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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광 카지노(외언내언)

    북해도 탄광촌을 소재로 한 일본영화에 「행복은 노란 손수건에」란게 있었다.가난한 탄광촌 달동네에 살던 가장이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떠나가고 부인이 어려운 선광부노릇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도시에 나간 남편은 몇년 뒤 기진맥진한 상태로 절망을 안고 탄광촌 집으로 돌아온다.그러나 유일한 희망은 떠나올 때 부인과의 약속,『노란 손수건을 집앞에 깃발처럼 꽂아놓고 당신을 기다리겠어요』였다.집에 가까워질수록 남편은 과연 아내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초조해진다.영화의 끝장면은 게딱지같은 판잣집 앞에 나부끼는 노란 손수건의 클로즈 업이다. 매우 감동적이었던 이 영화는 그 뒤 폐광이 된 탄광촌을 살려냈다.이영화로 너무도 유명해진 그 탄광촌은 관광명소가 되어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영화 주인공의 집에는 여전히 황색 손수건이 휘날리고 있다. 일본 탄광촌 나카쓰에는 광부들의 채탄작업을 한 눈에 볼수 있는 지하박물관을 탄광에 만들어 연간 30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한해 50만명.한 때 「검은 진주」로 불렸던 석탄은 이제 「미운 오리 새끼」가 돼버렸다.오염의 주범인 탄소 배출량 과다로 에너지 공급원으로도 석탄은 인기 하락이다.산업현장에서도 석탄은 사양길에 들어섰다.광부들은 문 닫는 탄광을 떠나고 썰렁한 탄광촌 거리에는 빈집만 늘어난다.광부들은 갈 곳이 없고 탄광촌은 자생력을 잃은 폐허로 변했다. 강원도에서 폐광이 늘어나면서 정부는 폐광촌 살리기에 주력한 끝에 내년에 정선·고한지역에 내국인이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설립을 검토중이다. 내국인 출입의 카지노가 개설되더라도 다음 두 가지는 꼭 지켜져야 한다.첫째 자연을 훼손해서는 안된다.탄광촌의 옛모습과 주변 경관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둘째 미국 라스베이거스같은 도박 도시가 돼서는 안된다.카지노가 있지만 문화관광적인 요소,예컨대 탄광 박물관이나 문화연고지와의 연계가 필요하다.
  • 폐광지역 카지노설립 논란가열/새달 국무회의 상정 앞두고 부처이견

    ◎통산부­“관광지 개발… 경제활성화 시급”/문체부­“「도박장」은 국민정서 위배” 반대 폐광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내국인이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의 설립을 허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통상산업부는 폐광지역인 강원도 사북·고한에 내국인의 출입이 허용되는 카지노의 설립을 추진 중이다.험준한 산골 오지인 사북·고한은 지난 60∼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 석탄생산의 중심지로 고도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곳.그러나 80년대 이후 에너지 주 공급원이 석탄에서 석유·가스·원자력으로 바뀌며 석탄 수요가 줄고 인건비 상승 등이 겹쳐 탄광들이 문을 닫으면서 이 지역 경제가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한때 6만여명에 달했던 상주인구는 2만여명으로 줄고 그나마도 일자리가 없어 생계수단이 막연한 실정이다.이들 폐광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내국인 출입이 허용되는 카지노를 세워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것이 통산부의 입장이다. 통산부는 이를 위해 「폐광지역 개발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마련,경제장·차관 회의를이미 거쳤으며 내달 초 일반 차관회의와 국무회의에 상정할 계획이다.그러나 정부내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 양론이 분분해 실현 여부가 불투명하다. 이달 초 열린 경제장관회의에서는 참석자 대부분이 폐허화하다시피한 탄광지역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적절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카지노 설립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들이 많이 표출됐다.개발 지원의 방법론과 관련해 「공인된 도박장」인 카지노의 설립을 허용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다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이에 따라 카지노 설립 관련 조항을 유보한채 여타부분만을 통과시켰다.카지노 설립건은 인가권을 가진 주무부처인 문화체육부가 참석하는 일반 차관회의와 국무회의에서 재론키로 했다. 이에 따라 내달 초에 열릴 예정인 일반 차관회의에서는 카지노 설립의 제안자인 통산부와 인가권자인 문체부 간에 한바탕 격론이 예상된다.문체부가 강력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체부의 반론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우선 국민정서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현재 카지노 설립은 외화획득을 위해 전국의 특1급 관광호텔에 대해서만 인가해주고 있으며 따라서 내국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만약 폐광지역에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카지노의 설립을 인가해줄 경우 정부가 국민의 도박행위를 합법화하고 사행심을 조장하는 격이 된다는 것이다.다만 외국인의 출입만 허용할 경우에는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문체부는 형평의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폐광지역에 설립되는 카지노에 대해서만 내국인 출입을 허용하는 것은 특혜이며,내국인 출입이 금지되고 있는 기존의 다른 카지노 업소와의 형평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또 전남 화순 등 강원도 이외 폐광지역의 주민들도 똑같은 특혜를 요구할 것이며 이 경우 모든 카지노에 대해 내국인 출입을 전면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기존 카지노 업계는 내국인 출입이 허용되는 카지노가 강원도 지역에 들어설 경우 자신들의 영업이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며 이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환경부와 각종 환경관련 단체들도 강원도 산림지역에 대규모 위락단지를 개발하는 것은 심각한 환경파괴를 불러 올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그러나 폐광지역 주민들은 카지노 설립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대규모 상경시위 등을 통해 집단반발할 움짐임을 보이고 있다. 통산부가 문체부와 환경부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지노 설립을 주장하는 것은 강원도 폐광지역의 지리적 특성때문이다.태백산맥의 준령들에 둘러싸인 오지인데다 서울에서 승용차로 5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카지노와 같은 특별한 유인 요소가 없이는 관광개발이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카지노가 설치돼야 관광객이 몰리고 도로 등 기간시설의 설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으며,음식·숙박업소와 스키장 등 각종 레저시설에 대한 민간투자가 유발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그러나 문체부의 반대가 워낙 거센데다 청와대 등도 정치적 부담을 지는 것을 꺼리고 있어 폐광지역의 카지노 설립 문제가 어떻게 결론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 사진작가 임응식(이세기의 인물탐구:84)

    ◎“셔터 외곬 인생”… 한국 사진예술의 선각자/“비예술성” 홀대속 국전 사진부문 신설 앞장/“인간의 살아있는 순간을 포착… 영원을 간직”/입학 선물 카메라가 첫 인연… 8순 넘은 지금도 활동 「인간은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멈출 수 없지만 카메라는 파인더를 통한 순간포착으로 영원을 담아낸다」 불모지 한국사단의 개척자이자 사진예술의 선각자로 불리는 임응식 원로의 사진예술관이다.미술평론가 이경성씨는 그의 사진과 관련된 일관된 자세를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디에 브레송에 비유하기를 주저치 않는다.「그의 눈은 과학자가 자연을 분석하고 연구하듯이 생의 본질을 잡기 위해 인간세상의 구석구석을 경건하게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인위적으로 생산된 사진,연출된 사진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브레송의 말대로 「그들의 사진예술의 공통점은 기록성이 확대되어 역사성으로 이어지고 한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노력과 정성의 불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베레모·검은 안경 차림 사진가는 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숙명을 쫓아 8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베레모에 검은 안경,간단한 촬영기재를 챙겨들고 아침마다 직장에 출근하는 것처럼 명동으로 나간다.명동은 「서울의 변화」이자 「한국의 문화사적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울」이며 그가 지나온 흔적이고 희망찬 미래이기 때문이다.20여년전까지만해도 전봇대위에 올라가 명동거리를 찍고 있는 그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지금은 서울 한복판에 서서 살아움직이는 명동의 표리를 응시하고 사유한다. 「나의 일생은 마라토너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골인지점 하나만을 똑바로 보고 혼자서 싸우며 앞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성취감이 특별히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사진계에서 이룩한 수많은 그의 업적중에서도 57년 뉴욕근대미술관 25주년기념행사였던 「인간가족전」유치를 빼놓을 수 없다.작품을 운반하는 데만 대형트럭 70대,관람객 30만명을 동원하는 가 하면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68개국의 쟁쟁한 현역들이 참가한 「인간종합 전시의 파노라마를 연출했다」는 평을 들었다. 또 「사진쟁이가어떻게 문화인이며 예술인이냐」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온갖 수모를 딛고 문총(예총전신)에 사진을 가입시킨 일이며 12년에 걸친 완강한 고투끝에 국전에 사진부문을 설치한 것은 그만의 끈질긴 고집과 자존심,강직함의 승리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국전 사진부 설치과정에서 조각가 윤효중씨와의 극도의 갈등은 한국사진사와 국전의 자취를 정리할 때마다 언제나 거론되는 사건의 하나다. 단지 사진이 한국미협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미협을 대표하는 윤효중씨는 국전의 사진부 신설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고 심지어는 「한국미협에서 탈퇴한다면 당장 국전 사진부문 설치는 물론 홍대에도 사진과를 신설하겠다」고 회유했다.「아무리 목적달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자세로 이를 묵살했으나 그가 60년도 서울시문화상 수상자로 추천된 자리에서 당사자인 윤효중씨가 「감언이설 따위에 미동도 하지않는 도도한 태도는 참으로 본받을 만한 예술인의 자세」로 칭송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드디어 64년 국전에 사진부가 탄생되긴 했으나 이번에는 최고상인 대통령상 국무총리상등 최고상에서 사진을 제외시키는 바람에 굴욕을 느낀 그는 국전심사위원직을 사퇴,국전의 차별성과 부당성을 성토하는 한편 주무당국에 시정을 촉구하는 건의서와 각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그 때의 비참했던 심경을 그는 「렌즈에 담은 소명」이란 글에서 「우리는 비굴할 정도로 참아냈다」고 표현하고 있다. ○6·25때는 종군작가 활동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세는 원리원칙과 정의를 주장하는 비타협주의로 응집되어있다.그리고 그것은 한 작가의 명예와 성문때문이 아니라 사진의 위상을 지키려는 사단의 자존심임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초기에는 정물과 풍경,인물과 누드를 소재로한 인상파적 표현기법에 천착하여 「사진미학의 완성자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 접근한다」는 평을 들었고 실제로 30,40년대 「침몰」같은 작품은 카메라를 쓰지 않고 인화지위에 직접 물체를 두고 빛을 쬐어 빛과 그림자만의 그라데이션으로 영상을 처리한 포토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가 현실에 눈돌리기 시작한 것은 6·25직후 USIS가 파견한 인천상륙작전 종군작가로 일하면서부터다.그와 친밀했던 「라이프」지의 기자 핸크워커가 「시체의 행렬」을 카메라로 끝 없이 쫓는 것을 보고 그는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한 기록」에 눈떠갔다.전후 폐허가 된 음습한 명동의 풀빵가게앞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는 슬픈 부녀와 직업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방황하는 청년의 「구직」은 인간존엄의 상실과 살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을 「사진은 사진」이라는 차원에서 그려낸 새로운 시각의 작품들이다.「인간의 몸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살점이 썩어가는 마당에 회화적 아름다움이니 관념적 자연미 추구는 한낱 한가로운 「음풍농월」이었고 그는 스스로 자책하여 싱싱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는 대학에서 최초로 사진을 강의하는가 하면 국립현대미술관에 예빙되어 사진가로선 처음으로 고희기념전을 개최,하셀블라드 같은 고급 카메라를 쓴적은 없지만 그의 작품 4백20여점은 미술관에 영구보존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그는 제자들에게 「아무리 위대한 인물묘사도 한장의 사진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사람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을 가차없이 포착하는 카메라의 눈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당부해 마지않는다. ○미술관에 420점 보존 그는 부산에서 한말 관리였던 임춘화씨와 김복덕 여사의 4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소년시절엔 바이올리니스트 화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도쿄 와세다중학 입학기념으로 둘째형(응구씨 재일화가)이 사다준 박스형 카메라 한대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던 엉뚱하게도 일본 풍도체신학교 졸업후 강릉우체국에 근무한 것까지도 결국 「사진」에 도달하기 위한 한 과정에 불과했을 뿐이다.사진에만 몰두하여 집안살림은 여유가 없었으나 신교육을 받은 부인 박갑득 여사가 3남 4녀를 훌륭히 키워냈고 장남인 범택(한양대 교수)씨가 부친의 뒤를 잇고 있다. 「여야일록」.화가 석도륜씨가 카메라를 메고 명동을 도는 그의 모습을 「들판의 한마리 외로운 사슴」에 비유한 휘호다.그러나 순간을 멈추고순간을 영원히 남기려는 그의 도정은 「도심을 꿰뚫는 혁혁한 형안」이란 표현이 한층 어울릴지 모른다. 이제 그에게서 쾌심작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진이 인생의 모든 것이 돼버린 작가」만의 「삶의 지혜와 인생을 체관한 시각」은 그를 능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명동을 겨냥하는 그의 셔터소리는 시간을 정지하는 소리며 그의 카메라는 낭만과 전쟁과 역사의 비풍참우,인생의 모든 것이 충만하게 담긴,한국 제일의 보물상자에 틀림없을 것같다. □연보 ▲1912년 부산 출생 ▲31∼34년 부산사진 여광 구락부 가입,일본 와세다(조도전)중학 및 일본 풍도통신학교졸업,일본「사진살롱」지에 「초자정물」발표 ▲35∼37년 강릉우체국근무 ▲47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발족 ▲50년 인천상륙작전 종군,「경인전선 보도사진 개인전」 ▲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에 「병아리」입선,한국사진가협회결성 ▲53∼73년 서울대를 필두로 이후 이대 홍대 건대 덕성여대 서울여대 숙대 서라벌예대출강 ▲55년 미국 사진연감 「포토그라피 애뉴얼」에「나목」수록 ▲57년 「인간가족사진전」유치(경복궁미술관) ▲64∼82년 국전초대작가 ▲69∼71년 월간「공간」지 주간 ▲72년 임응식회고전(서울,부산) ▲73년 한국사진협회 이사장 ▲74∼78년 국전운영위원,한국사진교육연구회창립 대표 ▲74∼90년 중앙대교수 ▲82년 국립현대미술관초대 회고전 ▲83년 미국LA한국공보원초대전 ▲89년 주불한국문화원초청「임응식 사진전」(파리) ▲95년 삼성 포토스페이스 개관 임응식회고전 서울시 문화상(6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71년) 문공부현대사진문화상(78) 은관문화훈장(89) 「한국의 고건축」(5집)「임응식 사진집」(79)「풍모」(82)「임응식 작품집」(95)외 「사진표현과 작가」「사진사상」등
  • 「세계의 지도자상」(사설)

