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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고령 운전/최광숙 논설위원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Driving Miss Daisy)는 주인공 데이지(제시카 탠디 분)가 70세가 넘는 고령에도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에 아들은 사람 좋은 흑인 운전기사인 호크(모건 프리먼 분)를 고용해 어머니를 모시게 한다. 그러나 인종차별이 심했던 남부지방 출신인 데이지는 흑인 운전기사를 무시하고 냉대하다 못해 내쫓으려고 갖은 애를 쓰지만 결국 진실한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데이지처럼 부잣집 할머니야 운전기사를 고용하면 되지만 현실 속 노인들의 교통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평생을 내 손으로 직접 운전하면서 살다가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운전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생활 편의를 위해, 혹은 생업을 위해 고령임에도 여전히 운전대를 놓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필자의 외삼촌만 해도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여전히 운전을 한다. 가까운 거리의 시내 운전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2~3시간 이상의 장거리 여행도 거뜬히 다닌다. 체력도, 판단력도 자신 있어 하는 외삼촌은 그래도 “운전사고의 위험성 때문에 80세가 넘으면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최근 서울 중구 신라호텔의 출입구 회전문을 들이받아 4명의 호텔직원과 투숙객을 다치게 한 택시운전기사 홍모씨도 82세의 고령 운전자였다.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65세 이상의 고령 운전자들이 늘면서 이들의 교통사고 사망도 2011년 31명에서 2012년 43명, 2013년 51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올 들어 1~2월에만 16명이 숨졌다. 서울시내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가 해마다 줄어드는 현상과는 정반대다. 경찰은 이에 경로당· 노인복지관 등을 찾아 교통안전 교육을 강화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고령 운전자임을 표시하는 ‘실버마크’를 자체 제작해 차량에 붙이도록 할 계획이다. 국토부와 서울시 등 관련기관과의 협의를 거쳐 일정 연령이 되면 운전 자격 여부를 심사하는 등 관련법 개정도 추진할 예정이다. 일본은 이미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가 늘면서 70세 이상의 운전자는 면허증 갱신 시 강의를 듣거나 인지 지능 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2008년부터 면허를 반납하는 고령 운전자들에게 대중교통비를 대폭 깎아주는 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80세가 되면 운전면허가 자동으로 말소되며, 갱신하려면 2년마다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노인들의 이동권과 행복 추구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안전이다. 요즘 규제개혁이 대세이긴 하나 고령 운전자들에 대한 적절한 규제는 필요할 것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열린세상] 벼락 맞을 신입사원 모집공고/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벼락 맞을 신입사원 모집공고/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소치 동계올림픽이 한창일 때, 팔순 노모를 모시고 식사를 했다. 피겨를 잘 모르는 노모가, 김연아가 훨씬 잘하는 것 같은 데 왜 이상한 선수가 금메달을 따느냐며, 노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일정(일제강점기) 때 소학교 운동회에서도 꼭 왜놈들이 이기도록 해놓고 경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일정 때나 자행되던 그런 잘못된 일이 대명천지에 아직도 일어나느냐며 혀끝을 찼다. 개강 준비로 한창 바쁜 삼월 초, 졸업한 제자가 찾아왔다. 어깨가 축 처지고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제자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취직 시험에 떨어졌다고 했다. 왜 떨어졌는지 이유라도 알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텐데, 도통 떨어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제자의 취업추천서를 써 주었기에 제자의 능력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학점도 매우 좋고, 토익 점수와 한국어 능력 점수, 한자 능력 점수 등도 거의 만점에 가깝다. 그 외 각종 자격증을 수도 없이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다. 재학 중에는 활발하게 봉사 활동도 했다. 또 사교성도 좋고 예의도 바르며 품행도 흠잡을 데가 없는 학생이다. 그래서 나도 제자가 자신이 가고 싶은 직장에 꼭 취직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청년실업 대란이라더니, 과연 취업이 어렵긴 어려운 모양이다. 제자보다 실력이 출중한 인재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혹시나 제자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공정한 선발 과정으로 인해 취직이 되지 않은 것이라면,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때의 소학교 운동회처럼 미리 우승자를 정해놓고 나머지는 들러리를 세우는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아버지가 간부로 있는 회사에 자식이 부정한 방법으로 취업하는 경우나, 권력을 동원해 뒷문으로 공공 기관에 입사하는 경우를 참으로 많이 접한다. 만약 제자가 그로 인한 희생자라면 한국 사회의 미래는 전혀 없다. 소치 올림픽에서 피겨 부문 금메달을 딴 러시아 선수(이름도 모른다)야말로 앞으로 피겨 하는 것이 고문일 것이다. 분에 넘치는 금메달을 땄으니 어떻게 다음 대회에 나올 수 있겠는가. 실력을 하루아침에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마도 전전긍긍하다가 일찌감치 은퇴하지 않을까. 결국 소치 올림픽에서 편파 판정을 한 심판들은 러시아 선수에게 금메달을 준 것이 아니라 독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연아 선수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선수 스스로의 피나는 훈련과 선수의 재능을 알아본 지도자의 선견지명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내 제자가 훗날 김연아 선수만큼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활동하는 영역에서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은가. 부당한 방법으로 신입 사원을 뽑는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뽑힌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람을 뽑은 기업이나 회사 또한 그 참혹한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길게 볼 때, 그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도태될 것이다. ‘소치’ 올림픽이 ‘수치’ 올림픽이라고 조롱받는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모 대기업에서 신입사원 채용과 관련해 대학총장추천제를 실시하려다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대학을 서열화해 대학별로, 또 지역별로 추천 인원을 할당하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그런 황당한 발상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압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황당함에 기초해, 벼락 맞을 신입사원 모집공고를 내 보자. 부모 연봉이 상류 계층의 기준에 부합할 것. 부모가 고위 관직에 있으면 가산점을 듬뿍 줌. 특정 대학 이외에는 일절 서류를 내지 말 것. 남성은 환영. 여성은 키가 170cm 이상이고 늘씬할 것, 따위로. 김연아 선수의 결과에 대해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가 공분하고 있을 때, 한국 사회는 도처에서 김연아 선수 같은 또 다른 희생자를 양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야말로 제대로 된 사회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공정한 경쟁이 행해지고, 그 결과에 대한 예측이 가능할 때 그 사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 김동리의 그녀 꽁꽁 숨겨왔던 사랑 털어놓다

    김동리의 그녀 꽁꽁 숨겨왔던 사랑 털어놓다

    서영은(70) 작가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꼬리표는 ‘김동리의 여인’이다. 서른 살 연상의 유부남이었던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아내로 살아온 생에 대해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14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에서다. 스탕달의 묘비명처럼 ‘살고 쓰고 사랑했던’ 이야기이자 하성란 작가의 말을 빌리면 “선생이 그토록 하지 않았던” 이야기다.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애사를 그가 직접 소설 속으로 들여보낸 까닭은 뭘까. 4일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내가 살아낸 삶 안에 문학을 통해 찾아온 구도의 과정이 다 담겨 있는데, 이걸 놔두고 계속 다른 소재로 글을 써 온 게 성에 차지 않았다”고 이유를 밝혔다. 소설은 호순이 서른 살 연상의 박 선생의 집으로 들어가 살면서부터 시작된다. 박 선생의 아내인 방 선생이 숨지자 미국에 사는 호순의 팔순 노모가 두 사람의 등을 떠밀면서 이뤄진 결혼이다. 하지만 결혼 직후 호순 앞에 애틋했던 연인은 사라지고, 소유욕 강하고 의심 많은 노인이 동그마니 자리해 있다. ‘그녀는 자기가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사람이 여러 겹의 육중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오싹 소름이 끼치도록 낯설었다.(중략) 그녀 앞에 나타난 그는 그녀의 연인도, 얼마 전 절에서 식을 올린 나이 든 신랑도 아니었다. 그는 거북처럼 오랜 동안 자기 집을 무겁게 짊어진 한 노인이었다. 그 집의 모든 것, 소파·가구들, 벽의 그림들, 도자기들, 전화기 하다 못해 탁자 위의 파리채까지도 그가 짊어진 집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를 만나러 오면서 가슴이 뛰었다는 사실이 스스로 무안스러워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21~22쪽) 이야기의 전개와 인물의 대화 등은 모두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작품과 철저히 거리감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고 강조했다. “제가 직접 살아낸 이야기였던지라 제 자신에 대한 연민 또는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배제한 채 그 정황으로 깊이 있게 다가가려 했어요. 사적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삶의 진실,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흘러간 시간을 회상할 때면 아프고 고통스러워 몇 차례나 덮어버리려 했다고 했다. 하지만 담금질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동안 ‘객관화’를 이루면서 문장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다. 지나간 삶에 담담해지기까지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면서도 그는 고인을 회고하며 말을 잇는 중간 중간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에는 설렘, 그리움으로 찬란하던 시절을 지나 스러지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안팎으로 고통과 슬픔에 사무친 아픔, 도전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걸 넘어서게 해준 게 김동리 선생이었죠. 그분은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내 안에서 솟아나는 사랑에 대한 도전, 밖으로부터의 도전으로 주저앉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그럴 때마다 상처에서 피가 줄줄 나는 경험을 많이 했지만 그러면서 깨달았죠. ‘꽃은 식물의 상처가 만든 아름다움’이라고요. 서로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입고 사랑하며 순화되는 과정이 우리가 삶을 통해 마지막에 움켜쥐게 되는 인생의 이슬이 아닐까요.”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끝난 이번 소설을 2, 3권으로 이어내겠다는 작가는 “아픈 눈만 버텨준다면 꽃이 져서 열매가 되는 과정, 열매가 썩어 밀알로 돌아가는 과정 등 꽃의 순환으로 상징되는 삶을 구도의 시작과 끝으로 마무리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쫄깃한 오징어·눈 덮인 산촌… 울릉도의 먹거리와 볼거리

