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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복지, 솔직하게 논의할 때가 됐다/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열린세상] 복지, 솔직하게 논의할 때가 됐다/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얼마 전 집안에 큰일이 있어 고향에 내려간 일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자란 마을은 아니고 부친께서 태어나서 자란 마을인데, 아직도 많은 친척분들이 거주하고 계신 곳이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많은 친척분들이 만나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많은 어르신들께서 기초노령연금을 받고 계셨다. 월 20만원 정도를 받으신다고 하는데, 손주들 먹을거리를 사 주시기도 하고 외식도 하시면서 나름 유용하게 쓰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경우에는 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지원이 나오는 것 같았는데, 시골 마을에서 혼자 거주하기 불편한 분들이 크게 의지가 되는 것 같았다. 평소에 내 월급에서 꼬박꼬박 떼어 가는 세금이 대체 어디에 쓰이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 마을의 어르신들이 여러 가지 복지 혜택을 누리고 계시는 것을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고 할까, 좋다고 할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2월 월급에서 연말정산의 조그마한 폭탄을 맞게 돼 기분이 좋지 않은 편이었는데, 마음이 다소 풀리는 느낌이었다. 예전 같으면 내가 고향에서 친척 어르신들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이런저런 도움을 드려야 했을 것인데 요즘에는 몇 년에 한 번 뵐까 말까 하는 상황이다 보니 도움은커녕 한번 인사드리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렇게 직접 뵙기 힘든 친척 어르신들을 내가 낸 세금으로 간접적으로나마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복지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오랜만에 찾은 고향 마을에는 젊은 사람은 찾아 보기 힘들고 대부분 칠순이 넘고 팔순이 지난 노인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젊은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나 자신도 해가 바뀌어 깊숙한 사십대 후반인데 나보다 어린 친척은 네 명 정도뿐이었다. 그나마 네댓 명의 젊은 친척들도 대부분 사십이 넘었는데 그중에서 두 명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열 살 전후의 아이들은 세 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칠순이 넘은 분들은 언뜻 보기에도 스무 명이 넘었다. 아버님 윗세대에는 환갑을 넘기신 친척 어르신이 거의 없었다는데 이제는 팔십 세는 기본인 세상이 됐으니 의학의 진보가 경이로울 뿐이다. 환갑을 넘긴 친척 형님도 계셨는데 감히 나이를 들먹이지 못하고 잡일을 맡아 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복지와 증세의 논란이 오랜만에 찾은 고향 마을에서는 정말 구체적인 형태로 이미 찾아와 있었던 것이다. 팔십이 넘은 노모를 육십이 넘은 자녀가 돌보는데 별다른 수입도 없고 더 젊은 사람도 없는 현재 한국 시골 마을의 풍경을 보며 삼십년 후의 대한민국 사회를 미리 보는 느낌이었다. 삼십년 후에는 시골 마을뿐 아니라 큰 도시에서도 젊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칠십 노인이 구십 노인을 공양하는 풍경이 전국에서 연출되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미래에는 이런 노인들을 봉양하기 위해 세금을 낼 젊은이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삼십년 후의 일이 아닌 현실의 일인데, 현재 대한민국 고등학교 한 학년의 학생 수가 60만명이 넘는 것에 비해 초등학교 한 학년의 학생 수는 40만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불과 6년 만에 학생 수가 삼분의 일이 감소할 것이 명백한 현실이다. 친척 어르신들이 정부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시는 것을 보면 흐뭇하기도 하고 당연히 아직 부족하다는 마음도 든다. 하지만 내 연말정산 결과를 보고 친척 어르신들이 엄청나게 늘어나는 현실을 보면 지금 이상의 복지는 절대로 무리이고 현재 수준의 복지라도 삼십년 후에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아무리 각박한 사회라도 형편이 어려운 친척 어르신들을 돕는 마음은 아직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한편 아무리 자신이 불편하더라도 친척 젊은이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것 역시 어르신들의 마음일 것이다. 이제 정치권은 이런 국민들의 마음을 수렴해 어느 수준과 방법의 복지를 선택하고 어느 수준의 증세를 감수할 것인지 솔직하게 논의할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 [경제 블로그] ‘치매 노인’을 사외이사에?… 한심한 농심·뻔뻔한 라응찬

    [경제 블로그] ‘치매 노인’을 사외이사에?… 한심한 농심·뻔뻔한 라응찬

    팔순을 앞둔 ‘치매 노인’이 국내 100대 기업의 사외이사 후보 자리에 올랐다가 이를 번복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100세 시대’라고 하니 팔순이라도 건장하기만 하다면 사외이사를 한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노인은 ‘알츠하이머 치료’를 이유로 수차례 검찰 소환 조사와 법원 출두에 불응했던 ‘전력’이 있죠. 그러니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응찬(78)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 얘깁니다. 농심은 지난달 29일 라 전 회장을 신규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오는 3월 주주총회에 상정하겠다고 공시했습니다. 시민사회와 금융권에서 비난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라 전 회장은 바로 2010년 경영권 분쟁인 ‘신한사태’의 핵심 인물입니다. 이와 관련한 고소·고발로 1·2심을 거쳐 현재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라 전 회장은 치매를 이유로 3년간 법원의 증인 출석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마지못해 증인으로 출석한 2013년 12월 재판 때는 불리한 질문만 나오면 “(치매 때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르겠다”는 답변만 반복했습니다. 이 정도면 일반적인 사회 활동이 불가능한 ‘한정치산자’로 보는 것이 맞겠지요. 그런데 농심은 좀 달리 생각했나 봅니다. 농심 관계자는 3일 “라 전 회장이 사외이사 업무를 수행하는 데 건강상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라 전 회장을 추천했던 농심 이사회 멤버인 신춘호 회장과 신동원 부회장, 박준 사장 눈에는 라 전 회장이 ‘지극히 정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치매환자와 정상인을 구분 못할 정도로 농심이 얼이 빠졌든가, 아니면 라 전 회장이 법정을 농락하며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든가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라 전 회장은 논란이 확산되자 사외이사 직을 사퇴했습니다. 신한금융은 명실상부한 국내 리딩금융그룹입니다. 탄탄한 후계구도로 KB금융처럼 외풍을 타지 않고 결속력도 단단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라 전 회장의 ‘입김’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금융권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지난해 연말 신한은행 동우회 송년회에 참석한 라 전 회장이 서진원 신한은행장을 시켜 배석자들의 술을 따르게 했다는 ‘전언’만 놓고 봐도 그 위상이 미루어 짐작 갑니다. 신한은 곤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합니다. 전임 회장 때문에 또 구설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신한 측은 “이제 (라 전 회장은) 신한과 무관한 분”이라며 애써 선을 긋습니다. 하지만 신한이 그토록 끊어내고 싶어 하는 줄은 라 전 회장의 기나긴 재임기간(20년)만큼이나 길고 질겨 보입니다.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 칠순에 한글 깨치고 팔순에 ‘정열 작가’로

