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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린턴 보스니아 파병 당위성 강조/TV연설

    ◎“중구평화 정착 미 국익에 부합”/미 선발대 700명 내주 파병… 독도 4천명 파견 결정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27일 저녁 TV연설을 통해 보스니아 평화협정을 실행에 옮기고 내전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 2만명의 미군 파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촉구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미군의 보스니아파병이 미국의 국익에 중요한 중부유럽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하고 『미군의 임무가 명확하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또 『보스니아에 미군을 파병하는 목적은 전투가 아니라 어린이를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을 방지하고 보스니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있다』고 주장하고 『우리는 평화에 등을 돌려서도 안되고 돌리지도 않겠다』고 역설했다.그는 평화유지군의 주둔기간은 1년정도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보브 돌 미공화당 상원원내총무는 이날 클린턴 대통령의 연설 직후 CBS TV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미국민들은 보스니아평화유지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확실히 우리는 미군 파병을 지지하게 될 것』이라며 미군의 보스니아 평화유지군 파병을 지지했다. 【브뤼셀·본 로이터 연합】 미군 5백∼7백명이 1주일 이내에 보스니아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선발대로 보스니아에 파견될 것이라고 윌리엄 페리 미국방장관이 28일 밝혔다. 페리 장관은 보스니아평화협정을 오는 12월중순 파리에서 공식체결한다는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1주일이내에 미군 5백∼7백명을 다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병력과 함께 보스니아에 파견,평화협정 이행감시를 준비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선발대는 통신설비,사령본부,병참사령부등을 구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와함께 독일내각은 28일 보스니아 다국적 평화유지군에 4천명의 병력을 파견키로 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이같은 결정은 다음주 의회의 비준을 남겨놓고 있다.폴커 뤼헤 독국방장관은 독일병력이 크리스마스이전에 크로아티아에 있는 기지에 도착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해왔다. ◎클린턴 「보」 파병 역설 배경/내년 대선 겨냥 분쟁해결사역 부각/국민 지지 유도… 의회 반발 간접 견제 27일 저녁 클린턴 대통령이 TV를 통해 전국민에게 이해를 촉구한 보스니아 평화유지군으로의 미군파병을 위한 결의는 미국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한 탈냉전 이후 국제질서의 새로은 패턴을 형성하는 「미국의 역할」 강조라는 측변에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다. 이는 클린턴 행정부 출범이후 북한핵협정,중동평화협정 등에 이어 고질적인 국제분쟁의 해결사로서,즉 국제평화유지의 중추세력으로서 미국의 존재를 부각시켜준 것으로 미국인들의 자노심 회복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2만여명 이상의 미군을 적어도 1년이상 보스니아에 주둔시키게 되는 보스니아파병 결의는 『전투 목적이 아니고 평화정착 목적』이라는 클린턴 대통령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인명손실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당초 의회를 중심으로 상당한 반발이 예상됐었다.더욱이 클린턴 행정부가 공화당 다수의회와 예산안을 둘러싸고 연방정부 폐쇄라는 대대적인 힘겨루기를 치르고 있는 상황이어서 모처럼의 평화합의가 수포로 돌아가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난주 데이턴에서의 평화협정 타결 이후 국민적인 여론은 미국주도의 평화추구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타났으며 이를 간파한 보브 돌 상원원내총무등 공화당 지도자들이 지지를 표명하고 있어 의회동의안의 통과는 부시행정부 당시의 쿠웨이트파병 때처럼 어렵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방송연설 다음날인 28일에는 돌의원을 포함,뉴트 깅리치 하원의장등 의회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초치해 의회의 지지를 재차 당부하고는 바로 닷새동안의 유럽순방길에 올랐다.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유럽연합(EU) 정상들과의 회담에 앞서 북아일랜드를 방문,또하나의 평화중재 시도를 하게된다. 결국 보스니아파병은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는 클린턴의 승부수로 해석될수 있으며 미국인의 자존심을 담보로한 클린턴의 대외정책전략은 당분간 지지를 받을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반인류 범죄」 처벌에 시효없다/과거청산 외국선 어떻게 했나

    ◎유럽/나치전범 86년까지 6,479명 단죄­독일/2차대전 유태인 학살 투비에 종신형­프랑스 집단학살등의 반인류 범죄를 처벌하는데는 시한이 없다.특히 2차대전당시 인류를 학살하고 괴롭힌 전범들에 대해서는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세계 곳곳에서 단죄를 받고 있다. 반인류범 처벌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법정.미·영·불·소 등 4개국이 2차대전 전범자들을 처벌할 목적으로 지난 45년 11월20일 개설한 이 특별법정은 지난 20일로 개설 50주년을 맞았다. 뉘른베르크법정이 열리자 히틀러의 측근인 헤스를 비롯해 24명의 나치 지도급인사를 처벌됐으며 46년 10월1일까지 1년 가까이 4백8명의 전범들이 법정에 서야만 했다. 독일은 특히 56년부터 루드스비히에 나치전범연구소를 세워 전쟁자료를 추적,구체적 죄목을 입증해 전범을 꾸준히 처벌해왔다.이에따라 86년까지 모두 6천4백79명이 날카로운 법의 심판을 받았고 이중 12명이 사형이 선고됐고 1백60명은 종신형,나머지 6천1백9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7천5백명 정도의 나치전범이 아르헨티나·브라질·파라과이 등지에 불안에 떨면서 숨어지내고 있다.그러나 이들을 찾아내 처벌하려는 노력은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어 시한이 걸리기는 해도 법의 심판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유엔은 반인류범을 집단학살은 물론이고 정치·종교·인종적인 이유에서 학대하거나 약탈행위·암살·포로나 인질을 괴롭히는 등의 행위로 규정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도 이같은 반인류범을 시한없이 끝까지 추적하고 있다.프랑스는 64년12월 반인류범죄에 대해서는 시효를 적용치 않는다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지난해엔 형법을 개정해 집단학살범에 대해서는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프랑스에서 전범으로 처벌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폴 투비에.투비에는 리옹 등지에서 나치 비밀경찰에 협조해 유태인 추방과 학살등에 관여한 혐의로 45년9월 열린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잠적해 버렸다.사면을 받는 등 우역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결국 89년 붙잡혀 지난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또 유태인 어린이50여명을 학살한 클라우스 바르비도 반인류적인 행위자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리옹지역의 게슈타포 지휘자였던 바르비는 52년 궐석재판을 받았다가 지난 83년 붙잡혀 4년뒤 종신형을 받았다. 스페인도 15년 동안의 작업 끝에 최근 인권 학대 등에 대해서는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뉘른베르크 특별법정 이후에도 반인류범을 처벌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유엔은 93년 결의안 808조에 따라 유고내전에 대한 특별법정을 헤이그에 설치,전쟁을 일으킨 주범들을 처벌하고 있다.또 르완다내전에 대한 국제법정이 지난해 탄자니아의 아루샤에 설치돼 집단학살의 책임자들에 단죄를 가하고 있다. 이런 법정들은 특정사안을 다루는 특별법정이지만 항구적인 법정도 있다.유엔 사법재판소는 45년 헤이그에 설치된 항구법정이고 유럽연합(EU)은 51년 룩셈부르크에 사법재판소를 두고 있다.EU는 이것도 모자라 59년 스트라스부르에 인권법정을 마련해 반인류범에 대한 강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의회,67년 군부행위 쿠데타 규정 특별재판서 주모자들 무죄징역 그리스의 쿠데타주모자 처벌은 비교적 순조롭고 철저하게 이루어졌다.2차대전 종전과 함께 부활된 왕정을 무너뜨리고 군부가 실권을 장악한 것은 67년.쿠데타 주역은 예오리오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이끄는 영관급장교 24명.이들은 콘스탄틴 2세를 폐위시킨 뒤 68년 독재헌법을 마련,7년간의 군사정권이 계속됐다. 74년 키프로스사태가 군사정권 몰락에 크게 작용했다.키프로스공화국내 터키계 주민과 그리스계 주민 사이에 주도권 쟁탈을 놓고 벌어진 유혈사태에 그리스군을 파병하기 위해 군정실권자들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그동안의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일부 군장성과 민간정치인들도 합세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명목상 군정대통령을 맡고 있던 기지키스 장군이 7월22일 야당지도자들과 민선 이양에 합의했다.당황한 군정측은 군대를 동원,아테네시를 포위하는 무력위협에 나섰고 시내 의사당 앞에 군정에 반대하는 수십만 시민이 모여 일촉즉발의 대치상태를 연출했다.결국 대세에 굴복한 군정측이 3일만에 손을 들었고 7월24일 파리에 망명했던 야당지도자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금의환양했다. 그해 11월 총리직에 오른 카라만리스는 곧바로 67년 쿠데타주역들을 재판에 회부했다.75년초 의회는 67년 군부행위를 쿠데타로 규정하는 결의안 채택과 함께 특별법을 제정했다.군정기간중 60여명이 독재에 항거하다 숨졌고 수천명이 부상당했음이 재판을 통해 밝혀졌다.같은해 8월 끝난 특별재판에서 쿠데타주모자인 파파도풀로스와 마카레조스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여타 주모자들에게 최고 사형에서 최하 25년의 중형이 선고됐다.이후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쿠데타주역들은 지금도 복역중이다. ◎남미/쿠데타 집권 전대통령 등 법정에­아르헨/인권탄압자 사면조건 범죄고백 받아­칠레 ▷아르헨티나◁ 76년4월 이자벨리타 페론 대통령을 내쫓고 정권을 잡은 군부는 라울 알폰신 민선대통령이 취임하는 83년12월에 이르기까지 최소 1만3천여명의 동족을 좌파타도의 슬로건 아래 납치·살해(실종 9천여명 포함)했다.알폰신 대통령은 취임 즉시 군 최고지도층 절반을 은퇴시키는 군개혁을 실시한 뒤 군부가 민정이양 4개월전 제정한 과거 10년간 군·경의 정치범죄에 대한 소급 사면법을 폐기,쿠데타주도의 혁명평의회 장군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쿠데타 장군들의 재판은 85년4월 시작돼 12월 혁명후 첫대통령 비델라 장군과 마세라 제독(종신형) 등 5명이 형을 받았고 4명은 석방됐다.포클랜드전쟁(82년) 당시의 갈티에리 대통령 등 3인혁명위원에 대한 재판은 따로 열려 갈티에리는 12년형을 받았다.그러나 알폰신정부는 87년 부분사면법을 통과시켜 인권침해 혐의로 기소된 3백70명의 군·경중 40명의 고위직을 제외한 나머지를 석방했다. 89년7월 취임한 카를로스 메넴 새 대통령은 이전 페론당으로서 군부에게 학대를 받기도 했지만 군부집권시의 좌파대상 「추악한 전쟁」이나 민정 이후 쿠데타기도에 연루된 2백10명의 장교·하사관들을 89년10월 사면했다.그리고 90년12월 2차 대통령사면령을 통해 군부정권 1,2번째 대통령인 비델라,비올라 장군및 마세라제독 등 군부지도자들을 「국민화합」을 이유로 석방했다. 당시 「추악한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 두명이 올 2월과 4월에 약물에 마취된 좌파인사들을 비행기에서 바다로 떨어뜨리는데 일조했다고 최초로 고백하기도 했으나 1만여 동포살해의 진상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칠레◁ 세계최초의 민선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아옌데를 살해하고 73년9월 정권을 잡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국민투표 신임미달(43%)로 90년3월 파트리시오 아일윈 민선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했으나 자신이 오는 97년까지 육군참모총장에 재직할 수 있도록 했다.앞서 군부는 80년 헌법개정을 통해 자신들의 73∼78년 좌파대상 정치범죄를 일괄사면시켰으며 민정이양하면서 상원의 5분의1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졌다. 지난 17년간의 군부독재 아래서 자행된 인권탄압 범죄를 법적으로 처리할 힘이 부족한 민선정부는 90년4월 「진실과 화해 전국위원회」를 구성,가해자에게 사면을 조건으로 범죄고백을 받고,모든 피해를 확인·적시하는 문서작성에 들어갔다.91년3월 아일윈대통령은 2천2백79명의 정치박해 사망자에 관한 1천쪽 분량의 보고서 완성을 TV방송을 통해 발표하면서 「국민화합」을 강조했다.여기서 피해자는 인적사항을 명확히 기록했으나 가해자는 이름 대신 소속기관을 거명하는데 그쳤다.칠레의 이같은 과거청산 방식은 동유럽,남미,남아공 등 14개국이 모방하는 세계적 모델로 예시되곤 한다. 한편 76년 미 워싱턴에서 전외무장관을 살해한 범죄는 군부의 사면법에서도 제외되었는데 92년11월 장기조사 결과 군부의 정치탄압 실행기관인 국가정보국 소행으로 밝혀졌고 당시 국장인 콘트레라스 퇴임장군과 참모장 에스피노사 현준장은 각각 7,6년형을 선고받았다.이 선고는 올 5월 최고법원에서 확정되었지만 피노체트 장군과 장교들은 콘트레라스 장군을 해군병원으로 피신시켜 에스피노사 준장만 현재 수감중이다. ◎남아공/「진실 및 화합을 위한 위원회」 창설/과거 인종차별 범죄행위 조사키로 지난 7월20일 넬슨 만델라 남아공대통령은 「진실및 화합을 위한 위원회」를 창설한다는 법안에 서명했다.만델라는 이 위원회가 흑백 인종차별 정책 아래 저질러진 숱한 인권탄압 등 국가의 주도 아래 벌어진 범죄들을 조사·단죄하기 위해 창설되며 창설 후 18개월간의 한시적 활동을 통해 인종차별 정책 아래 저질러진 모든 범죄행위들을 철저히 조사,남아공의 어두운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아공국민들은 대부분 이 위원회의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인종차별정책에 따른 피해가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현재 남아공의 연정을 이루고 있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나 국민당도 모두 겉으로는 이 위원회의 취지에 찬성하고 지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이들 정치인들이 이 위원회의 활동을 전폭 지지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과거의 범죄행위들이 정말로 철저히 파헤쳐지면 과거의 백인 소수정부를 이끌었던 데 클레르크 부통령의 국민당측은 물론 만델라 대통령의 ANC측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일부 관측통들은과거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가져올 정치적 대가가 도덕적인 사기 앙양에 비해 훨씬 클 것이라며 과거의 범죄행위가 어디까지 파헤쳐질 수 있을 것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범죄가 밝혀지더라도 처벌에 있어 어떤 예외조치가 취해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만델라 대통령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며 과거의 범죄행위를 밝혀내는데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 총선 앞둔 러시아/예브게니 바자노프(지구촌 칼럼)