    쫄깃한 오징어·눈 덮인 산촌… 울릉도의 먹거리와 볼거리

    경북 포항에서 동북쪽으로 217㎞ 떨어진, 망망한 동해 한가운데에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로 큰 섬이 있다. 부지깽이, 명이 등 풍부한 나물과 질감 좋은 오징어, 청정해역 위로 솟아오른 기암괴석까지, 볼거리와 먹거리가 즐비하다. 다녀오면 “정말 좋더라”는 감탄이 나오지만, 들어가려면 세차게 굽이치는 파도 탓에 지독한 뱃멀미를 견뎌내야 하는 바람에 선뜻 떠나기가 쉽지 않다. 울릉도 곳곳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시간, 20일부터 24일까지 매일 저녁 9시 30분 EBS 한국기행에서 준비했다. 20일 1부 ‘울릉섬에 어화가 둥둥’에서는 울릉도를 대표하는 저동을 조명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오징어 어판장이 있는 저동은 정오 무렵이면 출항을 준비하는 어선들의 엔진소리로 소란해진다. 이곳에서 출항하는 오징어 배는 하루 60여척. 해가 지면 이 어선들이 켜는 집어등이 바다를 수놓는다. 한때 오징어 전성기에는 수백 척이 한데 집어등을 켜면 마치 밤하늘 은하수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모습은 요즘도 울릉도 사람들에게 ‘저동어화’라고 불리면서 울릉8경 중 하나로 꼽힌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오징어잡이에 나선 어부들의 밤은 고단하다. 낚시로 건지고 내장을 제거한 뒤 심층수로 씻어 건조해 상품으로 만들기까지 오징어를 잡으며 살아가는 울릉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21일 2부 ‘겨울날의 산촌 풍경’은 설국(雪國)으로 변한 울릉도 산속 마을을 찾았다. 적설량 2m를 기록하기로 하는 울릉도의 겨울, 온통 흰색으로 변한 마을은 아름답지만 마을 사람들은 고달프다. 울릉도는 언덕배기가 많은 터라 성인봉 자락 분지인 나리마을은 눈이 오면 길이 끊겨 섬 속의 섬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산이 좋아서 선장 일을 접고 산골에 들어온 문대곤 할아버지, 다섯 마리 소를 한 식구처럼 여기고 사는 김득겸 할아버지, 이들의 황혼을 담았다. 22일 3부 ‘겨울 바다의 선물’에서는 울릉도 해녀 홍복신·우화수씨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옥빛 바다가 주는 선물과 삶의 행복을 이야기한다. 4부 ‘길 위의 사랑’(23일)은 20년 동안 트럭 행상 일을 하는 홍수자씨의 소소한 일상에서 울릉도 사람들의 소박함을 풀어낸다. 마지막 5부 ‘성인봉이 품은 것은’(24일)을 통해 울릉도가 간직한 자연의 혜택을 알아본다. 성인봉 산자락에서 태어나 팔순 인생을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김두경 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에서 행복의 소중한 의미를 헤아려본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여전히 패배한 편에 여전히 빈손이지만 팔순 시인은 말한다…그래도 행복하다고

    여전히 패배한 편에 여전히 빈손이지만 팔순 시인은 말한다…그래도 행복하다고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평생 쓰러진 것들을 위무했던 시인은 팔순에 이르러서도 낮게 엎드린 사람들의 등을 쓸어준다. 6년 만에 낸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에서 신경림(79) 시인은 여전히 빈손으로도, 패배한 편에 서서도 행복한 삶이었노라고 노래한다. 기교 하나 없는 서정적인 시어들에 59년 시력(詩歷)의 깊이와 무게가 담담하게 실려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 때로는 그 꿈이 허황하게도 내 지난날에 대한 재구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시인의 꿈 목록에 가장 먼저 올라 있는 이들은 가족이다. 시에서 그는 치매로 아들도 못 알아보던 할머니, 중풍으로 다리를 절던 아버지, 일찍 사별한 아내 등 이제는 맨살을 부비지 못하는 그리운 얼굴들을 불러 모은다. ‘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지독한 가난의 기억에 진저리 치면서도 시인은 시곗바늘을 자꾸만 그 시절로 돌린다. 지금도 경기 안양시 비산동 달동네에,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에, 아버지와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내가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움이 꿈과 현실의 경계마저 지우는 셈이다. “서러운 행복과 애잔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시집”이라는 박성우 시인의 추천사가 더없이 들어맞는 시편들이다. ‘통금에 쫓겨 헐레벌떡 돌아오면 늦도록 기다리다/문을 따주던 아버지의 앙상한 손이 싫다./중풍으로 저는 다리가 싫고/죽은 아내의 체취가 밴 달빛이 싫다./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어쩌다 그리워서 찾아가는/어쩌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헤어나도 언젠가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나의 마흔이 싫다.’(나의 마흔, 봄) 고 민병산 선생이 인사동 카페에 남긴 글씨 한 폭은 위로와 타박을 동시에 안기며 시인의 평생을 곱씹어 보게 한다. ‘歲月靑松老/그만하면 꽤 버텼다고?/歲月靑松老/이제 뭘 더 바라느냐고?/세상에 만 예순해를 살다 간 그의 글씨 한폭이/아니, 삐딱하니 모자를 쓴 그가/그뒤로도 스무해나 더 살고 있는 나를/위로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면서 걸려 있다/바보로 사는 게 더 어려웠다는 걸/아직도 모르겠느냐면서.’(세월청송로) 어느덧 ‘황홀한 윤무에 끼여 빙빙 돌아갈 날’(윤무)을 넘겨다보는 황혼에 이른 시인. 눈은 흐려지고 귀는 멀어 가지만 순리를 순정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난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다시 느티나무가)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화천산천어축제 ‘얼음낚시’

    [주말 인사이드] 화천산천어축제 ‘얼음낚시’

