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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8) 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8) 전운 그림자에 불안, 막막한 현실

    후금이 대릉하 원정에 앞서 평안도 일원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자 조선의 위기의식은 바짝 높아졌다. 인조는 강화도 정비에 몰두하는 한편, 후금의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 방책 마련에도 신경을 썼다.1631년 8월, 인조는 서쪽 교외로 나아가 무사들의 훈련을 참관하는 열무(閱武)를 행하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후금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위기 의식 속에서 상무(尙武)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띄우는 것만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북 포기론´ 떠돌자 민심 흉흉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 방어와 정비에만 몰두하는 자세를 보이자 청북(淸北) 사람들의 위기 의식이 높아져 갔다. 조선 전기부터 ‘서북인 차별’의 굴레 때문에 내내 불만을 삭이고 살던 그들이었다.‘조정이 청북 방어는 이미 포기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평안도 전역으로 퍼졌다. 청북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조정에서도 청북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1631년 10월, 사간 김세렴(金世濂)은 평안도, 그 가운데서도 의주 방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안도는 ‘나라의 문호(門戶)’라고 강조한 뒤 청북을 포기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팽배해 있다고 지역 민심을 전했다. 김세렴은 이어 ‘나라를 지키려면 백성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조정은 도리어 백성들의 원망만 사고 있으니 위기를 맞으면 누구에게 손을 벌릴 것이냐?’라며 대책을 촉구했다. 당시 청북 주민들의 불만과 위기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후금과 지척에 있는 데다 정묘호란 당시 막심한 피해를 온통 뒤집어썼던 그들이었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에서 별다른 방어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자 그들의 불만과 우려는 높아만 갔다.‘용골산성(龍骨山城)의 영웅’ 정봉수(鄭鳳壽)도 서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일찍이 절규했던 적이 있다. 청북 주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고을 인근에 있는 산성(山城)을 손봐달라고 조정에 요구했다. 산성은 후금군이 들이닥쳤을 때 그나마 자신들의 몸을 숨길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기 때문이다.1631년 8월 이후, 청북 지역의 요충지에 산성을 새로 쌓거나 수리해 달라는 건의가 봇물처럼 밀려들었다.8월12일 의주사람 백광종(白光宗)은 의주성을 수축하자고 했다.15일에는 곽산에 사는 김은정(金殷鼎) 등이 능한산성(凌漢山城) 안의 태초봉(太初峯)과 사인봉(舍人峯) 사이에 성을 쌓고 곡식을 저장하여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21일에는 철산 백성들이 정충신(鄭忠信)을 통해 운암산성(雲巖山城)을 수축해 달라고 건의해 왔다.9월 7일에는 운산 백성들이 용각산성(龍角山城)을 쌓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 백성들 스스로 나섰던 것이다. ●서북 방어, 재정궁핍이 발목 잡아 성을 수축해 달라는 청북 백성들의 바람은 절실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문제는 성을 쌓는 비용과 완공 이후 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병력과 군량을 마련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데 있었다.9월3일, 부원수(副元帥) 정충신이 차자를 올렸다. 청북 사람들의 축성 요구를 현장에서 직접 접했던 그였다. 하지만 정충신은 냉정했다. 그는 의주성을 쌓아봤자 소용이 없다고 했다. 성을 쌓는 것도 문제지만 완공 뒤 들여보낼 병력과 군량이 없는 현실에서는 우선 시세를 관망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비변사는 ‘정충신의 말대로 하면 청북의 민심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어 어렵게 모인 백성들이 모두 흩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비변사 또한 병력과 군량을 마련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원칙론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1631년 9월5일, 도체찰사 김류( )는 평안도 방어와 관련하여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의주를 지키려면 최소 1만명의 병력이 필요한데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군량이 5만석이라고 추산했다. 또 의주 방어에 필요한 용골산성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병력을 미리 들여보내면 군량이 없어 견디지 못하고, 그렇다고 적의 침입을 맞아 들여보내면 시간에 맞출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어차피 의주를 방어하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안주와 황주 방어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주를 지키든, 안주와 황주를 더 중요하게 여기든 병력과 군량을 확보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서북 지역에서 조정이 가장 신경을 썼던 곳은 안주였다. 안주에는 약 7000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군량은 겨우 몇 개월도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김류는 경기도와 황해도 사이에 진을 만들어 강화도를 바깥에서 응원하는 거점으로 삼자고 청했다. 김류의 대책이란 결국 ‘강화도 방어론’과 다름이 없었다. 위기를 맞아 서북 지역의 방어책 마련이 절실했지만 군량과 재정의 궁핍은 대책 마련에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조선이 이렇게 자기를 추스르기에도 겨를이 없는 처지에 명 장수들은 여전히 수시로 들락거리며 양곡을 지급하라고 떼를 썼다. 직접 서울로 올라와 양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아예 배에다 중국산 재물을 싣고 황해도 연안 등지로 몰려와 양곡 무역을 요구하는 자도 많았다. 그들이 몇 개월씩 머물며 돌아가지 않자 연안 주민들은 그들의 등쌀에 몸살을 앓았다. 1631년 10월26일, 가도의 도독 황룡(黃龍)은 군량을 독촉하는 자문을 다시 보내왔다.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자신이 가도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조선이 후금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떠벌렸다. 후금과 가도 사이에 낀 조선의 처지 역시 가관이었다. ●다시 ‘화친’상태로 돌아가다 1631년 윤 11월22일, 후금 사신 영아이대(英俄爾岱) 일행이 도착했다. 조선에서는 보통 용골대(龍骨大)라고 부르던 그는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내밀었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 백성들이 후금 지역으로 넘어와 산삼을 캐가고 있음에도 조선 조정이 방관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가도 사람들을 계속 상륙시키고, 형제국이 빌려달라고 요청한 배도 내어 주지 않는 조선은 이웃을 사귀는 데 정성이 없는 나라’라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조선은 가도의 명 장수들이나 조대수(祖大壽)가 후금을 이길 수 있다고 믿어 교묘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앞으로 언행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양국의 맹약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며 뼈있는 말을 남겼다. 인조는 이튿날에는 대릉하전을 직접 목도하고 돌아온 추신사(秋信使) 일행을 접견했다. 추신사 박로는 대릉하 싸움의 전황을 설명한 뒤, 홍타이지가 자신들에게 후금군의 병세(兵勢)를 과시했다고 보고했다. 후금군의 병력이 7만 정도 되고, 명군 사령관 장춘(張春) 등도 후금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이윽고 윤 11월24일, 조정의 고관들은 형조(刑曹) 앞마당에 모였다. 국경을 넘어가 산삼을 캐다가 잡힌 안덕간(安德幹)과 김태수(金太水)를 처형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용골대가 보는 앞에서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채삼인(採蔘人)의 월경(越境)을 금지해 달라.’는 후금 측의 요구에 대한 성의 표시였다. 비변사는 이어 인조에게 후금 측이 요구하는 물자를 넉넉히 보내주자고 건의했다. 대릉하 전투 시작 직전 급격히 고양되었던 후금에 대한 적대적인 자세는 어느새 가라앉고 있었다. 적개심에 맞물려 위기의식은 높아졌지만 그것을 돌파할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사실 조선 조정의 신료들은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한 이후부터 모두 융복(戎服)을 입었다. 조복(朝服) 대신 융복을 입은 것은 고난과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다.1631년 12월까지도 계속 융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융복을 착용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만으로는 후금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막막한 현실을 돌파할 특단의 조처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부고] 장익진 前 연세대 교수 시신 기증하고 하늘로

    [부고] 장익진 前 연세대 교수 시신 기증하고 하늘로

    31일 연세대에 따르면 전날 별세한 장익진(94) 전 연세대 의대 교수가 생전의 약속대로 시신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1916년 평안북도에서 출생한 장 교수는 42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국립보건원의 전신인 국립방역연구소 부소장을 거쳐 57년부터 연세대 의대 미생물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가톨릭의대와 미국 피츠버그대 의대 교수를 거쳐 69년부터 86년까지 미국 미시간주 공중보건과장을 역임했으며,86년 귀국해 90년 퇴임할 때까지 순천향대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장성인 시그노드 코리아 사장, 장성자 전 여성부 여성정책실장, 치과의사 장성온씨,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사위) 등이 있다. 시신은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안치됐다. 발인은 1일 오전 10시.(02)392-3099.
  • [부고]

