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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잿더미 속 떡국나눈 구룡마을...전장연은 추경호 ‘집 앞 시위’

    잿더미 속 떡국나눈 구룡마을...전장연은 추경호 ‘집 앞 시위’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은 구룡마을 주민들은 설날 아침 떡국을 나누며 마음을 달랬다. 해직 노동자들은 거리 위에서 차례를 지냈고, 이동권 투쟁 중인 장애인들은 연휴에도 시위를 이어갔다. 22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는 집을 잃은 이재민 20여명이 ‘구룡 토지·주민협의회’가 마련한 떡국을 나눴다.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인 이곳은 지난 20일 화재로 인해 임시 건물 형태의 주택 약 60여채, 2700㎡가 소실됐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화재 피해를 본 이재민 60명은 구청이 마련한 인근 임시 숙소에서 설을 보내게 됐다. 미리 준비한 제수부터 신분증, 옷가지까지 모두 불에 타 대부분이 지원 물품에 의존하고 화재를 가까스로 피한 주민들도 수도와 전기, 가스가 끊기는 불편을 겪고 있다. 거리두기가 해제된 첫 설 명절에도 고향을 찾지 못한 해고노동자들은 길 위에서 차례를 지냈다.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은 복직과 노동 환경 개선 을 요구하며 투쟁 중인 노동자들과 차례상을 올렸다.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에서 해고당한 뒤 복직 투쟁을 하다 숨진 정우형씨의 분향소가 설치된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 쿠팡물류센터지회 노동자들이 농성 중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는 각각 차례상이 차려졌다.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서울 중구 세종호텔 해고 노동자들도 “거리두기가 해제돼 관광객이 늘고 매출이 증가했지만 호텔은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해 객실을 운영하고 있다”며 복직을 위한 외침을 이어갔다. 이동권 투쟁 중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서 함께 차례를 지내고 장애인권리예산 쟁취와 장애인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촉구했다. 이후 지하철을 이용해 수인분당선 한티역 인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자택 앞을 찾아 “정부와 기재부가 예산 문제를 이유로 장애인의 기본권 보장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장연은 이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추경호 장관 집에 새배갑시다”라는 글과 함께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티역 인근의 추 부총리 자택 앞 집회를 예고했다. 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이날 집회에서 “추경호 장관이 장애인 권리 예산을 보장할 법률에 동의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앞서 전장연은 지난 4일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단독 면담을 요구하며 시위를 잠정 중단했다가 지난 20일 서울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과 서울역에서 ‘탑승 시위’를 재개했다.
  • 지지부진 재개발 속 또 화재 난 구룡마을

    지지부진 재개발 속 또 화재 난 구룡마을

    20일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은 화재, 수해 등 각종 재난 사고에 취약하다. 서울시와 강남구 등에 따르면 2011년 집중호우로 구룡마을 절반에 달하는 560여개 가옥이 침수됐고, 2009년 이후에는 최소 16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특히 2014년 발생한 화재로 주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집중호우 때는 주택이 침수돼 1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구룡마을은 1980년대 말 도시 내 생활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구룡산과 대모산 자락에 이주하면서 형성된 집단 촌락이다. 주택은 일명 ‘떡솜’으로 불리는 솜뭉치로 사방을 두르고, 내부는 비닐, 합판, 스티로폼 등 가연성 물질로 덮여 있어 특히 화재에 취약하다. 또 좁은 골목에 LPG(액화석유가스) 통과 연탄, 뒤엉킨 전선 등 때문에 한 번 불이 나면 진화가 쉽지 않다. 서울시가 2011년 구룡마을 공영개발 계획을 발표했고, 이후 사업 취소와 논의 재개를 반복하다 2014년 도시개발구역 지정이 해제됐다. 2016년 12월 다시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됐고 시는 4년 만인 2020년 6월 도시개발 실시계획 인가를 고시했다. 시는 당시 2022년 사업을 착공해 2025년 하반기까지 마친다는 목표를 밝혔다. 그러나 보상과 개발 방식을 두고 무허가 주택 원주민과 토지주, 서울시, 강남구의 의견이 달라 개발 사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재개발 사업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주민들은 화재나 수해가 발생할 때마다 임시 구호소로 옮겼다가 다시 판잣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한편, 오세훈 시장은 이날 오전 구룡마을 화재 현장을 찾아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와 강남구에 이재민 주거 이전 대책을 마련할 것을 요청했다.
  • 구룡마을 화재로 주택 60여채 소실, 이재민 62명

    구룡마을 화재로 주택 60여채 소실, 이재민 62명

    20일 오전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 난 불이 5시간 만에 진화됐다. 임시 건물 형태의 주택 약 60여채, 2700㎡가 소실됐고,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날 오전 6시 27분쯤 구룡마을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를 접수한 소방 당국은 신고 접수 이후 1시간 만인 오후 7시 26분쯤 소방 대응 2단계를 발령했다. 화재는 구룡마을 4지구에 있는 한 교회 근처에서 발생해 주변으로 확대됐다. 최초 신고 이후인 오전 7시 1분쯤 5지구 입구까지 불이 번지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기도 했다. 소방·경찰·구청 인력 918명과 소방헬기 등 장비 68대가 투입돼 불길을 잡는 데 주력했다. 오전 9시 16분쯤 소방 대응 단계는 1단계로 하향됐고, 오전 11시 46분 완진됐다. 소방 당국은 발화 원인과 정확한 피해 규모를 조사 중이다.강남구청에 따르면 구룡마을에는 약 666가구가 거주 중이다. 이번 화재로 발생한 이재민들은 인근 숙박업소 등 임시 거주시설에서 지낼 예정이다.
  • 서울 ‘지·옥·고’ 해소 나선다… 반지하·옥탑방 줄이고 안심고시원 지정

    서울 ‘지·옥·고’ 해소 나선다… 반지하·옥탑방 줄이고 안심고시원 지정

    “지난 8월 침수 피해 이후 바닥이 눅눅해 그동안 소파에서 주무셨다고 들었어요.”(오세훈 서울시장) “제 인생 처음으로 물난리를 겪었어요. 절망적이었는데 도움을 주셔서 그래도 한시름 놨어요.”(서대문구 반지하 거주 A씨) 30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반지하 다세대주택에 사는 A씨는 집을 찾은 오 시장을 만나 침수 피해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장애인을 포함해 네 가족이 함께 사는 A씨는 8월 폭우 당시 집 안에 물이 발목까지 차는 침수 피해를 겪었다. 서울시는 4000만원을 들여 이 집의 반지하 외창에 빗물이 유입되는 것을 막는 물막이턱을 비롯해 바닥 교체공사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A씨는 자가로 거주하기 때문에 이주비 지원이 어렵다. 시는 대우건설·한국해비타트와 업무협약을 맺고 진행되는 이번 시범사업을 앞으로 더 확대할 계획이다.시는 이날 A씨가 거주하는 반지하 주택을 포함해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로 대표되는 주거취약계층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8월 침수 피해가 집중된 반지하 거주민들에 대한 지원 대책의 연장선이다. 우선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등 판잣집과 비닐하우스처럼 비정상 거처에 거주하는 1500여 가구의 취약계층에는 공공임대주택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주거비와 이사비 등을 지원한다. 고시원의 경우 스프링클러·피난통로 확보 등의 안전기준과 최소 면적 등 주거기준을 충족하는 민간 고시원들을 대상으로 시에서 ‘안심고시원’ 인증을 실시한다. 2024년까지 총 450개 이상의 고시원을 안심고시원으로 지정하는 게 목표다. 고시원을 대체할 수 있는 1~2인 가구용 ‘서울형 공공기숙사’ 건립도 추진한다. 옥탑방은 구조, 단열, 피난 등 건축·안전기준에 맞게 수리하는 비용을 지원한다. 향후 4년간 총 350곳의 옥탑방을 재정비할 계획이다. 반지하 주택은 폭우 피해 후 발표했던 공공 매입을 통한 반지하 주택 수 축소 계획 외에 주변과 공동으로 개발을 유도하는 ‘반지하 주택 공동개발’도 추진한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주거안심종합센터’를 새로 만들어 이들 과정을 함께 도울 예정이다. 시는 민간 기업의 참여를 넓히기 위해 사회성과연계채권(SIB), 서울형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지표 발굴 등의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오 시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시 내에는 반지하나 옥탑방, 판잣집, 고시원 등 40만 가구가 주거취약지역에서 위태롭게 살고 있다”면서 “기존에는 주택을 얼마나 많이 공급하느냐가 주 관심사였다면 이제 열악한 형태의 주거에 머무는 분들을 어떻게 챙길지로 초점을 옮기겠다”고 말했다.
  • 김현기 의장 “의회가 서울시민의 의사를 최종결정하는 주체임을 보여주는 시금석”

