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평민
    2026-04-17
    검색기록 지우기
  • 본청
    2026-04-17
    검색기록 지우기
  • 박사
    2026-04-17
    검색기록 지우기
  • 럭비
    2026-04-17
    검색기록 지우기
  • 반박
    2026-04-1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655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6)미륵부처의 환생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6)미륵부처의 환생과 ‘정감록’

    영조 19년(1743) 은진미륵불로 유명한 충남 은진의 관촉사에 세워진 사적비에 이런 구절이 있다.“은진미륵불은 국가가 태평하면 온몸에 광채가 나고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어린다. 그러나 국가의 운수가 흉하거나 난리가 일어나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에 든 꽃도 빛을 잃는다.” (‘조선금석문총람’ 하) 민중은 은진미륵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라의 운명을 점친다는 것이다. 도대체 미륵불이 누구이기에 한국 민중에게 미래를 보여주는 것인가. 미륵신앙에 따르면, 장차 미륵불이 지상에 강림해 수많은 사람을 일시에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런 신앙은 석가모니부처 당대에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인데, 서기 100년쯤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서기 3세기에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미륵신앙은 북위 때 중국에 전파되어, 당나라 이후 보편 신앙이 됐다. 한국에는 불교가 처음 수용되던 4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많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중은 미륵불을 통해 손쉽게 성불할 수 있고 현세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정감록’ 역시 지상낙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미륵불과 ‘정감록’ 사이엔 흥미로운 접점이 있다. 역사상 스스로를 미륵부처의 환생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늘 예언을 빙자했고, 직접 예언서를 조작하기도 했다. 환생 미륵불은 ‘정감록’에 예고된 진인의 원형이었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견해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기록이 뒷받침해 준다.20세기에 창립된 여러 신종교의 교리를 조사해 봐도 결과는 역시 동일하다. 신종교 단체들은 자기네 교조를 미륵불로 간주한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미륵불은 바로 ‘정감록’이 말한 진인인 것이다. 예컨대 증산교의 교조는 자기 스스로를 천자 미륵이라고 했다. 미륵불인 동시에 세상을 직접 다스릴 최고의 통치권자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강증산은 제자들에게 “나는 미륵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대순전경(大巡經典)’ 초판 13장)고 직접 설파하기도 했다. ●고려후기 이금이 약속한 이상세계 신종교는 19세기 후반부터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 것으로 다들 알고 있다. 엄밀한 의미로는 그렇지 않았다. 미륵신앙에서 갈라져 나온 신종교는 일찌감치 고려 후기에도 존재했다. 그때의 신종교도 예언과 절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고려 후기 신종교의 미륵불은 뒷날 ‘정감록’의 진인으로 변형된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고려 우왕 때였다. 경상도 고성 출신으로 이금(伊金)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를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이금은 몇 가지 새로운 주장을 폈다. “무릇 귀신에게 빌거나 제사하는 사람, 말고기나 소고기를 먹는 사람, 돈과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이금의 종교적 입장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민간신앙에 대한 선전포고다. 당시 불교는 토착신앙에 관대했고, 그 일부는 불교 신앙에 흡수됐다. 산신이나 칠성을 모시는 민간신앙이 사찰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금은 이런 민간신앙을 근원적으로 배격했다. 둘째, 육식을 철저히 금한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민간신앙의 제물로 고기가 바쳐진 것은 물론이고, 밀교의 승려들도 육식을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금은 고대 중국의 도교에서 기원한 채식주의를 강화시키려고 하였다. 셋째, 사회적인 구제활동을 신앙생활의 엄격한 규범으로 정했다. 이금의 신종교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강조했고, 그런 점에서 개혁적인 성격이 뚜렷했다. 빈농을 비롯한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기에 족한 신종교였다. “만일 내가 하려고만 하면 풀에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도 곡식이 열릴 것이다.” 이금이 말한 파란 꽃은 상상의 꽃이며, 나무에 곡식이 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전능한 미륵불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법칙을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특히 가난한 민중을 배불리기 위해, 그는 “한 번 씨를 뿌려 두 번을 거둘 수도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금이 약속한 지상 낙원은 다분히 공상적이지만 ‘미륵하생경’에 묘사된 용화세계를 방불케 했다. 알다시피 미륵신앙은 상생(上生)신앙과 하생(下生)신앙으로 구분되는데,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생전에 공덕을 쌓아, 죽은 뒤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상생신앙이다. 그에 비해 하생신앙은 현세에서 법을 깨치고 지상낙원에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장차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지 56억 7000만년이 지난 다음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세 번의 법회를 열게 되는데 그때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고려 후기의 신종교 지도자 이금이 약속한 이상세계는 20세기 초, 강증산이 말한 “조화선경”과 많이 닮아 있다. 그것은 ‘정감록’의 진인이 실현할 지상낙원이기도 하다. 강증산은 조화선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세상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고 밤과 낮이 막힘없이 환하게 통하고, 백 가지 곡식을 오래도록 거두어들이고 만 가지 과일이 굵고 크며 풍성한 음식이 저절로 생기고, 아름다운 옷이 스스로 이르고” 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천지개벽경’) 실은 강증산의 생각은 ‘미륵하생경’을 표현만 달리해 옮겨놓은 것이다. 이금은 한 발 더 나아가 왜구의 침략으로 지쳐 있던 민중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했다.“나는 산과 개울의 신을 동원해 왜적을 포획할 수도 있다.” 이 약속은 그가 사회정의와 더불어 평화로운 삶을 중시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정감록’에 진인이 나와 일본을 복속시킨다고 예언한 것과 흡사하다. 이금은 자기가 창건한 신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시키려고 ‘폭력적인’ 경고도 남겼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계율을 어기면 목숨을 잃게 된다 했다. 뿐만 아니라,“만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오는 삼월에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고 컴컴해지리라.”고 했다. 이금의 가르침을 무시할 경우 세상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이금의 신앙동지와 적들 이금의 예언은 섬뜩했고 효과도 컸다. 말세에 대한 ‘정감록’의 경고로 인해 수십만명의 정감록 신도가 탄생했듯, 수백·수천명이 이금의 가르침을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말이나 소가 죽더라도 감히 고기를 먹을 생각조차 못했다. 잘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부자들 중에도 이금의 신도가 생겨, 그들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쌀과 베, 금과 은을 이금이 이끄는 신종교에 바쳤고, 활동자금이 풍부해진 이금의 신종교는 삽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금의 신도 가운데서 이채를 띤 것은 남녀 무당들이었다. 그들은 유난히 이금을 공경하고 따랐다. 그동안 자기들이 섬겨온 성황당이며 사묘(祀廟) 등 민간신앙의 성전을 일시에 허물어 버리고, 이금을 살아 있는 미륵불처럼 정성껏 모셨다. 현세의 복과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이금에게 몰려 왔다. 이 신종교의 신도는 대부분 가난한 민중들이었지만, 부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고급관리들 중에도 이금의 신도가 있었다. 정확한 수를 알 수는 없지만, 수천명이 이금의 제자가 됐다. 그들은 ‘미치광이처럼’ 열광적으로 전도에 열심이었다. 사회 정의를 선포한 신종교라서 전파속도가 매우 빨랐고, 급속히 사회세력으로 대두됐다. 이금의 제자들은 전국의 여러 곳을 누볐으며,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고을 관아에서 융숭한 대접을 베풀어 주었다. 심지어 어떤 고을에서는 수령이 직접 마중을 나와 이금과 고위간부들을 관사로 초청할 정도였다. 물론 이금 일파의 등장을 경계하는 이들도 많았다. 고려 왕실과 일부 귀족들은 이금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사교(邪敎)로 선포해 탄압을 전개할 경우, 도리어 이금 쪽에서 집단적인 무력저항을 펼 가능성이 없지 않아 적극적으로 손을 쓰지는 못했다. 그만큼 이금의 신종교는 성장해 있었다. 이때 청주목사 권화는 은밀한 꾀를 써서 이금을 처치할 생각이었다. 청주는 큰 고을로 중부와 남부지방을 잇는 간선도로상에 위치한 관계로, 이금 일행이 가끔 지나가는 곳이었다. 권화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이금 일행이 다시 청주에 들르기를 기다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금은 고위 간부들을 대동해 청주에 들렀다. 청주목사 권화는 이금 일행에게 향응을 제공할 뜻을 보여 그들을 관아로 유인한 다음, 재빨리 체포해 버렸다. 그는 이 사실을 황급히 조정에 알렸다. 개경에선 매우 기뻐하며 각도에 공문을 보내 이금의 신종교에 가담한 인사들을 몽땅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 바람에 고위관료 양원격 같은 이도 결국 목숨을 잃게 됐다. 과연 얼마나 많은 수의 신도들이 이때의 박해로 희생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륵불을 자처했던 이금의 신종교가 표면상으로는 완전히 박멸됐다는 점이다.(‘고려사’ 권 107) 이금에 대한 박해는 19세기 말에 있었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연상시킨다. 비록 한때였지만 이금의 신종교가 맹위를 떨친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지도자로서 이금이 가졌던 카리스마, 부정부패한 고려의 사회 현실, 그리고 내우외환으로 민생이 피폐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시 사회에는 미륵신앙과 각종 예언이 유행했다고 본다. 미륵신앙과 관련해 특히 향나무를 해변에 묻는 이른바 매향의 풍속이 대단했다. 장차 미륵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면 그에게 향을 바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매향은 집단적인 차원에서 이뤄졌으며, 행사 후 그 사실을 바위에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향비를 남겼던 것이다. 강원도 고성의 삼일포를 비롯해 경상남도 사천, 전라남도 영암, 목포 및 충청남도 서산 등 전국의 여러 해안 지방에서는 매향비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다. 그 비문에 따르면, 강원도 각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 10여명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밖에 남녀노소 수천명이 동해안 9군데에 모두 1500다발이나 되는 향나무를 땅속 깊이 묻었다고 했다. 위에서 살핀 이금의 신종교는 아마 이런 매향집단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고 하겠다. 매향비가 만들어진 지방마다 일종의 신종교 집단이 존재했을 법하다. 다만 그들 집단의 활동은 미륵신앙이라는 종교행위에 그쳤을 뿐, 사회 또는 정치적 운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역사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에 비해 이금이 이끈 집단은 예언을 내세워 사회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조정의 탄압에 직면했던 것이다.‘정감록’을 믿은 신앙집단은 무수히 많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공식적인 역사기록으로 남은 경우는 일부에 국한됐던 것과 마찬가지다. ●궁예도 미륵신앙 계통의 신종교 지도자 신종교란 관점에서 고대 한국의 역사를 좀더 바라보자. 미륵불을 자처한 교조가 국가를 직접 통치한 경우도 있었다. 태봉의 궁예 왕이다. 그는 신라 효공왕 5년(901)께 미륵불을 자칭했다. 엄청난 칭호에 걸맞게 왕은 외관을 특별한 모양으로 꾸몄다. 머리에는 금빛 모자를 쓰고 몸에는 승복을 걸쳤다. 왕은 궁성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흰 말을 탔으며, 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비단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게 했다. 또한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에게 일산을 받쳐 들게 하고, 향과 꽃을 가지고 앞에서 왕의 행렬을 인도하게 하였다. 그밖에 비구 200여명에게 명하여 부처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왕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왕의 화려한 행렬은 ‘미륵하생경’에 예고된 용화세계가 이미 지상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상징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궁예 왕은 경문(經文) 20여권을 지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신종교의 교리서이자 예언서였던 것 같은데, 불교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대목이 매우 많았다. 이를 참다못해 석총(釋聰)이란 승려는 “이것은 모두 이단의 주장이며 괴이한 말이므로 가르쳐선 안 된다.”라고 반발하였다. 분노한 궁예 왕은 석총을 철퇴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 50) 결국 미륵불의 화신을 자처한 궁예 왕은 실정을 거듭한 결과, 부하인 왕건 장군에게 밀려났다. 이와 더불어 그가 창립한 신종 미륵불교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의 역사에는 수많은 자칭 미륵불이 출현했고 그때마다 예언서가 큰 역할을 차지했다. ●조선후기의 자칭 미륵불 여환과 예언서 조선 후기에도 자칭 미륵불의 전통은 이어졌다. 숙종 14년(1688) 8월 승려 여환(呂還)이 관련된 변란사건이 주목된다. 그의 주된 활동무대는 경기도와 황해도의 몇몇 고을이었다. 여환은 양주목 청송면에 본거지를 두고 여러 곳을 오가며 신도를 포섭했다. 자기 자신을 “신령”(神靈)이라 일컫기도 하고,“수중 노인”(水中老人) 또는 “미륵 삼존”(彌勒三尊)이라고도 했다.“천불산 선인(仙人)”이라고도 하였다. 다양한 칭호에서 보듯, 여환의 신종교는 불교 특히 미륵불교에 기원을 두고 도교적인 측면도 가졌다. 본래 강원도 통천의 승려였던 여환은 “석가모니의 운수가 끝났으니 이제 미륵이 세상을 주관한다.”며 미륵세상을 선포했다. 그는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부린다고 했는데, 지관 황회, 평민 정원태 등을 동원해 많은 신도를 끌어 모았다. 여환은 “일찍이 칠성님이 강원도 김화(金化) 천불산(千佛山)에 강림하여 내게 3가지 국(麴·누룩)을 주었는데 국(麴)은 국(國)과 음(音)이 서로 같으니 짐작해 보라.”고 했다. 자기가 바로 새 왕조의 임금,‘정감록’에 기록된 진인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다만 그때는 아직 ‘정감록’이 출현하기 전이었으므로, 여환은 ‘진인’의 선구로 간주될 만하다. 자칭 미륵불인 여환은 직접 예언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구절도 포함돼 있었다.“7월에 큰비가 퍼붓듯 쏟아지리라. 그러면 큰 산도 무너지고 서울도 재난을 입어 쑥대밭이 되리라. 그러면 그해 8월이나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 가라. 대궐 한가운데 보좌를 차지하리라.”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에 이같은 구절은 없다. 그러나 유사한 구절은 얼마든지 있다. 따지고 보면, 여환이 지은 예언서는 ‘정감록’의 가까운 조상이었다. 결정적인 해 무진년(1688) 7월15일 여환은 참모들을 비롯해 양주와 영평의 광신자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잠입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큰비는 오지 않았고, 쿠데타는 불발했다. 여환을 비롯한 신도 50여명이 체포됐다. 당국의 엄한 취조를 받은 끝에 그 중 11명이 사형을 받았다.(실록·숙종 14년 8월1일 신축) 그 사건이 진압된 후에도 자칭 미륵불은 계속 등장했다. 민중과 미륵불 그리고 예언서는 여전히 불가분의 관계였다.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전북 고창의 선운사 동불암의 미륵불 배꼽에서 비장의 예언서가 나왔다고 한다. 고려 때의 미륵불이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의 선구였다면, 뒷날에는 진인의 별명이 되다시피 했다. 미륵불은 새 세상을 약속하는 영원한 상징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식탁 위의 쾌락/하우드룬 메르클레 지음

