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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깨 감싸안고” 영상 공개…민주당 소속 부산시의원 제명(종합)

    “어깨 감싸안고” 영상 공개…민주당 소속 부산시의원 제명(종합)

    민주당 부산시당 윤리심판원, A 시의원 제명 결정 최근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더불어민주당 소속 부산시의회 시의원을 민주당 부산시당 윤리심판원이 13일 제명했다. 부산시당 윤리심판원은 해당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과 진상조사, 당사자 소명 등을 거쳐 심의를 벌인 결과 가장 높은 징계인 제명을 의결했다. 부산사하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후 9시쯤 부산 사하구 한 식당에서 민주당 소속 A 시의원이 종업원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했다는 신고가 접수돼 조사 중이다. “복분자 먹으면…” 식당서 신체접촉·성희롱 발언 의혹 피해자 B씨 측 변호인인 김소정 변호사는 12일 오전 부산시의회에서 미래통합당 부산시당과 함께 연 기자회견에서 “A 시의원이 지난 5일과 11일 두 차례 이 식당을 방문해 B씨의 팔뚝을 쓰다듬는 등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하고 반말로 이름을 불렀다”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당시 A 시의원은 “난 복분자 먹으면 서는데 어떡하지”라며 “(B씨는) 손톱도 빨갛고 입술도 빨간데, 얼굴도 빨가면 더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또 “(5일에는) 식당에 B씨의 자녀가 옆에 앉아 있었는데도 신체접촉을 했다”면서 “B씨가 A 시의원의 성추행에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지만 7월 말 개업한 식당의 영업에 지장을 줄까봐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참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A 시의원이 11일에도 같은 행동을 하자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더 심해지겠다. 참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신고를 결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추행 의혹에 대해 A 시의원은 “해당 식당에서 일행 3명과 술을 마신 것은 맞다”면서도 강제추행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며 극구 부인했다. 또 민주당 부산시당에 ‘억울하다’고 호소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시의원 의혹 부인…통합당, CCTV 영상 공개 A 시의원의 부인에 피해자 측은 13일 당시 상황이 담긴 CCTV 영상을 공개했다.지난 5일 오후 8시 40분쯤 식사를 마친 A 시의원은 B씨에게 악수를 청했다. B씨가 머뭇거리다 악수를 받자 A 시의원은 B씨의 어깨 바로 아랫부분을 살짝 쓸어내리다가 팔뚝 부위를 움켜잡는다. 김 변호사는 “B씨는 자신의 딸이 보는 앞에서 A 시의원이 자신의 팔을 움켜쥘 때 상당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며 “명백한 강제추행”이라고 강조했다. “딸 앞에서 팔 움켜쥐고, 10초간 어깨 감싼 건 명백한 추행” 또 다른 영상에서는 식사비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A 시의원이 B씨의 어깨를 10초가량 감싸안고 있는 장면이 담겼다.김 변호사는 “‘격려 차원에서 어깨를 토닥였다’는 A 시의원의 해명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상”이라며 “A 시의원은 B씨의 어깨를 상당 시간 감싸 안았다. 강제추행의 증거”라고 말했다. 통합당 측은 A 시의원이 거짓 해명을 고수하면 추가로 영상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5일에 이어 지난 11일에는 A 시의원이 식당에서 근무하는 또 다른 여종업원을 성추행하고, 남자 직원을 폭행했다고 통합당은 주장했다. A 시의원은 “식당이 지난 7월 말 개업했는데 장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 ‘장사가 잘 되도록 도와주겠다’는 말과 함께 지난 5일 격려 차원에서 식당 사장의 어깨를 토닥였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지난 11일에 또 다른 여종업원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11일에 또 다른 여종업원에게 어떠한 성추행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부산시당 제명 결정…“피해자 보호 노력하겠다” 그러나 결국 민주당 부산시당은 A 시의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제명을 결정했다. 징계와는 별도로 피해자 보호와 2차 가해 예방을 위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로 했다. 민주당 부산시당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가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데 대해 책임감을 통감하며 다시 한번 사죄의 뜻을 밝혔다. 또 앞으로도 선출직 공직자가 성 관련 문제에 연루될 경우, 불관용의 원칙을 적용해 당헌. 당규에 따라 엄정 징계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여성위원회와 젠더폭력예방특별위원회 등을 통해 선출직 공직자들의 성 인지 감수성과 성 평등의식을 높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태아 내 태아…쌍둥이를 ‘임신’한 채 태어난 신생아의 사연

    태아 내 태아…쌍둥이를 ‘임신’한 채 태어난 신생아의 사연

    태어나자마자 제왕절개수술을 받아야 했던 신생아의 사례가 공개됐다. 미국 의학전문매체 메디컬데일리 등 해외 매체의 27일 보도에 따르면 콜롬비아에 사는 모니카라는 이름의 여성은 지난 3월 제왕절개수술을 통해 딸을 출산했다. 의료진은 신생아의 상태를 확인하던 중 신생아의 복부 안쪽에 탯줄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검사 결과 이는 신생아와 함께 수정된 쌍둥이 태아의 흔적으로 밝혀졌다. ‘태아 내 태아’로 불리는 이 증상은 작고 불완전한 태아가 자궁 안의 태아 내에 존재하는 상태이며, 50만 분의 1 확률로 매우 드물게 보고되는 사례다. 의료진에 따르면 신생아의 뱃속에 있던 태아는 대략적인 형체를 갖췄지만 심장과 뇌가 없는 상태였다. 의료진은 신생아가 태어난 지 24시간 만에 신생아의 제왕절개수술을 진행했고, 이후 신생아는 별다른 증상없이 병원을 퇴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의료진은 “우리는 신생아의 복부에서 ‘태아내 태아’를 꺼내는 수술을 진행했다. 만약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면 신생아 복부에서 또 다른 태아가 영양분을 받아 성장하면서 신생아의 장기를 손상시켰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국립보건원의 자료에 따르면 일부 사례에서는 청소년 또는 성인이 되어서야 ‘태아 내 태아’ 증상을 인지하는 경우가 잦다. 태아 내 태아가 성장하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긴 후에도, 이를 암으도 오진하는 사례도 많다. 지난 8월 영국의학저널 사례보고(BMJ Case Reports)에는 17세 인도 소녀의 사례가 소개됐다. 이 소녀는 12세 때무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 및 복부 혹이 증가하는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태아 내 태아’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료진은 “환자의 뱃속에서 머리카락과 척추뼈, 팔 등을 가진 쌍둥이가 발견됐다”고 밝혔고, 소녀는 수술 후 건강을 회복했다. 사진=123rf.com(자료사진)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미국은 잊어도, 美병사들은 못 잊는 한국전쟁

    미국은 잊어도, 美병사들은 못 잊는 한국전쟁

    ‘연인원 178만명의 병력 파견, 3만 3600여명의 전사자와 10만명 이상의 부상자, 그리고 7000명 이상의 실종자….’ 20세기 중엽 미국이 개입한 가장 참혹한 전쟁이라는 한국전쟁 중 미국의 참전 규모와 피해상이다. 그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 통한다. 과연 한국전쟁은 미국인에에 어떤 전쟁이었고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한국전쟁은 말 그대로 ‘잊혀진 전쟁’일 뿐일까. ●한국전쟁 다룬 美소설 70편 분석 미국 전쟁문학 전문가인 정연선 육군사관학교 영어과 명예교수는 한국전쟁을 다룬 미국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한국전쟁을 조망해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알려진 100여편 중 70편을 분석해 미국과 미국인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전쟁은 두 번씩을 싸우는 것이니 한 번은 전쟁터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기억 속에서 싸운다’는 말을 인용한 저자는 이렇게 책을 시작하고 있다. “전쟁소설은 바로 두 번째 싸우는 전쟁 기억의 산물이다.”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잊혀진 전쟁’이 예고됐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년 후 터진 한국전쟁을 미 행정부는 크게 부각시키지 않으려 했다.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것을 꺼려 극히 제한된 ‘작은 전쟁’으로 치부했다. 당연히 참전 군인들은 관심에서 멀어졌고 종전 후에도 주목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귀국하기 일쑤였다. 미 행정부가 내세웠던 한국전 참전의 명분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소련 공산주의 팽창을 막고 미국의 국익과 압박받는 (한국)국민을 돕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군 병사들은 그런 거창한 명분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남아 돌아가기 위해 싸워 냈다. 한국전쟁 미국 소설들에선 그 ‘잊혀진 병사’들의 증언이 생생하다. 우선 나라가 보냈기 때문에 싸우러 간 병사들의 한국 인상이 도드라진다. 대부분의 소설을 보자면 한국은 ‘인분 냄새 진동하고 갖은 질병이 창궐하는 생지옥’이나 다름없다. 생존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여인들이 가득한 나라로 그려지기도 한다. 제임스 히키의 ‘눈 속에 핀 국화’ 속 한 병사는 한국을 성병인 임질(고노리아)과 설사병(다이어리아)에 비유한다. 리처드 샐저의 ‘칼의 노래 한국’에선 주인공 군의관이 코리아를 ‘코리어’(Chorea·무도증: 불수의 운동이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병)를 떠올리게 하는 나라로 기억한다.●1950년 미국 사회의 거울이 된 한국전 한국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51년 10월 5일자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이런 기사를 싣고 있다. ‘본국에서는 완전 잊혀진 것 같은 (한국)전쟁인데 지난주 한국에서는 2200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한국전쟁 소설과 수기 속 병사들의 토로는 ‘무관심’의 실상을 실감나게 전한다. 한국전 참전용사이자 시인인 윌리엄 차일드리스는 ‘한 사람의 시인, 한국을 기억하다’를 통해 “그 잊혀진 전쟁은 병사들이 고향에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잊혀져 버렸다”고 술회한다. 멜빈 보리스의 소설 ‘내게 영웅을 보여다오’에선 주인공인 미군 총사령관조차도 “병사들은 우리 대다수의 국민들과 정부와 세계가 생각하기에 인기 없는 싸움을 이곳에서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커트 앤더스의 소설 ‘용기의 대가’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은 그들 자신의 가슴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특하고 이상한 전쟁’인 한국전을 다룬 소설들은 미국의 다른 전쟁소설과 다른 점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소설이며 베트남전 소설은 주로 반전 메시지에 치중한다. 하지만 한국전 소설은 조금 더 다층적이고 총체적인 시각에서 전쟁에 접근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어디인지도 모를 장소에서 혹한 속 끝없는 공방이 계속되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은 역설적으로 따뜻한 휴머니즘을 부각하는 소설이 많이 탄생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쓰고 있다. ‘전쟁을 치르는 나라에서는 국내 문제들이 병사들의 배낭 속에 넣어져 해외로 나가기도 하지만 반대로 전쟁터에서 수행됐던 많은 일들이 아주 튼튼한 시체 운반용 가방에 넣어져 국내에 들어오기도 한다.’ 1950년대 미국의 사회적 문제들이 미군 병사들에 의해 한국의 전쟁터로 운반됐고 그곳에서 실험을 거친 후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음을 풍자한 말이다. 결국 한국전은 1950년대 당시의 미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거울이었음을 밝힌 저자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잊혀진 전쟁은 역설적으로 절대로 잊혀지지 않고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엄마는 도움이 안돼!’ 개구리에 경악해 우는 아이

    ‘엄마는 도움이 안돼!’ 개구리에 경악해 우는 아이

    개구리에 놀라 경악하는 아이의 영상이 화제다. 지난 24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은 최근 미국 유타주 리치 웰스(Rich Wells)가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 한편을 소개했다. 영상 속엔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있는 한 어린 소년이 팔로 점프해 앉은 개구리에 놀라 울부짖는 모습이 담겨 있다. 속수무책 개구리의 스킨쉽에 놀라 우는 아들의 모습이 재밌기만 한 엄마는 카메라로 이 순간을 담으려고 접근한다. 아들에게 다가간 엄마. 손가락으로 개구리를 ‘툭’ 쳐서 아들의 위기상황을 모면시켜주려 한다. 하지만 개구리는 위로 도약해 아들의 입술 위에 앉는다. 혹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인 꼴이 된 엄마의 도움(?) 덕에 어린 아들은 망연자실, 입을 크게 벌린 채 울기만 한다. 해당 영상은 지난 18일 페이스북에 게재돼 현재 조회수 5346만, 좋아요 19만, 댓글 33만을 기록 중이다.사진·영상= Rich Wells facebook 영상부 seoultv@seoul.co.kr
  • 그냥 안아주면 돼… ‘영 어덜트’의 위로

