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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중국 지방정부가 연명해 나가는 법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중국 지방정부가 연명해 나가는 법

    중국 중부 허난(河南)성 루저우(汝州) 지역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전화 벨이 울리기만 하면 깜짝깜짝 놀란다. 그들이 받는 전화가 위급 환자를 빨리 치료해 달라는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병원장이 거액을 마련해 오라고 대출을 부탁하는 ‘대출 앵벌이’를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 탓이다. 병원장은 루저우시에 병원 시설이 부족하니 병원을 새로 지어야 한다며 건설비 명목으로 대출을 받아달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의료직 종사자들의 대부분은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까닭에 수천 달러를 대출받으면 갚을 길이 없는 만큼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린다. 지방정부 온라인 게시판에는 “상처를 덧내는 것과 같다. 정부 사업에 위해 왜 서민들의 돈이 필요한지 묻고 싶다”는 내용의 비난 글이 쇄도했다. 인구 100만 명의 루저우시는 중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주요인 가운데 하나인 부채 과다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표적인 중소 도시이다. 중국 지방정부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병원 의사들과 간호사, 학교 교직원들이 ‘대출 앵벌이’로 내몰리고 있다. 이들 공공기관의 기관장들이 직접 나서서 직원들에게 공공기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이 필요하니 대출을 받아달라고 다그치는 일이 심심찮게 이어지는 것이다. 중국 지방 정부들은 일자리 창출과 공장 가동을 위해 수년 동안 지속적으로 부채를 늘려왔지만 중국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파산 위기에 몰리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10일 보도했다. 미중 무역전쟁 등으로 30년래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고 있지만 중앙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눈덩이처럼 불어난 대규모의 부채 감축에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지방정부들이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당시 미국발 금융위기가 중국에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4조 위안(약 666조원)을 시중에 내다풀었다. 이 덕분에 중국 경제는 ‘반짝 효과’를 맛봤다. 2009년 1분기 6.4%로 곤두박질쳤던 성장률이 곧바로 반전돼 10%대 두 자릿수 성장세를 회복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인위적으로 내다푼 거액의 돈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실화해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중국 지방정부들은 당시 경제성장의 핵심 추동력인 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별도의 자금조달기관, 즉 지방정부융자 플랫폼(Local Government Financing Vehicles·LGFV)을 만들었다. LGFV는 지방정부의 부동산 담보를 근거로 은행에서 대출받아 지방정부에 자금을 제공하는 기관이다. 지방정부는 LGFV를 통해 은행으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빌려 인프라 사업에 쏟아부었다. 중국 금융당국 조사에 따르면 지방정부들은 담보가치보다 많은 자금을 끌어오거나 심지어 담보 설정도 하지 않은 채 자금을 조달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은행들도 기업대출을 통해 돈을 벌 최고의 호기라고 생각하고 기업 부실 여부를 면밀히 살피지 않은 채 무분별하게 대출을 해줬다. 지방정부는 파산하더라도 중앙정부가 지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한 것이다. 히자만 올들어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하면서 경기둔화세가 이어지면서 부채 문제가 발등에 불로 떨어진 중앙정부가 부채감축 정책을 완화하면서 다시 LGFV를 통한 자금조달이 급증했다. LGFV는 올들어 9월 말까지 2조 3700억 위안 규모의 위안화 표시 채권을 발행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8% 증가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2016년 기록했던 사상 최대치인 2조 5600억 위안을 깨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 없다. 중국 정부는 지방부채 총계를 2조 5000억 달러(약 2925조원) 규모라고 밝히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8조 달러 규모를 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더군다나 지방정부가 떠안은 채무 가운데 오는 2021년 말까지 2년반 사이에 3조 8000억 위안이 상환 만기를 맞는 탓에 중국 경제에 위기를 초래할 뇌관이 될 우려를 낳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전했다. 미국 컨설팅업체 로듐그룹 주밍치(朱鳴岐) 애널리스트는 “중국 경제가 타이타닉호와 같은 배라고 생각하면 지방정부 부채 규모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며 “지방정부의 부채는 갑판에 쌓여 있는 화물 컨테이너와 같다. 이미 화물 컨테이너가 너무 많이 쌓여 있다고 경고했다.상황이 이런 만큼 루저우와 같은 지방정부의 숨어 있는 부채는 중국 정부에 큰 골칫거리일 수 밖에 없다. 중국 지방정부들은 아직도 ‘흰코끼리’(겉보기에는 좋지만 실속 없다는 뜻) 사업에 해당하는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통해 성장률을 끌어올릴 생각에 목을 맸다. 중앙정부가 ‘스포츠’를 강조했을 때 루저우시는 복합 스포츠센터를 건설했다. 1만 5400 명을 수용하는 스타디움과 농구장, 컨벤션센터, 베이징 인민대회당과 같은 으리으리한 강당을 지었다. 중앙정부가 ‘기술’을 슬로건으로 내세우자 루저우는 복합 스포츠센터를 빅데이타와 e커머스(전자상거래) 센터로 개명하고 스타디움을 내려다보는 e커머스 맨션을 짓기도 했다. NYT 취재진이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브레이크댄스 팀이 공연을 위한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반면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해 4년 전에 첫 삽을 뜬 루저우 판자촌 재개발 사업은 자금 부족으로 현재 중단된 상태다. 지방정부가 이 같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세금과 대출만으로는 자금이 많이 부족한 만큼 중앙정부 지원과 부동산 매각을 통해 재원 조달에 나서지만 이 역시 충분하지 않다. 루저우시 정부가 돈에 쪼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루저우시 정부는 더 많은 돈을 빌리기 위해 LGFV를 설립했다. 루저우시 정부는 LGFV를 통해 자금을 조달해 복합 스포츠센터와 같은 인프라 프로젝트에 자금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것이다. 천즈우(陳志武) 홍콩대 아시아글로벌연구소장은 “LGFV는 지방정부가 자금을 빌릴 수 있는 대출 도구일 뿐”이라며 “중앙정부가 이 도구를 없애면 지방정부는 또하나의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수년 동안 지방 정부의 부채를 감축하는것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경제성장률 둔화가 가팔라지면서 루저우시 정부가 높은 이자를 갚지 못하고 연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은행들이 루저우의 병원 세 곳과 공공기관들에 대해 4500만 달러 규모의 빚을 갚지 않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고 NYT는 전했다. 이어 8월에는 루저우문화투자발전공사 등 공공기관과 중의학병원 등이 정부 블랙리스트에 올라 대출이나 다른 사업 거래에 대한 자금조달이 제한받고 있다. 가오인량(高銀亮) 루저우문화투자발전공사 융자부 주임은 “단순히 대출 보증인으로 연루됐을 뿐 돈을 빌리는 데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돈줄이 마르자 중국 지방정부들은 병원과 학교, 기타 기관을 이용해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지방정부 관리들은 지역 병원 관리자들에게 지역 투자펀드를 지원해달라고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메모에는 “지역 병원 관리자와 직원들은 병원 신설을 지원하기 위한 전환사채를 매입할 것을 권장한다”고 적혀 있다. 일부 병원들은 직원들은 돈을 갹출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경영자들은 할당량을 정했다. 중의학 병원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1인당 10만 위안에서 20만 위안을 내라는 병원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불평했다. 루저우 산부인과·소아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은 6만 위안에서 10만 위안을 투자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지방정부는 재빨리 발뺌을 했다. 장위항(張宇航) 루저우 중의학병원장은 현지 지역 관영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결코 자금 조달을 강요한 적이 없다”며 “병원들이 정부 정책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모두 자발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아마추어 사진 애호가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아마추어 사진 애호가

    사진을 취미로 삼게 된 건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어느 날 문득 카메라에 눈길이 갔다.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꿈이 떠올랐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여건도 안 되고 소질도 대단치 않아 주저앉았던 것이다. 그림 대신 사진이었다. 디지털 시대라 필름 부담 없이 마음껏 찍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내겐 필름카메라의 추억 같은 건 별로 없다. 20년 가까이 취미 사진을 찍으면서 단체로 출사라며 몰려다닌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진은 철저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앨런 하비의 말대로 “사진은 몰려다니면서 찍는 것이 아니다.” 사진을 좋아한다면서 단체로 몰려다닌다는 것은 토끼가 헤엄을 치는 것만큼이나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남이야 뭐라 하건 내 생각은 그렇다. 크고 무겁고 비싼 카메라를 가져 본 적이 없다. 늘 휴대하기 좋은 무게와 크기의 카메라를 선택하려 했다. 피터 린드버그는 “사진의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별하는 기준은 누가 더 좋은 카메라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사진기를 손에서 놓지 않느냐다”라고 말했다. 광각 줌렌즈 끼운 카메라, 그게 거추장스러우면 작은 팬케이크 렌즈 끼운 카메라 한 대를 항상 몸에 지니려고 한다. 찬스는 언제 올지 모른다. 사진만을 위한 여행을 해본 적도 없다. 지방에서 기차 통근을 오래했기에 퇴근 무렵 기차 기다리는 시간을 주로 활용해 사진을 찍었다. 영국 역사가 트리벨리언은 “내겐 주치의가 둘인데, 그건 나의 왼발과 오른발이다”란 말을 남겼다. 걷기 운동은 사진 취미의 덤이다. 윌리엄 인지는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무언가 진실한 것을 발견하려는 사람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고 말한다. 완벽하게 동의한다. 초라한 곳에서, 아니 초라할수록 아름다운 장면이 나온다. 호화 주택가보다는 구도심 뒷골목이나 판자촌에서, 햇살 쨍쨍한 한낮보다는 땅거미 질 무렵 더 좋은 그림이 나온다. 우리 삶도 그런 것 아닐까. 초겨울 해질 무렵 담장 아래 시들어 가는 꽃을 담았다. 영어 ‘에듀케이션’(educationㆍ교육)은 어린이의 개성과 가능성을 끌어낸다는 뜻이다. 사진가의 눈은 피사체의 가장 아름다운 면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교사 또는 부모의 눈과도 비슷하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 전쟁의 비극·고단한 삶…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恨 많은 고개’

