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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리한 필봉 휘두른 항일언론인/9월의 독립운동가 張道斌 선생

    ◎대한매일신보 시절 반일 언론의 선봉/일제의 행각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국사연구 몰두… 황국사관 정면 반박도 “국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을 모아 이룬 것이오. 국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일(국정)을 자치(自治)하는 것이오. 애국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몸(국가)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라. 고로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 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에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張道斌의 대한매일신보 논설중에서)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1888∼1963)선생. 타고난 문재와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언론활동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애국자다. 반일·항일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 기자겸 논설위원으로 언론계 활동을 시작해 일제하에서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며 이름을 떨쳤다. 망명과 귀국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굽힐줄모르는 지조와 의식을 발휘했던 빼어난 애국자·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난 張선생은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 소문을 들은 평양감사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여기서 교편생활을 했던 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와 인연을 맺어 총무인 梁起鐸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됐고 申采浩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을 맡아 친일내각과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미움을 받았지만 영국인 裵說이 사장을 맡아 항일의 강한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의 폭압이 더해가면서 신문압수와 검열이 심해졌으나 선생은 일제의 행각을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한 장본인으로 이 시절 미국에서 돌아온 安昌浩의 신민회 비밀회원으로 가담했다. 이 때 金九·李昇薰·李商在·尹致昊 등 애국지사들과 교분을 쌓아 나중 망명생활 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직후 필진들이 묶여 들어가고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질 때까지 필봉을 늦추지 않았다. 밤엔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면서 국사연구에 몰두, 사학자의 발판을 다졌다. 선생의 사관은 당시 팽배해 있던 황국사관과 사대주의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해 우리의 독립적인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결국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행 망명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까운 신한촌에서 다시 申采浩를 만나고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신병으로 安昌浩가 초청한 미국행을 포기하고 1916년 귀국했다. 평북 영변의 서운사에서 요양한 뒤 처음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서적 ‘국사’를 저술했다. 1919년 귀경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해 허가를 받았으나 돈이 없어 운영을 양도했다. 하지만 1926년까지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을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때 출판사 고려관을 설립,‘조선사요령’‘조선위인전’‘조선역사록 등 숱한 책자를 편찬했다. 1927∼45년은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던 시기. 일제말기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고향 근처의 심산에 은둔하며 역사서적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후학양성에도 뜻이 컸다. 1947년 한국대학을 설립한데 이어 1948년 단국대학을 설립,초대학장을 맡았다. 1949년엔 육군사관학교 국사학교수로 일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러나 단국대 명예교수로 강의를 가던 길에 짐수레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1년간 병원에서 고생하다 1963년 76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지난 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98년 9월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그의 후손들/高合 회장 致赫씨 등 5남1녀/모두 재계·학계 뿌리내려 저명 선생은 늦은 나이인 33세에 평북 영변의 기독교 집안 출신 金淑姿씨(1979년 타계)와 결혼,5남1녀를 두었다. 선생의 은둔생활과 구국운동에 따라 부인 金여사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모두 재계·학계에서 뿌리를 내린 유명인사들이다. 장녀 致豊씨는 지난 60년대 결혼후 도미,76년 작고했고 장남 致榮씨는 신동아손해보험 상임이사·고려다이아몬드공업 대표이사를 지낸뒤 92년 별세했다. 삼양식품을 창설한 차남 致德씨도 지난 88년 작고했고 3남 致健씨는 신화다이아몬드공업 회장·고려합섬 이사를 거쳐 현재 BBC 영어연구원 고문이다. 고려합섬을 창업한 4남 致赫씨(고합그룹 회장)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81년 산운학술문화재단(현 고려학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막내 致順씨는 중앙대 사회과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 한솔종이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9)

    ◎삶을 지속시킨 ‘소중한 존재’ 자각/요강·동고리·고비 등 갖가지 종이용품에/유물인식시스템·종이접기·한지제작 체험도/종이 쓰임새 변천 한눈에 알아보게 전시/기획전시실선 닥종이 인형전·부채전도 함께 한솔종이박물관은 재미있고,현장 학습에 많은 도움이 되는 곳이다. 박물관중에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곳은 없겠지만 한솔종이박물관도 흥미있고 지식에 보탬이 되는 가볼만한 박물관이다. 한솔종이박물관 관람이 재미있는 이유는 두가지.첫번째는 눈길이 쉽게 떠나지 않는 유물이 많다는 점이다.우리 조상들은 종이로 온갖 물건을 만들었다.갓·등·부채·미투리·반닫이·우산·베개뿐만 아니라 음식물과 곡식을 담던 동고리와 채독,문서를 꽂아 보관하던 고비,화살을 넣던 전통도 종이로 만들었다. 중국종이(華紙),일본종이(和紙)와 비교해도 역시 조선종이(韓紙)의 질이 으뜸이었다.옛 우리 선비들은 읽고 난 책들을 모아 함경도,평안도 변방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보내는게 관례였다.독서를 장려키 위함이 아니다.책장을 뜯어 옷을 만들어입으라는 배려였다.종이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던 기록도 있다. 전시품 중 흥미를 끄는 것은 종이요강.여인네들이 가마를 타고 먼 길을 갈때 필수품이었다.종이를 꼬아 과자 그릇처럼 예쁘게 만들었다.겉면에는 콩기름이나 들기름을 정성스레 발랐다.놋쇠로 만든 요강과 달리 중요한 순간에 소리가 나지 않았다. 종이박물관이 재미있는 두번째 이유는 스스로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우선 유물인식시스템이 있다.미투리를 센서에 올려놓으면 ‘종이·삼·짚을 섞어 꼬아 만든 신발’이라는 설명과 그것의 유래가 컴퓨터 화면에 친절하게 나온다. 관람객이 컴퓨터 영상을 따라 재미있게 종이접기를 하는 코너도 있다.한지 재현관에서는 직접 종이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2시간여 종이박물관을 돌아보면 ‘뭔가 배운 것 같다’는 뿌듯한 느낌이 온다. 박물관 제1전시실의 첫째 방은 ‘종이 이전의 세계’다.종이가 만들어지기전까지 인류의 모든 문명은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다.기록을 위해 갖가지가 쓰였다.점토판·파피루스·양피지·짐승뼈·갑골문·죽간 등.종이가 없었던 시절의 불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둘째 방은 ‘종이의 탄생과 전파’.서기 105년 중국 후한(後漢)시대 蔡倫이 종이사용을 실용화 시킨 이래 종이의 전파 과정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우리의 종이 사용 역사도 중국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통일신라 시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알려준다.종이박물관에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제삼십육’원본(국보 제277호)이 소장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종이의 오늘과 내일’을 알려주는 곳이다.컴퓨터 시대에도 종이의 효용가치는 변함없음을 강조한다.전시의 주제는 ‘종이는 영원한 친구’.그와 관련된 영상물도 준비되어 있다.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종이 퀴즈게임도 할 수 있다. 오늘날 종이를 만드는 과정을 매직비전이라는 특수전시기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스스로 빛을 내는 ‘축광지’도 볼거리다.안네 프랑크,베토벤,李仲燮 등 국내외 유명인사의 메시지가 담긴 종이도 있다. 특히 서울대 金安濟 교수의 ‘종이인생’이 눈길을 끈다.젊은 시절의편지와 일기,결혼 청첩장,첫 직장 임용장,첫 월급봉투 등 ‘종이’는 우리 모두에게 ‘인생의 축소판’이다. 이어 기획전시실과 한지재현관을 둘러보면 관람은 끝난다.기획전시실에는 김영희씨의 ‘닥종이 인형전’에 이어 8월31일까지 ‘부채 특별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한지재현관에서는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고 두드리고,한지를 떠내는 13개 과정을 옛 그대로 보여준다.한지 전문가 金泰福씨(52)부부가 관람객들을 친절히 맞는다. 한솔박물관은 한국 최초의 종이박물관이다.세계적으로도 9번째다.한솔그룹이 공익사업 차원에서 설립,운영도 책임지고 있다.개관한지 1년이 채 안됐다. 담임선생님의 인솔로 종이박물관을 찾은 전북 고창군 부안초등학교 학생들은 “이제는 시험에 종이에 대해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맞힐 자신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큐레이터 嚴素姸씨/“미래에도 종이는 다정한 친구”/관람객과 일심동체 유도 유물수집 등 60억원 들여 지역민과 융화에도 신경 한솔종이박물관은 전문 큐레이터(박물관운영책임자)를 두고 있다.미국 뉴욕대 예술학대학원을 졸업한 嚴素姸씨(34). “전라도는 옛부터 예술의 고장이라고 불리지 않았습니까.그러나 지금은 문화 관련 기관이 별로 없어요.저희 박물관은 이 지역의 문화 갈증을 푸는데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지요” 때문에 종이박물관측이 신경을 쓰는 것도 ‘지역민과의 융합’이다.최근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민화 그리기 공모전을 가졌다.박물관쪽에서 먼저 학교를 찾아 특활시간을 활용한 교육기회를 갖는 프로그램도 개발중이다. 아빠와 함께 연만들기,크리스마스 카드 그리기 등도 계획하고 있다.전주시청을 비롯한 정부 관공서와 연계해 박물관 소개 등 관람객 유치작업도 적극 벌이고 있다고 嚴씨는 설명했다. 박물관 시설도 관람객들과 전시유물의 ‘일심동체’를 이뤄내기 위해 스스로 참여토록 유도하는 것이 많다고 밝혔다. “유물인식 시스템,종이접기 코너 등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해 ‘종이’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데 전시의 중점을 두었습니다” “종이라는 주제로 박물관을 만드는데어려움이 컸습니다.어디까지가 종이의 영역인지 자르기가 쉽지 않았죠.그러나 ‘종이는 영원한 친구’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종이가 과거는 물론 미래에도 인류 문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방향으로 유물을 수집,정리했습니다” 유물수집과 정리에 60억원 남짓 들었다.기원전에 사용됐던 파피루스도 어렵게 영국에서 구입했다. 그녀는 “컴퓨터시대를 맞아 종이의 역할이 줄어들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그러나 외국 언론기관의 여론조사를 보면 20대 젊은이들도 컴퓨터 화면보다는 종이에 쓴 활자를 보는게 편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아무리 첨단화되어도 ‘종이 문화’는 지속된다고 생각합니다”면서 말을 맺었다. ◎종이박물관 가는 길/전주 IC서 7㎞ 거리 터미널서 택시로 15분/단체는 사전예약해야 호남고속도로 전주 인터체인지에서 7㎞ 정도 떨어져 있다.인터체인지를 나와 전주 시내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한솔종이박물관 푯말이 간간이 있어 그것을 따라 오면 된다.전주 고속버스터미널과 전주역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각각 15분,30분 정도 걸린다. 관람료는 무료.월요일과 국경일은 휴관하며 화요일∼일요일 상오 9시부터 하오 5시까지 문을 연다.하루 7차례에 걸쳐 가이드가 설명해주는 코스도 있다.관람 소요시간은 2시간. 한지뜨기 실습,한솔제지 공장 견학 등을 위해서 20인 이상 단체관람객들은 꼭 사전 예약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단체관람일은 매주 화,수,목요일이며 한지재현관은 수,목,토,일 주 4회 운영하고 있다. 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2가 180번지.(0652)210­8000.
  • 두 빈소(朴康文 코너)

