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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미, 北지역 유해 공동발굴 합의 가능성

    북한과 미국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이번 2차 정상회담에서 북한 지역에 묻힌 6·25전쟁 미군 전사자 공동 유해발굴에 합의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27일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미군 유해송환 문제가 다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미가 공동 유해발굴에 합의하면 2005년 이후 14년 만에 유해발굴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북미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주요 격전지였던 함경남도 장진읍과 신흥리, 평안북도 운산군과 구장읍, 계천시 등지에서 공동 유해발굴을 진행하며 모두 229구의 미군 유해를 수습하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군 유해송환에 합의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이 제재 완화와 맞물려 유해송환 문제를 더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며 “유해송환 문제는 제재의 틀은 유지하면서도 북한의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미국은 1990~2007년 미군 유해발굴 비용으로 북한에 유해 1구당 5만 691달러 등 총 2200만 달러를 지불한 바 있다. 북미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공동 유해발굴에 합의하면 미국 장비의 대북 반입과 미 정부의 발굴비용 지불 등을 위한 대북 제재 예외 인정도 무난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북미 정상회담서 ‘미군 공동 유해발굴’ 합의 가능성

    북미 정상회담서 ‘미군 공동 유해발굴’ 합의 가능성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갖는 2차 정상회담에서 북한 지역에 묻힌 미군 6·25전쟁 전사자 유해를 공동 발굴하기로 합의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27일 알려졌다. 한국 정부의 한 소식통은 “싱가포르 1차 북미정상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도 미군 유해송환 문제가 다뤄질 것”이라고 연합뉴스에 밝혔다.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미군 유해송환에 합의한 바 있다. 당시 발표된 북미 공동성명 제4항에는 ‘북미는 신원이 이미 확인된 전쟁포로, 전쟁실종자들의 유해를 즉각 송환하는 것을 포함해 전쟁포로, 전쟁실종자들의 유해 수습을 약속한다’고 명시됐다. 이에 따라 지난해 7월 27일 미군 유해 55구가 미군 수송기로 북한 원산에서 오산 주한미군 기지로 송환됐다. 이번 2차 북미정상회담에선 북한이 수습한 미군 유해를 송환하는 것에서 나아가 북한과 미국이 북한 지역에서 공동으로 유해발굴 사업을 하는데 양측이 합의할 가능성이 있다. 북미는 이미 작년 여름부터 ‘유엔사-북한군’ 채널을 통해 북한이 보유한 미군 유해의 추가 송환은 물론 북미 공동유해발굴 사업을 논의해왔다. 지난해 하반기 북미 비핵화 대화가 답보 상태에 빠지면서 북미 공동유해발굴 협상도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이번 2차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공동유해발굴 사업이 급물살을 탈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에도 북미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 함경남도 장진읍과 신흥리, 평안북도 운산군과 구장읍, 계천시 등지에서 공동으로 미군 유해를 발굴해 본국으로 송환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이 시기 북미 공동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229구의 미군 유해가 수습돼 미국으로 보내졌다. 북미가 이번에 공동유해발굴 사업에 합의한다면 미국 장비의 대북 반입과 미 정부의 발굴비용 지불 등을 위한 대북제재 예외 인정이 필요하다. 과거 미국은 1990~2007년까지 미군 유해발굴 비용으로 북한에 총 2200만 달러, 유해 1구당 5만 691달러(5620만원)를 지불한 바 있다. 북측도 작년 7월 미군 유해 55구를 송환할 때는 비용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송환되는 미군 유해에 대해서는 미측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측은 북한 내 장진호 전투 지역(1024구)과 운산·청천 전투 지역(1495구), 비무장지대(1000구) 등 6·25 전쟁 주요 격전지와 전쟁포로 수용소 소재지(1200구) 등에 모두 5000여구의 미군 유해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3·1운동 100년] 100년 전 촛불혁명… 평범한 민초들이 독립만세 외쳤다

    [3·1운동 100년] 100년 전 촛불혁명… 평범한 민초들이 독립만세 외쳤다

    “우리는 지금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이라는 점을 선언한다.”(3·1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손병희(1861~1922)와 이승훈(1864~1930), 한용운(1879~1944) 등 29명이 경성(서울)의 유명 요리집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으로 모였다. 이갑성(1889~1981)은 조선총독부에 사람을 보내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종일(1858~1925)은 참석자들에게 독립선언서 100여장을 펼쳐 보였다. 한용운이 만세 삼창을 하고 독립선언을 마치자 출동한 경찰들이 민족대표들을 모두 체포했다. 이처럼 3·1운동은 대부분 민족대표 33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이 조선 독립 혁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3월 1일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수개월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동자와 학생, 기생 등 평범한 조선의 민초들에게 이념이나 귀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이들이야말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서울 만세시위 3만명 참가… 평양서도 수천명 “만인이 죽더라도 백만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을 불사하겠소.”(만세열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인쇄소 직원 인종익이 경찰 조사에서 한 말이다. 이처럼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고 3월 1일 만세 시위를 알린 것은 인종익과 같은 민중이었다. 독립선언서는 2월 11일 기초가 완성돼 20일부터 이종일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2월 28일부터 함경남도 원산, 전라북도 군산,황해도 해주, 평안북도 평양, 경기도 개성 등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3월 1일 새벽 경성에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집회가 열릴 것’이라는 벽보가 거리 곳곳에 붙었다. 중학생들은 시위가 예정된 오후 2시에 맞춰 학교에서 파고다공원으로 모였다. 이들은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고 행인에게도 배포했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을 하고 있을 때 인근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대문통(중구 남대문로)과 의주통(종로구 의주로)을 거쳐 미국영사관, 대한문으로 거리 행진을 했다. 당시 일제 헌병 자료에는 “시위에 모인 사람이 3000~4000명”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판결문 등에는 “파고다공원 앞 군중 5000”이라는 표현이 나온다.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해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시위대는 파고다공원 앞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가 만세를 외치고 독립 연설을 시작했다. 다른 시위대는 미국총영사관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경성우편국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고 의주통에 있는 프랑스영사관에서는 영사관 직원에게 조선 독립이 가능한지를 묻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방향으로 가던 3000명 정도의 시위대는 본정통(중구 충무로)에서 행진이 막혔다. 일제가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6시 30분쯤 마포 전차 종점 시위를 마지막으로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잠잠해졌다. 질서 정연하게 행진한 평화 시위였다. 경찰서나 각국 영사관 앞에 멈춰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보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날 서울의 만세 시위에 약 3만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3월 1일 서울 시위 참가자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일제 군경의 개람표에는 4000명, 일람표에는 1만명으로 기록돼 있다. 헌병대에서 작성한 문서에는 “종로의 3000~4000명의 학생에 군중이 함께해 수만에 이르렀다”고 기술돼 있고, “이날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십만에 달한다”고도 적혀 있다. 일제는 이날 시위에 참가하거나 인쇄물을 배포한 주동자 134명을 체포했다.이날 만세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DB)에 따르면 3월 1일 하루에만 전국에서 22건의 단체행동(시위·휴학·휴교·파업)이 있었다. 함경남도 원산과 평안북도 선천, 평안남도 평양·안주·진남포, 경기도 개성 등에서 5만 2000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평양에서는 2000~5000명이 만세 시위에 참석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총에 맞아 부상당한 이들 가운데 최소 5명이 병원에서 숨졌지만 일제의 명령으로 사인을 총상으로 기재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독립가를 불렀다. 일제 소방대원들은 시위대에 물을 쏘고 갈고리를 휘둘렀다. 부상자가 나오자 분노한 시민들이 돌을 던졌다. 평양에서만 112명이 검거됐다. ●수개월 1700여건 단체행동에 103만여명 3·1운동은 단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민중은 단체행동(시위·휴학·휴교·파업)을 이어 갔다. 2일에도 전국적으로 13건이 발생했고, 3일(42건), 4일(23건)에도 계속됐다. 3월 4일 늦은 밤. 서울 시내 각지에 ‘경고 이천만 동포’라는 문서가 붙었다. 5일 남대문 부근에서 시위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5일 오전 8시 남대문역 앞에서 학생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1만여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학생과 시민은 붉은 수건을 팔에 두르거나 구한국기(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대문시장과 조선은행, 종로 보신각으로 행진했다. 대한문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 수백명이 체포됐다. 부상자도 속출했다. 저항의 방법은 시위만이 아니었다. 3월 1일부터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 관립, 공립, 사립학교와 전문학교 학생 다수가 학교에 출석하지 않고 동맹휴교에 나섰다. 또 서울의 전차 차장과 운전수는 3월 8일 오후부터 3월 10일 자정까지 동맹파업을 했다. 학생들은 휴학이나 휴교로,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일제의 폭거에 맞섰다. 3월 한 달(3월 1일 제외)간 민중의 단체행동 1025건, 참여 인원 66만 1311명이었다. 4월에도 저항은 이어졌다. 4월 한 달간 651건의 단체행동에 모두 31만 4778명이 참여했다. 3·1운동 기간 전체로 보면 시위·휴학·휴교·파업 1732건에 모두 103만여명이 참여했다. “조선 사람이니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이오.” 3월 5일 서울에서 벌어진 학생 주도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 학생 강기덕(1886~?)은 왜 독립 운동을 하려고 했는지를 묻는 검사의 심문에 이렇게 답했다. 민중이 3·1운동에 참여한 이유 역시 강기덕과 다르지 않았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3·1운동을 비롯해 독립 운동 관련 판결문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농민과 학생, 노동자”라고 설명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지도 세력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바로 민초 자신들”이라며 “몇 달간 1000회가 넘는 시위를 지속적으로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이들의 헌신 덕분”이라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강한 경제·감동 행정·찬란한 문화… 강감찬 관악구청장 될 것”

