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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2)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2)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더 오를 곳이 없었다. 나무는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하늘 끝에 닿을 듯 솟구쳐 올랐지만, 맨 꼭대기 나뭇가지는 더 이상 오를 곳을 찾지 못했다. 하늘 문에 막힌 건지, 긴 팔로 무거운 하늘을 떠받친 건지…. 지상 42m의 높이에서 나무는 절대수평을 이뤘다. 하늘을 떠받치는 천신만고를 이겨낸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수평으로 무겁게 걸터앉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의 압도적인 풍경에 제압당한 채,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사를 씹어 삼키며 쓴 필자의 나무 칼럼 속 한 구절이다. 초여름 용문사 은행나무는 소나기를 머금은 구름을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쭉 뻗어오른 나뭇가지 끝부분이 절묘하게 수평을 이룬 모습은 그저 ‘장관’이랄 수밖에! 낮게 드리운 소나기 구름과 높지거니 솟은 나뭇가지의 아스라한 경계는 마치 땅과 하늘을 나누기 위해 잘 벼린 면도날로 선을 그은 듯한 수평이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설 신빙성 “소문만 듣다가 오늘 처음 보게 됐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1000년을 넘게 살아온 이유가 금세 이해됩니다. 전국을 다 돌아다녀도 이런 나무는 보기 어려웠어요.” 나무를 찾아 울산에서 왔다는 심규강(60)씨는 나무를 처음 만난 느낌을 여러 차례 감탄사로 표현했다. 나무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던 그는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진정한 우리나라 대표 나무’라고 강조했다. 용문사 은행나무 앞에서는 누구라도 감탄사부터 내놓는다. 구름을 떠받들고 선 높이에 감동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무려 42m다. 빌딩 한 층의 높이를 대략 3m로 볼 때 13층이 넘는 높이다. 눈어림이 가능하지 않다. 절집 지붕이 아득히 낮게 깔려 있음에도, 도무지 그의 높이는 한눈에 가늠할 수 없다.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험한 나무다. 특히 망국과 침략으로 이어진 시련의 민족사를 담았다는 점도 우리나라 대표 나무로서 손색이 없다. 나무는 신라 때의 고승 의상대사가 꽂아둔 지팡이가 자랐다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신라 최후의 임금 경순왕의 세자인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에 들어가던 길에 용문사에 들러 심은 나무라는 이야기에 보다 신빙성이 있다. 어느 쪽 이야기를 받아들이든 나무는 1100년을 넘은 긴 세월을 살아왔다. ●우리나라 최초로 벼슬을 한 나무 망국이라는 치욕의 설움을 안고 생명을 얻은 나무는 어쩌면 태생부터 수난의 역사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독특한 유전자를 가졌는지 모른다. 나무에 얽혀 전해오는 숱한 이야기들이 모두 민족 흥망성쇠와 관련됐기에 드는 생각이다. 일제 침략이 본격화하기 직전인 1907년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른바 정미의병 항쟁 때에 일본 군은 의병의 집결장소라는 이유로 용문사에 불을 질렀다. 절집과 숲이 불에 탔지만 나무는 용케도 버텨냈다. 사람들이 나무에 ‘천왕목’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도 그런 때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고종이 승하하던 날에도 큰 가지 하나를 스스로 부러뜨려 내려놓았다고도 한다. 뿐만 아니라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에는 큰 울음을 운다고도 한다.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온 나무의 명성을 일찌감치 잘 알았던 조선의 세종은 나무에 벼슬을 내렸다. 정삼품에 해당하는 당상관이라는 높은 벼슬이었다. 이는 소나무에 정이품 벼슬을 내린 세조보다 훨씬 앞서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벼슬을 한 나무가 용문사 은행나무다. 이 나무의 높이를 측정하는 데에는 곡절이 있었다.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던 1962년의 측정값은 60m였다. 그리고 40년 뒤인 2003년, 천연기념물을 재조사한 문화재청은 나무의 높이를 67m로 고쳐서 발표했다. 그만큼의 높이로 솟아오른 은행나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2005년 어느 공중파 방송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이 나무의 높이를 측정했다. 당시 방송사에서는 대형 크레인을 나무 앞으로 가져갔다. 크레인을 나뭇가지 끝까지 끌어올린 뒤 건축물의 높이를 측정하는 방법을 이용해 측정한 결과는 약 42m 였다. 이후 필자를 비롯한 관련 인사들이 의문을 제기했고 급기야 문화재청에서는 지난해 봄 특별한 발표 없이 나무의 높이를 42m로 수정했다. ●영원히 잃지 않을 강인한 생명력 “1000년이 넘었어도 강인한 생명력을 잃지 않는 참 영험한 나무예요. 여전히 가을이면 열매를 무성하게 맺어요. 해걸이를 하기는 해도, 많이 맺힐 때는 바닥에 떨어진 은행만 주워도 여덟 가마니 정도를 모으지요.” 용문사 주지 호산 스님은 가을이면 은행을 예쁜 바구니에 담아 나무의 가치,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분들께 선물한다고 했다. 나무에 담긴 생명력을 여러 사람과 나누려는 베풂이다.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로 숨쉬며 1000년을 살아온 나무죠. 같은 자연에서 나무는 사람으로부터, 사람은 나무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나무와 사람은 한몸입니다. 나무 뿌리 부분에 천연 해우소가 있잖아요. 그것도 사람과 나무가 하나의 순환 고리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죠.” 나무는 사람이 버린 것을 좋은 거름으로 빨아들여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다. 1000년의 생명은 결국 나무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자연의 순환 이치 속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글 사진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6-1 용문사 경내. 서울에서 양평 용문사를 가려면 서울외곽순환도로에서 이어지는 중부고속국도의 하남나들목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팔당대교를 건너 국도 6호선을 타고 27㎞쯤 가면 양평읍에 이른다. 양평읍에서 12㎞쯤 더 가면 국도변에 용문휴게소가 나온다. 여기에서 1㎞ 남짓 더 가면 마룡교차로가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난 나들목으로 나가서 곧바로 좌회전한다.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선 몇 굽이의 고갯길을 따라 5.7㎞를 가면 용문사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1.2㎞쯤 걸어 들어가면 절집 앞에 나무가 있다.
  • 세계서 가장 평화로운 국가는 아이슬란드…한국은?

    세계서 가장 평화로운 국가는 아이슬란드…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는 어디일까? 호주 시드니에 본부를 둔 연구기관 경제·평화연구소(Institute for Economics and Peace)가 지난 12일(현지시간) “2012년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는 아이슬란드, 덴마크, 뉴질랜드 순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매년 경제·평화연구소가 발표하는 세계평화지수(GPI) 2012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전세계 42위(지난해 50위)로 3년 만에 순위가 상승했다. 세계평화지수(GPI)는 경제·평화연구소가 고안한 세계 평화 수치로 전세계 158개국을 상대로 국내 및 국제분쟁, 사회안전과 치안, 군비확장등을 항목으로 측정한다. 이 조사에서 북한은 최하위권인 152위, G2인 미국과 중국은 각각 88위와 89위에 올랐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5위에 랭크돼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으며 캐나다(4위), 오스트리아(6위), 아일랜드(7위), 슬로베니아(8위), 핀란드(9위), 스위스(10위)가 톱 10안에 얼굴을 내밀었다.   지구촌 최악의 평화롭지 못한 국가로는 내전과 테러, 해적질이 성행하는 소말리아가 선정됐으며 아프카니스탄, 수단, 이라크가 그 뒤를 이었다. GPI의 창시자인 스티브 킬레리아는 “각국이 군사력 보다는 경제력 신장을 위해 노력한 결과 지난 2년에 비해 지구촌이 평화로워 졌다.” 면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평화지수는 지난해에 비해 크게 향상됐다.”고 밝혔다. 이어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147위)가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면서 “서유럽 국가 대부분이 상위 20위 안에 포함돼 가장 평화로운 지역이라는 기록을 이어가게 됐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오늘, 민주당의 노선과 대선지형이 갈린다