    “한 뼘쯤 뚫어 놓은 얼음구멍 속에 전혀 딴판인 세상이 숨어 있습니다.” 17일 강원 화천군 산천어축제장을 찾은 송모(49·경기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씨는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이렇게 말했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얼음낚시의 묘미를 맛보려는 강태공들이 호수로, 강으로 몰려든다. 북극의 찬 공기가 한반도 상공까지 넘어오며 살을 에는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고 있지만 완전무장한 낚시꾼들은 끝없이 작은 얼음구멍을 찾는다. 아장아장 막 걸음마를 뗀 아이부터 팔순을 넘긴 어르신까지 얼음낚시 삼매경에 푹 빠져든다. 강원도와 경기 중·북부지역 호수와 강에는 주말마다 하루 수백명, 많게는 15만명까지 인파가 북적인다. 얼음낚시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것은 겨울을 상품화한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빙어, 산천어, 송어 축제를 열어 유혹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은 화천 산천어축제의 방문객은 120만~130만명에 이른다. 강원 인제와 화천, 평창, 홍천, 철원은 물론 경기 가평 등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과 호수를 낀 전국 곳곳의 물고기 잡이 축제까지 포함하면 한겨울 1000만명 이상이 얼음낚시를 즐길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얼음낚시가 인구 5명 가운데 한 명꼴로 즐기는 겨울 국민 레포츠로 자리매김했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가히 ‘얼음낚시 천국’이라 할 만하다. 겨울이면 방에 화롯불을 피워 놓고 가족끼리 오붓하게 군밤을 까 먹었던 것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먼 이야기’일 뿐이다. 스키장이나 스케이트장을 찾던 30~40대의 겨울나기도 이제는 추억이 되고 있다. 한겨울 유행의 바통은 이미 얼음낚시로 넘어온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얼음낚시의 묘미는 뭘까.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한 뼘도 안 되는 얼음 구멍으로 몰려드는 것일까. 다른 나라의 언론조차 “산천어축제가 100만명을 웃도는 낚시꾼으로 들끓는다니 불가사의하다”며 혀를 내둘렀다지 않은가. 그 비결을 들여다보러 화천 산천어축제장을 찾아갔다. 기자는 생전 처음 얼음낚시를 체험했다. 남들이 즐기는 한겨울 얼음 속의 묘미를 느끼기 위해 기꺼이 하루를 얼음 속에서 살았다. 햇살을 등지고 얼음구멍 속에 1000원짜리 낚싯줄을 드리우고 연신 줄을 채는 고패질을 하며 손맛을 기대했다. 얼마나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을까. 깊이 2~3m의 화천천 강바닥의 크고 작은 돌들이 투명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맑은 얼음 속 물에서 유유히 오가는 산천어들의 늠름한 자태가 신기하기만 하다. 어느새 물고기를 잡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물속 풍경에 흠뻑 빠져 고패질도 잊었다. 낚시꾼들의 손맛을 위해 군 공무원들이 주기적으로 산천어를 강물에 넣어주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봄, 여름, 가을에 흘러가던 물속 풍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오며 황홀경을 연출했다. 이리저리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어른 팔뚝만 한 얼룩빼기 산천어가 얼음 속으로 파고든 햇살을 받아 제왕처럼 빛났다. 이렇게 물속을 헤엄치던 산천어가 루어를 단 낚싯바늘에 걸리면 사람들에게 짜릿한 손맛을 안겨 줄 것이다. 투우장의 소처럼. 손발이 시리고 지루함을 느낄 즈음 산천어 한 마리가 묵직하게 걸려 올라온다. 손맛이 제법이다. 얼음 위로 올라온 산천어는 번쩍번쩍 하얀 비늘을 퍼덕이며 온 몸으로 찬 얼음을 거부한다. 멋진 녀석이다. 그제야 얼음구멍만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눈을 들어 주변의 눈 덮인 산과 청명한 겨울 하늘을 본다. 초보 낚시꾼이지만 자연과 하나 된 듯 뿌듯하다. 아, 이것이 겨울 얼음낚시의 묘미이구나 싶다. 특별한 낚시 기술이나 미끼도 필요 없이 그냥 작은 얼음구멍 속에 루어 미끼를 단 낚싯줄을 던져 놓으면 되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대자연 속에서 얼음 밑을 오가는 물고기도 보고 아름다운 물속 풍경도 즐기며 낚시하는 맛이란.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화천천에서 느껴보는 산천어낚시도 이토록 짜릿한데 넓은 소양호나 파로호, 의암호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얼음낚시는 또 어떨까. 빙어라는 작은 물고기를 잡는 손끝 맛은 덩치 큰 산천어나 송어에 뒤처지겠지만 자연 속의 겨울 얼음낚시 맛도 일품일 것이다. 잡은 물고기를 즉석에서 회나 구이로 요리해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축제장 곳곳에는 잡아 온 물고기에 소금을 치고 알루미늄 호일에 싸서 구워 주는 코너도 있다. 물론 회를 떠 주기도 한다. 내가 잡은 물고기를 손수 요리해 먹는 맛도 그만이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오손도손 얼음낚시를 즐기고 잡은 물고기를 맛보는 재미가 한겨울 추위를 저만치 밀어낸다. 더구나 축제장 곳곳에 마련된 썰매와 얼음축구 등 즐길거리도 가족동반 나들이를 한층 즐겁게 만든다. 축제장이 아닌 곳에서는 봄부터 가을까지 배를 타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포인트에 직접 구멍을 뚫고 채비를 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낄 것 같다. 얼음 위를 걸어 다니며 원하는 곳에 낚시 채비를 내릴 수 있다 보니 이보다 좋은 낚시가 또 어디 있을까. 멀리 물가에 앉아 찌 울림만을 쳐다보며 낚시를 해야 하는 일반 낚시에 견줘 생동감이 곱절이다. 전문가들은 축제장이 아닌 곳을 찾는 초보 얼음낚시꾼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한다. 물고기들의 활동이 왕성해지는 이른 아침, 동이 틀 무렵이 낚시에 좋은 시간이란다. 밤새 굶주린 물고기들을 꿈틀대는 미끼로 유인하기도 쉬울뿐더러 낚시꾼의 그림자가 덜 비쳐 자극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낚시꾼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고 물고기들이 접근하지 않기 일쑤여서라니 알아두면 좋다. 앉을 때도 얼음구멍으로 빛이 들어가지 않게 그림자로 막는 게 좋단다. 낚시를 하는 동안 햇살을 받으며 등을 따뜻하게 하는 데도 좋을 듯하다. 다만, 해가 뜨기 전 얼음낚시에 나설 땐 얼음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한 뒤 얼음을 밟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물 가장자리에서부터 얼음 끌로 두드리며 얼음 질을 꼭 살펴봐야 한다. 두께는 적어도 8~10㎝는 돼야 안전하다. 얼음 구멍은 충분한 간격을 두고 뚫어야 하기에 3~4개를 넘지 않는 게 좋다. 초보자에게는 낚시 포인트를 찾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에 처음 정한 자리에서 입질이 없으면 몇 차례 이동하며 포인트를 잡는 것도 필요하다. 수온이 낮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는 제방 부근 하류쪽, 오후엔 중상류 수초대를 찾아가는 게 낫다. 수온이 높아 물고기를 불러들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얼음낚시는 낚싯줄을 수시로 위아래로 당겼다 놓아주는 고패질이 중요하다. 얼음낚시의 미끼는 보통 지렁이, 구더기 등 살아 움직이는 게 좋고 축제장 등에서는 루어 미끼도 괜찮다. 축제장은 어쩔 수 없겠지만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좋다. 함께 낚시에 나섰던 문지훈 화천군청 직원은 “바닥을 체크할 수 없는 초보자들은 물고기들이 주로 움직이는 곳에 바늘을 놓고 고패질을 해 주면 된다”고 요령을 알려줬다. 얼음낚시엔 철저한 방한준비가 필수다. 추울 때 입을 여벌 옷을 챙기고 발이 젖기 쉬우므로 양말과 신발도 여러 켤레 준비한다. 모자, 장갑, 목도리, 귀마개 등은 반드시 챙기고 고어텍스와 같은 기능성 의류를 입는 것도 좋다. 주머니 난로를 여러 개 준비하면 더욱 따뜻하게 얼음낚시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자. 글 사진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길섶에서] 같은 나이, 다른 삶/최광숙 논설위원

    팔순을 바라보는 친척 두 분이 계신다. 가까이서 본 두 분의 삶은 너무 다르다. 한 분은 거동이 불편해 외출을 거의 하지 못해 집에만 주로 계신다. 가족들과의 대화도 별로 없고, 주위에 친구도 없다. 그러니 항상 외롭게 적적하게 지낸다. 이는 몸이 불편한 탓도 있지만 세상사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사람들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성격 탓도 있는 듯하다. 다른 한 분은 활기차다. 생활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불과 2년여 전까지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를 구해 용돈을 벌었다. 동창생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고스톱을 치고 술 한잔 하며 즐겁게 산다. 그 연세에 손수 운전해 볼거리를 찾아다닐 정도로 건강하다. 조카들을 만나도 어르신 티를 내지 않고 늘 웃고 농담을 나눌 정도로 젊은 감각이다. 동갑내기의 삶이 이렇듯 한 사람은 청년같이, 한 사람은 그야말로 나이 그대로 노년으로 갈린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가에 달린 것 같다. 과연 ‘미래’의 내 모습은 어떨까. ‘현재’를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묻지마 투자 걱정마 복지

