다. 애국시민연대 서정갑(68) 본부장은 “MBC의 편파 보도에 혹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미 쇠고기에 대해 ‘반발 촛불’을 든 사람들은 죄다 북한에 보내야 한다.”면서 “피로 맺어진 혈맹국인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적극 환영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경찰력을 총동원하는 갑호비상령을 내리고 225개 중대 2만 4000여명을 투입해 두 집회 참석자간 충돌을 막았으며, 미국 관련 시설 경비를 대폭 강화했다. 김정은 장형우기자 kimj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청군의 편제 병자호란 당시 조선 침략에 투입된 청군은 크게 4개 군(軍)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마부타(馬福塔)가 이끄는 선봉 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뒤 대로를 따라 곧바로 서울로 입성하여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서울과 강화도의 연결을 차단하여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예친왕(禮親王) 도도(多鐸) 등이 지휘하는 좌익군(左翼軍) 3만은 선봉대의 뒤를 받치며 서울로 입성하여 서울과 삼남 지방의 연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홍타이지가 직접 이끌었던 본진(本陣) 5만 4000은 좌익군의 뒤를 따라 남하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지의 산성을 공략하고 인축(人畜)을 획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친왕 도르곤(多爾袞) 등이 이끄는 우익군(右翼軍) 2만 2000은 벽동(碧東), 창성(昌城) 등지의 성들을 공략한 뒤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선봉대의 돌격을 통해 조선 조정이 강화도나 삼남 지방으로 파천하는 것을 차단한 뒤, 후속 부대를 남하시켜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복안이었다. 아직 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깜냥이기도 했다. 조선군은 초전에 이미 마부타가 이끄는 선봉군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들 철기(鐵騎)의 가공할 만한 전진 상황을 조정에 제 때 알리지 못하고, 또 돌격을 적절히 저지하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청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서정(西征)을 통해 명군이나 차하르(察哈爾) 몽골군과 싸워 실전 감각이 뛰어났다. 청군은 원정에 나설 때나, 명군과 그냥 대치하고 있을 때나 일상적으로 복병을 파견하여 적군 주둔지 주변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 납치했다. 이른바 착생(捉生)이 그것이다. 포로를 신문하여 적군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 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착생’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김자점 부대의 패퇴와 관망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른바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상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大路)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 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청군 선봉대로 하여금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대로 주변 산성에 있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 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 오는 청군의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 참전하여 패한 뒤,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이민환(李民 은 조선군 방어 태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청야견벽 작전만으로는 청군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의주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연변에 위치한 산성들은 대부분 대로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군이 산성 공략을 늦추고 서울을 향해 곧바로 남하할 경우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민환은 조선군도 적정한 수준의 기마병을 배치하여 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민환의 경고처럼 대로에서 적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한 후유증은 그대로 나타났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군을 비롯한 서북 지역의 병력 대부분이 청군의 후미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초기, 김자점은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부타가 이끄는 청군 선봉대를 그대로 놓아 주었던 그는 12월14일, 봉산(鳳山) 북쪽의 동선역(洞仙驛)에서 청 좌익군을 공격하여 소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이끄는 대군이 남하하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병력 수천을 이끌고 토산(兎山)으로 이동했다. 토산에서도 김자점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중화(中和)에서 조선인 포로를 신문하여 김자점 군의 이동 경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력의 차이는 그대로 승패에 반영되었다. 