    ◎겉으론 평온 속으론 혼돈/정치세력 4개로 분열… 의회 무기력·정국 불투명 가속화 오는 12월 총선을 앞둔 러시아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인다.무역수지가 점차 개선되고 현대식 빌딩건설이 러시를 이룬다.유명한 테니스 토너먼트도 잇따라 열리고 있다.상점들에 가보면 이전에 보지못한 최고급의 의상,상품들이 넘쳐나고 있다.고속도로나 모스크바 시내 곳곳에는 사치스러울 정도의 광고판들이 범람한다.정부 공식통계를 보면 모두가 낙관적이다.최근 월평균 인플레이션이 과거의 20%에서 4%로 떨어지고 식료품 가격이 전혀 오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산업생산은 회복세로 접어들었고 루블화도 미국의 달러화에 비해 안정세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거리의 폭력도 줄어들고 있고 반정부 데모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관적인 것들은 실제의 러시아와 관계가 멀다.정치권은 사분오열돼 정쟁을 일삼느라 민생에는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다.집권세력은 그나름대로 분열됐고 야당은 야당대로 분열돼있다.경제수치와 관계없이 일반국민들의 가계는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다.범죄와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지만 치안은 여전히 마비상태에 가까워 어두워지면 외출하기가 여전히 겁난다. 총선을 앞둔 현재 정치세력은 크게 4대 세력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바로 91년 공산주의 몰락 직후 세력을 장악한 소위 민주세력과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해 중도적인 개혁을 표방하는 온건중도세력,그리고 반민주세력으로 공산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들이다.앞의 2세력은 러시아의 혁명적인 동요상태에는 반대한다.그들은 점진적인 방법으로 안정을 유지시키려 한다.그럼에도 이들 진영 사이에는 통합하려는 움직임은 전혀없다.바로 2년전 민주진영은 정권을 잡았다.예고르 가이다르전총리가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고 옐친대통령의 지원을 받았다.사실 옐친대통령은 당시 자신을 민주진영이라고 밝혔다.93년 총선에 졌을 때 옐친은 생각을 바꿨다.자신을 선거에서 패배한(민주진영) 사람들과 격리시켜야한다는 것을 알았다.가이다르를 따라 다른 민주진영사람들이 정부에서 물러났다.개혁실패에 대한 좌절감,분노,사상적 괴리,개인적인 야망들 때문에 민주진영은 또 그들대로 분열됐다.정부에 몸담았던 관리들은 모두 정당을 만들어 나갔다.그러나 대다수의 정당들은 지지자가 작고 약하고 절망적이다.총선에 나가기는 역부족이다. 중도세력들은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그들은 원래 확신에 찬 민주세력이기보다는 정권을 즐기면서 현재상태를 지속시키려는 사람들이다.옐친대통령은 현재의 중도적인 관리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옐친은 유권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몇개월전 두 중도정당의 형성을 승인했다.하지만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체르노미딘 총리가 이끄는 「우리조국­러시아」당은 최근 지방선거에서 상당한 의석을 잃었다.두번째 정당은 현재 의회(두마)의 의장인 립킨이 이끌었으나 초기에 무너져버렸다. 반개혁진영은 바로 공산당과 민족주의 계열이다.이들은 다시 수십개의 정당으로 분열돼 있다.최대그룹은 겐나디 주가노프의 공산당이다.주가노프는 구소련 부활을 원하고 있고 서방과 다시 경쟁관계에 있길 원하고 있다.그는 나토의 확장계획,반세르비아계 정책들을 원위치시키겠다고 위협한다.민족진영은 많은 장성들과 구소련 때의 군산복합체의 관리들로 이뤄져있다.그들은 소연방 복원,초강대국 러시아 재탄생,서방체제에 대한 반감 등을 갖고 있다.가장 강력한 민족진영세력은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가 이끄는 자민당이다.현재 그는 15%의 의석을 갖고 있다.여기에 두 강적이 도사린다.전부통령 루츠코이와 레베드 장군이 각각 이끄는 정당들이 그것이다. 이들 4세력들­민주·중도·공산·민족진영­은 다가오는 새 의회에서 각기 동등한 의석을 확보할 것으로 전망된다.옐친대통령으로서는 최고로 바라는 양상이다.하지만 93년 채택된 헌법하의 이 의회는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힘을 갖지 못한다.의회세력들은 더욱 분열돼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의회는 자의적인 대통령의 포고령을 막지도 못하고 있다.옐친대통령은 각 그룹 세력을 적당히 내각에 이끌어들이거나 희생시키면서 의회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다고 해서 옐친이 대통령이 다시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옐친의 인기도는 바닥권이다.옐친이 다음선거에서 이기려면 주요 개혁정당과의 연합전선이 불가피하다.하지만 이것 역시 어렵다.각 진영마다 서로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심지어 중도진영에서조차 현 체르노미딘 총리와 리슈코프모스크바시장 등 두 강력한 후보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있다.이러한 정치의 불투명성 때문에 정치분석가들은 옐친 대통령이 대통령선거를 취소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펴고있다.이렇게 되면 러시아는 다시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 「노씨 사건」 처리와 정경유착 근절/김석준 이대교수(서울광장)

    노태우 전 대통령의 천문학적인 정치비자금사건은 온 국민을 경악시켰음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한국의 수치가 되고 있다. 비자금의 전모가 노출되면서 국민의 심리적 박탈감,상실감,집단스트레스,권위에 대한 불신,교육현장에서의 혼란,정치권의 무기력과 무책임성,기업뇌물규모에 대한 경악 등은 일반국민의 일상생활마저 뒤흔드는 가치혼란상태를 유발시켰다.특히 재벌기업의 규모와 뇌물액수의 비례하는 관계는 정부와 기업의 구조적인 관계가 전직대통령의 부도덕성과 함께 어우러져 이번의 수치스러운 사건을 일으켰음을 짐작케 한다. 노씨비자금사건을 보면서 노씨개인의 파렴치성과 부도덕성,지도자로서의 덕성결여,인격파탄적인 이중성 등과 같은 개인으로서의 인격적·심리적 측면을 온 국민이 비난하고 있다.대선에서 지지한 유권자의 배신감은 더욱 심각하다.이번 사건이 노씨의 개인비리와 부정부패사건으로 철저히 규명되고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5공관련 정치자금문제나 14대대선자금과의 관계도 검찰권의 중립적인 행사에 의해 철저히 밝혀지고 이에 따라 관련정치인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이다.이번 사건을 구시대의 잘못된 정치관행으로 본다면 이와 관련된 정치인은 반드시 새시대의 정치를 염원하는 국민의 시야에서는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노씨사건을 냉철히 분석하여 정치인이나 국민의 의식개혁뿐만 아니라 적절한 제도개혁을 통해 생산적으로 극복해야 하겠다.그동안 소진한 국민의 에너지와 세계속의 한국의 지위후퇴는 보다 큰 결실로 맺어질 때만이 그 대가를 긍정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특히 노씨사건이 가져온 국가위기적 상황은 5·16이후 군부권위주의통치가 낳은 구조적인 성격이 상당부분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제 문민시대의 실질적인 실현을 위해 지난 30여년간의 권위주의체제를 극복하고 정경유착의 구조를 정치제도적으로 해소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때다. 첫째,정경유착과 이에 따른 권력의 부패방지를 위한 법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정보공개법 제정,공직자윤리법 개정,내부고발자보호법 제정,금융실명제법및 부동산실명제법 강화,전직대통령예우법 개정,상훈법 개정 등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특히 이번 정기국회에서 정보공개법은 반드시 통과되어야 한다.정부내의 관련부처간에 이견을 보이고 경제관련부처가 강력히 반발하여 주무부처인 총무처의 입법추진이 정부차원에서 지연되고 있다는 보도는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특히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및 관련인사들이 이번 노씨 비자금사건의 폭로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을 인정하지만 아직도 이 사건이 철저히 밝혀지지 못하는 데에도 역시 일정부분 기여하고 있음을 상기할 때 경제관련부처의 정경유착근절을 위한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나아가 이번 사건에서도 부정부패와 비리사건의 경우 내부고발이 결정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부고발자보호법의 제정도 최우선 당면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이외에 전직대통령예우법의 전면개정 또는 폐지와 상훈법의 개정도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깨끗한 정치를 위한 선거법·정치자금법·정당법 등의 전면적인개정및 부패방지법 제정이 있어야 한다.정치문화의 지속적인 개혁과 더불어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지역구 의원수의 감축,정치자금의 완전한 주기적 공개및 「전용통장」에 의한 관리,선거공영제의 확대,당원의 정예화,당비납부 당원의 후보추천권 부여,상향식 후보공천,중앙당기구축소와 지구당의 폐지,감사원 또는 부패방지위원회의 기능강화,특별검사제 도입 등의 제도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이들 내용 하나하나마다 많은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나 여러가지를 고려할 때 최소한 위의 내용은 실천되어야 할 일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건의 엄중한 처리와 더불어 정치제도개혁 외에 정치세력 및 정당의 인적 구조가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구시대정치에 물든 기존정치 지도자나 정치인으로서는 새로운 한국의 역사를 열어나가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은 대부분 국민이 공감하면서도 선거때면 지역성과 파벌성의 포로가 되고 있는 유권자가 먼저 깨어나야 한다.이와 함께 지난 30년간 정치정체와 후진성의 상징적인 인물의 자진퇴장 위에 새로운 참신한 정치신인의 정치권진입이 대규모 있어야 한다.이점에서 여야를 초월하는 기존정치권의 혁명적인 개편이 있어야 한다.이번 사건이 새 역사를 여는 문민혁명으로 승화되길 기대한다.
  • 서울신문 21세기 새 도약 발진/창간 50돌 기념리셉션 이모저모

