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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多樂房] 드레스메이커

    [영화 多樂房] 드레스메이커

    소년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마을에서 쫓겨났던 한 소녀(틸리)가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해 돌아온다. 수십년 동안 거의 변한 것이 없는 마을의 냉랭한 분위기가 그녀를 다시금 옥죄어 오는 가운데, 틸리는 25년 전 ‘그날’의 사건 경위를 확실히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녀의 노력과 주장은 결백을 밝혀내기에 미약하기만 하다. ‘드레스메이커’는 1950년대 ‘던가타’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비밀과 상처를 껴안은 채 간신히 고요함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틸리의 회귀는 비단 개인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한 발단에 그치지 않고 잔잔한 수심에 던져진 조약돌처럼 마을에 파장을 일으키며 위선과 갈등을 들춰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25년 전 틸리의 추방이 보여주듯 약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 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포괄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다수의 처벌과 복수로 이어진다. 살인누명과 복수라는 무거운 소재에도 불구하고 틸리가 드레스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며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사랑도 이루게 되는 후반부까지 영화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그렇게 그녀의 삶에도 행복이 찾아오는 듯하다. 그러나 연속된 불운이 닥치면서 마을 사람들의 부정적 시선이 다시 고개를 들자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된 틸리는 운명과 싸우며 던가타의 부조리를 응징한다. 그녀가 약자들 위에 군림해 왔던 마을 사람들을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제압하는 종반부는 통쾌하면서도 왠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틸리의 복수가 드레스를 만드는 특별한 재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던가타의 단조롭고 메마른 풍경을 물들이는 각양각색의 의상은 서사의 중심에 있으면서 시각적으로도 많은 볼거리를 선사한다. 굳이 페미니즘 비평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지만 호주의 여성감독 조셀린 무어하우스는 역시 여성 작가 로잘리 햄이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 억압당하고 있던 여성들의 욕망이 화려한 드레스로 표출되는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묘사해냈다. 틸리가 ‘그날’의 기억과 대면하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과 복수극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쪽은 맞춤형 드레스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했던 당대 여성들의 ‘웃픈’ 초상이 지탱하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원숙한 연기를 선보이는 케이트 윈즐릿은 틸리라는 캐릭터 안에 자신을 살인범으로 몰았던 동네 주민들과 맞서는 강인함과,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동안 엿보이는 연약함을 동시에 녹여냈다. 틸리의 엄마로 분한 주디 데이비스도 관록의 연기를 펼친다. 두 배우는 모녀가 서로의 생채기를 보듬으며 치유해 나가는 모습을 안정적이고 자연스럽게 완성시켰다. 드레스와 복수라는 이질적 단어들을 연결시킨 참신한 발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윤성은 영화평론가
  • [책꽂이]

    [책꽂이]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톰 미첼 지음, 박여진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1970년대 우루과이 해변에서 기름에 뒤덮여 죽어가던 펭귄을 구조한 후 함께 살게 된 영국 청년과 펭귄의 우정에 관한 감동적 실화다. 352쪽. 1만 5000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창비 펴냄) 소설가인 저자는 전통적 성역할에 고착된 사고 방식을 반박하며 페미니즘을 통해 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96쪽. 9800원.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최삼규 지음, 이상 펴냄)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 ‘DMZ는 살아있다’ 등의 프로그램을 만든 최삼규 MBC PD가 쓴 야생견문록이다. 그가 관찰한 동물의 왕국은 정교하게 설계된 조화와 공존의 세계였다. 320쪽. 1만 6000원. 워크 피트니스(윤영철·장제욱 지음, 이지북 펴냄) 삼성, 현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기업 200개사 직장인들의 일 관리 핵심 노하우를 마치 피트니스를 하듯 스스로 진단하며 단련할 수 있게 구성했다. 248쪽. 1만 3800원. 유광종의 지하철 한자여행 1·2호선(유광종 지음, 책밭 펴냄) 한자로 이뤄진 역명의 유래를 풀고 그 한자가 어떤 의미인지와 그 안에 담긴 이야깃거리를 풀어 나간 한자교육서다. 1호선 380쪽, 2호선 296쪽, 각 1만 3000원. 연암이 나를 구하러 왔다(설흔 지음, 창비 펴냄) 조선의 대표 실학자 연암 박지원도 ‘히키코모리’였다? 정적을 피해 세 차례나 세상을 등졌던 연암의 고백이 가족과 친구에게 상처받고 고2 때부터 집 안에 틀어박힌 미노를 치유한다. 224쪽, 1만 1000원.
  • ‘올바르고 당연한 것’ 비틀기…페미니즘, 깊게 알고 싶다면

    ‘올바르고 당연한 것’ 비틀기…페미니즘, 깊게 알고 싶다면

    젠더 허물기/주디스 버틀러 지음/조현준 옮김/문학과지성사/431쪽/2만 5000원 2015년 한국에서는 ‘여성혐오’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가 논쟁의 대상이 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 걸기 운동이 일기도 했고 각종 성폭력 문제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를 계기로 리베카 솔닛(‘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게일 루빈(‘일탈’), 케이트 본스타인(‘젠더 무법자’) 등 페미니즘을 화두로 한 책도 연이어 나왔다.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페미니스트인 주디스 버틀러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 교수가 쓴 ‘젠더 허물기’는 이런 움직임의 대미를 장식하는 책이다. 1999∼2004년 쓴 글을 모은 책에서 버틀러는 자신의 대표작이자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인 ‘젠더 트러블’을 통해 보여준 ‘젠더 수행성’ 이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면서 정체성과 보편성, 사회 소수자들의 공동체 등에 관한 정치윤리적 사유를 보여준다. ‘젠더 트러블’이 젠더가 어떻게 구성되고 수행되는지를 고찰했다면 이 책은 남자와 여자라는 규범적 젠더의 개념을 허물고 개별적이고 단독적 주체인 ‘나’ 대신 ‘우리’를 불러낸다. 책에는 ‘소수자’로서의 저자 개인의 경험도 서술됐다. 버틀러는 청소년기에는 지하실에 처박히거나 술집을 전전하는 문제아였고, 대학생 때는 완벽한 철학을 꿈꾸다가 결국 깨져버렸으며, 페미니즘 철학 강의를 시작하면서 제도권 학계에서 배제됐다. 엘리트였지만 동시에 주변인이었던 자신의 위상에서 나온 문제의식은 성적 비결정성이나 불확정성으로 고통받는 현실의 인터섹스(중성)나 트랜스섹스(성전환자)의 문제로 확대된다. ‘올바른 것’을 모두에게 강제하면 ‘어떤’ 삶 자체가 배제당할 수 있다는 점을 버틀러는 상기시킨다. 그가 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서로 다른 차이를 대면하고 공존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며 당연시돼 온 기준, 규범, 규칙을 형성하는 조건과 권력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정치적, 윤리적으로 심문하는 것이다. 함혜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문화마당] 문화와 문화연구/코디 최 미술가·문화이론가

