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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소득층 도우려다 동심 울린 ‘쿠폰’

    “엄마, 쟤는 가난한 집 애야.” 서울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부모 유모(36)씨는 아들이 친구를 소개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들이 길에서 만난 친구와 인사를 하길래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나왔던 것.“가난한 집 애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자유수강권 쿠폰을 받아가는 친구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쉽게 집안사정이 노출된다고 생각하니 아들 친구가 너무 가여웠어요.” ●멍드는 동심… “자존심 상해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후 학교 무료 쿠폰을 나눠 주는 ‘자유수강권제’로 인해 동심이 멍들고 있다. 소외계층 가정의 교육비 부담을 덜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혜택을 받는 아이들의 집안 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학생들의 사생활(프라이버시)이 침해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자유수강권제는 지난해 서울시내 일부 초등학교에서 시범 실시되다 지금은 모든 초·중·고등학교로 확대됐다. 학생 1인당 30여만원이 지원된다. 한 강좌의 한 달 수강료가 3만~4만원인 점을 감안할 때 10개월 동안 1개 강좌를 꾸준히 들을 수 있는 액수다. 학생들은 무료 쿠폰을 받아 원하는 강좌를 적어 내는 식으로 수강신청을 한다. 문제는 학생들의 사생활이 외부로 드러나면서 ‘좋은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자유수강권 시범학교로 지정된 서울의 한 중학교가 지난 3월 학부모 7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자유수강권제의 문제점’에 대해 ‘자존심 상실’이라고 답한 경우가 42%에 달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인 강모(10)군은 “친구들이 내가 방과후 학교 무료 쿠폰을 받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면서 “솔직히 수업을 듣기 싫다.”고 털어놨다. ●카드회사도 ‘퇴짜’ 교사들은 오프라인으로 쿠폰을 나눠 주고 수강신청을 받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알려져 입소문을 타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놓는다. 출석부 문제도 있다. 일부 학교에서는 편의상 무료 쿠폰을 받는 학생들을 출석부에 따로 표기하고 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아이들이 몰래 출석부를 봐 무료 쿠폰을 받아가는 학생들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경우가 많아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선학교에서는 이를 보완할 뾰족한 수가 없어 고민이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신용카드로 금액을 지급해 온라인으로 수강신청을 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면서 “하지만 카드회사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발을 빼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했다.5% 미만의 학생들이 수강하는 자유수강권제를 위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 수는 없다는 얘기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여러 방안을 생각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다.”면서 “계속 노력해 보겠다.”고만 했다. 배경내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활동가는 “민감한 나이에 빈곤이 공개되면 수치심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는 사례도 있다.”면서 “교육 당국이 적극적으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6) 처참한 나날들

    [병자호란 다시 읽기] (96) 처참한 나날들

    인조가 항복의 예를 마치고 환궁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청군은 아직 철수하지 않았고, 그들은 조선 조정에 이런 저런 요구들을 쏟아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말을 탄 채 대궐을 무시로 들락거렸다. 그들은 홍타이지를 전송하는 데 예를 갖추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명을 공격하는 데 필요한 수군과 전함을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눈앞에 펼쳐진 전쟁의 상처는 참혹했다. 도성의 관아와 인가들은 불타고 여기저기서 시신들이 나뒹굴었다. 살아남은 어린애와 노인들은 굶어 죽거나 얼어죽기 직전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할 것인가. 어렵사리 목숨을 부지하고 종사를 보전했지만,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또 다른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처참한 도성의 모습 인조가 창경궁으로 돌아온 것은 1월30일이었다.46일 만에 돌아온 궁궐은 궁궐 같지 않았다. 백관들은 흩어지고, 서리들과 하인배들도 가족들을 찾아 떠났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을 시작하려 해도 누구에게 시켜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었다. 궁궐 바깥의 도성 모습은 참혹했다. 광통교 주변을 비롯하여 곳곳의 관아와 민가들은 불에 타버린 채 방치되어 있었다. 곳곳에는 참혹한 형상의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널려 있는 시신들을 보다 못한 한성부가 인조에게 건의했다.‘백골(白骨)을 묻어 주는 것이야말로 왕정(王政)의 급선무입니다. 길가에 버려진 시신들을 차마 볼 수 없으니 남정들을 징발하여 매장토록 하소서’. 물론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도성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0살 미만의 어린애들과 70살이 넘은 노인들뿐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나마 그들은 굶주린 채 추위에 방치되어 죽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호조에서 긴급 대책을 내놓았다. 노인들은 진휼곡을 풀어 구제하고, 아이들을 데려다 기르는 자에게는 노비로 삼을 수 있는 권한을 주자고 했다. 살아남은 자들, 그 가운데서도 그나마 힘이 남아 있는 어른들은 청군 주둔지 주변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청군의 철수가 곧 시작되려는 판에 포로가 된 가족들을 행여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청군이 몰려 있던 살곶이(箭串) 부근이며, 마포 서강(西江)의 성산(城山)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청군 진영에 있는 사람 가운데 절반이 조선인’이라는 풍문이 돌 정도로 피로인(被擄人)들의 수는 엄청났다. 하지만 청군은 피로인들이 가족과 만나는 것을 엄중히 차단했다. 피로인들이 행여 청군 진영 바깥으로 나가려 하거나, 가족을 찾는 사람들을 향해 두리번거리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청군의 철편(鐵鞭)이 날아들었다. 서강 등지를 오가며 피로인들의 참상을 목도한 나만갑은 ‘적진에는 이미 죽은 사람, 화살을 맞았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 무엇인가를 기원하며 합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기록했다. 참혹한 장면이었다. ●거듭되는 인조의 굴욕 1637년 2월2일, 홍타이지가 철수 길에 올랐다. 아니 홍타이지의 입장에서는 개선(凱旋)하는 길이었다. 그는 피로인 호송과 가도( 島) 공략 등 조선에서의 나머지 일들을 도르곤을 비롯한 부하들에게 맡기고 먼저 출발한 것이다. 살곶이에서 마장(馬場)을 거쳐 양주 쪽을 통해 북상하는 길을 잡았다. 홍타이지는 철수 길에서도 도르곤 등에게 수시로 전령을 보내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무엇보다 피로인들을 차질 없이 심양까지 끌고 오라고 강조했다. 인조는 홍타이지를 배웅하기 위해 거둥해야 했다.‘인조실록’에는 ‘청한(淸汗)이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전곶장(箭串場)에 나가 전송했다’고만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인조는 홍타이지를 전송하면서 다시 한번 삼배구고두례를 행해야만 했다. 거듭되는 치욕이었다. 인조는 치욕을 삼키며 홍타이지를 배웅했다. 하지만 홍타이지가 멀어져 간 길 위에서는 ‘차마 못 볼 장면’들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피로인들을 끌고 가는 청군 부대가 홍타이지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청군은 조선인 피로인들을 세 줄로 세워 연행했다. 수백 명의 피로인들이 지나가면 그 뒤에 감시병이 붙고, 다시 수백 명을 줄 세워 끌고 가는 장면이 하루종일 반복되었다. 인조는 이 처참한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오던 길과는 다른 길을 잡아 도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홍타이지가 지시한 상황은 용골대와 마부대가 대궐을 드나들면서 인조에게 전달했다. 그들은 먼저 가도를 공격하는 데 협조하라는 요구를 내놓았다. 공유덕 등이 전선을 수리하는 데 협조하고, 조선의 수군도 동원하라고 했다.‘요구‘라기보다 사실상 ‘지시’이자 ‘명령’이었다. 한창 기세가 등등한 그들의 요구를 뿌리칠 처지가 아니었다. 조정은 당장 신천(信川) 군수 이숭원(李崇元)과 영변(寧邊) 부사 이준(李浚)에게 황해도의 수군을 이끌고 청군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인조는 수군을 청군에게 보내라고 지시한 뒤, 호조참의 신계영(辛啓榮)을 급히 강화도로 보냈다. 선박을 수리한다며 서해 연안으로 간 공유덕 일행에게 강화도 등지의 주민들이 약탈당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라는 명목이었다. 더욱이 당시까지 원손(元孫)이 청군을 피해 교동(喬桐)에 은신해 있는 상태였다. 한편에서는 청 측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다른 한편에서는 그 과정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전전긍긍’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용골대 일행 가운데는 조선인 통역 정명수(鄭命壽)도 끼어 있었다. 그는 본래 은산(殷山) 출신의 노비였다. 일찍이 청에 투항한 뒤, 홍타이지의 신임을 받아 통역으로 조선을 드나들었다. 이제는 더 출세하여 어엿한 ‘상국의 통사(通使)’가 되어 조선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는 말을 탄 채로 창경궁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정명수에게나, 조선 신료들에게나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소현세자, 심양으로 출발하다 병자호란 직후, 인조는 갖가지 치욕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무엇보다도 슬픈 일은 소현세자, 봉림대군과의 이별이었다.2월3일, 소현세자는 창경궁에 들러 부왕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행차에는 청인 대여섯 명이 감시인으로 따라붙었고, 정명수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며 성화를 멈추지 않았다. 2월8일 소현세자 일행이 떠나는 날, 인조는 창릉(昌陵) 근처까지 거둥하여 배웅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만났을 때 백관들의 통곡 소리가 이어졌다. 인조는 세자 일행을 데려가는 도르곤에게 깎듯이 예의를 갖추었다.‘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이제 떠나니, 대왕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과거 ‘오랑캐’로 치부했던 청인, 그것도 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린 청 왕자에게 자식의 모든 것을 맡겨야 했던 아비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인조는 도르곤에게 또 다른 부탁을 빼놓지 않았다.‘자식들이 궁궐에서만 자랐는데, 지금 들으니 여러 날 동안 노숙(露宿)으로 벌써 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가는 동안 온돌방에서 재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도르곤은 그러겠다고 답한 뒤 출발을 채근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절을 올려 하직하자 인조는 눈물을 쏟으며 당부의 말을 이어갔다.‘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청인들에게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백관들이 통곡하면서 소현세자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세자 일행은 신하들의 통곡 속에 심양으로 떠났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별 장면 또한 눈시울을 적시지 않고는 읽기 어렵다. 애틋하고 슬픈 인조의 부정(父情)이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심양으로 들어간 소현세자는 이후 인조에게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말았다. 청인들은 소현세자를 지렛대로 인조로부터 충성을 이끌어 내려 했다.‘여차 하면 인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소현을 즉위시키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 와중에 인조와 소현세자는 서로 ‘경쟁자’가 되고 ‘정적’이 되어 갔다. 그 귀결이 소현세자의 돌발적인 죽음이었다. 병자호란은 그렇게 인조의 부자 관계부터 파괴시켜 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주중 대사관 관리 탈북자 70여명”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총영사관을 포함해 주중 한국대사관이 관리하고 있는 탈북자가 70여명이라고 밝혔다. 유 장관은 이중 상당수가 납북자와 국군포로임을 시인한 뒤 “가급적 (탈북자의) 체재기간을 줄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의 ‘작전계획’ 전환 여부와 관련,“북한의 불안정 상황이 됐든 정규전 대비가 됐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상정해 대비하는 게 기본 책무”라며 “북한의 어떤 상황도 대처할 수 있는 대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또 ‘북한에서 소요가 발생할 경우 한·미 특수군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침공이냐 아니냐.’는 질문에 “국가안보를 담당하고 안보와 통일을 지향하는 계획 자체는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먼저 도발한다면 (북한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전혀 침략전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美대선 D-1] “누가 되든 亞 중시정책 펼것”

