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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30)

    ◎소년시절:11/화성의숙 편입 경위/정의부 재정지원 해온 김형직 피살에/오동진,공범인줄 모르고 그 아들 보호/군사지도자 오를 최근엔 들러리로 격하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정의부 산하의 중대들에서 선발된 현역군인들이 입학하는 군관학교 화성의숙에 군인이 아닌 자신이 「개별인사의 소개」로 들어갔다고 하였다.그는 또 이런 일은 드문 일이었다고도 하였다. ○동급생들 나이많아 「40명 남짓한 학생들 가운데 나만큼 어린 학생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대부분이 20살 안팎의 청년들로서 그중에는 수염이 검숭검숭하게 난 아이 아버지도 있었다.모두 내 형이나 삼촌벌 쯤 되는 학생들이었다」 회고록은 교실에서 학생들이 김일성을 어느 중대에서 심부름이나 하다가 굴러 온 애숭이 군인이라 여겼다고 쓰고 있다.대부분 김일성보다 5살 정도 손위인 동급생들이었다.이리저리 학교의 격에 맞지 않는 특이한 아이가 들어 왔던 것이다.여기에 박만포선생의 6월전학설을 보태면 이것이 보통 상태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도 짐작할 수가 있다. 부모의 입장만생각해 보더라도 그렇다.한약방으로 성공하여 자식의 학자정도는 문제가 아닌 김형직이었다.먹여 살려주는 대신에 그 중대의 중견으로 정의부가 실컷 부려 먹겠다는 화성의숙에 무엇이 답답해서 자식을 보내겠는가.또 그는 숭실중학교를 중퇴했는데 1910년대 초에는 그래도 인텔리였다.그로서는 자기 자식을 중학교에 보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였다. 필자는 여태까지 김형직이 자식을 화성의숙에 보낸 일은 그가 민족주의자이며 애국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자식을 일부러 모국의 창덕학교로 보내고 만주에서도 그를 화성의숙에 보낸 일을 그렇게 본 것이다. 그러나 화성의숙은 공부를 못해서 중대에 입대한 군인들을 정의부가 재교육하는 목적으로 세운 학교이기도 하였다.실제로 회고록에서는 이러한 학생을 김일성이 가르쳐주었다는 이야기도 싣고 있다.김형직은 보통 같으면 소학교 졸업 직전까지 간 김일성을 이렇게 학력수준이 낮은 학교에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그가 자식을 정의부 같은 민족단체에 넣어 간부로 할 생각이 있었더라면 학력수준이 높은 중학교나 그보다 상급인 학교에 보내면 되었다. ○6월 전학설 설득력 이렇게 보면 부친이 죽기 전에 김일성이 화성의숙에 입학했다는 26년 3월 입학설보다 그가 죽은 후에 「개별인사의 소개」로 전학했다는 26년 6월 전학설이 훨씬 설득력을 가진다. 회고록에서는 이 「개별인사」가 오동진으로 되어 있다.그는 「최동오에게 소개신도 보냈으니 화성의숙에 가라.화성의숙에 가서 군사를 배우는 것이 네 포부에도 맞을 것이다.학교를 졸업하면 그 후의 진로문제는 우리가 책임지고 돌봐줄테니 의숙에 가서 마음대로 공부하라」고 한 모양이다.김일성은 그의 이러한 설득을 「쾌히」 승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오동진은 독립운동가 속에서도 경륜이 있고 지조가 굳은 위대한 지도자였다.1889년 태생인 그는 1913년 평양 대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가서 일신학교를 세워 사재를 털어서 교육사업에 종사했지만 18년 일제에 의하여 학교를 폐쇄당하고 말았다. 그후 그는 한동안 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이를 지도하고 마침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는 19년 11월,대한청년연합회가 조직된 후 생계부장 등을 맡고 있었다가 20년 2월에 광복군 사령부가 성립되자 그 지방영 제2영장으로 되었고 22년에는 광복군 총영장에 취임하였다.22년 8월에 군소독립단체가 대한통의부로 넘어가면서 재무부장,군사위원장을 역임하였고 24년에는 그 군사부장 겸 의용군 사령장을 지냈다.25년 1월 정의부가 결성된 후는 재무부위원장을 거쳐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활약하는 것이다. 오동진은 26년,정의부에서 군사분야의 최고 지도자였지만 군사력을 육성하기 위하여 재정분야에도 관여하고 있었다.그는 당시까지 재정을 일관성 있게 군사문제와 결부하여 다루고 있었으므로 그와 접촉한 후원자들은 자금을 갹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히 그의 항일투쟁정신에 감화되어 일제와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뜻을 가졌다.김형직도 그러한 자산가의 하나였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민족주의자의 거룩한 애국활동을 백방으로 도용하고 있다.첫째로 전기작가들은 사망하기 전의 김형직의 「혁명적 업적」으로 오동진의 업적을 가져왔다.예를 들면 1918년 11월에 있었다는 청수동회의인데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이란 다름아닌 오동진의 출생지이다.따라서 이러한 회의가 만약 있었더라면 오동진이 불렀고 김형직이 부른것은 아니었다. ○기회이용… 잠시 피신 그들은 다음으로 김형직이 죽은 후의 오동진의 활동을 김일성의 들러리 활동으로 전락시켰다.군사분야에서 정의부의 최고지도자였던 오동진은 재정사업의 대상자 김형직이 살부회의 테러리스트에 피살된 비보에 접하자 15세인 소년이 공범인 줄도 모르고 어른이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다 제공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그가 제공한 기회와 훈계를 반대로 이용하여 이를 「쾌히 승낙」하여 민족주의 군관학교에 잠시 피신한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1」144면 ②평전 76면 ③「세기와 더불어 1」137∼8면 ④한국독립사 334면 이하 기타
  • 근현대인물 재조명 된다/창비,현대인물연구시리즈 기획

    ◎1차 전봉준·김원봉연구 펴내/조봉암·홍명희·여운형도 계획 그동안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 편향 때문에 소홀히 다루어져온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들에 관한 새로운 조명이 시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창작과 비평사가 새롭게 기획한 현대인물연구시리즈의 제1·2권으로 최근 발간한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우윤)과 「김원봉연구」(염인호)는 주로 문헌자료에 의존했던 기존의 평전들과는 달리 학문적으로 전공한 젊은 학자들이 직접 현지답사와 인터뷰등을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인물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이와함께 진보당의 조봉암,일제시대 노동운동가 이재유,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끈 민족지도자 여운형등에 관한 연구서도 곧 선보일 예정이다.이 작업은 역사인물의 체계적 연구를 통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봉준의 연구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의 원인에 대해 단순히 삼정문란이나 지배층의착취,그리고 양반·토호들의 횡포에만 초점을 맞춘 종래의 시각에서 벗어나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이를 토대로한 사회변동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일어난 것이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했다.특히 주도면밀하고 조직적인 운동전개로 근대 민중운동 역량의 일대폭발을 가져온 전봉준의 역할을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그의 인간적 면모도 부각시켰다. 민족주의자 약산 김원봉의 연구는 그의 고난에 찬 투쟁사와 사상을 하나의 일관된 틀로 체계화한 국내최초의 연구서이다.그는 남한에서는 19 48년 월북했다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민족해방운동사의 정통성을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에만 한정시키는 또다른 이데올로기적 제약으로 남북한 양쪽에서 배척당해 역사의 뒤켠에 매몰된 인물이었다.이 책에서는 그가 이끈 의열단·민족혁명당·인민공화당등의 활동을 다각적으로 구명,그가 민족독립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그러면서도 민중의 이익을 일관되게 추구한 진보주의자였음을 밝혀내고 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9)

    ◎소년시절:10/화성의숙 전학 전후/“당시 만주에 공산주의 팸플릿” 필자 「평가」에/“소학교때 「레닌일생기」 읽었다” 92년판 날조/학업 비정상적… 면학문제 언급없어 김일성의 유소년 시절에 대한 우상화의 하나는 그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총명하고 공부를 잘했는가를 과장하는데 있었다.그런데 무송소학교 시절부터는 이 방향을 계급적 관점으로 더 강화한다.예를 들어 회고록에서 전기작가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나는 무송에 있을 적에도 「레닌의 일생기」나 「사회주의 대의」와 같은 책을 몇권 읽었다』라고 말하게 하고 있다. ○계급적관점 강화 그런데 우리는 이와같은 주장은 1992년에 출판된 「세기와 더불어」이전에는 그 어떤 김일성 전기에도 실린 적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전기작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런 조작을 했을 것이겠는가. 필자는 85년에 일본에서 「김일성평전」을 출판하고 87년에 이것을 한국에서 번역출판하였다.이 책에서 필자는 김일성이 소년시절에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엉터리 주장을 철저히 비판한 일이 있었다.일례로 여기에 그 문장의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공산주의문헌은 많지 않았다.1924년에 일본 경찰이 동남만에서 입수한 「불온문서」에는 공산주의 자체를 정면으로 해설한 책은 거의 없었다.1925년에는 이 간도에서 대량으로 공산주의 관계문헌이 압수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선전팸플릿이나 신문이었다.…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얄팍한 팸플릿으로는 레닌의 이름을 붙인 전기·역사·공산청년회역사·공산역사 등이 있었고 그 외에 「공산독본」「노서아 노동역사」「사회주의대의」「공산당의 선언」등이 있었다.이 팸플릿류는 모두가 소련에서 발행되었고 간도지방에서조차 1∼2점씩밖에 압수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에서 필자가 「외무성경찰사」란 극비문서를 찾아내어 그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에는 「레닌의 이름을 붙인 전기」「사회주의 대의」란 어구가 보인다.북한의 전기작가들은 필자가 낸 평전의 이 일절을 표절하여 김일성이 무송에서 「레닌의 일생기」「사회주의 대의」를 「읽었다」는 새로운 날조를 하게 된 것이다. ○얄팍한 선전신문 김일성은 이 시기 학교생활이 비정상적이었다.그 때문인지 종래의 전기에서는 면학문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좌익서적 읽기」신화의 날조에는 엉뚱하게도 필자가 자료를 제공해 준 것으로 되었다. 다음부터는 무송소학교를 중퇴한 후의 일로 넘어가겠다. 1926년 2월14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 달에 정의부 중앙의회에서 금년 4월1일부터 군인을 모집하기 위하여 정의부 군인이 될만한 청년을 모집할 위원을 선정하여 만주 각 현에 파견하리라는데 일본과 중국경찰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중학생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할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는 화성의숙이 창설되는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여기에는 이때 정의부에서 각 현에 파견될 위원의 명단도 실려 있다. 따라서 그 위원중 누군가가 김형직의 가정에 와서 3∼4월에 김일성을 화성의숙에 입학시킬 것을 상의한 것도 추측이 가능하다.그러나 박만포선생의 의견에 의하면 김일성은 3월이나 4월에는 입학하지 않았었다.필자는 4월 입학설이었으나 이러한 6월 전학설도 앞으로는 고려해 나갈 것이다. 일본 영사관에 계출된 기록에 의하면 화성의숙은 화어연구학교로 수업연한이 1년6개월이며 교원이 2명,생도가 30명으로 26년 3월에 설립 인가가 난 것으로 되어있다. 26년도는 1학년생만이 입학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의부의 진짜 목적은 이 학교를 교포 자제에게 중국말이나 가르쳐주는 정착준비 학교가 아니라 항일군인을 양성하는 군관학교로 경영하는 것이었다.숙장이 최동오,재무가 강제하로 정의부는 유하현 삼원포에 교과서를 찍는 인쇄소까지 마련하여 학업을 보장하였다. 이번 회고록에서는 화성의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화성의숙은 독립군의 간부를 키워낼 목적으로 1925년 초에 세운 정의부 소속의 2년제 군사정치학교였다.화성의숙의 입학대상은 정의부산하 중대들에서 선발된 현역군인들이었다.우에서 입학생수를 쪼개어 내려보내면 중대별로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 보내는데 2년동안의 학습과정을 마치면 성적에 따라 새 직급을 주어 출신 중대에 되돌려 보내었다.독립군 밖에서도 개별인사들의 소개로 입학하는 청년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설립연도 등 조작 여기서는 화성의숙이 26년에 설립된 것을 25년으로,1년 반인 수업기한을 2년으로 바가지씌운 일이 눈에 띈다.화성의숙은 25년에 설립될 계획이었지만 26년으로 지연되었다.그리고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그 명칭도 26년 8월 경에는 화림학교로,28년 6월경에는 화흥학교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김일성이 자기 스스로 화성의숙 전학은 특수한 케이스였다고 인정하고 있는 점이 더 중요하다.그의 전학은 역시 비정상적이었다. ①「세기와 더불어 1」156면 ②평전127∼128면 ③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8)72∼73면 ④평전 73면 ⑤「세기와 더불어1」136면 ⑥평전 74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7)