약 5000명에 이르던 김자점 군은 졸지에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김자점은 단기(單騎)로 도주하여 전장을 피했다. 선봉장 이완(李浣)이 이끄는 어영청(御營廳) 포수들이 분전하여 적장 한 사람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주장(主將)이 도주한 상황에서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김자점 부대말고도 강원감사 조정호의 부대, 북한산 전투에서 패한 뒤 이동해온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부대 등이 합류했다. 모두 합치면 1만 7000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 보겠다는 의지가 약한 점이었다. ●전라도 근왕병의 승리와 철수 당시 일어났던 근왕병 가운데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던 부대가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끌던 전라도 병력이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종군했던 김준룡은 1637년 1월4일, 병력 2000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光敎山)으로 이동했다. 김준룡 부대는 산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청군의 돌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화기수를 전면에, 사수(射手)와 창검병을 후면에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1월5일, 청군 지휘관 양고리(楊古利)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김준룡 부대는 집중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이튿날 양고리가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호준포(虎砲)까지 동원하여 조선군 진영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선방하던 조선군은, 저녁 무렵 청군이 광교산의 후방을 우회하여 광양현감 최택(崔澤)이 맡고 있던 방어선을 급습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김준룡은 최택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유격군을 이끌고 청군을 향해 돌격했고, 전투는 순식간에 혼전 양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혼전 중에 조선군 화기수의 총탄에 적장 양고리가 쓰러졌다. 양고리는 홍타이지의 매부로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사살한 최고위급 적장이었다. 양고리가 죽자 청군 진영은 급격히 동요했다. 김준룡은 청군이 동요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병자호란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남한산성과 가까이 있는 광교산에서 날아온 김준룡의 승리 소식에 조정은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의 부대는 광교산에서 계속 버틸 수 없었다. 군량과 화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준룡은 병력을 이끌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청군에 길목이 차단되어 근왕병 전체의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작전과 보급을 총괄적으로 지휘할 지휘부가 없었던 탓이었다. 환호도 잠시뿐 산성은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8강전 3국]박지은,최규병 꺾고 대역전 희망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8강전 3국]박지은,최규병 꺾고 대역전 희망

    제4보(40∼48) 여류팀의 기적 같은 역전우승은 가능할까? 26일 한국기원 바둑TV스튜디오에서 열린 제2기 지지옥션배 연승대항전에서 여류팀의 마지막 주자 박지은 9단이 시니어팀의 최규병 9단을 흑불계로 물리치고 대역전의 불씨를 이어갔다. 이제 박지은 9단이 상대해야 할 시니어팀 기사는 조훈현 9단, 서봉수 9단, 김일환 9단, 조대현 9단, 양재호 9단 등 5명. 확률적으로 보면 여류팀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지만, 지난 대회에서 박지은 9단이 조훈현 9단을 누르고 우승을 확정지은 전력이 있는 만큼 아직도 한 가닥 희망은 남아있다. 시니어팀의 다음 선수로는 조대현 9단이 출전한다. 흑이 세 번이나 손을 빼는 동안 백40의 날일자까지 허용해 우상귀는 상당히 궁색한 모양이 되었다. 그러나 박정환 2단이 믿고 있는 것은 흑을 둘러싸고 있는 백돌의 포위망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흑41에서 47까지는 전형적인 아마추어의 수법. 물론 지금은 생사가 걸려 있는 상황이라 이런저런 모양을 따질 때가 아니다. 흑47은 보통의 경우라면 (참고도1) 흑1로 끊는 것이 행마법이지만, 지금은 백이 2로 단수쳤을 때 응수가 곤란하다, 흑으로서는 3,5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는데 백4의 빵때림을 허용한 다음에도 계속해서 쫓기는 입장이 된다. 백48은 당장 가로 끊기면 집으로는 손해지만 나로 단수치는 등의 활용수단이 남아 있어 중앙전투에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 참고로 흑47 다음 백이 (참고도2) 백1로 막는 것은 흑2,4로 끊겨 아래쪽 백 넉점이 떨어진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16강전 7국] 지지옥션배,여류팀 차민수 비상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16강전 7국] 지지옥션배,여류팀 차민수 비상