    [문화마당] 문화와 문화연구/코디 최 미술가·문화이론가

    문화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단어이지만, 누가 그 경계와 개념을 묻는다면 경제나 정치와 같이 명확한 경계와 개념을 떠올리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쉽게는 시, 소설, 발레, 오페라 등의 예술분야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과학, 사회, 정치 심지어는 연속극이나 만화, 휴양지 등 우리의 일상 속에 녹아있는 모든 것들을 문화로 여기게 되며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인류학자들은 문화의 개념을 사회적 행동양식이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학자들은 더 나아가 사회적 행동양식을 통한 추상적 의미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 문화에 관한 가장 최초의 개념 정의는 1871년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에 의해서 다뤄졌는데, 사회인은 자연 및 원시와 대립하며 인위적인 무엇을 가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결과물들을 문화라고 규정하고 있다. 예컨대, 그 결과물은 인간이 요구하는 지식, 믿음, 예술, 도덕, 법, 관습, 습관 그리고 이에 따르는 모든 가능성에 의해 만들어진 합성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란 경험과 연구를 통해 학습되어진 사회 또는 소집단의 결과물을 뜻하게 되며, 결국 사회 구성원들 간의 관계성을 표현하고 나아가 그 구성원들을 지배하게 된다. 이와 같은 개념을 기초로 생각해 볼 때, 문화는 우리 일상 속의 의미를 동반하는 모든 행위들을 포괄하고 있는 셈이며 광범위한 실천범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명확한 경계와 개념을 논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기에 광범위한 실천범위를 갖고 있는 문화의 또 다른 난제는 문화를 연구하는 뚜렷한 공식이나 방법론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문화는 자신만의 명확한 범주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을 포함하고 관용을 베푸는 듯해도 자신의 모습은 뚜렷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의 관습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분방한 방랑자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느슨하게 모든 분야를 넘나들며 차용하고 포용하며, 자아가 없는 듯해도 누구보다 강력한 색깔을 지니고 있는 보헤미안과 같은 실리주의자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분야를 넘나드는 문화에 대한 연구는 자연과학과 같이 뚜렷한 기능과 방법론이 없으며, 그 목적과 필요에 따라 인문 사회과학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분야의 학술을 연결하여 인류학적 또는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분석하는 한편, 일상생활의 경험을 비롯하여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제적 방법론을 차용하고 통합하여 사용한다. 예컨대, 20세기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시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후기 식민지주의), 페미니즘 등을 비롯하여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던 과학 등의 지적 이해와 훈련과 더불어 그들의 관계를 연결하며 통합을 통해 한곳에 멈추지 않고 물이 흐르듯 연구한다. 즉, 문화연구는 한곳에 고여 있는 학습의 방법론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유동적이며 가변적인 문화 연구는 여러 방면의 주장과 서로 다른 의견 또는 정치적 입장에서 끝없는 지적 논쟁을 야기시킨다. 이것은 보헤미안과 같은 문화의 특성에 근거한 것으로 이처럼 끝없이 방법론의 변위를 일으키며 학술들과 실제 사이에서 연계적 통합의 연구를 진행하는데, 이러한 학술의 방법을 비학제 혹은 반학제라고 부른다. 이러한 주장은 1960년대 초 문화학자들에 의해 제창되었고 서구학술계에선 이미 70년의 학술적 전통을 갖고 있는데 최근 우리 학술계에 유행처럼 남발되는 통섭적 학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 동아시아 여성미술 페미니즘을 논하다

    동아시아 여성미술 페미니즘을 논하다

    유교적 영향 아래 가부장적인 전통이라는 유사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동아시아 국가의 다양한 여성미술이 한자리에 모였다.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시아’라는 제목으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한창인 이번 전시에선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 7개국 작가 14명의 작품 50여점이 소개된다. 이들은 퍼포먼스, 비디오, 멀티미디어, 사진, 페인팅, 조각 등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각자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펼쳐 놓는다. 중견작가 강애란은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주제로 한 신작을 선보였다. 피해 할머니의 증언과 다큐멘터리 영상, 사운드 등을 한곳에 모은 영상설치작품이다. 강애란은 “나이가 들면서 다시 여성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공감각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함경아는 북한에서 만들어진 자수작품 ‘모나리자’와 나란히 탈북자들의 모습을 고속카메라로 담은 인터뷰영상을 배치한 ‘입체적 모나리자’를 발표했다. 정금형은 여성에게 금기시돼 온 주체적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한 퍼포먼스와 설치로 구성한 ‘피트니스 가이드’와 애니메이션 영상작업 ‘문방구’를 선보인다. 비정형적 실로 엮은 현장 설치작업으로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치하루 시오타는 이번에는 검은색 실로 백색의 드레스를 거미줄처럼 감싼 작품 ‘에프터 더 드림’ 을 보여준다. 10명이 동원돼 100시간을 들여 완성된 작품으로, 작가는 여성의 부재와 억압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 작가인 시우젼은 재활용 의상이나 버려진 천, 비행기 바퀴 등을 활용한 작품을 통해 글로벌리즘과 세계적 획일화 현상, 도시발전과 개인적 상실감, 그에 따른 현대사회의 명암을 비판적으로 짚어본다. 참여작가 중 유일한 남성인 싱가포르 출신 밍웡은 여장을 한 채 아름다움의 의미를 물은 사진과 영상으로 관람객을 만난다. 2011년 홍콩아트페어에서 퍼포먼스로 선보였던 ‘홍콩다이어리’는 작가 자신이 홍콩에서 여장을 한 채 유머러스한 태도로 정형화된 미의 개념에 도전한 작품이다. ‘비지디바’와 ‘이스탄불 다이어리’는 터키의 트랜스젠더 가수의 삶을 기록한 것이다. 제목의 ‘판타시아’는 ‘판타지’(fantasy)와 ‘아시아’(Asia)의 합성어다. 페미니즘을 화두로 삼은 이유에 대해 서울시립미술관은 “1970년대가 여성주권을 높이자는 운동이었다면 현재는 가부장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내포하는 젠더 문제 등으로 옮겨지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페미니즘 시각에서 동아시아 여성미술의 현재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이번 전시 참여작가 중 7명은 연말 중국 광둥미술관에서 열리는 제1회 아시아 비엔날레에 참여할 예정이다. 전시는 11월 8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문화마당] 문화와 정체성의 단면/코디최 미술가·문화이론가

    [문화마당] 문화와 정체성의 단면/코디최 미술가·문화이론가

    인종 간의 유전자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구분돼 왔다. 특히 유럽의 식민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서구 우월적 인종주의는 동서양의 문화 차이를 인정하기 이전에 국가 간 인종적 문제에 집중해 오히려 이국주의와 서구 사대주의를 조장했다. 필자는 하나의 예로 우리의 유교적 문화 속에서 치부돼 왔던 젠더와 섹스라는 정체성의 단면을 다뤄 보려고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급부상하는 이슈인 젠더는 생물학적 성별을 뜻하는 섹스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 짓는 사회적 의미를 포함한다. ‘사무실에서는 여성이 차 심부름을 전담해야 한다’거나 ‘격투기는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식의 고정관념과 행동양식을 예로 들 수 있다. 사회에서 젠더라는 것이 이와 같이 인식된다면 결코 섹스를 젠더와 분리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섹스 그 배후에는 교묘한 사회문화적 전략이 숨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취직을 위해 여성들이 성형수술을 받는 행위의 배후에는 남성 중심 사회에 섹스로 어필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심리적인 전략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젠더는 사회의 구성원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론적 분별로 제도화함으로써 문화라는 공간 속에 이데올로기로 강화되고 있다. 나아가 문화적 생산구조 속에서 예술, 문학, 그리고 교육 분야 등에서 나타나는 남성과 여성의 위치, 성의 표현이나 이미지 등은 문화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역으로 섹스의 개념을 좌우하기도 한다. 1960년대와 70년대 사이 서구 사회에서 시작된 초기 페미니즘에서 섹스는 젠더가 형성되는 사회 과정의 기초로 간주됐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 오면서 이와 같은 페미니즘은 여성단체를 통해 남성에 대항하는 여성문화운동으로 치부됐다. 그후 1980년대에는 페미니즘이 동성애자들에 의해 이성애자의 성적 차별과 편견을 공격하는 기초이론으로 사용됐고, 1990년대 초에 와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거세지며 흑인과 비서구인들을 저급하게 취급하려는 서구 남성 중심의 역사관에 대해 공격하는 수준으로까지 진화하고 확장된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페미니즘은 남녀 불평등 관계에 대한 여성의 동등한 이익과 인격의 차원에서 그들의 입장과 주장을 펴는가 하면, 성별의 차이가 불순한 의도로 이용돼 젠더와 정체성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젠더의 문제를 사회의 권력구조 안에서 발견함으로써 성별의 차이를 문화와 정체성으로 다루며 사회적 대항으로 이끌게 됐다. 그러나 서구 사회와는 다른 문화와 역사 속에서 살아온 인도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생태와 인간을 하나로 간주하며 평등한 삶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운동 실천가들이다. 이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억압과 서구문명 침략에 따른 자연과 동양의 위기를 동일선상에서 유사한 속성으로 파악하고, 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했다. 예컨대 남성은 곧 문명과 서구를 의미하고, 여성은 자연과 동양을 의미하기에 남성과 서구 중심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 동양을 지배하면서 여성과 자연 그리고 동양을 황폐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흐름을 살펴볼 때 우리는 서구 중심의 성적 정체성에 휘둘리지 않고,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 관계라는 우리 문화 속에서 성적 정체성의 발단과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전략가·파티 중독자… 조금 특별한 공주들