    ◎소년시절:8/백산소학교/“6학년때 교장과 담판,조선여반 개설” 주장/이번에는 “아버지 김형직이 설립” 옳게 바꿔/“개교행사서 연극공연·연설” 왜곡도 없애 무송소학교 시절에 관한 우상화작업은 학업문제에 있어서는 별로 언급한 것이 없다.교우문제도 한인 학생인 고재봉,고재룡,고재림,고재수 등과 가깝게 지낸 일은 정식 전기로서는 이번 회고록이 그 이름만 처음으로 밝혔다. ○학업언급은 적어 전기작가들은 무송소학교시절의 우상화작업을 백산학교문제에 한정하고 있다.그런데 그 경위를 보면 우상화는 59년의 답사단이 그 시초를 뗏다.그들은 무송소학교 선생 마청산의 말을 받아 쓰는 것으로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무송에는 독립된 한인학교가 없었다.김일성이 6학년으로 진급하였을때 그는 교장 사춘태에게 한인학교 설립을 요청하였다.그 요청에 감동한 교장은 임강의 일본영사관으로 수차 출장하여 허가를 받아서 『무송 제1소학교 부속 조선주반』을 설치했다.이 반은 곧 무송현성 함장문가로 이동하여 40여명의 학생을 받아 들였다.어느날 저녁 개교식에 초청받은 나는 연극공연을 보고 김일성의 연설을 들었다」 이러한 마청산의 말이 원인이 되어 북한에서는 한때 「백산학교는 김일성이 교장에게 요청한 결과 창립됐다」라는 신화가 기승을 부린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아래와 같은 잘못이 있었다. (ㄱ)무송에는 오래전부터 백산학교가 있었다.일본기록에 의하면 1916년에 생도 23명을 성락힐이 가르쳤던 백산소학교가 있었고 20년에는 백산무사단이 이 백산학교에 병설되어 있었다. (ㄴ)김일성이 「학교 설립문제」를 가지고 6학년 진급시에 교장과 담판한 것이라면 그것은 1925년 8,9월쯤이다.그러나 일본영사관 모예산분관은 27년 1월에 분관주임이 임명되었지만 이 곳에 있었던 배일운동으로 주임은 분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28년 3월에 일본에 소환되었다. 마청산은 교장 사춘태가 소학교 6학년생의 말을 듣고 감동하여 출장했다고 했지만 이것은 1개 중공당원에 불과한 그가 북한의 최고권력자가 보낸 대표단의 위세에 눌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는 김형직보다 김일성을 입에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속에 있었다.그러나 가령 그런 일이 있어서 25년에 임강에 갔다 하더라도 그곳에는 일본영사관은 그림자도 없었다. ○마청산 말미 발단 다만 이상과 같은 잘못을 빼면 마청산의 말에는 부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무송소학교에 「조선족 반」이 생겼다든가,새로 함장문가에 교사가 마련되어 그것을 축하하는 개교식이 있었다든가,거기에서 연극공연이 있었다든가 하고 있는 것들이다.4년제 백산학교 개교식에서 다른 학교지만 6학년생 격인 김일성이 연설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있음직하다. 그후 북한에서는 이러한 마청산의 말을 자료로 하여 우상화작업이 본격화되었다.우상화란 사실을 왜곡·날조·은폐하여 턱없이 과장·미화·절대화하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우선 백산학교 설립자의 이름이 김일성으로 부터 김형직으로 옳게 바뀌어졌다.전기작가들은 당연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정으로 김일성이 6학년에 진급했다든가,교장이 임강에 갔다든가,그 후에 「조선족 반」이 생겼다든가 하는 전기 제작상 「귀찮은」무송소학교 문제들이 일체 불필요하게 되었다.그리하여 초점은 김일성이 전학한 무송소학교로부터 백산학교 개교식 쪽으로 옮겨졌다.김일성은 개교식에서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란 연극을 꾸미고 대중을 향하여 연설을 한 후에 자신이 주역이 되어 공연한 것으로 된 것이다. 전기 작가들은 그 위에 큰 왜곡을 하나 더 하게 되었다.전기를 새로 쓸 때마다 그들은 개교식의 날짜를 그의 소학교 전학 시기에 접근하게 한 것이다.1983년에 발간된 김일성 연표에서는 드디어 백산학교 개교식과 무송소학교 전학이 같은 「1925년 봄」으로 되었다.이 왜곡은 김일성을 「효자」나 부친의 「혁명위업」계승자로 조작하는데 필요한 조치였다. 백산학교에 대하여 이번 회고록은 요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백산학교는 무송지방의 망명자·선각자들이 농민들과 함께 설립한 역사가 오랜 사립학교였다.초기는 지금의 농촌집 방 두개를 합친 것만 하였다.그런데 그러한 학교도 운영비의 부족으로 오랫동안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었다.우리가 무송에이사하였을 때에는 백산학교를 복구하기 위한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던 시기였다.일제의 부추김을 받고 있던 군벌당국이 학교를 인가해주지 않아서 아버지는 여간 애를 태우지 않았다. 아버지는 백산학교 명예교장으로서 교편은 잡지 않았으나 교육내용과 후원사업을 보며 학교에 나가 연설도 하고 과외활동 지도도 많이 하였다」 ○회고록 대폭 수정 마청산의 잘못된 이야기를 자료삼아 전기작가들이 더 잘못된 우상화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 회고록은 그것을 약간 시정하였다.필자가 백산학교는 역사 있는 학교라고 「김일성 평전」에서 지적한 것이 주효한 것인지 회고록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그리고 개교식때의 공연이나 연설에 언급하지 않아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15면이하 평전 66면 상동서 67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동서 3면 「세기와 더불어1」122∼3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6)

    ◎소년시절:7/전기마다 다른 무송학교 학력/58년 역사서엔 전학아닌 입학 위장/중퇴사실 감추고 “우등졸업생” 선전/재학땐 토호아들과 절친하게 지내 김일성이 1925년 4∼5월에 간 무송현성에는 당시 중국 소학교가 있었다.그런데 이 학교에 관한 전기의 기술은 아래와 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학교 이름과 김일성이 들어간 시일 ㉠1924년에 무송제1우급소학교에 입학했다.(1958년의 역사서) ㉡25년 봄에 무송현립제1양급학교에 다녔다.(83년의 김일성연표) ㉢25년 봄에 무송제1소학교에 들어갔다.(83년의 「조선을 알아야 한다」156면) 85년에 김일성평전을 냈을 때 필자는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 「우급소학교」란 1938년 이후에,그리고 「양급소학교」란 36년 전후에 각각 괴뢰 만주국에서 4년제 초급과 2년제 고급을 병설한 소학교를 호칭한 것이었다고 밝히고,김일성이 들어간 25년에는 그저 「무송제1소학교」로만 불렸다고 하였다. 이번 회고록에는 「무송 제1소학교」로 되어 있다.②수업기간 ㉠25년 봄부터 26년 초봄까지 다녔다.(83년의 김일성연표) ㉡「26년 초봄 무송 제1소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조선을 알아야 한다」164면) 당시 중국에서는 소학교는 8월20일부터 1월31일까지 제1학기,2월4일부터 6월30일까지가 제2학기였다.따라서 25년 봄 같으면 그는 고급소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1학년 제2학기 도중에 전학한 것으로 된다.또 26년의 초봄이라면 3월쯤이다.김일성은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 아니라 고급소학교 2학년 제2학기 초에 중도 퇴학하였다. ①,②를 보면 김일성은 1년도 못되는 기간을 무송제1고급소학교에 다녔는데 입학도 졸업도 하지않았다.그래서인지 이 학교는 한 때 그에 대하여 별로 큰 대접을 하지 않았다. 「그이께서 학교교장의 안내로 한 책상에 다가 가시었을 때였다.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책상에 앉게 된 중국인 학생이 일어나 그에게서 들고 계신 책가방을 받아놓으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그가 바로 장울화동지였다」 이것은 1985년에 나온 「장을화동지는 나와생사고락을 같이 한 옛 전우입니다」라는 글인데 김일성의 회상을 전기작가가 대필로 써준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학교 교장이 그를 교실의 책상머리까지 안내했다는 말에 있다. 1959년 김일성은 해방전에 자기가 한 항일투쟁의 「전적지」를 답사하는 대표단을 만주에 보냈다.그러나 무송도 들렀던 답사단은 무송소학교 기사는 쓰지 않았다.이때 답사단을 영접한 무송소학교 선생은 마청산이었는데 그가 답사단을 소학교에 안내하지 않고 그들을 김형직이 살았다는 소남문가의 집에 안내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답사단은 그가 여기서 「김일성원수는 바로 저 창가에 책상을 놓고 공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25년 김일성을 교실 책상머리까지 안내했다는 무송소학교 교장은 59년,김일성이 직접 보낸 대표단을 푸대접하여 학교 문전에도 안내하지 않았다.그 까닭은 1학년 1학기 도중에 전학하고 2학년 2학기 도중에 중도퇴학한 김일성에 관한 자료란 이 학교에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일은 있었지만 중국인 장울화(통명 장아청)와김일성이 친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표단은 25년 당시에 소학교에서 장울화의 선생을 했다는 연동지와도 만났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장울화가… 지주의 아들로서 그렇게까지 훌륭하게 싸울 수 있은 것은 오로지 김일성 원수의 영향과 지도에 의한 것이었지요」 여기서도 문제는 연동지가 자신과 장울화의 관계가 사제간이었다는 것은 밝히면서 자신과 김일성이 사제간이었던가 어떤가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점이 있다.그러나 하여간 김일성과 장울화가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며칠 후 나는 무송 제1소학교에 편입하였다.이 학교에서 나와 제일 친한 학생은 장울화라는 중국소년이었다.그는 무송에서 두번째인가 세번째로 손꼽히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장울화네 집에는 가병만 해도 수십명이나 있었다.무송현 동강에 있는 인삼포는 거의가 장울화네 것이었다.장울화네는 해마다 가을이면 인삼을 캐 말이나 노새에 싣고 다른 지방에 가져다 팔았다.그 집에서 인삼을 팔러 갈 때에는 가병들이 10리씩이나 늘어서고 하였다.장울화의 아버지는 이름있는 부자였지만 제국주의를 미워하고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인간이었다.장울화 역시 그랬다」 한약방의 주인인 김형직과 인삼포 소유자인 무송의 토호 장만정은 친했다. 그 아들들인 김일성과 장울화도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다. ①평전 68∼70면 ②1985년 5월13일자「노동신문」 ③「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 1960년 당간 11면 ④상동서 17면 ⑤「세기와 더불어」 1백20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5)

