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에/송정숙 본사 논설위원(서울칼럼)
10월31일 저녁 관훈토론에는 강영훈 총리가 나왔다. 군출신에,한때 준망명기를 지냈고,권력의 부근에 복귀하여 비바람 심한 자리를 무난히 견디고 있는 고희가 멀지 않은 현직 총리인 그가 아직도 우등생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모범생같은 공직자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기대이상의 일이다.
그런 총리가 이날 저녁 꼭한번 넥타이를 푼 것 같은 「맨얼굴」을보였다. 플로에서 던진 「전적으로 농담차원」의 질문에 응답했을 때였다. 많은 어려운 시기와 시련도 무난히 끝냈으니 이제 아예 정치일선으로 나와 대통령에 출마해보는게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파안이 되어 손을 홰홰 저으며 『큰일날 소리 말라』고 받아 넘긴 그는 자신의 「정치불가론」을 몇가지 꼽았다. 그중의 한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나는 이북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정치는 못해요』
이 말은 처음에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 말은,출신구역이 없으니 어디서 출마를 하겠는가,통일이나 된다면 『나도 내고향에 가서 한번 출마를 하고 고향사람들께 표좀찍어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한국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자처하는 이북출신 사람들의 약간 자조적인 분위기까지는 안갔지만 그것은 확실히 진솔함을 띤 목소리였다.
특히 바로 이튿날 조간에서 본 「고향」에서의 김영삼 민자당대표 최고위원의 모습이 소급해서 그 정서를 확인해주었다. 거물 정치지도자라도 거기를 근거로 출마하고,답답하고 혼미할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고향이다. 더구나 김 최고위원에게는 그곳에 노부도 계시다. 국가의 운명을 손안에 쥐고 천하를 경영하는 큰 정치인이라도 시골에 묻힌 조그마한 부친 앞에서는 그냥 아들일 뿐인 것이 「고향의 조건」이다.
김 최고위원의 서양식으로 포옹하는 모습은 조금 생소했다. 그보다는 좌정한 노인아버지 앞에 공손히 무릎 꿇고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의 부자는 대개가 나이들수록 덤덤하고 무뚝뚝하다. 나이들수록 부친은 아들 앞에서 먼산을 보는게 보통이고,아들은 아들대로 아버지 앞에서는 고개를 반쯤 꼰채 웃목이나바라보면서 딴청을 한다. 선산이야기,어렵게 사는 동기간 걱정따위를 아버지가 「잔소리」처럼 늘어놓으시면 묵묵히 들어 드리다가 요긴한 대목에서 우물우물 대답을 한다. 그런 아들이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든든하고 소중한만큼 어려워서,알아서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옛날 할머니 어머니들은 나이든 부자는 되도록 겸상도 차려주지 않았다. 서로 불편하여 식사를 누리기 어렵다는 배려때문에 조손이나 손자만큼 어린 아들이 아니면 겸상을 해주지 않는다. 아무튼 출세를 많이 하거나 크게 된 아들이 소박한 귀향길에 촌로로 보이는 아버지에게 공손히 절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다.
흡사 이름은 없지만 꼿꼿하고 당당한 서민앞에 겸손하게 절하며 하명을 기다리는 검박한 정치인의 모습같은 것을 발견하게 하는 모습이다.
분당 소용돌이의 안개정국이 한치 앞도 제대로 비쳐주지 않는 이런 혼미한 계절에 「고향」 타령이나 하고 절의 「정서」를 늘어놓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목소리 가다듬어 꾸짖기도 지쳤고 정국을 탐색하기도이제는 성가셔졌다.
다만 순하고 소박하고 겸허한 정서의 총체인 「고향」을 지녔다는 것이 우리의 정의적 자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향이 이렇게 각별히 느껴진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또 지금이 깊은 가을철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난감하고 무력감이 드는 이 느낌이 겨울로까지 연장되지 않도록 순하고 겸허하며 현명한 가을의 감성을 발휘해 주었으면 좋겠다.
영국의 왕중에서도 가장 신사도의 덕목을 지녔던 조지 5세의 「행장전범」이 있다. 침대 머리맡에 새겨놓고 기도하듯 외웠다는 이 전범을 20세기의 현인 임어당은 추천한다.
「게임의 룰에 순종할 수 있게 하옵시고,
칭찬할 정서와 타기할 감상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시며
값싼 칭찬을 하지도 말고,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지도 말게 하소서.
만일 나에게 수난을 요구하면 그것을 묵묵히 받아서 순종하는 동물처럼 되게 하소서.
이겨야 할때는 이기는 법을,져야 할때는 멋진 패자가 되게 하소서.
달을 향하여 읍소하지 말게 하시고 쏟아진 우유에 미련을 갖게 하지 마소서」
이 전범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그 첫 항인 듯하다. 「게임의 룰」에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을 기도로 되뇌며 일상을 지냈다는 일이 매우 인상적이다. 군왕조차도 지키기가 쉽지 않아서 이렇게 간절하게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 아니었겠나 싶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든다.
그 다음으로는 네째항인 「수난을 요구하면… 순종하는 동물처럼」 되게 해달라는 대목이 좋다. 수난이란 동물처럼 맹목으로 묵묵히 당하는 것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는 철학을 터득한 전범이기 때문이다. 「멋진 패자」란 말이 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정치인에게는 특히 정상급 정치인에게는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 것 같다.
깊어가는 가을,맑은 마음으로 여러번 반추해볼만한 이 전범을 모든 힘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