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포격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 라이다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 연 1회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 숭실대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 교류
    2026-06-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019
  • 가자 휴전 후 첫 무력충돌

    임시휴전으로 9일간 전쟁이 중단됐던 가자 지구에 27일(현지시간) 첫 무력충돌이 벌어져 다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AP통신은 가자 지구 국경 근처에서 폭발이 발생해 이스라엘 정부관리 1명이 죽고, 3명의 군인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수뇌부는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혀 가자 지구의 교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키수핌 국경통과소 인근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2∼3명의 하마스 무장대원이 이날 오전 접경선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봤고, 조금 후에 폭발음과 총성이 들렸다고 로이터 통신에 말했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무장대원들의 기습 공격에 탱크 포격과 헬기의 기관총 소사로 반격에 나섰고, 가자지구의 상공에는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날아 다녔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공격행위에 대한 대응으로 이날 모든 국경통과소의 문을 폐쇄하고 가자 지구에 지원되는 인도주의 구호품과 복구작업용 물품 공급을 차단했다. 또 이스라엘의 치피 리브니 외무장관과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은 가자 지구의 무장세력에 대한 보복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리브니 장관은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의 테러행위에 대해 억제력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며 “이스라엘은 즉각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AP는 이스라엘군의 인명피해를 가져온 폭발물이 휴전 이전에 설치된 것인지 이후에 설치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사고 직후 국경지대에서는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20대 팔레스타인 농민이 사망했다고 AFP통신이 밝혔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이軍, 가자지구 유엔 건물 또 포격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20일째를 맞은 15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 탱크와 무장병력이 가자지구 북부의 가자시티에 대한 총공세에 나서면서 유엔(UN) 기구 단지와 병원, 언론사 입주 건물 등을 무차별적으로 포격해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구호품 창고에 화염… 반 총장 항의가자시티의 중심부로부터 1.5㎞ 근방까지 진입한 이스라엘군은 이날 도심 내 주요 건물들에 포탄을 마구 쏘아댔고, 이 과정에서 700여 명의 난민이 피난해 있던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기구(UNRWA) 본부 건물이 피폭돼 직원 3명 이상이 부상하고 수 백톤(t) 분량의 구호품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포격 직후 유엔은 “가자 지구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단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AP통신에 따르면 휴전 중재차 중동 지역을 방문 중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포격 소식을 접한 뒤 “(UNRWA의 본부를 포격한 이스라엘에) 강한 항의와 분노를 표한다.” 면서 “이번 포격에 대한 진상조사를 (이스라엘 측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어 반 총장은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내게 ‘(이번 포격은) 중대한 실수를 했다.” 고 말했다고 전했다. ●유럽의회 휴전촉구 결의안 채택 한편 유럽의회는 1월 본회의 최종일인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본회의장에서 표결이 아닌 ‘거수’ 만장일치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양측에 즉각적이고 항구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하지만 전날까지만 해도 가자지구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에 가자 지구 전투를 10일간 중단하자는 내용의 임시 휴전안을 제의한 가운데 14일 하마스 측이 종전의 강경 태도를 바꿔 이를 원칙적으로 수용하겠다는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 AP통신에 따르면 임시 휴전안은 하마스가 휴전 조건으로 내세운 이스라엘군 철수와 국경봉쇄 해제를 철회하는 대신 이스라엘군을 잔류시킨 채 ‘10일 휴전’ 기간 중 이집트-가자 지구 국경지대를 통한 무기밀수 방지와 라파 국경통과소를 개방하는 논의를 벌인다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하마스가 임시 휴전안을 원칙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사실상 가자사태 해결의 공은 이스라엘로 넘어갔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 안팎에서 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양측 휴전 합의는 임박해 보인다고 전망했다. ●가자사태 해결 이스라엘 손에 이스라엘 일간지인 하레츠는 이날 수뇌부 3인 중 올메르트 총리를 제외한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과 치피 리브니 외무장관은 이미 하마스의 세가 충분히 약해졌고,국제사회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휴전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즉각 휴전’의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미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이스라엘이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하는 오는 20일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작전을 종료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또 이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가 가자 지구 공격에 항의해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단절키로 하는 등 갈수록 거세지는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도 이슬라엘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5일 국방부의 아모스 길라드 외교군사정책국장을 카이로로 보내 협상을 벌였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사설] 이, 민간인 무차별 살상 계속할 텐가

    이스라엘이 ‘하마스 섬멸’을 내걸고 전쟁을 일으킨 지 보름이 지났건만 이스라엘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을 무시한 채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을 갈수록 강화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즉각 휴전과 완전 철군’ 촉구 결의안을 지난 9일 거부한 이스라엘은 다음날 가자지구를 40여 차례 공습했으며 주민들에게는 공세를 더욱 강화하겠다고 통고하는 전단을 뿌렸다. 이 전단에서 이스라엘 당국은 “가자지구 주민이 아닌 하마스와 테러범을 상대로 싸운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지구촌 가족이 얼마나 되겠는가.이스라엘이 공격을 개시한 뒤로 팔레스타인 사람이 900명 가까이 숨졌고 부상자 수는 3000명을 훌쩍 넘어섰다. 사망자 중에는 어린이 숫자가 3분의1쯤 된다니, 이스라엘이 하마스건 민간인이건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살상을 해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특히 이스라엘군이 주민 110여명을 한 건물에 몰아넣은 다음 잇따라 포격을 가했다는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보고서를 보면 이번 전쟁에서 드러난 이스라엘군의 행태는 ‘만행’이라고 지탄받아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지금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곳곳에서 반(反)이스라엘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일에만도 영국 런던에서 2만여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했고, 같은 날 프랑스에서는 전국 120여 곳에서 12만명이 참여해 이스라엘의 만행을 규탄했다. 이스라엘은 우월한 군사력으로 가자지구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는 데 당장은 만족할지 모르지만 지구촌에 번지는 반(反)유대인 정서는 결국 이스라엘이 설 땅을 좁히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제라도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기를 촉구한다.
  • [이스라엘-하마스 지상전] 4개여단 진입…로켓발사대 밀집 북부 사실상 고립

    [이스라엘-하마스 지상전] 4개여단 진입…로켓발사대 밀집 북부 사실상 고립

    3일(현지시간) 시작된 이스라엘의 대 하마스 지상전은 어둠과 함께 시작됐다.가자 지구의 불이 거의 꺼진 시각인 저녁 8시쯤,야간 투시경을 쓴 보병들과 탱크가 가자 지구와 인접한 국경을 넘어섰다. 칠흑 같은 가자 지구의 밤을 뒤흔든 지상전은 이스라엘군의 포탄과 화염이 하늘을 ‘불꽃놀이’ 하는 것처럼 밝히기 전까지 눈보다는 귀로 확인됐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이에 대해 이스마일 라드완 하마스 대변인은 알-아크사 TV에 나와 “이스라엘군은 쥐새끼처럼 들어왔다.”고 비꼬았다. 이날 가자지구로 들어간 이스라엘군은 최소 4개여단.이스라엘군 관계자는 현지 일간 예루살렘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작전 목표는 로켓 발사대가 있는 가자 지구 북부를 공략하는 것”이라면서 “가자 시내나 난민 캠프쪽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실제로 교전은 자발리야,베이트 하눈,베이트 라히야 등 가자 지구 북부 지역에서 주로 이뤄졌다. 이스라엘군은 지상군 투입에 앞서 북부 지역에 포격을 가해 이 지역 광산과 하마스 방어시설을 파괴했고 가자 지구 북부와 남부로 연결된 도로와 다리도 끊어 놓았다.해안지역에는 해군도 배치됐다.베이트 라히야 마을 인근에 자리잡은 가스 저장소도 공습했다.이로 인해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고 그 화염은 가자 지구 전역을 밝힐 수 있을 정도였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이처럼 이스라엘군이 북부 지역을 치밀하게 공격함에 따라 이 지역으로의 무기 및 군수품 공급과 무장 대원 투입이 어려운 고립상태에 처하게 됐다.여기에 탱크와 불도저가 가자 지구 중심인 가자시티 남쪽에 있는 넷자림까지 진입,사실상 가자시티가 사방으로 포위됐다.폭 5~8㎞의 길쭉한 모양의 가자 지구가 (남북으로) 쪼개진 형국이라고 예루살렘포스트가 보도했다. 지상전에 앞서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공습을 단행했다.200명이 기도를 하고 있던 모스크를 공격,아이들 4명을 포함해 최소 16명이 사명했고 수십명이 다쳤다.또 아부 자카리아 알 자말을 비롯한 하마스 고위 지도자 3명도 공습으로 사망했다.또 요르단강 서안에서 반이스라엘 집회에 참여한 시위자 한사람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사살됐다.지상전 개시 이후 사망한 팔레스타인 민간인은 최소 31명이라고 AP가 보도했다.여기에는 일가족 5명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군은 마을로 진입하면서 전단지를 뿌리거나 대형 스피커를 동원해 주민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또 방송국에 침입해 “하마스 지도부는 당신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지금 병원에 숨어 있다.”는 등의 자신들에게 유리한 메시지를 내보내기도 했다. 현재 외국인 기자들의 가자 지구 출입이 통제되고 있고 가자 지구를 나올 수 있는 사람도 220명의 외국인과 응급 환자 외에는 없다.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구급차는 전투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지상군과의 교전에 응수하면서 동시에 로켓포로 반격했다.이날 하마스는 평소보다 많은,약 40차례 로켓포를 쏘아 올렸고 이스라엘인 6명이 다쳤다.하마스는 “가자는 당신(이스라엘군)들이 오는 길에 꽃을 뿌리지 않을 것이다.그 길은 화염과 지옥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사설] 중동지역의 폭력 확산을 우려한다