    뒤늦게 한글을 깨우친 70대 할머니가 책을 펴냈다. 주인공은 전남 장성군 장성읍에 사는 박정열(79) 할머니.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박 할머니는 늘 배움에 목말랐다. 때마침 박 할머니는 69세 되던 2005년부터 장성공공도서관이 운영한 한글교실 ‘문불여대학’(文不如大學)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한글을 깨우친 박 할머니는 최근 남편과 자식,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와 일기, 기행문 등 57편의 글을 모아 ‘나는 문불여대 학생이다’를 펴냈다. 이 책에는 한 글자 한 글자 배워 가며 느꼈던 기쁨과 가족에 대한 고마움이 담담하게 녹아 있다.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랑하는 여보 당신, 당신과 나와 연을 맺은 지 55년을 맞이한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서 머리에 흰 꽃이 피었군요. 그동안 우리가 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살아왔지요. 그러나 당신이 부족한 나를 넓은 아량으로 채워 가며 살아 주셔서 항상 감사했지요”라고 적었다. ‘세월’이란 글에선 “세월아 가지 말고 거기서 있거라. 네가 가면 나도 따라가도 마음이 서글퍼서 내가 울잖니. 네가 가서 내 청춘도 가고 젊음도 갔으니 나는 네가 원망스럽다”며 세월의 무상함을 표현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태어난 박 할머니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초교를 졸업하지도 못했다. 젊은 나이에 시집을 가서 장성읍에서만 50년 넘게 신발가게를 하며 4남매를 길렀다. 어느 날 경로당 친구들이 장성공공도서관에 다니는 것을 보고 따라나선 게 계기가 돼 지금은 초등학교 과정인 3~4학년 반에서 공부하고 있다. 박 할머니는 4일 “못 배운 게 늘 한이었는데, 배우는 게 늘 즐겁고 재미있다”며 “건강이 허락하면 중학교 과정까지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열린세상] 세상의 모든 노인은 부모님이다/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세상의 모든 노인은 부모님이다/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새해 첫날 친구와 약속이 있어 버스를 타러 가는 도중에 파지를 줍는 할머니를 봤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얇고 낡은 외투를 걸친 할머니는 폐지 상자 두어 개를 접어 찌그러진 유모차에 싣더니 구부러진 허리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 유모차를 버스 정류장까지 대신 끌고 갔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기초연금으로 20만원 정도 받는다고 했다. 월세로 15만원을 내면 5만원이 남는데 그것만으로는 생활하기가 막막해 이렇게 파지를 줍는다고 했다. 마을버스가 도착했는데, 웬 젊은이가 노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치기를 해서 버스에 타더니 떡하니 경로석에 앉았다. 자리가 대부분 비어 있는데도 굳이 경로석에 앉아 스마트폰에 빠진 젊은이를 유심히 봤다. 값비싼 옷차림새로 보아 부유한 집 자식 같아 보였다. ‘저 아이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친구는 아들의 대학 진로와 관련해 조언을 구했다. 아는 대로 이야기를 해 주고 난 후 아까 본 할머니와 젊은이 이야기를 했다. 친구는 마침 기초연금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친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현재 노인 복지 제도를 위해 사용할 돈이 수년 내 바닥이 날 것이라면서 2030년쯤에는 노인 인구가 20%가 넘어서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 텐데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생산 계층에 있는 젊은 세대의 수마저 점차 줄어들고 있어 머지않아 젊은 세대가 노인 연금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국가재정이 파산 상태에 이를 것이라 했다. 친구는 자신은 물론 나 역시 노후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팔순의 부친이 요즘 부쩍 쇠약해져서 걱정이라고 했다. 친구의 부친은 친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중동 건설 현장에서 피땀을 흘리며 일한 분이다. 친구의 부친처럼 지금의 70, 80대 노인들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을 경험했고, 군사독재정권 시대와 민주화 시대, 산업화 시대와 정보화 시대라는 매우 이질적인 시대를 살아온 세대다. 그들은 ‘조국 근대화’,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하에서 조국의 미래를 책임지는 산업 역군으로, 또 ‘보릿고개 가난’에서 벗어나 ‘가족을 따뜻하게’ 먹고 재워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친 가장으로, 그렇게 한평생을 뼈가 휘도록 일만 해 왔다. 그분들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의 우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세대는 아버지 세대를 ‘말이 통하지 않는 세대’, ‘마지못해 부양해야 할 대상’, ‘병들고 무능한 세대’로 폄하하고 있다. 생산제일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삶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회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길든 결과 노인을 노동 생산력의 측면에서만 평가하고 ‘뒷방 늙은이’로 푸대접하고 있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친구가 한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젊은 세대가 노인을 공경하지 않고 버릇없이 구는 것은 젊은 세대를 가르치는 우리 중장년층 세대의 책임이라 했다. 우리 세대가 노인을 정성껏 모시지 않기에 자식 세대도 그걸 본받는다면서 개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의 모든 노인들을 내 부모님처럼 모신다면 현재의 노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친구가 나보다 더 교육자처럼 보였다. 친구는 부모님께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고, 맛있는 것이 있으면 부모님 것부터 챙기는 효자다. 친구의 아들 역시 효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친구 아들은 새치기하는 젊은이와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가하려는데, 팔순의 노모가 추운데 일찍 들어오라는 전화를 했다. 평생을 자식 걱정으로 살아온 노모가 계시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뭉클해졌다. 2015년 청양(靑羊)의 해에는 더는 노인을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노인 세대는 오늘의 부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의 전부를 희생한 존재이자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배워야 할 삶의 지혜를 지닌 존경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야말로 노인 문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 [100세 시대 퇴직연금 다시 보자] 입출금·적립·거치식…중장년층 전용 상품

    기업은행이 올해 8월 출시한 ‘IBK평생설계통장’은 만 40대 이상 중장년층 고객 전용 상품이다. IBK 은퇴브랜드 이름을 딴 첫 상품이기도 하다. 입출금식과 적립식, 거치식(일반·연금형)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입출금식은 은퇴 후 연금이나 용돈, 월세소득 등 고정 수입이 있는 고객에게 유리한 상품이다. 4대 연금이나 기초노령연금 등을 이 통장으로 받으면 50만원 이하 잔액에 대해 연 1.85%의 금리를 제공한다. 또 타행 자동화기기 출금수수료(월 5회)와 기업은행 자동화기기 타행이체 수수료, 전자금융수수료 등을 면제받는다. 목돈 마련을 위한 적립식은 월 1만원에서 50만원까지 가입이 가능하다. 목돈 운용을 위한 거치식은 원금과 이자를 만기에 찾는 일반형과 목돈 예치 후 매달 일정한 금액을 지급받는 연금형 중 선택할 수 있다. 적립식과 거치식 일반형은 회갑·칠순·팔순 등의 사유로 만기 이전에 해지할 경우 특별중도해지 이율을 적용받는다. 이 밖에 이 상품의 입출금식 통장으로 연금을 받거나 적립식·거치식 상품에 가입하면 1000만원(피해금액의 70%)까지 보장되는 전화금융사기 피해보상 보험 무료가입 혜택이 주어진다. 장년층의 여가 생활을 지원해 주는 상품도 있다. ‘IBK꽃보다청춘통장’은 금리우대와 각종 여행 관련 부가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 99세까지 건강하게 살자는 의미를 지닌 ‘IBK9988장수통장’은 전화금융사기 피해보상 보험, 회갑·칠순 등의 이유로 해지 시 특별중도해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추첨을 통해 장수기원 축하금을 제공한다. ‘IBK보험품은정기예금’은 은퇴 후 연금수령까지 공백기를 위한 가교 상품이다. 정기예금 가입 후 예금의 원금과 이자가 이자소득 비과세 상품인 저축성 보험에 매월 자동 납입돼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다.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 “팔순 앞둔 어르신들 한글 공부·일기 쓰기 도와요”

    “팔순 앞둔 어르신들 한글 공부·일기 쓰기 도와요”

    “늦깎이 한글학교 학생들이 처음 쓴 일기에는 그분들의 평생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정년 퇴임한 교장선생님 15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사랑의일기연구회’의 권정숙(65·여)씨는 3일 강성복(72·택시 기사)씨 등 특별한 제자 5명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이들은 4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2014 사랑의 일기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받는다. 3년 전 경기 고양시 가람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난 권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고양시 행신동 하림교회 인근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먹고살기에 급급해 배움에 대한 갈망이 한이 된 이들이었다. 권씨는 “한글학교를 시작했을 때 딱 2명이던 학생이 지금은 10명으로 늘었다”며 “여든을 앞둔 나이에 이분들이 한글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는 제각각”이라고 설명했다. 하림교회 한글학교의 청일점인 강씨는 6·25전쟁 때 개성에서 서울로 피란을 왔다. 강씨는 버스 조수,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안 해 본 일 없이 살았다. 실기시험만으로 개인택시 면허를 따던 시절 택시 기사가 됐지만 죽기 전 초등학교 졸업장을 따는 것이 소원이었다. 권씨는 “강 선생님은 청일점이면서 우등생”이라고 칭찬했다. 또 다른 만학도인 이여순(67·여)씨는 “아들, 딸 집에 갈 때 버스 노선도만이라도 혼자 힘으로 읽고 싶다”며 지난 4월 하림교회 한글학교 문을 두드렸다. 지병으로 당뇨를 앓는 데다 최근 신장수술까지 받았지만 아무리 아파도 수업을 빼먹는 법은 없다고 권씨가 설명했다. 권씨는 “한글 자모, 단어 하나를 배울 때도 다들 정말 기뻐하신다”며 “학습 속도가 천차만별이라 개인 지도도 해 드린다”며 웃었다. 늦깎이 학생들은 문법에는 약하지만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표현력은 남다르다. 권씨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일기를 쓰기도 한다”며 “시골에서 새를 쫓다가 어머니가 삶아 오신 고구마를 먹은 기억을 떠올려 시를 쓰는 분도 있다”고 했다. 시민봉사단체인 ‘인간성회복운동추진협의회’는 일기 쓰는 삶을 독려한다는 취지에서 1991년부터 25년째 ‘사랑의 일기 시상식’을 개최하고 있다. 올해에는 하림교회 한글학교 학생 5명 등 6명의 특별상 수상자를 포함해 전국 17개 시·도의 초중고교생 2060여명이 상을 받는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열린세상] 은행잎이 꽃잎처럼 날리는 교정에서의 결혼식/문흥술 서울여대 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은행잎이 꽃잎처럼 날리는 교정에서의 결혼식/문흥술 서울여대 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호텔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한 후 며칠 동안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지정된 좌석에 앉아 결혼식을 보고 식사하는데 내가 낸 축의금보다 두 배는 비싸 보이는 음식을 먹노라니 속이 더부룩하고 체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새로운 출발을 하는 신랑 신부를 보면서 진심으로 축하를 하고 친구와 함께 식장을 나왔다. 포장마차에 앉자 친구는 결혼을 앞둔 딸이 한사코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고 떼를 쓴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대기업 임원을 지낸 친구니 충분한 능력이 있겠다 싶어 뭐가 걱정이냐고 물었다. 친구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했다. 자신이 회사 있을 때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호텔에서 결혼식을 하게 해 주겠지만, 지금은 빚을 내지 않고서는 힘들다고 했다. 딸에게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자 딸에게 한심한 아버지로 비칠까봐 그것만은 죽어도 못 하겠다고 했다. 가끔씩 혼자 동해 바닷가를 찾는데, 그때마다 들르는 허름한 민박집이 있다. 그 집을 매번 찾는 이유는 집 주인인 팔순 노부부 때문이다. 노부부는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남들과 달라 보였다. 언젠가 노부부는 자식들이 선물한 휴대전화를 자랑하면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주름이 지고 검버섯이 피어 까칠한 얼굴로 집 마당 평상에 앉은 노부부의 모습에는 자식 세 명을 길러 낸 신산한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묻어 있었다. 손을 꽉 맞잡은 부부의 손가락에는 오래된 결혼반지가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나는 반지에서 할머니의 구부러진 허리를 다독다독 두드려 주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또 할아버지의 숟가락에 잘 익은 고등어 살점을 정성껏 발라 올려 주던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노부부는 어디에서 결혼식을 올렸을까. 호텔에서 했을까. 결혼식장에서 했을까. 아니면 동네에서 소박하게 전통 혼례를 치렀을까. 결혼식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부부로 평생 함께 살 것을 약속하는 하나의 의식이다. 그 의식이 반드시 고급스러워야만 하는 것인가. 비싼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이후의 결혼 생활이 그렇게 화려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검소하고 단출한 결혼식을 올리면 결혼 생활 또한 볼품없게 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우리네 결혼식은 부모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도구로 변질해 버린 듯하다. 또 결혼식을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특출한 존재인가를 뽐내기 위한 장치로 여기는 신랑 신부도 많은 듯하다. 단풍이 교정을 화려하게 수놓은 이 가을에 졸업한 제자가 결혼을 한다면서 인사를 왔다. 나는 제자 결혼식 주례를 절대 맡지 않는다. 말주변이 없는 것은 둘째 문제다. 평소에 나는 제자들에게 대학 4년 동안 죽어라고 공부한 후 사회에 나가서 번듯한 지식인으로 열심히 생활하라고 말한다. 시집 잘 가려고 대학 다니는 놈은 학교 당장 때려치우라고 윽박지른다. 그런 말을 하는 내가 어찌 주례를 보고, 제자 결혼식에 참석하겠는가. 그런데 제자는 주례 없이 결혼식을 올린다면서 공손하게 청첩장을 건넸는데, 결혼식장이 신랑의 학교 숲속 쉼터로 되어 있었다. 제자의 생각이 너무 가상스러워 결국 내 철칙을 깨고 제자 결혼식에 참석했다. 노란 은행잎이 꽃잎처럼 날리는 교정에서의 결혼식은 그 어느 결혼식보다 아름다웠다. 신부와 신랑은 부모님께 감사의 글을 읽으면서 울먹이기도 했지만 시종 환하게 미소 지었다. 신랑 신부 측 모두 집에서 마련해 온 음식으로 하객을 대접했다. 호텔 정식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국수가 맛있어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아마도 이 젊은 부부는 민박집의 노부부처럼 그렇게 금슬 좋게 평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식장을 나오면서 딸 결혼식장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을 잘 설득해서 교정에서 식을 올리라고, 안 되면 나라도 설득해 보겠다고. 그러면서 휴대전화로 찍은 제자 결혼식 사진 몇 장을 친구 휴대전화로 전송했다. 며칠 후 친구가 전화를 했다. 내년 봄에 딸이 자신의 모교 노천극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면서 내게 주례를 봐 달라고 했다. 아차, 싶었다. 이번에는 주례를 거절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손성진 칼럼] 친일과 뉴라이트, 그리고 기회주의