    ●이선호(한화건설 상무)씨 부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3010-2295 ●서우인(전 육사 교수)씨 상배 명진(기아자동차 부장)명국(신한은행 부지점장)명숙(한국가스공사 차장)씨 모친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3010-2231 ●황미원(적십자혈액원 의사)씨 상부 김태선(가톨릭대 교수)씨 형님상 2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9일 오전 9시 (02)3010-2293 ●황운용(전북체육고 교사)운철(전 LG전자 이사)운붕(자영업)운호(전주 대성학원 원장)운기(도드람비티 이사)씨 부친상 황지혜(전자신문 U미디어부 기자)지현씨 조부상 25일 전북대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63)250-2441 ●송동훈(헤딩커뮤니케이션 대표)연훈(한국간호학원)정훈(국립합창단)씨 부친상 길환영(KBS 대전방송총국 국장)공봉성(대한광업진흥공사 연구개발팀장)씨 빙부상 2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30분 (02)3410-6920 ●김상구(중도일보 사진편집위원)씨 형님상 27일 충남 예산삼성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30분 (041)335-0443 ●김시진(프로야구 현대 유니콘스 감독)씨 빙모상 26일 전북 군산시 금강장례식장, 발인 28일 오전 8시 (063)445-4188 ●이정인(고려대 공대 공동실험실 연구원)현우(건축업)씨 부친상 남상훈(세계일보 정치부 기자)씨 빙부상 25일 부산 침례병원, 발인 28일 오전 9시 (051)583-8905 ●채자영(전 한국경제신문 기자)씨 모친상 26일 청주 참사랑병원, 발인 28일 오전 10시 (043)286-9529 ●성오철(신성ENG 과장)유철(대동케미칼 〃)씨 부친상 김원섭(국방부 조사본부 지원대장)씨 빙부상 26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6시 (02)3010-2236 ●한태호(한창건설 대표)씨 모친상 전형태(장미화장지 대표)백태현(부산일보 논설위원)변석룡(FIPC 대표)씨 빙모상 26일 부산 동의의료원, 발인 28일 오전 10시 (051)852-9385 ●차금철(충남 부여 홍산중고 교장)씨 별세 영훈(개포중 교사)성훈(충청대 교수)혜원(고양시개인택시조합)혜경(합덕서야고 교사)씨 부친상 김해수(알파문구)이남수(삼성SDS)씨 빙부상 2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3410-6924 ●윤태진(청솔학원 직원)씨 부친상 정용희(삼정피앤에이 고문)이석구(건국대 교수)유종순(자영업)이범규(조선대 교수)씨 빙부상 2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28일 오전 8시 (02)3010-2251 ●박종신(학교법인 수동학원 감사)씨 모친상 이상철(전 거함실업 대표)씨 빙모상 박상혁(사랑과평안의교회 담임목사)상완(은파악기 대표)씨 조모상 2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8일 오전 9시 (02)3410-6918 ●유완수(오앤이 대표)상수(재미 사업)영림(줌애드 이사)씨 부친상 방형식(오감소 대표)씨 빙부상 27일 강북삼성병원, 발인 29일 오전 8시 (02)2001-1097 ●전선권(유리츠개발 대표)씨 모친상 고인권(전 한림공고 교사)김태중(경성대 교수)씨 빙모상 26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30일 오전 7시 (02)392-3299 ●최성호(한국은행 리스크관리팀 과장)씨 빙부상 26일 하계동 을지병원, 발인 28일 오전 7시 (02)970-8444
  • 25년째 한센인 돌보는 ‘소록도 천사’

    25년째 한센인 돌보는 ‘소록도 천사’

    “고단했던 삶을 놓는 순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너무나 평안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길에 가족도, 친척도 없는 그들을 지켜볼 때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한센인들의 보금자리인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의 천사 김명순(45) 간호조무사가 보통사람의 눈에는 태산보다 높게 보였다. 그는 2007년 ‘숨은 공무원’으로 뽑혀 최근 근정포장을 받았다. 병원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신청했으나 현장조사에서 감동받아 한 단계 올라갔다. 김씨는 남편과 초·중학생인 1남 2녀와 함께 소록도 관사에서 산다.1983년 시작해 25년째 한결같이 한센인들을 돌보는 삶을 잇고 있다. 그가 눈뜨면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암환자, 간경화 등 중증인 한센인 환자 50명을 찾아가 주사를 놔주고 욕창부위 고름을 닦아내고 소독한다. 식사보조, 대소변 받아내기, 목욕과 이발, 머리빗기, 손발톱 깎기, 세수, 바느질, 산책하기, 노래 부르기, 관절 운동까지…. 허리펼 시간이 없다. 김씨는 지금 10여명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가족 관계를 맺고 며느리가 됐다. 아이들은 재롱을 부리고 말벗이 되는 손주가 됐다. 식사 때면 아이들은 “꼭지(박곡지) 할머니 나 안 보고 싶대.”라고 물어본다. 그는 아이들 손 잡고 할머니 생일날 노래를 불러준다. 설에는 세배하고 세뱃돈도 받는다. 김씨는 “임종 때 할머니들은 우리에게 ‘간호야, 애기 엄마야.’라고 부르면서 ‘너무 미안하다. 고마웠다.’며 눈물을 흘리신다.”라고 말했다. 그가 치르는 장례식만 1년에 50여차례다. “요즘 소록도에 오는 젊은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저도 깜짝깜짝 놀랍니다.‘한센병은 옮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아무렇지도 않게 할머니 얼굴에 대고 비비고 안고 합니다. 이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워요.” 김씨는 “젊어서 대도시 다른 병원으로 갈까 하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살면 살수록 소록도가 좋다.”며 웃었다. 그의 선친도 소록도와 뭍을 잇던 나룻배 선장이었다. 소록도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5) 후금,조선을 떠보다