    식탁 위의 쾌락/하우드룬 메르클레 지음

    ‘엠마가 들어서자 사람들은 온갖 꽃과 고급스런 식탁보의 기분 좋은 향기, 다양한 요리와 트뤼플 버섯 냄새가 섞인, 미풍으로 둘러싸이는 느낌을 받았다. 촛대 위의 촛불은 식기에 새겨진 은종 위에 길게 불꽃을 드리우고, 은은한 미광이 날카롭게 조각된 크리스털을 비추고 있었다.’ 여기 등장하는 ‘엠마’는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이다. 그녀가 앉아 있는 식탁은 인간이 꿈꾸는 모든 게 갖추어져 있다. 맛있는 요리와 와인, 크리스털 유리잔, 촛불, 꽃, 향기가 나는 식탁보 등등.‘감각을 위한 축제’로서의 식사는 바로 이런 식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까? 독일에서 호텔경영과 요리, 철학을 공부한 하우드룬 메르클레의 책 ‘식탁 위의 쾌락’(신혜원 옮김, 열대림 펴냄)은 이런 모든 것들, 미와 맛, 향유와 감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오디세이아’가 쓰여졌던 기원전 700년 초기 그리스시대의 식사에서 시작해 고대 로마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와 19세기의 모습까지. 저자는 식탁을 둘러싼 다양하고 일상적이며, 동시에 특별한 모습들, 즉 손님 접대와 식탁문화에 대해, 음식과 와인 즐기기에 대해, 그리고 훌륭한 맛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또 각기 다른 시대마다 음식 섭취라는 행위가 어떻게 미학적인 일로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스시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보여주는 만찬은 손님 접대의 절정을 보여준다. 손님의 발을 씻겨주고 새옷을 내주는 등 경건함과 공손함이 종교적 분위기마저 풍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향연 진행과정은 너무 완벽해 가히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축제의 절정은 식사시간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여흥, 즉 시를 짓거나 화가와 음악가들의 공연, 재담, 게임 등에서 완성됐다. 로마시대 권력층에게 식사는 곧 부와 권위의 과시였다. 이들은 호화주택에서 엄청난 파티를 열어 최고급 요리를 무제한적으로 제공했다. 평민들은 앉아서 음식을 먹었던 반면 부자들은 비스듬히 누워서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당시 포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수저와 나이프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와 고기를 먹기 좋게 자르는 하인들만이 사용했다.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중세엔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의 구분이 확실했다. 곡물을 껍질째 빻아 만든 무겁고 거무튀튀한 빵은 ‘나쁜 음식’으로 농민들이, 밀가루로 만든 눈처럼 하얀 ‘좋은 빵’은 귀족들이 먹었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날짐승들, 꿩, 오리, 비둘기, 메추라기 등과 야생짐승 고기는 귀족들의 만찬에 쓰였다. 반면 돼지, 황소 등의 고기는 농부들에게 적합한 음식으로 여겨졌다. 계층의 서열이 위협받지 않도록 그에 맞춰 소비하는 ‘사치법’이 생겨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사람들은 음식 그 자체를 넘어 식사도구와 식탁보, 식기 등 식탁을 둘러싼 것을 미학적으로 꾸미기 시작한다. 귀족들이 포크 사용에 매달린 것도 이때부터다. 전문 요리사와 요리책, 다양한 상차림 등 새로운 음식문화 양식이 이때 등장했다. 메뉴와 차림표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식탁이 회의용 탁자처럼 변하는 등 현대화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이후 시민사회가 들어서면서부터다. 또 진정한 미식이 무엇인지, 칭찬과 감사의 말을 표현하는 것이 식사를 얼마나 즐겁고 아름답게 만드는지 미학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며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오늘 저녁 때는 가장 아끼는 식탁보를 꺼내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따뜻하고 아름다운 식탁을 꾸며 보는 게 어때요?’라고.1만 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3)묘청은 ‘정감록’의 숨은 뿌리였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3)묘청은 ‘정감록’의 숨은 뿌리였다

    조선 광해군 때였다. 술관 이의신이 상소하여, 경기도 교하현(현재는 파주군 교하)으로 서울을 옮기자고 주장했다. 한양의 지기가 쇠했기 때문이라 했다. 당파싸움과 청나라 세력의 등장으로 골치아파하던 광해군은 이의신의 천도론에 솔깃해 했다. 그러자 예조 판서 이정구는 이의신의 천도론을 거세게 공격했다. 풍수설은 유교 경전과 거리가 먼, 한낱 방술(方術), 아무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거였다. 이 때 이정구는 멀리 고려 때의 일을 들먹였다.“요승 묘청(妙淸)이 음양가의 설을 빌려 임금을 현혹했습니다.‘송경은 왕업이 이미 쇠하였는데, 마침 서경에 왕기가 있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하여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새로 궁궐을 짓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변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실록, 광해 4년 11월 15일 을사) 이정구의 이 같은 주장으로 이의신의 천도론은 무너졌다. “요망한 승려” 묘청을 연상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한국 역사상 묘청만큼 천도문제를 개혁과 맞물려 철저하게 내세운 이는 없었다. 그는 국정을 쇄신하고 종속적인 기왕의 대외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도론을 폈다. 잘 따져 보면 묘청의 천도론은 ‘정감록’과 일맥상통한다. 정감록의 주요 골자는 계룡산에 도읍해 세 세상을 열자는 것인데, 묘청의 생각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예언가 묘청의 비극 묘청은 서경(평양)의 승려다. 그는 인종 5년(1127) 검교소감(檢校少監) 백수한의 천거로 조정에 알려졌다. 서경의 천문 지리 관계 분사(分司)를 이끌던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였다. 이후 8년 동안 묘청은 인종의 신임을 받으며 국정을 좌우하다시피 했다. 그 무렵 내외정세는 무척 혼란했다. 권신이 날뛰고 북방의 금(金)나라가 압력을 가해오는 상황이었다. 인종은 수도 개경 출신의 귀족들을 억제할 생각이 없지 않았다. 혹시 금나라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에 대한 대비책도 강구해야만 되었다. 묘청은 인종의 이런 고민을 잘 헤아렸다. 묘청이 제시한 해결책은 서경천도였다. 인종7년(1129) 묘청의 강력한 추진력에 힘입어 서경에 신궁이 낙성되었다. 이 기회를 빌려 묘청 일파는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움)을 주장했다. 금나라에 대한 선제공략도 건의했다. 실로 국가의 명운을 건 과감한 시책이었다. 인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비롯해 여러 도참설을 이용하였다. 신비한 이적을 조작하기도 했다. 예컨대 인종이 신축된 서경의 궁궐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는 순간 공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고 허풍을 친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서경 한 가운데를 흐르는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다고 야단이었다. 신룡(神龍)이 침을 토해 강물에 오색빛깔이 영롱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신이한 현상에 대해 묘청 측은 위로 천심에 따르고 아래로 인망을 잃지 않은 결과라며 장차 고려는 동북아 최강의 패자로 급부상하던 금나라도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저절로 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환청 같은 것에 불과했다. 대동강물에 서기가 비친 것도 역시 조작된 것이었다. 묘청 등은 남몰래 큰 떡을 빚어서 속을 빼내고 볶은 기름을 채운 뒤 구멍을 뚫었다. 그런 다음 이 떡을 대동강에 가라앉힌 것이었다. 떡에서 나온 기름방울이 햇빛에 비쳐 오색을 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고려사’, 권 127) 처음에 인종은 묘청의 개혁안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러나 왕은 결국 묘청과의 약속을 배반했다. 본래 왕의 성격이 우유부단한데다 개경의 구 귀족들이 벌인 반대공작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묘청과 대립한 개경파의 거두는 김부식이었다.‘삼국사기’의 저자로도 유명한 김부식은 문무를 겸전한 인물이었다. 그는 개경의 구 귀족 세력을 결집시켜 우선 인종과 묘청을 이간시키고, 이어서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를 완전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인종13년(1135) 묘청은 더 이상 인종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력으로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해 평양에 새 나라를 세웠다. 국호를 대위(大爲)라 정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묘청의 군대는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하늘이 보낸 충의로운 군대)이라 불렀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끌던 고려군의 전술적 능란함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묘청은 한 때 그의 충실한 부하였던 조광에게 암살되었다. 이로써 묘청의 개혁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말까지도 유학자들은 묘청을 단죄해 왔다. 앞에 예로 든 이정구처럼 유학자들의 눈에 비친 묘청은 한갓 요망한 승려에 불과했다. 예언과 이적을 빌려 나라를 망치려 든 역적이란 것이다. 이런 악평을 처음으로 뒤집은 이는 아마도 단재 신채호(1880~1936)일 것이다. 그는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을 한국사에 있어 자주노선과 사대노선이 격돌한 일대사건으로 보았다. 신채호에 따르면, 묘청의 실패는 한 개인의 패망이 아니라 한민족의 주체성이 외세의존적인 세력에 완전히 무릎을 꿇고만 중대사건이었다. 나는 신채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묘청의 행적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예언가 묘청은 개혁의 웅지를 품었던 역사상의 일대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서경 궁궐터와 36국 조공설 ‘정감록’을 신봉하는 이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하면 나라의 수명은 6백 년이요,36국의 조공을 받게 된다. 사실상 세계 통일 정부가 한반도에 출현할 시운이 오는 것이다.” 지리산 청학동 골짜기에 있는 어느 신종교의 본부 건물에 부착된 주련(柱聯)에도 비슷한 구절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세계의 운이 돌고 돌아 이제 동방의 작은 나라로 들어오리라.”는 것이다. 36국이라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36이란 숫자는 자연수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인 지리 관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동, 서, 남, 북의 4방으로 나뉜다.4통8달이란 말도 있지만 4방은 다시 여럿으로 세분화된다.12 간지를 모방해 지관의 나침반에서 보듯 4방은 다시 12로 나뉜다. 이것이 36으로 더욱 미세하게 갈라지기도 한다. 요컨대 36은 온 세상을 포괄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장차 한국이 36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게 된다는 말은, 다시 말해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로 등장한다는 뜻이다. 물론 세상 모든 나라가 한국에 굴복할 거라는 기대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알다시피 고대로부터 중국대륙에는 강대한 정치세력이 연이어 들어섰다. 그들 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엔 독특한 세계 질서가 형성되었다. 조공체제란 것이다. 한 편엔 당연하다는 듯 조공을 받는 문명한 큰 나라가 있고, 다른 한 편엔 조공을 바칠 의무를 걸머진 여러 개의 미개한 나라들이 있다고 보는 위계적인 세계관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여진과 유구 등 몇몇 나라의 조공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 조공을 바쳐야만 되었던 경우가 좀더 많았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한국 사람들은 언젠가 다른 나라들에서 조공을 받는 날이 오기를 꿈꾸게 되었다. 근원을 헤아려 볼 때 ‘정감록’ 신봉자들이 36국 조공설을 주장하는 것은 민중의 오랜 갈망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조공 자체에 비중을 둔 것 같지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새 국가의 건설을 바랐던 염원으로 봐야 옳지 않을까 한다. 36국 조공설을 처음으로 편 사람은 다름 아닌 묘청이었다. 그것도 서경천도론을 펴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인종 6년(1128) 고려 수도 개경의 인덕궁과 남경(뒷날의 한양)에 있던 궁궐이 연이어 화재를 입었고, 이 무렵 묘청은 이렇게 주장했다.“서경에 있는 임원역의 지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 곳이 음양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만약 그곳에 궁궐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습니다. 금나라가 조공을 바치게 되고 저절로 항복해올 것입니다.36국이 모두 조공을 바치게 될 것 입니다.”(‘고려사’, 권 127) 이 말에서 보듯 묘청은 한국의 지세를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체로 인식했다.“대화(大華)”란 대화(大花)다.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로 볼 때 가지마다 크고 작은 꽃이 핀다. 이것이 각지의 길지 또는 명당이다. 이들 명당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명당이 큰 꽃이다. 그 자리가 평양 임원역에 있으므로, 그곳에 궁궐을 지으면 나라가 가장 융성하게(大華) 된다는 것이다. 인종은 묘청의 36국 조공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동안 개경의 귀족들에게 억눌려 지내온 자신의 처지를 일거에 개선하고, 나아가 쇠약해진 국운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왕은 묘청의 건의에 따라 서경에 궁궐을 지은 뒤, 개혁의 꿈을 이렇게 담아냈다.“해동 선현(海東先賢 옛날의 어진이들 즉, 예언가들)이 말하기를,‘대화세(大華勢)에 궁궐을 창립하여 나라의 운명을 연장할 것이다.’고 했다. 이제 이미 그 터를 잡아 새로 궁궐을 지었다. 나는 때때로 그곳을 순회하여 은혜와 덕택이 안팎에 고루 미치게 하려 한다. 이를 기념하여 죽을죄를 범한 자는 감하여 유배형에 처하고, 유배 형 이하의 죄를 지은 자는 모두 용서하겠다.”(‘고려사’, 권 16) 인종이 내린 글에서 보듯, 묘청은 ‘대화세´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앞 시대의 예언서에서 찾아 놓고 있었다.‘해동선현’이 했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 예언이 묘청 일파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어쨌거나 인종은 서경에서 발견된 대화세 명당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당시 조정 대신들 가운데서도 문공인과 임경청 등 일부 인사들은 묘청을 추종했다. 그들은 묘청을 “성인(聖人)”이라며 떠받들었다. 묘청의 제자 백수한 역시 그들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다. 문공인 등은 왕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모든 국가의 일을 묘청과 백수한 두 사람에게 일일이 자문한 뒤에 시행하십시오. 그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나라가 다스려져 평안할 것입니다.”(‘고려사’, 권 127) 이 말대로 인종은 한동안 묘청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좇았다. 그러나 의심 많고 나약한 왕은 결국 묘청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왕은 신하들이 “성인”이라 추앙하는 묘청의 종교적 카리스마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훗날 조선조의 중종이 개혁파 조광조를 중용하다가 겁을 내어 처단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인종은 본래 자기의 적이었던 송경의 귀족들을 앞세워 묘청을 제거했다. 묘청의 죽음과 더불어 36국 조공설은 끝장났다. 하지만 그 꿈은 민중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았다. 묘청이 죽은 지 900년 가량 지난 오늘날에도 ‘정감록’ 신도들은 여전히 36국 조공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묘청의 팔성당과 십승지 묘청이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로 인식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대화세´로 집약되는 묘청의 풍수 이해 가운데서 나는 ‘정감록’에 언급된 십승지의 원형을 본다. 이런 짐작은 인종9년(1131) 묘청이 인종에게 올린 글에서 더욱 뚜렷이 확인된다. 그는 궁궐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국토의 수호신인 여덟 성인을 위해 사당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여덟 성인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깊었다. 동시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팔성”에 관한 묘청의 말은 이랬다. “첫째는 호국(護國) 백두악(白頭嶽 백두산) 태백선인(太白仙人)인데 실체는 문수사리보살(文殊舍利 菩薩)입니다. 둘째는 용위악(龍圍嶽 금강산으로 추정) 육통존자(六通尊者)로 실체는 석가불(釋迦佛), 셋째는 월성악(月城嶽 경주 남산으로 추정) 천선(天仙)으로 실체는 대변천신(大變天神), 넷째는 구려(駒麗) 평양선인(平壤仙人)으로 실체는 연등불(燃燈佛), 다섯째는 구려(駒麗) 목멱선인(木覓仙人 목멱은 남산)으로 실체는 비파시불(毗婆尸佛), 여섯째는 송악(松嶽) 진주거사(震主居士)로 실체는 금강색보살(金剛索菩薩), 일곱째는 증성악(甑城嶽 속리산으로 추정) 신인(神人)으로 실체는 륵차천왕(勒叉天王), 여덟째는 두악천녀(頭嶽天女 이른바 지리산 聖母)로 실체는 부동우파이(不動優婆夷)입니다.”(‘고려사’, 권 127) 묘청의 주장은 ‘정감록’의 십승지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가 거론한 지명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두산을 비롯해 백두대간의 주요 마디가 중시되었다. 백두산, 금강산, 속리산 및 지리산을 비롯해 송악산과 서울 및 경주의 남산 등이 언급되었다.‘정감록’에 언급된 길지들이 이들 여러 산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얼핏 보기에 ‘정감록’과 전혀 다른 점도 눈에 띈다. 전국 8대 명산의 실체를 도교의 신선이자, 불교의 불보살로 인식한 점이다.‘정감록’에는 이런 종교적 관점이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없지는 않다. 부안의 변산이나 보은 속리산처럼 미륵불교의 성지가 십승지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례로 ‘정감록’의 핵심 예언서에 해당하는 ‘감결’을 살펴보더라도 불교 최고의 성지 금강산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불교의 성지가 바로 최고의 명당이요, 국가의 운명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이런 믿음이 풍수지리사상과 결합해 팔성당이나 십승지라는 관념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에는 불교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다.‘정감록’에는 불보살의 존재가 그저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더욱이 ‘정감록’을 전국에 전파시킨 술사들이 유교적 교양을 갖춘 평민 지식인들이고 보니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묘청이 팔성당의 건립을 주장했을 당시만 해도 사정은 아주 달랐다. 왕은 화공을 시켜 팔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당대 최고의 명문장 정지상은 팔성의 덕을 이렇게 찬양했다.“오직 천명(天命)만이 만물을 제어할 수 있고 오직 땅의 덕(土德)만이 사방에 왕 노릇을 하게 돕는다. 이제 평양 한 가운데 대화(大華)의 지세를 골라서 궁궐을 새로 짓고 음양의 이치에 순응하여 팔선(八仙)을 모시노라. 백두산을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으니 밝은 빛이 어리누나.” 묘청은 한국 풍수지리의 비조(鼻祖) 도선국사의 정맥(正脈)을 이었다고 했다. 도선의 후예답게 그는 팔성당 이론을 폈고, 이는 훗날 십승지설로 다시 피어나게 될 운명이었다. ●묘청의 새 상원(上元)과 후천개벽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감록’의 이면에 간직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도 실은 묘청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이다. 인종10년(1132) 왕이 반포한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옛 가르침(예언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천지가 생긴 뒤 수만 년이 지나면 반드시 동지(冬至)가 갑자일이 되리라. 그때가 되면 해와 달 그리고 수화목금토 다섯별이 모두 정북(正北,子)에 모여든다. 이 때를 상원(上元)으로 삼아 일력의 출발점을 삼으라. 천지가 열린 뒤 성인(聖人)의 도(道)가 이때부터 행해질 것이다.’(‘고려사’, 권 16) 하늘을 수놓은 일곱 개의 주된 별이 정북에 모이는 동짓날이 되면 후천이 개벽된다는 예언이었다. 이런 예언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묘청이었다. 그는 그해 동짓날을 기점으로 후천개벽이 시작된다며 왕에게 정치의 혁신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결국 묘청의 제안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건 그랬지만 한국 민중은 묘청이 한 번 싹을 틔운 이상세계의 꿈을 끝내 접지 않을 것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알림 지난 18일자에 게재된 정감록 32회 기사중 경북 울진 ‘불영사’의 한자 표기는 ‘不影寺’가 아닌 ‘佛影寺’이기에 바로잡습니다.
  • [책꽂이]

