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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인들도 빠져나오는데… 방독마스크도 없이…” 애끓는 119대원의 아내들

    “일본인들도 빠져나오는데… 방독마스크도 없이…” 애끓는 119대원의 아내들

    동일본 지진 현장에 급파된 119중앙구조대원 임팔순 소방교(8급)의 부인 김미영(33)씨와 방경호 소방교의 부인 김보경(32)씨는 처음엔 한사코 인터뷰를 마다했다. “남편이 탈없이 돌아오길 기도할 뿐,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만 했다. 그러나 18일 이들이 살고 있는 의정부시 민락동에서 어렵사리 만나본 두 사람은 속말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방사능 공포 때문에 제 나라 사람들도 앞다퉈 빠져나온다는 판에, 사지에 보낸 것 같아 미안해서 두 다리 펴고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간밤에 짧게 전화통화를 했어요. 센다이 지역에 내린 폭설로 베이스캠프 천막이 폭삭 주저앉았답니다. 열선으로 데워 먹는 비상식량조차 넉넉지 않은 눈치예요.” 행여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칠 것을 염려라도 하는 듯 전화선 너머의 남편들 목소리는 밝다고 했다. 그래도 “천막 캠프라 너무 추워 밤잠을 설친다.”는 말은 영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임 소방교는 4년 전에, 방 소방교는 2년 전에 각각 지역구조대에서 중앙구조대로 소속을 옮겼다. 자신도 8년차 소방교인 미영씨는 “중앙구조대로 옮기는 사람들은 자원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면서 “대형사건들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소방기술을 익히려는 일 욕심일 뿐 특별승진을 하는 것도, 보수가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해외파견 구조대로 몇 차례나 남편을 떠나보냈어도 이번만큼 애가 많이 탄 적도 없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1월 남편이 아이티 대지진 현장에 나가 한달 만에 돌아왔을 때도 그저 여진만 없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면 됐다.”는 보경씨는 “이번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 공포 때문에 사고 없이 귀국해도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울 것 같다.”고 걱정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가끔씩 비치는 한국 구조대원들이 제대로 방독 마스크조차 끼지 않은 장면을 볼 때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두 사람은 센다이에 파견된 105명 대원들의 가족 모두가 똑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극과 극 ‘슈퍼리치’ 다룬 신간 2권

    극과 극 ‘슈퍼리치’ 다룬 신간 2권

    ■ 사치열병/로버트 프랭크 지음 미지북스 펴냄 ‘승자 독식 사회’ ‘이코노믹 씽킹’ 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로버트 프랭크 미국 코넬대 존슨경영대학원 교수는 신작 ‘사치 열병’(이한 옮김, 미지북스 펴냄)을 통해 현대인의 소비 패턴이 점점 더 ‘과시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프랭크 교수는 사치 열병의 주범으로 최상층의 무분별한 소비 행태를 꼽는다.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의 초호화 요트인 크리스티나호에는 스위치를 올리면 수영장 위로 모자이크 타일의 무도장이 펼쳐지고, 스위치를 내리면 무도장이 다시 접혀 들어간다. 이 배의 수도꼭지는 순금이고, 높다란 의자에는 향유고래의 음경 포피로 만든 덮개가 씌어 있다. 오나시스의 경쟁자인 니아르코스는 이 사치스러운 전투에서 이기고자 오나시스의 배보다 최소한 15m가 더 긴 요트를 만들었다. 슈퍼리치(superrich·순자산이 280억원 이상인 사람)의 이 같은 소비 패턴은 바이러스처럼 중위 소득 가구, 심지어 하위 소득 가구에까지 확산해 영향을 미친다는 게 프랭크 교수의 진단이다. 최상층의 소비 패턴은 결혼 축의금, 생일 선물,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와인의 종류, 구직 면접 때 입어야 하는 옷의 종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최상층의 소득 수준은 크게 나아졌지만, 중위 소득 가구와 하위 소득 가구의 살림살이는 그대로이거나 더 나빠졌다는 점. 중위 소득 가구와 하위 소득 가구는 소득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위층의 소비 수준을 따라잡고자 저축을 줄이거나 빚을 지게 됐고, 그 결과 미국의 개인 저축률은 다른 주요 산업국가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반면 개인 파산 신청은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저자는 통렬히 지적한다. 사치 열병을 앓는 사회를 바로잡을 방안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바로 ‘누진 소비세’다. 누진 소비세는 한 가정이 해마다 지출하는 소비 총액에 근거해 과세하는 것. 각 가정은 일정 금액 이상의 소비에 대해 누진세를 물게 되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에 먼저 돈을 쓰고, 과시적인 소비는 줄이게 될 것이라는 게 프랭크 교수의 설명이다. 누진 소비세로 소비가 위축되면 경제 불황이 닥치진 않을까. 저자는 소비에 쓰지 않는 돈은 은행에 저축되기 때문에 투자가 늘어 장기적으로는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고, 정부는 세금으로 마련한 재원을 복지에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2만 2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슈퍼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랄프 네이더 지음 꾸리에 펴냄‘슈퍼 리치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랄프 네이더 지음, 강경미 옮김, 꾸리에 펴냄)는 저자가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꾸며 만든 소설적 비전이다. 1934년 레바논 출신 이민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네이더는 미국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31살에 거대기업 제너럴모터스(GM)를 고발한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를 썼다.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절단한 친구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으로 그는 GM 사장의 공개 사과를 받아냈다. “소수에서 다수로 권력을 이동시키겠다.”며 1996년부터 네 차례 미국 대통령 선거에 독립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이제 팔순에 이른 저자는 자신이 현실에서 못다 이룬 꿈을 책으로 집대성했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폴 뉴먼, 테드 터너, 배리 딜러, 로스 페로, 버나드 라포포트, 맥스 팔레브스키, 오노 요코 등이 하와이 마우이 섬의 한 호텔에 모인다. 이들의 공통점은 개인자산만 수조원에 이르는, 세계적 부의 상징인 ‘슈퍼 리치’들이란 것이다. 17명의 억만장자는 시장 만능 자본주의와 기업에 대한 특혜가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의를 가져온 주범이라고 지목하고, 대기업에 의해 장악된 금권정치를 회복하며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하기 위한 ‘대전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지난해 세계적 부자인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시작한 ‘기부서약’ 캠페인이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다. 미국의 억만장자 40명이 생전이나 사후에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약속했다는 소식은 신선하면서도 낯선 것이었다. ‘슈퍼 리치’의 저자 네이더는 팔순의 워런 버핏이 “부자들이 많이 가진 것을 내놓는 것도 특권”이라며 다른 억만장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함께 내놓자.”고 설득하는 모습을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그려낸다. 버핏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부자이지만 부자에 대한 감세 혜택을 중지하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부자 세금 많이 내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책에서 억만장자들은 자선과 기부운동에서 한발 나아가 전면적인 국가개혁을 실현하겠다고 팔소매를 걷어붙인다. 자신을 ‘사회개선론자’라 부르는 이들은 수천만 미국인을 괴롭히는 절대빈곤을 폐지하고, 시장을 떠받치는 하부경제를 강화하며 미국의 오랜 양당 질서를 뒤흔들고 의회를 개혁하는 일을 추진한다. 부자들이 인간 조건의 개선을 위해 매진하는 일을 그려낸 ‘슈퍼 리치’는 한 좌파 몽상가의 꿈을 담은 책이라 치부할 수 있다. 혹은 대통령의 꿈을 접은 노인네가 펼친 상상력의 유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민운동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네이더가 어떤 경제학자보다도 신랄하게 미국 보험업계의 감춰진 비밀과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장면에서는 ‘정의란 단호히 움직여야 얻어진다.’는 데 공감하게 될 것이다. 2만 7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이슈 인터뷰] ‘한국 테크노크라트 효시’ 오원철 前 경제2수석