    후금군이 침략해 오고, 사신을 보내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의 위기 의식은 높아졌다. 조정은 김시양(金時讓)을 도원수로, 이완(李浣)을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서북으로 내려보내고 전국에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후금과 맞설 수 없는 처지에서 계속 강경책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은 다시 기미책(羈策:오랑캐를 다독이는 정책)으로 돌아갔다.1631년(인조 9) 7월, 조선의 ‘태도’와 ‘능력’을 확인한 후금은 서쪽으로 명 원정길에 올랐다. ●때 아닌 斥和·主和 논쟁 1631년 6월13일, 배를 빌려줄 수 없다는 통고에 불만을 품고 호차 중남 등이 뛰쳐나간 직후 입직 포수(砲手) 이덕탁(李德卓)이 승정원에 나타났다. 그는 ‘오랑캐 사신들은 우리의 허실을 엿보기 위해 왔으니 그냥 돌려보내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며 빨리 그들을 억류하고 싸울 준비를 하라고 강조했다. 18일에는 후금군의 침략 소식에 놀라 이원익이 조정으로 달려왔다. 이원익은 당시 이미 은퇴한 데다 여든다섯의 고령이었다. 그는 인조에게, 하삼도의 군병을 동원하여 민심을 소란케 하지 말고 어영군(御營軍)을 비롯한 서울에 있는 정병을 평안도로 내려보내라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도 선제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금군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이덕탁의 건의를 계기로 때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지평 심연(沈演)은 식량을 주지도, 회답사(回答使)를 보내지도 말고 후금을 공격할 계책을 의논하라고 촉구했다. 사헌부의 다른 신료들도 심연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들은 ‘정묘호란 이후 오랑캐와 서로 왕래한 것은 화호(和好)를 굳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그들이 이유 없이 쳐들어와 맹약을 어겼다.’고 지적하고, 더 이상 미봉책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홍문관 신료들은 한 발 더 나갔다. 그들은 ‘오랑캐가 부모의 나라를 짓밟고 가도를 공격하려 한다면 갓을 쓰고서라도 달려가 구원해야 한다.’며 강약과 승패는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일부 신료들은 ‘조정이 아예 안주 이북의 방어를 포기했다.’고 통탄하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싸우자고 주장했다. 삼사(三司) 신료들은 이참에 후금과의 우호관계를 끊고 척화(斥和)의 길로 나아가라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비변사(備邊司)의 입장은 달랐다. 비변사는 ‘후금과의 화의(和議)를 언제까지나 믿을 수는 없지만, 싸우려 해도 병마가 모이지 않고 군량도 제대로 댈 수 없는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후금을 다독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비변사의 의견에 동조하여 박로와 오신남(吳信男)을 회답사로 임명하여 심양으로 보냈다. 화친을 계속 유지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삼사 관원들은 굴욕적인 사신 파견을 당장 중지하라고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조, 훗날 대비 강화도 정비 ‘올인´ 조선이 기존의 화친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하자 후금군은 철수 길에 올랐다. 당시 후금군은 조선군이 쉽게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1629년과 1630년 이른바 기사전역(己巳戰役) 당시 만리장성의 외곽을 넘어 북경을 비롯한 명의 심장부를 유린했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잘 훈련된 병력이 많은 것은 물론, 실전 경험까지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6월28일, 후금군이 철수를 시작했다는 보고가 조정으로 전해졌다. 철수 소식을 들은 인조는 신료들에게 강화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실 인조는 후금군이 쳐들어 왔던 직후 강화도로 피란할 계획을 세웠었다. 또 강화도로 들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삼남에 독운어사(督運御史)를 파견했다. 혹시라도 강화도의 군량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미리 양곡 운반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후금군이 물러가자 본격적으로 강화도를 재정비하려는 깜냥이었다. 인조는 강화도에 10만 군사가 먹을 수 있는 양곡을 비축하라고 지시했다. 강화 읍성(邑城)과 갑곶성(甲串城)을 개축하고, 화기와 각종 장비들을 미리 옮겨 놓으라고 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방물(方物)을 목면으로 바꿔 강화로 수송한 뒤, 나중에 군량 마련을 위한 자금으로 쓰려는 계획도 세웠다. 또 강화도 연안의 병력 주둔지에 큰 창고들을 지을 것을 주문했다. 측근들을 강화도로 보내 방어 상태와 시설 등을 수시로 점검했다. 인조가 강화도 정비에 ‘올인’ 하는 자세를 보이자 우려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우선 조정에서 방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청북(淸北) 지역 사람들의 불만이 높았다.1631년 7월, 영유현령(永柔縣令) 정기수(鄭麒壽)가 상소했다. 그는 ‘청북은 포기할 수 없는 조종(祖宗)의 강토인데 조정에서는 청북을 지키려 하기는커녕 사람들을 지역에서 빼내려 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또 ‘청북 사람들은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에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모두 싸우다가 죽으려는 결의가 넘친다.’며 조정의 지원을 촉구했다. 우의정 이정구는 다른 측면에서 인조의 ‘강화도 정비론’에 반대했다. 그는 서울이 팔도의 근원이며, 근원이 흔들리면 민심이 무너져 변경이 흔들릴 것이라고 지적하고, 먼저 서울 서쪽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라고 촉구했다. 이정구는 또한 강화도는 들어가려고 원하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요새로 정비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 때문에 불가능하고, 섣불리 강화도 정비에만 몰두하면 원망이 일어나 민심을 동요시킬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강화도 주변의 연도(沿島) 방어에도 신경 쓸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정구 등의 경고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뿐 아니라 당시 많은 관인들이 ‘후금군은 수전(水戰)에 약하기 때문에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는 안전하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후금 수군은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집착할 때,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후금군, 대릉하성 공략 나서 조선 조정이 위기의식 속에서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 골몰하고 있던 1631년 7월, 후금은 다시 명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의 공격 목표는 대릉하성(大凌河城)과 금주(錦州) 등지였다. 모두 영원성과 산해관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명군의 전초 기지였다. 홍타이지는 원정 시작에 앞서 소규모 정예 병력을 수시로 대릉하 주변으로 보냈다. 명의 장졸들이나 민간인들을 납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단순히 ‘인간 사냥’이 아니라 명군 관련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정찰의 일환이었다. 당시 후금의 정탐(偵探) 능력은 탁월했다. 이미 건주여진 시절부터 명 관인들은 누르하치의 간첩 활동과 정보 수집 능력에 경계심을 드러낸 바 있었다. 명 관인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건주여진인은 간첩 활동에 가장 뛰어나다. 내응하는 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아서 무너지고 만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홍타이지는 ‘인간 사냥’을 통해 명의 총병(總兵) 조대수(祖大壽) 등이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산해관 바깥에 대릉하성을 비롯한 여덟 개의 성을 수축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후금군이 공격해 오기 전에 공사를 마치려고 밤낮으로 독려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홍타이지는 원정을 결심하고, 후금에 귀순한 몽골의 여러 패륵(貝勒)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명령했다. 마침내 8월5일, 홍타이지의 대군은 대릉하 부근까지 전진했다. 대릉하 원정에 앞서 조선에 병력을 보내 위협하고, 배를 빌려달라고 한 것은 사전 정지작업이었던 셈이다. 받아들이기 곤란한 요구를 내세워 조선의 반응과 능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정(西征)하는 동안 조선이 배후에서 공격해 올 우려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로소 군대를 움직였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장충동 ‘평안도 족발집’

    장충동 ‘평안도 족발집’

    족발집이 즐비한 장충동에서도 ‘원조 중의 원조’라 불리는 족발집이 있다. 허영만의 ‘식객’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평안도 족발집’. 47년이나 된 장국의 맛과 족발집의 고유한 정취를 찾아가 보았다. 김상인VJ bowwow@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장충동 ‘평안도 족발집’

    족발집이 즐비한 장충동에서도 ‘원조 중의 원조’라 불리는 족발집이 있다. 허영만의 ‘식객’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평안도 족발집’. 47년이나 된 장국의 맛과 족발집의 고유한 정취를 찾아가 보았다. 김상인VJ bowwow@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4) 후금,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54) 후금,조선에 배(船)를 요구하다

    정묘호란이 끝난 뒤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아슬아슬했다. 조선은 후금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바로 명과 가도라는 바깥 변수 때문이었다. 유흥치가 피살된 뒤, 가도를 탈출하여 후금으로 귀순한 자들 가운데는 홍타이지에게 가도를 빼앗을 기회가 왔다고 부추기는 자들이 있었다. 홍타이지는 그럴듯하게 여겼고 그 파장은 곧바로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1631년(인조 9) 6월8일,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보낸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호차(胡差) 중남(仲男)과 아지호(阿之好) 등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와 가산(嘉山)의 서쪽 지역을 차단했다는 소식이었다. 같은 날 도착한 장계에서 평안감사 민성휘(閔聖徽)는 ‘호인들이 조선에서 배를 빌려 가도를 습격하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주변 고을의 수령들과 장수들을 불러모아 방어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보고했다. 소식을 접한 비변사는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을 평안도로 보내고 금군(禁軍)과 포수(砲手)를 평양으로 파견하고 황해도의 병력도 동원하라.’고 건의했다. 정묘호란 이후, 이렇게 많은 수의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온 적은 없었다. 그것은 사실상 침략이었다. 다만 그들은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고 배를 빌려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인조는 황급히 비변사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은, 후금군이 배를 빌려 가도를 습격하려는 목적에서 침략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명에 대한 의리를 고려할 때 배를 빌려줄 수는 없다며 속히 황해도를 비롯한 각도의 군사들을 동원하라고 촉구했다. 최명길의 분석은 좀 달랐다. 그는 후금군이 쳐들어 온 것은 조정을 협박하여 식량을 구하려는 수작이라고 보았다. 최명길은 후금군이 깊숙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군사 징발 때문에 민심을 소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6월10일 호차 중남이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갖고 서울로 올라왔다. 홍타이지가 보낸 편지는 조선에 대한 불만과 비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이 양곡을 주는 바람에 가도가 존속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어 조선이 용천, 철산 지역의 땅을 가도 주민들에게 경작지로 제공하고 있는 것을 비난했다. 그는 정묘호란 당시 서울 이북 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반환했음을 상기시킨 뒤 조선은 그럼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홍타이지는 ‘잘못을 사과하는 차원에서 배를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배를 빌려주기 않으면 의주와 철산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중남이 입경한 그날, 명에서 온 사절도 서울로 들어왔다. 등래순무 손원화(孫元化)가 보낸 도사(都司) 왕순신(王舜臣)과 이매(李梅)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인조를 만났을 때 조총, 구리 냄비와 배 100척을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공교롭게도 명 사절들도 배를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당시 손원화는 바람 잘날 없는 가도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배가 필요했다. 그는 조선에서 배를 구입하여 섬 안에 있는 인원과 전마(戰馬), 군수 물자 등을 등래(登萊) 지역으로 수송하려고 했던 것이다. 손원화의 요구는 조선에게 무척 버거운 것이었다.100척이나 되는 배를 새로 건조하기도 어렵고, 각 지역의 화물선들을 갑자기 차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 섣불리 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가 후금이 알게 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조선 조정은 결국 배를 제공하라는 요구는 완곡히 거부했다. 대신 조총 500자루와 구리 냄비 100개를 보내겠다고 확약했다. 명에 대해서는 참으로 충성스런 조선이었다. 청북 지역에 후금군 1만명이 주둔해 있고, 호차가 서울에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명 사절들에게 조총 500자루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분명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다. 조정은 실제로 왕순신 등이 중남과 조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했다. 중남 또한 배를 빌려줄지 여부를 빨리 밝히라고 닦달했다. 조정은 중남에게 ‘명은 우리의 부모 나라이므로 너희에게 배를 빌려주는 것은 천륜을 저버리는 것이다. 부자(父子) 사이에 차마 못할 짓을 할 경우 형제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잔인하게 명을 저버리면 뒷날 너의 나라로부터도 의심을 받을 것’이라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의리와 천륜을 강조하여 중남의 ‘심금을 울려 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면서 후금군의 침략을 비난하고,‘형제 사이의 의리를 생각해서 며칠분의 군량을 제공할 것이니 빨리 철수하라.’고 촉구했다. 배를 빌려줄 수 없다고 하자 중남 일행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조정은 접대하는 신료를 보내 그들을 달래서 다시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회유했지만 중남 등은 배를 빌려 달라는 요구를 접지 않았다. 조선 측이 다시 거부하자 중남 일행은 다시 일어나 귀국하겠다고 나가버렸다. 조정은 다시 사람을 보내 이미 녹번동까지 가 있던 중남 일행을 달래야만 했다. 후금은 왜 배를 빌려달라고 요구했을까? 당시까지 후금은 바다에서 작전할 수 있는 수군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요하(遼河)와 같은 내륙 지역의 강에서 운항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배들은 있었지만 그것을 갖고 바다로 나가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바다에서 배를 조종하고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수군 병력이 없었다. 후금에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들의 육군은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막강했지만 바다나 수군과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철산의 바로 코앞에 있는 가도에서 모문룡이 ‘발호’를 해도 수군이 없는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모문룡은 바로 그 같은 후금의 약점을 파고들어 8년 가까이 ‘해외 천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후금은 조선의 수군과 항해술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심지어 ‘조선 수군이 명 수군보다 강하다.’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조선에서 배와 수군을 빌리면 자신들의 전력은 배가될 수 있다고 보았다. 수군만 있으면 코앞에 있는 가도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후금의 서쪽을 철옹성처럼 막아 버티고 있는 산해관도 해로로 공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수군이 강한 나라’로 인식되었다. 왜란 초반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했지만 수군은 달랐다.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아 그들의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을 좌절시킴으로써 궁극에는 명의 안보까지도 지켜낸 것이 조선 수군이었다. 이순신(李舜臣)의 탁월한 영도와 거북선 등 조선 전함들의 활약상은 명 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626년 조선에 왔던 명사 강왈광(姜曰廣)은 ‘조선 사람들이 배를 조종하는 것은 빠르기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다. 만일 그들이 오랑캐에게 넘어가 오랑캐들이 조선 수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면 산동이나 강남 지방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명청 교체기 명 관인들이 조선의 향배와 관련하여 가장 크게 우려했던 대목이 바로 수군이었다. 조선 또한 명과 후금의 대결 상황에서 ‘수군 문제’가 갖는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후금의 강요대로 배나 수군을 제공할 경우, 가도가 곧바로 위험에 처하고 산해관을 비롯한 명의 내지까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후금에 배를 넘겨주는 것은 ‘부모의 나라’에 비수를 꽂는 것이었다.1631년 6월, 배 때문에 명과 후금 모두로부터 ‘코너에 몰려야 했던’ 조선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거리 미술관 속으로] (50) 서울삼성병원