    항일투사 海平 李在賢 선생이 세상을 떴다는 기별을 받고 빈소로 향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병원의 장례시설에 모셨다고 했다. 안양에 있는 작은 집에서 검박하게 살던 그에게 사후에 누리는 이런 호사란 좀 뜻밖이었다. 유족이 퍽 애쓴 것 같았다. 장례식장 건물 앞에는 연신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와닿고 차림새가 말쑥한 사람들이 내렸다. 해평 선생을 조상하러 온 손님들이거니 하고 인파에 묻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빈소 문전은 분향 재배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들로 이미 꽉 차 있었다. 고인의 고매한 인품이 이렇듯 사람을 모으는가 생각하며 둘러보는데 생소한 이들 뿐인 것이 이상했다.해평 선생의 빈소가 아니었다. ○광복군 장교와 친일고관 거기서는 높은 관직에 있던 어떤 분이 조객을 맞고 있었다.그 가족이 별세한 것이었다.그 전직 고관은 일제때 유능하고 충성심 있는 관리로서 신임을 받았다.대한민국에서도 오랫동안 여러 요직을 맡았다.관직에서 물러났건만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은 거기 모인 조객의 숫자로 알 만했다.정작,해평 선생 빈소의 분위기는 고인의 성품처럼 고즈넉했다. 아니,쓸쓸했다고 해야 옳다. 평소 선생을 존경하던 이들이 상 두어개를 둘러싸고 앉아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는 몇 시간 내내 새로 온 조객은 거의 없었으니까. 해평 선생은 광복군 장교로서 미국 전략정보처(OSS)와 합작해 8월 말로 예정한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광복군 안에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총지휘부가 구성되고 이범석 장군이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해평 선생은 본부요원이 되었다.안춘생 선생은 평안·황해·경기지역을 맡은 제1지구 대장,장준하 선생은 제1 지구의 경기도반장이었다. 국내 정진군은 국내에 들어와 적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미군이 상륙할 때 내응하는 것이 임무였다. 미군 훈련관이 실시한 3개월간의 특수훈련이 거의 끌나는 8월초 국내정진군은 편성되었다. 곧 미국 잠수함으로 국내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할 참이었다. 일본 항복이 조금만 늦었더라면,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있을 터였다.모든 광복군과 임시정부 인사들은 통한의 눈물을 뿌려야 했다. 해평 선생은 광복후 귀국해 수십년이 되도록 국가 보훈의 혜택을 받지 않았다.이역 땅에서 갖은 신고를 겪으며 싸우다 광복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투사들께 죄스러워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수십년간 공적 숨겨 그는 에스페란토­한국어사전 편찬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다.그 작업이 마침내 끝났을 때,출판비용을 조달할 방도가 달리 없자 유공자로서 훈장과 함께 받게 된 돈을 여기에 썼다.그래서 국내에서는 이 분야 최초인 사전이 해평 덕분에 나오게 되었다. 이번 광복절을 하루 앞둔 오늘,서울 남산에서 3·1 독립운동기념탑 건립기공식이 있다. 그 건립위원회 구성원 명단에,앞서 말한 전직 고관의 이름이 끼인 것을 보았다. 해평 선생을 영결한 것은 지난해 일이었지만,그 때 대조적이던 두 빈소의 풍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 뒤늦게 민생 챙기는 국회(사설)

    사상 최대규모의 경제적 손실과 막대한 인명피해를 몰고 온 이번 수재(水災)를 계기로 조만간 국회가 정상화할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회의등 여당은 본회의에서 국회차원의 수해복구지원대책기구를 설치토록 야당측에 제의하고 수해지역을 ‘특별재해지역’으로 선포,복구지원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을 밝혔다. 의장 자유경선에서 패배한 뒤 주요 국회일정 참여를 거부해오던 한나라당도 자체적인 재해상황실을 설치한데 이어 원(院)구성 등을 위한 대여(對與)협상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야당의 이같은 방향선회는 경선패배로 인한 국회파행과 관련,그러잖아도 일반의 비판이 거셌던데다 수해까지 발생하자 더이상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수해복구에 여야가 따로 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을 대표하고 국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지닌 국회로서는 모름지기 민생을 위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열(熱)과 성(誠)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한다. 국민의 고통을 사전에 방지하고 최소화하는 정책입안을 행정부에 제안하거나 이와 관계되는 입법활동을 빈틈없이 추진하는것이 백번 옳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이번에도 큰 일이 터진 뒤에야 앞다퉈 나서는 사후약방문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평소 정쟁(政爭)으로 날을 지새다가 국민이 큰 피해를 당했을 때 비로소 사후 복구대책 차원의 의정활동에 나서는 것은 명분과 체면을 위한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이처럼 되풀이되는 단발성 선심이나 지원 대신에 보다 근본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실기(失機)함 없이 국민 평안(平安)을 보장하는 대비책을 강구해야만 정치권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다. 우리는 특히 이번 수해가 없었더라면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경제구조조정 및 민생관련 법안 처리가 마냥 늦어졌을 것이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금융산업구조조정법,예금자보호법,조세감면규제법,외국인투자촉진법 등 하루 빨리 처리돼야 할 280여가지의 각종 법안이 무려 석달 가까이 국회계류중인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치권이 경제회생의 발목을 잡고 민생을 외면한다면 기업인과 근로자,가계를 꾸리는 주부등 국민 각계층에 요구되는 고통분담의 원칙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더이상 정쟁을 삼가고 한시라도 잊음이 없이 민생을 챙기는 참다운 국민의 국회가 되기를 거듭 당부한다.
  • 향토축제 나눔의 마당으로/沈雨晟 공주민속극박물관장(서울광장)