    ◎내빈들,“기록성과 정확성의 신문” 평가/“제2 창간의 비전” 선포로 분위기 피크 22일 저녁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서울신문 창간 50주년 기념리셉션에는 황락주국회의장과 이홍구국무총리,민자당 김윤환대표,국민회의 김대중총재,민주당 박일·홍영기공동대표,자민련 김종필총재 등 정당대표와 이한동국회부의장,최형우·김상현·김원기·정대철·서정화·신기하·김종호의원 등 여야의원을 비롯해 정계·관계·재계·법조계·문화예술계·연예계 등 각계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하오 6시부터 90분동안 진행된 이날 행사는 개식선언을 시작으로 축시낭송·홍보비디오 상영·사장 기념사·외빈 축사·축가·축배의 공식행사와 사물놀이와 연예인의 축하공연 등 여흥의 순으로 진행돼 축하분위기가 넘쳐 흘렀다. ○…행사장에는 오세창 초대사장의 창간사와 함께 「매일신보는 이제 혁신되어 이름조차 새로운 서울신문으로서 냅떠나서게 되엇다」는 사설을 실은 1945년 11월23일자 창간호를 비롯해 건국이후 역사의 굴절을 고스란히 담은 서울신문의 옛 지면을 전시,지난 반세기의 발자취를 되새기게 했다.또 가로 3.5m,세로 2.5m의 대형 멀티비전 2대와 레이저광선을 이용한 화려한 조명,비디오쇼 등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진행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계진 아나운서의 개식선언과 연극인 박정자씨의 축시 낭송,홍보비디오 상영에 이어 손주환서울신문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창간 50돌을 맞아 제2의 창간을 선언한 서울신문은 국민과 정부를 잇는 가교임을 자임하면서 21세기 세계 초일류 고급지로 성장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이어 황락주국회의장은 축사를 통해 『거짓과 허위로 가득찬 이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정직』이라면서 『서울신문이 정직한 신문,국민의 신문으로서 정직하고 밝은 사회를 이뤄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또 이홍구 총리도 『서울신문의 진정한 가치는 정확성과 역사적 기록성』이라면서 서울신문의 발전을 기원.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귀빈들의 축하케이크자르기와 축배의 순서.무대 앞 중앙에 마련된 길이 4m의 대형 케이크에는 10년을 뜻하는 1개의 대형촛불과 1년을 뜻하는 40개의 소형 촛불이 밝혀졌다.황락주 의장과 이홍구 총리·김윤환 민자당대표·김대중 국민회의총재·박일 민주당공동대표·김종필 자민련총재·노신영 전총리·현승종전총리·오인환 공보처장관·손서울신문 사장 등이 손을 맞잡고 축하케이크를 잘랐다.이 자리에는 지난 50년동안 서울신문을 애독해 온 독자 함종락씨도 함께 해 뜻을 더했다.이어 오공보처장관의 제의로 내빈 전원이 서울신문의 발전을 기원하며 축배를 들었다. ○…이날 공식행사에 이어 전문 MC 임백천씨의 사회로 열린 3부 축하공연은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우렁찬 연주로 시작,영화배우 오정해씨의 판소리와 인기가수 유열·민해경·조영남씨의 대중가요 열창으로 이어지면서 참석자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 지방촬영중 어렵사리 참석한 오정해씨는 판소리 「춘향전」중 한대목과 함께 민요 「성주풀이」를 서울신문의 발전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개사해 불러 절정의 분위기를 이끌어내기도. ○…더욱이 여흥행사뒤 끝에는 약 5분간에 걸쳐 「21세기 제2창간을 다짐하는 서울신문의 비전」선포식이 마련돼 장내를 숙연케 했다. 손주환 사장이 점화단추를 누르자 은빛 테이프 물결속에 「창간 50년 최고급 정론지」「정부와 국민을 잇는 서울신문」「통일을 이끌 정론지」라고 쓰인 휘장이 팡파르와 함께 솟아 오르며 대미를 장식.
  • 해외동포 어디에 얼마나(서울신문 50돌 특집)

    ◎그들의 위상은 어떠한가/6대주 142국에 520만명 근면·성실로 기반 확고히/2년새 5.7% 증가… 중국에 최고 194만 거주/미 180만·일 69만·중앙아시아 46만명 생활/최근 취업·유학·투자이민 급증/망국·가난의 한 딛고 현지 빠른 적응/정·관·재·교육계서 활약 숱한 인재 배출/한민족 동질성 유지가 최대의 과제로 구한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주로부터 시작된 한국이민사가 90여년에 이르면서 해외교민수가 5백만명을 넘어서고 있다.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그리 길지않은 역사이지만 한민족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어느 나라에 얼마나 살고 있으며 그들의 현재 위상은 어떤가를 알아본다. ▷교민현황◁ 94년12월31일을 기준으로 외무부가 파악하고 있는 우리의 해외교포는 모두 5백22만8천36명이다. 지역별로는 아시아에 2백72만,미주에 1백96만,유럽에 52만,중동에 9천2백,아프리카에 3천2백명이 분포하고 있다. 국가별로 볼 때는 중국에 1백93만명으로 가장 많다.이어 미국에 1백53만,일본에 71만,러시아를포함한 독립국가연합에 46만명이 거주중이다. 전세계 1백92개국 가운데 우리동포가 살고 있는 나라는 무려 1백42개국이나 된다.중국이나 미국·일본등처럼 역사적인 이유로 우리 민족이 옮겨간 경우도 있다.그러나 우리동포의 분포가 이처럼 넓어진 것은 최근 늘어난 선교이민과 태권도교관의 파견 때문이라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 2년마다 해외교포의 현황을 파악하는 외무부가 92년12월31일자로 파악한 해외교포는 4백94만3천5백90명이다.해외교포는 지난 2년동안 5.7%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해외교포가 증가한 것은 교포의 2세·3세·4세가 태어났고,해외경제활동의 증가로 우리 기업등의 파견원이 많이 진출하기 때문이다. 해외교포 가운데 95%인 4백70만명은 거주국의 국적을 갖고 있거나 거주국에서의 영주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나머지 5%는 상거래나 취업·유학등으로 체류중이다. ▷중국 교민◁ 중국에 한국인이 건너간 것은 매우 오래 전의 일이다.이미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부터 전쟁포로나 인질·공녀등의 형태로 한국인의 이주가 시작됐다.그러나 중국에 2백만의 교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하면서부터다.외무부에 따르면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민의 중국이주가 급격히 증가,1907년에 7만1천명,1910년에 10만9천명,1916년에 20만명,1921년에 30만7천명이 조국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방이후 80만명 귀국 1945년 이전까지 약 2백16만명의 한국인이 만주지역에 거주했으며,해방과 더불어 80만명이 귀국하고 나머지가 잔류했다. 현재 우리교민은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12번째 규모다.전체의 약 97%인 1백87만명이 길림성,흑룡강성,요령성등 동북 3성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특히 길림성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82만명이 밀집해 살고 있다. 중국 교민들은 해방후부터 냉전시대까지 남한과는 별다른 접촉을 가질 수가 없었다.따라서 정부도 이들에 대해 특별한 정책을 세울 수 없었다. 지난 88년부터 우리정부가 사회주의권 교민의 자유로운 모국 방문을 허용함으로써 중국동포와의 교류가 본격화됐다. ○동북 3성에 집단촌 그러나중국교민들의 모국 방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교민들이 경제수준이 월등한 모국에서 돈벌이를 하고자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밀입국,불법취업,취업사기,절도·강도등의 사건이 잇따랐다. 정부는 이에 따라 중국교민들에 대한 사증발급 심사를 강화하고,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현지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중국내에서 교민들은 한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수준과 경제·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또 중국 교민들은 스스로를 한국인 혹은 북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조선족 중국인으로 생각한다. ▷미국 교민◁ 한미우호통상조약에 따라 1903년 한국인 1백21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나면서 미국 이민사가 시작됐다. 이후 1961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이래 지난해까지 모두 62만6천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이 기간 동안의 총 해외이주자 79만2천명 가운데 미국이민 비율이 79%를 차지하고 있다. 재미교민의 상당수는 한국내의 중산층,식자층 출신이며 자녀의 교육문제,경제적 이해관계,혹은 한국사회에서의 불만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사람들이다. ○구한말 하와이로 나가 이들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이민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물론 언어장벽과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아직 미국사회의 주류에 진출하는데는 한계를 보이지만,최근들어 의사·변호사등 전문직 진출자가 늘어나고 있다.캘리포니아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김창준씨가 대표적인 한국교민의 성공사례이다. 교민 1.5세와 2세 이후세대는 현지에서 교육,성장해 비교적 빠르게 현지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 또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교민 사회에 북한과의 교류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고,과거 음성적으로 활동해오던 친북인사의 활동도 표면화하고 있다고 외무부 당국자는 밝혔다. ▷일본 교민◁ 일본에 거주하는 교민들은 다른 지역의 교민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태평양전쟁 발발후 일제가 전쟁수행을 위해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강제적으로 징용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강제 징용자의 숫자는 19 45년 당시 2백10만명에 달했으나,해방후인 46년 이후 65만명이 잔류하고 있다. 재일교민들은 오사카를 필두로 나고야·고베등지에 밀집해 거주하고 있으며,주로 상업 제조업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본교민들은 본국에서의 좌·우익 대립을 그대로 답습,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그러나 최근에는 남북간의 국력차이가 워낙 커져서,민단과 조총련이 특별히 경쟁하는 양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교민1세들은 우리국적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으로,일본에 귀화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민 2세이후부터는 모국과의 연대의식이 희박해지고 있으며,이에 따라 일본에 귀화하는 사람이 늘고있다.지난 50년 이래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은 모두 20만명 정도다.특히 교민 2,3세들은 일본인과의 결혼을 선호해 91년 결혼한 사람 가운데 82.5%가 일본인 배우자를 맞이했다. ▷독립국가연합지역 교민◁ 현재 옛 소련 지역내에는 러시아에 11만명,우즈베키스탄에 22만명,카자흐스탄에 10만명,우크라이나에 9만명등 모두 46만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이들은 대부분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된 우리 교민의 2,3세들이다.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뒤 이들은 자연적으로 그곳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따라서 우리말과 문화적 전통을 많이 잃은 상태고,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교민들 말고는 우리말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도 적다. 그러나 이들은 국제고려인단체연합회등 31개의 교민단체를 조직,모범적으로 혈연의식을 이어가고 있다.또 이를 바탕으로 각종 문화단체 활동,출판물 발간활동과 함께 대학교수,영농지도자를 다수 배출했다.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각 공화국은 우리교민의 근면성,높은 교육수준과 사회기여도를 평가하고 있다. ○사회기여도 평가 받아 이 지역에 대해서 정부는 물론 민간기업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우리업체와 현지 교민들간의 고용과 취업지원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내각 안에 「민족문제 및 지역정책부」가 설치돼 소수민족과의 화합 및 육성지원 정책을 마련한다고 표방하고있으나 체첸 공화국 사태에서 보듯이 러시아의 범위를 이탈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정부는 이러한 점을 감안,교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민족의식과 민족적 일체감을 고양하기 위해 한글교육,전통문화 재생,학술·체육 교류를 중심으로 지원책을 마련해가고 있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4만명의 교민들 가운데 1세들을 본국으로 귀환하는 문제는 한·러·일간의 현안으로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주추이◁ 우리나라의 최근 해외이주자 추이를 보면,80년 3만3천3백명에서 83년에 2만3천3백명으로 하강세를 보이다,86년 3만7천80명으로 다시 늘었다.이후 다시 감소해 93년에는 1만4천4백명으로 매우 낮은 수치를 나타냈다. 그러나 사업과 취업이주는 지난 10여년동안 꾸준히 증가했다.이는 그동안의 연고초청 이주,즉 막연한 동기의 해외이주보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이주형태가 늘어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민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역이민도 늘어나고 있다.80년 역이주자수는 1천49명으로 그해 이민자의 2.8%였다.86년에는 역이민자의 비율이 7%를 차지했다가 89년 25%로 급증했으며,91년 40%,92년 50%를 기록한 뒤 93년에는 60.65%를 차지,이민자의 반이상이 되돌아오는 현상을 보였다. 역이주자수가 늘어나는 이유는 우리국민의 소득수준이 향상돼 국내에서도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외무부는 설명하고 있다.같은 이유로 해외이주자수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고 외무부는 밝혔다. 최근 국내외에서 해외교민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의 하나로 해외동포에 대한 이중국적을 허용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해외교민에게 이중국적을 부여, 국내 왕래를 자유롭게 하고 각종 할동 및 재산권 행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교민의 권익을 크게 신장할 수 있는 방안이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점을 수반한다. 우선 교민들이 국적을 가진 두나라로부터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동시에 부여받게 되고, 범죄가 발생할 경우 자국민 불인도 원칙을 고수, 외교적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 또 납세·병역 등 의무를 다하는 국민들과 비교할 때 권리행사와 의무이행의 형평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다른 국민들과 위화감이 조성될 우려가 크다.
  • 서울신문에 미친 사회풍속도 세태 50년:Ⅱ(서울신문50돌 특집)