    “강한 경제·감동 행정·찬란한 문화… 강감찬 관악구청장 될 것”

    관악 출신 강감찬 삼행시로 각오 다져 귀주대첩 1000주년 남북 교류 축제 구상 청년 비율 1위…일터·삶터 기반 갖출 것 낙성벤처밸리 앵커시설 연내 완성 목표 시비 79억원 들여 도시농업공원 조성도“관악은 청년 인구 비율이 전국 1위인 ‘청년 도시’입니다. 미래의 주역인 청년들이 삶과 꿈을 공유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 ‘청년 특구’로 거듭나려 합니다. 올해 첫선을 보이는 ‘남북 미래 청년 아카데미’를 통해서는 남북이 서로 왕래할 앞으로의 시대에 대비해 상호 발전 방안을 모색해 나가겠습니다.” 박준희 서울 관악구청장이 이끄는 민선 7기 관악구의 화두는 ‘청년’과 ‘경제’다. 청년 인구 비율이 39.5%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만큼 청년들이 관악을 삶터이자 일터로 삼아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게 목표다. 또 청년과 서울대라는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베드타운’ 중심인 지역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게 민선 7기 마스터플랜의 주요 뼈대다. 22일 서울신문과 만난 박 구청장은 “올해는 특히 낙성벤처밸리 앵커시설을 오는 12월 완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낙성대 일대를 우리 경제를 이끄는 창조적인 벤처밸리로 키워내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치인(시의원)에서 행정가로 업을 바꾼 지 6개월이 지났다. 소감과 민선 7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각오는. -지난 6개월이 씨를 뿌리고 결실을 담기 위한 바구니, 즉 구정 운영의 틀을 짜는 시기였다면 올해는 민선 7기 계획들을 성과로 이어가며 결과물을 하나씩 채워가는 ‘원년’으로 만들려 한다. 특히 신년사에서 밝혔듯이 올해는 지역 경제 살리는 일에 모든 행정력을 집중할 예정이다. 이 때문에 요즘 스스로 ‘강감찬 구청장, 박준희’라고 소개하고 다닌다. 민선 7기 관악구를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관악에서 태어나고 자란 강감찬 장군의 함자를 빌려 삼행시로 엮은 것이다. 강, 강한 경제를 구축하고 감, 감동을 주는 행정으로 찬,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관악 공동체를 임기 내 반드시 실현시키겠다.→지난해 11월 구청 로비에 문을 연 열린 구청장실, 관악청은 구민 목소리를 듣는 창구로 기대만큼 역할 하나. -관악청은 구민과 소통, 협치를 핵심 가치로 하는 민선 7기의 공약 1호가 처음 실현된 것이라 의미가 크다. 매주 목요일 오후 2~5시 관악청에 내려가 현장 집무를 보는 데 지금까지 열한 차례, 58명의 주민을 만나 84건의 면담을 진행했다. 지난해 구정 성과로도 꼽을 수 있을 만큼 많은 구민들이 찾아오셔서 정책을 제안해주시고 직원과 협의 끝에 실제로 민원이 해결된 사례도 나오고 있다. 한 예로 지난해 11월 말 심부전증을 앓는 60대 남성 분이 ‘제발 살려달라’고 찾아오셨다. 심부전증뿐 아니라 하지정맥류로 고통받는데 기초생활수급자이시라 치료비가 없다고 도움을 요청하셨다. 이 얘기를 듣고 상황이 절박하다는 판단이 들어 300만원 이내의 긴급복지 의료비를 지원해주고 이를 초과하는 치료비에 대해선 후원으로 연계해주도록 지시한 바 있다. 관악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아닌가. 한 번에 3시간씩 현장 집무를 보는 게 쉽지는 않지만 주민들의 을 구정에 적극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크다.→민선 7기 주요 사업 가운데 올해 가장 주력하는 사안은.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첨단산업 시설, 낙성벤처밸리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관악구보훈회관 건물에 조성할 앵커시설은 이미 입면도가 나왔다. 낙성벤처밸리 조성의 기반이 될 앵커시설은 벤처기업의 유치와 안착,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할 것이다. 현재 설계 용역 중으로 올해 20억원을 투입해 연내 완성할 예정이다. 현재 보훈회관 건물에 연면적 691.6㎡,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조성될 앵커시설에는 벤처투자조합, 법률·회계 사무소 같은 지원 시설을 둔다. 또 유능한 엑셀러레이터(창업 초기 스타트업에 창업 교육, 멘토링 등을 지원해 창업 성공률을 높이는 민간 전문기관이나 기업)를 영입해 기업의 성장을 지원할 예정이다.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도시농업공원도 조성한다. -관악구 삼성동 86-6 일대에 시비 79억원을 들여 도시농업공원(1만 5000㎡)을 조성한다. 구청장이 되기 전 시의원으로 환경수자원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 기획했던 게 현실화한 것이다. 아파트 문화가 만연하며 삭막해지는 도심에 도시농업을 통해 주민들을 교류·화합의 장으로 이끌며 공동체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뛰어놀 곳 없는 아이들도 양봉체험공간, 친환경텃밭 등에서 직접 자연을 체험하며 교육·놀이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귀한 공간이 될 거다. 오는 5월에는 서울시와 공동 주관하는 도시농업박람회도 개최한다. →올해 관악에서는 대규모 축제가 여럿 열린다. 특히 귀주대첩 1000주년을 기념하는 강감찬 축제로 남북 교류도 구상하는데 가시화된 게 있나. -오는 10월 예정된 강감찬 축제는 올해가 귀주대첩 1000주년인 만큼 민선 5, 6기 때와는 달리 구민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서울시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시키려 한다. 귀주대첩의 귀주가 현재 평안북도 구성시 일대인 만큼 구성시와 교류를 추진하려 한다. 구성시 인사를 초청하거나 문화유산 교류를 진행하는 등 남북 화해 시대에 발맞춰 가능한 방안들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처리하려 한다. →구민 체육대회도 15년 만에 부활시킨다. 이유는. -구민들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화두는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까’이다. 삶의 질과 직결되는 생활 체육이 그 화두에 보탬이 될 수 있다.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은 물론 친교를 쌓아가며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 2004년 이후 15년 만에 관악구민체육대회를 여는 이유다. 오는 4월 관악구민운동장에서 2000여명의 주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축제의 장을 선보이겠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美보수, 北신오리 미사일기지 쟁점화

    1990년대 알려진 한·미 공조 감시시설 NBC, CSIS 인용해 ‘비밀 기지’로 보도 “신오리 미사일, 한·일 선제타격 위한 것” 작년 ‘삭간몰’ 이어 北 불신 분위기 조장 미국 보수 싱크탱크와 보수 언론이 국내외에 이미 알려진 북한 신오리 미사일 기지를 ‘비밀 기지’라고 주장하며 북한에 대한 불신 분위기를 조장하고 나섰다. 이는 미 보수층 특히 대북 강경 매파와 보수 언론, 여기에 한반도 평화를 반기지 않는 일부 다국적 군산복합체 등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2차 북·미 정상회담에 ‘재’를 뿌리려는 의도가 작용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미 NBC는 21일(현지시간)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산하 한반도 전문포털 ‘분단을 넘어’가 발표한 보고서를 인용, “북한이 평안북도 신오리 지역에 한 번도 존재를 알린 적이 없는 새로운 미사일 비밀기지를 운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신오리 지역을 촬영한 위성사진에 비밀 미사일기지 본부와 미사일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 훈련장, 숙소 등을 표시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17년 2월 12일 처음 시험발사한 북극성 2호(KN15) 개발에 중추적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NBC는 또 “신오리 기지에 배치된 노동미사일은 한반도 전역과 일본 열도 대부분을 핵이나 재래식 탄두로 선제 타격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CSIS 보고서와 NBC가 언급한 북한 신오리 미사일 기지는 이미 한국 언론에도 여러 차례 보도된 북한의 대표적인 미사일 기지로, 한국과 미국 정보당국이 1990년대 후반부터 주목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한국 합동참모본부는 22일 CSIS의 신오리 미사일 기지 보고서와 관련, “신오리 기지는 한·미 공조하에 감시하고 있는 시설”이라고 강조했다.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는 신오리 미사일 기지를 마치 북한이 숨겨 놓은 비밀기지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의심된다’는 CSIS나, 사실 확인 없이 이를 보도한 NBC가 ‘악의적’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CSIS는 지난해 11월에도 이미 잘 알려진 북한 삭간몰 미사일 기지를 비밀기지로 둔갑시킨 보고서를 낸 전력이 있다”면서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신오리 기지를 비밀기지로 둔갑시켰지만 보수가 아닌 미 조야에서는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백낙환 인제학원(인제대학교·백병원) 전 이사장 별세