    [손성진 칼럼] 친일과 뉴라이트, 그리고 기회주의

    “내 조부가 친일이면 일제강점기 중산층은 다 친일파”라는 이인호 KBS 이사장의 강변(强辯)을 듣고는 생각난 단어가 지조와 절개다. 조선으로 치면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든 논개의 지조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라고 외친 사육신 성삼문의 절개 말이다.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논개나 성삼문처럼 행동할 용기를 가졌던 지식인들이 그 얼마나 되었을까. 비단 일제강점기 때만이 아니라 건국 이후 근 반세기에 가까운 독재의 시기에도 진딧물의 단물을 빠는 개미처럼 처신한 이 땅의 지도층, 지식인들은 수없이 많다. 옹호하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시대가 만든 비극이기도 하고 그 비극적인 시대에 산 사람들이 한편으로 측은하기도 하지만 가려내고 단죄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시종일관적이었던 골수 친일파보다 육당이나 춘원처럼 중도에 변신한 민족지사들이 더 욕을 먹는 것도 지조와 절개를 버린 데 대한 분노심 때문일 게다. 그들은 광복 후에도 친일 경력을 깨끗이 세탁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귀의하는 ‘멋진’ 변신술을 보여 주었다. 변신은 현재 권력이나 사상과의 일종의 타협인데 지난 수십년간 권력 이동과 이념 투쟁의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태생적인 ‘확신범’도 있으나 전향이라는 이름으로 좌우와 여야를 넘나든 철새들 또한 드물지 않다. 가장 희극적인 전향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추종하던 주사파가 이른바 뉴라이트의 한 축으로 변신한 것이다. 반미종북의 선봉에서 극단을 달리던 그들은 뉴라이트로 짐을 옮기고 나서도 시선만 정반대 방향을 바라볼 뿐 똑같이 극단을 달리고 있다. 그들의 방향 전환은 주지하다시피 공산주의의 몰락에 따른 정신적 붕괴의 결과다. 좌파로서는 기회주의적 변절이요 배신이다. 원의 바깥 선을 아무리 돌려도 여전히 바깥에 있듯이 극단은 결국 극단으로밖에 변신할 수 없는 것일까. 이 이사장도 변신과 전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세대 러시아사학자로서 이 이사장의 성향은 원래 중도 진보였다고 한다. 1987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 당시 강만길, 김진균씨 등 대표적인 진보 학자들과 함께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황모씨의 석방을 위한 탄원서에는 자신 때문에 서양사학과를 택했다는 최영미 시인과 동참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역임한 핀란드 대사에 이어서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 최초의 러시아 대사를 지낸 것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진보처럼 보인 덕일 것이다. 그랬던 그가 돌연 뉴라이트의 선두에 서서 바뀐 정부의 공영방송 이사장직에 오르고 ‘대한민국 공로자로서 김구 선생을 거론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은 소련의 지령이었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의 이런 변신은 조부의 친일이 공론화된 뒤부터인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이 이사장이 자존심이 상해 반대편으로 돌아섰을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할아버지 때문에 신념까지 바꾼, 어쩌면 그 자신이 현대사의 비극일지 모른다. 민주주의에서 신념의 자유는 보장되지만 정권과 시류에 영합하는 신념은 타인의 믿음을 얻지 못한다. 한국에서 ‘돈’과 ‘높은 자리’로 매매되지 않는 게 뭐가 있겠느냐는 어느 교수의 말은 과격해도 팔순을 눈앞에 둔 이 이사장의 ‘노욕’(慾)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인제 와서 “독재를 미화하고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를 옹호한다는 비판은 터무니없다”는 것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대표적 뉴라이트 학자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6년 한 방송에 나와서 ‘위안부를 강제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위안부 문제로 일본과 담을 쌓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정부와 반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뉴라이트 학자들을 대거 중용하고 있는 것은 이해불가다. 대북 관계의 직위에 종북 학자들을 등용한 꼴과 다를 게 없다. 지조와 절개, 변절 여부는 둘째 문제다.
  • [지금&여기] 머라이어 캐리 유감/이은주 문화부 기자

    [지금&여기] 머라이어 캐리 유감/이은주 문화부 기자

    지난 8일 열린 ‘팝의 디바’ 머라이어 캐리 내한 공연을 찾았던 관객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시원한 돌고래 창법과 폭발적인 가창력은 온데간데없고 키를 낮춰 부르다가 고음 부분에서는 뒤로 몸을 돌려버리는 등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런 공연을 놓고 일각에서는 립싱크 의혹까지 제기됐다. 야외 무대였기에 좋은 음향 시스템을 갖추기 어려웠던 사정을 접어주더라도, 최고 20만원(VIP석) 가까이 하는 비싼 티켓을 샀던 관객들에게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공연계에선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한 중소 공연기획사 대표는 “캐리는 11년 전 한국 공연에서도 립싱크 의혹을 빚었다. 게다가 요즘은 전성기 때의 가창력에 한참 떨어져 미국에서도 인기가 시들한데 무조건 이름만 보고 모셔올 일이 아닌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CJ가 ‘팝의 전설’ 퀸시 존스 탄생 8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첫 내한 공연 때도 그랬다. 그는 연주를 한 번도 하지 않는 함량 미달의 공연으로 ‘졸속 팔순잔치’라는 등 혹평을 받았다. 그에 앞서 지난해 4월 내한한 라틴 팝의 황제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무성의한 무대 매너로 도마 위에 올랐다. 최근 들어 대기업의 문화사업 투자가 늘면서 세계적 팝스타들이 줄줄이 내한하고 있는 분위기다. 한국 관객들의 열정적인 반응도 월드스타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지난 14일 코엑스에서 열린 미국의 R&B 가수 브라이언 맥나잇은 셔츠가 흥건하게 젖을 정도로 ‘원 래스트 크라이’, ‘백 앳 원’ 등 자신의 히트곡을 열창해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마룬5, 제이슨 므라즈, 브루노 마스 등도 자신의 노래를 ‘떼창’해주는 한국 팬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감사의 뜻을 전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제 한국 공연계도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문화강국의 반열에 오른 만큼 해외 팝스타 모셔오기에 급급해 옥석을 가리지 않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성이 이어지고 있다. 모시기 경쟁이 심해져 해외 팝스타들 사이에 ‘서울=고액 개런티’의 등식이 통하고 있다는 공연계의 얘기는 씁쓸하다. 한물간 스타까지 내한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경쟁한다면, 그들이 한국 무대를 쉽게 볼 것은 당연한 이치다. 계약 조건에 아티스트의 공연 관련 의무조항을 좀 더 깐깐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제아무리 세계적 스타일지라도 무대는 관객과의 약속이다. 한국 관객의 관람매너는 해외 팝스타들도 인정한다. 그런 우리는 수준급의 공연을 즐길 권리가 있다.erin@seoul.co.kr
  • [길섶에서] 산수연(傘壽宴)/오승호 논설위원