    제9보(160∼174) 시니어팀과 여류팀간의 연승대항전인 제2기 지지옥션배에서 시니어팀 차민수 4단의 연승행진으로 여류팀에 비상이 걸렸다. 차민수 4단은 8일 한국기원 지지옥션배 본선4국에서 이슬아 초단을 누르고 파죽의 4연승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박지연 초단의 초반 3연승으로 여류팀이 기선제압에 성공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다. 여 류팀으로서는 우선 차민수 4단의 연승행진을 저지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이후에도 시니어팀에는 맹장 조훈현 9단을 비롯해 서봉수 9단, 최규병 9단, 양재호 9단, 서능욱 9단, 조대현 9단 등 쟁쟁한 강자들이 뒤를 받치고 있어, 여류팀은 더욱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14일 열리는 본선5국에는 김선미 2단이 여류팀의 5번째 선수로 나선다. 백164는 기분 좋은 단수한방이지만 막상 흑이 손을 빼고 흑165로 반격에 나서자 국면은 약간 시끄러워졌다. 물론 백은 아래쪽에서 패싸움을 벌이며 중앙 진출을 도모할 수 있어 아직은 여유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부자가 된 마당에는 사소한 시빗거리도 커다란 근심으로 다가온다. 백170으로 젖혔을 때 흑171로 급소를 짚은 것이 호착. 이때 백은 (참고도1) 백1로 가만히 잇는 것은 흑이 2로 끊은 뒤 4로 한점을 살리는 수가 성립한다. 계속해서 백이 9로 나와 끊으면 흑은 (참고도2) 흑1,3의 수순으로 백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다. 이제는 백도 하변 패의 부담이 제법 커졌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0) 반란자와 귀순자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60) 반란자와 귀순자들Ⅰ

    후금이 명을 압박하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1633년 무렵, 세 나라의 관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켜 등주(登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후금으로 귀순해 버린 것이다. 공유덕 등은 후금으로 가면서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병력을 대동했다. 뿐만 아니라 배 위에는 홍이포(紅夷砲)까지 싣고 있었다. 후금은 그토록 열망했던 함선과 수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후금은 이제 바다까지 장악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후금은 바다까지 장악할 기회 잡아 공유덕과 경중명 등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으로 귀순하게 된 사연은 모문룡의 가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란을 주도했던 공유덕과 경중명, 이구성(李九成) 등은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요동 출신으로, 누르하치가 요동을 장악하게 되자 가도로 들어가 모문룡에게 몸을 맡겼다. 모문룡은 이들을 우대하여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이들은 성을 모씨(毛氏)로 바꾸고 이름도 고쳤다. 공유덕은 모영시(毛永詩)로, 경중명은 모유걸(毛有傑)로, 이구성은 모유공(毛有功)이 되었다. 공유덕과 이구성은 활 쏘고 말 타는 데는 뛰어났지만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인물들이었다. 경중명은 자신의 이름을 겨우 쓸 수 있는 정도였다. 모문룡은 공유덕과 이구성에게는 군사들을 관리하게 하고, 경중명에게는 재물과 군기(軍器)를 관리하도록 했다. 모문룡 휘하에서 그런 대로 안온한 시절을 보내던 이들의 처지는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죽음을 당한 이후 크게 바뀌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제거한 뒤, 자신의 측근들을 가도로 보내 동강진(東江鎭)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모문룡 측근들에 대한 숙청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모문룡과 부자관계를 맺은 데다 안팎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의 입지는 당장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이들을 받아들여 준 사람은 등래순무 손원화(孫元化)였다. 평소 요동 출신 장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손원화는 공유덕과 경중명을 데려다가 유격(遊擊)으로 임명했다.1631년 8월, 후금군이 대릉하성(大凌河城)을 포위하자 조대수(祖大壽) 등은 손원화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등래(登萊) 지역의 수군을 이끌고 후금군의 배후를 견제해 달라는 주문도 곁들였다. 손원화는 공유덕 등에게 병력 1000여명을 주어 해로를 이용하여 대릉하 쪽으로 달려가게 했다. 하지만 공유덕 등은 손원화를 기만했다. 그들은 역풍이 분다는 핑계로 배를 띄우지 않고 육로로 영원(寧遠)까지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1631년 11월 공유덕 일행은 오랜 행군 끝에 직예(直隸)의 오교현(吳橋縣)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먹을 것을 찾았지만 오교현의 시장은 이미 철시한 상태라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자연히 병사들 가운데서 민폐를 끼치는 자들이 나타났다. 공유덕은 민원(民怨)을 야기한 병사들을 처벌했지만 병사들의 불만도 덩달아 높아졌다. 급기야 지역의 식량 창고를 약탈하고 현지의 관원을 살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구성은 병사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졌음을 핑계로 반란을 꾀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공유덕에게도 자신과 행동을 함께하라고 협박했다. 공유덕이 동참하면서 영원을 향해 가던 ‘구원군’은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공유덕과 이구성 그리고 진계공(陳繼功) 등은 병력을 돌려 산동(山東) 주변의 여러 고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공유덕 등을 따르는 병력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산동의 임읍(臨邑)·능상(陵商)·하청(河靑) 등 여러 고을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후금군이 대릉하를 공격했던 것의 여파가 엉뚱한 곳으로 미쳤던 것이다.1632년 1월 승승장구하던 공유덕의 반란군은 등주성 공략에 나섰다. 