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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30) 남해 난곡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30) 남해 난곡사 느티나무

    봄바람에 실려 온 편지 한 장 달랑 들고 먼 길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이 마치 조상 모시듯 정성으로 보호하는 나무’라며 할아버지 댁이 있는 시골의 정자나무를 소개한 제자의 편지다. ‘송글송글’이라는 유쾌한 이름의 여(女)제자는 편지에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가 잘될지 아닐지까지도 나무를 보고 짐작한다.”며 나무가 농사를 비롯한 모든 살림을 관장하는 큰 어른 같은 대상이라고 했다. 송양은 여러 각도에서 손수 촬영한 사진까지 첨부했다. 나무가 있는 곳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은진 송씨 집성촌인 경남 남해군 난음리 난음마을이다. ●女제자가 보낸 편지 속의 느티나무 송양이 편지에서 그려낸 것처럼 느티나무는 마을 앞의 너른 논을 거느리는 듯한 마을 수호목의 융융한 위용을 가졌다. 나무의 풍광을 더 근사하게 하는 건 나무 곁에 서 있는 ‘난곡사’라는 한 채의 아담한 사당 건물이다. 난곡사는 고려 후기에 성리학의 체계를 완성한 유학자 백이정(1247∼132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지역 유림들이 세운 사당이다. 난곡사와 느티나무, 그리고 그 앞으로 넓게 펼쳐진 들녘은 3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난음마을이 정신과 물질 모두의 풍요를 누리는 아름다운 마을임을 짐작게 한다. 송양은 편지에 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의 잎이 예쁘게 잘 돋아나면 풍년이 들고, 잎이 잘 나지 않으면 흉년이 들 것”을 예측한다고 썼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이뤄진 믿음이겠지만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느티나무에 잎이 나는 계절은 농사를 시작하는 때다. 곡물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이 즈음의 날씨는 한 해 농사를 쥐락펴락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느티나무의 잎이 무성하게 돋아난다는 건 곡식의 씨앗이 뿌리를 튼튼하게 내릴 수 있을 만큼 날씨가 좋다는 이야기다. 풍년을 예감할 수 있는 기미다. 그래서 이 같은 이야기는 난음마을뿐 아니라 큰 나무가 서 있는 농촌 마을에서라면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내내 나무를 바라보며 그 그늘 아래서 산다고 해도 되지요. 농사일이 바빠지면 모두 저 나무 앞에 모여들지요. 한여름에는 나무 그늘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선답니다.” 마침 느티나무 앞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나무 전체에 푸른 잎이 골고루 돋아나는 느티나무를, 풍년을 예감하듯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젊은 시절 대처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사는 송동우(77) 노인이다. ●마을 생활의 중심인 정자나무 농사일과는 무관했을 송양도 마을을 생각할 때마다 맨 먼저 나무가 떠오른다고 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 댁에만 가면 사촌 형제들과 나무 곁에 나와서 놀았어요. 나무에 기대어 숨바꼭질도 하고 기어오르기도 했지요.” 마을 어귀는 사람들의 모든 들고 남이 스쳐 지나는 곳이다. 나무는 아침저녁으로 들녘을 오가는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을을 찾아온 어린 아이까지 긴 세월 내내 모두를 품어 안았다. 느티나무보다 ‘정자나무’로 더 많이 불리는 나무는 얼핏 보아도 난음마을의 중심이자 가장 상쾌한 쉼터임을 알 수 있다. 크고 듬직해서만이 아니다. 나무 그늘 아래에 놓은 평상은 여느 마을의 평상과 달리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담겼다. 무성하게 펼친 느티나무 가지를 지붕 삼아 공 들여 지은 정자다. 평상 앞에는 은진 송씨의 조상인 우암 송시열의 흉상이 자존심처럼 꼿꼿하게 세웠다. 얼핏 보아도 이 자리가 마을의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대전 인근에 살던 조상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곳곳을 다니다가 여기까지 내려온 거죠. 이곳에 터를 잡은 게 700년은 됩니다.” 송 노인은 느티나무가 마을이 처음 이뤄졌을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나무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군청에서 세운 보호수 표석에는 나무를 650살로 표시했지만 실제 나이는 그보다 더 오래됐다는 이야기다. 700년이라는 긴 세월은 나무 밑동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정성껏 충전재로 메운 커다란 구멍이 나무가 지내 온 긴 세월의 풍상을 짐작하게 한다. 더 안타까운 건 나무 줄기의 윗부분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하릴없이 나무는 더 이상 키를 키우지 못하고 옆으로만 널찍하게 가지를 펼쳤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가 담겨 편지에서 송양은 “할아버지는 옛날에 이 나무의 뿌리를 타고 개울을 건너서 이웃 마을로 마실 다녔다고 하셨다.”고 썼다. 물론 송양의 할아버지가 타고 넘었다는 나무 뿌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느 느티나무 못지않게 큰 나무를 놓고 누구라도 보탤 수 있는 말이지 싶다. 옛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나무는 무척 크다. 가지는 사방으로 20m쯤 펼쳐져 있고 키는 19m, 가슴 높이에서 잰 줄기 둘레는 6m나 된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나무는 실제 크기보다 더 커 보인다. 700살 된 느티나무 곁에 200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 까닭이다. 마치 한 뿌리에서 솟아나온 것처럼 붙어서 자라는 두 그루는 한 그루의 풍성한 나무처럼 보인다. 두 그루의 나무가 가까이에서 자라는 게 생육에 좋을 리 없다. 그러나 700년의 삶이 지어 낸 넉넉한 품은 젊은 나무를 너그러이 품어 안았다. 두 그루가 전혀 다툼 없이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를 이뤘다. 나무를 한참 바라보자니 송양의 편지에 담긴 속뜻이 살아 오르는 듯하다.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마다 맨 앞자리에 떠오르는 나무의 존재감을 되새기면서 송양은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를 짚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가슴에 품은 젊은 여제자의 편지에서 느티나무 잎새의 연초록 향기가 알싸하게 차올랐다. 글 사진 남해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 “노벨화학상 나왔으면”

    80대의 서울대 동문이 “노벨 화학상 수상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면서 모교에 잇따라 거액을 기부했다.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은 그는 올 2월 1억원을 서울대에 기부한 데 이어 지난달에도 연구실 환경 개선에 사용하라며 3000만원을, 3일에도 2000만원을 더 냈다. 서울대 상학과 49학번인 그는 1억원을 기부한 후 자연대 학장에게서 온 감사 편지를 읽다가 추가로 기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전했다. 편지에는 “자연대의 염원인 노벨상과 필즈상(수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낡은 연구실을 보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는 “상을 타게 하려면 연구 환경 개선 부분에 먼저 지원했어야 했는데, 전에 기부한 1억원은 수상자에게 주라고 낸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추가로 기탁한 3000만원은 자연대의 연구 환경 개선 사업에 쓰일 예정이다. 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 ‘미이라로 발견’ 충격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 ‘미이라로 발견’ 충격

    1958년에 제작돼 컬트영화로 유명한 ‘50피트의 우먼’(Attack of the 50 Foot Woman)의 여주인공 이베트 비커스(82)가 사망 후 거의 1년 만에 미이라가 된 채로 발견돼 충격을 주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의하면 그녀의 사체는 4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자택에서 발견됐다. 그녀의 집 우편함에 우편물들이 쌓이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이웃 주민인 수잔 세비지가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 확인하게 된 것. 그녀가 집안에서 발견한 것은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비커스의 시체는 거의 미이라가 된 상태로 방안에 놓여 있었다. 방안에는 히터가 그대로 켜져 있는 상태였다. 경찰은 비커스가 사망한지 거의 1년이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82세의 노환으로 혼자 지내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할 예정이다. 언론은 ‘1년이 되는 동안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충격’이라고 보도했다. 처음 사체를 발견한 수잔 세비지는 “아직도 그녀의 영화를 기억하는 팬들이 팬레터와 사인된 사진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내오곤 했는데 이렇게 홀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비극” 이라고 말했다. 이벳 비커스가 주연한 ‘50피트의 우먼’은 몬스터 고전영화의 컬트영화로 1993년에 대릴 한나 주연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사진=’50피트 우먼’ 포스터와 20대의 이베트 비커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김경태 tvbodaga@hanmail.net
  • 자치구마다 孝데이 행사 ‘풍성’