    막바지에 이른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와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 중 누가 당선되든 정치와 경제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아시아 중시 정책이 기대된다고 호주 시드니 모닝 헤럴드가 1일(이하 현지시간) 보도했다. 오바마는 인도네시아에서 어린시절 4년을, 매케인은 베트남에서 포로로 5년 반을 지냈다. 이 시절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어도 아시아의 문화를 직접 접했다. 이런 가운데 마이클 매코넬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지난달 30일 테네시주 내슈빌에 모인 정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가들의 경제가 급성장해 2025년쯤 다극화 정세를 이룰 것”으로 전망하면서 “지구촌의 부와 경제권력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움직이는 것은 근대 이후 최초”라고 말했다. 오바마와 매케인의 아시아 경험은 외교정책이 기존의 편협한 미국 정치인과는 다르게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기대로 발전하고 있다. 두 사람의 외교노선은 대서양과 유럽 지향적인 미국 주류사회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 아시아와 태평양에 가장 근접했던 이들은 1960년 미 대선에서 맞붙어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1년 남짓 태평양 등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과는 접촉이 거의 없어 아시아와의 문화 교류는 사실상 전무했다. 오바마는 어머니 앤 던햄(24)이 인도네시아 대학생 롤로 수토르와 재혼하면서 6세 때인 1967년 그를 인도네시아로 데려갔고, 수도 자카르타 외곽에서 살았다. 오바마는 인도네시아 생활 이후 미국의 주(州)라고 하지만 태평양의 섬인 하와이에서 10대를 보냈다. 오바마는 아시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참모 수잔 라이스는 “오바마는 21세기 미국의 안전이 아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부시 행정부의 단편적 중동정책의 부작용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무슬림 국가에서 살았던 경험을 들며 “무슬림과 화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며 전세계 무슬림 지도자들과 회동을 제안하기도 했다. 매케인은 오바마가 인도네시아로 이사갈 당시 베트남에서 전쟁포로로 붙잡혔다. 미 해군 조종사였던 그는 1967년 10월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폭격하러 가다가 격추당했다. 소위 ‘하노이 힐튼호텔’로 불리는 포로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매케인은 “중국과 인도를 세계문제에서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야 한다.”면서 그의 포로 경험에 비춰 북한과 미얀마의 수감자들의 인권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영웅적 인간들의 도전과 장·단점

    영웅적 인간들의 도전과 장·단점

    ‘번뜩이는 천재성, 타고난 카리스마, 굽힘 없는 의지’ 세계사에서 영웅으로 군림하는 전사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KBS 2TV가 3일부터 7일까지 오후 6시50분에 방영할 5부작 다큐 드라마 ‘워리어스’(원제 Warriors)는 권력이나 신념, 이상을 향해 돌진한 영웅적 인간들이 겪은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집중조명한다. 그들은 왜 도전을 시작하게 됐을까. 그들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이었을까. 영국 BBC가 제작한 이번 시리즈에서는 타고난 승부사, 나폴레옹과 노예 출신 검투사 스파르타쿠스,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로마 제국과 유럽을 휩쓸었던 훈족 아틸라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방영된다. 고대 로마 노예 반란의 주인공 스파르타쿠스. 그의 고향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군인이었다가 아내와 함께 포로가 되어 로마의 노예시장으로 팔려왔다는 게 그에 대한 소문의 전부다. 아내와 헤어지고 노예에서 검투사로 거듭난 그는 동료 70여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 베수비우스 산 속에 숨어든다. 이후 그는 로마군에 대항해 50대1의 열세를 대담한 기습작전으로 극복해낸다.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의 노예들이 그에게 몰려드는데…. 그러나 상당수가 전투가 불가능한 여자나 아이, 노약자라 스파르타쿠스는 난감한 상황에 놓인다. 로마군은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 포위를 좁혀오고 있다. 이제 그에겐 목숨을 건 결전만 남은 것이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기로에 선 금융위기] 한은·재정부 ‘공치사’

    [기로에 선 금융위기] 한은·재정부 ‘공치사’