    백낙환 인제학원(인제대학교·백병원) 전 이사장 별세

    한국 의료계의 큰 어른인 인당 백낙환 박사(92)가 7일 오전 5시 22분 서울백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92세. 1926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백병원 창립자이며 당대 최고 명의인 큰아버지 백인제 박사의 뜻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예과(서울대 의대 전신)에 진학하면서 외과의사가 됐다. 6·25 전쟁 중 백인제 박사와 아버지 백붕제 변호사가 납북되자 유산처럼 남겨진 백병원 재건을 위해 1961년 백병원 3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백병원 재건에 성공하며 1979년 부산백병원을 비롯해 1989년 상계백병원, 1999년 일산백병원, 2010년에 해운대백병원을 개원했다. 현재 전국 5개 백병원에서 3500여 병상, 연 450여만명을 진료하는 의료기관으로 발돋움했다. 1979년부터 1998년까지 백중앙의료원 의료원장과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인제대학교 총장, 2000년부터 2014년까지 학교법인 인제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며 병원과 학교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 1984년 대한병원협회 회장(22~23대)과 대한외과학회 회장(37대), 한국병원경영학회 초대 회장, 대한소화기병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의료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백 박사는 경영자뿐만 아니라 당대 외과의사로도 이름을 떨쳤다. 우리나라 최초로 소아 선천성 거대결장에 대한 ‘스완슨 수술법’, ‘골반내장전적출술’을 시행하는 등 의사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백 박사는 교육자이기도 했다. 1979년에는 큰아버지의 또 다른 꿈이었던 인제대학교도 세워 의료뿐만 아니라 교육 발전에도 앞장섰다. 인술제세·인덕제세 창립이념을 실천하며 학교법인 인제학원을 성장시키는 등 인제대학교와 백병원이 오늘에 있기까지 평생을 교육, 의료, 사회봉사에 헌신했다. 민족 선각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자 제2대 서재필선생 기념사업회 회장과 성산 장기려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거쳐 2008년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했다. 복십자후원회 및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의 대표를 맡았다. 민족정신 함양에 공헌한 공로로 1983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200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0년 보훈문화상과 제14회 부산흥사단 존경받는 인물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숙란 여사와 아들 계형, 도형(숭실대 철학과 교수), 딸 수경, 진경(인제대학교 멀티미디어학부 교수), 며느리 엄인경, 김혜경(인제대 인문문화융합학부 교수), 사위 전병철(인제대학교 나노공학부 교수)씨가 있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진행된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2월 10일 오전 9시, 장지는 천안공원묘지다. 02-2072-2011.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독립운동 뒷바라지도 독립운동···여성 독립운동 예우받길“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독립운동 뒷바라지도 독립운동···여성 독립운동 예우받길“

    임정 비서장 차이석 부인 홍매영 서훈 신청 8년만에 인정받아 백범 선생 중매로 32살차 차이석과 결혼 독립당 당원으로 광복군 임정 활동·인정 아들 영조씨 “묘소 현충원 이장이 남은 일” “2010년 2월에 어머니(홍매영 여사)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8년이나 기다렸습니다. 그간 정권이 바뀌고 여성 독립운동가도 인정받는 세상이 왔네요. 평생의 큰 소원을 이뤘습니다.” 차이석 선생(임시정부 비서장)과 홍매영 여사의 아들인 차영조(74)씨는 19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남기신 한국독립당(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차이석 선생 등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 당원증으로는 독립유공자 인정이 안 된다고 수차례 들어서 기대도 안 했는데 이번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에 드디어 인정받게 돼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의 명패도 추후 전달할 계획이다. 홍 여사는 1942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광복군의 생활과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유한책임한국광복군군관소비합작사 사원으로 재직했고 이곳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을 지원한 공이 인정됐다. 평안북도 의주에 살던 홍 여사는 남편의 제안으로 임정으로 가기 위해 나무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중 남편이 중국 국경인 단둥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연행됐다. 홍 여사는 첫 중국행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5살·2살인 두 아이를 데리고 중국 시안의 광복군 진지에 도착했다. 차씨는 “어머니는 광복군으로서 훈련을 받았고 1942년 그곳에 들렀던 백범 김구 선생의 중매로 32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것도 또 다른 독립운동’이라고 했었다고 어릴 때 어머니께 들었다”고 덧붙였다. 1944년 차씨가 태어났고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이 됐지만 차이석 선생은 귀국 준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다 9월 9일에 숨을 거뒀다. 세 아이를 데리고 1946년 귀국한 홍 여사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마련한 숙소(서울 충무로 1가 한미호텔)에서 거주하며 노상에서 불법 담배장사를 했다. 차씨는 “마약 단속하듯 단속반이 발로 차고 지나가기 일쑤였고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며 “오히려 취업 때 불이익을 받을까 광복군 경력을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가족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충남 부여로 피난을 갔다. 차씨는 “형편이 힘드니 형과 누나는 고아원으로 갔고 김구 선생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나를 차(車)씨가 아닌 신(申)씨로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며 “6학년 때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학교를 관두고 아이스크림 행상이나 술집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홍 여사는 1979년 운명했고 부여의 작은 교회 공동묘지에 묻혔다. 차씨는 “독립유공자가 됐으니 현충원으로 모시는 게 남은 일”이라며 “독립운동에 나섰던 남편을 돕고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고, 남모르게 독립투사를 위해 밥을 하고 옷을 기워준 여성도 합당한 예우를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트럼프·김정은, 고도의 밀당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열어 북·미 관계의 새 지평을 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고난도의 ‘밀당’(밀고 당기기)을 선보이고 있다. 얼핏 보면 서로 상대방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한 줄다리기 전략으로 해석되지만, 그 이면엔 각자 국내 강경파의 견제를 다독이기 위한 고도의 정치력이 발현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북·미 관계 개선을 바라지 않는 강경파들이 비핵화 회의론 내지 불신론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거나 실무협상의 동력이 꺼지려 할 때마다 두 정상이 직접 나서서 긍정론의 큰 줄기를 부각시키는 것은 톱다운(정상이 먼저 합의하고 실무진이 실행) 방식의 장점을 두 정상이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분석도 곁들여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한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우리가 택한 방향에 대해 아주 만족한다”며 비핵화 협상 회의론을 일축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해야 했던 가장 힘든 결정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북한과 거의 전쟁을 할 뻔했기에 북한 문제가 가장 힘들었다”며 “나는 우리가 북한과 관련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진정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뉴욕타임스가 북한 황해북도 삭간몰 탄도미사일 기지에 대해 ‘기만’이라고 보도한 데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보도를 믿지 않는다”며 “나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겠다”고 답했다. 한편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실무진 등을 통해서는 강경론을 설파하는 강온 양면술을 구사하고 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지난 15일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핵·미사일의 완전한 목록 제출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이 되진 않을 것이지만 정상회담에서 핵 시설·무기 사찰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나와야 한다며 북한을 압박했다. 김 위원장도 최근 강온 양면술을 구사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6일 국방과학원 시험장을 찾아 신형 첨단전술무기 시험을 지도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해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급 화성15형 발사를 지도한 후 무기 시험을 현장에서 지도한 것은 1년여 만에 처음이어서 미국 조야 일각에서 북한 불신론이 급속히 번졌다. 하지만 바로 이틀 뒤 김 위원장은 경제시설을 찾아가 서방세계 지도자들이 쓰는 어법을 구사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는 평안북도 대관유리공장을 방문, 공장 현대화를 독려하며 “세상은 빠르게 변하며 발전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 역시 북한 매체를 강경론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 대외 선전매체 ‘조선의 오늘’은 19일 “최근 미 군부 것들이 조미 협상이 교착상태에 처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최대의 압박과 관여’로 우리를 비핵화로 몰아가려는 동향을 보이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앞서 지난 8일 북·미는 뉴욕에서 고위급회담을 열기로 합의했으나 막판에 연기되면서 북·미 협상 회의론이 점증했다. 하지만 수십년에 걸친 적대관계에 비교하면, 북·미 정상이 처음 만난 지 불과 5개월밖에 안 된다는 점에서 단기적인 성패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정상이 핵 군축을 위해 첫 정상회담을 가진 뒤 가시적인 결과물을 내놓기까지는 2년의 세월이 걸렸다. 1985년 말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제네바에서 첫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핵 군축 합의에 실패했고, 1987년 세 번째 만남에서 핵탄두 장착용 중·단거리 미사일을 폐기하는 내용의 중거리핵무기폐기협장(INF)을 체결한 바 있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북·미가 실무선에서 물밑 협상을 통해 타협점에 근접하고, 내년 초 북·미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양국 정상이 긍정적인 신호를 보낸 것 같다”며 “특히 미국 내에서 트럼프의 대북정책에 대해 회의론이 퍼지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북·미 관계가 진전되고 있다는 언급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울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독립운동 뒷바라지도 독립운동… 어머니가 인정받는 날 왔네요”

