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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내란음모 의혹은 선제대응이 핵심/여영무 남북전략연구소장

    [기고] 내란음모 의혹은 선제대응이 핵심/여영무 남북전략연구소장

    주권과 국민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안보의 핵심은 선제대응과 억지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비난을 무릅쓰고 자국 내는 물론 전 세계에 걸쳐 실시간 전방위 감청, 정보 수집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빅 브러더’ 정보망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에 따라 안보의 으뜸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헌법66조 2항, 69조, 74조). 안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침과 체제전복세력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사전에 보호하는 것이다. 알카에다의 9·11테러로 미국인들을 포함한 3000여명이 무고하게 생명을 잃었다. 대통령도 한번 잃은 생명을 복원할 순 없다. 21세기 무력충돌과 체제전복세력에는 국가 외 테러리스트들도 포함되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의 비밀공작과 기습공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자원을 총동원, 국민생명을 지키는 데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이 3년 전부터 알카에다 테러식 내란음모에 선제대응한 것도 이런 안보추세와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국정원이 ‘이석기 내란음모 의혹사건’을 사전 적발한 것은 남북 간 군사대치 속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남북은 법적으로 전쟁상태로서, 북한은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일으켰다. 북한은 올봄 내내 휴전협정 무효화와 전면전 선언 등 반년 동안 전쟁위협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며 우리의 굴복을 강요했다. ‘이석기 집회’가 북한의 이런 전쟁위협 시기와 일치했다는 점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앞으로 국정원과 검찰이 이석기 내란음모 의혹사건을 더 수사해봐야겠지만 드러난 사실들만으로도 범죄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국정원에 따르면 이들은 비밀 회합 때마다 ‘적기가’(赤旗歌)와 ‘혁명동지가’ 등 북한 혁명가요를 합창했고 사용용어들도 북한식 일색이었다고 한다. 수사 관계자들이 입수한 5건의 녹취록엔 ‘RO 총책’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조직원들을 교육한 내용과 핵심 조직원들의 회의 및 대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국정원 수사에 대한 진보당의 ‘날조’ ‘공안탄압’ 등 주장, 이석기 의원의 잇따른 말바꾸기, 러시아 루블화도 섞인 1억 4000만원 현금다발 적발 등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혐의점들이 그의 민혁당 전과와 함께 내란음모 의혹의 신빙성을 높이고 있다. 진보당은 ‘공안탄압’ 등 상투적 수사로 반발만 할 게 아니라 왜 조작인가를 국민 앞에 설득력 있게 조목조목 설명해야 한다. 이석기 의원은 떳떳하다면 왜 한때 잠적했으며, 진보당과 보좌진들이 무슨 권리로 법적 압수수색을 방해했는가. 선거 때 국고보조를 제외하고라도 혈세로 연간 32억원이란 막대한 국고보조를 받는 진보당은 대한민국 제도권 정당으로서 압수수색영장 수용을 솔선수범해야 할 기본적 책무가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법치주의며 법치주의는 준법정신이다. 진보당 자신들은 법 집행을 방해하면서 촛불시위로 ‘민주회복’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석기 사건은 각계각층의 종북세력망 중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주장이 무성하다. 수사당국은 일부 불순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공명정대하고 철두철미한 수사로 내란음모 의혹의 내용을 명백히 밝힐 뿐 아니라 이번 사건을 종북세력망을 파헤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 러셀 5일 취임 첫 방한… 日·中도 순방

    러셀 5일 취임 첫 방한… 日·中도 순방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총괄하는 대니얼 러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지난 7월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특히 러셀 차관보는 청와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면담할 것으로 전해져 북한 비핵화와 남북 관계 진전 상황뿐 아니라 양국 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재연기 문제도 심도 있게 협의할 것으로 관측된다. 미 국무부는 4일 러셀 차관보가 6~7일 방한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국을 첫 기착지로 선택한 러셀 차관보는 일본(7∼9일), 중국(13~14일)을 순차적으로 방문한다. 북한 비핵화 등 한반도 문제를 주제로 양자협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러셀 차관보는 정부 고위 당국자들을 폭넓게 접촉하는 일정을 짠 것으로 알려졌다. 러셀 차관보가 버락 오바마 1기 행정부 때부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을 역임하며 북한 핵실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 한·미 동맹 등 주요 현안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에서 다양한 의제가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김 안보실장과 러셀 차관보의 비공개 면담에서는 전작권 전환 재연기 문제가 협의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 등 동북아 역내 현안에 대한 의견 교환도 예상된다. 이와 관련해 러셀 차관보는 일본 문제를 다루는 외교부 김규현 1차관과 이경수 차관보도 예방한다. 러셀 차관보의 아시아 순방 시점이 중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사무특별대표의 방북 직후여서 북한의 대남·대미 기조 변화와 맞물린 미국의 대북 메시지가 주목된다. 한편 정부 내 북핵 파트의 고위 간부가 지난 3일 미국 및 중남미 방문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지만 외교부는 한반도 정세 설명 차원이라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김정은, 연평도 도발 해안포부대 또 시찰

    김정은, 연평도 도발 해안포부대 또 시찰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서해 최전선인 장재도와 무도의 해안포 부대를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3일 보도했다. 지난해 8월 첫 시찰과 지난 3월에 이어 세 번째이다. 북한 매체들은 그러나 정확한 방문 날짜는 공개하지 않았다. 무도는 연평도 서북쪽의 북한 개머리해안 남쪽 해상에 있는 섬으로,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을 한 영웅방어대가 주둔하고 있다.북한 매체 보도에 따르면 김 제1위원장은 앞선 두 차례의 시찰과는 달리 이번에는 위협적인 언사를 하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방문은 지난 시찰 때 지시했던 방어대 시설의 리모델링을 점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김 제1위원장의 최근 군부대 시찰에서 군의 식량 자급자족 체제 강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북한 매체는 이날 김 제1위원장이 조선인민군 박용웅 소속부대에 고깃배와 어군탐지기, 어구를 선물했다고 전했다. 지난 5월에도 동해 지역 최전방 부대에 최고지도자가 선물한 고깃배 4척이 지원됐다. 이는 각 군부대에 독립적인 식량 공급체제를 확보하는 동시에 외화벌이 사업을 독려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태평해도 전쟁 잊으면 위기 찾아와”