    묻지마 투자 걱정마 복지

    부산항만공사는 2012년 12월 28일 감정가 716억원에 이르는 국유지를 628억원에 현대건설에 매각했다가 최근 감사원에 적발됐다. 감정가보다 무려 88억원이나 적은 액수다. 이 공공기관은 정부가 발표한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에서 방만 경영 중점 관리 대상으로 꼽힌 20곳 중 하나다. 공사 측은 2200억원 상당의 건설 발주를 하면서 국유지 매각 등의 방법으로 비용을 줄였다고 밝혔다. 금융 이자를 무는 것보다 현실적인 방안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감사원은 항만공사 내부 기구인 항만위원회의 심의, 의결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493조원에 이르는 공공기관(295개) 부채의 원인이 과도한 복지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불필요한 손실을 막는 데도 소극적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기업에 조금의 손실도 입히지 않으려는 민간기업 직원과 달리 정부 기관의 입장에서 업무를 진행하는 관행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수익성을 꼼꼼히 따져 보지 않는 ‘묻지마식 투자’도 문제다. 감사원에 따르면 한국전력공사(6개 발전공기업 포함), 가스공사, 석유공사, 광물자원공사 등 10개 에너지 공기업은 2012년까지 자원 개발 및 해외 사업에 총 34조 9489억원을 투자했지만 이 중 회수한 투자금은 10조 5732억원에 불과했다. 투자금 회수율은 2008년에 68.3%였지만 2012년 30.3%로 5년 새 절반 이하로 줄었다. 한국전력은 2009년 한국수력원자력과 공동으로 우라늄 자원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니제르의 이모라렝 우라늄 광산을 소유한 프랑스계 회사의 지분 15%를 인수했다. 하지만 당시 지분 인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내부수익률(7.8%)은 최저기준수익률(11.99%)보다 낮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수익률이 최저기준수익률에 미달하는 사업은 포기하는 게 맞지만 한전은 1780억원을 들여 이 광산의 일부 지분을 사들였다. 또 적자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공공기관들은 임직원에게 과도한 성과급과 복리후생을 제공해 왔다. 공공기관 경영 정보 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방만 경영 중점 관리 대상인 20개 공공기관의 직원 1인당 평균 복리후생비는 837만원에 달한다. 한국거래소가 1488만 9000원으로 가장 많았고 마사회 1310만 6000원, 코스콤 1213만 1000원, 수출입은행 1105만원 순이었다. 코레일(철도공사)은 퇴직금 산정 기준인 평균 임금에서 제외되는 경영평가 성과급 중 일부를 평균 임금에 포함시켜서 최근 3년간 퇴직자 1만 7590명에게 947억원의 퇴직금을 더 줬다. 코스콤은 셋째 아이를 낳은 직원에게 1000만원의 출산장려금을 지급했다. 한국무역보험공사는 직원의 부모가 회갑, 칠순, 팔순을 맞으면 30만원씩,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면 200만원씩 경조금을 챙겨줬다. 직원의 자녀 등 유가족을 특별 채용하거나 우대하는 ‘고용 세습’ 제도를 갖고 있는 기관도 8개나 됐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말 ‘공공기관 정상화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공공기관에 배포했고 기관별로 부채 감축 계획과 방만 경영 정상화 계획을 만들어 이달 말일까지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공공기관의 빚은 나랏빚을 넘어섰다. 295개 공공기관의 부채는 2012년 기준으로 493조 4000억원에 달한다. 2008년 290조원에서 4년 새 203조 4000억원(1.7배)이나 급증했고 국가 채무 446조원보다 10.6%나 많다. 공공기관들도 자구 노력에 돌입했다. 부채 규모 1위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2017년까지 부채 비율 520%를 420% 이하로 100% 포인트 줄이기로 했다. 복리후생 1위인 한국거래소는 업무추진비, 국내외 여비 등의 경비를 30~45% 삭감할 방침이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기업은 공공성 못지않게 수익성도 중요하기 때문에 기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서 “민간기업처럼 효율적인 경영 전략을 짜고 수익성을 고려한 투자를 하는 등 이제는 정부 기관이라는 마인드에서 벗어나는 것이 공공기관의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첫걸음”이라고 밝혔다. 세종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아키히토 일왕 팔순… “전쟁 가장 기억에 남아”

    아키히토 일왕 팔순… “전쟁 가장 기억에 남아”

    아키히토 일왕이 23일로 팔순을 맞았다. 일왕은 이날 오전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왕자 부부 등과 함께 도쿄 왕궁의 베란다에 선 채 시민들의 축하 인사에 손을 흔들며 답례하고 인사말을 낭독했다. 일왕은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 복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올해는 큰 태풍이 이즈오시마를 덮쳤고, 적지 않은 지방이 풍수해로 고통을 받았다. 피해자들을 생각하면서 국민 모두의 행복을 기원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왕은 오후에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3부 요인, 왕족과 국회의원 등이 참석하는 축하연을 이어가는 등 행사를 계속했다. 역대 일왕 가운데 재위 중 팔순을 맞이하기는 아키히토 일왕의 아버지인 쇼와(히로히토) 일왕에 이어 두 번째다. 또 장수 순위로는 쇼와(1901∼1989), 고미즈노(1596∼1680), 요제이(869∼949년)에 이어 역대 네 번째에 자리했다. 일왕은 사전에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초등학교 학생 시절 겪은 전쟁을 꼽았다. 일왕은 “다양한 꿈을 갖고 살던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것을 생각하면 참담할 따름”이라면서 “전후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고 강조했다. 일왕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나이에 의한 제약을 받아들이고, 가능한 역할을 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욕창 걸린 시각장애인에 음성장치 지원뿐

    욕창 걸린 시각장애인에 음성장치 지원뿐

    시각장애 1급인 팔순의 노모를 모시고 사는 최모(63)씨가 최근 구청에서 장애인 보조기구 신청 안내장을 받고 어머니에게 필요한 욕창 방지 기구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시각장애인이 신청할 수 있는 보조기구는 음성유도장치나 음성시계 등으로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데다 노환으로 침대 생활만 하는 어머니가 욕창으로 고생하던 터라 정부 지원이 반가웠지만 어머니에게 필요한 보조기구는 ‘그림의 떡’이었다. 최씨는 “부축 없이 문 앞 화장실까지도 못 가는 분에게 음성유도장치를 지원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행정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냐”고 반문하면서 “장애 종류가 아니라 개인별로 필요한 기구를 지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7일 각 지방자치단체와 국립재활원에 따르면 지자체는 지난달부터 저소득층 장애인에게 보조기구 신청을 받아 시각신호표시기, 자세보조용구, 진동시계 등 17개 품목의 보조기구를 지원하고 있다. 지원 대상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자나 차상위계층에 해당하는 지체·뇌병변·시각·청각·심장장애인 등이다. ‘국가와 지자체는 장애인의 신청이 있을 때 보조기구를 교부, 대여하거나 구입 또는 수리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한 장애인 복지법에 따라 보건복지부와 각 지자체가 8대2의 비율(서울은 5대5)로 예산을 부담하고 있다. 올해 복지부가 쓴 비용은 34억 3400만원이다. 그러나 정작 보조기구를 지원받는 장애인들은 “같은 장애를 가졌더라도 상황에 따라 필요한 기구가 다를 수 있는데 무조건 장애의 종류에 따라 보조기구를 정해 놓아 쓸모없는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욕창 방지용 방석과 커버는 1~2급 지체·뇌병변·심장장애인이, 음성유도장치는 시각장애인이, 시각신호표시기는 청각장애인이 신청할 수 있도록 보조기구와 장애 유형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지자체는 한정된 예산으로 지원 사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품목을 정해 둔 것이라고 밝혔지만 실제 장애인들이 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보조기구는 장애 유형과 연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이 1인당 80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는 독서확대기 대신 최대 35만원이 지원되는 욕창 예방 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해도 장애 유형이 달라 받을 수 없다. 장애인이 필요로 하는 보조기구를 진단, 상담해 주는 보조기구센터 상담원이나 공무원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보조기구센터 담당자는 “장애인과 상담한 뒤 적합한 품목을 추천해도 구청이 다른 품목을 줘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면서 “장애 유형별로 품목에 제한이 있고 기구별로 지원 기준 금액이 정해져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지난해 보조기구 품목을 12개에서 올해 17개로 늘리는 등 각 장애인의 개별적인 수요를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생존형 이기적 본능보다 공동체형 이타적 선택이 인간 지구정복을 이루다