    당나라 시인 두보는 곡강시(曲江詩)에서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었다고 했다(人生七十古來稀).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1960년대에는 남자 51세, 여자 54세였다. 1970년대에도 남자 58.6세, 여자 65.5세에 불과했으니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 가운데 환갑(還甲) 잔치의 비중이 가장 컸다. 국가통계 포털을 보면 1970년부터 2010년까지 평균 수명은 10년마다 4.6세가량씩 늘어났다. 2011년에는 남자 77.6세, 여자 84.4세다. 일흔 살이 되는 해에 베푸는 생일잔치인 고희연(古希宴)도 옛말이 된 장수시대다. 환갑잔치는 그만두고, 팔순잔치(산수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어른들의 소망이 이뤄졌다고 할까. 지난주 어머니의 팔순을 맞아 가족들이 조촐한 식사를 대접한 뒤 모처럼 노래방을 찾았다. 어머니는 노래 서너 곡을 연달아 불러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형이 지정한 노래가 나오자 “내가 부르려 했던 곡”이라고 해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백세시대라 했던가. 산수연의 희소가치가 사라지고 88세의 미수연(米壽宴), 90세의 졸수연(卒壽宴), 99세의 백수연(白壽宴)이 일반화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빈농 아들로 태어나 230만여㎡ 농장 일군 김용복 영동농장 명예회장

    [김문이 만난사람] 빈농 아들로 태어나 230만여㎡ 농장 일군 김용복 영동농장 명예회장

    아무리 큰 거목도 하나의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이겨낸다. 어떤 시련도 묵묵히 참아낸다. 캄캄한 어둠 앞에 있더라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대사처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하며 새 아침을 기다린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그렇게 크고 자란다. 거목처럼 외롭게 살아온 한 사람의 처절한 외침을 들어본다. “저에게는 세 가지 굶주림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가난해서 배를 곯았던 굶주림, 두 번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사랑마저 새어머니에게 빼앗겨 가족 사랑에 대한 굶주림, 마지막이 배움에 대한 굶주림이 그것입니다. 저는 육신의 배고픔과 사랑의 굶주림, 그리고 배움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세 가지 굶주림을 넘치도록 채웠습니다.” 그랬다. 운외창천(雲外蒼天)이다. 구름 너머에는 항상 파란 하늘이 빛나고 있음을 기다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실패를 겪었음에도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결국 구름 걷히고 파란 하늘을 만났다. 시골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땅에 배추밭을 일군 신화를 만들어 냈고, 전남 강진의 척박한 땅에 여의도 면적에 가까운 기름진 농장을 가꾼 주인이 됐다. 그리고 지금은 장학회와 농촌문화재단을 만들어 숨은 일꾼들을 발굴해 도움을 주는 기부 실천자로 살아가고 있다. 김용복(81) 영동농장 명예회장이 주인공이다. 강진 농장의 실질적 운영은 아들에게 맡기고 현재 사재를 몽땅 털어 설립한 장학재단과 복지문화재단 일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 그가 살아온 대강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렇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했다. 먹고살기 위해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출발해 야간 대학을 나왔다. 그러다 베트남전 때 미국 빈넬 회사에 보급행정 기능공으로 지원해 5년간 번 돈으로 땅을 사며 재산가가 된다. 그렇지만 첫 사업으로 시작한 회사에서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로 회사를 정리하고 파산한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로 훌쩍 떠난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사막에 배추를 심어 ‘녹색혁명의 기수’라는 칭호를 얻었고 ‘석탄 산업 훈장’을 받았다. 지난 18일 서울 면목동 사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팔순의 나이지만 또렷한 말투에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척박한 사막에 씨를 뿌려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부합니다. 작으나마 오늘의 성공이 있기까지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이 사회, 우리 국가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 성과를 사회에 돌림으로써 제가 입은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합니다.” 수많은 실패를 거친 그에게 어쩌면 돈의 의미가 남다를 수 있다. “돈은 분뇨와 같아서 한 사람이 너무 오래 가지고 있으면 부패하고 구린내가 난다.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면 향내가 나고 비료가 돼 죽어가는 생명도 살린다”는 표현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생을 마감하고 저세상으로 갔을 때 하느님께서 ‘용복아 너는 이승에서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면 ‘예 저는 흙농사, 사람농사, 그리고 사랑농사를 짓다가 왔습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용복 장학재단’ ‘한사랑 농촌문화재단’ 등 다양한 장학과 후원의 일들을 펼치면서 현직 판사, 대학교수, 의학 박사 등 사회 인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낮은 곳에서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실수투성이의 삶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우리의 후배들은 저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리의 아들 딸들, 우리 후배들이 헤쳐나가야 할 장구한 미래에 저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얻는 소박한 생각들이 작은 거름이나마 되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는 질곡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두 가지 꿈을 항상 떠올렸다. 첫째, 가난한 학생들을 도와 그들이 성장해서 국가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장학사업이다. 두 번째, 건실한 농부였지만 땅이 없어서 항상 소작농의 서러움 속에서 힘겹게 살았던 아버지를 위해 논과 밭을 사들여 실컷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효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33년 음력 5월 5남매 중 막내로 강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산이라야 논 두 마지기(400평)가 전부일 만큼 가난한 농부였다. 어머니는 1936년에 세상을 떠났고 7살 위의 형은 1948년 여순사건 때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는 1950년 3남매의 자녀가 있는 여인과 재혼을 했다. 가뜩이나 가난한 집안에 식구가 더 늘어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등록금을 넉 달씩이나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눈물, 콧물이 범벅인 채 책가방 하나 달랑 들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부산역 대합실에서 노숙을 하며 배고파 울고, 외로워서 울고, 서러워서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미군 병사를 우연히 만났다. 중학교 때 배운 영어를 떠올려 ‘나는 촌놈이며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배가 고프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미군은 범일동 소재 미군부대로 데려가 하우스보이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충격적인 멸시를 받는다. 서울 등지에서 피란 내려와 일하는 어른들한테 ‘전라도 놈이지 너는, 물에 빠진 놈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평생 칭찬받는 전라도 사람, 모범적인 전라도 사람이 반드시 되겠다’고 다짐했다. 부산에서 3년 동안 하우스보이를 하면서 모은 돈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3남매를 데리고 온 새엄마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겨 찬밥신세가 됐다. 다시 고향을 떠나 광주로 갔다. 전남도청 앞을 걷다가 미군 지프차를 발견하고 다가가 ‘부산에서 하우스보이로 3년 동안 일하면서 영어와 운전기술을 배웠다’라고 말했더니 차에 타라는 대답과 함께 육군보병학교 상무대 군사고문단에서 수송부 통역원으로 취직돼 13개월 동안 근무하다가 9·28 서울수복 후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는 영등포에 있는 미군 45공병단 수송부 트럭운전수로 일하다가 육군 운전병으로 자원입대해 1958년 만기제대했다. 이듬해 결혼한 그는 미 빈넬회사 서울지사장 운전수로 취직했으며 1960년 건국대 야간대학을 다니며 주경야독을 했다. 6년 뒤 베트남 파견 기술자 모집에 응시해 캄란만에서 일을 했다. 그는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 받은 첫 월급 350달러를 강진군수에게 보내 고향의 불우한 환경의 후배들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이후에는 월급의 80%를 부인에게 보냈다. 1973년 베트남에서 귀국한 그는 서울 창동에 국제수출 포장공업사를 창업했다. 그러나 공장에서 숙식하던 직원 5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2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문을 닫아야 했다.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다시 내려간 그는 실뱀장어를 양식하는 일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고 경기도 성남에서 한 그릇에 150원하는 설렁탕 장사를 했다. 그러던 1979년 2월 친지인 전 사우디아라비아 노무관의 도움으로 리야드 남쪽의 한 농장으로 가게 됐다. 달랑 삽 4자루를 들고 사막에 도전했던 것. 이때 다들 불가능하게 여겼던 배추와 무 재배를 시작했다. 때마침 주변에 있는 경남기업 아파트 건설현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첫 판매가 이루어지면서 사막에서 배추를 재배하는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라면 하나로 두 끼니를 때우면서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에서 악전고투를 겪으며 500㎏을 첫 수확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는 15만명의 한국 일꾼들에게 김치를 제공하게 됐고 어느 정도 돈을 모은 그는 두 번째 꿈인 한국에서 큰 농장주가 되기를 실현해나간다. 여러 친지에게 버림받은 땅을 구입해 차근차근 농경지를 조성했다. 1982년 강진군 신전면과 도암면 일대의 미완성 간척지를 매입한 뒤 70만평의 현대식 벼농사 농장을 가꾸며 오늘에 이르게 됐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남기는 일은 사진에 맡기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자신 안에 일어나는 일,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사물에 대한 느낌은 삶의 기록으로, 인생의 참모습으로 영원히 남기고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그에게는 앞으로 할 일이 많다. 그중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이 이미 시작한 장학사업을 통한 인재발굴이다.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 ‘그때의 일’을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매년 선발해 지금까지 160여명이 혜택을 봤다. 2004년에는 사재 100억원을 출연해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매년 농업발전에 기여한 숨은 일꾼들을 돕고 있다. 또 하나 마지막으로 할 일은 남아 있는 부동산을 처분해 불우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복지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다. “덕은 고독의 단계를 거치면서 더욱 견고해집니다. 또한 덕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습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용복 회장은 1933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인생을 출발했다. 나중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주한 미군 제7사단 행정도서관 관장 보좌관(1960~1963년), 주한 미8군 사령부 교육처장 보좌관(1963~1965년), 주베트남 미 빈넬회사(미 국방성 기술용역회사) 보급 행정감독관(1965~1968년) 등을 지냈다. 이후 국제 수출포장 공업사 대표(1970~1972년), 사우디아라비아 영동농장대표(1979~1989년), 건국대 총동문회 건국장학회장, 건국대 총동문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영동농장 회장, 재단법인 용복장학회 설립자, 재단법인 한사랑농촌문화재단 설립이사장, 도산아카데미 운영위원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사막에 승부를 걸고’ ‘그때 처절했던 실패가 오늘 이 성공을 주었다’ ‘흙농사, 사람농사, 그리고 사랑농사’ ‘끝없이 도전하고 아낌없이 나눠라’ 등을 비롯 중국어판 자서전을 출간했다. 석탑산업훈장(1982년), 내무부장관 표창(1983년), 페스탈로치상(1995년), 도산경영상(2009년), 농업기업부문 인간상록수(2012년) 등을 수상했다.
  • 권노갑 동국대서 영문학 박사과정