당시 경중명은 이미 성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성안에서 요동 출신의 두승공(杜承功) 등과 함께 사람들을 불러모아 공유덕 등의 공격에 내응했다. 안팎이 호응하는 상황에서 성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이윽고 1월13일 등주성이 함락되었다. 성안에 있던 요동 출신 병사 3000명은 고스란히 공유덕 등의 수중에 떨어졌다. ●홍이포 등 엄청난 수량의 무기도 넘어가 등주성이 반란군에게 떨어진 여파는 심각했다. 등주는 전략 요충이었다. 육로로는 북경, 산해관 등지와 연결되고 수로를 통해 천진(天津)과 요동, 가도 등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미 산해관 동쪽이 후금군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 있는 현실에서 등주는 수군을 이용하여 후금의 배후를 칠 수 있는 거점이기도 했다. 공유덕이 등주를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장 여순구(旅順口) 참장 진유시(陳有時)와 광록도(廣鹿島) 부장 모승록(毛承祿) 등이 병력을 이끌고 등주로 와서 반란군에 합류했다. 모승록 또한 원래 가도에 있다가 모문룡이 죽은 뒤 광록도로 탈출했던 인물이었다. 등주 함락은 다른 측면에서도 명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다. 등주성 관할의 육군과 수군이 공유덕에게 넘어간 것은 물론 명이 자랑하는 다양한 화기(火器)도 반란군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등주성의 무기고에는 엄청난 수량의 화기들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홍이포(紅夷砲)도 있었다. 일찍이 등래순무를 지냈던 도낭선(陶朗先), 손원화 등이 애써 제작하여 비축해 놓은 것이었다. 등주 함락 직후 내주(萊州)도 떨어졌다. 산동의 거진(巨鎭) 두 곳이 모두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에 놀란 명 조정은 토벌군을 동원하려 하는 한편, 공유덕 등에게 면사패(免死牌)를 보내 귀순을 종용했다. 하지만 공유덕 등은 ‘이미 내주를 함락시킨 이상 북경까지 진군하겠다.’고 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한편에서는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내야 할 입장에서 내란까지 진압해야 했던 명 조정의 처지에서는 대규모의 진압군을 동원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이 같은 배경에서 공유덕 등의 등주 장악은 8개월 이상 이어졌다. 반란군의 군세(軍勢)가 커지면서 등주성의 제장(諸將)들은 공유덕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공유덕은 고사하다가 결국 스스로 도원수(都元帥)를 칭했다. 이구성이 부원수가 되어 병력을 지휘했다. 북경의 지척에 있는 산동이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명 조정은 고기잠(高起潛), 조대필(祖大弼) 등에게 대군을 주어 진압에 나섰다. 공유덕 등은 힘써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당시 명 조정이 동원한 진압군은 7만명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성 전체가 포위된 상황에서 공유덕과 이구성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여러 차례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구성은 돌격전 과정에서 죽고 말았다. 1632년 9월 수차례의 실패 끝에 공유덕은 포위를 뚫고 바다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공유덕 등은 여순(旅順)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여순구에서 명 총병(總兵) 황룡(黃龍)에게 차단 당한 데다, 영원 등지에서도 명군이 추격해 오자 공유덕 등은 광록도, 장산도(長山島) 등지의 연해 지역을 전전했다. ●조선 또다시 고래싸움에 휘말릴 위기에 당시 후금은 공유덕 등이 일으킨 반란의 경과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이 해상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책사 범문정(范文程)을 그에게 보냈다. 범문정은 홍타이지가 조대수에게 투항을 종용할 당시에도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공유덕 등은 범문정을 만난 뒤 후금으로 귀순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명 조정에는 비상이 걸렸다.‘오랑캐’에게 수군과 홍이포가 통째로 넘어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수군을 동원하여 도주로를 차단하려 하는 한편 조선에도 ‘급전(急電)’을 날렸다. 홍타이지는 홍타이지대로 병력을 진강(鎭江) 지역으로 보내 공유덕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바야흐로 조선은 또다시 ‘고래 싸움’에 휘말릴 위기 속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은 만주병과 몽골병, 그리고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합쳐 모두 4만명 가까운 병력이었다. 누르하치 시절 이래 후금군은 요동 지역의 명군을 공격할 때마다 항상 수적 우세를 유지해 왔다. 명군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병력을 집중시키는 작전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대릉하 원정에서도 어김없이 그 원칙을 지켰다. ●홍타이지,4만 병력으로 1만5000 대릉하성 포위 휘하 병력의 수가 명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음에도 홍타이지는 신중했다. 