    생존형 이기적 본능보다 공동체형 이타적 선택이 인간 지구정복을 이루다

    지구의 정복자/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사이언스북스/416쪽/2만 2000원 진화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아래·84) 미국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지난 수십년간 가장 논쟁적인 과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75년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입각해 분석한 ‘사회생물학’을 출간했을 때는 인종주의와 성차별, 우생학 등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1998년 과학과 인문학, 더 나아가 종교까지 범주에 넣어 지식의 대통합을 제안하는 ‘통섭’(원제 Consilience)을 발표했을 때는 ‘생물학 제국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팔순이 넘은 노학자의 신간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 역시 이 같은 논쟁의 연장선에 있는 문제작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윌슨과 함께 진화론의 양대 학자로 꼽히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가 공격의 선두에 섰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윌슨은 이 책에서 현대 진화생물학계의 주류 이론인 ‘혈연선택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혈연선택 이론에 기반한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 사회성 생물의 진화와 이타성의 진화, 협력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이 상호 작용하는 ‘다수준 선택이론’을 제안했다. 혈연선택이 아닌 다수준 선택이 인류의 유전자를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가 결합된 ‘유전적 키메라’(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합성동물)로 만들었고, 인류는 이기적 본능과 이타적 본능의 길항 속에서 살도록 운명지워졌다고 주장한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동물의 행동들조차 알고 보면 이기적인 유전자의 발현이라고 주장하는 도킨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전향’인 것이다. 윌슨의 제자이자 국내에 ‘통섭’을 번역 소개한 최재천 국립생태원 원장이 책 말미에 덧붙인 해설에 따르면 윌슨은 이미 2005년부터 혈연선택 이론을 버리고 집단 선택의 품으로 귀의하겠다고 선언했고, 2010년에는 ‘네이처’지에 혈연선택 논리를 반박하는 논문을 게재해 파란을 일으켰다. 이 책은 윌슨이 그동안 학계에 던진 일련의 충격과 도발을 총정리한 결과물이다. 학계 내부의 비판과 논란이야 어찌됐든 저자가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들은 독자들이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인 것은 분명하다. 책은 화가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1897년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던진 인간 조건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류는 불과 수십만년 전에 출현해 지난 6만년간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구성과 언어를 기반으로 한 독특한 문화로 지구를 정복해 왔다. 저자는 인류와 마찬가지로 사회성을 무기로 6000만년 전에 지구 정복을 완수한 개미 같은 사회성 곤충들의 진화와 인류의 진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 분석하면서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생물학적 기원을 탐색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혈연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만으로는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때로는 이기적이고 때로는 비이기적인 모습을 띠는, 서로 충돌하는 두 충동을 함께 지닌”것이 인간 본성이고 “최악의 것과 최선의 것이 공존하는” 인류 고유의 혼란이 진화를 이끌어 왔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집단 협력의 가치를 중시하는 저자는 기본적으로 인류의 미래에 낙관적인 전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오랜 생태주의자로 생물 다양성 보호를 주장해 온 저자는 또 다른 지구의 정복자인 개미와 달리 인류가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갈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를 멈추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자신이 주창한 통섭의 개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인류가 과학과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을 통해 얻은 지식을 한데 결합한 통섭적 지혜를 가지기 위한 새로운 계몽운동을 펼쳐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학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진화론 거두의 수십년에 걸친 학문적 궤적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할 만한 책이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노점상 할머니의 1억 기부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21일 도내 한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팔순의 할머니가 1억원을 기부했다고 밝혔다. 모금회에 따르면 이날 하얀 고무신을 신은 수수한 차림의 할머니 한 분이 공동모금회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름도 나이도 알리지 않고 어려운 곳에 써 달라며 1억원이 든 봉투를 전달했다. 이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해 청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수십년간 노점상을 하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할머니는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자식들만 데리고 정착한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녀를 잘 키워 냈다”면서 “인심 좋은 청주에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기부하게 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충북공동모금회 이명식 회장은 “고령에도 아직까지 시장 노점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 어르신께서 주름진 손으로 내놓으신 성금 봉투를 받고 감동을 받았다”면서 “어르신의 정성 그대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잘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이번 기부로 충북에서 여덟 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11월 20일 현재 전국 아너 회원은 380명이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詩가 읽히지 않는 무력한 시대 詩, 스스로 운명 개척하도록 해”

    “詩가 읽히지 않는 무력한 시대 詩, 스스로 운명 개척하도록 해”

    ‘나는 돼지가 되어서도/시인이련다/돼지가 되어서/꿀꿀/구정물 속 주둥이로/새파랗고/샛노랗고/새빨간/새하얀/아흐 새까만/시 몇편을 꿀꿀 쓰련다’(궁한 날) 팔순의 시인은 죽어갈 때도, 돼지가 되어서도 시를 쓰겠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시를 모르고 쓰고 있다”며 스스로를 ‘시의 아기’라고 칭한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호명되는 고은(80) 시인이다. 그가 올 봄과 여름 두 계절 동안 폭발하듯 써내려 간 시편들을 들고 돌아왔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린 시의 유성우(流星雨)’다. 총 607편, 1016쪽에 이르는 ‘무제 시편’(창비)이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새 시집은 올해 쓴 무제 시편 539편과 30년간의 안성 시대를 마감하고 수원 광교산 자락에 안긴 근황을 담은 부록 시편 68편으로 나뉜다. 18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여기 오기가 부끄러워서 소주를 두어 병 마시고 왔다”면서 “시인 생활 55년의 자취를 허여하는 내 모국어와 조국, 조국 밖의 나라들에 대해 새삼 무거운 은택을 깨닫게 된다”고 입을 열었다. 지난 반년간 수백 편의 시를 쏟아낸 열정은 어디서 왔을까. 동력을 묻는 질문에 시인은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나는 시에 관한 한 밤과 낮이 없습니다.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도 시의 시간이고 햇볕이 퍼부을 때도 시의 시간이지요. 전천후라고 하는 것이 내 시가 있는 장소가 아닐까 합니다.” ‘무제 시편’이라는 제목처럼 그는 이번 시에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고 1번부터 539번까지 번호를 매겼다. “시로부터 해방된 자로서, 시의 가장 먼 곳에 있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나의 이름에 시를 흡수시켜 버리는 게 과연 옳은 건가’ 하는 회의를 느껴 시에게 자기 운명을 개척하도록 했지요.”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에 시인에게 시의 위력과 무력은 동시에 찾아온다. 역설적이게도 시인은 시가 무력한 시대에 시인인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다. “호메로스(기원전 7~8세기 작가) 때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시의 영광이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됐습니다. 이제 무력해야 될 때가 됐어요. 이때 시인인 것을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시에서 멀어지는 지금을 ‘시의 죽음’이라고 여기지 않고 시를 회생시키는 게 제 존재 이유입니다. 남아 있는 삶의 시간 동안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시가 네 심장 안에 들어 있고, 네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걸 일러줄 생각입니다.” 올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체류하면서 유럽,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을 바삐 오간 시인의 시는 대부분 길 위에서 쓰여졌다. “어렸을 때도 기차, 돛단배, 새를 가장 많이 그렸더니 아버지가 그래요. ‘너는 왜 어디로 떠나는 것만 그리냐’고요. 그 점에서 정말 나는 로드무비야. 지금도 나는 분명 집의 행복을 알고 아내와 아기가 있는 집에 가면 행복한데 늘 내 꿈은 길에 있거든요. 이게 모순이에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해외 초청이 쇄도한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1년간 글을 써 달라,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는 강의를 해 달라, 중남미 국가에서도 방문 요청이 줄을 잇고 있다고 시인은 소개했다. 하지만 요즘도 밤에는 책에, 낮에는 원고지에 매달린다는 그는 “유럽에 한번 가면 사방에서 ‘미친갱이’처럼 초청해 찢어발겨지고 창작의 시간이 깨진다”며 “수원 골짜기에서 집념을 가지고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내 남아 있는 삶을 문학 자체에 충일하고 싶은 꿈이 있다”는 바람을 전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부산시민공원 ‘참여의 숲’ 모금액 초과달성