    「유엔 헌장의 원칙과 정신에 따라 인류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세계적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대한민국의 김영삼대통령이 탔다.유엔에 의해 식민지상태에서 해방되어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전쟁의 폐허에서도 유엔의 도움으로 회생한,아직도 완전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잔존 분단국 대통령이 차지한 이 명예를 우리는 대견하게 되새기지 않을수 없다. 김대통령이 수상연설에서 밝혔듯 『지난 반세기에 걸친 한국의 국가건설과정은 유엔과 한국과 미국이 힘을 합쳐 유엔의 이상을 구현한 역사』였다.그런 한국이 이제 세계와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유능한 나라임을 인증한 것이 「세계의 지도자상」에 담긴 뜻이기도 하다. 수상에 앞서 김대통령은 유엔연설을 통해 유엔의 「변화와 개혁」을 위한 제언도 한 바 있다.효율적인 유엔의 기능을 위하여 유엔정상회의 정례화를 촉구하고 새 국제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신선하고 능동적인 대응을 일깨운,그의 제언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곤살레스 스페인 총리,라빈 이스라엘 총리,라흐마노프 타지키스탄 대통령,레 둑 안 베트남 국가주석등 10여 나라의 정상들과 가진 마라톤정상회담은 시간이 모자라 요청을 못다 수용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유엔의 무대에서 실감한 우리의 위상은 이렇게 탄탄해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걸맞은 외교의 지혜를 다하기 위해 국가 최고지도자가 촌음의 시간을 별러쓰며 애를 쓰고 있는 같은 시각,국내의 사정은 혼미와 소요의 극을 치닫고 있다는 일은 좀 유감스럽다.그것도 지난 시대의 상처가 국민의 분노를 새삼 유발하고 있는 「비자금 정국」의 혼미는 너무 안타깝다. 그래도 지금 이런 시련을 마련한 역사의 의지는 따로 있을 것이다.언제고 되살아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옛날의 과오를 이 기회에 충분히 척결해야 할 것이다.더는 지난날에 미래를 볼모잡히고 허덕이는 일이 계속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지혜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 뉴욕 한국 거리(외언내언)

    뉴욕에 가는 한국사람들이 꼭 들르는 곳이 있다.맨해튼 허리께에 자리잡은 32번가다. 하루만 한국음식을 먹지 않으면 속이 메슥거리는 한국사람들에게 이곳은 맛의 향수를 달래주는 거리다.곰탕 설렁탕 자장면 명동칼국수까지 없는 게 없다.오랫동안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불과 한나절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뉴욕에 온 사람도 여기서 칼칼한 우리 음식으로 속을 달랜 후에야 관광도 되고 일도 시작되는 것이 한국사람 특유의 입맛이다.32번가엔 음식점만 있는게 아니다.한국사람들이 경영하는 책방 여행사 은행 선물가게 골프숍 호텔 할것없이 한국사람들이 흔히 필요로 하는 모든 게 몰려있는 한국인 거리다. 이 32번가를 뉴욕시가 지난 23일 「코리아 웨이」(Korea Way·한국의 거리)로 명명했다.코리아 웨이로 명명되면 영문과 한글로 거리명이 거리표지판에 정식으로 표기된다.한국인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장사를 하는 한국인거리는 실은 32번가뿐이 아니다.28번가 쯤에서부터 36번가 께까지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는 7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상업적 가치가 거의 없어져 창고 등으로 쓰이던 어둡고 지저분하기 이를데 없는 낡은 건물들만 줄지어 늘어서 있던 곳이다.이런 폐허화했던 곳이 오늘의 번창한 거리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들이 가발을 갖고 들어가 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뉴욕시는 슬럼화했던 이 일대를 다시 일으켜세운 한국사람들을 늘 고맙게 생각해왔다.코리아 웨이는 코리안들이 코리안 웨이(Korean Way·한국방식)로 만들어놓은 기적의 거리다.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 타운과 함께 한국인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뉴욕의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한국실이 새로 설치된다는 보도도 뒤따랐다.50평 규모가 될 것이라고 한다.메트로폴리탄에선 작지않은 문화공간이다.세계의 심장 맨해튼에 한국인이,한국의 얼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명성황후 1백주기… 재조명 활발

    ◎추모식·숭모제·뮤지컬·TV 다큐 등 기념행사 다양 오는 8일은 조선조 말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친 명성황후의 1백주기가 되는 날.일본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그 넋을 기려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리는 한편 그동안 부정적으로 평가돼 온 그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명성황후 현창회(회장 민영복)가 5일 추모식을 가진데 이어 한국여성예림회(회장 이온순)는 8일 비극의 현장 경복궁 녹원에서 숭모제를 열고 「독립정신」에 실린 명성황후의 사진을 바탕으로 황후복을 입은 초상화 영정(그림 권오창)을 제작,발표한다.KBS­1TV는 7일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이라는 특집방송을 하며 뮤지컬 전문 제작사인 「에이콤」은 뮤지컬 「명성황후」를 11월 공연할 예정이다. 역사학자 박성수 교수(정신문화연구원)의 기고문과 뮤지컬·특집방송의 내용을 소개한다. ◎뮤지컬 「명성황후」/일제에 맞서다 참변 당한 국모로 묘사 명성황후(민비)시해 1백주기를 맞아 「국모로서의 민비」에 초점을 맞춘 뮤지컬 한편이 선보인다.소설가 이문열씨의 첫 창작희곡「여우사냥」을 노래위주의 뮤지컬로 꾸민 「명성황후」(11월17∼26일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이씨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소설 「사람의 아들」이 연극으로 공연된 적은 있지만 이씨가 본격적으로 쓴 창작희곡이 무대화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씨는 4년전부터 뮤지컬 전문 제작사인 「에이콤」(대표 윤호진)과 함께 올해로 1백주년이 되는 민비시해 사건을 소재로 한 뮤지컬 공연을 준비해왔다. 희곡「여우사냥」은 이씨가 지난 94년 문학전문지「세계의 문학」봄호에 2백자 원고지 7백장 분량으로 발표했던 것으로 이번 공연을 위해 한국예술종합학교 김광림 교수가 새롭게 각색했다.고종황제의 드센 아내,시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맞서는 며느리로서의 민비라는 기존의 도식을 거부하고 민비를 프랑스의 잔 다르크처럼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조선의 국모로 그리고 있는 것이 특징.작가 이씨는 작중인물인 다이장군의 입을 빌려 『온몸으로 껴안으려 한 조국으로부터/오히려 버림받고/홀로 강한 외적과 맞서다/불꽃속에 사라져 간 조선의 잔 다르크』라고 명성황후를 칭송하고 있다. 연출을 맡은 윤호진 교수(단국대 연극영화과)는 『이씨의 창작희곡에서 대사부분을 모두 없애고 이를 노래로 처리해 마치 한편의 오페라처럼 만들어 보고 싶다』면서 『외국의 뮤지컬도 음악과 노래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인 만큼 우리 뮤지컬의 선진화를 위해서도 이런 시도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화씨가 타이틀 롤을 맡았으며 영화 「전태일」을 촬영중인 젊은 연기자 홍경인,뮤지컬 전문배우 김민수,성악가 윤치호씨 등이 출연한다.평일 하오4시·7시30분,토·일 하오3시·6시 공연.3452­9055 ◎K­1TV 다큐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사건당시 현장도·증언 통해 진실 추적 1895년 10월 8일 새벽.세계사의 큰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던 조선 왕조의 국모 명성황후가 일본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된다. 1백년을 맞는 이날을 기해 KBS­1TV「역사추리」팀은 그동안 일본에 의해 왜곡된 그날의 현장을 재연하고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시도한다.「명성황후 시해의 진실」편으로 방송시간은 7일 하오 8시.제작진은 일본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저질러진 시해사건의 진실을 당시 영국 공사 실리어가 확보하고 있던 「사건현장도」「경복궁 습격도」,시해당시 「일본군위치도」등을 바탕으로 컴퓨터 그래픽화면으로 생생히 되살린다.이를 통해 여전히 시해책임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정부의 기만성을 폭로한다는 의도다. 특히 제작팀은 이노우에와 이토 히로부미,야마가타등 당시 일본 천황의 직권을 대행하고 있던 수뇌들이 미우라를 조선에 부임시키고 이어 시해전후 활발한 접촉을 벌인 사실을 증언과 자료집을 통해 제시,일본정치권의 치밀하게 의도된 범행임을 제시한다. 또 당시 미국 다이 장군의 자문으로 활약한 러시아의 건축가 사비틴의 시해당일 상황 증언 테이프를 시청자들에게 공개할 계획.장해랑 PD는 『사비틴 증언의 경우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시청자들이 그동안 일본역사관에 의한 왜곡된 사실에 너무나 익숙해있기 때문에 이를 수정하기 위해 되도록 많은 증언,사진들을 보여줄 생각』이라고 설명한다. 이와관련,1895년 명성황후 시해전 일본신문에 게재된 삽화 몇점도 소개된다.일종의 「풍속화」로 고종과 함께 외국공사를 알현하는 명성황후를 여우의 얼굴을 한 꼭두각시로 폄하하거나 아예 기모노차림을 한 일본여자로 묘사한 것들이다. 프로그램 중간에 삽화형식의 드라마와 함께 김자영 아나운서가 명성황후 연극현장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명성황후가 누워 있는 「홍릉」을 찾아 리포트한다. ◎명성황후 1백주기를 맞아/“드센 여자·족벌정치가” 일서 왜곡/한국침략에 방해… 장애물 없애려 살해/박성수 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장 「중전이 밤중에 적도의 독검에 맞아 시해되었다.세상 천지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저상일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전인 1895년 10월8일 밤 경복궁 구중궁궐 안에서 국모가 일본군에 살해당한다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변란이었다.그러나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1895년은 동학란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일어난 이듬해로서 지방에는 민란과 콜레라의 병란이 일어나고 중앙에는 일본군이 가득차 마침내 경복궁을 습격하는 변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사변이 일어난지 1세기가 지난 오늘 살인범의 정체가 누구인지 이미 백일하에 들어났다.다름 아닌 서울 남산에 자리잡고 있던 일본 공사관의 주인공들이 범인이었다.일본 공사 미우라(삼포오루)란 자는 살인 전문가였고 하수인인 구마모토파 깡패는 일본 제일의 야쿠자였다. 그러나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이 있으니 처참하게 살해당한 민비(명성황후로 추존)자신에 대한 우리들의 역사적 평가이다.오랫동안 민비는 시아버지 대원군과 싸워서 정권을 잡은 비정의 며느리요 민씨 일족을 권좌에 앉혀 온갖 부정부패를 자행하게 만든 족벌정치가로서 비난받아 왔다.심지어는 그녀를 청국말년의 여걸 서태후에 비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혹평 뒤에는 일제 침략자와 이에 뇌동한 친일파들의 모함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그래서 민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호칭부터 명성황후로 고치고 경복궁 안 침소 옥호루(현재 경복궁 안 민속박물관 옆)자리에 조난비를 세워 그날의 참사를 잊지 않게 하고 일제 침략의 희생자로서의 민비상을 국민에게 보여주고 있다.특히 금년은 광복 50주년으로서 그녀의 위상을 다른 누구보다 바로 잡아야 하게 되어 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일제가 왜 민비를 죽이려 들었는가 하는 점이다.동학란을 구실로 한국에 파견한 일제는 처음부터 한국 침략의 야욕을 품고 있었다.즉 청일 전쟁을 도발하기 전에 각의에서 한국의 주권을 빼앗기로 결의했다.그러나 전쟁에는 이겼으나 열강의 강한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민비를 죽여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 세력을 만회하려 했던 것이다.간단히 말해서 민비가 침략에 장애물이기 때문이었다. 민비는 당초에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개항을 결심했던 인물이고 일본에 대해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그러나 1894년의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침략 야욕을 간파한 민비는 반일정책을 쓰기 시작했다.일제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청국과 러시아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민비의 이러한 대외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을 수구파라 하고 친일세력을 개화파 또는 독립당이라 부르고 있으나 명칭부터가 잘못되었다. 흔히 구한말 국제정세를 요즘의 국제환경에다 비겨 4강+2약 운운하나 당시의 침략세력은 유일하게 일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친일 개화파는 누가 진정한 적국인가를 알지 못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부르짖어 나라안의 정치싸움을 격화시켰고 외적에게 침략의 틈을 보이고 말았다. 민비가 참살당한 뒤 친일 개화당이 다시 정권을 잡고 단발령을 선포하게 되니 나라안은 뜨거운 솥끓듯 달아 올랐다.그러지 않아도 동학란과 청일전쟁으로 국토가 완전히 폐허로 변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필요없는 개혁을 시도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이 나라의 망국이 시작되었다고 모두가 개탄하였다.그래서 전국의 선비들이 무기를 들고 있어났으니 을미의병이었다.을미의병은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만일 민비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그리고 나서 최근에 나온 「여우사냥」등 소설을 읽어보아야할 것이다.
  • “북 「수재민 5백만」 과장 아니다”