    [이슈 인터뷰] ‘한국 테크노크라트 효시’ 오원철 前 경제2수석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방위산업부터 중화학공업까지 경제계획을 입안, 집행했던 오원철(83) 전 청와대 경제2수석은 1977년 발행된 미국 뉴스위크지를 보 관하고 있다. ‘한국인이 몰려온다’라는 제목의 기사는 한국의 수출·중화학공업 위주의 성장을 다뤘다. 이 잡지는 지난해 9월에는 ‘한국은 진정한 기술강국이 됐다’는 특집기사를 다시 내보냈다. 기술을 해외에 전수해 먹고살 수 있는 나라. 오 전 수석이 팔십평생 꿈꾸던 나라가 실현된 셈이다. 10일 서울 서초동에서 만난 오 전 수석은 그래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정략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인 대신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가 과학기술 정책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이다. 대담 박선화 경제에디터·정리 홍희경기자 →지난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그러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전 수출이라는 열매를 맺었는데. -원전 수출은 사실상 40년 전에 기획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동족을 죽이는 병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었다. 원자폭탄꽃 대신 산업성장의 기반이 되는 값싼 전기 생산과 원전 수출이라는 ‘무궁화 꽃’을 마침내 피워냈다. 당시 우리는 일본처럼 필요할 때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10·26 이전에 박 전 대통령에게 우라늄농축용 분말인 ‘옐로 케이크’를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군부가 들어선 뒤 국내 원자력 기술개발은 사실상 중단됐다. →수출 위주 중화학공업 정책은 이제 개발도상국에 경제개발 교과서처럼 되었다. 핵심분야 가운데 가장 애착이 남는 부분은. -철강·석유화학·기계·조선 등 6대 분야 가운데 하나라도 빠졌다면 중화학공업 성장 역사는 없었다. 여기에 기초과학을 연구할 대덕연구단지까지 모두 7개 분야를 집중육성했다. 오로지 국토의 균형발전과 업종의 특성을 고려해 제대로 입지를 잡아 성공적으로 육성했다고 자부한다. 산업정책을 펴는 데 있어 정치권의 이해관계를 따르면 안 된다. →지방자치단체별로 과학벨트 유치 경쟁이 한창인데. -지금 정부에는 전문 기술관료가 발을 붙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과학벨트 논쟁에서도 과학기술자들은 소외됐다. 만일 1960~70년대 이렇게 했다면, 경제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조선업을 육성하려면 수심이 깊은 바다라는 입지를 찾아야지, 정치적인 표심을 계산해서는 안 된다. 과학벨트 선정은 과학기술자 집단에게 맡겨 놓으면 된다. 설령 그들이 싸우더라도 그 속에서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결정은 정치인인 대통령의 몫이 아닌가. -지휘관과 참모의 역할은 구분되어야 한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육성자금으로 100억달러를 빌려야 한다고 하자 재무부 쪽이 난색을 표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라고 설득해 정책을 강행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국민들은 전쟁에도 따라줬는데, 후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에 돈을 핑계로 주저하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지휘관은 전체를 파악해서 방향을 정해야 한다. 물론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시 박 대통령 집무실에는 대형 한반도 지도에 북한군과 우리군의 전력이 표시되어 있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불러 “적기가 뜬 뒤에는 이미 늦으니, 단추 하나로 적을 제압할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미사일 개발을 할 수 있었다. 만일 이 기술이 계속 유지발전됐다면, 북한은 연평도 도발을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지휘관이 방향을 제시하면, 참모인 기술관료는 계획서를 만들고 집행을 하며 지휘관의 머리와 손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에 힘이 실린다. 지휘관도 과학기술자를 우대하는 쪽으로 정책을 펴야한다. →테크노크라트가 역량을 발휘할 방법은. -정부에 테크노크라트가 들어가 국가계획을 세울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지금은 과학기술부도 없고, 청와대에도 과학기술자를 대변할 인물이 없는 같다. 새롭게 생긴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는 정책을 집행할 권한이 없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동타격대처럼 정책을 세우고 집행할 수 있는 태스크포스팀 같은 조직이 필요한데, 오히려 그런 팀이 너무 많고 컨트롤타워는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이 끝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흔히 한국의 성장방식을 ‘압축성장’이라고 한다. 일본 학자가 개발한 용어를 국내 정치권에서 사용했다. 그런데 ‘압축’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우리는 산업혁명을 이뤄냈다. 영국이 수공업인 방직공장에서 시작해 증기 동력을 통해 산업혁명 단계를 밟았듯이, 우리도 수출을 해야겠다는 인식을 갖게 된 뒤부터 산업혁명 단계를 밟았다. 1963년까지만 해도 생선·김·돼지털·인모 같은 것을 닥치는 대로 수출했다. 그러다가 교육도 못 받고 형편도 어려워 3~4명씩 좁은 방에 합숙하며 살던 여공들이 수출산업의 주역이 됐다. 다음에는 남성 기능사가 나섰다. 월남전 이후 미군 하청을 통해 경험을 쌓은 인력이 생기며, 중동 건설현장이라는 시장에 투입됐다. 당시 영어로 된 도면을 읽을 수 있는 인력을 키우려고 공고 3학년생 2000명을 교육시켰다. 이들을 소년병이라고 불렀다. 용접은 어른들이 해도, 도면을 읽고 지시하는 일은 소년병이 했다. 이들이 점차 성장해 경제발전의 역군이 됐다. →최근 공학한림원에서 받은 대상 상금을 기탁했는데. -여공들과 남성 기능사·기술자는 그야말로 한국 산업혁명의 주역이었다. 관료들도 열심히 했지만, 현장의 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상금을 전부 기탁했다. →앞으로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나. -한국 사람은 끈기가 부족하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때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연구에 매진했다는 과학자의 일화가 있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자도 같은 얘기를 했다. 집적회로(IC) 기술을 들여오기 위해 한국 연구진에게 맡겼더니, 안 되는 이유만 설명하고 연구비를 더 달라고 요구했단다. 타이완 연구자에게 다시 일을 맡기자 근성 있게 매진하더니 6개월 만에 만들어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젊은 세대는 끈기와 창의력이 뛰어난 것 같다. 최근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과 비보이를 보면,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성공하려는 끈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기능사·과학기술자들은 국익을 위한 사명감으로 임했으면 좋겠다. saloo@seoul.co.kr ■ 그는…박 前대통령이 국보라 부른 사나이 1970년대 후반 어느 날 저녁 서울 프라자호텔. 박정희 대통령이 창원공단 순시를 마친 뒤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을 가리키며 “임자는 국보야, 국보.”라고 불렀다. 일순 오 수석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김정렴 비서실장 등 주변에는 침묵이 흘렀다. 오 수석은 우리나라 중화학정책을 입안하고 주도한 전문 기술관료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공군 소령을 거쳐 국내 최초 자동차회사인 시발자동차와 국산자동차의 공장장을 지낸다. 이듬해인 1961년 5·16이 일어나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을 맡은 이래 상공부 화학과장, 공업1국장을 맡으며 1차 5개년 개발계획과 수출제일주의 정책을 실행했다. 1970년에 차관보로 승진해 울산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하고, 1971~79년 10·26이 날 때까지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일했다. 이때 조선, 원자력, 대덕단지 등 7개 중화학공업 정책을 주도하고 방위산업 육성을 총괄했다. 율곡사업 진행 시 깐깐한 결재 때문에 12·12 이후 신군부에 미운털이 박혀 13년간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 요즘도 백선엽 장군 등 지인들과 어울리며 과학기술 강국을 강조한다고. 팔순을 비켜가듯 젊은이를 혼내며 박장대소하는 게 건강 유지의 비결이란다.
  •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바로 소설…재외동포 삶 담아”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바로 소설…재외동포 삶 담아”

    평생 남북 분단의 비극을 그려온 소설가 이호철씨가 팔순을 맞아 소설집을 냈다. ‘가는 세월과 흐르는 사람들’(글누림 펴냄)이다. 책은 팔십대에 접어드는 그가 재외동포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난 인생을 돌아본 소회를 담았다. 1932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 만 18세에 혈혈단신 월남, ‘탈향’ ‘나상’ ‘판문점’ ‘남녘사람 북녁사람’ 등을 발표하며 ‘분단 문학’의 대표 작가로 활동해 왔다. 데뷔작 ‘탈향’을 1955년 발표해 60년 가까이 전쟁과 분단문제에 천착한 그는 어느덧 한국 문단의 ‘최고참’ 작가가 됐지만 “늙을 틈이 없을 정도로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며 여전히 현역임을 과시하고 있다. 소설은 KBS의 ‘해외동포 체험수기’에 응모한 중국, 러시아 등 재외동포들의 수상작을 바탕으로 했다. 먼저 그들의 수기를 소개하고, 작가가 “이 글을 읽은 소감이 어떠신가?”라며 몇몇 사람들과 허물 없이 소감을 주고받는 독특한 형식이다. 이씨는 실제로 수상 수기를 읽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했던 경험을 살려 소설로 다시 풀어냈다. 그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바로 소설”이라며 “동포들의 수기를 여러 사람이 토론하는 식으로 구성했는데, 쓰면서도 재미있었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며 형식을 초월한 소설 쓰기에 대해 설명했다. 팔순을 맞은 소회에 대해서는 “가만 생각해 보니 36년 전에 감옥에 들어갔는데 이 나이가 되니 꼭 어제 같다.”며 “서정주, 김동리 선생의 팔순 기념행사에 간 기억이 나는데 내가 팔십이라니 세월이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문학의 본령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문학의 시대는 끝났다는 소리도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문학이 사람을 끌지 못하고 내쫓는 꼴이 된 것은 일단 문학의 책임이죠. 박완서 소설처럼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을 쓰는 소설가가 몇명 없어요.”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사설] 김인혜 교수 스스로 거취 결정하라