    30일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계약을 성사시킨 공적을 두고 한국은행과 재정부가 서로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했다고 공치사하느라 바빠 눈총을 사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어려운 상황 속에 이뤄진 ‘쾌거’를 놓고 논공행상식의 갈등 양상으로 비쳐질 수 있는 데 대해 매우 부담스러워하면서 미국 정부 인사들을 다각도로 설득해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얻어낸 쪽은 강만수 장관 등 재정부라는 입장이다. ●재정부 “강만수장관 美인사 설득 주효” 재정부 관계자는 “미국이 한국을 스와프 대상국가에 편입시키기로 하고 이 문제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다루기로 했다는 사실을 25일 재정부가 처음으로 청와대에 보고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은이 26일 이후 미국에서 실무작업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가속화된 계기가 됐던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미국날짜 9월14일)를 신청하고 나서 며칠 뒤인 18일 미국 재무부에 원·달러 스와프를 공식 요청한 것도 재정부라는 설명이다. 그는 이와 관련한 문서로 된 증거들도 갖고 있지만 공개할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미국정부를 다각도로 설득해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스와프 협정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재정부가 했다고 말했다.“그러나 이를 이유로 한은의 실무진이 적극적으로 열심히 뛴 공로를 평가절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함께 이룬 좋은 결과에 대해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키는 일은 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은 “9월부터 물밑에서 美FRB 공략” 한은은 지난 29일 기획재정부가 한국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임박’을 언론에 흘려 보도가 나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의 어설픈 언론플레이가 한은이 지난 9월24일부터 한달 넘게 물밑에서 미 FRB를 어렵게 공략해온 일을 수포로 만들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날 밤 재정부는 통화스와프 규모를 알아내기 위해 밤새 한은에 전화를 해 괴롭히기까지 했다. 한은은 끝내 규모만큼은 입을 다물었다. 한은 한 관계자는 “아쉬운 소리를 하는 쪽이 한국인데,FOMC가 회의를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점과 규모가 모두 보도가 되는 것은 위험하고, 국제적 관례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문소영 김태균기자 symun@seoul.co.kr
  •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아파트 재개발 놓고 벌이는 갈등·애환

    대한민국 신문에서 가장 ‘문제적인’ 단어는 ‘아파트’일 것이다. 재개발이 어떻고, 규제가 어떻고···. 학교 시사 숙제로 신문을 자주 들추는 아이들에게 이땅의 아파트는 딱히 호감이 갈 리 없는 단어가 분명하다. 문학적 상상의 힘은 그래서 호쾌하다. 아파트가 사람처럼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때로 요란스레 목청까지 높일 수가 있다면? ‘완득이’로 인기작가로 이름 날리는 김려령이 먹음직스러운 상상력으로 전복의 묘미를 꽉 채운 동화 한편을 새로 썼다. 제목부터 심상찮은 ‘요란요란 푸른 아파트’(신민재 그림, 문학과지성사 펴냄)다. 이 동화를 열어주는 기막힌 열쇠는 말하는 아파트다. 지방 변두리 도시에 지어진 지 40년이 넘어 낡을대로 낡은 5층짜리 아파트 단지. 첫 장에서부터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는 별난 아파트에 눈이 동그래질 만하다. 신도시 개발 계획으로 재개발 소문이 돌면서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주민들은 재개발이 취소되면서 삽시간에 풀이 죽는다. 반면,40년지기 끈끈한 우정을 다져온 아파트 4개 동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재건축 꿈을 버리지 못한 주민들은 아파트 담벼락에 현수막을 치고, 보기에도 끔찍한 검정 띠를 둘러놓기도 한다.502호 영감님은 불만을 참지 못해 밤마다 망치로 벽을 두드려댄다. 아파트들은 이제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다. 몇십년 동안 한결같이 살뜰히 품어줬건만 은혜를 모르는 주민들이 건물을 무너뜨릴 궁리만 하니 그럴 수밖에. 아파트를 의인화한 재치, 빠른 전개 템포로 동화는 경쾌하다. 신통한 것은 그럼에도 짐짓 ‘오래된 것’에 대한 의미를 되묻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는 아파트들이 주도하던 이야기 얼개에 ‘102호 할멈’이 주요 캐릭터로 끼어드는 것도 의미심장하다.“자식들이 다 뭔 소용이여. 생전 얼굴도 안 비추는 것들이 이제 와서, 에이.” 넋두리를 쏟아내는 할머니에 이어 갑자기 그에게 떠맡겨진 꼬마손자 기동이가 등장한다. 아파트 벽에다 해괴한 낙서를 하고 돌아다니는 사고뭉치 기동이를 끝까지 따뜻이 감싸안는 건 그래도 2동(아파트)이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우정의 끈을 놓지 않는 아파트들끼리의 관계에도 초점이 맞춰진다. 결국 아파트는 재건축 허가를 받는다. 우당탕 쿵쾅, 소란스레 시소를 타던 유쾌한 이야기는 끝내 콧등 시큰해지게도 만든다. 마지못해 이삿짐을 꾸리는 기동이 할머니의 말 끝에 오래오래 여운이 매달린다.“세상에 나는 것들은 다 지 헐 몫을 가지고 나는 것이여. 허투루 나는 게 한나 없다니께···.” 초등3,4학년 이상.85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역사교과서 수정] 정부 정통성·남북관계 집중… 보수색 뚜렷

    [역사교과서 수정] 정부 정통성·남북관계 집중… 보수색 뚜렷

    교육과학기술부가 30일 발표한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6종)에 대한 수정권고안은 교과서포럼이나 대한상공회의소 등 보수진영의 의견을 상당부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이명박 정부 들어 ‘좌편향’ 논란이 제기되면서 예상된 것이지만, 현재 역사교과서가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정부 차원의 판단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집필진 수정 102건은 그대로 수용키로 교과부는 교과서 수정에 대한 기본방침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저해하는 내용이 담겨서는 안 되며 ▲교과용 도서 검정제도의 취지를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16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넘겨받은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교과부가 검토한 각계의 수정요구안은 모두 253개 항목이다. 이 가운데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폄하한 부분 ▲남북관계를 평화통일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만 서술한 부분은 교과서 집필진이 ‘자체수정’(102건)하기로 결론을 냈다. 출판사측이 수정을 하겠다고 이미 통보해왔고, 교과부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수정권고 55건중 금성출판사 38건 나머지 ▲8·15 광복과 연합군의 승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부분 ▲미·소 군정과 관련해 학습자를 오도한 부분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에 전가한 부분▲대한민국을 민족정신의 토대에서 출발하지 못한 국가로 기술한 부분 ▲북한정권의 실상과 판이하게 달리 서술한 부분 등에 대해서는 교과부가 집필진에 대해 ‘수정권고’(55건)를 했다. 금성출판사 교과서가 38건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중앙교육진흥연구원 9건, 법문사·천재교육이 각각 4건씩이다. 구체적으로 ‘수출위주의 경제발전은 대외의존도를 크게 높였고, 제3세계 국가들과 대립을 불러일으켰다.’(금성·32쪽)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제3세계의 관계를 대립일변도로 서술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라고 고치라고 권고했다.8·15 광복과 관련,‘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금성·253쪽).’는 대목은 “분단의 원인을 외인론으로만 해석한 서술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삭제 혹은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좌편향´→‘가치중립´ 용어로 교체 요구 해방 이후 미·소군정을 설명하며 미군 포고령과 소련군 포고문을 나란히 실은 부분(금성·257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침인 포고령과 추상적인 포고문을 통해 미국과 소련의 정책을 이해하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면서 “학습자 수준에 비해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으므로 자료교체가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친일파 처벌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민족정신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의 출발은 수포로 돌아갔다.’(금성·266쪽)는 항목도 “친일파 청산이 철저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민족정신에...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라고 못을 박았다. 박정희 정권과 관련한 항목인 ‘박정희 정부 아래에서도 독재정치에 맞선 장준하의 민주화운동은 계속되었다.(중략)그 결과 1970년대에는 ‘재야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금성·289)는 부분에 대해서는 “객관적 근거가 불충분하므로 삭제가 바람직하다.”고 선을 그었다. 남북관계와 관련,‘2000년 6월에 개최된(중략)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중앙교육진흥연구원·323쪽)는 “급변하는 남북한 관계의 변화를 고려하여 최근의 상황을 반영해 서술하라.”고 지적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 ‘역전의 명수’