    이스라엘이 지난 27일부터 사흘째 팔레스타인 과격 무장세력 하마스가 다스리고 있는 가자지구를 맹폭하고 있다.1967년 제3차 중동전 이후 가장 격렬한 공습이라고 한다.이미 300여명이 죽고 8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이 가운데 3분의1 이상이 민간인 희생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스라엘군은 곧 지상군을 투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하마스는 보복을 다짐하고 있어 전면전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우려된다.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즉각 무력사용을 중단해야 한다.더 이상의 무력 행사는 보복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킬 뿐이다.이스라엘군은 이번 공격이 하마스의 이스라엘 남부 민간거주지역 포격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한다.하지만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과잉 무장공격’이라고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가자지구처럼 인구밀집지역을 공습하면 대규모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할 것을 이스라엘이 모를 리 없다.민간인을 대상으로 삼거나,민간인 희생자가 대규모로 발생하는 모든 무력사용은 평화로 가는 길에 암운을 드리울 뿐이다.미국의 공정한 중재 노력도 긴요하다.이스라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미국뿐이다.이스라엘이 공습에 나선 배경과 관련,오바마 새 정권이 하마스를 대화의 상대방으로 삼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하마스는 총선으로 집권한 합법적 통치 세력이지만 부시 정권은 하마스를 외면해 왔다.새로 출범하는 오바마 정권조차 이스라엘 일방주의에 기울면 중동지역 정세는 급격하게 악화될 것이다.오바마 새 정권은 출범 전이라도 이스라엘에 무력사용 중단을 설득하는 한편 공정한 자세로 중재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 [Local]

    ●대구·경북 일자리 1061개 제공 대구지방노동청은 올 연말 대구와 경북지역에서 사회적 일자리 1061개를 만들어 취약계층에게 제공한다고 5일 밝혔다.이에 따라 대구 24개 기관 566명,경북 33개 기관 495명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노동청은 지난 10월 지자체와 시민단체,복지기관을 상대로 신청·접수를 해 57개 기관 1061명의 일자리를 선정했다.대구남구 시니어클럽의 재활용품 매장운영사업,제일 종합사회복지관의 중증장애인 자립지원,달서 시니어클럽의 저소득보육가정 장난감 세척사업,에덴 영농조합법인의 영농도우미 파견사업 등이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겨울방학 행정인턴 200명 모집 행정안전부가 겨울방학 동안 일할 대학생과 고등학생 행정인턴 200명을 선발한다.10일부터 17일까지 행안부 홈페이지(www.mopas.go.kr)를 통해 모집하며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 등 저소득층 학생들이 대상이다.고등학생은 학교장의 추천을 받으면 된다.근무시간은 대학생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고등학생은 오후 4시까지다.일당은 대학생 3만 3000원,고등학생 2만 8000원이다.오는 29일부터 내년 2월6일까지 전국의 행안부 관련 기관에서 일한다.사무보조,현장지원 등을 담당한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대구엑스포 9일부터 확장공사 대구시는 9일 대구엑스코 확장공사를 시작한다고 5일 밝혔다.9일 대구엑스코 국제회의실에서 관계자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확장 기공식을 갖는다.시는 사업비 860여억원을 들여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 이전인 5월에 확장공사를 완료할 예정이다.확장 규모는 지상 5층,지하 2층으로 엑스코 남쪽 주차장 부지 2만 2000여㎡에 전시장(1만2800㎡),컨벤션시설(2630㎡),오디토리움(2640) 부대시설(3만 6800㎡) 등을 갖춰 기존 전시장 연면적의 두배에 달하게 된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속초서 500톤급 경비함 취역식 강원 속초해양경찰서는 5일 속초항 전용부두에서 500t급 경비함 취역식을 가졌다.취역 경비함은 올해 안에 속초해경에 배치하기로 한 3척 가운데 우선 배치된 509함과 510함 등 2척으로 길이 62.2m,폭 9.1m의 선체에 워터제트 방식의 엔진 4개가 부착돼 있다.최대 35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다.또 사격통제장치를 겸비한 최대 사거리 12㎞인 40㎜ 포가 장착돼 있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정확한 포격이 가능하다.이 경비함들은 동해 어로한계선 경계와 해상치안 유지,어민들의 안전조업 지도에 나서게 된다. 속초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포항상의, 기업 애로 건의 포항상공회의소는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기업의 지원을 위해 5일 포항상의 회의실에서 지역기업 규제개혁 간담회를 개최했다.이날 간담회에서 기업관련 애로사항 34건과 지역 현안 2건 등 36건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건의사항은 포항~울산간 고속도로 건설과 신규 산업단지 조성에 따른 용수확보,KS인증제도 ‘경영간부 품질경영 의무교육 조건’ 완화,시공참여자제도 재도입,주계약자형 공동도급제도 도입 등이다.간담회에는 대한상의와 규제개혁추진단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포항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킬링필드 비극의 전말

    킬링필드 비극의 전말

    3년8개월. 국민 5명 중 1명이 사라졌다. 거의 200만명에 달하는 숫자였다. 이들을 숙청과 기아로 내몬 것은 바로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이었다. 영국의 더 타임스,BBC방송의 해외통신원 출신으로 중국·캄보디아 전문가인 필립 쇼트는 ‘폴 포트 평전-대참사의 해부’(이혜선 옮김, 실천문학사 펴냄)에서 1975~1979년 대학살을 주도한 크메르루주 정권의 1인자 폴 포트를 조명한다. 단순히 폴 포트의 생애만이 아니라, 캄보디아 전역을 킬링필드로 만든 비극의 역사 전반을 냉철한 시각으로 해부한다. ●평등주의 추구하던 청년이 돌변한 이유는? 책은 ‘평등주의’ 이상향을 꿈꾸던 젊은이가 어떻게 인류 최악의 참사를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지도자로 변해 갔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이를 위해 저자는 1950년 파리 유학 시절 폴 포트를 처음 정치세계로 이끈 켕 반삭을 비롯해 크메르루주 핵심 인사들의 증언을 직접 듣고 중국, 러시아, 베트남 등 관련국들의 기밀자료를 찾아다녔다. 이로써 베일에 싸여 있던 폴 포트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 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맥락에서 킬링필드라는 비극을 규명해낸다. 저자에 따르면, 폴 포트는 온순하면서도 유머가 넘치고 지적이면서도 자신을 숨기려 한 신비주의자다. 이런 인물이 당내 베트남파와 정적들을 무차별적으로 제거하는 폭력성의 극치를 보이게 된 것은 혁명 완수에 대한 자기 과신과 조급증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어찌됐건 이렇게 해서 폴 포트의 캄보디아는 히틀러의 독일, 마오쩌둥의 중국, 스탈린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견제와 균형이 깨지면서 점차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승려와 지식인층도 참사의 ‘조연´ 하지만 사실 폴 포트 정권의 잔혹성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스탈린과 레닌으로부터 전수받은 폭력적 이념, 봉건적 전통질서에서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길을 막은 전 시아누크 정권의 부정부패, 권력자에게 절대복종하는 캄보디아 사회의 원칙 등이 근저에 깔려 있다. 저자는 “크메르루주의 만행을 머나먼 열대국가의 특수한 봉건문화 탓으로 돌리는 것은, 몇몇 지도자들의 비뚤어진 성격을 탓하는 것과 똑같이 안이한 답변”이라고 못박는다. 폴 포트가 최고기획자였으되, 승려와 지식인층을 비롯한 캄보디아인 수백만명이 크메르루주에 협력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지난 2006년 캄보디아 국제전범재판소가 설립됐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 MIT 교수는 “1970년대 초 캄보디아 농촌에 대한 집중 포격을 지시했던 사람도 전범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리처드 닉슨 대통령 등 당시 미 고위 정부관료들의 책임론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킬링필드의 주도자들과 국제기구 및 단체의 구호사업을 차단했던 사람들은 지난 2003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폴 포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을 뿐이다.2만 3900원.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2) 조선,항복하기로 결정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92) 조선,항복하기로 결정하다