    그냥 안아주면 돼… ‘영 어덜트’의 위로

    버드 스트라이크/구병모 지음/창비/356쪽/1만 4800원 ‘영 어덜트’(Young adult). 주로 10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로맨스나 판타지 요소를 녹인 성장 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는 소설을 뜻한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영 어덜트 문학의 초석을 다졌던 구병모 작가가 발간 10년을 맞는 해에 신작 ‘버드 스트라이크’를 펴냈다.‘버드 스트라이크’란 조류가 비행기에 부딪히는 것을 뜻하는 말로, 이 작품에선 ‘익인’이 스스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과 충돌의 의미로 쓰였다.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날개가 있고 치유의 능력을 지닌 익인(翼人). 도시인과 익인의 혼혈로, 날개가 보통 익인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비오’는 돌연변이로 취급돼 익인 공동체에서 배척당한다. 도시인들이 데려간 익인들을 되찾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나선 비오는 도시인들에게 사로잡혔다가 시청의 우두머리인 시행의 이복동생 ‘루’를 인질로 삼아 탈출한다. 시 청사에서 외롭게 생활하던 루는 익인 공동체에 머물면서 어딘가 모르게 자신과 비슷한 비오와 가까워지고, 둘은 비오의 18세 이행식을 계기로 사랑을 확인한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어른들의 세계에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당찬 루의 모습이다. 익인의 세계 속 손님에 불과한 루. 그러나 그는 비오가 18세 이행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익인의 룰에 딴지를 건다. “세상에 왔는데, 좋아서 태어난 게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그게 당신들의 초원조가 말하는 연결과 포용인가요.”(129쪽) 그 자신도 시행의 이복동생으로 주변부 사람으로 배척받았던 루다. 과거 ‘지장’으로, 익인들의 우두머리였던 ‘옛사람’은 이를 물으러 간 현재의 지장에게 말한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147쪽) 작가는 서로 배타적인 사회에서 자라났지만 점차 거리를 좁히며 마음을 여는 이들 주인공을 통해 우리 사회의 견고한 고정관념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어른들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견고한 편견들을 무너뜨리는 작지만 당당한 아이들의 모습이 이 소설의, 영 어덜트 소설의 진정한 매력이다. 이에 화답하는 ‘옛사람’이나 비오를 길러 준 아버지 ‘다니오’ 같은 이가 우리가 닮아야 할 어른의 전형이다. 날개로 두 팔 벌려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치유 능력이 있는 초원조의 세계에서 날개가 작아 고민하는 비오에게 다니오는 말한다. “지금부터라도 잘 기억해 둬라. 날개가 작아서 덮을 수 없다면… 그냥 그대로 꼭 안아 주면 돼, 너의 두 팔로, 너의 가슴에.”(17~18쪽) 혹독한 세상 끝으로 내몰려 아찔한 절벽 위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손 내밀어 그를 잡아줄 수 있을까. 판타지 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한 서사, 짜릿한 반전,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사랑 이야기까지 겹쳐 가슴 한켠이 몽글몽글해지는 소설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갤럭시 폴드 ‘벽돌폰’ 넘어섰다…작년 시제품과 비교해보니

    갤럭시 폴드 ‘벽돌폰’ 넘어섰다…작년 시제품과 비교해보니

    갤럭시 폴드 시제품에서 확 바뀐 디자인당시는 “벽돌같다” “너무 크다” 혹평도멀티태스킹 최적화해 매력 요소 확대높은 가격이 초기 시장 진입 관건 될 듯 삼성전자가 20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폴더블폰 ‘갤럭시 폴드’를 공개하면서 디자인 혁신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시제품을 공개한 뒤 ‘벽돌폰’이라는 우려까지 낳았지만, 결국 완전히 업그레이드된 디자인을 선보여 전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다만 외신은 200만원이 넘는 가격이 시장 경쟁에 일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서 열린 삼성개발자콘퍼런스(SDC)에서 갤럭시 폴드 시제품을 공개했다. 조명을 한껏 어둡게 한 무대 위에서 선 저스틴 데니슨 삼성전자 부사장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폴더블폰을 꺼내 펴보이자 기대와 실망이 엇갈렸다. 행사 영상을 접한 다수의 네티즌이 “삼성이 미친 것 같다. 이런 아이디어를 내다니”라며 놀라움을 나타냈지만, “사이즈가 너무 거대하다”, “진짜 벽돌같다”, “생각보다 두껍다. 베젤(액정을 감싼 테두리)이 시중에 나온 스마트폰보다 너무 넓은 것 같다” 등의 혹평도 많았다.전문가들은 시제품의 디자인을 어느정도로 완성도있게 개선할 지가 시장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봤다. 모바일 분야 시장분석업체 CCS 인사이트의 벤 우드 리서치 디렉터는 “삼성의 첫 번째 폴딩 폰의 성패는 삼성이 얼마나 기기 마무리를 잘 하느냐에 달렸다”며 “매끄럽고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완성된다면 모바일 기기를 좋아하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겠지만 너무 크고 무겁다면 제품을 팔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에 공개한 갤럭시 폴드의 디자인은 벽돌폰이라는 세간의 우려를 완전히 뛰어넘었다. 삼성전자는 특히 제품을 반으로 접은 상태에서도 얇다고 느낄 수 있도록 디스플레이 두께를 줄였다. 유리 소재 대신 새로운 ‘복합 폴리머’ 소재를 개발해 기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보다 약 50% 정도 얇은 디스플레이를 구현했다. 새로 개발된 ‘힌지 기술’을 적용해 책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화면을 펼칠 수 있고, 화면을 접을 때도 평평하고 얇은 형태가 된다. 접히는 부분의 곡률이 매우 작아 구부려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접힌다는 것이 삼성전자 설명이다. 또 20만번을 접었다 펴도 제품이 변형되지 않는 내구성을 갖췄다. 하루 100번을 접었다 폈을 때 약 6년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갤럭시 폴드는 멀티태스킹에 최적화된 기기다. 사실상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한 손에 들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접은 상태에서는 스마트폰 모든 기능을 한 손으로 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디스플레이를 펼치면 큰 화면에서 다양한 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다. 화면을 2분할 또는 3분할로 나눌 수 있고, 여러 개의 애플리케이션을 동시에 사용해도 애플리케이션이 동시에 동작하는 ‘멀티 액티브 윈도’ 기능을 지원한다. 왼쪽의 큰 화면으로 동영상을 보면서 오른쪽 상단 화면에 인터넷 브라우저를 실행하고 오른쪽 하단 화면에 모바일 메시지로 채팅도 할 수 있다. 갤럭시 폴드는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에 2분기 중 출시된다. 이날 갤럭시 폴드를 소개한 저스틴 데니슨 삼성전자 부사장은 4월 26일부터 출시된다고 밝혔다. 가격은 1980달러(약 222만 원)부터 시작된다. 초도 물량은 100만대 이상으로 예상됐다. 외신들은 디자인에 대한 찬사와 높은 가격에 대한 평가를 동시에 내놓았다. 블룸버그는 “삼성전자 갤럭시 폴드는 최초의 폴더블폰은 아니지만, 회사의 브랜드, 인기, 기술적 우수성은 갤럭시 폴드를 일반 시장에서 가장 진보된 폴더블폰으로 만들 것”이라고 보도했다. CNN 비즈니스는 시장조사업체 CCS 인사이트 벤 우드 리서치 디렉터를 인용해 “갤럭시 폴드를 경쟁사에 앞서서 발표한 것은 삼성전자가 혁신 리더로서 눈에 띌 수 있도록 만들었다”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마트폰에서 일반적인 디자인 방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워싱턴포스트는 “소비자가 2000달러에 이르는 제품을 수용할 수 있을지 불명확하다”며 “폴더블폰이 스마트폰 시장이 필요로 하는 기폭제가 될지 역시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앙상블/채기성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앙상블/채기성