    유명 성악가인 서울대 음대 김인혜 교수에 대한 의혹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양파 껍질 벗겨지듯 새로운 의혹이 계속 나오고 있다. 김 교수는 처음에는 제자들을 폭행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그제 주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지난해 10월 김 교수 시어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제자들이 축가를 부르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이 동영상은 10여명의 김 교수 제자들이 축가를 부르고 가면을 쓴 제자 2명은 뮤지컬곡을 부르는 장면을 담고 있다. 김 교수 측은 팔순 잔치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200만원의 사례비를 줬다고 해명했지만 사례비 여부와는 관계없이, 또 관행 여부와는 관계없이 약자인 제자들을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동원했다면 심각한 문제다. 김 교수는 딸의 서울대 성악과 입시를 앞두고 실기시험 장소를 수업 명목으로 빌려 연습장소로 이용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김 교수는 당초 제자들을 폭행했다는 의혹이 일자, “서울대를 다닐 때 엄격한 도제식 교육방식으로 지도를 받았고 그렇게 가르쳐 왔다.”고 해명했으나 같은 스승 밑에서 성악을 배운 적지 않은 교수들은 “스승님께서는 가르침에 있어 결코 도에 벗어나는 어떠한 훈육방법도 쓰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스승을 욕보이지 말라는 얘기다. 김 교수가 학생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상황이다. 의혹 중 다소 부풀려진 게 있을 수도 있다. 잔치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관행이었다고 김 교수는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 교수와 관련된 의혹이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나오는 것은 그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적지 않은 제자들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는 오늘 김 교수의 징계위원회 회부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김 교수는 대학의 결정을 기다리거나 제자들을 만나러 다닐 게 아니라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기 바란다.
  • 김인혜교수, 시모 팔순에 제자동원까지

    김인혜교수, 시모 팔순에 제자동원까지

    ‘제자 폭행 논란’을 빚은 서울대 성악과 김인혜(49·여) 교수가 지난해 시어머니 팔순잔치에 학생들을 동원해 축가를 부르게 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또 음대 실기시험장을 딸의 개인연습 장소로 쓰게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미 서울대 측은 김 교수의 행보에 대해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 공무원 복무규정을 어겼다.”고 비판하고 나섰고, 동문들은 “혼이 나 울면서 배웠다.”는 그의 인터뷰 내용을 정면 반박한 바 있다. 20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호텔 팔순잔치’라는 제목의 게시물에는 지난해 10월 서울시내 한 특급호텔에서 열린 김 교수 시어머니의 팔순잔치를 일부 촬영한 동영상이 들어 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제자들을 집안 행사에 동원한 것은 적절치 못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한 대학교수는 “제자들을 마음대로 동원했다면, 이는 상식에 어긋난다.”고 꼬집어 말했다. 네티즌들도 ‘평소 제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겠다.’ ‘제자가 소유물인가.’ ‘보기에도 민망하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2006년 딸의 성악과 입시를 앞두고 실기시험 장소인 서울대 문화관 중강당을 수업 명목으로 두 차례 대여한 뒤 딸의 개인적인 연습장소로 쓰게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서울대는 재학생·졸업생 등을 대상으로 사실 여부를 파악하고 있다. 김 교수의 딸은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한 뒤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고(故) 이정희 교수 동문회’는 ‘김 교수의 언론 인터뷰에 대한 입장’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 “고인이 되신 이정희 선생님은 교육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학생의 인격을 존중했고 어떤 경우라도 따뜻한 사랑으로 제자들을 대했다.”고 밝혔다. 최근 김 교수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학 때 지도교수님께 하도 무섭게 혼이 나 울었던 기억이 많이 난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가르쳐 왔다.”고 밝힌 데 따른 것이다. 서울대 관계자는 “김 교수가 (폭행 등 의혹에 대해) 21일까지 답변자료를 제출하면 이를 검토한 뒤 절차에 따라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김 교수의) 징계위 회부 여부나 시기는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한편 SBS TV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하 ‘스타킹’) 제작진은 이날 김 교수에 대해 출연정지 결정을 내렸다. 제작진은 “김 교수의 하차에도 ‘기적의 목청킹’ 코너는 유지된다.”고 밝혔다. 김정은·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깜깜한 객석의 그 처절함… 무대만의 매력”

    “깜깜한 객석의 그 처절함… 무대만의 매력”

    연극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국립극단 창단 멤버인 배우 백성희(86)씨와 장민호(87)씨가 다음달 자신들의 이름을 단 ‘백성희 장민호 극장’에서 개관작으로 공연되는 연극 ‘삼월의 눈’ 무대에 오른다. ●1시간 20분 연습내내 팔팔한 ‘팔순 청춘’ 연극 ‘삼월의 눈’ 은 극작가 배삼식과 국립극단 예술감독인 연출가 손진책이 최고령 현역인 두 선배를 위해 직접 쓰고 연출한 헌정 공연이다. 전통 한옥을 지키며 살아온 노부부의 하루를 애잔하게 그렸다. 주인공인 두 사람의 호흡이 관건이다. 이 작품을 연습 중인 백씨와 장씨는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시간 20분가량 이어지는 해당 연극에서 대부분 극을 이끌어 간다. 대사 한번 까먹는 법 없고, 발성도 젊은 배우 뺨치게 낭랑하다. 두 원로 배우는 공연 연습 과정에서 힘든 게 하나도 없단다. 백씨는 “평생 훈련된 상태로 살았는데 새삼스럽게 힘들 게 뭐가 있겠냐.”면서 “계속 해 왔던 걸 하는 건데, 대사 외우는 것도 상황에 놓이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장씨도 “무대에 같이 선 세월이 60년이다. 부부로 출연한 것만 20편 가까이 된다.”면서 “이번 무대에서는 ‘혈육이 무엇인가’ 하는 한국적 정서를 짙게 그려낼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백씨와 장씨는 20대 초반 연극 무대에 데뷔해 각각 400여편, 230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여든살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고 있어 연극계의 ‘살아 있는 역사’로 통한다. ●“부부로 출연한 작품만 20편” 두 배우가 무대를 지켜온 원동력은 무엇일까. 장씨는 그 힘으로 깜깜한 객석을 꼽았다. 그는 “3시간짜리 공연에서 모든 걸 쏟아내고 커튼콜을 마친 뒤 분장을 지우고 무대로 돌아온다.”면서 “깜깜한 객석엔 아무도 없다. 그때의 처절함, 그런 매력을 다른 어디에서 맛보겠냐.”고 물었다. 백씨는 “60년간 무대에서 살았다. 완벽하게 극중 인물이 돼 나 자신은 사라져 버린 것”이라면서 “평생 연극을 한다는 건 자기 인생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건데 그래도 좋다.”며 웃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18)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18)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