    ◎70년대/「보릿고개」 넘기자 미니스커트 상륙/비상계엄 후유증 「카더라 통신」 난무 70년대 70년대는 유신체제라는 스펙트럼이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잣대로 작용했다. 유신체제는 우선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로 국민들의 새벽단잠을 깨우며 다가왔다. 전국 농·어촌에 새마을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등 해외에서도 새마을 붐을 불러 일으켰다. 서울신문도 71년부터 정부의 본격적인 사업전개에 앞서 새마을가꾸기 선두부락을 소개하는 기획물 「번영을 가꾸는 희망가족 시리즈­의욕의 현지,북돋는 자립,땀흘린 보람의 합창」이란 고정컷으로 본지 최초의 새마을운동 기획물을 72년초까지 50회에 걸쳐 연재함으로써 이 운동의 확산에 큰 몫을 담당했다. 72년 3월24일자 사설에선 이 운동을 「농민들이 스스로 잘살기 위해 자조·자립·협동하는 정신의 계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70년 7월7일 경부·호남고속도로 개통에다 71년 3월31일 서울·부산 자동전화 개통은 「일일생활권」이라는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정부의 이러한 불도저식 경제 최우선 정책으로 국민들의 배고픔도 어느 정도 해결되기 시작해 국민들의 얼굴에 미소가 띠기 시작했다. 환해진 모습은 먼저 옷차림에서 띠였다.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선보인 미니스커트는 73년에는 무릎위 17㎝위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그 길이가 짧아져 경찰이 경범죄처벌대상에 미니스커트 길이를 포함시켜 자를 들고 다니며 이를 단속하는 진풍경을 빚기도 했다.남자들의 긴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을 비롯한 청년들은 청바지를 즐겨 입고 통기타와 생맥주로 이어지는 이른바 「청통맥문화」를 만끽했다.「사랑해」「왜불러」등의 포크송이 거리를 메웠으며 「아침이슬」「고래사냥」등 금지곡도 양산됐다.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을 염원해 온 국민들에게 벅찬 감격과 흥분으로 소용돌이쳤다. 이날자 본지는 「피맺힌 4반세기…이제 전쟁은 사라지는가! 3천리에 벼락환성」「대화있는 남·북대결의 시대 열리다」라는 제목으로 당시 시민들의 반응을 실감있게 전하고 있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근로조건개선을 요구하며 평화시장 교복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씨의 분신자살 사건은 이러한 고도성장 드라이브 정책이 필연적으로 맞을 수 밖에 없는 종착점을 예고한 사건과 다름 없었다. 72년 10월 17일에는 비상계엄선포로 국회가 해산되고 대학이 문을 닫고 신문·통신마저 사전검열을 받으면서 국민들은 「카더라 방송」「유비통신」으로 불리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한 유신국회의원들이 장충체육관에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거수기」로 변한 것이나 비상계엄 아래서도 반체제 인사들의 저항과 민주회복운동,양심선언 등이 계속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을 예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신정권은 「그때 그사람」이라는 노랫가락 속에 울린 몇발의 총성과 함께 79년 10월26일 막을 내렸다. 10·26사태 뒤엔 「한다면 합니다」란 말과 5·17후의 떡고물 얘기가 유행했다.부정축재자로 지목된 L씨가 자신은 떡(정치자금)은만졌으나 고물(부스러기돈)만 떨어졌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70년대 종반은 79년 12월 12일 신군부의 군사반란에 이어 80년 5·17일 쿠데타로 또 다른 군사정권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80년대/“금융사기” 장영자에 “큰손” 조롱/테러범 김현희에 구혼 줄잇고/“탁치니 억하고 죽었다”엔 분노 79년 10월26일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을 뒤로 하고 80년대를 앞두고 있을 때만 해도 국민들은 비로소 「서울의 봄」을 맞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9년 12월12일 이른바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탈취를 노린 신군부는 압제와 서슬 퍼런 군사독재의 시대로 80년대를 열고 있었다. 80년 5월17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8일 군부독재 연장기도에 맞서 광주에서 발생한 항의시위를 공수부대 특전단을 동원해 총검으로 유혈진압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결국 신군부는 그해 9월1일 전두환 정권을 탄생시킨다.그리고 이날부터 TV에는 「땡전뉴스」가 등장하게 된다.9시 뉴스는 어김없이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으로 시작됐던것이다. 80년 11월12일에는 언론통폐합과 언론기본법 등이 제정돼 기자들은 강제해직을 면치못했고 언론은 통폐합 됐다. 이같은 압제는 학생운동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다.학생운동은 광주항쟁에서의 좌절을 계기로 반미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표출됐고 급기야 82년3월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했다.이는 85년 서울·광주 미문화원 점거로 이어졌다. 82년 5월에는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했다.6천억원대에 달하는 건국후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으로 이때부터 사람들은 씀씀이가 큰 사람을 「큰손」이라 일컫기도 했다. 분단의 아픔은 80년 대에도 지워지지 않았다.83년 9월1일에는 사할린 부근에서 항로를 이탈한 대한항공 보잉007기를 소련의 전투기가 공격,승객과 승무원 등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고 그해 10월9일에는 서남아시아 순방에 나선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관리 13명이 미얀마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북한공작원이 설치한 폭탄에 절명,분노를 자아냈다. 그같은 분노는 87년 6월 테러범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기에 폭탄을 설치,1백51명의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로 절정에 달했다.그러나 압송돼온 김현희의 미모에 반해 결혼하고 싶다는 남성들의 문의가 쇄도했다는 웃지 못할 뒷얘기도 남겼다. 87년 1월14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도 시대의 아픔을 공유케 했다.「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발표는 폭력적인 공권력과 인권침해에 대한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 일으켜 6·29선언을 낳게 했다.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요구에 굴복해 나온 이 선언은 후에 「죽이구」선언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였지만 변화의 물결도 뚜렷했다.80년 컬러TV 시대가 개막됐고 82년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됐다.또 비디오문화가 새롭게 열리기 시작하면서 외설문화의 범람을 초래하기도 했다. 80년에는 또 대입본고사 폐지,대학정원의 졸업정원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교육개혁조치와 함께 과외 전면금지가 단행 됐다.이에 따라 숨어서하는 과외가 성행,수백만원대의 과외풍조가 생겨났으며 「쪽집게과외」 등 돈으로 교육을 사는 세태를 낳기도 했다. 82년 중·고생 두발자율화,83년 교복자유화 등의 조치는 청소년들의 유흥업소 출입 등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했으며 유니섹스모드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90년대/3D기피 현상속 세계화 바람타고 외국어 수강 “붑” 93년 2월25일 제 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문민정부」가 탄생했다.5·16 이후 30여년만에 민간대통령이 탄생한 만큼 90년대는 사회 모든 분야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안으로는 금융실명제 등을 통해 사회개혁의 기치를 높이 드는 사이 49년간 북한을 통치해온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체제가 들어서는 등 안팎으로 많은 소용돌이가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90년대를 특징짓는 함축적인 표현은 이른바 「X세대 문화」다. 뒤돌아볼 겨를 없이 성장가도를 달려온 부모·선배 세대가 만들어 놓은 과실을 향유하는 신세대들의 시대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주의적이라는 부정적인 측면과 함께 개성적인 새대라는 의식이 공존 한다.알아들을 수 없는 「랩」을 흥얼거리며 록카페를 드나드는 「오렌지족」인가 하면 마음만 먹으면 배낭하나 덜렁 메고 유럽이고 미국이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라도 찾아나서 모험을 즐기기도 하는 세대들인 것이다. 컴퓨터 없이는 아무 것도 할수 없지만 정보화시대를 앞당기며 국제화와 세계화를 이끌 첨병도 바로 그들이다. 젊은이들의 문화가 인간성 상실로 인한 황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적 대중문화의 병폐를 양산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컴퓨터나 외국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30∼50대 「컴맹세대」가 느끼는 세대간의 문화적 격차일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수대교 붕괴사고,서울 아현동 가스폭발사고,삼풍백화점 붕괴 등 90년대 들어 빈발하고 있는 대형사고들은 선배세대들의 부정적 부산물일 뿐이며 그점에서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인 것이다. 하지만 즐기는 신세대로서의 그들은 3D 기피현상이라는 어두운 한 단면을 90년대에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고학력 구직난,저학력 구인난」현상과 외국인근로자의 양산도 바로 그들의 시대를 특정짓는 모습들이다.
  • 무역마찰 해소 분쟁조정 서비스 도입/APEC정상회의 선언문 요지

    1,아태지역의 역동성과 공동체 의식을 고양시킴으로써 이 지역과 세계전체의 번영과 안정을 도모한다.APEC은 21세기를 향한 황금같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2,블레이크 아일랜드에서 합의된 비전을 이행하기 위해 보고르회의에서 무역·투자 자유화(선진국은 2010년,개도국은 2020년까지 완성),무역·투자 원활화,개발협력등의 3대 과제를 설정한다.오사카에서는 행동지침을 채택함으로써 이 과제의 실천단계에 진입한다. 3,앞의 3대 과제 실천을 위해 자발적 자유화노력과 공동행동을 병행하며,범세계적 자유화를 위한 추진력을 유지한다. 4,범세계적 자유무역에 반하는 내부지향적 무역블록의 형성에 반대하며 개방적 지역주의 기조를 유지한다.이러한 맥락에서 APEC회원국의 WTO가입 확대를 지지하며 WTO와 APEC의 조화를 추구한다.APEC회원국간의 무역마찰은 대결적 구도에서 해결해서는 안된다.WTO와 조화되는 범위에서 분쟁조정 서비스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행동지침에서 포괄성,형평성,무차별성,투명성,자유화 완성시기의 차등성,자유화 이행과정의 유연성등 무역·투자 자유화 및 원활화를 위한 기본원칙을 정한다.이를 위한 실질적 실행계획을 96년 필리핀 각료회의까지 정하고 이 계획을 97년1월부터 이행하며 그 이행여부를 매년 점검한다.상황변화에 따라 행동지침의 변경은 가능하나 성공적인 자유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과 긴밀한 협의가 요구된다. 6,상호존중및 협력정신에 입각하여 광범위한 경제및 기술협력을 실천할 것이다. 이같은 협력과 관련하여 「협력을 위한 동반자관계」를 비롯한 다양한 수단을 추구할 것이며 이는 선·후진국간의 격차해소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유화및 원활화에 기여할 것이다. 자본이동,자본시장 발전,인프라개발을 위한 재원마련등 중요한 주제가 각료회의에서 심도있게 논의되어 왔으며 통신 및 정보·운송·중소기업·과학 및 기술등의 분야에서도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7,전회원국이 초기 가시화 조치를 제출한 것을 환영하며 이는 APEC 자유화를 촉진할 것이다.UR이행 가속화를 위한 초기 자유화조치는 통관절차의 조화와 표준·부합성 강화등 가시적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8,저명인사 그룹과 태평양 경제인 포럼은 행동지침 확립에 큰 기여를 하였다.기업활동의 중요성을 감안,APEC 기업인 자문위원회를 설립한다. 9,광범위한 협력강화와 공동체 의식의 고양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특히 인구증가및 고도성장으로 인해 식량·에너지·환경등의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이러한 문제를 공동노력을 통해 해결함으로써 아태지역의 지속적 번영을 추구한다. ◎APEC 교육재단 이란/역내 학술교류·우수두뇌 지원 김영삼 대통령이 19일 오사카 APEC정상회의에서 한국 유치 의사를 밝힌 「APEC교육재단」은 회원국간 인력개발과 교육부문에서 공동노력을 강화하자는데 설립 취지가 있다.재단이 설치되면 APEC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공동 개발하고 전문가 양성을 위한 학술교류도 추진하게 된다.장학 및 연구보조기금도 마련,회원국의 우수두뇌들을 지원할 예정이다. 「APEC 교육재단」설치 아이디어는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6차 APEC 각료회의에서 미국측이 먼저 제시했다.이에 우리 정부도 역내 인적 자원개발을 위해 재단설치가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지난 7월 삿포로 고위실무회의(SOM)에서 미국측은 APEC 교육재단이 한국내에 설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표명했다.우리 정부도 회원국들의 의견을 타진한 결과 재단의 한국내 유치가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김대통령이 정상회의에서 공식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재단이 유치된다면 그 조직을 이사회·자문회의 및 사무국으로 구성할 방침이다.이사회는 각국 정부가 추천하는 인사들로 구성하게 된다. 운영기금 조성에 있어서는 각국 정부는 물론,민간부문의 적극 참여를 유도할 계획이다. 교육재단 유치는 APEC내에서 한국의 위치를 한층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연구보조금 및 장학금 지급을 우리가 주도하게됨으로써 APEC의 장래를 결정하는 움직임에 있어 선도국이 될 수 있다.또 APEC와 관련된 주요 사무소가 한국에 위치함으로써 APEC 참여기능도 한층 제고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 민단­조총련 해방 50돌 합동 심포지엄/도쿄서