    ◎유엔 조사단이 밝힌 「북 수해」 참상/주택·도로 등 완전폐허… 진흙 6m 쌓인곳도/동쪽지방 길끊겨 접근 못해… 주민 대피소에 북한수해 상황을 직접 둘러본 유엔관계자들은 수해가 『심각하다』고 입을 모으면서 구호활동이 안되면 최악의 상황이 올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 구호국(DHA)의 올랑 랑그렌(스웨덴)재난평가팀장을 비롯,세계보건기구·아동기금등의 관계자들은 12일 제네바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수해피해상황등 지난달 29일부터 11일동안의 방북결과를 생생히 전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북한의 방문지역은. ▲평안북도·함경북도·자강도등 주로 수해를 입은 서부지역이다.동부지역은 도로교통등 사회기반시설이 붕괴되거나 유실돼 접근하기가 어려웠다.일부지역은 북한이 제공한 헬기로 시찰하기도 했다. ­피해상황은 어떤가. ▲전형적인 홍수피해였다.진흙더미가 6m나 쌓인곳도 있었고 주택은 물론 도로와 상·하수도 시설도 완전히 파괴된 모습이었다.특히 주민들은 집단 대피소에서 식량난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유엔에 적대적이던 북한이 유엔에 구호를 요청하기는 처음인데 방북활동분위기는 어땠나. ▲이번 시찰은 전적으로 인도적 차원의 것이었다.북한은 유엔과 국제기구들을 신뢰하는 것 같았으며 유엔도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할 것이다. ­시찰기간동안 북한정부의 간섭이나 제한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차량·헬기등을 제공해서 조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방북 조사결과 북한의 피해상황은 북한측이 보고한 내용과 어느정도 차이가 있나. ▲전지역을 일일이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수해피해지역이 전국토의 75%에 달한다는 북한보고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인 것으로 판명됐다.겨울이 닥치기 전까지 구호가 시급한 50만명의 이재민들에게 1천5백만달러어치의 물자가 공급되지 않으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구호계획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구호국은 우선 구호가 시급한 50만 이재민에게 지원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중국과 태국등 인접국을 통해 식량을 우선지원하고 조만간 제2차 시찰을 통해 보다 구체적 물자조달계획을 세울 것이다.
  • 세계 최대 담수호/바이칼호(시베리아 대탐방:35)

    ◎남북길이 6백36㎞… 3백여개강 유입/한때 얼어붙은 호수위에 임시철도 가설 운행/생태계연구 「바이칼호 연구소」는 세계적 평판 많은 사람이 이르쿠츠크를 찾는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바로 바이칼호수를 보기 위해서다.이르쿠츠크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날 낮 12시에 택시를 대절해 곧장 바이칼호로 향했다.짙푸른 타이가숲을 뚫고 꾸불꾸불 난 포장도로를 1시간여 달리면 확트인 강하구 같은 곳이 나타나며 호수 초입의 마을 리스트비양카에 도착한다.이르쿠츠크에서부터 따라온 앙가라강이 호수와 연결되는 곳이다. ○앙가라강만 우회 앙가라강은 바이칼호에서 발원해 흘러나가는 유일한 장강이다.모두 3백여개의 크고 작은 강이 바이칼호로 흘러드는 데 유독 앙가라만이 바이칼호를 버리고 떠나간다.리스트비양카 선착장에서 취재진을 태우고 호수를 보여준 모터보트의 젊은 선장은 제일 먼저 높이 1m,폭 1.5m로 호수위에 솟은 작은 바윗돌에 일행을 데려다 주었다.앙가라는 얌전한 처녀였다.그러나 그가 사랑한 바이칼호는 난폭한 영웅이었다.앙가라는 바이칼호의 광포한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보다 인자하고 부드러운 남성 예니세이를 찾아 먼길을 떠났다.떠나면서 앙가라는 정표로 이 바윗돌을 남겨두었다.보트의 젊은이가 가리키는 대로 실제로 물살은 이 바윗돌을 기점으로 앙가라로 흘러들고 있었다.이곳에서부터 앙가라강이 시작되는 것이다.앙가라는 북서쪽으로 먼길을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주에서 새 연인 예니세이를 만난다. 세계 최대의 담수호.깊이 1천6백20m,남북 길이 6백36㎞,동서 폭 45㎞.각 종 희귀 동식물의 서식지…호텔로비에서 파는 팸플릿에 적힌 안내문이다.그러나 이런 수치만으로 바이칼호의 「위대함」을 묘사하기는 어림없다.호수면을 감싸던 물안개가 걷히자 반대편 부랴트공화국쪽의 눈덮인 산맥이 모습을 드러낸다.보트가 일으키는 물보라로 얼음같이 찬 물방울이 얼굴을 때린다.호수 밑 12m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는 여행안내서의 내용은 거짓이 아니었다.바이칼호는 1월초 얼음이 얼기 시작해 4월말까지 녹지 않는다.그리고 여름철에는 항상 짙은 물안개가 호수면을 뒤덮는다고 한다.호수 반대편 부랴트산맥을 본 것은 보통 운이 좋은 게 아닌 셈이다. 바이칼호 역시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역사에 한 획을 남긴 곳이다.1905년 리스트비양카에서 호수남단을 싸고 슬루지양카까지 연결되는 「크루가(순환) 바이칼」건설은 당시 최대의 난공사로 손꼽혔다.지진대로 엄청나게 단단한 바윗돌로 이루어진 산악지대였기 때문이다.모두 23개의 터널을 뚫고 산을 깎는 대역사가 벌어졌다.1899년부터 1905년 이 바이칼호 순환선이 놓이기까지 시베리아대륙을 달려온 열차가 호수앞에 와서 멈추면 승객들은 페리를 타고 호수를 건넜다.겨울이면 10m이상을 얼어붙은 호수위로 임시철로를 놓아 그 위로 기차가 달렸다. ○부근에 아이크별장 힘들게 건설된 바이칼호 순환선은 1949년 이르쿠츠크에서 슬루지양카를 잇는 현재의 단축노선이 완공되며 사용이 중단됐다.잠시 보트에서 내려 지금은 폐허가 된 바이칼호 순환철도의 녹슨 기찻길을 따라 걸어보았다.침목 하나하나에 빈틈없이 꽉 조여진 나사못들,천장에서 물한방울떨어지지 않도록 일목요연하게 화강암을 깎아 다진 터널 내부…당시 소비에트 노동자들의 꼼꼼한 일솜씨를 보며 잠시 시간 가는 것을 잊었다. 바이칼호수와 함께 유명해진 2개의 기관이 있다.바로「호수연구소」와 이 연구소 뒷산에 위치한 사나토리움(휴양소).1927년 바이칼호수의 생태계를 연구할 목적으로 설립된 호수연구소는 한때 쟁쟁한 학자 4백여명이 일하던 세계적 연구소였다.바이칼호에 대한 학문체계를 쌓은 업적으로 전세계 지리학자들 사이엔 대단한 평판을 누렸던 곳이다.최근에는 바이칼호 오염문제를 제기해 역시 세계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하지만 지금 이 연구소는 자금난으로 거의 폐쇄 일보 전에 와 있다.연구소는 과거 이 연구소 학자들의 학문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으로 바뀌었고 불과 20여명의 학자가 남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이르쿠츠크의 지리연구소로 자리를 옮겨갔다.이곳에 남은 학자들도 연구비 부족으로 거의 일손을 놓고 있었다. ○5시간 호수 감상 연구소 뒤편 산자락에서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기막힌 경관을 자랑하는 휴양소는흐루시초프가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에게 선사한 별장건물로 유명한 곳이다.흐루시초프가 미국방문 때 아이젠하워로부터 받은 선물에 답례로 이 별장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물론 아이젠하워는 이 별장에 한번도 묵은 적이 없지만 3개 동으로 이루어져 흐루시초프시대의 전형적인 별장양식을 갖춘 아담한 건물이다.3개동 모두 폐가로 변했으나 지금 수리가 한창이다.아이젠하워 별장 뒤편으로는 65년에 현대식 휴양소가 들어서 러시아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명소가 됐다.휴양소 마당에는 꼭 우리나라의 진달래꽃같은 「바굴리크」라는 연붉은색의 바이칼호 야생화가 만개해 있다. 이튿날 모스크바시간으로 상오 9시 이르쿠츠크역에서 울란우데행 열차를 탔다.울란우데까지는 8시간의 거리다.이른 기차를 탄 것은 도중에 바이칼호를 실컷 보기 위해서였다.기차가 호수 남단을 감싸고 도는 5시간여 동안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바이칼호의 갖가지 풍광들을 보는 것이 바이칼호 관광의 진수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이다. 이르쿠츠크역에는 다리에 짝 달라붙는 감색 유니폼 바지에,바지 양옆에 일자로 댄 노란색 스트라이프(줄),카키색 상의,넓은 가죽 허리띠,금색 견장,긴 가죽장화,단정하게 깎은 콧수염의 전형적인 코사크군인들이 역구내를 지키고 있다.풀어헤친 앞단추에다 불뚝 튀어나온 배,뒤통수까지 밀어 올린 모자 등 하나같이 「기합이 쑥 빠진」 모습의 러시아군인,경찰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경쾌한 차림이 단번에 코사크군인들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부랴트공화국의 수도인 울란우데는 그곳 말로 「붉은 우다강」이란 뜻으로 셀렝가강과 우다강이 만나는 곳에 만들어진 도시다.셀렝가강은 몽골의 후수구호수에서 발원해 바이칼호로 흘러드는 장강이다.북경∼울란바토르∼모스크바를 잇는 기차가 반대편 선로에 정차해 있다.북경행 역시 평양행과 마찬가지로 군복을 입은 자체 승무원들이 객실을 관리하고 있다. 울란우데까지는 4인용 객실을 탔는데 옆에 꼭 우리나라 시골장에 다녀오는 듯한 차림의 부인 한명이 같이 탔다.내몽골에 산다는 것과 우리가 한국기자라는 사실로 수인사는 했으나 그 이상은 도저히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서투른 필담을 몇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한자실력에 너무 차이가 져 그만두었다.
  • 불 베르사유 궁전(세계의 명소/걸작건축감상:22)