    전략가·파티 중독자… 조금 특별한 공주들

    무서운 공주들/린다 로드리게스 맥로비 지음/노지양 옮김/이봄/484쪽/2만 2000원 공주 하면 떠오르는 것이 동화와 왕자님이다.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난 착하고 아리따운 공주의 삶은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언제나 해피엔딩이다. 예쁜 그림이 있는 동화책이 심어 준 공주에 대한 판타지는 디즈니사의 만화영화로 더욱 공고해진다. 현실 속의 공주도 그런 삶을 살았을까. 적어도 ‘무서운 공주들’에 등장하는 공주들은 아니다. 특이한 이야기를 찾아내는 데 특출한 감각을 지닌 저널리스트 겸 작가인 린다 로드리게스 맥로비는 실제 역사 속의 공주들 중에서 지나칠 정도로 비범한 삶을 살았던 동서고금의 공주 혹은 왕비가 된 여인 서른 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퍼진 여자아이들의 공주 열병에 대한 우려가 자신이 책을 쓴 동기라고 밝히고 있다. 공주들이 여성의 미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 수준을 형성하고 소녀들의 개성을 제한하며 자존감마저 해칠 수 있다는 페미니즘적 관점을 수용해 동화는 현실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제목부터 과격한 책에서 저자가 소환한 공주들은 전사, 왕위 찬탈자, 전략가, 생존자, 파티 중독자, 난잡한 여인들, 미친 여인 등으로 기존에 우리가 상상하던 공주와는 딴판의 삶을 살았다.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교묘한 술수로 수천 명을 학살했던 키예프의 올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두 제거하고 여제가 된 측천무후, 단아한 미모와 유혹하는 기술로 귀족 사회에 진입한 뒤 놀라운 생존술로 나치의 앞잡이까지 했던 스테파니 폰 호엔로헤, 섹스 파티를 열고 참석자들을 협박하는 등 나쁜 여자의 전형으로 악명 높았던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공주 아나스타샤 등이 소개된다. 책은 딱딱한 역사가 아니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책에 가깝다. 이런 책의 성격을 더 강조하기 위해 한국어판에는 각 인물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컬러일러스트가 추가됐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책꽂이]

    상산고 이야기(나현철 지음, 북오션 펴냄) 다양성과 자율성을 추구하는 자율형사립고의 본래 취지를 잘 살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산고를 분석했다. 이 학교 출신인 저자는 입학 전형에서 교육철학에 이르기까지 상산고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소개한다. 224쪽. 1만 4000원. 나의 페미니즘 레시피(장필화 외 지음, 서해문집 펴냄)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지성과 양식으로 통하던 페미니즘은 언젠가부터 일베를 중심으로 혐오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페미니즘의 위기가 회자되는 지금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15명이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392쪽. 1만 7500원.
  • 영화 ‘매드맥스’ 때아닌 ‘페미니즘 홍보’ 논란

    영화 ‘매드맥스’ 때아닌 ‘페미니즘 홍보’ 논란

    얼마전 국내에도 개봉돼 호평을 얻고 있는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이하 매드맥스)에 때아닌 페미니즘 논란이 불붙었다. 최근 미국 CNN등 해외언론은 일부 남성인권 활동가들이 신작 '매드맥스'의 관람을 보이콧하고 나섰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도 '흥행 도로' 위에 올라 탄 '매드맥스'는 핵전쟁으로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 22세기를 배경으로 독재자와 그에 맞서는 전사를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를 찬사의 눈길로 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최근 미국의 유명 남성인권 활동가인 아론 클레어리는 매드맥스가 '분노의 도로'가 아닌 '페미니스트의 도로'라며 보이콧을 주장하고 나섰다. 클레어리는 "영화 예고편을 보면 맥스역의 톰 하디가 카메오처럼 보이고 샤를리즈 테론(퓨리오사 역)이 더 많이 등장한다" 면서 "테론이 맥스에게 명령하는데 어느 누구도 매드맥스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조지 밀러 감독은 페미니즘에 대한 강의를 영화 속 폭발과 토네이도 속에 교묘하게 집어 넣었다" 고 덧붙였다.   클레어리는 이같은 근거로 밀러 감독이 유명 페미니스트 작가 이브 엔슬러를 초대해 영화 제작에 참고했다는 점을 들었다. 실제로 엔슬러는 지도자인 임모탄의 여인들을 연기한 5명의 여배우들과 시간을 보내며 캐릭터 연구에 도움을 준 바 있다. 한편 영화 '매드맥스'는 세계 40여개 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말그대로 분노의 질주를 벌이고 있다. 특히 일부 남성 인권운동가들의 이같은 '시비'처럼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전면에 등장해 '페미니즘 액션'이라는 단어가 나올만큼의 화려한 액션을 탄생시켰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女性을 말하다