    김현기 의장 “의회가 서울시민의 의사를 최종결정하는 주체임을 보여주는 시금석”

    서울특별시의회(의장 김현기)는 15일 2023년도 예산제출에 따른 서울시장과 서울시 교육감의 시정연설 실시를 위해 제315회 정례회 제2차 본회의를 개최했다. 이후, 11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서울시정 및 교육행정에 관한 시정질문을 실시하고, 11월 21일부터 12월 22일까지 예산안 심의를 비롯해 ‘다중 운집행사 안전 확보에 관한 조례’ 같은 긴급한 민생 관련 조례안 등을 처리할 예정이다. 김현기 의장(국민의힘·강남제3선거구)은 2차 본회의 시작에 앞서, 개회사를 통해, 이번 정례회의 기조는 “응답”과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서울시의회는 지난 행정사무 감사를 통해 확인한 불합리한 정책과 잘못된 예산을 과감하게 삭감하고, 서울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미래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포퓰리즘의 잔재를 과감히 청산하는 동시에 건설적 대안을 모색해 시민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는 시의회 모습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서울시의회는 시민들에게 “책임”을 지겠다며, 예산심의와 조례 제‧개정의 과정은 훗날 시민들의 엄중한 심판을 받기 위함이고, 11대 의회는 집행기관을 단순히 견제하는 소극적 의회상과는 단연코 이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의장은 이번 정례회에서 시대상황을 적극 반영하고, 서울시민의 염원과 의지가 오롯이 담긴 각종 조례안이 처리될 예정으로 의원들 소신에 따라 책임있는 선택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특히, 이번 조례안 심의결정은 서울특별시의회가 서울시민의 의사를 최종결정하는 주체임을 보여주는 시금석이라고 강조했다. 김 의장은 이번 이태원 참사로 서울시는 미증유의 긴급상황에 처해 있다며, 이번 기회에 점검하고 또 점검해서 한치도 빈틈 없게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완벽한 대책을 수립해 줄 것을 서울시에 당부했다. 또한 죽은 지 1년 만에 백골로 발견된 SH임대아파트 거주 탈북자와 관련해 전임시장이 예산, 인력 대규모 확충 등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찾동사업’에 대한 세밀한 점검을 당부했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인 탈북민과 구룡마을 등 판자촌 약자 주민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2036년 서울올림픽 유치, 경부고속도로와 강변북로 지하화, 광화문에서 한강까지 국가 상징거리 조성 등 대규모 개발계획이 해외발 뉴스로 먼저 발표되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책의 최종 결정권자인 서울시의회와 충분히 사전에 논의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발표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김 의장은 지난 서울시 교육청 2차 추경예산 시 추경예산의 70%가 넘는 2조 7천억원을 기금으로 편성하려는 교육청의 나태와 무성의, 부작위로 추경 예산의 심사가 유보 됐음에도, 교육청은 이에 대해 보도자료를 통해 서울특별시의회를 비판했었다며, 그 유보 기간 동안 서울시의원들이 현장을 찾아다니고 학부모의 절절한 요구를 듣고 추경예산으로 반영했음에도, 막상 예산이 통과되자 ‘학교 풍경이 달라질 정도로 예산을 확보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교육청의 행태는 ‘후안무치’라고 지적했다. 덧붙여, 지난 추경예산에 반영된 30억 원은 기초학력 부진 학생 감소를 위해 제대로 된 평가 실행이 핵심임에도 교육청의 임의적 예산 집행과 방치 행태가 지속된다면 내년도 예산도 회기 내 처리가 불투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끝으로, 김 의장은 공감이란 이웃의 아픔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 씀씀이라며 이태원 참사로 이웃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서울과 시민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치열한 삶의 ‘현장 속으로’ 발 벗고 찾아가는 의회, 늘 ‘시민 곁에서’ 애환을 함께 하는 서울시의회를 만들어나가겠다고 밝혔다.
  • 사라진 판자촌, 가난은 더 가난해졌다

    사라진 판자촌, 가난은 더 가난해졌다

    전 세계 도시 인구의 4분의1은 판자촌에서 산다고 한다. 숫자로 따지면 10억명이 넘는다. 유엔에 따르면 2035년이 되면 이 숫자는 두 배에 이를 전망이다. 한국은 ‘다행스럽게도’ 유엔 국가별 통계에서 빠졌을 정도로 판자촌이 없는 나라다. 그렇다고 가난이 없는 건 아니다. 형태를 달리했을 뿐이다. ‘가난이 사는 집’은 한국 도시 주거 형태의 큰 축을 담당했던 판자촌 형성과 소멸 과정을 추적한 책이다. 1980년대 초 서울 시민 10% 이상이 거주하던 판자촌은 10년 만에 2~3%가 사는 곳으로 줄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줄잡아 70만명 이상이 판자촌을 떠나야 했다. 제주도 전체 인구(올해 8월 기준)보다 많은 이들이 대이주에 나섰던 것이다. 이들은 영구임대주택, 반지하방, 쪽방 등으로 스며들었다. 이런 연쇄 이동은 임대료 인상이란 폭탄을 불러왔다. 결국 재개발은 가난에 대한 착시현상만 가져왔을 뿐 가난한 이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사업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한국 판자촌은 다른 나라와 많이 달랐다. ‘모두가 희망을 갖고 살던 곳’이었다. 판자촌은 직업소개소였고 직업훈련원이었으며, 협동조합이자 어린이집이었다. 그런 공간을 밀어버린다고 가난의 본질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모두가 좋은 집에서 살 수는 없지만 최대한 가난한 사람들이 쫓겨나지 않는 개발 정책을 세우고, 개발이익은 도시 전체의 발전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공동체의 회복이다. 판자촌이 사라지면 가난은 영구임대주택 같은 엉뚱한 곳으로 집결한다. 두꺼운 벽 너머에서 일가족이 가난으로 스러져도, 아동학대가 빚어져도 알아채지 못하는 비극이 반복되게 둬서는 안 된다. 또 하나는 더불어 살기다. 저자는 “지금 한국 사회가 누리고 있는 번영의 상당 부분은 판자촌과 그곳에 살던 분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했다. 나만 잘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웃도 잘살아야 내가 더 안전하고 편안해질 수 있다. 싫건 좋건 모두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다.  
  • “강남 슬럼가래”…외국인 사이 ‘핫플레이스’로 뜨는 곳