    니체는 젊은 시절에 생을 마감한 자신의 아버지를 ‘생명 그 자체였다기보다 생명을 친절하고 부드럽게 환기시켜 주는 사람’이라고 걸작 ‘이 사람을 보라’에 썼다. 스스로의 삶을 오래 이어가지 못할 만큼 병약한 생을 살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쳐 지나는 삶을 통해 생명의 참 의미를 부드럽게 환기시켜 주었다는 절묘한 표현이다. 그건 변화를 드러내지 않으며 직수굿이 살아가는 늙은 생명체, 이를테면 크고 오래된 나무들에게서 바랄 수 있는 일이지 싶다.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생명의 약동을 아주 천천히, 그래서 더 부드럽게 일깨워 주는 건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사람의 마을에 살아가는 귀한 이유일 게다. ●역사의 흔적으로 남은 거대한 생명 가을까지 내내 짙푸른 녹음을 자랑하고, 겨울 바람 불어오면서 잎을 떨어뜨리면 나무는 잠시 숨을 멈추고 죽은 듯이 보인다. 살아 있는 생명체로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오랜 세월을 지나며 생로병사의 여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늙은 나무의 울퉁불퉁한 줄기는 커다란 바위가 건네주는 무생물의 느낌과 흡사하다. 영하 16도를 넘나들던 혹독한 추위에 적응된 탓인지 반도의 남쪽 부산을 휘감아도는 겨울 바람은 오히려 따스하게 느껴진다. 따뜻한 지방을 골라서 보금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푸조나무를 스쳐가는 겨울 한낮의 바람은 차갑지만 맵지 않다. 삽상하다. 텅빈 가지를 넓게 펼친 푸조나무 곁으로 이어지는 언덕으로 병색이 짙은 마을 노인이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다. 강추위 속에 반짝 나온 햇살을 맞이하기 위해서 언덕 위에 마련된 쉼터를 찾아가는 길이다. 팔순쯤 돼 보이는 노인의 걸음이 그가 살아온 삶의 무게만큼 무겁다. 푸조나무의 텅빈 나뭇가지가 지어낸 가느다란 실 그늘이 노인의 힘겨운 발걸음을 가만가만 따른다. 부산 수영동 좌수영성지 푸조나무의 겨울 한낮의 풍경이다. 옛 이름인 좌수영성지보다는 수영사적공원이라고 더 많이 알려진 이곳은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부산 시민들이 자주 찾는 편안한 공간이다. 그러나 평일 한낮이어서인지,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공원 안에는 해바라기 나온 노인들뿐이다. 좌수영성지는 조선시대 경상도 동쪽 바다를 지킨 경상좌도의 수군절도사가 머무른 좌수영성이 있던 곳으로, 성벽의 흔적과 성문이 남아 있다. 처음 성을 쌓은 때는 알려지지 않았고, 현재의 성곽은 숙종 18년(1692)에 다시 쌓은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으나 여전히 성터를 지키며 살아남은 생명이 있다. 500살 된 천연기념물 제311호의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다. ●남부의 해안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 푸조나무는 중부지방에서는 볼 수 없지만, 남부의 해안지방에서는 느티나무나 팽나무처럼 정자나무로 심어 키우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다. 이름에서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지만, 엄연한 우리 토종 나무다. 바닷바람을 잘 견뎌 바닷가의 방풍림으로도 많이 심어 키운다. 좌수영성지 푸조나무는 그의 나이를 감안할 때, 이 자리에 성을 다시 쌓았던 임진왜란 이후쯤에 심은 나무로 짐작된다. 물론 당시에는 성곽 안팎으로 더 많은 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나무는 제 명을 다해 저절로 스러지기도 했고, 또 어떤 나무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 베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모진 500년 세월의 풍파를 거뜬히 이겨내고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알이 담고 있는 푸조나무는 이제 키가 15m를 훌쩍 넘었다. 수천개의 나뭇가지는 그 펼침이 사방으로 20m가 넘어 보인다. 여느 생명체가 감히 넘보기 힘든 거대한 규모의 이 푸조나무는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지신목이다.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둘로 갈라지며 솟아올라서 마치 두 그루의 나무가 비스듬히 서서 정담을 나누는 듯한 모습이다. “오래된 공원이니, 오래된 나무가 많은 건 당연하죠. 이 푸조나무 말고 언덕 너머에는 천연기념물 곰솔도 하나 더 있어요. 또 천연기념물은 아니지만, 오래된 나무도 아주 많아요. 이 숲에 불어오는 바람이 좋아서, 여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죠.” 큰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는 푸조나무에 한창 눈을 맞추는 사이에 마침 운동하러 나온 이 마을 중년 사내가 짐짓 공원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유서 깊은 마을임을 증거하는 나무 이야기를 특히 강조한다. 그의 이야기처럼 수영사적공원에는 푸조나무 외에도 팽나무, 소나무, 곰솔 등 오래된 나무가 많이 있다. ●바위처럼 웅크리고 새봄을 기약 “하루하루 살기 바쁜 지금 사람들이 옛날 일이나 나무를 중요하게 돌볼 틈이 있겠어요? 제 살기 바쁜데, 어쩔 수 없죠. 나무랄 수도 없고요. 하지만 이만큼 큰 나무는 사람이 보살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자라지요.” 살아 있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겨울나무를 바라보는 중년 사내의 눈길에 담긴 건 생명에 대한 믿음이었다. 수천개의 가지들에 달렸을 수백만장의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리고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는 푸조나무는 그렇게 사람에게 생명의 신뢰를 건넸다. 그의 속살 깊은 곳에서 새봄에 다시 돋아날 새잎을 틔워가는 생명력이 생생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생명 그 자체로서보다는 생명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환기시키는 생명체로서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혹한의 겨울에 사람에게 건네주는 무언의 가르침이다. 글 사진 부산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부산 수영구 수영동 271. 혼잡한 도심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으나 좌수영성지 푸조나무는 부산시청에서 4㎞ 남짓 떨어진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시청 앞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난 연제로를 따라 3.2㎞ 가면 부산지하철 망미역 앞 오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여덟시 방향으로 좌회전하고 곧바로 주유소 뒤편으로 우회전하여 500m만 들어가면 수영사적공원 주차장이 나온다. 갈림길마다 나오는 안내판을 따라 가면 된다.
  • 영화 속 재즈1세대 앙코르 무대

    영화 속 재즈1세대 앙코르 무대

    ‘외롭고 괴로울 때면 난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 난 블루스를 더 잘 부를 수 있게 될 거야’(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 중)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음악에 관한 열정만큼은 여전히 청춘인 대한민국 재즈 1세대를 다뤄 ‘한국판 브에나비스타소셜클럽’으로 화제를 모았던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의 묵직한 감동을 직접 느껴볼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됐다. TV드라마 ‘수사반장’ 주제음악으로 잘 알려진 류복성(드럼·봉고)은 물론, 신관웅(피아노), 김수열(테너 색소폰), 최선배(트럼펫), 이동기(클라리넷), 김준(보컬), 그리고 한국 재즈의 대모인 박성연(보컬)까지 7명의 재즈 장인이 오는 2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2011, 브라보! 재즈 라이프 콘서트’에 함께 선다.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이 이끄는 18인조 오케스트라와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가 선배들의 뜻깊은 무대에 힘을 보탠다. 다큐 영화를 감독했고 이번 공연 연출을 맡은 재즈평론가 남무성은 “한국 재즈의 정수를 보여줄 것”이라고 장담했다. 지난해 12월 28~29일 LIG아트홀에서 열렸던 재즈 1세대들의 합동 공연이 전 좌석 매진을 기록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에도 자신 있다는 얘기다. 특히 이번 공연은 영화의 마지막 콘서트 장면이 시간 제약 때문에 압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에 아쉬움을 느낀 팬들이 “실제 그들의 공연을 보고 싶다.”고 요청해 이뤄졌다. 영화 제작사가 마련한 일종의 ‘애프터서비스’ 성격인 셈. 3만 3000~7만 7000원. (02)6377-1250.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건강 잃으면 모두 잃어” 조달청장의 편지 눈길

    노대래 조달청장이 17일 개청 62년을 맞아 전 직원들에게 건강관리를 당부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지난 14일 영국 출장 중 뇌출혈로 쓰러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40여일 만에 한국으로 이송된 운영지원과 김진곤(40·6급)씨<서울신문 13일자 11면>를 병문안한 소회를 담고 있다. 노 청장은 “할 말을 잃은 팔순 노모는 조그만 쾌유 성의도 고개를 떨군 채 외면했다.”면서 “위문 온 직원들이 위로의 말을 꺼내는 것마저 면구스러웠다.”고 병실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8년 전 이맘 때 부친 뇌출혈로 두달간 드나들던 곳이지만 또다른 착잡함을 느꼈다.”면서 “직장과 가족에 대한 첫째 의무는 건강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⑭ 충남 당진 부곡리 필경사 향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⑭ 충남 당진 부곡리 필경사 향나무

