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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위대가 할킨 연세대 피해 현장

    ◎온통 불탄흔적… 유리창 박살/종합·과학관 완전 폐허화/피묻은 돌·의자 어지러이 흩어져 난장판/곳곳 “결사항전” 대자보… 과학기기는 무사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연세대 과학관과 종합관은 태풍이 지나간 뒤처럼 모든 것이 뒤엉켜 있었다. 20일 상오 10시30분쯤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과학관 건물 옥상은 폐허 그 자체였다.책상과 의자,수십개의 소화기가 바닥에 쌓여 있었고 경찰에 던지다 남은 돌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부상을 입은 학생들도 적지 않은 듯,피 묻은 돌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헬기에서 뿌린 최루액으로 바닥은 온통 붉은색 투성이다. 2층 세미나실 책상 위에는 쵸콜릿 2개와 숟가락 10개가 담긴 플라스틱 팥죽 그릇이 채 비워지지 않은채 남아 있었다.10여명이 하루치 식량으로 할당받은 음식을 먹다가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갑작스레 달아난 듯 했다. 강의실에서 끌어온 책상과 의자가 가득한 계단은 지나가기가 버거울 정도로 좁다.벽에는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와 함께 「결사항전」을 독려하는 대자보가 어지러이 나붙어 있다.시시각각 경찰의 진입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감 속에 서로를 격려하려 한 듯 편지도 많이 붙어있었다. 질소실험실,동위원소실험실,방사선실험실 등이 있는 지하1층과 지상6층은 학생들도 위험을 느껴 접근하지 않은 듯 깨끗했다.화학실험실을 점검하러 온 조교는 『냉장고에 있는 음식만 없어졌고 모든것이 제대로 있는것 같다』며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이 전개됐던 종합관. 현관에는 학생들이 바리케이드로 설치했다가 불을 지른 책·걸상이 검은 연기를 계속 내뿜고 있다.진압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옥상에서 던진 철제 의자와 벽돌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1층 로비에는 커피 자판기와 공중전화기,현금 자동지급기들이 시꺼멓게 불타 있었다.옆 강의실에는 학생들의 가방과 옷가지들이 한데 모아져 있어 경찰 진입 때의 어수선함과 학생들의 공포를 보여주는 듯 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서자 매캐한 연기와 후끈한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히고 코를 자극했다.2층 석사학위 논문의 서고 및 열람실은 난장판이 돼 있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뒤의 과학관과 종합관에는 자신들 스스로와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안긴 과격한 학생운동의 상흔만이 가득했다. ◎시민들도 등돌렸다/도주학생 도움청했으나 외면/경찰 삽시간에 대량검거 “일조“ 20일 상오 연세대 과학관에서 기습적으로 탈출했던 학생들은 주변의 가정집으로 숨어 들었으나 시민들이 이들을 외면,절반에 가까운 1천여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학생들은 경찰이 종합관을 진압한 직후 「한총련」 집행부의 지휘 아래 쇠파이프를 든 「사수대」를 앞세우고 지하 1층에 뚫린 틈새로 우루루 몰려 나갔다.후문쪽에서 지키던 경찰 30여명은 「사수대」의 쇠파이프에 곧바로 맥없이 무너졌고 학생들은 연세대 담길을 따라 주택가로 진입,연희침례교회쪽으로 달아났다. 경찰은 곧 병력을 대거 동원,연희초등학교를 넘어가는 학생 수십명을 붙잡은 것을 시작으로 골목길로 흩어지는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후 주택가 골목길에 몸을 숨기거나 민가에 숨어 있던 학생들도 속속 붙잡혔다. 이들이 삽시간에대량 검거된 데는 학생들에 대한 시민들의 냉담한 반응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학생들을 격려하고 박수를 쳐주던 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 한총련 발본은 이제부터(사설)

    한총련 학생들의 연세대 폭력시위사태가 20일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9일만에 일단락됐다.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폐허의 연세대교정,그보다 쇠파이프에 찢기고 화염병에 불타버린 국민의 마음속 상처는 어떻게 추스릴 것인가.시위는 끝났으나 한총련문제는 바로 지금부터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미 그 불법성과 이적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한총련을 발본색원하는 과제가 우리의 발등에 떨어져 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총련문제는 차제에 끝장을 보아야 한다.정부는 단순가담자나 반성의 여지가 있는 시위학생엔 최대한 관용을 베풀기로 했으나 그 문제와 한총련을 제거하는 일은 별개의 것이다. 9일 진압작전으로 2천5백여 시위대가 경찰에 연행됐다고 하나 한총련 핵심간부·시위주동자·극렬시위자 등 주요인물은 대부분 사전에 빠져나가 검거되지 않았다고 한다.경찰이 시위진압에 여념이 없던 상황이어서 그럴 수 있는 일이다.그러나 한총련의 윤곽이 밝혀진 이상 경찰이 노력만 하면 못 잡아낼 이유가 없다고 본다.전수사력을 동원해서 빠른 시일 안에 하나도 빠짐없이 검거해 한총련의 전모를 공개하고 법에 따라 응징해야 할 것이다. 또 보도대로라면 수사당국은 한총련배후에 「지하혁명조직」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듣기에만도 끔직한 「지하조직」운운하는 말이 어떻게 이 시대에 존재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배후를 척결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서도 이번 시위의 규모나 조직성으로 봐 한총련의 자금출처에 의혹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수천여명의 학생이 9일동안이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쇠파이프·화염병 등 장비도 엄청난 규모였다.기억원은 족히 들었음직한 이 돈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 수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한총련문제는 단순한 학생시위차원이 아니라 분명한 사상적 정치투쟁이었음을 수사당국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연대의 피해(외언내언)

    며칠째 이어진 한총련의 「통일시위」에 가장 큰 피해를 입고있는 것은 연세대다.재산 피해액만도 십억원대를 넘어설 것이라는 짐작이 나오고 있다. 화면에 비친 것만 보아도 시가전 뒤끝의 전장같다.교문은 형체도 없고 강의실의 책걸상은 모조리 부서지고 타버렸다.바리케이드가 되거나 저지선 구축으로 또는 몽둥이가 되기 위해 뜯겨나갔다.그뿐인가,실험실의 도구들이 왕창왕창 깨지고 망가지고 못쓰게 되었다. 이것들을 장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앞으로 이를 복구하려면 얼마나 숱한 어려움을 또 겪어야 하는가.「연세」와 관계없는 사람도 열통이 터질듯한 심경이다. 최근 현직에서 물러난 송자 전연세대 총장은 별명이 『통장 총장』이었다.학교 발전기금 마련을 위해 통장을 많이 만들었다는 뜻이다.너무 열심히 뛰는 그를 따라잡기에 힘이 부치거나 그 열정에 감동한 동료 사학 총장들이 붙여준 별명이다.재원이 있어야 학교를 발전시킨다는 일념으로 갖은 신고를 다한 것이다.그런 대학측이 이번 사태로 얼마나 많은 좌절감을 맛볼것인가. 그러나 「연세」가 당면한 손실은 돈으로 환산할수 없는 것에 훨씬 더 큰 부분이 있다.당장 가을학기를 앞두고 폐허처럼 되어버린 교정과 강의실때문에 빚어질 차질,물리적으로 안보이는 연구결과들의 소실,그리고 무법과 폭력의 뒤끝이 지닌 황량함과 동료 학생들의 난폭한 작태가 안겨준 캠퍼스 분위기의 파괴성은 작은 것이 아니다. 그 부당함에 승복하기 힘든 분노와 허탈이 한동안 학생들의 학업정진을 방해할지 모른다.허용하지 않은 집회로 이런 사태를 빚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경제적 손실만으로 가늠할수 없는 이런 피해를 한총련 소속원들은 어떻게 할것인지 동학들과 학부모·학교측에 대답해야 한다.또한 연세대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사학의 대표격이다.국민 모두의 정신적 자산인 셈이다.그러므로 시민 모두도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 폭력시위 엿새째… 「무법 천지」 현장르포

    ◎화염병·최루탄 잔해­불에 탄 책상/연대,전쟁 치른듯 폐허로/곳곳에 경찰저지용 기름통 즐비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화염병과 최루탄 잔해.널려진 돌멩이,불에 타다 만 책상과 걸상…. 시위의 현장,연세대는 더이상 「학문의 전당」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17일로 과격시위 엿새째를 맞으면서 흉물스런 모습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상오 11시 정문을 지나자 농구대와 책·걸상이 한데 뒤엉켜 불에 타다 말고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학생들이 설치한 1차 바리케이드로 경찰이 진입하자 불을 지른 것. 이어 백양로에 들어서자 다연발 최루탄의 탄피와 돌조각,깨진 유리병 등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부리에 채였다.학생들이 행사 기간동안 내걸었던 플래카드가 찢겨진 채 나무에 걸려 바람에 휘날렸다. 도로는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 써 희끗희끗하게 얼룩져 있었다.본관으로 향하는 잔디밭에는 「사수대」들이 사용한 손수건과 마스크가 곳곳에서 목격됐다. 낮 12시쯤 연세대 동문.이곳 역시 몇차례 「전쟁」을 치른 탓인지돌멩이가 사방에 뒹굴었다.이정표와 나무로 쌓아놓은 바리케이드도 설치돼 있었다.주변 숲속에는 경찰의 진압작전 때 미처 챙기지 못한 쇠파이프와 장갑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시위 학생들의 「마지노선」인 이과대 과학관. 과학관으로 통하는 길 3곳에는 불에 타다만 바리케이드가 앞을 가로 막았다.드럼통과 책·걸상,칠판이 검게 그을린 채 방치돼 있었고 수십개의 쓰레기 더미가 그 위에 쌓여 있었다. 보도블록은 학생들이 깨트려 경찰에 던지느라 군데군데 바닥을 드러냈다.주변 화단은 화염에 몇차례 휩싸인 듯 검게 그을린 곳이 많았고 경찰헬기에서 뿌린 형광액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층계마다 기름통도 서너개씩 비치돼 있었다.경찰이 진입하면 기름을 뿌려 막겠다는 것이 학생들의 계획이다. 옥상 가건물에는 돌을 담은 상자가 수십개 쌓여 있었고 소화기,난로,전투경찰의 방석모,진압봉 등이 한곳에 모아져 있었다.
  • 김 대통령 광복절 51돌 경축사/전문