    고장마다 펼치고 있는 이른바 향토축제가 해마다 불어나고 있다. 1년에 300여가지의 축제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역사성 있는 민속제의 성격을 띤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새롭게 꾸며진 ‘문화제’ 또는 ‘예술제’라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하긴 우리 민족은 자고로 축제를 생활속에 심어온 남다른 데가 있는가 싶다. 상고시기 축제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중국의 옛 문헌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을 꼽는데 “…부여에서는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굿을 올리며 온 나라 사람들이 며칠을 먹고,마시고,노래하고,춤춘다…”했다. 이 밖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대개 정월,5월,10월 등의 일정한 때에 제사를 곁들인 공동체의 잔치를 펼치고 있다. 한 해의 시작인 정월,씨뿌리기를 끝낸 5월,추수를 마친 10월의 축제는 모두가 일의 시작과 마무리에 있으니 단순히 먹고 놀아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더 큰 수확을 염원하고,다지고,구가하는 가운데 내일의 평안함과 태평까지를 기리는 삶의 일정표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저 먹고,마시고 깨부수는 난장판으로 아는 풍조로 해서 본디의 축제정신이 왜곡되고 있다. 한편 축제 가운데는 국가적 규모의 큰 것이 있어 향토축제와 대비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은 점점 나라가 주관하는 특별한,또는 연례적 기념일로 분류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그렇다면 그저 지방에서 열리는 것이라면 향토축제일까. 그렇지 않다. 한 지역의 유서깊은 전통문화에 뿌리를 둔 향토성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는데 요즘의 실상은 분별이 없다. 물론 향토성이 있는 축제만이 축제라는 주장은 아니다. 예컨대 ‘강변 팝송잔치’는 ‘○○예술축제’로 부르는 것이 걸맞다는 의견이다. 또 한가지 흉금없이 논의되어야 할 일이 있다.향토축제의 본보기로 대접받고 있는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를 보자. 다분히 회고취향에 따라 열심히 옛 모습을 재현하려는 데까지는 그래도 좋다. 각기 제 나라 임금과 장수를 추모하고 숭앙하는 의식도 있음직하다. 그런데 이 모든 행사의 저변에 신라와 백제의 옛과 오늘이 서로 대결·질시하고 있으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나아가서 고구려문화제는 3국의 분열상을 재현·음미하자는 것이 아니다. 독창적이면서 다양한 문화를 확인하는 가운데 그의 총합체인 찬란한 민족문화를 더욱 뼈대있게 하려는 ‘울력 정신’이 발양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의 고질적 병폐인 동·서 갈등의 뿌리는 신라와 백제의 이질성에서 온것이 아니라,해당시기 일부 봉건적 지배층과 외세의 합작으로 비롯된 것임을 우리네 민초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전통시대 신라와 백제의 마을과 마을에서 벌였던 축제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나’가 아닌 ‘우리’로 통하는 공동체 의식이었다. 그래서 3국은 결국 하나가 되어 고려·조선으로 이어졌는데 다시금 외세의 농간으로 원통하게도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분단시대의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올해로 39년째 맞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이제는 ‘경연’이란 두 글자를 떼어 버리고 ‘우리민속큰잔치’로 거듭나야 하듯이 식민시대 유물인 관료적인 권위의식과 말초신경적 시샘을 훌훌 털어버리고 통일지향적 넉넉함이 의젓이 되살아나는 따사로운 나눔의 마당이어야 할 것이다.
  • 신명나는 굿 한판/세상 시름 날려 보낸다

    ◎8월2·9일 서울놀이마당 ‘이 땅의 사람들­황해도 굿의 명인’ IMF 시름을 신명난 한판 굿으로 날려보낸다.‘이 땅의 사람들­황해도 굿의 명인’. 황해도 굿을 전승해온 무당 5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주변의 액(厄)을 물리는 대규모 굿판을 8월2일과 9일 이틀동안 서울놀이마당에서 펼친다. 각각 상오 10시부터 하오 7시까지 9시간에 걸친 보기 드문 마라톤 공연인데다 이 바닥에선 내로라하는 큰무당 12명이 한 무대에 선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이 무대는 우리 전래의 민속문화인 굿을 놀이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하되 그중에서도 평안도나 함경도에 비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황해도 굿을 선보이려고 기획된 것이다. 황해도 굿은 신이 내려 무당이 된 강신무(降神巫)가 주재하는 굿으로 화려한 무복과 작두를 타는 활달한 모습 등으로 여느 지방 것보다 볼거리가 많다. 이번 공연은 기쁜 일이 있을때 하는 일종의 경사굿인 ‘철물이굿’(2일)과 아픈 사람을 위한 병굿 ‘태송굿’(9일) 등 크게 두가지로 나눠 열린다. 주로 초봄이나 더운 여름을 물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때 벌였던 철물이굿은 마을축제 개념이 강했다. 이번은 정부수립 5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나라굿으로 펼쳐진다. 신청울림 초부정거리 칠성거리 제석거리 성수거리 등 20거리로 나눠 진행되며 명복과 재수를 기원하는 칠성거리가 끝나면 복떡과 술 과일을 관람객들에게 나눠주면서 한껏 고조된다. 이날은 인천 뱃굿을 도맡아해온 ‘신기촌 매물이 만신’으로 불리는 무당 김매물의 작두타기에서 절정을 이룰것 같다. 이어 9일 펼쳐질 태송굿은 IMF여파로 우리를 옥죄고 있는 갑갑함을 한꺼번에 물리는 굿판이다. ‘송림동 처녀만신’ 김정숙이 보기에도 아슬아슬한 작두타기를 하고 허수아비를 땅에 묻는 달고거리 의식을 통해 액을 물린다. 이번 출연자들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인천지역에 터를 잡아온 황해도 출신 무당들이 대부분. 인간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황해도 굿의 맥을 이어온 유옥선 김황룡 김정숙 등 칠순이 넘은 무당들이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선다. “평생 남의 돈으로 굿하다 처음으로 내돈으로 하는 굿”이라는 이들의 말에서 어렵게 성사된 이번 무대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다.
  • 대원군 개혁의 교훈/李炫熙 성신여대 교수(서울광장)

    ‘놀고 먹으며 호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양반들도 나라 발전을 위해 세금을 내야 한다.상민들만 내게 되어 있는 군포를 양반계급에게도 확대 적용하라.’ 130여년전인 1863년 12월 천신만고,은인자중 끝에 대권을 거머쥔 정략가 흥선대원군(이하응)이 개혁의 날이 시퍼런 칼을 빼들고 여러가지 묵은 악폐를 도려내는 안건중의 하나로써 고종 8년(1869) 획기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 바로 특권계층인 양반에게도 군포라는 세금을 물린 조치였다.군포제는 원래 병역세로 징수한 것이었으나 특권층인 양반은 면제해주고 일반 백성에게는 어린이와 죽은 사람에게까지도 부과했던 가혹한 것이니 그 횡포가 얼마나 큰 것이었나 상상이 간다.이것은 곧 불만투성이가 되어 전국적인 민란(민중의 투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대원군은 이를 다시 호포제로 바꾸었는데 양반들의 체면을 보아 그들의 이름대신 하인의 이름으로 납부하라고 하였다. 대원군은 집권 10년간 그밖에 여러가지 개혁을 계속했다.그는 “고질적인 세도통치 60년의 횡포 등을 어찌 하루 아침에 뜯어 고치겠느냐마는 칼을 빼든지 1년 이내에 완료되어야 한다””고 조기 타결방침을 세웠다. ○“양반들도 세금 내라” 그는 특히 인사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사색붕당의 소속 인사를 적재적소에 고루 기용하였다.소외되었던 북인계 임상준을 훈련대장에 등용하였고 지역편중 인사정책으로 능력이 있어도 푸대접을 받았던 평안도·황해도 출신도 과감히 기용,그들의 유능한 재기(才器)를 국가발전의 밑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고려의 후손이라고 쳐져 있던 왕정양 부자를 장관급에 발탁하여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개각때마다 등용설이 있었던 능력있는 유후조가 당파가 남인이라 해서 탈락되었었는데 대원군은 그를 정승으로 파격 기용해서 소외,탈락세력의 대동단결을 모색한 바 있다.결국 거국 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1인 주도에 한계점 술 잘마시고 호탕하게 놀던 자도 특장점이 있다면 특채하여 위축된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경복궁의 중건(重建)은 대원군의 결단력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능하였다.그는 이를 소신있게 강행키위해 묘책도 썼다.경복궁은 임진왜란때 왜군이 쳐들어와 방화 소실된 채 270여년간 폐허로 방치되어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 있음을 보고 ‘제도권 정치복원’이란 대명제 속에셔 이를 복원토록 강행한 것이다.두번이나 큰 불이 나서 귀한 목재가 다 타 버렸으나 그대로 밀고 나가 2년만에 원래 모습보다 크게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는 살아있는 대원군으로 아들 고종을 앞에 내세웠으나 그 자신이 전부 정권을 장악했다. “개혁은 뜯어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지는 것이고 백성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라는 생각 속에 10년간 개혁의 칼을 번뜩였다. ○‘깜짝개혁=실패’ 교훈 그러나 계속된 며느리(민비­명성황후)와의 불화,민씨 친족의 대두로 마음 고생을 많이 하였고,만년에는 친인척을 요직에 등용함으로써 모처럼 불을 당긴 개혁의 이미지를 퇴색시켰다.더욱이 그의 개혁은 즉흥적이고,일인 중심적으로 불도저식이었기에 실패하고 말았다.제도적 장치가 미흡했던 것이다. 백성들에게 편안함을 주어야 한다는 위민(爲民),애민(愛民)사상을가졌음에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였다.그것은 양반에게 부가했던 세금이나 급진적 개혁이 결국 층이 두터운 기득권 세력을 극복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깜짝 개혁’은 ‘즉각 실패’라는 등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천신만고끝에 국민에 의해 대권을 잡은 ‘국민의 정부’는 과감하고도 신속하게 개혁을 마무리 짓고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위상제고에 총력을 기울여야 마음먹은대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 北 식량분배 감시지역 공개