    수십년 만의 찬 바람이라 했다. 사납게 몰아치는 매운 바람은 노인들을 마을 노인정 아랫목으로 한데 모았다. 가을걷이를 무사히 끝낸 충남 당진 송악면 부곡리는 바람이 모질어도 여느 때처럼 평화롭다. 이른 아침부터 노인정에 모인 노인들은 문을 꽁꽁 걸어 닫고 하릴없이 세월을 흘려보낸다. 무심하게 세월이 흘러도 노인들이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단 한번 만난 적 없어도, 이름과 행적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 해방의 염원을 간직하고 이 마을에 들어와 소설 ‘상록수’를 남긴 민족 작가, 심훈이다.부곡리가 고향은 아니지만, 심훈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좌절감을 안고, 1932년 그의 부친이 살고 있던 이 마을에 들어왔다. 오로지 글쓰기에 전념하겠다는 마음으로, 그는 글방으로 쓸 오두막을 지었다. 필경사(筆耕舍)가 그곳이다. ●소설 상록수와 함께 자라난 나무 심훈은 오두막을 짓고 마당 가장자리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가 고른 나무는 향나무였다. 식민지라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조국을 향한 충정과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상징으로 그는 사철 푸른 잎을 간직하는 상록수를 선택했다. 게다가 향이 짙게 배어 나오는 향나무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신성한 나무다. 민족 해방의 기원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알맞춤한 나무였다. 그가 삼간초가 필경사에서 써낸 대표적인 작품은 민족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농촌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소설의 제목은 마당에 심은 나무 이름처럼 ‘상록수’라 했다. 피 끓는 온 마음을 다해 한 자 보태면 나무도 한 잎 두 잎 새 잎을 돋웠고, 하나의 단락이 덧붙여질 때마다 나무도 키를 키웠다. 빽빽한 정성으로 채워지는 원고지만큼 향나무는 도담도담 자랐다. 소설 ‘상록수’는 그로부터 80년 동안 우리 문학사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심훈이 소설 쓰듯 지극정성으로 심고 가꾼 향나무도 그의 작품과 같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와 맞먹는 의미와 무게로 푸르게 살아남았다. ●마을에서 자발적으로 보존한 유적지 필경사 향나무의 나이는 아직 팔순이 채 안 됐다. 그러나 향나무는 뒤쪽으로 거느린 대나무 숲과 앞쪽에 새로 심은 측백나무에 비해 유난스레 기운차다. 하긴 대개의 향나무가 여느 나무보다 기운찬 자태를 지니긴 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려 애쓴 시인 심훈의 눈에 향나무가 먼저 들어왔던 것도 그런 옹골찬 생김새 때문이었으리라. 향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단아하게 돌담으로 화단을 쌓았다. 지금으로서야 나무의 자람을 방해할 만큼이라 할 수 없지만, 앞으로 이 나무가 살아가야 할 긴 세월을 생각하면, 조금 비좁지 싶은 크기의 화단이다. 그래도 깔끔하게 정돈된 탓에 초가 지붕을 스쳐 향나무 줄기 아래로 휘돌아드는 매운 바람이 상쾌하다. 당진군청에서 파견한 공무원이 필경사 옆에 새로 지은 심훈상록수기념관에 상주하며 세심하게 관리하는 덕분이다. 주변 청소는 물론이고, 수시로 찾아오는 관람객들을 안내하고, 기념관에 보존된 선생의 기념물들도 세심하게 돌보고 있다. “그게 아녀. 군에서 필경사를 관리한 건 얼마 되지 않어. 처음엔 심훈 선생 추모제도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추렴해서 시작했지.” 필경사 바로 옆집에 사는 윤석주(85) 노인은 오래된 일이지만 생생하게 기억한다. 1980년대 전까지만 해도 필경사는 아무런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때 인근 송악읍 기지시리에서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며 작가 생활을 하던 백승구씨가 마을을 찾아왔다. 7년 전에 작고한 그는 이곳 출신이 아니지만, 심훈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보존하는 건 당진 군민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게 1981년이었다. 백씨는 그 동안 돌보지 않아 남루해진 필경사를 정비하고 심훈 선생의 기일에 맞춰 추모제를 열었다. 군청의 지원이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고, 흔쾌히 추모제 준비에 나섰다. “내가 여기 들어온 게 65년 전인데, 그때 이미 심훈 선생은 돌아가셨지. 우리 마을에 심훈 선생을 직접 만나본 사람은 없는 셈이야. 하지만 심훈 선생을 빼놓고는 우리 부곡리를 이야기할 수 없지.” ●조국의 해방과 번영을 상징 윤 노인은 이 마을이 심훈 선생의 고향도 아니고 또 그가 이 마을에 살았던 시간이 그리 긴 것도 아니지만, 처음에 추모제를 열 때 자발적으로 나선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성의를 다했다고 강조한다. 군청에서 필경사를 본격적으로 관리하고 추모제를 맡아 진행하게 된 것도 자발적으로 세 차례나 추모제를 치른 뒤부터였다고 한다. “심훈 선생이 심은 그 향나무를 돌본 것도 백승구씨가 들어오고 우리가 추모제를 치르던 그때부터여. 그 전에야 누가 돌보기나 했나, 그냥 나무가 알아서 자란 거지.” 주인 떠난 자리에서 나무는 돌보는 사람 없이 훌쩍 키를 키워, 필경사의 초가지붕 위로 나뭇가지를 드리웠다. 예로부터 향나무는 민중의 염원을 담고 오랜 세월을 자라 우리가 귀하게 여겨왔던 나무다. 심지어 나뭇가지를 땅에 묻고 태평성대가 이뤄지기를 기원하는 매향(埋香) 의식을 지내기까지 했던 나무다. 필경사 마당에서 푸른 민족 향의 상징으로 살아남은 향나무는 그를 심은 사람의 뜻에 따라 잘 자랐다. 조국의 해방과 번영을 기원한 심훈의 염원을 알기라도 하는 듯 나무는 듬직하고 옹골차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나무 줄기 안의 나이테에 고이 새겨진 시인의 손길, 심훈의 문향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 향기 가득 담고 휘도는 바람 한 줄기 따라 대한민국의 2010년이 저물어간다. 글 사진 당진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251의12. 서해안고속도로 송악나들목으로 나가서 고대 부곡산업단지 방면으로 난 38번 국도를 이용한다. 700m 쯤 가서 나오는 부곡사거리에서 좌회전하고 돌자마자 곧바로 오른쪽의 비좁은 다리를 이용해 개울을 건넌다. 작은 다리인 데다 길가에 주차한 차량이 많아 놓치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이어지는 좁다란 마을 길을 따라 1.4㎞ 가면 필경사다. 교행이 안 되는 좁은 길이니 조심해야 한다.
  • [길섶에서] 보고싶은 얼굴/최광숙 논설위원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라야 자식들은 “살아 계셨더라면”하고 목이 콱 메는 후회의 순간들을 맞는다.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함께 못해 허전하다. 2년여 만에 고향에 가니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겨울 찬바람 속에 휑하니 무덤에 누워 계신 모습을 보니 참으로 마음이 아린다. 자식이 많아도 정성이 닿지 않아서인지 어머니 묘에 이상한 잡풀이 나 있어 속도 상했다. 함부로 묘에 손 대면 안 된다고 해 내년 한식에 묘를 손질하기로 했건만 죄송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를 꼭 닮은 팔순의 이모를 뵈니 휴대전화 카메라가 절로 움직인다. “왜 찍냐?”고 물으시기에 여동생 핑계를 댔다. 과거형의 사진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아쉬워 살아 계신 이모의 모습에서 현재형의 어머니를 뵙고 싶었던지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누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동생도 내 마음과 같은지 이모 사진을 보더니만 눈물이 핑돈다. 휴대전화 속에 저장된 이모 사진, 아니 어머니의 얼굴을 가끔 들여다 본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데스크 시각] ‘기빙 플레지’ 한국 상륙을 기다리며/황수정 국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기빙 플레지’ 한국 상륙을 기다리며/황수정 국제부 차장

    지난 1월 미국 연수 중에 아이티 지진 참사를 접했다. 다음날 아침 텔레비전 뉴스에 위로금을 쾌척한 기부자(단체) 명단이 줄줄이 소개됐다. 앵커의 구구한 설명 없이 뉴스 중간에 담백하게 처리된 자막에 우선 눈길이 갔다. ‘인천의 김 아무개’ ‘수원의 박 아무개’ 식의 평범한 시민들 이름이 한참 지나갔다. 그런가 싶더니 그 무리에 쓰윽 묻어 지나가는 익숙한 고유명사들! 월마트, 코카콜라, 맥도널드, 휼렛패커드, 스타벅스…. 그들이 제각각 내놓은 기부액은 줄잡아 50만~70만달러. 세계시장을 먹어치우는 덩치로 치면 푼돈이겠으나, 십시일반 하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눈으로 보면 적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뭉칫돈을 꺼낸 이들 거대기업은 그저 일반 시민들 이름 사이사이에 끼인 채 삽시간에 흘러갔다. 신선했다. 거대기업이든, 거액이든 그네들의 기부 행렬에 ‘특별대접’은 없었다. 곧잘 미국의 침몰이 운위되는 시대다. 그럼에도 간단히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저력은 대체 뭘까. 뼛속 깊이 뿌리내린 기부문화가 그들을 일류 반열에 머물게 하는 강력한 추동이 아닐까, 그때 무릎을 쳤었다. 기부문화의 씨앗이 발아하는 현장은 기실 일상 곳곳에서 목격됐다. 크고 작은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이벤트도 다름 아닌 기부였다. 소풍이나 댄스파티를 앞두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와 내미는 참가 신청서에는 어김없이 기부란이 따로 있다. 부담스러운 액수도 아니다. 넉넉지 못한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한끼 도시락 값으로 5달러쯤만 동봉해도 다음 날 담임교사의 감사 엽서가 되돌아온다. 한해를 접는 이맘때쯤이면 다양한 이름의 불우이웃 돕기 이벤트도 줄을 잇는다. 소박하게 먹거리를 모으는 초등학교의 ‘푸드 드라이브’(Food Drive)는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정해진 기간 등굣길 아이들의 손에 부지런히 들려 가는 이웃돕기 품목은 사실 거창할 게 없었다. 3달러 안팎의 옥수수·콩·과일 캔이나 시리얼, 쿠키, 잼, 밀가루 같은 조촐한 먹거리들이 고작이다. 아이들은 교실 한편에 마련된 큼지막한 바구니에다 용돈으로 준비한 먹거리들을 아침마다 갖다 날랐고, 게시판에 스티커까지 붙여 가며 온정의 온도 높이기 경쟁을 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왁자한 이벤트도, 주변을 의식할 일 또한 아니라는 명제를 아이들은 그렇게 부지불식간 몸으로 익혔다. 올 한해 지구촌을 뜨겁게 달군 캠페인이 있었다. 지난 6월 미국의 대표 부자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주도한 기부서약 캠페인,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 미국의 억만장자 40명이 생전이나 사후에 전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환원키로 약속했다는 소식은 한참 외신란을 장식하며 충격파를 던졌다. 세계 기부역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새삼 한번 상상해 보라. 팔순의 버핏이 “많이 가진 것을 내놓는 건 ‘특권’”이라며 70~80명의 억만장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함께 내놓자.”고 설득하는 그 장면을. 그가 누군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부자 감세혜택을 제발 올해까지만 적용하고 끝내라며, ‘부자 세금 많이 내기’ 운동에 요즘 한창 팔소매를 걷어붙인 ‘외계인’이다. 문득 궁금증이 솟구치는 세밑이다. 게이츠와 버핏의 캠페인은 왜 우리를 건너뛰었을까. 대한민국 갑부들이 유독 ‘기부 바이러스’에 내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간파했음이다. 그렇게 순위 따지기를 좋아하면서도 선진국들처럼 기부 순위를 매기는 작업은 어째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지, 그 또한 물음표를 찍게 되는 이즈음이다. 2011년 새해엔 기빙 플레지의 한국 상륙을 기대해도 될까. 애시당초 접어야 좋을 욕심일까. 야구방망이로 사람을 때리고 ‘맷값’으로 거액의 수표를 던지는, 함량미달의 재벌이 사는 나라에서는? sjh@seoul.co.kr
  • 여든번째 겨울 캔버스, 치유의 색채를 담다