    내년 개장하는 부산시민공원의 헌수(나무기증) 모금액이 당초 모금 목표액을 크게 초과하는 성과를 올렸다. 부산시는 시민공원에 시민기금으로 조성되는 ‘참여의 숲’ 헌수 모금액이 당초 목표액 10억원을 넘은 14억 800만원에 이른다고 12일 밝혔다. 지난 2월부터 지난달까지 진행된 범시민 헌수운동에는 시민, 향토기업, 기관·단체, 출향인사 등 5343명이 참가했다. 헌수운동을 주관한 부산그린트러스트가 8억 6100만원을 모금해 13일 허남식 부산시장에게 모금액을 전달한다. 시민들은 1억 3300만원을 내놨다. 상공회의소는 1억 3900만원에 현물 2억 7500만원 등을 모금했다. 부산어패류처리조합과 국민은행 부산본부(각 2000만원), 안용복 기념사업회(480만원) 등 기업과 단체들이 참여했다. 팔순잔치 비용 480만원을 헌수한 정덕강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1000만원을 헌수한 박홍득씨 등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밖에 부산시청 옆 재활용센터 작업장에서 발견된 수령 100년 이상의 녹나무(감정가 1억 5000만원)와 수령 60년 이상의 메타세쿼이아(감정가 2000만원) 등이 현물 기증됐다. 이처럼 헌수운동의 열기가 높은 것은 옛 하야리야부대가 100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기증한 나무가 역사적인 사업에 활용된다는 점에서 애향심을 자극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박종문 자치행정과장은 “참여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명품공원을 조성해 삶의 여유를 제공하고 소중한 도심 휴식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이 시대 마지막 어릿광대 국악인 김뻑국

    [김문이 만난사람] 이 시대 마지막 어릿광대 국악인 김뻑국

    살면서 가장 좋은 재미를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보는 것, 아니면 듣는 것일까. 대체적으로 보는 것보다는 듣는 편이 낫다고들 말한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재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재담(才談)은 익살과 재치를 부리며 재미있게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창작보다는 전승(傳承)에 기초를 두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나간다. 장구와 북을 치며 서로 주고받는 재담과 여러 타령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그렇다면 잠깐, 남녀가 주고받는 재담의 한 장면을 들어보자. 남:억조창생 만민시주님네, 이 내 말을 들어보소. 청춘이 가고 백발이 올 줄 알았으면 10리 밖에다가 가시철망을 쌓을 걸.(나무관세음보살 목탁소리를 한다) 여:이봅세 아즈바이, 이봅세 아즈바이, 어쩌면 그 소리를 잘 지르시지비? 남:아즈마이~여기가 어니 고장, 어니 댁이지비? 함경도 어랑타령 고장 아니메~아즈마이 가만히 관상 보니 혼자 삼동? 여:말 맙소, 갈라새끼 술지방 앙카이(남편이 술집 여자를 데리고 도망갔다는 함경도 지방의 욕) 옆에 차고 후르륵 날러 혼자 삼둥. 어쩌면 좋겠소, 어쩌면 좋겠소, 가슴 답답해서 못 살겠다. 내 눈에 햄세국물(김칫국)이 쫄쫄 흘리메, 정말 가슴 답답해서 못 살겠다. 아즈바이 아까 잘하던 소리 한번 아니 들려주겠소? 남:니가 먼저~살자고~옆구리 꾹꾹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 먼저 찍었나? 여:무주공산 뜬 달은 뜨나마나 하구요, 멍텅구리 새서방은 있으나마나 허다. 이어 둘이 합창을 한다.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고, 이십리 못 가서 불한당 맞고, 삼십리 못 가서 되돌아오리리라, 아하하 어이야 어야더야 내 사랑아. 아리랑 고개에다 초가삼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자~’ 김뻑국을 아시는가.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40대 후반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재담의 명인 김뻑국씨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34년생이니까 올해 우리 나이로 팔순이다. 예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여전히 공연무대에 올라 특유의 민요재담을 펼치면서 대표적 만담 콤비로 알려진 ‘장소팔·고춘자’ 이후 마지막 재담꾼으로 외롭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국립민속박물관 대강당에서 ‘김뻑국예술단의 소리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소리극 공연을 열고 관객들에게 웃음을 흠뻑 선사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서대문 농협 대강당에서 2인 소리극 형식으로 제자와 함께 조용한 무대를 갖기도 했다. 앞에 언급된 남녀의 재담 장면에서 남자는 김씨, 여자는 제자 김순녀씨가 맡았다. 둘은 이 무대에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아리랑을 불러 눈길을 끌었다. 외국어로 아리랑을 부르게 된 계기는 우리의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였다. 종로3가 국악로에 있는 ‘김뻑국예술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민요재담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현실에서 무슨 인터뷰를 하느냐고 했다. 재담인생 55년에 요즘도 열심히 공연을 다니고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재담은 춥고 배고팠던 시절 민초들의 해학이고 한풀이이자 격조 높은 풍자였다”면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먼저 회고한다. 그는 일제 때 일본에서 태어나 광복이 되던 11살 때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하지만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생들한테 ‘일본 하꼬짝(궤짝)’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왕따’를 당했던 것. 한글을 잘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쫓아다니면서 때리는 등 못살게 구는 학생들 때문에 도망치듯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뚝섬 근처에서 우연히 국악인 이충선씨를 만나 1년 넘게 머슴살이를 했다. 굿판이나 질펀한 놀이마당이 펼쳐지는 날 이씨를 따라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큰 재미였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천과 수원을 거쳐 용인 남사초등학교에서 숨어 지냈다. 끼니는 빈집 광을 뒤져 남아 있는 씨알로 근근이 해결했다. 그렇게 1년 3개월을 지낸 뒤 다시 서울로 왔다. 탑골공원에서 배회하고 있을 때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씨를 만났다. 이후 그는 최씨를 따라다니면서 장구와 피리, 배뱅이소리를 어깨너머로 배웠고 인천과 강화 등지에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배뱅이굿을 하는 이은관씨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이씨와 인연을 맺고 40년 동안 같이 지내게 된다. “하루는 육영수 여사의 초대를 받고 소록도 위문공연을 가게 됐습니다.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른 김상국,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의 가수 한명숙씨도 함께 갔지요. 이때 다른 분들은 10분 정도 노래를 불렀으나 저는 이충선씨를 따라다니면서 배운 재담으로 30분 가까이 무대 위에 섰지요. 환자들도 막 웃고 그러니까 무대가 화기애애했어요. 육영수 여사도 좋아하시면서 몸소 무대까지 다가오시더니 악수를 청하더군요. 엊그제(10·26)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러 간 것도 그런 인연에서였습니다.” 김씨가 재담가로 유명해진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박정희 정권 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만남이다. 사연은 이렇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였다. 김씨는 이은관씨와 함께 종로3가에 있는 요정집 ‘오진암’으로 초대받았다. 가 보니 김지미, 서수남, 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 20여명이 모여 있었다. 이후락 부장이 북한에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연 자리였다. 이 부장은 술을 한 잔씩 돌리면서 각자 노래 한 곡씩 부르게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라고 하면 매우 근엄한 위치여서 다들 조용하게 불렀다. 그러나 김씨 차례가 오자 원래 하던 대로 소리 내어 불렀다.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꾹꾹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를 민요풍으로 불렀다. 분위기가 확 반전됐다. 이 부장이 기분이 좋았던지 “바로 그거야 한 번 더 불러 봐”라고 했다. 이왕 내친김에 야한 노래를 했다. ‘○○산 자리봉에 좁쌀 서말 심었더니 공알새가 날아와~’ 다들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이 부장은 “저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 없어”라고 하면서 김씨를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원 이하) 한 장을 건넸다. 당시 100만원은 집 한 채 값이었다. “그 수표를 들고 한국은행을 갔습니다. 은행장이 직접 나와 인사를 하더군요. 이후락씨 사인을 보더니 다들 굽실굽실하는 거예요. 어떻게 받았으며 다 찾아갈 거냐는 등 아주 친절하게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10만원만 우선 달라고 했지요. 그것으로 양복점에 가서 옷을 맞춰 입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해군 단화를 구입했습니다. 나머지는 안비취, 묵계월, 박동진 등 국악인들에게 공연을 하도록 도와주었지요.” 아울러 ‘김뻑국예술단’을 창단한 뒤 전국 면소재지까지 가서 공연을 하면서 암울했던 시절에 해학과 웃음을 선사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재담 한마디 툭 던진다. “서방님의 양말을 꿰맬 때 본처는 이빨로 실을 끊고, 둘째 마누라는 가위를 사용합니다. 셋째는 냄새를 맡고는 아예 양말을 버리지요. 하하하.” 김씨는 살아온 세월이 그래선지 팔순의 나이에도 악동(樂童)처럼 웃는다. 얼핏 보면 동자승 같기도 하고 철없는 촌놈 같기도 하다. 김뻑국이라는 이름은 방송국 데뷔 시절 ‘뻑국 뻑뻑국’이라는 소리를 잘 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본명은 김진환이다. 김씨는 2010년 자신의 예술인생 50년을 맞아 남산 국악당에서 화려한 공연무대를 가졌다. 이때 각계 인사들이 참여해 한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단국대 명예교수인 서한범 문학박사는 “김뻑국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름이 재미있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재담과 소리, 몸짓과 연기로 청중을 몰고 다니는 유명세 때문이다. 선생은 익살스러운 말이나 행동,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능력이 있어 이 시대의 마지막 어릿광대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분이다”라고 했다. 그랬다. 어린 시절 피리의 명인 이충선을 따라다니면서 굿당의 대감놀이를 배웠고 김윤심의 재담과 소리를 익히기도 했으며 최경명에게는 장구와 피리, 1960년도에는 이창배 문하에서 경기민요를 배웠다. 그러면서 김뻑국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영역을 개척하면서 많은 국악인들의 앞날을 열어주기도 했다. 꿈은 무엇일까. “일본에는 재담이나 만담 문화재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꼭 인간문화재가 아니더라도 ‘명예문화재’라는 증서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재담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 노래를 한다. ‘만나보세~만나보세~어머님 아버님 앞마당에서 만나보세~얼쑤.’ 팔순에 눈을 감고 장구 치고 북 치며 달밤에 외로이 홀로 앉아 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뻑국은 1934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진환이다. 11살 때 광복을 맞아 아버지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국악인 이충선씨를 만나 머슴살이를 했다. 6·25전쟁을 겪은 뒤 국악인 최경명씨를 만나 피리와 배뱅이소리를 배웠다. 인천과 강화도에서 약장수를 하던 시절 배뱅이굿을 하는 이은관씨를 만나 40년을 같이 지냈다. 1960년 이창배의 문하에 입문해 본격적으로 경기민요를 배우게 된다. 이정업의 장구, 김천흥의 춤, 박동진의 판소리, 박해일의 재담을 배우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다. 1974년 남북적십자회담 환영공연을 했으며 1975년 ‘김뻑국예술단’을 창단했다. 최근에는 정선아리랑 연주법을 독창적인 기법으로 개발했고 우리 아리랑을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부르면서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김뻑국예술단’의 단장이다.
  • 올 노벨문학상에 ‘현대 단편소설 거장’ 앨리스 먼로