    “태평해도 전쟁 잊으면 위기 찾아와”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 연합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첫날인 19일 ‘지하 벙커’로 불리는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상황실에서 ‘을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했다. 박 대통령이 NSC를 주재한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 위협이 고조됐던 지난 4월 2일 및 26일(개성공단 사태 관련)과 6월 10일(남북당국회담 관련)에는 NSC 대신 외교안보장관회의를 주재했다. 이날 회의는 오전 8시부터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됐다. 회의에는 정홍원 국무총리와 류길재 통일부 장관, 윤병세 외교부 장관, 김관진 국방부 장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회의는 북한의 특별한 도발 위협은 없지만 국가 비상 대응 태세 역량 강화와 국가 사이버테러 위협에 대한 대응 태세 확립 등 전반적인 안보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적 돌발 상황이나 위기 사태 시 소집되는 NSC를 처음으로 개최한 것은 실전과 같이 연습함으로써 안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취임 초기 남북이 가파르게 대치하던 때와 달리 최근 개성공단 실무회담 타결을 계기로 북한과 협상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안보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섣부른 도발을 방지하겠다는 대북 메시지라는 해석도 나온다. 박 대통령은 NSC 직후 주재한 을지국무회의에서는 “천하가 비록 태평하다고 해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는 말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확고한 안보 태세를 갖추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을지연습은 1968년 북한의 청와대 기습 사건을 계기로 시작돼 45년째 계속해 오고 있는 국가 비상사태 대처 훈련”이라고 상기시킨 뒤 “전시 상황에서의 기관별 전시 전환 절차와 전시 임무 수행 체계를 정립하고 전시에 적용할 계획 등을 종합 점검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어 “개전 초기 장사정포 포격 시에 주민 대피 체계와 방호시설을 점검하고 수도권과 후방 지역에 대한 테러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며 “사이버 공격이나 위치정보시스템(GPS) 교란을 비롯해 최근 나타나는 새로운 도발 양상을 고려한 훈련에도 역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화학전과 관련해 “탄저균 같은 생물학 무기의 경우 치료제나 백신이 충분히 구비돼 있는지, 화학무기가 사용되면 군과 민간 모두 충분한 의약품을 보급받을 수 있는지 등을 치밀하게 고려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남·북·미·중+유엔

    [이도운의 빅! 아이디어] 남·북·미·중+유엔

    6자회담은 실패했는가. 그렇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이라는 목표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2003년 8월 27일 6자회담이 시작된 이후 북한은 오히려 핵과 미사일 능력을 확충했고, 결국 ‘핵 보유국’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직 국무부 부장관은 공개적으로, 한국의 전 외교부 장관은 반공개적으로 6자회담의 실패를 선언했다. 6자회담은 완전한 실패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동북아 평화·안보 협력의 장(場)을 열었다는 상징적 의미는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 국무장관은 6자회담을 동북아 안보 포럼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6자회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북한과 중국은 계속되길 바랄 것이다. 6자회담은 북한에 더없이 좋은 외교적 놀이터였다. 중국은 의장국 칭호를 부여받고 동북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모습을 과시할 수 있었다. 러시아도 6자회담에 참여하면서 동북아의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왔다. 한국과 미국, 일본은 다르다.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보이고, 상당한 사전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회담 재개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편으로는 6자회담이라는 비효율적이고, 무기력한 틀을 바꿔보려는 시도도 있다. 지난 2월 워싱턴에서 미 국무부의 한반도 문제 당국자를 만났다. “정말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라면, 뭔가 새로운 해법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좀 거칠고, 집요하게 물었다. 그 당국자는 조심스럽게 “6자회담을 대체할 또 다른(another), 비슷한(similar) 포맷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만난 한 싱크탱크의 부소장은 그 포맷이 “남·북·미·중과 유엔이 참가하는 5자회담”이라면서 “한반도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형식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 5자회담이 가능할까. 최근 미국 측 고위 외교소식통에게 확인질문을 던졌다. 다소 부정적이었다. 우선 러시아와 일본에 “나가달라”고 하기가 외교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 또 유엔이 참가하는 것이 과연 적절하냐는 반문이었다. 이 소식통은 6자회담 내에서 다양한 논의의 조합들을 만드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 내에서도 6자회담에 대한 입장은 정리되지 않은 것 같다. 박근혜 정부가 6자회담을 포기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현 정부의 국정과제를 보면 “한·미·중 3자 전략대화를 가동해 북핵 문제 해결의 추동력으로 활용하고 유엔,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확대한다”는 부분이 들어 있다. 남·북·미·중+유엔 구상과 궤를 같이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계에 이른 6자회담의 대안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남북이 합의한 최고의 성공 프로젝트로 꼽혀왔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이라는 굴욕을 당한 이명박 정부도 개성공단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이 폐쇄돼도 문제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개성공단이 아니라 개성공단보다 더 큰 그림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6자회담도 마찬가지다. 회담 재개 자체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 또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역대 모든 정부가 그런 구상을 해왔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는 6·15 정상회담 등을 통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지만, 주변국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미·중·일·러 모두가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원했다. 박근혜 정부는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핵무장한 북한을 더 이상 방치하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관련국 전체에 확산돼 있다. 국내적으로도 ‘원칙 있는’ 대북정책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정부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안보 구도를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는 그런 의지와 역량을 갖고 있을까? dawn@seoul.co.kr
  • [위클리 포커스] ‘개혁 시험대’ 베이다이허 회의 전망

    [위클리 포커스] ‘개혁 시험대’ 베이다이허 회의 전망

    중국 시진핑(習近平) 정권 출범 이후 처음 열리는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4일 베이징 외교 소식통들에 따르면 베이다이허 일대에 이미 보안과 공안들이 눈에 띄게 배치되는 등 경비가 강화돼 회의가 임박했거나 이미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중화권 언론들도 지난 2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비롯해 당의 주요 은퇴 원로들이 베이다이허에 속속 도착하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다만 이번 회의는 시 주석의 근검절약을 강조한 ‘8조’(八條)와 친민을 강조한 ‘군중노선’ 원칙에 따라 이전보다 대폭 간소하게 치러질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는 당 중앙을 비롯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국무원, 전국정치협상회의(전국정협), 중앙군사위원회 등 주요 당·정·군 기관은 물론 지방 정부 수장들과 수행 요원들까지 모두 참석하기 때문에 이전에는 수천명가량이 집결했다. 하지만 올해는 시 주석의 지시에 따라 참여 규모도 대폭 줄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에 서버를 둔 뉴스 사이트 둬웨이(多維)는 중국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시 주석이 지도자들의 휴가를 위해 베이다이허에 별장을 신축해선 안 되며, 일부 원로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장기간 별장에 머무르는 대신 일반 숙박시설을 이용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번 회의는 오는 10월 중 열릴 18기 3중 전회(제18기 당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를 준비하는 데 초점이 모아질 전망이다. 시 주석의 정치개혁 방안과 이를 위한 새 정부의 정치 노선을 확정 짓는 한편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주도하는 경제 개혁안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경제개혁 방안은 18기 3중 전회에서 구체적으로 발표되지만 앞서 이 회의를 통해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 밖에 조만간 공판이 열리는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 서기의 처리 방향에 대한 논의도 이번 회의에서 이뤄질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주요 국정 문제를 논의하는 정부 회의가 해마다 비공개적으로 열리는 것은 시스템보다 사람에 의존하는 중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선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용어 클릭] ■베이다이허 회의 보하이(渤海)만 인근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시에 위치한 해안 휴양지다. 베이징에서 동쪽으로 300㎞가량 떨어져 있다. 1958년 베이다이허에서 당 중앙정치국 확대 회의가 실시된 것을 계기로 거의 해마다 당·정·군 고위간부들이 이곳에 모여 여름휴가를 겸해 당의 노선과 인사,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1958년 타이완의 진먼(門)섬 포격 등 역사적 결정들이 이 회의에서 이뤄졌다.
  • [정전협정 60주년] (8)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 (하) 중감위 스웨덴 대표 안데르스 그렌스타드 소장