    전쟁의 비극·고단한 삶…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恨 많은 고개’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8차 서울의 대중가요3(단장의 미아리고개)’ 편이 지난 2일 강북구 미아동과 성북구 길음동·돈암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우이신설선 솔샘역 1번 출구에 집결했다. ‘미아리’라는 지명을 낳은 신라의 고찰 미아사~송천동성당~옛 미아리공동묘지~옛 미아리 유해업소를 거쳐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의 1950년대 명곡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를 만났다. 최근 송가인이라는 트로트 가수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입에 다시 오른 구성진 노랫가락의 위력을 새삼 느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미아리 점성촌이 마지막 코스였다.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에는 절절한 슬픔이 뱄다. 너무 가팔라서 넘나들기 고달팠고, 병자호란과 한국전쟁의 서울 침공로였으며, 공동묘지가 있던 시절엔 상여길, 조문길이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끌려가던 가족을 향해 울부짖던 비극의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 그 ‘창자를 끊는’ 미아리고개에는 미아리하늘고개다리와 노래비 그리고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이날 해설을 맡은 강영진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늘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미아리의 애사를 두 발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안내했다.서울 동북부의 관문 미아리의 역사는 2002년 서울시 시범 뉴타운 지정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개발의 속도와 규모는 전광석화 같았다. 10여년 만에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미아리의 잔상은 오간 데 없고 거대한 아파트 숲이 하늘을 가린 채 즐비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미아리의 행정구역은 한성부 동부 숭신방 동소문외계 미아리였다. 동소문 밖 성저십리(성 밖 십리)에 속했다.‘조선성시도’와 ‘한양도’ 등 옛 지도에는 오랑캐 적(狄), 넘을 유(踰), 고개 현(峴)자를 써서 적유현이라고 적었다. 한양에서 강원도나 함경도를 오가는 길손은 동소문(혜화문)~적유현~수유현~양주 길을 지나다녔다. 사람들은 이를 쉽게 병자호란 때 되놈(청나라군)이 넘어온 되너미고개라고 말하고, 이를 한자로 돈암현이라고 옮겼다. 또 길음동이라는 지명은 ‘기리묵골’ 또는 ‘기레미골’이라는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미아리고개 북쪽 정릉천 골짜기의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길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비가 오면 땅이 질퍽해 ‘질음골’이라고도 불렸다. 1792년 광릉으로 행차하던 정조는 미아리고개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잠시 머문 뒤 ‘야차제만장봉’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때 이곳의 지명이 미아리(美阿里)라고 적혀 있어서 현재의 미아리(彌阿里)와는 한자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길음1동의 옛 돌산(신안아파트)은 건축용 석재를 채취하던 채석장으로, 나머지 지역은 왕실의 매장 터로 쓰였다. 1911년 경성부 지도에 미선리, 미하리라고 표기됐으나 1930년대에 인쇄된 경성부 관내도에 비로소 미아리(彌阿里)라는 표기가 정착됐다. 청량사에서 청량리가 유래했듯 원효대사가 세운 불당골(미아7동)에 있던 미아사가 미아리라는 지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차 종점이 있던 돈암동은 시내, 고개 너머 미아리는 시골로 인식했다. 이후 경기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1914년)에서 성북구 미아리(1949년)로 변경되면서 미아1·2·3동과 길음동, 인수동, 송천동, 삼양동 등 우리 귀에 낯익은 이름이 생겼다. 인수동은 삼각산(북한산) 인수봉, 삼양동은 삼각산 아래 양지바른 동네라는 뜻이다. 송천동은 샘이 솟는 소나무 숲 마을이었다. 1973년 도봉구에 속했다가 1975년 다시 성북구로 회복됐다. 1995년 강북구가 분구되면서 길음동은 성북구, 미아동은 강북구로 갈라졌다.장소인문학에서 말하는 미아리의 정체성은 일제강점기 1930년에 완공된 공동묘지 조성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아리 공동묘지는 1912년에 만들어진 19개 공동묘지 중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였다. 1937년에 모두 1만 6000기의 무덤이 있었다. 주택난과 매장지 부족으로 1933년 망우리, 1958년 파주 용미리, 벽제로 각각 이전했다. 이상, 이육사, 유관순, 한용운, 최학송, 나석주, 이중섭 등이 묻혔다가 망우리 등으로 이장됐다. 또 도시빈민들의 이주로 정릉천변과 공동묘지 주변에 토막촌과 무허가주택촌이 형성됐다. 미아리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인민군의 격전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북으로 끌려가던 북송인사 때문에 ‘한 많은 미아리고개’ 별칭이 붙었다. 1958년 미아리공동묘지가 벽제와 망우리로 이장하면서 이재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길음동의 대표적 공영주택 백호주택은 1962년 입주 신청을 받았는데 당시 분양가구가 100호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호당 50평 안팎의 대지에 12평짜리 벽돌기와집을 지었다. 당첨자는 땅값을 내고 건축비 14만 2500원은 25년 분할 상환했다. 미아리는 인수로, 삼양로, 미아로 등 세 가닥 큰 길이 주축을 이룬다. 정릉천 물길인 인수로는 정릉천에서 길음동 돌산에 이르는 도로명이다. 인수로 좌우에는 거대한 무허가 간이주택이 천변동네를 형성했다. 본래 좌우제방을 도로로 이용하다 세 번에 걸쳐 복개돼 도로가 됐다. 뉴타운개발 후 길음시장과 역세권을 제외하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1960년대 후반 청계천 복개와 종로3가의 집창촌 ‘종삼’이 철거되면서 하월곡동 88 정릉천변 일대로 이주, ‘미아리 텍사스’라는 오명이 따라붙었다. 2000년대 길음 재개발로 대부분 헐려 나갔다. 삼양로는 길음역4거리에서 수유동 쪽 길이다. 1962년 미아초등학교 앞쪽에 백호주택이 들어선 뒤 위쪽을 잇는 도로가 생겼다. 수유동에서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는 미아사거리는 본래 미아삼거리였다. 장위동으로 나가는 길이 확장되고 입체교차로가 들어서면서 사거리가 됐다. 백화점과 할인마트, 극장 등이 들어와 길음동과 미아동, 삼양동 일대 상권의 중심지가 됐다. 1997년 미아리 텍사스가 정비되고, 1999년 내부순환도로 완공, 2002년 길음뉴타운 지정으로 이 일대는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개벽했다. 미아로, 미아리고개, 미아리하늘다리, 미아사거리 등 미아리가 붙은 지명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이유로 지명을 바꾸려던 한때의 시도가 무색하다.가슴 저미는 노랫말로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우리나라 대중 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 작사자 반야월은 가요 사상 가장 많은 작사, 가장 많은 히트곡, 가장 많은 노래비를 남긴 인물이다. 작사가 반야월은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함께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꼽혔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반야월은 미아리고개 너머에 살았다. 혼자 피란을 떠난 부인이 5살짜리 어린 딸을 등에 업고 미아리고개를 넘다 숨진 딸을 길섶에 묻은 비극적인 가족사를 노랫말로 만들었다. 미아리는 문학작품의 단골 소재였다. 미아리 사람들의 생활사가 서민의 삶을 대변했다. 소설가 김소진의 대표작 ‘장석조네 사람들’에서 “한 지붕 아래 아홉 개의 방이 한 일자로 늘어서 있어 사람들이 기차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장석조네 집터는 옆의 행길보다 석 자 정도는 높게 다져져 있었다”라는 대목은 1970년대 돌산 아래 ‘열차주택’을 묘사한 장면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장편소설 ‘한강3’에서도 미아리 무허가 판자촌과 구불구불한 비탈길이 나온다. 신경림의 시 ‘길음시장’과 박완서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는 미아리의 불법 매장 풍경이 그려졌다. 1986~1994년 방영된 인기 TV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도 열차주택 풍경이 등장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29차 효창공원 ■집결 장소: 11월 9일(토) 오전 10시 효창공원역 1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추억 속, 달동네로 간다 -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추억 속, 달동네로 간다 -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달동네 #인천수도국산 #1970년대생활상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 샛강 바닥 썩은 물에 / 달이 뜨는구나/...(중략).../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 다시 어두워돌아가야 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1978, 창작과 비평사> 한가위 보름달, 두둥실 떠있는 달동네로 찾아 간다. 달동네 어원의 유래는 여러 갈래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중반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이 정부가 정한 값싼 산자락 자투리 땅에 ‘ㄱ’자 모양 집을 짓고 살다보니 밤에는 달과 별이 바로 보인다해서 ‘달동네’, 한 달 단위로 ‘달세’를 내고 산다고 해서 ‘달동네’, 혹은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의 임시 주거지를 ‘상자(하꼬)’같이 작은 ‘방’이라고 해서 흔히들 ‘하꼬방’, ‘바라크’라고 부르던 이름으로서의 ‘달동네’ 등등 설명도 제각각이다.그런데 본격적으로 ‘달동네’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명확하다. 바로 1980년에 방영한 TBC동양방송의 드라마 '달동네'가 방영된 직후다. ‘달동네’는 도시 속 실향민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극중 아역인 ‘똑순이’의 인기에 힘입어 시청률이 60%까지 오른 작품이었다. 이후부터 ‘달동네’는 도심의 가난한 이들이 ‘가족’ 단위로 모여 사는, ‘아직은 이웃의 정이 남아 있는’ 서민 주거지를 뜻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달동네는 판자촌, 빈민가, 쪽방촌 등의 단어 개념과는 좀 다르게 인정(人情)이 ‘여전히 살아 있는’ 마을의 다른 이름으로도 쓰이게 된다. 바로 달동네를 기억하는 곳, 인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으로 가자.한 마디로 인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은 도시에 위치한 박물관으로서는 단연 기획력이 뛰어난 곳이다. 위치도 정확히 예전 달동네가 있음직한 산비탈 꼭대기까지 허위허위 올라가야 한다. 산 아래부터 일찌감치 달동네박물관 견학은 시작되는 곳이다. 그러하니 박물관 자리도 제자리를 잡고 있다. #인천생활사박물관 #송현배수지 #고향집박물관이 있는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으로, 원래는 바닷가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다. 그러다 개항 이후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고 예전부터도 물이 귀했던 이곳에 1906년 수도국 (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착수하게 되었다. 바로 ‘수도국산’이라는 명칭은 이 산언덕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송현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생겼다.처음 수도국산에 달동네가 생긴 시간은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인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일본인들에게 상권을 박탈당한 도시 하층 빈민들이 소나무숲 사이로 모여 들었다. 이후 한국전쟁과 1960년대 산업화로 인해 주로 전라, 충청 지역 사람들이 모이면서 약 181,500㎡(5만5천여평) 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모둠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도국산은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되었다.바로 이러한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으로 1960~70년대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테마로 하여 2005년 10월 25일에 개관하였다. 박물관에는 일상사 속에 실존했던 수도국산 달동네 서민의 평범한 삶과 생활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곳에는 구멍가게, 연탄가게, 복덕방, 이발소 등의 자그마한 가게를 비롯하여 공동수도, 공동화장실, 부업장면(성냥갑 만들기), 야학당(청산학원)도 실물형태로 재현하고 있어 관람객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인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대한 방문 10문답> 1. 방문 추천 정도는? - ★★★☆ (★ 5개 만점) - 기대 이상이다. 천천히 시간을 내어 가보자. 2. 누구와 함께? - 70년대를 기억하는 누구라도. 늙으신 부모님과 함께. 다만 언덕길이어서 천천히 3. 가는 방법은? - 1호선 동인천역 하차, 4번출구, 도보 10분 / 동인천 북광장 → 송현시장 입구(파리바게트와 인천종합동물병원 사이길) → 오르막길 약 400m 4. 특징은? - 국내 곳곳에 있는 ‘엄마 아빠 옛날 옛적에’ 류의 70년대 생활사 박물관 들 중에서는 단연 수준급.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주말을 제외하고는 한산한 편이다. 가족 단위로 다녀오면 좋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달동네 상점들, 만화가게, 달동네소극장 7. 토박이들로부터 확인한 추천 먹거리는? - 인천은 단연 맛의 고장이다. 노포 가게지만 인천 동구 해장국의 역사 ‘해장국집’, 한치회 ‘물레방아’, 쭈꾸미 ‘우순임할머니’, 세숫대야냉면 ‘삼미소문난냉면’, 막걸리 ‘개코막걸리’, 오징어찌개 ‘송림기사식당’ 8. 홈페이지 주소는? - 요금 및 운영 관련 자세한 내용은 http://www.icdonggu.go.kr/open_content/museum/ 으로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차이나타운, 월미도, 인천생태박물관, 개항박물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시간을 내어서라도 가보길 권유한다. 인천지역이 성장하고 발전하던 시절의 뒤안길을 걸어 볼 수 있는 귀한 곳. 이런 지역 특색을 가득 지닌 박물관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지나온 삶의 의미와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작지만 단단한 박물관.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영동대로 삼성역에 고속철 관철… 교통 허브 강남으로 거듭날 것”