    올 노벨문학상에 ‘현대 단편소설 거장’ 앨리스 먼로

    캐나다의 여성 소설가 앨리스 먼로(82)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차지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10일(현지시간) “현대 단편 소설의 거장”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먼로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캐나다 국적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처음이다. 여성 작가의 수상은 노벨문학상 사상 열세 번째이며 북미권에서 수상자가 나온 것은 1993년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 이후 20년 만이다. 1931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윙엄에서 태어난 먼로는 섬세한 관찰력으로 평범한 삶에서 의미를 포착해 내는 필치가 돋보여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 불려 왔다. 먼로는 웨스턴온타리오대 영문과 재학 시절 첫 단편 ‘그림자의 차원’을 발표하며 작가로 첫발을 뗐다. 1968년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북미권을 대표하는 작가답게 수상 이력이 화려하다. 캐나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총독문학상을 세 차례 수상했으며 미국 전미비평가협회상, 오 헨리상 등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열세 번째 단편집 ‘디어 라이프’를 발표하는 등 팔순을 넘기고도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하지만 올해 초 인터뷰에서는 더 이상 작품을 내지 않겠다고 밝혔다. 시상식은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의 기일인 오는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며 상금은 800만 크로나(약 13억원)이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팔순의 밀양 할머니 “송전탑 공사 막다가 죽을 것”

    30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위양마을 인근 산속, 127번 송전탑 공사현장. 한국전력이 765㎸ 송전탑 건설 공사를 10월 초 재개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주민들은 공사현장에 움막과 함께 1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2m 깊이의 구덩이를 파 놓고 보름 넘게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추석도 이 움막에서 보냈다. 주민들은 공사가 강행되면 밧줄과 쇠사슬 등으로 서로 몸을 묶고 죽을 때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한모(66) 할머니는 “한전이 공사를 하면 막다가 이 구덩이 안에서 죽을 것”이라며 목소리를높였다. 김모(86) 할머니도 “송전탑이 들어서면 어차피 살지 못하게 되니까 공사를 막다가 죽겠다”고 말했다. 부북면 화악산 해발 460m 지점에 있는 평밭마을 129번 송전탑 현장에도 주민 4~5명이 돌아가면서 밤을 지새우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부북면 주민 대표 이남우(71)씨는 “지중화 외에는 어떠한 보상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송전탑 건설을 막을 것”이라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한전은 주민들의 저항이 극렬해지자 공사재개 시기를 고심하고 있다. 밀양송전선로 건설 특별대책본부 박장민 차장은 “한전은 전력수급 계획 등에 따라 시간이 촉박하다”면서 “공사를 시작하기 하루 전에는 주민들에게 예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전은 공사 재개 과정에서 충돌을 막기 위해 경찰에 현장보호 요청을 해 놓았다. 이에 맞서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는 이날 “공권력 투입에 따른 인권침해가 우려된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 구제를 요청했다. 밀양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무색무취 물방울 그리는 데 한평생… 영혼과 닿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

    “무색무취 물방울 그리는 데 한평생… 영혼과 닿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

    “너절하지 않은 화가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올해 나이 여든넷. ‘물방울 화가’로 불리는 김창열 화백은 자신의 50년 ‘화업’(畵業)을 정리하는 전시회를 앞두고 작은 바람부터 털어놨다. 그에게 ‘너절하지 않은 것’은 있으나 마나 하지 않은 그 무엇이다.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마주한 김 화백은 커피잔을 들 때도 손을 떨었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그는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그림에 대한 생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김 화백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백남준, 이우환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렸다” “박서보, 정상화와 함께 한국미술 변혁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찬사와 함께 “변화가 없다” “상업성을 추구한다”는 비판도 만만찮다. 팔순 노화백의 변론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내 욕심은 물방울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고 한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어떤 때는 물방울을 그리다가 영혼과 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평안남도 맹산 출신이다.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1960년대부터 앵포르멜(무정형) 미술 운동에 몸담았다. 현대미술가협회를 이끌며 표상 체계를 벗어나기 위한 무차별적 몸짓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가 물방울을 처음 그린 것은 1970년대. 1960년대 중반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 수년간 집단 자의식으로부터 탈출을 꾀한 직후다. 196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작가로서 안정을 되찾은 때이기도 했다. “1972년쯤 파리 근교 마구간에서 생활할 때 대야에 물을 담아 세수를 하다가 캔버스에 튄 물방울을 봤어요. 아침 햇살을 받아 방울방울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을 접하고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순간의 영롱한 빛을 발한 뒤 속절없이 사라지는 물방울은 김 화백에게 집착해야 할 인생이었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개념’으로서의 물방울은 이미 물방울이 아닌, 존재로서의 자각을 스스로 탈락해버린 경지에 도달한 그 무엇”이라고 설명했다. 처음 캔버스에 표현하던 물방울은 4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마포, 신문지 등을 캔버스 삼아 그려졌다. 1990년대부터는 다시 캔버스로 돌아와 ‘회귀’ 시리즈를 연작하고 있다. 달라진 것은 인쇄체로 또박또박 쓰인 천자문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무리 지어 화폭 전반에 흩어진 점이다. 물방울들이 바닥에서 스며 나왔다기보다는 화면 밖에서 흘려진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김 화백은 29일부터 다음 달 25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자신의 작품 500여점 가운데 40여점의 물방울 그림을 추려 전시한다. 지난해 11월 국립타이완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 대규모 회고전을 연 뒤 마련한 첫 전시회다. 그는 “물방울이 무슨 의미가 있나. 무색무취한 게 아무런 뜻이 없다”며 겸손해했다. (02)2287-3500.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41일만에… ‘뚝딱 헌법’