    [3·1운동 100주년 프로젝트-독립운동가의 명패] “독립운동 뒷바라지도 독립운동… 어머니가 인정받는 날 왔네요”

    “2010년 2월에 어머니(홍매영 여사)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8년이나 기다렸습니다. 그간 정권이 바뀌고 여성 독립운동가도 인정받는 세상이 왔네요. 평생의 큰 소원을 이뤘습니다.”차이석(임시정부 비서장) 선생과 홍매영 여사의 아들인 차영조(74)씨는 19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남기신 한국독립당(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차이석 선생 등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 당원증으로는 독립유공자 인정이 안 된다고 수차례 들어서 기대도 안 했는데 이번 순국선열의 날(11월 17일)에 드디어 인정받게 돼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의 명패도 추후 전달할 계획이다.홍 여사는 1942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광복군의 생활과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유한책임한국광복군군관소비합작사 사원으로 재직했고 이곳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을 지원한 공이 인정됐다. 평안북도 의주에 살던 홍 여사는 남편의 제안으로 임정으로 가기 위해 나무배로 압록강을 건너던 중 남편이 중국 국경인 단둥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연행됐다. 홍 여사는 첫 중국행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5살·2살인 두 아이를 데리고 중국 시안의 광복군 진지에 도착했다. 차씨는 “어머니는 광복군으로서 훈련을 받았고 1942년 그곳에 들렀던 백범 김구 선생의 중매로 32살 차이가 나는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것도 또 다른 독립운동’이라고 했었다고 어릴 때 어머니께 들었다”고 덧붙였다.1944년 차씨가 태어났고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이 됐지만 차이석 선생은 귀국 준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다 9월 9일에 숨을 거뒀다. 세 아이를 데리고 1946년 귀국한 홍 여사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마련한 숙소(서울 충무로 1가 한미호텔)에서 거주하며 노상에서 불법 담배 장사를 했다. 차씨는 “마약 단속하듯 단속반이 발로 차고 지나가기 일쑤였고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며 “오히려 취업 때 불이익을 받을까 광복군 경력을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가족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충남 부여로 피난을 갔다. 차씨는 “형편이 힘드니 형과 누나는 고아원으로 갔고 김구 선생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나를 차(車)씨가 아닌 신(申)씨로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며 “6학년 때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학교를 관두고 아이스크림 행상이나 술집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홍 여사는 1979년 운명했고 부여의 작은 교회 공동묘지에 묻혔다. 차씨는 “독립유공자가 됐으니 현충원으로 모시는 게 남은 일”이라며 “독립운동에 나섰던 남편을 돕고 남편 없이 자식을 키우고, 남모르게 독립투사를 위해 밥을 하고 옷을 기워 준 여성도 합당한 예우를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北 ‘첨단 전술무기’로 美에 저강도 시위…군 “도발로 평가 않는다”

    北 ‘첨단 전술무기’로 美에 저강도 시위…군 “도발로 평가 않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새로 개발한 첨단 전술무기’ 시험을 지도했다고 북한 매체들이 1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방송 등은 이날 “(김 위원장이) 국방과학원 시험장을 찾아 새로 개발한 첨단전술무기 시험을 지도하셨다”며 “우리 당의 정력적인 영도 아래 오랜 기간 연구개발되어온 첨단전술무기는 우리 국가의 영토를 철벽으로 보위하고 인민군대의 전투력을 비상히 강화하는 데서 커다른 의의를 가진다”고 밝혔다. 매체는 무기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명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군 관계자는 “북한 발표를 보면 ‘(김정일이)생전에 직접 종자를 잡아주고’, ‘유복자 무기’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건 김 위원장 이전에 지시돼 현재 개발이 진행중 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일부에선 이 무기가 신형 장사정포일 것이란 추정도 나왔다. 군 관계자는 “한·미 정보당국은 나름의 테이터를 갖고 분석 중”이라며 “무기를 시험한 날짜는 ‘최근’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 매체가 언급한 무기 시험이 발사를 의미하는 것이냐’는 질문에는 “기사에도 ‘발사’란 언급은 없었다”며 “엔진 시험할 때도 출력만 보듯 말 그대로 ‘시험’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포탄 등이 실제로 발사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군 당국은 평안북도 신의주 인근에서 첨단전술무기 현지지도가 이뤄진 것으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신의주 인근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 국방과학 시험장이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 매체는 같은 날 김 위원장이 신의주시 건설 총계획도와 도시 건설 전망 모형 등을 검토하며 북·중 접경도시인 신의주를 ‘현 시대의 요구에 맞게’ 개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북한군의 무기 시험을 현장에서 지도한 것은 지난해 11월 29일 보도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발사 이후 1년 만이다. 김 위원장의 군사 행보 재개는 미국에 대한 저강도 시위의 일환으로 보인다. 보도에서도 이 시험이 또다른 군사적 ‘도발’로 비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수위 조절을 한 흔적이 묻어난다. 군 관계자는 “북한 매체가 첨단전술무기 시험이라고 공식 발표한 것을 두 가지 의미로 분석할 수 있다”며 “‘첨단’은 대내용으로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군사 강국을 중단없이 지향한다는 의미이고, ‘전술무기’는 대외용 무력시위는 아니라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를 우리 군이 도발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다만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이뤄진 이례적인 군사 행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중단없는 대북제재’를 강조하며 북한을 미국 페이스대로 끌고 가려는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 ‘협상이 결렬된다면 다시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일종의 정치적 시위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협상의 주도권은 미국에 뺐겼어도 휘둘리지는 않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군 당국 “김정은 무기시찰, 도발로 평가하긴 부적절”

    군 당국 “김정은 무기시찰, 도발로 평가하긴 부적절”

