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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싱가포르/“영화 불모지” 오명 벗는다

    ◎73년이후 동면… 91년이후 4년새 3편 제작/이달 개봉 「미폭맨」 국제영화제 특별상 받아/인구 310만명 불과… 제작비 조달 등에 어려움 싱가포르가 영화산업 불모지란 오명을 씻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91년 1편에 이어 올해 2편이 잇따라 개봉되는 등 4년사이에 3편이나 제작됐다.지난 73년 이후 18년간 단 1편도 제작되지 않았던데 비하면 3편은 엄청난 수치다. 70년대초까지만 해도 싱가포르 영화계에는 비록 싱가포르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화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말레이시아계 영화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활기가 있었다.그러나 말레이시아계 영화사 캐세이 케리스가 마지막으로 지난 73년 싱가포르에서 운영을 중단한 이후 그나마도 기나긴 동면에 빠졌다.이유는 홍콩과 대만의 생기있고 대중성있는 중국어 영화와 경쟁하려는 싱가포르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 그러나 이제는 분위기가 바뀌었다.싱가포르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을 만들어보자는 기운이 일고 있는 것이다.최근 제작된 3편의 영화는 모두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싱가포르인들의 황량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싱가포르의 엄격한 도덕기준에 비춰볼 때 꽤나 충격적인 주제들이기도 하다. 미인대회 운영업자인 에롤 팡(53)이 91년 제작한 「살짝 익혀주세요」는 88년 교수형에 처해진 정신착란 신비연구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기괴한 작품.미국배우 도어 크라우스가 공상적인 살인마역을 맡았다. 지난5월 개봉된 「부지스거리」는 70년대의 유명한 싱가포르 홍등가를 그리면서 대담한 정사장면을 많이 담은 작품으로 여성사업가인 캐티 유가 제작했고 홍콩 양만시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가운데 베트남 여배우 히엡 티 레가 허름한 호텔 여종업원역 주연을 맡았다.요즘 매일 1만여명씩 이 영화를 보려고 줄지어 늘어선다. 이달초 개봉된 「미폭맨」은 센스가 둔한 한 국수가게 점원과 염세적인 창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 4월 싱가포르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싱가포르인들의 삶의 단편을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대담한 기획물』이란 찬사를 받았다.주연을 포함한 출연진과 호주에서 영화를 공부한 제작자 쿠(30)를 비롯한 스태프진 전원이 싱가포르인으로 구성돼 데뷔작에서 성공했다는 점이 더욱 관심을 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영화산업 여건은 아직 너무나 척박한 것이 사실이다.인구 3백10만명으로 국내시장이 적은데다가 연간 총영화 관람객수는 91년 2천1백만명에서 94년 1천8백만명으로 감소하는 등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영화제작 경험자가 적고 하부구조마저 빈약해 영화촬영후 필름을 홍콩등 외국으로 보내 마무리작업을 해야할 정도다.검열기준이 매우 엄격한 것도 문제다.정부가 영화기금을 지원하고 세금혜택을 주기는 하지만 제작비 조달은 쉽지않은 문제다.팡은 사비로 1백20만달러를 들여 적자를 봤고,쿠는 제작비를 7만달러로 맞추느라 영화촬영을 16일내에 마치고 한 장면을 세번이상 찍지 않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쿠는 『당당한 영화대국 반열에 싱가포르를 올려놓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 월북화가 이쾌대 화집 출간/작품세계 변천과정·생애 정리

    월북화가 이쾌대(1913∼1987))의 생애와 예술을 총정리한 연구서 형식의 화집이 최근 열화당에서 출간됐다. 젊은 미술평론가 김진송씨가 펴낸 「이쾌대」(1백52쪽·6만원)는 서양미술 도입기의 한국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나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베일에 가렸던 이쾌대의 삶과 예술세계를 입체적으로,그리고 밀도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는 60여점에 달하는 그의 전 작품이 컬러사진으로 실려있고 이밖에 70점이 넘는 스케치,습작 그리고 당시 신문기사나 참고자료들을 총망라했다.삶의 궤적을 따라 작품세계의 형성 및 변천과정을 살펴보면서 그의 근대미술사적 자리매김을 확고히 해줌은 물론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 미술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는 지난 88년 정부의 「월북작가 해금」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고 특히 남한에 남아있던 부인 유갑봉(80년 사망)씨가 간직해온 유작들이 지난 91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이후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졌다. 한편 이번 화집에 실린 그림들과 자료 대부분을 선보이는 「이쾌대 회고전」(22일∼7월 9일·대구 대백 플라자 갤러리)도 마련됐다.
  • 박판씨 3번째 시집「화염길」출간/「타클라마칸 사막」등 63편 수록

    박찬 시인(47)의 신작 시집 「화염길」이 민음사에서 나왔다.83년 등단한 시인의 세번째 시집으로 지난 4∼5년간 써둔 63편의 시를 묶었다. 이 시집의 특색중의 하나로는 시인의 목소리가 사뭇 회고조라는 점을 들 수 있다.시인은 도시생활의 번잡함을 탓하거나 앞날의 전망을 설계하기 보다 화염산,타클라마칸 사막,산타페 등 신화적인 장소와 고향집 앞마당의 잎사귀 넓은 감나무 같은 예스런 정경을 떠오르는 대로 그려낸다. 신화가 돼 버린 것,아스라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시인을 마음의 행로를 따라 끝없이 여행하도록 부추긴다. 문학평론가 홍정선씨는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고여있는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에 경향성을 띠지 않는 시』라고 박찬 시의 특징을 말했다.
  • 장편소설/길이가 짧아진다

    ◎「매디슨 카운티…」·「느림」 등 짧은 외국작품 인기 영향/2백자 원고지 5백∼6백매 분량/민음사·문학과 지성사,장편 단행본 준비/적당한 긴장감 유지… 읽기에 편안 「두껍기만 하고 읽고 나도 무엇을 읽었는지 분명하지 않은 책들을 읽다가 맛좋은 짧은 책들을 발견하면 기쁘다」(김현·문학평론가)요즘 장편소설 한권은 3백∼4백쪽에 이르는게 보통이다.원고지로는 1천1백∼1천2백장에 이르는 분량이다.그나마 한권에 담지 못할 사연은 2권,3권짜리로 나온다. 이처럼 글이 길고 보면 작가는 속내를 실컷 털어놓으면서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끌고 나갈 요량이 훨씬 많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오히려 짧게 지나쳐도 그만일 것을 엿가락처럼 늘여 긴장감만 떨어뜨릴 수도 있다. 장편소설이 너무 길어지면서 이런 부작용이 눈에 띄자 여러 출판사들이 잇달아 소설 출판행태를 바꿔 놓을 짧은 장편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민음사가 원고지 5백∼6백장 가량의 중견작가 신작 단행본시리즈를 계획하고 있는 가운데 문학동네도 5백장안팎의 소설만 모아 시리즈로 내놓을 채비를 하고 있다.문학과 지성사에서도 부실시공된 3백쪽짜리 장편소설보다 알찬 2백쪽(원고지 6백장내외)을 내는 쪽으로 단행본 출판의 흐름을 잡아갈 예정이다.짧더라도 단행본 가치가 있는 책은 발간을 하겠다는 취지다. 이처럼 짧은 장편이 별안간 출판가의 인기 공략대상으로 떠오른 데는 최근들어 일기 시작한 짧은 외국소설 붐의 영향이 컸다.올 상반기 출판가의 불황을 너끈히 이겨낸 로맨스 그레이 류의 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7백장 분량이고 최근 매장에 불이 붙은 밀란 쿤데라의 「느림」이 4백장 정도다.소설은 아니지만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잠언집 「세상을 보는 지혜」(5백장)는 1백만부를 넘기는 어려운 실적을 올렸고 미셀 푸코의 미술평론집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3백장)도 학술서적으로는 뜻밖의 우수한 판매성적을 올렸다.한마디로 짧은 책이 팔리는 쪽으로 감각이 바뀌고 있는 것. 소설이 무작정 길어진 저간에는 원고지 장수당 고료를 지급하는 문단관행과 출판사의 상업성이 맞물려 있다.원고지 장수가늘어날수록 작가의 고료는 많아지고 소설 한편을 두권,세권씩 나눠 출판하면 출판사로서도 두편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창작과 비평사에서는 이런 폐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계간지 원고에 관한한 고료를 편당으로 지급하는 방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경우 5백∼6백장에 불과한 작품도 엄연한 단행본으로 출판돼 왔다.이 때문인지 프랑스권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전락」처럼 모국어를 풍요롭게 한 빼어난 짧은 장편이 많다.따라서 우리 문단 한켠에서는 두께가 얇은 소설책을 준비하는 최근의 조짐을 반기는 시각이 크다.짧지만 팽팽하고 맛있는 소설이 느슨하고 덤덤하면서 길기만 한 책보다 우리 문학의 토양을 일구는데 훨씬 보탬이 된다는 의견이다.
  • 가깝고도 먼 이웃(한·일수교 30년)