    최강 신한은행이 힘겹게 5연승 행진을 이어갔다.신한은행은 29일 안산 와동체육관에서 열린 08~09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과의 홈경기에서 강영숙(9점 18리바운드)의 신들린 리바운드와 정선민(22점 7리바운드)의 클러치슛에 힘입어 55-51로 승리했다.5연승을 이어간 신한은행은 7승1패로 금호생명(6승1패)을 밀어내고 단독선두로 나섰다. 올시즌 신한은행의 경기 패턴은 거의 흡사하다. 전반에 밀리다가 3쿼터부터 치고나선뒤 4쿼터에 승부를 매조지하는 것. 이날도 신한은행은 1쿼터에서 8-18로 뒤졌지만,2쿼터에서 승부를 33-30으로 뒤집었다.3쿼터에선 상대 득점을 단 5점으로 묶어놓고 정선민과 최윤아(6점) 등이 득점에 가세,43-35까지 스코어를 벌렸다. 하지만 4쿼터는 신한은행의 올시즌 승리 패턴과 조금 달랐다.쿼터 종료 5분여를 남기고 41-48까지 뒤지던 삼성생명이 허윤정(11점 8리바운드)과 이종애(12점 14리바운드), 이미선(7점)의 잇딴 골밑 공략으로 종료 1분 27초전 51-50으로 전세를 뒤집은 것.이호근 감독을 영입한 올시즌 촘촘한 수비조직력으로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선전을 펼치고 있는 삼성생명이 또한번 이변을 일으키는 듯 했다. 하지만 리그 3연패를 노리는 ‘레알 신한’의 저력은 위기의 순간 빛났다. 그 중심에는 ‘바스켓 퀸’ 정선민이 있었다. 경기 종료 49초전 진미정의 패스를 받은 정선민은 이미선의 수비를 뚫고 골밑슛을 올려놓으면서 반칙까지 얻어내 ‘3점 플레이’를 성공시켰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53-51이 됐다. 삼성생명은 종료 38초를 남기고 홍보람의 3점포로 역전을 노려봤지만, 공은 림을 외면했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5) 三學士의 최후

    [병자호란 다시 읽기] (95) 三學士의 최후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상징되는 치욕적인 항복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귀천을 막론하고 조선 사람들의 참혹한 고통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인조를 대신해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화친을 방해하여 전쟁을 불러왔다는 ‘죄목’으로 연행되는 삼학사, 경향 각지에서 청군에 붙잡힌 수십만의 포로. 그들은 청군의 엄중한 감시 속에 심양(瀋陽)을 향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그들 앞에는 과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고통 속에 끌려가는 사람이나, 슬픔을 삼키며 그들을 보내는 사람이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통곡했다. 그리고 곧바로 삼학사의 죽음 소식이 날아들었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 가운데 가장 연장이었던 홍익한(洪翼漢·1586~1637)은 당시 52세였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진사 홍이성(洪以成)과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습( )이었는데 뒤에 익한으로 개명했다. 이정구(李廷龜)의 제자였던 그는 1615년 소과(小科)를 거쳐,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정시(庭試)에 급제했다. 이후 언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병자호란 직전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윤집(尹集·1606~1637)은 당시 32세였다. 본관이 남원이었던 그는 현감 윤형갑(尹衡甲)과 황씨의 소생으로 일찍이 백형 윤계(尹棨)에게 수학했다.1627년 소과에 급제하고 1631년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했던 그는 1636년 당시 홍문관 교리(校理)였다. 윤집은 김상헌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3남을 두었는데, 후일 증손녀가 홍익한의 손자에게 출가하여 사후에 홍익한과 사돈 관계로 인연이 이어졌다. 오달제(吳達濟·1609~1637)는 당시 29세였다. 그는 해주가 본관으로 오윤해(吳允諧)의 셋째 아들이자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의 조카였다.1627년 소과를 거쳐 1634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고, 병자호란 당시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는 삼학사 말고도 많은 척화신들이 있었다. 윤황(尹煌), 유철(兪 ), 이일상(李一相), 유계(兪棨), 정온(鄭蘊), 조경(趙絅) 등이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세 사람이 청군에 넘겨지는 ‘희생양’으로 낙점된 까닭은 무엇일까?그것은 홍타이지의 칭제건원(稱帝建元) 사실이 알려진 직후 이들이 누구보다 격렬하게 홍타이지의 ‘참월(僭越)’을 비난하고 주화신(主和臣)들을 성토했기 때문이다. 홍익한은 1636년 2월 ‘홍타지이가 보낸 사신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보내든가, 그것이 싫으면 나의 머리를 베라.’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오달제는 1636년 10월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화친을 시도하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최명길을 겨냥하여 직격탄을 날렸다. 윤집은 더 나아가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화친을 주도하는 최명길은 진회(秦檜)보다 나쁜 자’라고 극언을 퍼부은 바 있었다. ●홍익한의 절개 청군이 철수할 때, 홍익한은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있었다. 조정은 2월12일 증산현령(甑山縣令) 변대중(邊大中)을 시켜 홍익한을 적진으로 압송토록 했다. 변대중은 홍익한을 결박하여 심한 모욕을 주었고, 음식물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홍익한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결박을 풀어 달라고 호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조정은 청의 질책을 피하기 위해 그를 신속하게 압송했는데, 2월20일에 벌써 만주의 통원보(通遠堡)에 도착했다. 통원보의 청인들은 그가 끌려온 사연을 듣고 음식물을 내어 후히 대접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개돼지 같은 청인들이 변대중 같은 조선 사람보다 훨씬 나았다.’고 통탄했다. 심양에 이르러서도 홍익한은 의연했다. 용골대가 그에게 ‘너의 나라 신료들 가운데 척화를 주장한 자가 퍽 많은데, 어찌 유독 너만 끌려왔는가?’라고 묻자 홍익한은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라고 응수했고, 용골대는 웃으며 가버렸다고 한다. 홍타이지는 홍익한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별관에 가두고 연회도 베풀어 주려고 시도했다. 과거 수많은 명나라 이신(貳臣)들을 받아들인 경험이 있는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홍익한은 ‘전향’시켜야 할 중요한 대상이었다.‘조선의 골수 척화파까지도 결국 홍타이지의 은덕에 감화되었다.’는 소문은 향후 조선을 제어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익한은 단호했다. 그는 글을 써서 자신을 회유하려는 홍타이지의 기도를 정면에서 반박했다.‘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의 잡혀온 신하 홍익한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감히 글로써 밝힌다. 지난해 봄 금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황제라 칭한다는 말을 들었다. 맹약을 어겼다면 이는 패역한 형제이고, 황제라 칭했다면 이는 두 천자(天子)가 있는 것이다. 한집안에 어찌 패역한 형제가 있을 수 있으며, 천지간에 어찌 두 천자가 있을 수 있는가. 그리하여 본래 예의를 숭상하고 직절(直截)을 기풍으로 삼는 언관으로서 맨 먼저 이 논의를 주장하여 예의를 지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상소 한 장을 올림으로써 가정과 나라에 패망을 초래하였으니 만 번 도륙당한다 할지라도 진실로 달게 받을 뿐, 달리 할 말은 없다. 속히 죽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대명조선국의 신하.’이 말 속에 이미 홍익한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나는 조선의 신하이자 명의 신하이니 그대들 오랑캐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것이 홍익한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였다. 홍익한의 의지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곧바로 그를 처형했다. ●윤집과 오달제의 최후 윤집과 오달제는 청군 후발대에 이끌려 1637년 4월15일 심양에 도착했다. 홍타이지는 두 사람도 회유하려고 시도했다.4월19일 용골대가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홍타이지의 말을 전했다.‘너희들이 척화를 외쳐 두 나라의 틈이 생기게 했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하다. 죽여야겠지만 특별히 살려주고자 하니 처자를 데려와 이곳에서 살겠는가?’ 윤집은 ‘난리 이후 처자의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했고, 오달제는 ‘고통을 참고 이곳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노모를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 속히 죽여 달라.’고 응수했다. 격분한 용골대는 그들을 묶어다 심양 서문 밖에서 죽였다. 청인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뒷날에도 뼈들이 쌓여 있는 형장에서 두 사람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집안의 종들을 시켜 초혼(招魂)하여 온 것이 전부였다. 오달제에게는 노모와 임신한 아내가 있었다. 심양으로 끌려갈 때 그가 남긴 시구(詩句)들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그는 인조와 노모를 생각하면서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임금님 깊으신 은혜에 죽음 또한 가벼워라/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홀로 계신 어머님 날 기다리는 거라오”라고 읊었다. 아내에게 부치는 시도 절절하다.“부부의 은정 중한데/만난 지 두 해도 못 되었구려/이제 만리에 이별하여/백년 언약 헛되이 저버렸구료/땅 멀어 편지 부치기 어렵고/산이 첩첩하여 꿈조차 더디오/나의 살길 점칠 수 없으니/뱃속의 아이나 보호 잘하오” 윤집 집안의 사연도 처절하다. 병자호란 당시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던 윤집의 형 윤계 또한 전란 중에 순절했다. 그는 의병을 일으켰는데 기습을 받아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윤계 또한 청군 앞에서 무릎 꿇기를 거부하다 혀가 잘리는 등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후손들은 왜란 당시 순절한 할아버지 윤섬(尹暹)과 윤계, 윤집의 글을 묶어 ‘삼절유고(三節遺稿)’를 펴낸 바 있다. 어쩔 수 없이 죽이기는 했지만 청조는 이후 삼학사의 절의를 인정했다. 그들은 삼학사를 기리는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강희제(康熙帝)는 훗날 ‘조선이 명나라 말년에도 끝까지 배신하지 않은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찬양한 바 있다. 삼학사로 대표되는 조선의 ‘절의’는 청인들이 보기에도 분명 이채로웠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사설] 남북 군사접촉 경색 풀 실마리돼야