    세계식량계획(WFP)은 최근 국제사회가 북한에 지원하고 있는 식량 분배를 감시하는 현황을 표시한 지도를 공개했다. WFP는 북한내 210개 분배지역 가운데 자강도·함경남도·양강도·평안남도·함경북도의 일부지역인 39곳의 감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일부 지역이 군사보호지역이라는 이유로 감시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朴宗和 교수 평양방문기:上

    ◎작음 만남이 신뢰구축 첫 걸음/4㎞ 무지개동굴 수작업 열악한 기술 대변/훼손 흔적 거의없는 금강산 커다란 기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대표단이 지난 5월26일부터 6월2일까지 조선기독교연맹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번 평양방문에서 경험한 것은 그동안 남북교회간에 축척된 긴밀한 상호간의 ‘신뢰성 구축’이 방문기간 내내 남북쌍방을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항도착에서부터 평양을 떠날 때까지 귀빈접대를 받으며 귀빈숙소인 ‘서재동 초대소’에 머물며 스케줄대로 움직였다.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과 ‘통일 전선탑’을 관람했다. 국립도서관에 해당하는 ‘인민대학습당’을 방문하여 시설과 운영을 돌아보았다. 안내인이 세계최대의 도서관을 목표로 3,000만권의 장서를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고 있다는 설명을 했으나 웅장한 시설에 비해 서적이나 소프트웨어는 아직 미흡함을 느끼게 했다.‘개선문’과 ‘주체사상탑’도 관람했다. ‘미술박물관’을 찾았는데 고조선의 고인돌과 고구려 동명왕릉을 재생해 놓은 것에서부터 한민족역사의 유물들을 보면서 설명과 해석이 주체사상적 냄새를 풍긴 것 말고는 정치적·이념적 선전물이 아닌 민족역사의 동질성을 확인해 주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50년 분단의 현실에서 이질화 현상 극복을 위한 방안 중에 남북상호간의 역사유물 교환이나 교환전시 등을 통하여 역사적 동질성을 확인하는 것이 민족화해의 중요한 첫 걸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산원’도 방문했다. 평양산원은 현지의 여건과 형편으로 보아 출중한 것 같았다. 엄청난 자금을 들여 최신 시설과 고가 기계를 설치한 서울의 병원시설과 비교할 처지는 되지 못했다. 2박 3일의 ‘금강산 유람’은 퍽 인상깊었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135㎞의 시멘트 고속도로를 달려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거쳐 고성군에 위치한 호수인‘삼일포’를 경유하여 금강산에 당도했다. 금강산의 수려함과 빼어난 장관은 굳이 글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금강산의 자연환경은 거의 훼손되거나 오염의 피해에 시달린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커다란 바윗돌에 군데군데 새겨진 선전문구 말고는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금강산 개발이 자연친화적으로 이루어지고 부족한 관광시설들을 새로 만들어 관광객 유치를 통한 북한 경제의 활성화가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원산 약 20㎞ 전방에 있었던 4㎞에 달하는 무지개동굴(터널) 작업현장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사람의 손과 발이 주축이고 거의가 수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동굴공사는,열악한 경제사정이나 기술환경을 대변하는 것 같아 가슴 아팠다.그것도 후방 군부대가 동원되고 또 과거 목탄차라고 불리던 트럭을 덤프 트럭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평양으로 되돌아올 때는 강원도 북부와 평안남도를 이어주는 공사중인 신설 도로로 우회하였다.공사 현장은 역시 마찬가지 모습이었다.구슬땀 흘려 일하는 남녀노소 인부들의 얼굴이나 표정은 바로 통일 이전이라도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양질 노동력과 결부되어 민족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하라는 간절한 희망을 전하고 있었다.
  • 탤런트 金惠子씨 오늘 訪北/선명회 후원자 대표자격

    탤런트인 金惠子씨가 30일 북한을 방문한다.탤런트가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통일부는 29일 “金惠子씨가 한국선명회의 吳在植 회장 등과 함께 방북(訪北)하는 것을 승인했다”고 발표했다. 30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북한에 머무르는 金씨등은 국제선명회가 평안남도 평원 등 6개 지역에서 운영하고 있는 국수공장을 둘러 볼 예정이다. 이번 방북에는 선명회 소속 외국인 3명도 포함돼 있다.金씨는 선명회 후원자 대표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金씨는 그동안 소말리아 르완다 베트남 등도 같은 자격으로 방문했다.
  • 여백과 서정의 공존/조상현­폴 하탈 2인전

    서양화가 조상현.폴 하탈의 2인전이 27일부터 6월2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단성갤러리(735­5588)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여백주의와 서정적 개념주의의 만남’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조씨와 하탈씨가 주장하는 미술사조를 작품을 통해 비교해보는 자리다. 조씨가 주창하는 ‘여백주의’는 우리의 역사적,사회적,정신적,미술적 전통에서 걸러낸 동양적인 조형정신과 양식으로 후기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평안과 위안을 주는 것이다. 폴 하탈은 캐나다의 화가이자 이론가로 그가 주창한 서정적 개념주의는 감성과 지성의 상승효과적인 상호작용,영혼과 정신의 균형잡힌 항상성과 단일성을 지향한다.이번 전시에서는 이런 사조를 표방한 조씨의 작품 18점과 하탈의 작품 24점이 선보인다.
  • 北에 식량 8만t 지원키로/EU,비료 3만t 포함