    ◎수교 19년뒤에야 한국정상 “공식 방일”/66년 무역협정 서명… 경제협력 “물꼬”/빈번한 교류속 일 지도층 잇단 망언 65년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한일 양국간에는 모두 17차례의 정상간 왕래가 있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첫 공식 방일이 추진된 것은 72년이다.박정희 대통령이 11월23일 공식 방일하기로 예정됐었으나,국내의 반일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취소됐다.박대통령은 18년에 이르는 재임기간동안 한번도 일본을 공식방문하지 않았다. 우리 대통령의 공식 방일이 성사된 것은 12년 뒤인 84년에 이르러서였다.이 해 9월6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히로히토 국왕을 만났다.이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도 90년과 94년 각각 일본을 방문했다. 수교전에도 대통령의 방일은 있었다.이승만 대통령은 48년과 50·53년 등 세차례 일본을 비공식 방문,요시다 총리 등과 면담하기도 했다.또 61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경로에 일본을 비공식 방문,이케다 총리와 면담을 가졌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일본 총리는 사토 총리로 67년 6월30일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공식방한한 첫 일본 총리는 나카소네 총리로 83년 1월11일 서울에 와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이후 88년 다케시타,91년 가이후,92년 미야자와,93년 호소카와 총리의 방한이 이어졌다. 비공식과 실무 방문을 포함하면,한국의 대통령은 모두 7차례 일본을 방문했으며,일본의 총리는 10차례 방한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66년 3월 한일간의 무역협정이 서명,발표됨으로써 본격적인 경제 관계도 시작됐다. 이 해 9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장기영 전부총리와 후지야마 일 경제기획청장관이 참석하는 한일경제각료 간담회가 열렸다.이후 양국간 경제교류는 80년대 말까지 크게 확대되어 왔으나,90년대초에 들어 무역·투자·기술협력 등의 분야에서 감소세를 보이다 최근 회복세를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무역불균형 심화가 지속적으로 양국간 현안이 됐는데,65년 1억 달러였던 대일 무역적자는 80년대 후반에 50억 달러를 초과하기 시작했으며,92년에는 79억 달러를 기록했다. 경제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67년 정기 각료회의가 시작된 뒤,양국 외무장관 회담,고위외교정책협의회,한·일 어업공동위원회,문화교류실무자회의 등의 한·일 정부간의 정기회담으로 자리잡았다. 또 한일의원연맹과 한일친선협회,한일협력위원회,한일경제협회,한일협회,한일여성친선협회,한일문화교류기금 등의 민간 친선단체가 발족되기도 했다. 65년 1만명에 불과하던 양국간 인적교류는 지난해 2백70만명으로 늘어났다.일본이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은 68만8천명이다.최근에는 재일교포와 일본인과의 결혼이 늘어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90년 통계에 따르면,재일교포의 총혼인건수 1만3천9백34건 가운데 동포간 혼인은 15.8%에 불과하며,일본여자와 결혼한 교포남성이 19.5%,일본남자와 결혼한 교포여성이 64.2%였다.일본에 귀한한 재일교포는 50년이래 17만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이러한 관계 발전의 한편에서는 일본측의 망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일본의 고위각료급에서만도 해마다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의 망언을 쏟아냈다.대표적인 것이 82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과 그에 대한 86년 후지오 문부상의 망언으로 양국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됐다.정부는 이해 9월 예정된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연기하며 후지오의 망언에 엄중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서도 어김없이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 전 외상이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을 함으로써 양국간의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에 찬물을 끼얹었다. ◎도쿄의 평가와 과제/“국교정상화 한국발전에 크게 기여”/위안부 등 개인배상문제 불씨 잠복/재일동포3세 법적지위개선도 현안 한국과 일본은 22일로 한·일기본조약 서명 30주년을 맞는다. 국교가 정상화된 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일본에는 한국에 대한 우월감이,한국은 일본에 대해 피해의식이 남아 있다.또 「김대중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망언파동 등으로 한일관계는 곡절도 많이 겪었다. 한일관계는 양국 정치에 있어 「늘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정략적 카드」로 악용당한 사례도 많이 있다. 하지만한일국교정상화가 냉전체제하에서 동아시아지역의 안정과 한국의 경제발전,일본의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안정적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양국에 크게 공헌한 점이 있다는 데 대해 의견이 대체적으로 모아진다.특히 일본에서는 국교정상화가 한국에 보다 많은 플러스가 됐다고 말하는 학자,평론가들이 많다. 초대 주일대사를 지낸 김동조전외무장관은 한일국교정상화와 관련,『냉전구조하에서 정치적으로 아시아,넓게는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으로서도 피폐해진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조약체결로 얻은 자금이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도쿄신문 20일자).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이 한국경제 발전에 대해 도움이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일사학자 강재언교수도 높이 평가한다.하지만 강교수는 강조하는 점이 조금 다르다.그는 우선 일본으로부터 무상공여 3억달러 등 모두 8억달러의 자금은 식민지 피해에 따라 당연히 받을 몫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강교수는 또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배상을 받았지만 많은 나라에서 특권층을살찌운 반면 한국은 깨끗하게 경제건설에 활용됐다』고 말해 자금이 들어온 일본보다는 활용한 한국의 노력에 비중을 두었다. 그는 반면 「식민지지배 책임문제」 등이 분명하게 밝혀진 위에 국교정상화가 됐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돈이 급하고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부분이 애매하게 처리된채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여러가지 문제들이 남게 됐다고 말한다.남은 문제들 가운데는 일본의 진정한 과거반성,한일기본조약의 해석,재일동포 3세이하의 법적 지위 문제,식민지배 피해자에 대한 개인적 배상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한·일기본조약 서명 이동원 전외무/“국력 길러 일 우월의식 극복을/과거에 매달려 역사흐름 놓치지 말길/패전 극복 일의 창조적 노력 본받을만 한·일기본조약을 서명한 이동원 전외무장관(현 국제학술원이사장)은 21일 국교정상화 30주년에 즈음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말고 일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한다고 강조했다.다음은 인터뷰 내용. ­한·일기본조약을 서명한 당사자로서 30주년을 맞는 감회와 기본조약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은 거의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전후 세계사에서 가장 길었던 외교협상이었습니다.그만큼 양국간의 적대감과 갈등이 깊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서명한 것은 역사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기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냉전이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식민지지배에 대한 청산을 분명히 하지않고 경제협력을 우선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역사는 변화하는 것입니다.변화없이는 발전도 없습니다.한·일기본조약은 그 시대의 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활용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당시 미국의 지원하에 새로운 일본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한국도 새로 태어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과거의 역사는 물론 잊어서는 안되지만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전후청산은 끝났다고 생각합니까.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봅니다.그러나 중의원의 「전후50년국회결의」 채택과정에서 나타났듯이 과거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독일과 같은 자세가 부족합니다.일본은 국수주의적 환상에서 깨어나 이웃국가들과 함께 공존·번영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그러나 불행히도 아시아의 후진성을 이용,우월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히 강합니다.공존의 시대에 배타주의적 우월의식을 고집한다면 일본의 미래는 어둡다고 봅니다.일본도 중국·한국·아세안등 아시아 이웃국가들의 역동적인 변화를 잘 인식하지않으면 안됩니다. ­국교정상화후에도 일본지도층의 망언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그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변국가를 멸시하는 일본의 배타주의적 우월의식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일본인들의 의식속에는 아시아를 깔보는 경향이 강하게 배어있습니다.그러나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일본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창조적 노력과 국력배양을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2차대전후 일본은 전쟁폐허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일본은 그러나 미국에 머리숙이며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경제부흥을 위해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특히 선진기술을 그대로 모방하지않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일본적인 알파」를 추가하려고 노력했습니다.그러한 「창조적」 노력이 오늘과 같은 경제대국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일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데 그친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이 점점 깊어져왔습니다.작은 것이라도 「한국적 알파」를 추가하려는 창조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한국을 보는 일본의 시각이 변했다고 봅니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한국을 얕보는 본질적인 인식은 크게 변하지않은 것 같습니다. ­식민지지배를 배경으로 한 한·일간의 특수관계에서 이제는 보통의 이웃국가관계로 바뀌어야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과거가 미래를 구속하는 상황이 더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됩니다.광복 50주년이 됐습니다.일본에도 한국에도 식민지이후 세대가 중심이 되고 있기때문에 한국도 이제는 냉정한국제정치논리에 대비하여야합니다.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어떻게 전망합니까. ▲양국은 경제뿐만아니라 정치·문화등 각분야에서 더욱 밀접하고 복잡한 관계로 발전할 것입니다.그러나 한국은 반일감정을 극복하고 기술·정보등 경제분야의 발전을 통해 일본과의 격차를 줄여야합니다.물론 일본과는 경제규모에서 대등할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질적인 대등함을 유지할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합니다.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국력이 뒷받침되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고 김동리 선생 문인장 엄수/이홍구 총리 등 각계인사 500명참석

    지난 17일 작고한 소설가 김동리씨의 영결식이 21일 상오 10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성당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상오 9시에 열린 영결미사에 이어 성당 앞마당에서 거행된 이날 영결식에는 문인들 이외에도 각계 인사 4백여명이 자리를 같이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이홍구 국무총리,주돈식 문화체육부장관,박찬종 서울시장 후보 등 정·관계 인사와 신영균 예총회장,문덕수 문예진흥원장,황명 문인협회 이사장,이대원 예술원회장,조경희 수필가협회장을 비롯,평론가 곽종원씨,작가 이문구·홍성유·한말숙·이호철·김이연·한승원·송영·김승옥·이문렬·김원우·김채원·김민숙·정종명·정소성·천금성씨,시인 박재삼·황동규·임영조씨,연극인 차범석씨 등이 참석했다. 영결식은 장의선언·약력보고·조사·조시·선생의 육성녹음재생·유족대표인사·헌화 순으로 한시간남짓 이어졌다. 소설가 김주영씨는 조사에서 『선생님은 제자가 찾아오면 차한잔이라도 손수 끓여 대접하시고 주머니가 비어있는 제자에게는 골목까지 나오셔서 여비를 넣어주셨다』고 선생의 제자사랑을 회고했다. 시인 이근배씨는 조시를 통해 『선생은 뛰어난 작가였을뿐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 나라사랑 겨레사랑에 앞장섰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이날 장남 재홍씨를 비롯한 가족들이 숙연한 모습으로 식을 지켜보는 가운데 세번째 부인 서영은씨는 소복차림으로 식장 셋째줄에 떨어져 앉아 내내 울먹이는 모습이었다. 식이 끝난뒤 고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가족묘지에 안장됐다.
  • 「순수문학」 외길 걸은 문단거인/타계한 김동리 선생의 문학과 생애