    사실 경희를 만나려고 만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먼저 경희를 봤다면 나는 아마도 버스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J가 그녀의 어머니를 논현동 게장 집으로 퇴근 시간에 맞춰 모셔 오지 않았더라면 굳이 몸을 구겨 가며 버스를 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경희를 만나고 나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체 탓에 긴 행렬로 이어진 차들 사이를 뚫고 버스는 간신히 일 차선으로 빠져나와 정류장 쪽으로 겨우 몸을 돌렸다. 출입문 앞 쪽까지 가득 찬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며 몸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기어 오는 버스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일찍 나오지 그랬어.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내 문자에 대한 J의 회신에도 한숨이 생략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들보다 도로 쪽에 위태로울 정도로 바짝 붙어 섰다. 버스 앞문이 열리기는 했지만 입구까지 막아서 있는 사람들을 어깨로 밀어내며 올랐다. 내 바로 뒤에서 어깨로 등을 떠밀던 한 남자는 문이 닫히지 않자 결국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낭패한 표정이 나에게는 왠지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버스 문이 겨우 닫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근래 들어 가장 운이 좋은 순간이었다.다음 정거장에서 앞쪽으로 몇 사람이 내리면서 문이 열렸다. 출입구 난간에 서 있던 나는 다시 사람들을 밀치고 버스 안쪽으로 올라섰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좁은 버스 출입구로 몰려들었지만 탈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없었다. 출입구 쪽의 사람들에게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퇴근 때보다 더 짙어진 어둠이 있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무표정하게 저마다의 핸드폰을 보며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버스 창에 반사되어 보였다. 차례로 사람들을 훑어보다 버스 중간 즈음에서 나처럼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낮은 조도의 등 아래에서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경희였다. 오래전부터 나에게 닿아 있었던 것 같은 무거운 시선. 사람들을 비집고 버스에 탈 때부터 나를 알아봤을 것 같은 시선. 아니면 그전부터. 우리가 서로 보지 않았던 시절부터 그래 왔다고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경희의 무겁고 오래된 시선에 사로잡혀 나는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흔들림을 사이에 두고, 경희와 나는 창을 통해 비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내려도 되죠?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기사 쪽을 향해 몸을 치켜세웠다. 버스 기사는 대답이 없었다. 버스 앞쪽으로 끼어들어 미적거리는 차량 때문에 예민해졌는지 기사는 후미 등을 반복해서 껐다가 켜 댔다. 버스 기사는 앞쪽 출입문은 되도록 열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앞쪽으로 내리는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 줄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한두 명 탈 수 있는 공간이라도 타기 위해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이 몰리면서 어깨로, 등으로,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밀어냈다. 버스 기사는 혼잡을 피하기 위해 뒷문을 먼저 열어 사람들을 그쪽으로 유도한 다음 앞문을 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뒤쪽이든 앞쪽이든 누군가 탈 만한 공간은 없었다. 일단 버스 앞쪽 난간에 매달린 다음, 문이 닫힐 수 있도록 까치발을 하고 몸을 앞으로 밀어대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위험하다는 기사의 만류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타겠다며 몸을 구겨 넣다가 버스를 출발조차 못 하게 만들었던 나를 경희가 봤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고개를 쭉 뻗어서 경희가 있는 쪽을 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해서는 경희를 볼 수 없었다. 다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 움직이지 않고 내게로 향해 있는 경희의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 경희를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그녀가 독일로 떠나기 바로 전날이었는데, 그날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나는 경희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먼저 연락하지는 않았다. 매년 경희의 생일을 챙겨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때만큼은 그녀의 생일을 챙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연락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경희였다. 독일로 떠나기 전에 꼭 나를 보고 떠나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러마 했다. 신용카드 연체 독촉 전화와 문자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출을 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 됐다. 수개월간 회사의 급여가 체납된 끝에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밀린 임금과 퇴직금이 언제 들어올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내지 못했던 월세 비용과 저축, 보험, 통신 요금의 더미에 묻혀 나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 그 더미를 뚫고 나가 경희를 만나 웃으며 생일을 챙겨 줄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전혀 없던 것이었다. 그녀를 만나는 시간만큼이나 연체된 카드 대금이 불어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돈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커피 한 잔은 사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비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오늘은 내가 살게. 함께 밥을 먹거나 술을 먹고 나서 경희가 보통 그렇게 얘기하면 나는, 배우가 무슨 돈이 있어, 하고는 늘 그렇듯이 그녀보다 한발 앞서 호기롭게 계산을 하고는 했다. 정말 유명한 배우가 되면, 그때야말로 나를 잊지 말고. 그리고 내가 다짐하듯이 경희의 눈을 보며 얘기하면, 보통 그녀는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배우라는 말이 낯간지럽다는 듯이. 오늘은 내가 살게. 경희가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나서야 나는 옷을 챙겨서 나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늘 만나던 홍대입구 8번 출구에서 만나 경의선 숲길 쪽으로 걸어가면서 경희는 딱히 어디를 가자거나 뭘 먹고 싶다고 선뜻 말하지 않았다. 둘이 자주 가던, 맥주를 마시며 음악을 듣기에 괜찮고, 또 무엇보다도 술이며 안주가 그리 비싸지 않은 익숙한 곳 몇 군데를 얘기해 봤지만 경희는 하나같이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면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와인을 마시고 싶어. 그럼 어디? 뭘 하고 싶은데. 그렇게 물으려던 참이었다. 와인. 경희를 따라 입 밖으로 뱉어진 단어의 모음 두 개가 허공에서 공허하게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두 개의 원 안으로 와인이 무한대로 부어지고 있는 게 떠올려졌다. 경희와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함께 와인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가자, 안 그래도 생일인데. 그건 비싸잖아. 사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결국 나에게 향한 말일 뿐, 경희에게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경희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가지 않을 수는 없어 나는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와인과 곁들여져 나올 샐러드와 안주 같은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내가 낼게. 와인을 다 마시고 나서 자리를 뜰 때 경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그저 작은 위안이 되었다. 경희가 그 말을 할 때면 아주 단호하고, 무엇보다 진짜 멋있어 보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좋아 보인다며 경희가 앞장서 들어간 곳은 이층짜리 주택을 개조해 만든 건물이었다. 그냥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물 앞에 주차된 차들은 거의 대형 수입차 세단이었다. 광택이 도는 창문 안쪽으로 와인을 마시며 앞에 앉은 남자를 그윽이 바라보는 여자가 보였다. 푸른색을 띠는 롱 드롭 귀걸이가 여자가 웃을 때마다 흔들렸다. 거기 안쪽에 있는 여자와 양복을 입은 남자,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어쩐지 다른 세상의 사람들 같았는데 그래서 그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게 여간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진짜인 사람들은 저기에 있는데,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저기 있는데, 그 사람들을 따라 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사람처럼 스스로 여겨져서 그랬다. 와인을 좋아하는 줄 몰랐네. 경희는 그 말을 듣고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옷가지들을 풀지 않고 걸치고 있던 머플러를 더 조여 맸다. 춥기도 하고. 와인을 마시면 몸이 좀 따뜻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고 경희는 익살스럽게 웃었다. 마음도. 그 말과 동시에 머금고 있던 웃음이 바람에 꺼진 촛불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경희의 표정은 차갑고, 두 눈은 아래쪽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일 것이라고 나는 직감했지만 그에 대해서 바로 묻지는 않았다. 경희는 나와 대화 중에도 반복해서 몇 번쯤 웃다가 다시 떠오르는 생각을 제어하지 못하겠는지 허공에 떠 있는 생각들을 겨냥한 채 눈을 겨눴다. 경희는 내가 한 말을 자주 놓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반복해서 물었다. 경희와 나 사이의 대화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계속 어긋나고 있었다. 딱히 서로에게 닿을 만한 대화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내적 요구가 가장 큰 마음속의 것들을 꺼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경희가 와인 한 병을 더 마시자고 하기 전에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고, 경희는 와인을 마실 때마다 잔을 비웠다. 처음에는 와인 잔에 반쯤 따르던 나도 양을 삼분의 일로 줄였다. 와인의 건조한 습기가 그녀의 입술에 붙어 입술 틈 사이로 갈라졌다. 깊숙이 몸 안으로 채워 넣을 것이 필요한 사람처럼 경희는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잔으로 담은 붉은색 와인을 몸속으로 들이부었다. 미처 저어할 틈도 없이 경희는 추가로 와인을 주문했다. 경희처럼 단번에 와인을 마셔 버려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그곳을 나올 때 경희보다 앞서 나오면서 신용카드로 결제한 금액이 이십오만 원쯤이었는데, 내가 낼게, 라고 경희가 나선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이 정도쯤 괜찮아. 내가 먼저 그렇게 얘기하자 경희는 고맙다는 말을 했다. 평소보다 돈을 더 많이 쓴 게 아니냐며 한 번쯤 얘기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도 위로받고 싶다고. 와인을 마시는 내내 대화가 엇갈린 경희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마음속에서 웅얼거렸다. 내가 힘들 때도 타인을 챙겨야 한다는 모순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경희가 독일로 떠난 이후, 우리는 만난 적이 없었다. * 팔꿈치로 등을 짓이기는 듯이 세게 문질렀다가 신경질적으로 툭툭 치는 사람은 내 뒤에 서있던 중년의 여성이었다. 등을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등을 찌르듯이 뾰족한 팔꿈치로 계속 찔러서 나는 최대한 여자의 등과 멀어지려 앞쪽으로 몸을 바짝 당기고는, 등을 활자로 폈다. 상대적으로 배가 앞쪽으로 들이밀어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바로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흘겨봤다. 배를 살짝 집어넣자 다시 여자의 팔꿈치 찌르기가 계속됐다. 내가 앞쪽으로 바짝 다가설수록, 그렇게 해서 생긴 빈 공간을 여자가 오히려 좁혀오는 것 같았다. 앞 남자는 몸이 닿는 게 싫은지 어깨춤으로 나를 살짝 밀쳐냈다. 하는 수 없이 활자로 핀 등을 일자로 세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의 날카롭고 뾰족한 팔꿈치와 닿았다. 왜 자꾸 밀고 그러냐는 여자의 거친 음성과 얼굴이 동시에 나에게 쏟아졌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봤다. 저도 계속 밀려서요. 여자에게 따지려 들면 더 싸움이 날까 봐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젊은 사람이 싸가지가 없긴. 여자는 그렇게 자기 말만 하고는 몸을 획 돌렸다. 결국 그 말을 타인, 상대방에게 던지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의도한 사람처럼 여자는 그 말을 던지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여자의 팔을 붙잡고 지금 뭐라고 한 거냐며 따지며 물었을 텐데 나는 일부러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저 뒤쪽의 경희도 여기를, 지금 나를 보고 있을 것이었다. 여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방어하는 내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었다. 버스에 탈 때부터, 여자가 팔꿈치로 나를 찌르고,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고 있는 순간까지 전부 그대로를 경희는 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경희와 친구로 지내면서 보여 준 적이 없었던 민낯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만 있는 것 같았다. 버스에 타지 말았어야 한다니까. 나를 탓하는 목소리가 뇌에서 진동 주파처럼 반복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거기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주머니. 경희의 목소리였다. 아주머니, 방금 뒤에 있는 남자한테 소리 지르신 아주머니요. 차들이 밖으로 늘어서 있었다. 옆 차선으로 옮기려는 차들이 켠 주황색 방향지시등이 깜빡이고, 좁은 틈 사이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거나 끼어드는 차선을 막아서는 차들의 붉은 후미등이 헤드라이트 불빛과 뒤섞여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는 사람들로 가려진 버스 뒤쪽을 고개를 돌려가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뭐야, 누구야. 방금 전의 격앙된 목소리보다 누그러진 신중한 목소리로 여자는 중얼거렸다. 그런 사람 아니라구요, 아주머니 옆에 있는 남자. 싸가지 없는 사람 아니에요. 김이 서리기 시작한 창 위로 희미하게 얹힌 도로의 풍경이 캔버스에서 흘러내린 물감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만들어 낸 그림 같았다. 경희의 목소리가 내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렸기 때문인지 바로 앞의 풍경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뭐야, 누구야. 누군데 그래 지금. 여자는 연신 뒤쪽을 쳐다보다가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아줌마, 이제 조용히 좀 하세요. 여자 앞쪽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여자를 향해 말했다. 아니, 내가 괜히 그래요? 여자가 정색을 하고 남자를 내려 봤는데 동시에 여자의 목소리가 버스 기사의 욕설에 묻혔다. 버스 기사는 이제는 참기 힘들다는 듯이 운전석 옆의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버스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싸가지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경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고개와 시선이 다시 버스 뒤쪽으로 향했다. 경희의 그 말이 귓속에서 울리더니 가슴으로 내려와 울렸다. * 경희와 만나지 않고 지내던 시간 동안 나는 딱 한번 그녀의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시작했다며 한번 보러 오라는 문자를 받고 나서였다. 경희가 독일로 떠난 이후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언제 한국에 돌아왔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후에도 몇 번쯤 경희가 먼저 연락을 해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한동안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다시 들어간 직장에서의 일이 절실하기도 했고, 그만큼 일상과 일과 중에는 일보다 중요한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책상 한쪽에서 진동으로 울리고 있는 휴대폰 액정 화면 위에 경희라는 이름이 몇 번인가 떠 있었고, 손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채 나는 그것을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진동이 그치고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 매번 무표정한 내 얼굴 표정이 비쳐 보였다. 다시 전화가 오면 받아야겠다고,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경희가 두 번 연속으로 전화를 하는 일은 없었다. 경희에게 연락도 없이 소극장으로 향한 건, 한 번도 그녀가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시작할 만큼 간절히 원하던 뮤지컬을 떠나 갑작스럽게 다른 장르의 무대로 간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연극 무대에 선 경희가 어떤 모습인지 멀리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애써 그녀의 변화를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그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독일로 그녀가 떠난 뒤로 내게 몇 번이나 연락했는지, 언제 연락했는지를 모두 세고 있었던 것처럼 노력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회사 휴게실에서 커피를 내릴 때, 누군가 뒤에서 손으로 등을 짚을 때, 차를 운전하다가 커브를 돌 때 같은 평범한 순간들의 틈을 타고 떠올려지는 기억들이었다. 나랑 사귀자. 농담이라며 경희가 무심코 던진 말이 한동안 얼마나 나를 들뜨게 했는지, 처음 뮤지컬 무대에 선 그녀를 단순히 객석에서 바라보던 일이 그렇게나 떨릴 만한 일이었는지를 재차 묻는 것 같은 기억들이었다. 기억들은 금세 사라졌다가 다시 불현듯 나타났다. 그래서 경희와 멀어지기 위해서는 갖고 있던 기억들이 완전히 소진되어 떠올릴 거리가 없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때 삶의 중심과 사건들을 나누고 공유했던 경희와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떤 시절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관계의 인과와 고리가 있는 것일 뿐이고, 우리는 지금 막 그 인과를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완전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힘에 저항하는 관습과 기억의 뜨거운 층위를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경희의 연극을 보러 온 것은 그런 생각의 연장이었다. 연극 무대에 선 경희를 확인하면 끝내 그 층위를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내가 그 기억들의 저항에 설득되었기 때문이었다. 중년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된 연극의 삼분의 일이 지나갈 무렵까지도 경희는 무대에서 보이지 않았다. 진한 화장을 하고 등장한 중년 남자의 딸이 경희일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중년 남자의 내연 관계인 직장 후배도 아니었다. 극의 중반 즈음을 지나서 등장한 중년 여성이 경희였다. 앞서 등장한 여성들이 모두 경희가 아닐까 생각했던 탓인지 중년의 여성으로 나타난 경희가 뜻밖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게 분장을 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동안 경희가 뮤지컬에서 맡아 왔던 역할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정적으로 보였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유행이 지난 옷들을 차려입은 그 역할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중년의 역할은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적정하게 소화해 낼 수 있는 게 아니냐며, 연극이 끝난 후에 찾아가 경희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 나이가 되면 말이야, 표현하지 않으려 해도 연기가 자연스러워질 텐데 굳이 왜. 나는 경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거기까지 떠올리다가 멈췄다. 넌 내 말을 들은 적이 없지. 정작 내가 경희에게 하고 싶던 말은 그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사실은 그 말 안에 내가 경희를 미워하는 감정이 얼마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이상하게도 경희가 독백을 할 때마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부러 무대 뒤편으로 자리를 잡아 놓기도 했고, 소극장이지만 그래도 무대 조명이 밝아서 어두운 객석의 사람들을 쉽게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에도, 경희의 시선이 내게로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경희를 외면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그때 혹시 말없이 소극장을 찾아가 공연을 보고 있던 나를 경희가 알아봤는지, 그리고 그녀가 뮤지컬에서 연극무대로 전향한 이유 중에 어떤 것을 먼저 물어볼지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경희네가 했던 연극 공연을 보러 갔었다고, 차라리 그렇게 말을 시작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경희는 알아, 혹은 그랬어? 그렇게 둘 중에 하나로 대답하고, 나는 궁금했던 것 중 하나는 먼저 알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다시 관계가 시작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145번 버스는 여전히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정체가 심한 신사동 고개에서부터 가로수길 입구를 거쳐 신사동 사거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차들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신사동 고개에서 정차했다가 출발한 버스는 그나마 정체가 덜한 좌회전 차선으로 옮겨 갔다가, 신사역이 가까워오자 사 차선에서 일 차선으로 한 번에 가로질러 갔다. 그사이 각 차선에 겹쳐 있던 차들 몇 대가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려 댔다. 버스 기사의 거친 운전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 모두 금요일 퇴근길의 정체가 지겨운 표정이었다. 이번 정류장에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과 앉으려는 사람, 내리기 쉽도록 문 옆으로 가 있으려는 사람들이 뒤섞이는 동안 사람들에게 밀려났는지 경희의 모습은 창에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느릿하게 가는 동안 나는 자주 버스 뒤편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등과 머리 사이 틈새 어딘가에 경희가 목에 두른 파란색과 검은색 도트 무늬가 새겨진 스카프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버스는 신사역 정류장 바로 앞에 차를 대지 못하고, 조금 미치지 못한 곳에 정차한 상태에서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앞 뒤 문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나는 내리려는 사람들을 먼저 비집고 들어가 버스 뒤편으로 향했다. 이제는 텅 비다시피 한 버스를 아무리 찾고 둘러봐도, 경희는 없었다. * 아마도 신사역에 도착하기 전이나 아니면 그보다 전 정류장에 내렸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혹 다른 사람을 경희로 착각한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도 해 보았지만 그건 분명히 아니었다. 그렇게 깊고 말간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은 경희밖에 없었다. 화가 렘브란트는 자신의 연대기에 따라 자화상을 그려 냈는데, 청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은 비록 달라졌어도 눈빛만큼은 그대로인 것처럼 느껴진다. 육체는 사라져도 눈빛만큼은 영겁의 시간을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나는 한눈에 경희의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경희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 해도 눈빛 하나로 그녀를 구분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스 창을 통해서였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랬으므로 버스에서 내려 신사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에 도착해서도, 날이 지나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며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그녀가 있었으나 사라졌던 자리와 음성을 지우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있었다. 몇 번쯤 핸드폰을 들고 경희의 연락처를 훑다가 말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멈추고를 반복했다. 갑자기 사라진 그녀에게 집중되는 생각의 관성이 오히려 나 자신을 괴롭힐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버스에서 경희를 만나기 이전으로 그저, 돌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그녀와 연결된 세계에 살고 머물게 될 것이었다. 그녀와 단절된 삶으로서의 세계.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날의 일을 기억 속에서 정리하기로 했다. 버스에서의 만남과 기억에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버스에서 경희가 사라진 이유도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경희가 정리가 된 적은 없었다. 삶의 어디선가 경희는 꼭 뛰쳐나오는 것이었다. 145번 버스에서처럼. 전우영씨죠. 굵고 낮은 목소리 톤을 가진 한 남자의 전화를 받은 것은 내가 어느 정도 경희에 관한 일을 어느 정도 잊고 있을 때였다. 회사 연수원에서 승진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받다가 밀려오는 졸음 때문에 잠깐 교육장을 나와 라운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때였다. 그렇습니다만. 차경희씨의 오랜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경희의 이름이 불려졌을 때, 그녀를 생각지 않고 지내던 시간들은 금세 증발되고, 애써 한쪽에 치워 놓고 쌓아 두려 했던 경희의 기억들이 눈앞으로 함몰되어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음성에서 느껴진 알 수 없이 무겁고 감당하지 못할 어떤 예감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남자가 전한 것은 경희의 죽음이었다. 그저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우영씨가 가장 친했던 친구라고 해서요. 마지막에 경희는 우영씨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지만요. 제가 대신이나마 한번 만나 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남자의 무거운 목소리는 내 무의식의 심연보다 깊어 그곳에서 나를 끌어내리는 소리 같았다. 온 힘을 다해 끌어내리는 목소리. 반드시 나를 만나야만 한다는 의지와 무게로 나의 목을 끌어안는 목소리였다. 그건 그래서 남자의 목소리라기보다 내 목소리인 것 같았다. 남자를 통해서라도 경희를 알아내야만 한다는 목소리. 그런데 혹시, 전화를 주신 분은 누구시죠. 아, 제 소개를 하지 않았네요.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경희의 소식이 믿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섣불리 어떤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반쯤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저는 김재철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굵은 톤으로 지금까지의 조심스러운 말투와 다르게 기운차게 자신을 소개했다. 남자의 이름이 상당히 낯익다는 생각이 들어 기억 속 어딘가 존재하는지 떠올려 보고 있었는데, 남자가 이어 꺼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경희와 같은 배우였습니다. 뮤지컬을 오래 같이 했습니다.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지만 나는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남자의 얘기를 듣고, 동창들이나 친구들을 수소문해 경희가 안치되어 있는 납골당을 찾아갔다. 그리고 근 한 달 동안 계속 술을 마셨는데 그때마다 경희에 대한 모든 사소한 기억까지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경희에 대한 기억을 꺼내면 꺼낼수록 그 기억들의 중심에는 어떤 죄책감이 놓여 있었다. 그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기억들을 끊어 내려 했던 죄책감을 희석시키고자 나는 끊임없이 그녀의 기억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이상했던 것은, 오 개월 전에 이미 떠난 그녀가 어떻게 불과 이 개월 전에 버스 안에서 나를 마주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출근을 하면서도 서류 더미 위로 떠올려지는 그 물음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본 것은 경희, 차경희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남자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은 그 일에 대해 한 번쯤 말해 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본 것이 경희에 대한 일종의 환영이었는지, 아니면 착시였는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고백하자면 내가 그녀에게 갖게 된 어떤 죄책감이 버스 안에서의 기억과 강하게 밀착되어 내게서 한시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음이 괴로워서였다. 남자는 예상대로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경희가 했던 한 뮤지컬 공연에서 수도 없이 그녀를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리던 상대 남자 배우. 남자는 그때처럼 팔 근육이 여전히 우람했다. 콧수염뿐이었던 수염이 턱 밑까지 깊고 거칠게 길러져 있었다. 더 달라진 게 있다면 한데 묵어 허리까지 내렸던 긴 머리를 잘라내 버린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들어 올리기 쉽도록 해야 한다며 경희 스스로 다이어트와 금식을 하면서 몸무게를 조절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버스 안에 있었던 겁니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남자는 경희가 버스 안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버스에 없었던 게 아니구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어긋난 겁니다. 그런 일이 종종 있어요. 과거의 시간에 놓여 있던 어떤 순간의 지형이 어긋나거나 뒤틀려서 현재의 시간 어딘가에 다시 배치가 된 겁니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우영씨가 본 건 경희가 맞아요. 그럼, 시간의 잘못된 인과다? 그렇다기보다 찢어 붙이기 같은 거죠. 저쪽 시간에서 잘못 끼워진 시간이 현재의 어떤 시간에 다시 조합된 거예요. 껴 맞춰진 거죠. 그런들 어쩔 수가 없어요. 그건, 시간이 하는 일이니까. 깨진 거울의 한쪽 면에 새 거울 조각을 맞추듯이. 가급적 오류를 그런 방식으로 해결해 가면서, 되도록 완벽한 시간성을 구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그러나 모든 것들을 통제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 우영씨가 본 건 그와 같은 통제에서 벗어난 시간의 왜곡으로 일어난 일이다, 이겁니다. 이 세상에 없는데도 나타날 수 있는? 내가 반문하자 남자는 한쪽 눈으로 윙크를 하며 한 손으로는 엄지와 검지를 ㄴ자로 만들어 나를 쏘는 흉내를 냈다. 쿨.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경희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언젠가부터 그림자처럼 그녀 곁에 붙어있는 남자가 같이 떠올려졌다. 그 남자에 대해 아직도야? 그렇게 물으면 경희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 왜 대답을 안 해? 그렇게 다시 경희에게 물으며 본론으로 돌아가면, 네가 싫어하잖아. 경희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 깊고 비어 있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그런 대화는 경희와 만날 때마다 반복이 됐다. 나 역시 경희가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그게, 매번 집요하게 그 남자에 대해 물었다. 그 사람. 그 사람 뭐? 취기가 볼에 붉게 오른 경희의 오른쪽 눈가가 엷게 떨렸다. 이런 얘기를 더 이상 주고받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사람 만나러 가지 말라고, 독일에. 독일로 떠나기 전 만났던 그때를 생각해 보면 그래서, 내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아내가 있는 사람을 만날 건데, 너. 그래도 그 정도는 늘 경희에게 하는 얘기였으니 어쩌면 거기까지만 말하고 멈췄어도 괜찮을 법했다. 경희는 내가 연이어 던진 말을 듣고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지는 것 같았다. 너는 그 사람의 아내까지 망치려는 거야. 그때, 경희에게 그렇게 소리치며 화를 내고 짜증스럽게 말한 게, 오랜 실직 상태로 지쳐 있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는지, 아니면 정말 경희가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일만 챙기려 드는 것 같다고 여긴 것 때문이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내가 오랫동안 그녀의 편이 돼주기보다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고, 어쩌면 경희는 내가 자신을 혐오스럽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에게 실망하며 마음을 닫아 버리려 노력했던 나와 달리, 이제는 세상에 없는 경희에 대해서도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남자에게서 나는 어떤 종류의 패배감을 느꼈는데, 자세히 그 감정을 살펴보니 더 깊은 안쪽에는 경희에 대한 부채의 감정이 거기 머물러 있었다. 나를 실망스럽게 쳐다보는 것 같은 경희의 얼굴처럼. * 경희는 그즈음 자주 뮤지컬계를 떠나고 싶다고 얘기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사랑하는 뮤지컬을 떠날 수 있겠냐고 농담조로 말하면 경희는 별 말없이 허공을 쳐다보고는 했다. 그제야 그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다는 듯이. 더 큰 박수를 받는 건 주연급뿐이잖아. 그래서 경희가 그렇게 덜컥 그 얘기를 꺼냈을 때, 정말 그녀에게 뮤지컬에 대한 권태로움이 심각하게 찾아왔구나 싶었다. 경희는 수년째 뮤지컬 무대에서 코러스와 춤을 뒷받침하는 앙상블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출연 배우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에 박수를 받는 주연의 뒷모습을 같은 무대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고 했던 그녀였다. 주연에게 기립 박수를 치는 사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처럼 경희가 말했을 때, 경희에게는 뮤지컬을 더 이상 할 수 있는 어떤 동력도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주연을 맡는 사람은 따로 있더라고. 경희의 그 말이 내게는 인생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될 일은 없는 것 같다고 토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자조 섞인 말투로 뮤지컬을 떠나야 하는 이유들을 말하던 끝에, 경희는 그 남자, 김재철이라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최근에 막을 내린 뮤지컬에서 경희의 파트너 역할을 했던 남자 배우라고 했다. 경희의 뮤지컬을 빠지지 않고 보던 나에게도 익숙한 남자 배우였다. 한데 묶은 긴 머리와 양 팔의 근육을 드러낸 화려한 의상을 입고 경희와 호흡을 맞추던 강한 인상의 그를 나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대에서 경희를 몇 번씩이나 어깨 위로 들어 올리고, 경희의 두 손만을 잡고 몸을 쭉 뻗은 경희를 회전시키는 등의 고난도 동작을 소화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남자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은 서울 공연이 끝나고 시작한 지방 투어 때, 회식이 끝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기 전, 자신에게 입맞춤을 하고 난 다음에야 알았다고 했다.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돌리기에는 그때는 이미 늦었었다고 경희는 고백했다. 경희는 남자의 아내가, 그 공연을 주최한 뮤지컬 회사의 안무가라는 사실은 남자와 조금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 후에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자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경희는 매일 남자와 공연 연습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묘해. 경희는 남자와 남자의 아내 앞에서 연습을 하고 있던 순간을 그렇게 묘사했다. 미쳤어?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듯이 경희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아내와 나를 부서질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 사이의 중심에 내가 있는 거잖아. 그런 셋을 단원들이 바라보고 있고 말이야. 너와 남자의 관계를 단원들이 알아? 아내도? 알고 있는 것 같아. 경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가 이 극의 주인공이야. * 경희가 뮤지컬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 것이 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뮤지컬에 대한 권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남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희를 버스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먼저 그 이유를 묻고 싶었었다. 사실 나는 경희가 뮤지컬을 떠난 이유보다 남자와의 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걸 더 궁금해할 것이라는 것을 경희는 아마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버스에서 사라진 걸까. 나는 오래 경희의 곁에 머물러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녀의 편에 서있던 순간들은 많지 않았다. 내가 경희에게 던지고 싶던 질문들은 그래서 수거되어야 할 것들이었다. 더 이상 경희에게 닿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퇴근 시간 무렵 145번을 탈 때면, 발뒤꿈치를 들고 버스 안쪽을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가만히 서서 고개만 돌려가며 사람들 사이 틈으로만 봐서는 경희를 찾아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경희를 다시 만난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함께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스 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편을 들어 주는 경희의 목소리가 가끔 환영처럼 들렸다.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우리들의 밧모섬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우리들의 밧모섬