    “영동대로 삼성역에 고속철 관철… 교통 허브 강남으로 거듭날 것”

    “영동대로 지하에 고속철이 들어오도록 하겠다.” 정순균 서울 강남구청장은 지난 28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는 2023년 영동대로 지하에 건립되는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에 고속철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국토교통부 및 서울시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지난 10일 강남의 삼성역~봉은사역 사이에 추진 중인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 지정을 최종 승인했으나 당초 예정됐던 고속철도 연장노선(수서역∼삼성역∼의정부)은 제외시켰다. 강남권 광역복합환승센터는 영동대로 삼성역∼봉은사역 630m 지하 구간에 지하 7층, 연면적 16만㎡ 규모로 조성된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A·C), 도시철도(위례∼신사 경전철), 지하철(2·9호선), 버스 등 환승시설이 들어선다. 정 구청장은 “지하 7층 규모로 개발하는데 다 지은 뒤에 고속철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다시 땅을 파서 공사를 할 것이냐. (처음부터) 삼성역에 고속철이 들어오도록 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영동대로 지하에 왜 고속철이 들어와야 하나. “광역복합환승센터 원안은 수서역 고속철이 삼성역을 거쳐 의정부까지 가는 거다. 그런데 국토부에서 경제성을 따져 보니 비용 대비 편익이 낮게 나와 삼성역에 고속철이 들어오지 않는 걸로 했다. 서울의 중심인 삼성동에 고속철이 들어오면 부산, 광주 등 전국 어디든 갈 수 있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평화시대로 바뀌고 유라시아대륙까지 철도가 연결되면 삼성이 유라시아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연말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GTX-A노선은 청담동 주택가에서 한강하부로 변경되나. “다른 지역은 모두 주택가를 지나야 해 대안이 없지만 청담동은 다르다. 주택가가 아니라 영동대교 밑에서 성수대교 쪽으로 한강 아래를 우회하면 된다. 한강하부 대안노선도 반드시 관철돼야 한다.” -지난 1년을 돌아봤을 때 가장 ‘기분 좋은 변화’는. “공무원들의 대민서비스 자세가 달라졌다.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구청 1층 민원실과 22개 동사무소도 바뀌었다. 구청 민원실은 주민과 소통하는 주민친화공간으로, 동사무소는 공무원들 업무 공간에서 주민 커뮤니티시설로 바뀌었다.” -공무원들이 어떻게 달라졌나. “구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구민들이 원하는 걸 하려고 한다. 구민들도 구청이나 동사무소 직원들의 업무 처리나 서비스 자세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체감하고 있다.” -거리도 훨씬 깨끗해졌다는 평인데. “청결도 주민들이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변화 중 하나다. 거리 청소는 기본이고 화단 조성 등 미관 개선에 주력했다. 고가 13곳의 외벽을 닦아내고 도색했으며 미관상 좋지 않은 지상기기 1200여개에 목재 격자와 야자수로 디자인한 ‘트렐리스’(울타리)를 설치했다. 누구나 강남에 들어서면 단번에 ‘역시, 강남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거리에 플래카드도 안 보이던데. “강남에선 플래카드를 보기 힘들다. 정치인이든 구민이든 업자든 가로 질서를 해치는 불법 플래카드를 내걸면 무조건 철거한다. 주말에도 기동순찰반 2개조가 단속, 주말을 틈타 기습적으로 내거는 플래카드를 모두 철거한다. 플래카드 철거는 깨끗한 거리를 위해 꼭 필요한 조치다. 구청도 공익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면 플래카드를 내걸지 않는다.” -1년 전 23년 만에 처음 보수 텃밭에서 더불어민주당 구청장으로 당선됐다. 당시 이를 두고 걱정하는 구민들도 있었는데. “보수 성향 주민들께서 급격하거나 일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닌지 불안해했을 건데, 그건 제 스타일이 아니다. 구정은 정치가가 아니라 행정가가 한다. 집안 어머니 역할을 하는 사람이 구청장이다. 정치적 이념을 내세워 한 쪽만 편드는 구정은 있을 수 없다. 모든 판단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구민들에게 도움이 되느냐 여부다. 주민들께서도 지난 1년간 펼친 구정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을 거다. 민주당 구청장으로 무리 없이, 모나지 않게, 순리적·합리적으로 구정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구민 화합을 위한 제1의 조건은. “구청장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인 구정을 펼치면 구민 화합은 절로 이뤄진다고 본다. 민주당 출신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민주당에 유리한 구정을 펼친다면 구민 화합은 물 건너간다. 지난 1년간 양쪽을 다 아우르는 구정을 펼치려 노력했다.” -강남구청장의 성공 요건은. “강남구민들 수준이 굉장히 높다. 모든 면에서 일등도시에 산다는 자부심도 강하다. 강남에서 사는 것 자체가 자랑이고 행복이라고 여긴다. 구청장은 이런 구민들의 자긍심에 생채기를 내선 안 된다. 강남에 대한 구민의 자긍심을 해치지 않는다면 반은 성공한 것이다. 예전엔 구청장 때문에 구민들이 자긍심에 손상을 입고 속상해했다. 구민들의 높은 자긍심을 충분히 세워 주고 강남을 서울시민뿐 아니라 전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 최대 규모의 판자촌인 개포동 구룡마을 개발 진행 상황은. “7월 중 사업실시계획 인가가 나면 보상을 거쳐 내년 초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주민들에겐 편하게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을 제공하고 토지소유주들은 ‘대토’ 방식으로 재산상 이익을 보장해 주는 방향으로 하려 한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빈자 안식처’ 부산 동항성당 근대역사 문화재 등록 추진

    ‘빈자 안식처’ 부산 동항성당 근대역사 문화재 등록 추진

    6·25전쟁 이후 빈민구제 사업 등에 큰 역할을 한 부산 남구 우암동 소막마을 동항성당에 대한 문화재 등록이 추진된다. 부산시는 문화재청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확산 사업’ 공모에 동항성당을 신청했다고 8일 밝혔다. 동항성당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같은 예수상이 있다. 붉은 벽돌로 된 건축물로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부산항의 석양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에게 인기를 끈다. 최근 TV 방송에 소개된 뒤 관광객들이 부쩍 많아졌다. 6·25 종전 직후인 1954년 천막성당으로 시작한 동항성당은 1957년 성탄절에 지금 모습으로 건립됐다. 지역 빈민 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에 큰 역할을 했는데 그 중심에는 하 안토니오 몬시뇰 신부가 있었다. ‘우암동 판자촌의 성자’로 불리는 하 신부는 피란민 구호와 교육의료 사업 등 58년 동안 부산에서 헌신하다 2017년 94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하 신부는 길거리를 배회하던 소년·소녀 장애아 등을 데려와 사제관에서 키웠다. 또 1965년 한독여자실업학교(현 부산문화여고)를 세웠고, 학교가 해운대로 옮겨가자 1977년 그 자리에 조산원을 설립해 신생아 2만 6000여명의 출산을 돕기도 했다.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하 신부를 가톨릭교회 명예 고위직인 몬시뇰에 임명했다. 동항성당 최성철 베드로 주임신부는 “하 안토니오 신부님이 우암동 주민을 위해 헌신하셨듯 성당의 문화재등록이 지역주민 삶의 질과 주거환경 개선에 좋겠다고 판단해 문화재 등록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부산시는 국비와 시비 200억원을 들여 피란민들 삶의 애환을 담은 소막마을 지역자산을 피란생활과 주거, 피란생활과 경제, 피란생활과 종교 등 3개 스토리 및 테마로 구성해 역사문화자산을 통한 체험형 필드 뮤지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빈자 안식처’, 부산 동항성당 문화재등록 추진.

    ‘빈자 안식처’, 부산 동항성당 문화재등록 추진.