    [거리 미술관 속으로] (50) 서울삼성병원

    즐겁고 행복한 일로 병원을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서울삼성병원이라면 얘기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최근 개원한 암센터 앞에는 10m 높이의 대형 작품인 ‘생·성·21’이 서 있다. 아시아 최고 규모라는 암센터의 푸른색 외관에 대비되는 금빛과 은빛의 작품이 편안함과 최첨단의 이미지를 조화시킨다. 조각가 김인겸씨는 “건강한 잎새가 생동하며 영롱한 물방울 모양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형상”이라면서 “고귀한 생명의 의지와 앞날의 힘찬 희망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희망과 건강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전하는 작가의 메시지이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처음 생겼을 때 한국 대표작가로 참여했던 작가의 작품 ‘묵시공간-우주’(5×2.2×2m·알루미늄)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병원 입구에 놓인 엄지손가락은 프랑스 조각가 세자르의 작품이다.2.5m 높이의 이 청동작품은 1960년대 ‘손’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선보인 것으로, 사실적인 손가락을 표현해 구상조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례로 꼽히는 의미를 갖고 있다. 평안을 원한다면 ‘사유소녀상’(95×5×215㎝·화강암)을 찾아가는 것도 좋다. 원로 조각가 최종태씨의 작품으로, 단순하면서도 온화함을 풍기는 소녀의 표정에서 마음의 평정과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밖에도 사물의 관계에 의미를 두는 ‘모노하 운동’을 주도한 거장 이우환씨의 ‘무제’(162×186×48㎝·철과 화강암)도 자리를 잡고 있다. 형식과 격식 없이 그냥 그대로 놓아둔 자유로운 돌과 쇠의 관계를 보는 이들에게 잠시 시름을 잊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여유를 안겨준다. 이밖에도 재일설치미술가 최재은씨의 ‘시간의 방향’, 산업재료를 재활용해 만든 베르나르 브네의 ‘불확실한 선’, 물결치는 평판의 이미지로 한국 추상조각의 디딤돌이라 불리던 전국광씨의 ‘적(積)’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조형물과 설치작품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미술작품의 보고(寶庫)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부고]

    ●박수일(대한축구협회 이사)씨 별세 지웅(피닉스체육학원 원장)씨 부친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010-2292●오수인(전 한화 부회장)씨 별세 이경희(수필가)씨 상부 오승온(온아트 대표)승신(서울대 인문정보연구소 객원연구원)씨 부친상 장필준(케이팩 대표)유정(삼하사 〃)씨 빙부상 10일 서울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2072-2011●유명화(대한민국건국회 부회장·평안북도 중앙도민회 고문)씨 별세 일선(자영업)씨 부친상 공기흠(삼성전자 부장)씨 빙부상 9일 경희의료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958-9549 ●엄명섭(한라병원 관리과)기섭(공정거래위원회 서기관)씨 모친상 허만배(영진식품 전무)김승리(예하종합건설 대표)씨 빙모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낮 12시 (02)3410-6902●장성익(SK건설 토목기술팀 부장)씨 부친상 이병철(현대증권 동소문지점 과장)조홍갑(경기도청)씨 빙부상 10일 서울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2072-2022●안경재(공무원)용재(가우전자 영업팀장)씨 모친상 홍종순(에리트베이직 대표)씨 빙모상 9일 부산의료원, 발인 11일 오전 8시30분 (051)607-2654●권영휘(약천농원 대표)영국(강원일보 전무 겸 서울지사장)영철(호주 거주)영근(사업)씨 부친상 오현(전 한국일보 생활팀장)혜경(박홍근홈패션 상무)씨 조부상 10일 강원 동해 해람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33)530-3320●김충기(자영업)재기(전의성결교회)범기(신진학원 청도학원장)형기(삼성물산 대만법인장)씨 부친상 김진규(AIG 손해보험 부산본부장)씨 빙부상 10일 천안 단국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30분 (041)550-7185●서범석(충남도 공보관)씨 부친상 10일 대전 성모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42)220-9870●한석동(국민일보 논설실장)씨 상배 우정(대학생) 재영(대학생)씨 모친상 10일 오후 9시 5분 서울 삼성의료원, 발인 13일 오전 9시 (02)3410-6920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병자호란 다시 읽기] (53) 끝없는 가도의 風雲