    ◎“체제 전복 세력 단호히 대처”/4자회담서 평화체제·군사신뢰 협의/지역·파벌 권력투쟁 지양… 국론 통합을/근검 절약으로 경제난 극복 협력 당부 오늘 우리는 나라를 되찾은지 쉰한돌을 맞아 민족의 통일과 영광을 다짐하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지금 이 자리를 지켜보는 겨레의 가슴속에는 식민통치의 압제에서 벗어나 「흙 다시 만져보고 바닷물도 춤을 추던」그날의 감격이 물결치고 있습니다. 오직 피와 땀과 눈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지난 반세기의 역정에 대한 긍지가 넘치고 있습니다.다가오는 21세기를 한민족의 위대한 시대로 꽃피우자는 희망과 용기가 불타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날을 맞을 때마다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낍니다. 「나라」가 있기에 우리가 번영을 구가하며 세계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저는 먼저 신명을 다 바쳐 조국의 주춧돌을 놓아주신 애국 선열들에게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무에서 유 창조 긍지 자유와 번영의 나라를 만든 주역이신 위대한 우리 국민께 감사를 드립니다.반세기동안 우리는 분단의 멍에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나라세우기의 길을 달려 왔습니다.가혹한 역경들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 막았지만 불굴의 의지로 마침내 오늘의 이 나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출발한 한국은 이제 세계 11위의 경제력과 국민소득 1만달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우리 모두가 함께 쟁취한 민주주의는 국민을 나라의 참다운 주인으로 만들었고 조국을 세계속에 당당한 나라로 바꾸었습니다.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확립하여 민족의 자존을 한껏 드높였습니다.남의 도움을 받던 나라로부터 남에게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 것도 우리의 큰 보람입니다. 열흘전 애틀랜타올림픽에서도 우리는 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진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자유와 정의,평화와 번영의 독립국가를 갈구했던 선열들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반세기,국민 여러분께서 「한국의 신화」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북한의 안정 원한다” 광복 후반세기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는 오늘,우리는 광복 1백년을 내다보며 새로운 출발을 결의해야 합니다.우리에게는 절절한 소망이 있습니다.그것은 여전히 미완인 우리의 광복을 진정한 광복으로 완성하자는 것입니다.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일류국가,한민족의 위대한 시대를 우리 손으로 창조하자는 것입니다. 민주와 번영으로 세계를 앞서가는 선진국가,정신적 가치와 도덕성이 존중되는 문화국가,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통일국가,이것이 우리 모두의 꿈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한국의 신화」를 창조한 그 위대한 힘으로 「한민족의 영광」을 반드시 실현할 수 있습니다.이제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는 평화통일을 성취하는 일입니다.그것은 참다운 광복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평화통일의 첫 걸음은 무엇보다 7천만 동포가 하나라는 인식을 함께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한반도의 남쪽만이 아니라 저 북녘 나아가 세계 곳곳 온 겨레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해 1천9백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쌀을 아무 조건없이 북한에 지원한것도 북한 동포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안타깝게도 우리의 선의가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민족사의 긴 안목으로 보면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일이 될 것입니다.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요체는 바로 「평화와 협력」입니다.「평화와 협력」만이 분단의 고통과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과 번영의 큰 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이러한 뜻에서 저는 「한반도 평화와 남북간 협력」을 위한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힙니다. 첫째,우리는 북한의 안정을 원합니다.지금 북한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북한의 안정에 영향을 줄 사태로 비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둘째,우리는 북한의 고립을 원치 않습니다.우리는 북한이 국제사회의 온전한 성원이 되어 우리와 함께 민족의 역량을 키우고 세계에 공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방 통일 추구 안해 셋째,우리는 일방적인 통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한반도 문제는 남과 북 상호간의 자유로운 합의에 따라 평화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남북한은 이미 기본합의서를 통해 남북한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평화를 정착시키고 서로 교류·협력해 나가기로 세계와 민족 앞에 약속한 바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약속의 이행이 지연되어서는 안됩니다.저는 이와 같은 기본정신에 바탕을 두고 남북관계를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지난 4월 저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함께 북한에 4자회담을 제의한 것도 「평화와 협력」의 정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4자회담에서는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에 관한 광범한 문제가 토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여기에서는 무엇보다 평화체제의 구축문제가 논의될 것입니다.군사적 신뢰문제도 협의될 것입니다. 그리고 긴장완화 조치의 차원에서 남북 경제협력 문제도 함께 논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저는 이 자리를 빌려 특히 4자회담에서 논의될 경제협력문제에 관해 우리의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먼저 식량문제입니다.북한은 지금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습니다.특히 지난달 집중 폭우로 인한 수해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은 더욱가중되고 있습니다.같은 동족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동안 우리는 동포애로써 북한을 도와왔고 앞으로 국제적 지원을 위해서도 노력할 것입니다. ○수해복구 지원 용의 그러나 북한의 식량난은 외부의 일시적 지원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식량문제를 보다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데 기여할 용의가 있습니다.먼저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북한의 농업생산성을 제고하고 장비 대여 등을 통해 수해농지를 복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나진·선봉지역에 투자하고 남북교역을 확대하여 북한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며 한국관광객의 북한 방문을 허용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제교류는 주로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며,이에 따른 인적·물적 교류의 안전 등을 보장하기 위해 남북 당국자간에 합의가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남북한 당국간의 좀 더 의미있고 실질적인 경제협력은 긴장완화와 호혜 원칙아래 대화를 통해 진전시켜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북한의 경제문제는 남북한간의 진정한 협의와 협력을 통해서만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북한을 돕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따라서 4자회담이 성사되면 북한은 정치적 안정과 군사적 신뢰 그리고 경제적실리를 모두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감상적 통일론 경계 세계 각국이 4자회담을 지지하고 있는 것도 이 회담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기 때문입니다.북한당국이 그들 자신은 물론 민족의 장래와 동북아의 앞날을 위해서도 4자회담에 호응해 나올 것을 거듭 촉구합니다. 평화통일은 이제 현실의 과제로 등장했습니다.우리 민족의 명운은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통일에 구체적으로 대비해야 할 때입니다.통일에 대한 우리의 열정이 뜨거운 만큼,통일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신중해야 합니다.감상적인 통일론이나 일방적인 시혜론은 남북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의 존립 토대인 자유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체제전복 세력에는 단호히 대처할것입니다.국가안보는 굳건하게 유지되어야 합니다.저는 군의 최고통수권자로서 막강한 국방력으로 나라와 국민을 확고히 지킬 것입니다. ○경제규모 1조불로 한·미 연합방위태세와 협조체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확고합니다.통일조국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통합이 중요합니다.이를 위해 먼저 지역간,계층간,세대간의 통합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의 정치는 이제 지역이나 파벌에 의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통합과 조화에 의해 국민의 힘을 모으는 정치가 돼야 합니다.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으로 국가를 경영하는 전문화된 정치,세계를 경영하는 세계화된 정치로 발전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경제도 7천만 동포가 다 함께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한단계 더 도약을 이루어야 합니다.다음 세기 초까지 경제 규모를 1조달러로 키우고,무역규모도 5천억달러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최근 우리 경제에 대한 국민 여러분의 걱정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정부는 우리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국민 여러분께서도 근검절약을 통해 가계를 풍요롭게 하고 경제를 회복하는 데 적극 협력해 주실것을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세계화 뿌리 내리게 우리 사회에는 또한 변화와 개혁의 꾸준한 추진을 통해 정의와 합리성이 뿌리내리게 해야 합니다.세계화를 더욱 촉진하여 모든 분야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온 국민이 이처럼 일치된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통일역량은 배가되어 통일조국의 모습은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설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신천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우리 민족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서 인류번영과 세계평화를 앞장서 이끌어야 할 21세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참다운 광복을 위해 어깨를 나란히 해 함께 나아갑시다. 우리 세대의 손으로 민족의 통일을 이룩합시다.세계가 우러러 보는 일류국가를 만듭시다.위대한 한민족의 시대를 창조합시다.그리하여 선열들이 그렇게도 애타게 희구했던 「한민족의 영광」을 자손만대에 물려줍시다.
  • 파키스탄/모헨조다로:상(세계 문화유산 순례:5)