    여든번째 겨울 캔버스, 치유의 색채를 담다

    “늙은 사람 작품 같지 않지요? 몸은 나이 드는데 정신은 오히려 젊어져요. 허허” 강렬한 붉은 색의 400호 대작 그림 앞에서 노() 화백은 호탕하게 웃었다. 작품만 젊은 게 아니라 외모도 젊다. 양복 상의 윗주머니에 주황색 선으로 포인트를 준 검은색 정장에 세련된 디자인의 안경, 손가락에 낀 알 굵은 반지까지 화단의 소문난 멋쟁이다운 차림새다. 전시장 곳곳을 활보하며 작품을 설명하는 모습은 얼마 전에 치렀다는 팔순 잔치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박서보. 한국 모노크롬(단색화) 회화의 선두 주자이자 묘법(描法) 시리즈로 이름 높은 박 화백의 개인전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2007년 경기도미술관에서 근작 80여점을 선보였던 전시회 이래 중국 베이징, 미국 뉴욕 등 해외 개인전과 아트페어 전시를 제외하고 국내 개인전은 3년 만이다. 팔순을 맞아 회고전 성격으로 열리는 전시는 국제갤러리 본관과 신관 전체에 50여점의 작품을 내건 대규모 전시다. 박 화백 특유의 묘법 작업 40년의 변천사에 초점을 맞춰 초기 작품부터 현재까지 시대순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홍익대 서양화과 출신으로 1950년대 국전 등 기존 화단의 가치와 형식을 부정하며 ‘앵포르멜(비정형) 추상주의’를 이끌었던 박 화백은 1967년부터 스스로 ‘손의 여행’이라고 칭한 묘법 회화에 천착했다. 프랑스어로 ‘에크리튀르’(ecriture·쓰기)라고 이름 붙인 이 작업은 초기엔 캔버스에 밝은 회색이나 미색의 물감을 바르고 연필로 그 위에 반복적으로 끊이지 않게 선을 그어서 완성했다. 그러다 1990년대에는 닥종이를 겹겹이 화면에 올린 뒤 막대기나 자를 이용해 표면을 일정한 간격으로 밀어내 요철의 선을 만드는 작업으로 변모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모노 톤 대신 밝고 화려한 색채로 캔버스를 물들이고 있다. 전시 개막에 앞서 지난 23일 만난 박 화백은 “구도와 비움의 자세로 도 닦듯이 그림에 매달려온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림은 생각을 토해내 채우는 마당이 아니라 비워내는 수련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그의 작품들에선 자연과 사물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동양 수묵화의 기본 정신인 깊은 사유가 느껴진다. 무채색의 시대에서 색채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는 수신(修身)을 넘어 치유의 예술을 이야기한다. “몇년 전 일본 후쿠시마를 여행할 때 단풍을 보면서 자연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감탄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색을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데 써야겠다 마음먹었죠.” 빨강, 파랑, 연녹색 등 그가 쓰는 색은 화사하지만 튀거나 가볍지 않고 차분하다. “21세기 예술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흡인지처럼 빨아들여야 해요. 그림을 보면서 불안이 해소되고,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하는 것이 미래의 예술이에요.” 1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요즘도 하루 열두시간씩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일요일에도 쉬는 법이 없다. “평생 노는 걸 모르는 양반”이라는 아내의 타박에 “조금 있으면 영원히 쉴 텐데….” 라고 받아넘길 정도로 일벌레다. 그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는 엄청난 변화의 시기다. 아날로그 세대인 나로선 그 변화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면서도 “아직 갈 길이 멀다.”며 청년 작가 못지않은 창작 의욕을 내비쳤다. 전시는 내년 1월 20일까지 열린다. (02)735-8449. 글 사진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데스크 시각]태광 母子와 정치/최용규 사회부장

    [데스크 시각]태광 母子와 정치/최용규 사회부장

    태광산업 이선애(82) 상무. 태광그룹을 취재하던 2006년 2월, 칼바람 속에 서울 장충동 언덕길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됐다. 여느 재벌가와 마찬가지로 안방마님을 직접 만나 볼 수는 없었지만 손에 쥔 그녀의 컬러사진에는 도도함과 강렬함이 물씬 묻어났다. 팔순을 넘긴 그녀가 장충동 2층 양옥집을 지키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기택이라는 야당 거물 정치인 동생을 둔 덕에 군사정권 시절 호되게 당했다. 틈만 나면 세무조사가 나왔고, 남편 이임용 전 태광 회장은 죽기 전까지 정치 알레르기를 보였다. 문 밖에서건 문 안에서건 자식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기업은 정치와 연결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또 가르쳤다. ‘찍히면 죽는다.’는 본능적 위기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태광이 은행 돈을 거의 안 쓰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했다. 이선애나 이임용인들 태광을 재계 서열 상위에 올려놓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은행에서 돈을 왕창 얻어 기업을 키웠다가 느닷없이 회수라도 하는 날에는 어떠했을까. 엄혹했던 시절, 이임용·이선애 부부는 이런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태광이 ‘베일에 싸인 오너’ ‘은둔의 기업’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런 태광이 또 한번 세찬 풍파를 만났다. 자칫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형국이다. 풍전등화 속에 태광의 대모(大母) 이선애 상무가 버티고 있다.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모친인 이 상무는 말이 상무이지, 이 회장 위세를 능가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태광의 연원을 보면 이선애가 태광의 막후 실력자이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태광의 모체는 1954년 부산 문현동에 세워진 태광산업사이다. 이임용과 중매결혼한 이선애는 부산에서 소규모 직물공장에 손을 댔고, 기업이 커지면서 남편 이임용을 합류시켰다. 일본 유학생 출신인 이임용은 이 전까지만 해도 면사무소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이임용과 오늘의 태광을 일군 창업동지 이기화 전 태광그룹 회장 역시 이선애의 남동생이다. 또 이기택이 있다. 정치의 단맛보다는 쓴맛을 본 이임용과 이선애다. 정치의 정자(字)도 꺼내지 말라는 이들 부부의 철학은 태광의 기업철학이 됐다. 하지만 태광의 탈(脫)정치 전통은 아들 대(代)에 와서 허물어진다. 형의 사망으로 경영권을 쥔 이호진 회장이 섬유기업 태광을 금융과 방송기업으로 재편하면서 금기시했던 정치영역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1조원이 넘는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무기로 정·관계 로비를 통해 기업 확장을 꾀한 의혹을 사고 있다. 정치 쪽으로 눈도 돌리지 말라는 선대의 기업철학이 자식 대에 와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하면서 무너졌다. 처음엔 이호진 회장도 부친의 경영스타일을 따라했다. 언론은 물론 전경련에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청바지 차림으로 현장에 등장해 직원들과 소통하는 소탈한 경영행보를 보였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최고경영자(CEO)가 안 됐으면 예술가가 됐을 것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경영권을 둘러싼 어머니 이선애 상무와의 갈등이 파국을 낳았다는 일각의 견해도 있으나 사실로 확인된 바는 없다. 현재로서는 검찰의 수사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전방위 수사라는 게 맞다. 그렇지만 세법 상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단순히 오너가의 지분 편법 증여 차원은 아닌 것 같다. 만약 이 것이 사실이라면 세법이 아닌 다른 법률 위반 혐의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불법 비자금 조성과 정·관계 로비 혐의가 그중 하나다. 태광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정치가 기업경영에 개입된 것으로 확인될 경우 태광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세무조사는 막아냈지만 심장을 파고드는 검찰의 칼끝을 피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ykchoi@seoul.co.kr
  • “지적장애우들과 기도… 욕심없이 살죠”

    “지적장애우들과 기도… 욕심없이 살죠”