    오늘, 민주당의 노선과 대선지형이 갈린다

    민주통합당이 9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새 지도부를 선출한다. 이번 당대표는 4·11 총선 패배 후 유동성이 커진 민주당의 대선 경선을 관리할 뿐 아니라 야권 연대 및 대선 후보 단일화를 조율하는 그야말로 ‘킹메이커’ 역할을 한다. 민주당 지지층이 누구를 킹메이커로 삼을지 확정하는 자리다. 현재까지 총 10차례 권역별 경선에서 김한길 후보는 누적득표 2263표로 이해찬 후보를 210표 차로 앞서고 있다. 그러나 최종 승부처는 8일 당원·시민선거인단 현장 투표와 전당대회 당일인 9일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대의원 6071명과 정책대의원 2467명 등 8538명의 표심에다 투표율 73.4%를 기록한 모바일 투표 결과에 달려 있다. 시선은 치열한 선두 다툼을 하고 있는 친노(친노무현) 좌장 이 후보와 비노 진영의 대표 주자인 김 후보로 쏠리고 있다. 두 후보의 색깔 차이가 뚜렷해 민주당의 얼굴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당의 노선과 대선 지형도가 바뀔 것이라는 게 당 안팎의 예상이다. 두 후보는 이날 국회에서 잇달아 기자회견을 열어 최후의 한 표를 호소했다. 이 후보는 “당의 정체성인 당대표로 민생, 민주, 평화로 압축되는 60년 민주당의 역사와 정체성을 같이하는 후보를 선택해 달라.”며 “모바일 선거인단이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자신했다. 김 후보는 “민주당이 밀실 담합과 정략적 기술 및 정치공학에 의지하는 퇴행의 정치를 계속하느냐, 소통과 화합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정치를 선택하느냐의 갈림길에 있다.”며 “대선 승리를 위해 결단해 달라.”고 말했다. 승패는 민주당 대선 주자들의 운명과도 관계가 깊다. 당권 경쟁이 대선 주자 간의 전초전 성격이 짙어진 탓이다. 이 후보는 친노 유력 주자인 문재인 상임고문과 정치적으로 한 배를 탄 모양새다. 문 고문이 ‘이해찬·박지원 연대’의 한 축으로 비쳐지면서 이 후보의 승패가 자신의 대선 입지와 연계되는 상황이 됐다. 김 후보는 김두관 경남지사와 손학규 상임고문의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지난달 26일 치러진 경남 경선에서 김 후보의 승리는 김 지사의 ‘보이지 않는 힘’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중론이다. 경남 경선은 이번 당대표 경선에서 친노 분화의 정치적 분기점이 됐다. 김 후보가 이·박 연대를 정치적 담합으로 맹비난하며 탈계파 정치를 역설했다는 점에서 ‘김한길 민주당’은 대선의 역동성 확장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이해찬 민주당’ 역시 대선 판의 확장성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이·박 연대가 정치적 발목을 잡고 있다. 화합의 리더십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을지, 당내 최대 계파인 친노가 상정하고 있는 ‘문재인 대세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정국을 휘감고 있는 ‘색깔론’ 등 당 노선 및 정체성의 변화도 예고된다. “북한 인권 제기는 내정 간섭”이라는 발언으로 색깔 공세의 표적이 된 이 후보는 ‘악질적 매카시즘’이라는 수사로 반격에 나섰다. 경선용 강경 발언 성격도 있지만 길게 보면 여권과의 첨예한 대치를 예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김 후보는 “보수 진영의 신공안정국 술수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면서도 “민생 정치를 복원하자.”는 메시지로 국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4·11 총선 이후 한때 불거진 당 정체성 논쟁도 뇌관이다. 이 후보는 진보적 노선 강화를, 김 후보는 중도 노선 강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두 후보의 인식 차는 야권연대에서도 드러난다. 이 후보는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 유지론’에 무게를, 김 후보는 ‘야권연대의 재구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는 김두관 경남지사가 전날 제기한 ‘당 대 당 연대가 아닌 진보와 노동 가치를 중심으로 한 신야권연대론’에 대해 “통진당과의 연대가 얼마나 유의미한지 의문이 있고 당 밖에 안철수 교수가 있는 만큼 야권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미얀마 난민 카렌족 아이들의 전통지키기

    미얀마 난민 카렌족 아이들의 전통지키기

    미얀마·라오스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태국의 최북단 매홍손. 열대림으로 뒤덮인 산악 지대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이곳에 카렌족이 거주하고 있다. 본래 미얀마에 뿌리를 둔 이들은 가난과 핍박을 피해 국경을 넘어 이곳에서 난민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생 동안 목에 황금빛 쇠고리를 감아올리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카렌족 여성들. 8일 오후 8시 50분에 방송되는 EBS ‘세계의 아이들’에서는 기린 목을 닮은 카렌족 아이들이 전통을 지켜 나가는 모습을 전한다. 황금빛 링을 씻어 할머니께 드리는 13살 카렌족 소녀 무치. 할머니는 황동 고리를 받아 손녀의 목에 감기 시작한다. 카렌족은 다섯 살이 넘으면 목과 다리에 링을 걸기 시작해 조금씩 링을 늘려 나가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점점 늘어나는 링의 무게는 갈비뼈를 내려앉게 하고 목이 길어 보이게 하는데, 긴 목은 이들에게 미의 기준이 된다. 무치는 링을 목에 두르고 마캄 나무 진액을 이용해 얼굴에 작은 잎사귀를 그려 넣는다. 예쁘게 단장을 마치고 무치가 향한 곳은 상점. 대부분 카렌족의 수입은 관광 수입이기 때문에 무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도와 베를 짜고 스카프를 만들며 자랐다. 대를 이어 자신의 전통과 생계를 잇기 위해 황동 고리를 스스로 선택한 카렌족 소녀 무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더위를 피해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무치와 동네 아이들. 이들이 자리 잡은 곳은 시원한 동굴 속이다. 아이들은 나뭇잎의 윗부분을 잘라서 만든 멋진 부채로 서로를 부채질해 주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다시 한번 뚝딱뚝딱 칼질에 비를 막아 주는 멋진 우비가 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은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이번엔 자신들의 키보다 몇 배가 넘는 꽃나무에 겁 없이 오르며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진다. 카렌족은 미얀마의 소수 민족이다. 1948년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계속 독립 투쟁을 해 오다 미얀마 정부군이 카렌 반군의 마지막 저항지를 공격하자, 반군 가운데 일부가 태국으로 피난 와 정착하며 살아가고 있다. 독립을 꿈꾸며 60년 넘게 투쟁해 온 그들은 이제 국경을 떠돌며 오갈 곳조차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하지만 카렌족은 카렌어를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4가지 원칙을 꼭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 전통 복장을 하고 악기를 두드리며 카렌족의 행렬이 시작된다. 어른들의 뒤를 따라 아이들의 어설픈 몸동작이 이어지고 황금빛 링을 찬 카렌족 여성들이 일제히 환호성으로 힘을 북돋아 준다. 여전히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카렌족 아이들의 희망 이야기를 담아 본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1) 경기 남양주 수종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1) 경기 남양주 수종사 은행나무