    1637년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조정은 이 때 청군이 또 다른 조건으로 제시한 척화신(斥和臣)을 잡아 보내는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적진에 당도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몇 명이나 묶어 보낼 것인가? 인조나 비변사 신료들에게나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不忍之事)’이었다. 하지만 앞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청군은 연일 인조의 출성을 독촉해댔고, 산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민심도 갈수록 흉흉해지고 있었다. 결국 최명길과 김류 등이 이 끔찍한 ‘불인지사’의 총대를 멨다. ●척화신들에게 자수를 권하다 1월22일, 김류와 이성구(李聖求), 최명길 등이 입시했다. 척화신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김류는 ‘척화신들의 논의가 과거에는 정론(正論)이었지만, 결국 나라를 그르친 죄를 범했으니 그들 스스로 적진으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최명길은, 자신이 홍익한(洪翼漢)과 같은 집안이지만 종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를 묶어보낼 수도 있다고 거들었다. 이성구 또한 ‘홍익한의 죄가 무겁다며 청군으로 하여금 처치하도록 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인조는 너무 참혹한 일이라며 입장 결정을 유보했다. 삼사(三司)를 비롯하여 신료들로부터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인조와 대신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윽고 조정에서는 척화신들에게 자수하라고 촉구했다.‘불인지사’를 밀어붙이는 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비롯된 고육책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척화신 박송(縛送) 문제로 조정이 뒤숭숭할 때, 산성을 지키는 군관들과 병사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1월23일, 수원과 죽산(竹山) 출신의 초관(哨官) 수백 명이 행궁 앞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척화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체찰부(體察府)로 몰려가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겁에 질린 체찰사 김류는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며 속히 해산하라고 종용했다. 나만갑은 ‘병자록’에서, 이 날의 시위는 하급 지휘관들의 본심이 아니라 고위 무장들의 사주에 따른 것이었다고 적었다. 어쨌든 산성의 분위기는 내부 분열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척화신들을 내 놓으라.’는 시위가 위력을 발휘했던 것일까? 이 날 조정은 청군 진영에 보낸 국서에서 척화신의 ‘처리’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국서에서 척화신으로 확실하게 언급된 인물은 홍익한이었다. 그는 당시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산성에는 없었다. 국서에서는 ‘홍익한이 당초 가장 열렬히 척화를 주장했기에 평양을 맡김으로써 그로 하여금 대국 군대의 예봉을 스스로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청군이 철군하는 날 평양 부근에서 그를 체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사실상 홍익한을 잡아 가라는 내용이었다. ●청군의 양동작전과 최후 통첩 1월23일, 청군은 양동작전을 펼쳤다. 조선이 척화신들을 묶어 보내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남한산성에 대해 최후의 공세를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날 자정 무렵, 청군은 먼저 서문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그들은 운제(雲梯-성을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사다리)를 이용하여 성을 넘으려고 시도했다. 당시 서문 방면의 조선군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청군을 발견한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의 군관이 병사들을 깨웠다. 병사들은 올라오는 청군을 돌로 내려치고, 화포를 이용하여 공격했다. 새벽 두 시 무렵에는 망월대(望月臺) 쪽으로 몰려오는 청군을 신경진(申景 ) 휘하의 병력들이 물리쳤다. 서문과 망월성을 공격하다가 적지 않은 수의 청군이 죽었다. 1월24일에도 청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구굉(具宏)이 지키고 있는 남성(南城)을 공격해 오자 아군이 조총을 쏘아 물리쳤다. 남성에서 물러난 청군은 망월봉(望月峯) 아래 홍이포를 설치해 놓고 산성을 향해 포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포격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포탄은 행궁(行宮)까지 날아와 천장을 뚫고 바닥으로 깊이 처박힐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보였다. 행궁뿐 아니라 성첩의 많은 부분이 포탄에 맞아 허물어졌다. 산성 안 사람들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했다. 1월25일, 청군은 사람을 서문으로 보내 사신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덕형(李德泂)과 최명길 등이 청 진영으로 가자 용골대와 마부대는 협박을 늘어 놓았다.‘황제가 내일 귀국하실 것이니 국왕이 출성하지 않는다면 사신은 다시 오지 말라.’며 그 동안 받았던 국서를 모두 돌려 주었다. 사실상의 최후통첩이었다. 최명길 등은 변변하게 이야기를 꺼내 보지도 못한 채 돌아왔다. 최명길 등이 돌아온 뒤, 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무렵 청군은 한편으로는 포격을 통해 산성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 넣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 몇 명을 다그쳐 산성 쪽으로 급히 이동시키고 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인조를 끌어 내려는 작전이었다. 이 같은 와중에 산성에서는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빚어지고 있었다.1월26일, 이번에는 훈련도감과 어영청(御營廳)의 장졸들이 행궁으로 몰려와 무력시위를 벌였다. 역시 척화신들을 붙잡아 청군 진영으로 보내라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인조실록’에 따르면 그들을 배후에서 사주한 주체도 신경진, 구굉, 홍진도(洪振道) 등 고위 무장들이었다. 시위를 벌이는 병사들은 해산하라는 명령에도 따르지 않았다. 승지 이행원(李行遠)이 나서 나무라자 군사들은 눈을 부릅뜨며 ‘승지를 모시고 가면 적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라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김류는 ‘그들은 부모와 처자가 살육당했기 때문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원수처럼 여긴다.’고 나름대로 진단했다. 군사들이 난을 일으킬 기미까지 보이자 인조는 다급해졌다. 인조는 세자를 청군 진영에 보내겠다며 사신을 보내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세자의 출성을 통해 수습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강화도 함락’을 통고받다 이 날 저녁 최명길, 김신국, 홍서봉 등이 청군 진영으로 갔다. 왕세자가 출성한다는 사실을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청군 지휘관들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전히 선을 그었다. 이윽고 용골대 등은 최명길 일행에게 충격적인 내용을 통고했다. 그들은 강화도에서 급히 데려온 종실 진원군(珍原君)과 내관 나업(羅業)을 보여 주면서 강화도를 함락시켰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들이 들고 온 봉림대군의 친필 편지와 윤방(尹昉)의 장계도 전해 주었다. ‘강화도 함락’ 소문이 전해지자 남한산성은 충격에 빠졌다. 인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최명길은 봉림대군의 편지와 윤방의 장계가 위조되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편지가 봉림대군이 쓴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분위기는 한 순간에 바뀌었다. 홍서봉, 김류, 이홍주, 최명길 등은 모두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신하된 자로서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머뭇거리면 더욱 기고만장해진 저들에게 화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인조는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왕실의 가족들까지 모두 인질로 잡혀 버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무기력함의 표현이었다. 이 무렵 구원군이 끊어진 것은 물론, 들려오는 것은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었다. 당시 청군의 일부 부대는 이미 경기도를 넘어 충청도 일원까지 남하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을 비롯하여 목천(木川), 청주 등지까지 출몰하여 겁략을 자행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은 청주에 있다가 청군의 습격을 받아 옥천으로 피신해야 했다. 인조와 조정의 입장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캄캄할 뿐이었다.‘강화도 함락’은 절망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인조의 면전에서 물러난 최명길 등은 국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남한산성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90) 강화도가 함락되다 (Ⅱ)