    유럽에 첫 나들이를 가는 여행자들은 우선 파리에 대한 기대감에 젖게된다.그러나 파리에 첫 발을 딛게 되는 순간 「프랑스 혁명」의 대상이었던 화려한 왕궁문화의 흔적은 눈에 보이지 않고,낮게 펼쳐진 소박하고 아담한 가로의 표정을 접하고는 왠지 실망감 마저 느끼게 된다. 파리는 「로망스」라는 그들의 노랫말처럼,『파리라는 말이 「로맨스」를 뜻하고,파리는 그어떤 사람의 것도 아니지만,갖기를 원하면 언제나 당신의 것이 될수 있는』 서정적 모습이다.물론 파리가 「도시화」나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이렇듯 본연의 모습을 지켜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파리의 건축법은 매우 까다롭기로 소문이 난지 오래다.모든 공간은 문화재 차원에서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집 안팎을 뜯어 고치는 행위는 그들에게 파리의 역사와 문화에 도전하는 무모함으로 받아 들여질 것이다.그러나 파리 여행코스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베르사유 궁전 관광」에 나서보면 파리에서 느낀 정서적 분위기와는 완전히 딴판의 무대,즉 사치의 극을달리는 귀족문화의 현장에 들어서게 된다. ○왕권의 상징적 건물로 베르사유 궁전은 1623년 루이13세의 계획으로 시작되어 2백년간에 걸쳐 증·개축 되었다.처음에는 파리 서남쪽으로 약 20㎞ 떨어진 곳에 「사냥」을 위한 별궁의 형식으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그후 귀족계급이 몰락할 때까지 지속된 왕권의 상징적인 과업이었다. 관광버스가 루브르 박물관 옆의 발착장을 출발하면 베르사유 궁전의 역사에 대한 안내방송이 시작된다.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인 그들이 타도한 귀족문화의 상징을 세계인을 상대로 판매(?)하는 어색함에 대한 그들다운 변명의 방식이다.만약 자신들의 『우리의 선조는 이렇게 혹세무민을 하였던 것입니다』라고 하면 누워서 침뱉는 일이 될 것이고,『이렇게 훌륭한 건물을 짓고 잘 살았습니다』하면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될 터이니 그들도 나름대로 요리조리 궁리를 했음에 틀림없다.안내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프랑스인들은 이들 귀족의 사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이제와서 보면 이들 귀족은 베르사유궁전이라는 명작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줌으로써 막대한 관광수입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그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은 결국 당시의 국민 세금으로 후대를 위해 저축을 한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라는 절묘한 넋두리가 일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베르사유 궁전은 사냥용 별장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신축 당시에는 아주 평범한 작은 별장이었다.그러나 이후 확장을 거듭해서 지금은 전체 면적이 1백50만평에 이르고 있다.수렵광으로 알려진 루이13세는 6개 정도의 방이 있는 이 작은 궁전에 소동물원을 만들었다.이곳에서는 초기에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던 타조나 펠리컨등 진기한 조류가 사육되었는데,점차로 동물의 종류도 다양해져서 낙타나 코끼리도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한다.절대권력과 파탄적 귀족문화 공간의 초기 모습이 「진기한 동물원」이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화려한 분위기에 매료 루이 14세에 이르러 베르사유는 당대 최대의 궁전이자 귀족들의 공동주택으로 변모한다.당시의 상황에서 귀족들은 매일 아침 자신의 집을 출발하여수십리 떨어진 베르사유의 제왕에게 충성을 서약한다는 것이 큰 고역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요즈음 말로 「눈도장」찍는 고달픈 일과를 겪고 있던 것이다.그들은 궁전의 규모를 키워가면서 객실수를 대폭 늘려잡아 자신들의 거처를 확보하는 묘책을 택했다.이때부터 베르사유는 「귀족 아파트」가 되었고 밤낮으로 연회가 열렸으며,이른바 「귀족의 반항」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시초까지 가장 사치스러운 축제공간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베르사유는 지탄받아야 할 타락의 상징임에 틀림없다.그러나 궁전 건축에 동원된 당시의 건축술에는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예술성과 정교함이 가득하다.목욕탕에는 18세기 당시에 이미 보일러를 이용해서 가동되는 독립된 급탕설비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벽화 이외의 건축재료는 천연석을 정교하게 조합하여 사용함으로써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퇴색되지 않은 선명한 색상을 간직하고 있다.특히 대리석과 유리가 조화된 실내는 낮에는 자연채광을 구석까지 고루 반사시켜 주며,밤이되면 샹들리에 빛을 받아 보석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준다. 혁명후 베르사유는 무용지물이 되었다.그러나 결코 「폐허」로 변하지는 않았다.혁명가들은 부패한 절대권력의 상징인 이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고스란히 보전하는데에 동의했다.그들은 단지 일부의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들,이를테면 백합꽃이나 왕관등을 없애버리는 것으로 만족했다.가구나 장식품은 경매에 부쳐졌다. 빈집이 된 궁전은 19세기에 들어서 루이 필립왕에 의해 프랑스역사박물관으로 변모되었다.그리고 이곳에 프랑스 건국에서 근대까지에 이르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수천점의 벽화와 조각으로 전시하였다.전시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칸막이 벽을 변경하고,전시품을 제작하는데만 4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로코코시대」전기 이뤄 베르사유를 떠난 귀족들은 각자 자기집으로 돌아갔다.이들은 베르사유의 화려함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그동안 방치했던 자신들의 집을 단장하기 시작했다.곳곳에서 주택의 설계와 증·개축,인테리어공사가 활발해졌다.베르사유 궁전의 장식적 분위기에 집착한 이러한 경향은 건축사적으로 「로코코」시대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지켜보면서 후련함과 아쉬움이 교차한다.물론 총독부 건물과 베르사유 궁전은 타락한 선조의 유산이 아니라 침략자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하지만 역시 우리 땅에서 우리의 피땀으로 시공된 우수한 건축물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우리 것을 찾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단순 해체로만 만족하지 말고 해체과정을 기술 발전의 계기로 삼기위한 지혜와 노력이 더욱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아울러 우리의 궁전 건축 유산을 보전하기 위해서 입장을 제한하는 방식의 「보호」그 자체 보다는 당시의 기술적·예술적 지혜를 현대에 널리 활용할 수 있는 발전적인 개방의 장으로 관리해나가기 위한 발상의 전환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 “한톨이라도 더”… 벼이삭 씻기 안간힘/수해 복구 현장

    ◎갯벌로 변한 농경지 보며 절망·한숨/붕괴된 강둑 쌓기에 국교생도 한몫/음료수·빵등 간식 제공 “따뜻한 인정”/전화불통으로 피해량 확인 안된 곳도 ▷예산◁ 8월의 마지막 휴일인 27일 충남 예산군 오가면 무안천 제방 복구공사 현장. 민·관·군 1천여명에 휴교를 맞은 오가국교를 비롯,부근 6개 초·중·고교생 1백20명은 뒤엉켜 복구작업을 하면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폭 24m,높이 6m의 우람한 강둑이 2백20m나 순식간에 떠내려 간 천재 앞에 세상모를 나이인 초등학생들 마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처럼 흘러내리는 흙더미를 담은 양동이를 묵묵히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어린 학생들은 연신 흘려내리는 땀방울을 훔치는 바람에 온몸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예산군 일대 오가면과 신암면일대를 순식간에 물바다로 만들어 버린 현장에 중장비의 굉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이날 상오 9시. 태풍 재니스가 물러나며 날이 개자 전 공무원에게 긴급 복구령이 떨어졌고 예산군청 직원 1백73명이 현장에 달려 왔다.이어 육군 32사단 8연대 3대대 장병들이 덤프 트럭 6대 등 중장비를 동원해 속속 줄을 이었다. 하늘의 뜻으로 밖에 돌릴 수없는 엄청난 재난복구에 민간 건설업체도 즉각 뛰어 들었다. 예산읍의 대산건설은 불도저 1대,대형 포클레인 5대,덤프트럭 15대를 곧바로 투입하면서 고요했던 참사의 현장은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집과 농경지를 소용돌이치는 흙탕물에 흘려 보내고 간신히 빠져나와 넋을 놓았던 주민들도 하나 둘 모여 들었다. 마을 뒷산 임시대피소에서 어른들의 낙담을 말없이 바라보던 초·중·고생들도 힘을 합했다.천방지축으로 뛰놀 어린이들도 모래를 담을 주머니를 날라다 주고 말뚝을 전달해주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예산군청 유병(44)토목계장은 『복구작업에 필요한 흙은 대형덤프트럭 2천4백대 분량인 2만4천㎥로 웬만한 산을 옮겨 놓는 것같은 엄청난 작업』이라며 『주민들도 하루빨리 의욕을 추스려 복구의 의욕을 되찾길 빈다』고 말했다. ▷여주◁ 27일 북내면 천송리 천송마을앞 여주∼원주간 42번국도.군장병과 공무원·주민등 3백50여명이 나와유실된 도로 복구 작업을 벌였다. 동원된 포클레인 6대는 굉음을 내며 2m 깊이로 푹파인 도로속에 흙을 퍼담고 있었고 20대의 덤프트럭은 자갈등을 실어 날랐다. 청송마을 주민들은 고생하는 장병과 공무원들을 위해 음료수와 빵등 간식을 제공하며 이들과 마음을 함께 했다. 이날 복구작업에 나선 55사단 소속 김상현 상병(23)은 『교통이 두절돼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왔다』며 『다른 지역의 피해도 빨리 복구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북내면 금당천등 여주지역 소하천 주변에서도 읍·면별로 유실된 제방에 마대와 골재를 쌓는등 복구작업이 활발히 진행됐다. 하지만 민·관·군의 이같은 복구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주 주민들이 입은 상처는 너무도 컸다. 대신면 당산리 당산벌에는 막 패기 시작한 푸른 벼이삭들이 누런 황토물로 덮여 있고 곳곳에는 죽은 가축과 상류에서 떠내려온 것으로 보이는 나뭇가지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태오씨(54)는 『그동안 피땀흘려 가꾼 벼들이 줄기부터 썩어들어가고 있다』며 『이번 농사를 망쳐 영농자금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남한강 건너편 흥천면 백석리에서 8만여평의 땅콩밭을 재배하고 있는 신명수씨(60)도 『심어둔 땅콩 모두 떠내려갔다』며 『이같은 수해는 처음본다』며 망연자실해 했다. 이 마을은 업친데 덮친 겪으로 남한강으로 유입되는 후포천이 불어난 강물로 역류하는 바람에 농경지가 산사태가 난 것처럼 폐허로 변해 버렸으나 아직까지 전화가 불통돼 정확한 피해상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편 여주지역에선 이번 호우로 농경지 1천37㏊와 가옥 56채가 침수됐으며 도로유실 34곳,산사태 3곳,소규모시설파손 50곳등 21억여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잠정집계됐다.
  • “핵실험 영구금지” 미 결정은 옳다/레너드 스펙터(지구촌 칼럼)