    ◎“이젠 이념굴레 벗고 재일동포 화합 이루자”/본국 정세 휘말리지 말고 우리위치 찾을때/분파주의 벗고 귀화자와의 알력 극복해야 해방 50주년을 맞아 재일동포들의 새로운 존재 형태를 모색하는 심포지엄이 3일 도쿄에서 개막됐다.이번 심포지엄은 3일 「재일동포의 화합」을 주제로 주제발표와 토론을 가진데 이어 4일 「재일동포의 법적·사회적 지위」를 주제로 계속되며 오는 18,19일 오사카에서 「재일동포의 생활과 경제활동」,「재일동포의 민족교육과 문화」를 주제로 열린다. 남북분단과 재일동포사회의 분열속에서 한국적과 조선적을 가진 동포들이 함께 자리를 하면서 재일동포의 공동체를 진지하게 모색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특히 이번 심포지엄과 관련,조총련측이 「반동분자들의 책동」이라고 비난하고 민단이 소극적인 가운데 심포지엄이 열린데 대해 참석자들은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다.이날 참석자들의 주제 발표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경수(45·리쓰메칸(입명관)대 조교수)=재일동포의 분열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초기에는일본 공산당의 영향,그 뒤에는 남북분단에 의해 분열됐다.한국전쟁의 결과 분열이 결정적으로 됐다.당시의 분열은 조직의 분열이었다.그러나 65년 한일협정결과 재일동포 사회까지 분열에 이르렀다.이같은 분열은 재일동포의 운동이 본국직결형이었기 때문이다.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운동 속의 하나로 존재하도록 상대화를 못시킨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신기수(64·텐리(천리)대 강사)=해방당시 재일동포들은 노래와 춤으로 해방을 맞았다.일본인들이 망연자실해 있을 때 동포들은 자각속에 해방을 맞았고 그 정열로 노천학교를 지어 후세를 교육하기도 했다.한국은 정치범이 8월16일 풀려났지만 일본은 2달뒤에나 풀려났다.당시 풀려나는 일본인 정치범조차 맞이하러 간 사람의 90%는 재일동포였다.이처럼 세상변화를 기대한 재일동포들이었지만 계급투쟁 우선으로 나간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조련(재일본조선연맹,조총련의 전신)은 2회 대회때까지 동반자인 민족주의자를 모두 추방해버렸다. ▲김총령(52·통일일보 편집장)=재일동포 사회의 분열이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라고 하지만 운동 지도자들의 첨예주의 과격주의 운동속에서 출세하려는 사람이 결국 동포운동을 미군정과 대립하도록 가져가고 탄압받게 만든 면도 있다.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올해 해방50주년을 화합하지 못한 채 맞이했다.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3세들이 재일동포 운동의 중심이 되고 있는 만큼 본국정세에 휘말리는 운동이 아니라 재일동포로서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는 운동이 돼야 한다.또 여러가지 단체와 운동의 존재의의와 권리가 인정되는 민주적 운동이 돼야 한다.상대를 향해 「적색 스파이」,「안기부 앞잡이」등으로 「레테르화」해서는 안된다. ▲김규일(57·재일동포의 생활을 생각하는 모임 대표)=재일동포 사회는 위기에 처해 있다.스스로 문제해결능력을 높여야 한다.민족적 민주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가 바람직스럽다.지방할거주의,정치적 분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사회적으로는 귀화자가 늘어가고 있는 것과 관련,귀화자와 비귀화자간의 간극을 극복해야 한다.또 일본 각지에서 풀뿌리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재일동포 시민운동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 가 퀘벡주 오늘 독립투표… 관심 집중

    ◎찬성땐 연방정부와 협상뒤 내년 분리/“쌍방에 손실” 최근 반대시위 잇따라 30일 실시되는 퀘벡주 분리독립을 묻는 주민투표는 캐나다 국내 뿐아니라 미국등 인접국에도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퀘벡의 독립은 국제 정치무대에서 가장 안정된 체제를 유지해온 북아메리카지역에 새로운 정치불안의 불씨가 될수 있으며 또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려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체제에 혼선을 초래하고 이 지역의 국가간 협력체제를 상당기간 후퇴시킬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시선이 더 크다. 퀘벡주의 분리독립 움직임은 주민의 82%가 불어를 사용하는데서 오는 타주와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됐다.더욱이 캐나다의 10개주 가운데 하나지만 전체 인구 2천8백만명의 4분의1이 넘는 7백30만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세계 21위의 경제규모와 엄청난 지하자원,그리고 앞선 경제력은 분리운동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2백여년을 한 국가로 살아오던 퀘벡이 분리독립할 경우 캐나다나 퀘벡 모두에게 엄청난 손실을 가져올 것은 분명하다.투표결과가 찬성으로 나타나면 1년간 유예기간을 갖고 연방정부및 나머지 주들과 경제적 정치적 협상을 마무리 지은후 오는 96년 10월30일까지 독립선포로 돼있다.협상이 원만치 않을 경우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할수도 있다.그러나 이 경우에는 국토가 양분되는 캐나다와 또 캐나다 영토에 둘러싸여 사실상 내륙국이 되는 퀘벡 간에 상당한 마찰이 예상돼 지역안정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장 크레티앵 캐나다 총리는 퀘벡주에 더많은 자치와 지원을 약속하는 개혁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면서도 찬성 결과가 나올 경우 전국민을 상대로한 2차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하는등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27일에는 분리를 반대하는 수십만명이 퀘벡주 수도인 몬트리올에 모여 캐나다 사상 최대규모의 시위를 벌이는등 반대 목소리가 절정을 이뤘다. 한편 분리주의자인 연방의회 뤼시엥 부샤르 의원과 자크 파리조 퀘벡주 총리는 찬성결과가 나올지라도 연방정부와 동반적 관계로 정치적 경제적 충격을 줄일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현재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들에 따르면 찬성이 46%,반대가 41%로 나타나 최종판결은 아직 의사결정을 하지못한 12%의 향배에 달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투표결과가 나올 30일 하오9시30분(한국시간 1일 상오11시 30분)까지는 어떤 속단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피납북자들의 비극(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2)

    ◎총 8만여명… 김규식·안재홍 등 각계 명사 다수/귀향길 막혀 고난의 세월… 대부분 비참한 최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한국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무리가 있다.그들은 바로 납북인사들이다.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끌려가 휴전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에트랑제였다.그래서 더욱더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만 2만여명 한국전쟁 기간중 북한군에 납치당한 사람들은 서울 2만7백38명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8만4천5백32명이나 됐다.이 납북자들은 대부분 북에서의 삶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소외된채 베일에 싸인 이들이 만난 비극적인 운명은 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강철교 폭파로 미처 피란을 못했던 요인들이 북한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우선 포섭대상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7월4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피란하지 못한서울과 점령지역의 주요 정치·종교·경제·문화인 등 각계 인사를 찾아내 포섭하려는 것이었다.군사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를 친·반공의 정도에 따라 5개 부류로 분류했다. 북한은 7월4일부터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 실무 집행자들로 하여금 이를 추진시켰다.이에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시청)와 성남호텔(서울 광교부근)에 납북 대상자 심사장이 설치됐다.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인사,임정요인에 대한 심사를 거쳐 이들을 북으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이들 중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요인이 들어있었다.안재홍 박열 백관수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방응모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문단 인사들이 포함됐다.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쳐 만포로 들어갔다.도중에 정인보와 이광수,최규동,방응모,김붕준,류동열이 미공군의 폭격과 지병으로 숨졌다.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장래의 한국 지도자로 꼽았던 김규식은 만포에서 16㎞ 정도가 떨어진 별오동이라는 마을에서 1950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납북인사들과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북한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별오동에는 유엔군에게 쫓겨온 북한의 주요기관이 모두 있었는데,김규식은 지병인 해소와 노환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날 때 지니고 간 약이 모두 거덜났다.당시 상황으로 약을 구할 수 없어 해소에 좋다는 토끼똥까지 달여 먹였다는 것이다.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별오동에서 8㎞를 더 들어간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홍명희를 만나 중국에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그날 압록강변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꽃다발이 개인 이름으로 도착했다.추도사를 맡은 조소앙은 날씨가 하도 추워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김규식의 시신은 상여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 트럭에 실려 장지에 갔다.땅이 얼어붙어 내려놓은 관을 땅에 제대로 묻지못하고 가장을 하다시피 장례절차를 마쳤다.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렇게 한만국경에서 막을 내렸다. ○독자 휴전운동 불발 납북자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됐던 납북자들은 전쟁이 끝나 남한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이들의 환향의지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사가 휴전과 관련한 토의를 제의한후 시작된 휴전회담은 납북인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납북자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답보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자적인 휴전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 적도 있다.북한측 연락장교들의 인솔로 안재홍 조소앙 김약수 원세훈 윤기섭은 51년 1월25일 판문점까지 오기도 했다.그러나 북한의 조종을 받은 이들은 유엔군측 연락장교 키니대령을 만나는 선에서 활동을 끝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됐지만 납북자들은 여전히 환향의 길이 막힌채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북에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휴전협정 체결 90일만인 19 53년 10월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회의 초반부터 미국측과 북측이 회담방법 등 정치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나 미·영·소·불 등 4개국이 1954년 4월부터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납북자들은 조소앙이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을 제네바회의에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북한당국에 건의했다.북한은 납북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의 통치속셈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54년 4월 중순 엄항섭과 권태양 등 납북자 대표는 제네바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소련 외무성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다.그러나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결국 이들을 제네바 국제회의에 보내지 않았다.스위스 정부가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처음부터 북한당국이 납북자들을 제네바 회담에 참가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제네바회담 참가 무산 1955년부터 김일성은 평화통일과 평화이미지 선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를 계기로 북한은 납북인사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평화통일 방안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이용을 서둘렀다.그래서 1955년 11월13일 납북요인들의 첫 공동성명으로 알려진 11·13성명을 발표하는데 납북자들이 실제 이용됐다.이 성명에는 납북인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된채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내세운 정치적 허구라 할 수 있는 선전문구만 나열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납북자들은 이후 북한에서의 독립적인 정치활동 보장을 위한 조직체 구성을 시도했다.1956년 7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결성대회가 그것이다.각지에서 모인 납북 및 월북 인사 4백여명 등 7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합법적 통일정부 구성과 국제적 중립화 선언,남북의 자유로운 내왕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협의회에는 북한의 노동당 등 친공세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또 분열이 이미 고질화돼 있었던 만큼 납북자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이 협의회는 1958년 9월9일 지도자인 조소앙이 숨을 거둔후 본래의 취지와는 멀어진채 북측의 대남 위장 정치선전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쿄대 「납북자 행적」 단행본/“북,납북 인사들 협박… 대남공세 악용”/56년 조국 통일전선 중앙위에 “동원”/“총일 앞장” 조소앙 등 강요된 맹세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의 족적을 기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란 단행본 책자를 입수했다.이 단행본은 1956년 5월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주요문헌과 참가자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납북 임정요인과 인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 재북인사들은 1956년 4월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당대회 직후인 같은해 5월24∼25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재북인사들을 대부분 초청한 것으로 밝혀져 이들을 여러 수단으로 회유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홍명희의 보고와 토론으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남한출신 정치인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윤기섭 엄항섭 송호성 김약수,국회의원 출신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박윤원 이구수 강욱중 최태규 김옥주 배중혁 구덕환 이문원 신성균이 참석했다.이밖에 남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 정치인을 대표해 토론에 나선 송호성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토론 내용을 소개했다.이들은 분단의 원인과 평화통일의 방책에 대해 토론한후 자신들이 앞장설 것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 자료는 납북인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보여 주었다.더구나 휴전 이후 정치공세를 강화한 폐쇄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 자료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 고구려 도입지 집안(압록강 2천리:10)