    첨단전술무기, 신형 장사정포로 추정우리 군은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둘러본 첨단전술무기를 신형 장사정포로 추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이 김 위원장의 무기 시험 지도를 관영매체를 통해 알린 것은 대내적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군사 강국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며 대외용 무력시위는 아니라는 게 우리 군의 판단이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16일 “김정일 시대 때부터 개발 중인 무기로 정보당국에서도 지속해서 확인하고 있던 사안”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앞서 조선중앙방송은 이날 “(김 위원장이) 국방과학원 시험장을 찾으시어 새로 개발한 첨단전술무기 시험을 지도하셨다”며 “우리 당의 정력적인 영도 아래 오랜 기간 연구·개발되어온 첨단전술무기는 우리 국가의 영토를 철벽으로 보위하고 인민군대의 전투력을 비상히 강화하는 데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고 밝혔다.김 위원장이 북한군의 무기 시험을 현장에서 지도한 것은 지난해 11월 29일 보도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 발사 이후 1년 만이다. 군의 한 관계자는 “북한 매체가 첨단전술무기 시험이라고 공식 발표한 것에 대해 두 가지 의미로 분석할 수 있다”며 “‘첨단’은 대내용으로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군사 강국을 중단없이 지향한다는 의미이고, ‘전술무기’는 대외용 무력시위는 아니라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에서 첨단전술무기 시험이라고 확인해 준 사안에 대해 우리 군이 도발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그는 김 위원장의 첨단전술무기 현지지도 지역에 대해서는 “신의주 인근 지역으로 알고 있다”며 “바다가 가까운 그 지역에 국방과학원 시험장이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한미 정보당국은 주요 인사(김정은)의 동선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며 “(첨단전술무기) 시험 사실은 북한의 공식 발표를 통해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무기체계 개발의 초기 단계로 보고 있다”며 “이번 시험 때 (포탄 등이) 실제 날아간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군 당국은 일부 언론에 보도된 지난 13일 북한의 평안북도 선천지역 시험사격에 대해서는 기존 방사포의 성능개량을 위한 시험사격으로 분석하고 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었다…해방촌, 찬미와 절망의 동거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었다…해방촌, 찬미와 절망의 동거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8회 서울의 영화1(유현목의 오발탄) 편이 지난 10일 용산구 용산2가동 해방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화인이 뽑은 ‘한국영화 100선’ 중 당당히 1위로 뽑힌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의 무대를 누볐다. 영화의 원작인 이범선의 1959년작 단편소설 ‘오발탄’과 1961년작 영화 두 편 모두 서울미래유산 무형유산이다. 영화를 주제로 삼은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는 처음이다. 1950~60년대 한국전쟁 전후 오발탄의 무대인 해방촌이란 지명은 동네의 이미지일 뿐 행정지명이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외국인 거주자와 젊은층을 중심으로 HBC(해방촌의 영문 이니셜)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한때 서울에만 20만채 판잣집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2번 출구에 집결한 투어단은 해방촌 입구의 명물 한신옹기를 지나 보성여고~해방촌 성당~해방촌교회~해방5거리~신흥시장~108계단~용산중·고교 간을 2시간여 동안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삭막한 풍경을 상상했다. 해설을 맡은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처음 시도한 영화투어에 현장감을 불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설문응답자들은 “해설 없이 걸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상에 빠졌다”, “몰라보게 변해버린 서울의 과거사를 떠올린 시간”, “불후의 소설과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소감을 남겼다.서울은 초거대 도시이다. 1000만명이 606㎢ 안에 살고 있다. 1㎢에 1만 7000명꼴이다. 국토의 0.6%에 인구의 20%가 몰려 있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생활권역에 묶여 있다. 서울은 메가시티(Mega City)이면서 인접 대도시와 띠로 연결된 메갈로폴리스(Megalopolice)이기도 하다. 1935년까지 30만명 선에 머물던 서울인구는 일제강점기 대륙침략을 위한 거점도시화하면서 1942년 100만명까지 늘었다. 불과 반세기 만에 10배로 팽창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00만명이 넘는 월남피난민, 중국과 일본으로 떠났던 해외동포의 귀환, 학교와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농민들이 마구잡이로 유입됐다. 1959년 수용한도를 초과해 200만명이 몰려들면서 도심과 남산, 인왕산, 북한산, 관악산 아래와 한강 주변에 난민이 대거 자리잡았다. 서울 인구는 1972년 600만명을 돌파한 뒤 1988년 1000만명 시대에 접어들 때까지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마냥 마구 몸집을 불렸다. 판자촌은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이 미군이 가져온 나왕, 미송 등 목재와 루핑, 깡통 등을 이용해 임시거처를 지은 데서 유래했다. 한때 20만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한 맺힌 디아스포라의 절규이며 우리가 겪은 주거의 사회사이다. ●영화 속 판잣집 소통 불가의 현실 “해방촌 고개를 추어 오르기에는 뱃속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 종이를 흰 실로 얼기설기 문살에 얽어맨 철호네 집 방문이 보였다.…비틀어진 문틈으로 그의 어머니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자! 가자!’” 원작 소설 속 해방촌 묘사이다. 그러나 백 마디 글보다 영화 한 컷이 더 웅변적이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철호의 판잣집은 소통 불가의 현실이며, 안식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공간이다. 로케이션 장면이 많은 영화는 근대적인 거리와 판자촌의 구불구불한 골목길, 공동수도 터, 푸세식 공동변소 등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눈앞에 펼쳐 보인다. 유현목 감독의 리얼리즘은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해방촌의 가난과 절망을 영상으로 보여 준다. 영화는 군사혁명 당국으로부터 ‘상영 불가’ 판정을 받았다.●해방 후 이북·해외서 온 동포들 용산으로 당시 용산은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도시였다. 한양도성 남산구간 바깥에서 한강까지 용산 전체의 20% 가까이 일본군영이 자리잡았고 나머지 지역은 철도부지와 일본인 거주지였다. 해방 이후 이북과 해외에서 들어온 동포와 월남민을 구제하기 위해 이 구역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남산 서쪽 기슭인 용산2가동 일대의 국유림에 정착지를 조성했다. 이때 38선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삼팔따라지’라고 냉대했다. ‘3·8’은 화투 도박에서 끗발이 가장 낮은 한 끗이므로 이를 비하해 한 끗짜리 인생이라는 뜻에서 따라지라고 한 것이다. 이들은 해방촌을 비롯해 이촌동, 용두동, 마장동 등지의 피난민촌에 모여 살았다. 해방촌이 자리잡은 남산 서쪽기슭은 인적이 없는 고요한 목장이었다. 김정호의 ‘경조 5부도’에 기록된 것처럼 갑오개혁 때까지 왕실 제사에 사용할 소와 양, 돼지를 키우던 전생서(典牲署) 터였다. 왕이 기우제를 지내던 남단(南壇)이 지척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일본군 20사단의 사격장으로 변했다. 해방촌의 기원은 해방 직후 용산동 4가 일본군 관사에 무단 거주하던 월남 피난민 50여 가구가 서울에 진주한 미군에게 관사를 비워주고 미군 트럭에 실려 이곳에 내리면서 시작됐다. 1947년 평안북도 선천군 군민 400여 가구도 집단이주, 일본군이 관리하던 경성호국신사를 중심으로 피난살이가 본격화됐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3년 대륙침략전쟁 당시 전쟁전사자를 추모하고 승전 분위기를 고취시키고자 마지막 발악처럼 건설한 신사가 바로 108계단으로 남은 경성호국신사다. 판잣집은 호국신사 간판과 건물을 떼어다가 지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호국신사 자리에 대형 천막을 세워놓고 천막 1개에 5~6가구씩 들어가 생활하다가 한 가구당 5~6평씩 불하를 받았다.●서북청년단·영락교회 영향력으로 탄생 1949년 주민들은 용산동이라는 동명을 해방동으로 바꿨다. 반공으로 똘똘 뭉친 서북청년단의 기세가 해방촌 건설에 한몫했다. 서북청년단의 비호 아래 해방촌은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가 됐다. 해방촌 형성과정에 영락교회의 영향력이 컸다. 영락교회는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월남민들 사이에서 ‘이북5도청’이나 마찬가지였다. “산등성이를 악착스레 깎아 내고 거기에다 게딱지 같은 판잣집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이 해방촌이 이름 그대로 해방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멀리 고향 쪽을 바라보며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철호 가족의 절망이 안타까운 영화에서 해방과 해방촌에 대한 역설이 등장한다. 당시 서울 인구의 반이 정부로부터 극소량의 식량을 배급받아야 하는 절대 빈민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방촌이라는 지명은 해방을 맞아 몰려든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주민들 스스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걸 해방됐다고 표현할 정도로 터부시 됐던 마을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쓰였다. 해방촌은 디아스포라의 섬이다.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는 차를 타고 풍경을 요약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들어온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도시의 만보객은 현대문명에 반하는 오래된 것들을 찬미함과 동시에 도시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된 것들에 대해서도 절망감도 느낀다. 해방촌은 찬미와 절망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그 시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갔다가 나왔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가리봉동(구로공단의 신화) ●일시 : 11월 17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 : 1호선,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7번 출구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흥미진진 견문기] 현실에 짓눌린 철호 만나…가을빛 위로해 주는 그 길

    [흥미진진 견문기] 현실에 짓눌린 철호 만나…가을빛 위로해 주는 그 길

    노란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걸어 영화 ‘오발탄’ 주인공 철호의 집이 있던 해방촌을 향했다. 해방촌 입구 오른편에는 ‘1945년 용산해방촌’이란 흰색 글자가, 왼편에는 미군 부대 담벼락을 촘촘하게 가득 쌓은 높다란 옹기들이 햇빛에 반짝였다.영화는 내러티브와 스펙터클로 구성된다. ‘오발탄’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 돌아갈 수 없는 북쪽 고향을 그리워하다 미쳐버린 어머니와 전쟁에서 부상당해 은행 강도짓을 하다 체포되는 남동생 영호, 양공주가 된 여동생, 병든 아내, 영양부족의 딸아이를 가족으로 둔 계리사 사무실 서기로 일하는 주인공 송철호 가족의 이야기다. 철호의 판잣집이 있었음 직한 골목들을 기웃거리며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다. 바람에 낙엽이 무심히 뒹구는 이 길을 철호는 빈곤의 무게에 억눌려 무능과 죄의식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으리라. 미군 기지였던 담을 따라 오르다 보니 보성여고가 나타났다. 평안북도 선천에 세워졌던 ‘예수교 보성여학교’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1955년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게 됐다. 오르막 위에 해방촌 성당이 있었다. 빨간 벽돌 위에 회색벽과 창문이 증축된 건물이다. 성모마리아 상과 오래된 종이 있는 성당 마당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해방교회를 거쳐 해방오거리에서 소월길로 올라섰다. 남산을 뒤로하고 해방촌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세먼지로 집과 건물들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낡은 건물들을 재단장하는 신흥시장과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108계단을 내려와 해방촌을 벗어났다. 사실 해방촌은 용산이나 광화문, 어디든 갈 수 있는 열린 동네이다.삶의 어두운 길을 인도하는 유일한 지팡이는 공감이라고 한다. 철호의 식구들이 불안한 현실과 타인에 대한 염려를 나눴다면, 혼자 괴로워하며 무너져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미래를 향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철호에게 노란 은행잎에 가을 정취가 흠뻑 물든 해방촌을 보여 주며 위로를 전하고 싶다. 이소영(동화작가)
  • [미래유산 톡톡] 4년간 20여번 철거 버텨…랜드마크가 된 한신옹기