    “강남 슬럼가래”…외국인 사이 ‘핫플레이스’로 뜨는 곳

    강남 내 한 마을이 최근 외국인 유튜버들 사이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 구룡마을이다. 구룡마을은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 화려한 도시의 이면을 비추는 이색 관광지로 인식되고 있다.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오징어게임’과 같은 문화 콘텐츠가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한국의 빈부격차를 눈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최고 부자 도시로도 소문난 강남에서 마을 한 곳이 외국인 유튜버들에게 ‘성지’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15일 유튜브에서 구룡마을(Guryong village)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마을을 탐방한 후기를 담은 해외 유튜버들의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최악의(The WORST) 슬럼가’, ‘한국 최대의 슬럼가 내부’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고 있다. 영상은 성인 한 명이 지나가기도 비좁은 골목 곳곳과 주민들의 판자촌 생활 모습을 자세히 담는다. 댓글에는 “이곳이 한국이야?”, “인터넷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 “나도 가볼래”라는 반응이 쏟아졌다.외국인들에게 ‘신기한 볼거리’…구경거리 전락 “불편해” 구룡마을은 과거 1980년대 후반 서울 각지에 몰려든 빈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농경지로 사용되던 땅이 바뀐 곳이다. 이들은 구룡마을 구역 곳곳을 탐방하며 탄생하기 시작했던 배경과 현 실태에 대한 문제점을 상기하기도 했다. K-콘텐츠가 해외에서 대대적인 관심을 받은 뒤 구룡마을은 의도치 않게 한국의 실상을 대표하는 장소로 외신의 주목받았다.기생충을 통해 한국의 반지하 주거 형태가 전 세계에 알려진 이후 2020년에는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 방송이 구룡마을을 집중 취재해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외부의 시각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을 주민 A씨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와서 여기저기 촬영하더니 간식이라고 빵을 주고 가더라”고 말했다. 또 다른 마을 주민 B씨는 “일주일 전쯤에도 외국인 몇 명이 더듬더듬 한국말로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촬영도 해갔다”며 “우리는 살아가는 곳인데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고 토로했다.한편 현재 구룡마을 1~8지구에는 약 550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강남구는 2016년 구룡마을을 2692가구 아파트촌으로 탈바꿈하겠다며 재개발 사업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임대 주택 보상이 아닌 재개발 아파트 입주권을 보상으로 요구하면서 현재까지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거주민들은 SH서울주택도시공사가 제공하는 임대 아파트로 임시 이주가 가능하다. 그러나 도시 개발 이후 재입주 조건이 높아질 것을 우려한 거주민들이 개발 예정인 마을 내 일부 지역 토지매입우선권을 요구한 상태다. 서울시와 마을 거주민 사이 합의가 미뤄지면서 구룡마을은 수년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남아있다.
  • 참혹한 수해 현장에 망연자실…“자원봉사 관심 절실”

    참혹한 수해 현장에 망연자실…“자원봉사 관심 절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판자촌은 수마가 휩쓸고간 흔적이 여전했다. 폭우가 쏟아진지 이틀이 지난 이날 30도가 넘는 더위에 내리쬐는 뙤약볕은 구룡마을의 참상을 더 선명히 보여줬다. 세탁기와 냉장고가 흙에 뒤덮여 좁은 길 앞에 버려졌고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집안은 미처 치우지 못한 흙과 가재도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 곳에서만 20년을 넘게 살아 온 김모(80)씨는 “이 작은 집에 흙과 물이 허리까지 차 올랐다. 여기 살면서 비가 많이 왔지만 이렇게 큰 피해는 처음”이라면서 언제 다시 이 곳에 돌아 올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망연자실했다.이날 구룡마을에는 대한적심자사와 전국자율방재단, 육군 210여단 3대대 장병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피해 복구에 한창이었다. 210여단 관계자는 ”어제부터 이틀째 부대 장병과 간부들이 나와 피해 복구를 돕고 있다“면서 ”오늘은 토사로 좁아진 배수로를 다시 넓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룡마을 입구 배수로에서는 10여명의 장병들이 삽으로 중간에 쌓인 토사물을 밖으로 퍼내고 있었다. 대한적십자사에서 나온 50여명의 봉사자들은 침수 가옥을 청소하는 일을 맡았다. 한 청년 봉사자는 ”주민분들께서 해주시는 말씀에 따라 더이상 쓰지 못하는 가재도구들만 우선 밖으로 빼 내고 있다“면서 ”대부분의 가재도구가 쓸 수 없게돼 남은 물품이 얼마 없다“고 말했다. 강남구에 따르면 구룡마을에는 611세대, 1211명이 거주중이다. 이번 수해로 인해 대부분의 주민들이 수해를 입었다. 이날 현재 84가구 106명의 구룡마을 주민들이 구룡중학교 체육관을 임시거처로 생활 중이다. 판자로 이뤄진 구룡마을 가옥은 폭우 당시 빗물과 함께 구룡산에서 쏟아진 토사가 집을 덮치면서 3가구가 완파되고 6가구는 쓸 수 없을정도로 반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임시 거처로 사용 중인 구룡중학교도 개학을 앞두고 있어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다. 강남구 관계자는 ”구룡마을 주민들이 고령자가 많고 건강 문제가 있어 근처 중저가 호텔로 임시 거처를 옮길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라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강남구 보건소에서도 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 관계자는 이어 ”주말에는 구청 직원들도 함께 나와 현장에서 피해 복구 지원에 총력을 기울일 예정“이라고 말했다.다른 서울지역의 수해피해 지역에도 자원봉사자들이 피해복구에 나서 이재민들의 일상 복귀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서울시에 따르면 동작구, 강남구, 관악구등 피해가 큰 지역을 중심으로 침수피해 가구복구를 위해 바로봉사단 및 자원봉사자 1000여명이 9일부터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대다수의 피해가구가 어르신이나 1인 가구가 많아 신속한 현장 정리 및 피해복구를 위해 더 많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면서 “이재민 생활지원, 피해주민 일상회복 지원 등의 영역에도 자원봉사가 필요하여 더 많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고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호소했다. 침수피해 복구 자원봉사 활동은 ‘1365 자원봉사포털(www.1365.go.kr)’을 통해 자치구별 모집 공고를 통해 확인하고 신청할 수 있다. 실시간으로 자원봉사 모집 안내가 게시되고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각 자치구로 문의하면 된다.
  • 성남 대단지 사건 51주년...성남 곳곳서 기념행사

    성남 대단지 사건 51주년...성남 곳곳서 기념행사

    경기 성남시는 8·10 성남민권운동(광주대단지 사건) 51주년을 맞아 10일 성남시청에서 기념식을 연다고 5일 밝혔다. 기념식은 성남민권운동을 다룬 뮤지컬 황무지 공연, 하동근 기념사업추진위원장의 기념사 등이 진행된다. 당시 상황을 담은 공연과 전시행사도 지역 곳곳에서 열린다. 성남아트센터에서는 ▲7~21일 ‘광주에서 성남으로’ ▲9~10일 ‘뮤지컬 황무지’, 성남아트리움 ▲10일 무용극 ‘8월 토마토’ ▲26일 ‘K팝페라로 들려주는 성남민원운동 이야기’ 성남시청 ▲30일 ‘해원-꽃으로 피어나다’ 정자청소년수련원 ▲9월 22일 그림자극 ‘BE’가 열린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정부가 서울 시내 무허가 판자촌을 정리하며 광주대단지(현 성남 수정·중원구)로 강제 이주당한 5만여명이 1971년 8월 10일 최소한의 생계수단 마련을 요구하며 정부를 상대로 벌인 생존권 투쟁이다. 성남시는 지난 2021년 조례 제정을 통해 광주대단지 사건을 ‘성남민권운동’으로 명명했다.
  • ‘차 없는 마을’ 美레스턴 타운… 서울 상륙작전명 ‘세운상가’