    ◎생명·인간성 탐구 중시… 문학의 도구화 반대/한국적 샤머니즘 담은 「무녀도」·「황토기」 남겨 17일 타계한 김동리(본명 김시종)씨는 한국 현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설들을 남긴 우리 문단의 거목이었다. 작가로서의 그는 60여년의 작품활동을 통해 1백여편에 이르는 중·단편소설을 남긴 빼어난 글쟁이였다.이른바 「순수주의」를 지향한 그의 소설들은 해방이후 우리 문학의 큰 줄기로 이어져 내렸다.뿐만 아니라 그는 참여주의 논객들과의 지속적인 논쟁을 통해 이같은 자신의 문학관을 적극 옹호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1913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김동리씨가 처음 문단에 나온 것은 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시 「백로」를 통해서였다.그러나 35년 중앙일보에 「화랑의 후예」,36년 동아일보에 「산화」 등 두편의 소설이 잇따라 당선되면서 그의 재능은 산문쪽으로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문학적 지향은 30년대말 발표된 「무녀도」와 「황토기」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기독교신자인 아들과 갈등을 빚는 무당,가공할 힘을 지닌 장사의 사연을 다룬 이 단편들엔 한국적 샤머니즘과 신화의 세계에 대한 지은이의 본능적인 이끌림이 나타나 있다. 이무렵 그는 자신의 창작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평론작업을 병행하기 시작했다.문학의 사회·역사의식 회복을 촉구한 임화·유진오의 글에 맞서 「순수이의」(39년)「신세대의 정신」(40년) 등의 평론을 발표한것.이런 글에서 그는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개성적인 삶의 탐구여야 한다』며 정치나 이념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문학이야말로 문학의 본령이라는 주장을 폈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이같은 순수문학 옹호는 그후 그의 창작에 일관되게 깔리는 철학적 기조가 된다.해방공간의 좌­우 논쟁,70년대말 순수­참여 논쟁 등을 거치면서 그는 문학의 도구화에 반대하고 생명과 인간성 탐구를 문학 고유의 역할로 여기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혔다.이때문에 리얼리즘 문학이 성했던 80년대엔 삶의 현실이나 인간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는 문단 한켠의 거센 비난에 맞닥뜨리기도 했다.그러나 그와 이념적으로 대척되는 지점에 놓인 시인 고은씨조차도『동리문학은 한국소설의 원점』이라고 평할 정도로 그의 탁월한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었다. 그는 한국문인협회장·예술원회장·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학장등을 거치면서 이념과 사상을 떠난 특유의 포용력으로 이른바 「김동리 사단」을 거느리는 문화예술계의 대부로 군림하기도 했다.장용학·손창섭·박경리·이범선·최일남·한말숙·정을병·이문구·서영은·문순태씨등이 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고 천승세·김원일·송상옥·유현종·오정희씨등이 서라벌예대 제자들이다. 문학과 삶의 동반자였던 부인 손소희씨가 작고한지 얼마 안된 지난 87년 30세 연하의 문단 제자 서영은씨(52)와 결혼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나 90년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념의 시대가 지나가고 90년대에 접어들어 동리문학의 짙은 문학성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그의 단편 대표선집이 나오고 연구논문들이 책으로 묶이는 가운데 민음사에서는 「김동리 문학전집」을 7월부터 2∼3차에 걸쳐 펴낼 예정이다.여기에는 장편「사반의 십자가」「을화」를 포함한 그의 모든 소설들과 문학평론,에세이들이 수록된다.한국 토속정서에서 인간의 보편적 구원문제로 확대돼온 그의 문학적 지평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이 책이 유작이 되는 셈이다. □연보 ▲1934년 조선일보 시 「백로」,35년 중앙일보 단편 「화랑의 후예」,36년 동아일보 단편 「산화」 각각 신춘문예당선. ▲36년 「무녀도」,39년 「황토기」,41년 「소년」발표후 8·15까지 침묵. ▲1946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초대회장,「윤회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소설분과위원장,장편 「해방」. ▲1950년 문교부 예술위원,서울시 문화위원,「인간동의」 ▲1954년 예술원회원,「마리아의 회태」. ▲1955년 「흥남철수」「밀다원시대」「실존무」. ▲1957년 장편 「사반의 십자가」 ▲1961년 문인협회 부이사장 「등신불」. ▲1966년 「까치소리」「송추에서」「백설가」. ▲1967년 3·1문화상 수상,대표작선집 전 5권 간행. ▲1968년 국민훈장 동백장,중편「극락조」. ▲1971년 장편 「아도」. ▲1973년 중앙대 예술대학장 장편「삼국기」 수필집「사색과 인생」 ▲1974년 장편 「이곳에 던져지다」. ▲1978년 장편 「을화」 수필집 「취미와 인생」. ▲1981년 예술원회장. ▲1983년 5·16민족 문화상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예술원 원로 회원.시집 「패랭이꽃」. ▲1987년 장편 「자유의 역사」(59년 신문 연재작). ▲1990년 소설가 협회장.7월 30일 뇌졸증으로 쓰러짐. ◎한국문학의 영원한 큰별이시여…/고 김동리 선생 영전에/한승원 작가 이세상 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고 선생님 혼자서만 아시는 그 깸없는 무상한 오랜 잠 주무시더니,그 잠 깨시기 바쁘게 선생님 어디로 떠나가시려 합니까.간밤 검은 구름장들 지붕머리 짓누른채 궂은비 흩뿌리고,그 습한 어둠속에서 허리 꼬며 강물 슬프게 앓아대고,북한산 지빠귀 한 마리 제 잠 설치게 하더니,신새벽의 푸른 빛살 속에서 선생님 떠나셨다는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고무줄처럼 잡아당기기도 하고 보석처럼 단단하게 앙금지게 해놓기도 하고,몇 천억겁을 찰나로 오그라들게 하기도 하고 그 찰나를 다시그 몇 만억겁으로 늘어나게 하기도 하는 혼자서만 아는 시간을 주무르고 노시다가 그 시간을 서리서리 호주머니에 넣으시고 가시는 거기가 어디입니까. 영화도 많았고 욕됨도 많았던 이 땅,이곳에서의 머무름은 얼마만한 잠시였습니까.이제 가시는 그곳은 「달」속의 달이와 「무녀도」의 을화가 있는 곳입니까.「황토기」와 「등신불」속의 그들이 살고 있는 그곳입니까. 30년 저쪽의 어느 늦은 가을날,저희들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뚝섬으로 소풍을 갔을 적에,저는 폭음을 하고 취한 척하고는 선생님께 건주정을 하였고,호래자식인 저를 유도하는 한 친구가 못됐다면서 모래밭에 내리 꽂았었습니다.이튿날 얼굴에 반창고 붙이고 찾아간 저에게 싱긋 웃으시며 어깨를 두들겨주시던 선생님의 그 인자스러운 동안을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속된 저로서는 지루하게만 느껴진 그 깸없는 신비한 잠을 주섬주섬 사려담고 문득 떠나가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이 제 가슴을 쓰라리게 하지만,저는 결코 슬퍼 울지 않습니다.이 밤,저는 북한산 위의 별들을 보고 있습니다.지금 선생님께서 이르게 되는 그곳은 선생님께서 신비롭게 형성해놓은 세계일터입니다.제가 쳐다보는 별처럼 떠있는 비가시적인 커다란 시공. 우리들의 우주안에서는 가는 것은 없고 오는 것만 있습니다.헤어지는 것은 헤어지는 것처럼 보일 뿐,사실은 긴긴 강의 하구에 잇닿은 바다에서 다시 만나 어우러지게 됩니다.그것을 굳게 믿는 저는 별로 오래지 않은 시간안의 즐거운 회후가 예정되어 있음도 믿습니다.선생님 그곳에 먼저 가셔서 큰 예술학과 하나 마련해놓고 계십시오. 저 선생님의 그 학교에 또 입학하겠습니다.선생님,명명한 그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 창무극 1인자 공옥진(이세기의 인물탐구:76)