    권노갑 동국대서 영문학 박사과정

    권노갑(84)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팔순이 넘은 나이에 모교인 동국대 대학원에서 영어영문학 박사과정을 밟게 됐다. 11일 동국대에 따르면 권 고문은 이번 학기부터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 이날 처음 등교해 손자뻘 되는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권 고문의 학구열은 유명하다. 동국대 경제학과 출신인 권 고문은 정계 은퇴 후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에 열정을 불태워 2007년 3월 서울 강남역에 있는 동시통역 어학원에 등록해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들었다. 2009년 2월에는 미국 하와이대로 어학과정을 떠났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6개월 만에 중도 하차한 바 있다. 이후 2011년 한국외대 영문학과 대학원 일반전형에 당당히 합격, 전 학기를 개근한 뒤 지난해 5월 ‘존 F 케네디의 연설문에 나타난 정치사상연구’를 주제로 한국외대 개교 이래 최고령 석사학위를 받았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열린세상]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지난여름 무더위가 한창일 때 2주가량 공적인 일로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생활을 했다.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전혀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큰 방에 홀로 기거를 하면서, 정해진 일정에 따라 주어진 일을 진행하느라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완료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을 받았다. 그 며칠 동안 나는 이가림의 시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를 계속 떠올렸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내가 일천 번도 더 입 맞춘 별이 있음을/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라는 시구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았다. 이 시는 사랑하는 이를 깊은 땅에 묻고 돌아오는 날 밤, ‘나’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자신을 스쳐간 수많은 모래알 같은 이름을 불러보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떠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며칠 밤을 심한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했던 일, 혹은 누군가와 다투었던 일, 또 무엇인가 소홀히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모래알 같은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나’라는 존재는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내 삶이 결코 외롭고 고독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면 나에게 인연의 끈을 허락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그 어떤 이해타산적인 측면을 개입시키지 않고 진심을 다하리라 다짐을 했다. 그런 결심을 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때의 각오를 지금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동안 소원했던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가끔 그때의 다짐을 떠올리면서 마음속으로나마 사랑하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긴 한다. 또 학생들에게 공부 안 한다고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열심히 하라고 용기를 북돋워주려 한다. 학생들 발표문을 집어던지면서 불같이 화를 내던 평소의 나답지 않은 모습을 본 때문인지 학생들은 나의 그런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추석 연휴를 맞아 학생들에게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김소월의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가르친다. 밤마다 돋는 달처럼 임이 늘 내 가까이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몰랐는데, 임과 ‘나’와의 거리가 저 달처럼 멀어지자 그때야 임이 사무치게 그리운 대상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임과 함께할 수 없기에 서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온다는 내용이다. 시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추석날 엄마 일 도와드리고 엄마가 차려준 음식을 맛있게 배부르게 먹으라고 당부한다. 엄마가 “우리 딸 많이 먹어”라고 말할 때 ‘살찌면 어쩔 거냐’면서 짜증 부리지 말라고. 엄마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고맙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하면서 볼이 미어터지게 먹으라고. 부모님 살아생전에 섬기길 다하라는 말이 있다. 부모님 돌아가신 뒤에 상다리가 휘도록 차례 상을 차린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모님은 저 달처럼 멀리 계시는 것을. 그러니 부모님 살아생전에 어깨 한 번 더 주물러드리고, 추석날 엄마가 정성껏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 효도 아니겠는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후회를 되풀이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듯하다. 그러나 가끔씩 ‘모래알 같은 이름’을 불러보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그들이 가까이 있을 때 사무치도록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본다면, 그런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 하게 될 듯하다. 이번 추석날도 풍요로운 보름달이 환하게 세상을 밝힐 것이다. 나 또한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부모님의 은혜를 새삼 떠올리고,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팔순 노모의 어깨도 시원하게 주물러드리면서 모든 이들의 평안을 달님에게 두 손 모아 기원 드리고 싶다.
  • 42년째 약혼 중…한 80대 신혼부부 사연

    42년째 약혼 중…한 80대 신혼부부 사연

    지난 2012년 개봉된 영화 5년째 약혼 중(The Five-Year Engagement)은 약혼 후 5년이 지나는 동안 이런저런 사건들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한 연인의 사연을 코믹하게 담아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때로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극적일 때도 있다. 영국 지역 일간지 허더즈필드 데일리 이그재미너(Huddersfield Daily Examiner)는 무려 42년간 약혼 상태를 유지하다 팔순이 넘어 최근 정식 결혼식을 올린 한 부부의 놀라운 사연을 29일(현지시각) 소개했다. 영국 웨스트요크셔 허더즈필드에 살고 있는 데이비드 바커(71), 다프네 소프(82) 부부는 수십 년을 함께 금술 좋게 살아온 커플 같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들은 지난 28일, 갓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지난 1972년 한 댄스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곧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고 불과 4주 만에 초고속 약혼을 치를 만큼 애정이 남달랐다. 상식대로라면 곧 이어 결혼식을 올려야했지만 이들은 42년이 지나도록 약혼관계를 유지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커 부부는 굳이 결혼식을 서둘러 치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철도원,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하며 두 자녀와 함께 열심히 삶을 살아왔다. 어떻게 보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사람에게 그저 법적인 개념일 뿐 약혼관계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부부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왜 다시 두 사람은 법적인 결합을 이뤄낸 것일까? 이는 소프 부인의 의지에서 비롯됐다. 작년 심각한 심장질환으로 생사고비를 넘겼던 그녀는 문득 너무 오랫동안 결혼을 미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프 부인은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았고 얼마만큼 더 오래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둘러 결혼식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28일, 두 사람은 30명 하객의 축하 속에서 멋진 결혼식을 올렸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소프 부인의 82번째 생일과도 겹쳤는데 간소한 연회가 결혼식장 근처에 있는 자녀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함께 열렸다. 42년 만에 법적인 결합을 이뤄낸 부부는 감회가 남달랐다. 두 사람은 “서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났고 이제 진정한 하나가 됐다”며 “날씨도 좋았고 결혼식은 완벽했다”고 말했다. 한편 두 사람은 잉글랜드 북동부 노스요크셔로 짧은 허니문을 다녀온 뒤, 설레는 신혼생활을 시작할 예정이다. 조우상 기자 wscho@seoul.co.kr
  • [길섶에서] 엘레지의 추억/손성진 수석논설위원

    한국인의 피에는 한(恨)이 녹아 있다. 슬픈 분위기의 전통가요, 엘레지(elegy)는 한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엘레지를 좋아한 것은 한 많은 그들의 인생이 노래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혼의 엘레지’, ‘용두산 엘레지’ ‘해운대 엘레지’…. 1960년대는 애절한 곡조가 심금을 울리는 엘레지 전성기였다. “황혼이 질 때면 생각나는 그 사람 가슴 깊이 맺힌 슬픔 영원토록 잊을 길은 없는데….” 가수 이미자의 ‘황혼의 부르스’라는 엘레지를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모친을 통해서였다. 흥얼거림을 자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락이 귀에 익게 됐다. 가끔은 노래방에서 부를 정도의 애창곡이 된 것도 순전히 모친 덕이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데뷔 55주년 기념 콘서트를 얼마 전에 열었다. 원곡 가수의 목소리로 ‘황혼의 부르스’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동백 아가씨’라는 한 맺힌 노래를 부른 불세출의 가수는 건재했다. 그래도 이제 칠십대 중반의 노년이고 모친은 내년이면 팔순이 된다. 노래는 변함이 없는데 세월은 무심히도 흘렀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유리상자 안에서 음악하는 게 아닐까 고민… 연주자의 삶 돌아보고 있어요”