    강원도 태백의 깊은 골, 금대봉 기슭의 검룡소(儉龍沼)에서 솟아오른 샘은 남한강이 되고, 금강산 금강천에서 흘러온 또 하나의 물줄기는 북한강이 된다. 두 강 줄기는 경기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만나 호흡을 고른 뒤, 민족의 젖줄 한강이 되어 수도 서울에 접어든다. 두 강물의 합강(合江) 풍경을 가장 잘 내다볼 수 있는 곳은 맞은편의 운길산 중턱쯤이다. 제법 가파른 운길산 등산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물머리의 저녁 노을 풍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오르는 사진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걷기 열풍과 함께 늘어난 등산객들이 부쩍 눈에 띈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동방의 사찰 가운데 최고의 풍광 “깊은 산은 아니지만, 수도권에서 이만큼 울창한 숲도 흔치 않아요. 숨이 찰 정도로 헉헉거려야 하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수종사에 닿지요. 숲도 좋지만, 절집 마당에서 보는 두물머리 풍경이 여느 등산 코스보다 좋지요.” 주말마다 수종사를 찾는다는 등산객 박순철(64)씨는 천천히 산을 오르며 한마디 던진다. 도시에 살면서 가까이에서 숲과 강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어 좋다는 이야기다. 그가 느릿느릿 오르는 해발 610m의 운길산은 큰 산은 아니라 해도, 길이 가팔라서 제법 숨이 턱에 찬다. 그 중턱에 아름다운 절집 수종사(水鐘寺)가 있다. 법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은 새로 지은 것이지만, 수종사는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이 지역 태생인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수종사를 “신라 때 지은 고사(古寺)”라며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물이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기 때문에 수종사라 한다.”는 기록을 ‘수종사기’(水鐘寺記)에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의 자취를 찾기 위해 수종사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의 등산객처럼 건강을 위한 등산 코스로, 혹은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일 뿐이다. 특히 저녁 노을 붉게 물들 무렵 수종사 법당 앞마당에서 내다보는 두물머리 풍광은 더할 나위 없는 장관이다. 이 풍광을 조선 전기의 명문장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동방의 사찰 풍광 가운데 최고의 전망’으로 꼽았다. 수종사의 아름다운 풍광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이 쌓아 온 심미안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셈이다. ●옛 절 중건 지시한 세조가 손수 심어 절집을 찾는 사람들의 자취는 허공으로 흩어지지만 그 안에는 수종사의 긴 역사를 증거하는 자취가 하나 있다. 큰법당을 비롯한 여러 전각 가장자리 언덕에 서 있는 은행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도 나무의 기세는 대단하다.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 앞의 안내판에는 나무의 키를 35m, 가슴높이 줄기 둘레를 6.5m라고 했다. 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한 1982년에 측정한 값이지만,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눈짐작으로는 대략 25m가 채 안 돼 보인다. 큰 줄기가 부러진 흔적도 찾을 수 없으니, 갑자기 나무의 키가 줄어들었을 리도 없다. 아무래도 애당초 부실한 측정이었지 싶다. 그러나 나무에는 숫자로 드러낼 수 없는 넉넉한 기품이 담겼다. ‘수종사’라고 이 절을 명명한 조선의 임금 세조가 손수 심은 나무인 까닭이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전국의 물 좋은 곳을 찾아다녔다. 그가 오대산 상원사의 약수로 목욕을 하고 돌아오면서 이곳 운길산 아래 마을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날 밤 세조는 신비롭다 해야 할 만큼 청아한 종소리를 들었다. 세조는 신하들을 시켜서 소리의 정체를 알아보라고 했다. 신하들은 “운길산 중턱에 폐허가 된 천년 고찰이 있는데, 그 터의 한쪽 바위 굴에 열여덟 나한이 줄지어 앉아 있다.”며 “신비로운 종소리는 그 바위 굴 옆의 큰 바위 틈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라고 아뢰었다. 물소리의 신비를 지키고 싶었던 세조는 옛 절을 다시 고쳐 세우라고 지시하면서 그 절의 이름을 손수 물 수(水)와 쇠북 종(鐘)을 써서 수종사라 했다. 1459년의 일이다. 절집이 완공되자 세조는 몸소 가파른 산길을 올라 종소리를 내는 샘물을 다시 찾아보고는 절집 마당 한켠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때가 정확하니 나무의 나이도 정확하게 554살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임금의 손길을 말없이 증거하는 음전한 생김새의 나무다. ●500년에 걸친 역사의 흐름으로 남아 세조의 은행나무는 사방으로 팔을 넓게 펼쳤다. 그 폭이 무려 20m나 된다. 더 넓은 세상을 품고자 했던 임금이 심은 나무여서인지 그의 품은 의젓하고 넉넉하다. 오래도록 거침없이 흘러야 할 민족의 젖줄 한강을 굽어 살피는 늠름함이 나무 줄기 깊숙한 곳에 배어 있다. 은행나무가 서 있는 언덕은 산 아래의 두물머리 주변 풍광을 조망하기에 좋은 자리다. 수종사 법당 앞마당과 함께 ‘동방 최고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자리다. 넓게 펼친 나뭇가지 아래에 들어서서 강촌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까지 평화로워진다. 나무 앞에 놓인 벤치에는 짧은 시간 동안 몇 쌍의 젊은 연인들이 스쳐 지났다. 이 땅의 평화와 역사를 지키며 서 있는 임금의 나무 아래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람 살이가 그렇게 하나 둘 쌓인다. 강마을에 땅거미 지고, 나뭇잎 사이로 비껴드는 햇살에 노을 빛이 스며든다. 옛 임금이 심은 은행나무 아래로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민초들의 가쁜 숨결이 새 역사 되어 천천히 내려앉는다. 글 사진 남양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가는 길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1060. 수종사는 자동차로도 찾아갈 수 있지만, 수도권에서 출발한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다. 등산로가 좁고 가팔라서 운전이 쉽지 않은 데다 주변 풍광이 걷기에 좋기 때문이다.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전철을 이용하면 남양주 조안면의 운길산역까지 1시간 남짓 걸린다. 운길산역 앞 삼거리에서 강변으로 이어진 국도 45호선의 청평 방면으로 800m쯤 가면 나오는 보건소 삼거리에서 수종사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300m쯤 가서 오른쪽 길로 약 1.5㎞ 오르면 수종사에 닿는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0)부산 나루공원 팽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80)부산 나루공원 팽나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 떠나간 사람이 그리워질 때면 옛사람들이 꺼내 들던 오래된 말이다. 함께 지내던 때에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편하게 지내지만, 떠난 뒤에야 비로소 그의 빈자리가 아쉽다는 생각으로 하는 말이다. 사람만 그런 건 아니다. 떠난 뒤에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대상으로 나무만 한 것이 없다. 나무만큼 흔한 것도 없기에 평소에는 일쑤 나무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스쳐 지난다. 꽃 피울 때나 단풍 물이 짙게 올라 도드라지게 화려한 자태를 보여 줄 때에만 겨우 한 번씩 바라보는 게 전부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뒤에 찾아오는 끝 모를 공허함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이른바 ‘뒤늦은 존재감’이다. ●2010년 작별인사… 이주비 2억 5000만원 “봄에 노란 꽃을 아롱아롱 피우고, 여름 지나면 검붉은 열매를 맺는 팽나무는 마을 살림의 중심이었죠. 놀거리도 먹거리도 많지 않던 어린 시절의 모든 생활은 바로 이 나무 곁에서 이뤄졌어요. 나무 주위를 뛰어다니고, 기어오르다 떨어진 일이 다반사였죠. 여름 지나면 나무 한 가득 맺히는 조그만 열매의 맛은 잊지 못합니다.” 부산 강서구 가덕도 율리 마을 지킴이 김성진(41) 통장은 마을의 수호목인 두 그루의 팽나무가 2년 전 대형 바지선에 실려 뱃길 50㎞의 먼 길을 따라 이사 가던 날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12가구만 남은 작은 마을에서 가장 젊은 축에 속하지만 나무에 대한 추억은 누구보다 많이 기억한다. 그러나 나무는 속절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할배나무, 할매나무라는 이름을 얻고 500년 동안 수굿이 마을의 살림살이를 지켜 주던 나무가 율리 마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건 2010년 3월이다. 키 10m, 줄기둘레 7m의 큰 나무를 옮겨 심는 공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두 달 넘는 준비를 거쳐 이사를 완료한 공사에는 2억 5000만원이 소요됐다. 나무가 원치 않는 이사를 채비한 건 가덕도 일주도로 개설 계획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도로를 설계하고 보니 도로 곁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나무 곁으로는 35가구의 살림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살림집은 적당한 보상과 함께 이주할 수 있었다. 마을의 생명줄 가운데 하나였던 마르지 않는 샘을 갈아 엎는 것까지도 사람들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삶을 지켜 주던 늙은 한 쌍의 팽나무가 그냥 쓰러지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무만큼은 살리고 싶었어요. 마을을 처음 일으킨 선조가 심고 대대로 의지하며 살아온 우리 살림살이의 기둥이고 삶의 역사거든요. 나무가 쓰러지는 건 우리가 쓰러지는 거라고 말할 수 있죠. 하지만 확정한 도로 설계는 조금도 변경되지 않더군요.” ●율리 마을의 살림살이를 지켜 온 수호목 김성진 통장의 부친 김영수(76) 노인은 나무가 곧 자신의 살아온 역사 그 자체였다고 보탠다. 마을 사람들은 온몸으로 공사를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어촌 사람들의 힘으로 현대화의 급속한 물결을 막아 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공사를 주관하는 쪽에서는 효과적인 완공에만 적극적이었다. 하릴없이 나무에 얹혀진 500년 삶의 무게는 산산히 부서져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때 부산시에서 나무를 살리겠다는 마을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공사 집행자 측의 계획을 절충하고자 했다. 오랜 토론 끝에 한 쌍의 팽나무를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전당’ 앞 수영강변 ‘APEC 나루공원’으로 옮겨가기로 결론지었다. “자리를 옮겨서라도 살 수 있게 됐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지만 나무가 떠난 뒤로 마을 살림살이는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지천으로 널린 피조개·새조개를 잡아서 아주 풍요롭게 살았지만, 갯벌을 갈아엎은 뒤로는 먹고사는 일이 묘연해졌죠. 살림이 힘들어질 때마다 우리를 지켜 주던 나무가 그리워질 수밖에요.” 불과 이태 전의 살림살이를 되돌아보며 한숨짓는 김 통장의 속내는 능히 짐작할 만하다. 김 통장의 손에 이끌려 나무가 서 있던 옛 마을 터를 찾았지만, 나무가 살았던 흔적은 이미 가뭇없이 사라졌다. 오순도순 살던 살림집들의 자취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면 여전히 마음속으로 나무가 그곳에 있을 것만 같은 환영에 빠진다. 그러나 마을 초입의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낯선 도로가 달콤했던 옛 추억을 깨뜨린다고 덧붙였다. 나무가 사라진 자리를 감도는 공허감은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온몸에 감겼던 붕대 풀고 싱그러운 잎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처음 생명의 싹을 틔운 자리에서 말없이 희망의 새싹을 틔우는 이 즈음, 율리 마을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떠난 할배·할매 나무를 만나기 위해 해운대 나루공원을 찾았다. 멀리 떠난 나무의 안부가 궁금해 도무지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는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오래 바라보면서 두 손을 모으고 말없이 나무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오로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고마운 마음이었다. 옛 마을에서는 낮은 지붕 위로 삽상한 그늘을 드리우던 나무였거늘 이제 그는 거꾸로 빌딩 숲 그늘에 덮였다. 바로 곁의 넓은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소음도, 도시 사람들의 분주한 걸음걸이도 나무에게는 낯선 풍경이다. 그가 500년을 보낸 율리 마을의 안온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그래도 나무는 미라처럼 온몸에 칭칭 감겼던 붕대를 벗고, 싱그러운 잎을 틔워 올렸다. 율리 마을 사람들의 실낱같은 안도감이 나무를 감돌자 나무는 오랜 벗을 만난 기쁨에 상큼한 바람을 허공으로 던진다. 낯선 곳에서도 끝내 생명을 내려놓지 않은 건 그동안 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평화와 안녕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성장과 개발, 그리고 사람과 나무의 더 평화로운 어울림이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풍경이다. 글 사진 부산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부산 해운대구 우동 1494 APEC 나루공원. 부산 APEC 나루공원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주변 주차 사정도 좋으니 자가 운전을 이용하면 편리하고 빠르게 나무를 찾아갈 수 있다. 부산 시내 어디에서 출발하든 광안리 방향으로 길머리를 잡고, 광안대교 못미처에서 부산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전당이나 신세계백화점을 찾으면 된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신세계백화점 주차장에서 나무까지는 불과 100m 남짓밖에 안 된다.
  • 어수선한 불교계… ‘부처님 오신날’ 봉축 법요식 두 표정