그는 과거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던 전철을 뒤풀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병사들을 성을 향해 돌격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격할 경우, 후금군의 인명 손실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명군이 갖고 있는 화포의 위력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성을 포위한 뒤, 성 주위에 두 겹으로 참호를 파라고 지시했다. 참호의 바깥에는 담을 쌓았다. 성과 후금군의 참호 사이의 거리는 약 3리(里) 정도였다.3리 정도면 명군 화포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리였다. 대릉하성에서 금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만주와 몽골군 분견대(分遣隊)와 한인 포병대를 배치하여 바깥 지역으로부터 명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도록 했다. 성을 완전히 고립시킨 상태로 장기전을 펼침으로써 명군을 고사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8월8일과 9일, 포위망을 뚫어 보려고 명군 기마병 600여 명이 성 바깥으로 나왔다가 모두 패하여 도주했다. 후금군은 명군의 출격에 대비하여 곳곳에 복병을 배치했다. 이후에도 명군은 간헐적으로 병력을 내보냈지만 그 때마다 후금군에 격퇴되었다. 홍타이지는 물 샐 틈 없는 포위 상태를 유지하는 한편, 대릉하성 바깥에 위치한 명군의 독립 성보(城堡)들을 각개 격파하려고 시도했다. 대(臺)라고도 불리는 개별 성보들을 향해 홍이포를 비롯한 화포들을 쏘아 타격을 가한 뒤,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작전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각 대에 머물던 많은 명군 장졸들과 백성들이 포격을 받고 전사하거나, 투항해 왔다.10월12일에는 대릉하성 주변의 성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우자장대(于子章臺)가 함락되었다. 후금군은 홍이포 6문, 대장군포 54문을 이용하여 3일 동안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성첩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와중에 남녀 587명이 투항해 왔다. 우자장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주변의 각 대들에도 연쇄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겁을 집어먹은 장졸과 백성들의 도주와 투항이 이어졌다.10월14일에는 대릉하성 외곽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흥보대(陳興堡臺)마저 무너졌다. ●명 대규모 지원군마저 참패 포위를 통해 명군의 목줄을 조여들어 가는 한편, 홍타이지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8월13일부터 수 차례에 걸쳐 조대수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과 투항을 촉구했다. 때로는 투항한 한군(漢軍) 장수들을 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처음 홍타이지로부터 화친과 투항을 요구받았을 때 조대수는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과 상황은 조대수의 편이 아니었다. 8월15일, 포위된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송산(松山) 방면에서 명군 지원군 2000명이 달려 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후금군 병력에 의해 격퇴되었다.25일에도 금주성으로부터 6000명의 원군이 출격했지만 역시 후금군에 차단되어 도주했다.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병력이 번번이 패퇴하자 9월24일 명군은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었다. 산해관으로부터 대규모의 구원군을 다시 보낸 것이다. 감군도(監軍道) 장춘(張春), 총병 조대락(祖大樂) 등이 병력 4만명을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명군은 소릉하(小凌河)를 지나 주둔지에 참호를 파고 화기 등을 정렬 배치하는 등 후금군과 전면전을 벌일 태세였다. 하지만 3일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다시 패하고 말았다. 전투 도중 후금군 진영 쪽으로 불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었다. 날씨도 철저히 후금군 편이었다. 명군은 결국 사령관 장춘을 비롯한 33명의 지휘관이 포로가 되는 등 참패하고 말았다. 전투를 감독하던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은 산해관으로 패주했다. 구원군이 오는 족족 패주했던 데다 외곽에서 전초 기지 역할을 하던 각 대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자 대릉하성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외부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땔감, 마초(馬草)가 고갈되고 있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성밖으로 몰래 나오는 명군 병사들은 매복하고 있던 후금군에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8월24일, 포로로 잡힌 명군 병사로부터 ‘성을 쌓는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가운데 이미 30명 가까이 굶어 죽었다.’는 진술이 나왔다.9월19일에는 ‘성안에 남은 곡식이 불과 100석뿐이고, 탈 수 있는 말은 70마리밖에 없다. 인부들의 절반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병사들은 말고기로 버티고 있으며 말 안장을 쪼개 불을 피우고 있다.’는 형편이었다. 장춘이 이끄는 구원군이 패하고 우자장대마저 무너진 10월 이후의 상황은 절망과 처참 그 자체였다.10월10일, 성을 탈출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투항한 왕세룡(王世龍)의 진술은 충격적이었다.