    “유리상자 안에서 음악하는 게 아닐까 고민… 연주자의 삶 돌아보고 있어요”

    섬세한 타건으로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칭이 붙은 차세대 피아니스트 윤홍천(32).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고민이 하나 생겼다. 지난 29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이 시대 음악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하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돈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우리가 음악을 유리상자 안에서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컸어요. 음악이 대중을 위한 게 아니라 일부 돈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음악이 예술이 아닌 성공의 도구로 전락한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계속됐죠. 콩쿠르 우승이나 눈에 띄는 스토리를 만들지 않으면 좋은 무대에 설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갈등도 크고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하며 연주자로서의 삶을 정립해 보고 있어요.” 독일 뮌헨에 살며 유럽, 한국 무대로 보폭을 넓히고 있는 그는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만큼이나 농익은 연주 실력으로 현지에서 인정받고 있다. 오는 2018년까지 5년간의 프로젝트인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 음반 1차분은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에서 “여러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음반 가운데 손꼽힐 만하다. 깔끔하게만 치는 게 아니라 곡의 뉘앙스와 극적인 면을 잘 살렸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의 한 단계 도약은 오는 12월에도 예고돼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 로린 마젤(84)이 이끄는 뮌헨필하모닉오케스라와의 협연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직접 마젤에게 편지를 보낸 뒤 오디션을 통해 ‘간택’을 받은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존경해 오던 음악인과 교감하게 된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지휘를 잘하시는 분은 많아요. 하지만 주로 브루크너나 베토벤 곡으로 역량을 드러내는 다른 지휘자들과 달리 마젤은 한정된 레퍼토리에 갇히지 않고 오페라, 현대음악 등을 모두 아우르죠. 팔순이 넘으셨는데도 블로그, 트위터나 본인이 직접 만든 캐슬턴페스티벌(미 버지니아주) 등을 통해 젊은 연주자들과 활발히 교류하고요. 외골수가 아닌 전방위 음악인의 상을 보여주시는 분이라 더욱 배우고 싶어요.” 협연 프로그램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그와는 인연이 깊은 곡이다. 첫 독주 음반에 담긴 곡일 뿐 아니라 그를 독일 매니지먼트사와 계약하게 만든 곡이다. “처음엔 의아했어요. 오케스트라가 부각되는 곡이 아닌 오케스트라가 솔리스트에게 맞춰야 되는 곡이거든요. 피아니스트로서 그만큼 역량을 많이 보여줄 수 있는 곡이 없기 때문에 저를 배려한 선택인 것 같아요.”(웃음) 다음달 10일에는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 박성용영재특별상 앙코르 무대를 5년 만에 꾸민다. 19일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아르츠콘서트-로마 위드 러브’ 무대에 선다. 9월에는 독일 4개 도시 투어 리사이틀, 10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등이 줄줄이 잡혀 있다. 특히 이번 금호아트홀 연주회에서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B플랫 장조 D.960과 리스트가 편곡한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 S.178 등 3곡을 직접 골랐다. 슈베르트 후기 작품을 담은 두 번째 독주 음반(2011)으로 현지에서 ‘독일인보다 독일 음악을 더 잘 해석하는 남자’로 통했던 만큼 더욱 기대를 모은다. 그는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슈베르트의 가곡을 종일 들으며 독일 문화, 슈베르트의 내면에 침잠해 보려 노력했다”며 “베토벤의 후배인 슈베르트와 리스트가 소나타 형식을 어떻게 각각 개성적으로 풀어갔는지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열린세상] 필부필부에게서 거인을 보다/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필부필부에게서 거인을 보다/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사회적으로 이른바 ‘존경’ 받아오던 법조인, 교수, 언론인, 기업가가 그동안 숨겨 왔던 파렴치한 행위들이 폭로되면서 하루아침에 위선자가 돼 버리는 요지경 같은 세상이다. 아마도 이들은 ‘존경’이라는 단어를 앞세운 채 뒤에서는 출세욕, 물욕, 지배욕 같은 온갖 탐욕을 부리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하찮은 수단 내지 도구로 여겼을 것이다. 팔순의 장인을 모시고 동서와 동해안으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왔다. 백담사 입구에 도착해 밥을 먹으며 동서와 나는 백담사에 유배 왔던 대통령과 요즘 청문회 건으로 도마에 오른 인사들의 이야기를 했다. 어른은 대화를 듣고 나서 모든 것이 사람의 과한 욕심 때문이라면서 혀를 찼다. 어른이 살아온 삶을 알고 있는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른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웠다. 장사를 하면서 어른은 한 번도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운 적이 없었다. “아버님, 그렇게 해서 돈 버시겠어요”라고 웃으면서 묻자 어른은 그저 욕심부리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숙소인 금강산 콘도로 가는 도중, 어른은 거진 항구에 꼭 들러야 한다고 했다. 항구에 도착하자 어시장 한구석 좌판에서 회를 뜨는 할머니가 반갑게 어른을 맞이했고, 어른은 서울에서부터 준비해 간 옷 한 보따리를 할머니에게 선물했다. 사연인 즉, 어른은 지난 20여년 동안 거진항에서 친목 모임을 해왔고, 그때마다 할머니에게서 회를 샀다는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할머니는 매년 어른에게 감사의 인사로 횟감을 보냈고, 어른은 할머니에게 답례로 옷을 부쳤다는 것이다. 내가 근사한 횟집으로 어른을 모시려 하자, 어른은 할머니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할머니 좌판에서 꼭 회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가 내놓은 회는 물기가 덜 빠져서 그런지 동서와 나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사실, 어른은 몸이 불편해서 회를 가능하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어른은 진귀한 회를 대접받은 듯이 맛있게 먹으면서 할머니와 즐거운 담소를 나누었다. 숙소로 와 잠을 자고 새벽에 한국 대 러시아의 축구 경기를 보았다. 어른은 한국이 축구를 잘한다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른은 조기 축구회 회원으로 젊은 사람 못지않게 90분 시합을 거뜬하게 소화해 냈다. 그렇게 건강했던 어른이 요즘 기력이 많이 쇠약해졌다. 숙소를 나올 때 어른을 부축하기 위해 손을 잡았는데, 살집도 예전 같지 않았다. 통일전망대에 도착해서 어른은 망원경으로 철조망 너머 북녘 땅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른은 6·25전쟁 참전 용사다. 아마도 어른은 젊은 시절 체험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떠올리면서 죽어간 전우들을 위로하고 분단된 나라의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어른은 전쟁 때 통일전망대 부근 고지에서 치른 전투를 이야기하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른은 피곤한지 눈을 감고 있었다. 여행 내내 사람들은 장인과 두 사위가 같이 여행을 다니는 것에 대해 매우 신기해했다. 그런데 동서나 나는 그런 시선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도 어른의 평소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어른은 자식들에게 돈보다, 권력보다, 명성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고 늘 가르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 구성원 간의 참사랑이다. 그러면서 그 사랑이 사회와 나라의 참사랑으로 연결되도록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가르쳐왔다. 동서와 내가 장인을 친아버지처럼 여기는 것도 그런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정한 아버지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진정한 아버지의 상이 무엇인지를 그동안 나는 찾아 헤맸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통해 그런 아버지를 비로소 만나게 된 것이다. 어른을 마냥 평범한 분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어른은 거인이었다. 자동차 뒷거울로 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몸가짐, 마음가짐, 그 모든 것에서 나는 어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버지가 될지 모른다는 조바심이 났다. 많은 제자를 둔 스승으로서,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나는 과연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반문해 본다.
  • [제22회 공초문학상] “시를 쓰는 건 죽은 자, 지금 없는 자 위한 것”

    [제22회 공초문학상] “시를 쓰는 건 죽은 자, 지금 없는 자 위한 것”