    ●붐 그리고 포스트 붐(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외 지음, 송병선 옮김, 예문 펴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붐’소설과 대중적 리얼리즘으로의 회귀를 표방한 ‘포스트 붐’소설 등 20세기 중남미 작가들의 단편을 묶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마르케스의 ‘꿈을 빌려드립니다’, 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의 ‘에밀리아에 관한 편지’, 이사벨 아옌데의 ‘배신당한 사랑의 연애편지’ 등 16편 수록.9800원. ●새로운 천사(이신조 지음, 현대문학 펴냄) 1999년 ‘기대어 앉은 오후’로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저자의 두번째 창작집. 연인의 아버지를 엄마의 재혼 상대로 맞아야 하는 딸의 갈등을 그린 ‘미혹’, 열세살 소녀의 성장기인 ‘새로운 천사’ 등 섬세한 감수성으로 빚어낸 9편의 단편이 실렸다. 9000원. ●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이문숙 지음, 창비 펴냄) ‘여름 한낮/고요한 버스는 장의차 같네/나를 운구해 가는 저 햇볕들의/따가운 행렬’(‘정오의 버스’중). 수시로 삶을 파고드는 소멸과 죽음의 의미와 사소한 일상의 풍경에서 생동하는 우주의 기운을 감지하는 시인의 독특한 시 세계를 담았다.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후 낸 첫 시집.6000원. ●끝에서 두번째 여자친구(왕원화 지음, 문현선 옮김, 솔 펴냄) 중국·일본 등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타이완 작가 왕원화의 장편소설. 고독한 도시남녀의 삶과 사랑을 객관적이고 경쾌한 문체로 그려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바라보는 세밀한 시선과 따뜻한 온기가 빛난다.9800원. ●한권으로 읽는 한국의 기담괴담(김원석 엮어씀, 문학수첩 펴냄) 신라·고려·조선을 아우르는 폭넓은 시대 배경과 임금, 권문세족, 양반, 평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고민과 사건들을 담은 31편의 기이한 이야기를 실었다. 일본편이 함께 나왔고, 중국편은 곧 출간 예정. 각권 8500원.
  • 묘비도 관도 없이 흙속으로…

    ‘살아선 왕족의 영예, 죽으면 평민과 함께 흙으로.’ 사망 이튿날인 2일 곧바로 수도 리야드의 알 우드 공공묘역에 안장된 파드 빈 압델 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검소하기 이를 데 없는 장례식이 화제를 낳고 있다. 화려한 이승에서의 삶을 누렸던 파드 국왕이지만 국장(國葬) 절차도 없이 그는 관에 몸을 뉘지도 못하고 수의만 걸친 채 흙으로 돌아갔다. 전대 사우드, 파이살, 칼레드 국왕 등과 함께 묻혔지만 주위에는 평민들도 나란히 누워 있다. 묘역에는 어떤 묘비나 봉분도 찾을 수 없으며 표지 없는 돌들로 묘역은 구분될 따름이다. 이런 장례 절차는 중동의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사우디 왕가의 창시자 모하마드 이븐 사우드가 1745년 받아들인 와하비즘(Wahhabism)이란 교리에 따른 것이다. 수니파 지도자 모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1703∼1792)에서 유래한 이 분파는 기독교의 청교도와 마찬가지로 철저한 검약과 엄격한 생활을 강조한다. 와하비즘은 고인의 묘소를 참배하는 일조차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 압둘라 요르단 국왕 등은 장례 전 이맘 토키 빈 압둘라 사원에서 열린 영결 의식에만 참석할 수 있었다. 재미 있는 것은 테러조직 알 카에다도 와하비즘을 신봉하고 있다는 점이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씨줄날줄] 협상의 여유/이목희 논설위원

    우리 헌정사에서 정치협상력이 돋보였던 시절로는 1988년 6공 초기가 꼽힌다.3김씨가 야당 지도부에 포진한 여소야대 정국에, 민주화욕구,5공청산까지 얽혀 복잡했던 시기였다. 도대체 협상이 이뤄질 것 같지 않은 구도가 그런대로 굴러간 배경에는 여야 원내총무 진용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당인 민정당 총무는 고인이 된 김윤환씨였고, 제2당 평민당 총무는 김원기 현 국회의장이었다. 민주당·신민주공화당 총무는 최형우·김용채씨였다.4당 총무회담이 열리면 2∼3시간씩 걸렸다. 기자들은 ‘3시간여 격론’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고 한다.4인 사이에는 발표문이 금방 만들어지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회담을 일찍 끝내면 진지해보이지 않는다. 잡담을 하거나, 각자의 보스에게 합의내용을 유리하게 포장해 보고하는 방법을 얘기하며 적당히 시간을 때웠다. 정치·외교협상에서 여유를 가짐으로써 나은 결과를 가져온 사례는 많다. 나폴레옹전쟁을 마무리짓는 빈회의가 대표적이다. 춤파티로 일관해 ‘회의는 춤추고, 진전은 없다.’는, 생산성을 비꼬는 말을 남겼다. 패전국 프랑스는 일류 요리사를 보내 최고급 와인과 음식을 연일 제공했다. 당연히 프랑스에 관대한 조치들이 결정됐으며, 이는 오랫동안 유럽의 평화를 가져왔다. 그동안의 북·미 접촉을 보면 긴장감이 먼저 흐른다. 상대를 원수로 여겨서는 협상이 되질 않는다. 국가간 전쟁상태라도 협상대표 사이가 그래선 안 된다. 비록 공개할 수 없어도 화기애애함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6자회담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좋다고 한다. 견해차가 심각함에도 비난의 목소리가 없다. 지난달 30일에는 북한측이 미국 대표단을 초청해 비공식 만찬을 베풀었다고 한다. 북·미의 태도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1994년 1차 북핵위기때에는 햄버거가 협상파탄을 막았다고 로버트 갈루치 당시 미국 대표가 회고록에서 밝혔다.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자 갈루치는 책상을 내리쳤다. 결렬이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북한 관리 부인이 맥도널드 햄버거를 사와 “드시면서 하시라.”고 했다. 양국 대표단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긴장을 풀었고, 회담은 타결 순간까지 인내심으로 이어졌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한국인 얼굴 과거·현재·미래] 미간등 150곳 측정값·해부학적 형질 ‘결합’

    [한국인 얼굴 과거·현재·미래] 미간등 150곳 측정값·해부학적 형질 ‘결합’

    어디선가 본 낯익은 얼굴들인데…. 한국인의 ‘대표 얼굴’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얼굴들이다. 그럼에도 낯익은 느낌은 왜일까. 이미 머릿속에 이미지로 형상화된 얼굴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이 기획한 ‘대표 얼굴’은 사진 고증과 얼굴 150곳의 측정값, 통계 자료 및 해부학적 형질 등이 반영된 과학적 분석의 결과물이다. 눈동자는 인종에 관계 없이 똑같다는 것을 전제로 인물의 사진을 눈동자에 맞춰 대표 얼굴을 만들어 내는 종래 방식을 한 단계 넘어섰다. 조용진 교수팀은 우리 얼굴의 시대적 변화상을 찾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1911년부터 촬영한 남·북한 128개군의 성인 남녀 사진 1228장을 분석했다. 양반과 평민 등 신분에 상관 없이 사진에 찍힌 4000여명이 조사됐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형질을 연구하기 위해 사진을 채집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 한국인은 얼굴연구소가 수집한 1980년대 남녀 출생자 3000명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했다.1인당 1500개의 얼굴값 가운데 주요 부위 150곳이 활용됐다. 한국인의 80%인 북방계형을 기준으로 비교적 한국인의 원형에 가까운 경기 내륙지역의 얼굴을 표준으로 삼았다.100년 전과 현대 한국인 남녀는 연령층이 20대로 각 부위의 평균값을 가장 많이 보유한 얼굴들을 합성한 끝에 탄생됐다. 미래형 얼굴은 복잡한 공정을 거쳤다.1900년 초부터 현재까지 비교 분석된 측정값이 정밀하게 반영됐다. 얼굴연구소에 따르면 얼굴 좌우의 최대폭은 평균치가 100년 전 남성이 15.4㎝, 여성은 14.5㎝였다. 현대 남성은 16.5㎝, 여성이 15.5㎝로 늘어났다. 이처럼 과거 100년 동안의 변화로 나타난 얼굴 및 두상의 길이와 폭, 좌우 동공거리, 코와 이마 등 주요 측정값이 삽입된 ‘예측 얼굴’이 미래의 얼굴이다. 3D 전문 업체인 플라잉 피그의 전문가 5명이 석고상으로 제작된 얼굴을 복원했다. 평면인 얼굴을 3차원으로 입체화하는 모델링과 피부를 입히는 매핑, 여자의 경우 한 올씩 머리카락을 심는 이펙트 작업을 거쳐 마침내 100년 후 한국인 얼굴이 컴퓨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3당합당’ ‘DJP연합’ 못지않을 파괴력

    여권 핵심의 ‘연정 구상’이 현실화된다면 정치적 파괴력은 과거 ‘3당 합당’이나 ‘DJP 연합’에 못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소야대의 상황을 탈피하기 위한 ‘승부수’라는 점에서는 현재의 ‘연정 구상’은 이전 정권들의 ‘정치적 사건’과 공통점을 갖는다. 지난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당시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은 정치구도를 ‘1여3야’에서 ‘거대 여당 대 평민당’의 구도로 뒤바꿨다.88년 13대 총선에서 처음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이 무너지면서, 민주개혁 세력도 분열됐다. 또 지난 98년 ‘국민의 정부’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대, 즉 ‘DJP(김대중·김종필)연합’으로 정권을 잡았다. 출범 첫 내각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 자민련 소속 국회의원 6명이 입각했다. 전문성이나 업무 조정력 보다는 대선 승리에 따른 DJP연합의 지분 나눠먹기 성격이 짙었다. 현 여권은 지지부진한 개혁 입법과 이로 인한 국정 운영의 차질을 ‘연정 구상’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재집권을 위한 ‘세력 연대’라는 주장을 표면적으로 올리지는 않고 있다. 여권의 ‘연정 구상’은 평소 ‘정치인 장관’이나 ‘권력 분산’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과도 상충되지 않는다.현재 국무회의 의결권을 가진 국무위원 20명 가운데 절반인 10명이 여당 정치인 출신이다. 이해찬 총리, 정동영 통일·김근태 보건복지·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은 지난 1일로 입각 1년을 맞았다. 김진표 교육·천정배 법무·박홍수 농림·이재용 환경·추병직 건교·오거돈 해양수산부 장관도 열린우리당 출신이다.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옛공부의 즐거움/이상국 지음