    女性을 말하다

    “여성인 나의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되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76)은 “40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다만 모든 희생을 감내하던 어머니의 삶을 그리고 싶었다”면서 “연구자들을 통해 1985년에야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 감성만이 아니라 공부도 하고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도 하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먼저 화폭에 담은 소재는 39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6남매를 키워낸 자신의 어머니였다. 이후 30여년간 모성, 여성성, 생태, 환경 등 다양한 주제를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시각화해 온 윤석남의 회고전 ‘윤석남♥심장’전이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설치 50여점·드로잉 160여점 전시 ‘심장’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이번 전시는 윤석남의 식지 않는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배려의 마음이 담긴 50여점의 설치와 윤석남의 글과 그림이 담긴 드로잉 160여점을 소개한다. 전시는 어머니, 자연, 여성사, 문학이라는 4가지 주제로 서로 다른 연대의 작품들이 공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실제 시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모습에 담은 ‘무제’(1982)를 비롯해 가족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손이 모자라는 어머니를 그린 ‘손이 열이라도’(1986) 등 초기 작품이 선보인다. 버려진 나무를 주워 와 영감을 끌어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한 여성이 머리에 큰 고래를 이고 물고기 떼를 이끌고 가는 모양의 설치작품 ‘어시장’(2003), 1000마리가 넘는 유기견을 거두어 기르는 이애신 할머니의 삶에 영감을 받아 만든 ‘1025: 사람과 사람 없이’(2008) 등은 생명을 포용과 치유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윤석남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누군가 사용하고 버린 너와를 우연히 얻어 그 결을 살려 여성들을 그린 작품들에서 그의 독특한 조형감각이 빛을 발한다. ●역사 속 여성 3명의 삶 표현 ‘눈길’ “여성주의를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았다”는 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 외에 통시적으로 재능이나 발언을 억누른 채 살아야 했던 역사 속 여인의 삶을 재해석하는 작업도 선보이고 있다. 두 여인이 과장되게 늘어난 팔을 뻗고 있는 나무 부조작품 ‘종소리’(2002)는 시와 노래에 능했던 조선시대 기생 이매창과 작가가 푸른 종을 흔들며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는 자기 재산을 팔아 굶어 죽어가던 제주도민을 위한 구휼미를 제공했던 조선 정조시대 거상 김만덕을 기리는 작품이다. 작가는 “김만덕의 삶을 생각하면 너무 감동스러워 눈물이 난다”며 “전 재산을 털어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일은 남성거상도 할 수 없었던 일로, 한 여성의 이타적 삶을 잘 보여 준다”고 말했다. 조선 중기 여류시인으로 27세로 요절한 허난설헌과 이매창의 삶을 기리는 설치작품도 새롭게 선보였다. 999개의 작은 여성목상을 설치한 ‘빛의 파종’(1997)에 대해 “완벽수 1000에서 하나가 부족한 것은 여성의 삶이 아직은 완전하게 평등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그는 “이번에 역사 속 여성 3명의 삶을 작품으로 선보였지만 아직도 수없이 많은 여성의 삶을 캐내어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한국 현대건축 평전(박길룡 지음, 공간서가 펴냄) ‘한국 건축계의 석학’으로 불리는 박길룡 국민대 건축대학 명예교수가 2005년 낸 ‘한국현대건축의 유전자’ 개정증보판.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행로를 되밟는 통사’라는 자평대로 2005년 출간 이후 10년간 변화와 함께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다시 다듬었다. 해방 후 재건기록부터 현대건축의 거장 김중업·김수근에 이어 1990년대 초반 ‘4·3그룹’을 비롯해 집단체제로 실천을 시도한 건축인까지 담았다. 단순 연대기적 나열을 피해 건축물·건축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한계, 우리 건축사에 남긴 의미를 비판적으로 봤다. 한국건축의 다양한 종파와 변이, 진화상을 온전히 담아낸 흐름이 도드라진다. 책 속 253개 건축 이미지와 한국 근현대사 내용을 4쪽에 걸쳐 펼친 그림으로 앞쪽에 정리했다. ‘한국에게도 모더니즘은 거스를 수 없는 절대가치가 되지만, 개화기 동안 어질러졌던 문화 유전자를 껴안고 다음 시대로 넘어간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 440쪽. 3만 3000원. 단테의 신곡, 에피소드와 함께 읽기(차기태 지음, 필맥 펴냄) 한겨레 기자를 지낸 아시아엔 편집국장이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신곡’의 깊이 읽기를 시도했다.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여행하는 줄거리의 신곡은 중세 기독교 교리와 세계관을 기반으로 저승세계를 생생하게 형상화한 작품.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면서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근대의 개막을 예고한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만큼 신화와 설화, 역사적 사건, 철학·신학적 개념에 익숙해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책은 신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가면서 신화와 설화, 철학·신학적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감상과 비평을 곁들여 읽는 이의 이해를 도왔다. 저승세계를 실제로 여행하는 느낌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원작의 지옥, 연옥, 천국 구분을 각각 상·하부로 세분한 게 특징. 프랑스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신곡 내용을 소재로 그린 삽화작품도 곁들였다. 624쪽. 2만 5000원. 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오은경 지음, 시대의창 펴냄) ‘여성 억압’ 문화를 낳은 이슬람 민족주의·가부장제 역사부터 근대화 과정과 페미니즘 운동까지를 살폈다. 전 세계 문제로 떠오른 테러와 이슬람국가(IS)식 범죄 발생의 근본원인을 분석하고 해법도 제시한다. 이슬람 국가들은 서구 제국주의가 등장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이슬람 정체성의 유지를 위해 전통문화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믿어 왔다. 이런 믿음이 이슬람을 폭력적으로 해석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국가·민족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전쟁·테러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면서 여성을 향한 폭력을 한층 강화시킨다. 이슬람 국가의 여성들은 자국 민족주의와 가부장제 문화, 서구 제국주의 사이에서 이중으로 고통받으며 이중적 타자가 된다. 명예살인, 여성 할례, 베일, 전쟁·테러로 여성이 고스란히 떠안는 메커니즘을 분석해 여성 억압의 다양한 층위를 파헤친 게 특징이다. 308쪽. 1만 6000원. 부자들의 역습(장루이 세르방 슈레베르 지음, 정상필 옮김, 레디셋고 펴냄) 프랑스의 현직 언론인이 다양한 분야에서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부자’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했다. 부의 흐름을 개인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살펴 ‘부의 팽창’이란 전 지구적 현상을 어떻게 수용하고 접근할지를 귀띔했다. 우선 부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이유가 세 가지로 압축 정리된다. 신흥국 중심의 높은 성장률과 증가하는 금융자본의 지배력, 젊은 백만장자를 양산하는 디지털 혁명이 그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부자는 모든 분야를 점령해 가고 있다. 자본은 물론 정치·미디어에 미치는 영향력도 막강해 부자들의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가늠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부자들의 증가가 소비를 활발하게 함으로써 경제에 활기를 주기도 하지만 금력을 이용한 권력 정복을 통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각종 통계와 사례를 삽입해 사회 속 부자들의 위치와 영향력을 알기 쉽게 정리했다. 256쪽. 1만 5000원.
  • [세종로의 아침] 여성 혐오와 양성평등기본법/김주혁 정책뉴스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여성 혐오와 양성평등기본법/김주혁 정책뉴스부 선임기자

    지난달 초 터키에서 실종된 김모(18)군이 회교 원리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에 자진 가담한 것으로 확인돼 충격을 더하고 있다. 김군은 실종 전 ‘페미니스트를 증오한다. 그래서 IS가 좋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겨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중학교를 자퇴한 은둔형 외톨이의 ‘이유 없는 반항’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문제가 더 심각해지기 전에 원인과 대책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온라인상 여성 혐오 표현 모니터링 보고서’를 지난해 말 펴내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 바 있다. 경제학자 우석훈씨는 지난해 펴낸 ‘솔로 계급의 경제학’에서 솔로 증가의 원인으로 신빈곤 현상과 함께 ‘젠더 비대칭성’ 등을 꼽았다. 한국 남성의 낮은 가사분담률 및 청년 솔로들에게서 연령층이 낮을수록 더 강하게 나타나는 여성 혐오 등이 여성의 욕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여성 차별이 과거 인종 차별 이상으로 심각했고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으며, 페미니즘이 여성 참정권 확보 등 많은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위직 승진이나 결혼생활의 차별 등과 당장은 무관한 청년들에게는 역차별이 체감될 수도 있겠다. 연령이 적을수록 성 차별은 감소하는데도 여성만 지원받는 것 같은 데 대한 거부감, 성적과 취업 등에서 여성들이 약진하는 가운데 맞는 취업난 등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여성들이 불리한 것만 말하고 유리한 것은 방치하는 것 같은 데 대한 불만 등이 여성 혐오의 배경이 아닌가 여겨진다. 청소년의 경우 온라인게임 중독을 방지하기 위한 셧다운제를 주관하는 여성가족부에 대한 반발이 엉뚱하게 청소년정책과 무관한 여성 혐오로 투사된 것으로도 보인다. ‘자녀가 성공하려면 어머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식의 남성비하 유머 확산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정당한 불만은 표출돼야 하지만 무조건적인 외국인 혐오나 여성 혐오, 남성 비하는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오는 7월부터 여가부의 모법인 여성발전기본법이 양성평등기본법으로 전면 개정 시행된다. 여성 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해 일하는 명실상부한 ‘양성 모두의 부처’로 거듭나겠다”고 김희정 여가부 장관이 올 초 신년사를 통해 밝힌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여가부는 궁극적으로 부처 명칭을 영어 명칭(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처럼 양성평등가족부로 바꾸기에 앞서 7월 법 시행에 맞춰 우선 여성정책국을 양성평등정책국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양성평등기본법 시행을 계기로 이제는 이성(異性)에 대한 마녀사냥식 혐오와 비하는 내려놓자. 집안일과 양육 공평 분담, 데이트 및 결혼 비용 공평 분담 등 남녀 불문하고 이성의 합리적인 목소리에는 귀와 마음을 열자. 이성이 없는 세상은 종족 단절은 차치하더라도 상상만으로도 삭막하고 끔찍하지 않은가. 어차피 서로 필요한 존재라면 미워하고 헐뜯기보다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happyhome@seoul.co.kr
  •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어디서 볼까? ‘페미니즘 논란’ 김태훈 하차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어디서 볼까? ‘페미니즘 논란’ 김태훈 하차