    중령급 남북 군사실무책임자 접촉이 오늘 오전 열린다.‘군 통신 정상화 문제’ 등이 협의될 예정이다. 북측이 사흘전 먼저 제의하고, 남측이 동의해 성사됐다. 우리는 이번 접촉이 비록 중령급 실무접촉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당국간 공식 대화라는 점에서 남과 북에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임할 것을 촉구한다. 남이나 북이나 피를 나눈 형제·동포로서 서로 등지고 비난하며 살아갈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오해한 일도 있고 섭섭한 일도 있었겠지만, 지난 8개월여 동안 티격태격했으면 충분하다고 본다.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서 득될 게 무엇이란 말인가. 다음달 18일이면 10주년을 맞는 금강산관광이 지난 7월 이후 석달 넘게 중단되고 있는데 남과 북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중단인지 곰곰 따져보고 결단을 내릴 것을 당부한다. 오늘 군사접촉은 비록 하위급 만남이지만, 남과 북이 과연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의 의지가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이달 초 열린 남북 군사회담이 양측의 입장차만 확인하는 데 그쳐 큰 실망을 안겨줬음을 상기할 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 것을 남북에 강력히 요구한다. 먼저 대화를 제의해온 북측이 의제를 ‘군 통신 정상화 문제’라고 특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번 접촉이 남측의 전단살포 행위를 비난하고, 남북관계의 전면 차단을 협박하는 정치선전의 장이 아니라, 가동 중단된 통신망 복원 등을 논의하는 실무협의의 장이 되는 게 아니냐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 경우 남측은 통신 관련 자재·장비 제공에 있어서 보다 과단성을 보임으로써 관계 경색 완화의 물꼬를 트기를 기대한다.
  • 유전자 제어로 암세포 발생 막는다

    생명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 가장 큰 장벽으로 여겨지는 마이크로RNA(miRNA)의 조절과 사멸 메커니즘이 국내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이번 발견은 암세포 생성 억제는 물론 여러 가지 세포로 분화가 가능한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도 폭넓게 사용될 수 있을 전망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빛내리 교수는 26일 세포질에 주로 분포하며 RNA와 결합하는 단백질 ‘Lin28’이 배아발달과 암 발생 등에 관여하는 ‘let-7’ miRNA를 조절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구결과는 생명과학저널 셀(Cell)의 자매지인 ‘몰레큘러 셀(Molecular Cell)’ 최신호에 게재됐다.miRNA는 생명체 내에서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해 세포분화와 배아발생, 암 발생과정에 등에 관여하는 물질이다. 각 miRNA의 역할을 규명하는 작업은 2000년대 초반 인간게놈지도가 완성된 이후 생물학계의 가장 큰 과제로 여겨져왔으며 김 교수는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명성을 쌓아온 과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이번 김 교수팀이 메커니즘을 밝혀낸 Lin28은 RNA와 결합해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로 간암 세포에서 많이 발견된다. 특히 미국 연구진이 이 유전자를 이용해 사람의 피부세포를 유도만능줄기세포(iPS)로 전환하면서 줄기세포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공룡 맞아?”…90cm 가장 작은 공룡 발견

    “공룡 맞아?”…90cm 가장 작은 공룡 발견

    무게가 약 200g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형 초식공룡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시카고 대학교 로라 포로 교수에 의해 밝혀졌다. 포로 교수는 육식 공룡의 식습관에 대해 조사하던 중 남아프리카 아이지코(Iziko)박물관에서 우연히 이 소형 공룡의 존재를 확인했다. 포로 교수는 “너무 작아 소형 포유류의 화석이 실제 공룡의 것이라고 깨닫지 못했지만 조사 결과 이 공룡이 초기 쥬라기 시대에 남아프리카에 서식하던 성장기의 초식 공룡인 것을 밝혀냈다.”고 척추고생물학잡지 최신호에서 전했다. 이 소형공룡은 고생물학계가 공룡이 최초 서식했던 것으로 추측하는 시기인 2억 3,000여 년 전보다 약간 늦은 1억 9,000여 년 전에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로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초식 공룡의 화석은 성장기였으며 다 자라도 무게는 약 2.5kg정도, 키는 약 90cm 정도였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공룡은 다른 초식 동물 트리케라톱스, 안킬로사우루스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에 육식 공룡 들 사이에서 생존 할 수 있었던 생존 이유에 대해서 연구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4) 해가 빛이 없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94) 해가 빛이 없다