    어수선한 불교계… ‘부처님 오신날’ 봉축 법요식 두 표정

    “상처 깊고 커 치료 오래 걸릴 것”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 거취 관련 추가발언 없어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28일 ‘승려 도박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참회의 뜻을 거듭 전했다.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에서다. 자승 스님은 봉축사에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경사스러운 날 매우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밝혔다. ●자승스님 발언후 추가폭로 관심 그러면서 “현안의 본질이 예사롭지 않음을 잘 인식하고 있고, 상처가 깊고 크기에 치료 또한 어렵고 오래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며칠 전 거취와 관련, ‘임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대한 추가 언급은 없었다. ‘6월 초 발표하겠다.’는 쇄신안을 지켜봐 달라는 주문의 재확인으로 보인다. 자승 스님의 발언 수위를 본 뒤 ‘부처님오신날’ 이후 할 것이란 일부 스님과 인사들의 양심선언, 비위사실 추가 폭로가 실제 이어질 것인지를 놓고 관심이 쏠린다. ●2만여 사찰 일제히 법요식 한편 불기 2556년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이 이날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2만여 사찰과 암자에서 일제히 열렸다. 오전 10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법요식에는 종단 주요 관계자와 이웃 종교 대표, 정·관계 인사 등 사부대중 5000여명이 참석해 부처님오신날을 기렸다.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은 법어를 통해 “진흙 속에서 맑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나듯 모든 불자와 국민, 온 인류가 참나를 찾는 수행으로 마음에 밝은 지혜와 자비의 등을 밝혀 행복한 가정, 아름다운 사회,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자.”고 강조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부처님 우신 날… 참회하겠다” ‘룸살롱 파문’ 명진스님 “심려 끼쳐 죄송” 신도에 큰절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과 함께 2001년 ‘강남 룸살롱 출입 파문’에휩싸였던 명진(전 봉은사 주지)스님이 충북 제천시 덕산면의 월악산 자락 보광암으로 은거에 들어간 뒤 처음 맞는 부처님오신날인 28일. ●제천 월악산 보광암서 법문 보광암 앞마당에서 명진 스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욱하고 욕심 많은 제자들 때문에 ‘부처님 우신 날’이 됐다며 참회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리자 사부대중이 황망하게 동작을 따라 했다. 이날 법문에는 명진 스님과 함께하는 수행 모임인 ‘단지불회’ 회원 350여명이 참가했다. 명진 스님은 “열아홉에 출가했을 때 성철 스님의 법회 도중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며 머리통을 깨부수겠다고 할 정도로 원래 나란 사람이 방약무인, 안하무인이었다.”며 “세상이 나에 대해 온갖 비난을 털어놓을 때에도 ‘그 스님 좌파는 아니다’, ‘나름 훌륭한 수행자다’, 이런 식으로 옹호해 준 많은 신도들이 있을 텐데 그분들에게 미욱한 일로 심려를 끼친 것이 정말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부처님의 제자란 사실에 모멸감을 느끼실 텐데도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주신 여러분이 바로 부처라 여기고 참회의 절을 올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안거 동안 용맹정진할 것” 명진 스님은 “오늘 법문을 끝으로 6월부터 석 달 동안 문경 봉암사 하안거 결제에 들어가 용맹정진하겠다. 그때에는 더 훌륭한 수행자로, 부처님을 잘 받드는 존재로 돌아올 것을 약속드린다.”고 덧붙였다. 제천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작은 생활의 기쁨/구본영 논설위원

    무엇이 그리 바쁜지 쫓기듯 사는 게 요즘 도시 생활 아닌가. 너나 할 것 없이 출퇴근 길에 종종걸음을 치는 광경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불현듯 전원생활이 부러워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게다. 하지만 출판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보내 온 책을 읽고는 생각이 좀 바뀌었다. 무엇보다 “자연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면허증을 거저 발부하진 않는다.”는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다. 충북 제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목판화가 이철수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언이다. 그렇다. 남의 떡이 커 뵈는 것은 인지상정일 터. 하지만 한없이 평화로운 목가적인 삶의 뒤안길에도 농부의 굵은 땀방울과 가축의 분뇨 냄새가 배어 있기 마련이다. 이제부터라도 평범한 일상에서 소박한 생활의 기쁨을 찾아야 할 듯싶다. 문득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프랑스 격언이 생각난다. 오늘 저녁엔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작은 화분에 물이라도 줘야겠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마음에 지혜·자비의 등 밝히자”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과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불기 2556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18일 봉축법어와 봉축사를 각각 발표했다. 종정 진제 스님은 법어를 통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떨쳐버리고 내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반야의 밝은 지혜를 회복하기 위해 인인개개(人人個個)가 참나를 찾아야 한다.”며 “마음에 밝은 지혜와 자비의 등을 밝혀 행복한 가정, 아름다운 사회,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무명과 욕탐의 세계에 지혜와 나눔으로, 대립과 갈등의 삶터에 화해와 공존으로, 서로의 차이에는 존중과 상생의 말씀과 손길로 오신 것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뜻”이라며 “모든 이웃이 부처님의 지혜와 동행하자.”고 당부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화초 물주기/임태순 논설위원

    사무실 칸막이 너머로 이따금 ‘쉭 쉭’ 소리가 난다. 동료가 물뿌리개로 난초에 물을 주는 소리다. 소리가 듣기 좋다. 물을 주는 그의 모습이 무척 평화로울 것 같다. 덩달아 내 마음도 편안해진다. 생명의 세례를 받는 난초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기쁨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영화 레옹이 생각난다. 잔혹하고 냉혹한 전문킬러의 취미도 화초가꾸기다. 화초잎을 정성스럽게 닦고 해가 쨍쨍 내리쬐면 방안의 화초를 창가로 옮겨 밝고 따스한 햇볕을 쬐인다. 아마 그에게 화초는 생명이자 희망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화초에 물 주는 모습을 보면 별 감흥이 없었지만 요즘은 반갑고 정겹다. 한번도 화초를 가꿔본 적이 없는 맹문이지만 물을 주면서 화초와 대화를 하고,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 그 재미가 더없이 쏠쏠할 것 같다.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수양이 덜 돼서인지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멀지는 않은 것 같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도심 속 새들과 사람이 공존하는 길 찾기

    도심 속 새들과 사람이 공존하는 길 찾기

    이른 아침 멀리서 들려오는 청아한 새소리에 마음이 상쾌해진다. 도심 속 공원에서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새들의 노랫소리가 만들어내는 조화에 몸과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러나 많은 도시인들에게 새라는 존재는 기껏해야 거리를 어지럽히는 비둘기, 종종거리는 작은 참새, 새장 안에서 파닥거리는 잉꼬나 십자매 정도일 터. 14일 밤 11시 10분, EBS ‘하나뿐인 지구’는 새들의 도심 속 삶을 살피면서 함께 사는 길을 제시하는 ‘도시, 새에게 공존을 청하다’를 방송한다. 길가를 자세히 살피면 작은 새들을 만날 수 있다. 박새는 검은 넥타이가 반듯한 신사 같고, 사촌 격인 쇠박새는 턱수염을 달았다. 곤줄박이와 직박구리뿐만 아니라, TV에서만 보던 딱따구리도 공원이나 뒷산에 모습을 드러낸다. ‘숲 속의 건축가’로 불리는 오색딱따구리가 길가 나무에 둥지를 트는 현장이 카메라에 잡혔다. 심지어 아파트 정원수에 둥지를 튼 오목눈이와 멧비둘기도 있다. 올갱이 모양을 한 둥지에 눈도 뜨지 못한 오목눈이 새끼 세 마리가 있다. 어미는 경계심을 잃지 않고 조금씩 둥지로 날아올라 새끼에게 다다랐다. 먹이를 먹이고 배설물을 받아 어디론가 사라진다. 천적이 냄새를 맡고 접근하지 않도록 하는 행동이다. 반면 멧비둘기의 둥지는 엉성하다. 키가 작고 잎도 별로 달리지 않은 정원수에 둥지를 만들었다. 약한 바람에도 둥지는 심하게 흔들려 새끼들은 안쓰럽게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 이들은 왜 이곳에 둥지를 지었을까. 새들에게 도시는 살아가야할 터전이 됐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에는 새 구조를 요청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한 고층건물 밀집지역에서는 천연기념물 소쩍새가 상점 유리와 충돌하기도 했다. 새와 사람이 공존하는 길은 무엇일까. 서울 성수동 서울숲에서 인공 새집을 달아주는 사람들 등을 조명하면서 상생을 모색한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8) 경북 의성 사촌리 향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8) 경북 의성 사촌리 향나무