    자치구마다 孝데이 행사 ‘풍성’

    자치구마다 8일 어버이날을 맞아 효(孝)를 되새기고 부모님 은혜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효 잔치가 풍성하다. 광진구에는 어버이날을 앞두고 경로잔치에 써달라며 후원금 300만원을 기부한 천사가 있어 눈길을 끈다. 능동에서 건축업을 하는 박상희(51·여)씨는 평소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던 차에 주민센터 경로잔치 현수막을 보고 선뜻 후원금을 내놓았다. 또 4일 동주민센터별로 어르신 위안잔치가, 14일 오전 10시 구의동 동의초교에서 추억의 운동회, 18일 서울대공원을 관람하는 독거노인 나들이 행사가 잇따른다. 동대문구는 6일 청량리 노인종합복지관에서 한국전통타악그룹 ‘디딤소리’ 예술공연을 비롯해 노인인권센터 인형극과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을 무대에 올리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한다. 7일 오후 6시 용두공원에서는 색소폰동호회 연주회, 판굿이 어우러진 퓨전 공연으로 나들이 나온 어르신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성북구는 6일 오후 2시 길음복지관에서 어르신들에게 미용·네일아트를 해드리고 사진을 찍어 액자에 담는 ‘청춘을 돌려다오’ 행사를, 강북구는 4일 오후 1시 강북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 신사임당을 뽑고 무료로 사진촬영도 해드리는 ‘천태자비 효축제’를 개최한다. 19일 강북스포츠센터에선 장수를 기원하는 합동 금혼식도 열린다. 서초구는 4일 오전 10시 서초구민회관에서 1004(천사)개의 카네이션을 어르신들에게 달아드리는 시간을 마련한다. 특히 이날 행사에서는 손자·손녀가 전하는 감사의 편지 전달식을 갖고 실버가요제를 연다. 중랑구에선 3~6일 중·고교 학부모봉사단과 학생 160명이 복지관, 병원 등을 찾아 홀몸 어르신 2000명에게 사랑의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말벗 해드리기, 청소 자원 봉사활동을 펼친다. 은평구는 4일 어르신 초청 강화도 나들이, 같은 날 금천구에선 달빛충만 카네이션 패밀리 축제, 용산구에선 다음 달 10일 어르신 가수왕을 뽑는 실버 가요제를 열어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강남구는 6일 오후 2시 도곡동 숙명여고 강당에서 지역 어르신 1300여명을 모시고 ‘孝 Day’ 행사를 갖는다. 행사는 대학생들의 ‘큰절 올리기’와 함께 효행자, 장한 어버이, 노인복지 유공자에 대해 표창하고 한국 벨리댄스협회 소속 어린이와 주부가 선사하는 열정적인 ‘밸리댄스 공연’에 이어 가수 서수남씨의 즉석 ‘노래교실’도 곁들인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길섶에서] 어머니 展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30년 전 초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자장면 안 사준다고 10리 길을 울면서 걷던 내 뒤를 묵묵히 따라만 오신 어머니….” 40대 아들은 자장면 한 그릇 사줄 수 없었던 어머니와 가난을 함께 추억한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70대라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늙지는 않나 보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보다 더 진한 표현이 ‘죄송합니다’라는 사실, 새삼 알게 됐다. 어머니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야 어느 자식인들 예외가 있으랴. 과천국립과학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한민국 어머니전(展)’ 한 켠의 ‘못 부친 편지’ 코너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풀어낸 노란 리본이 가득하다. 부치지 못해 안타깝고 허허롭다. 편지가 아니라도 좋다. 언제나, 쉽게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전화도 고맙다. 만날 때마다 그냥 꽉 안아드리는 것도 좋겠다. 7살 아이의 편지에서 배운다. “엄마가 안아주면 좋아요. 나도 안아줄게요.” 버킷 리스트에 ‘어머니를 300번 안아드릴 것’을 추가했다. 마음이 급해진다.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
  • 성동구청장의 편지

    성동구청장의 편지

    “둘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평소 내게 하고 싶었던 마음속의 말을 들려주세요.” 성동구 직원들은 최근 집으로 배달된 이 같은 내용의 구청장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누군가 장난으로 보낸 줄 알았다가 고재득(65) 구청장의 친필 사인과 함께 진솔한 내용이 담겨 있어 어떻게 답신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편지를 받은 S(8급)씨는 “구청장은 야근하는 직원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등 직원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직접 편지까지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비밀이지만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를 적어 보냈다.”고 말했다. 2일 구에 따르면 고 구청장은 직원 1272명에게 일일이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행복 경영의 전제는 소통이라는 믿음으로 우리 성동 가족들의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는 말과 함께 반송용 봉투도 동봉했다. 반송지에도 구청장 집무실이 아닌 구청장 집 주소가 적혀 있는데, 이는 비서실이나 총무과를 통하지 않고 직접 편지를 뜯어 하나하나 읽어 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직원들과 편지 주고받기’는 고 구청장이 직접 낸 아이디어. 이메일보다는 종이 편지를 통해 직원들과 더 친밀감을 갖고 직원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기 듣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고 구청장이 민선 2기 구청장으로 재직하던 10여년 전에도 한번 시행돼 직원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만약 내가 구청장이라면 이렇게 할 텐데.’라는 포부와 평소 하고 싶었던 말, 직장생활 에피소드 등 직원들의 답장을 바탕으로 고 구청장은 신바람 나는 일터, 정답고 행복한 사무실을 만들 계획이다. 구는 또 고 구청장의 지시에 따라 지난 2월부터 매주 금요일을 ‘가정·자기계발의 날’과 ‘소통의 날’로 지정해 시행하고 있다. 전 직원이 업무 부담을 훌훌 털고 정시에 퇴근, 가족과 자신을 위해 보낼 수 있도록 했다. 또 매월 첫째·셋째주 수요일은 직원 간 대화의 시간을 갖는 ‘소통의 날’로 운영하고 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천국의 내가 나에게 보낸다’···’천국에서 온 편지’ 日사이트 화제