    【브뤼셀 DPA 연합】 유럽연합(EU)은 6일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 자금 3천3백만달러의 방출을 승인했다고 유럽위원회가 발표했다. EU 관계자들은 원조자금이 옥수수,쌀,식용유 및 콩 등 8만6천t에 달하는 긴급식량과 3만t의 비료를 포함,수확증진을 위한 기술이전에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배급의 투명성을 위해 EU조사단의 방북을 허용했으며 식량이 주로 황해남도와 평안남도 지역에 중점,배급될 것이라고 EU 관계자들은 덧붙였다.
  • 아랍인의 꿈의 궁전/포아드 아자미(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부서져버린 아랍지역의 평화/“이슬람 신앙 기반… 공동체 건설” 열망/汎아랍민족주의·시아파운동 등 노력/끊임없는 충돌·이념 대립으로 좌절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충돌,중동 및 중앙아시아지역에서 힘의 균형을 뒤흔들어대는 회교근본주의 운동,아랍인들의 해방을 주장하는 반서구적 무장폭력,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전쟁,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20세기 내내 인류 평화의 목줄을 쥐어온 중동지역의 갈등 배경은 무엇이고 앞으로 인류의 행보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뉴욕서 출간된 ‘아랍인의 꿈의궁전’은 20세기 아랍 지식인들의 꿈과 좌절의 행로를 역사 사회학적인 통찰을 통해 해부하고 현재와 미래를 투시하고 있다.‘한 세대의 역정’라는 부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 저자는 20세기 아랍인들의 꿈과 노력이 ‘부서졌다’고 규정했다.평화의 가능성은 아랍인에게 멀리있다고 절규했다. 저자는 실현할 수 없는 꿈과 목표,지역적·민족적 충성심의 괴리 등은 아랍인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한다.아랍인들의 꿈과 목표,즉 ‘꿈의 궁전’은아랍인들만의 고통에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인류 평안을 위협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는 경고도 덧붙인다. 저자 포아드 아자미(Fouad Ajami)는 레바논 남부 독실한 시아파 회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아랍인이다.63년 미국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저명한 학자며 저술가로서 활동중이다.이 책은 60년대 최고조에 이르렀던 진보적인 ‘범 아랍 민족주의’(pan­Arab nationalism)와 그에 대한 민중들의 높은 기대감,그리고 오늘 아랍인들이 겪고 있는 갈등과 생각을 정리했다. 저자는 책 전편을 통해 범 아랍 민족주의와 시아파(派)의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이란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지난 몇십년동안 아랍 세계의 변화와 아랍인들의 실천운동을 설명한다.50·60년대 범 아랍 민족주의가 변화와 행동의 원천이었다면 70년대이후 변혁과 행동의 자극은 하류계층에 동정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시아파의 교리,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이 바탕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70년대 이란 혁명의 성공은 시아파를 믿는 아랍인들을 고무시켰다.전아랍권에 퍼져 살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지배계급에 대항해서 일어서기 시작했다.시아파에겐 범 아랍 민족주의는 불평등과 가진자 및 기득권층,다수인 수니파의 지배를 의미할 뿐이다” 저자는 이라크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전쟁을 당시 이라크,레바논,페르시아만 지역 등에서 불길처럼 타오르던 시아파 구원주의 및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에 반격을 가하려는 시도와 갈등이란 관점에서 분석했다.그러나 시아파 민중 구원과 평등을 강조한 메시아주의,복음주의도 지역 정치및 역학구도를 바꾸는데는 실패했다고 지적한다.“사우디 아라비아등의 가족지배 정권과 비옥한 초승달지역(이라크등)에서의 군사독재는 여전히 변하지않고 유지되고 있다.” 이 책은 이슬람세계는 여전히 과두 정치에 의해 민중들의 소망이 좌절되고 있다고 고발한다.이집트에 대해서도 실망을 숨기지 않는다.전통과 현대의 갈등속에서 이집트는 찢기우고 있다고 절규한다.“정부는 폭력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인,‘가마트 이슬라미야’와 맞서있고 질서 유지를 위해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심화시키고 있다.기득권 세력은 중산층의 폭넓은 참여와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한 정권의 출현을 지연시키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항한 문화적 다원주의와 세속주의 옹호 세력도 존재하지만 아직 설 땅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신앙을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온 신학자 나즈 하미드 아부 자이드(Nasr Hamid Abu Zeid)도 그 세력중 일원이다.그러나 자이드 역시 시리아 출신의 지식인이자 시인인 알리 아마드(Ali Ahmad)처럼 수구세력에 의해 망명의 길을 떠난다. 이집트의 예처럼 현대화를 추구하는 정부와 폭력을 통해서라도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이슬람주의자들과의 충돌은 이슬람국가들의 갈등과 딜레머를 보여준다.그러나 서구인들이 테러집단으로만 생각하는 이슬람 무장 집단가운데서도 사려깊고 인도적인 모임들도 적쟎다는 저자의 지적이다. “그들은 전통적이고 신앙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서구의 물질주의적이고 황폐한 개인주의에 대신해 도덕적이며 공동체적인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그들의 외침은 젊은이들과 중산층에게 호소력을 갖는다.”아랍 정체성 회복 운동은 이슬람이란 종교적 뿌리를 배제하곤 생각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50·60년대 고조됐던 아랍민족주의도 아랍 민중들의 희망을 실현하지 못했다고 저자는 한숨짓는다.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간의 전쟁은 범 아랍 민족주의가 무너져내리는 계기였다.시리아와 이라크의 바트당 정부,이집트의 낫세르 정권은 전후 통치기반에 대한 비판 고조를 억누르기위해 억압을강화했고 그에따라 대중적 기반을 상실했다.진보적이라고 여겨졌던 믿음의대상이 아랍발전의 장애물이 됐다는 생각이 민중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67년 전쟁’이후 아랍내부는 독재가 강화됐고 종교적 분파와 폭력이 난무하게 됐음을 저자는 사례를 통해 조명한다. ‘67년 전쟁’이후 고통받고 갈등하는 ‘패배한’ 지식인들의 애가(哀歌)를 실례로 들면서 이 책은 시작한다.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때 자살한 레바논의 저명한 시인이며 학자인 칼리 하위(Khali Hawi)는 이같은 상황속에 좌초한 아랍 지식인을 상징한다.칼리 하위는 ‘대(大)시리아 운동’의추종자였다.낫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이 주도하던 ‘범 아랍 민족주의’에 몸을 던졌고 폭력을 통해 아랍인들의 정치적 통합의 꿈과 영광을 실현하겠다는 열정에 불타있었다.그들은 시민적이고 자유주의적 가치보다는 집단적 정치적 보상과 획득을 중요시 했다. 저자는 범 아랍민족주의나 시아파의 운동이나 아직 아랍의 꿈의 실현에는 요원하다고 결론짓는다.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꿈의 상실속에서도 역사의 진보를 이뤄내려고 애쓰는 아랍세계의 물결을 그 속에서 싹트고 있는 성공의 맹아를 응시하고 있다. 원제목:THE DREAM OF ARABS.판테온 북(Pantheon Books).3백44쪽.26달러.
  • 종묘 蒼葉門의 숨은 뜻(秘錄 南柯夢:8)