    이 땅에 처음으로 초록 세상을 일군 건 나무였다. 초록의 땅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은 나무가 좋았다. 나무 그늘에 들어서서 여름 뙤약볕을 피했고 비바람 눈보라도 나무 둥치에 기대 이겨냈다. 그래서 사람은 나무 곁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사람은 그 보금자리 앞 마당에 한 그루의 나무를 더 심었고 오래도록 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무가 아프면 사람도 아팠고 나무가 쓰러지면 사람의 집도 덩달아 무너앉았다. 사람과 나무와 집은 서로 다른 개체이지만 하나로 연결된 생명체였다. 식물과 동물, 심지어 주변의 모든 무생물까지 아우른 ‘천지만물이 본디 사람과 한 몸’이라는 양명학(陽明學)의 만물일체설이 바로 그것이다. ●유성룡의 외조부, 벼슬 버리고 내려와 심어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벌써 심상치 않다고 할 만큼근사한 정취가 느껴지는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안동 김씨 만취당파의 집성촌인 이 마을의 랜드마크는 김사원(金士元) 선생이 살던 고택이다. 선생의 호를 그대로 따서 만취당(晩翠堂)이라 이름한 이 집의 대청마루에 앉아 내다보면 하늘 가장자리에 걸리는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 바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07호인 의성 사촌리 향나무다. “내가 향나무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이만큼 좋은 향나무는 그리 많지 않을걸요. 500살이나 된 나무가 젊은 나무 못지않게 싱싱한 데다 잘생기기도 했잖아요.” 나무 그늘에 기대어 자리 잡은 살림집에 사는 김재열(79) 노인은 가만히 선조의 얼이 담긴 나무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나무를 심고 애지중지 키운 사람은 김 노인의 방계 13대조인 조선시대 문인 김광수(金光粹, 1468~1563)다. 서애 유성룡의 외조부인 김광수는 연산군 때에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벼슬살이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이 마을에서 시를 읊으며 평생을 보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그는 강가에 영귀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짓고 자연에 묻혀 안분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사촌리 향나무는 500년 전에 그가 손수 심은 여러 나무 가운데 한 그루다. 오래전부터 선비들이 살던 사촌리는 여태까지 전통 가옥을 보존하고 덧붙여 몇 채의 초가를 복원해 옛 전통 선비마을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평화로운 곳이다. “옛날에는 아주 큰 마을이었지요. 한창 때 400가구가 넘게 살았는데 지금은 죄다 떠나고 고작 60가구만 남았어요. 천천히 돌아보면 알겠지만 옛 모습은 많이 남아 있어도 지금은 빈집 투성이예요.” 사촌리를 대표하는 만취당 역시 지금은 살림을 하지 않는 문화재로만 남았다. 살아있는 생명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건 만취당의 기와가 도도하게 빚어낸 곡선에 맞닿은 채 당당한 기품으로 서 있는 사촌리 향나무다. ●모진 풍파 이겨내고 하늘로 치솟은 가지 사촌리 향나무는 키가 8m에 불과하고 나뭇가지도 사방으로 3m 정도 펼쳤을 뿐이다. 규모에서 결코 큰 나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옛 선비의 전통과 품격이 남아있는 마을 중심을 지키고 서 있는 나무의 기품은 여느 향나무를 훌쩍 뛰어넘는다. 나무를 스쳐 간 모진 풍파를 이겨낸 자취라도 되듯 나무는 몽실몽실 피어나는 뭉게구름처럼 올망졸망 덩어리를 이뤘다.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점잖게 뻗은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이 이룬 덩어리는 하늘로 솟구쳤고 저마다 끝 부분은 뾰족하게 마무리했다. 줄기 곳곳에는 가느다란 가지들을 정성껏 다듬어낸 흔적도 눈에 들어온다. 정원수로 잘 가꾸려 애쓴 옛 사람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김광수가 살던 당시, 마을의 길가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 소나무를 좋아한 그는 무시로 소나무 그늘을 찾았다. 더불어 그는 권세와 부귀를 좇지 않으며 소나무 그늘에 머무르는 은자의 삶을 실천하겠다는 생각에서 스스로를 송은(松隱) 처사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로 심고 키운 한 그루의 나무에는 ‘만년을 살아야 할 소나무’라는 뜻에서 만년송(萬年松)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그가 심은 나무는 사실 향나무다. 자연에 묻혀 자연의 생명을 닮으며 살았던 그에게 향나무와 소나무를 구별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무처럼 제 본분에 만족하는 안빈낙도의 삶을 살고자 한 그에게 세상의 모든 나무는 하나로 연결된 생명이었을 뿐이다. 평생 자연을 벗했던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일생을 모범으로 삼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천성을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했던 그의 가르침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연과 하나 되는 만물일체설의 삶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가 많이 오면 나뭇가지가 조금씩 부러지기도 하고 잎이 떨어져 내 집 지붕에 쌓이지요. 청소가 번거롭기야 하지만 그걸 불편하다고 할 수는 없죠. 그게 다 자랑스러운 선조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지요.” 선조들이 가꾸어 온 자연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그 정도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 노인의 느릿한 말투에 사람과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옛 선비의 자연주의 정신이 배어 있다. 선조의 정신을 올곧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후손들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이되 그 가운데 사람의 마음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양명학의 정신에 다가선 지혜를 닮은 생각이다. 노인의 지혜로운 말들이 사뿐히 내려앉은 나무 그늘에서는 무더기로 피어난 파란 빛깔의 제비꽃이 생명의 노래를 외장쳐 부른다. 나무와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사람의 맑은 마음을 따라 피어난 풀꽃이 빚어낸 선비마을의 늦은 봄 풍경이다. 글 사진 의성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5. 중앙 고속국도의 남안동나들목으로 나가서 3㎞ 가면 나오는 운산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의성 방면의 국도 5호선을 이용한다. 1.4㎞ 가면 나오는 교차로에서 고운사 방면의 오른쪽 나들목으로 나가 고가도로 아래로 좌회전한 뒤 다시 우회전하여 4㎞ 남짓 간다. 팽목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9㎞ 가면 후평 삼거리에 닿는다. 좌회전하여 4㎞쯤 가면 사촌리 가로숲이 나오고 길가에 주차장이 보인다. 나무는 마을 안쪽에 있으나 주차 공간이 없으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걷는 게 좋다.
  • 원시의 삶·현대가 공존하는 파푸아섬

    원시의 삶·현대가 공존하는 파푸아섬

    남태평양에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 파푸아. 사라져 가는 미개척지 중 하나로, 이질적인 것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다. 태초부터 존재했던 자연과 전통을 지켜온 인간의 공존, 나체의 원시적 삶과 서구 기독교의 조화, 해양스포츠의 명소가 된 산호색 바다와 인도네시아 최고봉의 만년설 등이 그것이다. 7일부터 10일까지 매일 저녁 8시 50분, EBS ‘세계테마기행’은 ‘마지막 원시, 파푸아’를 4부작으로 방송한다. 세계 곳곳을 떠돌며 사막 마라톤을 완주한 최명재 소아과 전문의가 제작진과 함께 석기시대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한 원주민 다니족, 센타니 호수에서 벌어지는 부활절 축제, 산홋빛이 녹아든 바다가 아름다운 환상의 섬 퍼다이도를 거쳐 인도네시아 최고봉이 있는 발리엠 밸리로 향한다. 7일에는 원시 부족의 삶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석기시대로의 여행, 다니족’을 방영한다. 첫 여정은 파푸아의 오지, 와메나에서 시작한다. 이 지역 한복판에서는 ‘코테카’라고 불리는 성기 가리개만 걸친 다니족의 남자들을 만날 수 있다. 다니족은 깊은 산 속에서 소금을 채취하고, 돼지기름에 숯을 으깨 몸에 발라서 체온을 유지하는 원시시대 삶을 유지하고 있다. 돼지잡이 축제에서는 돌을 구워 땅 속에서 채소와 돼지고기를 익히는 전통요리 ‘바라크 바투’, 독특하게 생긴 열대과일 등을 맛볼 수 있다. 2부 ‘마음의 고향, 센타니 호수’(8일)에서는 파푸아의 주도 자야푸라 근처에 있는 타블라누수 해변을 찾는다. 발아래 부서지는 산호와 돌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웅는 돌’(Crying Stone)이라고 불린다. 대표적인 휴양지인 아름다운 산호초 해안은 사진작가들을 끊임없이 불러모은다. 센타니 호수는 파푸아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호수에는 전통 주거지인 수상가옥이 평화로이 떠 있다. 민속예술 ‘바크 페인팅’(나무껍질 회화)을 감상하고 기독교 부활절 축제 ‘파스카’를 경험한다. 새벽 3시에 횃불을 들고 동네를 한 바퀴돌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축제는 종교적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정신을 쏙 빼놓는 흥겨운 시간이다. 이어 3부 ‘천상의 바다, 퍼다이도 섬’(9일)에서는 전통춤 ‘요스판’을 즐기고, 스노클링과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에메랄드빛 바닷속을 누비는 시간이다. 섬사람들은 소박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지만 병을 앓아도 치료를 받기 힘들다. 섬에 있던 유일한 병원이 몇 달 전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최명재 의사는 섬사람들에게 진료를 하며 짧지만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시간 ‘원시와 현대의 공존, 발리엠’(10일)에서는 파푸아 섬 최고의 여행지로 각광받는 광대한 계곡, 발리엠 밸리를 찾는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CEO 칼럼] 신의는 미래성장의 열쇠이다/김창범 한화L&C 대표

    [CEO 칼럼] 신의는 미래성장의 열쇠이다/김창범 한화L&C 대표

    알프스 아래 스위스의 평화로운 호수도시 루체른. 옛 시가지 빙하공원 안에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의 라이언기념비(빈사의 사자상)가 자리하고 있다. 사자는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튈르리 궁전(현재 루브르 미술관)을 지키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상징한다. 이들은 혁명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항복하면 스위스와 국민의 신의(信義)가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중국 춘추시대 5패(五覇)의 한 사람이었던 진(晉) 문공(文公)은 왕위에 오르기 전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의 충신 개자추(介子推)는 문공이 아사(餓死) 지경에 놓이자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먹일(割股啖君) 정도로 헌신적으로 그를 보필했다. 개자추는 이후 문공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주군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까 논공행상을 마다하고 노모와 함께 면산(綿山) 깊숙이 들어가 은둔생활을 했다. 이를 알게 된 문공은 개자추를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나 통하지 않자 결국 면산에 불까지 질렀으나 그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 스위스 용병들과 개자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군주를 위해 헌신한, 신의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스위스의 신뢰는 은행업과 시계산업 발달로 이어졌으며, 교황청이 지금까지 500년 이상 스위스 용병을 근위병으로 쓰고 있는 배경이 됐다. 또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한식(寒食)에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것으로 군주를 향한 개자추의 신의를 애도하고 있다. ‘믿음과 의리’, 신의의 사전적인 의미다. 신의는 다른 이와의 관계, 곧 사회적 관계의 기초 덕목이다. 신의가 없이는 건강한 사회적 관계 형성이 불가능하다. 신의는 기업 경영에서도 필수 조건이다.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창출이며, 기업이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소비자들로부터 제품과 서비스 등을 선택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들은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기업들이 제품에 조그만 문제라도 발생하면 리콜(회수) 조치를 취한다. 그러지 않는 기업들이 이미지 하락과 매출 급락에 직면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업 역시 사회 구성원의 하나라는 점에서 신의는 일종의 의무이기도 하다. 혼자 빨리 가기보다 함께 간다는 경영이념을 바탕으로 한 노사 간 화합의 믿음과 협력업체와의 상생의 믿음이 없다면 시너지가 창출되기는커녕 제대로 된 제품 하나 생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회 안에서의 신의의 가치는 그 어떤 덕목보다 크다. 신의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각종 이념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끝까지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다. 하지만 신의는 종종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성과주의와 미래를 읽지 못하는 현실 안주로 외면당한다. 일본 최대 식품회사였던 유키지루시(U) 유업은 2000년 대규모 집단식중독 사고에 대해 거짓말과 발뺌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신뢰가 무너져 75년 역사의 명문 기업이 몰락하는 데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는 기업의 영속성에서 고객과의 신의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없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사회와 기업이 효율적이고 바람직하게 운영되는 원리는 현학적 이론이나 미사여구에 있지 않다. 최고경영자(CEO)는 주주와 고객의 가치를 위해, 정치가는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며 신의를 지킬 때 기업과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가 세분화되고 다양화될수록 신의의 가치는 상승하고 있다. 스위스 용병들과 개자추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덕목은 수백년이 지난 현재에도 우리 사회가 갈등이 아닌 공존이, 미움이 아닌 사랑이, 외면이 아닌 돌봄이, 폭력이 아닌 평화가 넘쳐나는 곳으로 성장하기 위한 열쇠가 될 것이다.
  • [영화프리뷰] ‘백설공주’