    인조가 원종 추숭을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가도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켜 조선의 정벌 대상이 되었던 유흥치(劉興治)는 조선에 대한 물자 징색(徵色)을 멈추지 않았다. 유흥치를 토벌하려 했던 ‘원죄’ 때문에 조선은 그의 보복을 받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1630년(인조 8) 8월, 비변사는 총융사 휘하의 경포수와 어영군을 평안병사 유림(柳琳)에게 배속시키고 도내의 정예병을 안주, 정주, 구성 등지에 배치하여 유흥치 일당의 노략질에 대비할 것을 청했다. ●가도 정벌 시도의 후유증 1630년 8월 유흥치는 차관 이매(李梅)를 서울로 보내, 조선이 자신을 공격하려 했던 까닭을 힐문하려 했다. 인조는 처음에는 그와의 면담을 회피했다. 하지만 결국 그를 만나 토벌 시도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유흥치는 9월에도 차관 이현(李見)을 보내왔다. 그는 먼저 ‘정충신이 가도 사람들이 배 만들고 숯 굽는 것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 정충신이 토벌에 나섰을 때 유흥치의 정탐꾼들을 체포하고 한인들을 살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유흥치는 이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양곡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뻔뻔함의 극치였다. 인조는 이현에게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겠다고 했다. 같은 해 10월, 인조는 문안관 정유성(鄭維城)을 가도로 보냈다. 유흥치는 ‘기공대첩(奇功大捷)’이란 글자를 쓴 깃발을 세워놓고 정유성을 만났다. 그는 정유성에게 자신이 섬 안의 훼방꾼들을 제거했는데 조선이 자신을 왜 공격하느냐고 힐문했다. 그러면서 ‘조선이 천조(天朝)를 범하는 오랑캐는 토벌하지 않으면서 명나라 장수를 향해 군사를 들이대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정유성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정유성에게 유흥치는 본색을 드러냈다. 섬 안에 군량이 부족하니 조선이 그것을 공급하라고 다시 요구했다. 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하고 힘만 낭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유흥치에게 약점을 잡혀 코가 꿰인 셈이었다. 유흥치는 정유성을 만난 직후, 평안도 일대에 부하들을 보내 곡물을 운반해 오도록 했다. 그들은 조선 관민들에게 수천 석의 군량을 빨리 운반하라고 독촉했다. 유흥치는, 압록강이 얼기 전에 군량을 보내주지 않으면 군사들을 평안도에 풀어놓겠다고 협박했다. 유흥치가 가도로 돌아온 뒤 조선에 보낸 게첩(揭帖)에는 모욕적인 언사가 많았다. 김상헌이 회답서를 썼는데, 유흥치의 무례함을 질책하고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노여워할까 우려하여 내용을 고치라고 지시했다. 김상헌은 인조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인조는 김상헌에게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고, 김상헌은 홍문관 부제학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맞섰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는 인조의 태도도 유흥치의 작폐를 조장하고 있었다. ●유흥치의 수탈이 격화되다 유흥치가 반란을 일으킨 뒤 명 조정은 가도에 대한 군량 공급을 중단했다.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가도의 한인들은 조선에서 토색질을 벌였다. 조선의 관민들 가운데는 한인들의 작폐에 시달리다 못해 그들을 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1630년 12월, 중화의 대장(代將) 양덕위(梁德渭)는 노략질을 일삼는 한인들을 공격하여 17명을 살상했다. 조정 일각에서는 유흥치가 알게 되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양덕위를 처벌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평안감사 민성휘의 의견은 달랐다. 양덕위를 살인죄로 처벌한다면 한인들이 더욱 거리낌 없이 난동을 피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 관민들의 ‘자구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시 같은 해 12월에는 황주의 백성들이, 배를 수리하기 위해 왔던 한인들을 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화가 난 한인들은 황주 관아로 몰려가 주동자 색출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작폐에 대한 조선 관인들의 태도가 과거와 달라진 것을 절감한 유흥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우선 서울 등지에 정탐꾼을 들여보냈다. 정탐꾼들은 사대부가와 여염을 돌아다니며 조선 사정을 파악하려고 골몰했다. 그들이 무엇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선과 후금의 왕래 상황이었다. 정탐꾼들을 통해 파악된 정보를 바탕으로 유흥치는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다.1630년 11월, 전국해(錢國海)라는 자가 등래순무(登萊巡撫) 손원화(孫元化)의 차관이라 칭하며 조선으로 출발했다. 그는 ‘조선에서 군량 2만석과 전마 3000필을 얻어 유흥치에게 공급한다.’고 떠벌렸다. 가도에서 그를 만났던 조선 접반사 이경헌(李景憲)은 ‘조선에서는 전마를 키우지 않고 평안도는 이미 황폐화되어 군량을 더 이상 마련할 수 없다.’고 조선행을 만류했다. 전국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전국해는 본래 유흥치의 부하였다. 유흥치는 그에게 위조한 자문(咨文)을 주었다. 자문의 내용은 가관이었다.‘명 조정은 이제 유흥치를 용서했다. 감격한 유흥치는 공을 세우고 싶지만 식량과 전마가 부족하여 이웃에 의지해야만 한다. 듣건대 조선이 후금을 돕고 한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소문이 있다. 부득이하게 후금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조선이 명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곡식과 전마를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시 전마 2000필을 가도로 보내고 한인들을 핍박하지 말라’. 조선이 후금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을 빌미로 군량과 전마를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 조선 조정은 전국해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과거부터 등래 군문(軍門)이 바다 건너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 군량과 전마를 청했던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국해는 인조를 만났을 때, 자신이 손원화가 보내서 온 차관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인조는 양곡과 전마를 보내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 비변사는 서울에 있는 한인들을 모두 색출하여 가도로 돌려보내자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상인과 역관들이 가도에 들어가 무역하는 것을 엄격히 제재하자고 했다. 그들을 통해 조선 사정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였다. 바야흐로 조선과 유흥치 사이의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도의 변란 1631년(인조 9) 1월, 가도로 들어간 조선 문안관을 만났을 때 유흥치는 다시 길길이 뛰었다. 그는 한인들을 살해한 범인을 체포하여 자신에게 묶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병력을 풀어 자신이 직접 살인자를 찾아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유흥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명 본토로부터 군량 공급이 여의치 않은 데다 조선 또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흥치는 결국 1631년 3월, 부하 장도(張濤)와 심세괴(沈世魁) 등에게 피살되었다. 유흥치는 가도를 통제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심세괴 등의 반발을 사서 죽은 것이다. 모문룡과 원숭환이 죽은 뒤, 사실상 방치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가도의 난맥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가도에서 다시 일어난 변란의 불똥은 조선으로 튀었다. 인조는 유흥치가 후금으로 투항을 시도하다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가도 정벌’을 다시 운운했다. 그런데 당시는 ‘가도 정벌’을 운운할 상황이 아니었다.1631년 5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조선 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협박을 늘어놓았다. 그는 우선 조선이 보낸 방물(方物)의 양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굶주린 유흥치가 자신에게 귀순하려고 했는데 조선이 식량을 공급해 주는 바람에 귀순을 거부했다.’고 따졌다. 그는 조선이 이후에도 가도에 식량을 대주면 병력을 의주로 보내 차단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의 원조가 없으면 가도는 쉽사리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협박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조선이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 한, 후금과의 관계는 안정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락가락했던 인조의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의 가도 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결국 후금과의 원한을 쌓아 가는 과정이었다. 파국이 다가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도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었던 것, 바로 거기에 조선의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지자체 새해 주민축제 풍성

    지자체 새해 주민축제 풍성

    무자년(戊子年) 새해를 맞아 각 지방자치단체는 다채로운 주민참여 행사를 마련했다.1일 첫날부터 전국에서는 눈길을 끄는 해맞이 행사가 펼쳐졌다. 지난 연말의 대선에 이어 다가오는 총선 등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추스르고 올해는 좋은 일이 더 많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민심 추스르는 문화행사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은 2일 오후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2008 신년음악회’를 연다.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4번 등 감미로운 선율을 들려준다. 이달말까지 서울대공원에서는 12간지 신년운세, 별자리 운세 등을 점치고 꿈과 희망을 적은 ‘소원지’를 나무에 거는 행사도 한다.7∼20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옆에서는 ‘얼음조각축제’가 펼쳐진다. 서울시극단에서는 9∼20일 세종M씨어터에서 세계적인 ‘자크 르콕 국제 연극학교’ 최초의 동양인 교수 유진우씨의 연출로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를 공연한다. 프랑스 국민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3번째 서울 공연이 18일∼다음달 2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펼쳐진다. 한국의 대표적 안무가 제임스 전의 참신하고 기발한 해석이 돋보이는 서울 발레 시어터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11∼13일 서울열린극장 무대에 오른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은 오는 24일 오후 7시30분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크리스티안 슐츠의 객원 지휘로 펼쳐지는 ‘신년음악회’를 연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아이만 무사하자예바와 첼리스트 여미혜 등이 출연, 요한스트라우스 2세의 ‘박쥐’ 서곡 등을 들려준다. ●무자년 아침 힘찬 ‘희망의 함성´ 1일 오전 7시47분 서울 광진구 아차산에서는 ‘고구려 해맞이’가 열렸다. 붉은 해가 얼굴을 드러내자 고구려 장군 복장을 한 정송학 광진구청장이 큰 북을 힘차게 울리면서 주민들의 함성이 터졌다. 김현풍 강북구청장은 우이동 ‘삼각산’ 시단봉에서 신년기원제례를 지내고 기원문 등을 낭독하는 행사를 가졌다. 관광객 20만여명이 몰린 강원 강릉 경포해수욕장과 정동진에서는 해맞이 콘서트가 열렸다. 이어 ‘진또빼기(솟대)’소원 빌기, 희망 풍선 날리기, 연날리기 등도 펼쳐졌다. 동해안 최북단 고성 통일전망대와 화진포에서는 ‘평화기원 난타공연’이 새해 행사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한반도에서 일출이 가장 빠른 울산 울주군 서생면 간절곶 등대에서는 관광객 4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맹우 울산시장 등 2008명이 태양을 향해 일제히 국궁을 쏘아 올렸다. 이어 시내 곳곳에서 대북공연, 가수 공연, 소망지 걸기 등 행사가 열렸다. 반면 기름유출 피해로 시름을 앓고 있는 충남 태안의 백화산 정상 등에서는 올 한해의 무사평안을 기원하는 제천제를 열고 경건한 하루를 보내면서 다른 지역과 대조를 보였다. 전국종합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지자체 새해 주민축제 풍성