    ◎BC 2,500년에 세운 완벽한 계획도시/벽돌 8천만장 소요 추산… “인더스문명의 꽃”/대욕탕에 상·하수시설… 도로는 벽돌포장/기능별로 구역 배치… 요새유적이 중추 인더스문명의 꽃 모헨조다로.파키스탄 신드지방 라르카나에 있다.카라치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신크리를 우회하여 2시간만에 모헨조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황토지대에는 벌써 불볕이 깔렸다.그래서 메마른 문명의 구릉모헨조다로는 말 그대로 「죽음의 언덕」처럼 보였다. 비행장에서 4∼5㎞쯤은 될까.그리 멀지 않았다.모헨조다로 초입의 요새유적은 약간 경사진 비탈에 흙을 돋우어 만든 인공언덕 기슭을 깔고 앉았다.작열하는 불볕을 이기지 못하고 고운가루로 바스러진 황토흙과 벽돌이 어울린 모헨조다로의 색깔은 붉었다.인더스강이 범람하면서 밀어붙인 황토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설한 모헨조다로는 애초부터도 붉은색 도시였다. 그 요새유적 어귀에 모질게 자란 가시나무 한그루가 무척이나 반가웠다.신드말로 간디라는 가시나무는 그런대로 불볕을 가려주었으나,유적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곧 시작되었다.높이 21m에 지나지 않는 인공언덕의 벽돌계단이 극악스러운 더위로 해서 코밑으로 바싹 다가왔다.그리고 정상에 올라 진흙과 벽돌을 섞어 만든 거대한 탑파(수투파)를 만났다. 요새유적 정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를 얼핏 불교유적으로 착각하기 딱 알맞았다.1922년 이 유적을 처음 조사했던 영국 고고학자 RD배너지도 모헨조다로를 불교유적으로 보고 탑파 주변을 발굴했을 정도였으니까….실제 AD 200년쯤 쿠산왕조시대의 동전이 나오기는 했다.그러나 탑파 주변을 더 깊이 파들어가서 생전 보지못했던 인장한 점을 발굴해냈다.그 인장은 바로 세기적 유물로,모헨조다로가 인더스문명 유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공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모헨조다로는 BC2500∼1700년까지 8백년동안 번영을 누렸던 도시다.그러니까 요새유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가 멸망한 이후 1천9백여년이 지나고 나서 파괴된 모헨조다로 유적지 위에다 쌓아올린 불교유적인 것이다.어떻든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다른 세계가 거의 신석기시대를 살 무렵에계획된 도시를 건설했다.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도시 면적은 어림잡아 4천8백여㎡를 웃돌았을 것으로 보고있다. 오늘날 모헨조다로 유적은 편의상 네 블록으로 나누어 블록마다 고유부호를 붙였다.블록의 부호는 발굴자들 이름에서 약자를 따다 만든 것인데,요새유적은 SD구역으로 되어있다.인공의 언덕,다시 말하면 토루가 있기때문에 요새로 불리는 이 유적은 도시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정상에 올라서면 동남과 동북쪽으로 펼쳐진 주변 도시유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요새유적(SD구역)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중요한 건물은 큰 욕조가 있는 대욕탕이다.길이 12m,너비 6.9m,깊이 2.4m의 벽돌탱크가 설치되었다.욕조바닥 벽돌의 가장자리를 석고로 모르타르한 대욕탕은 방수처리가 완벽했다.욕조의 물은 세 개의 우물로부터 공급받는 상수도시설과 물을 빼내 흘려보내는 배수 및 하수도 시설도 갖추었다.대욕탕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에는 작은 욕조가 딸린 방들이 따로 있다.깨끗한 물을 늘상 공급받아 몸을 청결하게 가꾼 성직자들의 전용공간인 것이다. 대욕조를 돌아보고 나서 눈길을 끄는 건물터 하나가 골목 건너에서 기다렸다.네 개의 통로가 난 건물안에는 벽돌 스무남은장씩을 포개 쌓은 주춧대가 늘어 섰다.그 주춧대는 지붕 버팀기둥 자리였을 법한데,건물안 홀 넓이는 26㎡를 헤아렸다.고고학자나 문명사에 관심을 둔 전문가들은 이 건물을 종교집회를 위한 성소로 보았다.이 성소건물은 모헨조다로의 다른 블록 DK지역에서 발굴한 족장의 저택과 함께 도시사회의 통치기능과 체제를 가늠할 수 있는 유적이기도 했다. 모헨조다로를 와서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위대한 도시라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그까짓 벽돌을 쌓아 건설한 도시가 별 대수로우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BC 2500년쯤 도시계획에 의한 완벽한 도시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모헨조다로 사람들 말고 다른 많은 종족들은 기껏해야 움집 정도를 짓고 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요새유적(SD구역)과 그 밑의 도시유적 DK구역,노동자 거주유적 HR구역 등이 기능에 따라 배치되었다. 이들 구역의 모든 건물은 구워 만든 붉은색 벽돌로 지었다.그리고 우물을 파고 원형으로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우물은 7백개나 되었다.방수처리한 상·하수도에도 역시 벽돌을 사용했다.도로는 오늘날 나침반이 가리키는대로 정확히 동서와 남북을 이었다.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너비가 10m에 이르는 큰 도로에는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벽돌을 모로 뉘어 깔았다.도시계획은 물론 도시토목을 맡은 전문 엔지니어가 설계한 도시가 바로 모헨조다로인 것이다. 이 도시를 건설할 때 엄청난 분량의 벽돌이 들어갔다.고고학자들이 계산해낸 숫자는 자그마치 8천만장이다.벽돌을 일정한 규격품으로 세 종류가 생산되었다.가장 큰 세로 28㎝,가로 16㎝,두께 9㎝짜리 벽돌은 나무로 구웠다.나머지 작은 규격품 벽돌을 굽는 데는 곡물의 껍데기 왕겨를 땔감으로 썼다.이들 벽돌은 건축용도에 따라 사용되었다.오늘날 건축자재용 벽돌강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제품을 대량 생산했으나 벽돌공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헨조다로와 버금하는 파키스탄의 다른 문명유적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모헨조다로보다 더 상류에 위치한 인더스강 지류 라비강 북쪽 연안의 하라파 유적의 수난이 그것이다.영국식민통치시대 파키스탄 초기철도건설 당시 하라파유적의 벽돌이 공사용 자재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다.그 이후 문명유적임이 확인되어 지금은 모헨조다로 유적과 더불어 두 개의 큰 인더스문명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정오를 넘긴 구릉지대의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그러나 내친 걸음이라 모헨조다로박물관에서 내준 랜드로버로 인더스강쪽을 향해 달렸다.2㎞쯤을 실히 가서 강물이 범람할 때 도시 한 블록을 흔적없이 삼켜버린 폐허지대에 다달았다.비록 폐허라 할지라도 모헨조다로를 보다 분명한 문명유적으로 부각시킨 많은 유물들이 1898∼99년 사이 여기서 출토되었다.파키스탄 독립이후 최대의 발굴성과로 꼽히는 여러 돌인장,소가 끄는 달구지 따위의 테라코타 조각품들,무늬도자기와 민무늬도자기 등이 그것이다. 소 달구지에서 모헨조다로 도시유적의 그 넓은 길이 허세가 아니었음을 실감했다.그리고 돌인장에는 설형문자가 나오거니와 큰 선박 그림을 새겼다.이들 모헨조다로의 인장은 파키스탄보다 먼 서역수메르에서도 출토되었다.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아주 일찍 고유문자를 쓰는 가운데 큰 배를 부려 장거리 해상무역로를 개척했다는 증거가 아닌가.그래서 모헨조다로에는 영원한 문명의 빛이 어려있는 것이다.
  • 전쟁터 못지않았던 군부대 수해현장

    ◎전우잃은 슬픔 딛고 복구 “비지땀”/진입로·막사 뼈대만 앙상/무너진 철책 다시 세우고 막사재건 분주/“차라리 전투를 벌였다면…” 병사들 하소연 【철원·연천=김태균 기자】 『차라리 적과 전투를 벌였다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겁니다』 땀과 진흙이 뒤범벅이 된 채 전우의 생명을 앗아간 수해의 잔해를 치우는 군인들이 한결같이 내뱉는 말이다. 이들의 말처럼 이번 수해는 우리 국군에게 쉽사리 씻기 어려운 상처를 안겨줬다. 30일 상오 11시쯤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육군 백골부대 ○○수색중대 철책선.1㎞앞에 북한군 초소가 보인다.「월북 행복」이란 선전구호도 선명하다. 이전에는 제법 평평하게 닦였을 법한 부대진입로는 온통 자갈밭이다.말 그대로 폭격맞은 것 같다.이번 비로 쓰러진 전봇대는 전선을 치렁치렁 걸친채 논두렁 위로 누워 있다. 부대 초입부터 병사들은 계곡처럼 깊이 팬 철책담을 다시 쌓느라 정신이 없다. 빗물로 깊이 30여m,너비 20여m나 팬 계곡은 입을 벌리고 갈길을 막는다.군 관계자는 백골부대 관할 18.2㎞의 철책 가운데 2.4㎞나 쓰러졌다고 전한다. 1시간에 1백㎜의 비가 쏟아진 27일 상오 6시쯤 철책근무를 서다가 갑자기 철책담장이 무너지면서 생매장될 뻔했다는 김양만병장(23)은 『친하게 지내던 동료 1명이 실종돼 아직 시신도 찾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이어 찾아간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고신4리 육군 열쇠부대 군인관사.열쇠부대는 이번 사고로 병사 22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되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장병들은 모두 가슴에 검은색 리본을 달고 있다. 관사주변은 상류 차탄천이 범람하면서 완전 아수라장이 됐다.당시 오명신 중사(29·수송담당관)가 희생됐다.군 막사 30여동 대부분이 부서졌고 문짝이나 유리창들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일부 막사는 석기시대 유적지처럼 격자형 집터만 앙상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물살에 휩쓸려 내려가다 건물에 부딪쳐 멈춘 갈대와 작은 관목·자갈 뿐이다.근처 5백여평에 이른다는 밭은 흔적이 없다.높이 30m가 넘을성 싶은 큰 나무들도 뿌리가 뽑힌 채 어지러이누워있다. 점심시간(낮 12시)을 30여분이나 넘겼으나 수마가 할퀴고간 잔해를 치우는 병사들의 손길은 분주하기만 하다.수해를 입은 인근 민가를 가구마다 10여명씩 나눠 폐허더미 속에서 옷가지며 가구를 꺼내 말리고 겹겹이 쌓인 토사를 치우느라 땀은 이번의 호우만큼 굵은 줄기가 되어 쏟아진다.
  • 동포애로 수재민을 돕자(사설)