    ◎고독을 춤추는 이시대 마지막 광대/타고난 끼와 파격의 몸짓으로 한맺힌 삶 표현/헤살궂은 사설조에 마음을 움직이는 정감이…/부친에게 창배워 유랑극단에… 장애인 동생 조카위해 국수장사도 전라도 광주땅에서 공옥진예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공옥진」 이름을 대면 「함평군 문장을 지나 40㎞쯤 들어간 영광에 가보라」고 일러준다.영광읍 교촌리 영광예술연구소에 들어서자 그는 찾아간 사람을 얼싸안고 눈물부터 글썽인다.눈물 많고 한 많고 정많은 모습은 예전이나 변함 없다.연구소 마루는 널찍한 20여평인데 비해 뒤꼍에 위치한 살림방은 사람이 둘만 앉아도 비좁은 골방에 불과했다.전국 방방곡곡 이름을 떨치지 않은데가 없건만 그의 생활은 여전히 궁핍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다.그러나 자신이 직접 캐온 불갑사 산나물이며 법성포 바닷가에서 주워온 바지락으로 상을 차리면서도 지난해 피땀으로 절약한 1천만원을 중고생 장학금으로 내놓아 주변을 훈훈하게 했다는 얘기다.가난과 한과 고독이 점철된 그의 지나온 생애에 비춰 그는 한푼이라도 돈이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지금도 의탁할곳 없는 동네 노인들을 집에 데려다 함께 밥을 지어먹기도 하고 산에 가서 고사리를 캐기도 한다. ○생활은 여전히 궁핍 지금부터 17년전 중앙대 교수이자 무용평론가인 정병호씨가 「참으로 이 시대 그대로 지나쳐선 안되는 예사롭지 않은 예인」이 있다면서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데려간적이 있었다.그때 공옥진은 하얀 옥양목 치마 저고리차림의 평범한 시골 아낙에 지나지 않았으나 창과 춤뿐 아니라 일인다역으로 「흥보가」「심청가」를 혼자서 몇시간이든 두루 꿰어나간다고 했다.막상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가 「심청이 팔려가는 대목」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 번뜩이는 예살이 범상치가 않았다.「서리서리 한맺힌 구성진 가락은 한여름철 장대비와도 같고 헤살궂은 사설조마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감」이 담겨있었다.용궁막 황성 맹인잔치대목에 이르러 저고리 뒷섶을 활짝 뒤로 젖히더니 목속에 턱을 깊숙이 파묻고 눈을 사팔로 만들고는 엉거주춤 허리춤을 부여잡고 뒤뚱뒤뚱 휘돌아나갔다.엉덩이 빠진곱사춤,절름발이 곰배팔이 오리발 병신춤을 눈부시게 펼치는 가운데 인물치레 성음치레를 무시한 자재로운 몸짓은 도무지 몸을 사리거나 풍색을 개의치도 않았다.솔직하고 천연덕스러운 그의 춤은 얼핏 보기엔 즉흥적인 신명같지만 하나의 익살스러운 동작에는 반드시 그 시작과 끝을 알리는 회무가 따르고 있었다.경륜 있는 예인으로서의 여유와 능수능란이었다. 그의 성공에 대해 민속학자 심우성씨(문화재 전문위원)의 「고격의 예술에 식상한 관객들이 섬세한 아름다움이기를 거부한 그의 진솔한 인간적 표현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인 탓」이라는 평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샀다.이후 국악관련 책자나 프로그램에서 그는 「우리나라에 예술가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공옥진을 꼽겠다」고 당당하게 밝혔고 「공옥진의 타고난 「끼」,철저한 광대기질,총명과 명석은 가히 천재적인 것으로 그는 한번만 힐끗 보고도 상대방의 모든 동작과 표정을 날카롭게 읽어낸다」고 찬사해 마지않았다. 예술사 연구를 하는 김철순은 『일찍이 이동백옹이 이혜구씨에게 말한 것처럼 판소리 뿐 아니라 모든 한국예술의 본질은 기존의 법칙과 양식,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류의 새로운 음악과 춤으로 자연스럽게 창조해내는 것」이라야 한다면 그가 바로 공옥진』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공옥진의 춤은 춤사위로 이어진 정제된 춤이 아닌 고통스런 삶의 한풀이이자 아무도 흉내낼수 없는 진짜 고유의 조선춤」으로 호평했고 무언극공연차 한국에 왔던 마르셀 마르소도 「나는 무언극을 하지만 공옥진의 일련의 움직임은 그것이 단순한 움직임이 아닌 독특한 파격의 예술」임을 거듭 강조한바 있다. ○한때 입산… 비구니로 공옥진의 광기랄가,신기랄가.그의 천부적 재질은 연습과 훈련으로 이루어진 격식을 갖춘 전통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사람을 사로잡는 힘과 정과 한이 일체감을 이루면서 「고통과 슬픔이라는 껍질을 과감하게 깬 살아 있는 몸짓」은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만의 독특한 창무극을 무대에 정착시켰고 그는 일약 중앙무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7살때 단돈 천원에 일본에 팔려간 적이 있어요.당대 제일의 무용가인 도쿄의 최승희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다시 일본인집에 넘겨졌지요.5년만에 집에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방랑길을 떠났고 어머니 마저 개가해버려 동생들과 먹고 살기 위해 그때부터 장터에서 춤을 추고 창을 하게 됐답니다』 하얀 옥양목 치마끝에 찍어낸 눈물은 그의 말을 빌리면 「눈물이 고여 바다」가 됐을 정도다.그만큼 그의 지난 세월은 어느 대목을 들어도 고초와 한숨이며 통곡의 파노라마다.그런중에도 국내 구석구석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 초대되어 젊은이들에게 「어머니」라 불렸고 미 카네기홀 링컨센터 대공연을 갖는가 하면 일본의 저명한 사진작가 세키네는 그의 공연사진과 데생으로 도쿄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옥진은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추동리에서 태어났다.남도 인간문화재인 공대일 명창의 4남매중 둘째딸,그의 조부는 광주의 김채만을 사사,서울 협률사 초기멤버이던 공창식 명창이다.그는 일찍이 부친에게 창을 배운후 유랑극단의 소녀주역으로 활약하다가 두번의 결혼 실패끝에 한때는 지리산 천은사에 입산하여 「수진」스님으로 참선,중년에 접어들어 농아인 남동생과 곱사등이인 조카딸을 돌보기 위해 광주 지산면에서 국수장사를 했고 그곳에 공연을 왔던 김연수씨를 만나 우리국악단에 몸담으면서 다시 유랑생활에 나섰다.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로 얼룩진 그의 인생사는 그동안 여러잡지 신문 등에 소개된바 있지만 그 어느것도 그가 돗자리 하나만으로 장바닥에서 펼치는 통한의 눈물과 익살과 한숨에 미치지 못한다.또한 그의 「살풀이춤」은 장탄식과 짙푸른 한의 음영이 깃든 명무지만 「살다보니 어찌어찌하다 희극무인 병신춤 동물춤의 일인자」처럼 되었고 한때는 장애자들로부터 「무엇 할짓이 없어 장애인 흉내로 무대에 서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그때마다 그는 곱사춤은 옛날부터 각 지방에서 내려오던 사당패들의 자리판 놀음이며 더구나 그 자신이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과 내손으로 키운 조카아이까지 장애인의 가족으로서,살아있는 여러 삶의 절박한 표현은 춤일수 밖에 없음」을 그때마다 상기시키지 않으면안되었다. ○84년 서울생활 청산 그는 지난 84년 6년여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노부를 모시고자 그가 자라난 영광읍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동생과 조카를 앞세웠고 부친마저 90년 세상을 떠난후 지금은 예술연구소에 남아 고향의 「아기」들에게 그의 춤을 전수시키고자 만모의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요즘은 수년전부터 앓아온 담석증을 세번째 수술하고 아직 건강치 못한 몸이지만 산에 가서 즉흥무를 추거나 산야에 대고 「제비 노정기」를 내지르면 「없던 힘과 신명이 절로 솟아」 아프던 몸이 거뜬히 낫는다고 말한다.지난봄부터 여수 영암공연,크고 작은 경로 효도잔치에 빠지지 않았고 7월에는 광주에 새로 생긴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공연을 앞두고 있다. 공옥진은 참으로 한이 많은 예술가다.그리고 그의 춤과 소리를 격조와 품위로 논하기란 어렵다.그러나 무대에 서면 진흙탕에 뒹굴듯 몸을 사리지 않고 인간의 「절대고독」을 춤추는 모습은 「아름다움의 극치 그 이상」이라는 한 평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누군가 말한대로 「광대가 될때만가장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꾸미지 않은 옛광대의 기질과 체취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옥진이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광대라는 예감이다. □연보 ▲1931년 전남 승주 출생 ▲38∼43년 일본 체류 ▲45∼47년 조선창극단 ▲48년 고창·정읍 명창대회1등 ▲57∼63년 임방울창극단 협률사 입단 ▲61∼63년 김연수 우리국악단 ▲64∼66년 김원술안성국악단 ▲66∼67년 박녹주국극협회 ▲67·68년 일본공연 ▲78년 공간사랑 1인창무극 ▲81년 미 케네디센터 「한국전통무용」공연,전남 영광읍장터 「공옥진놀이판」 ▲84년 일본 공연,서울 결산무대 「공옥진춤판­그의 모든 것」(문예회관대극장),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서 「마당놀이 춤판」,낙향 광주서 부친 공대일명창과 「아버지와 춤을」 대공연 ▲85년 런던 국제 연극제 참가 ▲91년 1인창무극(호암아트홀) ▲92년 불우한 소년소녀가장돕기 서울공연(세종문화회관)을 필두로 인천 성남 수원 구미 대구 천안 평택 충주 제주등 15개도시 순회공연 ▲93년 뉴욕(링컨센터) 시카고 LA 하와이 중국 런던 일본등 세계순회 및 부산(KBS홀)공연,「한국의 소리와 몸짓」시리즈(예술의 전당),1인 창무극(미도파 메트로홀) ▲94년 1인창무극 「학녀의 한의 춤」(세종문화회관),그외 전국 50여 대학 초청 「공옥진 한의 춤」공연등 경로위로 잔치 수백여회 ▲95년 여수(진남체육관) 및 영암 정읍 공연,7월9일 광주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공연 예정 전남 영광예술연구소 대표
  • 고령사회의 진전과 대응(최택만 경제평론)

    최근 우리 사회에 「중년노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이 조어는 50대 중반에 직장을 그만두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놀고 있는 고령자를 일컫는 말이다.우리 사회에 고령화현상이 진전되면서 고령자 취업문제가 주요한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령인구는 13%이고 2천년에는 15%대로 늘어날 전망이다.고령인구 가운데 47%만이 취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고령인구의 절반이상이 일을 하려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고령자 개인에게는 평균수명 내지는 평균 노동력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필요한 일터와 소득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확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기업은 젊은 노동력의 감소와 고령노동력의 증가라고 하는 노동력 연령구성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고령자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갖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어떻게 하면 사회적인 부양과 피부양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으며 고령자에게 취업기회를 더 많이 부여하여 인간다운 노후와 보람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정부가 지난주 정부투자기관 등 공공부문에 고령자 고용을 확대하고 고령자를 많이 고용한 민간기업에 대해서는 고용자 고용장려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바로 정부 역할을 수행해 나가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정부기관의 고령자 고용에는 정원문제 등으로 인해 한계가 있다.취업기회가 많은 기업들이 고령자를 수용하지 않으면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기업의 사회적 책임가운데 으뜸가는 책임은 고용과 소득의 창출이다.또 우리 사회의 고령화시대 진전에 대비하고 심화되고 있는 인력난 해소를 위해서 새로운 고용관행이나 고용제도의 창출이 시급하다. 일본의 경우 고령화사회 대응방안으로는 몇가지가 있다.첫째로 정년이후 5년동안 본인의 체력과 지식 등에 걸맞는 적합한 직종에서 반일근무나 격일근무를 하는 이른바 시니어·파트너제도가 있다.이 제도는 일본의 마쓰시타전기가 실시하고 있다.또 이 회사는 내셔널 패밀리 컴퍼니 코스도 병행해서 실시하고 있다.이 제도는 55세에서일단 정년 퇴직한 뒤 다른 회사로 옮겨서 주 40시간의 통상체제로 일하는 것이다.이 제도는 정년을 선택적으로 보장해주는 점이 특징이다.일정기간은 최저한 55세 때의 소득을 보장하지만 그 이후는 임금이 낮아진다. 둘째로 정년후 재고용제도가 있다.세계적인 카메라 메이커인 캐논과 캐논판매 등 양사가 노동조합과 협정한후 정년으로 퇴직하는 근로자를 3년동안 재고용하는 제도다.재고용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희망자 전원을 재고용하게 되어 있어 실질적으로는 근무연장이면서 임금면에서도 상당히 우대하고 있다. 셋째로 기업이나 조직과는 인연이 끊긴 고령자의 일자리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알선해 주는 방식이다.도쿄도가 설립한 고령자사업단과 노동부가 추진하고 있는 실버인재센터 등이 그 것이다.이 제도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직접나서 퇴직자중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정부기관에 취업시켜주거나 민간기업에 취업을 알선해 주는 것이다.또 일본 노동부는 55세이상의 고령자의 고용촉진을 위해 종업원 1백명이상 기업은 고령자 고용비율(전 종업원 중 55세 이상자의 비율)을 6%로 정하고 있다.또한 정년연장 장려금제도와 고령자 고용장려금제도 등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일부 기업들은 현재 고령자를 명예퇴직 등 명목으로 조기퇴직시키고 있다.이는 연공서열의 관행에 따른 승진과 임금 등 면에서 고령자가 기업에 상대적으로 부담을 주기 때문으로 보인다.우리가 일본 처럼 고령자 고용비율제도를 시행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고령자 퇴직을 장려하는 일은 억제되어야 한다. 국내기업의 현실을 감안할 때 최근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정년연장과 같은 조치도 시행에 어려움이 있을지 모른다.그렇지만 일본에서 실시하고 있는 시니어 파트너제,정년후 재고용제,지방자치단체의 고령자사업단제 등은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카사블랑카(영화탄생 100년/감동의 명화)