    로마시대 정치범을 유배 보내던 에게해의 파트모스섬은 세계에서 ‘유배로 악명 높은 10개의 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기독교인들에게는 ‘밧모’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며, 로마 황제가 사도 요한을 유배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사도 요한은 이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썼고 그래서 유네스코(UNESCO)에서는 1999년 ‘성 요한 수도원과 파트모스섬 요한계시록 동굴’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받고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서 지냈다. 이곳에서 루터는 질병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교황에서 벗어난 그리스도교를 구상했고, 성서를 번역했으며, 방대한 저작물들을 남겼다. 이곳에서 루터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열정과 집중력을 발휘함으로써 일약 그리스도교 사상의 정점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을 “나의 밧모섬”이라고 불렀다. 한말의 3대 시인이었던 강위는 제주 유배 중이던 김정희를 찾아가 보고 “달팽이집에서 10년간 가부좌를 트셨다”(蝸廬十載跏趺膝)며 스승의 유배지를 ‘달팽이집’에 비유했다. 윤선도 역시 ‘어부사시사’에서 “와실(蝸室)을 바라보니 백운이 둘러 있다”고 하면서 작고 누추한 자신의 유배지를 에둘러 표현했다. 그러니까 김정희나 윤선도에게 달팽이집은 그들의 ‘밧모섬’이었던 셈이다. 로맹 가리는 가장 권위 있는 프랑스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1956년에는 본명으로, 1975년에는 가명으로 2회 수상했던 특이한 작가다. 그는 굴레를 벗은 자유로운 말이라는 뜻의 ‘시마론’이라는 별장에서 온종일 글을 썼다. 그런데 하수구를 별장 근처에 만들려 하자 홧김에 그 집을 팔아 버린다. 그 후로 그는 햇볕이 작열하는 또 다른 은신처를 찾아 끊임없이 헤맨다. 그의 ‘밧모섬’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밧모섬’이 필요하다. 적어도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원한다면 자신의 ‘밧모섬’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연암 박지원은 “경조사도 폐하고 혹 며칠씩 세수도 않고 혹 열흘간 망건도 쓰지 않고 지냈다”고 했다. “잠이 오면 자고, 깨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고, 막 배운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어쩌다 친구가 술이라도 보내오면 마시고 취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두지 않고, 몸과 마음이 하자는 대로 지내는 동안 박지원은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이라는 다른 상상을 할 수 있었다. 혼자 있으면 쓸쓸하다고 이를 달래기 위해 ‘쓸쓸비용’을 지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 써도 되지만 혼자인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쓰는 것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지출이 그렇다. 1인 가구 중심으로 관련 시장이 팽창 중이다. 이런 사람들도 있지만 자신의 밧모섬에서 쓸쓸함을 이겨 내는 사람들도 많다. 도서관에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중년들이 그들 중 하나다. 나만의 서재, 나만의 작업 공간으로 느껴져 자주 찾는다는 그들에게 도서관이야말로 나의 ‘밧모섬’인 것이다. 이렇게 각자의 ‘밧모섬’에서 소위 ‘셀프 유배’를 하는 동안 어느덧 ‘다른 길과 다른 가치와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됨은 물론 더욱이 몸과 마음도 따라서 건강해지니 놀랍고 신기한 일일 수밖엔 없다. 그래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도 “유배 와서야 세상사 끊고 기쁨 얻었네”(謫來?喜世情?)라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한 해가 화살처럼 가는데 더 늦기 전에 각자의 밧모섬에서 제대로 기쁨을 맛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백성뿐”… 민본·신분제 타파 외친 혁명가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천하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백성뿐”… 민본·신분제 타파 외친 혁명가