    옛 글이 딱딱하고 고리타분하다는 건 옛날 얘기다. 요즘 나오는 고전 책들을 보면, 아니 그중에서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들을 보면 고전이 ‘옛날이란 시대’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신영복의 ‘강의’(돌베개)가 그렇고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가 그렇다. 그런데 조만간 여기에 목록 하나를 추가해야할 것 같다.‘옛공부의 즐거움’(이상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부제를 ‘고전에서 누리는 행복한 소요유’로 붙였듯, 옛 사람과 글, 그림을 불러다 놓고 대화를 시도한다. 옛 글이 주는 묵직함과 모호한 느낌을 취향에 맞게 다듬고 색깔도 입혀 즐기면서 놀아보자는 게 이 책의 의도. ●노자와 장자 불러다 놓고 ‘도덕경’ 논해 대화와 놀이의 대상은 누구인가.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 나오는가 하면, 추사 김정희와 소치 허유가 나오고, 노자와 장자를 불러다놓고 박경리·김춘수가 ‘도덕경’과 ‘소요유’를 논한다. 지은이가 이들과 어떻게 교유하는가 잠깐 엿보자.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골라 살고 싶은 시대를 택하라면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가 한 하늘 하래 동거하는 18세기 조선에서 살고 싶다는 지은이. 그는 글과 실용의 일치를 주장하고 실천했던 연암의 글을 요즘 말로 각색해 공리공론을 일삼던 선학들을 꾸짖는다. ‘…선배들, 고상한 학문적 변론을 하겠다고 덤벼들었다가 마침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감정시비가 되어 서로 미워하고 욕질하는 폐단의 주인공들이 아닌가…. 이론에 이론을 덧대 자꾸만 아리송하고 복잡다단한 말장난의 영역으로 치닫는 걸 못 느끼겠는가. 이제 그런 짓거리를 그만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화담 서경덕은 지은이의 표현에 따르면 ‘나와 동일시하는 만용을 부리는’ 인물로 표현된다. 지은이가 중학교 때 수학시간에 얽힌 추억 때문.‘피타고라스 정리’의 원리를 증명해오라는 숙제를 자습서없이 밤새워 ‘독학’으로 풀었던 기억이다. 다음날 칠판 가득 써내려간 증명과정을 보고, 선생이 ‘내 수학선생 한 지 10년도 넘었지만 너처럼 길게 희한한 방식으로 증명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가르쳐줘서 고맙다.’라고 했단다. 화담은 황진이와의 ‘스캔들’로 더 유명해졌지만, 당대에 가장 큰 성취를 이룬 독학파 학자였음을 지은이는 상기시킨다. 화담이 당시 조류와는 다른, 과학적이면서도 독창적인 학문을 갖게 된 것은, 철저한 ‘자학’(自學) 때문이라고 믿는다. ●고전과 옛 그림은 ‘사교의 장’ 지은이에게 고전과 옛 그림은 ‘사교의 장’인 듯하다. 노자의 ‘도덕경’ 하나를 놓고 ‘꽃’의 시인 김춘수,‘바위’의 유치환,‘토지’의 박경리가 만나 작품 이야기를 펼친다. 도덕경이 때로 불꽃 튀는 논쟁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이 땅의 작가, 시인들에겐 더 없는 보물창고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노자가 읊어놓은 5000자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비밀클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도 한다. 문인화의 맥을 이은 소치 허유가 나오는 대목에선 추사 김정희와 예술적 안목이 뛰어났던 임금 헌종에 얽힌 아름다운 삼각관계 이야기가 펼쳐진다. 평민 출신인 허유가 출세해 임금과 나눈 시시콜콜한 대화를 소상하게 적어 남긴 ‘몽연록’ 이야기가 흥미롭다. ‘애효 딜레마와 맹자의 카운슬링’‘논어의 교언영색 콤플렉스’‘인사동에서 만난 최치원’‘꿈이로다 몽유도원’…. 책을 구성하는 각각의 이야기에 붙은 타이틀처럼 고전의 딱딱함과 엄숙함은 어디에도 없다. 지은이는 말한다. “인물의 위대성과 학문적 깊이는 당연히 존숭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무게를 두다 보면,‘인간’을 따뜻하게 바로보기 어렵다. 시간을 넘어서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여러겹’의 삶을 동시에 살기를 꿈꾼다.”고. ●산의 정상이건 중턱이건 즐기면 그만 산이 꼭 정상에 올라야 맛인가. 정상이든 중턱이든 원하는데서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범접하기 어려운 깊이만 따지지 말고, 아는 그 자리, 그 상태에서 아는 만큼 최대한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이 책은 ‘즐기는 고전, 함께 노는 고전’의 전형이 될 듯싶다.1만 1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日노리노미야 공주 11월15일 결혼

    |도쿄 이춘규특파원|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장녀인 노리노미야(紀宮·36) 공주와 도쿄도청 직원인 구로다 요시키(40)가 오는 11월15일 결혼할 계획이라고 왕실업무를 관장하는 궁내청이 18일 발표했다. 식장은 도쿄 시내 데이코쿠호텔이며 결혼식 후 4000∼5000여명의 하객이 참석하는 피로연이 열린다. 일본 왕가 공주의 결혼은 45년 만이다. 노리노미야 공주는 결혼하면 왕실전범에 따라 왕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의 신분이 되며 이름도 남편 성인 구로다에, 유아명인 사야코가 더해져 구로다 사야코(黑田淸子)로 바뀐다. 또 보통 사람들과 같이 주민등록에 이름을 올리며 선거권을 갖게 된다. taein@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8) 18세기 유랑지식인들 정감록을 퍼뜨리다

    ‘정감록’이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1730년대였다. 그것도 차별의 땅 서북지방에서였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고해 조야(朝野)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인데, 금지령 속에서도 재빨리 전국 각지로 번져 나갔다. 누가, 왜 정감록을 퍼뜨렸는가? 그들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이번 호에선 18세기 황해도 출신 술사(術士)인 박서집을 만나 이 문제를 집중 검토하려고 한다.1731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어린 시절 한글본 정감록을 읽었다. 나중엔 예언에 빠져 정든 고향을 등진 채 홀로 충청도 진천으로 이주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782년 정감록 사건에 연루돼 처벌된 사람이다. 박서집과의 대화는 물론 가상 대담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만은 아니다. 필자가 여러 종류의 역사자료를 읽으며 재구성한 것이다. ●술사 박서집 정감록을 발견하다 백:서북지방에서 출현한 정감록이 남부지방에 전파된 것은 대강 언제쯤이었을까요? 박: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알겠어요. 하지만 내 경우엔 이랬어요. 난 사실 어렸을 때 집에서 정감록을 읽었어요. 우리 집은 양반은 아니라도 선친께서 까막눈은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한문에 능통하셨단 얘긴 아니고 그저 ‘명심보감’과 ‘소학’ 정도는 동네 서당에서 배우셨지요. 이유야 자세히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리 집엔 정감록이 있었어요. 백:술사님이 태어난 해가 1731년(영조 7년)이었다지요. 그렇다면 아홉 살 되던 1739년(영조 15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정감록이 문제가 됐습니다. 술사님은 그때 벌써 정감록을 읽으셨나요? 박:아니지요. 열두 살 때 읽었어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아주 선명해요.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서당을 다녔으니까 글은 제때 배운 셈이지요. 읍내 서당에서 ‘사서’(四書)도 좀 읽고 해서 문리는 제법 나 있는 편이었어요. 그래도 한문 책 읽기는 늘 까다롭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그해 한여름에 설사가 심해 집에서 쉬다 심심해서 벽장을 뒤졌어요. 벽장 깊이 감춰둔 정감록을 발견했어요. 한글로 된 필사본이라 단숨에 읽어 버렸어요. 너무 재밌어 그 뒤에도 가끔씩 꺼내 읽었어요. 백:첫눈에 정감록에 반하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술사님을 그렇게 매료시켰나요? 박:아까부터 자꾸만 ‘술사, 술사’ 하고 부르는데 듣기에 별로 안 좋아요. 그건 나를 좀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에요. 기왕이면 도사(道士)라든가 거사(居士) 같은 칭호로 부르는 게 좋겠어요. 이래 봬도 내가 실은 못하는 것이 없어요. 아픈 사람에게 약을 처방해 주지, 땅도 좀 볼 줄 알아서 지관(地官)이라고 대접하는 이들도 많았고 점도 칠 줄 알거든요. 백:죄송합니다. 그럼 거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요새 사람들은 거사님이 살던 18세기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당에 다닌 사람들은 유교 경전만 읽는 줄로 알고 있어요. 박:틀린 생각이지요. 서당에선 천문이나 풍수에 관한 책을 전혀 가르치지 않지요. 그러나 서당에서 배운 한문 실력을 바탕으로 다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는 거죠. 훈장님들도 실은 의술이나 풍수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 마을 사람들의 자문에 자주 응하곤 했어요. 나도 한때는 훈장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지만 말예요. 백:몰라 뵈었습니다. 훈장님! 그러면 훈장님은 주리론(主理論)이니 주기설(主氣說) 같은 복잡하고 어려운 성리철학을 훤히 다 아시겠군요. 대단하십니다. 박:솔직히 말해 난 그런 건 잘 몰라요. 관심도 별로 없고, 실상 배운 적도 없어요. 내 특기라면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잡학이었어요. 대개 시골훈장들이 다들 그랬어요. 백:아마도 평민 출신 훈장님이라서 더욱 잡학에 강했다는 말씀인가 보군요. 그런데 훈장님은 52세 되던 1782년(정조 6년) 정감록 사건 때 충청도 진천에서 체포되셨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서북의 술사들 남쪽으로 향하다 박:그때 그 이야길 여기서 꼭 해야 되나요?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군요. 당시 난 관가에 불려가서 아주 경을 쳤어요. 그건 그렇다 치고 내 본업이야 잡술(雜術)을 파는 사람이었지 어디 점잖은 훈장이라 할 수 있나요. 날 훈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거사라고 불러 주시오. 백:그래요, 거사님. 그런데 거사님은 왜 정든 고향을 떠나셨지요? 박:솔직히 말해 나와 같이 먹물 든 사람이 무슨 낙으로 농사를 짓겠어요? 속이 답답해 절대 안 되지요. 그렇다고 내 처지에 과거에 급제해 무슨 벼슬이라도 하겠어요? 그 역시 아니었어요. 차별 받는 서북지방 그것도 평민 출신인 나로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어요. 정말 답답한 이야기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마땅히 마음을 쏟을 만한 일이 거의 없었어요. 나이 스물을 넘기자 난 점점 노골적으로 사회질서에 불만을 품게 됐어요. 그런 내 모습을 보는 게 서글펐지만 하는 수 없는 노릇이었어요. 물론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고 봐요. 차별이 심한 세상에서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요. 백:거사님의 말씀이 이해가 돼요.20세기의 일입니다만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킹 목사는 백인들의 가혹한 차별정책에 맞서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며 소수자의 꿈과 희망을 부르짖었어요.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나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서 철저히 소외됐던 특정 지역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똑같은 맥락에서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해온 여성들의 고통도 마찬가지 일 거예요. 누구든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서면 절망하기 십상이겠지요. 박:고통스러운 내 삶에 희망을 안겨 준 것이 정감록이었지요.‘양반 놈들의 조선’이 끝나야 뭐가 돼도 제대로 될 거라는 생각뿐이었어요. 처음에 난 황해도 평안도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마흔 살 무렵엔 아예 남쪽지방으로 이주했어요. 정감록이 약속한 구원의 땅은 남쪽에 주로 많았거든요. 난 계룡산 언저리를 배회하기도 했고, 삼남지방의 십승지며 수많은 길지를 찾아 일일이 답사했지요.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더군요. 백:거사님이 남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군요. 거사님이 남쪽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도 혹시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나요? 박:그러니까 1770년대였어요. 정감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지요. 바로 내가 관련된 1782년 12월의 정감록 사건만 해도 실은 그 증표가 아닐까 해요.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어요. 예컨대 반역죄로 죽은 문인방 선생님만 해도 평안도 양덕 출신이었지요. 함께 죽은 문 선생님의 제자 백천식도 참 불쌍해요. 문 선생님은 천문과 점술의 대가였어요. 우린 모두 선생님의 말씀대로 정감록이 예언한 새날이 곧 밝아올 줄로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시기상조였던가 봐요. 백:1782년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문인방을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대접하는 걸로 보아 거사님도 그 부하가 분명하군요? 박:문 선생님은 당시 충청도 진천의 산골에 머물렀어요. 진천은 마침 계룡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데다가 그곳이 십승지로도 손꼽히는 길지랍니다. 특히 목천이 아주 좋아요. 뿐더러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해서 진천이야말로 살기에 가장 좋단 말도 있잖아요. 게다가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잉태된 곳이라지요. 그 서기가 아직 남아 있는 곳이라 문 선생님과 제자들은 진천 땅에 머물렀던 거지요. 백:정리하면 문인방과 거사님은 서북 출신으로 정감록을 충청도에 퍼뜨린 전도사였다는 말씀이 되는군요. 박:우리 말고도 여러 명이 있었어요. 황해도 평산 사람으로 지관을 업으로 삼았던 권택인이란 친구가 마침 기억나는군요. 그 친구는 신형하란 젊은이와 친했는데 정감록을 가르쳐 준 일이 있었대요. 한데 이 신형하란 친구가 1780년대 초반엔 이미 전라도로 내려와서 활동 중이었지요. 나나 문 선생님과 함께 연결이 돼 있었지요. 어쨌거나 우리가 삼남지방에 처음 내려갔을 적만 해도 거기 사람들은 정감록이란 이름만 들었지 내용은 다들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그러다 보니 우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정감록이 차츰 퍼져나갔어요. 우린 길지도 살필 겸 직업이 풍수와 점술이라 각지를 떠돌며 돈도 벌 겸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단 말이 있잖아요. 전국의 길지를 배회하며 정감록을 선전하는 우리에게 혐의를 둔 사람들이 있었어요. 우린 마침내 관가에 고발을 당했지요. 문 선생님이나 나나 굴비 두름처럼 한데 묶여 역모죄로 엄한 처벌을 받았어요.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뜻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역량이 부족해 무엇 하나 변변히 준비한 것은 없었어요. 한데도 반역자란 누명을 쓴 채 관헌에 붙들려가 죽게 됐으니 참 기막힌 노릇이었지요. 백:참 딱한 말씀이네요. 어쨌거나 거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지네요. 요컨대 거사님을 비롯한 서북 출신 술사들이 정감록을 전국 각지에 유행시킨 주인공이었단 점은 틀림없군요. ●유랑 지식인들의 사회적 생리와 정감록 박:지금 생각해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은 유랑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아요. 경제적인 기반이 없이 ‘글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거나 ‘혀를 놀려서 먹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 늘 떠돌아 다녔어요. 이런 사람들이 미약하나마 하나의 사회세력을 이룬 것은 역시 18세기가 아니었을까 해요.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몰락한 양반이었지요. 그러나 대다수는 서얼이나 평민이었다고 봐요. 문인방 선생님이나 나는 틀림없는 평민이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난한 하급지식인으로서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서당과 같은, 이를테면 사설 교육기관이 전국 어디나 많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훈장 목숨은 파리 목숨 같았어요. 요새 말로 고용이 불안정해 늘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고요. 백: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18∼19세기 한국사회에 서당이 많이 늘어난 것을 냉소적으로 기술한 적이 있더군요.“군현에는 각 면마다 수십 개 마을이 있고, 대략 네댓 마을에 반드시 서당 한 개 씩은 있다. 서당마다 한 훈장이 앉아 있는데 글을 잘못 가르치는 시골의 무식한 훈장인 주제에 아이들을 수십명이나 거느린다.”라고 했어요. 박:정약용의 말이 좀 지나친 감은 있어요. 그래도 전국 어디서나 초보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서당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말은 분명히 맞아요. 이런 상황이 지속돼 평민이나 서얼 출신의 중하급 지식인이 대량으로 배출됐던 거지요.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단 이야긴데 우리들은 애초부터 과거에 붙기도 어려웠고, 요행으로 시험에 붙었댔자 벼슬길에 나갈 가능성도 거의 없었죠. 신분과 지역이란 이중의 벽을 좀체 넘어설 수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사정이 그렇고 보니 먹고 살길이 막연해 유랑의 길로 나서는 경우가 아주 많았지요. 이를테면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지식인들이라서 현실 비판적이었고 자연히 정감록을 애호하는 핵심적인 부류가 됐어요. 백:그렇군요. 남부지방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정감록을 퍼뜨린 문인방이나 거사님이야말로 18세기에 등장한 유랑 지식인의 전형이었군요. 자력으로는 당면한 정치 및 사회적 불만은 물론이고 생활고조차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사님과 같은 분들은 정치적 예언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었던 거죠. ●정감록 사건에 대한 집권층의 대응조치 박:정감록을 빌미로 역모를 꾀한다는 고발이 있기만 하면 조정은 잔뜩 긴장했던 것 같아요. 정감록을 모두 압수해 불태워 버리자든가 정감록의 출처를 끝까지 조사하자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백:그러나 미봉책을 편 것도 사실이었어요.1739년 정감록이 처음 나왔을 때도 국왕 영조는 함경도 경성에 살던 유학자 이재형 부자를 한직에 등용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어요. 조선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는데도 초야에 묻혀 있던 한두 명의 선비를 발탁한다고 상황이 해결될 수 있었을까요? 박:아마 국왕은 민간에 퍼져 있던 정감록을 모두 거둬들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해요. 정감록을 유포한 장본인을 체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공연히 소란을 피웠댔자 민심만 자극될 테니 어떻게 하겠어요? 차라리 미봉책을 펴는 게 상책이란 판단을 한 걸 테죠. 백:그 말씀이 그럴 듯하군요. 거사님이 처벌 받은 지 한 해 뒤 해주에서 또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어요. 거사님의 고향 해주에서 말이죠. 그런데 국왕 정조의 처분은 매우 관대했어요.“‘정감록’이 안필복의 집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집사람들이 저술한 것은 아니다. 큰 죄는 아니다.”라면서 관련자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했어요. 예언서라는 게 허무맹랑한 내용뿐이므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말했지요. 박:그러나 국왕 정조는 정감록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이상한 일이 황해도에서 발생할까 염려한다.”고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죠. 국왕은 정감록을 이용해 왕조에 대한 반역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도 ‘정감록’을 빙자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지 않아요. 백:해주 사건이 터진 지 2년 지나서였죠.1785년 서울을 비롯해 각지의 인사들이 두루 가담한 이른바 이율과 양형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겠지만 같은 해에 전라도 구례 화엄사의 윤장(允藏) 스님은 절간에 ‘정감록’을 숨겨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적발돼 흑산도로 유배됐어요. 그렇게 본다면 1783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석방된 안필복의 경우는 오히려 예외로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박:1785년 이후에도 ‘정감록’ 사건은 계속 발생했어요. 신분차별과 지역차별이 해결되지 않는 한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봐요. 백:조선의 통치자들은 유교적인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킴으로써 정감록의 유행을 차단하려 했지만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는군요. 늦어도 1780년대엔 ‘정감록’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게 틀림없어요. 정감록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평민 출신의 유랑 지식인들 특히 서북 출신 술사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거사님은 바로 그 주역이지요. 박:내가 죽은 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이렇게 회포를 풀 수 있어서 퍽 다행이었어요. 이젠 정말 편히 잠들겠어요. 나라의 평안을 축수합니다.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스리랑카에서 佛心을 배우다