    경기·강원북부를 강타한 집중호우로 86명이 사망·실종되는 인명피해에,건물 9천여채가 무너지고 논밭과 도로가 유실되는등 엄청난 재산피해를 냈다.3만여명의 이재민을 낸 이번 수해는 87년 태풍 셀마호 이후 최악의 수재로 국민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정부는 1천4백억원을 긴급지원,수해복구작업에 나섰고 수해주민도 실의를 딛고 펄에 묻힌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고 있다.이제는 온 국민이 나서 수마에 모든 것을 빼앗긴 수재민을 돕고 그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보내줘야 할 때다. 흙탕물과 진흙이 휩쓸고 간 폐허의 삶터를 다시 가꾸고 유실된 도로와 둑을 복구하기 위해 인력과 장비,생필품과 구호품등이 긴급투입되어야 할 것이다.이웃이 재난을 당했을 때 자기 일처럼 함께 나서서 돕고 격려해주는 것이 우리사회의 고유한 미풍양속이다.또한 재해가 생길 때마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복구작업을 지원해온 것이 우리의 재난극복방식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재산을 잃고 망연자실한 수재민에게 우리 모두 따뜻한 동포애를 발휘하여 성금과성품을 보내도록 하자.동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의 선이 아니겠는가.수해지역에는 금품의 지원뿐만 아니라 장비와 인력의 지원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과거에는 공무원과 군인이 복구작업에 주로 투입되었으나 이번에는 방학을 맞고 있는 중·고·대학생의 자원봉사가 적극 활용되었으면 한다.학생들이 수해현장을 직접 돌아보고 수재민을 돕기 위한 봉사활동을 하게 되면 자원봉사와 현장학습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학생들의 노력봉사를 체계화하기 위해 적절한 인원을 적합한 지역에 투입하는 통제기구가 필요하다. 재해복구는 국민의 성원이 하나로 결집되었을 때 빠르고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우리의 작은 정성이 모아져 큰 힘으로 복구작업을 서둘러 마치게 할 수 있으며 실의와 좌절에 빠진 수재민에게 재기의 새 삶터를 마련해줄 수 있는 것이다.
  • “수재민돕기” 전국민 한마음/구호물자 속속도착… 복구현장 훈훈히

    ◎민간구호단체·기업들도 앞다퉈/성금·의류·의약품 잇따라 전달/신문·방송사엔 의연금 답지 전 국민이 수해의 아픔을 딛고 한마음으로 뭉쳤다.너 나 할 것없이 복구 현장으로 달려갔다. 29일 연천·파주 지역의 주민들이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와 진흙더미를 헤치며 가구와 집기를 닦고 있는 현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각종 구호물자가 속속 도착,복구 현장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각 시·도는 물론 민간 구호단체와 기업들도 나섰다. 서울시는 비상구급차 6대를 비롯,양수기 34대,의류와 모포·라면·버너 등 구호 물품 8천7백13점을 현장으로 보냈다.피해를 입지 않은 경기도 내 시·군도 앞다퉈 구호성금과 물품을 보냈다.군포시를 비롯,동두천·광명·수원시 등도 성금과 인력·라면·생수·담요·배수펌프 등을 지원했다. 수해지역 주민들이 앓기 쉬운 설사·피부병·감기몸살 등의 질환에 대비,의료 구호진도 파견됐다.보건복지부는 국립의료원 등 3개 병원 전문 의료진으로 구성된 이동종합병원 차량을 현지에 급파했다.경상남·북도와 대구시는 의료반과방역차량 20여대,의약품 등을 지원했다. 대기업들은 종합적인 수해 복구 지원대책을 발표하고 계열사내 건설·의료·가전·자동차 등 지원팀을 현지로 보냈다.현대·대우·기아 등 자동차 3사는 수해차량 정비를 위해 정비요원과 서비스차량 2백여대를 보내 연천과 문산지역에서 정비활동에 들어갔다.소모성 부품은 무상으로 정비 받을 수 있고 나머지도 염가다.가전 3사 긴급 정비반도 다음 달 15일까지 현지에 머물며 물에 잠긴 가전제품을 정비하기로 했다. 한국은행을 비롯,시중은행들은 수해복구자금을 장기저리로 대출해 주기로 했다.국민은행은 가구당 2천만원까지 3∼5년 상환을 조건으로 일반금리 보다 1% 낮게 지원한다. 현지에는 대한 적십자사 회원 50여명이 밤을 새워가며 구호 활동을 펴고 있다.또 손장갑,1회용 식기,세면용품 등을 들고 찾아오는 일반인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각 신문,방송사에도 수재의연금과 구호물품이 속속 접수되고 있다.〈김경운 기자〉
  • 구슬땀 장병들 “하루가 짧다”/연천·문산 수해복구 현장

    ◎다리·제방 12곳 한나절에 거뜬히 【연천·문산=김명승·박성수·박준석 기자】 수마가 할퀴고 간 경기 연천·문산지역의 이재민들은 29일 폐허 속에서도 재기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상오 9시쯤 경기도 연천군 차탄리.연천군 전체를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던 차탄천을 끼고 있는 곳이다. 구멍이라도 난 듯 물동이처럼 비를 퍼붓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쏟아내고 있다. 차탄천에서 불과 10여㎞ 떨어진 무궁화빌라 20가구 주민들은 온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채 진흙으로 범벅이 된 가재도구들을 끄집어내느라 흐르는 땀방울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마당 가득 쌓인 장롱과 전자제품·책더미 등 가재도구는 폐자재 창고를 연상시킨다. 이 빌라 103호에 사는 박소연씨(37·주부)는 『가재도구를 정리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며 때마침 지원나온 30명의 경찰과 함께 이불과 옷가지를 빨아 널었다. 비슷한 시각 연천군의 장남면 원당2리.워낙 저지대라 전날 하오에야 물이 빠지기 시작해 이제 막 차량통행이 시작됐다.마을 곳곳에는 폭우에 씻겨내려온 쓰레기와 가재도구 등이 어지러이 널려있다.농경지와 가옥은 온통 황토흙을 뒤집어썼다.폐비닐과 나무뿌리 등이 걸려 있는 마을 앞 전깃줄은 빨랫줄과 흡사하다. 이곳에서 1㎞가량 떨어진 옥산리 연경금속공장.동파이프를 만드는 이 회사도 작업장 5천여평과 대형 시설물들이 고스란히 물에 잠겼었다.아직도 고물창고와 다름없다.그러나 종업원 43명은 물에 잠긴 가정도 잊은 채 이틀째 밤을 지새며 기계를 닦아내고 부서진 시설들을 일으켜 세운다. 연천지역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군남면 진상1리. 입구부터 진흙더미가 곳곳에 쌓여 있다.발목까지 빠지는 진흙더미 속을 허겁지겁 돌아다니는 주민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굳어 있다.건물은 거의 무너질 듯이 기울어 있다.언제 무너질지 몰라 손을 못쓰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자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가게에서 무엇인가를 꺼내고 있다.「고헌상」(48·자동차부품가게 운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떠내려가다 나무에 걸린 타이어 몇개를가게 앞에 걸어놓았다.건진게 이것뿐이라고 한다.가게 뒤편의 집은 보기에도 참혹하다.온통 흙탕물과 쓰레기 투성이고 벽과 지붕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내려앉았다.살림살이는 흙더미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연천군 백학면 322번 지방도를 따라 1.5㎞를 달리자 군병력 2백여명이 파손된 도로를 복구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차탄교 등 다리 3개소와 유실된 하천제방 9곳 3천7백여m가 하루 반만에 복구됐다. 사흘간 4백30㎜의 폭우가 휩쓸고 간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문산역 앞. 상가가 밀집한 문산의 중심가인 이곳의 도로와 인도 양편에는 상가 주민들이 꺼내 놓은 각종 물건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전자제품 대리점 앞에는 아직도 물에 젖은 TV,냉장고,세탁기가 즐비했고,가구점 앞에도 장롱,문갑,책상 등이 얼룩진 채 쌓여 있다. 주변 도로도 거대한 개펄을 연상케 한다.주유소 주변은 기름과 오물이 범벅이 돼 악취를 풍겼고 양수기가 뿜어낸 물로 도로는 온통 황토색이다. 이틀여 만에 다시 상가를 찾은 상인들은 한숨과시름속에서도 토사더미를 뒤지며 쓸만한 물건을 찾아내느라 분주하다.
  • 물빠진 연천은 “진흙탕 천지”/수마할퀸 경기북부 수해현장을 가다