    문단 데뷔 1년 차이던 고은(81) 시인을 ‘불나비’에 빗댄 이가 있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쉼 없이 시라는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고은을 불을 발견한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한 시 ‘불나비’를 썼다. 1959년 인쇄소 화재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고은의 첫 시집에 실린 서시였다. 그는 공초 오상순 선생이다. 55년의 시간을 넘어 시인은 자신의 천재성을 첫눈에 알아봐 줬던 오상순 선생에게 또다시 격려를 받게 됐다. 지난해 펴낸 ‘무제 시편’에 실린 ‘무제 시편 11’이 서울신문이 주관하는 제22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수원 광교산 품에 안긴 그의 자택을 18일 찾았다. 수만권의 책이 장벽을 이룬 2층 서재 책상은 ‘세계인의 시인’이 된 그를 불러내려는 국내외 행사 스케줄과 초청장, 집필 중인 원고 더미 등으로 한 치의 여백도 없었다. “주시는 쪽도 불편했을 거고 받기에도 송구스럽다”는 말로 수상 소감을 대신한 그의 기억은 어느새 파릇한 스물셋, 승려로 살았던 1956년으로 건너가 있었다. 당시 그는 전국승려대회를 맞아 서울 조계사 총무원의 허름한 숙직실에서 공초와 처음 만나 함께 살았다. 속인으로 절에 기거했던 공초와 승려대회를 찾은 승려 20여명과 한 방에 꾸역꾸역 껴서 자야 했던 곤궁한 시절이었다. “공초도 나도 구석에 누워 서로 정수리를 마주하고 자야 했어요. 새벽 2시쯤인가. 자다가 둘이 동시에 일어나 손을 잡았어. 몽유병처럼 둘 다 전혀 의식이 없던 행위야. 악수하고 보니 그제야 의식이 돌아와 불을 켜곤 함께 ‘허허허’ 웃었어. 둘 사이에 정신의 어떤 동시적인 폭발이 있었달까. 서로 도의 수준이 통하는 걸로 됐죠.” 이후 그와 공초, 구상은 불교,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경계 없이 가족처럼 어울려 지냈다. 집도 혈연도 없는 공초를 조계사에 영구히 거주하도록 도와준 것도 그였다. 시인은 공초의 말년작 중엔 함께 쓴 것도 있다고 했다. “공초는 남이 잘 쓰면 칭찬했지만 자기 작품은 자랑하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문학관을 지키고 있었죠. 엄연한 저작권이 있는 지금처럼 자기 문학이냐 남의 문학이냐 하는 구분은 의미 없어 했어요. 이건 세상이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함께 시도 쓸 수 있었지요.” 그는 수상작 ‘무제 시편 11’에서 ‘명왕성의 고독을 안다/그 만겁 빙벽의 고독을 안다’고 노래했다. 장소와 시간에 속박되지 않고 우주와 소통하는 시인의 사상을 압축한 이 작품은 공초의 시정신과 맞닿아 있다는 평을 받았다. 시인은 자신의 생명의 씨에 깃든 고독과 우주 권속인 명왕성의 고독이 끊임없이 내통하고 있다는 ‘리얼리티’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삶의 여러 경험 속에서 늘 고독과 동행해 온 시인은 20세기 인류에게 남겨진 최대의 사명, 과제는 ‘우애’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최근 세월호 사건을 통과하면서 더욱 굳히게 된 생각이다. “지금의 시장 속에선 인간이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의미도 돈의 의미로 바뀌어 버렸죠. 이런 시장의 야만, 폭력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물을 연민화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남기가 되어야지요. 그래서 ‘애도가 길어야 한다’는 자크 데리다의 말을 좋아해요. 최근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하루나 이틀 생각하고 돌아서서 자기 삶을 사는 행위는 안 된다는 거죠. 내가 쓰는 것도 결국은 죽은 자, 지금 없는 자들을 위해 쓰는 거 아니에요? 내 어깨에는 한국전쟁, 제주 4·3 사건, 1980년 광주 등 무수한 죽음이 짊어져 있어요. 그걸 지워 버리고 살 수가 없죠. 이 죽음들을 하나하나 현재화시키는 것 역시 애도라고 봐요.” 그의 쓰기, ‘애도’는 계속된다. 시인의 책상에는 시 한 편이 700여쪽에 이르는 장시(長詩) ‘처녀’의 원고 뭉치가 묵직하게 자리해 있었다. 현재 487쪽까지 썼다는 ‘처녀’는 지상과 용궁, 천상 등 세 개의 공간을 오가는 심청을 그린 대작이다. “1950년대 후반 ‘심청부’라는 시를 쓴 이후 ‘고은에겐 심청의 세계가 있다’고 한 평론가들이 더러 있었죠. 중국 고사 등을 따와 만들어진 심청의 문학적 가치를 끌어올려 고전으로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을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오라는 곳이 빗발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형편이다. 오는 8월 마케도니아 스트루가 국제시축제에서 황금화환상을 받을 예정인 데 이어 10월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강연 및 낭독 행사에 초청받았다. 11월에는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시축제와 영국 첼튼엄문학페스티벌에서 잇따라 참가 요청이 들어온 상태다. “온몸이 찢어져서 쓸 수가 없다. 내 팔자려니 한다”는 팔순의 시인은 “그래도 ‘어떤 시를 쓸까’가 여전히 나를 눈뜨게 하는 질문”이라며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시’ 창간호에 시 ‘폐결핵’으로 등단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간사 ▲1989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1999년 미국 하버드대 연구교수. 버클리대 방문교수 ▲2005년~현재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2008년~현재 단국대 석좌교수 ▲주요 수상: 만해문학상(1988), 대산문학상(1993), 은관문화훈장(2002), 스웨덴 시카다상(2006), 캐나다 그리핀 시인상 평생공로상(2008), 대한민국예술원상(2008), 미국 아메리카어워드(2011)
  •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문학 번역하는 외국인 국문학 박사 1호 케빈 오록 경희대 명예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문학 번역하는 외국인 국문학 박사 1호 케빈 오록 경희대 명예교수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병 속에 물과 함께 달을 길었네)/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절에 가서 비로소 깨달았으리)/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병을 기울면 달도 또한 없는 것을).’ 고려시대 이규보가 지은 ‘영정중월’(詠井中月)이라는 선시다. 케빈 오록(75) 교수와 만남은 이규보 시에서 시작했다. 그는 외국인 출신 국문학 박사 1호로 기록된다. 24세 때, 그러니까 1964년 한국에 신부(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로 선교차 왔다가 한국시가 맘에 들어 1982년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 쓴 논문이 ‘1920년대 한국 시가 끼친 영향’이었고 석사논문은 ‘1920년대 단편소설과 자연주의’였다. 어떻게 해서 국문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싶었는데 학위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해서 그랬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학위는 강의할 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학위 때 쓴 일정한 논문주제와 가르치는 학문은 다른 것이 아니냐고 했다. 만남의 장소는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자택이었다. 그는 2012년부터 한국문학번역원 이사를 맡아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만났을 때 연락처를 알아내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자 “한국사람들은 참, 기자가 알려달라고 하면 (번역원에서)얼른 알려주면 될 것을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등 연휴가 끝난 지난 7일 오전이어서 그는 “연휴 때 술을 많이 마셨겠다”며 농담으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바꾼다. 다시 이규보 시로 돌아간다. 그동안 접한 한국 시 가운데 이규보의 시처럼 상상력과 규모, 그리고 욕심을 초월한 인생관은 놀라울 만큼 훌륭하다고 강조한다. 중국의 두보나 소동파를 능가하는 좋은 시라고 설명한다. 아마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충분히 ‘노벨상감’이라고 했다. 고려시대의 시는 대부분 그러하다고 말한다. 시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정지상, 혜심 스님의 작품도 기가 막히다고 했다. 그는 조선시대 시조번역을 1000수 이상을 했고 정철의 가사와 윤선도의 연시조 ‘어부사시사’ 등도 번역했다. 가사번역은 600수가 넘는다. 신라시대의 시조집은 2006년, 그리고 현대시는 10년 전에 영역판 책으로 펴냈다. 올가을에는 조선시대 시선집을 한 권 더 낸다. 그는 “아마 한 사람의 손으로 신라에서 오늘날 시까지 관통하며 번역해낸 것은 최초의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권수로 따지면 그동안 낸 책(시와 소설)이 25권 분량이고 시와 시조는 모두 2000여수에 이른다. 대표적 현대소설로는 최인훈의 ‘광장’, 이문열의 ‘일그러진 영웅’ 등도 번역했다. 최근에는 ‘나의 한국:갓 없이 40년’(My Korea: Forty Years Without a Horsehair Hat)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에 대해 “갓은 선비의 상징이다. 외국인이 드물었던 1960년대만 하더라도 코 큰 놈이 국문학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름대로 한국에서 선비로 인정받고 싶었다”며 웃는다. 어떻게 그런 방대한 작업을 할 수 있었느냐고 하자 “자식과 부인에 대해 신경 쓸 일 없으니 시간이 많다”며 다시 한번 웃는다. 답이 명쾌하고 한국문학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김삿갓의 한시 60수도 번역했다. “송송백백(松松柏柏), 나무와 바위 사이를 걷고 있는 김삿갓이 보인다. 찰나에 느낀 세상의 신비가 한눈에 보이는 듯하다”고 풀이한다. 김삿갓은 장난기가 가득한 천재였다. 그를 촘촘히 들여다보고 영문으로 번역해냈으니 이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잠시 그의 명함을 들여다봤다. 좀 특별한 면이 있다. ‘경희대 명예교수 오록(吳鹿)’이라고 적혀 있다. 조병화 시인이 지어준 이름이다. “오나라의 사슴이라는 뜻이죠. 또 오(吳)에는 오랑캐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랑캐의 사슴이라고 할 수 있죠. 중국에 가서 명함을 건넸더니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아일랜드 출신이고 옛날에 바이킹의 지배를 받았으니 바이킹의 후예, 오랑캐의 후예나 마찬가지라고 말입니다. 조병화 시인이 그런 뜻에서 지어주었고 저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아마 사슴은 예쁘니까 붙여줬겠죠(웃음).” 조병화의 ‘소라의 초상화’를 외운다. ‘당신네들이나/영악하게 잘살으시지요/나야 나대로히/나의 생리에 맞는 의상을 찾았답니다.’ 박목월·박두진 시인과는 대학 때 강의를 들으며 만났다. 그는 미당 서정주와도 인연이 깊다. 다시 시 한 수를 외운다. ‘하늘이 하도나/고요하시니/란초는 궁금해 꽃피는 것이다.’ 미당의 초기 시에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보들레르와 비유된다고 말했다. 또한 미당의 작품 중에는 예이츠도 있다고 했다. 그는 “미당에게 외국의 어떤 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있었느냐고 잠깐 물었더니 ‘전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했다. 미당은 충분히 노벨상을 받을 만한 좋은 시들을 썼다”면서 “안타깝게도 일제 때 친일했던 부분, 전두환 정권 당시 약간의 실수를 하고 말았다”고 했다. 미당과는 아일랜드에서 만난 추억도 있다고 했다. “더블린 중국집에서 미당과 저희 할아버지 등 셋이서 만났습니다. 미당의 시집을 더블린에서 출간했는데 기념차 방문했지요. 당시 할아버지는 90세, 미당은 80세였습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면서 통역 없이 3시간 동안 얘기했습니다. 할아버지나 미당이나 서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주 오래 얘기했어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 중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예이츠나 사무엘 베케트 등이 있다. 한국의 시와 소설을 접하면서 ‘노벨상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노벨상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우습고 문인은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 정부나 문단에서 밀어야 합니다. 아일랜드에는 현재 시인 10여명, 소설가 5, 6명이 주목받고 있지만 어떤 상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최근 들어 한국 시단에 대해서는 난해한 시가 늘어나는데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깨달음을 담은 시는 줄어들고 있다고 평했다. 얼른 시란 무엇인지 물었다. “시는 가슴속에 있는 감각과 감정의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할 때 항상 남게 되지요. 그러나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은 말씀의 나라입니다. 말이 적을수록 시가 좋습니다. 결국 시 작품은 상징입니다. 한국에는 좋은 선시들이 많습니다. 10년 전에 읽었던 시도 지금에 읽으면 달라집니다. 모럴 중심으로 시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한국 문학에는 유교라는 큰 짐이 깔려 있다고 했다. 그래서 문학을 망칠 뻔했고 서거정과 김시습, 서산대사 등이 그 짐을 다소 회복했다고 말한다. 황진이는 어떠한지를 물었더니 “황진이 시는 12수가 있는데 대부분 사랑에 대한 시다. 세상에서 사랑은 중요하지만 작품에서 전부는 아니다. 서거정, 김시습의 시는 황진이보다 앞서간다”면서 그러나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좋은 시는 좋지 않느냐고 말한다. 시조 중에는 ‘어부사시사’가 으뜸이며 연시조로 아주 멋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어 우리 문단의 풍토에 대한 쓴소리가 나온다. “한국 문학은 작품에 대한 가치보다 사업이 돼 버렸어요. 문학은 서로 나눠야 해요. 영월에 가서 김삿갓 시 못 사요. 안동에 가서도 못 사요. 전철 타면 시가 여럿 있는데 시조나 한시가 없어요. 높은 양반들 시집 선물 안 합니다. 아주 쉬운 것들을 안 합니다. 한국사람들이 외국인에게 시 선물을 안 합니다.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려면 그런 것부터 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문학 전집이 나오면 달려나가 번역하고 싶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중간에 에이전트가 있고 출판사에서 허락받아야 번역할 수 있어 복잡하다고 했다. 작가가 쓴 초고를 보고 눈물이 나와야 번역을 잘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미리 받아들이는 출판사가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요즘에 미당이나 박목월 같은 큰 시인이 없다고 했다. 우리 문단의 미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문학 속에 유교정신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러나 요새 김중혁 같은 젊은 작가들에 의해 많이 달라졌어요. ‘유리방패’는 유교를 희롱합니다. 재치 있습니다. 옛날 무거운 문장보다 가볍고 좋아 번역하기도 쉬워졌습니다. 김동리나 염상섭 같은 작품보다 훨씬 쉬어졌지요. 한국문장이 영어와 같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영어로 작품을 쓰려면 룰이 많아요, 그러나 한국 랭귀지는 작가 마음대로 룰을 정합니다. 그래서 한국문학의 미래는 매우 밝습니다.” 한국 땅을 밟은 지 올해로 꼭 50년이다.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러나 한국문학에 대한 열정,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하는 간절한 생각만큼은 아직도 왕성하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오록은 아일랜드 더블린 인근에서 태어났다. 더블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뒤 1964년 한국에 신부(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로 선교차 왔다가 한국 시가 마음에 들어 1982년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조선시대 시조번역을 1000수 이상 했다. 정철의 가사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등의 연시조도 번역했다. 신라시대 시조집도 펴냈다. 그동안 번역해낸 한국 시와 소설이 책으로 25권 분량이고 신라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와 시조 번역은 모두 2000여수에 이른다. 2012년부터 한국문학번역원 이사를 맡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 명예교수로 재직한다.
  • 불교계 최고 지성 가르침 책으로 배운다