    ◎NPT체제 강화로 북한 핵위협 등 효과적 억제 8월15일,영국·미국,그리고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배 50주년을 기념했다.일본의 패배는 일본의 야만적인 점령과 일반인 및 전쟁포로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이보다 앞서 8월6일과 9일은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50주년이었다.이 폭격은 일본의 패배를 앞당겼을 수도 있었지만 이 사건을 기리는 「축하」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대신에 이 두 도시 파괴 50주년은 핵전쟁의 철저한 파괴력에 대해 국제사회가 냉철한 반성의 기회를 갖도록 하면서 「추념」되었다. 과거에 초점이 맞춰진 이 사건들은 오늘날 핵무기 문제의 계속적인 심각성을 상기시킴으로써 주목된 것이다.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은 프랑스가 남태평양에서 핵실험을 재개한다고 선언했으며 중국은 올들어 두번째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다행스럽게 핵무기의 역할이 앞으로 국제문제로서 다소 약화될 전망이 이번달 내비춰졌다.핵실험 재개에 대한 비난에 못이겨 시라크대통령은 96년 핵실험의 영구금지를 약속했으며 중국정부도 비슷한 약속을 내놓았다. 거기에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미 영구핵실험 금지 방침을 밝혔고 또 일시적 실험중지 약속을 지켜온 미국이 소규모 폭발실험마저 위법대상으로 포함시키는 금지안을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러나 소규모라도 실험실시는 전지구적 실험금지의 뜻을 해칠 수 있다고 염려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같은 올 8월의 일련의 이벤트들은 다양하면서 상충되기도 하는 메시지를 한국에 전달했을 것이다. 첫째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한 원폭투하를 다시없이 좋은 일로 여긴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어떤 이에겐 이것은 수십년 일제 압제에 대한 징벌이었다.더 나아가 이 원폭투하 덕분에 한국이 주권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늘날 다수 학자들은 당시 일본이 평화로 돌아선 것은 소련군의 참전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있으나 원폭투하는 일본의 항복을 가속시켰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폐허가 될 무렵에 이미 소련군은 한반도의 북쪽을 점령해가고 있었다.일본의 항복이 조금 더 늦춰졌다면 소련은 한반도 전역을 욕심냈을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모든 한국인은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하는 민간인들의 고통을 다시금 떠올렸을는지도 모른다.남·북한간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는 핵무기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참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핵실험 금지 또한 한국에게 복잡한 문제와 다시 대면케 한다.오늘날 북한으로부터의 도전은 아주 새로운 차원을 갖는데 평양이 하나 혹은 둘의 핵 장치를 위한 물질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미·북한간 기본합의는 이 위협을 제거하는 청사진을 제공하고 있으며 현재는 비록 절름거리기는 하지만 목표를 향해 진전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의 핵우산이 중무장한 북한의 공격을 저지하는 주요 방책이었던 냉전시대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진정 당시 미 핵무기의 한국 존재는 동맹국 방어에 대한 미국의 굳은 의지를 과시하는 상징이었다.그러나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북한의 핵위협을 억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핵확산금지 체제를 비롯한 외교적 방편이다. 미국의 모든 종류의 핵실험에 대한 금지 방침은 현재의 세계적 핵확산금지 체제를 강화할 것이다.더구나 핵실험 금지는 그자체로 지구적 핵억제 체제에서 중요한 새 요인이 된다.이 억제체제가 더 광범위해지고 더 상세해질수록 핵확산금지의 규범을 강화할 것이며 이 규범에 거슬려가려는 국가는 한층 고립될 것이다.북한은 이미 이같은 고립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지난 91년 미국 핵무기가 한국에서 철수된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의지는 외부적으로 덜 분명해졌다.그리고 몇몇 미 국방관계자들은 미국의 핵실험금지 정책이 확고해지면 지금도 보일락 말락하는 미국의 핵억지력이 외부에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이런 시각에서 본 핵실험금지의 영향은 그러나 미시적인 것이다.미국은 이제까지 어느 국가보다 많은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기술적으로 가장 앞선 핵능력을 보유하고 있다.핵실험 계속여부와는 상관없이 어떤 적성국이 미국의 비축 핵무기 성능이 크게 나빠질것이란 판단을 바탕으로 군사적 계획을 세운다고 가정하는 건 억지에 가깝다. 결국 핵실험금지는 북한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보증을 보는 시각에다 별다른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없다.반대로 핵실험금지는 북한의 핵도전을 종식시킬 국제사회의 외교적 노력을 강화시킬 것이다. 올 8월에 발신된 핵 신호는 혼선돼 불분명할 수 있으나 하나의 메시지만은 단연코 뚜렷하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사태가 되풀이되어선 안된다.한반도와 세계의 핵확산금지에 관한 미국의 노력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
  • 중국의 얼굴/나이젤 카메론 등 지음(화제의 책)

    ◎서구인 눈에 비친 19세기 중국 모습 19세기 서구인의 눈에 비친 중국의 모습을 담은 사진 68컷과 참고도판,이와 관련된 글 4편을 엮었다.사진작가는 펠리스 비토,존 톰슨 등이다. 자희황태후(일명 서태후)가 악명높은 내시장 이연영과 함께 자금성에서 찍은 사진,아편전쟁 때 폐허가 된 이화원의 모습,북경으로 진주하는 서양연합군을 찍은 사진 등 희귀한 자료가 많이 소개돼 있다.또 중국인 상류층의 집 내부와 가족,하녀를 거느린 만주족·한족의 여인,범죄자 처형 등 중국인의 생활상과 풍속도 두루 등장한다.양자강의 고산,절강성 남부의 사원 등 절경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 사진집은 단순히 자료집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이 사진들에서는 당시 동양문화에 대해 우월감에 넘쳤던 서구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곁들여 미지의 세계인 중국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도 뒤섞여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편역한 미술사학자 이영준씨는 『이 사진들이 중국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서양사진의 주변적 영역으로 볼 것이 아니라 사진의 역사를 이해하는중요한 자료로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열화당 5천원.
  • “식민지 지배·침략 통절히 반성”/일 총리 종전50주년 담화/전문

    ◎전후문제 성실히 처리… 아태국에 신뢰 쌓을터 지난 대전이 종말을 고한지 5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다시금 그 전쟁으로 인하여 희생되신 내외의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만감에 가슴이 저미는 바입니다. 패전후 일본은 불타버린 폐허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오늘날의 평화와 번영을 구축해 왔습니다.그것은 우리들의 자랑이며 그것을 위하여 기울인 국민 여러분 한분 한분의 영지와 꾸준한 노력에 대하여 저는 진심으로 경의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여기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내진 지원과 협력에 대하여 다시 한번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또 아시아·태평양 근린제국,미국,나아가 구주제국과의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우호관계를 구축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일본은 평화롭고 풍요로워졌지만 우리는 자칫하면 이 평화의 존귀함과 고마움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전쟁의 비참함을 젊은 세대에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특히 근린제국의 국민들과 협조하여 아시아·태평양지역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 여러 나라와의 사이에 깊은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를 배양해 나가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정부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특히 현대화에 있어서 일본과 근린 아시아제국과의 관계에 관한 역사연구를 지원하고 각국과의 교류를 비약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이 두 가지를 축으로 하는 평화 우호교류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또 현재 힘을 기울이고 있는 전후처리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와 이들 나라와의 신뢰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하여 저는 앞으로도 성실히 대응해 나가겠습니다. 지금 전후 50주년을 계기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배우고 미래를 바라다보며 인류사회의 평화와 번영에의 길을 그르치지 않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는 멀지않은 과거의 한 시기,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제국의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또 역사가 초래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패전의 날로부터 50주년을 만지한 오늘,우리나라는 깊은 반성에 서서 독선적인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협조를 촉진하고 그것을 통하여 평화의 이념과 민주주의를 널리 확산시켜나가야 합니다.동시에 우리 나라는 유일한 피폭국으로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핵무기의 궁극적인 폐기를 지향하며 핵확산금지체제의 강화 등 국제적인 군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이 긴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에 대한 속죄이며 희생되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는 길이 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의지할 곳은 신의만한 것이 없노라」고 합니다.이 기념할 만한 때에 즈음하여 신의를 시정의 근간으로 삼을 것을 내외에 표명하며,저의 다짐의 말씀에 대신하고자 합니다.
  • 통일염원의 뜨거운 몸짓 영상화

    ◎화가 하용석씨 민통선내 12곳서 벌인 퍼포먼스 기록전/철책앞에 사과나무 심고 북쪽향해 걷고…/회화·설치·판화 등 하씨 작품도 함께 전시 한 작가가 휴전선 1백55마일, 전 전선을 가로 지르며 그의 온몸을 던진 행위예술을 통해 국민의 통일여망을 쏟아 냈다. 지난 6월15일부터 25일까지 「휴전선 1백55마일­철마는 달리고 싶다」란 이름아래 작업을 펼친 하용석씨(38).당시 모든 작업을 담은 비디오영상과 오늘이 있기까지 그의 회화·설치·판화작품들을 발표하는 전시회가 사단법인 한국사회 문화연구원(회장 한완상) 주최로 오는 25일부터 9월3일까지 서울역앞 갤러리아트빔에서 열린다. 『통일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휴전선으로 떠난다』고 했던 하씨는 6박7일동안 폐허가 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태풍전망대등 민간인의 출입이 어려운 민통선지역내 12곳에서 각기 다른 주제의 퍼포먼스를 펼쳤다.그가 통일을 염원하며 펼친 퍼포먼스의 주제는 「DMZ는 살아 움직인다」 「당장통일 1」 「한계시점­통일 연기나르기」 「당장통일 2」 「무명계곡」 「철마는 달리고 싶다」 「궁극공간」 「우리의 소원은 통일1」 「잡초속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2」 「사과나무」 「그날이 오면」 등이다. 포탄과 총알 자국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철원군 노동당사에서 그는 해골을 껴안고 뒹굴기도 하고 최전선 철책앞에서 내일의 희망을 상징하는 사과나무를 심기도 했으며 연기가 피어 오르는 지게를 짊어 지고 북쪽을 향해 걷기도 했다.또한 송현리 통일전망대에서 가진 「DMZ는 살아 움직인다」는 퍼포먼스에서는 흰 석고가루를 허공에 뿌리고 온몸에 흰 천을 감은채 휴전선지역의 맑은 바람과 햇빛속에서 몸부림쳤다. 보통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제 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일 그의 행위예술은 그러나 통일을 바라는 뜨거운 열망을 담은 작가의 온몸작업이었다. 갤러리 아트빔에서 열릴 「통일염원­하용석 미술작품전」은 그의 이같은 작업들을 기록으로 보여주는 전시회가 된다.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 출신인 하씨는 지난 10여년간 그의 작업생활 내내 상업주의에휩쓸린 국내 화단에 도전해 온 작가.지난 91년 제4회 개인전에선 임대한 화랑 벽면에 그림하나 걸지 않은채 「미술의 죽음」전을 가져 오늘의 미술현실을 풍자했고 지난해에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화랑가인 청담동의 한 화랑에서 돼지와 인간이 동거하는 「돼지와 인간」전을 벌여 화단의 눈길을 모았다. 지난 93년엔 미국 뉴욕 미술계가 해외작가들을 뽑아 1년간 작업실을 제공하는 연수프로그램인 「P S I뮤지엄 국제스튜디오」에 한국 대표작가로 선발된 바도 있다.
  • 김 대통령 8·15 경축사/전문