    [정전협정 60주년] (8) 한반도 분단을 보는 외국의 시각 (하) 중감위 스웨덴 대표 안데르스 그렌스타드 소장

    한반도 정전체제의 ‘감시자’인 중립국감독위원회(이하 중감위)는 지난 60년 동안 부침을 겪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군 측의 스웨덴·스위스, 공산군 측의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에서 각 100명씩 400명이 한반도에 상주했지만, 현재 스웨덴·스위스 대표단 5명씩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연평도 포격도발 등 정전협정 위반 사건을 조사하고, 한·미 연합훈련의 정전체제 위협 여부를 감시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최근 한미연합사령부에서 스웨덴대표단 대표 안데르스 그렌스타드(55) 소장을 만났다. 스웨덴 정부가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그를 대표로 보낸 건 연평해전과 천안함 사태 등 서해에서 정전협정 위반이 빈번한 걸 감안했기 때문이다. 그렌스타드 소장은 지난 27개월 동안 김정은 체제의 등장과 맞물려 긴장이 한껏 고조된 한반도를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는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이후 한반도는 계속 긴장 국면”이라면서 “특히 지난 2월 3차 핵실험 이후 북한의 ‘레토릭’(정치적 수사)에 익숙하지 않은 서방에서는 핵전쟁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때 전쟁이 일어나는 거 아니냐는 전화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긴장이 자주 발생하면 여러 사람이 개입하게 되고 그런 와중에 무기 체계를 잘못 사용하게 돼 비극적인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중감위의 역할과 관련해 그는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이란 단어를 거듭 강조하면서 “우리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옵서버”라고 밝혔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전체제일지라도 한반도 안정과 평화라는 측면에서 남북 모두에 도움이 됐다”면서도 “또 다른 60년을 기다리지 않고 평화협정으로 대체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 조건으로 남북 간, 북한과 6자회담 당사국 사이의 신뢰를 강조했다. 그는 “남한은 지금껏 북한을 변화시키려고 햇볕정책도 해 봤고, 이전 정부에선 강경노선도 취해 봤지만 지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다”면서 “북한이 1950년대처럼 군사적인 위협을 통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대화를 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용어 클릭] ■중립국감독위원회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스웨덴·스위스(유엔군),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공산군) 대표단 1명씩 4명이 소조를 이뤄 남북한 항구·공항에 파견, 외부로부터 증원되는 군사력과 무기 등의 교체·반입을 감시했다. 하지만 공산군 측 중립국 감독소조 요원의 간첩 행위가 이어지고, 유엔사 측 요원의 북한 내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1956년 감독소조 기능은 잠정 중지됐다. 소련 해체 이후 북한은 1993년 체코에 이어 1995년 폴란드 대표단마저 쫓아냈다. 중감위는 매주 화요일 회의 결과를 판문점 북측 우편함에 넣지만, 북한은 1995년 이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 [정전협정 60년] (4) 남북 군사 대치 (하) 北의 협정 위반과 일촉즉발 위기

    [정전협정 60년] (4) 남북 군사 대치 (하) 北의 협정 위반과 일촉즉발 위기

    북한은 지난 60년 동안 끊임없이 무력 도발을 시도했다. 정전협정이 무색할 정도다. 특히 무력 도발 빈도는 줄어든 반면 수위는 상승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력 도발 방식 역시 다양화, 노골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국방부에 따르면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부터 1994년 4월 말까지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행위는 무려 42만 5271건에 이른다. 특히 지금까지 무력을 동원해 우리 영토와 국민들을 직접 위협한 행위는 간첩 남파 등의 침투 도발이 1959건, 연평도 포격과 같은 국지 도발이 994건이다. 60년 동안 해마다 평균 49건, 일주일에 1건씩 발생했다는 얘기다. 유엔군사령부가 1994년 5월부터 위반 사례를 집계하지 않아 더 이상의 자료는 없지만 북한의 도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도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은 1968년 ‘1·21사태’ 또는 ‘김신조 사건’이다. 북한 무장 대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했다가 발각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1980년대까지는 이렇듯 무장간첩 등의 테러 도발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1974년 8월 1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 기도,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 폭탄 테러, 1987년 11월 28일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1974년, 1975년, 1978년, 1989년에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도 발견됐다. 1990년대 들어서는 정전협정 무력화 시도가 두드러졌다. 북한은 1991년 3월 군사정전위원회의 유엔군 수석대표에 우리 군 장성이 임명되자 불참을 선언했으며 1994년 4월에는 아예 군정위에서 철수했다. 이듬해인 1995년 9월에는 북한이 중립국감독위원회마저 봉쇄했다. 군정위와 중감위의 설치 근거인 정전협정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북한은 이어 1996년 4월 정전협정 의무 이행 포기를 선언한 뒤 지금까지도 한·미 군사훈련 등을 구실 삼아 정전협정 백지화를 주장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또 북한의 해상 침투가 두드러졌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사건’이 발생해 무장 공비 13명이 사살되고 11명은 자폭했다. 1998년 6월과 12월에도 각각 강원 속초와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정이 발각됐다. 2000년대부터는 남북 간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등 도발 수위가 이전에 비해 대폭 상승했다. 1999년 6월과 2002년 6월에는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 선박의 북방한계선(NLL) 무단 침입을 계기로 제1, 2차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이 중 2차 연평해전 때는 우리 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2009년 11월에는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과 우리 해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대청해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급기야 2010년 3월 26일에는 북한 잠수정 어뢰에 의해 우리 초계함이 격침당해 해군 장병 46명이 목숨을 잃는 ‘천안함 폭침 사건’까지 발생했다. 같은 해 11월 23일에는 북한이 연평도에 100여발의 포탄을 발사했으며, 이는 정전협정 체결 이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대규모 군사 공격으로 기록됐다. 북한은 또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를 전면에 내세워 국제사회를 압박하는 공세도 펴고 있다. 2005년 2월 핵무기 보유를 선언한 북한은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 지난 2월 등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강행했다. 아울러 북한은 1998년 8월 사정거리 2000㎞급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시험 발사한 이후 지속적으로 장거리 로켓을 쏘아올리고 있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최근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도발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화됐기 때문에 북한이 레토릭(정치적 수사) 차원의 비난 수위를 높일지는 몰라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면서 “다만 우리가 방심할 경우 이를 명분 삼아 틈새를 파고들 가능성이 있고, 그 위험성은 과거 어느 때보다 크다”고 지적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남북 관계가 악화될 경우 NLL을 중심으로 한 무력 충돌 가능성이 상존한다”면서 “북·미 관계가 나빠진다면 핵실험 등 대량살상무기를 활용한 위협이 반복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 새누리 “장물로 여론 호도 민주당 본질”