    스리랑카에서 佛心을 배우다

    고요함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 스리랑카를 아십니까. 열대성기후의 홍차가 많이 나는 나라 스리랑카는 찬란한 고대 불교문화와 태곳적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7곳이나 있는 보물 같은 나라가 바로 스리랑카이기도 합니다. 인도양에 외로이 한 점 떠있는 스리랑카, 홍차 향기가 그윽한 고요와 자비의 나라를 소개합니다. 스리랑카는 전국이 문화유적지라고 할만큼 고대 문화가 잘 보존돼 있다. 유적지는 아누라다푸라와 폴로나루와, 그리고 캔디를 잇는 이른바 문화삼각지대와 시기리야에 몰려 있다. 그중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은 모두 7곳.200m 높이의 커다란 바위산 위에 지어진 왕궁인 ‘시기리야락’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곳. 우선 바위산으로 달려갔다. ●비명과 탄성을 지르는 4시간 수도인 콜롬보에서 시기리야까지는 169㎞. 자동차로 4시간이 넘게 걸린다. 콜롬보를 빠져나가자 도로가 장난이 아니다. 편도 1차선 국도는 울퉁불퉁해 자갈밭을 달리는 것 같다. 달려오는 자동차와 부딪칠까봐 아슬아슬하다. 그렇게 좁은 도로를 추월하며 질주하는 버스. 앞에 마주 달려 오는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든 스리랑카의 근거리 교통수단)은 알아서 피해가라는 듯 마구 추월하며 경적을 울려댄다. 이방인의 눈에 도로는 무법천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나름의 룰이 있다고 한다. 이 룰을 모르고 운전대를 잡았다가는 5분도 못가서 사고가 난다고 한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야자수와 이름 모를 나무들로 뒤덮여 있는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스리랑카만의 자랑이다. 짐짝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며 어렵게 도착한 시기리야는 천둥과 벼락이 한창이었다. 서둘러 호텔로 들어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아침에 눈을 떴다. 붉은빛을 잔뜩 머금은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카메라를 챙겨 스리랑카의 아침을 담으려고 서둘러 7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눈을 뗄 수 없는 황홀경에 숨이 막혔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칸달라마 호수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지저귀던 새들도 잠깐 숨을 고르는 듯 조용했다. 아니 거대한 대자연 앞에서 서니 하나의 점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보다 크기는 작지만 태곳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스리랑카, 그 아름다움을 둘러싸고 있는 고요함. 시간이 멈춘 듯한 나라, 스리랑카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계 제8대 불가사의 누가 높이 200m 바위 위에 궁전을 지었을까. 이야기를 듣고 보니 궁금증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5세기, 아누라다푸라를 지배하던 다투세나왕의 장남 카샤파는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이복동생 목갈라나와는 달리 평민 출신 어머니를 둔 탓에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몹시 우려해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동생 목갈라나의 보복이 두려웠을까, 아버지를 살해한 후회와 고통 때문이었을까 카샤파는 신들린 사람처럼 시기리아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웠다. 그러나 11년 후 인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이복동생과 싸움에서 패한 카샤파는 자살하고 말았다. 젊은 왕자의 광기어린 행동이 후대에 세계 문화유산을 남겼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임에 분명하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거대한 바위산만이 보였다. 올라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저렇게 큰 바위산 위에 궁전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1500년 만에 깨어난 미녀들 정상까지 계단은 1200개. 무더운 날씨에 20분 오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기리야 벽화가 기다리고 있다. 1875년에 우연히 이 바위산을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던 영국인에 의해 처음 발견된 ‘시기리야 레이디’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벽화이다.1400년 긴 잠에서 깨어난 미녀들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처음에는 500명이 넘는 여인들의 그림이 있었지만 지금은 훼손되어 18명밖에 남지 않았다. 2000년이 지났건만 빛나는 색채는 아득한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한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미녀들의 농염한 자태와 신비스러운 표정은 오히려 현대적이라 놀랍기까지 하다. 광기 어린 젊은 왕이 남겨놓은 최고의 걸작품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니 참 재미있다. 벽화 밑쪽에 있는 ‘미러 월’은 달걀 흰자와 꿀, 석회를 섞어 칠한 다음 표면을 문질러 밝게 빛나는 벽을 만들었다. 신기하게 거울처럼 보이진 않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자신의 형체가 보인다. 조금 더 걷자 드디어 평지가 나온다. ●사자 입속으로 올라가는 궁전 발톱이 날카로운 사자 두 발 사이에 궁전 입구가 있다. 예전에는 다리와 머리가 있어 사자가 크게 입을 벌리고 앉아 있는 형상었다. 바로 여기 때문에 이곳의 이름이 시기리야로 정해졌다. 사자를 의미하는 ‘싱하’와 산을 의미하는 ‘기리얀’이 합쳐진 단어다. 또한 스리랑카의 국기도 칼을 든 사자가 자리잡고 있듯이 스리랑카인의 70%가 넘는 싱할라족은 스스로를 사자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철계단을 통해 올라간다.10여분만 올라가면 정상이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린다. 난간을 잡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도대체 철계단으로 올라가도 이렇게 힘든데 2000년 전 그들은 어떻게 바위 정상까지 벽돌을 나르고 음식을 나르며 궁전을 만들었을까.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정상에 오르니 4800평 평지에 궁전과 연회장, 수영장 등 나타내는 벽돌들이 가득 박혀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200m 높이의 바위 꼭대기에 수영장이라니…. 어이가 없다. 물이 지상에서 공급된다고 하는데 그 방법은 현대 과학으로도 풀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천륜을 어기고 얻어 권력의 두려움에 암벽 꼭대기로 도망쳐 온 카샤파. 불안과 고독에 몸부림쳤을 그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스스로를 안쓰러워했을까. 카샤파가 앉아 무희들의 공연을 감상했다는 돌 평상이 그대로 남아있다. 권력욕 때문에 허망하게 생을 마친 왕의 평상에 앉아보니 욕심에 차서 살고 있는 세상사가 모두 허무해진다. ●이름처럼 예쁜 도시 캔디 몇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싸우고 배신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이 끊이지 않는 인류를 향해 시기리아락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도다.” 스리랑카가 동방의 아름다운 정원이라면 캔디는 그 중에서 가장 빼어난 멋을 가진 곳이다. 완만하게 경사진 지붕을 얹은 전통 건축물들과 아름다운 호수, 푸른 나무와 풀들 등으로 인해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로 꼽힌다. 캔디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129㎞ 떨어져 있고 해발 465m에 자리잡고 있다. 인도의 잦은 침략에 남쪽으로 도시를 계속 옮기던 싱할라 왕조는 14세기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무려 350여년 동안 이곳에서 고대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캔디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겐 정신적인 고향이자 안식처다. 바로 부처의 치아 사리를 모셔놓은 불치사가 있기 때문이다.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 볼 만하다. 흰옷을 입고 연꽃과 향을 두 손에 든 순례자들의 행렬이 인상적이다. ●자비가 흐르는 황금사원 담불라는 캔디와 아누라다푸라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변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순례자와 관광객들로 붐빈다. 산중턱에 위치한 석굴사원까지 맨발로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담불라의 석굴사원은 커다란 바위를 파내어 만든 5개의 석굴이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제1석굴 안의 황금빛 와불. 길이 15m의 와불이 열반에 들 자세로 누워 있다. 발바닥에 그려놓은 불꽃 같은 꽃무늬도 강렬하고 현란하다. 나머지 석굴에도 수십개의 불상들과 벽화 등이 있다. 담불라는 180m 높이의 흑갈색 바위산이지만, 석굴안의 불상과 벽화는 온통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래서 담불라를 ‘황금빛으로 빛난다.’는 뜻이 담긴 ‘란 기리’라고도 부른다. ■ 미리 알고가세요 스리랑카는 연 평균 30도에 가까운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온으로 습도가 매우 높다. 햇빛이 강해 선글라스, 자외선차단제와 모자 등은 필수. 현지 시간은 우리나라보다 3시간 늦다. 화폐는 주로 루피가 쓰이며 미국 1달러가 96루피 정도다. 환전은 공항에서 하는 것이 좋다. 음식은 커리(인도식 카레)와 라이스(안남미)가 주를 이룬다. 밀크라이스라는 전통 음식은 우유와 안남미를 넣고 찐 것으로 우리나라 백설기와 맛이 비슷하다. 석가모니가 열반을 했을 때 제일 먼저 공양을 했던 음식이라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 직항은 없고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야 한다. 혹시 배낭여행이나 개별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콜롬보에 있는 한국인가이드 정은희(001-94-776-322-589,eunicejung@hotmail.com)씨에게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가야여행사에서는 스리랑카 문화유적 탐방 5일 상품을 129만원에 판매한다. 모든 일정에 식사를 포함한 옵션이 포함되어 있다. 일정도 캔디, 시기리아락, 석굴사원과 네곰보 해변 등 스리랑카의 전반을 둘러볼 수 있게 알차게 꾸며졌다.(02)536-4200,www.kayatour.co.kr 글· 사진 스리랑카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6) 정감록, 언제 누가 썼나