    청군은 강화도 공격을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도르곤(多爾袞)은 심양에서 데려오거나 한강 일대에서 사로잡은 조선인 선장(船匠)들을 활용하여 다량의 병선을 만들었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빠른 배들이었다. 청군은 그 배들을 갑곶(甲串)까지 육로로 운반하여 조선군의 허를 찔렀다. 한강이 얼어 있던 당시, 강화도의 조선군 지휘부는 청군이 육로로 배를 운반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다 할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고 오로지 천연의 험세(險勢)만을 믿고 또 믿었다.‘준비된 군대’의 의표를 찌르는 작전 앞에서 강화도가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갑곶 방어선이 무너지다 갑곶은 육지와 강화도를 잇는 바다의 폭이 매우 좁은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작은 거룻배만으로도 건널 수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김경징 등은 갑곶 방어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청군이 상륙작전의 출발지를 갑곶으로 정한 것은 까닭이 있었다. 청군이 도해(渡海)를 시도하던 날 갑곶에 배치된 방어 전력(戰力)은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이끄는 병선 7척과 수군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시 해안 방어의 주력은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張紳) 휘하의 수군이었는데, 광성진(廣城鎭) 부근에 머물고 있었다. 강화성 방어를 맡은 초관(哨官)들 대부분도 장신의 선단에 소속된 배에 타고 있는 상태였다. 1637년 1월21일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경징은 장신에게 휘하의 수군을 갑곶으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장신은 급히 선단을 움직였지만 마침 조금(潮水가 가장 낮은 때인 음력 스무사흘)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조금 때문에 전진이 여의치 않았던 장신의 선단은 이튿날 새벽까지도 갑곶에 도착하지 못했다. 청군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강진흔은 중과부적인 상태에서도 분전했다. 적선 3척을 침몰시켰지만 자신의 배 또한 청군의 화살과 대포에 맞아 죽은 군졸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신의 수군이 도착했다. 장신은 정포만호(正浦萬戶) 정연(鄭) 등을 시켜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했다. 덩치가 훨씬 큰 조선 전함이 들이받자 적선 한 척이 침몰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많은 청군 병선들이 방향을 바꿔 자신의 선단을 향해 몰려들자 장신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그는 갑자기 정연 등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광성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하기 시작했다. 변변하게 싸워 보지도 않고 퇴각을 결정했던 것이다. 강진흔이 발을 동동 구르며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장신은 끝내 외면했다.‘인조실록’과 ‘병자록’ 등에는 격앙된 강진흔이 장신을 질타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장신,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 하지만 장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정연 등은 전진하여 강진흔을 구원하려 했으나 장신의 위세에 밀려 물러서고 말았다. 갑곶 방어선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청군이 강화성을 포위하다 갑곶에서 강진흔의 수군이 무너지자 청군이 상륙을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안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섣불리 건너오지 않았다. 척후병이 먼저 상륙하여 주위를 둘러본 뒤, 이렇다 할 저항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다를 건넜다.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던 김경징 등은 당황하여 해안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성 안으로 달아나려고 획책했다. 청군 대병력과 해안에서 직접 맞서봤자 승산이 없다는 핑계를 댔다. 호조좌랑 임선백이 봉림대군에게 달려가 호소했다.‘어찌 천연의 요새를 버리고 허물어진 성안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나라의 존망이 이 한번의 싸움에 달려 있는데 대장이 물러나 위축되어 군사들의 마음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봉림대군도 김경징을 말렸지만 그는 이미 상황 판단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지휘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해안에 배치된 병사들은 인근의 산 등지로 물러나 버렸다. 임선백은 봉림대군에게 진해루(鎭海樓) 아래를 비롯한 험한 곳에 진을 치고 결전을 벌이자고 건의했다. 그러는 사이에 갑곶 건너편에 있던 청군의 대병력은 이미 바다를 건너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다.‘병자록’ 등에서는 ‘청군이 마치 나는 듯이 바다를 건너 달려들었다.’고 적었다. 여러 곳에서 조선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이어졌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이 지휘하는 병력은 진해루 아래에서 적 9명을 살해하는 등 분전했다. 하지만 이미 청군에게 도해를 허용하여 사기가 저하된 데다 중과부적이었다. 황선신과 천총(千摠) 강홍업(姜弘業), 초관 정재신(鄭再新) 등 항전하던 말단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했다. 그럼에도 장신의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초관들은 바라만 볼 뿐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경징과 이민구는 이미 나룻배를 타고 장신의 배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도주했다. 격분한 천총 구일원(具一元)은 장신을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다.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등의 휘하에서 강변을 수비하던 병력들도 모두 바다나 산으로 달아났다. 전투를 해본 적이 없던 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청군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갑곶 나루를 돌파한 청군은 사시(巳時·오전 9∼11시) 무렵 강화성으로 밀려들었다. 청군은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성안에서는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 등이 중심이 되어 방어군을 배치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조선군은 조총과 활을 쏘며 저항했지만, 집중 포격을 앞세워 몰려드는 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미 강화성보다 몇 배나 견고한 대릉하성을 함락시킨 경험이 있는 그들이었다. 김경징 등 최고 지휘부의 오판과 태만, 그리고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수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상륙을 허용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강화성의 북문(北門)이 가장 먼저 무너지고 청군은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이어지는 자결, 그리고 죽음들 불과 한나절여 만에 강화성은 함락되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항하거나 도망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또 ‘오랑캐’가 몰려오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남문에 머물던 김상용은 화약 궤짝에 불을 질러 스스로 폭사했다. 그의 장렬한 죽음과 함께 문루도 사라져 버렸다. 김상용 말고도 우승지 홍명형(洪命亨), 도정(都正) 심현(沈俔), 봉상시정(奉常寺正) 이시직(李時稷), 주부(主簿) 송시영(宋時榮), 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등이 자결했다.‘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순절한 것이다. 이시직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글은 비감했다.“장강(長江)의 험함을 잃어 북쪽 군사가 나는 듯이 건너오는데, 술 취한 장수는 겁이 나 떨며 나라를 배반하고 목숨을 지키려 드는구나. 파수(把守)가 무너져 만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하물며 저 남한산성이야 조석간에 무너질 것이다.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자결하려 한다. 살신성인하려 하니 땅과 하늘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아 내 아들아. 삼가 생명을 상하게 하지 말라. 돌아가 유해(遺骸)를 장사 지내고, 늙은 어미를 잘 봉양하거라. 그리고 깊숙한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구구한 나의 유원(遺願)을 잘 따르기 바란다.” ‘골짜기에 몸을 맡겨 세상에 나오지 말라.’ 이 한마디 속에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삶의 가치가 함축되어 있었다.‘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세상에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삼가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술에 취해’ 자신의 임무를 팽개쳤던 관인들 때문에 ‘도마 위의 고기’가 되어야 했던 수많은 생령들의 희생은 과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성인(成仁)을 도모했던 관인들의 이면에는 너무도 많은 보통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 가리어져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팍스 시니카 시대로-중국의 비상]‘중화 경제권’ 구체화 … 거대 패권국 우려

    [팍스 시니카 시대로-중국의 비상]‘중화 경제권’ 구체화 … 거대 패권국 우려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지금 세계는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또 하나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중국을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같은 ‘중국 위협론’의 핵심은 ‘중국 패권론’이다. 세계 유일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은 ‘1극체제’에 대한 위협으로서 중국을 주시하고, 주변국들도 새로운 패권국가의 등장이 가져올 국제질서의 변화가 자국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에 대한 경계는 정치와 군사, 외교 등 다양한 측면에 모두 해당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경제 분야에서 중국 위협론은 그동안 중국산 공산품의 안전 문제에서부터 중국발 세계 인플레 우려까지 다양하게 대두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가장 이목이 쏠리는 대목이 갈수록 구체화하고 있는 ‘중화 경제권’이다. 중화 경제권이란 중국과 홍콩, 타이완 등이 실질적 공동 경제권을 형성함으로써 엄청난 시너지를 발산하게 될 것이라는 시나리오다.1차적으로는 세계 최대의 생산기지이자 시장인 중국과 국제 금융의 허브인 홍콩, 그리고 타이완의 하이테크의 결합을 의미한다. 나아가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미주 등의 화교 경제권이 가세하면 ‘중화경제 블록’이 완성되고, 미국·일본의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견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올 초 타이완 대선에서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당선됨에 따라 양안(兩岸)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마 총통은 선거전에서 ‘양안 단일시장’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장 중국의 위안화가 타이완 전국의 은행에서 환전되면서 ‘혈액’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양안간 ‘화폐 통합’의 시발점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대기시간을 포함해 비행기로 12시간쯤 걸리던 타이완과 중국 사이의 이동시간도 지난 7월부터는 1시간30분으로 줄었다. 타이완 해협에 있는 대륙붕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하는 등 자원 협력도 가시화하고 있다. 마 총통은 특히 타이완의 최전방 군사기지가 있는 진먼(金門)섬과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1958년 대규모 포격전이 벌어지는 등 양안 분단의 상징처럼 여겨진 곳이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은 액정표시장치(LCD) 업종 등의 중국 투자에 적용하던 규제를 완화했다. 타이완 금융시장에 들어오는 돈이 중국자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도록 했던 중국 자본 배제 제한도 없앴다. 타이완은 자국 기업의 중국에 대한 투자 상한선을 현재 순자산의 40%에서 60%로 완화하기로 하는 등 중국 투자를 더욱 장려한다. 내부적으로도 중국에 금융, 운송, 인적자원 등 5개 분야를 개방해 중국과 ‘하나의 시장’에 대비하고 있다. 중국도 무관세 혜택을 홍콩뿐 아니라 타이완에도 똑같이 적용하도록 했다. 홍콩과 중국 선전(深)에선 두 도시 증시의 통합지수가 가동되는가 하면 홍콩-선전 경제특구의 개발 논의가 한창이다. 일각에서는 중국-홍콩-타이완의 경제협력으로 ‘유럽연합(EU)식 차이나 연합’의 탄생을 내다 보기도 한다. 아울러 중국은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과 자유무역협정(FTA)에 공을 들이고 있다. 아세안과는 2005년 상품 분야 개방에 합의한 뒤 서비스 분야까지 협정 내용을 넓혀 왔다. 안정적인 자원 확보와 경제 블록화, 지역 통합에서의 주도권 확보 등의 효과를 동시에 노리고 있다.2007년 중국-싱가포르 FTA 협상은 싱가포르와 기존 아세안 국가들을 묶는 ‘중화 벨트’의 완성으로 해석됐다. 중화 경제권의 미래를 밝게 보는 사람들은 전 세계 화교의 자산이 3조 7000억달러에 이르고, 동원 가능한 자본금이 2조 2000억달러라는데 주목한다. 여기에 중국, 홍콩, 타이완과 전 세계 화교를 합친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0조달러에 이른다. 미국, 유럽연합(EU)과 함께 ‘세계 3대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교 경제권이 중국 위협론의 주요한 배경으로 자리잡은 것은 이처럼 엄청난 잠재력 때문이다. 동시에 화교 경제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야기될 자원 쟁탈과 뒤따를 외교 충돌 가능성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중국은 주변국과 조화하며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며 ‘화평굴기(和平起)’를 거듭 강조하지만 서방국가들은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 jj@seoul.co.kr
  • 마잉주 “진먼도와 샤먼 사이 다리 놓자”