    새누리당은 권영세 주중대사의 대화내용이 녹음된 파일을 민주당이 절취해 갔다는 주장을 내놓은 뒤로 다시 공세 모드로 전환한 모양새다.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30일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매관매직, 인권 유린에 이제 도둑질까지 한 것은 정치도 아닌 명백한 불법행위”라면서 “남의 물건을 불법으로 얻은 장물로 여론을 호도하는 것은 민주당 장물정치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민주당과 박범계 의원은 이 음성파일을 누구에게서 얻었는지 떳떳하게 밝혀야 한다”며 경찰에 수사를 촉구했다. 윤 수석부대표는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북한 김계관 외무상이 ‘핵물질 신고에서 무기화된 것은 안 한다’고 보고하자 ‘잘했다’고 말하는 바람에 북한은 우리가 핵폐기를 하자고 해도 마이동풍”이라면서 “그래 놓고는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북핵 폐기를 명확하게 밝혔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이게 대화록 공개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의 원인은 노 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잘못된 신호를 북한에 보낸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 사실로 드러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한 것과 관련, 윤 수석부대표는 “문 의원이 정계은퇴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포기라는 단어는 없지만, 포기 의사는 갖추셨던 것을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오늘의 눈] NLL의 지정학적 요인과 노 전 대통령/김학준 메트로부 차장

    [오늘의 눈] NLL의 지정학적 요인과 노 전 대통령/김학준 메트로부 차장

    남북 간 충돌이 벌어졌을 때 우리나라 최북단 백령도와 연평도에 10여 차례 취재차 가 본 기자로서 서해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발언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NLL 바로 밑에 있는 서해5도는 지정학적으로 중동의 화약고인 팔레스타인과 비슷한 분쟁적 요인을 안고 있다. 6·25전쟁 휴전 협정 당시 그어진 NLL은 서해5도를 끼고 서해 북쪽으로 유달리 올라가 있다. 백령도의 경우 인천에서 175㎞ 떨어져 있지만 북측에서 보면 황해도 장산반도에서 17㎞ 거리다. 연평도도 사정이 비슷하다. 북한 입장에서는 적이 옆에서 자기 집을 들여다보고 있는 격이다. 우리에게는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지만 북한이 항상 트집을 잡는 것은 이 때문이다. 휴전 당시에는 우리 유격부대가 서해5도를 장악하고 있어 북한은 NLL에 합의했지만 내내 후회해 왔다. 북한의 이런 결기는 1999년 육지 군사분계선과 연장선상에 있는 해상분계선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제1, 2연평해전, 대청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을 일으켜 많은 장병들이 산화했다. 노 전 대통령의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발언이 공개되자 논란이 일고 있다. 여당과 보수신문들은 노무현이 매국노라도 되는 양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 회의록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었고, 회의록 공개의 직접적 계기가 된 NLL에 관련된 발언을 세심히 살펴봤다.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NLL을 평화지대로 바꿔야 한다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NLL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돼 양쪽이 늘 충돌하니 평화구역으로 만들어 보자는 취지가 녹아 있다. 실제 회담에서도 ‘평화협력지대’라는 말이 여러 번 사용됐고, 회담 후에는 NLL 주변 공동어로수역이 실무적으로 협의됐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낸 노 전 대통령의 말이 “안보군사 지도 위에 평화경제 지도를 그려보자”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강조해 온 ‘ NLL 포기’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노 전 대통령은 평소에도 “NLL 때문에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니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는 NLL을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지역으로 바꿔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회의록에는 “NLL이 괴물처럼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다”는 등 국민들의 기존 NLL에 대한 인식에 거부감을 줄 수 있는 표현이 더러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바꾸자’, ‘NLL 치유’라는 말에 힘이 실려 있다. NLL이 장병들의 무덤이 된 점 등을 고려할 때 노무현식 인식이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음에도 지난 대선 때 NLL 문제를 제기해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새누리당이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이 불거지자 또다시 NLL을 들고 나온 것은 비열한 행태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63년째인 25일, 정략적 이용을 위해 비밀문서를 해제하면서까지 NLL을 재탕·삼탕해 전직 대통령을 부관참시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망신스러운 일 아닐까. kimhj@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한반도 지형 변화(상)

    [정전협정 60년] 한반도 지형 변화(상)

    1950년 6·25 전쟁 발발과 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 비극, 그리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발효. 포성은 이미 60년 전 멎었지만 남북한 190여만명의 중무장 병력은 여전히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비무장지대(DMZ)의 ‘두 얼굴’, 평화와 대치는 오늘의 한반도 상황이다. 정전협정 발효 60주년을 앞두고 서울신문은 정전체제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의 가능성을 짚어 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모호한 상태가 21세기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서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수석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북한·중국을 대표한 남일 북한군 대장은 12분 만에 전문 5조 63항의 협정문서 9통과 부본 9통에 서명을 마쳤고, 그날 밤 10시부터 정전협정이 발효됐다. 이때만 해도 정전협정은 임시적·군사적 수준의 합의에 불과했다. 전쟁 당사국 군사 책임자들이 ‘발포중지’에 합의했을 뿐 전쟁 책임 소재 규명과 피해 보상, 전범 처리, 재발방지 조치 등은 입장 차가 커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전체제는 이후 60년 동안 한반도의 군사질서는 물론 외교·안보·정치적 프레임을 규정하고 있다. 양측은 정전협정 60항에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고자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할 것을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이에 1954년 4~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북한, 미국, 중국, 소련 등 19개국 외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정치회담이 열렸다. 87일간 진행된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이후 폭 4㎞ 길이 240㎞의 비무장지대(DMZ)를 두고 남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밀도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정전체제는 태생적으로 불안정성과 비정상성을 품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한국군은 실질적인 정전협정의 이행 당사자임에도 지금까지 소외돼 왔다. 정전협정 위반 사건이 발생하면 유엔군과 북한군이 협의하는 비정상적 상태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적대·대결과 화해·협력이 공존하는 모순된 상황도 여전하다.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한 남북은 정치적으로는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적대관계에 놓인다. 남북 관계 또한 불명확하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에는 ‘(남북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실제 남북 경계는 지도에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표시된다. 정전협정 당시 국경선 개념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양측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시작으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공동선언 등 끊임없이 화해와 협력, 교류 확대를 모색해 왔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할 필요성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전쟁 상태를 법적으로 종결시켜야만 평화적인 관계로 재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 모두 평화체제를 말하고 있지만, 시각차는 뚜렷하다. 우리 정부와 미국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가 완료되면 비로소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병행해 평화체제로 바뀔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선(先) 북·미 평화협정, 후(後) 한반도 비핵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1, 2차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사건 등에서 보듯 총탄이 오가지 않는 정전체제, 즉 전쟁 부재의 상황이 곧 평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정전협정 60년, 세계 최장의 ‘정전지대’인 한반도는 여전히 살풍경하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브루스 커밍스 美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말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60년] 브루스 커밍스 美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말하는 ‘한국전쟁’