    ◎전기·가스·전화끊긴 문산은 “수중도시”/군·공무원 등 중장비 동원 “복구 구슬땀” 황토물이 빠져나간 연천지역은 거대한 호수의 밑바닥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과 흡사했다.문산천이 범람해 침수된 파주시 문산읍은 수중도시를 방불케 한다. 28일 상오 9시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2리. 이틀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마을 60여가구는 모두 폐가로 변했다.뼈대만 간신히 남아있는 가옥들과 주변에 어지러이 널린 벽돌·콘크리트 더미,상류에서 휩쓸려온 쓰레기 등이 뒤섞여 폭격 뒤의 폐허와도 다름없다.소·돼지·닭 등 가축들이 곳곳에 죽어 있고 옥토는 진흙밭으로 변해버렸다. 연천에서 농지가 가장 넓은 백학면과 신서면 일대도 거대한 황토바다로 변해 있다. 연천군 군남면 역시 전체 2백5가구 7백18명이 졸지에 이재민이 됐다.논밭은 자갈과 토사,깡통 등 쓰레기에 뒤덮여 묻혀버린 벼포기는 어른손으로 한뼘이나 넣어야 겨우 잡힌다. 새벽부터 복구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쓸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그릇 등 가벼운 가재도구들은 이미다떠내려갔다.썰렁한 방과 마루,부엌에는 두꺼운 흙앙금만 겹겹이 덮여 있다.어린이들은 곤죽이 돼버린 교과서와 공책을 들고 울먹인다.농민들의 눈가에는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로 흥건히 젖어 있다. 하지만 절망도 잠시.주민들은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주민들은 상오 11시를 넘기면서 공무원·군인·자원봉사자 등으로 구성된 복구지원단과 함께 복구작업을 시작했다. 간간이 비치는 햇볕에 말리기 위해 젖은 이불과 옷가지,TV,냉장고를 꺼내들고 나온다.아이들은 바가지와 양동이를 들고 집안에 고인 물을 퍼낸다. 굴착기 등을 동원해 도로와 제방의 복구에 나선 군인들의 손놀림도 하오 들면서 더욱 빨라진다. 간밤에 침수된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은 전기와 가스,전화가 모두 끊긴채 온통 누런물로 뒤덮여 있다. 문산읍 봉서리 부근에서 거대한 호수의 초입에 들어섰음을 직감할수 있다.임진강변을 따라 수천평의 논·밭을 덮어버린 황토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약간 떨어진 통일동산 주변부터 심각한 수해지역이다.승용차 3∼4대가물에 잠겨 있다.월롱면 부근에는 양계장에서 나온 닭 1백여마리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읍내 대부분의 아파트와 집들도 물에 잠겨 있었다.한창 공사중인 건물들이 물에 잠긴 채 그대로 방치돼 있었고 잠긴 물 위로 고압전선탑 꼭대기만 나란히 이어져 있다. 인근 청안천이 범람한 파주시 적성면 율포리와 장현리 일대 인삼밭과 옥수수밭도 전체가 흙밭이다.물 한가운데 승용차와 유조차가 섬처럼 잠겨있다. 문산초등학교 등 23개 대피소에 수용된 이재민은 1천7백50여가구,45천8백여명.삽시간에 집과 가재도구 등 전재산을 잃어버리고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수재민들은 하오부터 모포와 온수를 구하러 이리저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연천·문산=김상연·이지운·강충식 기자〉 ◎2개지역 1천여명/사흘째 고립 굶주려 ○…2개지역 주민 등 1천80여명이 지난 26일부터 고립돼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 연천군 백학면 학곡리 주민 3백80여명은 26일 하오 3시부터 불어난 물로 진입로가 막히며,마을이 물에 잠기자 마을 뒷산 고지대에 천막을 쳐놓고 생활. 또 장남면 원당리 주민 7백여명도 26일부터 사흘째 고립돼 극심한 굶주림을 겪고있는 사실이 28일 하오 6시 10분쯤 마을을 겨우 빠져나온 신동원씨에 의해 확인돼 재해대책본부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수해현장 위로 방문/각당 대표 등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위원은 28일 상오 이한동 상임고문 이해귀 경기도지부위원장,이신행 당재해대책위원장 등 당직자 19여명과 함께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차탄천 인근 수해현장을 방문,피해상황을 점검하고 주민들을 위로했다. 자민련 김종필 총재도 이날 하오 김용환 사무총장,허남훈 정책위의장,김고성 당재해대책위원장 등 당직자 10여명과 경기도 파주군 일대를 방문,금일봉을 전달하고 피해주민들을 위로했다.〈진경호 기자〉
  • 황룡사를 복원하자/김호준 논설위원실장(서울논단)

    신라최대의 가람이었던 경주 황용사는 신라불교의 호국도량으로서 국민통합과 삼국통일을 상징하는 곳이었다.진흥왕 14년(서기 553년)에 절을 처음 짓기 시작하여 4대왕 93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선덕여왕14년(서기 645년)에 마무리한 황룡사는 신라인의 웅장한 기상이 유감없이 표출된 곳이었다.불국사의 8배나 되는 넓은 경내엔 동양최고의 9층목탑이 하늘을 찌를듯 솟아 있었고 남대문의 9배나 되는 거대한 금당엔 서축 아육왕이 보낸 누른쇠와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높이 5m의 장육존상과 두 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새가 앉으려 했다는 솔거의 그 유명한 소나무 벽화가 그려져 있던 곳이 바로 이 황룡사였다.그러나 불행히도 고려 고종25년(서기 1238년)몽고의 병화로 소실돼 폐허만 남긴채 역사의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 황룡사의 복원을 최근 불국사 주지 설조스님이 정부에 청원하였다.그는 청원문에서 『온 국민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때에 신라인의 호국정신과 통일정신의 요람인 황룡사(와 감은사)의 복원 불사를 성취함으로써 통일의 정신적 기틀을 다져야 한다』고 역설했다.760년전 잿더미로 변해버린 황룡사를 오늘에 다시 살려야 할 이유는 바로 이 황룡사에 각인된 호국이념과 통일정신에 있다. 황룡사가 착공된 서기 553년은 신라가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강유역을 장악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해였다.황룡사의 중심가람인 9층목탑은 신라에 침범을 일삼던 주변의 아홉 나라를 부처님의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백제멸망 15년전에,고구려멸망 23년전에 완공됐다.당시 건축공사를 지휘했던 아비지라는 백제 공장이는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걸 보고 일을 맡은걸 후회했다고 한다.국찰인 황룡사 강당에서는 자장률사와 원효대사가 강론을 하였으며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비는 팔관회가 열렸다.국민들의 마음을 불심으로 통합시켜 국력결집과 삼국통일을 이끌어낸 곳이 황룡사였다.고려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9층목)탑을 세운뒤에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황룡사를 복원하자는외침엔 무엇보다도 통일의 영험을 다시 보고자 하는 간절한 기구가 담겨 있다. 황룡사 복원을 바라는 또하나의 사연은 그 규모의 웅장함에 있다.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8천8백평의 경내에 1탑3가람이 들어 앉은 황룡사가 소실될때 그 재가 수십일동안 경주 하늘을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었다고 한다.황룡사 찰주기에 의하면 9층목탑은 높이가 2백25자였다.요새 치수로 환산하면 80.18m,아파트 30층에 해당된다.당시로선 그야말로 아찔한 초고층 건물이었다. 황룡사 9층목탑은 목탑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중국 산서성의 응현목탑(높이 67m)보다 4백여년 앞서 세워졌으면서도 13m가 높은 것이다.또 일본에서 가장 높다는 흥복사 5층탑(높이 50m)보다 30m가 높다. 황룡사의 규모는 목탑과 함께 소실된 종의 크기로도 유추할 수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황룡사의 동종은 49만7천5백근의 구리를 들여 만들었다고 한다.현존하는 우리나라 종 가운데 가장 큰 성덕대왕신종,즉 에밀레종의 4배에 달하는 중량이다.한마디로 말해 황룡사는 우리 건축사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조형물이었다.한반도 동남쪽 구석에 갇혀있다시피한 신라인들이 어떻게 그런 큰 웅지를 품을 수 있었는지 그저 경탄스러울 뿐이다. 중국은 큰 나라였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만해도 스케일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거대한 문화유산이 적지않다.산덩이 같은 천황릉들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5세기때 축조물로 추정되는 인덕천황능은 길이가 4백86m에 달해 피라밋과 맞먹는 세계최대의 분묘로 꼽힌다.서기 752년에 개안된 높이 15m의 동대사 대불은 후대에 여러번 보수되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보잘것 없게 됐지만 그 거대함에 있어서는 세계제일이다. 황룡사가 복원된다면 우리 조상들도 웅혼한 기상의 소유자였음을 실증적으로 확인시켜 줄 것이다.우리 문화재에 대해 후손들이 느끼고 있는 왜소 컴플렉스를 씻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빈약한 불거리로 고전하고 있는 한국관광도 새명소 새활력소를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황룡사 복원은 불교계가 지난 50년대 부터 추진해온 숙원사업이다.그러나 오늘에 재조명되는황룡사는 불교계를 넘어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해야할 과제임을 일깨워 준다.돌이켜 보면 지난해 광복50주년 기념사업으로 일제총독부청사철거와 더불어 황룡사 복원에 눈을 돌렸더라면 「철거와 복원」의 멋진 조화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그렇게 못한건 참으로 아쉬웠다.물론 지금 착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제일 중요한 문제인 경비를 우선 불교계에서 부담하겠다고 자청하고 있으니 말이다.시급한건 황룡사 복원을 국가적 사업으로 확정하고 추진하는 정부의 결단이다.
  • 캄보디아 앙코르:하(세계 문화유산 순례:2)