    ◎우상화 제1호 「광복의 천리길」/“14살때 독립안되면 안올 결심… 도강”/45년 수행기자 한재덕이 기사로 “창작”/「압록강의 노래」도 그이후에 만들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25년 1월22일에 만경대를 떠나 만주로 갔다고 하고 있다.졸업식을 몇달 앞두고 창덕학교를 중퇴했다는 것이다. ○김형직 테러사망 이런 엄동설한에 떠난 것을 김일성은 일제에 체포되었다는 부친의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필자가 이전에 지적한 바와 같이 만주 팔도구의 대안인 포평에서 김형직이 탈주했다든가,그 과정에서 그가 심한 동상을 입었다든가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김형직은 26년 6월에 갑자기 테러를 당해 죽었는데 그 때까지는 건강하였다.따라서 김일성이 일부러 가장 추운 1월 하순에 가야할 이유란 믿기가 어려워진다. 또 25년 당시 부친이 건강했더라면 김일성이 혼자서 만주로 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실제로 1960년까지의 북한기록은 52년 전기의 기술대로 김형직이 그를 「데리고」만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그가 단독으로 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여간 만경대를 떠나 13일째 되는 날 포평에 도착한 김일성은 여기서 부모가 있는 팔도구를 향하여 압록강을 건너가게 된다. 그런데 이 김일성의 도강에 관하여서는 종래의 전기들이 판에 박은 듯이 사용하여 온 문장이 있다.그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명문장은 이번 「세기와 더불어」에서 「압록강의 노래」가사까지 덧붙여졌다.그러나 그 표현은 종래와 다름이 없으므로 이 비장감이 넘치는 문장은 김일성이 실지로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도 오해할 수가 있다.그러나 이 문장은 25년의 도강 당시에 김일성이 한 생각은 아니다.이것은사실은 해방직후 작가가 만들어 낸 우상화를 위한 창작물인 것이다. 1945년 10월 한재덕씨는 김일성을 수행하여 만경대를 방문하였는데 그 2∼3일후 한씨는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장군과 그 가족환영 및 위안회」에 초대되었다.신문기자였던 한씨는 거기서 김일성이 하는 연설을 받아 썼다.그러나 한씨는 김일성의 서툴고 갈팔질팡하는 연설을 듣고서는 연필을 집어치우고 술만 마시게 되었다.한씨는 이튿날 연회의 기사를 써야했는데 이 때 무리를 알면서도 이상과 같은 명문장을 만들어 신문에 실었다는 것이다. 한재덕씨는 「평양민보」창간호에 김일성이 개선한 「군중환영대회」기사를 썼고 또 거기서 소좌에 지나지 않았던 김일성을 「장군」이라고 불러주어 일약 그의 마음에 들게 되었다.그러나 한씨는 우여곡절 끝에 1959년에 한국에 귀순하였다. ○한 기자 한국귀순 한씨는 또 이 기사를 쓴 당시는 「압록강의 노래」가 없었는데 그 후에 이러한 노래도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압록강상에서 비분강개하는 김일성,이 영웅적 장면은 역사적사실이 아니라 한재덕씨가 써 준 미사여구였다.그리고 「광복의 천리길」이란 부친을 따라 갔건 혼자 갔건 간에 그의 이 심정토로 부분을 빼버리면 사람들을 울리는 장면이 없는 한갓 평범한 이민의 이동로정에 불과하게 된다. 지금 북한에서는 매년 1월 전국에서 청소년이 선발되어 이 「광복의 천리길」을 행진하고 있다.김일성 우상화작품 제1호인 한재덕씨의 이 문장은 지금도 북한 청소년이 집단주의를 익히는 세뇌용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복의 천리길」의 종점은 만주 팔도구에 있는 부모의 집이다.북한에서는 그가 여기에 25년2월3일에 도착한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앞에서 그가 1월 하순에 창덕학교를 그만둘 이유는 없다고 말하였다.또 필자는 이 만주행은 창덕학교가 졸업생을 내는 3월 하순이라고 추정한 바도 있었다.그러나 졸업식에 참가하지 않은 것 같으면 2월말이나 3월중에 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전기에서 만주행을 적어도 1개월이상 앞당기고 있다.그리하여 이러한 날짜조작으로 비운 자리를 그는 이른바 「혁명활동」으로 메우게 되는 것이다.「세기와 더불어」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달이상 앞당겨 『팔도구의 집에서 나를 맞이한 모친은 저녁밥을 차려주고는 여기는 놈들의 감시가 심하니 동생들을 데리고 곧 떠나라고 하였다.그래서 우리는 발구를 타고 팔도구를 떠나 눈보라가 이는 압록강가로 오구비라는 조선쪽에 가서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임강으로 갔다.우리는 거기에서 한달 가까이 객주집에서 숨어 살았다.모친이 삼촌 김형권과 임강으로 온 후 부친의 전화를 받고 비로소 우리는 무송으로 가게 되었다』 전기에서는 김일성 가족의 이러한 무송행은 1925년3월로 되어 있다. ①김일성저작집1 361면 ②「김일성을 고발한다」 1965년 내외문화사 간 96면 ③평전 61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2)

    ◎소년시절:3/허위로 가득한 「배움의 천리길」/외조부경영 창덕학교로 3학년에 편입/“5학년때 단독 평양행”은 날조… 부모 동행/전학기념사진엔 김일가 유복함 노출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있으면 우리는 거기에서 김일성우상화의 목적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한국이나 일본 학자들의 견해까지도 북한 어용학자들이 슬며시 추인하거나 제멋대로 자기 주장처럼 만들어 버리는 행위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로 한정하고 예를 하나만 들면 김시우가 백산무사단의 재무였다든가 김형직이 백산무사단에 관계하였다는 회고록의 주장이 그런 경우이다.또 강진석이 1920년 9월에 임강의 김형직 집에 있다가 백산무사단에 입단하였다든가,21년 4월에 평양에서 체포되었다고 하는 것도 모두 필자가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한·일학자 주장 삽입 북한의 어용학자들은 필자가 밝힌 이러한 자료를 부정할 수가 없어서 이번 회고록에서는 이것을 거꾸로 이용하며 김일성우상화 자료로 충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여기서는또 하나 소위 「배움의 천리길」의 출발날짜를 들어 본다.김일성이 부친의 말을 듣고 창덕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팔도구를 떠나 만경대로 갔다는 날짜이다. 필자는 그 출발날짜의 상이점을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었다. ①팔도구의 4년제소학교를 졸업한 그해 여름에 창덕학교에 가서 5학년에 다녔다(1960년의 기록). ②열세살 때(1962년 전기). ③열두살 때,1923년 1월30일(1971년 기록). ④1923년 3월16일(1982년 전기). 필자는 이상과 같이 열거한 후 1923년 3월16일은 음력으로는 1월29일이라고 지적하였다.그런데 이번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1923년 음력 정월 그믐날(양력 3월16일)」에 팔도구를 떠났다고 종래의 주장을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음력을 양력으로 고치는 일에 주안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김일성은 이런 계절이 아니라 1960년에 나온 「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에서 나오고 있는 것처럼 여름철에,그러나 연도는 23∼24년이 아닌 1922년에 팔도구를 출발하였다고 분석하였다. 이 분석은 지금의 김일성우상화를 깨뜨리는 주장이어서 북한이 묵살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소개해 놓는다. 필자가 김일성의 평양행을 23년 3월이 아니라 1922년 여름이라고 한 것은 이상의 북한자료 이외에 김형직의 가족사진과 두명의 한국측 증인이 있기 때문이다. ○동창생증언과 모순 먼저 한국측 증인 2명은 창덕학교시절 자기들이 제각기 김일성의 3학년과 4학년의 동급생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이 증언은 5학년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김일성의 말을 부인하는 것으로 된다.또 이 증언은 팔도구소학교를 4학년으로 졸업했다는 그의 주장도 번복하고 있다. 다음으로 당시 창덕학교는 5년제학교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23년 봄 5학년에 편입되어 25년 1월에 졸업을 앞두고 창덕학교를 중퇴했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 25년초에 5년제학교의 5학년을 중퇴한 것 같으면 23년 4월에 그는 4학년에 편입되어야할 것이다.이렇게 되면 4학년때 동창생이라는 한국측의 증언에 신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3학년 시절의 동창생 말이 가령 옳은 것 같으면 김일성은 적어도 23년 3월 이전에 창덕학교에 있어야 한다. 김형직이나 강돈욱은 교육가이므로 그들은 적어도 학기초나 학년초에 맞추어 김일성을 전학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공공연하게 소개되면서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는 이상한 가족사진이 있다.어떤 한옥 앞에 김명주를 안은 김형직과 강반석이 의자에 앉아 있고 김형직의 왼쪽에 김일성,부모 사이에 김철주가 각각 서있는 구도로 되어 있다.당시로서는 아주 호화로운 몸차림을 한 유복한 김형직 일가 사진이다. 이 사진에 대한 필자의 추리는 다음과 같다. ①1922년생인 김영주가 강보에 싸여 있는데 생후 7∼8개월로 보인다. ②김일성의 모자에는 교장이 있고 김철주 모자에는 그것이 없다.따라서 그들은 각각 다른 학교의 제복을 입고 있다. ③중국에서는 1921년 11월에 학제가 미국식인 6·3·3제로 바뀌었고 1922년 8월 하순에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김형직은 일본식 학제때 중국학교에 들어간 김일성이 학제 변경으로 학업리수가 늦어지는 것을 싫어하였을 것이다.마침 창덕학교는 김형직의 장인 강돈욱이 경영하고 있었다. ④이 때문에 김형직은 22년 8월경에 가족을 데리고 평양에 갔다.그는 처가집에 가서 김일성이 창덕학교에 전학하도록 부탁하고 얼마간 평양지방에 있었다가 팔도구로 돌아가게 되었다. ⑤그는 창덕학교에 전학한 김일성과 1916년생으로 8월에 팔도구소학교에 입학하게 될 김철주에게 각각 학생복을 사 입히고 김일성과 헤어질 기념사진을 찍었다. ⑥김일성은 22년 8월까지에 팔도구소학교 3학년 1학기를 수료했는데 9월에 들어가면 미국식학제로 다시 3학년 1학기를 이수해야 하였다.그러나 창덕학교에 전학함으로써 그는 일본식 학제대로 3학년 2학기를 이수할 수 있게 되었다. 김일성의 학업과 이상의 여러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22년 8월경.자기 혼자가 아니라 부모와 같이 팔도구에서 평양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김일성 평양 단독행이란 결국 우상화작업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1」61면 ②평전 86면 기타 ③평전 47면 ④「세기와 더불어1」77면 ⑤「사인의 김일성」236면⑥「역사사전Ⅱ」 ⑦724면 ⑧평전 46면 이하 참조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1)