    ‘정감록’이 수백년 동안 인기를 누려왔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런데도 막상 언제, 누가 정감록을 썼냐고 물으면 딱 부러지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정감록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예언한 책자라 왕조 말까지 금서(禁書)였고, 그래서 저작에 관해 참조될 만한 기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럼, 우리는 정감록의 저자와 출현 시기를 하나도 알 수 없단 말인가? 여러 해 전부터 나는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고심했다.‘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정사를 샅샅이 뒤지며 여러 가지로 궁리해보았다. 이제는 정감록이 언제, 어디서 나왔는지를 답할 수 있게 됐다. 이 글에선 정감록의 기원에 관해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그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선조22년 정여립 역모사건이 기원? 처음으로 정감록을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이는 이능화다. 그는 선조 22년(1589)에 발생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정감록’의 기원으로 간주했다. 이능화의 저서 ‘조선기독교급 외교사(朝鮮基督敎及 外交史)’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정여립은 뜻을 잃고 나라를 원망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계룡산에 갔다가 반란할 마음을 적은 시(反詩)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보였다. 그리고 장차 나무 아들(木子, 즉 이씨)이 망하고 전읍(奠邑, 즉 정씨)이 일어난다는 노랫말을 지어서 퍼뜨렸으며, 스스로 그에 응하였다. 이것이 정감록에 관한 주장의 시초가 된다.”요컨대 정여립이 계룡산에서 지은 ‘반시’에서 정감록이 시작됐다는 말이 된다. 일제시기엔 정감록의 기원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애써 찾아낸 답도 근거가 불명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1923년 도쿄(東京)에서 간행된 ‘정감록비결집록(鄭鑑錄秘訣集錄)’을 보면 그 사정이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그 저자에 대하여도 항간의 주장은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승려인 무학(無學, 또는 舞鶴)이라고도 한다. 무학은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다. 조선의 태조가 무학을 존경하고 숭배하였던 것은 고려의 태조가 도선(道宣 또는 道詵이라고도 함)을 대우한 것과 비슷하였다. 조선 태조는 도읍을 한양에 정하였는데, 사실은 무학의 결정을 따른 것이었다. 무학의 비석은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있다. 결국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누구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입증할 수 없다.” 정감록의 작자와 출현 시기에 관한 논의는 최근까지도 별로 진척되지 못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고나 할까.1973년 안춘근은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의 이본들을 대대적으로 수집 정리하여 ‘정감록집성(鄭鑑錄集成)’을 간행했다. 그는 정감록의 저자를 확인하기가 곤란한 사정을 이런 식으로 요약했다. “작자에 대한 확증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파란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알 수 없게 숨겨질 것이기 때문에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시일이 경과할수록 더욱 알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정감록과 같이 허황하면 그럴수록 또 작자는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른바 술서(術書) 또는 그 밖의 미신과 관련 있는 저작들의 작자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요, 그것이 밝혀졌다고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논증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 말대로 정감록을 언제, 누가 썼는지를 정확히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선시대에 금서로 낙인 찍혀 있었던 책이라서 그 사본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베끼는 사람의 개인적인 목적이나 학식에 따라 변형됐을 것은 틀림없다. 내 자신의 연구결과 확인된 사실이지만 역사상 여러 기록에 나와 있는 정감록의 내용은 현재의 정감록과 많은 점에서 달랐다. 어떤 연구자는 정감록이 등장한 시기를 16세기 말 또는 17세기 전반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정감록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이 주장 역시 뒷받침할 증거는 뚜렷하지 못하다. ●‘정감록’은 고구려 때 나왔다? 학자들의 생각은 그렇다 치고 정감록을 애독한 민중들은 그 저자를 누구라고 생각할까? 1979년 서울시 도봉구 수유동에 살던 강성도(조사 당시 69세) 노인은 정감록의 유래를 이렇게 말했다. “정감록이라고 하는 사람이 상고(上古)에, 뭐라더냐. 고구려 때, 그 때쯤 되었던 모양이라. 응 그 때쯤인데 어디 사람인가 하니 평안도 사람이야. 나면서부터 이 양반은 참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중국 땅을 한번 시찰로 나갔는데. 이 정감록은 남방의 화직성(火直星, 화성임) 정기를 타고난 사람이야. 이 재주를 당할 재주가 없어. 미래를 다 알고 앉았으니 말이야. 뭐 요새 정감록비전(鄭鑑錄秘傳)이 그런 소리가 있지? 그 정감록이 남긴 책이 그렇지.” 강성도 노인은 정감록의 저자를 고구려 사람 정감록으로 보았다. 정감록을 평안도 출신이라고 못 박은 점도 재밌다. 젊었을 때 누구 못지않게 ‘정감록비전’을 자주 읽었다고 하는 강 노인의 이런 확신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강 노인의 견해가 일반의 인식을 대표하는지도 솔직히 의문스럽다. 하지만 구비 전승의 근본적인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노인의 주장을 완전히 억지주장이라 매도하기도 어렵다. 강 노인 역시 어디선가 그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든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말을 바꾸면, 한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정감록’이 삼국시대 고구려에 살던 정감록이란 사람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는 뜻도 된다.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정감록이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언제, 어디서였을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았다. 영조 15년(1739) 음력 8월6일(경진)이었다. 그 날짜 실록엔 정감록의 성격과 그 책에 대한 당시 조정의 입장을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이 실려 있다. 정감록에 관해 워낙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어 몇 줄만 그대로 옮겨 보겠다. “이때 서북변방(평안도와 함경도)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鄭鑑讖緯之書)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들이 그 책을 불살라 금지시키기를 청했다. 아울러 소문의 뿌리를 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금은 말하기를,‘그것이 어찌 진시황이 서적의 소유를 금지한 것과 다르겠는가? 바른 기운(正氣, 유학을 숭상하는 기풍)이 충실하면 나쁜 기운(邪氣)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바른 기운을 북돋우는 데 학문이 아니면 무엇으로 하겠는가?’ 이어서 왕은 수백 마디 말로 훈시하였다.” 방금 읽은 실록 기사는 정감록에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을 한꺼번에 다 거론하기는 어렵겠기에 우선 한 가지 사실만 특히 강조해 둔다. 정감록은 1739년경 황해도, 함경도 및 평안도 지방에 유행했다는 점이다.“이 때 서북 변방의 사람들이 ‘정감의 참위한 글’을 서로 널리 전하였다.”라는 구절로 보아 명백하다. 만일 그 때 ‘정감록’이 전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면 특히 서북지방이 심하였다는 식으로 기술되었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강 노인의 진술에서도 예언서의 작자가 평안도 사람 정감록이라고 했다. 물론 노인의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가 전한 말 가운데는 정감록이 평안도를 비롯한 북부지방에서 처음 등장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돼 있다. ●문제의 인물 조유제는 누구? ‘정감록’이 1739년 서북지방에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또 다른 자료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실록보다 약 두 달쯤 앞선 그 해 6월15일자 기록에 정감록의 유행에 대해 새로운 단서가 포착된다. “우의정 송인명이 또 아뢰었다.‘정감록(鄭鑑錄), 역년(歷年) 등에 관한 일은 조사에 있어 철저를 기해야 하고 또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함경감사에게 명령해서 조사 결과를 보고하게 하는 게 옳습니다. 그런데 본사(비변사)에 있는 서류를 살펴보니 조유제(趙裕齊) 등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름을 차례로 적어가지고 비밀리에 함경도로 내려보내서 수사에 도움을 주면 어떨까 합니다.’ 임금은 그 말대로 하라고 말했다.” 문맥으로 보아 정감록이나 역년은 모두 예언서가 틀림없다. 이들 예언서의 전파에 직접 관여한 이는 조유제로 밝혀져 있다. 전후 관계로 보아 함경도에서 중앙에 보고한 문서 가운데 언급된 사항은 아니다. 함경도 관찰사는 미처 모르고 있는 정보를 비변사가 입수했다는 뜻으로 봐야 된다. 어쩌면 조유제란 이는 예언서나 괴문서를 조작한 전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실이 있었더라면 함경도 측이 몰랐을지 의문이다. 내가 짐작하는 마지막 가능성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함경도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있어 비변사에 조유제를 밀고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 짐작이 옳다 해도 조유제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나는 조유제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 실록 등을 검색해 보았으나 도무지 정보가 없다. 좀 더 추측해 보면, 서울의 비변사가 그의 행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어떤 사건에 연좌돼 함경도로 유배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본래 함경도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지방에선 이름이 다소 알려진 식자층에 속했을 것이다. 예언서를 저술할 정도라면 상당한 학식을 갖추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실록에 조유제란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점으로 볼 때, 그의 정치적인 비중은 대단하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하필 서북지방에서 ‘정감록’이 출현한 이유는? 조선 왕조는 오랫동안 북부 지방 출신을 차별했다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성계가 함경도 출신이었고, 개국공신(開國功臣)들 중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의 무인(武人)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초창기부터 이들 무인을 박대하였다. 게다가 서북 사람들은 본래 상무적(尙武的) 기질이 강해 문과를 비롯한 과거 시험에서도 성적이 부진했다. 결과적으로 서북인들은 중앙 정계로부터 더욱 소외되었다. 자연히 서북 사람들은 조선왕조에 대한 원망이 컸는데, 이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긴말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위주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서북 출신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대우는 20세기 초까지도 서북 출신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었다. 박은식은 광무 10년(1906)에 창립된 서우학회(西友學會)의 기관지 ‘서우(西友)’ 창간호에서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정도였다. “여러 백년 동안 이른바 서토(西土 평안도와 황해도)의 출신이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대우를 받았던가. 책 읽는 선비는 재상 집안의 심부름꾼이요, 일반 평민은 모두 관리배들의 희생물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되었다는 이가 이른바 진사(進士)니 급제(及第) 등으로 붉은 대문(재상의 집)에 찾아가서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손님(벼슬을 구하기 위한 비굴한 행동을 말함) 노릇을 하면서 서울의 여관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지 않았던가. 이렇게 하여 평생을 그르쳤으니, 뜻을 이루지 못한 이는 진실로 안타깝다 하려니와 설사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 이라 한들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은 이가 있었던가.” 또 한 가지. 정감록이 하필 서북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데는 서북지방이 악명 높은 유배지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16세기 말부터 시작된 당쟁이 점점 치열해지자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중앙 정객들은 산간 오지가 많은 평안도나 함경도로 유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익숙한 속담 중에 “내일은 삼수(三水, 함경남도) 갑산(甲山, 함경남도)을 갈지라도.” 라는 표현이 있다. 함경도의 삼수나 갑산 같은 곳으로 유배를 당할망정 지금 당장은 뜻대로 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 속담이 웅변하듯이 서북지방의 유배지는 누구에게도 최악의 거주 장소였다. 권좌에서 축출돼 서북 변경으로 쫓겨온 정객이라면 현실 정치에 대해 불만이 컸을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 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가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서북지역에 다수의 불만 정객들이 원한을 품은 채 지내는 실정이었다. 서북지방은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일촉즉발의 화염병이었다. 따라서 ‘정감록’처럼 “민심을 현혹시키는” 예언서가 서북 지방에서 출현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필연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나는 비변사등록에서 정감록 사건의 관련자로 거론된 조유제를 유배객 또는 지방 양반으로 추정했다. 바로 그와 같이 불우한 인사들이 예언서를 조작하고 유포하였을 것이다. ●나라를 원망하는 뜻이 꺾인(怨國失志) 사람들 손에서 탄생 정감록이 실제 출현한 시기는 1739년보다 앞섰는지도 모른다. 예언서란 것이 민간에 남몰래 유행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정에서 문제로 삼기 전에 이미 항간에 유포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점은 정감록이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이 1739년이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그 때부터 조선왕조는 정감록을 문제의 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어본 실록 기사를 되새겨 보면, 정감록은 “참위(讖緯)”라고 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왕조의 정치적 운명에 관한 예언서란 뜻인데, 왕조의 뜻에 반하는 예언서라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예언서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조작하고 유포했다고 봐야 한다. 일찍이 이능화는 그 점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정감록은 나라를 원망하는 뜻을 잃은 무리(怨國失志)의 손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당쟁에서 실패한 사람들과 애써 관직을 구하던 선비들이 조선 왕조를 전복시키고자 할 때면 반드시 정감록의 예언에 의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감’은 가공인물인가 역사적 인물인가 이 지점에서 나는 한 가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진다. 실록에선 ‘정감록’을 “정감의 참위한 글”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조정은 정감이란 사람을 예언자 또는 정감록의 저자로 인식하였다는 뜻이 된다. 정감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가공인물인가 또는 역사적 인물인가?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DJ 숨겨진 딸’ 논란 확산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 ‘숨겨진 딸’이 있다는 소문과 관련한 보도를 SBS와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가 19일 잇따라 내보냄에 따라 큰 정치적 파문이 일고 있다. ●“DJ·어머니 1967년 종로 한정식집 ‘대하’서 만나” SBS ‘뉴스추적’은 이날 DJ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김모씨 인터뷰 내용을 방영했다. 김씨는 경기도의 모 대학과 서울의 모 대학원을 졸업했으며,30대 중반이라고 했다. 김씨에 따르면, 김씨의 어머니 김모(2000년 6월 자살)씨는 1967년에 자신이 일하던 서울 종로의 고급 한정식집 ‘대하’에서 신민당 국회의원이던 DJ를 만나 2년여간 연애한 끝에 딸 김씨를 낳았다. 김씨는 6세때부터 어머니의 종용으로 수시로 동교동을 찾아가 비서나 DJ의 장남 김홍일씨한테서 생활비를 타왔다고 한다. ●“6세때부터 김홍일씨등에 생활비 타 써” 이후 김씨 모녀는 DJ가 평민당 총재였던 88년에 김홍일씨가 3000여만원을 보태줘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후 DJ와 친분이 있던 무기거래상 조풍언씨를 소개받아 금전적인 도움을 받았고,99년엔 조씨가 짐 가방에 현금 다발 3억 2000만원을 갖고 와 서울 중심가의 아파트를 사줬다는 것이다. ‘유명 성직자’란 사람도 인터뷰를 통해 “DJ가 대통령이 되니까 어머니 김씨가 괴롭히면서 돈을 요청해서 당시 국정원이 DJ가 노벨상을 타게 하려고 돈으로 무마하고자 김은성 2차장과 정성홍 경제과장을 통해 진승현씨한테 ‘네가 돈을 대라.’라고 했다. 그후 국정원은 진씨의 돈을 받아 특수사업이란 명목으로 쓴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대헤 2000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진승현 게이트’의 주인공인 진씨의 한 측근은 인터뷰를 통해 “진씨가 2000년 초 국정원으로부터 돈을 요구 받고 3억 5000만원을 김은성·정성홍씨한테 줬다고 하더라.”라고 증언했다. ●“유전자 감식할 의향 있다” 그러나 김은성 차장은 인터뷰에서 “그런 유언비어는 들었지만,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조풍언씨는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딸이라는 김씨는 “유전자 감식을 할 의향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김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수십년간 비밀이 지켜질 수 있었을까.SBS 보도에서 ‘전직 국정원 직원’이란 사람은 “과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선 이런 보고하면 ‘남자 아랫도리 보고는 하지 마.’라고 잘라버려 보고할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이상하게 관대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동교동핵심인사 “방송보도 추후 적절대응” 한편 오마이뉴스는 이날 보도에서 2년 전에 이미 국정원을 통해 ‘DJ의 딸’ 소문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어머니 김씨가 김대중 당시 의원을 만났을 때의 신분이 여비서였다고 보도,SBS와 차이를 보였다. 이와 관련, 김 전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동교동계 핵심인사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얘기도 없다.”면서 방송 보도에 대해선 추후에 적절한 대응을 할 뜻을 비쳤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찰스·카밀라 35년 로맨스 결실…하객 28명 소박한 ‘세속’ 결혼식