    “우리는 최고다!” “최~고~다~아~”지난 4일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우리마을’. 말 그대로 맑은 공기와 따스한 가을 햇살이 머무는 곳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50여명의 장애우들이 식탁에 모여 앉았다. 숟가락을 들기 직전이었다. 김성수(시몬·80) 대한성공회 주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우리는 최고다.”라고 먼저 외친다. 그러자 장애우(여기서는 다들 친구로 부른다)들도 큰소리로 따라했다. 이어 잠시 기도를 한다. 말이 어눌한 친구들도 더러 있었지만, 어쩌면 반복됐던 말인지도 모르지만,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며 친구와 우정을 같이했다. ‘우리마을’은 지적장애인 직업재활시설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서 10년 전에 설립했다. 김 주교는 성공회대 총장을 그만두고 1년 전 부인 후리다(78) 여사와 함께 이곳으로 낙향했다. 현재 ‘우리마을 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 또 있다. ‘콩나물공장장’이다. ‘우리마을’의 주 수입원인 콩나물 공장 역시 장애우들이 직접 가꾸고 다듬는다. 김 주교는 공장에 들러 “우리는 최고”라는 말로 수시로 격려해준다. 최근에는 삼성 그룹 계열사에 납품할 정도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순수 국산콩을 사용하며 2005년 친환경농산물 인증까지 받은 ‘우리마을’의 효자상품이다. “저 친구들 보세요, 욕심도 없어요. 순수하고 영혼이 맑은 친구들이지요. 저런 친구들과 늘 함께 지내다 보니 젊어지는 기분입니다.” 이곳 친구들의 평균 나이는 37세. 팔순의 김 주교는 나이도 잊은 듯 마냥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마을’ 친구들은 콩나물과 버섯 재배 등 무공해 자연농법과 전기부품 조립 등 직업교육을 통해 자립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전문가를 초청해 제빵기술도 배운다. 아니 즐거울 수가 없을 터. 한 달에 20만원에서 많게는 70만원의 월급을 받는 날이면 ‘기분 짱’이다. 스스로 값진 보람이다. 훈훈한 화젯거리도 있다. 최대한 짧게 말해야 간신히 알아듣는 유아 수준의 지적장애인 이혜련(34)씨는 얼마 전 첫 월급 25만원을 받아 홀어머니한테 속옷을 선물했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바보’라고 손가락질만 받고 살았던 이씨가 난생 처음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효도를 했던 것. 선물을 받던 날 이씨의 어머니와 이웃이 함께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이런 얘기를 듣고 다들 감동한다고 김 주교는 설명한다. “우리마을에는 10명 중 4명꼴로 아직도 신발끈을 못 매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그런 친구들에게 신발끈을 매주고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비오는 날 그냥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진정한 친구라는 말도 있지요. 장애우들에겐 같이 일할 자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김 주교가 ‘우리마을’ 친구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또 있다. 정상인보다 의지나 의식이 약하기 때문에 욕심 없이 산다는 것이다. 삶에서 ‘욕심 없이 사는 것’ 하나만 배워도 소중한 것 아니냐고 강조한다. 마음을 열고 이웃을 섬기고, 장애우 빈민 등 약자들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김 주교는 최근 제12회 ‘길상면민의 날’ 행사로 열린 마을운동회 때 소중한 상을 받았다. 길상면민이 주는 ‘제1회 길상인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 면장이나 군수가 아닌 이웃 주민들이 주는 상이기에 기꺼이 받았다. 낙향해 아름답게 살아가는 김 주교에 대한 고운 시선이 아닐까 싶다. “콩나물을 많이 팔아 돈을 벌게 되면 장애우들에게 일자리를 많이 줄 수 있는 시설을 늘렸으면 합니다. (잠시 창밖을 보다가) 장애우는 대부분 치아가 약합니다. 복지국가라면 ‘우리마을’ 같은 시설에 은퇴한 간호사라도 파견해 줬으면 하는 게 바람입니다.” ‘우리마을’의 또 하나의 꿈은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같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김 주교는 나직이 말했다. 강화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SKT, 약 8000명 소외이웃 나눔 실천…추석 봉사활동

    SKT, 약 8000명 소외이웃 나눔 실천…추석 봉사활동

    [서울신문NTN 이규하 기자] SK텔레콤은 추석의 따스함 전할 추석맞이 구성원 자원봉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19일 밝혔다.이번 자원봉사 활동은 약 8000명의 소외이웃을 찾아 나눔의 정을 실천하는 것으로 추석을 맞이해 1000명의 구성원이 활동을 펼치고 있다.SK텔레콤 지역본부별로 독거노인, 복지관 소속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추석 선물 및 명절 음식 나누기, 송편 만들기, 경로잔치 등 다양하게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SK텔레콤 서부네트워크본부 임직원 자원봉사자들은 지난 17일 광주 하남종합사회복지관과 함께 추석 명절 음식을 만들고 이를 취약계층 약 350여 가정에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진행했다.이날 봉사활동으로 서부네트워크본부 임직원은 전주 인보노인복지관을 찾았고 서부마케팅본부 자원봉사자들은 익산부송복지관, 대구마케팅본부는 대구 남산기독종합복지관과 공동으로 봉사활동을 진행했다.서울의 경우 이날 SK텔레콤 CR전략실 구성원이 시립서대문노인복지관 경로당과 독거노인 등을 방문해 명절에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영상통화, 영상메시지를 진행했다.특히 오는 30일 구로노인복지관과 공동으로 SK텔레콤 수도권마케팅본부가 관내 노인 300여 명을 초청해 ‘2010 SK텔레콤과 함께하는 정성 가득 행복나눔 칠순·팔순 잔치’를 개최할 예정이다.SK텔레콤 중부마케팅본부 자원봉사자들은 오는 21일 청주 혜능보육원을 찾아 어린이들에게 예절교육 및 물품 증정행사를 가질 계획이다.박용주 SK텔레콤 CSR 실장은 “가족의 따뜻한 정이 그리운 추석 명절을 맞아 이를 느끼기 힘든 지역사회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SK텔레콤 본부별로 자원봉사팀 특성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이규하 기자 judi@seoulntn.com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1) 경기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1) 경기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태풍이 사납게 불어닥쳤다. 바람이 지나가자 하늘이 파랗게 드러났다. 티끌 먼지까지 모두 휩쓸어간 때문이다. 큰 나무로 다가서는 길 위로 여름내 비바람 맞고 늦여름 햇살을 받은 풀들이 무릎 위까지 웃자랐다. 비탈 길을 오르는 발길에 여린 풀들이 차인다. 큰 나무 아래 오래된 집 한 채가 있다. 대문 앞 마당에서 팔순을 내다보는 노파가 참깨를 턴다. 영감님을 떠나보낸 지 20년째 홀로다. “나무가 사람 손을 타면서 눈에 띄게 고와졌어. 옛날에는 장정들도 가까이 가지 않던 나무였어. 생김새도 음산했지. 줄기에 구멍이 큼지막하게 났잖아. 그 안에 천년 된 구렁이가 산다고 했거든.” ●나무 앞 오래된 집의 노파 더듬더듬 노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2004년이야. 고추 모종을 심다가 나무를 바라봤는데, 꽃이 활짝 피어난 거야. 오십 년째 여기 살면서 저 나무에 꽃이 피는 건 처음 봤어. 하도 신기해서 동네의 구십 된 노인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양반도 처음이래. 고목에 꽃이 피었으니, 좋은 일이 있을 거라 했지. 그러곤 2006년에 한번 더 피었는데, 올해는 안 폈어.”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에 지정된 것이 2006년이다. 이전까지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나무를 찾아내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 지정을 처음 건의한 때가 2004년이었다.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해서 마을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좋아질 일은 없다. 마을의 자랑거리이기야 하겠지만, 천연기념물 관리 규정에 의한 제약이 뒤따르는 까닭으로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귀찮아하는 편이다. 이 때문에 이 나무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뛰어다닌 게 바로 ‘나’라는 이야기를 밝히지 않았다. 나무의 신비로운 개화 이야기를 듣고는 못내 참지 못하고, 내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노파는 가볍게 웃으며, ‘그까짓 건 뭣하러 했어. 이제 와서 취소할 수야 없을 테니, 앞으로 관리나 잘했으면 좋겠네.’ 하고 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물푸레나무 이 나무를 찾아내기 전까지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천연기념물 제286호인 경기 파주 무건리 물푸레나무가 우리나라에서 나이나 규모면에서 가장 큰 물푸레나무였다. 150살에 키 15m의 무척 아름다운 나무다. 다른 종류의 나무에 비하면 나이나 키가 턱없이 작다. 관련 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목질이 단단한 물푸레나무는 쓰임새가 많은 까닭에 제대로 자라기 전에 베어내 쓴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크게 자라지 못하는 이유다. 아무리 쓰임새가 요긴했다 해도 나무를 베어내기만 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어디엔가 살아있는 물푸레나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나라 안 곳곳의 물푸레나무를 찾아다니던 중에 이곳 경기 화성 서신면 전곡리 웅지마을까지 찾아오게 됐다. 그리고 마을 뒷동산에서 한 그루의 커다란 물푸레나무를 찾아냈다. 그때가 2003년이었다. 우선 키가 무건리 나무보다 훨씬 큰 20m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도 한눈에 무건리 나무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돼 보였다. 300 살은 넘어 보이는 이 나무는 나중에 문화재청의 정밀 조사 끝에 350살로 결론내려졌다. 나무를 찾아내고 기뻤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무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서 동제와 기후제를 올리던 당산나무였다고 했지만, 지금은 나무에 제를 올릴 사람이 없다. 나무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마을이 죄다 흩어진 상태다. 나무 바로 아래에는 예의 노파가 사는 살림집 한 채만 덩그마니 놓여 있고, 그 바로 아래에는 공장이 들어와 있었다. 당산나무였을 때의 영화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나무 주위로는 키 작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서 나무 가까이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돌보는 이 없이 버려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나무는 언제라도 사람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조급함이 일었다. 어떻게든 나무를 보호해야 하겠다는 마음에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를 두드렸다. 그때가 2004년이었다. 나무도 그걸 알았던 것일까. 마을의 구순 된 노인도 한번 보지 못했던 꽃을 그해에 처음 피웠다. 그로부터 3년에 걸쳐 문화재청 전문가들이 이 나무를 정밀하게 조사했다. 고목에서 꽃이 피었다고 신기해했던 노인도 나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6년 4월에 나무는 드디어 나라에서 인정하는 최고의 지위인 천연기념물 제470호로 지정됐다. 생식능력을 상실할 만큼 오래 살아온 나무는 새로 태어나는 기쁨을 자축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그해 5월 다시 꽃을 피웠다.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말 없이 살아가는 나무이지만, 필경 나무도 살아있는 생명체인 이상 사람과 끊임없이 느낌을 나누며 살아간다. 다만 그의 표정이나 그의 온몸에서 배어나오는 식물성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에만 익숙한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햇살 따가운 여름에 더 싱그러운 물푸레나무. 목질이 단단한 물푸레나무는 웬만한 태풍쯤은 너끈히 이겨낸다. 지난 태풍 정도는 물푸레나무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못했다. 나무 주변에 무성하게 돋아난 이름 모를 풀과 관목들이 성가실 뿐이다. 나무를 더 잘 보호하고 오래도록 그가 들려줄 생명 이야기를 귀에 담아내는 건 그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전곡리 물푸레나무는 찾아가는 길이 비교적 까다롭다. 서해안고속도로 비봉나들목으로 나가 제부도로 이어지는 지방도 306호선을 타고 송산면 소재지까지 간다. 지방도 309호선으로 갈아타면 곧 나오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마을 길을 타고 칠곡리에 들어선다. 이 길을 따라 3㎞ 남짓 가면 오른쪽으로 주유소가 나오는데, 주유소 바로 앞에서 좌회전하여 마을 길로 들어서야 한다. 마을 길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난 작은 길의 끝에 나무가 있다. ●이번 호부터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가 매주 1회 독자를 찾아갑니다. 고씨는 중앙 일간지 기자를 거쳐 충남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에서 오랜 기간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나무 스페셜리스트’입니다. 앞으로 전국의 ‘큰 나무’를 찾아 그 안에 담겨 있는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와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우러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새벽마다 공원 출근하는 구청장님