    ◎광복반세기 올해 남북관계 새 장 열길/민족정기 회복위해 총독부 철거 마땅/지속적 개혁… 21세기엔 역사의 전면에 친애하는 국민여러분,북한동포와 해외동포 여러분,그리고 자리를 함께 하신 내외귀빈 여러분. 우리는 오늘 뜻깊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민족사에 새 지평을 열자는 굳건한 결의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지금 우리의 귓전에는 잃었던 국권을 되찾은 기쁨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던 반세기전 그날의 환호가 생생합니다. 우리의 가슴은 온갖 고난을 뚫고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반세기에 대한 깊은 감회로 가득 차 있습니다.다가오는 21세기를 우리 민족의 위대한 시대로 만들자는 굳은 다짐속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선열들의 축복과 7천만 겨레의 기대가 이 자리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 경하스러운 날을 맞아 나는 먼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애국선열들을 추모하며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오늘의 이 나라를 만들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묵묵히 땀흘려 일해 오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7천만 동포 여러분.우리 겨레에게 지난 50년은 가혹한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우리는 불굴의 의지로 이를 극복해 왔습니다. 우리는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이라는 엄청난 비운을 안은채 국가건설의 대장정에 나서야 했습니다.물려받은 빈곤과 전쟁의 폐허 위에서 생존마저 위협받아야 했던 「절대빈곤의 시대」를 헤쳐나와야 했습니다.극단적인 남북대치와 군사독재 아래 민주주의가 질식하던 「어둠의 시대」를 뚫고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식민통치의 사슬을 끊던 불같은 투혼과 강철같은 의지로 우리는 분연히 일어섰습니다.불과 한세대 남짓한 짧은 기간에 우리는 가장 가난한 나라로부터 이제는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뛰어올랐습니다. 민주의 씨앗이 싹트기조차 어렵던 그 메마른 땅위에 문민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웠습니다.민족의 자존을 크게 드높이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확고히 세웠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의 당당한 중심국가로 떠오르고 있습니다.자유와 풍요의 민주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던 선열들의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 민족의 위대한 저력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입니다. 내외동포 여러분.우리의 성취가 이처럼 빛나는 것임에도 우리의 광복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 있습니다.남북의 민족성원 모두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완성일 것입니다. 통일의 큰 길을 열기 위해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는 일입니다.평화없이는 통일된 조국은 물론 민족의 장래 또한 기약할수 없습니다. 나는 민족의 안전과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다음과 같은 기본원칙을 제시하는 바입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는 반드시 남북 당사자간에 협의·해결되어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킬 책임은 궁극적으로 남북한 당사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관련 국가들의 협조와 뒷받침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는 동북아 안정과 세계 평화에 크게 기여할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비롯한 모든 남북간의 합의사항은 존중되어야 합니다.평화의 첫걸음은 신뢰구축이며 신뢰는 서로 약속한 것들을 지키고 실천에 옮기는데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같은 기본원칙을 밝히면서 남과 북이 지금의 정전협정을 준수하는 가운데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함께 강구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광복 50주년이 되는 올해야말로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해가 되어야 마땅합니다.나는 북한이 조속히 안정되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나오고 남북간에도 신뢰가 증진되기를 기대합니다. 아울러 국민여러분께 당부 드립니다.평화통일은 우리 모두의 절실한 염원이지만 그것을 추진하는 것은 냉엄한 현실의 과제입니다.통일문제에 대해서는 환상적인 기대도,성급한 포기도 모두 금물입니다.꾸준한 인내심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그것이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7천만 동포 여러분.광복 반세기라는 역사의 장을 넘기는 오늘 우리의 눈앞에 새 하늘,새 땅이 열리고 있습니다.우리 민족에게 무한한 희망을 주는 21세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아시아·태평양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선조들의 꿈과 후손들의 소망이 담긴 민족의 꿈을 활짝 펼칠 때가 왔습니다.우리는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제 나는 7천만 겨레의 여망을 모아 민족이 나아갈 길을 역사앞에 엄숙히 선언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조국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는 「일류국가」로 만드는 것,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민족사적 소명입니다.21세기를 우리 민족의 위대한 꿈을 실현하는 세기로 만들어 나갑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나라의 각 분야가 선진화되고 세계화되어야 하겠습니다.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고루 확산되어야 하며 한차원 더 높은 발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파당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하는 정치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낡은 틀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와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새 정치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경제 또한 선진경제권에 진입해야합니다.경제의 규모가 더욱 커질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고도화되어야 하겠습니다.또한 성장의 과실이 국민 모두에게 고루 나누어지고 삶의 질을 존중하는 경제가 되어야 합니다. 정당한 부가 존경을 받고 분배의 정의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통일에 대비하는 경제역량 또한 구축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진정한 문화국가를 건설해야 하겠습니다.무엇보다 인간과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제도와 관행이 확고하게 정착되어야 하겠습니다.정신문화가 존중되고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 실현되는 투명한 사회가 되어야합니다.민족정기를 드높이고 자랑스런 민족문화를 꽃피워야 하겠습니다. 셋째,인류와 세계의 발전에 더욱 기여하는 민족이 됩시다. 우리는 지금 역동적인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우리는 평화와 번영의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만드는데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합니다.나아가,민족의 웅대한 꿈을 저 넓은 세계무대에서 펼쳐야 합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와 긴밀하게 협력하고당당하게 경쟁해 나가야 하겠습니다.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진정으로 기여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역사는 청산과 계승을 통한 창조의 과정입니다.우리는 오늘 옛 조선총독부를 철거하는 역사적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이 건물이 철거되어야만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경복궁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식민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우리의 민족정기를 회복하자는 온 국민의 뜻과 의지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옛 조선총독의 관저를 철거한 것도 같은 취지에서 입니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단순히 식민잔재의 외형적인 청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우리 모두의 의식속에 남아있는 그릇된 역사의 잔재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한·일 두나라 관계가 불행했던 과거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미래지향적으로 발전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과거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건전한 한일관계의 구축은 일본의 과거 침략행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한 건전한 반성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애국선열 등 1천4백여분을 새로 독립운동 유공자로 모셨습니다.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은 우리가 이어 받아 후대에 전해야 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나는 광복 전반세기와 후반세기를 잇는 대통령으로서 역사의 창조적 발전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거대한 문명사적 변혁 앞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지금 안으로는 내실을 다지면서 밖으로는 21세기를 향한 역사의 격랑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더이상 미움과 분열과 갈등으로 소모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미움을 사랑으로,분열을 통합으로,갈등을 조화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나는 오늘 대통령으로서 헌법에 따라 대대적인 특별사면과 복권을 단행하였습니다.국회의 동의절차를 거쳐 대규모의 일반사면도 실시할 계획입니다.이는 뜻깊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우리 국민 모두가 대화합을 이루어 새출발하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겠다는 충정에서 내린 결단입니다. 그러나 문민정부 출범이후에 이루어진 부정부패 관련자는 이번 조치에서 제외했습니다.이것은 부정부패는 반드시 척결한다는 정부의 단호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제 온 국민이 하나되어 세계로 미래로 힘차게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조국과 민족의 앞날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를 통해 위대한 국민만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우리 모두 다시 한번 한민족의 위대한 21세기를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을 세계화합시다.변화와 개혁을 힘차게 추진합시다.그리하여 세계의 중심에 우뚝서서 인류공영에 기여하는 「일류국가」의 꿈을 실현합시다. 50년후 광복 한 세기가 되는 그날,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진정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합시다.감사합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1

    ◎분단대결 구도속 민주주의 꽃피우다/동족상잔의 전쟁 발발… 전국토 초토화­1950년/5·16 쿠데타… 본격 개발독재시대 돌입­1961년/유신 선포… 장기집권의 「정치암흑기」로­1972년 95년 8월15일.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지 쉰번째 맞는 광복절이다.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민족상잔의 비극과 국토의 허리가 꺾이는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분단을 원죄 삼아 정치·사회등 각부문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최근들어서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으로 붕괴·폭발등 인재가 속출,광복 반세기사에 깊은 골이 패이게 했다.그러나 한민족은 이같은 역사의 도전을 끈질김과 슬기를 갖고 성공적으로 극복,전쟁의 폐허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눈부신 꽃봉오리를 피워냈다.광복 및 분단 반세기동안 빚어진 영욕의 역사를 연도별로 간단히 정리해본다. ▷1945년◁ 8월15일 한민족은 36년간의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다.그러나 얼마뒤 9월2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 발표돼 분단의 씨앗이 심어졌다.김일성은 9월19일 원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이 가운데 10월25일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을 중심으로 2백여 정당대표가 회합해 조선독립 촉성중앙협의회를 발족시켰다.김구등 임정요인들은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뒤늦게 환국했다.연합국은 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 신탁통치를 결정,12월31일 반탁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1946년◁ 조선공산당은 1월2일 입장을 급선회,신탁통치 지지에 나섰다.5월23일에는 군정장관의 허락없이 38선을 무단 월경하는 것이 금지돼 분단이 사실화됐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6월3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했으며 소련은 7월2일 서울영사관을 철수했다.대구에서 쌀배급요구를 내세운 10·1폭동이 일어나 3천7백명이 체포돼고 16명이 숨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은 남한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김구등 한독당 대표들은 이에 반발해 4월19일 38선을 넘어 김일성과 남북연석회의를 갖고 통일방안을 논의했다.또한 제주도에서 4월3일 남한단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그러나 결국 5월10일 유엔 한국위원회의 감시 아래 남한단독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총선 이후 첫 소집된 국회는 7월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결정했으며 원내 선거로 초대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했다. ▷1949년◁ 5월20일 남로당 국회프락치사건이 일어나 국회의원들이 체포됐다.미국은 같은날 미군철수를 발표했으며 6월29일 철수를 완료했다.이에 앞서 6월26일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이 안두희에 의해 피살,국민의 깊은 슬픔을 자아냈다. ▷1950년◁ 미 애치슨 국무장관은 1월12일 미방위선에서 한국이 제외된다고 말했다.반면 1월26일에는 외침시 미군의 개입을 보장하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됐다.마침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여간 전국토가 전화에 휘말려 폐허화됐다.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 함락됐으며 같은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됐다.미국은 6월27일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 안보리에 연합군 결성을 제안,7월7일 안보리에서 유엔군 최고사령부 설치를 채택됐다.부산까지 계속 밀리던유엔군은 9월15일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9월26일 서울을 수복한데 이어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에 들어갔다. ▷1951년◁ 중국군은 1월1일 6개군단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고 정부는 다시 1월4일 부산으로 후퇴했다.이 가운데 공비토벌을 이유로 거창양민 6백63명을 국군이 학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1953년◁ 이승만은 미측의 조기 휴전 추진에 반발해 6월18일 반공포로 2만7천여명을 석방하는등 미측에 압력을 가했다.그러나 7월27일 유엔과 북한·중국이 당사자로 서명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조인됐다.북한에서는 8월7일 박헌영등 남로당 계열을 간첩혐의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1960년◁ 전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을 간신히 수습하고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4대 대통령에 이승만대통령이 당선됐다.그러나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져 거센 항의시위가 빚어졌다.4월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렬군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됐다.4월19일 서울에서 2만명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도심시위를 벌여 4·19혁명의 불길이 당겨졌다.4월26일 이승만대통령은 마침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이에 따라 4월28일 과도내각이 구성됐으며 이승만은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소장의 주도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전두환대위가 이끄는 육사생도들은 18일 쿠테타지지 시위를 벌였다.박정희는 20일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취임했다.이어 용공분자와 깡패 6천2백여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7월27일 미측은 한국군사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1962년◁ 한일양국은 3월12일 외무장관 회담을 개최했다.또 3월19일 최고회의는 63년 민정이양을 발표했으며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이에 따라 윤보선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하자 박의장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했다.또 6월10일에는 10환을 1원으로 평가절하하는 화폐개혁이 단행됐다.10월15일에는 한미행정 협정실무자회담이 학생들의 반대속에 18개월만에 재개됐으며 11월12일 김종필은 일본 오오히라와의 비밀메모를 작성했다. ▷1963년◁ 1월18일 민주공화당이 발기선언을 가졌으며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발표했다.25일 김종필은 순회대사 자격으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올랐다.11월26일 실시된 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압승을 거두고 이어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64년◁ 4월1일 국회에서 김종필과 오히라간의 비밀메모가 공개되면서 학생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는 6월3일 각급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1965년◁ 국회는 1월26일 베트남에 대한 국군공병단의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다.또 2월20일에는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군은 한일조약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날로 거세지자 4월19일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정부는 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조인했다. ▷1966년◁ 6월18일 장창선이 세계아마레슬링 플라이급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1주일 뒤인 6월25일에는 김기수가 국내 처음으로 주니어미들급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1967년◁ 3월22일 북한 중앙통신부사장 이수근이 위장 귀순했다.5월3일 제6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돼 박정희후보가 당선됐다.7월8일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관련자1백94명 가운데 1백4명을 구속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31명이 청와대기습을 위해 서울에 잡입했다.1월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북됐다.4월 파라과이와의 이민협정에 체결됨으로써 남미 이민의 막이 올랐다. ▷1969년◁ 2월5일 서울시 중학교 무시험 전형이 실시됐다.3월22일에는 3·1고가도로가 개통됐다.3월28일 김수환대주교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추기경에 선임됐다.10월17일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1970년◁ 3월1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로에서 정인숙이 피살,배후를 놓고 전국이 들끓었다.4월8일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했다.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자살해 노동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했다.
  • 한국­격동의 반세기 발자취/1945∼95:2