    |파리 함혜리특파원|찰스(56) 영국 왕세자와 그의 첫사랑 카밀라 파커 볼스(58)가 35년 만에 마침내 부부로 결합했다. 찰스와 카밀라는 9일(현지 시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여름 거처인 윈저성이 위치한 런던 서부 윈저시의 시청 대강당에서 20분간의 짧은 ‘세속’ 결혼식을 올렸다.1970년 윈저시에서 열린 폴로경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로써 말 많고 탈 많았던 35년간의 로맨스에 종지부를 찍고 합법적인 부부로 다시 태어났다. 결혼등록소 서기 주재로 열린 재혼식에는 언론 취재가 금지된 가운데 찰스와 다이애나비 소생의 두 아들인 윌리엄과 해리 왕자를 비롯, 특별 초대된 28명의 하객들만이 참석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은 참석하지 않았다. 다이애나비 사망 8년 만에 이뤄진 이날 재혼식으로 평민이었던 카밀라는 ‘콘월 공작부인’이란 공식 직함을 부여받았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이어 두번째로 서열이 높은 왕실 여성이 됐다. 찰스 내외는 이어 윈저궁 안에 있는 왕실 전용 예배당 세인트 조지 채플로 자리를 옮겨 축복 예배를 올렸다. 사실상 결혼식인 축복예배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내외와 토니 블레어 총리, 유럽 왕실 인사, 외교사절 등 국내외 귀빈 700여명이 참석했다. 예배는 성공회 최고위 성직자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집전으로 진행됐다. 지난 1981년 60만명의 인파가 몰린 가운데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린 찰스와 다이애나비의 성대한 결혼식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소박한’ 결혼식이었지만 그늘진 사랑을 털어버린 두 사람은 행복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찰스 부부는 윈저성 워털루홀에서 열린 여왕 주재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한 뒤 스코틀랜드 왕실 영지 밸모럴로 10일간의 신혼여행을 떠났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불법이고, 비도덕적이며, 부끄러운 일”이라는 글이 쓰인 피켓을 들고 나와 야유를 보냈다. lotus@seoul.co.kr
  • 與 대변인 전병헌·비서실장 박영선의원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은 4일 후속당직개편에서 전병헌 의원을 대변인에, 박영선 의원을 의장 비서실장에 내정했다. 문 의장이 정동영(DY) 통일부 장관의 후원을 받으며 당의장에 선출된 만큼 DY계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고 있다는 평가다. 기획력이 뛰어나고 아이디어가 많아 동료 의원들 사이에서 ‘꾀돌이’로 불리며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전병헌 신임 대변인은 1980년대 평민당 당료로 출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청와대 정무비서관·국정상황실장·국정홍보처 차장을 지냈다. 정무적 기능이 적지 않은 의장 비서실장에 초선인 박영선 의원이 선택된 것도 의외. 문 의장의 우락부락한 ‘장비’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개선시킬 수 있다는 점이 인선과정에서 고려됐다는 분석이다. ■ 전병헌 신임 대변인 충남 홍성(47) ▲고려대 정외과 ▲국민회의 14대 총선기획단 부단장, 대선기획단 기획위원 ▲원내부대표 ▲17대 의원(서울 동작갑) ■ 박영선 신임 의장 비서실장 경남 창녕(45) ▲경희대 지리학과 ▲MBC LA특파원·경제부장 ▲경희대 언론정보대 겸임교수 ▲대변인·원내부대표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의원직 사퇴/김경홍 논설위원

    고위직에 있는 인사들은 확고한 신념이나 결의를 알리기 위해 “자리(職)를 걸고”라든가,“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흔히 쓴다. 최근 한나라당 박세일 의원이 국회의 행정도시특별법 통과에 반발해 국회의원직 사직서를 제출하고 잠적중이다. 미련없이 자리를 버리겠다는 의사표시다. 지금까지 정치인의 격렬한 의사표시나 항의수단으로 농성과 점거, 단식, 의원직 사퇴 등의 방법이 주로 이용됐다. 행정도시특별법 국회통과 과정에서는 이런 행태가 모두 등장했다.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등은 법사위회의장을 점거 농성했고, 전재희 의원은 8일째 단식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저항의 수단으로서 의원직 사퇴는 역사가 깊다. 지난 80년 신군부의 계엄확대 후 김대중씨가 구속되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가택연금에 처해졌을 때 신민당의원들은 의원직 사퇴를 결의했다. 하지만 신군부가 국회를 해산하는 바람에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도 한두차례 이상 의원직 사퇴서를 낸 전력이 있다.89년 3월 당시 통일민주당 노무현 의원은 당의 노선과 현실정치에 반발해 사퇴서를 던지고 잠적했다가 14일 만에 철회서를 내고 복귀했다.90년 7월에는 당시 민주당 소속인 노무현, 김정길, 이철 의원과 평민당의 이해찬 의원이 국회해산과 야권통합을 요구하며 의원직사퇴서를 던졌다. 정국은 소용돌이쳤지만 이들의 사퇴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해 국회에서 대통령탄핵소추안이 통과됐을 때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즉각 의원직사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국회의원직을 총사퇴하면 총선에서 통일된 기호를 받을 수 없고, 의원수에 따라 지원되는 국고보조금이 끊기는 등 현실적인 이해 때문에 슬그머니 발을 빼고 말았다. 한나라당은 왜 사퇴하지 않느냐고 비아냥거렸고, 열린우리당은 스타일을 구기고 만 셈이 됐다. 한나라당이 10일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박 의원에 대해 사퇴철회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행정도시법 통과나 한나라당 내분이 박 의원 책임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구든 비례대표든 국회의원직은 국민의 표와 선택에 의해 주어진 자리다. 함부로 던지고, 붙잡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시대가 달라졌으면 행동도 달라져야 한다. 박 의원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9) 십승지란 어디인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9) 십승지란 어디인가

    “나로 말하면 흔히 서양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에 견주어 조선 최고의 예언자라 불리는 남사고(南師古·1509∼1571)라오. 호는 격암(格菴)이라 했고, 학문을 업으로 삼았으되 평생 유가(儒家)의 경전이라곤 그저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을 뿐, 그밖엔 온 마음을 쏟아 역학·풍수·천문·복서(卜筮)·관상 등을 즐겨 배웠고, 마침내 도통해 대예언가 소리를 듣게 된 거였지. 오늘날에도 ‘남사고비결’이니 ‘격암유록’이란 비결 책을 내가 쓴 것으로 다들 믿고 있다던데. 그야 어쨌든 내 예언은 항상 정확히 들어맞았소.1575년(선조8) 조정이 동서 양편으로 분당될 것을 난 미리 짐작했고, 뒤이어 임진왜란(1592)이 발생할 것도 진즉에 알고 있었소. 사람은 영물이라, 열심히 도를 닦아 이루지 못할 게 그 무어겠소? 풍수에 관심이 깊은 나는 조선8도의 명산을 빠짐없이 둘러보았고, 그 결과 미래까지 꿰뚫어보는 안목을 얻었다고나 할까.” 남사고는 정감록 산책을 함께하고 싶었는지 과거로부터 내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는 남사고 자신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해놨다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에 대한 설명이다. 남사고는 본래 십승지의 원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정감록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돼 있는지는 사실 미지수다. 십승지란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며 복을 듬뿍 주는 길지(吉地)다. 남사고는 편지의 서두에서 예언서 가운데 가장 체계적으로 십승지의 문제를 다룬 ‘감결’의 성격을 논의한다. 노대가의 안광이 날카롭다. ●감결의 성격 “정감이 이심과 이연 형제와 더불어 방방곡곡을 유람하면서 조선의 국운을 예언한 대화체 예언서가 바로 ‘감결’ 아니겠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정감은 천문에 밝았고 이심은 아마 풍수에 정통했나 보오. 그런가 하면 이연은 세상사를 이모저모 따져 두 사람의 말을 보충한 것 같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세 사람이 금강산에서 유람을 시작, 삼각산을 거쳐 다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가야산에서 대화를 마친단 점이야. 서북쪽에도 묘향산, 구월산 같은 명산이 많은데 거기엔 발길이 전혀 미치지 않아. 이걸 보면 정감록은 서북지방을 버려진 땅으로 본 모양이야. 그와 대조적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을 몹시 중시하고 있어. 하긴 이 3두 산이 백두대간의 허리니까. 또 하나 재밌는 점이 있어.‘감결’은 역사상 한국의 수도가 평양, 송도, 한양, 계룡산, 가야산으로 옮긴다고 봤다는 점이지. 나라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한단 말인데, 남부지방이 한반도의 중심이란 이야기야. 그렇담 요새 행정수도를 공주 연기 쪽으로 옮긴다고 야단들인데 그도 그럴듯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어. 여하튼 말세엔 천지가 온통 전쟁, 질병, 경제대란, 환경파괴 등으로 한바탕 진통을 치르게 돼 있다고 하지. 바로 그때 십승지를 찾아가야 하는 거야. 십승지는 전쟁과 흉년이 들지 않으므로 지각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십승지로 들어가야 옳겠지. 글쎄, 나도 알아. 십승지가 과연 특정한 공간이냐 아니면 어떤 특수한 정신적 단계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단 걸 말이지.” ●십승지의 으뜸 풍기 금계촌과 예천 금당동 십승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인 논쟁을 남사고와 벌이고도 싶지만 그는 내게 그럴 겨를을 안 준다. 대신 그의 편지는 십승지를 하나씩 직접 거론한다. “이제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를 하나씩 소개해 보자고.‘감결’의 내용을 줄기로 삼고 그밖에 다른 예언서들도 참고한다면 설명이 제법 들을 만할 거야. 첫째가는 곳은 풍기(豊基)지.‘토정가장결’에서도 풍기를 피난처로 손꼽았어. 내가 쓴 걸로 돼 있는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菴山水十勝保吉之地)’에선 산수가 은밀한 태백·소백 두 산의 그늘이 남쪽으로 드리워진 풍기라고 했어. 풍기의 예에서 보듯 한국 최고의 길지는 태백산과 소백산에 포근히 안겨 있단 말야. 난 또 풍기의 길지를 기천(基川) 차암(車岩) 금계촌(金鷄村)이라고 좀더 자세히 밝혀놓기도 했어. 금계촌은 마을 북쪽에 소백산이 있고 산 아래 두 개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이야.‘피장처’에도 역시 같은 말이 나오지. 물론 내가 지금 언급한 ‘남격암’ 등의 비결 책들은 모두 정감록의 일부야.” 풍기 금계촌이라면 나도 잘 안다. 이미 답사를 다녀온 곳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나의 답사 이야기를 할 겨를이 없다. 남사고의 설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풍기 못지않은 곳이 예천(醴泉)이야.‘토정가장결’에도 예천이 나와 있지.‘남격암’에선 예천에서도 금당동(金堂洞) 북쪽이라고 제법 자세히 밝혔어. 그러고 보면 내 책이 다른 비결서에 비해 역시 가장 세밀해. 금당동은 사실 큰 길에서 가까워. 십승지로선 이례적인 경우인데 그래도 병란이 미치지 않아 여러 대에 걸쳐 평안을 누릴 만한 곳이야. 다만 임금이 이쪽으로 피난을 올 경우엔 화가 미쳐.” 아마도 남사고는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 봉화까지 피난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물론 엄밀한 의미로는 ‘남격암’을 남사고의 저서라 주장할 근거가 없고 그저 속설일 뿐이다. ●경상도의 십승지 남사고의 설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십승지를 선정하는 1차적인 기준은 풍수다. 특히 백두대간 가운데서도 태백산 이남에서 길지를 구하고 있다. 십승지의 으뜸으로 손꼽히는 풍기와 예천은 행정구역상 경상도에 속한다. 둘째, 셋째, 넷째 그리고 여덟째 십승지도 역시 그러하다. 적어도 십승지의 절반은 경상도에 있단 말이다. 경상도는 퇴계 이황을 비롯해 큰 선비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라 세평이 좋아 그렇게 된 점도 있겠다. “십승지의 둘째는 안동(安東) 화곡(華谷)이야.‘남격암’에선 화산(花山)의 북쪽에 이른바 소령고기(召嶺古基)가 있다고 했고 그곳은 내성현(奈城縣)의 동쪽, 태백산의 양지바른 곳이라고 토를 달았어.‘두사총비결’에선 그저 영가(안동)의 백운산이라 했고,‘토정가장결’은 그저 안동이라고만 썼는데,‘피장처’엔 경상도 내성현의 북면, 안동 북면 소라고기부 동쪽과 극히 양지바른 서쪽이라고 말했지. 비결 책마다 십승지의 설정이 꽤 다르게 돼 있군. 어느 쪽이 맞느냐 하는 문제는 단언하기 어렵지. 사람들 생각이 서로 다른 걸 어떡하겠어? 셋째 십승지는 개령(開寧)의 용궁(龍宮)인데, 어느 비결에도 자세한 설명이 없어. 아마 한때 각광을 받았지만 그 뒤론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나봐. 넷째는 가야(伽倻)라고.‘남격암’엔 가야산 밑 남쪽에 만수동(萬壽洞)이 있다며 그 둘레는 200리가량 되어 몸을 보전할 수 있지만 가야산의 동북쪽은 나쁘다고 했어. 만수동이란 이름은 사실 각지에 다 있었어. 만 살까지 살 수 있는 마을이라니 이름이 좋지 않아? ‘감결’이 여덟째로 꼽는 십승지 봉화(奉化)도 역시 태백산과 소백산에서 가까운 곳이지.‘남격암’도 봉화를 언급했어. 열 번째 십승지도 태백 즉, 태백산이라 했지만 강원도 쪽보다는 경상도를 중시한 느낌이고, 심지어 아홉 번째 십승지인 지리산도 전라도에만 속한 것은 아니거든. 이렇게 보면 십승지의 대부분은 경상도 땅에 있다고나 할까.” ●충청도의 십승지 “충청도엔 모두 세 곳의 십승지가 있지. 모두 소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어.‘감결’이 다섯째로 언급한 단춘(丹春)이 우선 주목되네.‘남격암’은 단양(丹陽)군의 영춘(永春)에 있다고 했고,‘피장처’에선 춘양면의 땅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단양 가차촌을 거론하지. 깊고 기이하고 경치 좋은 곳이라는데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여섯째 십승지는 공주(公州) 정산(定山) 마곡(麻谷)이야.‘남격암’은 공주의 유구(維鳩)·마곡 두 물줄기 사이로 보았지. 그 둘레가 백리나 되는데 전쟁의 피해를 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요즘 거론되는 신행정수도가 바로 이쪽이지. 명당이야! 그런데 말이야, 내 후배인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택리지’에 이런 말을 적어 놨더군. 무성산(茂盛山·공주의 서쪽 산)은 차령의 서쪽 지맥의 끝이다. 산세가 빙 돌며 마곡사와 유구역을 만들었다. 그 골짜기의 마을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많고, 논이 기름지며, 목화, 수수, 조를 심기에 알맞다. 사대부와 평민이 한 번 여기 들어와 살게 되면, 풍년과 흉년을 잊는다. 생활이 넉넉하게 돼 다시 이사를 떠날 염려가 적다. 대체로 낙토(樂土)라 하겠다는 거야. 그러면서 내 말을 인용했어.‘남사고는 십승기란 글에서 유구와 마곡의 두 강 사이가 병란을 피할 만한 땅이라 했다.’고 말이지. 내 십승기는 결국 유실됐지만 여하튼 난 십승지를 피난지로만 봤어. 그런데 이중환의 안목은 나보다 깊었던 거야.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단 말야.” 이중환은 1721년에 일어난 신임사화(소론이 노론을 무고한 사건)에 연루돼 유배형을 받았다. 그 뒤 그는 다시 등용되지 못한 채 평생 전국을 유람했다. 그의 책 ‘택리지’ 가운데는 십승지 가운데서도 유독 유구와 마곡에 관해 상세한 설명이 있다. 이중환은 기후가 좋고 물산도 풍부해 양반은 물론 평민까지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그 지역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밖에 일곱째 십승지는 진천(鎭川)의 목천(木川)이야. 역시 백두대간의 한 마디지. 그런데 말이야, 다른 비결 책들엔 목천에 대한 설명이 조금도 없어. 이처럼 십승지라 해도 사람들의 선호도는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어.” 남사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른바 십승지란 것은 일정하게 고정된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 보기만은 어려운 것 같다. 다음 기회에 좀더 알아볼 생각이지만, 비결 책마다 십승지에 준하는 수많은 명당이 열거돼 있다. ●전라도의 십승지 “전라도 땅에 있는 십승지는 하나뿐이야.‘감결’이 아홉째로 언급한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이 그거지.‘남격암’엔 이를 지리산이라고도 했고 더욱 구체적인 설명도 나와 있어. 운봉 땅 두류산 아래 동점촌(銅店村) 백리 안은 오래오래 보전할 수 있는 땅이라고 말이야. 이곳에서 장차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들이 연달아 나온다고도 했어.‘토정가장결’에서도 운봉의 두류산은 지형이 기이하고 아름답기가 궁기(弓其)만은 못해도 편안하고 한가로이 몸을 보전할 수 있다고 했어. 궁기란 나중에 말하겠지만 한국 최고의 명당인데 지리산은 그 다음이란 뜻이야. 내가 사랑하는 후배 이중환도 지리산을 극찬했어.” 내가 택리지를 살펴보았더니 이중환은 이렇게 말했다.“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백두산의 큰 줄기가 끝나는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瀛洲)라고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이다.” 이중환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리산에 태을성신(太乙星神·하늘 북쪽에 있어서 병란, 재화 및 생사를 다스리는 신령한 별)이 산다고 믿었다. 그밖에 여러 신선들이 그 산에 모인다고도 생각했다. 지리산은 계곡이 깊고 크며 땅이 기름진 데다 골짜기의 바깥은 좁으나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어지기 때문에 백성들이 숨어 살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산속 깊은 데서도 농사가 잘 돼 승속(僧俗)이 섞여 산다는데 별로 애쓰지 않아도 먹고 살기에 문제가 없단다. 이중환은 지리산 사람들은 흉년을 모르고 살므로 아예 그 산을 부산(富山)이라고 불렀다. 지리산을 백두대간의 종착점으로 인식한 점에서 이중환의 생각은 ‘정감록’의 지리관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중환은 정감록에 미처 언급되지 못한 중요한 사실도 거론했다. 사람들이 지리산을 신성한 산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지리산 주변의 경제 여건이 좋다는 점 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난세에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택리지’의 설명은 이어진다.“지리산 남쪽에 화개동(花開洞·악양동의 동남)과 악양동(岳陽洞·지리산 남쪽 섬진강변)이 있다. 두 곳 모두 사람이 사는데 산수가 아름답다. 고려 중엽에 한유한(韓惟漢)은 이자겸(李資謙)의 횡포가 심해지자 화가 일어날 것을 짐작했다. 관직을 버린 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악양동에 숨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찾아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한유한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도 신선이 돼 가야산과 지리산을 왕래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선조 때 한 스님이 지리산의 바위틈에서 종이 한 장을 주웠는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동쪽나라 화개동은 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신선이 옥 베개를 밀고 일어나 보니 이 몸이 이 세상에서 벌써 천년을 지냈구나(仙人推玉枕 身世千年).” 이중환의 말로는 그 필적이 최치원의 것과 동일했다 한다. 남사고 역시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이중환은 신선의 땅 지리산에서 최고의 복지로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 두 곳을 손꼽았지. 만수동은 조선후기에 구품대(九品臺)로 알려진 곳이요, 청학동은 매계(梅溪)란 말야.18세기부터 조금씩 사람들이 출입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지리산 북쪽도 나쁘지 않아. 경상도 함양 땅인데 그곳의 영원동(靈源洞·지리산 반야봉 북쪽), 군자사(君子寺·함양군 마천면 군자동) 그리고 유점촌(鍮店村)을 일찍이 난 복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도계(道界)를 뛰어넘은 십승지 지리산에 관한 이중환과 남사고의 설명을 음미해 보니 지리산을 전라도만의 십승지라고 주장하기는 어렵겠다. 만수동, 청학동 등의 지명은 누구도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군자사 등은 행정구역상 엄연히 경상도 땅이었다. 사실 지리산은 조선시대에 전라 경상 2도에 걸쳐 있었으므로, 도계를 초월한 십승지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따지고 보면 지리산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가장 큰 마디인 소백산도 그러했다. 특정한 지역이 과연 십승지가 될 만한가 하는 문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곳이 백두대간에 속한 명산이 빚어놓은 명당이냐 하는 것이었다. 십승지에 대한 남사고의 설명은 다음회로 이어진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다시 교단에 서는 양성우 시인 7시간 격정 토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다시 교단에 서는 양성우 시인 7시간 격정 토로