    ‘차 없는 마을’ 美레스턴 타운… 서울 상륙작전명 ‘세운상가’

    사무실·아파트·상가 하나로 당시 차일석 부시장 아이디어 서울광장 1983년에 이미 기획 안보 등 이유로 20년 지나 완성“세운상가는 미국 버지니아주의 ‘레스턴 타운’을 참조했습니다. 레스턴 타운은 마을 안에 차가 없어 도보로 이동하며 생활할 수 있는 곳입니다. 세운상가를 하나의 건물 안에 오피스와 아파트, 상가가 있어 차 없이 걸어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상했던 겁니다.” 종로 세운상가 건설 당시 서울시 제2부시장을 지낸 차일석(85) 전 부시장은 세운상가의 아이디어를 레스턴 타운에서 따왔다고 회고한다.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는 주거와 일터, 상가가 복합된 최고급 ‘도심 맨션’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보편화된 주상복합 건물인 셈이다. 서울역사편찬원은 1960~70년대 경제성장기에 서울시 도시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당시 공무원들의 구술이 채록·정리된 ‘서울의 도시계획을 말하다’를 발간했다고 2일 밝혔다. 서울역사구술자료집 제14권으로 만들어진 이 책에는 총 7명의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 담당 공무원이 풀어내는 도시계획의 과정과 비화가 담겼다. 차 전 부시장은 오늘날 개발사업의 전형이 된 공공사업에서 민간자본을 이용하는 방식과 개발을 통해 얻어지는 체비지(개발비 충당을 위해 남겨 뒀다가 매각하는 땅)로 개발 자금을 조달하는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김정근(87) 전 서대문구 도시정비과장은 서울시 토목과와 도시계획과에서 근무하며 청계천 복개 공사를 맡았던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 판자촌이 가득했던 청계천의 복개를 위해 현장을 찾아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이야기 등이 책에 담겼다. 홍종민(77) 전 서울시 도시철도공사 사장은 1983년 서울시 시설계획과장을 지내며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시청광장’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홍 전 사장은 당시 안보 문제와 교통 체증 등을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20여년이 지난 2004년에야 서울광장으로 문을 열었다고 전했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이 책을 통해 서울시 도시계획의 구상과 수립 과정 그리고 각종 개발사업 추진을 위해 현장을 뛰어다녔던 공무원들의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김신영 “내가 살찐 이유는 가난 때문…저장 강박 심했다”

    김신영 “내가 살찐 이유는 가난 때문…저장 강박 심했다”

    ‘빼고파’ 김신영과 배고픈 언니들의 건강한 다이어트가 시작됐다. 4월30일 오후 처음 방송된 KBS 2TV ‘빼고파’는 연예계 대표 유지어터 김신영과 다이어트에 지친 언니들이 함께하는 건강한 몸만들기 프로젝트다. 수치적 감량을 위해 출연자들을 극단적으로 몰아세우는 대신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지켜주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예고해 많은 관심을 모았다. 베일 벗은 ‘빼고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솔직하고 유쾌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김신영과 하재숙, 배윤정, 고은아, 유정(브레이브걸스), 김주연(일주어터), 박문치 여섯 멤버의 첫 만남이 그려졌다. 각양각색 캐릭터를 지닌 멤버들이 만남은 웃음을 빵빵 터뜨렸다.  또 눈에 띈 것은 김신영과 멤버들의 솔직함이었다. 고은아는 지방 흡입 시술, 소주 다이어트 경험을 고백했다. 배윤정은 출산과 육아로 인해 안무가로서 경력이 단절되고 체중이 증가해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고 털어놨다. 유정과 박문치는 과거 극단적 다이어트로 건강이 악화됐던 경험을 밝혔다. 김주연은 유튜브 콘텐츠를 위해 극단적 체중감량을 하는 것에 강박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재숙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체중 감량 경험을 밝히며 ‘빼고파’ 출연 제의를 거절했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김신영의 고백이 놀라움을 자아냈다. 김신영은 “처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살찐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판자촌에 살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밥을 주셨다. 오빠가 얻어온 햄버거 반 개로 이틀을 먹었다. 진짜로 서러웠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김신영은 “한 번에 폭식을 했다.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저장 강박 식으로 먹었다. 그래서 살이 쪘다. 내게 살은 통한이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김신영의 고백에 ‘빼고파’ 멤버들도 눈물을 보였다. 한편 ‘빼고파’는 매주 토요일 오후 10시35분 방송된다.
  • ‘부산의 슈바이처’… 안철수 부친 안영모 前원장 별세

    ‘부산의 슈바이처’… 안철수 부친 안영모 前원장 별세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의 부친이자 ‘부산의 슈바이처’로 불린 안영모 전 범천의원 원장(92)이 19일 별세했다. 안 위원장은 전날 안 전 원장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코로나19 특위 등 인수위 활동과 국민의힘·국민의당 합당 선언을 마무리하고 부산으로 가 임종을 지켰다. 안 위원장으로서는 정치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여는 중요한 단계에 자신의 삶 깊숙이 자리했던 부친의 마지막을 보게 됐다. 안 전 원장은 안 위원장이 공대 대신 의대에 진학하고 굴지의 정보기술(IT) 기업인으로 성장하면서도 사회 환원에 대한 관심을 늘 갖는 등 그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안 위원장은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피를 끔찍하게 싫어하던 내가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대에 가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다”고 회상한 바 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안 전 원장은 군의관 때 낳은 장남인 안 위원장이 갓 돌을 넘겼던 1963년 당시 부산의 가장 가난한 동네였던 범천동에 범천의원을 개원하며 의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시내 중심가나 부유층이 사는 지역에서 병원을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판자촌에 세운 범천의원에서 당시 다른 병원 절반 수준의 진료비를 받으며 생활했다. 교통사고를 당한 신문 배달 소년을 병원으로 데려와 무료로 치료해 준 일화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부친의 이 같은 모습은 어린 시절 안 위원장의 뇌리에 깊이 박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선행이 하나둘 알려지며 안 전 원장은 ‘서민들의 의사’, ‘부산의 슈바이처’로 불렸다. 안 위원장이 2011년 재산의 절반인 1500억여원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신이 개발한 백신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했던 것도 부친의 선행을 2대에 걸쳐 실현한다는 의미가 컸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장지는 경기 용인공원으로 발인은 22일 오전 7시다. 안 위원장 측은 “코로나19가 아직 확산세인 만큼 조문과 조화, 조의금은 사양한다”고 전했다.  
  • 안철수, 인수위 잠시 떠나 아버지 마지막 길 지킨다

    안철수, 인수위 잠시 떠나 아버지 마지막 길 지킨다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의 부친 안영모(92)씨 별세 소식에 안 위원장은 전날 오후 국민의힘과의 합당 선언식에 잠시 참석했다가 서둘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장례 기간인 오는 22일까지 인수위에 출근하지 않고, 상주로서 빈소를 지킬 예정이다. 고인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1963년 부산 범천동 판자촌에 범천의원을 열어 2012년까지 49년간 의사로 일하며 ‘부산의 슈바이처’라 불렸다. 안 위원장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롤모델로 삼고 의대에 진학해 의사의 길을 따랐다. 그러다가 1995년 IT 벤처기업 ‘안랩’을 창업해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했고, 이후 대학 교수를 거쳐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안 위원장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공대 대신 의대에 진학한 이유에 대해 “피를 끔찍하게 싫어하던 내가 아버지가 좋아하실 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대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언급했다. 2012년 대선 당시에는 고인이 안 위원장의 출마를 극구 만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40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소년 배달원을 데려와 치료한 뒤 “어린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냐”며 치료비를 받지 않고 돌려보낸 일화가 지역 일간지에 실리기도 했다. 그렇게 일평생 운영해오던 병원은 2012년 안 당시 안 위원장의 대선 출마 여부에 국민적 관심이 쏠려 취재진의 병원 방문이 잦아지자, 부담을 느껴 조기 폐쇄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지며 유족들은 20일 낮 12시부터 조문을 받는다. 유족들은 “코로나19가 아직 확산세이고, 평생 베푸는 삶을 사신 고인의 유지에 따라 조화와 조의금을 정중히 사양한다”고 밝혔다.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떠밀려와 모였고, 떠밀리듯 떠난다