    마잉주(馬英九) 타이완 총통이 24일 “타이완 진먼도(金門島)와 중국 샤먼(廈門) 사이에 다리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진먼도는 타이완의 최전방 군사기지가 있는 곳이다.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시의 코 앞에 있다. 지난 1958년 중국과 타이완 사이에 대규모 포격전이 벌어지기도 해 양안 분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타이완 중앙통신은 이날 “마잉주 총통이 발발 50주년을 맞은 ‘진먼 823포격전’ 기념식에 참석해 진먼도를 양안 평화의 상징으로 만들자고 제의했다.”고 보도했다. 마 총통은 “진먼도는 2001년 소삼통(小三通, 양안간의 통상·통항·통신) 개방 이후 중국 샤먼과 더불어 양안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진먼도 주민들의 염원인 진먼~샤먼 대교 건설도 적극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마 총통은 “대만 행정원은 양안 관계 개선에 발맞춰 진먼의 관광, 문화 자원, 산업 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중장기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진먼도를 방문하는 중국민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진먼에 도착해 ‘비자’를 받는 ‘어라이벌 비자’와 ‘복수 비자’도 계획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이날 마 총통의 ‘진먼도 평화선언’으로 양안의 교류 개방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그러나 민진당 의원들은 “무조건 문을 열면 타이완의 ‘국가 안보’에 큰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우려했다.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마잉주 타이완 총통 23일 양안 평화선언

    마잉주(馬英九) 타이완 총통이 양안 분단의 상징인 진먼도(金門島)를 방문해 종전(終戰)을 제안하는 평화선언을 할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4일 마 총통이 오는 23일 진먼도 군사기지에서 중국측에 화해와 협력의 메시지인 ‘진먼도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날은 진먼도 전쟁 발발 50주년으로 총통부 왕위치(王郁琦) 대변인도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마 총통은 외교·안보 라인을 통해 선언 내용을 다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타이완 현지 언론들은 마 총통이 중국측에 “역사적이고 매우 중요한 연설을 할 것”이라며 관심을 집중했다. 타이완 연합보는 그가 ‘외교적인 종전협정’ 체결을 제안할 것으로 전망했다. 개도국들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양측의 외교 주도권 경쟁을 끝내자는 의미라고 신문은 분석했다. 종전을 제안하는 진먼도 선언이 나오면 양안 관계는 한 단계 격상될 것으로 전망된다. 타이완은 이미 지난 5월 마 총통 취임 이후 중국과 경제 협력을 강화했다. 중국 본토인들의 타이완 직접 관광 허용, 양안간 투자제한 완화 조치 등이 취해졌다. 마 총통은 그러나 미국에 대해 무기판매 약속 준수를 촉구하는 등 안보문제에선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내다봤다. 중국 푸젠성(福建) 샤먼(廈門)시 바로 앞에 위치한 진먼도는 타이완 최전방 군사기지가 있는 섬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한국전쟁 실패 이후 옛 소련에 위세용으로 1958년 인민해방군에 진먼도 공격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8월23일부터 44일간 진먼도에서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됐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1) 근왕병이 패하다 Ⅱ

    당시 근왕병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을 고려하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을 구원하는 것은 애초부터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선 지방의 감사나 지휘관들이 병력을 모으고 행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집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고, 날씨가 추워 행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병사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문관 출신이 많았던 지휘부 또한 전문적인 군사지식이나 병법(兵法)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청군을 만나면 겁먹고 진군을 꺼리거나, 한 번 패할 경우 부하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한 청군의 편제 병자호란 당시 조선 침략에 투입된 청군은 크게 4개 군(軍)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마부타(馬福塔)가 이끄는 선봉 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뒤 대로를 따라 곧바로 서울로 입성하여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특히 서울과 강화도의 연결을 차단하여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예친왕(禮親王) 도도(多鐸) 등이 지휘하는 좌익군(左翼軍) 3만은 선봉대의 뒤를 받치며 서울로 입성하여 서울과 삼남 지방의 연결을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홍타이지가 직접 이끌었던 본진(本陣) 5만 4000은 좌익군의 뒤를 따라 남하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지의 산성을 공략하고 인축(人畜)을 획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친왕 도르곤(多爾袞) 등이 이끄는 우익군(右翼軍) 2만 2000은 벽동(碧東), 창성(昌城) 등지의 성들을 공략한 뒤 임진강을 건너 강화도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선봉대의 돌격을 통해 조선 조정이 강화도나 삼남 지방으로 파천하는 것을 차단한 뒤, 후속 부대를 남하시켜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복안이었다. 아직 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깜냥이기도 했다. 조선군은 초전에 이미 마부타가 이끄는 선봉군의 위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했다. 무엇보다 그들 철기(鐵騎)의 가공할 만한 전진 상황을 조정에 제 때 알리지 못하고, 또 돌격을 적절히 저지하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청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군대였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서정(西征)을 통해 명군이나 차하르(察哈爾) 몽골군과 싸워 실전 감각이 뛰어났다. 청군은 원정에 나설 때나, 명군과 그냥 대치하고 있을 때나 일상적으로 복병을 파견하여 적군 주둔지 주변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 납치했다. 이른바 착생(捉生)이 그것이다. 포로를 신문하여 적군과 관련된 정보를 정확하게 알아 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착생’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김자점 부대의 패퇴와 관망 조선 조정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른바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상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大路)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 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청군 선봉대로 하여금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대로 주변 산성에 있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 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 오는 청군의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투’에 참전하여 패한 뒤,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경험했던 이민환(李民 은 조선군 방어 태세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청야견벽 작전만으로는 청군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의주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연변에 위치한 산성들은 대부분 대로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청군이 산성 공략을 늦추고 서울을 향해 곧바로 남하할 경우 속수무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민환은 조선군도 적정한 수준의 기마병을 배치하여 그들의 돌격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민환의 경고처럼 대로에서 적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한 후유증은 그대로 나타났다.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군을 비롯한 서북 지역의 병력 대부분이 청군의 후미를 쫓아야만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초기, 김자점은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마부타가 이끄는 청군 선봉대를 그대로 놓아 주었던 그는 12월14일, 봉산(鳳山) 북쪽의 동선역(洞仙驛)에서 청 좌익군을 공격하여 소소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이끄는 대군이 남하하자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병력 수천을 이끌고 토산(兎山)으로 이동했다. 토산에서도 김자점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척후병을 두지 않은 채 안이하게 행군하다가 12월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행군하면서 수시로 ‘착생’을 통해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중화(中和)에서 조선인 포로를 신문하여 김자점 군의 이동 경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력의 차이는 그대로 승패에 반영되었다. 약 5000명에 이르던 김자점 군은 졸지에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김자점은 단기(單騎)로 도주하여 전장을 피했다. 선봉장 이완(李浣)이 이끄는 어영청(御營廳) 포수들이 분전하여 적장 한 사람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이미 주장(主將)이 도주한 상황에서 전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자점은 결국 남은 어영군 병력을 수습하여 양근(楊根)의 미원(迷原)으로 이동했다. 당시 미원에는 김자점 부대말고도 강원감사 조정호의 부대, 북한산 전투에서 패한 뒤 이동해온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 부대 등이 합류했다. 모두 합치면 1만 7000에 달하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다. 남한산성에 있는 인조와 조정은 이들이 청군의 포위를 뚫고 산성으로 들어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김자점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청군이 이천과 여주 지역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청군의 포위를 뚫어 보겠다는 의지가 약한 점이었다. ●전라도 근왕병의 승리와 철수 당시 일어났던 근왕병 가운데 두드러진 활약을 벌였던 부대가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끌던 전라도 병력이었다.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 휘하에서 선봉장으로 종군했던 김준룡은 1637년 1월4일, 병력 2000을 이끌고 수원 광교산(光敎山)으로 이동했다. 김준룡 부대는 산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여 청군의 돌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화기수를 전면에, 사수(射手)와 창검병을 후면에 배치하여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1월5일, 청군 지휘관 양고리(楊古利)가 5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김준룡 부대는 집중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이튿날 양고리가 병력과 화력을 증강하여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호준포(虎砲)까지 동원하여 조선군 진영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선방하던 조선군은, 저녁 무렵 청군이 광교산의 후방을 우회하여 광양현감 최택(崔澤)이 맡고 있던 방어선을 급습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김준룡은 최택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유격군을 이끌고 청군을 향해 돌격했고, 전투는 순식간에 혼전 양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혼전 중에 조선군 화기수의 총탄에 적장 양고리가 쓰러졌다. 양고리는 홍타이지의 매부로서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사살한 최고위급 적장이었다. 양고리가 죽자 청군 진영은 급격히 동요했다. 김준룡은 청군이 동요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병자호란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남한산성과 가까이 있는 광교산에서 날아온 김준룡의 승리 소식에 조정은 환호했다. 하지만 김준룡의 부대는 광교산에서 계속 버틸 수 없었다. 군량과 화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준룡은 병력을 이끌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아쉬운 대목이었다. 청군에 길목이 차단되어 근왕병 전체의 전력이 분산되었던 데다, 작전과 보급을 총괄적으로 지휘할 지휘부가 없었던 탓이었다. 환호도 잠시뿐 산성은 다시 기다림의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자랑스런 내 아들아 , 이제 편히 가거라”