    “한국 사람들은 왜 어느 쪽이 전쟁을 일으켰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브루스 커밍스(70)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는 지난 20일(현지시간)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북한이 한국전쟁의 책임을 놓고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비난전을 그만둬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의 부인인 한국인 우정은 박사가 학장으로 있는 버지니아주립대 캠퍼스 내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커밍스 교수는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날짜와 한국인 이름을 자료도 없이 술술 말해 한국전쟁 연구의 최고 권위자임을 실감케 했다. →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당신의 수정주의 이론에 반해 옛 소련의 기밀문서를 통해 북한의 남침이 확인됐는데. -나는 수정주의자가 아니라 개척자다. 내가 쓴 글은 미국 정부의 1급 비밀 문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미국과 한국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1985년부터 전두환 정권이 그렇게 (조작)한 것이다. 내가 1990년에 쓴 책은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됐다는 기존의 관념을 허물려는 시도였다. 한국전쟁의 뿌리는 1945년 이후 발생한 일련의 일들에 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결정했고 소련이 나중에 그것을 수용했다. 그것이 한국전쟁의 기반이 됐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 진주했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았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내전이다. 나는 북한이 남한을 6월 25일 침공한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침공이 남한의 자극에 의해 일어났는지 여부다. 1949년 8월 옹진, 개성, 철원 등지에서 남북 간 충돌이 격화됐다. 이승만이 공격을 원할 때 주한 미국대사가 반대했고, 김일성이 공격을 원할 때 주북 소련대사가 반대했다. 양측의 공격 욕구는 이렇게 억제됐다. 그리고 이듬해 봄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에게 제한적인 대남 공격을 승인한 것이다. →소련 기밀문서 공개에도 불구하고 기존 이론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인가. -기밀문서를 통해 소련의 연관성이 예상보다 깊숙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을 빼면 나머지는 별로 수정할 필요를 못 느낀다. 나는 내가 했던 일에 대해 여전히 굳은 확신을 갖고 있다. 다만 책을 쓰는 시점에 아직 나오지 않은 문서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는 다른 학자들이 하지 못한 방대한 북한 문서를 연구했다. 나는 지난 20여년간 내가 하지도 않은 말 때문에 공격받았다. 사람들은 내 책을 읽지도 않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미국이 일부러 유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안 했다. 나는 단지 딘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이 탱크와 항공기를 한국에 두기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무기로 이승만이 북한을 공격하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 남한은 북한이 6월 25일 침공했을 때 대처할 무기가 없었다. 애치슨은 한국에 대해 매우 모호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어리석게도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애치슨이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고 그로 인해 미국은 많은 ‘옵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만약 이승만이 공격하면 미국은 지원하지 않는 반면 북한이 공격하면 이승만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애치슨이 남한을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한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을 등에 업고 북한을 공격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이 북한을 침공할 가능성도 있었다는 얘기인가. -1949년 5월부터 12월까지 38선 곳곳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싸움을 남한이 먼저 시작했다. 따라서 1950년 6월 25일의 침공은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켰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1949년 8월 주한 미국대사는 워싱턴에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이 북한군의 옹진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철원을 공격하려 한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의 본질은 당시 남북한의 지도부가 서로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 모두 뜨거운 감자를 두 손에 쥐고 있는 꼴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그해 12월부터 한국군에 “38선에서 도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후 38선 남쪽이 조용해졌다. 남한의 공격을 남침 명분으로 삼으려던 김일성이 1950년 2월 주북 소련대사에게 “왜 남한이 요즘 공격을 안 하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남한을 배제한 것은 북한의 침공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1949년 6월 30일 남한에 있던 마지막 미군이 오키나와로 나간 직후 애치슨 장관이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에게 ‘만약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 유엔에 회부한다’는 메모를 건넸다. 한국전 발발 1년 전에 이미 전쟁 가능성을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스탈린이 승인하지 않으면 북한은 남한을 침공할 수 없는데, 스탈린은 침공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2차 대전의 후유증 때문에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 스탈린이 허락지 않으면 감히 중국도 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스탈린이 통제하는 획일적인 공산주의가 있다고 잘못 추정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특징은 무엇인가. -반(反)식민지 전쟁이라는 점에서 베트남전과 매우 비슷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빨치산 출신 김일성 등은 북한을 접수한 반면 남한에서 김구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밀려났다. 남한에서 미국은 일본 경찰과 장교 출신들을 기용했다. →한국에서는 내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곳에서 8마일(약 12.8㎞)만 리치먼드 쪽으로 가면 남북전쟁박물관이 있다. 거기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남군을 침공할 명분을 얻기 위해 남군의 공격을 유도하는 속임수를 썼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 남부 사람들은 남북전쟁이 내전이 아니라 주(state)들끼리 벌인 전쟁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이 6월 25일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만 나쁘고 남한은 결백한 게 된다. →한국과 미국도 한국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얘기인가. -미국의 책임이 크다. 미국은 38선을 그을 때 어떤 나라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쁜 결정이었다. 7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반도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승만도 큰 책임이 있다. 그는 일본군에서 복무한 장교를 기용했다. →결국 한국전은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발생했다고 봐야 하나. -아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국 내 모순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45~1950년 사이 일련의 사태들이 영향을 줬다. →지난 60년간 정전체제는 잘 운영됐다고 보나. -아니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 매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다. 정전체제는 평화협정으로 대체돼야 한다. 중국과 소련은 1990년대 초 남한을 승인했지만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의 교훈은. -미국인으로서 나는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열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서 김일성의 반(反)식민지 운동에 봉착한 것이다. 1944년 국무부 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인과 진정한 관계가 없는 반면 만주의 빨치산은 일본군에 잘 대적하고 있다”면서 “김일성을 접촉해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현실화했다면 한국전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정전 60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인들은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1997년 북한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갔을 때 한 북한인이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더라. “많은 원인이 복합작용한 내전”이라고 답했더니 그는 “한민족에 대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이라고 하더라. 한국전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난 게임’을 멈추고 화해해야 한다. 글 사진 샬러츠빌(버지니아주)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동아시아 전공) 박사 출신이다. 1960년대 후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한국 현대사 연구에 천착했다.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반공주의에 치우친 기존 연구의 평면성을 넘어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식민지와 냉전, 계급 갈등이라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전 연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1980년대 통일, 반미 운동과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연구는 커밍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생겼다.
  • [김문이 만난 사람] 6·25 대한해협 전투 승리 ‘…바다의 전우들’ 펴낸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김문이 만난 사람] 6·25 대한해협 전투 승리 ‘…바다의 전우들’ 펴낸 백두산함 갑판사관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