    [영화프리뷰] ‘백설공주’

    평화로운 왕국에 새 왕비가 들어온다. 얼마 뒤 왕은 실종되고 왕비가 집권한다. 왕비의 사치 탓에 왕국은 파산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왕비에겐 재정건전성보다 더 큰 골칫덩어리가 있었으니, 왕의 외동딸 백설공주다. 왕비는 10년이 넘도록 공주를 가둬 놓는다. 어느 날 화적질을 하는 일곱 난쟁이에게 털린 발렌시아 왕국 앤드루 왕자가 왕비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왕비는 훈훈한 외모에 경제력까지 갖춘 왕자를 낚아 인생역전을 노린다. 문제는 왕자가 백설공주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 올해는 야콥과 빌헤름 그림 형제가 독일의 설화들을 편집한 ‘그림동화’가 출판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다. ‘헨젤과 그레텔’, ‘잠자는 숲속의 미녀’, ‘빨간모자’도 유명하지만, 그림 형제의 최대 히트작은 뭐니뭐니 해도 ‘백설공주’다. 5월에만 두 편의 백설공주 영화-타셈 싱 감독의 ‘백설공주’(3일 개봉)와 루퍼트 샌더스 감독의 ’스노우화이트 앤 헌츠맨’(31일 개봉)이 잇따라 개봉된다. 타셈 싱 감독의 버전은 애니메이션 ‘슈렉’의 세계관으로 재해석한 백설공주쯤으로 생각하면 무리가 없다. 팝스타 필 콜린스의 딸 릴리 콜린스가 연기한 백설공주는 더는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지 않는다. 빼앗긴 왕국을 되찾으려고 어리바리한 왕자의 도움을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칼을 빼들고 적과 맞선다. 300대1의 경쟁을 뚫고 8500만 달러(약 965억원)짜리 판타지 대작의 주연을 꿰찬 콜린스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얼굴과 단호한 여장부의 모습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할리우드의 블루칩임을 입증했다. 로맨틱코미디의 여왕 줄리아 로버츠가 늘어 가는 주름과 뱃살 걱정이 많은 여왕으로 등장한 것도 흥미롭다. 그녀 최초의 악역 캐릭터라고는 하지만, 사악하고 어두운 동화 속 왕비라기보다는 푼수끼 넘치는 귀여운 악당에 가깝다. 뮤직비디오와 광고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싱 감독은 이번에도 화려한 색채와 조명, 의상으로 동화의 세계를 실사로 구현했다. 물론 ‘더 셀’(2000),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6), ‘신들의 전쟁’(2010)에서 호흡을 맞춘 의상 디자이너 에이코 이시오카(1938~2012)의 공이 크다. 1992년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린 이시오카는 세계 최고의 비주얼 아티스트로 명성을 날렸지만, 지난 1월 타계했다. 훗날 이 영화는 ‘발리우드의 할리우드 공습’(봄베이+할리우드의 조어로 인도 영화산업을 의미)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콜린스가 인도풍 노래를 부르면서 동료 배우들과 인도 영화 특유의 떼춤을 춘다.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에도 군무가 나오지만, 인도 뭄바이(봄베이의 새 이름)가 배경인 데다 인도 배우들이 무더기 출연했기 때문에 경우가 다르다. 북미 등에서는 지난 3월 30일 먼저 개봉했다. 30일 현재 흥행수익은 1억 3537만 달러를 기록 중이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CEO 칼럼] 지금이 더 겸손해야 할 때/최흥집 강원랜드 사장

    [CEO 칼럼] 지금이 더 겸손해야 할 때/최흥집 강원랜드 사장

    어느덧 세상은 온통 연초록으로 물들었다. 따스한 햇살 아래 빛나는 신록은 보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든다.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나누는 직장인들, 나무 그늘 아래서 이들을 쳐다보는 인자한 표정의 할아버지. 이 평화로운 풍경처럼 우리 사회가 항상 안정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사람은 다른 이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 또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나 회사 등 많은 조직이나 단체의 일원이 된다. 수많은 조직들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리더들을 보고 또 만나 왔다. 그리고 훌륭한 지도자를 가진 조직이 성공하고, 잘못된 지도자를 만난 조직이 한순간에 붕괴되는 것도 숱하게 봤다. 흔히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로 ‘카리스마’를 꼽기도 한다. 진정한 카리스마는 힘이나 권력에서 나오는 강제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스스로 따르는 것에서 생긴다.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는 리더는 독재자일 뿐이다.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따르게 한 지도자의 일화를 ‘논어’에서 찾을 수 있다. 논어 가운데 공자가 거론한 인물평을 모은 것이 ‘옹야’편이다. 여기에 ‘맹지반’(孟之反)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노나라의 대부인 맹지반은 다른 나라와 전쟁이 벌어지면 부하들을 이끌고 전쟁에 출전하는 장군이었다. 한번은 노나라와 제나라가 전쟁을 치르게 됐다. 제나라는 노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나라다. 이 전쟁에서 맹지반은 선봉에서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하게 되어 노나라 군대는 후퇴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우왕좌왕할 때, 맹지반은 부대의 후미에서 노나라 병사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적을 맞아 싸웠다. 이윽고 병사들이 노나라의 성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는 자신의 어깨에 박혀 있던 적군의 화살을 빼들고서는 그것으로 말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본대에 합류했다. 이를 본 사람들이 그의 용맹을 칭송하자, 그는 “내가 일부러 후미에 서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말이 잘 달리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공자는 “맹지반은 자신의 공을 자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구나.”하며 그의 겸손을 높이 평가했다. 이렇게 하여 그의 이름은 겸손의 상징이 되어 ‘논어’와 함께 영원히 남게 됐다. 겸손(謙遜)의 겸(謙)자는 언(言)자와 겸(兼)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겸(兼)은 ‘두 개의 벼 줄기를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모양’을 나타낸 글자다. 한 손으로 두 개의 벼줄기를 잡고 있는 것은 ‘갑절로 일하다’라는 의미이며, 겸직과 같이 어떤 일을 함께 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말을 나타내는 언(言)자가 합쳐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양’, 즉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뜻을 가진다. 손(遜)은 손자 손(孫)자와 달린다는 착(?)자가 합쳐진 글자로, 어린 손자가 달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조심스러운 자세를 의미하는 겸손의 의미가 완성됐다. 리더의 카리스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잡느냐에 달려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다. 곧, 겸손한 리더가 훌륭한 리더이다. 겸손한 리더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직을, 사회를,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 리더의 오만은 쉽게 부정과 부패, 부조리를 불러온다. 독선적인 지도자를 가진 나라의 불안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봐 왔다. 새로운 계절을 맞는 세상의 평화로움을 보며 남보다 자신을 낮추고, 또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맹지반을 통해 리더의 겸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누구보다도 지난 4·11 총선에서 영예의 금배지를 딴 선량들이 반드시 실천하기를 바란다.
  • [김문이 만난사람] 벽안의 한옥 지킴이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벽안의 한옥 지킴이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교수