     미래 ‘천국(天國)’에 있을 내가 지금의 나에게 편지를 전하는 ‘천국에서 온 편지’ 인터넷 사이트가 화제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사이트는 ‘미래 천국에 있는 내가 지금의 나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는 콘셉트로 만들어졌다. 운세(運勢)를 보여주는 일종의 재미로 보는 사이트다. 일각에서는 이 사이트가 ‘분신사바 오이떼 구다사이’ 등을 만든 일본의 신비주의자 같은 부류가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이름과 생년월일, 성별을 입력하고 ‘천국에 연결’이라는 버튼을 누르면 천국의 나에게서 편지가 온다. 이 사이트는 “천국의 메시지는 오락으로 즐기세요. 메시지의 내용에 우울하지 마세요.”라는 당부의 말을 적어놓았다.  편지 내용에는 사망 연도를 포함해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까지 상세히 언급된다. 이 편지는 일본어로 돼 있어 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포털 사이트 등의 일본어 번역기를 이용해야 읽을 수 있다. 이 사이트는 또한 이 편지에 너무 깊은 믿음을 갖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 사이트는 “천국의 메시지는 오락으로 즐기세요. 메시지의 내용에 우울하지 마세요.”라고 적었다. 이 사이트가 화제로 떠오르면서 한글판 ‘천국에서 온 편지’ 사이트도 생겼다.  한편 이 사이트는 지난 해 9월3일 방송된 KBS-2TV ‘스펀지 제로’에서도 소개돼 화제를 일으켰다. 당시 방송에서 개그맨 이휘재는 2042년 70세 나이로 계단에서 떨어져 사망한다는 예견이 나왔고, 개그맨 허경환은 96세까지 장수한다는 내용이 예견됐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7) ‘삼민주의’ 쑨원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7) ‘삼민주의’ 쑨원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1866~1925). 그가 내세웠던 ‘삼민주의’ 곧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는 한마디로 말하면 ‘구국주의’이다. 삼민주의는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건국할 수 있게 만든 혁명 정신이었고, 외세로부터 중국의 통일을 지켜낼 수 있게 하는 이념적 모토였다. 쑨원의 유훈을 받든 장제스나 마오쩌둥 등에 의해서 삼민주의는 재해석되고 계승되었다. 그리고 지금 쑨원은 중국과 타이완 양쪽에서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성공한 혁명가 쑨원. 이상이 우리가 보통 상식으로 알고 있는 쑨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실제 쑨원의 삶은 이와 달랐다. 현실의 쑨원은 혁명가로 이름을 내건 이래로 단 한번도 혁명 봉기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신해혁명을 알리는 1911년의 우창 봉기까지도. 한마디로 쑨원의 삶은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 무엇이 혁명 봉기에 계속 실패한 그를 성공한 혁명가의 아이콘으로 기억하게 만드는가. 쑨원에게 혁명이란 과연 무엇이었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쑨원은, 혁명은 또 어떤 의미인가. ●직업 혁명가 쑨원의 탄생 1800년대 청나라가 외국에 문을 열어 놓고 있었던 유일한 곳 광둥성 광저우. 근처 농촌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외국인과 그들의 생활 및 문화에 대해서 낯을 가리지 않았다. 이 지역 출신자가 으레 그러했듯 그의 집안에도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버는 친척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쑨원은 하와이에서 일하는 형 덕분에 근대적 교육과 기독교에 접할 수 있었고, 이후 의학 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전근대적인 청나라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고, 중국은 점차 서구 열강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었다. “대체로 중국과 조약을 맺은 나라는 모두 중국의 주인이다. 따라서 중국은 한 나라의 식민지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있고, 우리는 한 나라의 노예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노예가 되어 있다. … 이것을 보아도 중국이 안남이나 조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래서 중국을 반(半)식민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내가 만든 명칭에 따르자면 ‘차(次) 식민지’라고 불러야 한다.”(‘민족주의’ 제2강, 1924년 2월) 1895년 전근대시기 세계 최대 제국의 하나였던 청나라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무참히 패배했다. 서구 열강도 아닌,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에 중국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중국의 멸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위기감은 강력한 민족주의적 신념과 혁명적인 방법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쪽으로 쑨원을 몰고 갔다. ‘만주족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건설하자.’ 혁명이 그의 답이었다. 쑨원은 요동치는 정국을 틈타 혁명 봉기를 도모했다. 하지만 쑨원의 봉기는 시작도 하기 전에 청 정부의 감시와 단속에 발각됐다. 함께 거사를 도모한 동지들 중 일부는 정부군에 잡혀 처형을 당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한 이 거사로 쑨원은 반체제의 길로, 직업적 혁명가의 길로 들었다. 이후 혁명은 그의 삶이 되었다. 한번은 쑨원이 해외의 지원자를 모으기 위해 영국 런던에 갔다가 런던 주재 중국 공사관 관헌에게 잡힌 일이 있었다. 쑨원의 자칭 ‘피랍’ 사건은 그의 이름을 중국보다도 해외에서 먼저 반체제 혁명가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쑨원은 하와이를 필두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가는 곳마다 중국혁명을 역설했다. 그들로부터 한두 푼 피땀이 가득 밴 후원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그는 혁명의 불길을 살리고,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해 항상 봉기를 일으켰다. 그것의 성공과 실패는 상관없이 그는 항상 격동하는 중국의 근현대사와 온몸으로 부딪쳤다. ●혁명, 다시 한번 더 1905년 쑨원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보황회와 힘겨운 각축을 벌였다. 그는 혁명과 공화를 기치로 내건 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중국동맹회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당시 쑨원만큼 서구 열강을 다루는 교섭에 뛰어나다고, 해외 화교 사회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평가를 받은 자가 드물었던 덕분이다. 쑨원은 중국혁명에 열강들이 개입할까 항상 우려했다. 쑨원에게는 열강들의 이권다툼 속에서 중국의 운명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는 냉철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쑨원이 도모했던 봉기들, 가령 광둥, 광시, 윈난 등 남서부 변방의 봉기들은 모두 실패했다. 1911년에 일으키려고 했던 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쑨원에게는 중국 국내에 어떠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기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쑨원을 대하는 서구 열강의 시선도 냉담해졌다. 열강들은 중국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지켜낼 수 있느냐, 쑨원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쑨원이 기댈 것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민중의 불만과 혁명적 열기뿐이었다. 쑨원은 자신을 대하는 서구 열강의 시선이 냉담해질수록 민중의 혁명적 열기에 의지했고, 그것을 혁명 이상으로 녹여 내는 작업에 매진했다. 삶이 계속되듯 쑨원의 혁명은 계속되었다. ●1911년, 혁명정신을 갖고 온 사나이 쑨원은 우창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신문을 통해 접했다. ‘열 번째 패배’에서 잠시 낙담한 뒤, 다시 활동을 재개하려고 움직이고 있던 찰나였다. 우창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이었지만, 쑨원은 서둘러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워싱턴, 런던, 파리를 경유해서 귀국하는 긴 행로를 선택했다. 긴 항해를 마치고 1911년 말 상하이에 도착한 쑨원. 사람들은 그에게 무엇을 갖고 왔느냐고 물었다. 쑨원의 답은 간단했다. ‘혁명 정신’을 갖고 왔노라. 쑨원이 세계를 돌고 돌아 귀국한 까닭은 바로 열강들에게 중국 혁명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기 위해서였다. 열강의 이권 다툼으로 중국이 사분오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쑨원에게 중국 혁명의 성공은 외세의 중국 분할 없이 전 영토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형태로 공화제 혁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중국 혁명의 과정에서 보여 줬던 통일된 중국에의 염원, 이것이야말로 쑨원을 중국을 낳은 아버지로 추앙받게 만든 힘이었다. 혁명이 성공한 후에 쑨원이 보여준 행적도 중국의 통일이라는 궤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화정에 맞춰 비밀결사의 구태를 벗은 동맹회는 국민당으로 거듭났다. 국민당의 대표로 선출된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군사적인 기반이 약했던 그는 초대 대총통의 자리를, 당시 베이징을 중심으로 기반을 잡고 있던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에게 양보했다. 쑨원에게서 혁명은 공화정의 수립으로 완성됐기도 했지만,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강하고 하나 된 중국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1912년 마침내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그러나 혁명 정신의 완성태로 보였던 공화정은 잘 굴러가지 않았다. 선거를 통해서 만들어진 임시약법은 믿었던 위안스카이 등 정치가들에게 유린당했다. 아첨, 뇌물, 협박과 살인이 횡행했다. 설상가상으로 1915년 위안스카이의 칭제(稱帝)와 군벌의 난립으로 중화민국의 기반은 흔들렸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쑨원의 방식 “또 다른 거사를 분주히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 나는 모든 일을 직접 지휘하겠다.”라고 쑨원은 미국인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중화민국의 성립과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진 듯 보이는 쑨원. 그는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국민당을 재정비하고, 혁명 세력을 결집시키고, 그들을 훈련시켰다. 삼민주의로 혁명 정신을 다잡았다. 1923년 쑨원은 마침내 광둥을 진원지로 한 통일을 위해 북벌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는 혁명의 시작점에서 그 결과를 보지 못한 채 1925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쑨원은 단 한번 성공한 1911년의 혁명에서 무참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쑨원은 결과물로 주어진 현실을 견주고, 재고, 제도화하는 정치에 서툴렀으므로 새로 만들어진 공화정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쑨원은 그 실패에서 혁명이 결코 공화제라는 정치체제의 수립만으로 이뤄질 수 없음을 알았다. 쑨원은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전히 혁명 정신은 유효하고, 중국은 통일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쑨원은 중국의 통일을 향한 외침, 북벌을 선언한 채 죽었다. 그는 혁명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그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혁명이란 오로지 길 위에서 끝나지 않는 과정으로만 말해지지 않던가. 그래서 쑨원에게 혁명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지금 여기 혁명의 이름으로 그는 항상 살아 있다. 이것이 바로 ‘혁명가’ 쑨원이 갖는 의미다. 최정옥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서태지 입장표명하자 이지아 소송취하… 왜?