    ◎천년 잠든 무덤 7천8백기/뒤는 노령산맥… 앞은 압록강 물줄기/찬란했던 고구려 명당엔 잡초만 무성/유리왕이 도읍 창건… 조선족 1만5천여명 거주 장백진을 떠나 집안까지 가는데 장장 15시간이 걸렸다.아침7시에 떠났는데 밤이 늦은 10시에 도착했다.장백에서 무송까지는 버스를 타고 무송에서 기차로 갈아탔다.곧바로 집안을 들어간 것이 아니고 반드시 통화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지도를 들여다 보면 압록강을 따라 금세 쪼르르 내려갈 것만 같은 거리가 그리도 멀었다. 길림성 최남단에 있는 집안시는 아온대이거니와 대륙성 계절풍습윤기후대에 속한다.노령산맥이 병풍을 두르고 압록강이 물길을 열어놓은 집안은 햇볕이 넉넉하고 강우량도 많다.그래서 범증이라는 서도가가 집안을 「작은 강남」(소강남)이라 이름하고 이를 돌에 새겨 토구령에 세웠다.고구려가 도읍지로 정한 까닭은 풍수지리가가 아니더라도 명당임을 단박에 알차릴 수 있다. ○길림성 최남단 위치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집안시의 인구는 21만명이다.이 가운데 1만5백여명이 조선족이다.시 소재지인 집안진에는 조선족이 정확히 1천6백13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내가 간밤에 끼어들었으니 조선족 유동인구가 더 늘어났는지도 모를 일이다.어떻든 허술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날이 밝으면서 압록강가로 나갔다.험준한 산악 사이로 비좁게 촘촘이 들어앉은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가 시야로 들어왔다. 집안과 만포 사이로 흘러가는 압록강 물살이 만고의 역사를 안고 달려가는데,무심히 지나던 기차가 기적을 길게 뽑았다.여객과 짐을 한꺼번에 실은 열차가 국경의 철교를 막 건너는 참이었다.레일을 굴러가는 쇠바퀴의 굉음이 가슴을 쿵쿵 쳤다.그 찰나에 조용남의 시 「실종된 민족」의 몇 귀절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창창한 이끼를/용포로 두르고/통구의 언덕에 외로이 서서/천백년 풍우의 긴 세월」 그 시인의 시처럼 「천백년 풍우의 긴 세월」을 버티어 온 호태왕비가 집안에 있다.그리고 당시를 살았던 고구려인들이 뼈를 깎는 아픔을 들여 쌓아 올린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자리한 땅이기도 하다.찬란한동아시아의 문화를 창조하고 천년을 두고 잠든 고구려인들의 무덤이 바둑판에 올린 바둑알들 보다 더 밀집한 대묘역이 아직도 잔존했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집안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유리왕 22년의 일이니까 서기 3년에 해당한다.그 천도에 따른 뒷 이야기로 민속과 밀접한 전설이 남아있다.고구려 사람들은 단오와 추석에 조상을 위해 제사를 올렸다.유리왕도 재위 18년이 되는 해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그런데 제사상에 올린 돼지가 달아나 버려 탁리와 사비가 붙잡아 뒷다리를 끌고 왔다.변고는 여기서 생겼다.돼지가 상처 입은 것을 본 왕이 붙잡아 온 사람들을 생매장시켰던 것이다. 그 뒤에 왕은 병환에 들어 시름시름 앓아 누었다.용하다는 무당이 와서 모두가 생매장 당한 두 사람의 장난이니 제를 지내라고 했다.그래서 제를 지내기로 하고 돼지를 붙잡아 왔으나 또 달아나고 말았다.이 소식을 들은 사물택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돼지를 가져와 바치고 고구려에 귀속되기를 간청했다.유리왕은 이에 응하고 사물택이 자리했던 집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도읍지 이름을 국내성으로 불렀다. ○단오·추석때 제사지내 고구려는 유리왕의 뒤를 이은 동천왕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삼국이 정립하는 기회를 타서 위나라 변경을 쳐 승리를 거듭했다.그러자 위나라 진수요동의 대장군 모구검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이 때에 고구려 충신 뉴유가 투항하는 척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칼로 찔렀다.적은 혼란에 빠졌다.고구려군은 곧바로 적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뉴유의 공적을 기린 비석은 청나라 연호로 광서30년(1904년)도로공사 때 발견되어 현재 요녕성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고구려는 국내성에 자리를 잡으면서 수성을 쌓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한 그 해에 환도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본디 이름은 위나엄성이다.자연지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한 이 산성은 한사람의 군사가 만인을 당해낼 수 있는 지세였다.청태가 퍼렇게 낀 성벽을 기어올라 산성에 당도했다.천군만마의 발굽소리가 요란했을 산성에는 인마의 그림자조차 없고 잡초만 우거졌다. 그 천군만마가 마셔도 끄덕없었다는 음마만도 물이 말랐다.당시 80㎡의 못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물 한방울도 볼 수 없다.음마만에는 연꽃이 자라고 물고기가 노닐었다니 당시는 대단히 큰 연못이었을 것이다.대수신왕 11년(서기 28년)요동태수가 황제 몰래 고구려를 쳤을 때 이 연못에서 잡아온 잉어가 적을 퇴각시켰다는 사연이 있다.을두지가 묘책을 내어 잉어를 연잎에 싸가지고 성밖의 병졸들을 대접했더니,적이 성안에 먹을 것이 많은 줄로 착각한 나머지 퇴각했다는 이야기다. 환도산성에서 내려와 고구려 사람들이 묻힌 묘역을 찾았다.집안시에는 현재 7천8백여기의 무덤들이 널려있다고 한다.국내성시대를 살았던 역대 임금들의 무덤이 있는가 하면 고관대작을 포함한 귀족들과 평민들의 무덤이 공존하고 있다.고구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이들 무덤은 더러 전쟁에 파괴되고 심한 도굴을 당했다.집안시 마선향의 서천왕릉은 2만명 군사를 이끌고 온 연의 모용간이 파헤쳤으니 파괴의 역사는 참으로 길었다. ○광복 이후 도굴 극심 1945년 광복 이전의 도굴은 특히 심각했다.이 무렵의 도굴에서 우연히 횡재를 만난 한씨라는 가난한 농부의 에피소드가 있다.그는 통화시 기차역 뒤쪽에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느날 아침 집 부근에서 버들 광주리를 진 당나귀 2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풀로 덮은 광주리를 헤쳐본 그는 깜짝 놀랐다.그속에는 온갖 골동품이 가득했다. 순박하기 짝이 없는 농부는 임자가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농부는 하는 수 없이 물건을 팔아 부자가 되었다.그래서 광복이 되기 이전까지는 1백㏊의 땅에 1백간짜리 집과 머슴 20명을 두고 살았다.그 골동품은 산동땅에서 집안으로 이사와 살던 전씨 형제의 도굴품이었다.전씨 형제는 도굴품을 당나귀에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이를 알고 뒤쫓아 온 집안의 건달왕개에게 통화 왕바령에서 덜미를 잡혔다.왕개는 전씨 형제에게 맞아 죽었으나 골동품을 실은 3마리 당나귀 가운데 2마리가 달아나 한씨 집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 내실 경영·6공 실세 지원 “상승작용”/신한은 고속성장 배경

    ◎나 행장,이원조·이용만씨와 밀접… 특혜설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설과 관련,4백85억원의 은닉처로 드러난 신한은행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지난 해 수신고 10조원을 돌파,창사 13년만에 금융재벌로 고속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배경도 세인들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6공(91년)시절 신한은행장으로 취임,지금까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응찬 행장도 이번 비자금 파동을 계기로 뉴스의 초점으로 부각됐다.더욱이 나행장이 서소문지점에 입금된 4백억원대 차명계좌 개설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 은행에 대한 6공의 특혜설이 더욱 꼬리를 물고 있다. 신한은행은 이희건씨(신한은행 회장)등 재일교포 실업인들이 자금을 모아 82년 7월7일 자본금 2백50억원,8개 점포로 출발했다.그 후 금융계에선 파격 경영이란 소리를 들으며 6대 시중은행을 맹추격했다.특히 6공시절인 88년과 89년 3차례에 걸쳐 납입자본금을 4천3백억원으로 늘리면서 금융재벌로 급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했다.이어 90년에는 신한생명보험,91년에는 신한리스와 신한시스템을 설립,화려한 금융재벌로 등장했다.그 결과 지난 6월말 현재 점포수 1백91개,총수신 16조5천억원,납입자본금 6천1백60억원,자기 자본금 2조원으로 급성장했다. 금융계에서는 신한은행의 이같은 고속성장에 대해 은행자체의 참신한 경영기법이 큰 힘이 됐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고있다.지난 해 국내은행 가운데 최고의 당기순이익(1천5백32억원)을 냈고 세계 양대 신용평가 기관인 무디스사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사로부터 국내 민간 기업중 최고의 신용평가 등급을 받는 등 내실을 다져왔다. 그러나 정치바람이 거센 우리 금융계 풍토에서 과연 특혜 없이 내실 경영만으로 초고속 성장이 가능했겠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TK의 핵심으로 6공의 금융계 황제로 불리는 이원조씨,재무장관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던 이용만씨와 나행장의 끈끈한 관계에 주목한다.이용만씨가 신한은행장(85∼88년)재직시 상무로 근무하던 나행장은 이원조씨와 연결돼 6공의 정치자금을 관리하게 됐다는 주장이다.이용만씨가 신한은행장을 지낼때 이원조씨가 은행감독원장(86∼88년)을 역임했고 이용만씨도 90년부터 은행감독원장을 지내면서 이 세사람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는 것이다. TK(경북 상주)출신인 나행장이 고졸 출신(선린상고)으로 학연이 중시되는 금융계에서 91년 은행장의 자리에 오른 것도 이원조씨와 이용만씨 등 6공실세들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신한은행이 이원조씨 등 6공 인물들과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은행의 발전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남다른 경영능력으로 금융계의 떠오르는 별로 통했던 신한은행이 비자금의 온상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어떻게 떨치고 일어설지 주목된다.
  • 헤이그의 보스니아 전범 재판/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해외사설)

    헤이그에서 진행중인 전쟁범죄 재판은 험로를 헤쳐가야 한다.창설규약상 궐석재판은 배제되어 있고 기소된 피고인들이 옛 유고연방으로 부터 국외추방,인도될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그리고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라도반 카라지치등 최고지도층이 고문과 집단학살의 특정사안에 직접 연루되어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특히 상부기관인 유엔이 예산 위기에 놓여있어 국제사법재판소의 이 전범재판은 이런 어려운 일을 수행할 자금부족에 직면해 있다. 전범기소 검찰은 이 난관에도 불구하고 몇몇 중요한 기초절차를 마쳤다.보스니아 세르비아계 혐의자인 드라간 니콜리치 포로수용소장에 대한 체포영장이 이번주 발부될 예정이다.검찰은 또한 크로아티아가 카라지치나 반란지역을 진압할 때 저지른 최근의 범죄에 대한 증거수집에 나섰다.이미 진행중인 르완다학살 사건 재판에서는 혐의자와 증인들의 체포·출두명령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같은 작업과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저질러진 인간성에 대한 범죄는 결코 모른 체하고 묵과될 수 없다.비록 범인인도 문제가 유죄선고 및 징벌실현을 막고있긴 하지만 재판소의 「심판실」 제도는 혐의자에 대한 모든 증거가 낱낱이 제기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이것만으로도 정의실현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체포영장이 발부됨에 따라 죄를 진 혐의자는 국제사회의 추방자로서 자기 땅의 좁은 영역에 갇혀진다. 이 전범재판은 잔학행위를 사전에 저지·예방할 수 있는 국제 정의실현 체제를 향한 또하나의 진전이다.첫 진전은 40여년전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이뤄졌었다.이 느린 행진은 문제가 되고있는 분쟁지역의 평화협상 작업과 상충될 소지가 있긴 하지만 멈춤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국지적이든 세계적이든 평화정착에 대한 희망은 정의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 빨치산의 최후(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1)