    아카데미 시상식 생중계 어디서 볼까? ‘페미니즘 논란’ 김태훈 하차 아카데미 시상식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채널CGV를 통해 생중계되는 가운데, 방송인 정지영이 중계에 나선다. 정지영은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함께 23일 오전 10시부터 방송되는 채널CGV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맡았다. 이동진과 함께 4년 간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맡았던 김태훈은 최근 한 패션지에 기고한 페미니즘 관련 칼럼 논란으로 인해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다. 김태훈은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내용이 담긴 자신의 칼럼을 통해 “사람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보다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라는 주장을 담아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에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에서 하차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실험정신·불꽃 감수성… 우리말의 연금술사들

    실험정신·불꽃 감수성… 우리말의 연금술사들

    1만명이 넘는 시인들이 전국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단과 대중의 호평을 동시에 받는 시인들은 극히 적다. 탁월한 시어 조탁과 시적 감각을 갖고 있는 데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개인의 문학적 성향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거나 문학의 변화를 미리 감지해 시대적 흐름에 앞선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이라는 게 문학계의 중론이다. 실험정신과 남다른 감각으로 시단의 저변을 확대하는 ‘저평가 우량주’ 시인들은 누구일까. 조재룡 고려대 불문과 교수는 유형진, 고명철 광운대 국문과 교수는 장이지를 각각 꼽았다. 유형진은 2000년대 시단의 미래파 논쟁을 주도했다. 2000년대 들어 시단이 확 바뀌었다. 젊은 시인 15명이 언어파괴 등 1990년대와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시단을 움직였다. 조 교수는 “유형진은 2000년대 전혀 다른 어법을 구사한 시인들의 선봉장이었다”며 “당시 평가를 받은 다른 시인들과 달리 유형진은 지금껏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장이지는 서구 모더니즘을 자기식으로 극복하려는 시인이다. 서구가 그동안 개발해낸 모더니즘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비서구가 갖고 있는 모더니즘의 발전된 형식을 계속 모색하고 있다. 고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모더니스트들은 대부분 서구 취향인데 장이지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색깔을 띠면서도 서구의 모더니즘을 넘어서려고 한다”고 분석했다. 김동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는 성윤석, 고봉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김소연을 뽑았다. 성윤석은 단순히 시적 관조나 상상으로 시를 쓰지 않는다. 노동을 매개로 세상의 사물들을 만나고 노동을 통해 사물들에 대한 사고를 깊게 한다. 노동을 통해 숙성된 시적 인식이 단정한 언어들로 표출되는 게 특징이다. 첫 시집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는 극장 주변에서의 아르바이트 경험이, 두 번째 시집 ‘공중묘지’는 시체 수습 체험이 녹아 있다. 최근작 ‘멍게’는 어시장에서 막일을 하며 사물들의 의미를 포착했다. 김 교수는 “신기한 발상도 화려한 미사여구도 없지만 시를 읽고 있으면 인식이 열리고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며 “시집 ‘멍게’는 언어에서 멍게 향과 어시장 내음이 나는 듯하다”고 평했다. 김소연은 원래 미학적 완성도를 추구하던 시인이었는데, 최근 시의 경향이 바뀌었다. 노동환경 등 현실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고 교수는 “최근 5년 문단이나 대중의 관심을 받은 진은영·신보선·이연광 시인에 비해 평가를 덜 받았다”며 “올해엔 김소연의 시가 주목받거나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우찬제 서강대 국문과 교수는 김지녀, 김경복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고영을 들었다. 김지녀는 우리 시대의 문제적인 징후들을 미학적으로 비판하고 아파하고 분노한다. 적의를 가장 미학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 교수는 “내면에 침잠하거나 감수성에 의지한 시는 소통이 불가능하고 세대 간 단절을 일으킨다”며 “김지녀는 그런 맹점을 극복했기 때문에 어느 한 시기에 잠깐 반짝하다가 끝날 시인이 아니다”고 했다. 고영은 정제된 형식의 역설적 표현도 있으면서 서정시의 신비함도 갖추고 있다. 젊은 시절의 고난이 시에 깊이를 더하고 삶의 무게도 잘 드러나게 한다. 김 교수는 “김경주 시인이 갖고 있는 신비함도 있고, 작품에 삶의 고뇌가 녹아 있어 서정시의 깊이를 잘 보여준다”고 했다. 유성호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박서영, 이광호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송승언을 주목했다. 유 교수는 “박서영은 서정과 언어 감각의 절정에 있는 시인”이라며 “미래파 담론과 페미니즘 담론이 놓친 우량주”라고 했다. 이 교수는 “송승언은 앞 세대인 2000년대 전위적 시인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감수성을 보여준다”며 “조만간 나올 첫 시집이 기대된다”고 했다. 함돈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김희업은 삶의 리얼리티를 정직하게 포착한다”며 “올해 리얼리즘 계열 서정시에 대한 복권 움직임과 맞물려 재조명돼야 한다”고 했다. 조연정 평론가는 “이제니는 리듬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어의 묘미를 흥미롭게 발견하고 있다”며 “시가 진술이나 이미지가 아닌 리듬과 정황을 통해서도 어떤 정서를 표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고 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외톨이 자퇴 소년, 왜 이슬람 전사를 꿈꿨나