    ◎소년시절:2/“김형직에 워싱턴행적 배웠다”/82년엔 없던 “가정교육” 이번전기 삽입/“중국귀화 교육” 팔도구소학교에 편입/김일성 “공부잘했다” 회고록서 자랑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진석이 1921년 4월에 평양에서 체포된 후 더 이상 임강에 살 수 없게 된 김형직이 장일현팔도구로 이사하셨다고 쓰고 있다. 임강은 독립운동단체들의 활약이 맹렬한 지방으로 1920년 7월에는 봉천군벌 고문으로 있었던 판본준마(사카모토)의 사간도탐사반이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하는 「모예산사건」이 있었다.김형직과 같은 자산가였던 이두희,그리고 정단등 10명이 체포되었는데 모두 유하현삼원포의 독립군중앙총단장 조맹희계통이었다. ○친지 검거로 이사 사카모토 수사반은 백산무사단 계통인 팔도구소학교 교사 김관계(김보안)는 체포하지 못하였다.그러나 같은 백산무사단 계통인 김형직이 수사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독립운동에 관여한 혐의가 그에게는 그만큼 적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강진석이 체포되면서 김형직도 임강을 떠나지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팔도구까지 2백50리를 이사 갈 때는 전도사 방사현이 동행했는데 압록강과 팔도구하의 합수목에 있는 마을에 광제의원을 차리게 되었다.김일성은 21년 여름에 이곳 팔도구소학교 2학년에 전학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 말하는 임강소학교의 정식명칭이 모예산현립소학교였던 것과 같이 팔도구 소학교도 그 정식명칭은 장백현립제칠분교이다.장백현의 동남단에 현치인 장일부가 있는데 거기에 현립제1분교가 있었고 거기에서 압록강을 따라 대체로 서쪽 하류로 나가면서 제3·제4 등 분교가 설치되어 임강현경인 팔도구에 제7분교가 있었던 것이다.중국측에서는 이 학교들을 정몽학교로도 불러 팔도구소학교는 제칠정몽학교라 하였다. 팔도구의 제7정몽학교는 1917년에 설치되었다.그 12년 후가 되는 1929년의 통계에 의하면 귀화한인인 교원이 1명만 있었고 아동은 8명 밖에 되지 않았다.당시는 4년제 소학교였으므로 단순계산으로는 한 학년에 2명 꼴이었다.너무 학생수가 적어서 새삼스럽게 놀랄 정도이다. 1927년 일제가 영사분관을 모예산에 설치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임강현 지사장극상은 이를 재만한인의 탓으로 돌리고 임강현에 거주하는 한인에게 퇴거를 강요하였다.이러한 압박으로 당시 임강현에서는 한인 5백∼6백명이 현경 밖으로 도피했다. 팔도구는 임강현 바로 동쪽에 있는 한인촌락이므로 이러한 영향을 받아 1929년에는 그곳의 주민들이 아주 적었던 모양이다.이것이 팔도구소학교의 학생수 8명이란 통계에 반영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의 영사분관 설치책동이 없었던 1925년의 인구통계를 보더라도 팔도구의 인구는 4백명,호구는 75호였다. ○학생 겨우 15∼16명 당시의 취학률은 인구의 4%정도로 추정되므로 김일성이 있었던 1921∼2년 께의 팔도구소학교는 학생수 15∼16명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이 학생수로는 4개 학년으로 나누어 1개 학년에 각각 4명 정도인데 이 4개 학년을 교원 1∼2명이 복식수업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당시 공부를 잘 했다고 자랑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쓰고있다. 「내가 다니는 팔도구소학교는4년제 중국인학교였는데 수업도 중국말로 하고 취급하는 과목도 중국의 것이었다.시내에는 조선학교가 없었다」. 장백현은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빠져 나온 한인이 거의 전부였으므로 소학교에는 중국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다.그러나 이 학교는 한인을 귀화시켜 중국에 정착하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이 있었던 1921년 당시 이 학교의 주된 교과목은 수신·국문·사회·산술 등이었는데 수신이란 유교사상이며 국문이란 한문이었다.당시는 아직 백화문(보통 중국말)은 가르치지 않았다. 필자는 평전에서 이 학교에서는 한국어도 약간 가르친 것이 아닌가고 추측했지만 김일성은 이상의 글에서 이 학교에서는 한글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글과목은 없어 그 대신 그는 김형직으로부터 개별교육을 받았다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우리 글과 지리,조선역사를 배워주고 레닌·손문·워싱턴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다… 그 덕으로 나는 그 때 「조선문위인」「조선영웅전」「노국혁명사와 레닌」같은 좋은 책들과 신문·잡지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의 말은 북한의 이전 전기에는 없었던 말들이다.8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임강에서 가정교육에 열심이었다는 말이 나오지만 팔도구에서까지 그랬다는 말은 없다. 팔도구소학교 시절 그가 레닌·손문·워싱턴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의 위인이나 영웅,그리고 노국혁명사와 레닌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다. 강진석이 체포되자 같은 우익단체인 백산무사단에 관계하였던 김형직은 겁을 먹고 팔도구에 피난하였다.그러나 김형직이 「노국혁명사와 레닌」같은 책을 자식에게 가르쳤다는 선전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1990년대가 되어도 이런 식의 날조가 진행중이다. ①「세기와 더불어Ⅰ」72면 ②같은 책 72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0)

    ◎소년시절:1/중국학교 입학 「지원」으로 합리화/한인탄압 앞장섰던모아산소학교 다녀/주체사상에 흠결 우려 기술 제대로 못해/“가정교사 들여 중국어공부” 70살 넘어 자인 김형직 일가가 이주한 임강은 임강현의 현소재지였는데 당시는 임강이라 하지않고 모아산이라고 불렀다.그들이 정착한 곳은 현공서에서 압록강변 쪽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었던 정미소 옆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70년 후반부터 언급 김형직은 여기에 순천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방안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걸었다.김일성은 자기 부친이 가짜 의사였던 일을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자랑하면서 그가 몇달 후 「명의」로 평판났다고 쓰고 있다. 하여간 임강에 온 김일성은 만7세였으므로 학교에 들어가야 할 연령이다.그런데 종래 북한에서는 그가 소학교에 다닌 일조차 이리저리 변경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도록 만들고 있었다. 임강에서 소학교에 다닌 것도 1949년에 발간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 「모아산의 소학교」에 다녔다고 한것이 처음일 것이다.그러나 이런 서술로써는 객관적으로 그 학교가 중국인의 학교인지 한인의 학교인지 알 수가 없다. 「장군님께서는… 부모님을 따라 압록강가의 중강진으로 가시었고 그후 임강을 거쳐 팔도구로 가시어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니시었다」 임강소학교가 북한에서 조심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1978년에 나온 「불명의 자묵을 따라」에서 「1920년 봄,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께서는 강안촌에 있는 임강 소학교에 입학하시었다」라고 쓴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학교인 임강소학교를 전기에 내는 것은 「주체사상」에 저촉되는 일이었는지 어떤지 8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가정교육」에 열심이었다는 기술만 하고 임강소학교 입학문제는 언급을 피하였다. ○사상적 해결 시도 북한 어용학자들의 이러한 갈등은 이번 회고록에서 일단 낙착이 간 모양이다.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①「우리가 임강에 건너가자 아버지는 한 반년 남짓동안 중국교원을 붙여 중국말을 배우게 한 다음 나를 임강소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다. 나는이 학교에 입학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중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8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가정교육」에 열심이었다고 썼는데 여기서는 그가 자식에게 중국인 가정교사를 붙였다고 밝히고 있다.또 그가 정식으로 임강소학교에 입학한 것도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서술로 되고 있다. ②「어째서 아버지가 나에게 서둘러 중국말 공부를 시키고 나를 중국인학교에 다니게 하였는지 그때로서는 미처 다 깨닫지 못하였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지원」사상에 기초한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일성은 이런 말로 오랫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임강소학교 진학문제를 「사상적으로」해결하였다.아마도 김일성은 1980년대 초까지 아버지가 시킨 중국학교 입학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그는 수십년이나 이 문제를 가지고 어용학자들에게 우왕좌왕시킨 끝에 「지원」을 가져와서 합리화시켰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전기의 불명확한 기술은 북한 어용학자들 뿐 아니라 필자에게까지 판단을흐리도록 만들어 놓았다.필자는 김일성 평전에서 임강에는 당시 모예산현립소학교와 한인이 경영하는 「모예산숙」이 있었는데 그 어느 쪽에 김일성이 입학했는지 단정할 수 없다고 썼었다.이번 김일성의 회고록은 필자의 이런 궁금증도 풀어준 것으로 되어 있다. ○수십년 걸려 정리 필자가 당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이유는 모아산현립소학교가 1927년 당시 한인을 박해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반동소학교였기 때문이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만주의 봉천군벌과 「불령(불령)선인취체협정」을 체결하였다.이 협정은 「삼시(미쓰야)협정」으로도 불리는데 일제는 이 협정후 만주에 있는 한인 독립운동가와 운동단체를 마음대로 탄압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작림은 일제가 한인탄압을 구실로 1927년 안동령사관의 모예산분관을 설치할 책동을 부리게 되자 이것을 반대하기 위하여 뒷면에서 중국의 관청과 민중을 발동시켜 반일운동을 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반일운동은 그 직접적인 대상이 한인이었다.임강의 관헌은 모아산분관 설치의 주요인이 일제에 의하여 만주로 쫓겨 나온 한인에게 있다고 단정하고 중국민중을 동원하여 한인을 박해한 것이다.김일성은 이 악명높은 소학교에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기 싫어하여 70세 생일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이번에 「지원」을 내세우고 입학사실을 공개한 것은 김일성연구의 진척으로 사실을 감추지 못하게 된 그가 택한 고육지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Ⅰ」59면 ②평전 39면 ③평전 38면 ④「세기와 더불어 Ⅰ」58면 ⑤같은책 59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9)