    “역적 허균, 하인수, 현응민, 우경방, 김윤황을 서쪽 저잣거리에서 사형에 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1618년) 8월 24일 기사에는 허균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의 나이 50세 때의 일이다. 허균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한때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은 “예로부터 매를 치며 심문하지도 않고, 사형을 결정하는 최종 문서도 작성하지 않은 채 단지 진술 내용만을 가지고 사형에 처해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다른 논의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사관은 기자헌의 이 말을 허균의 죽음에 이어 실록에 기록해 두었다. 이렇듯 당시에도 허균의 역모사건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됐고, 현재까지도 그 진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 역모를 도모했는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썼는지를 떠나, 허균의 의식 속에는 분명 당시의 사회질서 체계를 바꾸고자 했던 혁명의 뜻이 있었던 듯하다.#백성을 ‘항민’·‘원민’·‘호민’으로 구분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은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天下之所可畏者 唯民而已)”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글에서 허균은 백성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일상에 매여 순순히 윗사람이 시키는 것을 따르는 ‘항민’(恒民), 수탈에 고통받으며 윗사람을 탓하는 ‘원민’(怨民), 평소에는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혹 시대적 변고가 일어나면 자신의 바람을 이루려고 일어나는 ‘호민’(豪民). “호민이 나라의 빈틈을 엿보며 일을 실행할 만한가를 살펴 밭두둑 위에서 팔을 치켜들어 한번 소리치면 ‘원민’이란 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여 서로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소리치고, ‘항민’이란 자들도 살길을 찾아 호미, 고무래, 창 자루 등을 들고 그들을 따라가 무도한 자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략)…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기 위함이지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끝도 없는 욕심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중략)… 견훤과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그를 따르지 않는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호민론 중) 백성을 위하지 않는 임금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니, 더이상 임금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는 혁명의 대상에 불과하다. 허균은 그 혁명의 지도자인 호민의 출현을 갈구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러한 호민이 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품지 못한 주변의 인물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1517∼1580)은 대사성, 부제학 등을 지냈다. 큰형인 허성(1548∼1612)은 이조판서까지 지낸 인물이다. 양천 허씨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자신 또한 재주가 뛰어났기에 당시 사회 질서에 적절히 순응했다면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문장으로도 당대에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 그만큼 허균 자신도 많은 애정을 쏟았던 인물들은 당시 사회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제도적으로 품어 안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허균보다 18살 많았던 둘째 형 허봉은 허균에게는 형님이자 스승이었다. 22세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재주가 있었지만, 임금에게까지 바른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강직함으로 인해 결국 귀양을 갔고 더이상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때 술로 세월을 보내다 38세로 생을 마감했다. 바로 위 누이인 허초희는 ‘왜 조선에 태어났는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라는 세 가지 불행 속에서 자신의 재주를 펼치지 못한 채 27세의 짧은 생을 마쳐야만 했다. 형과 누이를 차례로 보내며 허균은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사회에 절망했을 것이다. 또 뜻을 같이해 교유한 사람 중에는 서얼들이 많았다. 서얼 출신의 이달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고, 자신이 영달했을 시절에는 항상 불우했던 서얼 친구들을 후원하며 가까이 지냈다. 허균은 이들과 편견 없이 마음을 주고받으며 시대에 강한 문제제기를 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천하는 넓은데, 서얼 출신이라고 하여 그의 훌륭함을 버렸단 말은 듣지 못하였고, 어머니가 개가하였다고 하여 그 재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거나 개가한 사람의 자손은 모두 벼슬에 나아갈 수가 없다. …(중략)… 하늘이 내렸는데 사람이 버린다면 이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늘을 거스르고서, 하늘에 빌어 나라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었던 자는 있지 않다.”(유재론 중)#‘장생전’ 등 소설 속에서 이룬 이상사회 자신은 정통 양반으로 아무런 제약이 없었지만 신분에 대한 차별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며 당시의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허균의 시선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비렁뱅이 천민의 신이한 이야기를 다룬 ‘장생전’(蔣生傳), 중인으로 도술에 능한 인물을 다룬 ‘장산인전’(張山人傳) 등 그가 ‘전’(傳)이라는 양식으로 형상화한 인물들은 모두 신분적으로 미천한 사람이었다. 허균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 없는 사회가 아니었을까, 미루어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언급했듯, 허균이 실제 역모를 도모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많은 글과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혁명을 꿈꾸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그렸던 혁명은 단순히 왕조의 성씨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께할 동지들은 당시 사회에서 소외됐던 서얼 등이었다. 하지만 공고한 신분제 질서 속에서 꿈을 현실화하지는 못하고 소설이라는 가상 세계에서의 구현에 만족해야만 했다. 작자에 대한 다소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허균의 삶의 궤적과 주장을 살펴볼 때에 ‘홍길동전’을 허균의 작품이라 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 듯하다. 서얼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이 세력을 형성해 정의를 구현하고, 결국 병조판서에 올랐다가 무리를 이끌고 나라를 떠나 따로 율도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허균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혁명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타협 거부한 채 ‘자유분방한 삶’ 26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뛰어난 재주로 중국의 문단에까지 이름을 널리 알렸으나, 그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행실이 경박하고 규범에 맞지 않는 처신을 한다고 번번이 파직을 당했다. 삼척부사에 부임했을 때에는 불과 13일 만에 파직되기도 하는 등 부침의 반복이 광해군 집권 초기까지 이어졌다. 이후에는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형조판서, 좌참찬 등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변명도 소용없는 역모라는 죄명을 받고서 형장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허균은 자신의 호를 ‘교산’(蛟山)이라 했는데, 출생지인 강릉에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교’(蛟)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뜻한다. 소설 ‘홍길동전’에서의 홍길동은 아버지 홍 판서가 청룡의 꿈을 꾸고 낳았다고 묘사했는데, 결국 꿈을 이루고 용이 됐다고 하겠다. 허균은 홍길동처럼 용이 돼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이무기로 남았지만,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한 채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살았다. 예의 가르침이 어찌 나를 구속하리오 禮敎寧拘放 인생의 부침을 그저 마음에 맡길 뿐 浮沈只任情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도를 따르시게 君須用君法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겠노라 吾自達吾生. -‘파직 소식을 듣고서 짓다(聞罷官作)’ 이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성소부부고(惺所覆藁)는 허균이 자신의 글 정리한 문집…총 64권 중 필사본 26권만 남아 문집은 일반적으로 저자 사후에 문인이나 후손들이 남겨진 글을 모아 간행한다. 그러나 허균의 문집은 허균이 생전에 직접 자신의 저작을 간추려 편집하고 문집의 이름까지 지어두었다. 43세인 1611년 귀양지에서 시(詩), 부(賦), 문(文), 설(說)의 4부로 나누어 64권으로 엮어 ‘부부고’(覆藁)라고 명명했다. 이 문집에 ‘호민론’ 등이 실려 있다. ‘성소’(惺所)는 허균의 호이고, ‘부부’(覆)는 장독 덮개라는 말이며, ‘고’(藁)는 원고이니,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지은 장독 덮개로나 쓰일 변변치 못한 글들’이라는 뜻이다. 장독을 덮는다는 것은 자신의 글에 대한 일종의 겸사이지만, 실상은 중국의 대문장가인 양웅에게 자신을 빗댄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부’란 말이 양웅이 지은 ‘태현경’(太玄經)을 지칭해 쓴 말이기 때문이다. 허균은 역모로 탄핵을 받은 50세에 앞날을 예측했는지, 자신의 편집 원고를 사위인 이사성에게 보내 보관하게 했다. 이후 역적으로 몰려 죽은 탓에 정식 간행은 하지 못한 채 필사본만이 남게 됐다. 편차와 수록 내용도 원래의 모습과 다소 달라진 채 26권이 전해진다.
  • 조선 사람은 춤추고 노래할 때 제일 조선 사람답지