    한국전쟁 이후 빈민 구제 사업 등에 큰 역할을 한 부산 남구 우암동 동항성당에 대한 문화재 등록이 추진된다. 부산시는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확산사업 공모에 동항성당을 신청했다고 8일 밝혔다. 동항성당은 리우데자네이루와 같은 예수상이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건축물로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부산항의 석양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최근 TV방송으로 소개된 이후 외지 관광객들도 많이 찾고 있다. 한극 전쟁 직후인 1954년 천막성당으로 시작한 동항성당은 1957년 성탄절에 지금의 모습으로 건립됐다. 지역 빈민 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에 큰 역할을 했는데 그 중심에는 하 안토니오 몬시뇰(1922~2017) 신부가 있었다. ‘우암동 판자촌의 성자’로 불리는 하 신부는 피난민 구호와 교육?의료사업 등 58년 동안 부산에서 헌신하다 2017년 94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하 신부는 길거리를 배회하던 소년·소녀 장애아 등을 데려와 사제관에서 직접 키웠다. 또 1965년 한독여자실업학교(현 부산문화여고)를 세웠고, 학교가 해운대로 옮겨가자 1977년에 그 자리에 조산원을 설립, 신생아 2만6000여 명의 출산을 돕기도 했다.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하 신부를 가톨릭교회 명예 고위직인 몬시뇰에 임명했다. 명예 부산시민이었던 그는 부산의 ‘기억 자산’으로서 피란시절의 우암동을 중심으로 많은 사진자료도 남겼다. 동항성당 최성철 베드로 주임신부는 “ 하 안토니오 신부님이 우암동 주민을 위해 헌신하셨듯이 성당의 문화재등록이 지역주민의 삶의 질과 주거환경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문화재 등록을 동의했다”고 말했다. 부산시는 국?시비 200억 원을 투입해 피란민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우암동 소막마을의 지역자산을 피란생활과 주거, 피란생활과 경제, 피란생활과 종교 등 3개의 스토리 및 테마로 구성해 역사문화자산을 통한 체험형 필드 뮤지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문학 속 서울공화국… 욕망으로 지은 도시

    문학 속 서울공화국… 욕망으로 지은 도시

    정부가 19일 발표한 3기 신도시 조성 계획은 ‘서울로의 접근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정부는 신도시에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를 새로 깔고 지하철을 연장하며 간선급행버스체계(BRT)를 신설해 “30분 내 서울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번 계획은 서울의 위상을 다시금 보여 준다. 서울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한 유인책으로 서울에 가기 쉽다는 점을 강조하니 말이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서울공화국’이다. 도대체 서울은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위상을 갖게 된 것일까.신간 ‘서울 탄생기’는 1960~70년대 서울의 변화상을 추적하며 해답을 내놓는다. 다만 이를 바라보는 도구가 문학작품인 점이 독특하다. 저자인 송은영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이호철 ‘서울은 만원이다’, 김승옥 ‘무진기행’, 최일남 ‘서울의 초상’,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박태순 ‘정든 땅 언덕 위’, 박완서 ‘낙토의 아이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작가 16명의 작품 110편으로 서울의 변화를 분석한다. 저자는 1960년대 초반 이후 경제성장과 도시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과거와의 ‘단절’과 ‘망각’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빠른 변화가 지금 서울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우선 1960년대 초반은 혼란을 거쳐 현대 도시 서울을 형성한 법적·행정적 토대가 마련된 시기였다. ‘무진기행’에서 하인숙은 당시 젊은이들의 서울 열망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여주인공이 보여 주는 서울 생활은 혼란 그 자체다. 사기꾼이 득실거리고, 내 몸 하나 제대로 누일 곳도 없다.1962년 1월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에 이어 서울은 1966년 현대 도시로 나아간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1~1966년)의 효과가 슬슬 나타난 지점이기도 했다. 1965년 한·일회담 결과로 한국에 돈이 풀리며 경기가 살아났고, 같은 해 베트남 전투부대 파병과 건설사업 참여 등으로 서울은 고도성장의 기반을 마련한다. 이를 진두지휘한 이는 1966년 4월 부임한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다. 군인 출신인 그는 서울을 현대 도시로 만들기 위해 도시개발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인다. ‘서울은 만원이다’는 그를 가리켜 ‘부산 거리를 의욕적으로 밀어버리고 계속 두 눈을 부릅뜨고 서울로 전임해 온 젊은 시장’으로 묘사한다. 그는 400여동의 시민아파트를 짓고, 봉천·신림·상계동 등지에 거대한 불량지구를 만든다. 판자촌을 쓸어버리려 서울 외곽 변두리 지역인 경기도 광주로 철거민을 강제 이주한다. 결과적으로 사대문 안에 머물러 있던 서울의 실질적 경계는 확장됐고, 현재 서울 전체의 모습도 이때쯤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급작스런 도시 개발은 부작용을 부른다. 1970년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1971년 광주 대단지 소요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사건에 관해 박태순은 ‘정든 땅 언덕 위’의 ‘외촌동’이라는 가상 마을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김 시장은 물러났지만, 서울 개발은 강남으로 이어진다. 포화 상태에 이른 강북 인구를 분산시킬 신시가지인 강남은 전쟁이 나면 또다시 한강을 건너지 못하는 시민들이 생길까 하는 걱정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부동산 투기를 통해 개발자금과 정치자금 등을 마련해야 했던 권력층의 탐욕이 있었다. 특히나 1972년과 1973년은 강남과 강북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이다. 1972년 4월 서울시가 강남을 발전시키고자 강북을 특정시설 제한구역으로 설정하며 강남은 뜨고 강북은 쇠락한다. 당시 서울시는 도심부 인구 분산계획의 일환으로 종로구와 중구 전역은 물론 용산구와 마포구의 기존 시가지 전역 등에 백화점, 도매시장, 공장 등 신규 시설을 불허했다. 이듬해에는 강남 지역을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한다. 수많은 상업시설이 규제도 받지 않고 특별법 혜택으로 취득세, 재산세 등을 면제해 주는 강남으로 옮겨갔다. 와우아파트 사고 이후 침체했던 아파트 붐이 살아났고, 명문 고교들이 강남에 터를 잡으며 명실상부한 서울의 또 다른 중심으로 자리잡는다. 박완서의 ‘낙토의 아이들’에서는 강을 경계로 생겨나는 강남과 강북의 거리감을 탁월하게 짚어낸다. 1960~70년대 서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결국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을 향한 사람들의 거대한 욕망은 수많은 부작용에도 불구, 지금의 서울을 만든 근원적인 힘이다. 서울은 주택, 교육, 취업, 여성의 권리 등 현재의 문제가 집약된 곳이자, 제대로 된 자기성찰 없이 근대화에 매진해 온 한국 현대사 현장 자체이기도 하다. 꿈틀거리는 욕망으로 가득한 서울에서 우리는 이렇게 또 하루를 살아간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文 “지구 반 바퀴, 두 계절을 건너왔다”… 아르헨 동포들과의 특별한 만남