    서태지 입장표명하자 이지아 소송취하… 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태지·이지아 사태가 서태지의 입장 표명과 이지아의 소송 취하로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그들의 결혼과 이혼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지 열흘 만의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많아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서태지는 열흘 만인 지난달 30일 보도자료를 내고 “이지아와 1997년 10월 미국에서 둘만의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 생활을 시작했으나 성격과 미래상이 달라 2000년 6월 별거를 시작했고, 2006년 8월 부부 관계가 종결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지아와의 만남에 대해 “1993년 미국에서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으며 한국과 미국에서 편지와 전화로 연락하며 호감을 갖게 됐고, 1996년 은퇴 후 미국 생활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지내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둘은 결혼한 지 2년 7개월 만에 별거를 시작했고, 2006년 1월 이지아의 이혼 요청이 있은 후 6월 12일 이지아 측이 단독으로 미국 법정의 이혼 판결을 받으면서 8월 9일 부부관계가 종결됐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날 공식홈페이지인 서태지닷컴을 통해 14년 동안이나 결혼과 이혼을 숨겼던 이유와 심경을 밝혔다. 서태지는 “1996년 은퇴 후 가수 서태지가 아닌 평범한 자연인 정현철로 돌아가 보통의 사람들과 같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평범한 생활을 소망했다.”면서 “은퇴 이후 힘겹게 얻은 최소한의 보금자리와 처음으로 누려 보는 평범한 일상을 보호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히지 못한 데 대해서는 “2000년 이후 상대방과 헤어지는 수순을 밟으며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가수 서태지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미 헤어져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상대방을 세상에 발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내 마음에 담아둬야 할 비밀이 됐다.”고 설명했다. 서태지가 입장을 표명하자, 이지아도 같은 날 55억원의 위자료 및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취하했다. 서태지 측이 2주 동안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소취하가 성립되며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재판도 종결된다. 하지만 이지아가 14년 동안이나 지켜 온 서태지와의 결혼과 이혼에 대한 비밀이 공개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번 소송을 감행한 이유와 돌연 소송을 취하한 배경을 둘러싸고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특히 서태지의 입장 표명과 이지아의 소송 취하가 같은 날 이뤄져 사전에 양측의 교감이 있었다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들의 결혼과 이혼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고, 인터넷에서는 둘의 사생활 파헤치기 광풍이 불었다. 이처럼 파문이 커지자 양측은 이번 소송을 장기적으로 끌고가는 데 부담을 느꼈고, 합의를 통해 서둘러 소송을 종식시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는 것이다. 연예계 일각에서는 “양측이 10억원대의 합의금에 소송을 취하했다.”는 물밑 합의설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서태지 측은 1일 “이지아의 소 취하 사실을 몰랐다. 거액 합의설도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이지아도 이날 밤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소를 취하하며 그 어떤 합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지아가 소송을 제기한 배경도 미스터리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베토벤 바이러스’, ‘아테나: 전쟁의 여신’ 등을 통해 주연급 스타로 부상한 그가 자신의 결혼과 이혼 사실이 모두 알려질 것을 알면서도 한국에서 이번 소송을 진행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물론 55억원이 큰돈이긴 하지만 이미지 타격으로 입을 손해는 더욱 막심하고, 앞으로 주연급 스타로 계속 활동하기 위해 포기할 수도 있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이지아는 사건이 터진 지난달 21일 사태가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밝혔지만, 소송에 따른 파장과 결과에 대해 사전 대비나 각오가 전혀 없었는지도 의문이다. 특히 두 사람의 관계는 2000년 6월 이후 사실상 끝난 셈인데 11년이나 지나서야 재산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나선 배경도 의문이다. 또 디자이너를 꿈꾸던 그녀가 굳이 한국으로 와 전 남편이 활동하는 연예계에 데뷔한 이유 등 이번 소송을 통해 불거진 의문점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이은주·이민영기자 erin@seoul.co.kr
  • [나와 통일] “한국은 北에 식량 지원하고 北은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나와 통일] “한국은 北에 식량 지원하고 北은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1991년 11월 25일. 남북의 여성이 분단 46년 만에 서울에서 얼굴을 맞댔다. 분단 후 처음으로 북한 여성이 판문점을 넘어와 남북통일과 평화를 노래한 것. 이를 성사시킨 사람은 남한의 여성도 북한의 여성도 아니었다. 4년 넘게 남북한의 메신저 역할을 한 시미즈 스미코 전 일본 사민당 의원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남북 분단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주장하는 시미즈 의원으로부터 남북 여성 교류를 성사시키기까지의 뒷얘기와 현 남북관계에 대한 소회를 들어 봤다. →4·15 김일성 생일을 맞아 북한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요즘 평양의 분위기는 어떤가. -김일성 주석 탄생 100년(2012년)을 앞두고 축하 분위기였다. 작년에 북한에 갔을 때와 달리 주택이 잘 정비돼 있다는 느낌이었다. 살구꽃과 개나리꽃이 아주 예쁘게 폈고, 분위기가 휴일에 축제가 더해져 즐거워 보였다. →외부에서는 북한이 매우 빈곤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빈곤한 것은 사실이긴 하다. 그래도 내년에 강성대국을 앞두고 국민 경제 강화를 최우선하는 한편 굉장히 자신감에 차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술 등 여러 측면에서 늦었지만 그런 가운데서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겠다는 의욕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몇 번째 방북인가. -24번째다. 1972년에 간 게 처음이었다. →어떤 계기로 북한 문제에 관여하게 됐나. -1972년 북한의 초청으로 처음 평양을 방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조선반도가 인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북한에서 박물관, 역사전시관 등을 보고,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른바 여성운동, 평화운동을 하는 내가 일본의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모르고 있었다니 엄청 충격을 받았다. →남북이 분단된 데에 일본의 책임을 느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한반도가 짓밟힌 뒤, 해방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합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지 않았나. 일본이 패전했기 때문에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보고 희생자가 된 것이다. 식민지배가 원인이 돼 분단이라는 희생을 강요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본은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1년 남북한 여성 교류에 어떤 계기로 참가하게 됐나. -1987년 8월 이우정 당시 여성단체연대 공동대표가 ‘원자폭단 금지 세계대회’ 참석차 일본에 왔다. 감시를 피해 밤에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가 한국의 민주화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이 대표가 북한 동포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이 대표는 “동족인데도 사십년 넘게 못 만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일본에서 북한 여성을 만날 수 없겠느냐.”면서 남북한 여성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일본이 북한과 국교가 맺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로서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 대표의 열정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무려’ 여연구 당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몽양 여운형의 딸)을 말하는 게 아닌가(웃음). 그 이후 4년간 인편을 통해 북한에 편지를 보낸 끝에 일본 대회 개최가 결정됐다. 아마도 김일성 주석에게 편지가 전달됐던 것 같다. →굉장히 긴 노력 끝에 이뤄 낸 결실이었다. -이 대표는 남북이 만난다고 하면 정부의 간섭을 받을 테니 ‘아시아 평화의 여성의 역할’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냈다. 행사 준비도 문서로는 일절 남기지 않고, 구두로만 전달해 몰래 준비했다. 정체가 드러날까 봐 참가자도 모호하게 했다. 미키 무쓰코(고 미키 다케오 전 총리의 부인), 오타카 요시코 자민당 참의원 등을 초청했다. 나중에 정부으로부터 “자민당 행사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대성공이었다(웃음). 일본에서 열린 첫 대회에 1000명 이상이 모여 대성황을 이뤘다. →집회에서 남북한이 뜻을 모았나. -일본이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남북한 여성의 교류를 확대하고, 위안부 문제도 함께 해결하자고 뜻을 모았다. 정치의 벽을 부수는 것은 역시 민중의 힘이라는 것을 느꼈다. →같은 해 11월에 서울에서 제2차 대회가 열렸다. -한국 여성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가 통일원을 움직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이 집회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결국 여연구가 아버지 여운형의 묘소를 참배했는데, 약속한 일정엔 없었던 일이라고 정부에서 문제를 삼아 도중에 북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깨진 건 참 유감이었지만, 집회 당시 마치 남북이 통일된 것처럼 흥분하고 감격했다. 남북한 여성들이 껴안고 울고 웃는 모습에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 분단의 책임을 느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남북 교류가 굉장히 활발했던 것 같다. -민중들의 교류, 대화가 없으면 화해와 통일로 갈 수 없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을 때 드디어 밝은 시대가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군사적 관점으로만 상대를 보면 미움과 분노밖에 생기지 않는다. 작년에 여러 군사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어떻게 하면 긴장을 없앨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남북통일이 일본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렇지 않다. 일본이 (남북통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고, 동북 아시아 지배의 역사뿐 아니라 앞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지역의 새로운 미래, 새로운 상황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런 시대는 100년도 더 갈 것이다.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지 않으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나라가 되기 어렵다. 그걸 이룩하는 게 우리 세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등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식량지원은 인도주의 차원의 문제다. 남북 간의 대립이 있더라도 지원 의지가 없으면 대화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인간은 한번 지원을 해 준 나라는 잊지 않는다. 일본인은 전쟁 후 미군의 건빵·탈지분유 등을 받으면서 점령군에 대한 적대감이 없어졌다. 역시 음식이라는 건 인간에게 일상생활에서 없으면 가장 괴로운 것 아니냐. 북한도 여러 지원에 대해 한국 동포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게 좋다. →남북통일이 된다면 어떤 형태가 가장 좋을까. -다른 나라가 말할 문제는 아니지만 가장 좋은 건 다른 나라의 간섭 없이 같은 민족끼리 스스로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양측의 좋은 점을 취하고 통일을 다른 나라의 간섭이나 군사적 대립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실현될 것라고 생각한다. 조선 민족은 긴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항일운동이나 민주화 투쟁에서 조선의 민족성에 크게 놀랐다.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경제 발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지혜를 살려 주었으면 좋겠다.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면 좋은 지혜가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세상을 뒤흔든 불편한 사진 73장