    ◎高宗 “하늘에 빌면 王朝운수 늘까”/高宗이 정환덕에게 묻기를 “蒼자는 분명 二十八君이고 葉자 또한 二十八世 뜻 하는데 운수가 과연 글자 뜻과 같겠는가” 정환덕의 입궐시각은 고종황제의 기상에 맞춘 매일 낮12시.황제가 일어나면 잠시 문안을 드린뒤 오후 내내 물러나 있다가 초저녁부터 다시 임금곁을 지켰다.새벽녘에야 황제가 잠자리에 들었으므로 장장 12시간의 밤노동이었다. “광무 6년 11월 시종원(侍從院) 시종으로 임명한다는 칙명(勅命)을 받았다. 매일 낮 12시경 대궐(덕수궁)에 입궐하여 편전(便殿=함녕전)에 나가 대기하게 되었다.침소에서 나오신 황제는 잠시 안부를 물으시고 다시 침소에 드셨고 초저녁이 되어서야 완전히 일어나시는 것이었다.황제는 대궐의 종소리가울리는 밤 11시까지 집무를 보시다가 다시 침소에 드셨는데 반드시 나와 봉시(奉侍)내관을 불러 곁에서 지켜보도록 일렀다.황제는 한시간쯤 눈을 붙이신 뒤 다시 일어나 일을 보시는데,날이 밝기를 기다려서야 지밀(至密=내전)에 드신다.침소에 드신 뒤에는 겹겹으로 된 문이 굳게 닫혔다.” 고종 황제는 이처럼 불면증으로 낮과 밤을 뒤집어 생활했는데 그 때문에책을 많이 읽어 군왕에게 꼭 필요한 역사와 보학(譜學=족보학)에 통달하였다.그래서 어디의 아무개 하면 누구의 자손이란 것을 훤히 알고 있었다.사람을 잘 써야 좋은 임금이란 것은 고금을 막론한 진리다.사람 잘못 써서 망한 분이 최근에도 있지 않은가. “황제께서 눈을 뜨시면 먼저 관보(官報)와 천금록(千金錄·성균관의 선비명단인 靑衿錄의 잘못인 듯)을 올려드렸고 황제는 이를 세세히 읽으셨다.황제께서는 우리나라 선정(先正=선현)을 비롯하여 충렬,공훈,문장,명필,문무의 집안 사적에 대해 자세히 통달하고 계셨다.” 그래서 이규찬이 처음 정환덕을 소개했을 때 고종은 어디사는 누구인지를 물었고,이규찬은 그의 선조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고려 명신 鄭襲明 후손” “황상께서 ‘그 사람이 어느 지방에 살고 있고 성은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인고’고 물으셨다.이규찬은 ‘원래 거주지는 경상도 영양군이고 현재 거주지는 충청도 황간고을인데고려때 명신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라고 합니다.단종조에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한 정종소(鄭從昭)의 12세손이고 임진왜란때 의병을 주창한 공신으로 영천과 경주 두 고을을 수복하고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황해도지방의 현령을 지냈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강의(剛義)라는 시호를 받은바 있는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라고 합니다.그리고 효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좌랑 진주목사를 역임했으며 대구부의 청호서원(淸湖書院)에 배향된정호인(鄭好仁)의 8세손입니다.경상도 관찰사 송인명(宋寅明)의 특별추천으로 사릉(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은 정시건(鄭時愆)의 7세손인 정환덕이라고 합니다’고 아뢰었다.” 정습명은 고려때 김부식과 더불어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이 컸고,임진왜란때의 의병장 정세아는 영월 환고사에 배향되어 있다.그러니 고종은 안심하고 정환덕을 임명하기로 한 것이다.그러나 고종은 다시 정환덕에게 물었다. “황상께서는 ‘나이는 몇이나 되었는고’하고 물으셨다.‘40이오나 백두(白頭)이옵니다.한번도 벼슬을 한 바 없으니 천안(天顔=임금의 얼굴)을 우러러 뵙는 것만으로도 더이상 바람이 없사옵니다’고 하자 ‘그러면 너의 나이가 40이나 되도록 벼슬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그동안 무엇을 하였는가’고 되물으셨다.‘그동안 공부만 하였사옵니다.그러다가 늦었사옵는데 누구나 때가 있고 운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어찌 벼슬에 이르고 늦음이 있겠사옵니까.옛날 중국의 풍당(馮唐)은 한문제(漢文帝)의 부름을 받기까지 늙도록 벼슬하지 않았고,낚시꾼으로 유명한 강태공(姜太公)도 나이 80에 주문왕(周文王)에게 등용되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도 나이 70에 비로소 벼슬한 사람이 있고,또 어떤 분은 80에 출세하였으니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빠르고늦고 하는 것은 벼슬하는데 상관이 없는 줄로 압니다’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뒤 고종은 내심 정환덕을 믿을만한 신하로 단정하였고,이어마지막 시험문제(?)를 냈다.즉 산에서 여러해 수학(數學=역학)을 했다니 얼마나 아는지 들어보자면서조선왕조의 운명에 대해 물었다.이것은 여간 큰학자가 아니고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상이 또 묻기를 ‘갑오경장 이후로 국가의 운명이 점점 위급하고 어려워져 재이(災異)가 거듭 일어났다.또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무리와 풍속을 무너뜨리는 자들이 조정과 민간에 가득차 임금은 임금노릇을 못하고 신하는 신하노릇을 못하고 아비는 아비노릇을 못하고 자식은 자식노릇을 못하게 되었다.흉역의 무리가 계속 일어나 거의 평안하고 안정된 때가 없었다.만약 이같이 타성에 젖어 시간만 보내다보면 국사가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지못하겠다.당초 태조가 한양에 터를 잡을 때 500년으로 왕조의 운명을 삼아종묘의 문에 창엽(蒼葉)으로 현판을 써서 걸었다.창(蒼)이라는 글자는 분명히 이십팔군(二十八君)이고 엽(葉)이라는 글자도 또한 이십팔세(二十八世)를 뜻하는데 운수가 과연 그와 같은가’라고 하셨다.” 종묘 문의 창엽이라는 글자는 정도전이 쓴 것이라 전하며 창(蒼)자의 초두는 쌍십자로 20이란 뜻이요,그 밑에 여덟팔(八)자와 임금군(君)자가 붙어 있으니 28대라는 뜻이고 엽자 또한 초두 쌍십자에 인간세(世) 그리고 나무목(木 )자에 여덟팔자가 들어 있어 28세로 읽을 수 있다.정도전이 어쩌면 그렇게도 조선왕조의 운명을 알아맞혔는지 모두 탄복하고 있다. ○고종의 在位연수 맞혀 “엎드려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의 운수는 길고 멀며 짧고 촉박한 것이 정해진 수(=천재지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또한 국가가 다스려지느냐 다스려지지 않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확정지어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약 폐하께서 나라를 잘 다스리시면 500년 뿐아니라 1천년도 더 갈 수가 있고 1만년도 가할 것입니다만 잘못 다스리시면 아침에 얻었다가 저녁에 잃을 수도 있겠습니다.신의 얕은 생각으로는 대개 추측한 운수는 폐하 이후로부터 11제(帝)의 운입니다.폐하에게 앞으로 주어진 재위 연수는 정유 원년(1897년) 이후 11년으로 그쳤으니 이 수는 피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황상께서 ‘그렇다면 혹 하늘에 빌어서라도 그 수를 늘리는 법이 없는가’고 말씀하심에 ‘인재를 얻으면 번창해지고 인재를잃으면 좋지 않게 됩니다.이밖에는 특별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이에 상께서 다시‘너는 나가서 자세히 수를 추산하여 다시 아뢰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비어 있는데 정환덕을 임명한다는 글을 써서 궁내부에 내려주셨다.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격은 다 말씀드리기 어려웠다.다만 임금을 향하여 사배(四拜)를 하고 그 은혜에 사례하고 물러 나왔다.” 실제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1907년 정미(丁未)년에 양위하게 되었으니 정환덕이 그것을 꼭 집어 맞혔던 것이다.
  • 영산강은 말없이 흐르건만(박갑천 칼럼)

    나주목(羅州牧)조의 십이영(十二詠)가운데 제8영. “붉은뱃전(舷) 검은 돛대가 파도에 가득하고/나지막한 집 마을마다 노적가리 높구나/백만섬 영산창(榮山倉)의 곡식있으니/올해는 백성들 고혈짠다는 말 하지들 마소”.뱃길따라 세곡(稅穀)을 실어 날랐던 왕조시대, 지금의 영산포언저리에 조창(漕倉)있었음을 알려준다. 본류길이 115.5㎞의 영산강.지난날에는 서해의 한사리 밀물이 나주까지 밀려들었다.영산포까지는 70년대 중반까지도 작은배들이 드나들면서 수산물거래로 박신거렸고.후백제 甄萱과 弓裔휘하의 王建이 공방전을 벌인 곳도 영산강하류 영암군 덕진포(德津浦)께였다.912년 견훤이 중국으로 보내는 교역선을 영광앞바다에서 나포한 왕건은 승리한 군대를 이끌고 나주포구로 개선하고있다. 수리시설 없는 영산강은 가뭄과 홍수에 민감하여 유역주민에게 피해를 주어왔다.黃玹의 은 1876년의 가뭄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는 가하면 그 이듬해에는 장마로해서 논밭곡식이 거의 썩어 버렸다고 써놓는다.현대로 와서는 1967년의 나주지방 가뭄이 유명하다.이해 여름 40일 동안의 강우량이 고작 37㎜였다는 것 아니던가. 이같은 가뭄과 홍수의 되풀이를 두고는 목포의 여류작가 朴花城의 작품을 떠올린다.여러 단편 가운데 ‘홍수전후’가 1934년,‘고향없는 사람들’과‘한귀(旱鬼)’가 1935년에 발표되었는데 가뭄·홍수와 영산강유역 주민들의 참상을 그리고있다.“작년 홍수때문에 쌀알 몇밖에 건져보지못한” 오삼룡이네 등 아홉집 가족이 평안남도 강서농장으로 이민하게 되는 시작이 ‘고향없는 사람들’.그곳에서 다시 귀향하기로 작정한 사흘전 오삼룡은 가장 친하게 지냈던 고향의 강판옥으로부터 긴편지를 받는다.“…하늘이 무심하여 작년에는 자네들을 몰아내고 금년에는 개벽이래로 두번도 없는 큰가뭄이 우리들을 마저 죽여 고향에서 쫓아내네그려.…”삼룡이는 이 편지를 받고 고향에 갈 생각을 버린다. 광주시에서 추진하는 영산강 개발사업이 환경영향평가의 벽에 부딪혀 있다.그 개발이 생태계를 파괴하게 돼있다는 것이 환경당국의 눈길.홍수예방을 위한 범위안에서계획을 다시 짜보라는 주문인 것으로 알려진다.개발에 따르는 파괴와 보존의 조화는 항상 어려운 대목.억겁의 역사를 안은채 오늘도 영산강은 말없이 흐른다.
  • 국태공의 보은(비록 남가몽:2)