    ◎브그만의 청순한 지성미에 매료/보가트의 하드 보일드 연기 압권 가장 완벽한 여배우는 누구인가.평론가들의 집계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소피아 로렌으로 지목되었는데 그녀는 춤과 노래,각종 스포츠등 배우가 갖추어야할 기초실기가 풍부하다는,즉 다재다능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지성미가 뚜렷한 여배우로서는 단연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만을 꼽는데 모두 주저하지 않았다. 나의 조감독 시절(6.25 동란 전후)처음으로 「카사블랑카」를 통해 잉그리드 버그만의 청순한 지성미를 접했을때 어떤 청정감에 매료되었던 아득한 기억이 되살아 난다.아마도 우리나라에 처음 잉그리드 버그만을 선보인 작품으로 기억된다. 버그만과 같은 스웨덴 출신의 미국배우 그레타 가르보의 북구적인 신비감을 떠올렸다가 버그만의 지성미가 오버랩된다.뒤이어 나온 마릴린 먼로의 관능미가 돋보일수록 버그만의 지성의 응결체같은 눈동자,알찬 얼굴의 윤곽은 지성을 추구하는 관객들에게 줄곧 절찬을 받아왔다. 험프리 보가트는 이미 1957년에 세상을떠났지만 올드팬들의 뇌리에는 그의 개성적 강렬함이 지금도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3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갱영화 전성시대부터 출발했으면서도 별볼일 없는 악역만을 거치다가 「카사블랑카」에서 그의 독특한 데드 마스크와 하드 보일드한(비정하고도 무감각하게 딱딱한)생김새와 연기가 빛을 내면서 당대의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반나치를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보가트는 언제나 고독한 사나이로 열연한다.그러나 의협심이 강하며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자기 희생의 길로 들어서면서 고민하고,자유를 위한 사나이의 투혼을 깊숙한 영혼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그의 연기는 과연 압권일 수밖에 없다. 모로코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카사블랑카의 인간군상들을 감독 마이클 커디즈는 입체적인 카메라 앵글로 스케치해나가면서 주인공들의 부피를 구축하며 요리해나가는 침착한 솜씨로 과연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을만 했다고 하겠다.
  • 세계화하는 한국미술(사설)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이 7일 현지에서 개관됐다.올해로 1백주년을 맞는,세계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미술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의 독립미술관이 개관된 것은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알리는 신호로서 참으로 경하할만한 일이다.독립관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번째,세계적으로는 25번째라는 사실만으로도 한국관의 개관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86년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했으나 독자적인 전시실이 없이 제3세계 여러나라와 함께 전시하는 초라한 신세를 면치 못했다.그러나 10년이 채 못돼 한국미술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됐으며 그 결과가 한국관 건립이란 획기적 성과로 나타난 것이다.올해는 마침 정부가 정한 「미술의 해」라서 미술인에게는 더욱 큰 경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독립관의 개관으로 한국 미술은 이제 당당히 세계미술의 중심권에 우뚝 설 수 있게 됐다.2년마다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세계미술의 온갖 유파와 조류가 함께 선뵈는 대전시장이다.온세계 미술인들과 평론가들의 관심이 이곳 비엔날레에 쏠리게 되며 따라서 세계화단의 전망대라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한국관의 개관은 곧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위한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음을 뜻한다.우리미술이 세계의 관심을 끌 수 있고 또 세계미술속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확고한 전진기지를 갖추게 된 셈이다. 이미 개관일에 베니스의 카스텔로공원에는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고조됐으며 한국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한국문화의 새로운 전파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키기 위해 우리는 한국관의 효율적인 운영과 관리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비엔날레가 끝난 뒤에도 유능한 작가를 발굴하여 한국관 전시장에 유치토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미술을 세계에 소개하는 상설창구로 활용해야 한다.
  • 문화홍보(세계화 이렇게 하자:14)

    ◎해외 문화원 대폭 늘려 전초기지로/전문인력 보강… 체계적인 국제교류등 시급/체류 외국인이 한국어 배울 학원 많이 설립 아침 출근시간의 지하철 3호선.옆자리에 앉은 노란 머리의 외국인이 무언가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살짝 훔쳐 보니 서툰 글씨로 쓴 한글 옆에 영어로 토를 단 공책을 읽고 있는 참이었다. 지하철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이런 외국인들의 모습을 최근엔 종종 볼 수 있다.한국문화의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세계화 추세를 뒷받침해야 할 문화정책은 그러나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한국 체류 외국인이 급증하고 있음에도 그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방안이 적극적으로 수립되지 않고 있으며 몇몇 대학의 어학원들이 그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오는 97년부터 국민학교 3학년에게 영어교육을 실시하도록 한 교육개혁안이 나올만큼 영어 배우기 붐이 일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한국어를 세계화하는 정책은 너무 빈약한 셈이다.어문학자들은 『어학원이 없는 대학이라도 강의실 한두군데만 있으면 한국어 강좌를 시작할 수 있다』면서 이같은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사물놀이포함 극소수 현재 우리문화 내지 문화상품의 세계화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지난 10여년간 5백여회의 해외공연을 가진 「사물놀이」등 몇몇 분야만이 확고한 명성을 얻고 있을 뿐 영화,문학,연극,무용 등 많은 장르에서 아직도 진정한 세계성을 갖춘 상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문화가 나름의 보편적인 예술가치를 획득하고 미학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문화예술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전략적 문화홍보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일환으로 우선 우리 문화 세계화의 전초기지라 할 해외 한국문화원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현재 한국문화원이 설립돼 있는 곳은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프랑스 파리,일본 도쿄 등 3개국 4개 도시에 불과하다.이같은 숫적 열세는 84개국에 1백45개의 문화원을 두고 있는 영국이나 68개국에 1백52개의 문화원을 갖고 있는 독일의 경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가까운 일본의 경우만해도 우리의문화원에 해당하는 광보관이 31개국에 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경희대 영문과)교수는 『그나마 설치돼 있는 해외 한국문화원도 전문인력 부재와 보잘 것 없는 예산 등으로 해외문화교류의 다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문화원 증설과 함께 기존 대사관의 문화담당관(CulturalAttache)등도 크게 보강,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문화외교에 나서야할 때』라고 진단한다. ○영상산업등 집중지원 한국문화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기 전에 우선 우리 문화를 정보화사회의 변화된 미학과 기술적 발전에 걸맞는 방식으로 표현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관광상품을 만드는 식의 방안은 싸구려 문화상품으로 한국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후기산업사회의 관건은 바로 소프트웨어산업이다.문화 자체가 생산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이 가운데서도 특히 영상산업은 부가가치 창출효과가 큰만큼 산업적 측면에서의 세계화전략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영화진흥공사 이무상 차장은 『영상산업 중에서도 비교우위가 예상되고 지원효과도 조기에 극대화될 수 있는 만화영화나 게임소프트웨어 분야를 「전략적 선도부문」으로 선정,집중 육성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보였다.상품으로서의 한국영화 세계화와 관련해서는 「서편제」의 예에서 볼수 있듯이 차별화된 틈새시장(니치마켓)전략이 역시 가능성있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수출영화에 대한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합작영화 제작에 대한 허가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올해 국내 미술계에는 1백억원의 경비가 투입될 광주 비엔날레를 비롯,각종 대형 국제전 창설붐이 일고 있다.특히 최근 들어서는 대기업의 미술문화 투자사업이 부쩍 활기를 띠며 「젊은 작가지원」을 표방한 미술관들이 늘어나고 있어 우리 미술 세계화의 전망을 한층 밝게 하고 있다.젊은 작가 육성은 그동안 미술계의 가장 시급한 과제중의 하나인 만큼 미술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공공적 성격의 미술관들은 물론 인기작가들만 선호하는 상업화랑들도 적극적인 작가육성 방안을 마련,우리 미술의 토양을 가꿔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가는 프로야구팀보다 더 많은 표를 판다고 한다.그만큼 연극저변이 두텁다.그러나 우리의 경우 세계화에 앞서 국내기반 조차 허약하기 이를데 없다.이같이 피폐한 무대예술 현실을 감안할때 「사랑의 티켓」등 관객지원제도를 보다 활성화,연극인구를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문화창조자를 돕기보다 문화수요자를 돕는 것이 문화정책의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서울 ITI총회 활용 오는 97년 서울에서 열리는 ITI(국제극예술협회)총회에는 세계 90개국 3백50여명의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다.이를 한국연극 세계화의 한 계기로 활용할 만하다. 한국연극협회 정진수(정진수) 이사장은 『ITI총회에 맞춰 세계 공연예술페스티벌을 개최,한국이 일방적인 문화소비국이 아닌 공연예술의 주요거점임을 부각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민속춤 위주의 해외공연 정책을 펴온 한국은 필리핀이 「대나무춤의 나라」로 기억되고 있듯이 「부채춤의 나라」 정도로 인식돼온 측면이 강하다.그런만큼 우리 무용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기존의 민속공연과 별개로 창작분야에 좀 더 힘을 쏟아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 심슨재판/5개월 경비 5백만달러