    지자체 새해 주민축제 풍성

    무자년(戊子年) 새해를 맞아 각 지방자치단체는 다채로운 주민참여 행사를 마련했다.1일 첫날부터 전국 곳곳에서는 눈길을 끄는 해맞이 행사가 펼쳐졌다. 지난 연말의 대선에 이어 다가오는 총선 등으로 어수선한 민심을 추스르고 올해는 좋은 일이 더 많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민심 추스르는 문화행사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가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은 2일 오후 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2008 신년음악회’를 연다.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4번 등 감미로운 선율을 들려준다. 이달 말까지 서울대공원에서는 12간지 신년 운세, 별자리 운세 등을 점치고 꿈과 희망을 적은 ‘소원지’를 나무에 거는 행사도 한다.7∼20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스케이트장 옆에서는 ‘얼음조각축제’가 펼쳐진다. 서울시극단에서는 9∼20일 세종M씨어터에서 세계적인 ‘자크 르콕 국제 연극학교’ 최초의 동양인 교수 유진우씨의 연출로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를 공연한다. 부산시립교향악단은 오는 24일 오후 7시30분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크리스티안 슐츠의 객원 지휘로 펼쳐지는 ‘신년 음악회’를 연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아이만 무사하자예바와 첼리스트 여미혜 등이 출연,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 서곡 등을 들려준다. 18∼19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는 가족 뮤지컬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무대에 오르고,19∼20일 소극장에서는 ‘미녀와 야수’가 공연된다.13일 경기 과천시민회관에서는 체코의 민족음악을 소개하는 ‘과천시립청소년교향악단제’가 열린다. ●새해 아침부터 힘찬 함성 1일 오전 7시47분 서울 광진구 아차산에서는 ‘고구려 해맞이’가 열렸다. 붉은 해가 얼굴을 드러내자 고구려 장군 복장을 한 정송학 광진구청장이 큰 북을 힘차게 울리면서 주민들의 함성이 터졌다. 김현풍 강북구청장은 우이동 ‘삼각산’ 시단봉에서 신년 기원제례를 지내고 기원문 등을 낭독하는 행사를 가졌다. 관광객 20만여명이 몰린 강원 강릉 경포해수욕장과 정동진에서는 해맞이 콘서트가 열렸다. 이어 ‘진또빼기(솟대)’ 소원 빌기, 희망 풍선 날리기, 연날리기 등도 펼쳐졌다. 동해안 최북단 고성 통일전망대와 화진포에서는 ‘평화기원 난타 공연’이 새해 행사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한반도에서 일출이 가장 빠른 울산 울주군 서생면 간절곶 등대에서는 관광객 4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맹우 울산시장 등 2008명이 태양을 향해 일제히 국궁을 쏘아 올렸다. 이어 시내 곳곳에서 대북공연, 가수 공연, 소망지 걸기 등 행사가 열렸다. 반면 기름유출 피해로 시름을 앓고 있는 충남 태안의 백화산 정상 등에서는 올 한해의 무사 평안을 기원하는 제천제를 열고 경건한 하루를 보내면서 다른 지역과 대조를 보였다. 전국종합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Seoul In] 대학로서 은하수 축제 개최

    강북구(구청장 김현풍) 내년 1월1일 오전 7시 삼각산 시단봉에서 구민 2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2008 삼각산 해맞이’를 연다. 옛날부터 서울의 진산(鎭山)이자 종산(宗山)으로 추앙받는 삼각산에서 한 해의 평안과 행복을 비는 자리다. 오전 6시 우이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출발,1시간 정도 등산하면 시단봉에 도착한다. 이날 일출시간은 오전 7시 47분. 자치행정과 901-2041.
  • [인사]

    ■ 보건복지부 ◇서기관 승진 △정책홍보관리실 기획조정팀 김문식△사회복지정책본부 사회서비스개발팀 유주헌△보건의료정책본부 건강투자기획팀 손영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 ◇부이사관 승진△중앙지역팀장 柳日燁◇서기관 승진△홍보지원팀 全蘭慶△회의운영팀 金安那■ 교육인적자원부 ◇승진 (3급)△대학구조개혁팀장 강영순△혁신인사기획관 윤인재△시설기획담당관 김기남(4급)△감사관실 박인상△정책홍보관리관실 김두용△국제교육정보화국 심민철 이선희◇전입△인적자원정책본부 류민수■ 통일부 ◇전보 △남북회담본부장 洪在亨△남북회담본부 상근회담대표 尹正遠△개성공단사업지원단장 金泳卓■ 국방부 ◇국장급 전보 △삼청교육피해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보상지원단장 朴忠信■ 행정자치부 ◇부이사관 전보 △한국정보사회진흥원 劉恩淑◇팀장급 전보△개인정보보호팀장 金楨璂△정보자원관리〃 申炳大△교육운영〃 崔洛英△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홍보협력〃 李亨馥△이북5도위원회 평안북도 사무국장 申東本◇서기관 파견△국무조정실(제주특별자치도지원위원회사무처) 朴仁用△보건복지부(저출산고령사회정책본부) 朴基烈△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金銀玉△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沈寧哉△거창사건등처리지원단 朴孝錫△자치경찰제실무추진단 孔範錫△한국지역진흥재단 李敬載■ 통계청 ◇전보 △경제통계국 분석통계과장 金泳魯■ 한전원자력연료 △기술연구원장 박종률△튜브사업단장 정선교△기획처장 정승철△관리〃 황영하△인력개발〃 안태운△튜브사업단 튜브관리실장 홍증표△〃 튜브생산〃 박찬현△세라믹처장 이범재△신연료연구실장 전경락△설계연구〃 이상종△사업처장 김희재△노심설계〃 정일섭△안전해석〃 황순택■ 피닉스자산운용 ◇신규 선임 △법인영업본부 부사장 김영은■ 현대백화점그룹 (현대백화점)△전무 김인권 소병걸 이동호△상무(갑) 김병우 김영태 오중희△상무(을) 강찬석 김동성 김형종 박동운 박홍진 서성호 장호진 최관웅△상무보 김명식 임진현 이성희 홍병옥 황해연 (현대H&S)△전무 오흥용△상무(을) 이하영△상무보 이필선 (현대홈쇼핑)△상무(갑) 연순모△상무(을) 황병국△상무보 김규진 (HCN)△대표이사 전무 강대관△상무보 유정석 박보영 (현대푸드시스템)△상무(갑) 김인영 (현대F&G)△상무(을) 정종원■ SK증권 ◇부사장 승진 △자산관리사업부문장 李明振 ◇상무 승진△영남지역본부장 金潤植△자산운용〃 田祐宗△종합기획실장 柳定年■ SK에너지 ◇부문장 승진 △경영지원부문장 한치우◇임원 선임△R&M 에너지·환경담당 김종수△R&M 폴리머공장장 박현상△R&M 울산CLX 부문장실장 이재환△R&M 카라이프사업부장 김도성△R&C 폴리머사업부장 임종헌△R&C 화학사업기획담당 김경배△R&C 미국휴스턴지사장 최동수△P&T 석유랩장 조인호△CMS SKMS실천담당 하창현△CMS 윤리경영담당 장석수■ LG텔레콤 ◇상무 승진 △영업1부문 강북사업부 朴詳薰△기술부문 기술전략담당 權浚赫△비즈니스개발부문 컨버전스〃 閔鷹埈△경영진단〃 李鐘洙◇상무 전보△비즈니스개발부문 마케팅전략담당 李承一△사업지원부문 홍보〃 柳洹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병자호란 다시 읽기] (49)우여곡절 속 후금과의 관계