    외톨이 자퇴 소년, 왜 이슬람 전사를 꿈꿨나

    김모(18)군은 정말 ‘이슬람국가(IS) 전사’를 꿈꿨던 것일까. 21일 경찰에 따르면 터키에서 사라진 김군은 수니파 근본주의 무장단체 IS에 가담하려고 8000여㎞를 날아가 스스로 국경을 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초등학교 졸업 이후 사실상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외톨이 청소년이 ‘현실 세계’에서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극단적인 수단을 택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현실과 단절된 삶” ‘홈스쿨링’이라 해도 김군처럼 두문불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경찰에 따르면 김군은 지난해 11월부터 올 1월 15일까지 모두 1666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1657통(99.5%)의 수신자는 동생이었다. 김군에게 걸려온 전화 887통 가운데 798통(90.0%)의 발신자 역시 동생이었다. 부모와도 대화는 거의 하지 않고 쪽지로 소통했던 김군은 동생을 제외하면 단절된 삶을 살았던 셈이다. 김군처럼 인터넷을 통해서만 세상과 연결된 경우 허상에 빠지기 쉽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현실적 기반이 폐쇄된 청소년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어 인터넷에 유통되는 극단주의 종교나 사상에 쉽게 빠질 수 있다”며 “외부 세계에서의 존재감 발현이 자신이 꿈꾸던 IS 가담을 통해 실현될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IS 통해 현실서의 존재감 확인하고자” 또 “동생에게 하루에 28통의 전화를 한 셈인데 망상의 초기 증상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대표는 “인정 욕구가 강한 것으로 보이는데 학교 부적응 등으로 자존감이 많이 훼손된 것 같다”며 “나를 받아 주고 이해해 주는 집단을 IS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김군은 페이스북에 ‘난 이 나라와 가족을 떠나고 싶어. 단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라는 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김군은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등에서 활동하는 10~20대 남성에게서 엿보이는 여성 혐오적 성향도 드러냈다. 지난해 10월 트위터에 ‘나는 페미니스트를 증오한다. 그래서 나는 ISIS(IS의 전신)를 좋아한다’는 글도 남긴 것. ●“또래 이성에 상처받아 여성혐오 가능성” 공정식 코바범죄연구소장은 “또래 이성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경험이 여성혐오주의로 왜곡, 표출된 것 같다”면서 “본인이 열등하지 않은 것을 입증하고자 강해 보이는 조직의 일원이 되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빈약한 세계관에서 ‘반(反)페미니즘=IS’란 식으로 이해했을 것”이라며 “정작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이유를 물으면 합리적인 답을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靑 교문수석 “북핵은 약소국 비장의 무기” 논란

    靑 교문수석 “북핵은 약소국 비장의 무기” 논란

    김상률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교수 시절 쓴 책에 ‘북핵은 약소국이 당연히 추구할 수밖에 없는 비장의 무기’라고 규정한 것으로 24일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김 수석은 “10년 전 서투른 표현에 죄송하며 북한 비핵화가 필요하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수석은 2005년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미국 문화 등을 비판한 ‘차이를 넘어서’라는 책에서 북한의 핵무기 소유와 관련, “열강에 에워싸여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민족 생존권과 자립을 위해 약소국이 당연히 추구할 수밖에 없는 비장의 무기일 수 있다”고 썼다. 또 미국이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북핵을 위협 요소로 규정한 것은 ‘자국 중심의 발상’이라고 규정하면서 팔레스타인 무장 독립투쟁에 대해서는 “동양인의 시각에서는 테러가 아니라 독립운동”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보유도 ‘자주 국방의 자위권 행사’라고 표현했다. 김 수석은 또 9·11 사태는 폭력적인 미국 문화와 무관하지 않으며 부시 행정부가 세계를 전쟁의 공포와 인권의 사각지대로 몰아넣는 데 9·11사태를 악용했다고 비난했다. 김 수석은 서양 중심의 시각으로 동양을 바라볼 때 생기는 왜곡된 인식을 의미하는 ‘오리엔탈리즘’과 관련해 서구 언론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썼다. 이에 김 수석은 “당시 학계 일부의 이론을 소개한 것일 뿐 표현상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송구스럽다.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을 전공한 학자로서 전반적 내용은 평등과 상호호혜적 존중관계를 지향하는 의미”라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핵에 관해서는 “한반도 비핵화와 미국과의 동반자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신념은 확고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김 수석은 숙명여대 영문과 교수를 지내다 지난 18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발탁됐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지성·예술·통속·스포츠… 역사의 좌표를 제시했다

    지성·예술·통속·스포츠… 역사의 좌표를 제시했다

    1945년 해방을 맞자 한국의 지성 역시 과감히 자유와 해방을 선언했다. 이는 사상 학문적 좌우 분열기에도, 반공독재와 부정부패가 횡행하던 시절에도, 물질적 풍요로움과 부의 추구가 정신적 빈곤을 부추길 때도,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해 민족, 해방 등속의 언어가 철 지난 유행가처럼 무시받을 때에도 꿋꿋하게 유지돼 왔다. 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명멸하면서도 감내해 온 해방 이후 잡지(雜誌)의 역사다. 고스란히 한국의 지성사, 문화사 흐름과 맞닿았다. 이들이 표방했던 내용의 고갱이는 창간사를 통해 압축적으로 담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는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마음산책)을 펴내며 해방 이후 2000년대까지 발간됐던 잡지 123종의 창간사를 분석해 당대의 시대정신과 조응했던 지성사의 흐름을 짚어 냈다. 1945년 12월 창간한 월간지 ‘백민’은 창간사에서 ‘백민은 대중의 식탁입니다. 문화에 굼주린 독자여 맘것 배블리 잡수시요. 쓰는 것도 자유, 읽는 것도 자유, 모-든 것이 자유해방이외다’(원문 표기)라고 밝히며 ‘말과 정신의 자유’를 천명했다. 1948년 9월 창간한 ‘학풍’은 문학, 과학, 역사학, 사회학, 법학, 정치학 등 전방위 분야를 망라한 종합학술지였다. ‘학풍’의 창간사 제목은 ‘학문의 권위를 위하여’다. 해당 연구가 정치하게 분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인문학의 재출발 선언문이자 곡학아세의 학자들에 대한 천둥과도 같은 계언이다. ‘학자가 오늘은 생활을 위하여 몸을 영리기업에 두기도 하며, 내일은 세속적 위력에 아첨하여 학계를 파는 데 여념이 없다.(…) 우리의 학계가 급속히 자체의 권위를 자각하지 않으면 학문의 이름 앞에 자멸의 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6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흠칫 놀라 움찔거릴 만한 일갈이다. 이는 함석헌과 장준하라는 한국 현대지성사의 두 거목이 이끌었던 월간 ‘사상계’(1953년 4월 창간)로 이어졌다. ‘사상계’의 존재만으로 만족하기에 박정희 정권의 현실은 참혹했다. 눈엣가시 같던 ‘사상계’ 외에도 ‘모든 지성과 양심의 나침반’을 자부한 ‘청맥’(1964년 8월 창간)이 나왔고 기꺼이 탄압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1966년 당시 스물여덟 살의 서울대 전임강사였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창간한다. 오랜 시간 한국 사회 지성의 전위이자 본대였던 ‘창작과비평’은 시대적 변화에 맞춰 문예지의 특성을 더욱 부각시키며 ‘문학과지성’(1970년 창간)과 함께 문예계간지의 축을 이룬다. 지성의 성찰은 1976년 3월 창간한 ‘뿌리깊은 나무’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한글 중심주의, 민중주의, 생태주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뿌리깊은 나무’ 창간사는 ‘고급문화의 그늘에서 시들지도 않고 이 시대를 휩쓰는 대중문화에 치이지도 않으면서, 변화가 주는 진보와 조화롭게 만나야만 우리 문화가 더 싱싱하게 뻗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는 1991년 ‘녹색평론’에 이르러 생태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으로 진화한다. 창간사는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산업문명’, ‘정치나 경제의 위기일 뿐 아니라 문화적 위기, 즉 도덕적·철학적 위기’ 등으로 시대를 진단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인간 중심의 관점에 머무르는 한(…) 크게 미흡한 사상’이라고 일갈했다. 물론 엄숙한 잡지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57년 2월 ‘야담과 실화’ 창간호는 ‘육체파 미인 윤인자양’의 총천연색 화보를 앞세웠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논란 속에서도 통속 대중잡지의 흐름은 1968년 9월 ‘선데이 서울’ 창간까지 계속된다. 1982년 아무 직함도 없이 ‘박근혜’ 명의로 창간사를 썼던 만화잡지 ‘보물섬’부터 ‘음악동아’(1984년 창간), ‘미술세계’(1984년 창간), ‘과학동아’(1986년 창간) 등 전문지에 이르기까지 잡지의 분화는 본격화한다. 특히 페미니즘을 표방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를 비롯해 2000년 ‘아웃사이더’, 2012년 ‘월간 잉여’ 등이 잇따라 창간됐다. 또한 2000년대 이후 ‘GQ’(2001), ‘맥심’(2002) 등의 해외 판권을 사 온 라이선스 잡지는 자동차, 패션, 섹스, 스포츠 등 ‘남성용 콘텐츠’를 세계적 트렌드로 녹여 냈다. 천 교수는 “잡지를 창간하는 일에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퍼뜨리고 싶다는 욕망, 잡지를 중심으로 앎과 삶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 같은 것이 관여한다”면서 “(창간사에는) 현재의 역사적 좌표와 사회상을 말하는 것이 공통적이며, 창간사에 담긴 정신과 말은 당대의 현실과 상호작용해 빚어진 것”이라고 지성사와 문화사의 틀로서 창간사를 분석했음을 밝혔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여성 폭력 근절 어떻게 해야 하나…라시다 만주 유엔 특보·김행 원장 대담