    “자랑스런 내 아들아 , 이제 편히 가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아. 이제 편히 가거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6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흉상으로 영원히 남았다. 해군은 13일 해군사관학교와 해군교육사령부의 각 학교에서 제2연평해전 전사자 고(故) 윤영하 소령과 조천형·황도현·서후원·한상국 중사, 박동혁 병장의 흉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유가족들과 윤공용 해군사관학교장, 김정두 해군교육사령관, 장병 등 500여명이 참석해 전사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흉상 제막은 전사자들이 처음 군복을 입고 첫발을 들였던 해군 사관학교와 기술병과학교, 전투병과학교, 기초군사학교 4곳에서 잇따라 열렸다. 제막식은 고인에 대한 경과보고와 공적소개, 추모사, 제막, 헌화와 분향, 묵념, 흉상 만남 순으로 진행됐다.6주기를 맞은 이날도 유가족들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마치 교전 당시 한배를 탔던 전우들과 같이 이날 첫 제막식이 열린 해군사관학교부터 기초군사학교까지 4곳을 한가족처럼 함께 움직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눴다. 전사자 가운데 유일한 사병(의무병)이었던 고 박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52)씨는 “사랑하는 동혁아 그렇게 힘들고 아프게 가더니 이렇게 오늘 또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구나.”라며 오열해 제막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김정두 해군교육사령관은 “영령들이시여, 이제 장병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어떠한 시련과 역경의 파도 앞에서도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필승 해군의 전통을 이어가게 해 주십시오.”라며 추모사를 했다. 제막식에는 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부정장으로 북한군 경비정의 포격으로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이희완(32·해사 근무) 대위 등 전우 4명도 참가했다. 전사자 등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에 실망해 2005년 4월 조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3년만에 귀국한 전사자 한상국 중사의 미망인 김종선(34)씨는 “전사자들의 명예가 늦게나마 회복된 것이 다행스럽지만 이같은 행사가 여전히 군대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부터 국가 차원에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과 행사를 갖는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29일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에서 우리 해군과 북측 해군간에 일어난 교전으로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으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했다. 진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양안 9년만에 대화 물꼬

    양안 9년만에 대화 물꼬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중국과 타이완 간 문제를 논의하는 협상기구들이 9년 만에 처음으로 12일 베이징에서 역사적인 양안대화를 시작했다.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와 타이완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는 1999년 타이완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양안은 특수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는 ‘양국론’을 주창한 이후 대화가 중단됐었다. 이번 회담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우보슝(吳伯雄) 타이완 국민당 주석이 지난달 28일 열린 국공 영수회담에서 해협회·해기회 간 대화채널 복원을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9년 만의 회담에서는 평화협정 체결이나 미사일 배치 등 민감한 정치문제는 피하고 주말 직항노선 개설과 대륙 관광객 타이완 방문 등 경제협력 문제만 논의하게 된다. 이날 해협회와 해기회는 이날 상호 영구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데 합의했다. 팡젠궈(龐建國) 해기회 부비서장은 “설치될 사무소는 영사관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이며 해협을 건너 양안 인민들의 교류와 여행을 용이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고 신화사가 보도했다. 두 나라는 이어 다음달 4일부터 중국과 타이완 각각 4개 도시를 연결하는 주말 직항노선을 개설키로 했다. 그간 중국·타이완 간에는 직항이 없어 홍콩이나 제주공항을 경유해야 했다. 우선 하루 평균 3000명 정도의 대륙 관광객의 타이완 방문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타이완은 또 중국인 관광객이 중국 신용카드는 물론 위안화를 타이완달러로 환전해 쓸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 밖에 양안간 화물기 운항과 타이완 금융회사의 중국 내 영업 등도 논의된다. 양안 협상이 개시됨에 따라 타이완군은 13일 최전방 진먼(金門)도에서 예정된 실탄 포격훈련을 무기한 연기했다고 타이완 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타이완군은 매년 한차례씩 중국 샤먼(廈門)을 앞에 두고 실탄 포격훈련을 실시해왔다. 천윈린(陳雲林) 해협회 회장은 환영만찬에서 푸젠(福建)성 도요에서 1300도의 고열로 구워 만든 ‘부귀홍(富貴紅)’이라는 국보급 도예 작품을 선물했다. 홍콩 명보(明報)는 “뜨거운 양안의 동포애와 유장한 중화문화로 양안 인민이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장빙쿤(江丙坤) 해기회 이사장은 ‘청공만리 연비인락(晴空萬里 鳶飛人樂·맑게 갠 날에 멀리 연을 날리며 친구와 즐거움을 나눈다)’이라는 제목의 대나무 조각품을 선물했다. 군자의 정을 나누자는 의미로 해석됐다. 장 이사장은 이날 만찬사를 통해 쓰촨(四川)성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측에 위로의 뜻을 전하며 타이완 국민들이 상당한 성금을 내놓았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jj@seoul.co.kr ■용어클릭 ●해기회·해협회 양자간 교류협력 추진을 위해 1990년과 1991년 각각 만들어진 반관반민 형태의 기구. 타이완의 해기회가 먼저 만들어졌으며 준정부기구 간의 접촉의 필요성을 인식한 중국이 뒤따라 창설했다. 중국은 국무원 산하에 장관급 기구인 타이완사무판공실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 136년만에 귀환 帥字旗 특별전