    정묘호란 직후 조선은 후금에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모문룡을 비롯한 한인(漢人)들의 비방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후금 사자에 대한 접대나 그들과의 무역에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후금과의 우호 관계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이 후금을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는 한 ‘내키지 않는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파열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후금, 병력 철수하고 조선과 사신교환 정묘호란이 끝난 뒤에도 의주 등지에 병력을 주둔시켰던 후금은 1627년 9월경부터 병력을 철수시켰다. 두 나라의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당시 조선과 후금은 정기적으로 사신을 교환했다. 인조는 신료들에게 호차(胡差·후금 사신에 대한 멸칭)들을 우대하여 환심을 잃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후금 또한 호란 직후에는 조선에 매우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 때문에 심양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의 후금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었다.1627년 5월 심양에서 돌아온 원창군(原昌君) 일행은 인조를 만난 자리에서 ‘후금 사람들이 매우 친절했다.’고 보고했다. 인조가 홍타이지와 후금 신료들의 인물됨을 묻자, 호행관(護行官) 이홍망(李弘望) 등은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라고 칭찬했다. 인조의 우호적인 태도는 후금 사신들을 접견할 때 잘 나타났다.1627년 5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 용골대는 인조를 만났을 때 ‘전하께서는 극진하게 대우하시는데 관리들이 삼가지 않는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조선 관리들이 그를 인조에게 인도하면서, 대궐 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게 하고 인도자도 없이 한참 걷도록 만든 것이 불만이었다. 인조는 즉각 사과하고 용골대 등이 나갈 때 어로(御路)에서 말을 타고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당시 봉산(鳳山)에 살던 백성 박응립(朴應立)과 황하수(黃河水)가 서울로 올라가던 용골대 일행을 가리키며 ‘죽여야 한다.’고 소리친 사건이 있었다. 용골대 일행이 불만을 터뜨리자 조정은 봉산에 이문(移文)하여 곧바로 그들을 붙잡아 하옥시키고 후금 사신 일행의 경호를 강화하는 조처를 취했다. 비변사 신료들은 ‘호인들과 기미(羈)하기로 작정한 이상 원하는 물품을 많이 주어 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와 신료들을 막론하고 정묘호란 직후 후금을 대하는 조선의 자세는 유연했다. 그런데 병자호란 무렵이 되면 이 같은 유연함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開市에 대한 후금의 열망 정묘호란 직후 후금이 조선에 가장 강하게 바라던 것은 무역이었다. 그들은 시장을 열어 쌀을 공급해 달라고 간청했다. 쌀뿐만이 아니었다. 생필품과 사치품을 막론하고 후금이 요구하는 물품은 참으로 다양했다.1628년 1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들은 홍시와 대추, 알밤 등 과일과 약재 등을 요구했다. 중국산 비단과 청포(靑布), 일본에서 들여오는 후추를 비롯하여 단목(丹木), 칼과 창 등도 그들의 관심 품목이었다. 명과 적대 관계가 지속되면서 과거와 달리 만주 지역으로 몰려오던 중국 상인들이 끊겨 버린 상황에서 후금이 원하는 물품을 공급해 줄 나라는 조선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일단 교역의 문을 열어줄 경우, 후금 측의 요구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김상헌을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특히 중국산 물화를 후금 상인들에게 파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하찮은 오랑캐에게 천조(天朝)의 물품을 넘겨주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1627년 12월 심양에 갔던 회답사(回答使) 박난영(朴蘭英) 일행은, 중강(中江)에서 속히 시장을 열어 교역하자는 후금 측의 재촉에 시달려야 했다. 박난영은 ‘전쟁 때문에 평안도와 황해도가 극히 피폐해졌다.’는 것,‘명나라 산 물자는 조선이 구하기 어렵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지만 후금 측은 집요했다. 후금 측은 ‘조선과 후금이 이미 한집안이 되었으니 어려움을 서로 구제해야 한다.’며 ‘모문룡은 값도 치르지 않고 조선으로부터 쌀을 공짜로 빼앗았지만 우리들은 정당하게 값을 치르고 사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라며 회답사 일행을 압박했다. 조선 측은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이후 쌀과 과일, 약재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산 물품 등도 후금 측에 공급했다. 중국산 물품은 가도를 통해, 일본산 물품은 왜관을 통해 입수되었다. 당시 가도에는 명의 강남 등지로부터 수많은 상선들이 모여들었다. 조선 상인들은 은이나 인삼을 갖고 가도로 가서 비단과 청포 등을 구입하여 그것을 다시 후금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사실상 후금에 중국과 일본산 물자를 공급하는 중개자 역할을 했던 셈이다. 조선은 또한 후금과의 개시를 통해 피로인(被擄人)들을 속환(贖還)하려고 시도했다. 피로인이란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에 사로잡혀 끌려갔던 포로들을 말한다. 호란 당시 무방비 상태였던 서북 지방에서는 엄청난 수의 포로가 생겨났다.1627년 5월 평안도 평양, 강동(江東), 삼등(三登), 순안(順安), 숙천(肅川), 함종(咸從) 등 여섯 고을에서 파악된 포로 숫자만 4986명이었다. 같은 해 6월의 기록에 따르면 심양에서 도망쳐 오는 포로의 숫자가 매일 40명에서 50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였다. 이것을 토대로 계산하면 당시 후금군에 끌려간 피로인의 수는 최소 수만 명을 넘는 수준이었다. 조선은 개시에서 후금 측에 쌀을 공급하는 대가로 피로인들을 넘겨받고자 했던 것이다. ●피로인 송환 등 둘러싸고 분열양상 1628년 2월 후금 측은 개시가 열린 중강에 200여명의 피로인을 데리고 왔다. 그들 가운데 조선에서 우선적으로 속환하려 했던 사람들은 귀의할 수 있는 부모나 형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포로들의 몸값을 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개시 장소에 왔던 200여명 가운데 70명 정도만 가족 품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얻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후금 상인들은 자신들이 어렵게 데려온 피로인들을 모두 구입해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고국 귀환을 애타게 고대하고 왔다가 후금 병사들에게 이끌려 도로 심양으로 돌아가는 피로인들은 조선 국경 쪽을 쳐다보며 통곡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후금과의 개시는 유지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파열음을 냈다. 우선 개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이 사뭇 달랐다. 조선은 봄가을 두 차례 개시할 것을 원했다. 후금 측은 봄, 여름, 가을 세 번을 정기적으로 하되 필요하면 제한을 두지 말자고 맞섰다. 그들은 중강 이외에 함경도의 회령에서도 개시하자고 요구했다. 개시할 때 후금 측이 데리고 오는 인원의 숫자도 문제였다. 1628년 2월 중강에서 개시할 때 용골대 일행은 자그마치 1300명의 인원을 데리고 왔다.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마초는 전부 조선 측의 몫이었다. 조선은 부담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측이 문제를 제기하자 후금 측은 조선과 명의 전례를 들고 나왔다.‘과거 조선이 명과 개시할 때는 소와 돼지까지 증여했는데 우리에게는 식량과 마초만 주는데 무엇이 부담스러우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선이 계속 식량 공급을 거부하면 서울로 올라가서 소 몇 백 마리와 군사들이 한 달 먹을 식량을 얻어 내고야 말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은 결국 용골대 일행에게 쌀 2000섬을 그냥 주기로 약속했다. 후금에서 도망쳐 온 피로인들을 송환하는 문제도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후금은 수시로 조선에 국서를 보내 조선이 고의로 피로인들을 숨겨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피로인들을 ‘피 흘려 얻은 대가’로 여겨 송환을 요구하는 후금과 ‘살겠다고 도망 온 혈육’을 송환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조선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양국 관계는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Local] 대구 약수터 대부분 식수 부적합

    대구지역 약수터 11곳 중 8곳이 식수 사용에 부적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시는 지난달 하루 50인 이상이 이용하는 약수터에 대한 오염도를 조사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5일 밝혔다. 시는 이번 조사에서는 달서구 3곳, 남구 5곳, 동구 2곳, 달성군 1곳 등 약수터 11곳에 대해 4개 항목의 미생물검사와 13개 항목의 이화학적 검사를 실시했다. 검사결과 원기사, 고산골ⅠㆍⅢ, 대덕사, 안일사, 동화사Ⅰ 등 약수터 6곳은 미생물 기준인 총대장균군이 기준치를 초과했다. 또 고산골Ⅳ 약수터는 탁도 기준치를 넘었고, 매자골Ⅲ 약수터는 총대장균군과 탁도의 기준치를 모두 넘었다. 그러나 평안동산과 동화사Ⅱ, 대림생수 등 약수터 3곳은 식수 사용에 적합한 것으로 조사됐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부고] 북한연구가 김창순씨 별세

    [부고] 북한연구가 김창순씨 별세

    대표적인 1세대 북한 연구가인 김창순 북한연구소 이사장이 3일 오후 7시34분께 숙환으로 별세했다.88세. 고인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광복 후 북한에서 평북신보사와 평북인민보사 주필, 신의주 동방사회과학연구소장, 북조선기자동맹 창립중앙위원, 민주조선사 총무국장 등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 1949년 평양특별검찰소에 의해 검거됐으나 이듬해 이송 중 탈출, 월남했다. 이후 북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내외문제연구소 초대 소장,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특별연구원, 북한연구소 이사장, 내외통신 이사장, 북한학회 부회장,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 한국통일문화진흥회의 부회장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진용주씨와 딸 경희씨 등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발인은 5일 오전8시,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02)3010-2294
  •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48)가도 정벌이 유야무야되다