    ◎지리산 본거지로 군사시설 파괴·후방 교란/휴전협정뒤 숙청·토벌로 조직 “지리멸렬” 1953년 7월27일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가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일단 마무리 됐다.그러나 남한 곳곳에서는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흔히 빨치산 또는 유격대로 알려진 대한민국에서는 「공비」라 부른 공산주의자 무장집단과의 전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이 「전선없는 전쟁」은 1956년까지 계속됐다. 남한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부터 활동 했다.처음에는 남로당 출신이 주축을 이뤘지만 1949년 3월 북한이 간부들을 파견,빨치산부대를 직접 지휘케 하면서 빨치산은 정규군에 버금가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이는 물론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남한내 공산당 조직을 재가동,전쟁 때 국군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한 조치였다. ○「남한 민중봉기」 염두 이어 전쟁 직전인 50년 6월 북한은 남한 각 도에 「정치공작대」5∼6명씩과 일부 무장병력을 다시 침투시켰다.6월10일 김달삼이 이끄는 유격대 2백50여명이 경북 청도 운문산에 유격구를 마련하는 임무를 띠고남하했다.24일에는 남도부를 사령관으로 한 766군부대(7백66명으로 구성)가 해군 함정을 이용,포항 쪽으로 상륙했다.같은 날 또 다른 유격대 2백50여명이 강원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이 부대들은 뒷날 북한 정규군과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개전 다음날인 6월26일 김일성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평양방송을 통해 「해방전쟁」승리를 위해 남한 주민들은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특히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는 더욱 강력한 주문을 했다.곧 『해방구를 확대·창설해 적의 배후를 공격,소탕하라』고 촉구했다.구체적으로는 『적의 참모부를 습격하고 철도·도로·교량과 전신·전화선등을 절단,파괴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를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민중봉기」를 염두에 둔 김일성의 이같은 요구는 당시 남한실정을 전혀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김일성의 기대에 찬 독촉이 쉴새없이 방송됐지만 어느 곳에서도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에서 20만 지하당원들이 민중을 이끌고 호응할 것』이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은 무산됐다. 물론 일부 지방에서는 빨치산의 파괴활동이 벌어졌다.가장 널리 알려진 빨치산부대인 지리산 이현상부대는 8월10일 대구 주변인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미군통신부대를 기습,미군 20여명을 살상하고 무전기 14대,소총 20정을 빼앗아갔다.이들은 8월25일에는 경남 거창 미군사령부를 습격,1백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뒤 탱크 3대,화물차 30여대를 부쉈다.9월6일에는 경북 청도에서 북한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밖에 경남 백운산유격대,경북의 배철이 지휘한 유격대,전남 빨치산,남해안유격대들이 미 공군기지를 점령하거나 경찰과 전투를 벌였고 마을 청년들을 끌고가 빨치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또 북한군 점령지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할 때는 적극 나서 북에서 내려온 공산당원들을 도왔다. 하지만 이같은 활동은 전쟁 흐름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박헌영·김일성의 기대와는 달리 빨치산은 민중과 괴리돼 있어 힘을 쓰지 못했다.게다가 전쟁전 한국정부가 꾸준히 소탕작전을 벌여 기본조직을무너뜨린 것이 빨치산 세력약화에 결정적 요소가 됐다. 빨치산은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군이 밀리면서 뿌리잘린 풀잎처럼 역사의 틈바구니를 떠돈다.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쫓겨간 10월 8일 북한 노동당 정치국 군사위원회는 남한 각 지방당 조직에 『(북한군의)조직적인 후퇴를 보장하기 위해 각 도당이 책임지고 유격대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김일성도 이틀 뒤 방송에서 전세가 불리해 「전략적으로」후퇴하니 빨치산은 뒤에서 유엔군의 발목을 잡아 북진 속도를 늦추라고 강조했다.이를 위해 ▲당을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유엔군이 이용할만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군사시설은 파괴할 것 ▲입산경험자와 입산이 가능한 자는 산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남강원도로 후퇴할 것등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빨치산은 지역별로 유격대를 재편성,산악지대에 들어갔다.이들은 나중에 완전 소탕될 때까지 산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남기 위한」처절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당시 입산자들은 민청원·자위대원등 남로당 계열과 북에서 파견한 내무서원·정치보위부원·정치공작대원이 대부분이고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도 적잖게 끼어 있었다. ○이승엽 당정 총 지휘 북한군이 후퇴하자 지리산 이현상 부대는 잠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달아나는 북한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1950년 11월 강원도 평강군 후평리에는 이현상부대를 비롯해 다른 곳에서 도망해온 빨치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이곳에는 당시 남한내 당·정을 총지휘한 이승엽이 기다리고 있었다.이승엽은 이곳에 모인 빨치산으로 「남조선인민유격대」를 조직해 이현상을 부대장으로,여운철을 정치위원으로 삼았다.이때 새로 편성된 이현상부대는 직속부대원 1백50여명 말고도 승리사단 4백여명,혁명지대 1백여명,인민여단 1백50여명등으로 구성됐다. 이현상 부대는 지리산을 본거지로 정하고 남하했다.먼저 태백산맥을 타고 1950년 12월 말쯤 충북 단양에 이르러 문경경찰서를 기습하는등 유격전을 벌였다.다시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러서는 남한내 6개 도당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이 자리에서 빨치산은남부군을 결성,통일된 지휘체제를 구성했다.이현상이 총사령관을,이영회가 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빨치산은 북한 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남부군을 해체하고 6개 유격지대 체제로 바꾸는등 여러차례 조직개편을 했다.또 북한에서 지도부와 북한군을 남파하는등 안간힘을 썼고 가끔 경찰서·열차를 습격하지만 큰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38선 일대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11월 말 한국 정부는 토벌전투사령부를 전북 남원에 설치,빨치산 소탕에 적극 나서 영호남 일대 빨치산은 치명타를 입고 지리산으로 모여들었다.이후 거듭되는 토벌작전에 몰린 빨치산은 「보급투쟁」이란 명목으로 산간마을에서 생필품을 약탈하는 것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지도자 대부분 피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것은 남한내 빨치산에겐 사형선고와 같았다.박헌영·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이 대부분 숙청되면서 빨치산은 북한정권에서 버림받게 된다.휴전협정에서도 빨치산의 지위에 관한 규정은 전혀 없어 이들에게는 북으로 돌아갈 길마저 막혔다. 1953년 4월 북한 노동당의 남로당계 숙청계획에 따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됐다.8월에는 이현상이 지리산 빗장골에서 토벌대에 사살됐다.54년 초 김지회·이영회부대가 각각 전멸당하고 빨치산의 마지막 지도자 남도부가 대구에서 체포돼 남한 빨치산은 사실상 소멸됐다.한국정부의 기록에는 1954∼5년에도 「공비 출현,소탕」사실이 가끔 등장한다. 1956년 7월13일 전북 정읍에서 「공비 1명 사살,2명 생포」를 끝으로 빨치산은 정부기록에서 사라졌다. 빨치산은 조선노동당의 혁명전략 계획에 따라 조직돼 활동한 집단이었다.이들의 투쟁은 민족사에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했다.결국 빨치산은 공산주의가 이 땅에 남긴 역사적 범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그러나 빨치산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여러 형태로 잠복해 남아 있다. ◎「빨치산 신문」 한국전중 10여종 발행/남부군 「승리의 길」 등 타블로이드판 지면 대부분 전투원 선동­선무 할애 우리 학계의 빨치산 연구는 매우 미약하다.그동안 「빨치산」이란 말조차 금기처럼 여겨온 사회 분위기에 비추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관련자료는 이우태씨(필명 이태)의 「남부군」을 비롯한 수기 3∼4종에 불과하다. 이같은 현실에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빨치산이 한국전쟁 발발이후 간행한 신문 10여종을 찾아냈다.국내 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빨치산신문들은 그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따라서 학계는 이 신문들이 빨치산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 1951년 5월5일자로 발행한 「승리의 길」10호는 타블로이드판 한장에 양면으로 기사를 실었다.앞면 머리기사는 「총사령관 로명선」이 쓴 「5·1절을 맞으면서」란 논설.『5월1일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력량과 국제적 단결을 시위하는 날』이란 의미 부여와 함께 그 내력을 소개하고 『남부군 전체 군무자 동무들』의 분발을 촉구했다.또 신문 사고의 형태로 『남부군 산하 각부대들이 3월21일부터 4월14일까지 수안보·칠성·청천·봉화·립석을 공격하여 이를 해방시켰다』고 전했다.아울러 「적 사살 1백25명,부상 30명,포로 48명,각종 무기 37정,탄약 2천2백37발」등의 전과를 올렸다고 보도했다. 1951년 11월23일자 「승리의 길」27호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 진술한 김일성의 보고를 실었다. 이밖에 빨치산 신문들은 많은 지면을 전투원 선동에 할애 했다.즉 『용감하고 귀중한 빨치산들이여,적들의 지휘처와 참모부를 기습 소탕하며 기동력을 마비시키는 투쟁을 더욱 과감히 전개하라』『리승만의 반동적 지방의회선거를 철저히 파탄 분쇄하자』는 등으로 채웠다.이따금 이명제의 서사시 「정복되지 않은 사람들」(29호)따위 문학작품이나 감상문,외신,전투실기,정찰기,여순병란 회고기등도 실었다.
  • 백혈병 나을 수 있다(최선록 건강칼럼:86)

    ◎팔·다리에 둥근 반점모양 출혈증세 보이면 의심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백혈병에 걸린 사람은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치료를 포기했었지만 이제는 화학요법과 골수이익술의 발달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백혈병은 악성 임파종이나 다발성 골수종과 함께 혈액암에 속하는데 혈액성분중 비정상적인 백혈구의 증식으로 혈액과 골수에 침입,증식하는 일종의 종양을 말한다. 이 암의 발생연령은 4세 이하의 어린이와 15∼19세 사이의 청소년 및 60세 전후의 노령층에 많이 분포돼 있다. 대부분의 백혈병은 그 원인이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방사선·바이러스·화학물질·염색체 이상 및 지나친 흡연이 주요한 원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백혈병의 가장 확실한 유발인자는 방사선이다.일본의 원폭피해자 가운데 백혈병 환자가 유난히 많은 것은 이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해준다.다음으로는 바이러스가 동물에게 백혈병을 일으키는 것이 입증되었고 화학물질인 톨루엔,항암제인 비소제제,관절염 치료제인 페닐부타존,항생제 클로람페니콜도 백혈병을 일으킨다. 백혈병에 걸린 사람은 골수내의 정상혈구가 백혈병 세포로 대치됨으로써 여러가지 증상이 나타난다.맨 먼저 적혈구 부족으로 빈혈이 생기고 백혈구 결핍으로 폐렴,패혈증,고열이 나타나며 혈소판 부족으로 피부의 자반증,코피,장출혈 등 각종 출혈이 발생한다.또 백혈병 세포의 증식으로 임파절과 간·비장이 커지고 뼈 및 관절통을 일으키며 뇌막염이 발생할 수 있다. 가정에서 백혈병의 자가진단은 비교적 수월하다.몸이 아무런 이유없이 나른하고 피곤하며 팔다리에 둥근 반점의 출혈이 생기는 동시에 통증이 오면 일단 백혈병을 의심,종합병원에서 혈액검사를 받아보아야 한다. 백혈병 치료에는 화학요법과 골수이식술이 두드러진 효과를 나타낸다.약물요법에 의한 5년 생존율은 소아 백혈병이 60%이상,성인 급성 골수염도 18% 정도가 자기 수명을 다 살 수 있다. 콩과 당근은 백혈병 치료와 예방에 두드러진 효능이 있다.더욱이 검정콩 노랑콩 밤콩 완두콩 강낭콩 등 모든 콩속에는 게니스테인이라는 항암물질이 들어 있어백혈병 세포만을 파괴하는 약리작용을 가지고 있다.
  • 계좌추적땐 전주 쉽게 밝혀질듯/「3백억 비자금설」 베일 벗겨질까