    文 “지구 반 바퀴, 두 계절을 건너왔다”… 아르헨 동포들과의 특별한 만남

    1965년 8월 17일 부산항을 떠난 농업이민단 78명은 꼬박 두 달이 걸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그들이 품고 온 것은 농사지을 호미와 종자, 1인당 500달러가 전부였다. 앞서 6·25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 북한 송환을 거부하고 중립국 행을 택했던 북한군 출신 반공포로 중 12명이 당시로써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아르헨티나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50여년이 흐른 뒤 아르헨티나 동포사회는 약 3만명 규모로 커졌다. 남미에서는 브라질(약 4만명)에 이은 두번째 규모다. 지난해 5월 취임 이후 해외 곳곳에서 동포간담회를 가졌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감정이 남달랐던 배경일 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참석차 2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문 대통령은 알베알 아이콘호텔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비행기로 와도 짧지 않은 거리였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왔고, 두 계절을 건너왔다. 이민 1세대는 이 길을 배로 왔다”며 동포들의 지난했던 50년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문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남북평화를 위해 축복과 기도를 여러 번 보내 주셨고 여건이 되면 방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셨는데, 한인 동포사회와의 깊은 인연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며 “아르헨티나 동포가 한반도 평화를 돕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고 했다. 이어 “교황님이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주교로 있던 시절 한인 동포사회와 귀한 인연을 맺었다”며 “교황님께서 병원 사목을 위한 봉사자를 찾을 때 한국 성가소비녀회 수녀님들이 달려와 그 역할을 기꺼이 맡았고 문한림 주교님과 동포사회가 다리 역할을 했다. 교황님께서 직접 해 주신 얘기”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 후 한국 수녀님들은 20년 넘게 봉사하시며 현지에서 ‘올해의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특히 빈민촌의 천사 세실리아 이 수녀님은 많은 아르헨티나인의 존경·찬사를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한인 동포사회가 대단한 것은 개척정신만이 아니라 나누고 돕고 함께 잘사는 정신”이라며 수익을 반으로 줄이면서 동포들에게 편물을 가르친 조화숙씨와 농작물을 동포에게 절반 가격으로 판매한 문명근씨 사례를 소개했다. 이어 “맨주먹으로 밭 갈고 집 짓던 힘든 시절에도 ‘혼자 잘살겠다’가 아닌 ‘우리 동포가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이런 헌신·희생을 가능하게 했다”며 “그렇게 109촌을 비롯한 빈민 지역 판자촌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 한인 동포사회는 현재 중심 상권인 아베쟈네다 상가 절반가량을 운영할 정도로 성장했고, 올해는 김홍렬 대표께서 외국인 최초로 아르헨티나 섬유재단 회장에 선출됐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동포사회에 또 하나 감탄하는 것은 다른 지역과 달리 2·3세들이 한국어를 매우 잘한다는 사실”이라며 “몸은 지구 반대편에 있지만, 마음에는 언제나 조국이 담겨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5만 고시생의 성지는 ‘인생 고시생’ 안식처 됐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0회 신림동(대학촌과 고시촌) 편이 지난 24일 관악구 신림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서울대학교 정문을 출발한 참석자들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안 예술관(서울미래유산)과 규장각을 둘러본 뒤 캠퍼스를 빠져나와 첫눈이 제법 소담스레 쌓인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또 서울미래유산이지만 지난해 폐차된 콜럼버스 스넥카와 폐가 일보 직전의 조각가 전뢰진 가옥에서 서울미래유산의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해 생각을 나눴다.고시촌과 녹두거리, 지난해 조성한 민주열사 박종철 거리,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자리를 옮긴 사회과학 전문서점 ‘그날이 오면’에서 투어를 마무리했다. 1981년 이후로 가장 많은 양의 첫눈이 펑펑 쏟아진 날, 지하철 서울대입구역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버스가 끊기는 바람에 출발 시간이 30분 지연됐다.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가 시작된 이래 첫 ‘천재지변’이 발생했지만 참가자들은 불평 없이 미끄러운 고갯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그리고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첫눈을 즐겼다. 관악산은 어떤 장소의 역사를 갖고 있을까. 서울을 정치·지리학적으로 설명할 때 역사도심은 한양도성이 에워싸는 내사산(內四山·백악산-인왕산-남산-낙산) 안쪽을 가리킨다. 도성 안에 내수(청계천)가 흐르고 외수(한강)가 도성 밖을 감싸고 있다. 도성 바깥의 북쪽 삼각산(해발 836m), 서쪽 덕양산(125m), 남쪽 관악산(629m), 동쪽 용마산(348m)을 외사산(外四山)이라고 부른다. 외사산은 내사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성저십리(성 밖 십리)와 외사산 영역은 다르다. 성 밖 십리의 북쪽은 비봉~정릉동, 동쪽은 미아리~용답동, 남쪽은 한강변, 서쪽은 역촌동~모래내를 이른다. 도성 밖 십리는 서울의 통치 영역인 반면 외사산은 경기도에 속했다. 한강 이북의 성 밖 십리와 외사산의 영역은 겹치는 곳이 많지만 한강 이남은 소외됐다. 서울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생산기지이자 문화적으로 서울권에 속하는 강남지역은 관악산 안쪽에 있으면서도 서울에 속하지 않았다. 서울의 풍수개념에서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상산(祖上山)이요, 지리산에서부터 뻗어 오른 관악산은 임금이 아침마다 알현하는 조산(朝山)이었다. 서울의 남과 북을 잇는 축선(軸線)은 삼각산과 관악산 선상에 있다. 광화문네거리에서 보면 서울의 주산 백악산과 경복궁이 직선 라인에 있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서울의 남북 간 축선은 삼각산~백악산~경복궁~숭례문~관악산으로 그어졌기 때문이다. 관악산 정상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듯했다.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라고 부르고, 관악(冠岳)이라고 썼다. ‘벼슬 산’이라는 이름도 쓰였다. 조선 개국 초 무학대사는 관악산이 화산(火山)이고, 목멱산(남산)은 목산(木山)이어서 관악산 화기가 목멱산 나무를 불쏘시개 삼아 도시를 태운다고 예언했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막고자 남대문(숭례문) 편액을 세로로 세워 부적을 삼았고, 남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파서 방화수를 채웠다. 불이 길을 따라 올라오지 못하도록 직선도로(세종대로)를 닦지 않고, 숭례문에서 지금의 남대문로를 따라 보신각까지 둘러간 뒤 운종가(종로)에서 꺾여 육조대로(광화문광장)에 이르도록 정(丁)자형 길을 닦았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의 광화문네거리에는 황토마루라는 낮은 언덕을 쌓아 관악산의 불길이 대궐에 미치지 못하게 막았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치 두 마리에게 광화문 앞을 지키게 했다. 모두 5겹의 방화장치를 할 정도로 관악산 화기를 두려워했다. 관악산 기슭 지금의 신림동, 봉천동과 금천구 시흥동 일대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금주, 조선시대엔 금천이라고 불렸다. 고려 강감찬 장군의 5대조 강여청이 터를 잡았으며, 부친 강궁진은 고려 창업과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에 책봉됐다. 장군이 태어난 관악구 낙성대동 218의 14번지 생가 앞마당에 탄생기념 삼층석탑을 세울 정도의 떵떵거리는 호족이었다. 신림동(新林洞)이라는 지명은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에서 비롯됐다. 서울대 캠퍼스 안 자하연이라는 연못은 의성 김씨가 모여 사는 자하동이라는 집성촌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야영장 등 군사시설로 썼고, 1963년 서울에 편입되면서 해방촌, 청계천, 이촌동, 대방동 등지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을 수용하는 철거민 정착촌을 형성했다. 1970년대까지 도시빈민의 무허가 건물이 난립하는 기반시설 부재의 우범지대였다. ‘돼지막’이라는 절간 분위기의 하숙방 몇 채가 고시촌의 원조이다. 1969년 서울대를 ‘한강 이남 수원 이북’으로 옮기는 관악캠퍼스 건립계획이 확정됐다. 태릉, 신갈 일대, 과천, 안양 등이 후보지 물망에 오른 끝에 관악컨트리클럽이 있던 골프장 용지가 낙점된 것이다. 일부에선 “서울대 종합화는 구실이고, 데모 막으려고 한곳에 모아놓은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1975년 2월 28일 동숭동에서 관악산 중턱으로 옮긴 서울대의 시위와 저항정신은 1980~1990년대 민주화운동의 열풍으로 타올랐다. ‘관악산의 화염이 나라를 태울 것’이라던 무학대사의 예언이 들어맞은 셈이다. 서울대 정문과 신림동 일대를 중심으로 동맹휴업, 수업거부, 시위, 이념서클활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시인 김지하는 ‘숨죽여 흐느끼며/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타는 목마름으로/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여 만세’라고 노래했다.학사주점 ‘녹두집’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이용하는 주점, 인쇄소, 당구장, 서점, 사진관, 슈퍼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오늘날 유흥가로 바뀐 녹두거리다.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젊은 지성의 의식화 공간이요, 은신처였으며, 화염병 제조 공장지대였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하숙집이 있던 골목이었다. 1980년대 말 고시학원이 등장하고, 사법고시를 통해 법조인을 대거 선발하던 1990년대가 되자 전국의 고시생이 신림동으로 모여들면서 신림동 고시촌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녹두거리는 ‘녹두 베가스’로 불렸다. 녹두거리의 인문사회과학서점들은 서울대 학내 시위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1980~1990년대 ‘그날이 오면’, ‘전야’, ‘열린글방’ 등은 녹두거리의 서점 트로이카로 꼽힌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고시생이었고, 전국에서 몰려든 고시생 5만명이 북적거리던 호시절이었다. 흔히 신림동이라고 불리던 신림9동은 2013년 행정명이 바뀌면서 대학동이 됐다. 고시촌은 2008년 로스쿨 도입을 꼭짓점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고시생들은 떠나기 시작했고, 고시 특수 때 신축한 고시원과 원룸의 공실률은 40%를 넘어섰다. 수많은 서점, 헌책방, 복사집, 고시식당, PC방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관악구는 여전히 서울에서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은 동네다. 10집 중 3집 이상이 1인 가구다. 서울 전역의 고시원 6곳 중 1곳이 관악구에 있다. 고시생들이 떠난 자리에 공무원시험이나 국가고시 준비생, 외국인 유학생이나 취업자, 새내기 직장인, 일용직 노동자, 기초생활대상자들이 스며들었다. 집값이 싸고, 물가가 저렴하고, ‘혼밥 혼술’ 시설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없고, 발조차 뻗을 수 없는 1평짜리 고시원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취약계층의 안식처로 풍속도가 변했다. 2018년 신림동 고시촌은 등껍데기가 없는 달팽이처럼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민달팽이족’들이 잠시 머무는 밀실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단편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의 고시와 같은 것이 아닐까…인간은-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고 고시촌 시대의 아픔과 자기성찰을 얘기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후암동 (문화주택단지의 어제와 오늘) ●일시: 12월 1일(토) 오전 10시~낮 12시 30분 ●집결장소 : 지하철 1호선 서울역 5번 출구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앞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http://futureheritage.seoul.g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었다…해방촌, 찬미와 절망의 동거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었다…해방촌, 찬미와 절망의 동거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8회 서울의 영화1(유현목의 오발탄) 편이 지난 10일 용산구 용산2가동 해방촌 일대에서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화인이 뽑은 ‘한국영화 100선’ 중 당당히 1위로 뽑힌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의 무대를 누볐다. 영화의 원작인 이범선의 1959년작 단편소설 ‘오발탄’과 1961년작 영화 두 편 모두 서울미래유산 무형유산이다. 영화를 주제로 삼은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는 처음이다. 1950~60년대 한국전쟁 전후 오발탄의 무대인 해방촌이란 지명은 동네의 이미지일 뿐 행정지명이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외국인 거주자와 젊은층을 중심으로 HBC(해방촌의 영문 이니셜)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한때 서울에만 20만채 판잣집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 2번 출구에 집결한 투어단은 해방촌 입구의 명물 한신옹기를 지나 보성여고~해방촌 성당~해방촌교회~해방5거리~신흥시장~108계단~용산중·고교 간을 2시간여 동안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삭막한 풍경을 상상했다. 해설을 맡은 김미선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처음 시도한 영화투어에 현장감을 불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설문응답자들은 “해설 없이 걸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상에 빠졌다”, “몰라보게 변해버린 서울의 과거사를 떠올린 시간”, “불후의 소설과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소감을 남겼다.서울은 초거대 도시이다. 1000만명이 606㎢ 안에 살고 있다. 1㎢에 1만 7000명꼴이다. 국토의 0.6%에 인구의 20%가 몰려 있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생활권역에 묶여 있다. 서울은 메가시티(Mega City)이면서 인접 대도시와 띠로 연결된 메갈로폴리스(Megalopolice)이기도 하다. 1935년까지 30만명 선에 머물던 서울인구는 일제강점기 대륙침략을 위한 거점도시화하면서 1942년 100만명까지 늘었다. 불과 반세기 만에 10배로 팽창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00만명이 넘는 월남피난민, 중국과 일본으로 떠났던 해외동포의 귀환, 학교와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농민들이 마구잡이로 유입됐다. 1959년 수용한도를 초과해 200만명이 몰려들면서 도심과 남산, 인왕산, 북한산, 관악산 아래와 한강 주변에 난민이 대거 자리잡았다. 서울 인구는 1972년 600만명을 돌파한 뒤 1988년 1000만명 시대에 접어들 때까지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마냥 마구 몸집을 불렸다. 판자촌은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이 미군이 가져온 나왕, 미송 등 목재와 루핑, 깡통 등을 이용해 임시거처를 지은 데서 유래했다. 한때 20만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한 맺힌 디아스포라의 절규이며 우리가 겪은 주거의 사회사이다. ●영화 속 판잣집 소통 불가의 현실 “해방촌 고개를 추어 오르기에는 뱃속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 종이를 흰 실로 얼기설기 문살에 얽어맨 철호네 집 방문이 보였다.…비틀어진 문틈으로 그의 어머니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자! 가자!’” 원작 소설 속 해방촌 묘사이다. 그러나 백 마디 글보다 영화 한 컷이 더 웅변적이다. 영화에서 보여 주는 철호의 판잣집은 소통 불가의 현실이며, 안식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공간이다. 로케이션 장면이 많은 영화는 근대적인 거리와 판자촌의 구불구불한 골목길, 공동수도 터, 푸세식 공동변소 등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눈앞에 펼쳐 보인다. 유현목 감독의 리얼리즘은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해방촌의 가난과 절망을 영상으로 보여 준다. 영화는 군사혁명 당국으로부터 ‘상영 불가’ 판정을 받았다.●해방 후 이북·해외서 온 동포들 용산으로 당시 용산은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도시였다. 한양도성 남산구간 바깥에서 한강까지 용산 전체의 20% 가까이 일본군영이 자리잡았고 나머지 지역은 철도부지와 일본인 거주지였다. 해방 이후 이북과 해외에서 들어온 동포와 월남민을 구제하기 위해 이 구역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남산 서쪽 기슭인 용산2가동 일대의 국유림에 정착지를 조성했다. 이때 38선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삼팔따라지’라고 냉대했다. ‘3·8’은 화투 도박에서 끗발이 가장 낮은 한 끗이므로 이를 비하해 한 끗짜리 인생이라는 뜻에서 따라지라고 한 것이다. 이들은 해방촌을 비롯해 이촌동, 용두동, 마장동 등지의 피난민촌에 모여 살았다. 해방촌이 자리잡은 남산 서쪽기슭은 인적이 없는 고요한 목장이었다. 김정호의 ‘경조 5부도’에 기록된 것처럼 갑오개혁 때까지 왕실 제사에 사용할 소와 양, 돼지를 키우던 전생서(典牲署) 터였다. 왕이 기우제를 지내던 남단(南壇)이 지척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일본군 20사단의 사격장으로 변했다. 해방촌의 기원은 해방 직후 용산동 4가 일본군 관사에 무단 거주하던 월남 피난민 50여 가구가 서울에 진주한 미군에게 관사를 비워주고 미군 트럭에 실려 이곳에 내리면서 시작됐다. 1947년 평안북도 선천군 군민 400여 가구도 집단이주, 일본군이 관리하던 경성호국신사를 중심으로 피난살이가 본격화됐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3년 대륙침략전쟁 당시 전쟁전사자를 추모하고 승전 분위기를 고취시키고자 마지막 발악처럼 건설한 신사가 바로 108계단으로 남은 경성호국신사다. 판잣집은 호국신사 간판과 건물을 떼어다가 지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호국신사 자리에 대형 천막을 세워놓고 천막 1개에 5~6가구씩 들어가 생활하다가 한 가구당 5~6평씩 불하를 받았다.●서북청년단·영락교회 영향력으로 탄생 1949년 주민들은 용산동이라는 동명을 해방동으로 바꿨다. 반공으로 똘똘 뭉친 서북청년단의 기세가 해방촌 건설에 한몫했다. 서북청년단의 비호 아래 해방촌은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가 됐다. 해방촌 형성과정에 영락교회의 영향력이 컸다. 영락교회는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월남민들 사이에서 ‘이북5도청’이나 마찬가지였다. “산등성이를 악착스레 깎아 내고 거기에다 게딱지 같은 판잣집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이 해방촌이 이름 그대로 해방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멀리 고향 쪽을 바라보며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철호 가족의 절망이 안타까운 영화에서 해방과 해방촌에 대한 역설이 등장한다. 당시 서울 인구의 반이 정부로부터 극소량의 식량을 배급받아야 하는 절대 빈민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방촌이라는 지명은 해방을 맞아 몰려든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주민들 스스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걸 해방됐다고 표현할 정도로 터부시 됐던 마을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쓰였다. 해방촌은 디아스포라의 섬이다.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눈에는 차를 타고 풍경을 요약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들어온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는 도시의 만보객은 현대문명에 반하는 오래된 것들을 찬미함과 동시에 도시 근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오된 것들에 대해서도 절망감도 느낀다. 해방촌은 찬미와 절망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그 시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갔다가 나왔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가리봉동(구로공단의 신화) ●일시 : 11월 17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장소 : 1호선, 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7번 출구 ●신청·안내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go.kr)
  • 김수현 소통·조정능력 靑참모들 인정…“뒤 생각하며 일하는 사람 아니다”