    1869년 제18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율리시스 그랜트는 이듬해 1월 베이징 주재 미국공사 로를 조선 전권공사로 임명한다. 그랜트는 조선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교서를 내리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1812∼1882)에게 로 공사를 수행하여 ‘조선원정’을 단행하도록 지시한다. 로저스는 1871년 로 공사와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5척의 군함을 이끌고 일본의 나가사키를 출발한다.6월1일 강화도 손돌목에서 첫번째 포격전이 벌어졌고,11일에는 미군의 함포사격과 상륙전으로 어재연 장군이 지휘하던 광성보가 함락됐다.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상징하는 수자기(帥字旗)가 내려진 자리에는 성조기가 올라갔다.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3명에 부상자 9명에 그쳤지만,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비롯하여 전사자만 350명에 헤아렸다. 우리가 신미양요(辛未洋擾)라고 부르는 ‘한·미전쟁’의 전말이다. 수(帥)자가 크게 씌어진 조선군 깃발은 이렇게 미군의 전리품이 되어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내졌고, 최근 장기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지난 1일 막을 열어 새달 5일까지 열리는 ‘수자기-136년만의 귀환’은 이 깃발의 ‘귀향’을 기념하여 마련된 것이다. 수자기에 얽힌 사연은 그동안 여러차례 언론보도에 오르내렸으니 크게 신선한 주제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역사적 사건으로 신미양요에 대한 친절한 해설자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볼 만한 전시회를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특별전을 둘러보면, 당시 조선이 서구열강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처했고, 군사적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방비태세를 마련했으나 ‘실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었음을 절감하게 된다. 실제로 조정은 진무영(鎭撫營)을 별도로 두어 강화도를 지키게 했고, 진무영의 우두머리인 진무사(鎭撫使)에는 정2품을 임명했다. 병조판서가 같은 정2품이었으니 강화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는데, 전시된 미군의 종군사진기자 F 비토의 사진을 보면 조선군의 입성에서는 군복이라는 개념부터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은 듯한 모습이다. 화력의 비교도 이루어졌다. 병력은 조선군이 1000명, 미군이 교전부대와 대기부대를 합쳐 1230명이었으니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포의 경우 조선군은 사거리 120m의 불랑기포가 주력이었고, 가장 멀리 나가는 홍이포도 사거리는 700m에 불과했다. 반면 미군은 사거리 1564m의 9인치 함포를 앞세웠다. 특별전에는 면 30장으로 누빈 일종의 방탄복인 ‘면갑(綿甲)’도 출품되었다. 대원군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면갑은 조선군의 개인무기였던 사거리 120m짜리 화승총에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하지만 미군이 갖고 있던 사거리 400m와 914m의 레밍턴소총과 스프링필드소총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어떻게 대처해야 나라를 지켜낼 수 있는지 ‘수자기’특별전은 이렇게 관람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터키군 1만명 이라크 진격

    터키군 1만명이 쿠르드노동자당(PKK) 게릴라 소탕을 위해 21일(이하 현지시간) 국경을 넘어 이라크 북부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 공격은 지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첫 대규모 월경 군사 작전이다. 터키·쿠르드간 무력 충돌이 확대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로이터,AP통신은 22일 터키군 당국 발표를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터키 군 참모는 웹사이트를 통한 성명에서 “터키 군은 이라크 영토의 안정을 보존한다는 조건 하에 월경 작전을 시작했으며 목적을 달성한 뒤 가능한 한 단시간 내에 귀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군은 이날 저녁 7시쯤 쿠르드 반군 거점에 대한 전투기 공습과 지상군 포격을 시작으로 국경을 넘었으며 전투기 엄호 아래 작전을 수행했다. 터키 민영 NTV는 터키군이 이라크 영토 10㎞ 지점까지 진격했다고 전했다. 군사작전은 이라크 접경인 쿠쿠르카 남쪽의 PKK 근거지인 하쿠르크 지역에 집중된 것으로 전해졌다. 관영 아나톨리아 통신은 터키 남동부 디야르바크르의 공군 기지에서 전투기 이륙과 헬기의 국경지역 정찰 비행이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이라크 주둔 미군도 이날 터키군의 진격 사실을 확인했다. 그레고리 스미스 미군 대변인은 “터키군의 이라크 북부 진격은 이 지역의 PKK 테러리스트들을 타깃으로 한 제한적인 작전”이라고 말했다. 한편 PKK 대변인 아흐메드 다나스는 “터키군의 국경 침입으로 인한 충돌에서 터키군 2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터키군은 즉각 언급하지 않았다.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공습 직후 터키 측에 이라크의 주권을 존중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레젭 타입 에르도간 터키 총리는 TV회견을 통해 “터키군의 작전은 대상과 목표, 규모가 제한적”이라면서 “터키군은 목표를 달성하는 즉시 가능한 한 빨리 철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압둘라 귤 터키 대통령은 잘랄 탈랄바니 이라크 대통령에게 이번 작전의 목표에 관해 설명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터키의 이번 작전은 봄철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PKK 게릴라들의 테러 활동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터키는 PKK가 북부 이라크에 은신하면서 지난 수개월 간 영토에 침입해 터키군 수십명을 사살한 것을 비난해 왔다. 터키군은 PKK를 공격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는 PKK 게릴라 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고집 중이다. 터키군은 지난 90년대에도 PKK 소탕을 위해 수차례 이라크 국경을 넘었다. 지난해 10월엔 의회로부터 이라크 월경 작전을 승인받은 후 PKK 근거지를 수차례 공습하는 지상 작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1만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용어클릭 ●PKK(Partia Karkaren Kurdistan) 쿠르드족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무장단체로 1984년 창설된 뒤 터키 내에 거주하는 1600만명의 자치 확대를 위한 무력투쟁을 벌여 왔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3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병자호란 다시 읽기] (56) 대릉하성의 비극 (1)