    ◎유년시절:7/20일 머무른 중강진 혁명사적지로/“단오씨름판서 일본아이 뉘어” 자랑/독립운동가 비밀연락원으로 자처/임강이주시기 1919년 5월 아닌 6월이후 김형직은 일제기록에 의하면 3·1운동때 평북 중강진에서 활약하였다.따라서 그는 3·1운동때보다 훨씬 이전에 이 중강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3·1운동 후에는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어 5월에 대안인 임강으로 이주하였다. 이런 기록을 보면 김형직 일가는 북한이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1919년 초가을에 만경대에서 중강진으로 간 것이 아니고 3·1운동 이후에 갔다.그런데 임강으로 떠난 달이 5월이라는 것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5월 도강설 모순 「무지개 비낀 만경봉」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1)씨름­김일성은 임강에 있었던 어느날 부친의 혁명사업을 돕기 위해 연락임무를 받고 나루터를 건너 중강진으로 나왔다.이날은 바로 5월 단오날이었다. 명절날이어서 중강진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때마침 조선아이들과 일본아이들이 씨름하고 있었다.김일성은 조선아이들이 지고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씨름판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몸집도 큰 일본아이를 조선식 씨름으로 이겼다.일본아이가 이 씨름은 일본식이 아니라고 트집을 잡자 그는 너희들은 너희식대로 하고 조선사람인 나는 조선식으로 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냐 하고 또다시 덤벼드는 일본아이를 보기 좋게 넘겨버렸다… 이 책에서는 김일성이 씨름판에 든것을 1920년의 단오날이라 하고 있다.당시 그는 임강에 있었는데 일부러 「연락임무」를 띠고 중강진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5월 단오는 우리 세시풍속에 있어서는 추석·정초에 못지않는 3대명절의 하나다.부모는 자식을 슬하에 두고 집근처에서 놀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필자는 이렇게 추측하며 「감일성평전」에서 김형직 일가는 음력 5월의 단오날에는 중강진에 있었고 그후에 임강으로 이사했다고 기술하였다. 필자의 이러한 추측은 적중하였다.「세기와 더불어」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도와 망도봐주고 여인숙에 찾아오는 독립운동자들의 시중도 해주고 중상·중덕 등지를 다니면서 비밀연락도 하였다. 중강진 인상 가운데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나보다 몸집이 더 큰 일본아이와 씨름을 하며 그 아이를 배지기로 넘어뜨리던 일이다.나는 그때 조선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일본아이가 있으면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제타도에 집중 객주집 주인은 후환이 두려워서 걱정했지만 아버지는… 내 배짱을 지지해 주었다」 김일성은 여기서 일본아이와 씨름한 것은 김형직이 중강진 여인숙에 있었을 시기였다고 하고 있다.결국 임강에 넘어간 후 맞이한 단오가 아니라 1919년의 단오날 일이었던 것이다. 1919년 음력 5월5일은 양력으로는 6월2일이 된다.김형직 일가는 중강진에서는 여인숙에 살면서 적어도 양력 6월초순까지 이곳에 체재하였다.일본 관헌 기록에서 5월에 김형직이 임강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음력 5월의 오기였다. 김일성의 중강진 시기란 여인숙에서 20일정도 살던 시기이므로 그가 한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을 것인데 현재 중강진은 김일성의 혁명적 사적 투성이다. 이상의 「일화」들을 보면 김일성은 만7세이면서 벌써 자수성가한 혁명가처럼 되어 있다.모든 이야기가 「일제 타도」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둘째 문제이다. 이상 지금까지 어린시절에 관한 북한의 김일성전기 서술내용을 소개하였다.그 내용은 그의 어린시절의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정권의 교양방침에 따라 그 어린시절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정권에 의한 창작 북한 어린이들을 김일성의 의도대로 어떻게 사상개조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김일성 어린시절 설화는 한국에서 보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로 북한 어린이들은 김일성부자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고 그들에게 반대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투쟁」하는 심성을 키우게 된다.그들의 「투쟁대상」은 「왜놈」이나 일본군국주의자뿐아니라 미제국주의자,「남조선괴뢰놈들」그리고 「보수반동」과 「종파놈」에게까지 확대되어 있는 것이다. ①「무지개 비낀만경대」148면 이하 ②평전 36면 ③「세기와 더불어 1」55면
  • “굶주림…절망…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요덕15호 정치범수용소:1)

    ◎북한탈출 안혁·강철환씨 수기연재 앞서 회견/5만명 가족·독신자동 나눠서 감시/탈출하다 적발되면 돌팔매질 사형/강냉이죽 연명… 사람 죽으면 옷차지 아귀다툼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죽음자체보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는 죄없는 북녘 동포들이 절망과 공포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다. 함경남도 요덕군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에 있는 12곳의 수용소 가운데 가장 크고 처참한 곳이다. 북한 주민들은 「조선인민경비대 2915부대」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이 곳을 「15호 관리소」또는 「15호」라고 부른다. 15호는 구읍리·입석리·용평리·평전리·대숙리등 5개 리(이)가 있는 요덕군전체 지역에 설치된 거대한 「수용소군도」이다. 이 수용소에는 이른바 반동분자·사상불순자라는 누명을 쓴 북한 주민과 북송교포등 5만여명이 가족세대와 독신자세대로 나뉘어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에 수용되어 있다. 이곳에 9년6개월동안 가족과 함께 수용되었던 강철환씨(24·북송교포 2세)와 1년3개월간 혼자 갇혔던 안혁씨(24·전탁구선수). 강씨는 조총련 교토(경도)본부 상공회장을 지내다 지난 61년 일가족과 함께 북송된 할아버지 강태휴씨(92·생사불명)의 손자로 북한에서 결혼한 아버지 강리명씨(89년 병사)와 어머니 신도옥씨(90년 병사)사이에서 68년 출생했다.강씨 가족들은 소문난 부자였던 할아버지 덕분에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아파트에서 자가용차와 냉장고까지 갖추고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77년 7월 강씨의 할아버지가 영문없이 행방불명된지 한달만에 할머니·삼촌·아버지·남동생등 일가족 4명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강씨는 당시 10살이었고 성분좋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강제로 이혼 당해 헤어졌다. 한편 안씨는 중학생 대표 탁구선수로 중앙체육학교에 다니던 중 호기심으로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의 연길등지에서 놀다 돌아온뒤 간첩으로 몰려 87년 11월부터 1년3개월간 수용되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사지에서 풀려난뒤 지난 3월 북한을 탈출,중국을 거쳐 남한에 귀순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눈에 선한 수용소의참상을 상세히 폭로하고 싶어한다.그들은 인간다운 삶을 되찾게 된 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수용소 생활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 강씨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인간에게 온갖 잔인한 고통을 주어 죽어가는 과정을 처참하게 체험토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말했다. 1인당 하루 5백g의 강냉이알맹이가 주식의 전부이며 반찬은 굵은 소금.이때문에 수용소 사람들은 풀을 뜯어다 강냉이를 삶아 으깬뒤 죽을 쑤어 먹거나 풀범벅을 만들어 먹고 있다는 것이다. 강씨는 또 『흙벽돌과 나무판자로 지은 낡은 집은 흙방바닥이며 1년에 한번 지급되는 마대로 짠 겉옷이 의복의 전부여서 사람이 죽으면 서로 헌옷을 차지하려고 다투며 신발은 아예 지급되지 않아 나무껍질과 헝겊으로 감발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이들은 『수용소안의 모든 사람들이 극심한 노역과 영양실조로 펠라그라병(단백질 결핍증으로 심한 피부병·설사증세와 정신이상을 일으켜 곤충등을 잡아 먹는 병)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수용소에서는 약을 구경할 수도 없어 병에 걸리면 곧바로 죽을 수 밖에 없다』면서 『폐렴·결핵등에 걸리면 치료는 커녕 산속에 있는 격리수용건물에 넣어 죽을때까지 방치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또 가족세대인 경우에는 드물게 출산을 하는 여자들도 있으나 아이들은 모두 태어난 직후 죽거나 살아도 기형아가 된다고 말했다. 수용소 생활을 견디다 못해 가끔 작업장에 나간 틈을 이용,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지역이 워낙 넓은데다 제대로 걷지를 못해 모두 곧바로 붙잡히고 만다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안씨는 『탈출하다 붙잡히면 수용자들이 모두 모인 공터에서 처음에는 총살을 시켰으나 얼마전부터는 총알이 아깝다며 목을 매단뒤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도록 명령하고 있으며 부녀자들은 이같은 끔찍한 광경에충격을 받고 까무러치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수용소 사람들에게는 겨울이 시작되는 11월부터 이듬해 새풀이 돋는 3∼4월까지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3)

    ◎유연시절:1/이용목적 따라 이름 바꾸어 사용/호적에 오른 본명은 중학생때의 “성주”/일제시대엔 보신위해 “성주”로도 표기/최근 우상화목적,유명 ‘성주’로 선전 성균관대 이명영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김형직의 동생인 김형록의 아들 중에도 김영주가 있었다.그래서 필자의 추측이지만 김형직과 김형록 두 형제의 아들에 각각 영주가 있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두 가정중 어느 한 가정이 자식들의 이름을 바꾸어야 할 시기가 온 것으로 보인다.결국 김형직 쪽이 자기 아들을 성주·철주·영주로 고쳤다.실제로 북한에서는 지금 철주·영주라 하지 않고 철주·영주로 표기하고 있다. ○김형직쪽서 개명 따라서 호적상으로 보면 김일성은 김성주가 아니라 김성주일 것이다.중학시절의 그의 이름이 바로 김성주였다. 그러나 김성주는 자기 이름을 꼭 그렇게만 고집하지 않았던 증거도 몇가지 있다.1930년 3월에 그가 관계한 동성농민총동맹의 일본기록은 김성주가 되어있고 30년 9월 이후에 그가 활동한 회덕현 오가자에 있었던 최형우는 자기 저서에서그를 김성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김일성은 자기 본 이름의 표기를 때와 장소에 따라 바꾸었다.과거의 독립운동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보신의 방법을 그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그가 중학시절에 사용하고 있었던 김성주를 버리고 유명인 김성주만 고집하는 것은 부자연하다.보통 같으면 그 반대가 정상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김성주만 선전하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적어도 해방후라는 때와 북한이라는 장소에서는 호적명 보다 유명쪽이 보신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그는 김성주를 선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김성주를 사용하여 유리한 점이 과연 무엇인가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년시절이란 부모의 행적에 따라 유아의 생활이 결정되는 자아 없는 시절이다.따라서 보통 같으면 자서전에서 유년시절 같은 것은 취급하지 않더라도 그 주인공에게는 별로 어떻다 할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경우에는 그저 이렇게 상식적으로 보고 그의 유년시절을 생략할 수가 없다.왜냐하면 북한에서는 태어나서 몇살 안되는 유아들을 탁아소에 집어넣고 그 유아들을 낳은 부모 대신에 김일성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면서 「김일성 아버지의 어린시절」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게 하기 때문이다. ○주입식교육 강요 필자는 1976년에 평양을 방문하여 그곳의 전시시설인 「9·15 주 탁아소」를 참관한 일이 있었다.나는 지금도 그 강당에서 3살난 어린 여자아이가 무대에 나오고 혀 짧은 말로 「아버지 김일성원수님께서는 1912년 4월15일에 만경대에서 탄생하시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고사리 같은 양손을 들어 배경에 있는 「만경대 초가집」을 가리키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생아버지도 양아버지도 망각시키고 「김일성아버지」를 억지로 어린아이의 머리에 박아넣는 세뇌작업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아버지 뿐 아니라 어머니까지도 독점하여 양친을 의미하는 「어버이」를 써서 북한주민에게 「어버이 수령 김일성원수님」이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시키도록 하고 있기도 하다.그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까지 빼앗아 어린이의 순진한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리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현실을 거꾸로 보면 김일성은 북한의 어린이를 세뇌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자기의 어린시절」을 교재삼아 가르쳐주어야 한다.어렸을때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이 자기를 어떻게 가르쳤으며 그 가르침을 어떻게 소화하였는가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년시절이란 자아 없는 시절이므로 그때 들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이 때문에 그는 그가 들었다는 기억도 없는 일들을 「들었다」고 하여 그 어린시절의 「사적」을 날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셈이다. ○유년기사적 날조 물론 이러한 날조는 처음에는 김일성 자신만이 한 것은 아니었다.해방후 최초로 김일성의 유소년시절을 「만경대」란 단행본으로 발간한 사람은 작가 한설야였는데 그는 김일성과 그외 일가친척을 두루 찾아 가 김일성의 유소년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미화하였다. 이 책은 62년에 한설야가 숙청됨에 따라 김일성이 전부 불살라버렸다.「만경대」가분서의 대상이 된 것은 그 내용이 벌써 당시의 우상화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①평전 33면 ②평전 389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2)