    ◎바이온사원 바위마다 「크메르의 미소」가…/돌탑 37기 사면에 3∼5m 「큰얼굴」 새겨/야외수영장 「스라스랑」은 둘레 3,500m/밀림속 옛 사원은 「고」나무에 뒤덮여 폐허로 앙코르 와트를 나와 북쪽으로 1.5㎞쯤 떨어진 「앙코르 톰」으로 발길을 돌렸다.앙코르 와트가 단일 사원건물인 데 비해 앙코르 톰은 크메르제국 때 1백만 백성이 살았다는 왕성터다.성곽은 거의 남지 않았지만 그 중앙에 「크메르의 미소」로 유명한 바이온사원이 버티고 서서 그 옛날의 영화를 일깨워준다.3층인 사원은 울퉁불퉁 아무렇게나 쌓은 듯한 돌탑을 머리에 이고 있다. 1층 회랑에 들어섰다.이곳에도 앙코르 와트의 벽면조각 못잖은 릴리프가 벽을 뒤덮고 있다.다른 점은 바이온의 부조는 당시 백성의 생활상을 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원숭이가 나무 열매를 따는 아래로 승려행렬이 지나가고,그 옆에는 쪼그려 앉은 사람이 새고기를 굽는다.곁에 있는 이는 꼬치구이를 사러온 손님인가 보다.그런가 하면 집안에서는 아낙네가 해산하느라 용을 쓴다.릴리프의 예술성을 우리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단원보다 5백여년 앞서 그같은 작품을 돌에 새긴 크메르인은 대체 어떤 민족이었을까. 3층에 올라서니 여기저기서 「큰바위 얼굴」이 미소로 맞는다.3∼5m 높이인 돌탑들은 결코 울퉁불퉁한 게 아니었다.그 자체가 조각품이다.돌탑 하나하나에는 동서남북 4면에 「큰바위 얼굴」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돌탑은 원래 54기였으나 지금은 37기만 남았다고 하니 바이온에는 아직도 1백50가량의 「큰바위 얼굴」이 남은 셈이다.눈을 지그시 감은 이 「큰바위 얼굴」들은 두툼한 입술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띠고 있다.세상은 그 신비한 표정을 「크메르의 미소」라고 하지 않던가. 이 얼굴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하나는 앙코르 톰을 완성한 자야바르만 7세(1181∼1215?)를 꼽는다.크메르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인 자야바르만7세는 힌두교 대신 불교를 받아들여 바이온과 「타프롬」 등 불교사원들을 지었다.그러면서 자신의 얼굴을 돌탑에 남겼다고 보는 것이다.반면 『왕의 초상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상』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다. 자야바르만7세는 백성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바이온 1층 회랑에 서민의 생활상을 새긴 까닭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왕의 치세에 힘입어 찬란한 문화의 불꽃을 피운 크메르제국은 2백여년후 샴족(태국민족)에 쫓겨 사라진다.앙코르 톰 건설에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탓일까.그뒤 앙코르는 밀림 속에서 4백여년동안 길고 긴 잠을 잤다.그리고 나서 1861년에야 프랑스탐험가 앙리 무오에게 발견돼 세상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그 깊은 잠의 흔적을 타프롬사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앙코르 톰 동쪽 밀림에 있는 타프롬은 자야바르만7세가 폐위된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사원이다.한때 딸린 식솔이 1만2천명이나 됐다지만 타프롬은 위대한 자연에 밀려 영화의 흔적을 이미 잃었다.지금 사원은 지상으로 1백∼2백m 뿌리를 뻗어나간 열대수종 「고」나무에 뒤덮여 온통 무너지고 허물어졌다.거대한 뿌리에 휘감긴 사원은 마치 억센 손아귀에 잡혀 짜부러진 종이상자꼴이었다.접착제를 사용하지않고 수십m 높이의 대형석조건물을 세운 크메르인의 신기도 대자연의 심술에는 이처럼 무기력을 드러내고 말았다. 왠지 서글퍼지는 마음을 달래며 발길을 재촉했다.앙코르 톰의 동서 양쪽에는 거대한 바라이(인공호수)가 남아 있었다.당시 1백만 인구를 먹여살릴 만큼 활발했던 농업을 뒷받침한 저수지다.또 아직도 세계최대의 야외수영장으로 꼽힌다는 3천5백m 둘레의 「스라 스랑」,벽돌건물의 대표적 걸작인 「프라삿 크라반」사원,앙코르에서는 유일하게 언덕 위에 자리잡은 초창기 사원 「프놈 바켕」등 어느 유적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었다. 앙코르유적지를 순례하면서 숱한 크메르인을 만났다.지금의 「캄보디안」이 아니라 9∼15세기를 산 「크메」(크메르인이 자처하는 민족이름)들이다.그들은 왕이나 장군·병졸이기도 하고,농부·주부·장사꾼·어부이기도 했다.그 쇠약해진 민족이 안타깝다는 마음에서 말을 건넸다. 『이 위대한 문명을 창조한 당신들을 존경합니다.그런데 당신들이 남긴 문명은 지금 어디로 이어졌나요.문화는 물과 같아 괴어서 넘치면 다시 새길로 흐른다는데…』 그러나 대꾸는 없었다.돌벽 속에서 그들은 1천년쯤 해온 일을 묵묵히 계속할 뿐이었다. ◎여행 가이드/국내선 하루 7회 운항/달러 선호… 1불짜리 유용/쌀국수·생선요리 별미 우리나라에서 캄보디아로 직접 가는 항공기노선은 없고 동남아 다섯 나라의 공항에서만 캄보디아로 연결된다.베트남의 호치민(옛 사이공),태국의 방콕,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홍콩,싱카포르등이다.입국비자는 프놈펜의 포첸통공항에서 미화 20달러로 구입하면 된다.체류허용기간은 30일. 프놈펜에서 앙코르유적이 있는 시엠립까지는 국내선을 이용한다.국내선은 비행기편이나 좌석을 지정하지 않는 「오픈 티켓」제이므로 도착하는 순서대로 탑승시킨다.하루 일곱편쯤 있어 바로 탈 수 있다.앙코르유적지 안에서도 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데 대중교통수단이 없어 택시나 영업용 오토바이 등을 이용해야 한다. 태국 방콕에서 앙코르까지 자동차로는 8시간쯤 걸린다.시간여유를 갖고 태국·캄보디아의 풍물을 즐기길 원한다면 육상여행도 고려해봄직 하다. 캄보디아의 화폐단위는 리엘로 환율은 미화 1달러가 2천5백리엘쯤이다.공항이용료·앙코르입장료 등 공식적인 요금을 달러로 받는등 현지에서 달러를 선호하기 때문에 굳이 리엘로 환전할 필요는 없다.주의할 점은 고액의 여행자수표(TC)는 환전이 어렵다는 것과 웬만한 거래는 1달러단위로 이루어지므로 1달러짜리를 많이 갖고 가는 게 좋다는 것. 음식은 비위생적인 것이 많으므로 음식·식당선택에 조심해야 한다.안남미계통의 쌀로 지은 밥은 푸석푸석한 느낌을 주지만 쌀국수로 만든 요리는 우리 입맛에 맞는 편이다.또 생선이 싱싱해 입맛을 돋운다.치안은 우리 생각과는 달리 평온한 상태이고,앙코르주변에서 북한인활동은 달리 없다고 한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겸 식당이 딱 한군데(바라이호텔) 있는데 새로 지어 깨끗한데다 안주인의 음식솜씨가 상당하다.매번 열가지 안팎의 우리 반찬을 가정식으로 내놓는데 그 맛이 국내 웬만한 식당보다 낫다.한끼에 미화 7달러.숙박료는 25달러다.
  • 끊어진 뱃길 잇기/임영숙 논설의원(굄돌)