    조선 사람은 춤추고 노래할 때 제일 조선 사람답지

    나는 외할머니 얼굴을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외할머니 얼굴은 내 마음 안에 환하게 들어 있다. 어머니로부터 외할머니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릎 위에 나를 누이고 가만가만 귀지를 파줄 때면 어머니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외할머니는 10남매를 낳았다. 아들 여섯 딸 넷. 둘은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아들들은 나이 스물이 되기 전 차례로 어머니 곁을 떠났다. 아들 둘이 만주로 갔고 하나는 일본으로 갔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오복리. 외가는 골짜기가 깊고 숲이 치렁한 마을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름은 호복리(虎伏里)였다고 한다. 호랑이가 엎드린 마을에서 복이 다섯 개인 마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외할머니는 매일 새벽 당산나무 아래 치성을 드렸다. 약수터에서 떠온 정화수를 놓고 객지를 떠도는 아들들의 안녕을 비는 것이었다. 어느 새벽 샘물을 받던 할머니는 샘 뒤에서 환한 불 두 개를 보았다. 호랑이였다. 물 항아리를 머리에 인 할머니는 천천히 그 불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산신령님 저희 아들들 무사하게 해주세요. 그날 새벽 외할머니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약수터를 찾았다. 어느 날 호복리로 편지가 왔다. 만주의 큰아들이 보낸 편지였다.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어머님은 몸 편히 지내시는지 물었다. 영님이 정님이는 잘 있느냐고 여동생들의 안부도 물었다. 영님이는 우리 어머니 이름이다. 언젠가 식구들을 모두 만주로 데려가겠다고도 적었다. 이 편지가 스무 살 산골 처녀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어머니는 오빠가 사는 만주에 가고 싶었다. 남녀와 출신, 교육의 정도 구분 없이 스무 살은 방랑과 낭만의 나이인 것. 추석 사나흘 전날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토종닭 두 마리를 팔아오라고 시킨다. 어머니는 닭을 팔러 영산포 장으로 갔고 닭을 판 돈으로 무작정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귀지를 파던 손을 멈추고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봉천까지 가는 기차 삯이 얼만 줄 아니? 1원이 조금 넘었구나. 닭 값은 1원 50전이었지. 뒤에 나는 어머니가 국경열차를 탈 무렵 시문학사에서 나온 정지용 시집의 정가를 확인했는데 1원 20전이었다. 봉천의 석탑 거리에서 오빠가 사는 집을 찾았구나. 외삼촌이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아니? 봉천에 닿은 날이 추석날이었구나. 보름달이 석탑의 골목을 환하게 밝혔지. 마을의 조선 사람들 다 모여 영춘이 여동생 왔다고 잔치를 벌였지. 큰 개를 잡고 송편도 빚고 호주를 실컷 마시고 함께 춤을 췄단다. 조선 사람은 춤추고 노래할 때가 제일 조선 사람 답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끝나고 헤어질 때 버스 앞에서 울며 너울너울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한다. 당시 만주 봉천의 석탑 거리는 세상에서 제일 큰 코리아타운이었다. 반도를 떠난 사람들이 만주에 간다고 하면 그것은 봉천을 간다는 말이었고 모두 석탑 거리에 모여 살았다. 1989년 처음 석탑에 갔을 때 가슴이 찌릿찌릿함을 느꼈다. 낡은 목조 2층집을 보면 그 안에 혹 조선 사람이 살고 있는가 물어보기도 했다. 어머니가 외삼촌이 살았던 집이 2층 기와집이었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봉천의 석탑 거리는 재개발되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나라도 없고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만주 봉천에서 오빠와 조선 사람들 함께 보낸 그 추석날이 제일 행복했다고 어머니는 얘기했다. 올해의 추석은 우리 민족에게 각별하다. 남북이 분단된 채 삶 아닌 삶을 산 지 70년. 남북의 두 지도자가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손잡았으니 마음 안에 복숭아꽃이 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7500만 겨레가 마음을 모아 통일의 시간으로 나아가자. 나라를 빼앗긴 그 시절에도 겨레의 분단은 없었다. 남북분단 현실은 식민지 시절보다 더 수치스런 일인 것이다.■곽재구 시인은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국문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한국의 연인들’,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등을 펴냈다.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길귀신의 노래’와 창작장편동화 ‘아기참새 찌꾸’ 등을 썼다. 1995년 시집 ‘참 맑은 물살’로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기고] 북방경협의 세 가지 핵심 요소/김효선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에너지분과장

    [기고] 북방경협의 세 가지 핵심 요소/김효선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에너지분과장

    우리는 ‘기획’을 판다. ‘지적자본론’을 쓴 마스다 무네야키의 경영철학이다. 그의 성공 신화는 문화와 공간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많이 회자된다. 그는 지방의 한 평 남짓한 책방으로 시작해 현재 일본 전역에 1400개가 넘는 오감만족 북클럽을 운영하는 리더로 성장했다. 만약 그가 ‘기획’ 없는 ‘영업’에만 치중했다면 그는 여전히 지방 소상공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평수만 넓혀서.이번 제4차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정상들은 모두 영업을 하러 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에너지’로 포장된 ‘안보’를 팔았다. 결국 이번 행사로 러시아는 420억 달러(약 50조원) 규모의 175개 거래를 성사시켰다. 처음으로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의 조급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일대일로 정책’을 영업 포인트로 삼았다. 이로 인해 중국은 미국을 견제할 러·중, 중·일 연대를 한층 돈독히 다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북극항로 연계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투자’와 ‘LNG 밸류체인 연수 프로그램’을 들고나와 연내 러·일 평화협정 체결을 받아 냈다. 즉 푸틴 대통령은 투자 유치에 성공했고, 시진핑 주석은 러시아를 앞세워 중·미 무역마찰에 세(勢)를 과시했으며, 아베 총리는 안보와 경제적 이득 두 마리 토끼를 모두 획득했다. 그렇다면 이 정상들의 영업이 성공한 배경은 무엇인가. 바로 세 가지 핵심 요소에 있다. 즉 전문가가 기획하고, 탄탄하고 치밀한 팀플레이를 통해 정책의 우선순위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번 동방경제포럼에서 푸틴 대통령은 정상들의 토크쇼에서 한반도에 대한 복심을 드러냈다. 바로 ‘가스’와 ‘철도’다. 과연 우리는 이 ‘가스’와 ‘철도’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이 역시 전문가의 기획이 가장 중요하다. 다음 부처의 조직력을 이용해 국정 운영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이 역할 분담을 잘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혹 부처가 기획하고 전문가가 구경하고 있는 구조는 아닌지. 푸틴 대통령, 시진핑 주석, 아베 총리 모두 아시아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가스 시장은 아시아가 최대 수요처다. 이들이 얘기하는 인프라 연계는 소프트웨어적인 시장 연계를 지향하고 있다. 아시아가 세계 가스 시장의 중심이 돼 가고 있다. 즉 국내 에너지 정책의 포커스가 여기에 맞춰져야 하지 않겠는가. 가스와 철도 모두 전문가의 역할이 있고 소명이 있다. 현장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의 기획력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 성장기 10대의 적 ‘골종양’ 혹으로 착각해 수술 땐 위험

    성장기 10대의 적 ‘골종양’ 혹으로 착각해 수술 땐 위험

    ‘골종양’은 뼈에 생기거나 뼈와 연결된 연골과 관절에 생기는 종양이다. 모든 뼈에 생길 수 있고 특히 무릎, 어깨 관절 주변이나 골반 뼈에 많이 생긴다. 26일 이재영 부천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에게 골종양에 대해 물었다.Q.골종양이 많이 발병하는 연령대가 있나. A.골종양은 주로 성장기 10대 남자 청소년에게 많이 발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동·청소년기는 몸이 성장하는 시기여서 뼈를 구성하는 세포가 변이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Q.사망 위험이 높나. A.모두 그렇진 않다. 골종양은 양성 종양과 우리가 흔히 ‘암’으로 부르는 악성 종양으로 나뉜다. 양성이 악성보다 흔하게 나타난다. 양성 종양은 뼈를 파괴할 수 있지만 생명을 잃을 위험은 없다. 악성 종양은 뼈에 생기는 ‘골육종’과 연골에 생기는 ‘연골육종’ 등이 있다. Q.증상은. A.골종양이 생기면 발병 부위에 혹이 만져지거나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대개 초기에는 증상을 거의 못 느끼다가 골절, 외상, 퇴행성 질환을 치료하면서 우연히 발견할 때가 많다. 골육종이 많이 진행되면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느껴지고 병변 주위가 부어오르기도 한다. 가벼운 외상을 입었을 때 통증이 오래 가고 밤에 통증이 심해질 수 있다. 심하면 골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골육종은 다른 뼈나 폐 등의 장기로 전이될 가능성도 높다. 근육, 신경, 인대, 혈관 등에 생기는 ‘연부조직육종’은 멍울이 주요 증상이다. 한쪽에만 생긴 비대칭 멍울이거나 갑자기 커진 멍울이라면 연부조직육종일 가능성이 높다. Q.치료는 어떻게 하나. A.양성 종양은 정기적으로 경과만 관찰할 때가 많다. 통증이 있거나 골절이 일어날 때는 수술로 제거한다. 만약 악성이거나 악성이 될 위험이 높으면 수술과 항암 요법, 방사선 치료를 함께 시행한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종양이 생긴 부위를 절단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지금은 절단 비율이 5% 이하에 그친다. 주로 병변만 제거하고 팔, 다리의 기능을 최대한 살리는 ‘사지 구제술’을 시행한다. 우선 암세포가 퍼진 부위를 절제하고 손실된 뼈와 연부 조직을 재건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악성종양을 단순한 혹으로 판단해 잘못 수술하면 암세포가 몸 여기저기로 퍼져 나갈 수 있으니 골종양으로 의심되면 반드시 전문의가 있는 병원을 찾아야 한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中까지 덮친 ‘아프리카돼지열병’… 청정 국내 양돈 지키기 총력