    ◎전화폐허서 교역 13위 경제강국 건설/부·마사태­10·26사건… 박정권 18년 마감­1979년/「민추협」 발족… 민주화운동 본격 점화­1948년/금융실명제·재산공개 등 대대적 개혁조치­1993년 ▷1971년◁ 2월17일 남한의 한필성,북한의 필화 남매가 국제통화로 서로 생사를 확인했다.4월27일 제7대 대통령선거,5월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7월28일 서울형사지법 판사 39명이 정부의 압력에 반발해 집단으로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이 일어났다.8월23일에는 실미도 특수부대원이 서울로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10월1일 전국에서 장발족 단속이 시작됐다.12월25일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8월3일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는 이른바 「8·3 조치」가 발표돼 기업들이 자금숨통을 트게 됐다.10월17일 유신이 선포,박정희의 장기집권 계획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씨가 동경에서 괴한 5명에게 납치돼 강제송환됐다.10월6일 이화여대생들은 쌍쌍파티 중단을 결의했다.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생산량 25% 감축을 결정함으로써 석유파동이 발생,국내경제가 심한 몸살을 앓았다. ▷1974년◁ 4월17일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이 일어나 금융시장이 크게 교란됐다.7월13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이철 유인태 김지하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박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육영수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졌다.같은 날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19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실시돼 가결됐다.3월17일 서울 면목동 YH무역 여공 2백여명이 신민당사에서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1976년◁ 8월1일 양정모가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서 해방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10월24일 박동선이 로비활동을 펼친 것이 미국에서 문제화됐다. ▷1977년◁ 8월20일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시험송전을 시작했다.9월15일 고상돈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11월11일 이리역에서 한국화약의 화약수송열차가 폭발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78년◁ 1월14일 여배우 최은희가 홍콩에서 납북됐다.4월24일 전남 함평에서 고구마 수매부정에 항의하는 농민대회가 열렸다.6월30일 현대아파트 부정분양사건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79년◁ 10월7일 박정희를 비난하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파리에서 실종됐다.10월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10월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이 발동됐다(부마사태).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부 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12월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12·12사태). ▷1980년◁ 4월21일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명이 어용노조에 반발해 광산촌을 점거하고 경찰과 충돌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났다.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5월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전두환)가 신설됐으며 8월27일 전두환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10월13일 삼청교육 실시가 발표됐다. ▷1981년◁ 1월13일 대학졸업 정원제가 도입됐다.15일 민주정의당이 창당,전두환이 초대 총재로 선출됐으며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23일 대법원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관련 피고인 12명의 형량을 확정했으나 김대중은 나중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전두환은 2월25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서 제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982년◁ 3월18일 고신대생 문부식등이 부산 미문화원을 방화했다.3월27일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했다.5월7일 대검은 대화산업회장 이철희·장영자부부를 외국환 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18일에는 이 사건과 관련,대통령 처삼촌인 이규광등이 구속됐다. ▷1983년◁ 1월11일 나카소네 일본총리가 방한,한일정상회담을 갖고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3월17일 일본에서 활약중이던 프로기사 조치훈이 기성을 획득,일본 바둑계의 주요 타이틀을 석권했다.5월18일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민주화와 정치활동 피규제자 해금을 주장하며,자택에서 단식에 들어갔다.6월12일 청소년축구대표팀이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9월1일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2백69명 전원이 사망했다.10월9일에는 버마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이 발생,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등 17명이 사망했다.11월17일 동아건설은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 규모인 리비아 1단계 대수로 공사를 32억9천만 달러에 수주했다. ▷1984년◁ 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는 민주화 추진협의회가 발족됐다.22일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이 완전개통됐다.9월6일 전대통령은 일본을 공식방문했다.일본의 히로히토 왕은 만찬에서 과거의 한일관계에 유감을 표명했다.9월 북한 적십자가 보내준 수재구호물자를 남한측이 인수했다.미국방송이 의정부에 핵배낭 특수부대가 배치돼 있다고 보도했다. ▷1985년◁ 5월23일 대학생 73명이 미 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사과 요구 및 반미구호를 외쳐 충격을 주었다.9월20일 남북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각 1백51명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했다. ▷1986년◁4월들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분신등 시위가 본격화됐다.7월2일 부천에서 시위중 체포된 여대생 권인숙양을 경찰관이 성고문한 사건이 처음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다가 고문사했다.4월8일 김대중·김영삼씨는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한 신당창당을 선언했다.13일 전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개헌논의 유보를 발표하고 직선제 요구를 거부했다.24일에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용팔이 사건이 발생했다.6월10일 민정당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대표를 차기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및 호헌철폐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29일 노대표가 직선제개헌 수용을 밝혔다.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1988년◁ 1월14일 문교부는 새로운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을 확정 발표했다.2월25일 노태우대통령이 취임했다.4월26일 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그 결과 처음으로 여소야대의 현상이 나타났다.9월17일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개막돼 10월2일까지 계속됐다.11월부터는 5공비리 청문회가 시작됐다.11월23일 전두환전대통령은 백담사로 은둔했다. ▷1989년◁ 3월25일 문익환목사가 방북,김일성과 면담했다.6월30일에는 외국어대 임수경양이 북한에 들어가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석했다.9월11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1990∼1년◁ 90년2월9일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합당,민자당이 창당됐다.10월1일 한소양국이 수교했다.91년2월 수서지구 택지특별분양 사건이 발생,이원배등 의원5명과 청와대비서관,정태수 한보그룹 회장등 8명이 구속됐다.12월18일 노대통령은 한반도 핵부재를 선언했으며 같은달 31일 남북한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가서명했다. ▷1992년◁ 3월24일 14대 총선이 실시돼 2번째 여소야대가 실현됐다.정부는 6월30일로 예정된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95년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8월22일 중국과 수교,주변 4강과 모두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2월19일 14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자당의 김영삼후보가 당선됐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은 2월25일 취임후 공직자 재산공개,군 하나회 숙정,금융실명제 실시등 굵직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이회창원장이 이끄는 감사원은 6월 율곡사업감사,7월 평화의 댐 감사등 과거비리를 사정했다. ▷1994년◁ 정부의 외교가 북한핵문제 해결에 집중됐다.그 결과 10월21일 제네바에서 미북기본합의서가 타결됐다.국내적으로는 구포 열차전복사건,위도 여객선 침몰사건,목포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건,아현동 가스폭발사건,성수대교 붕괴등 대형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1995년◁ 6월27일 역사적인 4대 지방자치선거가 일제히 실시된 결과 수도 서울의 시장에 민주당의 조순후보가 당선되는등 시도지사에 대거 야당 후보들이 당선됐다.4월28일 대구가스폭발에 이어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등 대형사고가 계속됐다.
  • 21세기 아·태시대 향한 협력­평화·번영의 동반자

    ◎김대통령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설­전문 위대한 미국국민을 대표하는 이 숭고한 민주주의의 전당에서 연설하는 영예를 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나는 고향을 찾아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스물다섯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된 이래 40년 가까운 의정생활을 통해 의회는 어느 덧 나의 「고향」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또한 나의 고난에 찬 기나긴 민주화투쟁을 한결같이 성원해주신 의원 여러분에게 평소 깊은 감사와 함께 동지의식을 지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오직 피와 땀과 눈물로 오늘의 한국을 이루기까지 언제나 든든한 벗이 되어 온 미국 국민에게 뜨거운 우정을 느끼고 있습니다.나아가 온 인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새로운 세기를 향해 우리 두 나라의 두터운 유대관계를 더욱 성숙시켜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빈국서 부국으로 1945년 2차대전의 종전은 우리 민족에게 해방과 독립이라는 축복을 안겨주었습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우리는 민족분단이라는 역사적 비운을 다시 맞게 되었으며 5년후 동족상잔이라는 참극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인은 식민통치의 잔재와 빈곤의 유산,그리고 전쟁의 폐허와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 나라를 세워야 했습니다.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번영을 향한 의지,단지 그것만으로 지난 40여년을 줄기차게 달려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최빈국으로 출발했던 한국은 이제 경제규모에 있어 세계 열한번째의 나라로 뛰어올랐습니다.그러나 우리 국민이 이룩한 것중에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운 것입니다.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두텁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여기에서도,한국 국민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향한 끈질긴 투쟁끝에 마침내 문민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2년여동안 과감한 「변화와 개혁」을 통해 군사독재시대의 적폐를 청산하고 참다운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또한 지난해부터 우리는 「세계화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지구공동체의 번영에 크게 기여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없는 맨주먹으로 일어나 짧은 기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모두 이룩하고 이제 세계로,미래로 나아가는 한국의 이야기입니다. ○참전용사에 감사 한국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평화가 가져온 결실입니다.한반도의 평화가 지켜지지 않았다면 한국 국민은 오늘의 자유도,번영도 결코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평화는 대가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내일은 우리 모두가 이 의사당 맞은편 포토맥강변에서 한국전의 영웅들을 다시 만나는 뜻깊은 날입니다.6·25전쟁의 휴전 42주년이 되는 이날을 맞아 제막될 한국전 참전기념비는 우리에게 언제나 평화의 소중함을 웅변해줄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을 대신하여 한국의 전선에서 고귀한 젊음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고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당시 약관 19세의 나이로 참전하신 찰스 랑겔의원을 비롯한 스물여덟분의 의원들께도 경의를표합니다. 아울러 지난 40여년간 한국의 전선을 지켜온 모든 미군장병과 그 가족에게 한국 국민의 사의를 전합니다. 반세기전까지만 해도 태평양 너머 멀리 느껴졌던 우리 두 나라는 이제 가장 가까운 벗이 되었습니다.일방적인 도움을 주고 받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도움을 주고 받으며 자유와 번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성숙한 동반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가 함께 키워온 평화의 유대는 값진 열매를 맺었습니다.한국의 성공은 한·미 양국 국민의 공동승리입니다. 아시아·태평양시대의 막은 이미 올랐습니다.한·미 두 나라는 더욱 강력한 결속으로 본격적인 아·태시대를 열어나가야 합니다.아·태지역이 역동적 성장을 거듭하여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미국이 장기간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아·태 미 역할 긴요 아·태시대가 활짝 꽃피기 위해서는 미국이 앞으로도 이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역할을 계속해야 합니다.특히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한 한반도의 평화보장은 이 지역 전체의 안정에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아직도 1백50만의 중무장한 병력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지대입니다.주한미군은 지난 40여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왔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물론 아·태지역 전체의 안정을 위해 주한미군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싸고 고조되었던 긴장은 한반도가 얼마나 불안정한 지역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핵문제와 관련하여 미·북간에 이뤄진 콸라룸푸르합의를 지지하는 바입니다.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간의 공동보조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분명히 풀릴 때까지 강력하게 유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미·북 제네바합의가 충실히 이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그 실질적 당사자인 남북간의 대화와 협력에 의해서만 정착될 수 있습니다.대화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나는 클린턴대통령과 미국 의회가 그동안 남북대화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강조해온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광복 50주년이자 분단 50주년인 올해를 남북관계에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인 해로 만들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을 통해 점진적으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나감으로써 궁극적으로 1민족 1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한국의 통일정책입니다.이에는 북한의 안정이 필수적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남과 북이 함께 번영하는 「민족공동발전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북한 경수로 건설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 한국형 원자로를 제공하고 그 중심적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입니다.같은 취지에서 남북경제협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우리는 또 순수한 동포애적 차원에서 북한의 어려운 식량사정을 덜어주기 위해 북한에 쌀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통일로 가는 길이 비록 멀고 험하더라도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쉼없이 전진해갈 것입니다.한반도가 다시 하나가 되는 그날,동북아에는 진정한 평화와 번영이 올 것입니다.분단된 한국보다통일된 한국이 인류와 세계에 더욱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균형통상 급선무 아시아·태평양지역 전체의 번영을 위해서는 이 지역에 자유무역과 개방주의가 뿌리내리게 해야 합니다.2차대전후 미국의 지도력 아래 자유세계에서 이뤄져온 자유무역은 빈곤과 공산주의를 퇴치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한국 역시 자유무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나는 아·태지역의 모든 나라가 자유무역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클린턴대통령과 더불어 APEC의 발전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한국정부는 또한 WTO 규범에 따른 다자간 협력도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미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며 한국도 이제 미국의 여섯번째 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지난해 양국간 교역은 4백억달러를 넘어섰고 금년에는 5백억달러 수준에 달할 것입니다. 한·미간의 무역은 대체로 균형을 이루어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한국의 대미 적자폭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세계화정책을 통해 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의 개방과 자율화를 적극 추진해왔습니다. 우리는 나아가 OECD 가입을 통하여 선진국 수준의 개방화시책을 본격적으로 펴나갈 것입니다.한국은 개발도상국으로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문을 열어왔습니다.앞으로도 한국은 지속적인 자율과 개방정책을 통해 아·태지역의 번영을 촉진하는 미국의 강력한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국제적 책임 확대 우리 앞에는 21세기의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미국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한국도 국제사회에서의 역할과 책임을 확대해나갈 것입니다.우리의 발전경험을 살려 개도국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범세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도 적극 동참할 계획입니다. 한국 국민은 한·미양국이 「21세기 아·태시대를 향한 협력」아래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께 전진시켜나가려는 희망에 차 있습니다.통일한국을 이루어 미국국민과 함께 「평화와 번영의 동반자」로서 세계와 인류에 더욱 크게 기여하자는 의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한국 국민의 메시지입니다.그것은 이 신대륙에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미국의 정신에도 합치할 것입니다. 우리,어깨를 나란히 하여 앞으로 나아갑시다.그리하여 인류에게 무한한 희망과 가능성을 안겨줄 새로운 세기,새로운 세계를 함께 열어 나갑시다.모든 것은 유한하나 평화와 번영을 향한 인류의 열망은 영원할 것입니다.
  • 「삼풍」 폐허속서 피어난 인간애/김호웅 연변대학 교수(발언대)