    [김주혁 선임기자의 가족♥男女] 여성 폭력 근절 어떻게 해야 하나…라시다 만주 유엔 특보·김행 원장 대담

    라시다 만주 유엔 여성폭력 특별보고관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주최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남아공으로 이주한 유색인종 3세대로서 각종 차별을 뼛속까지 경험했다. 서울신문은 그와 김행 양평원장의 대담을 지난 10일 주관했다. →김행 원장 :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유엔 여성폭력 특별보고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만주 특별보고관 : 유엔 시스템에서 독립적 전문가로 활동하며 4가지 업무를 주로 한다. 특정 정보를 수집 조사하고, 여성폭력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매년 인권이사회와 유엔총회에 한 차례씩 주제별 보고를 하는 등 기준을 마련하며, 남성폭력과 여성폭력이 어떻게 다른지 알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 워크숍 등에 참여한다. →한국은 직선에 의해 여성 대통령이 뽑힌 나라다.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 등을 4대 폭력으로 규정해 국정과제로 내세우고 정책을 집행하는데 이런 노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량식품도 몸에 대한 폭력이란 점에서 이 4가지는 공통점을 가지며, 구체성을 띤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더욱 효과적이려면 구조적인 근본 원인을 이해하고, 증상뿐 아니라 폭력의 원인과 결과를 규명해야 한다. 그래야 재발이 방지된다. 폭력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없어져야 한다. →국가가 여성폭력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효과적인가. -먼저 국제법에 의거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예방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구제수단을 마련하는 등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의무가 있다. 국가가 성인지적 관점에서 법률을 제정하고 같은 법률이라도 여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려하는 정책과 예산이 있어야 한다. 인권 침해에 대한 지원과 금전적 보상, 주택 마련 등 여성들이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 발전하도록 돕기 위해 국가가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성인지적 사건을 적절히 다루도록 경찰, 검찰, 법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예방적 대책도 포함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재발되지 않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여성인권 보장과 폭력 방지를 효과적으로 이룩한 국가가 있나. -여성폭력을 근절하는 데 큰 성과를 이룬 국가는 없다. 부분적으로는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법률과 시스템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좋은 결과가 나타났고, 법률을 적용해 실행하는 부분이 중요하다. 보통 정부들이 처한 가장 큰 도전과제는 여성폭력을 인권이 아니라 사회복지나 가족융합의 측면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문제라고 하면 여성인권 침해가 잊혀지기 쉽다. →예산배정의 우선순위에서 여성폭력은 대개 뒷순위로 밀린다. -동의한다. 성인지 예산 등이 실행되지만 여성폭력 예산을 독립항목으로 할당하는 나라는 없다. →여성폭력은 기본적으로 남녀 간 힘의 불균형에서 발생한다는데 추가적으로 설명해달라. -여성폭력은 자신의 존엄성과 삶의 권리,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인권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 여성 차별과 억압 등 인권침해는 폭력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제도적 차별이 만연하는 것이 큰 문제다. 사회가 발전해도, 법률에 의해 보장하더라도,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고 여성 소득이 남성보다 낮은 게 당연시되는 등 차별과 불평등이 일어난다. 여성이 무슨 일을 하든지 노인과 아이 돌봄은 당연히 여성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도 문제다. 안정성 부족과 급여 차이 등 직장에서도 차별로 나타나며 이 차별과 불평등이 영속화되면서 여성폭력의 원인이자 결과가 된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심이나 역차별 주장이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는 기제가 되는데,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나. 유엔의 ‘여성을 위한 남성’(He for She) 캠페인은 어떤 식으로 여성을 돕는가. -이제는 페미니즘이 남성 반대가 아니라 비차별과 양성평등을 옹호한다는 인식을 강화해야 한다. 400년 전과 2500년 전에 작성된 여성 인권신장 문서를 보면 교육, 보건, 투표권 등 옛날과 큰 변화가 없는 게 안타깝다. 아직도 여성들이 운전이나 투표를 못 하는 나라도 있다. 어떤 노력을 했는지 페미니즘을 가르쳐 공백을 없애야 한다. 남성, 특히 정치인들에게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 ‘히포쉬’ 캠페인은 여성인권과 평등을 위해 남성들이 함께 싸워나간다는 점에서 동의하지만 이런 운동으로는 남성들이 더 누리는 권력이나 가부장적 제도에 대해 논의할 수 없고, 남성들이 문제를 해결하고 권리를 준다는 방향으로 잘못 해석될 소지가 있다. →얼마 전 캄보디아의 웨니 쿠스마 유엔 여성대표를 만났는데 그분은 세계 각국에서 여성 리더들이 배출되지만 여성 정치인에게 여러 가지 폭력이 행해지고 있어서 이 문제가 시급히 해결돼야 한다고 했다. -그분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공적 영역에 진출한 여성들이 많은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다. 여성들은 정계에서도 육체적,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폭력을 경험한다. 여성을 정계에 영입할 때는 환경도 바꿀 준비가 돼야 한다. 여성은 공적 업무뿐 아니라 요리와 아이돌봄 등 집안일도 해야 하는 점을 고려해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남성과 달리 여성들이 법안 작성 업무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점을 감안해 연구 조사인력을 지원한다든지, 여성들이 발언과 토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교육을 제공하는 것 등이 방법일 것이다. 여성들이 동등하게 일할 환경을 만들어줘 여성들의 능력과 자신감을 향상시켜야 한다.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도 중요하다. 남성들이 여성을 무시하고 2류 시민으로 대하면서 폭력적 언행과 고정관념을 계속 행사하면 여성들이 정계에서 일하는 의미가 없다. 교육이 필요하고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 여성의 인권이 침해됐을 때 사법적인 조치와 보상 및 구제가 있어야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변할 수 있다. →캄보디아 여성대표는 호주에서 길라드 전 총리에게 “빅 바텀”(큰 엉덩이)이라고 하고, 태국의 잉락 전 총리의 사생활에 언론이 집중하는 등 차별에 대해 적절한 보호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하더라. -이런 것들을 근절할 제도적 장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인권법에 마련돼 있다. 일반적으로 언론이 여성은 아무렇게나 다뤄도 된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있다. 여성 정치인의 신체나 옷이 아니라 발언과 주장에 대해 더 관심을 갖도록, 과연 어떤 게 뉴스 가치가 있고 국민이 원하는 기사인지를 언론 옴부즈맨 등이 평가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 부적절한 보도가 있으면 언론인이 책임져야 한다. →상당수 남성과 일부 여성들은 성매매가 ‘필요악’이라고 주장한다. -성매매는 남성의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해 여성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별이고, 성매매가 필요악이란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빈곤, 폭력, 성매매를 알선하는 남성에 의한 여성폭력, 남성들의 성적 욕구 제어 등 성매매의 원인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이주여성 폭력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데 어떤 관점에서 그들을 보호해야 하나. -가난, 가정폭력, 억압, 경제적 기회, 성매매 등 다양한 이유에서 가족과 안정적인 삶을 떠나 이주하는 여성들이 늘어난다. 국가는 이들이 어떤 연유로 오는지, 그 과정에서 폭력은 없었는지 살펴보고, 불법이든 합법이든 영토 안에서 이들의 인권이 보호받도록 해야 한다. 국제인권법에 서명 비준했기 때문이다. 단일민족에게는 더 큰 변화가 필요하다. 내 국민이 아니니까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버리고 사회적 관점을 바꿔서 이주민들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결국 ‘모든 것은 인권으로 통한다’고 결론을 내려도 될까. 우리가 일류국가가 된다는 것은 인권국가가 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우리는 국가 개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인권 우선 이니셔티브’를 추진 중인데, 이에 따라 모든 정부는 사법, 정치, 예산을 인권 측면에서 봐야 하고, 이주민이나 여성에게 폭력 및 정치 참여 교육도 해야 한다. 이런 메시지를 담아 모든 정부가 모든 사안을 인권과 통합해야 한다. happyhome@seoul.co.kr ■라시다 만주(Rashida Manjoo) 유엔 여성폭력 특별보고관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국내외 사회 정의와 인권, 특히 여성인권을 위해 30년 넘게 헌신해온 전문가다. 2009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지명을 받았다. 케이프타운대 공법학 교수이고, 미국 웹스터대 객원 교수 등을 겸하고 있다. 올해 미국 변호사협회의 국제인권상을 받는 등 인권 관련 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남아공 헌법에 의거해 설립된 양성평등위원회의 의회감찰관으로도 활동했다.
  • [책꽂이]