    참여정부 때 인연…文캠프서 공약 설계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사안도 핵심 정리 무리하게 일 처리 않고 충분히 얘기 들어” 보수진영선 “사회수석 때 정책혼선” 비판 김수현(56)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사회수석에 임명돼 비서관 진용이 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1~2개월간 부동산·에너지·복지·교육 등 경제·사회 정책 전반을 주도했다. 그만큼 문재인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왕(王)수석’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첨예한 현안들을 관장하다보니 부동산과 에너지전환 정책(탈원전), 대학입시 등 교육 현안과 관련한 정책 혼선이 적지않았고, 소득주도성장의 기조 전환을 요구해온 보수진영의 반발도 거셌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부동산 정책 실패와 개혁성 후퇴를 이유로 비토론이 제기됐다. 참여정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는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아 경제를 모르는 사람은 곤란하다”고 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관리형 관료 출신인 홍남기 내정자와 부동산 가격 폭등의 주역인 김수현 정책실장으로 이뤄진 새 경제팀은 경제개혁 정책을 포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2012년, 2017년 두 차례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의 ‘정책 브레인’ 역할을 했다. 문 대통령과는 참여정부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다. 2005년 국민경제비서관으로 일하며 8·31 부동산 정책을 만들었다. 지난해 대선 때는 도시재생 뉴딜사업, 임대주택 확대 등 핵심 공약을 주도했다. 청와대 참모들이 꼽는 그의 강점은 소통과 조정 능력이다. 김 실장도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내각과 청와대 비서실의 팀워크를 한 단계 더 높이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강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충분히 이야기를 듣는다. 관련 부처 장관들과 수시로 통화한다”며 “직원들이 스스로 방향을 제시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곤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핵심 관계자는 “정책 사안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고,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라도 단순화시켜 핵심을 잘 정리한다”고 평가했다. 김 실장이 일했던 사회수석실은 보건·복지, 교육, 부동산, 기후·환경, 저출산 문제 등을 총괄하는 곳이다. 풍부한 국정경험과 전문성은 물론 문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잘 이해해야만 다룰 수 있는 업무들이다. 신고리 원전 건설 중단, 대입제도 개편, 부동산 정책 등이 대표적이다. 이 관계자는 “부동산 문제는 외부에서 굉장히 문제 제기가 많았지만, 중요한 사안에 대해 본인의 판단이 명확하면 끝까지 밀고 나갔다”며 “강하게 원칙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기자간담회를 했을 때도 김 실장(당시 사회수석)은 “이번 정부는 어떤 경우에든 부동산 가격에 대해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출마 등) 뒤를 생각하며 사심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대통령이 신임하는 것도 크게 작용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물론 그가 주관한 부동산 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실패한 정책’으로 낙인찍힌 참여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대해선 그도 입버릇처럼 “책임감을 느낀다”고 한다. 참여정부 시절 종합부동산세를 입안했지만 결국 집값을 잡지 못한 데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지난해 8·2 대책과 올해 9·13 대책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한동안 서울 집값이 잡히지 않아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사회수석 경질론이 일기도 했다. 김 실장은 경제 전문가는 아니다. 20대 때 판자촌 철거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30대 들어 한국도시연구소에서 빈곤을 연구했으며, 40대 때 제도권으로 들어와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도시 정책을 다뤘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박원순 시장의 정책 분야를 총괄했다. 굳이 따지자면 ‘도시 정책 전문가’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관계자는 “장하성 전 실장처럼 경제적 전문지식이 있으면 좋을 수도 있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라며 “정책실장의 본분은 큰 틀의 방향을 설정하고, 담당부처가 올바른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그 점에서 김 실장의 능력을 대통령이 높게 평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애초 정부 출범 때 첫 정책실장으로 대통령이 김 실장을 비중 있게 고려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은수미 “지역화폐 발행 1000억원까지…콜센터 직원 공무직 전환할 것“

    은수미 “지역화폐 발행 1000억원까지…콜센터 직원 공무직 전환할 것“

    “시민 청원제를 도입하고 지역화폐 발행 규모를 1000억원까지 확대하겠다. 또 판교 트램을 차질없이 추진하고, 콜센터 직원 등을 공무직으로 전환하겠습니다.” 오는 8일 취임 100일을 맞는 은수미 경기 성남시장이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시정 구상을 밝혔다. 은 시장은 이날 시청 한누리실에서 열린 회견에서 “취임 100일이 다가온다. 그동안 성남 미래에 대한 구도를 잡았다. 앞으로는 질책과 비판, 격려와 성원을 보내주는 시민 여러분과 소통하면서 성남만의 그림을 그려가겠다”고 말했다. 은 시장은 아동수당의 지역화폐 지급과 관련 “지급 수단을 체크카드로 변경한 뒤 신청률이 99%에 육박할 정도로 배려와 지지를 보내주셨다” 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은 시장은 “대기자 제로를 목표로 한 초등 돌봄과 어린이 병원비 100만 원 상한제, 시립의료원 개원을 실시하겠다”며 “서울 출퇴근 2위 도시에 맞게 위례신사선과 8호선 판교역 연장 등 지하철노선 확대, 버스 준공영제, 트램, 공유 전기자동차 도입 등 교통체계 개선에도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선순환 경제구조의 자족기능 강화를 위해 지역화폐 1000억원으로 확대와 사용 편의를 위한 모바일 결제도 도입하겠다”며 “대내외적으로 경제 전망이 그리 밝진 않지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데 멈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은 시장은 47년 전 서울 판자촌 주민 집단이주과정에서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 재조명과 원도심 도시재생 등 지역 정체성과 특성에 기반을 둔 도시전략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쪽방촌이 ‘행복촌’으로 변모하도록” 공동시설 안전지킴이로 뜬 종로구청장

    “쪽방촌이 ‘행복촌’으로 변모하도록” 공동시설 안전지킴이로 뜬 종로구청장

    공사장 방문하고 환경 개선 지원 약속“오는 11월까지 종로 새뜰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을 완성해 쪽방촌 주민들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김영종 서울 종로구청장은 지난 21일 일명 ‘돈의동 쪽방촌’이 몰려 있는 돈화문로9가길에 건립 중인 종로 새뜰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 공사장을 찾아 안전을 점검했다. 184㎡ 부지에 지하 1층~지상 5층 연면적 578㎡ 규모로 건립되는 시설에는 욕실, 주방, 세탁실, 서가, 작업장 등이 들어선다. 일대 80여개 건물 740여개 쪽방에서 변변한 가구별 욕실이나 취사시설도 없이 지내는 주민 600여명이 목욕, 요리, 빨래 등은 물론 이웃 간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건립하는 것이다. 시설 건립은 쪽방촌 일대 생활 개선을 위한 ‘돈의동 새뜰마을 사업’의 하나로 추진하고 있다. 앞서 구는 2015년 서울시 자치구 중 유일하게 지역발전위원회와 국토교통부의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 프로젝트 공모사업’에 선정돼 4년간 50여억원의 예산을 받아 돈의동 새뜰마을 사업을 진행 중이다. 사업에는 공동이용시설 건립뿐만 아니라 마을경관개선, 범죄예방디자인적용 등을 통해 지역 환경 개선 프로젝트가 포함돼 있다. 김 구청장은 이같이 목욕, 취사 등을 할 수 있는 공동시설뿐만 아니라 1인 가구 혼자 살기에 적당한 가구당 14㎡ 규모의 임대아파트 300호 이상을 지어 쪽방촌 주민들에게 공급한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2002년 은평구 노재동 구청장 당시 구산동 결핵환자 판자촌을 임대아파트로 재개발해 19㎡(약 6평)에 보증금 244만원, 월 임대료 3만 2400원에 공급, 재입주율 99%를 달성한 그린빌 아파트를 선례로 제시했다. 쪽방촌 주민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창문 한 칸 없는 쪽방 건물을 더이상 짓지 못하도록 하는 데서 나아가 1인용 임대아파트를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로구는 새뜰마을 희망밥상, 마을집사 돈의동 홍반장, 행복마을학교 한글교실 등 돈의동 쪽방촌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사업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김 구청장은 “최소한의 인간적이고 안정적인 삶터를 제공해 공동체 회복을 이끌어 내는 게 돈의동 새뜰마을사업의 최종 목표”라면서 “앞으로도 새뜰마을이 도심 속 행복마을로 변모할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서동철 칼럼] 고층 빌딩 사이에 문화유산 숨기기