    ◎계좌번호·입금당시 수표 등 자료 충분/이 전 지점장도 돈주인 인지 가능성 커 정부가 전직대통령 비자금설에 대해 조사할 뜻을 분명히 함에 따라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3백억원을 입금한 전주의 실체가 밝혀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비자금설과 달리 3백억원이라는 정체불명의 돈이 기업금전신탁으로 입금된 사실이 확인된 만큼 실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신한은행의 설명대로라면 입금된 3백억원의 전주가 박계동 의원의 주장처럼 노태우 전 대통령이라는 증거는 없다.일부 금융계 관계자는 박의원이 일부사실과 전직대통령 비자금설을 적절히 섞어 「작품」을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면 정부가 조사에 착수할 경우 얼마만큼 베일이 벗겨질 수 있을까. 아직 구체적인 조사주체와 방법이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지난번 서석재전총무처장관의 4천억원 비자금설 발언파문 때처럼 검찰수사라는 형태로 계좌추적을 벌일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은 예금주 본인의 동의 없이 계좌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수사목적과 세무조사,감독기관의 검사 등으로 한정하고 있다. 수사기관이 계좌추적을 할 경우 우선 계좌번호와 예금주가 드러난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의 3계좌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입금당시의 기록을 뒤질 것으로 예상된다.이우근 당시 지점장이 1억원·5억원·10억원 등 자기앞수표로 입금됐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보존기간 5년인 당시의 마이크로필름을 살펴보면 자기앞수표의 발행점포를 추적할 수 있다. 발행점포에서 발행한 수표를 사용했다면 자기앞수표 발행의뢰서의 신청인이 누군인지 곧 확인된다.예금과 같은 재원을 근거로 수표를 발행했다면 계좌번호가 근거로 남는다.또 다른 은행에서 발행한 타점권을 이용해 자기앞수표를 끊었다면 다시 타점권의 발행점포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자금세탁의 전문가라면 이같은 방법을 활용했을 수도 있다. 다른 추적방법은 이전지점장의 말대로 명의를 빌려준 한신기업의 계좌에서 40억∼50억원이 빠져나갔다면 당시 지급청구서의 신청인과 발행수표를 통해 추적하는 길이 있다.다만 계좌개설과예금인출시점이 금융실명제 이전이고 철저하게 가·차명이 활용됐다면 신한은행에 예금을 의뢰한 「40대초반 남자」의 신분은 확인할 길이 없어진다.그러나 은행감독원 검사역들은 경험에 비춰 수표를 추적하다 보면 한번 이상은 실명을 사용한다고 한다.또 예금유치에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이전지점장이 전주나 예금의뢰인의 신분을 어느 정도 알 것으로 보고 있다.이번 사건이 의외로 쉽게 파헤쳐질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쨌든 이번엔 3백억원과 전직대통령 비자금설의 연계여부가 보다 분명히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은행 금융권 표정/“검찰 수사땐 한바탕 회오리”… 긴장/이미지 큰 타격… 고객 이탈 등 우려/입금 확인 해준 신한은 2명 잠적 ○…금융계는 4천억 비자금설에 대해 검찰이 수사할 것으로 알려지자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하며 긴장하는 모습이다. 계좌추적이 시작되면 업무상 불편은 물론 은행이 비자금의 은신처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명확한 증거 없이 「설」만 갖고 수사에응할 경우 큰 고객의 이탈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객이 돈을 들고 오면 우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수사결과 비자금이 예치된 것으로 드러나면 대외이미지에 막대한 손상을 입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비자금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단골로 거명돼온 동화은행은 이번에 그동안의 불명예를 씻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박계동의원의 발언 이후 당시 관련업무 담당자들을 중심으로 1백억원짜리 계좌가 개설돼 있는지 조사했으나 아무 혐의점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화은행은 이에 따라 이날 상오 박의원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계좌번호와 예금주를 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박의원측으로부터 『우리도 모른다』는 답변만을 들었다고 소개했다. ○…3백억원의 입금사실을 확인해준 신한은행 이우근 전 서소문 지점장(이사대우 융자지원 부장)은 19일 하오 잠적한 이후 이날도 출근하지 않고 행방이 묘연.동서명의로 1백억원을 예치한 것으로 알려진 이화구 역촌동 출장소장도 전날 낮부터 행방을 감춘 뒤 연락이 두절됐다. 신한은행 관계자들도 『이전지점장이 전날 얘기한 것 외에는 더이상 할 말이 없다』며 함구로 일관했다. ○…금융계 일각에서는 박의원 주장내용중 상당부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만약 비자금규모가 4천억원이라면 4천억원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라며 『더구나 계좌를 분산,입금시켰다면서 어떻게 은행원이 전체 비자금규모가 4천억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차명예금 3백억」 어떻게 될까/내년 8월13일전 실명전환땐 90억 과징금/탈세 밝혀지면 과징금외 117억∼135억 추징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차명으로 입금돼있는 것으로 확인된 3백억원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될까.이 돈의 실소유자가 누군가와 함께 처리방법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3백억원의 처리방향은 전주가 실명전환을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검찰·국세청의 조사결과 실소유주가 밝혀지는 경우 등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전주가 내년 8월 12일까지 차명예금을 실명으로 전환할 경우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에 따라 금융자산의 30%에 해당하는 90억원을 과징금으로 물어야 한다.또 이자소득에 대해 소득세 90%와 주민세 6.75% 등 이자의 96.75%를 세금으로 내야하기 때문에 이자소득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비실명 금융자산에 대한 과징금은 실명전환 의무기간(93년 8월 13일∼10월 12일)이 끝난 93년 10월13일부터 94년 8월12일까지는 금융자산의 10%,올 8월 12일까지는 20%,96년 8월 12일까지 30%,97년 8월 12일까지 40%,98년 8월 12일까지 50%,98년 8월 13일부터는 증여세 최고 세율인 60%가 적용된다.따라서 전주가 내년 8월12일 이전 실명으로 전환하면 원금의 30%인 90억원의 추징금을 내야하며 98년 8월 13일 이후 실명으로 전환할 경우 60%인 1백80억원의 과징금을 내고 이자(금리 연 10% 기준,약 1백20억원)의 대부분도 세금으로 내야 한다.한마디로 원금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검찰의 조사결과 실소유주의 탈세,불법증여,횡령 등 불법행위가 밝혀질 경우 금융실명 규정에 의한 불이익외에 관계법에 따른 처벌도 함께 받아야 한다. 전주가 법인일 경우 자금출처조사 결과 탈세혐의가 확인되면 과징금이나 이자소득세 중과 외에 관련법에 따라 법인세 30%(90억원)와 불성실신고 가산세(납세액의 20%인 18억원)·무납부 가산세(기간에 따라 납세액의 10∼30%)등 1백17억∼1백35억원 가량이 추징된다.불법증여로 드러나면 증여세(40%)와 불성실신고 및 무납부 가산세가 붙어 1백56억∼1백80억원을 추가로 물어야한다.불법조성된 정치자금으로 판명되면 전액 국가에 몰수된다.
  • 무라야마 총리 망언에 대하여(사설)

    ◎일 「한일합방 늑약」 원인무효 확인하라 유감스런 일이지만 다시 한번 일본은 대단히 교활하고 이기적이며 반성할줄 모르는 속성의 나라임을 실감한다.기회있을 때 마다 과거 일제의 한반도병합과 식민지통치에 대한 유감과 사죄의 뜻을 표시해온 일본이 그 병합조약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총리의 국회답변 망언이다.그것이 우리와의 미래지향적 우호협력관계를 강조하는 일본정부의 기본인식이라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중대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늑약합법이 기본입장 이라니 우리대통령이 심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정부가 강경대응에 나섰으며 국회가 원천무효의 결의문을 채택했는가 하면 국민과 여론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한일합방조약」이 합법적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에 대한 민족적 모독이다.일제의 식민지통치는 우리가 원해서 일본이 베풀었다는 논리가 되지 않는가.그리고 그에 의한 극악무도했던 일제통치도 합법적이며 목숨과 재산을 빼앗기고 참을수 없는 고통을 강요 당한 우리애국선열과 일반국민의 저항이 오히려 불법이었다는 주장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일합방조약」이 불법조약임은 아사히신문 사설도 지적했듯이 일본인들 자신이 더 잘 알것이다.조약이 합법적이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건은 체결당사자가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할수 있는 분위기에서 하자없는 의사표시를 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약은 자유의사가 기본조건 당시 조약체결권자인 고종황제가 강제로 체결된 「늑약」이라고 지칭했으며 서명날인도 하지않았다는 증거까지 있는 이 조약이 어떻게 합법적일수 있는가.강압에 의한 것임은 무라야마총리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그것을 한·일기본조약 체결당시 표현이 모호하다 해서 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만적 궤변이며 설사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해도 그렇게 하지않는 것이 일본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대일관계에 있어 과거사의 포로가 되지않으려 노력해왔다.동시에 미래지향적인 우호협력관계발전을 적극 지향하면서 일본의 호응을 기대해 왔다.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인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호소카와 정부 때를 제외하면 일본정부는 우리의 이같은 노력에 호응하기보다는 역으로 이용하는 인상마저 주었다.무역적자의 누적(금년들어 8월말 현재 1백7억6천만달러 적자로 작년동기비 29억2천만달러 증가)은 방치됐으며 기술이전 문제에도 여전히 무성의한 태도가 일관되었다.특히 과거사문제엔 패전50주년을 기해 채택하려 했던 일제침략전쟁 사죄및 부전결의의 증발에 이은 망언소동으로 우리국민의 감정만 자극했다. ○우리정부 미래지향 보답인가 그리고 마침내 총리의 입을 통해 한일합방조약이 합법적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망언이 다시 나왔으며 일본정부가 30년동안 지켜온 입장이기 때문에 바꿀수 없다는 궤변까지 듣게된 것이다.틀린 것이 있고 그것을 알았으면 당장에 고치고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도리요 순리일 것이다.서로의 해석에 차이가 있다면 옳은 방향으로 조정해야 하는것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다.그것이 그동안 끊임없이 계속된 일본망언들의 뿌리라면 다시는 양국관계 발전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차제에 확실히 뽑아버려야 한다.그렇지 않고는 진정한 미래지향적 한·일 우호협력관계 성립과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차제에 망언의 뿌리제거해야 일본은 언제까지 과거사의 문제로 숙명적인 이웃인 우리와의 관계를 이런식으로 방치할 것인가.갈등이 해소되고 새로운 관계의 발전이 기대될만 하면 과거사문제가 터져나와 발목을 붙잡는 것이 지난 50여년을 이어온 한·일관계의 불행한 전개였다.이같은 전개의 되풀이는 참으로 유감스럽고 한·일 양국국민 모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백해무익한 일이다.일본 정부는 종전50주년인 금년이 다 가기전에 「합방조약」의 법적인 원인무효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말만이 아닌 진심의 사과를 함으로써 이 「과거사의 문제」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어주도록 일본의 양심에 촉구한다.
  • 헤즈볼라 또 민병대 공격/6명 사망… 이선 보복 다짐

    【마르야욘(레바논)·워싱턴 AP 로이터 연합】 이스라엘이 친이란계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잇단 공격으로 6명이 사망한데 대해 보복을 다짐하고 나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헤즈볼라측이 16일 남부 레바논 이스라엘 점령지에 있는 친이스라엘계 민병대 초소를 다시 공격했다고 소식통들이 밝혔다. 헤즈볼라의 회교 시아파 게릴라들은 이날 정오(현지시간)께 남레바논군(SLA)의 소요드 초소에 총류탄을 발사,1명이 부상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그러나 이스라엘측은 이번 공격으로 SLA 소속 2명이 경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레바논 보안 소식통은 이스라엘군과 SLA 전사들이 이에 대응해 야포와 전차포로 헤즈볼라의 거점인 이클림 알투파 지역에 보복공격을 가했으나,사상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은 이날 레바논의 폭력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시리아가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촉구했다.
  • 「이·로버트슨 회담문서」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원

    ◎한·미 줄다리기 외교 상세히 밝혀/미,휴전동의 얻으려 설득·협박 병행 서울신문이 워싱턴에서 발굴한 이승만·로버트슨 회담문서는 1953년 6월 25일부터 7월 11일까지 계속된 전쟁상태의 종결이 아닌 휴전을 위한 한국과 미국 사이의 협상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당시 로버트슨의 방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미간 계속된 협상의 배경을 알아야만 한다.그것은 휴전회담을 둘러싸고 악화된 양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동시에 조속한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것이었다.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휴전협정의 시급한 체결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협조를 지속적으로 구하였지만,이승만 대동령은 미국의 전쟁정책에 계속 도전하였다.그는 휴전협상을 방해하려는 적극적인 조치로써 1953년 6월 17∼18일 밤에 또 다시 약2만4천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워싱턴 정가는 이승만의 조치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였다.휴전의 지연으로 당시 2주간에만 유엔군사령부는 약1만7천명의 전투손실을 입었으며,그중 3천3백33명이 전사하였기 때문이었다.미국은 이승만을 직접 설득하기 위하여 로버트슨 차관보를 서울에 파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자료에 의하면 로버트슨의 끈질긴 설득과 일종의 협박은 결과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굳세었던 휴전 반대 의지를 꺾었다. 로버트슨이 회담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간 것은 7월12일이다.이날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동시에 이승만·로버트슨회담을 통해 한국의 휴전,포로의 처리및 장차의 제휴를 위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합의에 도달하였음을 강조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같은 시간에 미 국무부는 별도의 성명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휴전에 동의하였다고 분명하게 성명하였다.이것은 판문점에서 공산군과의 협상까지 휴회한 채 진행된 이승만·로버트슨회담이 얼마나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로버트슨이 7월4일 방위조약 초안을 전달한 이후 이대통령이 지극히 우호적으로 나왔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이대통령은 휴전 이전에 미 상원의 방위조약 승인을 요구했지만 휴전 이후에 실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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