‘성안의 양식은 다 떨어졌고, 인부와 상인들은 모두 죽었으며, 남아 있는 병사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릉하성은 마침내 ‘서로를 잡아 먹는(人相食)’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고립된 명군과는 달리 후금군은 금주를 거쳐 심양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양으로부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시로 실어올 수 있었다. 조대수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고 말았다. ●‘부메랑’된 홍이포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1626년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명군의 홍이포(紅夷砲)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절명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大將軍砲)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佛狼機砲)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 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홍이포를 주조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이었다는 점이다. 홍이포 주조의 총감독이자 나중에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이끌었던 동양성은 원래 무순(撫順)에서 한족 상인들과 오랫동안 거래했던 인물이다. 절반은 한족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는 이후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홍이포 주조의 실무를 감독했던 정계명(丁啓明)은 원래 명군 부장(副將)이었다가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에 투항했던 인물이다. 주조를 직접 담당했던 장인(匠人) 왕천상(王天相)과 두수위(竇守位) 등도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이 획득했던 한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화포 주조의 공을 인정하여 이들 장인을 노비 신분에서 모두 해방시키고 많은 상을 내렸다. 귀순한 한인들의 협조 덕분에 대릉하 공격 당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더 많은 수의 대형 화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명 출신 장인들이 만든 홍이포에서, 명 출신 포병들에 의해 발사된 포탄은 견고한 대릉하의 성보들을 파괴하고 용장(勇將) 조대수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무너져 가고 있던 명으로부터 유출된 인력과 최신 기술들이 ‘부메랑’이 되어 명군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6국] 이세돌, 삼성화재배 우승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6국] 이세돌, 삼성화재배 우승

    제4보(74∼86) 이세돌 9단이 삼성화재배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올 한해도 이세돌의 천하가 될 것임을 예고했다.24일 서울 삼성화재 본사 특별대국실에서 열린 제12회 삼성화재배 결승3번기 최종국에서 이세돌 9단은 박영훈 9단에게 흑1집반승을 거두었다. 종반 무렵 검토실에서는 미세하나마 박영훈 9단의 우세를 점쳤지만, 이세돌 9단은 마지막 초읽기에 몰린 박영훈 9단의 작은 빈틈을 찔러 기어코 역전에 성공했다. 장장 5시간이 넘는 대혈투였다. 이로써 2억원의 상금을 거머쥔 이세돌 9단은 다음달 한상훈 2단과 맞붙게 될 LG배 결승에서 또 한번 우승사냥에 나선다. 백74로 끊은 것은 살기 전에 흑에게 응수를 물어본 것. 흑이 77을 선수해 백이 78로 뻗게 되자 상변의 흑도 두집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이 생겼다. 흑79로 가만히 늘어둔 것은 정수. 급한 마음에 <참고도1> 흑1 이하로 백을 잡으러 가는 것은 백의 역공에 말려 오히려 흑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흑85는 자신의 단점을 보강하면서 백을 압박하려는 의도. 여기서 박정환 2단이 백86으로 손을 돌린 것은 이미 백이 사는 수순을 확인해 두었기 때문이다. 만일 흑이 백을 잡으러 간다면 <참고도2> 흑1,3으로 파호하는 것은 절대. 이때 백이 4로 가만히 늘어두면 흑5로 찝는 수와 백6으로 찌르는 수가 맞보기가 된다. 흑은 9까지 억지로 버틸 수는 있지만, 백이 10으로 끼우는 순간 흑의 포위망은 속절없이 돌파 당한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4국] 새해 첫 프로기사 월간랭킹 발표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 4국] 새해 첫 프로기사 월간랭킹 발표

    제4보(65∼77) 2008년 첫 번째 프로기사 월간랭킹이 발표되었다. 지난해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의 성적을 근거로 산출한 이번 랭킹은 개정된 산정방식이 적용된 터라 순위변동 폭이 더욱 커졌다. 새해 첫 월간랭킹에서는 1위 이세돌 9단이 독주체제를 더욱 강화한 가운데 이창호 9단, 박영훈 9단, 목진석 9단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특히 지난해 맹활약을 펼쳤던 신예 한상훈 2단이 단숨에 9위로 뛰어오른 반면,1년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던 최철한 9단은 5계단이나 하락한 11위에 머물렀다. 개정된 프로기사 랭킹제는 기존에 2년치의 성적을 합산하던 것을 1년치로 수정해 최근 성적의 반영률을 높였다. 흑65는 반발을 위한 사전 공작. 흑으로서는 어쨌든 흑67로 반격해 백의 주문을 거스르고 싶은 장면이다. 백이 68로 밀고 나왔을 때 흑은 (참고도1) 흑1로 막는 것이 제일감이지만, 백2로 끊긴 뒤 4,6의 돌파를 당하면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백74로 단수친 것은 평소에는 금기시되는 행마. 그러나 지금은 흑이 이어준다면 (참고도2)의 장문을 씌우겠다는 뜻이다. 언뜻 백의 포위망이 허술해 보이지만 막상 백이 12까지 꾹꾹 틀어막으면, 이후 흑의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흑은 백에게 요석을 내줄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흑75,77로 변화를 구한 것이 좋은 감각으로 오히려 흑이 대세를 휘어잡은 모양이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2국] 목진석,최다승 신기록도 눈앞에