    1637년(인조 15) 음력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일찍부터 여진족을 ‘오랑캐’이자 ‘발가락 사이의 무좀(疥癬)’ 정도로 멸시해 왔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그것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기막힌 장면이었다. 인조와 신료들은 ‘오랑캐 추장’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가장 치욕스런 항복 의식이었다. 그것으로 ‘춥고 배고픈’ 산성에서의 고통은 일단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조와 신료들, 조선 백성들 앞에는 몇 배나 더 아프고 처절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색 융의를 입고 서문으로 나오라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가 항복하기로 결정한 뒤, 항복 의식을 어느 수준에서 행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1월28일, 김신국, 최명길, 홍서봉 등이 청군 진영에 갔을 때 전체적인 대강이 확정되었다. 용골대 등은 조선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제 1등 절목(節目)은 면제해 준다고 했다. 그것은 이른바 함벽여츤(銜璧輿)을 면제해 준다는 뜻이었다. 함벽여츤이란 손이 뒤로 묶인 채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메고 나아가 항복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관을 메는 것은 항복하는 사람이 자신을 죽이더라도 이의가 없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좌전(左傳)’에 보면 미자(微子)가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함벽여츤을 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선왕의 제기(祭器)까지 모두 바쳐 완전히 신하가 되어 복속하겠다는 것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함벽여츤’은 면제되었지만 청 측이 요구한 의식 내용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1월28일, 홍타이지의 칙서를 갖고 왔던 용골대는 조선 신료들과 항복 의식을 논의했다. 하지만 ‘논의’라기보다는 ‘통고’라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용골대는 먼저 과거 조선이 명 황제의 칙서를 받을 때 어떤 의례(儀禮)를 따랐는지 물었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음에도 조선 신료들을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당시 청 진영에는 범문정(范文程)을 비롯하여 한족 출신 이신(貳臣)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명과 조선 사이의 외교 전례(典禮)에 밝았고, 그 내용을 홍타이지는 물론 만주족 관인들에게 훈수하고 있었다. 홍서봉이 ‘칙서를 가져온 명 사신이 남향으로 서고, 조선 배신(陪臣)은 꿇어앉아 칙서를 받았다.’고 대답했다. 홍서봉이 조선과 명의 전례를 ‘실토’하자 용골대는 자신이 남향하여 서서 과거 명 사신이 하던 방식대로 칙서 전달 의식을 재현했다. 칙서 전달을 마친 뒤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이 같은 좌차(座次) 또한 과거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했던 관례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조선의 상국(上國)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전례 상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용골대는 삼전도(三田渡)에 수항단(受降壇)을 이미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과 1월30일을 항복 의식을 행하는 날로 정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그는 또한 항복하는 인조가 용포(龍袍)를 착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문인 남문으로는 나올 수 없다는 것도 통고했다. 용골대는 인조가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수행원은 500명을 넘을 수 없고, 호위하는 군사나 의장대를 거느릴 수도 없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적어도 홍타이지를 황제로 받들고 신속(臣屬)을 맹세하러 나오는 이상, 인조는 철저히 신례(臣禮)를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홍서봉 등이 이의를 제기하려 했지만, 용골대의 기세를 꺾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인조,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다 항례(降禮)를 행하는 절차까지 정해지고 난 뒤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일부 신료들은 ‘전하는 항복하시더라도 명에서 받은 옥새를 청 측에 넘겨서는 안 되고, 그들을 도와 명을 치는데 필요한 군사를 원조해서도 안 된다.’고 눈물로 간언했다. 일각에서는 각 관아의 문서들을 모아다가 불태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소 각사(各司)끼리 주고받던 문서에서 청인들을 가리켜 ‘적(賊)’, 또는 ‘노적(奴賊)’이라 적어 놓은 것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1월30일이 밝았다. 산성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나만갑은 이 날의 일들을 기록하면서 맨 앞에 ‘해가 빛이 없다(日色無光).’고 적었다. 자신의 주군(主君) 앞에 닥친 치욕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일찍부터 용골대와 마부대가 나타나 인조의 출성을 재촉했다. 인조와 소현세자는 남색 융의(戎衣) 차림으로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섰다. 인조의 뒤에 선 신료들 가운데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청군이 양철평까지 들이닥치고, 강화도로 가는 피란길이 끊어졌다는 소식에 놀라 황망하게 산성으로 들어온 지 꼭 46일째 되는 날이었다. 홍타이지는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진영에서 나와 군기를 앞세우고 주악이 울리는 가운데 삼전도를 향해 한강을 건넜다. 삼전도에는 아홉 단으로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과 크고 작은 황색 장막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인조가 50여명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산성 밖 5리쯤까지 왔을 때 용골대 등이 영접을 나왔다. 용골대 일행이 앞장서고 인조는 삼 정승과 판서, 승지와 사관(史官)만을 거느리고 삼전도를 향해 걸어서 나아갔다. 군사를 도열시켜 놓고 장막에서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인조 일행이 도착하자, 그와 함께 배천(拜天) 의식을 행했다. 청의 입장에서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하는 의식이었다. 배천 의식을 마치고 홍타이지가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는 그 아래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과천선하겠다고 다짐한 뒤 소현세자와 신료들을 이끌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예를 행한 뒤, 용골대 등이 인조를 인도하여 홍타이지 아래에 마련된 자리로 안내했다. 인조에게 항복을 받은 뒤 홍타이지는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며 조선 신료들에게 활을 쏘아보라고 했다. 조선 신료들이 쭈뼛거리는 와중에 청나라 왕자와 장수들은 떠들썩하게 어울려 활을 쏘면서 놀았다. 이윽고 주찬(酒饌)이 나오고 음악이 울려 퍼졌다. 세 차례 술잔이 돌고 잔치가 파할 무렵, 청나라 사람이 개를 끌고 나오자 홍타이지는 직접 고기를 베어 개들에게 던져 주었다.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모습이었다. 인조는 이런저런 치욕을 겪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왕이시여,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잔치가 파하자 강화도에서 끌려온 강빈을 비롯한 왕실과 대신들의 처자들이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곧 이어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선물이라며 초구(貂, 짐승 가죽으로 만든 방한복)를 가지고 와서 인조 이하에게 주었다. 인조는 그것을 입고 홍타이지 앞에 나아가 사례했다. 다시 두 번 무릎을 꿇고 여섯 번 머리를 조아렸다. 홍타이지는 이어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포로들과의 상면을 허락했다. 서로 만난 왕실과 대신들의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울면서 삼전도는 순식간에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홍타이지가 신시(申時, 오후 3~5시) 무렵 자리를 뜬 뒤에도 인조는 밭 가운데 앉아 그들의 지시를 기다렸다. 해질 무렵에야 도성으로 돌아가라는 통고가 내려졌다. 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가게 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와 이별한 채 귀경 길에 올랐다. 송파 나루에서 배에 오를 때, 신료들이 다투어 먼저 건너려고 인조의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는 소란이 빚어졌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인조가 청군 병력의 호위 속에 도성으로 돌아올 때, 수많은 포로들이 인조를 향해 울면서 절규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인조는 그 절규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밤 10시 무렵 창경궁으로 들어갔다. 인조의 생애에서 가장 길고도 처참했던 하루가 저물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女談餘談] 인언가외(人言可畏) /주현진 산업부 기자

    [女談餘談] 인언가외(人言可畏) /주현진 산업부 기자

    인언가외(人言可畏). 시경(詩經)의 장중자(將仲子) 편에 나오는 말이다. 소문이나 유언비어 등 사람의 말이 무섭다는 뜻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 화(禍)를 입을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역사책 속에 묻힌 사어(死語)인 줄 알았는데 사이버 테러가 사람을 해치는 요즘 세태를 예견한 말 같아 새삼 섬뜩해진다. 확인되지도 않은 루머가 인터넷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제일기획은 최근 디지털 시대의 소비자 특성으로 인터넷상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디지털 호모나랜스(Homonarrans·이야기하는 사람)’란 신조어를 만들어 소개했었다. 보고서는 수도권 남녀 600명을 상대로 소비 행태를 조사한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공유하는 것을 좋아하는 특성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에서 남에 대한 막말을 서슴지 않고, 확인도 안 된 루머를 퍼뜨리는 것 역시 말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과 인터넷의 잘못된 만남이 빚은 결과로 보인다. 사이버테러에 대한 대안으로 악성댓글 처벌 강화, 인터넷 실명제 확대, 사이버모욕죄 신설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법안이 추진되는 듯싶더니 어느새 흐지부지되는 분위기다. 인터넷상 루머와 악플을 죄다 조사할 수도 없고 관련 네티즌들을 모두 구속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다. 취지는 좋다 하더라도 악용될 가능성도 적지 않은 만큼 반대 논리가 힘을 얻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자살은 또 다른 억측을 낳는다. 다시 어떤 소문으로 둔갑해 남은 사람마저 해칠지 여간 우려스러운 게 아니다. 사이버 테러를 마냥 눈감아 주다 다음엔 또 어떤 사건이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을지도 두려운 일이다. 기자와 신문사가 자기 기사에 책임을 지듯 네티즌과 포털도 본인의 글에 책임을 느끼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의 말과 글이 가장 무서운 시대인 듯하다. 더이상 사이버 테러로 인한 애꿎은 피해자가 생기지 말아야 한다. 건전한 인터넷 문화가 간절하다. 주현진 산업부 기자 jhj@seoul.co.kr
  • [토요영화] 그림자 군단

    ●그림자 군단(EBS 세계의 명화 오후 11시35분) 영화 ‘그림자 군단’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담은 작품이다. 감독 장 피에르 멜빌은 자신의 전쟁경험을 토대로 누아르와 다큐멘터리적 요소를 버무려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배경은 1942년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장인 필립 제르비에(리노 벤추라)는 동료의 밀고로 체포돼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이감되는 도중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마르세유에서 펠릭스(폴 크로셰), 뤼크(폴 뫼리스) 등 동지들과 함께 자신을 배신한 동료를 고통스런 심정으로 처형한다. 필립이 이끄는 저항세력은 영국 런던에서 드골 장군의 ‘자유프랑스군’과 연계하는 등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간다. 그러던 중 펠릭스가 리옹에서 체포돼 구출작전을 벌이지만, 경비가 철통같아 접근조차 쉽지 않다. 이 와중에 장 프랑수아 자르디(장 피에르 카셀)는 두려움에 떨다 조직을 떠난다. 그러고는 스스로 독일군에 잡혀 들어간다. 마틸드(시몬 시뇨레) 등은 펠릭스를 빼내기 위해 감옥에 위장 진입하지만, 펠릭스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구출을 포기한다. 그러다 얼마 뒤 마틸드가 체포되자, 저항세력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마틸드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프렌치 누아르의 거장 장 피에르 멜빌은 할리우드 갱스터 영화와 필름누아르의 특징을 흡수, 자신만의 영화언어로 빚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1960년대 중반 ‘페르쇼’‘두 번째 숨결’‘사무라이’ 등은 유럽영화의 혁신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다. ‘그림자 군단’(1969)은 세심한 시선이 빚어내는 심오한 깊이로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모자람이 없다. 여느 전쟁영화처럼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물의 행위와 심리의 추이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마틸드의 처형 장면은 백미로 꼽힌다. 시대상황 속에 개인이 직면하는 고독과 숙명이란 테마에 감독 특유의 염세주의가 덧입혀져 전쟁의 절망과 허무가 더욱 농밀하게 다가온다. 대개의 레지스탕스 영화들에는 극단적인 고문 장면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 영화는 감정 자극 효과를 최대한 배제했다. 오직 인물이 처한 상황과 선택, 대처방식 등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같은 묘사는 레지스탕스 내부의 의사 결정 구조나 조직원 통솔 방식이 마피아 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밖의 은유를 던져주기도 한다.145분.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읽기] (93) 파국의 전야