    ‘내일일까, 모레일까, 눈물 맺힌 30년 세월∼’. 누군가 말했다, 기다림은 차라리 고통이라고. 그렇게 30년을 지냈다. 이제 돌아가려 한다. 그곳은 어머니의 품이다. 태어나 뒹굴었다. 함께 울고 웃었다.‘품’을 떠난 뒤 강산이 세번 변했다. 파란과 곡절, 무수한 격동의 그림자를 관통했다. 돌이켜봐도 손바닥만한 가슴으로 꽁꽁 부둥켜안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75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광주중앙여고 파면 2월 초였다. 그날따라 눈이 펑펑 쏟아졌다. 한 시인이 학교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게 덮인 눈, 서산대사가 걸어갔듯이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그렸다. 시계바늘을 30년 전으로 돌렸다. 농성하던 3학년 학생들이 거울처럼 투영됐다.‘겨울공화국’이 뇌리에 생생하게 스친다.‘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영화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 대사.‘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며 읊었다. 시인 양성우(62). 요즘처럼 설렌 적이 있을까.30년만에 찾아온 ‘아주 특별한 귀향’을 맞이하고 있다.1975년 2월12일 ‘겨울공화국’이란 저항시를 낭독, 광주중앙여고에서 파면당했다. 이후 온몸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투옥·고문·도피의 세월을 보냈다.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광주중앙여고측에 양씨에 대한 복직권고 결정을 통보했다. 학교 측도 복직 절차에 들어갔다. 늦어도 한달 이내에 다시 교단에 설 것으로 보인다. 서울 마포에 위치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양씨를 만나 7시간 동안 ‘격정’의 인터뷰를 했다. 그는 먼저 1월말 학교측에서 연락이 와서 2월초 광주에 내려가 재단(금호·아시아나)이사장과 교장, 그리고 행정실무자 등을 만났다고 했다. 다들 흔쾌하게 양씨의 복직의사를 받아들였다고 귀띔했다. 특히 30년전 같이 근무했던 동료 교사들이 아직도 있어 무척 반가웠다고 부연했다. 또 이같은 사실이 언론 등에 보도되자 당시 제자들로부터 많은 축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광주중앙여고의 ‘총각 시인 선생님’이었던 그는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학생들로부터 ‘오빠’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장남이 해직기자였던 당시 교장은 양씨를 파면할 때 “(아들 생각으로)내가 차라리 감옥에 가고싶은 심정.”이라며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학생·학부모 선동 이유 사찰로 유폐 양씨는 그해 4월15일 학교측으로부터 파면통고를 받자마자 중앙정보부(중정) 광주지부로 연행됐다. 중정 요원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선동했다는 이유를 들이댔다. 장시간 조사를 받은 양씨는 구례군 지리산 ‘천은사’로 유폐된다. 경찰 2명이 보초를 세워 출입을 통제했다. 이같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자 면회객들이 줄을 이었다. 광주중앙여고 학생은 물론 서울의 대학생들까지 단체로 면회를 왔다. 양씨는 그해 연말 시인 고은씨한테 ‘사람 많은 곳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고은씨는 곧장 천은사로 내려와 한밤중에 양씨와 함께 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에 온 양씨는 흑석동 중앙대 정문 입구에 2평짜리 쪽방을 얻었다. 쪽방 벽면 너머는 다방이었다. 때문에 날마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들어야만 했다. 또 다방은 동료문인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황석영·이문구·고은·이시영씨 등이 찾아와 문학을 얘기하고 군사독재를 비판했다. 중앙대 문창과 학생들도 단골로 찾아왔다. 그러던 하루는 한양대 이영희 교수가 불렀다. 중국문제연구소에서 촉탁직원으로 일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춥고 배고팠던 양씨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연구소 소속 교수들의 논문을 모아 책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양씨는 이 무렵 장편시집인 ‘노예수첩’을 썼다. 이는 당시 재야권 인사들에게 수천부씩 복사되어 언더그라운드 페이퍼로 읽혀졌다. 얼마후인 1976년 남산(중정)의 4국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재야권에 음성적으로 떠돌던 ‘노예수첩’이 일본의 ‘세계(世界)지’에 게재된 것. ●한달간 고문 국제 간첩단으로 몰려 한달간 고문 끝에 양씨는 ‘양성우 국제간첩단 사건’의 장본인으로 발표된다. 양씨와 만났던 미국인 캐서린 엘리자베스(여성민권운동가)와 폴 슈나이스(독일인 목사), 일본의 다카사키 소지 교수 등이 입국금지됐다. 양씨는 곧 재판에 회부됐다. 죄목은 ‘국가모독죄’와 ‘긴급조치9호 위반’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6개월간 재판을 받는다. 이때 옥중에서 박정희 정권타도에 앞장섰다는 죄목이 더 추가됐다. 결국 5년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면회는 절대금지였다. 때문에 변호를 맡은 홍성우 변호사와 고은씨 등 지인들은 옥중결혼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마침 양씨는 수감되기 전 정정순(현재의 부인)씨와 사귀고 있었다. 반대할 것으로 예상됐던 정씨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했고 유일하게 면회를 할 수 있는 직계 가족이 됐다. 양씨는 농섞인 말로 “결혼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깨갱’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집사람은 그 일로 고향인 광주집에서 쫓겨났다.”면서 (부인이)처녀의 몸으로 옥바라지한 경험담을 ‘때가 오면 그대여’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출간했다고 귀띔했다. 결혼식은 출소 후 이문구씨의 사회와 박형규 목사의 주례로 올렸다. 양씨는 수감 중 찬 감옥방에서 지내느라 하반신에 악성종양을 얻어 영등포시립병원에서 수술대에 누웠다. 이때 이문구·조태일·박태순씨 등 문인들이 단체로 몰려와 “저항시인 양성우를 석방하라.”며 연일 데모를 벌였다. 탄원도 계속됐다. 양씨는 2년6개월 만에 출소했다. 수감생활 중 성경책의 여백에 못으로 꾹꾹 눌러 옥중시집 ‘북치는 앉은뱅이’를 썼다. 5·18 때에는 지명 수배돼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시인 신경림씨의 도움으로 가끔 서울에 올라와 세종문화회관 뒤쪽 ‘항아리집’에서 동료들과 비밀리에 만났다. 모이는 사람은 주로 염무웅·백낙청·이호철씨 등이었다. 항아리집 여종업원들은 프랑스의 물랭루즈처럼 운동권 인사들에게 음성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양씨는 회고했다. “고은·조태일씨, 그리고 이영희 교수 등도 저를 돕다가 옥살이를 했지요.5·18후에는 문단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또한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는 등 민주화 운동에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지요.” ●87년 잠시 정치권 외도 그는 6월항쟁 때 이한열군이 사망하자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는 추모시를 써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이후 87년 대선 때 “법과 제도를 민주적으로 고치기 위해선 현실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주위의 끈질긴 권유로 정치무대로 잠시 외도한다.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철길’이라는 소설로 ‘학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4·19시위를 주도하는 등 일찍부터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파란많은 인생역정의 길을 걸었다. 요즘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있다는 그는 “정년이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역사에 떠밀려간 30년의 세월을 매듭짓고 싶다.”면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좋은 보약이 되는 얘기를 많이 해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올 하반기에 신작 시집을 출간한다. 그의 시 가운데 ‘혼자 떠나는 새’ 등 10여편은 이미 가곡으로 불려지고 있다. ■ 그가 걸어온 길 ▲1943년 전남 함평 출생. ▲60년 조선대부속고등학교 2학년 재학중 4·19시위 주도 ▲61년 민통련 호남지역 고등학생 총연맹 회장으로 활동.5·16 직후 광주교도소 수감 ▲62년 학다리고등학교 편입. 학원문학상 소설당선 ▲63년 전남대 국문과 입학 ▲70년 ‘시인’에 ‘발상법’과 ‘증언’으로 등단. ▲71년 전남대 국문과 졸업 ▲71∼72년 학다리고 교사 ▲72∼75년 광주중앙여고 교사.‘겨울공화국’ 사건으로 교사직 파면 ▲76년 대한성서공회 문장위원 ▲77년 ‘노예수첩’으로 투옥 ▲79년 8월 가석방 ▲84년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 대표 ▲85년 서울민통련 중앙위원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 ▲88년 제13대 국회의원(평민·서울 양천구) ▲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 시집 발상법, 신하여 신하여, 겨울공화국,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넋이라도 있고 없고, 노예수첩 등 k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