    ◎대원군,정권잡사 신세진 쌀장수에 관직/이조판서 홍종응 집서 무참하게 냉대받고/서 강사는 쌀장수 이천일 찾아가 사정하니/쌀 20섬·돈 1천냥 꾸러미·정육 100근 선뜻/아들 보위 오를던날 궁중잔칫상 차려 대접 고종이 즉위하자 아버지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고 세상사람들은 그를 국태공이라 불렀다.운현궁도 초가 삼간에서 대궐같은 기와집으로 탈바꿈했다.당시의 돈으로 1만7천830냥이나 들여 신축하였으니 만일 그 때가 IMF시절이었다면 즉각 공사중지 명령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만에,실로 오랜만에 권좌에 오른 대원군이었던 만큼 그까짓 1만이나 2만냥 같은 돈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겼고 무엇보다 먼저 해야할 일이 나라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동안 자기를 도와준 사람에게 보답하고 자기를 능멸했던 사람에 대해서는 응분의 불이익을 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먼저 대원군이 손을 보려 했던 사람은 이조판서 홍종응이었다.이사람은 당대 유수의 대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보는데 안목이 없었고 세상일에 너무 각박했다.○하인폭거로 왼손에 유혈 1863년 임술민란(일명 진주민란) 직후의 경제는 특히 어려웠다.요즘과 같은 경제난국이 닥쳐 모든 사람들이 하루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는데,흥선군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래서 하루는 흥선군이 홍판서 댁을 찾아가 구걸하게 되었는데,홍판서는 문전박대를 했다.문전박대 뿐만 아니라 그 댁 하인이 대원군에게 폭행까지 하여 손가락에 유혈이 낭자하였다. “국태공이 흥선군 시절에 너무 가난하여 늘 꾸워 먹고 살았다.임술민란이후에 인심이 점점 각박하여 먹고 살 길이 막막하였다.이조판서 홍종응의 집에 가서 입을 열고 싶었으나 여러 번 은혜를 입은 처지라서 쉽게 말하기도 어려웠다.그러나 염치를 불고하고 부득이 찾아가니 하인들이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 대감께서는 근래에 건강이 좋지 못하여 잠시 산정의 사랑에 쉬러 갔습니다. 소인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아무라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다른 날 다시 오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했다.그러나 세모에 날씨가 너무 추운데다 배도 고프고 목마름이 심하여 일이 성사되건 안되건간에 한번 만나 얘기나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흥선군이 애걸하니 하인들이 차마 거절하지 못하여 협문을 열어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나 홍종응이 답하기를 ‘이왕에 몇번 청구하신 것은 즉시 봉행해 드렸습니다만 지금은 세모를 당하여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구걸하니 이들을 다 구제해주기 어렵습니다.얼마 안되는 이조판서의 봉급으로는 그 사람들을 다 기쁘게 해주기 어려우니 대감께서 금번에 청하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차차 형편을 보아 후일에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흥선군의 청을 거절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흥선군이 그 집 문밖을 나설 때에 불상사가 생겼다.뒤를 따라 나온 홍종응의 하인이 발길로 협문의 판자를 찼다.그 조각이 흥선군의 손을 내리치니 다섯 손가락에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러나 서강에 사는 쌀장수 이천일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홍종응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흥선군은 손에 붕대를 감은 채 그 길로 이천일의 집을 찾아갔는데 맞이하는 태도부터가 홍종응과는 크게 달랐다. ○“집권자 되면 은혜 갚겠다” “부득이 서강에 사는 쌀가게 주인 이천일을 찾아갔다.흥선군을 맞은 천일은 크게 놀랐다.문안을 드린 후에 보니 흥선군의 왼손 다섯 손거락에 피가 엉기어 얼었고 상처의 흔적이 매우 심하였다.천일이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하고 물으니 대원군은 ‘나귀를 모는 아이가 실수하여 빙판에 떨어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천일이 약수로 피를 씻어낸 후에 손을 헝겊으로 싸니 조금 통증이 가셨고 정신이 들었다. 그런 뒤 천일이 ‘대감은 어찌해서 누한 곳(누지)에 행차를 하셨습니까.’고 물으니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없고 몇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 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절기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불고하고 찾아왔네’ 하고 답했다.이에 천일이 아뢰기를 ‘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메모지) 한 장이면 족하실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셨습니까.송구할 따름입니다.염려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요.내일 아침일찍 조처하여 보내 드리겠습니다’고 황송해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저녁을굶은 터라 추위가 더욱 혹독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이 물자를 보냈다.흥선군이 조반 후에 서강의 이천일에게서 보내 온 목록을 보니 쌀 20섬,돈 1천꾸러미,장작나무 50바리,정육 100근,서초(평안도에서 나는 담배) 30근이나 되었다.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늘이 도와 내가 집권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다.” ○경상감사와 비슷한 녹봉 세상 일은 알 수 없는 것.거지 흥선군이 국태공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1863년 12월8일 젊디 젊은 철종이 갑자기 승하하니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다. 아들이 임금이 되고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뜬 것이다. 즉위식 날 대원군이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일이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달려와 운현궁으로 들어섰다. 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인도해 가니 천일은 떨리고 황공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굽히고 있었다.그 두터운 은혜를 이루다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때 대원군의부인 민씨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치상을 내어오게하니 천일은 손이 떨려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이에 대원군이 친히 천일의 손을 잡아 상에 앉게 한뒤 큰 은반에 홍로주를 가득 부어주니 천일에게 그렇게 큰 영광은 처음이었다.” 대원군은 왕실의 체면을 많이 떨어 뜨렸으나 그 정분은 잃지 않았던 것이다.뿐만 아니었다. “드디어 이천일이 선혜청 고직에 임명되니 그 수입이 경상감사의 봉급보다 못하지 않았다.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있다하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홍종응 처럼 한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천일같이 착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 일은 두고 두고 후세 사람들이 명심할 일이라 할 것이다.
  • 남산에 봉화 밝혀 국가의 평안 기원/취임식 전야제

    ◎보신각 타종… 역사의 새날 선포 제15대 대통령취임식 전야제 행사가 25일 0시 서울 종로구 보신각과 남산에서 각각 동시에 열렸다.‘국민의 정부’ 출범을 알리는 불꽃이 피어오르고 종소리가 밤하늘에 은은히 울려퍼졌다. 25일 0시 정각 1천여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15대 대통령취임을 상징하는 15명이 보신각에 올랐다.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모된 시민 대표 12명과 자민련 박태준 총재,국민회의 조세형 총재권한대행,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이종찬 위원장.이들이 타종한 보신각의 종소리는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온국민에게 알리는 소리였고,‘역사의 새날’이 밝음을 전파했다. 33번의 타종이 울리는 동안 시인 고은씨가 축시 ‘새벽의 노래’를 직접낭송했다.이어 종로구민합창단이 ‘새날이 오면’을 함께 불렀다. 같은 시각 남산 봉수대에서도 큰 북소리와 함께 봉수대는 불을 밝혔다.특수효과로 5기의 봉화가 동시에 점화됐고 1기의 봉화만 남아 남산을 환하게 비쳤다. 5기는 나라의 어려움을 상징했으며 마지막 남은 1기는 국가의 평안함만 남는다는 기대의 표출이었다.봉화는 ‘희망의 21세기’를 밝히며 타올랐다.
  • 모닥불/백석 지음(화제의 책)

    ◎월북후 작품까지 역은 백석 시전집 최근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백석 시인의 시전집.첫시집 ‘사슴’에 실린 시 뿐만 아니라 분단이후 북에서 발표된 시들을 발굴,보완했으며 북한에서 발간된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에 실린 작품까지 망라했다.시인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평안북도 정주 태생이다.동향인 시인 김소월과는 오산고보 선후배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흠모했다.소월이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를 민요적 틀에 실어 표현했다면 백석은 소월보다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낸 시인이다.백석은 지난 88년 납·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있기 전까지는 ‘잊혀진 시인’이었다.백석문학의 특징은 상실되어가는 고향 의식의 회복과 이를 통한 제국주의 문화의 극복,전통문화유산에 대한 따뜻한 긍정,특유의 방언주의와 북방정서등으로 요약된다.특히 그는 구개음화가 되지 않은 구어체를 그대로 시어로 사용해 시적현장감을 살린다.백석의 시에서는 또한 민속적 상상력이 만개한다.그의 시에는 치성을 드리는 것에서부터 백중날 호미를 씻는 풍습에 이르기까지 전근대 시대의 민중들의 삶 속에 전해 내려오는 갖가지 습속들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이러한 백석 시의 민속적 세계는 결코 우연적인 것이나 이국취향이 아니다.그것은 근대인의 절실한 내면적 목소리에서 나온 것이다.한편 이번 시전집에는 270여개에 이르는 백석 특유의 향토성 짙은 시어들에 대한 풀이가 실렸다.된비(소나기),엄지(짐승의 어미),구신간시렁(걸립귀신을 모셔놓은 시렁),동말래이(산꼭대기),자즌닭(자주 우는 새벽닭),석박디(물김치),나주볕(저녁 햇살),들망(후릿그물) 등이 그 예이다.이동순 엮음 솔 9천원.
  • 일본인과 자살/이세기 사빈 논설위원(외언내언)