    ◎출생비화/「1912년 4월15일」의 의문들/중학동차 임춘추는 14년생으로 회고/날짜도 음력·양력 밝히지 않은채 기술/태어난 곳도 만경대 아닌 대동군 칠골 김일성은 자기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변경하고 날조한다. 1989년 동구의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되고 난 이후 한국에 널리 알려진 사실 가운데 하나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틀림없이 소련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근교의 브야츠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북한에서는 그가 「백두산 밀령」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고 있다. ○우상화위해 변경 이로 미루어 보면 김일성 자신의 출생과 성장도 사실보다는 「우상화」위주로 변경되어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번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나는 아버지 김형직의 맏아들로 망국 이태 후인 임자년(1912년)4월15일에 만경대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있다. 우선 김일성은 그 생일이 4월15일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음력인가 양력인가,음력을 양력으로 고친 것인가,아니면 전혀 다른 날짜인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북한에서 발간된 역사사전에는 김일성의 사촌동생인 김원주가 1927년 9월22일에 태어났다고 하면서 이 날짜가 음력 8월27일이라고 밝히고 있다.그런데 그보다 15세 먼저 난 김일성에 대해서는 일체 그러한 언급이 없다.이 점은 김형직이나 그의 동생 김철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봉건사회였던 조선왕조가 망한 직후 태어났다면 그것이 음력인가 양력인가 밝혀야 마땅하다.이런 점에서 그의 생일이란 날짜 자체를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 김일성이 정말로 1912년에 태어났는가 어떤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다카기(고목건부)란 일본의 원로신문기자가 있었다.그는 일본 매스컴에서 북한을 「북조선­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호칭하도록까지 한 철저한 친북한파였는데 나중에는 김일성의 어용 전기를 써주기 위해 평양에 가서 직접 취재하는 열성까지 보였다. 다카기는 김일성의 내력을 알기 위하여 당시 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임춘추와 만난 일이 있었다.그는 1912년생이라는 임춘추로부터 은을 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춘추는… 육문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보았더니 나이는 그보다 두어 살 아래인데 김성주라는 학생이 있었다」 1912년 생인 임춘추가 다카기에게 김일성은 자기보다 두어살 아래라고 하였다면 그는 12년생이 아니라 14년생 정도로 된다.따라서 김일성이 1912년 생이라는 것도 상당한 의문을 남기게 되는 대목인 것이다.김일성은 사실은 1914년 생이면서 12년 생으로 행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김일성이 만경대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그냥 믿기는 힘들다. 김일성이 유일독재체제가 아직 미완성이던 1958년,북한의 역사학자 이나영은 「김일성 원수는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 빈농가에서 탄생하여 그후 고향인 만경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본명은 김성주)」라고 적었다.또 1961년에 나온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서도 그렇게 쓰고 있다. 김일성이 태어난 해가 만약 1912년이라면 이해에 부친 김형직은 평양숭실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는 만경대에서 편도 40리 길을 통학하고 있었다. 한편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의 친정은 그 부친 강돈욱이 후에 장로가 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그는 1906년 전에 살던 집을 헐고 새 집을 지었는데 현재 칠골에서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이 집을 보면 그는 결코 빈농은 아니다.그는 또 하리교회와 창덕학교를 짓는데도 주동이 되었다. 한국의 풍습으로는 부인이 첫 아이를 낳을 때 친정에 가는 것은 보통 일이었다.부자집 친정에서 강반석이 첫번째 해산을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별로 이상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대개 친정서 출산 그러나 김일성은 우상화를 위해서는 자기가 꼭 만경대에서 태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한 모양이다.김일성의 이름 문제도 이번 회고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버지는…내 이름도 나라의 기둥이 되라는 의미에서 성주라고 지어 주었다」 그러나 문헌기록을 보면 김일성은 김성주 이외에 김성주로도 김성주로도 표기되어 있다.또 김일성 자신은 그 어느 표기도 다 자신의 이름이라 하고 있다.예를 들면 김성주는 평양의 조선 혁명박물관에 걸려 있는 일제기록의 사진판에 보이며 김성주는 조선전사에 역시 사진판으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김성주가 본명이라고 추측되는 유력한 자료로는 해방직후 만경대에 직접 가서 취재한 한재덕이 남긴 글이 있다.거기에는 김일성 3형제를 김성주,김철주,김영주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1」14면 ②「김일성,조국에로의 길」고목건부저 1982년,일본,채류사간,26면 ③「조선민족해방투쟁사」리나영저,336면 ④평전 22·23면 ⑤「세기와 더불어 1」9면 ⑥「김일성장군개선기」74·75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1)

    ◎김형직의 사망신화:2/“아사·타사·동사 3대각오 지시” 등 꾸며/사실은 급사… 많은 재산 남긴것엔 함구 김일성은 부친 김형직이 죽기 직전에 「유언」을 받았다고 선전하고 있다.「세기와 더불어」는 이 유언을 김일성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유산」이라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원의 사상,3대 각오,동지획득에관한 사상,두자루의 권총,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0)

    ◎김형직의 사망신화:1/“일경에 연행도중 탈출하다 동상” 미화/“공산당 싫어해 피살” 무사단원이 증언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1925년 5월 이후에 백두산 서남쪽인 장백현 팔도구에서 백두산 북쪽인 무송에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무송은 백산무사단과 광정단의 발생지였고 26년에는 한때 정의부의 총지부가 있었다. 그러나 김형직은 1926년 6월5일에 32세로 갑자기 사망한다. ○26년 갑자기 사망 김일성은 이 사망의 원인을 1917∼18년 평양감옥에 투옥된 김형직이 병약하였던 것과 24년말 팔도구 내안인 평북 후창군 포평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후창경찰서로 호송되는 도중 연포리의 주막집에서 탈출할때 입은 동상이 악화되었다는데 돌리고 있다.사인은 직접적으로는 연포리에서 얻었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일찍이 이 주장에 대한 반박논문을 쓴 일이 있었다.그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①24년말 김형직을 연행한 경관은 아키시마(추도)와 또 한명의 조선인 경관이라고 주장하는데 68년에 발간된 「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은 도보로,72년에 발간된백봉의 「인류해방의 구성 김일성원수」는 호송차로 김형직을 연행했다고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탈출을 성공시킨 인물 황씨는 술병을 들고 그들을 뒤쫓아 연포리 주막에서 순사 2명을 취하게 하였다.그 틈을 타서 김형직은 탈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씨가 호송차를 어떻게 술병을 들고 뒤쫓았는지의 설명이 불가능하다.68년 전기를 72년 전기가 이렇게 바꾸어 놓은 것은 이 일화가 창작의 하나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된다.물론 그후의 전기들에서는 두 경관은 다시 「걸어가게」되었다. ②연포리라는 곳은 한반도에서도 가장 추운 중강진 근처의 산간부락으로 영하30도를 오르내리는 곳이다.24년말이면 12월이 되는데 이런 혹한에서 탈출하여 산마루까지 올라가면 「심한 동상」으로 끝나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③연포리는 인가가 드문 중간고지이지만 후창과 포평에는 경관들이 아주 많았다.가령 두 경관이 김형직을 놓치더라도 그후의 그들의 경계망을 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52년 전기엔 없어 이상인데 필자는 여기에 1960년초까지발간된 김일성의 전기들에는 이러한 「일화」가 없었다.그의 만주행은 김형직이 김일성을 「데리고」만주로 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따라서 이 「일화」는 1960년에 있었던 조선노동당 제4차대회 이후 김일성의 「만주단독행신화」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꾸며진 창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필자의 논문은 87년에 발간된 김일성평전에 실렸다.그런데 김일성은 이번에 나온 「세기와 더불어」에서 필자의 견해를 다시 논박하는 듯한 장대한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그 내용인즉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의 초가을,김일성은 무임소상이었던 한글학자 이극로를 평안북도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김형직이 탈출한 연포리의 주막을 들렀다는 것이다.그 주막은 당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뿐만 아니라 이극로에게 김형직 탈출의 이야기를 한 인물은 한국전쟁보다 훨씬 이전인 1930년 그가 신간회대표단에 망라되어 길림에 갔는데 이때 만난 황백하였다는 것이다.황백하는 길림소년회에 김일성과 같이 있었던 황귀간의 아버지이다. 이런 말을 늘어놓은 김일성은 이극로가 「혁명전통」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하며 무척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말 자체가 역시 날조라고 보고 있다.김일성이 50년 초가을에 그런 말을 들었다면 52년 전기에는 왜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가 문제로 되기 때문이다. 이극로는 82년에 죽었는데 김일성은 그가 죽어서 10년된 후에 이런 말을 끄집어 내고 있다. ○우상화위해 창작 이번 회고록은 김형직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두세번 「심한 동상」을 입히고 도중에서 마적때에까지 털리게 하고 있다.김형직이 중병에 걸리지 않으면 안되도록 새로 만든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진상은 아래의 증언에 있는 것이다. 「나는 형직 등과 같이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백산무토단에 관계하고 있었다.단장은 김호라는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모두가 순전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 공산당운동이 성하게 되었다.그렇게 되자 자연히 독립운동진영에 금이 가서 분열하였다.한방의사였던 김형직은 독립군에는 약을 주고 치료하여 주었는데 공산당은 냉대하였다. 그러한 형직을 반동분자라 하여 공산당원들이 어느날 밤 습격·살해하였다. 김성주(김일성의 본 이름)는 자기 부친이 누구에게 죽었는지도 모르면서 지금 공산당운동에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증언을 한 이도일은 1930년대 일제의 주주로 전락하여 김일성 토벌에 동원된 인물이다.그러나 그는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도 구출하여 김형직의 아들이라고 갖은 배려를 다 돌려준 인물이기도 하다.또 그가 말하는 당시의 소란한 세상도 필자의 연구와 일치한다. 김형직은 건강한 몸으로 있었지만 테러리즘에 희생되어 급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①「4인의 김일성」이명영저 일본 성갑서방간 242면 ②「세기와 더불어1」109면 이하 ③「4인의 김일성」242면
  • 소설가 황순원씨(이세기의 인물탐구)