    [서동철 칼럼] 고층 빌딩 사이에 문화유산 숨기기

    숭례문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언덕길 오른쪽에 서울도큐호텔이 들어선 것은 1971년이었다. 그것은 흉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훨씬 더 높은 곳에서 숭례문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25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1970년대 막바지 대학에 들어가 주변을 지날 기회가 더 잦아진 뒤에는 더욱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건 ‘할짓’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자본의 호텔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문화유산을 돋보이게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숭례문에는 정말 미안한 표현이지만, 호텔 화장실처럼 왜소하게 보이게 만든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일본 호텔 자본이 철수하고 지금은 단암빌딩으로 이름을 바꾼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김중업 선생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는 서울의 도시 및 건축 계획과 관련한 정부 시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서울도큐호텔이 문을 연 바로 그해 프랑스로 사실상의 강제 출국을 당했다. 그런 김 선생이 도큐호텔 같은 건물의 설계를 수락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도큐호텔 이후에도 반성은 없어 오늘날 숭례문이 고층빌딩으로 포위당하는 처지가 된 것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바와 같다. 우울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고 해도 파리 르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도 공부한 김 선생이었으니 의외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파리라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숭례문과 서울도큐호텔의 악연을 떠올린 것은 지금 부산 복천동 고분군 안팎에서 빚어지는 파문 때문이다. 지금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주변에서 고층 아파트 건축을 위한 허가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66만㎡ 남짓한 부지에 5층에서 32층에 이르는 아파트 6000가구 안팎을 짓는 대형 공사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1969년 무허가 판자촌을 택지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처음 고분이 드러났다. 이후 여러 차례 발굴 조사에서 200기 안팎의 2~7세기 무덤과 토기, 철제무기류, 갑옷, 투구, 금동관, 목걸이 등 1만 2000점 남짓한 유물이 확인됐다. 출토 유물은 긴급 발굴에서부터 화제를 모았다. 학계는 얇은 철괴인 철정(鐵錠)에 주목했는데, 사실상 화폐처럼 사용한 철기 재료였다. 이듬해는 말머리 장식 뿔잔이 나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유행한 뿔잔과 비슷한 모양이라는 점에서 학계는 동서 교류의 흔적으로 봤다. 1980년에는 420가구의 연립주택을 짓는 공사가 다시 추진됐다. 부산시 문화재 관계자들의 주민 설득으로 발굴 조사가 시작되자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대량으로 나온 판갑(板甲)은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불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판갑은 쇠를 두르려 얇게 펴서 만든 갑옷을 말한다. 그동안 가야의 판갑은 일본에서 수입한 것밖에 없다고 했지만, 4세기 판갑이 복천동에서 대거 나오자 5세기 것이 대부분인 일본은 할 말을 잃었다. 고대사의 공백기라는 가야사를 규명하는 실마리가 복천동 고분군에서 찾아지자 발굴 현장 4만 5576㎡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1996년에는 복천박물관도 문을 열었으니 하나의 발굴 현장을 위한 박물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례가 드물다. 지금 추진되는 고층 아파트 건축 계획의 문제점은 둘이다. 우선은 1969년과 1980년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공사를 위해 고분군 주변을 판다면 가야 무덤이 대규모로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음은 문화재를 둘러싼 경관의 문제다. 지금도 복천동 고분군의 일부는 고층 아파트로 막혀 있다. 숭례문을 위축시킨 도큐호텔처럼 새 아파트가 건설되면 고분군의 가치는 더욱 퇴색할 것이다. 지역 고고학자의 모임인 영남고고학회도 ‘경관 보호를 위한 초고층 아파트군의 건설허가 재고’와 ‘고분군 주변을 개발하는 경우라도 철저한 발굴 조사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개발 계획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앞으로의 문화유적 주변은 옛 지형을 유지하는 저밀도 개발과 같은 ‘문화재 친화적 개발’을 유도할 것을 촉구했다. 부산시뿐 아니라 정부와 모든 지자체가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 김민교 어린시절 “수영장+반려견 집사 있었다. 아버지 직업이..”

    김민교 어린시절 “수영장+반려견 집사 있었다. 아버지 직업이..”

    배우 김민교가 부유했던 어린시절을 밝혀 화제다.24일 방송된 KBS2 ‘1대100’에서는 배우 김민교가 출연해 최후의 1인에 도전했다. 김민교는 ‘반려견 집사까지 둔 적이 있었냐’는 MC 조충현의 말에 “제가 고2 때까지는 집이 잘 살았다”고 인정했다. 이어 그는 “어린시절 집에 수영장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그레이하운드가 두 마리 있을 때 두 마리가 저희 집에 다 있었다. 반려견 집사까지 있었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어 그는 “아버지가 종합병원 원장님이셨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김민교의 집 가세가 기울었다. 김민교는 “당시 큰 사기를 당하고 아버지가 도망을 다니셨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를 모시고 판자촌으로 가서 살았다”고 밝혔다. 김민교는 “아버지는 나중에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 스님이 되셨다. 그리고 가족을 등지셨다”고 말했다. 이어 “만약 저에게 그 시기가 없었다면 아직도 철 없이 지내고 있거나 연기를 못할 수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강감창 서울시의원 ‘의정활동 100대성과 보고서’ 펴내

    강감창 서울시의원 ‘의정활동 100대성과 보고서’ 펴내

    서울시의회 강감창 의원(송파, 자유한국당)은 「10년후 송파, 의정활동 100대성과 보고서」라는 제목의 의정보고서를 펴내 지금까지의 의정활동 성과를 주민들에게 자세히 공개했다. 16페이지 분량의 「10년후 송파, 의정활동 100대성과 보고서」에는 지역구인 석촌동, 가락1동, 문정2동 관련 사업에 대한 예산 확보 내역 및 사업성과 뿐 아니라 자신의 의정활동 성적을 계량화하여 객관적 데이터로 제시했다. 의정활동 보고의 주요내용으로는 ▲지역구 교육환경개선사업비 140억 확보 ▲본회의장 발언 34회, 언론보도 1,200회 ▲9대 의회 출석률 100% ▲매니페스토 약속대상 8회 수상 등이 제시됐다. 특히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는, 도시는 사회적 약자부터 담아야한다고 강조하며 9년간의 투쟁으로 개미마을 주민을 지켜낸 것, 석촌시장 노점상의 존치방안을 모색해온 노력, 그리고 무허가 판자촌 화훼마을 주민을 위해 펼친 활동 등이다. 강감창 의원의 의정활동은 각 지역별 맞춤형공약과 특화된 접근방식에서 차별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지역별 키워드를 제시하며 주민들의 요구와 산적한 지역현안에 대한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석촌동은 ‘석촌고분에서 찾아가는 송파의 미래가치 창조’, 가락1동은 ‘더 진화하는 빛’ 헬리오시티, 문정2동은 ‘행복한 주거권+환경권 지키기’를 키워드로 접근했다. 의정활동 보고에서는 석촌동을 변화시킨 내용으로 가득하다. ▲석촌호수~석촌고분간 명소화사업 추진 ▲석촌고분에서 찾아가는 송파의 미래가치창조 사업 ▲주민주도의 마을공동체사업 지원 ▲4차산업 활성화 노력 ▲금년 10월 개통 예정인 지하철 9호선 3단계사업 추진 ▲교육환경 및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이룩한 각종 사업 등 일목요연하게 제시했다. 가락1동 ▲가락아파트 재건축 3종 상향 결실 ▲탄천유수지를 주민친화적 공간개발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 ▲가락시장 재건축 문제 및 장기간 순환개발 문제 지적 등을 통해 헬리오시티를 지속적으로 진화시켜 나가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정2동의 주거권과 환경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내용으로는, ▲교육환경 개선 ▲가락시장내 도축장 이전 ▲문정지구 열병합시철계획 백지화 ▲동남로에 광폭의 녹지 조성 ▲탄천동측도로 훼밀리아파트 구간 250m 탄천연결녹지 조성 ▲문정지구 오피스텔의 주민주도형 관리인선출 지원 ▲문정지구를 동남권역의 신성장동력으로 발전시켜가는 활동이 담겨있다. 강감창 의원은 의정보고서를 통해, “도시는 사회적 약자와 미래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자신의 신념을 반복적으로 밝히고 있다. 도시의 미래가치를 담아내는 활동으로는 △석촌호수와 석촌고분을 중심으로한 명소화거리 조성, △주민주도형 마을기업 발굴 및 역사문화기반 마을공동체사업지원, △석촌역과 문정지구, 등 송파대로를 중심으로 한 송파의 미래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전문성을 바탕으로 열정적으로 일하는 시의원, ‘정책에는 당당하게 주민께는 겸손하게 다가서는 반듯한 시의원이 되겠다’고 주민에게 약속한 초심을 잃지 않는 시의원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투명한 정책ㆍ인사 큰 성과”… 올해도 ‘청사초롱 ’ 불 밝히는 서초