    [미래유산 톡톡] 4년간 20여번 철거 버텨…랜드마크가 된 한신옹기

    지난 10일 투어단은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된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의 공간적 배경이 됐던 해방촌을 중심으로 한신옹기, 해방촌 성당, 해방 예배당, 신흥시장을 둘러봤다.미군 부대 담벼락에 설치미술처럼 옹기를 줄줄이 쌓아 놓고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의 한신옹기는 남편의 성 ‘한’씨와 자신의 성 ‘신’씨를 하나씩 따서 ‘한신옹기’라는 점포명을 지었다고 한다. 50년 세월을 꿋꿋이 지킨 신연근(81) 할머니는 끼니도 두부 반 모로 때우고, 국수 한 그릇도 사 먹지 못해 곯은 배를 쥐고서 10년을 모은 뒤에야 가게를 열 수 있었다. 4년 동안 스무 번이 넘는 철거를 당할 정도로 해방촌에서의 삶은 어렵고 힘겨웠지만 양질의 옹기만을 고집한 끝에 지금은 해방촌의 랜드마크가 됐다. 입소문을 타고 블로그 등을 보고 많이들 찾으며, 미군들이 귀국하기 전 부랴부랴 사 가지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 월남한 사람들과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해방촌 성당’과 ‘해방촌 예배당(교회)’을 떼 놓고 해방촌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촌 성당은 1955년 성당 신축이 시작되어 11월 완공됐으나 교세 확장에 따라 1983년 현재 성당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해방 예배당 역시 ‘영락교회’에 다니던 실향민들이 세웠다. 지금의 해방 예배당은 평안북도 선천 사람들이 북적이던 당시 해방교회 느낌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1949년에 건축했고, 현 건물은 1991년 신축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촌 성당과 해방교회는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교육과 복지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오랫동안 해방촌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해방촌오거리에서 주된 생활가로에 접해 있는 신흥시장은 대부분 3층 건물, 좁은 건물 폭에 가파른 계단으로 형성돼 있고, 1층은 점포, 2~3층은 창고나 주택으로 사용되는 구조이다. 1960년대부터 상당한 시장점유율을 보여 줬던 ‘스웨터 편직사업’이 성행했고, 1990년대까지 번성했다. 2000년대 초 시장기능의 대부분을 상실, 공간들은 주택으로 개조돼 임대되거나 방치됐다가 최근 해방촌의 옛 역사와 기억을 보전하기 위한 도시재생이 시도되고 있다.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
  • ‘빨간 구두 아가씨’ 작곡 원로 음악가 김인배 별세

    ‘빨간 구두 아가씨’ 작곡 원로 음악가 김인배 별세

    ‘빨간 구두 아가씨’ 등 숱한 히트곡을 만든 원로 작곡가 겸 트럼펫 연주자 김인배씨가 지난 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86세.193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인 고인은1963~64년과 1980년 KBS 라디오 악단장, 1973년 TBC(동양방송) 라디오 악단장을 지냈다. 드라마 주제가인 한명숙의 ‘삼별초’ 작곡을 시작으로 남일해의 ‘빨간 구두아가씨’, 한명숙의 ‘그리운 얼굴’, 영화 주제가인 배호의 ‘황금의 눈’ 등 400여 곡을 작곡하고 2500여 곡을 편곡했다. 음악 인생 60여년간 트럼펫을 놓지 않을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던 고인은 1987년 대통령 문화포상, 2000년 제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통령표창, 2006년 제13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남 1녀가 있다. 장남 대우 씨는 KBS 관현악단장이며, 외손자 김필은 엠넷 ‘슈퍼스타K 6’ 출신 가수로 3대가 음악인으로 활동 중이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이며 발인은 9일 오전 6시다. (02)2227-7550.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사설] 남북 지뢰 제거, 군사적 긴장 제거의 디딤돌이다

    남북이 ‘판문점 선언 군사분야 합의서’ 후속 조치로 어제부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과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 제거에 들어갔다. 지난달 이 합의서에서 20일까지 JSA에서, 11월 30일까지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 제거를 마치기로 했다. 철원 지역 지뢰 제거는 비무장 지대 내 유해 발굴을 위한 전 단계다. 운산·장진호 전투가 벌어진 평안북도와 함경남도 등에서 북·미가 1996년부터 공동으로 발굴한 유해 중 국군 전사자로 판명된 64위도 국군의 날 70주년인 어제 미국에서 돌아와 문재인 대통령이 6·25 참전기장을 수여했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호국영령 유해가 12만 4000여구라니 지뢰 제거에 이은 남북 공동 유해 발굴도 기대한다. 남북은 군사합의서에서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인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지’하기로 했는데, 지뢰 제거는 군사적 긴장 완화와 적대 행위 중지의 첫걸음이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의 평화지대화, DMZ 내 GP(감시초소) 시범 철수, 군사분계선 일대 군사훈련 중지 등 군사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도 이른 시일 내에 실천되기를 바란다. 북한과 미국의 비핵화 프로세스와 더불어 남북이 군사합의서를 착실히 실천하고 이행하면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이 머지않은 미래에 달성될 수 있다. 그를 위해 남북 군사공동위원회도 조속히 가동하기를 촉구한다. 군사공동위원회는 군사분야 합의서의 이행 실태를 점검하고 우발적 무력 충돌 방지를 위한 상시적 소통을 할 창구이자 군축의 출발점이다. 국군의 날에 제대로 된 기념식 없이 지나갔다고 일각에서 얘기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겉치레 행사를 하지 않는다. 중국, 북한 같은 일부 국가에서나 열병식이 열린다. 군사합의서 등을 놓고도 안보 태세의 해이를 지적하는데, 군사합의는 행동 대 행동 원칙이 기본이라는 점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도발이 있으면 그 전의 합의는 무효가 된다”는 이낙연 총리의 국회 답변은 당연하지만 의미심장하다.
  • 오늘은 건군 70주년 국군의날···블랙이글스 야간 에어쇼도

    오늘은 건군 70주년 국군의날···블랙이글스 야간 에어쇼도

    건군 70주년을 기념하는 국군의 날 행사가 1일 열린다. 올해 행사는 이날 오전 성남 서울공항에서 ‘국군 유해 봉환식’으로 시작된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약 10년간 미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함경남도 장진호, 평안북도 운산 지역 등에서 발굴한 유해 중 한미 공동감식을 통해 국군전사자로 판정된 64구가 봉환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현역·예비역 장병 등과 함께 국군의 날 경축연 오찬을 갖는다고 뉴스1이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강한 안보’를 강조하고 이를 위해 노력해준 군 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언급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와 별도로 70돌을 맞은 국군의 날에 관한 공식 메시지를 낼 것으로 보인다. 메시지 키워드는 ‘평화’와 ‘자주국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 매체가 전했다.이어 오후 6시 30분 서울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기념식은 국군기수단 입장, 훈장과 표창 수여, 태권도 시범, 미래전투수행체계 시연, 축하공연 등으로 진행된다.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는 처음으로 서울 상공에서 야간 에어쇼를 펼친다. 또 5년 주기로 선보였던 군사 퍼레이드 대신, 가수 싸이 등 연예인들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항공기 소음이 들리시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부탁한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남북은 이날부터 비무장지대(DMZ)의 시범적 공동유해발굴지역인 강원도 철원의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와 폭발물 제거작업을 시작한다.지뢰 제거와 함께 DMZ에 묻혀 있는 6·25 전사자 유해발굴도 첫 삽을 뜰 예정이다. 한국전쟁 휴전 직전인 1953년 중공군과 국군간에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진 화살머리고지에는 국군전사자 유해 200여 구, 미국과 프랑스 등 유엔군 전사자 유해 300여 구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트럼프가 처음 공개한 6·25 참전 미군 유해 신원은?