    세상을 뒤흔든 불편한 사진 73장

    1993년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던 아프리카 수단. 카메라를 목에 건 당신 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비쩍 마른 여자아이가 보급품을 받기 위해 급식센터를 향해 네발짐승처럼 기어가고 있고, 그 뒤로 ‘초원의 청소부’ 독수리 한 마리가 서 있다. 독수리의 눈초리는 노골적이다. 얼른 소녀가 기력을 잃고 쓰러지길 바라는 포식자의 시선이다. 게걸스러운 독수리는 소녀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줄곧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밟고 있다. 꼭 보도사진가가 아니더라도 사진을 찍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 봤을 곤혹스러운 광경이 펼쳐진 셈이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평생 만나기 어려운 극적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소녀의 안위를 위해 독수리를 멀리 쫓아 버릴 것인가. 당시 이 같은 극적인 순간과 마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청년 사진가 케빈 카터는 사진을 선택했다. 수단이 겪고 있는 고통과 참상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순간을 사진에 담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극심한 갈등 속에서도 셔터를 눌렀고, 이후 독수리를 쫓아 버린 뒤 자신도 마을에서 멀리 도망쳤다. 카터가 찍은 사진은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반향은 대단했다. 소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편지가 신문사로 폭주했다. 이듬해 카터가 퓰리처상을 받으며 사진의 성가는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사진가에 대한 비난의 크기 또한 그와 똑같이 커졌다. 그는 왜 사진만 찍고 소녀를 돕지 않았을까. 독수리 맞은편에서 비슷한 눈높이를 한 채 쪼그리고 있었을 카터 또한 독수리와 다를 바 없는 모리배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던 카터는 결국 퓰리처상을 받은 지 두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다니엘 지라르댕·크리스티앙 피르케르 지음, 정진국 옮김, 미메시스 펴냄)는 이처럼 사진사(史)에서 논란이 된 사진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한 책이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병사가 적의 총탄에 쓰러지는 장면을 담은 로버트 카파의 사진, 1969년 닐 암스트롱과 함께 달에 착륙한 버즈 올드린의 사진, 1997년 달리는 차 안에서 파파라치의 렌즈를 피해 몸을 돌린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의 마지막 사진 등 논쟁거리가 된 사진 73장이 수록됐다. 책에 등장하는 사진들에 평범한 순간이란 없다. 전쟁의 광기와 학대, 참혹한 죽음, 도착적 성욕 등이 시종 독자의 상식과 참을성을 시험하고 도발한다. 컴퓨터 그래픽(CG)과 ‘뽀샵질’ 탓에 사진(寫眞)이 ‘진실의 매체’로서 가치를 잃기 이전의 것들이어서 더욱 충격적이다. 3만 90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신문 안 읽으면 망국의 길로”

    “신문 안 읽으면 망국의 길로”

    정부가 385억원을 들여 신문을 활용한 교육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대전에는 신문읽기 운동을 하는 대학 총장이 있다. 바로 한남대 김형태(64) 총장이다. 그는 ‘신문읽기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김 총장은 28일 “국민이 신문을 안 읽으면 망국의 길로 간다.”면서 “대통령도 나서서 신문읽기를 권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제부터 신문의 매력에 빠졌나. -소설 ‘인간시장’의 작가 김홍신씨가 충남 논산의 대건고 1년 선배다. 그와 함께 교지를 만들며 글에서 깊은 영감과 배움을 얻었다. 당시 책이 많이 없어서 각 대학 신문을 모아 읽었고, 한남대 학보사 기자로 3년 활동도 했다. →왜 신문을 읽어야 하나. -모든 사람이 난로에 손을 데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난로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농담이지만, 사람 다 죽는다. 그래서 간접 경험을 적절하게 제공하는 신문이 필요하다. 요즘 학생들은 편지나 일기도 안 쓰고, 휴대전화 문자와 같은 토막글만 많이 쓴다. 신문을 읽으면 자신의 깊은 생각이나 느낌을 종합적으로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높일 수 있다. 신문은 다양한 지식을 흡수하고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채널이기도 하다. →하루 중 언제 신문을 읽는가. -새벽 4시 조금 넘어 일어나 신문을 읽는다. 뒷면부터 앞면까지 거꾸로 읽는다. 두꺼운 노트를 펴서 메모하면서 1시간 넘게 읽는다. 퇴근할 때 다섯부 정도 더 들고 와 자정까지 본다. 하루를 신문으로 시작해 신문으로 끝낸다고 보면 된다. 사설과 칼럼을 꼼꼼히 읽는다. 사회, 문화, 심층기획 등 기사도 정독한다. TV는 뉴스와 가요무대만 본다. →신문 내용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활용하나. -내 강의는 무조건 신문에서 본 얘기로 시작한다. 시대의 이슈를 던져 청중을 사로잡는다. 그래야 청중이 기대하고 공감대가 만들어진다. 서양에서 주로 농담으로 강의를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어릴적 부터 만든 100권이 넘는 스크랩북이 내 기고나 강연의 자양분이다. →가족들도 신문을 많이 보는가. -저녁에 퇴근하면 가위를 들고 필요한 기사를 오려서 두꺼운 노트에 붙이고 내 생각과 코멘트를 적어 놓는다. 서재에는 내 키만큼 쌓아 놓은 신문더미가 3개나 된다. 신문 읽기와 스크랩을 하니까 화제가 궁하지 않게 된다. 스크랩을 할 때에는 어린 손자가 가위를 들고 온다.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다면. -이어령씨의 칼럼은 고도의 지성을 제공하고 있다. 속상한 기사보다 휴먼스토리와 선한 이야기에 자극과 감동을 받는다. →학교에서도 신문읽기 운동을 하는가. -올 신학기부터 국내 대학에서는 처음으로 시행하고 있다. 캠퍼스 곳곳에 신문열람대를 설치, 학생들이 언제든지 신문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신문읽기 강좌도 개설해 그 중요성도 가르치고 있다. 이 강좌는 한국언론진흥재단 공모에 선정돼 강사비 등을 지원받고 있다. →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인터넷과 휴대전화에 빠져 논리적인 사고가 안 되는 학생이 너무 많다. 이들에게 돈 덜 들이고 좋은 글을 많이 읽을 수 있는 신문읽기를 권하고 싶다. 두툼한 노트를 한권 사서 매일 하나씩 신문 기사나 칼럼, 사설 등을 오려서 붙이고 세번을 읽어라. 그리고 대안이나 아이디어를 코멘트로 남겨라. 이렇게 한 학생과 하지 않은 학생은 나중에 큰 격차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했는데도 취업이 안 된다면 나를 찾아오라. →요즘 신문을 어떻게 평가하나. -백화점처럼 없는 게 없다. 정치적 방향은 다소 불편하지만 국민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는 편이다. 다만 오늘의 운세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고급스럽고 건실한 기사로 (여론을) 리드하는 것이 좋다.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려면 찬반의 시각을 의식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피해야 한다. 글 사진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깔깔깔]