    ◎재판 2천년까지 갈듯… LA카운티 재정적자 고민/기록양산… 전미 “떠들썩” 미국을 들끓게 하고 있는 OJ 심슨 재판은 뒷얘기의 「보고」이다.이 재판은 논객,기록자,평론자가 모두 참여하고 있는 한편의 드라마이다.이 재판에는 이들 외에도 회계사가 따로 등장한다.바로 LA카운티이다. LA카운티는 매달 20일쯤 심슨재판에 소요된 경비를 산출하면서 지리한 재판진행 상황에 낙담하고 있는 납세자들의 눈치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 4월30일 현재 소요경비는 4백98만6천1백67달러였으며 그 액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재판이 시작된지 다섯달 동안 매달 1백만달러 정도씩 쓴 셈이다. 12억달러의 재정적자를 내고 있는 LA카운티로서는 재판이 장기화되면서 안절부절하고 있다.지금까지의 재판진행 상황으로 볼 때 아동학대 혐의로 기소돼 3년 동안 진행된 「맥마틴 가족 재판」에 소요된 1천3백23만9백71달러보다 더 들 것으로 추산된다. LA카운티의 한 관계자는 심슨이 재판에 져 항소한다면 변호사비용을 제대로 주지 못해 결국 납세자들이 이를 부담해야 할것이라고 불평하고 있다.카운티에서는 이에 따라 심슨재판의 TV방영권을 아카데미 시상식처럼 공개입찰에 붙이려 했으나 미국의 인권단체와 TV사들에 의해 거절당했다.카운티에서는 심슨재판이 오는 2천년까지 갈 것으로 보고 차선책으로 지난 1월부터 2천년까지 발생하는 모든 경비를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떠맡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심슨재판은 이와 함께 갖가지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고 있다.몇주전 LA를 비공식으로 방문하고 돌아간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가 LA의 저명인사들을 위해 비버리 힐의 한 고급식당에 마련한 만찬석상에 심슨재판의 마르시아 클라크 여검찰관과 로버트 샤피로 변호사가 의기양양하게 왔다가 부토 총리로부터 재판에 관한 곤혹스런 질문을 받는 촌극을 벌였다.훈제연어와 양고기 요리가 나오는 중간중간 부토 총리는 두사람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재판에 큰 관심을 표시하고 자신은 심슨이 유죄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는 것이다.
  • 시인 박두진(이세기의 인물탐구:75)

    ◎신·자연·인간을 노래한 “해의 시인”/불의·적당주의·시속과 타협 단호히 거부/독학으로 인생행로 개척한 극기의 인물/등산·수석채집 30여년… 붓글씨·서화에도 능해 「해야 솟아라.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넘어 산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산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혜산 박두진의 「해」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우리나라 대표적 시인의 한 사람인 그를 일컬어 문단은 「해의 시인」으로 부르고 있다.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인환(고대교수)은 『밤과 밤을 몰아내는 해와의 대조위에 전개되는 「해」에는 혜산이 희망하는 세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그 세계는 꽃과 새와 사슴과 칡범과 인간이 한 자리에 앉아 앳되고 고운 동심을 이루고 있지만 과연 현실이 기다림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그의 시적 변모는 이러한 질문에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혜산 박두진의 시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한 줄기 정신은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신앙의 영향은그로하여금 인간중에서 가장 많이 고통받고 가장 위대하게 사랑한 예수의 생애를 통해 언덕과 하늘과,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집단이 감동속에 결속되고 있음을 「갈보리의 노래」로 절규하고 있다. ○“위선과 탐욕 버려야” 「마지막 내려덮는 바위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같은 치욕을,불붙는 분노를,에어내는 비애를,물새같은 고독을,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꽝꽝 쳐 못을 박고,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우주의 생명과 우주의 질서」에 눈을 돌려 「이제 사물과 인간은 우주적 무도에 참여하는 하나의 과정,하나의 사건이 되고,가식과 위선과 탐욕을 버리기만 하면 누구나 생명의 환희를 체험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의 특징은 작품에서 개인적인 감상을 추구하지 않는 점이다.86년 한 신문에 발표한 칠순기념 특별기고에서 「가난이라든가 개인적인 슬픔,사람에 대한 배반감이나 기쁨을 시로 승화시킬 수는 있다.그러나 문학은 인간 누구나가 느끼는 인류공동의 문제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로 천착하여 진실에 대한 투시력을 보여야 한다」고 논한 바 있다.즉 「시의 사상,시의 윤리,시의 심미적 창조가치는 언제나 그 창조의 주체인 시인에 의해서만 시적 진실이 획득된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쓰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개탄하면서 「나이든 사람은 젊은 사람의 눈치를 보고 젊은 사람은 나이든 사람을 업고 나와 학연·지연을 앞세워 설쳐대는 것은 문학의 권위와 문학인의 자존심을 잃는 일」이라고 우려해 마지않았다. 혜산의 생애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를 일컬어 「극기의 인물」로 평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앙상하리만큼 야윈 체구에 오랜 등산과 수석채집으로 다져진 강단은 일상생활에서도 불의에 굴하거나 적당주의나 시속의 타협이 없이 무엇을 하든 정의감과 선비적 자세를 지켜왔고 그의 시의 소재들은 이런 다양한 지란을 이겨낸 심혼의 결정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인 신대철은 팔순을바라보는 나이에도 언제나 꼿꼿한 자세와 순수무결한 시심을 잃지 않는 혜산을 향해 『자기초월의지를 가진 인격과 고고한 학자의 기풍과 시인의 기상을 흐트리지 않아 문단에서는 물론 대학에서도 제자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다』고 자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경기도 안성 「고장치기」로 불리는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청렴한 선비이던 선친으로부터 일찍이 한문과 붓글씨를 배우고 안성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 외엔 그는 혼자서 독학으로 인생행로를 개척해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4세때 「문장」지에 등단 24세에 「문장」지의 시 추천을 거쳐 문학활동을 전개하기 이전까지 그는 측량소·경성부청·금융조합원 생활을 전전했고 45년 해방과 함께 그 당시 유일한 출판사이던 을유문화사에 입사한 것이 조지훈·박목월과 만나 「청록집」을 출간하는 계기가 된다.이후 자연과 신을 주제로 하는 시들을 끊임없이 발표하더니 60년대말부터 수석취미에 침몰하여 「돌」 하나만을 주제로 하는 「수석열전」시리즈를 「현대문학」지에 수년간 연재,지금은 「돌의 시」로써 시인만의 청복을 누리는 시기다. 서대문구 창천동 그의 집에 가보면 마당과 거실과 서재와 베란다는 「뇌뢰낙락하고 고하고 괴하면서 관용자수 한 명석」들이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고 그의 돌에 대한 사랑은 3천여편 이르는 시작 외에도 서화나 수필에 넘치도록 표현되어 있다. 「작은 한개의 돌이 갖는 형태미와 색채미는 어떤 조각품에도 견줄 수 없는 묘막한 조형미가 갖춰져 있다.난이 정의 극치라면 수석은 의 극치,난이 부드러우면서 의연하다면 수석은 웅혼섬세하고 표일 불기이면서 차라리 성자롭다」등,그리고 「시를 쓸 때의 사무사의 맑은 마음,맑은 눈만이 석격이 심웅하고 석품이 우귀」한 것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혜산의 취미는 다양하다.시를 쓰는 것과 동시에 30년남짓 등산을 하고 난을 키웠으나 그는 이를 굳이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붓글씨와 서화에 능하여 앞을 향해 질주하는 듯 한 아름다운 필체는 「혜산체」로 일가를 이루고 있으나 서도를 감히 취미라고 하지 않는다.「어떤 것은 너무 높은 경지라그렇고,어떤 것은 나 자신이 족히 미치지 못해 모자라는 것을 취미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시를 좋아하면서 산을 좋아했는지 산을 좋아하다가 시를 좋아했는지는 모르나 산은 심약한 그를 「의지적 인간」으로 바꾸어놓았고 일목일초에 기울이는 정서적·감각적 운치를 알게 했으며 「한개의 돌에 얽힌 정신적 파동」은 그의 시심을 한층 심화시켰다고 돌아본다. 문단의 교분은 다양하진 않지만 월탄이 생존해 계실 때는 종로구 충신동 월탄댁에 가끔 모여 「문주반생기」의 무애 양주동,「명정사십년」의 수주 변영로,공초 오상순,연포 이하윤등 문단의 주호들과 맥주 두잔의 술실력으로 「도도한 무애의 웅변,월탄의 호통,공초의 무언,수주의 독설속에서 시를 주고받고 휘호를 치면서 철저하게 밤을 새운 이야기」는 문단사의 향기로운 추억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수석에 물을 뿌리고 돌보면서 가슴속에 들끓는 정열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그럼에도 자신을 「시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렇게 의식해 본 일이 없다」고 끝내 도도하다.다만 「시는 한낱 감상이 아닌 인간이 신의 손길에 의해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덕윤과 경외의 념」이라는 한 평자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언제나 쓸 것이 밀려 있고 생각에 쫓겨 「한없이 즐겁고 한없이 탄력을 느끼면서 고양된 감정,맑은 생각,투지와 저항,여유와 절박감이 뒤섞인 속에서」 그는 총체적으로는 어떤 즐거움과 보람같은 것을 느껴왔다고 수필집 「돌과 사랑」에서 밝히고 있다. 연세대 교수 정년퇴직후엔 일주일에 두번 추계예술대 강의,그외엔 2박3일정도로 수석채집을 위한 여행길에 오르고 수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을 만나면 수석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데 지루해 하지 않는다.가족은 동화작가인 이희성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만 4형제. 『시인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기꺼워하고 다른 사람들보다도 내부의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은 그를 두고 적절하다.혜산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 속에는 시가 있고 시를 상실한 사람은 인간의 순수성을 상실한 사람이며 시는 본질적으로 진실이며 선이며 아름다움이며 신의말씀」이라는 그의 시론을 시로써 실천해냈고 마지막 붓끝까지도 신과 자연과 인간의 결속을 불후의 명시로 성취할 이 시대 진정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연보 ▲19 16년 경기도 안성출신,호 혜산 ▲39년 「향현」「묘지송」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에 추천 ▲46년 첫시집 조지훈·박목월등과 「청록집」(을유문화사)출간 ▲48년 한국청년문학협회 시부위원장,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 ▲49년 제2시집 「해」(청만사)출간,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51∼81년 연세대 교수 ▲65년 우석대 조교수 ▲70년 이화여대 부교수 ▲81년 단국대 초빙교수 ▲86∼현재 추계예대 전임대우교수 시집 「오도(오도)」(54년)「박두진 시선」(56년),수필집 「시인의 고향」(58년),시론집 「시와 사랑」(60년),시집 「거미와 성좌(성좌)」(61년)「인간밀림(인간밀림)」(63년)「하얀날개」(67년)「청록집·기타」「청록집 이후」(68년),시론집 「한국현대시론」,수상집 「생각하는 갈대」(70년),영역시선집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역 「Sea of Tomorrow」(71년),수상집 「언덕에 이는 바람」,시집 「고산식물」「사도행전」「수석열전」,시론집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한국현대시문학대계 「박두진」(73년),시집 「속·수석열전」(76년)「야생대」(77년),시선집 「예레미야의 노래」,시집 「포옹무한」「하늘까지 닿는 소리」「박두진 전집」(범조사 81년)「나 여기에 있나이다,주여」(82년)「청록시집」(83년),수상집 「돌과의 사랑」「그래도 해는 뜬다」,시선집 「일어서는 바다」(86년) 「불사조의 노래」(87년),시집 「빙벽을 깬다」(90년),산문전집 「햇살,햇볕,햇빛」(91년)「박두진 전집」(신원문화사 95년) 아세아자유문학상(56년) 서울시문화상(63년) 3·1문화상 예술상(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76년) 인촌(인촌)상(88년) 지용문학상(89년)
  • 「대부」 1·2·3부(영화탄생 100년/감동의 영화)