    트럼프가 처음 공개한 6·25 참전 미군 유해 신원은?

    미국이 최근 북한으로부터 넘겨받은 6·25전쟁 참전 미군 유해 가운데 2명의 신원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최근 확인된 유해가 인디애나 버넌 출신의 찰스 맥대니얼(당시 32세) 육군 상사와 노스캐롤라이나 내시카운티 출신의 윌리엄 존스(당시 19세) 육군 일병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의 ‘트윗 발표’ 이후 국방부도 이들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AP 통신이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 영웅이 집에 왔다”면서 “그들이 편히 잠들기를 바라고, 가족들의 고통도 끝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두 명 가운데 맥대니얼 상사는 녹슨 인식표(군번줄)가 발견돼 이미 이름이 알려진 전사자다. 그의 인식표는 지난달 두 아들에게 먼저 전달됐다. 하와이 지역매체 스타애드버타이저 등에 따르면 맥대니얼 상사는 육군 1기병사단 8기병연대 소속의 위생병으로 1950년 11월2일 북한 평안북도 운산 남서쪽에서 중공군과 교전하다 실종 신고됐다.존스 일병은 25보병사단 24보병연대 소속으로 1950년 11월26일 평안북도 구장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역시 실종됐다. 그가 활약한 24보병연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이며, 장교들만 대부분 백인이었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미 국방부는 지난달 초 북한으로부터 55개의 유해 상자를 돌려받아 신원 확인 작업을 벌이는 동시에 아직 북한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미군 유해를 추가로 찾기 위한 협상에 나설 계획이다.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 켈리 맥키그 국장은 이날 북한 내 미군 전사자 발굴작업 재개의 조건을 놓고 다음달 북한과 대면 협상을 시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AP에 따르면 매키그 국장은 “북한에 대한 보상 금액 등의 조건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내년 봄 발굴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전쟁포로·실종자의 날’을 맞아 성명을 내고 “실종된 우리나라의 영웅들을 찾기 위해 정부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미군 전사자 유해 송환 약속을 받아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 결과 실종된 전사자 2명의 신원을 확인했고, 아직 한국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미국인들을 최대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다시 부풀렸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나는 북파 공작원, 암호명은 ‘흑금성’…남북합작 애니콜 CF광고 성사시켜

    “나는 북파 공작원, 암호명은 ‘흑금성’…남북합작 애니콜 CF광고 성사시켜

    북파 공작원을 소재로 한 영화 ‘공작’의 실제모델 박채서(64)씨를 만났다. 그는 1990년대 중반 북한 핵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대북사업가로 위장한 채 중국과 북한을 무대로 활동한 안전기획부의 대북공작원이다. 1997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으며 이효리, 조명애가 나온 최초의 남북합작 광고도 성사시켰다. 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황과 영화 등에 대해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27일 본사 9층 대회의실에서 했다.→영화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아내와 큰딸이 교도소로 면회 와서 내 얘기를 CJ에서 영화로 만들겠다고 제안했다고 하더라. 처음에 거부했다. 단순 용기만 갖고 할 수 없는 일 아니냐. 그런데 이미경 부회장이 원치 않던 외유를 나가야 할 정도로 압박이 심한 상황에서도 영화 제작을 하겠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수감 중 작성한 노트기록이 토대가 됐다. →리 참사(영화에서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의 실재 인물)는 어떤 사람인가. -리철은 북한의 몇 안 되는 자본주의 전공자다. 김일성대를 졸업했으며 박사논문이 `박정희의 경제개발 정책’이다. 1954년생으로 나와 동갑이라 쉽게 친구가 됐다. 리철은 아들이 둘이고, 나는 딸만 둘이다. ‘사돈 맺자’는 농담도 했다. →2005년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가 나오는 남북합작 광고인 애니콜 사업 전에 추진하던 ‘남남북녀 결혼작전’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지금 못지않게 힘들었다. 대량 탈북자가 나오고, 이에 북한이 반발해 미사일을 쏘는 등 대화가 안 됐다. 햇볕정책을 계승했는데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자문요청이 오더라. 북측은 미사일 쏘다가 평화 모드로 가려면 명분이 필요하다며 이벤트를 만들자고 하더라. 2002년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개막식에 북측 기수단으로 와 한국에서 인기 있던 조명애를 내 지인 중 한 분이 며느리 삼고 싶다고 말한 게 생각나 추진하게 됐다. 베이징에서 양가 상견례도 했다. 그런데 국정원이 방해했다. 신랑 어머니를 만나 ‘조명애는 기쁨조인데 결혼이 웬 말이냐’고 한 것이었다. 이벤트 무산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 3일 뒤 고영구 원장이 기관보고를 했던 것 같다. 비슷하게 나를 비난하는 보고에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이 사건으로 원장은 강력경고 조치를 받고, 나머지 주요 간부들은 인사조치됐다. →결혼 무산으로 애니콜 광고는 힘들었겠다. -공작 실패에 대비해 늘 예비 계획을 세운다. 남남북녀 결혼작전이 무산되면서 내가 하면 또 국정원이 방해하니 청와대가 나서야 한다고 해 애니콜 광고는 성사됐다. 삼성을 소개받았다. 다 돼 있더라. 감독이 차은택씨였다. 모델은 이효리고. 최고기업, 최고상품, 최고모델 콘셉트였다. 나머진 북한 몫이었다. 그런데 제동이 걸리더라. (광고 촬영지인) 상해로 갔는데 조명애가 도저히 촬영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 결혼이 미뤄진 충격으로 밥도 안 먹고 말이 없더라. 마음병을 앓은 것이다. 조명애는 ‘평양의 신데렐라’였다. 갑자기 남쪽으로 시집가야 하는 상황에 가족회의를 열고 “나 하나 시집가서 우리 가족이 잘산다면 기꺼이 가겠다”고 했다더라. 그런데 남자를 만나 보니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딱딱한 북한 남자와 달리 함께 놀러 갈 때 손도 잡아주는 등 싹싹한 매너남이었다. 게다가 시아버지 될 사람은 핸드백, 신발, 바바리 코트 등 온갖 명품을 다 사줬다. 가족 용돈도 따로 준비하고 예술단 단장, 부단장 선물도 따로 줬다. 조명애가 예비 시아버지를 만난 다음날 무용단에 출근하면 그날 오전 업무는 마비된다고 하더라. 서로 옷 입어 보느라고 말이다. 예술단 부탁으로 20인승 출퇴근 버스도 사줬다. 2년간 쓸 타이어와 유류비도 지원했다. 촬영이 힘들 것 같아 시아버지가 될 뻔한 사람을 급히 오라고 했다. 이 양반이 오자, 소파에 말없이 앉아 있던 조명애가 벌떡 일어나 달려가 우는데,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우리도 다 울었다. 촬영은 일주일 동안 약 먹이고, 알로에 바르고, 얼굴 뾰루지 등은 화장술로 커버해서 끝냈다.→조명애는 그 이후 결혼했나. -소설 잘 쓰는 언론에서 북한군 장교와 결혼했다는데 거짓말이다. 완전히 폐인 됐다. 원래는 광고 찍고 나서 식당 같은 것을 마련해 중국에서 살게 할 계획이었다. 제가 2010년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들은 얘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어떤가. -1997년 6월에 만났다. 유순한 편이다. 예능을 좋아해서인지 독하지 못하다. 김정일이 후계자를 정할 때, 자기 닮아 순한 김정철 대신 독한 김정은을 시켰다. →한·미 합동부대 있을 때 미군과 업무 협조는 잘됐나. -처음 3개월간은 많이 싸웠다. 양주 선물 등 온갖 유혹을 거절하고 한·미공조의정서에 따라 원칙대로 일했다. 오산공군기지는 통제가 안 된다. 전용기가 아무거나 싣고 온다. 나 보고 골프용품 거저 줄 테니까 하라고 하더라. 당시 골프채 등은 비쌌다. 안 했다. 결국 미군이 나를 인정해 미 대사관 등 우리나라의 어떤 미국시설도 24시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통행카드를 주더라. 이게 네 장뿐인데 대통령, 국방부 장관, 안기부장과 내가 받았다. 미국이나 북한을 나쁘게 버릇 들인 건 우리다. 우리나라에 ‘까만 눈 미국인’이 많더라. 미국에 가지도 않고 시민권은 갖고 있더라. 거래하기 위해서다. 각계각층에 다 있더라. 대학원 석사과정 때 일인데 조선 주둔 일본대위가 쓴 일본어로 된 비망록을 봤다.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회유작전에 바로 서약서 쓰고 넘어와 실망하게 되는 반면,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굽히지 않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존경한다고 적고 있더라.→북한의 정보수집력은 어떤가. -신상옥·최은희가 1978년에 납북됐다가 8년뒤 탈북했는데 당시 수사관들이 물었다. 베를린영화제 참석 때 왜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북 정보력에 겁이 나 애기 못 했다고 했다. 하루 전 남한 대통령이 결재한 것이라며 서류를 보여 주는데 실제로 그 날짜에 결재한 서류였다고 한다. 그러니 누구를 믿어야 할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는 거다. 사례를 더 들자면 1999년 평안북도 금창리에 숨겨진 지하 핵시설이 있다고 보도되면서 난리 난 적이 있다. 우리 공작원이 조선족을 시켜 흙을 파니, 우라늄이 검출됐다는 것인데 미국도 이를 믿은 것이다. 미국이 현장사찰을 했으나 핵 관련 움직임은 찾지 못했다. 빈 동굴뿐이었다. 왜 그랬냐. 북한 역공작에 당한 거다. 북한에서 돈 주고 우라늄을 넣어준 거다. →1994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사업에 미국의 공작이 있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북 핵무기 개발 자료를 1992년에 내가 입수했다. 미국 장비 등의 지원을 받아서 알게 된 것이라 미국에 보고했다. 난 당연히 그 사항이 김영삼(YS) 대통령에게도 보고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안 됐더라. 당시 YS는 북한에 쌀을 주려고 난리 칠 때였다. 만약 핵무기 개발 사실을 알았다면 막았다고 본다. 이어 1994년에 북핵 위기가 벌어진다. 북한의 신포에 한국형 경수로 2기를 건설하는데 재원의 70%인 32억여 달러를 우리가 부담한다. 여기엔 미 중앙정보국의 공작이 있었다. 평양을 다녀왔다는 한 재미목사가 YS에게 긴급 보고를 한다. 북이 서해 5도를 잠수함으로 봉쇄, 무력으로 점령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YS는 재미목사를 잘 만났다. 대통령이 놀라 해군참모총장을 긴급호출하고 제주도가 제일 취약하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어 북측의 회담 요구를 받아들여 경수로 건설사업비를 떠안는다. 미국이 YS가 재미목사를 잘 만나주고 위기의식, 안보 개념이 없다는 걸 알고 공작한 거다. 서해 5도는 수심이 낮다. 잠수함 봉쇄가 말이 안 된다. 첩보 가치도 없었다. 보안이 최고 생명인데 어떻게 재미목사가 기습공격을 아느냐. →이명박 정부 시절, 북에서 대남파에 대한 공개 처형이 많았는데 우리 측에서 움직임이 있었나. -대남파는 빨치산세력에 맞설 실용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30~40명씩 공개 처형 등 다 숙청됐다. 숙청 자료를 우리 정보기관에서 줬다. 과거 10년 동안 남북교류하면서 뒷돈 준 자료를 다 준 거다. 한 예로 본명이 권민인 권영욱이라는 김일성대 나오고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항상 북측 대표단장으로 나온 유연한 사고의 실용주의자, 그 친구도 날짜별로 돈 받은 게 나와 숙청됐다. 사는 아파트 바닥을 파 보니 비닐에 쌓인 8만 달러 꾸러미들이 나왔다. 그런 식으로 대남파들이 결딴나면서 북한 내 강경파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진 것이다. 난 절대 국정원이 자의적으로 그런 자료를 주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무대책·무대응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국을 통한 정책이었다.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 실패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전에 북한에서 정책실패는 한 번도 없었다. 화폐개혁은 가진 자들의 돈을 뺏으려고 한 거다. 장성택도 모르게 말이다. 20분의1로 화폐가치를 낮췄다가 한 달 만에 원상복귀했다. 기득권세력의 저항 때문이었다. 개혁 전에는 베이징에서 북한 사람들에게 “김정일이가~”라고 말하면, 이 사람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반발했다. 그러데 화폐개혁이 되자 “개XX” 등 욕이란 욕은 다하더라. 뭘 의미하느냐. 화폐개혁 실패라지만, 기득권이 흔들린 거다. 볼셰비키 혁명, 중국 공산당 혁명 주도세력은 노동자나 농민이 아닌 엘리트다. 모택동은 호남성 제일갑부였다. 형식만 노동자, 농민이지 가진 사람, 엘리트 그룹이 주도했다. 북한의 엘리트 변화를 우리가 뒷받침해야 한다. →3차 남북 정상회담 전망은. -미국은 북이 비핵화하면 제재를 풀겠다는 것인데 북은 점진적으로 비핵화하자고 한다. 그런데 미국은 이를 못 받겠다고 한다. 일방적 행동 강요는 강압이다. 북 강경파들이 절대 받지 않는다. 김정은이 맘대로 못한다. 김정일은 아버지로부터 정식 후계자 교육을 받고 17년간 당 지도부를 장악했다. 당·정·군의 인사를 다 했다. 그런데도 김일성 사후 주석궁에 바로 못 들어갔다. 왜냐하면 호위총사령부는 자기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김정은은 후계자 내정 2~3년 만에 아버지 사망으로 갑작스럽게 권력을 승계해 지지기반이 약하다. 빨치산 세력은 손 못 대고 군부, 문화계 등 분야별로 중간층 중심으로 100인 그룹을 만들어 자신의 호위세력으로 만들었다. 이 그룹이 200인으로 늘어났다는 얘기가 있다. 이들 눈에 벗어나면 김정은은 죽는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금요일의 서재]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 그의 생애와 정신을 돌아보다