    때는 1950년 6월 25일 정오. 진해항에 정박 중인 국내 최초의 군함 백두산함 갑판에는 외출·외박을 나갔던 장병들이 급히 모였다. 최용남 함장은 비장한 모습으로 말했다. “적 인민군대가 오늘 새벽 동해안 옥계, 임원해안으로 쳐들어왔다. 우리는 지금 동해로 출동한다. 적 상륙군을 격멸해야 한다. 각자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라.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자.” 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승조원들은 각자 위치로 돌아가 전투준비를 한 뒤 오후 3시 진해항을 출항했다. 여기서 잠깐, 백두산함에 대해 잠시 살펴본다. 초창기 해군의 염원은 함포가 장착된 군함을 갖는 것이었으나 빈약한 국가재정으로 군함 구입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해군은 자체적으로 군함 구입자금을 모으기 위해 장병들의 월급에서 5~10%씩 갹출하고 부인회에서 삯바느질, 의복세탁, 수선, 뜨개질로 1만 5000달러를 모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했다. 이 대통령은 해군의 뜻을 높이 사 4만 5000달러를 보태 군함 구입을 주선했다. 결국 1949년 12월 뉴욕 맨해튼 섬 부두에서 정박 중인 고물 함정(2차대전 직후 퇴역)에 태극기를 높이 올리고 마이애미와 파나마 운하를 지나 1950년 1월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입항했다. 3인치 포를 장착하는 등 무기정비를 마친 3월 20일 하와이를 떠나 25일 콰잘린 섬에 기항해 연료를 공급받고 괌 섬 아프라 항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형편에 맞춰 3인치 포탄 100발만 장착하고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했다. 이후 심하게 녹이 슨 배를 진해항에서 한 달 동안 정비했다. 모든 승조원들이 달려들어 시뻘겋게 녹슨 선체를 해머로 털어내고 방부 페인트를 칠한 후 깨끗하게 단장해서 탄생된 것이 백두산함이다. 그렇게 해서 진해항을 떠난 백두산함이 부산항과 울산 앞 방어진 동쪽 3마일 해상에 도착한 것은 1950년 6월 25일 밤 9시 10분쯤이었다. 이때 우현에서 근무 중인 승조원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견시보고, 우현 45도 수평선 검은 연기 보임.” 항해 당직사관 최영섭 소위는 쌍안경으로 동쪽 수평선을 봤다. 수평선에 검은 연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夏至) 때라 해는 넘어갔으나 시정(視程)은 좋았다. 해상은 흐리고 너울이 일고 있었다. 최 소위는 함장에게 이러한 사실을 즉각 보고했다. “함장님, 저기 수평선에 검은 연기가 흐르는 것이 보이지요. 그쪽으로 가서 확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함장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백두산함은 당초 목적지인 옥계 방향을 바꿔 15노트 속력으로 수평선을 향해 달렸다. 밤 9시 30분쯤 연기를 뿜으며 남하하는 배가 가까이 들어왔다. 백두산함과 비슷한 형태의 괴선박은 백두산함이 접근하자 항로를 이리저리 바꾸면서 계속 남하했다. 최 소위는 부하들에게 국제통신부를 통해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문의하는 신호 부호를 찾도록 했다. 이어 발광신호를 보내게 했다. 최 함장은 괴선박의 예사롭지 않은 행태를 보고 적 인민군 함정이 아닌가 의심했다. 최 소위는 괴선박의 발견과 추적, 여러 동태 등을 해군본부에 타전했다. 이어 최 소위는 신호사에게 “정지하라,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라는 국제부호를 찾아놓으라고 지시한 뒤 공격적 탐색기동을 개시했다. 그러자 장교들 사이에 “무장한 군대가 갑판에 가득 깔려 있습니다. 아, 함수 갑판에 대포가 있습니다. 양현에 기관포도 있습니다”라는 외침이 잇따랐다. 밤 11시가 조금 지난 시간, 괴선박과 거리를 좁히자 장교들은 다시 “주갑판, 후갑판, 중갑판에 있는 병력만 500명은 돼 보입니다. 선실과 선창에 타고 있는 군대는 보이지 않지만 모두 합치면 700~800명쯤 되겠습니다. 적함이 틀림없습니다. 공격합시다”라고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최 함장도 “저 배는 대포와 기관포로 무장하고 1000명 가까운 무장 육전대(해병대)를 태우고 있다. 저 배의 항로로 보아 부산을 점령하려고 내려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 전투에 돌입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라고 명령했다. 이어 함장은 다시 한번 장교들의 얼굴을 보면서 냉수로 건배를 했다. “살아서 마지막 마시는 대한민국 물이다”고 결의를 다졌다. 최 소위는 건배를 마치고 곧바로 함수 사병 침실로 가서 포술갑판 부대를 집합시킨 뒤 전투에 임할 것을 지시했다. 26일 밤 12시 30분, 함장의 사격명령이 떨어졌다. 3인치 포탄 첫 발이 포성을 울리며 적함으로 날아갔다. 최 소위의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일시에 풀렸다. 백두산함은 인수 후 포탄이 아까워 모의탄으로만 훈련했지 실탄사격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함도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응사해 왔다. 백두산함은 18노트 최고 속력으로 기동하며 주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적함도 주포와 기관포로 맹렬히 반격해 왔다. 치열한 포격전이 20여분간 계속됐다. 백두산함은 최고 속력으로 적함을 향해 돌진하면서 포탄을 계속 쐈다. 이윽고 적 함교에 포탄이 명중했다. 백두산함에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 함은 검붉은 연기에 휩싸여 좌현으로 기울어져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때 적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 조타실 외판을 때렸다. 조타사 김창학 등이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또 적 포탄 한 발이 주포 갑판에 떨어져 파편이 튀었다. 장전수 전병익 등이 가슴에 파편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주포 전화수 김춘배 등이 다리에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부상병을 후갑판 아래 사병식당으로 이송해 응급처치하고 3인치 포 수리에 착수했다. 이때가 6월 26일 오전 1시 20분쯤이었다. 백두산함은 약 4시간에 걸친 적함 잔해물 수색을 끝내고 아침 6시쯤 부상자 치료를 위해 포항기지로 향했다. 이상은 한국전쟁 당시 벌어졌던 ‘대한해협전투’에 대한 내용이다. 이 해상 전투는 전사(戰史)에는 기록돼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한국전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3·8선 돌파하고 육상으로 남침한 것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육상은 물론 남한의 부산과 진해항을 점령해 유엔군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치밀한 계획을 짰던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문서기록보관청에도 이러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대한해협 전투에서 백두산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였던 최영섭씨를 지난 13일 경기 일산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위 내용을 상세하게 밝히기 위해 ‘6·25 바다의 전우들’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책을 펴냈다. 당시 부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대한해협전투’는 물론 서해 봉쇄작전, 인천상륙작전, 함경도 동해진격작전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바다의 전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적함을 침몰시키고 포항으로 항진할 때 함미 사병식당에 있는 응급실에 있었습니다. 군의관 김인현 중위는 심한 배멀미로 목에 깡통을 달고 구역질을 하면서도 출혈이 심한 전병익, 김창학에게 응급수술을 했습니다. 두 중상자는 그 와중에도 ‘적함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격침했다. 살아야 해’라고 했더니 두 중상자의 눈빛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그러더니 ‘대한민국 만세’라면서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지요.” 그는 한국전쟁을 회고하면서 “육지에서 불이 붙었으나 바다에서 진화해 갔다. 6·25 그날 대한해협 전투 승첩으로 부산항을 지켜냈고 대한민국을 돕는 유엔군과 무기, 탄약, 장비 등 병참 물자가 들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7년 미국 해군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과 미국 해군’이라는 책자에도 ‘전쟁의 가장 중요한 해상 첫 전투로, 백두산함이 1000t급 북한의 무장 수송선을 수장시켜 부산항을 통해 증원 병력과 물자가 도착할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 정부에서도 1961년 4월 ‘대한해협 해전 승전’이라고 공표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이 마련됐다고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최씨는 해군사관학교 3기 출신으로 나중에 백두산함 함장, 최초의 구축함인 충무함 함장, 51전대 사령관 등을 거쳐 1968년 해군 대령으로 전역했다. 최씨는 매년 6월 25일 당시 대한해협전투를 겪은 전우들(당시 70명이었으나 현재 생존한 15명)과 같이 부산에서 만나 그날을 되새기고 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 공부할 당시 조국의 군복을 입고 바다를 지키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됐다. 이번에 펴낸 ‘6·25 바다의 전우들’을 쓰기 위해 26개월 동안 자료수집을 다시 했고 1년 동안 연필로 직접 썼다. 그는 자칭 ‘통합군사령관’이라고 한다. 왜냐 하면 첫째 아들은 해군장교, 둘째와 넷째는 육군장교, 셋째는 공군장교, 손자는 해병대 장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을 맡고 있다. 올해 85세의 고령인데도 열심히 강의를 다니면서 “육지 자원은 더 이상 없다. 우리나라는 이제 바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하늘로 돌아간 전우들이여, 그리고 머지않아 사라져 갈 전우들이여, 조국과 6·25의 바다는 그대들의 피끓는 조국애를 길이길이 기억하리라”고 말한다. 노병의 눈가가 잠시 적셔진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은 1928년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시립 제2중학교(우에노)를 졸업했다. 광복 이후 남한으로 와 해군사관학교 3기로 1950년 졸업했다. 또 단국대학교 법정학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육군대학, 미국 국방산업대학원 등을 나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위 계급장을 달고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로 해상전투에 참전했다. 주요 참전 경력은 6월 25일 대한해협전투를 비롯해 인천 철수작전, 여수 철수작전, 진동리 정찰작전, 덕적도·영흥도 탈환작전, 군산 양동작전, 인천상륙작전, 대청도·소청도 탈환작전, 원산·함흥·성진 동해진격작전, 제2차 인천상륙작전 등이다. 해상 근무 시에는 백두산함 함장, 충무함 함장, 51전대 사령관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충무공 이순신의 업적을 기록한 ‘고하도’ 등 3권이 있다.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으며 모두 육·해·공군 장교를 지냈다. 현재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으로 있다. 백두산함에 3인치 포를 설치하는 모습.
  •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결과] 인터넷에 올린 글 주요 내용