    ◎폭력·음모 투성이 마피아세계 해부/마리오 푸조 운작·코폴라감독 영상화/말론 브란도·알파치노 혼신연기 “일품” 「대부」.이 영화에 대해 논평하기 위해서는 기나긴 망설임이 필요하다.「대부」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72년의 1부 이래로 90년까지 3편이 만들어졌다.극장 상영시간만 9시간이 넘는다. 어디서부터 「대부」를 말할 것인가.원작자 마리오 푸조로부터,아니면 현대 미국영화의 거인 감독 프란시스 코폴라로부터? 게다가 말론 브란도,알 파치노와 같은 연기자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엄청난 작품 앞에서는 차라리 실없는 어리광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뭐 이런 장난말이다.3개의 「대부」중에 어느 것이 제일 좋은가.혹은 실패작은 무엇인가.그러나 아무리 경솔한 안목으로 보아도 영화 「대부」에 실패작은 없다.걱정스럽던 제3부조차도 이 걸작의 완결편으로는 손색이 없었다.그러면 1부와 2부중에 어느 것이 더 걸작인가.대부분의 평론가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어버린다.두편 다 마스터피스이기 때문이다. 꽤 많은,공연히 심각한 사람들이 「대부」를 헐뜯는다.『흉악한 마피아를 미화했다』『끔찍한 폭력영화다』등등.이런 친구들은 정말 한심하다.영화도 모를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도 국민학교 도덕교과서 정도의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다.「대부」는 폭력적이긴커녕 폭력과 음모로 점철된 인간의 문명을 깊은 비관주의로 성찰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1편의 첫장면,그리고 그 26분에 걸친 결혼피로연 시퀀스를 잊을 수 없다.정원에서는 딸 코니의 결혼피로연이 벌어지지만 집안의 사무실에서는 마피아의 비즈니스가 한창이다.『대부님,복수를 간청합니다』『대부님,저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카메라는 계속 정원과 사무실을 들락거린다.그러나 주의깊게 보면 그 중간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정원에서 사무실로 들어가는 통로는 삭제되어 있다.코폴라의 엄격한 주제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다.가족과 비즈니스는 구분되어야 한다.그러나 결코 구분되지 않는 현실의 괴리. 1편의 마지막 장면도 압권이다.매형을 죽였는지를 묻는 케이.새로운 대부 마이클은 『죽이지 않았다』라고거짓말을 한다.안심하는 케이.그러나 곧 부하들이 방으로 들어오고 케이의 얼굴 위로 단절의 문이 닫힌다.거기서부터 코르레오네일가의 도덕적 붕괴는 가속된다.그리고 완결편에서 마이클이 외롭게 죽을 때까지 이 단절과 붕괴는 끝나지 않는다.
  • “정보통신의 힘은 국경을 허문다”/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파월경」 보편화… 통신주권 약화/경제개방·지방분권화 점차 가속/오마에 겐이치 강연 일 경영컨설턴트 포항제철 산하의 포스코 경영연구소(소장 유한수)는 창립 1주년을 맞아 지난 달 31일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일본의 경영컨설턴트이자 경제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52) 박사를 초청,기념 강연회를 가졌다.다음은 오마에 겐이치 박사의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의 강연내용 요지이다. 지금 세계는 보이지 않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움직인다.지난 90년 봄 옛 소련이 무너지기까지 어느 누구도 이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가 붕괴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하지만 당시에도 이미 그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옛 소련과 같은 강력한 국가는 붕괴되지 않는다는 기존 관념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세계는 지난 5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는 셈이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동인은 정보통신의 힘이다.정보는 국경을 초월, 국가 사이를 「제집 드나들 듯이」 넘나 든다.우리는 지금 서울에서 NHK 방송을 볼 수 있고 도쿄에서는 KBS를 시청할 수 있다.각국 정부가 통신 및 방송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신주권이 없어졌다. 세계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정보통신이라는 사실을 가장 빨리 간파한 나라는 싱가포르이다.싱가포르는 지난 84년 이광요 전수상의 주도로 「정보기술 비전 20 00」이라는 장기 국가발전 계획을 수립했다.싱가포르를 정보 초고속도로의 중심지로 육성,정보통신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또 영어를 제1 언어로 정하고 국가경제의 완전 개방화를 추진했다.현재 1인당 국민소득(GNP)이 1만4천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으나 오는 20 00년에는 3만달러 선으로 끌어 올린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이처럼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개념은 지역국가로 설명된다.지역국가는 국경없는 경제와도 같은 맥락이다.따라서 21세기에는 우리가 아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산업혁명이 제국주의를 통해 국경을 넓혔으나 이제는 정보통신의 힘이 국경을 허물어뜨린다. 예컨대,엔고현상으로 일본의 항공권 가격은 미국보다 2배나 비싸다.일본 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일본 내에서 항공권을 구매하도록 규제하고 있으나,국경없는 경제에서는 정보통신의 힘이 이를 무력화시킨다.일본에서 인터넷(세계 최대의 정보통신망)을 이용,미국으로부터 항공권을 구입한 뒤 우편을 통해 배달을 받더라도 25%나 비용을 줄일 수 있다.결제는 비자나 마스터카드로 하면 된다. 국경을 없애는 핵심적인 요소는 디지털 네트워크(통신망)이다.따라서 1인 회사의 탄생도 예상된다.한 사람만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큰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기술 개발­부품공급­생산­판매에 이르는 전 공정을 디지털 인터넷을 통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이론도 이제 바뀌어야 한다.지금의 경제이론은 케인즈 이론에 근거하거나,아니면 단지 이를 조금 수정한 것에 불과하다.그러나 오늘날의 국경없는 경제에서는 더 이상 케인즈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국경없는 경제에서는 정부가 총 수요관리 정책으로 고용을 창출하려 해도 고용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미국은 얼룩말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지역마다 분권화돼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탓이다.반면 일본은 하나의 색깔이다.일본은 중앙집권적인 관료사회가 만든 전형적인 모습을 띤다.도쿄를 모르면 일본 전체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지금 일본에 가장 필요한 것은 분권화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한국은 현재 세계화와 지방화를 동시에 추진 중이다.세계화의 논리 속에서 지방화를 달성한다면 한국은 크게 발전할 수 있다.이를 위해서는 먼저 정부의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세계화·지방화란 단지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정부의 개념은 19세기에나 필요한 것이지,21세기에는 적합하지 않다.지금의 변화는 기술을 배경으로 이뤄진다.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다.따라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역국가와 그룹웨어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가 이끄는 나라는 이제 세계사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한국의 통일문제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독일식의 통일방식에는 반대한다.만일 한국이 독일의 통일방식을 따라 북한의 SOC(사회간접자본) 구축을 위해 납세자의 세금을 쏟아 붓는다면 북한이나 한국 모두를 낙후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통일 뒤에도 북한지역에 경제적 자율권을 주면서 자연스러운 경제통합을 유도해 나가야 한다.한국도 지역국가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 추한 한국인/“실제 저자는 일극우 외교평론가”