    심심함은 재미의 시작이다. 옛날이다. 임금이 밤중에 심심하면 경복궁 오른쪽(서쪽)에 사는 사람들을 몰래 불렀다. 엊그제 청나라에 다녀온 역관한테는 뒷얘기를 들었다. 청나라 옥좌는 어떻게 생겼고, 신하들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어떤 맛있는 음식이 나왔는지, 술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증이 한두 가지가 이니었다. 그 다음에는 중인, 아전, 화가, 서예가 등을 차례로 불러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었다. 경복궁 왼쪽(동쪽)에 사는 양반들은 뻔한 얘기를 하기 때문에 서쪽 사람들의 얘기가 훨씬 진솔하고 재미있었다. 특히 양반들보다 글솜씨가 뛰어난 ‘송석원’ 같은 문집을 보며 세상의 진솔한 이치와 푸짐함을 느꼈다. 요즘 서촌(西村)이 주목을 받는다. 경복궁 서쪽 마을이다. 동네가 여럿이다. 효자동, 누하동, 누상동, 통인동, 옥인동, 필운동, 청운동, 체부동, 적선동 등 10여개 동네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서촌은 서인, 그중에서 소론이 살았다. 세종대왕 이도가 서촌에서 태어났고 필운 이항복,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시인 윤동주, 화가 이중섭이 서촌에 살면서 예술적 끼를 맘껏 발산했다. 근래 들어서는 한국화가 이상범, 박노수 가옥이 유명하고 소설가 박완서가 다닌 매동초등학교, 육영수 여사가 다닌 배화여고, 고(故) 정주영 현대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 현정은 현대그룹회장 등이 단골로 드나들었던 유정미용실 등은 여전히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아 참, 또 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로 알려진 형제이발관이 오롯이 추억을 말해 준다. 서촌에는 한옥 663가구가 있다. 서울 한복판에, 그것도 옛날 임금님이 살던 경복궁 바로 옆에 추억과 역사를 도도히 품고 세월속에 알뜰하게 존재해 있다. 이러한 가치를 위해, 이러한 보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외국인이다. 2008년 국내 최초로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된 미국인 로버트 파우저(51)가 주인공이다. 1년 전부터 서촌주거공간연구회 회장을 맡아 서촌지역 한옥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파란 눈의 이방인이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시작했다고 하지만 서촌의 난개발이 안타까워 그 길을 택했다. 지난 23일 오후 경복궁 옆 서촌 길가에서 만났다. 점퍼 차림에 웃는 모습인 그는 “사진도 찍나요. 그럴 줄 알았으면 옷을 달리 입을걸.”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 정감이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수더분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약속 시간보다 다소 늦은 탓에 그는 “신문사도 마감을 중요하게 여기지요. 다문화 사회에 대해 원고를 쓰느라 좀 늦었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한다. 사는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북촌에서 살아요.”라고 답한다. 서촌을 사랑하는 사람이 왜 북촌이냐고 했더니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 많아요. 원래는 서촌에 살았지요. 그런데 집 근처에 빌딩을 세우고 난개발을 하더군요. 그래서 북촌으로 집을 옮겼습니다.”라고 까닭을 말한다. 북촌 집은 방이 세칸 딸린 한옥이다. 미국과 일본에 있는 친구들이 한국에 올 때면 자신의 집에서 재우며 한옥 자랑을 한다. 그와 함께 서촌 골목을 다니며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누하동 일대를 갔다. 마침 10층 빌딩을 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청계천 발원지 복원·생태보존 건의 성사 “저거 보세요. 인왕산과 북악산을 가리잖아요. 한옥 보존지역이라고 해놓고서는 저런 건물을 지으면 어떡하지요. 경관이 막혀서…. 한옥의 가치가 뭔지, 햇빛을 가리고, 뉴욕 같으면 이런 일이 절대 있을 수 없어요. 아마 2~3층 정도면 몰라도 말입니다.” 시인 노천명의 가옥 앞으로 장소를 옮겼다. 파란 눈의 이방인이 한옥 사랑을 얘기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얼핏 생각난다. 개발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이라면 어떻게 바라볼까. 그는 2009년 누하동에 1년 동안 살다가 집 인근에 빌딩이 들어서는 바람에 “성질 나서” 북촌으로 이사했다. 그런 다음 2011년 서촌주거공간연구회를 설립했다. 서촌 한옥과 아름다운 골목들을 지키기 위해 매일 서촌 사람들과 만나 ‘서촌의 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지금은 회원이 500여명에 이른다. 이들 중 정회원 30명은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서촌 발전을 위해 토론을 한다. 서촌을 어떻게 하면 잘 지킬까. 정보교환도 하고 소식지도 발간한다. “연구회 모임에는 3개 분과가 있습니다. 이야기 분과, 한옥 분과. 자연생태 분과 등으로 나눠져 있지요. 그동안 어떤 일을 했냐고요. 청계천 물줄기의 발원지인 수성동 계곡을 복원하면서 원래 그대로, 그러니까 자연생태를 보존하도록 서울시에 건의해 성사되도록 했습니다. 또 천재 시인 이상의 집 철거계획을 유보시켰지요. 서촌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세미나도 열고 동네 공동체 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참, 지난 주에는 벚꽃축제를 함께 열었고 시각 장애인 가족들, 환경연합 가족들과 씨앗 나눠 주기 행사도 했습니다.” 한국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미시간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한 그는 일본에서 10년 정도 살았다. 그러면서 1983년 서울대에서 1년 동안 한국어 공부를 했고 1987~88년 카이스트(KAIST)와 고려대에서 영어 강사를 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살던 그는 2008년 서울대에서 연락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왔다.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에게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직을 맡게 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법을 강의하고 있다. “일본에 있을 때에도 아파트에 살기 싫었습니다. 한국에 오면서 지도를 들고 북촌도 가보고, 삼선교도 가보고, 필동도 가보고 그러다가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서촌의 한옥을 정했습니다. 마침 이웃에는 미술을 하시는 분, 글을 쓰시는 분, 건축을 하시는 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서촌 한옥은 옛날 한옥과 비슷해서 추억하기 딱 좋습니다. 그런데 개발을 하는 바람에 북촌으로 떠나긴 했지만 올해 말에는 다시 서촌으로 집을 옮길 예정입니다.” ●한옥 손대고 고치면 역사성 못 느껴 괴물 그에게 한옥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었다. 웃으면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오늘은 오래된 한옥이 역사성을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되지 않은 것은, 중간에 손대고 고친 것은 역사성을 못 느낀다. 괴물 같은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서촌은 한옥의 미래를 간직한 곳이란다. 그러더니 “서울시가 생각하는 한옥은 조선시대의 것을 축소시키려 한다.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어 한국 사회에 대한 소감을 잠시 피력한다. “한국 교수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 성공, 성공 하는 말을 자주합니다.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 어느 정도 이너프(enough, 충분) 단계에 이르면 나눠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삶의 질이란 그런 것이고 태어나 살면서 사회 공헌도 해야 하거든요. 서촌주거공간연구회 모임도 그런 차원입니다. 앞으로 다문화 사회, 열린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싶은 것이 저의 소망이자 바람이지요.” 그가 가르치는 제자(한국어 교사 지망생)들에게 항상 이런 내용을 강조한다고 했다. 전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차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부분에 중요성을 더 둔다는 것이다. 미시간에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가 일본으로 파병된 인연으로 일찍 동아시아 쪽에 관심을 두었다.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일본 교토에선 1950년대 지은 비좁은 흙집에서 살았어요. 한국의 서촌도 교토와 느낌이 비슷해요. 좁은 골목이라든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북촌은 요즘 영화 세트장처럼 변했어요. 빨리 서촌으로 이사해야지요(웃음).” ●서촌 개발 갈등 조정해 한옥 잘 지킬 것 경복궁과 청와대 서쪽인 서촌은 192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삶의 형태가 간직된 근현대 생활박물관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요즘 평화로운 마을에 한옥 열풍과 ‘제2의 삼청동’ 바람이 불어닥쳤다. 부동산 투기와 개발 바람을 타고 한옥의 가치가 상승하자 이를 비싸게 매입한 투자자들이 다시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한옥을 바꾸려고 한다. 때문에 서울시와 원주민,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 간에 복잡 미묘한 갈등도 더러 생겨나고 있다. 파우저 교수는 이를 잘 알고 있다. 하여 서촌주거공간연구회를 통해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고 기존의 한옥을 잘 지키며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자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꿈을 물었다. 그랬더니 빙그레 웃는다. 촌스럽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다시 물었다. 하고 싶은 일이 어떤 것이냐고. “꿈은 없었요. 썰렁하죠(웃음). (잠시 생각하더니)꿈이 꼭 있다면 저와 함께하는 회원들이 열린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옥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책도 내고 그런 일을 할 생각입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로버트 파우저 교수는 1961년 미국 미시간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2차대전 때 일본에 파병한 까닭으로 일찍 동아시아에 관심을 두었다. 1983년 미시간 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전공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1986년 박사학위(언어학)를 받았다. 1983~84년 서울대에서 한국어를 공부했다. 이후 일본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1987~88년 카이스트 영어강사, 1988~89년 고려대 영어강사 등을 지냈다. 이때 서울 약수동과 혜화동, 안암동 등 한옥에서 살았다. 2008년 미국인 최초로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채용된 그는 현재 외국인과 내국인 교사 지망생들을 상대로 한국어 교수법을 가르치고 있다. 아울러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개론서를 교육하고 있다. 주요 번역서로 ‘한국 문학의 이해’가 있으며 이는 해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에 동생이 살고 있어 가끔 고향을 다녀온다. 파우저 교수는 아직 미혼으로 한옥을 사랑하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했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4)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4)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나무들은 단지 아름답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의 무구함을 배우게 하고, 나무를 둘러싼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살이의 의미까지도 알게 한다.”고 했다. 평소에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건 곧 ‘진리를 배우는 일’이라고 강조하며 정원 일을 즐겼지만, 그에게 나무는 관상의 대상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는 삶의 진리를 얻고자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서 참삶의 길을 찾고자 했다. 헤세의 이야기대로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오래된 나무에는 오래된 삶 속에서 배워야 할 삶의 진리가 담겨 있다. ●마을 수호목에서 문화재로 재조명 “동네 하나 뒤집어 엎는 건 금방이죠. 집들이 부서지고, 여기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건 고작해야 4년밖에 안 됐지만, 이제 옛날 모습은 남은 게 거의 없어요.” 공공근로 작업으로 나무 주변 정비 작업에 나온 강현미(73) 할머니가 점심 도시락 보자기를 펼치며 이야기를 꺼냈다. 강 할머니의 이야기대로 마을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나무 옆으로 난 조붓한 골목길을 따라 낮은 지붕의 작은 집들이 이어져 있었다. 골목 안에서는 간간이 동네 조무래기들의 왁자한 목소리도 새어나왔다. 정겹게 느껴지던 그 마을은 그러나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이들이 뛰놀던 골목으로는 널따란 자동차 도로가 뚫렸고, 반듯한 도로 너머로 휑해진 넓은 터에는 이미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변하지 않은 건 나무밖에 없어요. 이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라고 하대요. 우린 맨날 봐서 뭐 그리 대단한 줄 모르지요. 그러다가도 나무 한 그루 보겠다고 관광버스까지 타고 우르르 몰려와서 사진 찍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돼요.” 강 할머니는 이 마을로 이사온 지 몇 해 되지 않지만, 그나마 마을 사정을 아는 축에 속한다. 이곳 하송리는 군청을 가까이한 영월군의 중심지여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들고남이 잦았던 곳인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의 택지 개발까지 이어져 옛사람보다는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하송리 은행나무는 마을이 처음 들어설 때부터 마을의 당산나무로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나무이지만, 이제는 이곳 사람들보다 오히려 외지에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기념물로 남았다. ●영월엄씨 시조인 당나라 파락사가 심어 나무가 처음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린 건 신라 때인 1200년 전이다. 당시 당나라의 현종이 새로 지은 악장(樂章)을 주변 나라에 알리는 임무를 띤 ‘파락사’(波使) 신분으로 신라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임무를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가려 했으나, 때마침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고,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릴 요량으로 이 지역에 머무르게 됐다. 난은 금세 평정되지 않았고, 영월 지역의 풍광을 좋아하게 된 그는 마침내 새 성씨(姓氏)인 영월엄씨를 일으키고, 이 마을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가 바로 당나라의 파락사 엄임의(嚴林義)였다. 당시 마을 위쪽의 솔숲이 매우 우거졌다는 이유에서 마을 이름은 소나무 아랫마을, 즉 하송리(下松里)가 됐다. 영월엄씨의 시조인 그는 사람이 모여 사는 아름다운 마을의 상징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그게 바로 천연기념물 제76호인 하송리 은행나무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게 서기 755년이니 이 나무는 무려 1200년을 넘게 살아온 셈이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 신범(辛汎·1823∼1879)도 이 은행나무를 찾아보고 남긴 시(詩)에서 “中有千年杏”, 즉 ‘마을 한가운데의 천년 된 은행나무’라고 표현했다. 150년 전에도 이미 이 나무가 1000년을 넘은 나무라는 걸 모두가 인정했다는 증거다. 1000년을 넘게 살아온 나무는 키를 29m까지 키웠다. 세월의 풍진에 나무의 원래 줄기는 썩어 문드러져 가운데가 텅빈 듯한 생김새이지만, 거개의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원줄기 곁에서 돋은 맹아(萌芽)가 더 우람하게 자랐다. 택지 개발로 마을 사람들이 흩어져야 했던 아쉬움 탓이었는지, 영월엄씨 후손들은 나무 앞에 영월엄씨 시조가 심은 나무라는 돌비석을 세웠다. 그 동안 사람들은 나무를 지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였을 것이다. 조상의 얼이 깃든 나무이니 당연한 노릇이다. 그리고 나무를 떠나면서 그들은 나무와 더불어 살았던 자신들의 삶을 비석 하나의 기록으로 남겼다. ●사람살이의 안녕을 지켜온 ‘큰나무’ 한 그루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살았던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얽힌 여러 전설을 남겼다. 나무 안에 신통력을 가진 늙은 뱀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늙은 뱀은 근처에 다른 삿된 짐승은 다가서지 못하게 하지만, 사람살이만큼은 평화롭게 지켜주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나무에 기어오르다 떨어져도 결코 다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나무에 기도를 올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전설을 통해 나무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며 이룬 평화로운 풍경을 엿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도 나무는 앞으로 다시 또 긴 세월을 이 자리에 지금처럼 융융하게 선 채로 사람과 나무가 더불어 살아갔던 평화로운 마을의 사람살이를 서리서리 풀어낼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주변 환경과 그 곁에서 이뤄가는 사람살이의 의미를 짚어준다는 헤세의 말을 다시 짚어보게 하는 이 땅의 큰 나무다. 글 사진 영월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강원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190-4번지. 중앙고속국도의 제천나들목으로 나가서 영월군 방면으로 간다. 국도 38호선을 이용해 영월군에 들어서면 남면 소재지를 지나면서 청령포 방면을 알리는 안내판을 자주 만나게 된다. 청령포에 가까이 가면 청령포교차로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영월군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공설운동장을 지나면서 나오는 군청사거리를 지나 300m쯤 가면 하송사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280m 가면 나무가 있다. 나무 옆에 자동차를 세울 공간이 있다.
  • [리뷰]’인류멸망보고서’가 말하는 종말, 어떤 모습?