    ‘북한이 오죽 박정희를 싫어했으면…이번에 문죄인이 돼야 링거라도 꽂아줄 텐데ㅋㅋ.’ ‘정희 언니가 대선에 출마한다는 뉴스를 듣고 졸라 웃었다.’ ‘안철수는 문재인 밀어주고 하산했으면 뻔한 거 아냐?’ 국가정보원 심리정보국 직원들은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이 같은 내용의 비방글 73건을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다. 공무원이 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내용들이다. 검찰에 따르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라 김모(29·여)씨 등 직원 9명은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오늘의유머(오유),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보배드림 등 인터넷 커뮤니티와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 수십곳에 대선과 관련된 댓글을 달았다. 지난해 9월 3건이던 댓글은 11월에 24건, 12월에 35건으로 늘어나는 등 대선이 다가올수록 늘었다.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에 대한 비방글은 대선 직전 쟁점화됐던 북방한계선(NLL) 문제와 공약 비판 글이 주를 이뤘고, 통합진보당과 이정희 후보에 대한 비방글은 남쪽정부 발언 등 TV토론회가 가장 많았다. ‘가슴의바다’라는 닉네임을 쓴 직원은 지난해 11월 23일 오유 사이트에 ‘연평도 포격 2년…그날을 잊었는가?’라는 글에서 “문재인 후보는 천안함 폭침 후 나온 5·24 대북제재 조치까지 해제하겠다고 한다. 국민은 어떤 후보가 우리의 안보와 국익을 수호하고 책임질 수 있는지를 눈여겨봐야…”라고 문 후보를 비방했다. 지난해 12월 ‘응답없음1997(dkzkfkzk)’이라는 닉네임을 쓴 또 다른 직원은 뽐뿌 게시판에 ‘남쪽정부? 정말 할 말이 없네요’라는 글에서 “어제 TV토론 보면서 정말 국보법 이상의 법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국보법 때문에 뭐가 그렇게 불편하고 무서워서 폐지, 폐지 외쳐왔는지 이제 좀 알 거 같군요”라고 이 후보를 비방했다. 안철수 의원에 대해서는 지난해 10월 ‘어차피 정치는 계속한다 했고 박원순 때처럼 또 흡수당하면 스탠스가 애매해지니까 박근혜 이기든 말든 완주하고 여의도 귀퉁이 차지하겠다는 속셈 아니노?’라고 비난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이산가족 신청자의 16%만 부모·형제 만나

    이산가족 신청자의 16%만 부모·형제 만나

    2000년 8·15를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꿈에 그리던 부모, 자식, 형제를 만난 이산가족들은 2만 1734명에 불과하다.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2만 8808명의 16.8%다. 영상통화를 통한 화상 상봉으로 간접 접촉한 3748명을 제외하면 1만 7986명만이 직접 가족을 만났다. 통일부는 아직 가족을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들이 상봉 신청자 외에도 60만~70만명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상봉자 명단에 들지 못한 다른 이산가족들은 기약 없는 기다림에 눈물 지어야 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거의 매년 개최돼 왔지만, 2010년 18차 상봉 행사(10월 30일~11월 5일) 이후 남북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3년 가까이 열리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총괄하는 대한적십자사(한적)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반면 사망하는 이산가족들은 해마다 늘어 지난달 말 기준으로 상봉 신청자의 43%인 5만 5347명이 끝내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특히 생존자 절반 정도가 80대 이상의 고령자여서 더욱 애를 태우고 있다. 이들이 사망하면 부부, 부모, 자녀 상봉은 사실상 맥이 끊기게 된다. 이산가족 상봉을 ‘시간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늘 남북 적십자 회담의 화두는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문제였다. 이명박 정부 때도 2010년 상봉 정례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렸지만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논의가 중단됐다. 지난해에도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위한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을 2차례 제의했지만 북한은 5·24 대북조치 해제,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의 문제를 연계해 우리 측 제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오는 12일 열리는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 합의가 이전과는 달리 수월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북한이 먼저 이산가족 상봉 행사 논의 의사를 밝혀 왔기 때문이다. 한적에는 벌써부터 상봉 행사 재개 여부와 절차를 묻는 이산가족들의 전화가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3년만에 이산가족 만날 수 있을까

    3년만에 이산가족 만날 수 있을까

    대한적십자사 직원들이 7일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받기 위해 사무실을 정비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은 2010년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3년 가까이 중단됐다. 지난 6일 북한이 남북 당국 간 회담을 제안하면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협의할 수 있다고 밝힘에 따라 그동안 막혔던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제2연평해전·천안함 폭침 경험한 현역 해군들의 ‘끝나지 않은 전쟁’