    일본의 대표적 작가 미시마 유키오(삼도유기부)의 단편 ‘우국’은 육군장교들의 반란사건과 관련하여 한 중위 부부가 자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할복한 남편이 내뿜은 검붉은 피가 부인의 백색 기모노를 적시고 피바다를 이룬 다다미 바닥을 새하얀 버선발로 밟고 다니는 이단적인 형식미가 눈부시다.이른바 ‘하리키리(복체)’란 헤이안(평안)시대 이후 투철한 무사도 정신을 강조하는 자살방법이다.작가는 그의 소설처럼 자위대의 각성과 궐기를 촉구하면서 지난 70년 자위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할복자살했다.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그의 제자인 미시마가 자결한 뒤 가스자살했고 그 이전에 ‘나생문’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다사이 오사무도 자살했다. 일본인의 죽음에 대한 집착은 일본을 소개하는 서적에서 ‘죽음의 문화’가 민족적 특성으로 등장한다.또한 매주 집계되는 금주의 베스트 셀러 중에는 죽음과 관련된 ‘유서’‘임사체험’‘투명한 유서’ 등이 두세권씩 끼어 있고 ‘인간답게 죽는법’이란 책이 서점의 중앙에 장기 진열되기도 한다.그들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반드시 치명적인 미학의 결정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책임에 대한 전력투구일 뿐이다.이번 일본 대장성 수뢰 스캔들도 마찬가지다.전현직 간부들의 잇단 체포,장차관의 인책경질에 이어 대장성 은행국 오쓰키 요이치(대월양일) 금융거래관리관이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76년 록히드 사건이나 89년 리크루트 사건때도 측근인 운전사와 자금담당 비서가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그들의 정신은 자신이 겪은 수치를 ‘깨끗이’ 자살로서 사죄하고 전력을 다해 책임을 지려는 최후의 수단이다.일본도를 사용하진 않았으나 현대적인 ‘셉부쿠(체복)’인 셈이다. 자살이 아름답다거나 장하다는 것은 아니다.문화가 다른만큼 모든 것이 우리와는 다를 수 밖에 없다.그러나 만약 비슷한 사건때문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면서 ‘시간이 약’이라고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모든 사건을 잊어버리기나 바랐을 것이다.
  • 흑하시 ‘김치 할머니’의 소원(흑룡강 7천리:19)

    ◎“한국서 돈벌어 귀국,식당 차리는게 꿈”/“고국에 사는 언니 만나려 26개월 번돈 주고 초청장 사려다… 결국 일부는 떼이고 말았지요” 그녀의 이름은 김화자(60).흑하시 조선족들은 김씨를 “김치할머니”라고 부른다.채소시장에서 김치를 해서 팔기를 10여년.김씨의 김치가 유달리 맛이 있다고 소문이 나서 붙여진 별명이다.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김씨는 요녕성 개원이 고향인데 남편을 따라 흑하에 온지도 어언 33년이나 된다고 한다.김씨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오면서 딸 셋,아들 하나를 낳아서 길렀다. “할아버지 고향은 경상도입니다.아버지의 이름은 해웅인데 1남 7녀를 두었답니다.넷째언니의 이름이 고만인데 딸을 그만 낳으라고 지은 이름입니다.나의 이름은 소덕이었습니다.재덕오빠도 세상을 뜨고 형제라고는 한국에 사는 봉애언니 뿐입니다.보고싶어요” 김치할머니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언니가 한국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안지도 3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러나 만날 수가 없다.중국 조선족이 초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혈육을만나고 싶 은충동에 김씨는 다른 경로를 찾았다.1995년 김씨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 중급인민법원의 심광섭 선생에게 초청장을 부탁했다.김씨는 심선생에게 수속비로 1만6천원,강명순 선생에게 1만원 등 모두 2만6천원을 주었다.하지만 돈을 주고 사기로 한 초청장은 못사고 말았다.1년뒤 아들 한영길을 보내 수속비를 찾았는데 2만1천원은 되돌려 받았으나 5천원은 아직 받지 못했다. ○“월급 적은 자식들 도와줘야” “어려운 부탁이지만 연변으로 돌아가면 심선생에게 말해서 나머지돈을 찾게 해주십시오.5천원이면 우리에게는 큰 돈입니다” 김씨는 어려운 생활 형편 이야기를 했다.남편 한정순씨(64)의 매달 퇴직금에 김치장사 수입 1천여원이면 늙은 부부 생활에는 근심이 없다.그러나 직업도 있고 장가를 간 자식들의 월급이 적어 도와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때문에 아직 전화도 없다고 한다. 수만명의 한국초청 사기 피해자들의 경우 대부분이 수입원이 말라 있는 사람들이다.한국을 천국처럼 착각,한번 가서 몇년만 벌어오면 평생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고리대금 수만원을 쳐넣으면서 위험천만한 밀입국까지 시도한다. 올해 4월 위해에서 부산으로 밀입국하려고 배에 탔던 106명의 밀입국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구치소에 갇혔다가 돌아온 김정립씨(36·연수현 가신진 부유촌)는 11월 22일 광서 계림식당에서 만나 이렇게 말했다. ○3번 밀입국 시도… 붙잡혀 “우리 배에 같이 탔던 송씨는 3번이나 밀입국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잡혔습니다.재수가 없는 사람이지요.그래도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밀입국밖에 없다.바다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또 배를 탈 것이다.’정말 그래요.저도 5만원을 빚졌습니다.4푼이자로 매달 2천원씩 물어야 합니다.빚때문에 집에도 못가고 여기에 피해 있습니다.처도 보고싶고 아이들도 보고싶어 미칠 것같습니다.빚을 갚고 돈을 벌어 고향에 가서 살려면 한국에 가 는길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조선족에 대한 초청이 어려워지자 요즘 조선족사회에서는 성과 이름을 바꾸는 바람이 불고 있다.사성,봉양등과 같은 한족 이름으로 완전히 고쳐버린다.성과 이름을바꾸는 이유는 많지만 섭외혼인,출국노무연수 등이 늘어남에 따라 많아진다는 것이다.그들은 “이름을 한족식으로 짓는다고 다른 민족으로 변하겠는가.이름의 민족성을 따져 무얼 하겠는가?” 반문해온다.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사기인줄 알면서도 생명을 걸고 모험을 시도한다.꼭 한국에 가야만 살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대와현 평안조선족촌의 한 과부는 한국에 아들을 보내 돈을 벌었으나 아들이 사고로 죽었다는 비보를 받고 “얘야 돈이 뭐길래 네가 죽었느냐?그만하면 괜찮게 살았는데… 한국에 간 사람들과 비길게 뭐람?우리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었는데…”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김정립씨가 몸을 피해 있는 식당의 주인은 이종사촌 동생 임호일씨(25)이다.그는 한국바람이 들지 않고 알뜰히 자기 삶을 개척하는 사람이다.고급중학을 졸업하고 북경에 가서 한국 금원물산에 취직,사회경험을 쌓는 한편 임금을 챙겨서 자금을 마련해 계림시에 흠흠식당(일명 장백산식당)을 차렸다.한국인이 하는 아리랑식당의 종업원들을 위한 도시락만 해도 하루에 100여개를 만든다.처음에는 조선족 고객들만 모이던 이 식당에 요즈음에는 한족들도 조금씩 온다고 했다. “내년부터 한국에서 계림까지 직접 비행기가 통한답니다.관광객이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 가이드들도 불어날 것이고.지금 계림에 조선족 가이드가 200여명 있습니다.그들이 우리 식당의 고객입니다.한족들도 차차 김치와 불고기에 맛을 들이게 될 것입니다.저는 낙관합니다” 임호일씨는 자신에 차 말했다. 김화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돈도벌고 요리도 배워야죠” “지난번에 언니의 딸 이숙련이 전화를 해왔습니다.언니하고도 통화를 했지요.울기만 했어요.초청장을 보낸다고 했어요.친척방문이니까 반년까지는 체류 연장이 된다고 해요.영감과 같이 한국에 가서 돈도 좀 벌고 요리법을 배워 식당을 차릴 것입니다” 조선식당의 성공 비결은 음식맛에 있으며 음식맛의 비결은 양념맛으로 ‘쇠고기 다시다’‘순창 고추장’등 한국 수입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흑하에서 한국의 맛에 다시금 자부심을 느꼈다.우리 민족의 음식문화는 미각을 통해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육체에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그것은 우리 민족문화의 생명력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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