    中까지 덮친 ‘아프리카돼지열병’… 청정 국내 양돈 지키기 총력

    아프리카돼지열병 예방에 비상이 걸렸다. 치사율이 30%가 넘는 치명적인 질병이지만 아직 백신이 없다. 일단 발병하면 살처분 말고는 방법이 없어 자칫 국내 양돈산업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지난 1일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발병이 확인된 데 이어 지난 14일과 15일 추가 발병이 확진됐다. 바로 옆 중국에서 병이 확산되자 과거 구제역 파동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선 ‘예방만이 살길’이라며 공항·항만 관리 강화, 양돈농가 등을 대상으로 한 방역, 대국민 홍보에 팔을 걷어붙였다. 20일에는 관계기관과 전문가, 생산자단체 등과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해외 발생 동향과 국내 유입 가능성 등을 점검하고 추가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아프리카돼지열병은 원래 1920년대부터 아프리카 지역 돼지에 풍토병으로 존재했다. 2007년 조지아(옛 그루지야)에 있는 한 항구에 아프리카를 경유한 선박이 정박했는데 이 선박에서 나온 잔반을 그 지역 돼지에게 먹이면서 발생해 유럽으로 확산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이웃나라인 아르메니아 등을 거쳐 2012년 우크라이나, 2013년 벨라루스, 2014년 발트 3국(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과 폴란드까지 확산됐다. 2017년에는 체코와 루마니아에서도 발병했다. 급기야 지난해 3월에는 러시아·몽골 접경인 이르쿠츠크에서도 발병했다. 이르쿠츠크는 기존에 발병했던 지역과 4000㎞ 넘게 떨어져 있었다. 더구나 이달 초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서도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걸린 돼지가 나타났다. 지난 14일 허난성 도축장에서 발견된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걸린 돼지는 헤이룽장성에서 반입된 것으로 확인됐다. 헤이룽장성은 북한과 가까운 동북 3성에 속한다. 지난 15일에는 장쑤성 롄윈강시에서도 신고가 들어왔고 88마리의 돼지가 폐사했다. 중국과 한국은 사람과 물자 이동이 활발해서 방역당국으로선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국은 전 세계 돼지의 절반이 몰려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각국 정부가 신경을 안 써서 질병이 확산되는 게 아니다.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백신이 없고, 앞으로도 백신을 만드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의 유전자 크기는 다른 바이러스보다 10배가량 많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 유전자가 크다 보니 유전자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단백질 종류도 최대 151개다. 백신을 개발해야 하는 처지에선 강적을 제대로 만난 셈이다. ●염지 상태 182~300일 생존… 육포 안심 못 해 바이러스는 대체로 열이나 건조한 조건에 약해서 체외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은 그렇지도 않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생존력이 막강하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 매뉴얼에 따르면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냉동고기에서 1000일가량, 심지어 염지(소금 등에 절여 간을 하는 것)된 고기나 건조된 고기에서도 182~300일 이상 생존할 수 있어 육포조차 안심할 수 없다. 백신도 없고 생존력도 엄청나니 일단 발병하면 살처분 말고는 대응책이 마땅치 않다. 고열과 식욕 결핍, 유산 등 증상을 보인다. 오순민 농식품부 방역정책국장은 “당장 백신을 기다릴 수도 없는 지금으로선 바이러스 유입을 미리 차단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아프리카돼지열병은 어떤 경로로 옮을까. 유럽식품안전국이 2014년 발간한 자료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돼지 이동과 잔반 사료로 인한 감염이 73%를 차지했다. 이르쿠츠크에서는 약 40마리를 잔반으로 키우는 돼지 사육 농가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사료로 바꿔서 돼지에게 먹이는 농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유럽에선 야생 돼지가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옮기는 것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가령 중부 유럽에서 영국이나 독일로 일하러 들어오는 많은 노동자들이 소시지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 같은 음식을 자국에서 가지고 오는데, 이들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야생 멧돼지가 먹고 감염되는 사례가 있다. 야생 돼지는 일단 바이러스에 걸리면 평생 바이러스를 배출하는 보균 돼지가 된다. 이 때문에 유럽 각국에선 사냥으로 야생 돼지 개체수를 줄이고, 감염국에서 들어오는 노동자나 여행객에게 음식물 반입 금지를 홍보하는 실정이다. 한국은 당장은 야생 돼지로 인한 발병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아시아 대륙과는 유일하게 북한을 통해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북한과 정보 교류를 통해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북한에 유입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중요한 예방조치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2007년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조지아에서 발생하고 반년 뒤 러시아 국경지역에서도 등장한 것에서 보듯 야생 돼지를 통해 아프리카돼지열병이 국경을 넘어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다시 한국으로 옮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질병을 옮기는 일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사람이다. 외국에서 불법 축산물을 가지고 오다 공항이나 항만에서 적발된 게 해마다 약 2t이나 된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들어 있는 불법 축산물이 공항과 항만 단속을 빠져나가면 바로 그 순간부터 축산농가에겐 재앙이 시작되는 셈이다. ●각 시·도에 항원·항체 진단체계 만들어 대응 농식품부에선 유럽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뒤 방역대책을 발전시켜 왔다. 항원·항체 진단법을 2009년 확립하고 사육 돼지와 야생 멧돼지를 대상으로 혈청 예찰을 실시하고 있다. 공항이나 항만에서 압수한 불법 휴대돼지고기와 돼지고기 가공품 항원검사도 2016년 100건, 2017년 112건을 했다. 지난 2월에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예방 관리대책도 마련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국가와 관련한 세관 합동검사를 주 2회 실시하고 전담요원도 배치했다. 특히 중국발 항공편 노선에 검역 탐지견을 집중 투입해 검역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혹시라도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하면 신속히 살처분을 할 수 있도록 긴급 행동지침도 만들 계획이다. 살처분 매몰지도 미리 선정해놓았다. 국내 방역은 국제기구에서 권장하는 유효 소독성분을 포함하는 제품을 사용하도록 관련 규정도 강화했다. 시·도에도 아프리카돼지열병 항원·항체 진단체계를 구축했다. 농식품부 김대균 구제역방역과장은 “시·도에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을 검사할 수 있는 실험실과 진단기관이 없는데 관련 전문가도 부족한 실정”이라면서 “예방이 최선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유입됐을 때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인적·물적 기반 구축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세종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1908년 10월 21일 정오. 허위 선생은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라갔다.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태도는 당당했다. 왜승(倭僧)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했다. 그러자 선생은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일갈했다. 털끝만큼의 흔들림도 없었다. 곧 사형이 집행됐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대장 허위의 최후였다. 나이 53세였다.대한매일신보는 ‘天日無光’(천일무광·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이라며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왕산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제1호 사형수였다.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국치민욕 내지어차 불사하위 부장미성 국권미복 불충불효 사하명목·국치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죄수들과 도성(都城) 안팎의 백성이 통곡했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제자 박상진이었다. 박상진은 하얀 천으로 시신을 감싸 안고 나와 금오산 아래에 묻고 장례를 치렀다. 상주인 장남 허학을 비롯한 유족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회유하는 이완용에게 “넌 죽일 것” 호통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을사늑약 직후 의병을 일으켰던 선생은 일제가 정미 7조약 체결을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하자 세 번째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에게 거사 밀명을 내린 사람은 고종이었다. 강제로 퇴위당하기 직전인 1907년 4월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쓰인 의대조(衣帶詔·옷 속에 넣어 비밀리에 전하는 임금의 편지)가 선생에게 전달됐다. 을미의병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이인영도 다시 뛰어들었다. 이인영은 전국에 격문을 띄워 1907년 12월 각도의 의병부대를 경기도 양주에 집결토록 했다. 경기도에서 거병한 허위도 의병들을 이끌고 동참했다. 의병 총수가 1만명을 헤아렸다.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연합의병대(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됐다. 1908년 1월 연합의병대는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화승총에 짚신을 신은 의병은 애초에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군(日軍)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서울 진공 계획을 알아챈 일제는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방어망을 펼치고 있었다. 선생은 선발대 격인 감사병(敢死兵) 300명을 지휘해 선두에 서서 서울로 진격했다.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이인영이 이끄는 본대도 뒤이어 1월 28일 동대문 밖에 도착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이인영에게 부친의 부음이 날아든 것이다. 이인영은 후사를 허위에게 맡기고 급히 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 서울진공작전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들은 부대별로 흩어져 유격전에 들어갔다. 선생은 주로 임진강 유역에서 일본군의 진지를 습격하고 관공서를 덮쳐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선생의 의병들이 수많은 전과를 올리자 이완용은 사람을 보내어 관찰사, 내부대신 직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선생은 “너(이완용)는 반드시 죽일 것이로되 심부름 온 놈이야 죽여서 뭐하겠느냐”고 크게 꾸짖어 돌려보냈다. 1908년 6월 11일 아침 오오타 기요마쓰 등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영평군(지금의 포천) 서면 유동에 있던 선생의 은신처를 덮쳤다. 헌병들이 의병 한 사람을 붙잡아 회유와 협박을 해 은신처를 알아낸 것이다. 선생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체포에 응했다. 13년 의병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선생은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랴. 지금 내가 죽을 곳을 얻었으니 너희 형제간이 와서 보도록 하라.” 선생은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심문을 받았다. 선생은 아카시에게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아카시가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마치 병자 몸뚱이를 주무르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마침내는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자 선생은 책상 위의 연필을 가리키며 “이 연필은 붉은 빛깔이지만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도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도 없이 명백하다”고 반박했다. 아카시는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늠름한 태도에 감복하여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선생에게 존경을 표했다. 또 선생의 목숨을 구하려고 데라우치 통감에게 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재판에서 일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묻자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구겠느냐”고 반문했다.선생은 1855년(철종 6년)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달은 대장이 되고 별들은 군사가 되어 따른다”(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월위대장군 성위만병수)라는 글을 지을 만큼 한학에 능통했다. 관직에 나선 것은 44세의 늦은 나이였지만, 평리원 재판장(지금의 대법원장 격), 의정부 참찬, 칙임 비서원승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의 본관과 고향은 김해다. 임은동에는 낙동강 물길을 따라 김해에서 서울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허위의 증조부 허돈이 1807년에 정착했다고 한다. 임은동은 박정희 생가가 있는 상모동과 붙어 있다. 드넓던 평야는 구미산업공단으로 바뀌었고 공단 아래쪽 허씨 일가가 모여 살던 마을은 빌라와 주택이 들어서 고가(古家)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1962년 건국훈장 추서… 서울시 ‘왕산로’ 명명 다행히 생가터는 남아 있었다. 선생의 장손 허경성(91·둘째아들 허영의 장남)씨가 자신은 전세를 살면서도 큰돈을 대출받아 1990㎡의 터를 사들여 2005년 구미시에 기부했다. 생가 건물은 자료가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생가 건너 쪽 야산에는 선생의 묘소와 유허비가 있고 그 바로 옆에 2009년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세워졌다. 김교홍 기념관장은 “선생의 집안은 논 3000마지기(60만평)를 팔아 군자금으로 쓰는 등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다”고 말했다. 묘소 옆에 위패를 모실 사당 경인사(敬仁祠)가 조성되고 있지만, 예산 편성이 미뤄져 공사가 답보 상태다. 기념관 아래에 선생의 호를 딴 왕산초등학교가 있다.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서울시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청량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가로를 ‘왕산로’라고 명명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이효리, 이상순과 결혼생활 시작한 제주도 집 팔았다

    이효리, 이상순과 결혼생활 시작한 제주도 집 팔았다

    JTBC가 예능 ‘효리네 민박’의 배경이 됐던 가수 이효리-이상순 부부의 제주도 집을 매입했다. JTBC는 14일 연합뉴스에 “출연자 보호와 콘텐츠 브랜드 이미지 관리를 위해 이효리-이상순 부부와 합의하고 부지를 매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효리네 민박’ 시즌1 방송 이후 이효리-이상순 부부의 자택 위치가 노출되면서 사생활 침해와 보안 이슈가 발생해 실거주지의 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설명이다. JTBC는 “실제로 부부의 집을 찾아 문을 두드리고 심지어 무단 침입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이런 식의 사생활 침해 이슈가 예상 범위를 벗어나는 수준에서 이어졌던 게 사실”이라며 “향후 제3자가 이 부지를 매입한다고 해도 역시 거주지로 활용하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판단됐으며, 혹 타인에 의해 외부 공개 시설 등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될 경우 ‘효리네 민박’이란 콘텐츠 이미지가 훼손될 가능성도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JTBC는 그러면서 “사생활 보호 목적에 의한 매입이므로 향후 이효리-이상순 부부의 새로운 주거지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자제해주셨으면 한다. 이 부지와 집을 향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이제 논의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효리-이상순 부부는 최근 제주 집을 매각 후 경기도에 새집을 짓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삼성증권 “당일 주식 판 개인투자자 장중 최고가 보상”

    삼성증권 “당일 주식 판 개인투자자 장중 최고가 보상”