    ●잘못된 편지 그를 짝사랑한 지 3년째 되던 날. 이제 그만 마음 졸이고 사랑을 고백하라는 친구의 말에 용기를 내서 편지를 썼다. 그러나 직접 건네줄 기회를 매번 놓쳐 고백의 편지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결심을 한 나는 그에게 편지를 잽싸게 전해 주고 뛰었다. 다음 날 그에게 전화가 왔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때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가 했던 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제 나한테 2000원 왜 줬어?” ●난센스 퀴즈 절대로 울면 안 되는 날은? 중국집 쉬는 날. 세계에서 데모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우간다. 나폴레옹의 묘 이름은? 불가능.
  • ‘왕자의 난’ 딛고 ‘왕자 호동’ 웃다

    ‘왕자의 난’ 딛고 ‘왕자 호동’ 웃다

    유료 객석 점유율 94%. 국립발레단의 창작 발레 ‘왕자 호동’의 최종 성적이다. 2011년 첫 공연 ‘지젤’로 전회·전석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던 국립발레단이 남자 단원들 간의 ‘폭행 사태’로 주역 무용수 2명을 교체하는 홍역을 치르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27일 국립발레단에 따르면 지난 22~24일 사흘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 ‘왕자 호동’의 유료 객석 점유율은 94%로 집계됐다. 지난해(75%)는 물론, 2009년 초연(89%) 때보다도 높다. 창작 발레극이 자리를 잡으려면 10년은 걸리는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성과다.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된 ‘노장’(老將) 김용걸(38·호동 역)의 투혼 덕도 컸지만 그간 변화를 위해 부단히 쏟아부은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원래 2막에 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결혼식을 1막 마지막으로 옮겨온 것이 좋은 예다. 이로 인해 시간 안배(1막 1시간, 2막 40분)가 다소 틀어지긴 했으나 두 사람의 사랑이 맺어지는 오르막(1막)과 파국으로 치닫는 내리막(2막)의 대비 효과가 극명해졌다. 호동이 낙랑에게 자명고를 찢으라고 밀지를 내리는 대목을 실제 편지 쓰는 장면으로 추가한 것도 두 인물의 심리적 갈등을 선명하게 끌어냈다. 화려한 군무 못지않게 2막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슬픈 재회 장면도 압권이다. 김주원, 김리회, 이은원 세 주역(트리플 캐스팅)은 생명이 다해 가는 공주를 잘 묘사해 냈다. 물론 더 다듬어야 할 부분도 있다. 유형종 무용 평론가는 “연기나 안무 차원에서는 확연히 나아졌다.”면서도 “발레라는 장르적 특성을 감안해도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 장면이 지나치게 서구적인 형식에 치우쳤고, 왕자가 끝내 자결하는 결말도 너무 식상하다.”고 지적했다. ‘왕자 호동’은 10월 이탈리아에 간다. 발레의 본산으로 여겨지는 나폴리 산카를로 극장의 초청을 받아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농협 조직개편 본격화

    농협 조직개편 본격화

    거래 내역의 영구 유실 가능성이 확인되는 등 농협 전산망 마비 사태의 파문이 확산되는 가운데 농협의 사업구조 개편 작업이 본격화 국면에 들어섰다. 내년 3월 2일 농협은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해 ‘1 중앙회·2(금융, 경제) 지주회사 체제’로 공식출범한다. 하지만 최근 전산망 마비 사태와 맞물려 정보통신(IT)조직 등의 조직개편이 추가로 요구되는 상황이어서 새 변수가 될 전망이다. 정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조직 개편을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농협 중앙회는 26일 오후 서울 충정로 농협중앙회 본관에서 농협 사업구조개편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사업구조개편준비위원회와 경제사업활성화위원회 현판식을 가졌다. 이들 조직은 지난달 통과된 농협법의 부칙 제2조와 제5조에 따라 창설됐다. 사업구조개편준비위원회는 정부, 농민단체, 학계, 언론계, 농협관계자 등 26명으로 구성됐고, 내년 2월까지 활동한다. 경제지주회사와 금융지주회사의 출범 준비에 대한 자문과 의견수렴을 맡게 된다. 경제사업활성화위원회는 정부, 농민단체, 학계, 농협관계자 등 15명이 참가해 신·경 분리 이후 경제사업 활성화를 통해 농협 본래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의견을 제시하고 자문하게 된다. 이들은 농림수산식품부가 제1차관을 본부장으로 해 이달부터 출범시킨 ‘농협사업구조개편지원본부’와 함께 조직 개편을 진행하게 된다. 농협과 정부는 신용·경제 분리 외에 이번 전산망 마비 파문과 관련해 제기되는 조직개편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각종 사태에 책임질 수 있도록 농협중앙회장직을 비상임에서 상임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현재 농협중앙회장 직속으로 운영되는 IT조직을 전문성이 강한 금융지주회사 산하로 편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우선 전산망 마비 파문과 별개로 농협 사업조직개편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전산망 파문은 조직 구조보다는 보안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식품부 고위관계자는 “전산망 마비 파문과 별개로 연구용역 결과 농협중앙회장의 상임직 전환이나 IT 조직의 금융지주회사 편입이 더 생산적인 것으로 나타나면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농협 사업조직 개편은 7월까지 농협안이 도출되면 2~3개월의 정부 실사를 거쳐 부족 자본금을 10월 초 국회 예산안에 반영하는 수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위치추적 파문…잡스 ‘부인’ 고객 ‘고소’

    위치추적 파문…잡스 ‘부인’ 고객 ‘고소’

    애플 아이폰이 이용자 동의 없이 위치정보를 수집해 온 사실이 지구촌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정작 당사자인 애플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아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잡스의 이 같은 행태가 애플이 그동안 펼쳐 온 ‘신비 마케팅’의 하나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지난 며칠 아이폰 트래킹 파문 이후 침묵을 지켜 온 잡스는 25일(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처음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누구도 추적하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잡스는 이날 ‘맥루머’라는 인터넷 매체를 통해 해명을 요구한 한 독자의 질문에 “그들(안드로이드)은 (위치추적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도 추적하지 않는다. 주변에 돌고 있는 정보는 거짓이다.”라고 답했다. 이미 수많은 전문가와 이용자들이 아이폰의 위치추적을 확인한 터임에도 잡스는 이를 정면 부인한 것이다. 한편 미국의 아이폰 이용자 두명이 이날 애플을 상대로 프라이버시 침해 등을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미국의 소비자들 사이에 애플을 상대로 한 집단소송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플로리다에 사는 아이폰 이용자 비크람 아잠푸르와 뉴욕의 아이패드 사용자 윌리엄 데비토가 지난 22일 플로리다주 탬파시의 연방법원에 위치정보 수집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원고 측 변호사인 애런 메이어는 “애플이 현재 기본적으로 이용자들이 방문하는 모든 장소에 대해 추적하고 있다는 개념과 관련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며 “사법당국도 이를 위해서는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는데 애플이 영장 없이 그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메이어 변호사는 이와 함께 원고 측이 아이폰과 아이패드 고객들을 대표하는 집단소송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하고, 원고 측이 이 같은 기능이 있는 제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구입한 점을 지적하면서 환불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리사 매디건 일리노이주 법무장관은 이날 애플과 구글에 “위치 추적을 통해 어떤 정보를,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모아왔는지에 대한 답을 달라.”고 요구했다. 미 상원의 ‘첨단기술에 대한 사생활 보호 관련 소위원회’ 위원장인 앨 프랭큰 민주당 의원도 잡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해명을 요구했다. 프랭큰 의원은 다음 달 10일 소위원회에서 애플과 구글을 증인으로 출석시킨 가운데 휴대전화 프라이버시에 대한 청문회를 열 계획이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4·27 재보선 D-1] 여야 막바지 호소전…고소·고발도 잇따라