    [제18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본선2국] 목진석,최다승 신기록도 눈앞에

    제6보(69~80) 이창호 9단의 연간 최다대국기록을 갈아치운 목진석 9단이 연간 최다승 기록경신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89승(116전)을 기록 중인 목진석 9단은 93년 이창호 9단이 수립한 최다승 기록인 90승에 단 1승만을 남겨놓은 상태. 목진석 9단은 앞으로 원익배 8강전, 마스터즈 토너먼트, 한국바둑리그 플레이오프 전 등의 대국을 남겨두고 있어 무난히 신기록달성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흑69로 눌러간 것이 김진우 3단의 반격. 백도 70으로 밀어올린 것이 일단 형태의 급소다. 여기서 흑이 75로 응수한다면 가장 무난하다. 그러나 김진우 3단은 흑71, 백72이라는 차마 두기 힘든 악수교환을 한 뒤 흑73으로 힘차게 막는다. 흑으로서는 백이 가로 끼우는 단점을 선수로 없애기 위한 일종의 임기응변이다. 또한 흑71은 나중에 <참고도1> 흑1로 끊는 무시무시한 강수를 노리고 있다. 물론 이때 백이 행마법이라고 해서 백2쪽으로 모는 것은 흑13까지 백이 모두 잡혀버린다. 백의 최선은 <참고도2> 백2로 뛰어서 흑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 백6까지 된 다음에는 흑도 단점이 너무 많아 공격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주변상황이 무르익으면 언제든 노림이 작렬할 수 있다는 것이 백으로서도 주의할 점이다. 백76의 젖힘에 흑77로 백 한점을 잡은 것은 안전책.나로 막는 싸움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평택 미군기지 기공식… 미군의 동북아 ‘군사허브’로

    평택 미군기지 기공식… 미군의 동북아 ‘군사허브’로

    주한미군 구조조정의 신호탄이 될 미군기지 평택 이전공사가 13일 팽성읍 대추리에서 첫 삽을 떴다.2004년 12월 국회에서 기지 이전협정 비준안이 가결된 지 2년 11개월 만이다. 2012년 완공될 새 기지에는 용산 주한미군사령부와 유엔사령부, 미8군사령부 등 미군 핵심지휘부와 한강 이북의 미2사단 예하부대가 차례로 입주한다. 기지 이전이 마무리되면 평택은 괌, 오키나와와 함께 동북아 미군의 전략적 군사허브로 변신할 전망이다. ●김 국방 “기지이전, 미래전 대처에 기여” 이날 기공식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와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 등 1200여명이 참석했다. 김장수 국방장관은 “우리는 급변하는 국제안보 환경 속에서 미래전 양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보다 성숙된 동맹을 요구하고 있다.”며 “미군기지 이전은 이런 염원을 실현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전공사는 한·미 양국이 지난 3월 시설종합계획에 합의함에 따라 약 11조원이 투입돼 2012년 말까지 3개 구획으로 나눠 진행된다. 기지가 완공되면 인접한 캠프 험프리와 동북쪽 20㎞ 거리에 있는 오산 미 공군기지, 서쪽으로 20㎞ 떨어진 평택 해군기지와 연계, 육·해·공군 연계작전이 가능할 것으로 미군측은 기대하고 있다. 기지에는 500여동의 본부·행정시설과 정비·보급저장시설, 숙소, 가족주택, 병원 등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며 미군과 군무원, 가족, 한국측 지원인력 등 4만 4000여명이 생활하게 된다. ●MD 연계 ‘대중국 봉쇄기지’ 우려도 당초 용산기지만을 후방으로 이전할 계획이던 한·미 양국은 2003년 부시 행정부가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을 발표하면서 주한 미군기지 전체를 재배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외국군의 수도 주둔에 정치적 부담을 느끼는 한국 정부의 입장과 주한미군을 한반도 전쟁억제에 주력하는 ‘붙박이군’에서 동북아 분쟁에 신속하게 개입할 수 있는 ‘기동군’으로 전환시키려는 미국측 구상이 맞물리면서 이전 규모가 확대되고 사업의 속도도 급물살을 탄 것이다. 하지만 미군기지 재배치가 사실상 중국을 견제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구상에 따른 것이며, 결과적으로 평택∼군산∼제주를 잇는 서해 벨트가 미국의 미사일 방어계획(MD)과 연결돼 중국 봉쇄를 위한 포위망으로 활용될 것이란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쳐 진통을 겪기도 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전(1국)] 이창호,막차로 원익배 24강 합류

    [제17기 비씨카드배 신인왕전-결승전(1국)] 이창호,막차로 원익배 24강 합류

    제5보(48∼55) 독특한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제3기 원익배 십단전에서 이창호 9단이 강동윤 7단을 꺾고 막차로 본선24강에 합류했다.20일 한국기원 바둑TV스튜디오에서 열린 본선1회전 마지막 대국에서 이창호 9단은 강동윤 7단의 거대한 대마를 함몰시키며 흑 불계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올해 다섯 번의 대결을 펼친 두 기사는 지금껏 흑번필승의 징크스를 이어가고 있다. 이창호 9단은 제1기 원익배 결승에서 박영훈 9단을 누르고 초대챔피언에 오른 바 있다. 대회 우승상금은 3500만원. 백48은 최대한 벌어들인 다음 타개에 나서겠다는 전략. 실제로 흑이 <참고도1> 흑1과 같이 넓게 포위망을 쌓더라도 귀에서 백이 2,4 등으로 움직이는 뒷맛이 있어 흑이 온전한 집을 만들기는 어렵다. 흑49는 공격에 앞서 간접적으로 귀를 보강한 수. 흑49가 놓여진 다음에는<참고도2>의 진행에서 보듯 백이 귀에서 사는 수는 없다. 언뜻 백이 3,5로 흑 한점을 잡아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흑에게는 6으로 빠진 다음 8로 젖혀 백의 자충을 이용하는 맥점이 준비되어 있다. 백52는 당장 끊기는 약점이 있어 위험해 보이지만 백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행마. 만일 연결만을 생각하고 흑55의 곳으로 한칸 뛰는 것은 흑가의 씌움을 당해 백돌전체가 갑갑해진다. 실전은 끊길 때 끊기더라도 귀의 활용수단을 이용해 타개에 나서겠다는 의미이다. 최준원 comos5452@hotmail.com