    [금요일의 서재]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 그의 생애와 정신을 돌아보다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 선생은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까지 갔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해 한국 광복군에 합류했다. 해방 이후에는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유신 헌법에 반대하는 활동으로 구속돼 1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가 그해 병든 몸으로 풀려났다. 얼마 후인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약사봉 계곡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타살 의혹이 불거졌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재조사했으나 여전히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장준하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6일 ‘장준하100년위원회’가 발족한 가운데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책들이 때맞춰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됐다. ◆어둠 속에 묻힌 의문의 사건, 다시 돌아보는 그날의 진실-2003년 7월부터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담당했던 고상만 전 조사관은 2012년 장준하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을 펴냈다. 처음엔 이 책을 쓸 생각이 없었던 그는 국가기록원에서 장준하 사건 관련 자료를 2074년까지 비공개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에 사건의 전말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집필을 시작했다. 책에는 장준하 사건에 얽힌 오해와 진실, 극적으로 찾은 장준하 의문사 관련 기록, 법정 스님으로부터 확인한 장준하 ‘거사’의 실체, 당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한 김용환의 주장에 대한 의혹 등이 담겨 있다. 저자는 2012년 출간된 동명의 책에 머리말과 에필로그를 추가해 개정판을 펴냈다. 개정판 머리말에 저자는 지난 7월 별세한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어머님의 평생 소원 중 하나였던 남편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 진실을 꼭 밝히겠다”면서 “지난 2012년 8월 1일 ‘스스로 세상에 드러낸’ 장준하 선생님의 타살 의혹에 분명한 마침표를 찍겠다. 그동안 밝혀낸 사실과 새롭게 드러난 진실을 더하여 곧 이어질 진실화해위원회 2기 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명명백백히 하는 데 제가 가진 모든 힘을 다 하겠다”고 썼다. 개정판 에필로그에서는 장준하 사건의 비밀을 밝혀줄 단서가 “1975년 장준하 선생 사망 당시 사고 현장을 다녀간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요원이 작성한 중요 상황보고서를 존안해 놓고 있는 문서고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 문서고 안으로 ‘강제 수사권’과 ‘압수 수색권’을 가진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 직접 들어가 문제의 존안 문서를 확보할 수 있다면 지난 40년이 넘도록 굳게 닫힌 ‘비밀의 문’이 마침내 먼지를 털며 열리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바로 그때가 이 나라의 진짜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그날’임을 나는 확신한다”고 적었다. 356쪽. 1만 5000원.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위해 싸운 장준하 선생의 일생-신간 ‘민주주의의 등불 장준하’(사계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펴낸 책이다. 1994년 처음 출간한 이 책은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 기념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책은 장준하 선생이 1918년 압록강 하류의 남쪽에 위치한 평안북도 의주 땅에서 출생한 날부터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시절,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뒤 광복군 훈련반에서 군사 훈련을 받던 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로서 조국으로 돌아오던 여정, 민주 언론의 필요성을 느껴 잡지 ‘사상계’를 창간하게 된 과정 등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책을 지은 김민수씨는 머리말에서 “나날이 새로운 역사를 써 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장준하라는 이름이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지난날 장준하 선생 같은 이들의 의지와 희생 위에서 싹트고 자라날 수 있었다”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평화 통일이라는 과제를 풀어야 하는 우리에게 선생이 보여 준 신념과 용기와 행동은 여전히 소중한 가치다. 우리가 장준하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 까닭”이라고 말했다. 268쪽. 1만 2800원.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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