    가도 정벌 방침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자 신료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병조판서 이귀가 나섰다. 그는 ‘주장(主將) 진계성을 함부로 살해한 유흥치를 토벌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바다 건너 정벌하는 데 한 달 이상 걸리고, 중국 조정과 상의하지 않을 경우 의심을 살 우려가 있다.’며 재고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노기 띤 목소리로 “이 자리는 반역자 토벌을 논의하는 자리지 군대 해산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이귀의 주장을 일축했다. 유흥치의 반란을 응징하겠다는 인조의 결의는 확고해 보였다. ●인조의 토벌 강박증 이귀는 다시 ‘훈련도 안 된 병력을 하루아침에 멀리 보내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자 인조는 ‘병조판서가 그렇게 말하면 병사들의 맥이 풀린다.’며 계속 반대할 경우 처벌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군법으로 처벌하려 한다면 기꺼이 죽을 것’이라며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둔 자신의 충고를 받아달라고 촉구했다. 이귀가 ‘죽음’ 운운하자 인조는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고 회의를 파해버렸다. 1630년 4월27일에도 인조와 신료들 사이의 갑론을박은 지속되었다. 이정구(李廷龜)는 먼저 황제에게 주문(奏聞)한 뒤 성지(聖旨)를 받들어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는 배반한 적은 누구나 토벌할 수 있는 것이라며 명 조정에서 회답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했다. 인조가 워낙 강하게 나오자 신료들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끼리 비변사(備邊司)에 모여 회의할 때는 출병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이었던 신료들도 인조 면전에서는 태도가 달라졌다. 최명길은 ‘비변사에 있을 때는 반대하다가 주상 앞에서는 순종하기에만 급급하니 신하의 도리가 어디로 갔냐.’며 이서와 정충신의 태도를 비판했다. 인조는 토벌에 관한 한 강박증에 걸린 것 같았다. 그는 “우리나라가 중국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맹세코 이 적을 섬멸하여 황은에 보답하고 싶다. 무기는 흉한 물건이고 전쟁은 위험한 것인데 나라고 좋아서 하겠는가?”라며 신료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김류는, 출정 날짜가 다가오는데 논의가 계속 분분하면 장수들이 동요할 것이라며 성사를 기약하려면 군법을 엄격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류가 자신에게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자 인조 또한 “의심을 품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4월28일, 이귀는 인조에게 다시 면담을 요청했다. 그는 혹시라도 불리할 경우 원한을 사서 화를 재촉할 것이니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곧 이어 홍문관과 양사(兩司)의 신료들이 나서 출정 명령을 거두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향후 망령되이 반대하는 자는 중률(重律)로 처단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곧 이어 출정을 앞두고 인사하러 온 총융사(摠戎使) 이서에게 갑주(甲胄)와 궁시(弓矢)를 하사했다. 그럼에도 병조판서 이귀가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자 인조는 그를 파직시켰다. ●토벌군의 출정과 상황의 변화 비변사는 병선 열 다섯 척을 징발하여 격졸(格卒)과 군량 등을 싣고 5월15일 이전까지 강화도 교동(喬桐) 앞 바다에 대기하도록 조처했다.4월29일에는 정벌에 즈음하여 가도의 중국인들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이 만들어졌다. “지금 역신(逆臣) 유흥치는 스스로 사사로운 불화를 조성하여 가슴에 음모를 품고 승냥이나 이리 같은 흉악한 세력을 끼고 벌이나 전갈처럼 독기를 뿜어대었다. 붙잡혀 온 달족( 族-후금 투항자)들을 불러모아 감히 반란을 일으켜 주장을 멋대로 해쳤는가 하면 통판(通判) 등과 각부(各部)에서 파견한 관리도 아울러 죽여 반역의 기운이 하늘에 닿았다.(중략) 이에 우리 전하가 한 번 크게 성내시어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본관이 나라의 명을 삼가 받들어 삼군을 이끌고 바다와 육로로 일제히 진격하며 동서에서 동시에 포위하려 하는데, 의기에 격동되어 사기가 저절로 배나 치솟고 있으니, 탄환(彈丸)만 한 너희 일개 섬이 어떻게 빠져 달아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반역의 변고가 호로(胡虜)보다 심하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유흥치를 묶어 군문 앞으로 끌고 오라.” 반란을 일으킨 유흥치 일당에 대한 토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조선군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5월 4일 인조는 도승지를 서쪽 교외로 보내, 가도를 향해 출정하는 총융사 이서와 부원수 정충신의 장도(壯途)를 축원하는 송별식을 열어 주도록 했다. 이서는 어영군 병력을 이끌고, 황해감사 이여황(李如璜), 병사(兵使) 신경인(申景)과 함께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나아가 주둔했다. 부원수 정충신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수군 병력을 이끌고 황해도 은율(殷栗)로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이렇게 가도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유흥치가 전함 49척을 이끌고 가도를 떠나 등주(登州)를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평안감사 김시양(金時讓)의 장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조정은 당황했다. 토벌의 1차 대상인 유흥치가 섬을 비웠기 때문이다. 김시양은, 유흥치가 없는 이상 가도로 진격하여 그의 심복들을 사로잡고 창고를 봉한 뒤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자고 했다. 총융사 이서는, 소굴이 비었으니 가도 공격이 무익해졌다며 아군의 대선(大船)을 숨기고 선봉을 접근시켜 유흥치를 유인해야 한다는 계책을 제시했다. 유흥치가 섬을 비우는 바람에 조선의 정벌은 자칫하면 ‘싸움을 위한 싸움’,‘공격을 위한 공격’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비변사 신료들은 인조에게 먼저 가도 사정을 철저히 정탐하라고 촉구했다. 유흥치가 병력을 이끌고 섬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명 본토를 공격할 것인지, 후금에 투항할 것인지, 요동 반도 연안의 여러 섬들을 노략질할 것인지, 명의 아문으로 가서 귀순할 것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류 또한 공격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프닝으로 끝난 토벌 분위기가 바뀔 조짐을 보이자 인조가 다시 선을 그었다. 그는 ‘유흥치가 우리의 공격 기미를 눈치채고 일단 섬들 사이로 피했다가 우리의 자세가 해이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가도로 들어가 그 심복들을 죽인 뒤 병력을 선천과 철산 사이에 주둔시키라고 지시했다. 또 이서에게도 밀서를 보내 섬을 반드시 토벌하고 항복한 달족들을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가도에 대한 공격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던 6월, 후금 사신 일행이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조선이 여전히 가도에 쌀을 공급하고 있다고 힐책하고, 과거 자신들이 무역했던 청포(靑布)를 유흥치에게 빼앗겼다며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실제 의주의 압록강 건너편에서는 후금군 3000명이 청포를 내놓으라고 무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참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가도 정벌에 신경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가도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벌을 그만두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졌다. 토벌군 병력들은 한창 더운 여름철에 무작정 해상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사망자가 속출하고 원성이 터져나왔다. 1630년 6월28일, 부원수 정충신은 조정에 보낸 장계에서 군사를 파하라고 촉구했다. 일선 지휘관으로부터 파병(罷兵) 의견이 제시되자 비변사 신료들은 속히 정벌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오직 김류만이 토벌을 중지하는 데 반대했다. 인조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을 때 최명길이 나섰다. 그는 ‘해상에서 노숙하느라 지쳐 쓰러진 병사들이 많은데 장수들은 그들이 도망갈까 염려하여 상륙을 금지하고 있다.’며 현지 상황을 전했다. 놀란 인조는 결국 수군만 남기고 육군은 철수시키라고 지시했다. 가도 정벌 시도가 결국 유야무야 되는 순간이었다. 나라 안팎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전후의 맥락을 제대로 헤아려 보지 않고 내렸던 인조의 ‘결단’이 해프닝으로 끝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영재들의 두뇌활동 7가지 습관

    뇌(腦)교육 전문지인 ‘브레인’(www.brainmedia.co.kr)은 최근 창간 1주년을 맞아 국내 유일의 영재교육기관인 한국과학영재고 전교생을 대상으로 두뇌활용에 대한 설문을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영재들의 7가지 두뇌활용 습관’을 제시했다. ●명상이나 산책 등을 통해 뇌의 상태를 평온하게 만든다. 마음을 평온히 유지하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는 중요한 습관이다. 집중이 안 되거나 현 상태에서 무언가 변화를 주고 싶을 때 명상이나 호흡, 산책 등은 자신의 뇌 상태를 평안하게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집중이 안되면 빠르게 뇌 상태를 바꾼다. 현재 상태가 문제 있을 때 가장 좋은 것은 시간과 공간을 달리 하거나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뇌가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면 뇌에 신선한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영재고 학생들은 집중이 안 될 때 숙면을 취하거나 명상, 음악, 운동, 게임 등을 통해 기존의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고 있었는데, 훌륭한 두뇌 활용 습관이다. ●적절한 운동을 통해 뇌를 건강하게 한다. 체력 관리는 뇌를 맑게 유지하는 기본이 된다. 영재고 학생 10명 가운데 8명이 간단한 스트레칭부터 구기 운동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었다. 육체를 움직이면 두뇌활동을 원활히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예습보다 복습에 더 집중한다. 미리 하는 것보다 뇌 속의 정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영재고 학생 10명 중 8명은 복습이 예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을 땐 부족한 것에 집중한다.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정된 시간이 주어질 때 잘 하는 것보다는 부족한 것에 집중한다. 시간 대비 효과나 자신감 측면을 고려했을 때 다소 부족한 것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꾸준한 독서로 다양한 지식을 뇌에 공급한다. 교과서나 학습지 외에 다양한 독서를 통해 색다른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두뇌의 유연성을 확대하고 새로움에 대한 뇌 기능 발달에도 효과적이다. ●중요한 날 전에는 충분한 휴식으로 뇌를 편안하게 한다. 뇌가 긴장하면 뇌 기능이 쉽사리 발현되지 않는다. 중요한 날 전에는 뇌를 평안한 상태로 두거나 정리한 내용을 위주로 체크하는 것이 뇌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는데 좋다. 정리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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