  • “美·日·印·濠 4각연대 강화를”

    “美·日·印·濠 4각연대 강화를”

    |도쿄 박홍기특파원|인도를 방문중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2일 인도 국회 연설을 통해 일본과 인도의 관계를 “기본적인 가치와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결합”으로 정리하면서 미국과 호주를 포함한 4개국 연대 강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아베 총리는 ‘2개 대양의 결합’이라는 주제의 연설에서 “강한 인도는 일본의 이익”이라며 인도의 위상이 커지고 있는 점을 환영했다. 인도 국회에서 외국 정상이 연설하기는 현재 맘모한 싱 정권이 들어선 지난 2004년 이후 처음이다. 아베 총리가 의회 연설에서 미국·일본·인도·호주 4개국의 연대 강화를 강조하고 나선 것은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포위망’을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의 군사력 증강을 경계하면서도 동아시아 지역에 불안정 요인이 될 행동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베 총리의 이같은 구상의 실현엔 많은 장애물이 예상된다고 교도통신이 지적했다. 아베총리는 일본과 인도의 구체적인 협력방안으로 ▲안전보장과 방위협력의 방향성에 관한 검토 개시 ▲일본의 온난화 대책의 기본 방침인 ‘아름다운 별 50’에 대한 협력 요청 ▲경제연대협정(EPA) 조기 체결과 공적개발원조(ODA) 등에 의한 인프라 정비 협력 ▲인적교류 촉진 등을 제시했다. 그는 지난 19일부터 25일까지 인도네시아·인도·말레이시아 등 3개국을 순방 중이다. 그는 앞서 지난 20일 밤방 유도유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2년 동안 추진해온 경제연대협정을 체결했다. 또 천연가스(LNG) 수입의 25%를 의존하는 인도네시아로부터 LNG의 안정적 공급을 지원받는 결실을 거뒀다. 한편 일본은 요즘 외교의 계절을 맞았다. 마치 복잡다단한 국내 정치에서 벗어나 전방위 외교에 총출동한 듯한 모양새다. 아베 총리외에도 아소 다로 외상, 고이케 유리코 방위상,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환경상 겸 농림상 등도 현재 각각 동남아, 남미·중동, 중국 등지에서 경제·환경·방위 등 포괄적·다각적인 외교전선의 구축에 나섰다. 아소 외상은 지난 12일부터 중동에서 남미로 강행군을 하고 있다. 아소 외상은 지난 13∼15일 요르단·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차례로 찾아 중동평화와 함께 평화정착을 위한 경제적 지원 입장을 밝혔다. 특히 반미정권 등장을 이유로 1년 이상 중단했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직접 지원도 재개하기로 했다. 미국과 함께 ‘중동평화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17일 멕시코로 이동,2005년 체결한 EPA의 상황을 점검한 뒤 브라질에서 열리고 있는 ‘동아시아·중남미 협력포럼’에 참석, 브라질과 범죄인 인도를 위한 사법공조 등도 논의했다. 고이케 방위상은 지난 8일 미국 방문에 이어 21,22일 인도와 파키스탄을 잇달아 찾았다. 테러대책특별조치법에 따라 인도양에서 미국 등의 함선에 급유를 지원하는 해상자위대의 활동을 설명,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다. 와카바야시 환경상은 21일 중국에서 중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삭감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전제한 뒤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다각적 외교를 통한 이미지 강화와 함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염두에 둔 것 같다.”고 분석했다. hkpark@seoul.co.kr ●경제연대협정(EPA·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 관세철폐를 목적으로 한 자유무역협정(FTA)보다 더 포괄적인 협정이다.FTA의 내용에다 서비스, 투자, 인적교류 등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일본은 지금까지 싱가포르·멕시코·말레이시아·필리핀·타이·칠레·브루나이·인도네시아와 EPA를 체결했다.
  • 아베 “개혁은 나의 사명” 거부

    |도쿄 박홍기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대한 포위망이 좁혀지는 분위기다. 민주당 등 야당뿐만 아니라 자민당의 중추에서도 사퇴 의견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9일 참의원 선거 개표가 시작된 직후 자민당의 핵심들로부터 ‘총리직 사퇴’의 의견을 전달받았다고 아사히신문이 2일 보도했다. 모리 요시로 전 총리와 아오키 미키오 자민당 참의원 의장, 나카가와 히데나오 자민당 간사장 등 자민당의 ‘핵심’들은 선거 직후 도쿄도의 호텔에 모여 향후 정세 등에 대해 논의,“40석에 미달하면 아베 정권의 퇴진은 피할 수 없다. 총리직 유임은 곤란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나카가와 간사장은 이어 총리 관저를 방문, 아베 총리에게 모임의 의견을 알렸다. 아베 총리는 그러나 “매우 어려운 결과다. 개혁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라며 사퇴 불가 방침을 분명히 했다. 또 아베 총리는 모리 전 총리에게도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총리를 하겠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때문에 모리 전 총리도 아베 총리의 입장을 결국 수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전 간사장은 “이날 오전 후지TV에 출연,“중의원은 고이즈미 칠드런(children), 참의원은 오자와 칠드런, 칠드런의 대회가 됐다.”면서 “국회의 상황에 따라서 국민의 뜻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며 가을의 임시국회 때 국회가 혼란스러워지면 중의원 해산도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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