    불교계 최고 지성 가르침 책으로 배운다

    한국불교계의 대강백과 조계종 최고 입법기관의 수장이 보기 드문 역저를 나란히 내놓아 불교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통도사·범어사 승가대학장, 조계종 승가대학장·교육원장을 지낸 무비 스님과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인 향적 스님이 주인공. 무비 스님은 불교 최고의 경전으로 통하는 ‘화엄경 강설(80권본)’ 1차분 5권을 펴냈고, 향적 스님은 선시 해설서 ‘선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를 내놓았다. 무비 스님의 ‘화엄경 강설’은 스님이 올해부터 2022년까지 8년 결사를 통해 매년 10권씩 완간할 ‘화엄경 강설’의 1차분으로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1·2·3·4·5를 마무리했다. 그동안 탄허 스님과 월운 스님이 화엄경 번역서를 낸 적은 있지만 화엄경 해설서가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그간의 해설서도 ‘보현행원품’, ‘입법계품’ 등의 부분 번역·해설에 그쳤던 데 비해 화엄경 전체를 강설하기는 한국불교사 최초의 일이다. 무비 스님은 이와 관련해 2010년부터 부산 범어사에서 매월 첫째 주 월요일 화엄산림대법회의 법사를 맡아 화엄경 강의를 이끌어왔다. 강의마다 전국 각지에서 200여명의 스님이 범어사로 집결하고 있다고 한다. 원제 ‘대방광불화엄경’의 화엄경은 원래 산스크리트로 된 경전으로 한국불교 소의경전(所依經典) 중 하나. 현재 ‘40권본’, ‘60권본’, ‘80권본’과 ‘티베트어로 된 ‘장역화엄’ 등 총 4종이 유통되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 동진 시기에 번역된 ‘60권본’은 주로 일본에서 보고 있으며 695∼699년 번역된 ‘80권본’은 한국에서 널리 보고 있다. 특히 ‘80권본‘은 선재동자의 구법 이야기로 유명하며 문장이 아름답고 내용도 이해하기 쉽게 구성된 게 특징이다. 무비 스님은 ‘화엄경 강설’을 사실상 마지막 강설 작업으로 여겨 ‘화엄경’에 집중하고 있다. ‘80권본’이 완간되는 2022년은 스님의 팔순이기도 하다. 향적 스님의 선시 해설서 ‘우리는’은 해인사 지족암 법회 때 신도들과 읽던 선시들에 향적 스님 특유의 해설을 더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향적 스님은 해인사에서 출가해 교(敎)를 배우고 선(禪)을 참구해 온 스님. 월간지 ‘해인’을 창간한 주역이고 프랑스 가톨릭 수도원에 머물며 불교와 천주교의 수행법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번 선시 해설서는 해인사 지족암에 주석하며 법회 때마다 신도들과 선시를 읊는다는 스님의 선에 대한 생각과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선시야말로 선사의 정신적 사리이자 언어의 근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던 스님이다. 그 지론은 책 곳곳에 스며 있다.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게 가득 넘치는구나.’ 은사인 일타 스님의 오도송을 회상하면서는 이런 말을 떠올린다. “선방 앞 화단에 조그마한 목단 꽃봉오리를 보고 들어가 입선 죽비를 치고 방석에 앉았는데 눈을 뜨고 방문을 열고 나오니 목단 꽃이 활짝 피어 미소 지으며 달려 왔다”고. 소림사 달마 스님 앞에서 칼로 왼팔을 잘라 가르침을 청한 중국 선종의 2대조 혜가 스님를 묘사한 청매 인오(1548~1623) 스님의 시 구절 ‘눈 쌓인 빈 뜰에 떨어진 붉은 잎’을 놓고는 이렇게 해설한다. “팔이 잘려 눈 위에 피가 흐르는 모습을 ‘눈 쌓인 빈 뜰에 붉은 잎이 떨어진다’고 묘사한 청매 스님이야말로 ‘선시의 시성’이다.” 책의 감수를 마친 정휴 스님은 이 선시집을 향해 이렇게 극찬하고 있다. “오랜 수행을 통해 얻은 값진 체험과 깊은 사색으로 걸러낸 언어, 그리고 깨달음의 정서로 풀어놓은 선적 통찰력들이 비우고 내려놓아야 자유스러워질 수 있음을 깨우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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