    4·27 재·보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숨가쁜 레이스를 달려온 여야 후보들은 25일 지역구를 누비며 막바지 유세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나라당은 분당에, 민주당은 강원도에 총집결해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막판 불법선거 공방이 확산되면서 고소·고발전도 잇따랐다. ●분당을 ‘총동원령 VS 무한책임론.’ 한나라당은 경기 성남시 분당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의 역량을 집결시켰다. 40여명의 국회의원을 비롯, 시·도 의원, 당 사무처 직원, 의원 보좌진 등 동원 가능한 인력을 모두 이곳에 배치했다. 이에 따라 당초 50여명이던 강재섭 후보의 선거운동원은 25일 현재 600여명으로 늘었다. 전략지역 몇 곳에서만 이뤄졌던 출근길 인사도 이날 오전에는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 등 수십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강 후보는 유세차량으로 곳곳을 누비며 “여당 후보를 찍어 달라.”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안상수 대표도 이날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거리 유세에 나섰다. 민주당 손학규 후보는 ‘무한책임론’을 전면에 내걸고 유세전을 펼쳤다. 전날부터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26일까지 3일간 지하철역과 상가 등 7대 거점을 중심으로 하루에 지역구를 세 바퀴씩 순환하는 이른바 ‘3·3·7’ 유세 전략을 바탕으로 바닥을 샅샅이 훑는 속도전을 벌였다. 손 후보는 유세차량에 몸을 싣고 손가락으로 기호 2번을 뜻하는 ‘V’자를 그리며 “변화를 원한다면 손학규를 찍어 달라.”고 외쳤다. 소속 의원 40여명을 포함한 500명도 각지에 흩어져 ‘보이지 않는’ 지원전을 벌였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강원 강원도는 ‘불법 콜센터 선거운동’ 논란이 유세전의 핵심이었다. 민주당은 25일 한나라당 엄기영 후보측의 ‘불법 콜센터’ 논란의 불씨를 키우기 위해 의원총회를 아예 강릉에서 열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박지원 원내대표 등 전체 의원의 절반가량인 43명이 참석했다. 민주당은 불법 선거운동의 총지휘자가 엄 후보가 회장으로 있는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기원 민간단체협의회’ 사무국장 최모씨라고 주장하며 엄 후보와 같이 있는 사진을 공개하고 엄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민주당 전현희·백원우·김학재 의원은 강릉경찰서, 춘천지검 강릉지청을 방문해 엄중수사를 강조했다. 한나라당은 사건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과도한 선거운동을 자제하면서 최문순 민주당 후보의 허위 문자 메시지 발송 등에 대한 맞대응 전략을 구사했다. 한나라당은 18개 시·군별로 의원들을 보내 ‘대세 굳히기’에 들어갔다. 한 관계자는 “엄 후보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대세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민주당도 불법선거 운동한 것들이 많아 도민들에게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엄기영·최문순 두 후보는 TV토론 준비에 전력을 쏟았다. 대신 홈페이지와 트위터, 유세 방송을 동원해 자신들의 선거운동 근황을 전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강릉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김해을 경남 김해을 재·보선에 나선 여야 후보들은 25일 마무리 유세전에 총력을 쏟았다. 김태호 한나라당 후보는 유세차에 올라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진영읍과 진례·한림면을 시작으로 26일엔 장유신도시와 내·외동 등을 샅샅이 훑겠다는 계획이다. 선거운동원 24명은 쓰레기를 줍고 아파트 분리수거를 도와주는 등 생활밀착형 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유갑 선대본부장은 “이봉수 후보를 거의 따라잡은 것 같다. 마지막 집중력을 발휘해 승기를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봉수 참여당 후보는 ‘이명박 정권 심판, 노무현 대통령이 옳았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차를 타고 게릴라 유세전을 폈다. ‘특임장관실 수첩’ 파문과 관련, 이 후보 측은 이재오 특임장관 및 특임장관실 직원 3명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창원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박주선·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과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지역 호남향우회 관계자 등을 만나 이 후보 지지를 당부했다. 한편 유시민 참여당 대표는 분당 거주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통해 “손학규 대표에게 투표해 달라. 나는 손 대표의 경쟁자가 아니다. 손 대표의 승리는 야권 전체의 승리”라고 호소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청해부대원 땀냄새 지상최고 향수였다”

    “불길한 생각으로 백년 같은 시간을 보내고 밝은 하늘 아래서 처음 본 청해부대원들이 우리의 우상이 됐습니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될 위기에 처했던 한진텐진호(7만 5000t급)의 박상운(47) 선장은 지난 24일 청해부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면서 감사인사를 전했다. 합동참모본부가 25일 공개한 박 선장의 편지는 긴급피난처에 숨어 있던 박 선장과 선원들은 청해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찾아냈을 때 안도하며 느꼈던 마음을 글로 표현했다. 박 선장은 “크나큰 은혜를 입은 한진텐진호 승조원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탈한 상태에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순항 중”이라면서 “청해부대장과의 무선 통화가 처음 성공했을 때 통렬한 기분은 평생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땀으로 완전히 젖은 군복에서 인도양의 바람을 타고 밀려드는 소금기 잔뜩 안은 그 진한 땀의 향기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향수였다.”면서 “작전 수행을 했으면서도 아이스크림 한 숟가락에 고마워하던 당신들의 모습에 펑펑 울었다. 우리는 그날 다시 태어났다.”고 당시의 감동을 표현했다. 박 선장은 또 긴급피난처에서 통신기를 통해 들려온 청해부대원들의 목소리에 대해 “선원 여러분 안심하라던 무전기 소리는 하늘의 음성과도 같았다.”면서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웃음 짓게 한다.”고 기억했다. 박 선장은 “앞으로 여러분의 그 모습 백분의 일이라도 닮으려고 애쓰며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앞서 청해부대는 지난 21일 아덴만 해역에서 해적으로부터 한진텐진호의 한국인 14명과 인도네시아인 6명 등 선원 20명을 구조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국제 해적들 ‘투자 -납치-협상’ 전문화

    국제 해적들 ‘투자 -납치-협상’ 전문화

    “‘선박 내 긴급대피소’를 자세히 묘사하지 말아 주세요. 해적들에게는 오히려 생생한 정보가 됩니다.” 지난 21일 한국선원 14명이 탑승한 한진텐진호가 피랍위기에서 벗어난 직후 이 같은 편지가 일부 언론사에 배포됐다. 자신을 네덜란드에 정박 중인 국내 컨테이너선 기관장의 아들이라고 소개한 발신자는 “아버지가 인도양을 지나 유럽을 오갈 때마다 한숨도 못 잔다.”면서 “업계에선 해적들이 국내 뉴스를 꼼꼼히 읽어 본다는 소식이 파다하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도 “소말리아 해적과 연계된 외곽조직에는 한국인이 포함됐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해적들은 국내 선박 납치에 성공하면 국내 언론보도를 활용,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다.”고 전했다. 24일 국제해사국(IMB)과 국토해양부 등에 따르면 최근 소말리아 해적 조직들은 기업 뺨치는 유착고리를 갖고 진화하고 있다. 투자·납치·협상팀으로 나뉘어 치밀한 작전을 펼치는 데서 나아가 고도의 심리전도 구사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앞서 한 대형선박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을 때 선원들은 해적들이 건넨 위성전화로 수시로 부산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면서 “해당 선사 관계자가 몸값 협상을 벌이기 직전이나 직후여서 혀를 내둘렀다.”고 말했다. IMB 공식사이트(www.icc-ccs.org)에는 해적들의 생생한 모습도 담겨 있다. 한진텐진호 사건 발생 이튿날인 22일에는 인근 해역에서 대형 유조선과 컨테이너선이 잇따라 공격받았다. 한진텐진호를 공격한 것으로 추정되는 16명의 해적들이 소형보트 4척에 나눠 타고 대형 컨테이너선 180m 옆까지 접근, 총기를 난사했다. 또 다른 해적들은 유조선에 탑승한 보안요원들과 총격전을 벌인 뒤 퇴각했다. 지난달 12일 아덴만에 출몰한 해적선에는 대전차 로켓포가 실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해적들의 ‘기업화’는 이미 업계에선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아가 요즘은 아예 조합형태로 진화했다. 투자금을 모아 납치계획을 꾸민 뒤 납치에 성공하면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배분하는 식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최근 소말리아 해적들의 투자자는 마약상이나 무기판매상 등으로, 투자에 일종의 기업공개(IPO) 방식을 도입했다. IMB 관계자는 “지난 14일까지 전세계적으로 156건의 해적 관련 사고가 일어났다.”면서 “소말리아 해적은 이 중 107건과 연계됐고, 지금도 26척의 배와 532명의 선원을 억류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6) ‘붉은 책’ 카를 구스타프 융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6) ‘붉은 책’ 카를 구스타프 융