    떠밀려와 모였고, 떠밀리듯 떠난다

    “처음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도도 없어서 호롱불 켜고, 산에서 약수 길어다 생활했어요.” “8평 천막에서 시작해 나중에 무상 보급된 블록으로 집을 지어서 살았지요.”●강제 이주한 도시 빈민들의 보금자리 서울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백사마을은 그렇게 시작됐다. 1967년 용산, 청계천, 영등포, 안암동 등에서 살던 판자촌 도시 빈민들은 개발을 이유로 강제로 옮겨졌고 생존을 위해 모여 살았다. 마을로 시집온 지 50년이 지났다는 이금자(78)씨는 “신혼 첫날을 화장실도 없는 집에서 시누이들과 한방에서 시작했다”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했다.마을이 늘 힘든 곳만은 아니었다. 동네 어귀 삼거리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들던 초기 정착민 정두진(64)씨는 백사마을의 전성기를 증언했다.1980년대 전후로 섬유제품 수출이 한창일 때 집집마다 요꼬(니트 편직) 기계를 들여와 가내공업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마을 입구에는 시장이 형성됐다. 술집, 당구장, 다방, 식당 등이 즐비했다. 마을 밖에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로 아침저녁마다 거리는 붐볐다. 1967년부터 현대이발관을 운영해 온 터줏대감 이달수(80)씨는 “마을이 번성할 때는 이른 시간부터 이발 손님이 몰려오는 바람에 정오가 한참 지나서야 첫 끼니를 챙길 정도로 수익이 좋았다”면서 “지금은 타지로 이주한 옛 손님들만 가끔씩 들른다”고 넋두리했다.자원봉사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고독사 없는 마을’로 통했지만 해가 갈수록 빈집이 늘어나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방역 수칙으로 인해 기부나 봉사활동은 더욱 줄어들었다. ‘평화의집’에서 급식 봉사를 하는 안정자(68)씨는 마을과 인연을 맺은 지 36년이 됐다. 집이 있는 강서구 등촌동에서 전철 세 번, 버스 한 번을 갈아타고 와야 하는 먼 곳이지만 주민들이 건네는 “오늘도 고생했네” 한마디에 힘든 줄 모르고 지금까지 왔다고 한다. 돌아가신 분들이 마음에 상처로 남아서 마을이 사라지면 청소년 가장을 돕는 봉사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코로나로 자원봉사자 발길도 뜸해져 마을은 지난 연말에 재개발 사업 시행을 확정했다. 대기업 건설사를 시행사로 지정하고, 공동주택 1953가구와 공공임대주택 484가구 등 총 2437가구를 조성하는 최종안을 가결했다. 600여 가구 중 현재 남아 있는 130여 가구는 올해 말까지 모두 이주할 예정이다. 시는 사라지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를 위해 백사재생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주거지 보전 사업과 원활한 공동체 지원, 주민의 재정착을 돕는 한편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보존하고, 이미 수집한 생활유물 1100여 점을 활용한 기록관도 세울 계획이다.●서울시, 재개발로 사라지는 주민 삶 기록 임인년 새해를 맞은 마을 입구에는 재개발 확정을 알리는 시행사의 현수막이 나부꼈다. 그 너머로 길고양이는 하릴없이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노인은 가파른 언덕길을 힘겹게 올랐다. 퇴락한 집들의 허공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불고, 주인이 떠난 빈터엔 황폐함과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 열사보다 친근한 형·오빠·친구… 다시 돌아온 전태일

    열사보다 친근한 형·오빠·친구… 다시 돌아온 전태일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고자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1948~1970) 열사의 삶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홍준표 감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태일이’로 관객들에게 다시 돌아온 전태일은 영웅적 열사라기보다 우리 곁의 친근한 형, 오빠, 친구 같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담은 영화는 그래서 식상하지 않다.다음달 1일 개봉하는 이 작품은 220만 관객을 동원한 ‘마당을 나온 암탉’(2011)에 이은 명필름의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월급도 깎아 가며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 회사에 보조 재단사로 취직하는 청년 전태일의 10대부터 집중 조명한다. 성실과 정직으로 재단사가 된 태일의 눈에 띈 것은 죽도록 일하고 박봉에 시달라며 피를 토하는 어린 여공들의 얼굴이다. 그는 평화시장 동료들과 함께 ‘바보회’와 ‘삼동회’를 조직하고 근로기준법 준수를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한다. 작품은 99분의 상영시간 동안 누구라도 전태일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구성됐다. 굶는 여공에게 자신의 동전을 털어 풀빵을 사 주는 정 많은 청년은 때로는 짝사랑에 실패해 한숨을 쉬기도 하고,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지극히 평범한 젊은이다. 이런 그가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에 분노하기까지의 심리 묘사는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나 자극적이지는 않다. 전태일을 연기한 배우 장동윤의 목소리는 굳세면서도 다정하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하는 장면도 과함이 없다. 장면 자체가 길지 않고 휘발유를 온몸에 뒤집어쓰는 모습도 없다. 병원에 누워 있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 곁에서 숨을 거둘 때 “제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 주세요”라고 간신히 당부하는 장면에선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머니 목소리를 연기한 염혜란, 아버지 역의 진선규, 피복 회사 사장으로 악역을 맡은 권해효 등 친숙한 배우들의 목소리가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영화는 태일이 해고 직후 막노동을 하는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도 보여 준다.디즈니·픽사의 화려한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겐 ‘태일이’의 그림체는 다소 촌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빛도 제대로 들지 않고 환기조차 되지 않는 공장 다락 속 먼지들은 태일의 선한 모습과 어우러져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국적 정서가 녹아 있어 소박하면서도 포근하다. 50여년 전의 평화시장과 서울 동대문 일대, 판자촌을 섬세하게 묘사해 향수도 불러일으킨다. 홍 감독은 “전태일 열사를 다루는 데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부담감이 있었다”면서도 “현 젊은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청년 전태일을 제 세대의 화법으로 전한다는 게 의미가 클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업재해 사망률 1위를 벗어나지 못한 현실 속에서 전태일의 무게는 여전히 남다를 수밖에 없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오늘날은 어떠한가’라는 청년의 외침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전체 관람가.
  • 산·공원서 생태문화 배우고 힐링… 쉼터가 되는 ‘정원도시 양천’

    산·공원서 생태문화 배우고 힐링… 쉼터가 되는 ‘정원도시 양천’