    제2연평해전을 경험한 해군 장교 A의 ‘악몽’은 11년째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6월만 되면 더욱 심해진다. 북한 경비정의 포격에 참수리 357호 고속정 전우들이 피 흘리는 광경이 선하다. 가위에 눌린 듯 꼼짝할 수 없다. 잠이 들었다가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여지없다. 2002년 6월 29일 그 바다가 눈앞에 있다.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과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26일)을 경험한 현역 해군 부사관, 장교들이 여전히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민간 연구기관인 안보경영연구원이 국방부 의뢰를 받아 최근 수행한 ‘해외 파병자 PTSD 관리 방안’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국내에서 교전을 경험한 현역 군인에 대한 PTSD 조사는 처음이다. 연구진은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사건에서 생존한 현역 부사관, 장교 30여명 가운데 6명(제2연평해전 5명, 천안함 1명)을 대상으로 올초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병행했다. 6명 가운데 5명(83.3%)은 조사 시점을 기준으로 최근 1주일 동안 수면 장애와 정서적 마비, 반복적인 악몽(침습), 생리·자율적 흥분(과각성), 관련 사건·장소 의도적 회피 등 전형적인 PTSD 증세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1명도 정도만 덜했을 뿐 부분 PTSD집단으로 분류됐다. 특히 제2연평해전 경험자 5명 모두 PTSD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뷰 대상자 6명 전원은 PTSD 관련 교육을 한 차례도 받은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연구를 총괄한 안보경영연구원의 김기정 소장은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교전 경험자들은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교전 해역에서의 근무를 견딜 수 없어 함대를 옮겨도 다를 게 없다며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日정치인들 잇따른 역사인식 망언에… 7년만의 한·일 의원 친선축구 전격 취소

    일본 정치인의 역사인식 문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한 가운데 7년 만에 열릴 예정이던 양국 국회의원들 간의 친선 축구경기가 취소된 것으로 21일 확인됐다. 양국 의회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의 국회의원 축구연맹 소속 여야의원들과 일본 의원축구연맹 소속 의원들 간의 친선 경기가 오는 27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한국 측에서 이달 초 취소를 통보했다. 한국 측 회장을 맡고 있는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의원들의 친선 축구 경기는 양국 간 우호를 다지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한·일관계가 나빠진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한가하게 축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의견이 많아 일본 측에 취소를 통보했다”고 말했다. 축구 대표단 소속 새누리당 정갑윤, 민주당 최재성·박범계 의원 등이 오는 27일 일본을 방문해 행사 취소를 정식 통보하는 한편 “정치인들의 잇단 망언이 한·일관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뜻도 전달할 예정이다. 한·일 의원 간 친선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1998년 시작된 이 행사는 2006년까지 양국을 오가며 7차례 진행됐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지난해 양국의 선거 등으로 인해 한동안 열리지 못하다 올해 7년 만에 재개하기로 양측 간에 합의가 이뤄졌었다. 도쿄 이종락 특파원 jrlee@seoul.co.kr 서울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北 해안포 잡는 ‘스파이크 미사일’ 실전 배치

    군 당국은 19일 북한 해안포를 정밀 타격할 수 있는 이스라엘제 스파이크 미사일을 서북도서에 실전배치했다고 밝혔다. 합동참모본부의 한 관계자는 “백령도와 연평도 등 서북도서에 스파이크 미사일 발사 차량과 미사일 수십 발씩을 최근 전력화했다”고 말했다. 사거리 20여㎞, 중량 70㎏인 스파이크 미사일은 은닉된 갱도 속 해안포를 정밀 타격하는 성능을 갖췄다. 1발의 가격은 2억∼3억원이다. 이 미사일은 목표물의 좌표를 미리 입력해 유도하거나 탄두가 찍은 영상을 보면 조작 인원이 미사일의 방향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발사된다. 재장전 시간은 3∼5분이다. 합참 관계자는 “유사시 갱도화된 적의 진지를 파괴할 수 있고 이동표적도 탐색기로 보면서 추적, 타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백령도와 연평도 북쪽 서해안에 사거리 12㎞의 76.2㎜ 해안포를 비롯해 내륙지역에 사거리 20㎞의 122㎜ 방사포 등을 밀집 배치해 놓고 있다. 스파이크 미사일은 당초 2012년 하반기에 도입될 예정이었으나 현지 시험평가가 지연되면서 실전배치가 6개월 정도 지연됐다. 전술비행선은 비행체는 미국에서, 카메라와 레이더는 이스라엘에서 각각 도입하는데 양국간 기술협정 체결 문제로 도입이 지연됐다. 군의 한 관계자는 “기술협정 체결 문제가 최근 해결돼 전술비행선이 다음달 말 국내 도입된다”며 “수락검사 등을 거쳐 올해 4분기 중 전력화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전술비행선은 주야 연속 광학카메라와 레이더 등을 갖춰 지상 10㎞ 상공에서 북한 지역을 감시할 수 있다. 백령도와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활동 중인 해군 정보함에 영상 촬영거리가 늘어난 개량된 무인정찰기(UAV)를 배치하는 사업은 사업자 선정과정의 잡음으로 인해 사업 추진이 보류됐다. 해상 무인정찰기 개량 사업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을 계기로 서북도서 전력증강 사업에 포함됐다. 그러나 사업 추진과정에서 고정익이냐 회전익이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져 사업이 잠정 중단됐으며 올해 예산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연합뉴스
  • 공단도, 대화도, 출구도… 남북관계 ‘0’

    공단도, 대화도, 출구도… 남북관계 ‘0’

    개성공단에 남았던 홍양호 개성공단관리위원장 등 우리 측 인원 7명이 3일 오후 모두 귀환하면서 2004년 공단 가동 후 9년여 만에 남북 협력의 ‘상징 지대’인 개성공단이 사실상 폐쇄 국면에 돌입했다. 금강산 관광 중단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5·24 대북 제재 조치 등 연이은 악재 속에서도 남북을 이어 온 개성공단은 극적 회생으로 가느냐, 사망 판정을 받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남북 모두 상생보다는 한반도 주도권을 건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인 결과로도 해석된다. 정부는 이날 북한에 미수금 명목으로 1300만 달러(약 142억원)를 지급했다고 밝혔다. 이는 북측 근로자의 3월 임금 730만 달러, 2012년 회계연도 소득세 400만 달러, 통신·폐기물 처리 등의 수수료 170만 달러를 합친 금액으로 당초 협의된 것으로 알려진 1000만 달러보다는 늘었다. 남북 간 금전적 정산이 완료되면서 개성공단의 남측 체류 인원은 처음으로 ‘0명’에 머물게 됐다. 지난 3월 27일 북측의 남북 군사당국 간 통신선 차단 후 유일한 연락 접점이었던 개성공단 관리 채널마저 끊기면서 남북 간 대화 채널은 표면적으로 모두 단절됐다. 남북관계의 출구 찾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남북 두 체제의 경제협력 실험이었던 개성공단에 정치 논리가 작용한 건 향후 교류·협력 관계에도 상당한 생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 대화에 주력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 기조를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개성공단 잠정 폐쇄가 장기적인 교착 상태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한반도 위기의 막후 중재자인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급랭된 상황에서 오는 7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 간의 첫 한·미 정상회담이 모멘텀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은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미·중 3국 간 조율이 있었고, 향후 북·중 대화가 열릴 수 있다”며 “한반도를 교차하는 대화 구도 속에서 개성공단 사태의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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