    “이봐요 의사 양반, 어서 저기, 태양을 좀 봐요. 태양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요? 당신도 나처럼 머리를 움직여요. 이렇게. 보이나요? 태양의 남근(pallus)이. 그게 바람의 근원이랍니다. 이렇게 머리를 움직이면 태양의 남근도 움직이고, 그럼 바람이 만들어지는 거지요.” 정신병 환자 에밀 슈비처는 정신없이 바쁜 젊은 의사를 붙잡고 자신의 환상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 의사는 어느새 이야기에 매혹되어 함께 태양을 바라보았다. ●무의식, 인간 안의 자연 4년 뒤, 그 젊은 의사 융은 이 황당한 환상을 독일 역사학자의 고대 미트라교 연구서에서 만난다. 이게 도대체 뭔 일? 가난한 집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한 슈비처가 미트라교를 알 리 없었다. 게다가 이 책은 슈비처가 환상을 이야기한 지 4년 뒤에 출판된 것이 아니던가. 시간을 가로질러 반복되는 이야기들. 융은 이것이 인간 정신의 공통 구조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16년, 중년이 된 융은 ‘무의식의 구조’에서 이런 구조를 ‘집단 무의식’이라고 불렀다. 모든 종(種)은 자신의 생명을 실현시킬 적합한 방식을 찾아 진화했다. 신체가 그런 진화의 산물이듯, 정신 역시 그렇다. 생명의 힘을 실현한 역사의 표현으로서의 정신. 경험에 앞서, 경험을 산출하는 조건. 삶의 지혜를 담은 온갖 민담과 신화, 종교적 이야기의 생산 공장. 정신은 인간 속의 자연이었고, 삶을 위한 창조적 힘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이다. 이런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과 의지에 앞서 존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을 불쾌하게 느낀다. 하지만 불쾌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융은 말한다. 양배추가 똥거름에서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똥거름 냄새가 좀 불쾌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악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융에게 무의식은 그런 똥거름, 선악의 저편에 있는 자연이었다. 성적인 것만으로 환원되기에는 너무도 풍부한 자연! ●프로이트와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 집단 무의식의 발견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1875년 스위스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융은 익살과 민담을 들려주던 가난한 농부들과 책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아버지의 서재를 오가며 자랐다. 융은 학문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이 타협점으로 바젤 의과대학을 선택한다. 1900년 공부를 마친 융은 취리히 주 정신의학 대학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융은 그곳에서 정신의 병이 무의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았다. 치유의 단서는 무의식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단서에 이를 것인가. 이때 그에게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계시처럼 찾아왔다. 융은 거기서 두 개의 길을 발견한다. 하나는 무의식에 이르는 길로서 ‘꿈’이고, 다른 하나는 의사로서 자신을 인도해줄 ‘프로이트’라는 길. 1906년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담아 융은 프로이트에게 편지를 보낸다. 당시 학계에서 찬밥신세였던 프로이트는 주목을 받기 시작한 젊은 의사의 지지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어진 7년간의 우정. 그 우정은 1913년, 완전한 자유를 가져가라는 프로이트의 편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융의 답장으로 막을 내린다. 프로이트가 말한 ‘완전한 자유’란 사상적 자유를 말한다. 융은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성격을 오로지 성(性)으로 환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융이 일하고 있는 병원은 국립병원으로, 당시 그곳은 에밀 슈비처처럼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그런 환자들의 병은 성에 의한 도덕적 갈등보다는,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다양한 문제들 때문에 발생했다. 더욱이 어릴 때 듣던 농부들의 이야기는 어떠했는가. 그 이야기들은 성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사용된 성적 은유는 말 그대로 은유일 뿐, 삶의 다양한 힘들을 표현할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융은 이런 생각을 담아 1912년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을 출간한다. 그렇게 융은 프로이트를 떠나 자신의 길로 들어선다. 프로이트와의 이별 전까지, 융의 삶은 프로이트에게 경도되어 있었다. 이런 삶을 무의식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정신의 자가 조정 체계로서 무의식이 극단적으로 치우친 의식을 바로 잡기 위해 밀려왔다. 이렇게 시작된 무의식의 반란은 프로이트와의 결별 후 더욱 심해졌다. 길을 잃은 의식으로 기괴한 꿈과 환상들이 마구 밀려왔다. 내 안에 있는 낯선 것들, 그 타자들. 여기서 정신줄을 놓으면 심각한 환자 신세가 될 판이었다. 이제 그에게 선택은 하나.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는 것! 치유의 첫 단계는 내 안의 타자들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무의식이 표현하는 타자들은 그 자체로 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자연일 뿐, 병은 오히려 의식이 그것을 대면하지 않고 도망가는 데서 왔다. 융은 그 타자들을 긍정하고 무의식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그것은 일종의 받아쓰기 작업이었다. 중구난방으로 펼쳐졌던 환상들이 언어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럴수록 융은 점점 안정되어갔다. 이렇게 여섯 번째 노트를 완성할 즈음, 융은 받아쓰기를 멈췄다. 거기에는 오직 타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자신이 그간 프로이트의 이름만으로 살아왔듯, 그곳에도 자신의 목소리는 없었다. 융은 타자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받아쓰기에서 번역하기로! 현실 속의 삶, 자신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내야 할 삶. 그 삶의 문법으로 타자들의 이야기를 융합하기. 융은 새로운 노트에 그 융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융은 1913년부터 4년간 이런 글쓰기를 계속했다. 그의 노트를 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융은 그 자신이 걸어 다니는 정신병원이자 그 병원을 책임진 의사였다.” 융에게 글쓰기는 치유였다. 이것은 훗날 그의 치유 방법 중 한 가지로 이용된다. 융은 환자들에게 자신의 꿈과 병을 스스로 관찰하고 기록하도록 요구했다. 환자들은 융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글쓰기를 통해 자신 안의 자연을 만나고 통합하는 법을 배웠다.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시오! 이제 제법 희끗한 머리를 가진 의사 융. 그를 만나고 나온 환자. 투덜거린다. “뭐 저런 의사가 다 있어. 진단도 안 내리고, 딱히 처방도 안하고, 그렇다고 안쓰럽다고 위로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상담을 마친 환자들은 뚱하고 불친절한 융에 대해 한번쯤은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시 융을 찾았다. 그들은 느꼈다.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법을 하사할 때 얻을 수 없던 것을. 그것은 환자가 의사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며, 자신이 능동적으로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융의 진료실은 여느 진료실과 달랐다. 그곳에는 반쯤 누운 상태에서 의사의 이야기를 편안히 받아들이도록 고안된 환자용 의자도, 그 뒤에서 환자를 은밀히 관찰하는 의사용 의자도 없었다. 대신 의사와 환자가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뿐. 그 의자에 앉아 융은 그저 물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융은 의사로서 말하는 대신 환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병의 문제부터 치유 단서까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병의 심판자로서, 치유의 구원자로서 의사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융은 알았다. 융의 성격이 원래 좀 퉁명스러웠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융은 굳이 직업적 친절함으로 그것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은 의사에게 쉽게 의존하는 환자의 성향을 막고, 환자를 독립적인 대화상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의사와 환자는 병이 던져준 수수께끼를 함께 푸는 놀이의 참가자였다. 거기서 길을 만드는 것은 환자의 몫이었고 의사는 조력자일 뿐이다. 오늘날 너무도 병원에 의존해 사는 현대인을 보면 융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긴 안목으로 보아도 유효한 치료란 없습니다. 삶은 언제나 다시금 새롭게 획득되어야 하는 법이지요. 병을 만든 것도, 그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도, 그리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십시오! 신근영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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