    [병자호란 다시읽기] (93) 파국의 전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가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고, 왕실과 대신의 가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어버린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하지만 출성(出城)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척화신 가운데 누구를 뽑아, 몇 명을 보낼 것인지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사신을 보내 인조의 신변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으려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척화신을 ‘낙점’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빚어졌다. ●出城을 결정하고 三學士를 ‘낙점’하다 1월27일 김신국과 이홍주, 최명길 등이 국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이전에 가져갔던 국서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신(臣)은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 날을 머뭇거렸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 하는데, 만약 스스로 나아가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는다면 조그만 정성도 펼 수 없게 될 것이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이 바야흐로 300년 동안 지켜온 종사(宗社)와 수천 리의 생령(生靈)을 폐하께 의탁하게 되었으니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소서.’ 국서의 내용은 공순하고 처절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나가겠다고 ‘굴복 선언’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던 ‘호소’는 사라지고 대신 인조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해 달라는 요청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상황에서 출성을 거부하고 버틸 여력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인조가 출성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결을 시도하는 신료들이 나타났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을 매고, 이조참판 정온(鄭蘊)은 칼로 배를 찔렀다. 두 사람 모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성에는 처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출성을 약속했음에도 청군은 포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조선의 마음이 변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처절하고 황망한 분위기 속에서 인조와 대신들은 청군 진영으로 보낼 척화신의 숫자를 조율했다. ‘홍익한만을 보낸다고 했기 때문에 홍타이지가 강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 속에 일각에서는 열 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묶어 보낼 대상자로 김상헌, 정온, 윤황(尹煌), 윤문거(尹文擧),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김수익(金壽翼), 김익희(金益熙), 정뇌경(鄭雷卿), 이행우(李行遇), 홍탁(洪琢) 등이 거명되었다. 너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고, 누구를 뺄 것인가? 이 ‘불인지사(不忍之事)’를 둘러싼 논란 끝에 오달제와 윤집 두 사람만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이들 두 사람과 당시 남한산성에 없었던 홍익한을 가리켜 보통 삼학사(三學士)라고 부른다. ●홍타이지, 항복 조건을 제시하다 1월28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조유문(詔諭文)을 가지고 왔다. 조유는 ‘그대는 짐이 식언(食言)할까 의심하지 말라. 지난날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規例)를 상세하게 정하여 군신(君臣) 관계를 대대로 이어가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홍타이지는 향후 인조와 조선이 준수해야 할 조건들을 제시했다. 맨 먼저 명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명 황제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반납하고, 명의 숭정(崇禎) 연호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사용하라고 했다. 조선의 ‘상국(上國)’을 바꾸라는 요구였다. 이어 맏아들 소현세자와 둘째아들 봉림대군뿐 아니라 여러 대신들의 아들이나 동생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인질들을 붙잡아 놓음으로써 조선의 ‘변심’을 견제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홍타이지는 또한 향후 자신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도 보병, 기병, 수군을 동원하여 원조해야 한다고 했다. 당장 자신이 항복을 받고 돌아갈 때 가도( 島)를 공격할 계획임을 밝히고, 조선이 전함 50척과 수군을 내어 동참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군과 화기수(火器手)를 조선으로부터 보충하여 명을 공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요구는 계속 이어졌다. 성절(聖節), 정조(正朝), 동지(冬至), 중궁천추절(中宮千秋節), 태자천추절(太子千秋節) 등 청나라와 관련된 경조사가 있을 때는 대신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심양으로 오는 사신이 지참하는 외교 문서의 형식, 조선에 오는 청 사신에 대한 의전과 접대 절차 등은 한결같이 과거 명나라에 행했던 구례(舊例)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특기할 것은 포로들과 관련된 조건이었다. 홍타이지는 ‘아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이 압록강을 건너 청 영토로 들어온 뒤, 조선으로 도망쳐 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청의 주인에게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포로를 ‘우리 군사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얻은 성과’라고 규정한 뒤, 포로들을 데려오고 싶으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 포로와 관련된 이 조항은 훗날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남기게 된다. 홍타이지는 그 밖에 조선이 해마다 바쳐야 할 세폐(歲幣)의 수량을 제시한 뒤, ‘청의 신료들과 조선 신료들이 혼인을 맺을 것’, ‘조선의 성들을 수리하거나 다시 쌓지 말 것’, ‘조선에 사는 우량허(兀良哈) 사람들을 쇄환할 것’,‘일본과의 무역을 계속 하고 그들의 사신을 심양으로 인도해 올 것’ 등의 조건도 같이 내 걸었다. 홍타이지가 제시한 항복 조건은 조선에 대해 이중 삼중의 그물을 쳐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건’을 따를 경우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인조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유시문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인조에 대한 협박을 빼놓지 않았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려 주었다. 짐은 망해가던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까지 신의를 어기지 않도록 한다면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란 조선이 명에 대해 그토록 고마워했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 청은 조선의 항복을 코앞에 두고, 자신들이 조선에 대해 ‘재조지은’을 베풀었다고 역공을 취했던 것이다. ●오달제와 윤집을 적진으로 보내다 1월28일 저녁, 인조는 하직 인사를 하러 온 오달제와 윤집을 만났다. 인조는 두 사람을 보자 목이 메었다. ‘그대들의 본 뜻은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구나.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인조는 결국 오열했다. 임금으로서 자신의 신하를 붙잡아 적진에 보내고, 적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참담함 때문에 울고 또 울었다. 윤집은 오히려 인조를 위로했다. ‘이러한 시기에 진실로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만 번 죽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이렇게 구구한 말씀을 하십니까.’ 오달제는 의연했다.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다만 전하께서 성을 나가시게 된 것이 망극합니다. 신하된 자로서 지금 죽지 않으면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인조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울음 섞인 소리로 자책과 회한,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쏟아냈다.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여겨 외로운 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인조는 오달제와 윤집에게 가족 사항을 물은 뒤, 자신이 그들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윽고 술을 내렸다. 이별주였다. 술을 다 마시기도 전에 승지가 아뢰었다. 사신들이 두 사람을 빨리 내보내라고 독촉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직을 고하는 두 사람에게 인조는 울면서 꼭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출성을 코앞에 둔 남한산성의 밤이 슬픔 속에 깊어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재테크 칼럼] 세제개편안과 절세 전략