    사천성을 포함해서 중국의 4개성을 약 40일에 걸쳐 여행해 본 짧은 경험에 의하면 우리 입맛에 가장 맞는 중국음식은 절강성의 영파 요리가 아닐까 싶다.「작은 상해」로 불리는 영파의 항구와 연결된 운하옆에 자리잡은 음식점에선 해산물 요리만 내놓았다.그것은 여행지의 음식에 잘 적응하지 못한 일행이 비상식품으로 준비해 온 김치의 인기를 떨어뜨릴만큼 맛 있었다.그뿐인가.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산하는 우리와 전혀 달랐지만 이상스럽게도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초행길임에도 영파는 우리에게 결코 낯선곳이 아니었던 것이다.중국의 해안지방엔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데 특히 영파는 황해에서 표류하면 해류를 따라 도착하게 되는 곳으로 우리 고대 소설에까지 그 지명이 등장하고 있다.고려시대엔 영파와 항주를 통한 우리 스님들의 구법활동이 활발했다는 기록도 있다.그 결과 「고려사」라는 이름의 절이 영파에 세워졌다.고려 문종의 넷째 왕자로 한국 천태종의 창시자가 된 대각국사 의천은 송나라에 유학,당시 명주로 불리던 이곳 영파의 아육왕사 등을 찾고 귀국한 후 화엄경과 금2천냥을 보낸다.그 돈으로 건립해 화엄경을 봉안했던 장경각이 「고려사」다.지금은 폐허가 됐지만 지난 1940년대 초까지도 고려사엔 북송의 시인 소동파와 대각국사의 조상이 봉안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 영파를 지난 5일 출발했던 「700년전의 약속」호가 11일 목포항에 도착했다가 다시 일본 후쿠오카와 요코하마로 계속 항해하고 있다.MBC가 제작한 이 배는 700년전 원나라의 무역선으로 영파를 떠나 일본으로 가다가 우리나라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던 해저유물선을 복원한 것이다.오늘 7월20일엔 또 중국과 한반도의 고대인들이 수천년전에도 교류했다는 가설을 입증하기위한 뗏목 「동아지중해」호가 영파에서 인천을 향해 출항한다. 두 배의 항해는 「바다의 날」이 새로 지정된 올해,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끊어진 옛 뱃길을 다시 이어 줄 뿐만 아니라 한국이 동북아를 주도하는 국가로 떠오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두 배의 안전항해를 기원한다.
  • 아우슈비츠수용소 찾은 이 총리/폴란드 방문 이모저모

    ◎독일인들의 참회 강조하며 일 우회적 비판 폴란드를 방문하고 있는 이수성 국무총리는 15일 하오(현지시간) 우리나라 총리로는 처음으로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찾았다. 이총리는 이날 아우슈비츠 「죽음의 벽」과 비르케나우 충혼비에 헌화하고 불행한 과거에 대한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총리는 두 수용소를 돌아본뒤 『역사라는 것은 결코 잊혀지는 것이 아니며,특히 피해를 입은 쪽의 입장에서는 수난의 역사가 영원히 남는 것』이라고 근대사의 아픔을 공유한 나라의 총리로서 감회를 피력했다. 이총리는 이어 『역사의 아픔은 가해자가 진심으로 회오할 때 용서되고 묻혀질 수 있는 것』이라면서 가해자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과거 피해국과 선린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이총리는 그러면서 『현대를 사는 독일 젊은이들이 비록 그 현장이 오늘의 자기 자신들의 책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 민족 한 국가 입장에서 솔직한 뉘우침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문화민족다운 모습』이라고 강조,독일과 달리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총리 일행은 이날 바르샤바에서 비행기편으로 크라코프공항에 닿은뒤 다시 자동차로 아우슈비츠에 도착,예르지 브로블로브스키 박물관장의 안내로 수용소를 둘러보았다. 이총리는 1통으로 4백명을 죽였던 독가스통과 학살한 유태인으로 부터 잘라낸 7천㎏의 머리카락이 산처럼 쌓인 「살인공장」과 박물관을 거쳐 희생자들을 기리는 「죽음의 벽」에 헌화하고 방명록에 서명한뒤 3㎞쯤 떨어진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향했다. 이총리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촬영된 곳이기도 한 이곳에서 화장터의 폐허를 둘러본뒤 희생자 숫자에 해당하는 4백만개의 벽돌로 쌓아올려진 충혼비에 헌화했다. ○…이총리는 이에 앞서 14일에는 바르샤바에서 유태인 집단수용지역인 「게토」 위령비를 참배하고 헌화했다. 이총리는 예정에 없이 이루어진 이날 「게토」방문에서 유태인 안내인으로 부터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만행을 자세히 전해들으며 깊은 감회에 잠기는모습이었다. 이총리는 이날 유태인 안내인들에게 당시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해 달라고 주문,「4년 동안 수용소에서 고생하다 탈출했다」는 대답을 듣고는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고 위로했다.〈아우슈비츠=서동철 특파원〉
  • “「공직자 처우 개선」 민간서 요구해야”/이승우(공직자의 소리)

    ◎부실한 행정서비스의 피해자는 국민 우리나라가 지난해 드디어 소득 1만불 시대에 들어섰다.세계도 놀라고 우리도 스스로 탄복할 정도로 실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낸 대단한 성과다. 50년대의 전쟁과 폐허,60∼70년대 개발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로서는 요즈음의 풍요로움이 감격스러울 것이다.혼란과 갈등속에서도 개인적 가치를 희생해가며 이를 이룩해낸 선배세대에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그 중에서도 행정분야는 적합한 전략과 집행수단을 활용해 발전을 주도했다.열악한 환경과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역할에 보람을 느끼고 책무에 충실했다. 하지만 사회 각 분야가 선진화·세계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 행정분야와 공무원이 과연 과거와 같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가.민간의 능력이 향상되고 사회가 다양화되면 행정의 역할 및 서비스 수준도 달라져야 하지만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불편」하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공무원들도 민간분야에 비해 열등한 환경과 몰인정에 자조적인 모습만을 보이고 있다. 문민정부 출범과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행정서비스도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급속한 선진화와 다양화에는 따르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를 해결할 방안은 공직사회의 노력과 함께 공무원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지속적인 제도개선이다.특히 민간분야의 이해와 협조는 필수적이다. 민간분야 전문가들의 시각으로 볼 때 공무원들이 무능하고 답답하겠지만 지금의 행정체제가 고도의 서비스를 제공할만한 여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지 묻고 싶다.공무원은 민간의 전문가와 비교해 엄청나게 낮은 보수를 받고 있다.국가에 대한 충성심,공직에 대한 자부심만으로 박봉과 격무를 버텨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우수인력이 공직사회에만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적어도 민간에 걸맞는 인력이 공직에 남아 있도록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 이제는 공무원의 근무여건 개선을 공직내부 보다도 오히려 민간에서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날로 전문화되고 다양화되는 선진사회에서 능력없는 공무원과 부실한 행정서비스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국민이기 때문이다.〈내무부 지방공무원과장〉
  • 중국인의 반미감정/이석우 북경특파원(오늘의 눈)

    북경 서북쪽에는 원명원이란 1백만평규모의 청나라 황실의 별장 유적지가 폐허로 남아있다.북경의 자금성 못지않은 건축물이 있었다는 이곳은 1860년 영·불 연합군과 1900년 미국등 8개국 군대의 북경점령으로 초토화됐었다.이를 옛모습대로 복원하기보다 폐허상태로 자손대대 외세침략의 상징과 역사학습장으로 남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아편전쟁뒤 한세기동안 일본과 서양제국들에게 반식민지상태로 약탈당했던 중국인들에겐 외국인혐오와 피해의식이 아직도 사라지지않고 있다.중국상주 외국인이면 한두번씩 들어봤을 『너희들은 우리땅에서 많은 돈을 벌어가지 않느냐』는 항변에도 이런 심리가 깔려있다.중국인의 피해의식,잠재적 외국혐오증은 근래에 들어 중·미 관계악화뒤부터 미국 혐오증으로 집약돼 증폭되고 있다. 티베트문제에 대한 간섭,세계무역기구(WTO)가입 거부,지적재산권및 통산분야의 압력등에 이은 이번 미국의 대만문제에 대한 간섭은 중국인들의 반미감정을 고조시키고 있다.외교부대변인이나 택시기사,미국행 비자를 위해미영사관앞에 줄서있는 젊은이 할것없이 『미국이 왜 우리 집안문제에 간섭하느냐,대만은 국가 아닌 중국의 일부』라며 핏대를 올린다. 미국의 「차쇼우」(삽수·간섭)와 후견인역할을 맹비난하는 일치된 중국인들의 반응은 외국인에겐 의아할 정도다.미국의 대만에 대한 F16기 판매계획,미하원의 「국무성 대외원조법」통과등은 언론의 즉각보도로 중국인들의 반미감정을 더욱 북돋고 있다. 이런 반미감정의 바탕엔 강한 민족자존심과 초강대국에 대한 불쾌감이 자리한듯하다.16일 미사일훈련 종료를 보도하는 중국언론 태도는 국가대사를 완수했다는 자랑스럽고 당당한 어조다.역사·문화배경을 고려할때 중국의 대만문제에 대한 민감한 반응은 헤아릴수 있다.그러나 전인대기간중 군대표단회합과 인민일보등을 통해 계속 강조되는 「항미원조의 자랑스런 전통계승」운운은 우리주위를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한다.지난 50년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도와 미국침략을 격퇴했다는 이같은 개념은 대미갈등이 심화되면서 더욱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동맹을 안보 축으로 하는 한국외교가 다극화시대에 무엇을 해야할지 중·미 갈등은 우리에게 하나의 숙제를 안겨주고 있는것 같다.
  • 말빌 1∼2/로베르 메를르 지음(화제의 책)