    [자치단체장 25시] “투명한 정책ㆍ인사 큰 성과”… 올해도 ‘청사초롱 ’ 불 밝히는 서초

    조은희 서울 서초구청장은 2014년 7월 민선 6기 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 결심했다. 서초구를 서울 25개 자치구 중 청렴도 꼴찌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슬로건도 ‘청렴과 친절로 구민을 섬기겠습니다’로 정했다. 취임 첫해 국민권익위원회 청렴도 평가에서 서울 자치구 중 12위를 기록했다. 2015년 9위, 2016년 7위, 해마다 꾸준히 오른 데 이어 지난해 12월 당당히 1위에 올랐다. 지난 19일 구청에서 만난 조 구청장은 “청렴도 발표가 있던 날 1위라는 사실보다 청렴도 꼴찌에서 벗어나기 위해 직원들과 함께 땀을 쏟았던 순간들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왜 청렴도 향상에 주력하고자 한 건가요. -주민들이 공무원에게 가장 바라는 게 뭘까요. 바로 청렴입니다. 청렴해야 행정도 신뢰를 받을 수 있어요. 구민 신뢰를 받지 못하는 공직자가 어떻게 구민을 위해 일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공자께서도 무신불립(無信不立),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공직자에 대한 주민 신뢰는 청렴에서 나와요. 그리고 청렴도 꼴찌라는 게 서초구의 명성·브랜드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서울시에서 정무부시장으로 있을 때 서울시장과 함께 서울시 청렴도를 꼴찌에서 1등으로 끌어올렸어요. 당시 경험을 밑거름 삼아 직원들과 의기투합했습니다. ▶3년여 만에 꼴찌에서 1등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특단의 대책이 있었나요. -투명성부터 확보하려 했습니다.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업을 추진할 때도 주민 의견을 수시로 반영했어요. 건축·보조금 지원 등 부패 취약 분야는 민원인들이 직접 모니터링하게 했고, 금품·향응 같은 비리는 징계 수위를 대폭 높였어요. 음주운전은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 아예 싹을 잘랐죠. 지난해 3월 시작한 ‘체인징데이’도 효과를 발휘한 것 같아요. 한 달에 한 번씩 국·과장들이 서로 업무를 바꿔 근무하는 건데, 홍보과장이 건축과장이 되고 건축과장이 주거과장이 되는 식이죠. 내 업무를 다른 국·과장들이 보기 때문에 비리가 싹틀 여지가 없어요. 타 부서의 ?어려움을 알 수 있어 협업도 더 잘 이뤄지게 됐습니다. 퇴근 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금지와 부당한 업무지시 근절 내용을 담은 ‘청렴실천결의문’을 선서하기도 했습니다.▶무엇보다 인사 투명성 확보가 중요했을 듯한데요. -권익위 평가에서 인사청렴지수가 전국 최고 수준으로 나왔습니다. 투명한 인사제도로 청탁을 배제하고 예측 가능한 정기인사를 했더니 직원들 표정이 한결 밝아지더군요. ▶청렴도가 향상되면서 공직 내부 분위기도 바뀌었나요. -직원들이 더욱 친절해지고 부패에서 멀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됐어요. 조직문화가 유연해지면서 직원들 근무 만족도도 높아졌고요. ▶지난 연말 마지막 확대간부회의에서 직원들에게 큰절까지 했는데. -혼자 꾸는 꿈은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하죠. 함께 뭉쳐 꿈같은 기적을 이뤄낸 직원들이 너무 고마웠어요. 직원들에게 제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청렴도 1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일 텐데. -올해 구정 모토를 ‘청사초롱’으로 정했습니다. ‘청’렴 1등 ‘사’수해 푸른 서‘초’ ‘롱’런하자는 뜻을 담고 있어요. 청렴도 1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내부 결속을 다지자는 의미에서 정했는데, 요즘 직원들 사이에 ‘청사초롱! 불 밝히자!’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하네요. 그만큼 직원들의 청렴 의지가 높다는 거죠. 그리고 올핸 ‘데이터 감찰제’를 도입하려 해요. 제보에 의한 사후 조사 대신 홈페이지 민원창구인 ‘구청장에게 바란다’ 등 각종 소통 창구의 데이터를 분석해 비위 행위를 사전에 근절하려고 해요. 조 구청장은 지역민들에게 ‘복손’으로 통한다. 취임 후 수십년 숙원 사업들을 척척 해결, 지역민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37년간 풀리지 않았던 정보사부지 관통 터널 착공, 서초구 마지막 판자촌인 방배동 성뒤마을과 국회단지 개발, 위탁개발 방식으로 건립기금 1000억원을 아낀 서초구청사 복합 개발 등이 대표적이다. 조 구청장은 “취임 직후 기존 프레임에 얽매이지 않고 발상 전환을 통해 과감하게 새로운 프레임을 짜 숙원사업들을 해결했다”고 했다. ▶숙원사업을 거의 다 해결했는데, 앞으론 어떤 사업에 역점을 둘 건가요. -30년 만에 도시계획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려고 해요. 서초구는 1988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강남구에서 분구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도시계획이 바뀐 적이 없어요. 21세기 대한민국 도시재생 모델인 ‘경부고속도로 지하화’, 4차 산업혁명 산실인 ‘양재 R&CD 특구’ 지정, 단절됐던 서초의 동·서를 연결하는 ‘서리풀터널’ 착공, 65건의 재건축 등 다양한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해 30년간 정체돼 있던 도시계획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으려 해요. ▶굵직한 숙원사업뿐 아니라 대형그늘막인 ‘서리풀원두막’ 같은 생활밀착형 행정들도 지역 안팎에서 큰 호응을 얻었는데요. -주민들이 횡단보도 등에서 교통신호를 기다리며 따가운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서리풀원두막을 설치했는데, 주민들이 ‘도심 속 오아시스’라며 아주 좋아하셨어요. 서울의 다른 자치구들은 물론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벤치마킹했어요. 서리풀원두막으로 지난해 유럽연합(EU) 등에서 공식 인정하는 친환경상인 ‘그린애플 어워즈’(The Green Apple Awards)도 받았어요. ▶큰 히트를 친 서리풀원두막이 서울시 반대로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서리풀원두막을 설치하려 했을 때 서울시에서 도로 위에 세우면 안 된다고 반대했어요. 하지만 주민 편의를 위해 강행했죠. 주민 호응이 ?커지자 도로 위에 설치해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이 내려왔어요. 반대한다고 안 했다면 전국으로 뻗어나간 서리풀원두막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뒷골목 모기를 박멸하는 ‘서초 100인 모기보안관’, 도시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입힌 ‘양재천 칸트의 산책길’, 노점상 없는 거리를 만든 ‘강남대로 푸드트럭 존’ 등도 큰 호응을 얻은 생활밀착형 행정으로 꼽히는데, 이런 행정은 어떤 철학으로 추진하나요. -마음을 읽으면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게 됩니다. 행정도 마음을 읽는 게 중요해요. 한여름 땡볕을 가려주는 작은 배려인 서리풀원두막처럼 마음이 담긴 행정, 체온이 묻은 사업들은 주민 호응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죠. 주민 눈높이에 맞춰 주민들이 직접 효과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핵심입니다. 주민들은 구청장이 집안의 작은 일도 챙기는 엄마처럼 골목의 고장 난 가로등, 공원의 낡은 벤치 등 작지만 생활에 불편을 끼치는 것들을 찾아내 꼼꼼하게 처리해 주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조 구청장은 올해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한다. 독일의 첫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롤 모델이다. 부드럽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포용하면서도 뚝심 있게 정책을 펼쳐서다. “서초의 변화는 응원과 따끔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45만 서초구민들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물은 100도에 끓는데, 1도만 보태면 기체가 됩니다. 서초는 다른 자치구와 달리 1도가 더 있어요. 무한한 잠재력과 에너지를 지닌 구민들이 바로 1도입니다. 그 에너지를 모아 서초의 100년 미래를 그려 나가겠습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조은희 구청장은 누구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20대 후반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30대 중반에 청와대 행사기획 비서관, 문화관광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이어 대학교수, 비정부기구(NGO) 대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관(1급), 서울시 최초 여성 정무부시장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2014년 7월 민선 6기 서초구 첫 여성 구청장으로 취임, 강력한 추진력으로 서초의 해묵은 난제들을 풀어내고 있다. 독일 메르켈 총리의 ‘무티 리더십’을 바탕으로 서초의 100년 미래를 위한 그림을 ‘엄마행정’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 강남 판자촌, 공원으로 복원… 달터ㆍ수정마을 주민 이주 완료

    서울 강남구는 무허가 판자촌인 달터마을과 수정마을 거주민 총 156가구를 임대주택 등으로 이주 완료시키고, 이 가운데 98가구를 우선 철거해 원래의 공원으로 복원시켰다고 17일 밝혔다. 달터근린공원 안에 있는 집단 무허가 건물 전체 257가구 중 91가구를 정비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이 점유해 온 공원 전체 면적의 약 37%인 4226㎡ 부지가 다시 공원이 된 것이다. 구는 주민숙원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부서의 무허가판자촌 정비 관련 업무를 도시선진화담당관으로 통합해 3년여간 본격 이주 정비를 추진했다. 달터마을 거주민 257가구 중 70%인 178가구의 이주 동의를 받고 그중 120가구가 보상협의 후 임대주택 등 새 보금자리로 이주를 마쳤다. 신연희 강남구청장은 “아직도 매우 열악한 무허가판자촌에 거주하고 계신 분들이 많은 만큼 하루 속히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도록 계속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강남 대변혁 ’ 청사진 제시한다…신연희 구청장, 5일 신년 인사

    ‘강남 대변혁 ’ 청사진 제시한다…신연희 구청장, 5일 신년 인사

    서울 강남구는 5일 삼성동 코엑스에서 ‘2018년 강남구 신년 인사회’를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국회의원, 시·구의원, 구민 등 1100여명이 참석한다.신연희 강남구청장은 이날 신년사를 통해 강남의 중심인 영동대로의 지상·지하 복합개발이 구의 노력으로 본궤도에 오른 데 대해 감사를 표할 예정이다. 행사장 로비에 지난해 확정된 영동대로 지하공간 통합개발 국제설계 공모 당선작인 ‘빛과 함께 걷다’ 설계도를 전시해 강남 대변혁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한다. 실제로 국내 첫 옥외광고물 자유표시구역으로 지정된 영동대로 무역센터 일대가 지난해 12월 20일 1호 광고물 점등식을 시작으로 한국판 타임스스퀘어로 변모하고 있다. 2020년 이후 현대차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준공, 영동대로 지상·지하 복합개발 완료 등 호재가 예정돼 있어 세계 속의 강남구로 도약할 것으로 구는 본다. 신 구청장은 또 최근 SRT 수서역세권 개발계획이 국토교통부 최종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미래 복합도시로 탄생할 계획을 강조한다. 30년 이상 방치된 판자촌 구룡마을의 도시화개발사업이 올해 하반기에 착공할 수 있도록 지난해 만반의 준비가 완료된 성과도 함께 나눌 계획이다. 신 구청장은 신년사에서 “지난 한 해는 강남 발전을 위한 역사적인 성과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한 해였다”고 소회도 밝힐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연초부터 거의 1년 내내 수사를 받아 힘든 시간이었으나 많은 구민분들의 격려에 용기백배해 소임을 완수할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할 예정이다. 신 구청장은 “올해 남은 임기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소임을 다해 대한민국을 이끄는 창조행정을 굳건히 펼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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