    지난달 초 내년도 세제 개편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 정부 들어 첫 세제 개편인지라 세제정책의 기조를 엿볼 기회로 여겨 관심이 높았는데 세 부담 완화가 주요 내용이다. 실물경제에 짙게 드리운 침체상황을 걷어내고 경제재도약을 모색하기 위한 정책입안자의 고민이 담겨 있는 개편안의 골자를 읽어가던 필자는 개인적으로 80년대 거시경제학을 처음 공부할 때 교과서 뒷부분에 담겨 있던 조세부담 감소를 통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겠다는 공급주의 경제학의 논리가 자꾸 겹쳤다. 공급주의 경제학은 소득세율 인하는 근로소득에 영향을 주어 노동공급을 증가시키고, 금융소득에 대해서는 저축을 증가시키며 법인세율 인하를 통해 투자를 증가시키게 되어 경제 전반에 활기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80년대 미국 레이건정부의 경제정책(레이거노믹스)으로 자리잡은 이 이론은 단기적으로 실효성이 있었는지는 반론이 분분하지만 경제 활력 재건이라는 명제와 형평보다는 효율에 중점을 둔 현 정부의 철학을 실천하기에는 적절한 대안으로 보인다. 세제개편안의 주요 내용 중 개인의 경제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는 재산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재산세제는 크게 양도 상속 증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양도세 관련 개정안을 보면 1가구 1주택 비과세요건 중 고가주택 기준이 기존 6억원에서 9억원으로 완화되는 대신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또 이들 대상의 장기보유 특별공제율이 4%에서 8%(최대 80%)로 크게 확대될 예정이다. 이중 고가주택의 기준조정과 강화된 거주 요건은 법체계 상 시행령에 위임돼 있어 법 개정이 필요하지 않아 지난 7일부터 시행에 들어가 법안 개정을 요하는 장기 보유공제만 국회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고가주택의 기준 변경은 6억~9억원의 주택 보유자에게 비과세 혜택뿐 아니라 9억원 초과자에게도 양도세 부담을 크게 줄여줄 전망이다. 고가주택의 양도세는 양도가격 중 기준금액을 초과하는 양도소득과표만을 과세대상으로 하고 있다. 가령 양도세 과표가 4억원인 시가 10억원짜리 주택을 양도하면 애초에는 1억원(4억×(10-6)/10)에서 4000만원(4억×(10-9)/10)으로 줄어든다. 게다가 과세표준 구간변경과 아울러 양도세율이 구간별로 내년 2%, 내후년 추가 1% 인하될 예정이고 장기보유 특별공제가 매년 8%포인트씩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여 고가주택 보유자나 비과세 요건을 못 갖춘 1주택자들은 매도 시기를 될 수 있는 대로 내년으로 늦추는 것이 좋다. 주택 수요자는 시행령 공포로 강화된 거주 요건의 실시가 내년 7월부터 적용되면서 내년 6월 말 전에 주택을 사들이면 서울 및 신도시에 국한한 종전의 거주 요건만 채운다면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 참여정부 세제정책의 골간을 이루었던 보유세에 대한 부분은 개편안과는 별도로 당정 협의안이 올라가 있다. 여야 간의 견해 차이로 기준금액 세율 등 기본골격이 쉽게 타협을 보긴 어려운 상황이어서 최종 개정안에 따라 보유 전략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상속증여에도 과세표준 구간이 늘어나고 현재 증여세율은 10~50% 수준에서 내년부터는 7~34%, 2010년부터는 6~33%로 낮아져 세 부담이 줄어들 예정이다. 부자지간에 10억원을 증여한다면 증여재산공제를 제외한 경우 올해에는 2억 4000만원의 세금을 부담해야 했지만 내년에는 1억 1500만원으로 대폭 줄어들고, 내후년에는 1억 500만원으로 더욱 감소한다. 따라서 재산액수의 급격한 상승으로 증여재산이 커지지 않는다면 내후년으로 증여시기를 늦추는 것이 증여세를 아끼는 방안이 된다. 이신규 하나은행 세무사
  • [여자프로농구] 하은주 16점 컴백쇼

    13일 용인시체육관에서 삼성생명전을 앞두고 임달식 신한은행 감독은 “하은주(25·202㎝)를 5~10분 정도 뛰게 하겠다.”고 말했다.08~09여자프로농구 개막을 앞두고 최장신 센터 하은주의 복귀 시점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은주는 4월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팀 훈련 도중 오른 무릎을 다쳤다. 이후 대표팀과 함께 베이징에 갔지만, 벤치를 지켜 ‘하 주무‘로 불렸을 뿐 코트에선 볼 수 없었던 것. 1쿼터 종료 3분52초를 남기고 하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3월 챔피언결정전 이후 6개월여 만에 공식경기에 출전한 탓인지 다소 어리둥절한 듯했다. 하지만 2쿼터 5분52초를 남기고 재투입된 하은주는 서서히 ‘감‘을 찾았고 이내 골밑을 장악했다. 삼성생명 센터들이 약한 편이어서 수월했을 터.2쿼터에서만 9점을 올린 하은주를 앞세워 신한은행은 36-35로 앞선 채 전반을 마쳤다. 지난 시즌이라면 신한은행이 3쿼터부터 압도적 화력으로 승부를 끝냈겠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끈끈해진 삼성생명이 종료 직전까지 물고 늘어진 것. 승부는 마지막에 갈렸다.56-57로 뒤지던 신한은행이 종료 1분15초 전 진미정의 3점포로 59-57, 전세를 뒤집은 것. 삼성생명도 종료 5.7초 전 김세롱이 파울을 얻어 동점의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부상으로 빠진 김세롱 대신 자유투의 중책을 맡은 홍보람이 1구를 놓쳐 고개를 떨궜다. 결국 신한은행의 61-58 승리. 하은주는 16점 8리바운드, 진미정이 19점으로 활약했다.워낙 승부가 빡빡했던 터라 감독의 말과 달리 20분 남짓 뛴 하은주는 “몸 상태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시즌 끝까지 부상당하지 않고 팀에 도움이 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용인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기로에 선 세계금융]외환시장 한고비 넘기나

    [기로에 선 세계금융]외환시장 한고비 넘기나

    한때 장중 1500원까지 뛰었던 원·달러 환율이 1238원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금융위기의 ‘태풍의 눈´이었던 외환시장 안정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외화 조달 창구인 외환 스와프시장은 달러를 구하려는 수요가 넘쳐나면서 여전히 불안정성이 큰 상태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글로벌 신용경색 현상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하락세가 계속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1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마감된 원·달러 환율 1238.0원은 지난주 말보다 달러당 71.0원 떨어진 수치다.3거래일째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71원 떨어지며 1200원대 재진입 이날도 환율이 하락한 것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수출 대기업들이 보유하고 있던 달러화를 내놓았기 때문. 수출기업의 달러화 매도를 유도한 정부는 은행과 기업 간 일별 외환 거래를 보고받아 환투기를 조사하고 변칙증여송금 등에 대해서도 조사하기로 하면서 환율이 하락세를 이어갔다. 여기에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 은행의 외화부채가 어떤 경우에도 디폴트(상환 불능)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기연장 자금의 경우 100% 외환보유고로 지원하겠다.”고 말한 것도 환율 하락의 배경이 되고 있다. 환율 급등에 대한 공포로 원화 투매 현상이 나타난 것처럼 환율 급락에 대한 공포로 달러화 투매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신한은행 금융공학센터 홍승모 차장은 “대외적 불안에 따른 원화 디스카운트 현상이 한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오버슈팅(단기과열) 상태였던 환율이 원위치를 찾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달러난 여전해 시장안정 속단 일러 그러나 여전히 외환시장은 달러화 공급보다 수요가 크게 웃돌고 있다. 통화스와프(CRS) 금리와 이자율스와프(IRS) 금리 격차인 외환 스와프 베이시스 1년물의 경우 이날 오후 2시30분 기준으로 481bp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9일부터 오름세를 계속하면서 장중에는 사상 최대치인 500bp를 경신했다. 이는 달러와 원화를 일정 기간 교환할 때 원화를 빌리는 쪽에서 부담하는 이자인 CRS 금리가 1년물 기준으로 ‘제로 금리´에 가까운 연 1.00%에 불과하기 때문. 전일보다 0.2% 포인트 오르긴 했지만 지난 7월 초 3.65%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달러화에 대한 수요가 공급보다 월등히 많다는 뜻이다. 외환 스와프 시장에서 현물 환율과 선물 환율 간 차이인 스와프포인트 1개월 물이 외화 유동성 부족으로 4거래일 연속 하락하면서 -11.00원으로 떨어진 점도 외환시장에서 불안심리를 키우고 있다. 이에 따라 환율 안정을 속단하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금융기관의 파산 등 돌발악재가 나타나면서 주가 급락, 환율 급등 현상이 재연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하나대투증권 공동락 연구원은 “지금은 변화의 경계에 와 있는 것 같지만 지난주 말에도 장중에 200원 이상 움직인 만큼 자금시장이 완전히 풀렸다고 단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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