    ◎소설을 시의 경지로 승화시킨 “청산의 백학”/작품 끝낼때마다 “마지막 작” 심정으로/문장·단어 하나까지 보석처럼 갈고 닦아/시·소설의 잡문엔 손 안대… 문학박사학위도 거절 서울신문사는 증면과 더불어 새로운 기획물 「인물탐구」를 매주 화요일 1페이지에 걸쳐 연재키로 했습니다.이 와이드 기획물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를 가지고 관심있게 대하는 사람의 이야기 인물평전입니다.그것은 삶의 모습을 담은 인생일 수도 있고 세상살이와 고리를 함께 하는 인간의 진면목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집필은 본사 이세기논설위원이 맡았습니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산골아이」나 「소나기」「학(학)」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투명하게 정제된 청강(청강)의 문체와 명편에 흐르는 별빛같은 이야기는 우리의 정서속에 총총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새삼 황순원문학과 한국문학사에서 그가 점하고 있는 오늘의 위치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청산의 백학」「소설을 시의 경지로 승화시킨 언어미의 추구」「하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절고의 기품」등 이미 잘 알려진 시중의 찬탄을 되풀이 열거하는 것도 무색한 노릇이다. 「소설가는 소설로 말한뿐 더이상 다른말은 하지 않는다」,그래서 독자들에게 책임지고 소설을 내놓기위해 그는 문장 한구절 단어 하나에 세심하게 배려하여 「토씨」 한 자도 잘못 놓인 바가 없다는 정평을 받고있다. 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남에게 읽힐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이미 출간된 시집 「방가」에서 27편중 12편을 빼 버리고는 『내가 이렇게 버린 것을 이후에 어느 호사가가 있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든 뭐로든 끄집어 내지 말기를』당부하기도 한다. 작품이 활자화되기 이전까지 그만의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지켜 초교에서 재교까지 꼼꼼하게 손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넘치는 감정의 뒷받침없이는 작품을 써본적이 없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쓰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작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이르고 있다. 일사일언적(일사일언적)인 그의 압축된 문체의 시정신은 「생각나면 시구를 적어두는 운문적 스케치 방식,사전구상에매이지 않고 붓이 생각해서 쓰도록 맡겨두는 데서 온 탄력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의 문장은 말하듯이 써야한다고 하지만 귀로 듣는 말과 눈으로 읽는 글이 같을 수 있을까. 그는 언젠가 들은 감명깊은 강연을 후에 속기록으로 살려 글로 옮겨쓴 것을 보고는 그 지리멸렬함에 크게 놀랐다고 말한다. 「역시 말하듯이 말하고 글쓰듯이 써야 한다」고.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보석처럼 갈고 닦는 언어 탁마(탁마)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설을 끝낼때마다 「나는 과연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는가」를 자신에게 묻기를 잊지 않는다. 이른바 지난 60년 동안 시와 소설외에 단 한번도 잡문을 쓰지 않았고 신문연재소설을 거절해 왔으며 어떤 단체에도,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 제자들이 새로 책을 내면서 서문이나 발문을 부탁하면 정중하게 이를 말린다.그자신도 그의 책속에 서문이나 발문을 써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나 서문이나 발문은 독자가 소설을 읽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재직했던 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수여하려 할때도 「소설가는 소설가 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이를 깍듯이 거절했다. 이렇게 표면에 드러난 예만으로는 그가 얼핏 까다롭게만 비치기 십상일것이다. 물론 문학을 하는 길에서는 공정·엄격하고 단호하고 결벽하다.그외엔 인자하고 다감하고 말을 아끼고 술을 즐긴다. 주량은 3년전까지는 소주 한병반,주력은 문단데뷔보다 빨라 13세때부터 체증(체증)으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문학하는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술마시는 자리에서도 명정(명정)의 모습을 보이거나 비틀거려 누가 댁까지 바랜일도 없다. 아무리 취중이라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빛나는 형안(형안)으로 경청하고는 내용이 정확치 않으면 두번 세번 되물어 확인하기 때문에 어설픈 지식이나 주워들은 풍월은 통하지 않는다. 다만 「술」에 얽힌 일화라면 그의 친구이며 번역문학가인 원응서씨와의 총죽지교(총죽지교)를 빼놓을 수 없다. 황순원과 술자리에서의 「마지막잔」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느 술자리에서든지 원응서씨는 『그 마지막 잔은날주게』하는 버릇이 있었다.술이 바닥에 이르면 이유도 없이 친구는 이 술을 탐냈고 언제부턴가 마지막 술은 원응서씨의 몫으로 돌아갔다. 73년 낚시갔다가 쓰러져 친구가 타계하자 황순원씨는 술마시는 자리에서 반드시 이 마지막 잔을 친구에게 따라주었다. 잔에 술을 따라 빈그릇에 버리는 이 의식은 지난 20년간 한결같이 지켜져온 그의 친구를 그리는 아름다운 슬픔의 장면이다. 역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라면 77년 서울신문사 신춘문예 심사때의 예가 있다. 그때 최종심에 두편이 남게되자 같은 심사위원인 홍성원씨가 『두편중 선생님이 고르시지요』했다. 아무래도 대선배인 황순원씨가 당선작을 확정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으나 그는 굳이 홍성원씨의 선택에 따르겠다면서 이를 사양했다. 『하나는 군대물로 장래성이 보이고 다른 하나는 뱃사람 얘기로 소설기법상 우수하므로 신춘문예 당선작으로는 장래성 보다 소설로서 완벽한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럼 뱃사람 얘기로 결정하세』 뱃사람 얘기로 결정후 잡담하는 자리에서『군대물을 쓴 사람은 바로 내 제자』라고 했다는 얘기다. 그는 아무리 아끼는 제자라도 작품이상으로 그를 부추기거나 추켜세우지 않는다.또 어떤 경우에도 남을 악평·혹평하는 법이 없다. 그가 문단후배들을 즐겁게 했다면 72년 2월 현대문학사가 주최한 문인극 「양반전」에 특별 찬조출연한 일이다. 유현종 연출로 한국일보 13층 홀에서 공연된 이 연극에서 그는 박영준 최정희씨와 함께 「동네사람」으로 분장해서 모처럼 문단에 훈훈한 화제를 뿌려주었다. 황순원씨는 언제 어디서나 명징·적연할뿐 넘치거나 눙치지 않는다.보기싫은 것·듣기 싫은 것·하기 싫은 것을 명료하게 구분하여 전혀 주저가 없다. 오산중때 남강 이승훈씨의 단정한 풍채와 인품을 보고 『남자가 늙어서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했다는 그는 그때부터 자신도 「늙어서 아름다운 남자축에 들수 있기를」마음속에 그려왔는지도 모른다. 황순원씨는 평남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에서 교육자이며 조림사업을 하던 황찬영씨와 장찬붕여사의 아들 3형제중 장남.숭실학교 출신인부친은 숭덕학교 교사시절 바로 남강과의 기미독립만세사건으로 수감된 적이 있었고 64년 창우사에서 펴낸 「황순원 문학전집」(전6권)제자는 바로 부친의 친필이다. 숭실중으로 전학하여 졸업후 일본 와세다 제2고등학원 재학때 나고야 김성여전에 다니던 양정길여사와 35년 결혼,동갑인 양여사와는 평양 숭의여고 문예반장때부터 교제해온 사이다.자녀는 시인이자 서울대 영문과 교수인 동규씨(54)등 3남1녀. 요즘은 부인과 함께 새벽7시면 사당동 대림아파트 단지내 공원을 1시간씩 산책하면서 처음 문단 출발때처럼 오랜세월 가슴에 담아두었던 시어를 고르고 있다. 삶을 정관하는 절제된 서정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애정,보석을 눈에 띄지않게 장식한 듯한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감동하게 되는 것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울같은 청휘,또는 고치에서 막 뽑히기 시작한 명주실 같은」바로 그 싱그러운 시와 문득 마주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최근 시에 이렇게 쓰고 있다. 밤늦어 플랫폼에 내 긴 그림자를 끌고 섰을때 밀물이 거슬러 오르는 강물을내 저만치서 바라볼때 가을걷이 끝낸 들판을 내 해걸음녘에 거닐때 그러나 나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항상 곁에 지키고 있는 이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이가 누구라는걸 나는 안다­.
  • 전기/꽁트/만화/대선후보들 얼굴알리기 경쟁

    ◎20여종 출판… 이달들어 더욱 늘듯/지나친 PR·상대비난… 독자반응 시큰둥/미 대통령이야기·5공인사 관련서도 가세 대통령 선거를 두달여 앞두고 대통령후보및 선거관련서적이 쏟아져 나왔다.9,10월 들어 출판붐을 이루고 있는 이들 서적은 현재 20여종이 서점가에 나와 있으며 11월초를 고비로 대거 출판될 전망.이들 서적은 김영삼·김대중·정주영·백기완씨등 대통령후보출마자들의 자서전적 전기에서부터 비교적 객관적 시각에서 상호비교를 시도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정치풍자소설·PR만화·사진집도 끼여 있다. 김영삼후보관련서적으로는 「닭의 목을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박권철 백양출판사),「김영삼,왜 그의 등장은 시대적 요청인가」(송철원 동광출판사)등 전기류와 「변화의 시대를 연다」와 같은 사진집이 대표적.김대중후보도 「사랑하는 가족에게」(김대중 새빛문화사),「영웅의 최후­김대중평전」(이태호 한뜻),「신김대중 1993」(민족공동체연구소편집부),「만화 김대중­알고보면 따뜻한 사람」(장영철그림 호산문화)등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다. 국민당 정주영후보의 경우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소설·전기류·꽁트·만화등 각분야별로 책을 펴냈다.소설로는「소설 정주영」(전범성 기문연펴냄)과 꽁트집 「나라고 대통령되지 말라는 법있나」(하이콤스 동인문화),전기류 「정주영은 말한다」(정주영 울산대학교)가 그것.본격만화PR지 「감자 트랙터」(이현세그림 문화사랑)의 경우 노골적인 홍보물로 6천원정도 짜리를 정가3천원에 출혈판매하고 있다. 민중후보 백기완의 「그들이 대통령되면 누가 백성노릇할까」(백기완 생명문화사)도 나와있다.이밖에 주요대선후보들을 서로 비교한 정치평론집으로는 「대통령이 뭐길래」(정상구 인간시대),「김영삼·김대중 경쟁과 공존의 역사」(한상휘·오연호 외암출판문화),「대선누구를 지지할 것인가」(김중배외 풀빛)등이 있다. 그러나 「오리공화국」(김상 삼일출판),「대변인 얼굴은 빨게」(이상락 문예마당),「농담」(이호광),「김영삼은따로 울지 않는다」(대학문화기획단)등은 후보들을 뭉뚱그려 비판한 정치꽁트집.소설류로는 고원정의 「최후의 계엄령」(범조사)와 「대권」(우리 문학사),윤성모의 「청와대를 향하여」(지리산)이 있다.이중 「대권」은 현재 출판된 1·2권 2만질정도가 팔린것으로 추산되며 3권은 선거가 끝난뒤에 결산용으로 내놓을 예정이어서 벌써부터관심을 끈다. 이외에도 「대통령의 유머와 위트」(제럴드 가드너),「미국대통령의 모든 것」(타카이치 사나에),「대통령의 스캔들」(셀리로스)등 외국작품도 나와있다.장세동저 「미래는준비하는 사람들의몫이다」,김성림저 「전두환육성증언」,김재홍저「군부와 권력」등은 대선붐을 타고 서점가에서 잘 팔리는 책으로 꼽혔다. 그러나 이번 대선관련서적들은 치열한 홍보,광고전에 비해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데는 실패한 인상을 주고 있다.50만권이상이 나간 고원정의 「최후의 계엄령」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이 판매가 부진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을지서적 김영수출판실장은 『이들 서적들이 지나치게 자기PR용이거나 상대후보비난일색의 정치꽁트류로 선거에 관심있는 대학생등 지식층독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독자들은 정치의 본질과 정치가의 자질,사명등 궁금증에 명쾌하게 답해줄 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9)