    서울 양천구 신정동 양천공원에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주민이 책쉼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이는 신이 나 엄마 손을 끌며 책쉼터로 들어가 익숙하게 책을 골라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 지루해졌는지 아이는 창밖으로 보이는 잔디광장으로 뛰어가 한참을 뛰놀다가 다시 엄마에게 돌아왔다.김수영 양천구청장은 올해 ‘정원도시 양천’을 야심 차게 추진했다. 잘 설계된 천변 녹지와 공원들이 때마침 코로나19로 지친 구민에게 큰 치유가 되고 있다. 도시민에게 공원과 산의 ‘숲’은 유일하게 숨을 쉴 만한 외부 공간이다. 녹색 공간에 대한 소비자 열망이 커지면서 카페에도 백화점에도 정원 바람이 거세다.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며 실내 조경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는 추세다.●안양천, 산지형 공원 4곳 등과 연계 정원도시 양천은 구 외곽을 감싸고 있는 지양산, 갈산, 용왕산 등 녹지축과 안양천 수생태축, 그리고 국회대로 상부 선형공원과 목동중심축의 5대 공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다채로운 정원을 무시로 만나고, 힐링과 생태문화를 즐기고, 이를 넘어서 직접 문화를 생산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태아기부터 숲 태교를 받고 태어난 아이들은 숲에서 놀이를 하고 생태를 배운다. 청년이 돼서는 트레킹과 스포츠를 즐기고 노년기에는 숲에서 힐링하며 스스로 공원과 숲을 만들어 가는 일에 동참한다. ‘전 생애에 걸쳐’, ‘누구나’ 찾고 누리는 곳으로 가꿔 가는 것이 정원도시 양천의 정신이다.구는 우선 안양천에 치유와 놀이, 감성을 담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해 운동기구 위주로 구성된 현재 시설들을 개선할 예정이다. 오금교부터 양화교까지 5.4㎞에 이르는 안양천 수생태축에 감성정원, 초화원 등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을 조성하고 수목원과 잔디마당 등 주요 공간별로 명소화도 추진된다. 물가를 따라 걷던 기존 관행에서 탈피해 물을 바라보며 즐기는 ‘샌드비치’도 새롭게 시도한다. 구는 안양천을 공유하는 서울, 경기 지방자치단체 8곳과 협약을 통해 안양천 일대 정원이 대표 국가정원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있다. 김 구청장은 “1980년대 안양천은 상습 침수 지역으로 무허가 판자촌이 즐비했던 곳이다. 목동아파트가 개발되며 무허가 건물 철거가 이뤄졌는데, 이로 인한 갈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됐던 곳이기도 하다”며 “연결과 접근성을 강화해 누구나 언제든 와서 즐길 수 있는 공원민주주의가 안양천에서 꽃피울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안양천과 함께 구 외곽을 감싸고 있는 산지형 공원 4곳(온수공원, 계남근린공원, 갈산근린공원, 용왕산근린공원)은 도시를 담는 큰 틀이 된다. 산지형 공원과 2025년 완공 예정인 국회대로 상부 공원, 크고 작은 도심 곳곳의 공원이 이어지며 보다 세분화되고 확장되는 양천 둘레길이 형성된다. 구는 산지형 공원마다 책쉼터와 같은 거점시설을 설치하고, 이를 여러 문화 자원과 연계해 생동감 넘치는 도시 숲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용왕산에 철쭉동산과 무장애 데크길을 함께 조성해 누구나 편안하게 즐기는 경관 명소로 만들고 온수공원에는 산지형 수목원을 조성해 다양한 숲 체험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자원도 활용된다. 계남근린공원의 야외무대를 리모델링하고 갈산근린공원의 어린이교통공원과 실내형 놀이터 ‘오색깔깔키즈’도 함께 연계되도록 동선을 정비한다.목동중심축의 5대 공원도 재탄생한다. 지난해 가을 새롭게 단장한 양천공원에 이어 올해는 파리공원과 오목·목마·신트리공원이 새 모습으로 변화를 시작했다. 한·프 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조성된 파리공원 개보수는 공원의 특별한 역사성과 상징성을 복원하기 위해 프랑스문화원과 계속 소통하고 지역 주민의 현장 목소리를 함께 담아 최종 설계에 반영했다. 파리공원은 올해 말 개장을 목표로 현재 공사가 한창이다. 지붕이 있는 긴 복도 ‘회랑’을 도입한 오목공원, 이대목동병원이라는 자원을 수용해 시니어놀이터와 치유텃밭을 설계한 목마공원 등 나머지 목동중심축 공원도 설계가 끝났다. 오목·목마·신트리공원 모두 2022년 준공을 목표로 개보수 공사를 준비 중이다. ●공원 안에 문화·치유 프로그램 가득 공원과 정원은 답답한 도심 속에서 잠시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운동과 치유공간으로 쓰인다. 도시에서 뱉어 내는 온실가스를 흡수하는 것도 숲과 공원의 기능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어 나가는 데 필요한 요소임에 분명하다. 김 구청장은 “이런 공원 기능에 도시민의 요구를 반영해 휴식과 힐링, 생태와 학습, 놀이와 참여 등 다양한 문화 기능을 추가하겠다”고 말했다. 공원이 ‘시설’만을 뜻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문화’ 자체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양천공원 책쉼터는 2021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상, 2021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넘은들공원 책쉼터는 2021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계절에 따라 이용에 제한이 있는 기존 도시공원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계절 이용할 복합 문화공간을 제시해 새로운 도시공원 패러다임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구는 양천공원과 넘은들공원에 조성된 책쉼터 같은 거점시설을 양천구 공원 전역으로 확대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민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구성할 계획이다. 생태탐험, 숲 산책, 음악 감상, 힐링 파크데이, 캘리그래피 체험, 그림책 감성코치 등 양천구의 공원문화 프로그램은 이미 주민들에게 입소문이 난 상태다. 유아부터 노년층까지 각 계층 수요에 맞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구성해 주민 만족도가 매우 높다. 구는 올가을 놀이터축제와 겨울 빛 축제 등 공원문화축제도 계획하고 있다. 또 구는 공원을 이용하는 주민들 스스로 공원 가치를 높이는 공원 가꾸기 등 자원봉사를 활성화하기 위해 ‘공원의 친구들’이라는 브랜드 이미지(BI)를 만들었다. 공원의 친구들은 신정허브원 가드닝에 참여한 시민정원사 ‘양천가드너’, 연의생태학습관의 생태환경지킴이, 나무 30만 그루 심기에 참여한 주민 등 공원과 사람을 연계하는 새로운 플랫폼이다. 양천구는 주택 밀집 지역의 전형이다. 아파트가 빽빽한 빌딩 숲이지만 곁에 안양천이 흐르고 숨통을 틔울 만한 공원도 가까이에 있다. 김 구청장은 “주변 산지와 안양천, 그리고 크고 작은 공원들을 연결해 양천구 전체가 하나의 큰 숲이자 공원이자 둘레길로 기능하도록 구상하고 있다”며 “그 안에서 누구나 걷고, 쉬고, 즐기고, 배우고, 직접 가꾸는 문화를 담아내며 머물고 싶은 공간을 늘려 가겠다”고 말했다. 이어 “2년 넘게 모두가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견뎌 왔다. 이제 ‘위드 코로나’가 논의되는 시점이니 더 쉽고 적극적으로 공원과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양천구가 서남권의 중심을 넘어선 전국적 명소 수준의 정원도시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다.
  • “어머니 재심, 민주화운동가·노동자들 상처 치유 계기 되길”

    “어머니 재심, 민주화운동가·노동자들 상처 치유 계기 되길”