    교대역을 지나던 걸음에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을 찾아 보았다. 두달전 서울에 처음 들어설 때 강남에 거대한 산맥처럼 늘어선 고층아파트군과 한강 위에 볼썽사납게 끊어져 있는 성수대교를 보면서 야속하고 애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었는데 오늘 또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을 보고 있노라니 그 어떤 배반감마저 느낀다.세상사람들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했던 「한강의 기적」이란 저 동해의 신기루처럼 허황한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모국 국민은 20∼30년이란 짧은 시일에 서구 선진국들이 백여년의 시일을 들여 이룩할 수 있었던 눈부신 번영과 발전을 가져왔다.선진국의 뒤를 쫓아 빨리빨리도 뛰어온 20∼30년이다.정부가 「빨리!」하고 소리를 치면 온 국민이 「빨리!」하고 화답을 하면서 낮에도 뛰고 밤에도 뛰었다.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빨리빨리 앞을 향해 뛰기만 하다 보니 옷고름도 풀어졌고 신짝도 벗겨졌으며 체신없이 바지가랭이가 찢겨져 엉덩이가 드러났다.실로 빨리 먹은 콩밥 뒤탈이 생기기 마련이요,욕심스럽게 뽑아올린곡식은 죽기 마련이니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이상할 것 없다고 하겠다. 「빨리빨리병」이 겉발림이나 속임수를 유발하고 치명적인 허점을,후환을 남기게 됨은 더 말할 나위없다.문제는 삼풍백화점의 설계·시공 및 경영과정에 영리만을 따지는 탐욕스러운 자본의 손장난이 많았고 금전에 눈이 어두운 공직자들의 수치스러운 눈가림수작이 많았다는 점이다.사고 직전만 하더라도 조금만 인간성과 정상적인 의식을 가진 경영자들였다면 무려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대참사는 피면했을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이번 대참사는 무절제한 자본의 탐욕이 빚어낸 인재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살풍경스러운 폐허속에서도 따뜻한 인간애는 숨쉬고 있고 인간 승리의 기적은 창조되고 있었다는 점이다.사상자들에 대한 부모형제,아니 온 국민의 관심,의무봉사자들의 뜨거운 인간애,구조대원들의 밤에 낮을 잇는 헌신적인 구조,특히 생존자들의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끈질긴 생명력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각일각 엮어냈다. 요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나 원 창피해서…」,「참 말이 아니지요…」하고 고개를 돌리며 괴로워하는 모국 친구들이 많다.실로 이번 사고는 단순히 백화점 하나가 주저앉은 사고가 아니라 나라와 국민의 체면,대외적인 공신력이 무너져내린 사고이다.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국민정신의 붕괴이니 이제 우리는 어둠과 죽음을 이겨내고 광명과 삶을 되찾은 최명석군,유지환·박승현양처럼 폐허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슬기와 총명,구슬땀으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창조해야 할 줄 안다.적어도 삼풍백화점 그 자리에 천하 만방에 자랑할 수 있는 건물이 보란듯이 신축되기를 비는 마음이다.
  • 독 프랑크푸르트 현대 미술관(세계의 명작/걸작건축 감상:20)

    ◎디자인된 “3차원적 공간”/전시관 내부는 절묘한 「여백의 미」 연출/건물·미술품이 완벽한 하나의 작품으로/거장들의 개인전시 공간은 각각 다른 형태로 프랑크푸르트 현대 미술관 20세기초 새로운 건축 형태를 추구하는 대전환의 바람은 독일을 중심으로 세차게 일어났다.2차 대전 후 어려운 경제적 여건과 시간적 제약 조건 속에서조차도 독일의 폐허되었던 도시들은 근대 건축의 철학을 깊이 담고 있는 건축물들로 복구되어,지금은 살아있는 건축 박물관역할을 하고 있다.이러한 근대 건축운동의 신기원을 열어간 독일인들은 현재까지도 세계 유명건축가들을 초대하는 건축전과 공모전을 수시로 열어 간과할 수 없는 현대 유명 건축작품들을 지속적으로 건축하고 있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건축기행의 명소가 되고 있다. 독일인들의 건축에 대한 높은 예술적 인식은 19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각 도시들의 미술관 신축 및 증축계획으로 또다시 세계 건축인들의 관심을 모았다.이중에서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건축된 10여개에 달하는 소규모 미술관과 박물관은 제각기 독특한 소장품과 함께 창의적인 건축형태를 지니고 있어 전시관 박람도시를 연상케한다. ○“하나의 예술품” 승화 여기서 소개하는 프랑크푸르트 현대 미술관은 입면 형태와 공간적 조형성을 통하여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으로 승화되어 강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미술관 건축의 새로운 시도를 제창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이 미술관은 프랑크푸르트 시내 중심지역의 보행자전용 상가 지역인 자일,이 도시의 상징인 파올 교회,로마 지배 당시부터 시청사로 사용해온 뢰머 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이렇게 시민들의 접근이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점은 현대미술이 일상 생활과 매우 친근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게 한다.원래는 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된 곳에 식당이 있던 자리로 시에서 처음에 음악 박물관을 계획하였던 곳이었다.그 당시 현대미술관은 지금의 건축 박물관 자리에 함께 할 계획이었으나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기에 부적합한 대지 조건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위치에 독립된 미술관이 건립되기까지는 프랑크푸르트시의 12년에 걸친 노력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오랜 기간의 계획 끝에 건축된 현대 미술관은 종래의 틀에 박힌 설계개념에서 탈피하여 건축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미술관으로 탄생되었다.외관은 브라우 바흐 거리,베르리너 거리,돔 거리가 만드는 뾰족한 삼각형의 대지 형태를 그대로 쌓아 올리고있어 「케이크조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삼거리에 면한 세방향의 외관은 서로 다르게 처리되고 장식이 강조된 포스트모던 양식을 추구하고 있다.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건축물이기에 형태창출의 제약을 받고 있는 외적조건은 금속조각품과 건축을 접목시켜 건축의 조형성을 통해 「현대」미술관임을 외부에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이러한 건축 형태적 제스처는 현대의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사회를 현대 미술이 복합적인 언어로 구성하여 표출해 내고 있듯이 단순하지 않은 「현대성」을 지닌 미술품들을 수용하고 있는 건축물임을 자인하며 표현의 절제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공간 조형물도 작품 그런가하면 전시관으로서는 실험적인 내부공간을 창출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인들의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일반적으로 미술관은 「전시공간을 제공하는 장소」로서 전시된 미술품이 가장 돋보일 수 있도록 배경 공간으로 설계된다.그러나 프랑크푸르트 미술관은 이러한 종전의 미술관 건축의 기본개념에 도전하고 있다.건축물 자체가 거닐 수 있는 조형 예술로 작품화되어 공간 속에 미술품들을 전시함과 동시에 디자인된 3차원적 공간도 함께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대칭적이면서도 관람자의 흐름을 강하게 유도하고 있는 내부공간은 천장·벽·바닥·계단 등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조각품으로 승화되어 공간 조형물로 관람되지 않을 수 없도록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특히 중앙홀은 상층이 개방되어 단지 동선의 연결을 위한 기능 뿐만 아니라 관람자들의 움직임과 함께 다각도에서 조망될 수 있게 하여 공간조형물로 작품화되고 있다.원래 전시공간으로 계획되어 있지 않았던 중앙홀에 전시가 계획되었을 때 건축가와 전시책임자가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순수 건축공간 자체에 대해 설계자는 강한 자부심을 표명하고 있다. 동시에 전시관 내부는 전시품들의 적절한 연결과 적절한 공백이 절묘한 공간 기교로 연출되고 있어 그 속에서는 공간 조형의 빈틈없는 감상과 함께 숨가쁜 관람의 무드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요셉 보이스·앤디 와홀·백남준 등등 세계의 현대미술 거장들의 개인 전시공간이 제각기 다른 형태로 제공되고 있는 점은 이 미술관의 건축적 가치를 극에 달하게 한다.현대의 조각품은 전통조각품과는 달리 지지하고 있는 받침대를 넘어서고 있고,회화는 고립시키고 있는 액자를 불필요하게 하고,환경 설치물은 그것을 담고 있는 공간과 특별한 관계를 요구한다.이러한 현대미술의 특성들을 살려 개개인의 작품특성에 따라 전시실의 크기나 높이가 다르고 전시 방법이나 조명이 작품마다 다르게 처리되고 있다.이것은 마치 건축 공간과 더불어 작품이 완성되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도 들게할 정도다.따라서 이곳에서는 건축이 전시품의 배경이 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전시품들과 대화를 가지고 상호 더욱돋보이게 강화해 주는 예술적 건축 공간만이 존재한다. ○건축가 홀라인 설계 제공된 건축공간이 없이는 전시된 미술품도,예술가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시품과 건축이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미술관이 창작되기까지는 건축가의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배경이 되고 있다.1985년 국제 현상공모로 당선된 이 건축작품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건축가 한스 홀라인에 의해 설계되었다.그는 순수예술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이곳에 상설 전시될 작가들과 설계이전부터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오랜 기간을 두고 작품전시에 대한 논의를 거친 후에야 건축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듯 설계진행 과정에서부터 전시될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 건축과 미술품이 완벽한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된 프랑크푸르트 현대 미술관을 대하면 창조된 건축공간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한편으로는 문화적 용도이든,주거용도이든,용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수용위주로 졸속이계획되고 있는 우리의 경박스런 건축문화에 견주어 보면 이 미술관이 지니는 건축공간 자체의 숭고한 질적 가치에 대해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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