    ◎김형직의 행적/세브란스의전 가짜 졸업증 내걸어/한의로 번 돈 일부 독립자금에 쓴듯/1925년 일제기록엔 「개전자」로 회고록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김형직이 어떻게 의학공부를 했으며 무면허 의료행위를 했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버지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책을 읽었다.한동안은 눈병을 잘 고친다는 왕고모부 김승현네 집에서 보양을 하며 감옥에서 시작한 의학공부를 하였다」. ○18년경 한방 공부 여기서 김일성은 부친이 감옥에 갔다고 써 있지만 필자는 이것은 믿을 수 없다고 전번에 지적하였다.그러나 김형직이 1918년경에 서당교사를 그만둘 생각을 가지고 한방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배운 것을 가지고 한방의를 시작할 때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한다.북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께서는 평양에 있는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증을 구해다가 펼쳐놓고 환자들의 병을 보시었다」. 김일성은 자기 아버지가 가짜 의사였다고 북한에서 이렇게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중학교 2학년 중퇴생인 김형직은 무면허 서양의사가 되어 무지한 한인들을 기만하고 착취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무면허의사 시인 그는 이러한 수법으로 임강에서는 순천의원,팔도구에서는 광제의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무지무지하게 많은 돈을 벌었다. 25년 4월에 조사된 김형직에 관한 일제기록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팔도구,의자,김형직,삼십삼,배일,천원(자산을 말함­인용자),평남 평양출신,한학의 소양이 있다.대정8년 3월 조선독립 소요사건의 주모자였다가 관헌의 체포가 두려워서 동년 5월 대안으로 도주하고 당시 불령배(불녕배)의 오이를 잡고 있었으나 개전후 의사에 종사함」. 여기에는 25년 4월에 자산으로 일화 1천엔을 가지는 장백현 제일의 부자 김형직의 인적사항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한학에 소양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한방의로 돈을 벌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또 일제는 김형직이 「개전」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그의 정치활동이 일제의 눈에는 크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된다.광정단의 총무는 일종의 사무직이었고 그것도 비밀리에 맡았기 때문에 일제는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활동 주목 못받아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오동진,강제하,김시우(김시우로도 쓴다)등이 김형직의 「동지」였다고 몇번이나 강조하고 있다.그런데 오동진은 대한통의부와 대한정의부의 재무부 위원장이었고 강제하는 정의부가 설립한 화성의숙의 재무부담당이었다.김시우도 1921년 당시 임강현에 1부로부터 5부까지 있었던 백산무사단의 제1부에서 역시 재무를 맡고 있었다. 김형직은 축재의 과정에서 독립자금 공급에는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①「세기와 더불어,1」34년 ②「불로리 혁명투사 김형직선생」1968년 당간.60면 ③평전 35면 ④평전 127면,한국독립사 357∼358면.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8)

    ◎김형직의 행적/1920년대 민족주의 단체 활동/만주·임강·장백현 팔도구서 한의사로/25년 광정단 지방조직의 총무 명단에 김일성의 외가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을 찾으면 그의 외삼촌인 강진석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20년 봄에 임강에 있는 매부 김형직을 찾고 있다.회고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18년 이주 「강진석외삼촌이 림강에 들어와 백산무사단을 조직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백산무사단은 평안도지방의 독립운동자들을 중심으로 무어진 무장단이다.이 무장단의 본부는 림강현에 있었다.백산무사단의 국내활동지점은 중강,초산,후창을 비롯한 평안북도 일대와 멀리 평양,수천,강서 지방에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이것은 일본으로 귀화한 김정명(시천정명)교수가 발굴한 사료의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다.김일성은 이 자료를 입수하여 백산무사단의 본부를 「임강」이라고 왜곡하고 마치 강진석이 조직한 것처럼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백산무사단은 3·1운동직후에 백두산 북쪽인 무송현에서 결성된흥업단과 동체이명으로 보이는 단체이다.그 간부에는 김호,윤세복(윤세덕),김성규가 있었다.20년이 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매제와 가입한 듯 「무토단은 무송현화개산에 근거하고 김성규를 단장으로 윤세복을 총무로 하는 단체로서 무송,안도내를 그 세력범위로 하여 목하 열심히 단원의 모집에 힘써 왔다고 하나 하등 실력이 없다.무장단체로서 들을 가치가 없는 단체이다」 일제기록에 의하면 김형직은 북한이 주장하는 18년 가을이 아니라 18년 5월경에 평북 중강진으로부터 압록강 대안인 만주 임강으로 이주하고 있다.그런데 20년 봄에 강진석이 찾아와 임강에서 백산무사단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김형직도 이때 입단한 것으로 보인다.김형직은 21년 여름 임강 동쪽에 있는 장백현팔도저로 다시 이주하게 되는데 임강에 있을 때와 같이 한방의를 하는 한편 민족주의 단체에 소속하고 있었다. ○「흥업단」의 이명 그간 흥업단은 군비단,태극단,광정단 등과 22년 여름에 통합하여 광정단으로 개편된다.이때 단장은 김호익(김호림,김호라고도 쓴다).군무장은 강진건,총무장은 군비단출신인 윤덕보였다.이중 강진건은 해방후 돌아와 북한의 요인으로 된다.아마도 김형직과의 인연으로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광정단은 대한통의부와도 관계를 맺고 있다. 대한정의부는 25년 1월,통의부,광정단 기타 10여개의 단체가 모여서 길림지방에 본부를 두고 성립하였다.광정단에서는 김호림이 민사부위원장으로 참가하고 있다. ○요인으로 귀국 25년 3월 광정단의 단장은 윤덕보였다.당시 이 광정단의 지방조직은 제1서부터 제4서까지 장백현에 있었다.그제4서는 팔도구에 있었고 서장이 박만석,총무가 김형식,재무 김상만,서기 김덕칠이었다.형직과 형식은 일본어 발음으로 다같이 「교쇼구」이므로 김형식은 김형직의 오기로 되는 것이다. 김형직은 따라서 1925년에는 백산무토단·광정단·정의부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①현대사 자료 28,15면 ②「세기와 더불어1」60·61면 ③조선독립운동사 ④,김정명편 9백95면 ⑤평전 85면 ⑥평전 35면 ⑦한국독립사 3백59면 ⑧평전 87면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6)

    ◎“김형직이 반일·공산운동 접목” 주장/“감옥에서 선진사상 배웠다” 날조/대한국민회를 적색단체로 기술 김일성을 본격적으로 우상화하기 시작한 1968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서 저자 백봉은 조선국민회를 김형직이 창시한 것처럼 왜곡하였다. 그러나 백봉은 적어도 김형직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3·1운동이 있은 1919년 이전에 조선국민회로부터 멀어졌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3·1운동 이전 멀어져 그러나 김일성의 유일독재가 한층더 악화되어 그의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근본이 다른 것으로 되어 나가자 김형직에 관한 왜곡도 극단을 달리게 되었다. 김일성은 그의 부친이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인 인물이었다고 선전하기 시작하였다.김형직이 아들로부터 제공받은 방향전환의 활동무대는 중국료령성관전현홍통구회의이다. 그런데 김형직이 언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조선전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형직은 옥중에서 러시아사회주의10월혁명의 소식을 듣고 이것으로 혁명적 신조를 굳히고 선진사상을 연구하게 되었다.그 결과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민주해방운동의 방향을 구상하게 되었다」 필자는 전번 졸고에서 김형직은 평양감옥에 투옥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그때 필자가 제공한 이유이외에도 김형직은 1919년의 3·1운동때 평북 중강진에서 운동의 선두에 섰던 것이 일본기록에 나오고 있다.전과자같으면 할수 없는 일일 것이다.이런 점과 그후 그가 갑자기 졸부로 된 점을 감안해 보면 옥고를 치렀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에 일단 따르고 김형직이 평양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옥중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의 소식을 듣는 것으로 된다.공산주의자란 없었던 그 때까지 그는 주변에 공산주의자를 「동지」로 두고 있었지 않았다.그에게는 당시 공산주의서적도 있을 리 없었다.「옥중」으로서는 공산주의자가 될 「계기」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세기와 더불어」는 김형직에게 공산주의자가 될 「계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듣지도 못한 「새로운 사실」을 양산하고 있다.그 날조항목을 여기에 열거해 놓는다. 1)「아버지는 1916년에 방학을 이용하며 간도에 다녀왔다.무슨 줄을 타고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간도를 거쳐 상해에 가서 손문의 국민혁명파와도 연계를 맺었다」 이런 말은 북한주민도 처음 듣는 말이다.아마도 이것은 김형직을 「부르주아민족운동」도 국제적규모로 경험한 인물로 조작하기 위한 허구일 것이다. 2)㉠「그해(1919년­인용자)여름에 우리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할머니는…혼자소시로 뇌이는 것이었다.『아라사에 갔는지 만주에 갔는지…이번에는 퍽이나 오래두 객지생활을 하는구나』」 ㉡「아버지가 무산동회의(1918년 11월)를 소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평안북도의 조선국민회 조직대표들과 각 지역의 연락원들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파괴된 국민회조직들을 시급히 복구하며 광범한 무산대중을 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울데 대한 활동방침을 밝히셨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레닌에 대한 이야기,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히 많이 하였다」 ㉠㉡㉢의 글은 이런 차례로 김일성이 말한 것을 발췌하여 실었다. 그런데 1919년의 일인 ㉠은 의당 ㉢에 직결해야 하는게 1918년의 청수동회의 문제를 그 중간에 삽입하고 있다.이것이 ㉡이다.이 세가지 문장은 문맥의 앞뒤가 바뀌어진 매우 부자연한 글로 되어있다. 김일성은 마치 소설과도 같이 부친을 1917년 가을에 평양감옥에서 「출옥」시켜 놓고 그해 11월에 「청수동회의」를 소집하게 하였다.옥중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된 부친이 「무산민중」을 「조선국민회」에 묶어세울 방침을 제시하도록 조작한 것이다. ○거의 앞뒤 안맞는 내용 그러나 「옥중에서 혁명적 신조를 굳힌 아버지」를 막바로 그해 11월의 청수동회의에서 「무산민중」을 조직하는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북한의 어용학자가 보더라도 너무 무리한 작업으로 보인 것 같다.이 때문에김일성은 이번 회고록에서 1917년11월의 청수동회의이후 부친에게 다시 만주와 러시아를 방황하도록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레닌에 대한 이야기,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많이 하였다.로씨야에서는 로동자·농민을 비롯한 무산대중이 주인으로 된 새 세상이 왔다고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가 하면 신생로씨야가 백파도당들과 14개국 무력간섭자들의 공격으로하여 시련을 겪고 있다고 하면서 못내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들이 모두 생동한 세부와 사실들로 엮어졌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그동안 연해주에 갔다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회고록은 이런 복종을 깔아 놓은 다음 아래와 같은 문장을 가져 온다. 「아버지는 1919년 7월,청수동회의에서 무산혁명의 역사적필연성을 논증한데 기초하여 8월,중국 관전현 홍통구에서 조선국민회 각 구역장들과 연락원들,독립운동단체 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나라 반일민족주의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으로방향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시였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역사에 실재하는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후 상해임정의 지시를 받는 대한국민회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국민회에 대한 사료가 김일성의 손에 들어오자 이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후 엉뚱하게도 공산주의단체로 변해버린다.김일성은 이 날조의 주역으로 자기의 부친 김형직을 갖다 앉히고 있는 것이다. 〔주해1〕조선전사16,29면 이후 〔주해2〕같은책 동면 〔주해3〕졸저 김일성평전 35면 〔주해4〕「세기와 더불어!」23면 〔주해5〕같은책 44면 〔주해6〕같은책 45면 〔주해7〕같은책 동면 〔주해8〕같은책 45면 〔주해9〕같은책 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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