    “형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불길 속에 스러지던 순간 자그마한 어머니가 오라(포승줄)에 묶여 총검을 든 군인 사이를 지나던 모습···. 지난 모든 순간이 밀물처럼 밀려드니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 노동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소선(1929~2011)씨의 아들 전태삼(71)씨는 1980년 계엄 당국의 허가 없이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어머니에 대한 재심이 41년 만에 결정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씨는 1970년 맏아들 전태일(1948~1970) 열사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이후 노동운동가로 변신했다. 이후 40년의 세월을 핍박받는 민중의 어머니로 살며 무려 180번의 구류 처분을 당했고,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1980년 5월에는 고려대 시국 성토 농성에 참가해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연설했고, 같은 달 한국노총회관에서 ‘노동3권 보장’, ‘민정 이양’ 요구 농성을 벌였다. 그해 12월 수도경비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이씨에게 계엄포고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검찰은 이와 관련해 지난 4월 “피고인의 행위는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 질서 파괴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로 평가할 수 있어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라면서 재심을 청구했고, 9월 9일 첫 재판이 열렸다. 지난달 30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 은행나무 앞에서 전씨를 만났다. 둘레만 10.7m인 이 나무 주변은 전씨가 어린 시절 형과 산에서 싸리버섯을 뜯고 난 뒤 땀을 식히던 추억의 장소다. 전씨는 이곳에서 검찰의 재심청구서를 꺼내 보이며 “이번 재판이 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정의를 실현하려 희생됐던 많은 민주화운동가들과 노동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80번 구류처분·세 차례 옥고… 평생 고초 -어머니의 재심이 결정됐을 당시 소감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한 어머니는 공권력에 핍박받던 노동자들과 희생자 유가족들 곁에서 평생을 함께하셨다. 수사기관에 잡혀가 구속된 횟수가 무려 250번이 넘을 정도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재심이 결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1980년 어머니가 군사재판을 받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당시 하얀 수의를 입은 어머니의 자그만 몸에는 오라가 칭칭 감겨 있었다. 재판관이 입장하자 총검을 한 군인들이 화약총을 쐈고,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주저앉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못다 한 일을 이뤄 달라’는 형의 유지에 따라 평생을 치열하게 싸운 어머니의 일생이 밀물처럼 밀려들면서 감정이 북받쳤다.” -서울북부지법에서 첫 재심 공판이 9월 9일 시작됐다. ‘장소’와 ‘날짜’에도 의미가 있다. “도봉산 아래 북부지법 부지는 원래 국군 창동병원 자리였고, 그 이전에는 하천 모래 백사장이었다. 1967년 남산동 판자촌 대화재가 발생해 그곳에 살던 우리 가족이 강제로 이주해 판자를 깔고 살았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9월 9일은 1977년 당시 형의 유지를 받들어 어머니와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결성한 청계피복노조가 노동교실 사수 투쟁을 벌인 날이다. 당시 유신정권은 법정을 모독했다는 명분으로 어머니를 무참하게 끌고 가 구속했고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을 폐쇄했다. 이에 조합원들이 ‘어머니 석방’과 ‘노동3권’을 내걸고 결사항전을 벌인 날이다.” -이번 재판의 가장 큰 의미는. “이번 재판은 단순히 당시 어머니가 집회에 참여해 노동권 보장과 민정 이양 등을 외친 것이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인지를 가리는 것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80년 서강대 무역학과에 재학 중이던 청년 김의기 열사는 광주항쟁 진실을 밝히려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서 몸을 던졌다. 서울 신촌역 부근 사거리에서는 김종태 열사가 분신했다. 군부 독재에 맞선 수많은 피해자들과 5·18 유가족들은 아직도 상처를 안고 있다. 결국 이 상처를 아물게 할 사람은 전두환씨뿐이다. 이 재판을 통해 전씨가 5·18 유족들과 국민 앞에 진심으로 사죄하고 참회했으면 한다. 이는 상처 치유와 화합을 통해 미래 세대가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이소선 정신’은 “차별 없는 세상, 하나 되는 세상”으로 일컬어지는데, 지금 사회에 어떻게 실현돼야 할까. “어머니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기독교 정신을 평생 가슴에 새긴 분이다. 동네에 굶는 한 사람을 위해 밀가루 한 포를 줄 때까지 농성했고, 장례 치를 돈이 없는 유족들을 위해 대신 염을 했다. 결국 이런 정신으로 모든 계층이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정신이다. 문제는 형이 떠난 51년 전이나 지금의 노동 현실이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쉼 없이 일하며, 불안정한 현실 속에 목숨을 끊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들 모두가 존귀하다는 마음으로 소통하고 화합해야 한다. 노동계도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집회 때마다 ‘노동자가 하나로 뭉치면 다 이겨낼 수 있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정규직, 비정규직 따지지 말고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형·어머니 걸어온 길, 내가 계속 이어 갈 것 -과거 인터뷰에서 ‘내 나이는 형이 불길 속에 스러졌던 스무 살에 멈췄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러한가. “1970년 11월 13일 형이 불꽃 속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고 말한 순간에서 나는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당시 대학에 진학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형 친구들과 함께 노동운동 현장을 지켜 왔다. 여전히 내 나이는 스무 살에 멈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형의 정신을 계속 기리기 위해 김명신 전두환심판국민행동 대표와 함께 매달 ‘13일의 지킴이’ 행사를 하고 있다. 형이 분신 항거한 13일마다 서울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희망의 무지개떡을 나누는 것이다. 이 떡은 형이 생전에 굶주린 노동자들에게 차비를 털어 나누어 줬던 풀빵을 상징한다. 전두환심판국민행동 상임고문을 맡아 김 대표와 4년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죄를 촉구하고 서울 광화문광장과 국회 앞에서 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했고, 어머니의 재심 재판도 시작됐다고 본다. 어머니가 그랬듯 나 또한 눈 감는 순간까지 형이 스러지며 남긴 유지를 이어 갈 것이다.” -어머니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형이 눈감기 전 ‘어머니 미안합니다. 그래도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어머니뿐입니다. 연약한 노동자들을 어머니가 돌봐 주시고 함께해 주세요. 내가 못다 이룬 꿈 어머니가 이뤄 주세요’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내가 생명이 붙은 날까지 너와의 약속을 꼭 지키마’라고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약속을 끝내 지켜 내셨다. 돌아가시기 일 년 전인 2010년 형 40주기를 맞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7만여명이 모여 ‘내가 전태일이다’라고 외쳤을 때도 어머니는 함께하셨다. 그 자리에서도 어머니는 노동자들이 하나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지금은 어머니가 형과 다시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계실 거다. 과거처럼 권력이 헌정을 유린하고 대중을 탄압하는 역사는 이제 없을 것이란 이야기를 들은 형이 참 기뻐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형과 어머니가 걸어온 길은 내가 계속 이어 갈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재판부가 어머니 재심 쟁점과 관련해 집회 전후 경위 등에 대한 자료를 제시해 달라고 해서 현재 준비 중이다. 이번 재판을 통해 참혹했던 과거를 다시 되짚고 화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재판 과정이 잘 기록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서울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재개발 누구 손에…