    1631년(인조 9) 8월5일 밤, 후금군은 대릉하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안에는 사령관 조대수(祖大壽)를 비롯하여 1만 5000명 남짓한 명군이 있었다. 성의 치첩(雉堞)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 미처 돌아가지 못한 인부가 3000명, 상인이 2000명 정도 있었다. 후금군은 만주병과 몽골병, 그리고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합쳐 모두 4만명 가까운 병력이었다. 누르하치 시절 이래 후금군은 요동 지역의 명군을 공격할 때마다 항상 수적 우세를 유지해 왔다. 명군보다 월등히 많은 수의 병력을 집중시키는 작전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는데 대릉하 원정에서도 어김없이 그 원칙을 지켰다. ●홍타이지,4만 병력으로 1만5000 대릉하성 포위 휘하 병력의 수가 명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음에도 홍타이지는 신중했다. 그는 과거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했던 전철을 뒤풀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병사들을 성을 향해 돌격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격할 경우, 후금군의 인명 손실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명군이 갖고 있는 화포의 위력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홍타이지는 성을 포위한 뒤, 성 주위에 두 겹으로 참호를 파라고 지시했다. 참호의 바깥에는 담을 쌓았다. 성과 후금군의 참호 사이의 거리는 약 3리(里) 정도였다.3리 정도면 명군 화포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리였다. 대릉하성에서 금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만주와 몽골군 분견대(分遣隊)와 한인 포병대를 배치하여 바깥 지역으로부터 명의 지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도록 했다. 성을 완전히 고립시킨 상태로 장기전을 펼침으로써 명군을 고사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8월8일과 9일, 포위망을 뚫어 보려고 명군 기마병 600여 명이 성 바깥으로 나왔다가 모두 패하여 도주했다. 후금군은 명군의 출격에 대비하여 곳곳에 복병을 배치했다. 이후에도 명군은 간헐적으로 병력을 내보냈지만 그 때마다 후금군에 격퇴되었다. 홍타이지는 물 샐 틈 없는 포위 상태를 유지하는 한편, 대릉하성 바깥에 위치한 명군의 독립 성보(城堡)들을 각개 격파하려고 시도했다. 대(臺)라고도 불리는 개별 성보들을 향해 홍이포를 비롯한 화포들을 쏘아 타격을 가한 뒤, 점령하는 방식이었다. 작전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각 대에 머물던 많은 명군 장졸들과 백성들이 포격을 받고 전사하거나, 투항해 왔다.10월12일에는 대릉하성 주변의 성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우자장대(于子章臺)가 함락되었다. 후금군은 홍이포 6문, 대장군포 54문을 이용하여 3일 동안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성첩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와중에 남녀 587명이 투항해 왔다. 우자장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주변의 각 대들에도 연쇄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겁을 집어먹은 장졸과 백성들의 도주와 투항이 이어졌다.10월14일에는 대릉하성 외곽의 마지막 보루였던 진흥보대(陳興堡臺)마저 무너졌다. ●명 대규모 지원군마저 참패 포위를 통해 명군의 목줄을 조여들어 가는 한편, 홍타이지는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했다.8월13일부터 수 차례에 걸쳐 조대수에게 편지를 보내 화친과 투항을 촉구했다. 때로는 투항한 한군(漢軍) 장수들을 성으로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처음 홍타이지로부터 화친과 투항을 요구받았을 때 조대수는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시간과 상황은 조대수의 편이 아니었다. 8월15일, 포위된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송산(松山) 방면에서 명군 지원군 2000명이 달려 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후금군 병력에 의해 격퇴되었다.25일에도 금주성으로부터 6000명의 원군이 출격했지만 역시 후금군에 차단되어 도주했다. 대릉하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낸 병력이 번번이 패퇴하자 9월24일 명군은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었다. 산해관으로부터 대규모의 구원군을 다시 보낸 것이다. 감군도(監軍道) 장춘(張春), 총병 조대락(祖大樂) 등이 병력 4만명을 이끌고 출동했던 것이다. 명군은 소릉하(小凌河)를 지나 주둔지에 참호를 파고 화기 등을 정렬 배치하는 등 후금군과 전면전을 벌일 태세였다. 하지만 3일 뒤에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다시 패하고 말았다. 전투 도중 후금군 진영 쪽으로 불던 바람이 역풍으로 바뀌었다. 날씨도 철저히 후금군 편이었다. 명군은 결국 사령관 장춘을 비롯한 33명의 지휘관이 포로가 되는 등 참패하고 말았다. 전투를 감독하던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은 산해관으로 패주했다. 구원군이 오는 족족 패주했던 데다 외곽에서 전초 기지 역할을 하던 각 대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자 대릉하성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외부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식량과 땔감, 마초(馬草)가 고갈되고 있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성밖으로 몰래 나오는 명군 병사들은 매복하고 있던 후금군에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8월24일, 포로로 잡힌 명군 병사로부터 ‘성을 쌓는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가운데 이미 30명 가까이 굶어 죽었다.’는 진술이 나왔다.9월19일에는 ‘성안에 남은 곡식이 불과 100석뿐이고, 탈 수 있는 말은 70마리밖에 없다. 인부들의 절반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병사들은 말고기로 버티고 있으며 말 안장을 쪼개 불을 피우고 있다.’는 형편이었다. 장춘이 이끄는 구원군이 패하고 우자장대마저 무너진 10월 이후의 상황은 절망과 처참 그 자체였다.10월10일, 성을 탈출하여 후금군 진영으로 투항한 왕세룡(王世龍)의 진술은 충격적이었다.‘성안의 양식은 다 떨어졌고, 인부와 상인들은 모두 죽었으며, 남아 있는 병사들은 서로를 잡아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릉하성은 마침내 ‘서로를 잡아 먹는(人相食)’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고립된 명군과는 달리 후금군은 금주를 거쳐 심양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양으로부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시로 실어올 수 있었다. 조대수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가 되고 말았다. ●‘부메랑’된 홍이포 대릉하성의 명군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시 후금군이 보유하고 있던 화포의 위력이었다.1626년 영원성을 공격하다가 명군의 홍이포(紅夷砲) 공격 때문에 누르하치가 끝내 절명했던 ‘아픔’을 겪었던 후금은 이후 명군의 화기를 획득하기 위해 부심했다. 처음에는 전장에서 노획한 명군의 화기를 활용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후금은 마침내 1631년 1월과 3월, 대장군포(大將軍砲)와 홍이포를 각각 자체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대장군포는 16세기 전반, 포르투갈 상인들이 명에 전해준 불랑기포(佛狼機砲) 가운데 제원이 큰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홍이포는 17세기 초반 역시 마카오를 통해 명에 전해진 최신 화포였다. 포신이 길어 사정 거리가 길 뿐 아니라 탄환이 날아가는 속도와 파괴력이 당시 그 어느 화포보다도 발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홍이포를 주조하고 그것을 전장에서 활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주역이 대개 명과 관련이 있거나 명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이었다는 점이다. 홍이포 주조의 총감독이자 나중에 한인으로 구성된 포병대를 이끌었던 동양성은 원래 무순(撫順)에서 한족 상인들과 오랫동안 거래했던 인물이다. 절반은 한족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는 이후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홍이포 주조의 실무를 감독했던 정계명(丁啓明)은 원래 명군 부장(副將)이었다가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에 투항했던 인물이다. 주조를 직접 담당했던 장인(匠人) 왕천상(王天相)과 두수위(竇守位) 등도 기사전역 당시 후금군이 획득했던 한인들이었다. 홍타이지는 화포 주조의 공을 인정하여 이들 장인을 노비 신분에서 모두 해방시키고 많은 상을 내렸다. 귀순한 한인들의 협조 덕분에 대릉하 공격 당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더 많은 수의 대형 화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명 출신 장인들이 만든 홍이포에서, 명 출신 포병들에 의해 발사된 포탄은 견고한 대릉하의 성보들을 파괴하고 용장(勇將) 조대수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무너져 가고 있던 명으로부터 유출된 인력과 최신 기술들이 ‘부메랑’이 되어 명군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강유정의 영화 in]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티앙 카리옹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는 유럽판 ‘웰컴투 동막골’이라고 할 수 있다.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은 전시(戰時)라는 비인간적 상황에서의 판타지를 그려내고 있다. 환상적 비약을 통해 전쟁이라는 현실로부터 일탈해 버린 셈이다.‘메리 크리스마스’ 역시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의 상처를 ‘화해’라는 윤리로 회복하고자 한다. 너무도 착해서 마음이 훈훈해지기는 하지만 어딘지 현실감이 떨어지는 동화처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북부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독일, 프랑스, 영국군이 마주한다. 추위와 공포 속에서 매일 밤 포격이 일어나고 크리스마스만큼은 평화롭게 보냈으면 하고 바란다. 이 극심한 공포 속에서 신부였던 스코틀랜드 병사는 백파이프를 연주한다. 독일군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참호 위에 세우고 노래로 화답한다. 낮 동안 국적과 언어가 다른 군인들의 시체가 쌓였던 완충지대, 그 곳에 세 나라의 장교들이 모이고 하루 동안의 휴전을 제안한다. 샴페인과 음악을 나누고 함께 성탄절 미사를 올리는 그들, 이제 그들은 서로에게 낯모를 적이 아닌 전쟁이라는 공포 앞에 내던져진 동료가 된다. ‘메리 크리스마스’는 적과 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점들을 따뜻한 감동의 지점으로 선택한다. 백파이프와 캐럴이 섞이고 포도주와 샴페인이 전쟁의 공포를 녹인다. 화해의 지점에 가족이 등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독일 장교는 프랑스 장교가 잃어버렸던 아내의 사진을 돌려주고 스코틀랜드 장교는 자신의 편지를 적에게 부탁한다. 복잡하고 두려웠던 완충지대의 긴장은 ‘가족’과 ‘사랑’,‘신의 은총’이라는 대의 명제 앞에서 휘발된다. 그렇게 평화는 다가오는 듯 싶다. 영화는 결국 완충지대의 평화가 단 하루의 몽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암시하면서 끝난다. 하지만 ‘메리 크리스마스’가 방점을 찍는 부분은 이 현실적 결말이 아닌 환상적 화해의 공간이다. 매일 아침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커피를 끓이는 당번병,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포격을 뚫고 찾아온 애인, 애인과의 달콤한 하룻밤을 뒤로 한 채 동료들에게 돌아오는 오페라 가수.‘메리 크리스마스’에는 꼭 있어야만 하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사랑으로 무장한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영화가 착한 영화로 분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착한 영화는 보는 이들의 내면적 갈등을 잠재운다. 사람이란 욕망과 윤리, 당위와 선택 가운데서 흔들리는 존재라는 것을 잠시 잊게 해주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상흔은 거시적 담론의 폭력으로 전도되고 그 가운데 개인들은 선량한 피해자로 채색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메리 크리스마스’에는 체온과 혈액을 지닌 진짜 사람의 흔적이 없다. 이를테면 그들의 종교가 모두 달랐더라면, 크리스마스가 공유된 명절이 아니었더라면과 같은 질문들이 빠져 있다. 전쟁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닌 약점에서 시작된 불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터키軍 이라크 월경… 쿠르드 공습

    터키군이 이라크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감행, 쿠르드 반군 30명 이상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터키와 이라크 국경선의 긴장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들은 24일 터키군의 전투기들이 이라크 영토내로 21㎞나 깊이 들어갔고, 보병 300여명은 10㎞나 국경을 넘어들어가 분리주의자인 쿠르드노동자당(PKK) 반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고 전했다.23일까지 3일간 단행된 이번 공격으로 PKK 소속 34명의 반군이 살해됐다. 이 공격에 대해 터키군 관계자는 공격규모는 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터키 군 대변인은 이날 또 이번 공격에는 공군의 공습은 물론 대포도 동원돼 반군들의 은신처로 의심되는 곳 수곳을 포격했다고 확인했다. 그러면서 “좀 더 격렬한 추격이 이라크 월경(越境)을 통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될 수 있다.”면서 “다만 당장 오늘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이번 작전에 투입됐던 터키군 전체는 이미 터키 영내로 되돌아 왔다고 주장했다. 터키군의 이라크 월경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나 이라크 주둔 미군에 의한 반격은 없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최근 터키-이라크 관계는 터키 의회가 쿠르드 반군 소탕을 위한 월경 작전을 승인하면서 긴장이 높아져 왔다. 이어 4일 만인 지난 21일 터키-이라크 국경지대에서 쿠르드족의 습격과 터키군의 반격이 이어지면서 수십명이 사망했었다. 이춘규기자 taei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