    ◎핵폭발 이후의 미래세계 그린 소설 갑작스런 핵폭발로 폐허가 된 세상에 살아남는다면 어떻게 될까.이 책은 많은 이들이 전율하며 자문해 봤음직한 핵폭발 이후의 미래세계를 그린 소설이다. 잿더미 한가운데에서 「말빌」성의 폐쇄되고 튼튼한 지하실에는 프랑스 시골마을의 은퇴한 교장 엠마누엘을 비롯해 일곱명이 살아 남는다.이때부터 생존자들은 허허벌판에 남은 최소한의 자원으로 세계를 재건하려고 몸부림친다. 여기서 이 소설은 핵폭발을 다룬 다른 많은 작품들과 갈라선다.대부분의 소설이 핵폭발 후유증 등을 묘사,경계하는데 치중했다면 이 책은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 최초에 인간이 어떻게 규범과 기술로 공동체를 일궈냈는지 인류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호전적인 다른 생존자 집단과 「말빌」공동체가 맞부딪치면서 방어를 위한 살인이 정당한가 하는 물음이 생겨난다.남은 여자가 적어 일처다부제가 자리잡는 과정을 통해서는 남성중심적인 남녀관계가 결코 본질이 아님이 드러난다. 또한 강력한 지도력과 독재의 문제,선악 양면성을 가진 기술 등 인류문명 전반을 반성적으로 짚어보고 있다. 이재형 옮김,책세상 각권 8천원.
  • 해외건설 제2중흥기 맞았다

    ◎올해 13년만에 100억달러 이상 수주 기대/미분양 등 국내시장 침체로 외국진출 러시/공사 70% 아시아에 집중… 지역다변화 시급/30년간 76국서 3,400건… 래플즈시티 등 기념비적 건축물도 80년대 후반부터 침체였던 해외건설이 지난 2∼3년간 꾸준히 회복,올해에는 83년이후 13년만에 1백억달러 이상 수주가 기대되는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특히 건설업체들이 미분양아파트 누적 등으로 침체된 국내 시장을 벗어나기 위해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올해에는 1백8억달러 수주 예상액을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올해에는 해외건설업 면허 보유업체수가 처음으로 3백개를 넘어섰고 그간 해외사업이 부진했던 현대산업개발·코오롱건설 등 업체들도 해외 사무소 설치 등을 본격화하고 있어 전망이 매우 밝은 편이다. 우리가 해외건설사업에 진출한 것은 지난 65년 현대건설이 태국 고속도로공사에 참여한 이후 올해로 31년째다.해외사업이 장년기를 맞기까지는 한마디로 고난과 역경,영광이 뒤섞인 파란만장한 행로였다. 해외진출 초기인 60년대 말에는경험부족과 과당경쟁으로 일부 기업이 부실공사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첫 사업인 태국 파타니∼나라티와트간 고속도로공사에서 현대건설은 국제규격의 시방서 조차 잘모르고 시공에 임하는 어려움을 겪었다.그러나 당시 3백만달러에 이르는 재정 손실을 감수하면서 근면과 끈기로 이를 극복,해외진출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했다. 해외사업에서 우리를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88년 6월30일 이란의 캉간 가스정유공장 건설현장 참사.당시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와중에서 공사를 진행하던 대림산업의 현장 근로자 14명이 이라크 공군의 공습으로 숨진 것이다.공들여 짓던 공장도 하루아침에 폐허로 변해 건설의욕을 꺾었다. 해외공사 수주에서도 어려움은 많았다.70년대초 중동붐을 타고 호황을 누리던 해외건설은 2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로 타격을 받았고 84년 이후 지난 해까지 연간 1백억달러를 밑도는 지루한 침체기가 계속됐다. 60년대말∼70년대초 베트남 공사 때는 베트콩의 폭탄테러 위협이 잇따랐다.우리 건설업체들이 중동지역에 대거 진출하자 외국 경쟁사들로 부터의 수주방해 공작도 끊임없이 이어졌다.이 때문에 최저 입찰을 하고도 계약을 못한 대형 공사도 많았다. 그러나 역경이 많았던 것만큼 영광도 있었고 신뢰도 확고히 다졌다. 지난 30년간 우리 업체들은 세계 76개국에서 3천4백여 공사를 시공했다.그 가운데 리비아 대수로공사(동아)와 싱가포르 래플즈시티 빌딩(쌍용),말레이시아 페낭대교(현대),KLCC(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시티센터·삼성) 등은 세계 기념비적 건조물로 손꼽히는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동안 공사 종류별로는 건축이 1천4백75건으로 4백98억달러어치(누계 수주액의 41.4%)를 수주한 것을 비롯,▲토목이 1천57건에 4백56억 달러(38%) ▲기계가 5백25건 1백87억달러(15.6%) ▲전기·통신 1백93건 46억달러(3.9%) ▲용역이 1백98건 13억달러(1.1%)를 각각 수주,총 누계 수주액이 1천2백억달러를 넘는다. 지역별로는 ▲중동 16개국에서 8백92억달러 ▲아시아·대양주 21개국에서 2백81억달러 ▲미국·캐나다 등을 포함한 태평양 연안 11개국에서 21억달러 ▲아프리카 12개국에서 11억달러▲중남미 6개국에서 2억달러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 11개국에서 12억달러를 수주했다. 해외건설에서 이처럼 피땀을 흘린 결과 그동안 2백50억달러의 외화획득과 연인원 2백70만명의 고용창출로 국제수지 개선 및 중산층 확대로 국민경제 발전에 효자노릇을 했다.신기술의 도입·개발로 건설산업의 고도화를 촉진하고 건설기자재·금융·운송 등 관련산업의 국제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아직은 미국·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 등 선진 6개국이 해외건설시장의 80% 이상을 독점,이들 나라와 전략적 제휴를 통한 업체의 세계화가 시급한 형편이다. 또 우리 업체들이 맡은 해외공사 중 70% 이상이 아시아·중동지역에 집중,사업이 잘 되는 곳에만 너무 몰려지역 다변화도 서둘러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 유권자 혁명 필요하다(박화진 칼럼)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한국은 「한강의 기적」「경제기적」을 이룩한 나라로 유명하다.해방직후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던 한 영국특파원은 한국에서 민주정치의 성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찾는 것과 같다는 논평보도로 유명해진 적이 있다.한국에서 민주정치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일 것이라는 「포기와 체념」의 가슴아픈 지적이었다. 지난 반세기의 자유당 및 군사독재와 4·19,5·16,12·12,5·18등의 정치 격동사를 겪으면서 우리는 정말 구제받을수 없는 정치적 쓰레기통인가 하는 좌절을 몇번이고 경험하기도 했다.그러나 우리는 자유당과 군사독재의 오랜 정치적 암흑기를 거쳐 92년 마침내 민주선거를 통해 명실상부한 대망의 자유·민주·문민 대통령과 정부를 탄생시키는데 성공을 거둘 수가 있었다.그러나 그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찾은 정치기적의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6·25의 폐허에서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는등 오늘의 경제기적을 이룩한 우리는 이제 민족비원의 통일을포함하는 선진 민주정치의 기적도 이룩해야 하는 역사적 소명의 시점에 서있다.불과 2개월 앞으로 다가온 4·11총선은 바로 그러한 정치선진화 기적의 달성을 위한 중차대한 관문의 하나라 생각한다.선진 민주정치의 생명이 공명선거에 있으며 이번 총선은 그러한 공명선거 실현의 전통을 정착시킬 출발점이 될수 있을 것이냐의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회가 아닐수 없기 때문이다.오늘의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관행을 정착시킨 영국의 「부패 및 위법행위 방지법」의 정신을 살린 「통합선거법」등 제도적 장치도 이미 마련한 바 있는 정부는 작년의 6·27지자체 선거에 이어 이번에도 확고한 공명선거 실현의 결의에 차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진·민주·공명선거의 실현과 성공은 제도나 정부의 결의만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작년의 지자체 선거는 잘 보여 주었다.일선의 후보와 정당 및 그 지도자등 정치권은 말할것도 없고 특히 국민 즉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감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던가 한다.깨끗하고 공명한선거를 위해서는 물론 개인이나 지역이기가 아닌 객관적 의미의 국익에 부합되는 선거결과를 위해서도 그것은 절대적인 조건임을 실감할수 있었다. 이번 총선에 대한 최대의 위협도 결국 정치의 한국병인 일부국민들의 지역감정과 정치무관심 내지는 태만이 아닐까 관측되고 있다.특히 선거때 마다 드러나는 지역감정은 선진·공명·민주선거 실현의 한국정치·선거 혁명을 위해선 반드시 극복해야할 가장 중요한 장벽의 하나라는 진단이 내려진지 오래다.그 장벽의 극복을 위해선 정치권은 물론 국민의 각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문민정부가 추구·지향하는 정치및 선거혁명의 최종적 성패도 결국은 국민과 유권자들의 각성에 달려있다 할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가 그러한 각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전직대통령들의 투옥도 불사하는 과감한 정치·경제·사회개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찬성하고 지지하면서 투표는 그래도 지역당에 하겠다는 악습은 이번 총선 한번만이라도 탈피해보면 어떻겠는가.정부와민간단체 그리고 언론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적극적이고 사심없는 계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정당과 정치인들은 선거유세를 통해 국가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할수 있는 대북정책등에 대한 국익차원의 정책대결 내지 토론을 벌이고 유권자들도 지역감정이나 이기주의 혹은 정치적 무관심이나 태만을 떠나 정책과 토론을 부지런히 보고 들은후 가장 바람직하거나 덜싫은 정당과 후보를 선택하고 투표하는 바람직한 「선거문화의 기적」은 정영 불가능한 것인가.그렇지는 않다고 단호히 부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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