    보상 기준가 3만 9800원 정해 6일 이후 판 투자자 제외 논란 보상안 불만 주주 소송 가능성삼성증권이 배당 착오 사태가 일어난 지난 6일 삼성증권 주식을 매도해 피해를 입은 투자자를 상대로 한 보상안을 11일 발표했다. 대상자는 우리사주 주식에 대한 첫 매도 주문이 발생했던 6일 오전 9시 35분 이전 삼성증권 주식을 보유했던 개인 중, 이날 주식을 매도한 투자자다. 하지만, 6일 이후 주식을 판 투자자는 제외돼 논란이 예상된다. 당초 지난 6일 주가가 급락할 당시 ‘패닉셀’(공포에 몰린 투매)한 투자자로 보상 범위를 최소화 할 거라는 예측보다는 범위가 늘어났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사고 당일 내내 주식 시장에서 주가 흔들림이 있었던 만큼 오후에 매도한 투자자까지 보상 범위를 확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보상 기준가는 당일 장중 최고가인 3만 9800원으로 결정됐다. 직원들이 주식을 내다 판 오전 9시 35분 직전 가격보다는 투자자에게 유리한 기준이다. 이에 따라 지난 6일 주식을 판 투자자는 주식 판매 가격과 3만 9800원의 차액에 매도한 주식 수량을 곱한 금액을 보상받는다. 3만 5150원에 10주를 판 사람이라면 4만 6500원(4650원×10)을 돌려받는 셈이다. 혹 다시 주식을 산 경우에는 주식을 재매수 한 가격에서 처음 판 가격의 차이를 돌려받는다. 10주를 3만 5150원에 팔았다가 3만 8000원에 도로 샀다면, 2만 8500원(2850원×10)을 보상받는다. 이번에 마련된 보상안은 이미 주식을 판 투자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보유한 주식 가치가 떨어진 부분은 보상하지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다만 6일 이후에 주식을 판 투자자나 매도를 하지 않은 투자자들에 대한 보상 방안은 포함하지 않아 논란이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보상안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 투자자들이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있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회사가 6일 주식을 다 정상화했고 주가에도 그날만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면서 “다음날도 주가가 빠졌지만 시장 전체가 같이 빠진 데다 사고상황도 이미 공개가 된 시점”이라고 말했다. 6일 이후 삼성증권 주가는 하락을 거듭해 11일에는 지난 5일 종가 대비 10% 떨어진 3만 5450원에 거래를 마쳤다. 보상 대상에 포함된 투자자들은 해당 매매수수료와 세금 등 관련 비용도 보상받을 수 있다. 당장 11일부터 보상금 지급이 시작된 가운데 신청 기한은 따로 두지 않기로 했다. 원하는 입금 계좌를 삼성증권에 등록하거나 지점을 직접 찾아가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다른 증권사를 통해 거래한 투자자도 있어 정확한 보상 대상자 수나 피해 규모는 아직 산정하기 어렵다”면서 “보상 비용은 모두 자체적으로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오전 11시 기준으로 피해 신고 건수는 591건, 매매 손실에 대한 보상 요구는 107건이다. 이번 보상안에서 기관투자자들에 대한 계획은 제외됐다. 삼성증권 측은 “기관의 경우 개별적으로 협의할 예정”이라며 “개인과 달리 보상요구가 접수된 사례도 없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기관은 개인과 달리 패닉셀의 피해자로 보기 어려운 만큼 이날 보상안보다는 보수적인 기준이 적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공무원 대나무숲] 성범죄 잡혀도 직 유지, 동료 남성들은 구명서…‘공직 미투’ 고발합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정무비서의 성폭행 폭로로 현직에서 물러나면서 공직사회에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바람이 거세질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4명의 여성 공무원이 비실명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 개선 의지 없는 상관… 미투 막는 벽 세상의 어머니, 부인, 딸 중에 평생 성추행을 한 번도 당하지 않는 여성은 없을 것 같다. 남성의 성추행이 광범위하다는 의미다. 수년 전에 한 지하철역에서 동료 공무원이 불특정 여성의 신체 부위를 사진으로 찍다가 적발됐다. 하지만 별일 없다는 듯 근무하고 있다. 또 지하철에서 여성의 몸에 밀착하다 현장에서 잡힌 경우도 있었다. 외려 동료 남자 직원들이 소위 ‘구명서’를 돌리고, 아무 생각 없이 서명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당황했다. 그 역시 현직에서 탈 없이 근무 중이다. 안내직 여직원을 성폭행했지만, 합의에 성공(?)해 별 탈 없이 직위를 유지하는 사람도 봤다. 직원 게시판에 문제를 지적하는 글도 올라왔지만, 상부에서 개선의 의지는 없어 보인다. 공직 사회의 보수적 특성으로 볼 때 공직 사회에서 ‘미투’가 가장 늦게 퍼질 것이다. (한 지방 공무원) # 회식 때 추행당해도 “니가 참아라” 2010년까지는 회식 문화가 너무 많았다. 적어도 월 2~3회는 있었다. 20대 중반이었는데 회식자리에 가자고 상관이 손이나 팔을 잡고 끌거나 어깨를 감싸곤 했다. 그런 행동이 싫다고 말해도 외려 ‘니가 참아야 한다’는 식의 반응이 돌아왔다. 회식자리에서 벌어진 성추행이 주변에서 꽤나 들렸지만, 큰 문제로 불거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 예전에는 손을 잡는 정도는 예사였다고 들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 # “예전엔 다 그랬어” 이젠 없어져야 20년 전 처음 공무원을 시작할 때, 노래방에서 회식을 하면 남자 상사와 블루스 춤을 추는 사례가 꽤 있었다. 사무실에서 담배도 피던 시절이었으니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래도 요즘에는 회식을 빙자한 성추행이 많이 없어졌다. 무엇보다 회식 문화가 변했기 때문이다. 2차 문화가 없어지고 2~3년 전부터는 술을 강요하는 문화도 사라졌다. 여성 관리자가 늘어난 것도 조금이나마 성추행 문제가 개선돼 가는 이유라고 본다. (한 지자체 공무원) # 떨고 있는 윗분… 부조리 타파 계기로 이번 사건으로 걱정하는 남성 상관을 봤다. 혹 ‘의도치 않게 그런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식이다. 나 역시 주위에 성향상 기피하거나 조심해야 할 남성 상관이나 동료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런 반응들을 볼때 ‘미투’가 광범위한 성추행이라는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고민하고 되돌아볼 기회를 주는 것 같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
  • ‘불타는 청춘’ 박혜경 “한국 떠났었다...성대 혹 수술로 목소리 잘 안 나와”

    ‘불타는 청춘’ 박혜경 “한국 떠났었다...성대 혹 수술로 목소리 잘 안 나와”

    ‘불타는 청춘’ 가수 박혜경이 그동안 활동이 뜸했던 이유를 털어놨다. 6일 오후 방송된 SBS ‘불타는 청춘’에는 가수 박혜경(45)이 등장, 오랜만에 얼굴을 보이며 시청자의 반가움을 샀다. 이날 시골마을에 찾아온 박혜경은 전북 진안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학교가기 전에 물 길어서 데워 밥 해먹고, 불을 때고 그랬다”라며 당시를 추억했다. 박혜경은 이날 방송에서 4~5년 동안 가수 활동을 하지 못한 사연을 공개했다. 그는 소송에 휘말려 마음을 병을 얻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대에 혹까지 생겨 수술을 한 것. 박혜경은 “4~5년 전 어느 날 소송에 걸렸다. 그때 스트레스를 받았다. 노래를 못하게 돼 절망적이었다”라며 “피가 거꾸로 솟고 너무 억울했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줬다. 이어 “성대를 혹사시켜서가 아니라 화병으로 성대에 혹도 생겼다. 활동이 없으니 돈을 벌지 못했다”면서 “혹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살다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고 털어놨다. 박혜경은 “내 인생 황금기에 온 시련이었다”면서 “노래를 못할 줄 알고 이런 것을 배웠다”라며 새 도전기를 전했다. 그는 “한국에서 도저히 못 살겠다 싶었다. 차 두 대를 팔아서 파리에서 공부를 했다. 자격증을 따고 중국에서도 한 2년 정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스스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밝힌 박혜경은 수술을 한 뒤, 아로마 비누 관련 자격증 4개, 플로리스트 관련 자격증 4개를 취득했다. 이에 현재 플로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박혜경은 “다시 노래를 하기 위해 성대 회복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방송에서 아픔을 딛고 다시 마이크를 들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편 1997년 그룹 ‘더더’로 데뷔한 박혜경은 1999년부터 솔로로 활동했다. 1집 정규 앨범 수록곡 ‘고백’으로 주목을 받은 그는 특유의 청아하면서 힘 있는 목소리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주문을 걸어’, ‘Rain’, ‘안녕’, ‘레몬트리’ 등 다수 곡을 히트시켰다. 사진=SBS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아이들 위해 버틴다” …악성 질병 대물림 해준 엄마

    “아이들 위해 버틴다” …악성 질병 대물림 해준 엄마

    기포처럼 생긴 종양 수천 개를 온몸에 달고 사는 여성이 있다. 남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지라도 그녀는 이런 자신이 오히려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지난 2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 메트로 등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사는 산드라 드 산토스(53)의 사연을 소개했다. 산드라는 현재 유전성 질환인 제1형 신경섬유종증(Neurofibromatosis type-1, NF1)을 앓고 있다. 10대 때부터 자잘한 혹들이 온 몸을 뒤덮기 시작했고, 20대 중반을 넘어서자 팔과 얼굴로 전이됐다. 1970년대에 신경섬유종증 진단을 받았지만 너무 옛날이라 그 병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삶을 향한 산드라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산드라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즐겼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 호세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은 나의 신경섬유종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내가 자신의 유일한 짝이라며 함께하자고 말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27년을 살아왔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외모를 사랑한다는 산드라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덮고 있는 양성 종양이 4명의 아이 중 3명에게 대물림된 것이다. 신경섬유종은 상대적으로 흔한 질환으로 신생아 3000명 당 1명 꼴로 발생한지만 심각성의 정도가 달라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당시 6살이던 둘째 아들의 신경섬유종증은 암으로 변했다. 신경섬유종증 환자의 10%에서만 발생한다는 일이었지만 결국 아들은 숨을 거뒀다. 그녀는 “의사에게 나 때문이 아닌지 물었지만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의 사망 진단서에는 ‘신경섬유종증으로 인한 악성 육종’이라고 적혀있었다”며 슬퍼했다. 오랫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자신에겐 그 증상을 가진 자녀가 두 명이나 더 있다. 힘들거나 고통스러워도 아들 산드로(21)와 딸 루아나(16)가 자신을 본보기로 삼고 살아가기에 산드라는 삶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치료법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막내 루아나는 “엄마와 같은 병을 갖고 있지만 내 인생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엄마는 내게 이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신경쓰지 말라고 가르쳤다. 만약 내가 엄마처럼 된다고 해도 난 크게 마음쓰지 않을 것”이라며 엄마를 지지했다. 피부과 전문의에 따르면, 산드라의 종양은 여러개의 신경섬유 덩어리와 결합 조직, 작은 혈관들로 이루어져있다. 수술로 도려낼 수는 있지만 모두를 제거하기는 어렵다. 복잡한 유전병인 신경섬유종증에 대한 연구도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사진=유튜브캡쳐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김혜주의 포크&라이프] 읽고 떠나고 먹어라

    [김혜주의 포크&라이프] 읽고 떠나고 먹어라

    최근 우리말 제목 ‘오로지 일본의 맛’과 ‘우리 음식의 언어’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두 책 모두 천천히 읽을 요량으로 펼쳤는데 웬걸, 단숨에 읽어 버렸다. 전자는 요리사이자 음식 작가인 앤서니 보댕의 ‘키친 컨피덴셜’과 ‘쿡스 투어’에서 읽은 일본 방문기의 확장판 같고, 후자는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만 봐도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 국내편을 목표로 만든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의 우위를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 이 더위에 어느 책이 더 잘 읽힐 것인가를 기준으로 말해 보자면 이번에 읽은 두 권이 선배격인 책들보다 낫다고 답을 하겠다. 다시 두 책 중에서는 ‘오로지 일본의 맛’ 쪽에 조용히 손을 들어 본다.‘오로지 일본의 맛’의 영국인 저자 마이클 부스는 요리작가이자 여행작가다. 파리로 요리 유학까지 다녀온 저자는 그곳에서 이 책을 쓰게 만든 일본인 요리사 친구를 만난다. 그 친구는 일본 요리에 관해 일말의 지식도 없던 부스에게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일본 요리 관련 책을 한 권 선물하고, 부스는 그날 당장 그 책을 독파해 버린다. 그리고 대번에 내린 결정. “일본에 가자!” 책은 ‘영국 요리 작가의 유머러스한 미각 탐험’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 그렇게 도착한 일본에서 보낸 3개월의 시간을 기록한 것이다. 짧은 체류 기간에도 불구하고 알찬 정보를 두루 획득하고 부러울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안팎 일본인 조력자들의 공이 컸다. 그들은 저자가 필히 먹어 봐야 할 것, 꼭 가봐야 할 곳, 애써 만나 봐야 할 사람,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을 짚어 주고 그것이 성사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다 읽고 나면 후속작 소식이 궁금해 앞뒤를 뒤적거리게 될 텐데 그 아쉬움은 ‘미식 예찬’,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나 홀로 미식수업’, ‘로산진 평전’ 등으로 충분히 달랠 수 있다. 부스가 일본 식문화의 왕초보였다면 이 네 권의 책 저자와 주인공은 이런 초보들을 노련하게 이끌어 줄 이 분야의 전문가 혹은 대가들이다. 이들의 먹고 거닌 모습들을 저 네 권에서 만날 수 있다. 혹 로산진 이름이 낯선가? 그렇다면 만화 ‘맛의 달인’의 엄격한 미식가 우미하라를 기억하는지. 그 실제 모델이 바로 기타오지 로산진이다.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권유하는 책은 ‘미식 예찬’으로, 이 소설은 ‘오로지 일본의 맛’과도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스를 단박에 일본까지 이끈 책 ‘일본 요리: 단순함의 예술’을 쓴 고 쓰지 시즈오의 인생 전반을 그리고 있다. 1979년에 처음 출판된 ‘일본 요리: 단순함의 예술’은 서양 미식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일식의 바이블로 통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돼 나오지 않았다. 관련하여 쓰지 시즈오의 아들이자 현 쓰지조리사학교 교장 쓰지 요시키가 쓴 ‘미식의 테크놀로지’도 읽어 봄직하다. 앞서 나는 ‘우리 음식의 언어’보다 ‘오로지 일본의 맛’이 몰입도 면에서 더 낫다고 했다. 고백하자면 이것은 올가을 도쿄행을 계획하고 있는 자가 선택한 결과다. 스키지 시장이 올겨울이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진즉 전해 들었지만 막상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접한 부스의 독한 소개가 나의 일본행을 결정지어 주었다. “담보대출을 받든, 적금을 깨든, 차를 팔든, 아니면 이웃의 콩팥을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해 이전하기 전의 스키지 시장을 가 보라는 것이다.” 역시, 독서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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