    [리뷰]’인류멸망보고서’가 말하는 종말, 어떤 모습?

    인류의 멸망, 지구의 종말…2012년 들어 수도 없이 등장한 화젯거리 중 일부다. 시도 때도 없이 지구를 향해 날아드는 소행성이나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직한 먹거리 전쟁 등을 접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혀를 찬다. 김지운·임필성 감독의 옴니버스 SF영화인 ‘인류멸망보고서’는 이러한 현실을 십분 반영한 듯 한편으로는 처절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의 빛줄기가 내리는 에피소드를 나열한다. 오랜만의 소개팅에 마음이 들뜬 윤석우(류승범)은 급한 마음에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하지 않고 한 번에 처리한 뒤 퀸카(고준희)를 만나러 간다. 그녀와 즐겁게 고기를 먹은 뒤 석우의 몸에는 이상한 변화가 찾아오고, 그를 비롯해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점차 좀비로 변한다.(멋진 신세계) 평화로운 천상사(寺)에 사는 로봇 RU-4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설법을 하는 경지에 이른다. 이를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제조사 UR은 이를 해체하기로 결정하지만, 그를 이미 인명스님이라 부르며 숭배하는 승려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갈등이 깊어진다.(천상의 피조물) 아빠의 소중한 8번 당구공을 망가뜨린 초등학생 박민서(진지희)는 부모님 몰래 다시 당구공을 사놓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다 정체불명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당구공을 주문한다. 하지만 2년 뒤 당구공 모양의 괴 혜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하고, 지구는 혜성 충돌로 인한 멸망의 위기에 놓인다.(해피 버스데이) 쓰레기 갈아 만든 사료를 먹고 자란 육류를 섭취한 인간, 곧이어 이 인간들이 모두 좀비로 변한 세상(멋진 신세계)과 혜성의 충돌이 가까워질수록 속수무책으로 울부짖기에 바쁜 연약한 인류(해피 버스데이)의 모습은 SF라고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더욱 섬뜩하다. 이미 로봇의 일상화가 코앞에 닥친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은 로봇을 부처로 보아야 하는지, 인류는 이것을 결국 파괴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천상의 피조물) 역시 창조주와 피조물의 기본적인 관념을 다시금 돌이켜보게 하는 대목이다. ‘인류멸망보고서’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부합되고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스토리에 있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광우병 사태로 이미 느꼈듯 먹거리로 인한 바이러스의 공포는 더 이상 과거의 일이 아니며, 지구를 향해 날아드는 혜성의 위협은 더 이상 비현실적인 두려움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은 천상사의 로봇은 고도로 발달한 서양의 기술과 동양의 불교사상 사이에서 인류 대신 세상과 삶의 고민을 떠안는다. 이 영화는 SF의 기본 소스인 ‘신선한 소재’를 무기로 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내 영화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좀비(그것도 ‘류승범 표’ 좀비)의 리얼한 모습과 현실가능성 다분한 미래를 우리 문화와 밀접하게, 그리고 블랙코미디를 버무려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영화를 본 뒤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분리수거를 잘 해야겠다고 느끼는 관객이 있다면 ‘인류멸망보고서’는 인류멸망을 막기 위한 보고서로서의 의무를 상당부분 충실하게 이행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업그레이드~코리아 리더십

    27일 폐막된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는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역대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로, 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국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번에는 국제안보 분야의 최고위급 포럼인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성공리에 마치면서 다시 한번 G20 국가로서의 면모에 걸맞은 책임과 리더십을 보여 줬다고 볼 수 있다. 경제뿐 아니라 안보 분야의 다자간 외교올림픽에서도 긍정적인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북한 핵, 이란 문제 등은 당초 이번 회의의 의제에 포함돼 있지 않았지만, 회의 개막을 열흘 앞둔 지난 16일 북한이 광명성3호 발사 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하고, 한국과 미국은 물론 중국·러시아 등 거의 모든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참가국 정상들이 북한의 로켓 발사를 한결같은 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선 것도 또 다른 부수적 성과로 볼 수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다음 달 15일을 전후해 장거리 로켓 발사 계획을 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이 같은 국제사회의 연대 움직임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서울 정상회의에서 거둔 성과 자체를 놓고만 봐도 2년 전 워싱턴 정상회의 때보다 진일보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번 회의는 핵테러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평화서밋’인데, 2010년 1차 워싱턴 정상회의에서 처음 시작됐던 핵안보정상회의 프로세스를 실천의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번 회의를 통해 전 세계 53개 초청국, 4개 국제기구에서 참석한 58명의 정상 및 대표들은 핵테러 방지를 위한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실천 조치를 담은 ‘서울 코뮈니케’를 채택하는 결과물을 도출했다. 핵테러 방지를 위한 약속을 실천으로, 염원을 현실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농축우라늄(HEU) 반납 및 제거, 2013년 말까지 HEU 이용 최소화 계획 자발적 발표, 핵안보 관련 국제협약 가입, 2014년까지 개정 핵물질 방호협약 발효 추진 등이 구체적인 성과로 꼽힌다. 특히 이번 정상회의에서 개별국가 차원의 조치뿐만 아니라 핵물질 밀수 방지, 민감한 정보 보호, 운송 중 핵물질 보호 등 주요 핵안보 분야에서 여러 국가들이 함께하는 자발적인 협력 조치도 발표돼 핵안보와 관련한 새로운 국제협력 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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