    새벽마다 공원 출근하는 구청장님

    “노인정에 바둑판 좀 놓아 주세요.” “커피 자동판매기가 멈췄으니 차라리 철거해 주세요.” “전경(전투경찰) 부대 앞 공터에 운동기구 좀 설치해주세요.” 8일 오전 6시30분. 우이령길과 아카데미하우스~북한산 등산로에서 주민들은 박겸수 강북구청장을 붙들고 이렇게 한마디씩 건의했다. 박 구청장은 “담당 부서들에 전달해 시행하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그는 이날 3㎞를 걸었다. 박 구청장은 취임 이후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매일 아침 6~7시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으로 출근(?)한다. 민원인이 구청 집무실로 찾아와 노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구시대적인 태도라는 생각이다. 혹시라도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하고 싶던 말도 못하고 돌아서는 일이 비일비재한 탓도 있다. 그는 “밖에서 만나면 그들은 한결 마음을 풀고 할 말 못할 말 후련하게 털어놓는다.”고 했다. 심하다 싶을 만큼 시시콜콜한 민원도 많지만 넋두리처럼 풀어 놓는 얘기를 듣노라면 반드시 리콜 서비스를 해줘야겠다는 책임을 느낀다는 이야기다. 또 일일이 메모했다가 해당 과장을 불러 검토해 시정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주민 김중배(인수동)씨는 “처음엔 한 일주일 하고 그만두겠지 생각했는데 꾸준히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내심 놀랐다.”면서 “일부러 구청을 찾아가지 않는 한 구청장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얘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고 반겼다. 박 구청장은 “사람과 만나는 데 격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이천, 삼각산 등산로, 학교 운동장, 배드민턴장, 축구장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특히 요일을 정해 주민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주민과 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는 “주인으로 섬겨야 할 주민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민하는지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어 좋다.”면서 “나무가 쓰러졌는데 세워 달라는 얘기를 안에만 있으면 들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최근 한 달에 걸친 현장 건의문엔 “임대아파트 가구주가 사망하면 나가야 하는데 계속 살게 해 달라”(7월30일), “순국선열묘역 안내판 옆 화장실 위치를 변경해 달라”(8월9일), “빨래골 공원 앞 계단을 없애고 도로를 만들어 달라”(8월13일), “집 근처에 팔순 어르신이 홀로 살고 있는데 도와 달라”(8월23일)는 등 서민들의 애환이 오롯이 녹아 있다. 박 구청장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나를 찾아오는 주민이 있기 때문이다.”면서 “이왕이면 그들의 목소리로 행정을 이끌어 가는 강북구를 만들고 싶다.”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글 사진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국가 이미지 올라가야 세계적 인물 탄생”

    “국가 이미지 올라가야 세계적 인물 탄생”

    “한국이 어디 있느냐고, 남태평양의 어떤 섬이냐고 할 때는 기가 찹니다. 국가 이미지가 올라가지 않으면 세계적인 인물이 탄생하기 어렵습니다.” 위대한 어머니이자 세계적 석학인 전혜성(81) 박사가 신간 ‘가치있게 나이 드는 법’(중앙북스 펴냄) 출간에 맞춰 7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팔순 넘은 나이에도 현역 활동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며 공부와 연구, 봉사를 멈추지 않는 전 박사는 6명의 자녀가 모두 미국의 명문대를 졸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큰아들 고경주씨는 미국 보건부 차관보로, 셋째아들 고홍주씨는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부 법률 고문으로 인사 청문회를 통과해서 인준됐다. 전 박사는 “미국에서 한국의 문화적 특성이 인정받기를 고대하면서 수십 년 동안 한길을 걸어온 비교문화학자로서 아이들이 미국 사회에서 든든한 뿌리를 내린 것은 학수고대하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194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30여명의 대가족을 꾸렸지만, 전 박사는 여든 살이 되던 지난해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있는 비영리 노인 복지시설인 휘트니 센터로 이주했다. 어머니를 모시겠다며 집수리까지 한 딸의 만류를 뿌리치고 휘트니 센터로 옮긴 까닭은 “나이가 들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심이고 삶을 간소화하는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휘트니 센터에서도 전 박사는 여유롭게 휴식만 취하지는 못했다. 휘트니 센터 내 살고 있는 아파트를 한국 가구와 한지, 비단, 병풍, 반닫이로 꾸며 한국문화관으로 만들었다. 한국 문화를 알리는 강좌를 개설했으며 성신여대와 협력해 한복을 소개하는 패션쇼도 열었다. 노인 복지 시설에서도 한국 문화를 알리려고 바쁘게 사는 전 박사처럼 휘트니 센터에 사는 노인들도 새로운 것을 배우며 사회에 도움을 주려고 애쓴다. 전직 정치학 교수는 환경을 위해 깡통을 줍고, 전 박사의 친구 캐서린은 인형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었다. 뜨개질 모임에서는 담요나 모자를 떠서 3000여개를 기증했다. ●美 노인복지시설서 한국문화 전도사로 전 박사는 “가치 있는 삶은 장례식에서 관을 닫았을 때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라며 “노인들의 지혜를 재활용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계속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지금 당장 죽음을 맞는다 해도 크게 아쉽지 않다는 전 박사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이 하던 일을 하며 지내기를 희망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그는 1989년 세상을 떠난 남편 고광림 교수의 비문도 미국 사람들의 비문 경향을 조사하고 연구한 다음 태극 문양을 새겨서 완성했다. 전 박사는 건강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가치 있는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강조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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