    41일만에… ‘뚝딱 헌법’

    [두 얼굴의 헌법] 김진배 지음/폴리티쿠스/453쪽/2만 6000원 1948년 6월 중순, 서울 계동의 ‘계동궁’에선 헌법기초위원회의 서상일 위원장과 김준연 위원, 유진오 전문위원 등이 자리했다. 계동궁은 이승만의 이화장 등과 함께 해방정국 우익 거점의 하나인 인촌 김성수의 자택을 일컫는 말이다. 회의는 한국민주당 당수인 인촌이 주재했다. 어둡고 좁은 사랑방에선 의원내각제로 작성한 헌법초안을 대통령제로 뜯어고치는 작업이 이뤄졌다. 도쿄제대 독법(獨法)과 출신인 김준연이 등사판으로 민 초안 조문에 북북 줄을 긋고 또박또박 글씨를 써나갔다. 경성제대 법학강사 출신인 유진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가져와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 다듬었던 그는 애초 내각책임제 주창자였다. ‘유진오 헌법’이라 불리던 이 초안은 이렇게 ‘김준연 헌법’으로 바뀌었다. 인촌과 각별한 사이였던 유진오는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데는 원칙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며 자리를 떴다. 이 같은 희한한 풍경은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의 고집에서 비롯됐다. 제헌의회 임시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선생님’이라 불리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 “대통령제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안 된다”며 의원들을 다그쳤다. “여러분이 그런 헌법을 만들겠다면 그런 정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박 외에도 “지금 국회에는 어떻게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며 공산주의자의 멍에를 덧씌우려 했다. 오늘날 ‘종북주의자’ 논쟁과 같이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김약수 의원은 미국식 대통령제 예찬론자인 이승만 의장에게 “대통령제에 상당한 결함이 있다”며 남미 제국의 빈번한 혁명을 예로 들었다. 그의 예언은 이후 박정희·전두환 등 장군들의 쿠데타를 겪으며 적중했다. 환갑을 넘긴 대한민국의 헌법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빛바랜 사진 속 제헌의회의 근사한 모습만 접했던 세대에게 헌법의 탄생과정은 충격적이다. 책은 당시 제헌의회의 모습을 마치 TV를 보듯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신문기자, 재선의원 출신으로 폐암을 극복한 팔순의 저자가 취재 일선에서 만난 지인들의 증언과 국회 속기록 등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 썼다. 책은 1948년 7월 17일 토요일 오전 10시 국회의사당(옛 조선총독부) 본회의장에 공포된 제헌 헌법이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급박하게 만들어진 인스턴트 법안이라고 설명한다. 5월 30일 소집된 제헌국회가 불과 41일 만에 ‘압축심의’해 뚝딱 내놨다. 후일 진보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조봉암 의원은 노사관계 조항을 명확히 넣지 못하자 속기록에 구두로 취지를 밝히기도 했다. 그해 7월 초 헌법안 독회 과정을 보면 이승만 의장이 얼마나 빨리 헌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썼는지 알 수 있다. 마치 연극 대사를 읽는 것처럼 ‘제 몇 조 무엇무엇’이라고 읽기가 바쁘게 ‘이의 없습니까?’하며 의사봉을 땅, 땅, 땅 신나게 쳐댔다. 심지어 역사적인 헌법안의 표결은 기본이어야 할 재석이 얼마인지 그 중 몇 명이 찬성했는지 기록도 없다. 어떻게든 미군정 당국과 약속한 8월 15일 광복절까지 정권을 미군정으로부터 이양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쫓기고 있어서였다. 저자는 “누가 기초하고 손을 들어 헌법을 통과시켰든 간에 대한민국 헌법의 최대 공로자와 수혜자는 이승만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다만 제헌 헌법을 만드는 이면에는 ‘10만 선량’(당시 선거구당 유권자는 10만명 안팎)이라 불리던 제헌의원들의 고뇌도 담겨 있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헌법기초위원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정해졌다. 청일전쟁 뒤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마관조약에서 비롯된 국호를 놓고 ‘배냇병신’이란 비하가 나왔고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은 강력한 국호 경쟁자였다. 어떤 이는 ‘태동화국’을 제의했다. 수십 종류인 태극기의 어느 도안을 채택할지와 영토조항을 넣어야 할지도 논란거리였다. 국호에 군국주의의 냄새가 나는 대(大)자를 넣을지도 의견이 맞섰다. 하지만 헌법은 시간에 쫓겨 친일파 청산과 적산기업 처리 등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민족의 생채기로 남았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권력자들의 욕심에 밀려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며 수난을 겪었다. 헌법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흉기도 되고 민주주의의 보루도 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지관스님 유훈사업 ‘가산불교대사림’ 제14권 발간

    지관스님 유훈사업 ‘가산불교대사림’ 제14권 발간

    지난해 1월 입적한 가산 지관(왼쪽) 전 조계종 총무원장의 유훈 사업인 ‘가산불교대사림’(伽山佛敎大辭林)의 제14권(오른쪽)이 출간됐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이사장 김정배)은 “표제어 ‘소바라나’(素??拏)부터 ‘심로’(心路)에 이르는 8042개의 항목을 담은 ‘가산불교대사림’ 제14권을 최근 발간했다”고 31일 밝혔다. ‘1700년 만의 한국불교 술어의 최초 결집’으로 평가받는 ‘가산불교대사림’은 평생 교학 연찬에 몰두하며 불교대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지관 스님의 원력에 따른 것. 현재 간행된 국내외 사전 중 최다인 15만 개의 항목을 담는 대규모 편찬불사다. “한국정신사의 참다운 자존을 일깨우고 나아가 한국에 있어 불교술어의 일차 결집이라는 사명 아래 소중한 결과물이 되도록 정진하겠다”고 천명했던 스님은 50세가 되던 해인 1982년 ‘불교대사전편찬발원문’을 손수 짓고 편찬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스님은 1991년 사단법인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지난해 입적할 때까지 대사림 완성을 위해 쉼 없이 정진했다. 입적 6개월 전인 2011년 음력 5월 11일 팔순생신 때 연구원 가족들에게 “대사림 완간을 위해 합심하여 정진하라”는 간곡한 유훈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총 원고량(200자 원고지 2만 70장)이 신국판 단행본 10권 분량인 이번 14권은 불교의 다양한 고전정보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 작업할 수 있는 전공별 연구자 30여 명이 불교고전번역과 대장경 편제전통에서 기원한 작업전통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펴낸 사전. 특히 다국적 원어폰트(범어, 팔리어, 티베트어)와 한자권 벽자시스템 등 인쇄제작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편집, 제작, 출간까지의 모든 작업을 연구원 내에서 직접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은 지관 스님의 유지를 이어 2019년까지 본책 후반부 10권을 모두 펴내고 2022년 색인 및 연표부, 보유편 2권도 출간해 총 22권의 ‘가산불교대사림’ 편찬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연구원들은 이와 관련해 “지관 스님의 원력이 서린 가산대사림 완간은 한국불교와 전통문화의 자존을 높임은 물론, 후학의 전범이 될 것”이라며 “스님의 위적을 봉대하고 고군분투하며 공부할 따름”이라고 다짐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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