    [책꽂이]

    빨래하는 페미니즘(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민음사 펴냄) 왜 다시 페미니즘인가를 이야기하는 책. 신화와 종교에 갇힌 여성 이미지를 추적하는 것부터 시작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초기 페미니즘을 다시 조명했다. 444쪽. 1만 9500원. 한국의 경제학자들(이정환 지음, 생각정원 펴냄) 한국 경제학자 30명의 미래진단기. 지난 10년간 재벌개혁 논쟁의 다양한 쟁점과 층위를 추적해 대안을 모색한다. ‘사회적 대타협론’ 등의 실체를 파고들어 장하준, 장하성, 이병천, 김정호 등 경제학자들의 이론적 지형과 쟁점을 재해석했다. 384쪽. 1만 6000원. 인생 빛과 그림자(정병윤 지음, 참좋은사람들 펴냄) 정치칼럼니스트가 집대성한 대정부 건의서. ‘충효 패를 책상 앞에 놓고 자기수양과 나라를 위한 충효사상 실천을 맹세하자’, ‘대학학력 국가고시제도 입법’ 등 다양한 견해들을 풀어놓았다. 497쪽. 2만 5000원.
  • 한국 성문화, 음지에서 더 사악해지다

    한국 성문화, 음지에서 더 사악해지다

    섹슈얼리티는 정치학이다/이성은 지음/서해문집/240쪽/1만 5000원 여권의 옹호/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지음/손영미 옮김/연암서가/656쪽/3만원 “회식에 가면 남자 상사랑 뒤엉켜 춤을 춰야 해요. 정말 싫은데 그들이 요구하면 뭐라 대응할지 생각이 안 나요.”(유현재·가명) “종종 나이트클럽이나 가라오케에서 이사님이 나한테 춤추자고 그러고 몸을 만져요.”(최정희·가명) “블루스 타임이 있잖아요. 그럼 남자 직원들과 부장님이 억지로 플로어로 끌고 가요.”(손지혜·가명) 이들 모두 20대 젊은 여성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감정평가사무실에서 일하지만 원치 않는 춤을 남자 상사와 함께 춘 경험들이 있다. 회식에선 술 시중을 도맡고, 나이 많은 남자와 얼싸안고 춤추는 괴로움을 떠안고 산다. 1차 고깃집, 2차 노래방, 3차 룸살롱으로 이어지는 거나한 회식문화 속에서 “이거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야. 귀 막고 듣지 마”라며 음담패설이 이어지는 것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민감하게 반응하면 남자 동료들과 같이 일하지 못한다”는 여직원들의 푸념만이 허공을 맴돌 뿐이다. 이들은 국내 3대 대기업을 놓고도 제각기 평가를 내린다. A기업은 차별 없는 합리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존재하며 B기업은 부드럽고 자유로운 이미지와 달리 매우 보수적이라고 꼬집는다. C기업은 거친 마초문화 속에서 여성이 아예 ‘명예 남성’이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영국 요크셔대에서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책 ‘섹슈얼리티는 정치학이다’를 통해 한국사회의 ‘슈퍼 갑’인 남성들의 행태에 대해 따지고 든다. 저자는 2013년 5월,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의 미국 방문길에 수행했던 청와대 대변인이 주미 대사관의 인턴 여직원을 성희롱한 사건은 20년 전(1993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과 처음과 끝이 완전히 닮았다고 주장한다. 몇몇 관련자들의 책임만 묻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조용히 덮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한민국은 20년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한국의 가정, 직장,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성(性)에 얽힌 권력관계를 생생한 인터뷰와 관찰로 추적해 나간다. 이른바 ‘대한민국 섹슈얼리티 보고서’다. 책은 주변에서 쉽게 마주하는 평범한 이웃들의 은밀한 속내를 전한다. 예컨대 권력관계로서의 성은 조직뿐 아니라 가부장적 결혼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서적 친밀감은 아내가 아닌 말이 통하는 여자 친구와 음주로 풀고 성욕은 성매매로 푼다”는 38세의 별정직 남성 공무원은 아내와 살짝 손목이 닿는 것도 싫다고 고백한다. 중매로 결혼한 40대 부부는 19년간 혼인관계를 이어왔음에도 성관계를 ‘그게’라고 낮춰 부를 뿐이다. 은행원 출신의 49세 전업주부는 부부관계를 졸업한 지 오래이며, 대신 남편의 경제적 기반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으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저자는 그럼에도 ‘섹스리스’ 부부들이 혼외 성관계에 대단히 배타적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예외 없이 ‘외도=이혼’의 등식을 품는데, 결혼제란 강력한 규범이 오히려 결혼제 밖의 위험한 성을 선택하게 만드는 기제가 된다고 추정한다. 저자가 새삼 화두를 던진 배경은 단순하다. 1993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아, 피해자와 지난한 인터뷰를 벌인 뒤 한국 사회의 이성애 중심 문화가 생성해 온 위험한 권력관계를 파헤쳐 왔다. 책은 그간 연구 결과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한국의 섹슈얼리티 문화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더 사악하게 변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반면 여권 운동의 어머니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대표작 ‘여권의 옹호’는 가슴에 엉킨 한국 여성들의 멍울을 달래준다. “남녀 모두 같은 지식을 익히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습속을 고치기 어렵다”는, 프랑스 혁명 직후 남성 편향 교육에 반발했던 저자의 글들이 오늘날 여전히 의미를 갖는 것은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은 양성 불평등 탓이다. 저자는 여권의 옹호를 통해 여성의 역할을 사회적 경제 활동과 정치 참여로 확대하고 남녀 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잠재된 예속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 질서의 재편을 촉구했다. 덕분에 책이 출간된 1792년은 여권 운동의 기념비적 해로 꼽히며 저자는 ‘근대 페미니즘의 어머니’로 추앙받는다. 2008년에 이어 국내에 재출간된 책으로, 다른 작가들의 비평이 묶여 나왔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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