    ◎누명쓴 한국인 장세순씨 증언/가명 저자 박태혁은 「나」 아닌 가공인물/다른 사람 글에 내가 쓴 글짜깁기 조작 지난해 3월 일본에서 출간돼 물의를 빚고 있는 일본어판 「추한 한국인」의 가명 저자 「박태혁」씨의 실제인물로 알려진 재일 한국민속전문가 장세순(57)씨는 31일 『이 책의 실질적인 저자는 일본의 극우외교평론가 가세 히데아키』라고 주장했다. 장씨는 이날 하오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추한 한국인 저자에 관한 공개증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장씨는 저자로 되어 있는 「박태혁」이란 인물은 본적도 없다고 밝히고 『가세 히데아키와 일본 광문사 출판사가 펴낸 「추한 한국인」은 가세 히데아키의 요청에 따라 한국민속에 관해 원고지 1백장분량으로 써준 내용을 다른 사람이 한국에 관해 쓴 글과 섞어 조작한 것에 불과하며 「추한 한국인」에는 가세 히데아키가 89년에 펴낸 「한의 한국인,외경스런 일본인」의 내용 가운데 20여군데가 그대로 옮겨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출판계약서에는 「박태혁」에게 40%,책의 추천서를 쓴 가세 히데아키에게 60%의 비율로 인세를 나누도록 돼 있다』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나의 요청에 의해 출판사가 초판 3만부에 대해 4%의 인세를 추가로 주겠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추가한 점으로 볼 때도 분명 「박태혁」은 가공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광문사 관계자로부터 책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저자가 한국인 「박태혁」으로 잘못돼 있음을 출판사측에 지적한 뒤 내용에 문제가 많으므로 발매중지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저자를 밝히려는 이유에 대해 『저자가 가짜 일본인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으나 마치 한국사람이 책을 쓴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짜 저자를 분명히 규명해 한국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 9월 광주비엔날레/세계 젊은 작가의 실험정신 만난다

    ◎국제전 참여 작가 대부분 주목받는 30∼40대/각국의 예술조류·작품경향 한눈에 파악될듯 오는 9월20일부터 11월20일까지 광주 중외공원 문화벨트에서 열리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는 전세계 젊은 작가들의 자유분방한 사고와 다양한 실험정신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위원장 임영방)가 지난 25일 제2차 커미셔너회의(광주광역시 상황실)에서 선정·발표한 비엔날레 국제전 참가작가의 대부분이 각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30∼40대 작가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 이번 비엔날레에 참여할 작가는 51개국 96명.이중 30대가 절반을 넘는 56%(49명),40대가 31%(30명)나 돼 각 지역의 새로운 예술조류를 보여주는 다양한 작품들을 출품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 아래 선보일 작품들도 평면이나 입체보다 실험성이 강한 설치와 비디오·테크노아트,설치의 성격을 띤 사진 등 새로운 장르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이는 세계 화단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으로 광주비엔날레가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끄는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비엔날레 참여작가 중에는 94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여작가인 중국의 팡리 준,올해 휘트니비엔날레에 초대된 미국의 여류 설치작가 리르크리트 티라바니자,포토리얼리즘의 선두주자인 미국의 척 클로즈,조각에서 설치로 전환한 그리스의 조지 라파스 등 지명도 높은 작가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러나 독일서 최근 각광받고 있는 조형예술가 카르스텐 횔러와 같이 작품성에 비해 아직 국제무대에 알려지지 않은 신진 작가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미래미술의 흐름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횔러는 전시장 내에서 거위알을 부화시킨 뒤 2개월간 모형 헬리콥터로 나는 교육을 시켜 전시회 폐막과 함께 날려 보낸다는 독특한 작품을 구상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실장 이용우(고려대 교수)씨는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조류가 창조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올해에는 베니스비엔날레 청년작가전인 아페르토전시회(35세 미만)가 열리지 않아 광주비엔날레가 그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전시회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서유럽지역 커미셔너 장 드 루아지씨는 『미래 화단을 이끌어갈 젊은 작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광주비엔날레는 침체된 세계화단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라며 『참여작가들도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데 상당히 고무돼 있다』고 전했다. 이번 비엔날레의 작가선정은 ▲아시아(한국 제외)8개국=오광수(오광수·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서유럽=장 드 루아지(퐁피두미술관 큐레이터) ▲동유럽=안다 로텐버그(바르샤바 국립현대미술관장) ▲미주=캐시 할브레이히(미네아폴리스 워커아트센터관장) ▲중동·아프리카=클라이브 애덤스(영국 테이트갤러리 전시자문위원) ▲남미=성완경(성완경·인하대교수) ▲한국·오세아니아=유홍준(영남대교수)씨 등이 맡았다.
  • 만화 이론·비평서 잇따라 출간

    ◎「한국만화의 역사」 「… 선구자들」 「… 만화산업 연구」/대중예술 한 장르로 파악… 체계적 연구/이론 불모지 만화발전에 이바지 “기대” 학술적인 연구대상에서 거의 소외돼 온 만화 분야에 최근 이론서·비평서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올들어 나온 이 분야 책들은 열화당 미술문고 시리즈로 나온 「한국 만화의 역사」와 「한국 만화의 선구자들」을 비롯,「한국 만화산업 연구」「우리 만화 가까이 보기」등 모두 4권. 이 가운데 「한국 만화의 역사」는 우리 만화를 대중예술의 전통적인 독립장르로 파악,그 미학과 사회·문화적 성격을 전시대에 걸쳐 정리했다.우리 학계에서 나온 첫번째 만화사인 셈이다. 지은이 최열(미술평론가)씨는 우리 만화의 원형을 고려시대 불교문화에서 찾았다.10세기 무렵 제작된 「보명십우도」야 말로 『우리 만화의 원형이자 뿌리,나아가 만화의 할아버지』라고 평가했다.불교의 깨달음을 「잃어버린 소를 되찾는」과정에 비유한 이 그림은 모두 열칸으로 구성됐으며 칸마다 설명글을 붙여 지금의 만화와 동일한 형태를갖고 있다.또 불경에서 불교 전설·설화를 예로 들 때 이를 설명한 그림 「변상화」를 함께 싣는 것이 13∼14세기에 유행했는데 「변상화」는 요즘으로 치면 삽화 구실을 했다. 조선시대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바람에 불교미술의 한갈래인 만화적 전통은 크게 위축됐다.그러나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나온 「삼강행실도」「오륜행실도」등에서 명맥이 이어지며 18세기에는 네칸만화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19세기의 몰락기를 거쳐 19 09년 6월 2일 「대한민보」창간호에 이도영의 시사만평이 실리면서 근대적 의미의 만화가 시작됐다. 현대만화의 흐름은 「한국 만화의 선구자들」에 자세히 소개된다.「시사만화의 선구자」이도영에서 70년대 중반까지를 대표하는 대중·시사만화가 13명의 작품세계와 시대배경,만화발전에 끼친 공로들을 다룬 작가론이다.이도영외에 시대순으로 김규택,김용환,신동헌·동우 형제,김성환,박기정,김종래,임창,산호,방영진,고우영,엄희자들이 나온다.한국만화평론가협회 회원 7명이 나누어썼다. 이 책을 시대적으로뒤잇는 평론집이 「우리 만화 가까이 보기」(눈빛 펴냄,만화평론가협회 엮음)이다.비평대상을 70년대이후 등장한 작가,특히 대중만화가로 좁혔다.현재 만화를 즐겨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이현세·허영만씨등 13명이 평론가들과의 대담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세계를 직접 밝힌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 「한국 만화산업 연구」(글논그림밭 간)는 만화를 예술장르라는 측면에서 비평한 것이 아니라 출판·영상·팬시등과 연결된 「거대한 산업체제」란 종합적 시각에서 분석했다.미처 누구도 손대지 못했던 분야에 처음 이론틀을 제시한 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지은이는 서강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는 한창완씨(28). 이밖에 열화당 미술문고가 미술의 한 장르로서 만화관련 책을 계속 낼 예정이며 만화전문 출판사로 출발한 글논그림밭도 만화이론서는 물론 만화가 대표작선집,에세이집들을 준비하고 있다.
  • 문신 그리고 마산(외언내언)

    『나는 아마 백제 석공의 후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던 조형예술의 거장 문신씨가 갔다.예술작업의 고통과 가난한 예술가의 타향살이의 고달픔 때문인지 늘 수척하고 쇠약해 보이던 그의 모습을 이제는 잊어야 하려나 보다. 아프리카 흑단으로 빚은 한마리 작은 생물체 같은 「의식하지 않은채」 빚은 그의 조각을 보고 사람들은 『개미가 연상된다』고 했다.그래서 그의 조각 「개미」는 탄생했다.그러나 그것은 개미는 아니었다.콩나물이 두쪽의 머리를 들고 똑같이 자라지만 햇빛의 방향이라든가 영양의 흡수에 따라 똑같지는 않듯이 「똑같은 것」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추상에 대한 개념이다.그런 그의 예술을 두고 프랑스 평론가 자크 도판은 『추상이란 말의 가장 절대적인 의미에서 추상예술』이라고 말했다. 작업이 너무 힘들어 오른 팔만 길어지고 오른쪽 귀가 「당해서」 잘 안들리는 통에 말씨도 어눌했던 그가 스스로를 「백제 석공의 후손」인가 보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가난한 만학의 미술학도로 생계를 위해 프랑스의고성수리를 할때 그 돌을 주무르는 일에서 깨달은 자신의 조형적 재능과 흥미 때문이었다. 고향 마산에 대한 애착이 유난해서 그곳에 미술관을 마련했고 그것이 억울한 일로 훼손되는 설움도 당했었다.그래도 미술관이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영원의 길」을 떠나는 그를 잘 놓아주지 않았던 듯하다.「마산시민과 민족전체의 문화적 자산」인 미술관을 『남은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해 국제미술관으로 가꾸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온갖 고난의 길로 살다간 그의 숭고한 예술인생은 이제 소중한 우리의 자산으로 남았다.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미술관과 작품들을 그가 한만큼 사랑하며 가꾸는 일은 유언이 아니라도 남은 사람의 몫이다.특히 그로해서 더욱 향기가 높아진 고향 마산의 더 큰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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