    서울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 재개발 누구 손에…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 일대 이른바 ‘백사마을’ 재개발 사업을 두고 대형 건설사들의 수주전이 치열하다. 올해 도시정비사업 수주 순위를 바꿀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백사마을을 지역의 랜드마크로 개발하면 노후 아파트가 많은 노원구의 재건축 수주전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16일 건설업계와 백사마을 재개발 조합 등에 따르면 조합이 최근 개최한 재개발 사업 현장설명회에 현대건설, GS건설, 포스코건설, 대우건설과 한양 등 5개 건설사가 참석했다. 오는 10월 5일 입찰을 통해 시공사를 뽑는다. 2025년 준공 예정이다. 백사마을 재개발 사업은 총면적 18만 6965㎡에 2437가구를 짓는 대규모 주택 사업이다. 공동주택(아파트) 1953가구와 다세대 주택 484가구로, 기존 마을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단독주택과 아파트를 혼합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도록 짓는다. 사업비는 약 5800억원이다. 황진숙 주민대표회의 위원장은 “현재 주민 90% 이상이 이주를 마친 상태”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수주전 결과에 따라 건설사들의 도시정비부문 실적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 올 상반기 건설사별 도시정비사업 수주실적은 DL이앤씨가 1조 7935억원으로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이어 대우건설 1조 7372억원, 쌍용건설 1조 4424억원, 현대건설 1조 2919억원, 포스코건설 1조 2731억원, GS건설 1조 890억원 등의 순이다. DL이앤씨는 재개발 사업 현장설명회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현대건설, GS건설, 포스코건설, 대우건설 중 한 곳이 사업권을 따내면 올해 수주실적이 급상승하면서 순위가 요동칠 수 있다. 게다가 노후 아파트가 많은 노원구 상계동 등의 재건축 시장을 선점하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노원구에는 대규모 새 아파트 단지가 없어 대형 건설사들은 백사마을 재개발을 랜드마크로 삼으려 한다”며 “재개발된 백사마을은 시작 단계인 노원구의 다른 도시정비사업을 모델로 삼아 시공권을 더 따내려는 복안도 있다”고 말했다. 백사마을은 1960년대 후반 용산·청계천·안암동 등의 판자촌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형성된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마을이다. 2009년 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지정된 지 12년 만에 시공사 선정 절차에 들어가면서 사업이 본격화됐다.
  • 태릉골프장·창동차량기지 개발 “첨예한 갈등, 대안 제시하겠다”

    태릉골프장·창동차량기지 개발 “첨예한 갈등, 대안 제시하겠다”

    서울 노원구는 서울 속에 높은 산과 너른 녹지를 보유하고 있다. 오승록 노원구청장은 취임 초기부터 주민에게 자연 속 치유를 제공하는 문화도시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광역단체급’ 굵직한 현안들이 등장했다. 국토교통부는 군사지역으로 수십년 공개되지 않았던 태릉골프장 부지를 개발해 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상계동 서울교통공사 창동차량기지 부지에 돔 야구장을 포함한 상업시설 건립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오 구청장은 국토부, 서울시와 주민 사이에서 상충되는 조건을 조율하는 조정자로 나서게 됐다. 지난 8일 만난 오 구청장에게선 조정자 역할의 무거움을 잘 알며,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생각이 엿보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태릉골프장 관련해서 가장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구지정 시점이 다시 내년으로 미뤄졌다는데 구 입장은 달라진 게 없는지. “태릉골프장은 주민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노원에 있는지도 모르는 주민이 많았다. 가뜩이나 아파트 과밀 지역인데, 그런 땅에 갑자기 정부가 또 아파트를 짓겠다고 하는데 주민이 찬성할 리 없다. 규모가 30만㎡ 넘으면 지구단위 계획 정책 수립 권한은 구는 물론 서울시에도 없다. 태릉이 80만㎡이다. 권한은 오롯이 정부에 있다. 반대만 했다간 주민 의사에 반하는 계획이 그대로 실현될 것 같았다. 짓는 건 인정하되 개입해서 공원이나 단지 배치 등 확보할 것은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속수무책 당하고 나중에 ‘반대만 했지 대안 제시를 안 했다’는 소리를 들어선 안 되니 대안을 제시한 거다. 1만 가구면 닭장에 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절반으로 줄여 달라 했다. 주민에게 대규모 공원을 달라 했다. 25만㎡ 규모의 공원을 확보했다. 여의도공원보다 큰 규모다. 교통대책 수립해 달라고 했다. 안 그래도 고질적인 교통문제, 대규모 아파트단지 또 들어오면 더 악화된다. 임대와 분양 비율도 조정을 요청하는 등 아직 협상 중이고, 일부 합의된 부분도 있다.” ●지상 바이오단지·지하 쇼핑몰 절충안도 있어 -창동차량기지 개발 관련 앞으로 계획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 “창동차량기지와 운전면허시험장 부지 면적은 24만 6000㎡에 이른다. 구는 주민 의견을 반영해 이곳을 세계적 바이오메디컬 산업단지로 조성하길 원한다. 서울대병원 등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바이오 관련 연구소를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인근 창동에 케이팝 전용 공연장까지 들어서면 국내 관광객뿐 아니라 해외 관광객을 대상으로 문화공연과 의료관광이 함께 가능해지는 시너지 효과도 기대한다. 계획대로라면 바이오 메디컬 단지뿐 아니라 호텔 등 상업시설들도 들어서 일자리 약 8만개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지난해 11월 서울대병원과 산업단지 조성 상호협력을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바이오메디컬 산업단지 조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 수준의 병원 유치다.” -오 시장 입장과 다소 다른 것 같은데. “오 시장 선거 당시 공약은 바이오메디컬단지 조성을 백지화하겠다는 게 아니라 ‘돔구장과 쇼핑몰, 바이오메디컬 시설’ 3가지를 함께 짓겠다는 걸로 안다. 고급스러운 문화생활 인프라 확충과 항구적이고 자생적인 일자리 창출의 필요성에 대한 주민들의 욕구를 반영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안다. 문화생활인프라 기능은 창동차량기지가 아니더라도 광운대 역세권, 창동역 일대 ‘서울아레나’ 등이 충분히 할 것으로 본다. 노원이 베드타운에서 벗어나 자족도시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는 점에 오 시장도 동의하는 만큼 이견을 조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 시장을 만났다. 시장도 주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겠다고 했다. 지상은 바이오단지, 지하는 쇼핑몰 등 절충하는 방안도 있다. 돔 야구장은 철회를 기대하지만 결정은 안 됐다. 어쩌면 지상에 바이오단지와 함께 모두 구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주민에겐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말했다. 업무파악이 마무리되면 조만간 결론을 낼 것 같다.”●마스크 대란 극복 노하우 해외 언론에 소개 -코로나19 대응이 1년이 넘었는데 여러 순간이 기억날 것 같다. “처음으로 전 주민에게 마스크를 2장씩 나눠 준 게 기억난다. 그건 사실 전설적인 얘기다. 초기에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시기에 100만장을 구해서 전체 주민에게 두 장씩 나눠 줬다. 그 뒤 주민 600여명이 면 마스크를 3만 6000장 만들어서 저소득층에게 주기도 했다. 그거 정말 ‘예술’ 아니냐. 자원봉사와 국난 극복 전형으로 해외 언론에 소개됐다. 백신 접종을 돕는 ‘백신의병단’ 모집에도 20분 만에 100명 모두 모였다.” -타 구에서 배워 간 노원만의 특색 있는 정책은. “어르신들을 위한 ‘야간 무더위 쉼터’다. 2018년 여름은 사상 최고의 폭염과 사투를 벌이던 때다. 특히 전기 요금이 아까워 에너지 사용을 꺼리는 홀몸 어르신 등 취약 계층은 더했다. 밤잠을 못 자고 나와 있는 어르신들을 보며 생각한 게 구청 대강당을 활용한 야간 무더위 쉼터다. 모든 언론이 주목했고, 당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구청을 방문해 현장을 보고는 이듬해 전국으로 확대했다. 맞벌이 가정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위한 ‘아이휴 센터’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퇴근하는 저녁 늦게까지 돌봐줘 학부모들로부터 큰 인기다. 서울시가 벤치마킹해 ‘우리키움센터’라는 이름으로 서울 전체를 권역별로 나눠 진행하고 있다. 그 원조가 바로 노원구의 아이휴 센터다. 맞벌이로 아이의 병원진료 동행이 어려운 부모 및 보호자를 대신한 ‘아픈 아이 병원동행 서비스’도 2019년 전국 최초로 시행했다.” ●日·유럽까지 가서 좋은 정책 벤치마킹 -3년간의 소회를 듣고 싶다. “정말 밤낮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1년 반은 어찌 됐든 업무파악하고 지역 구석구석 기관, 단체 간담회하고 점심, 저녁에 주민, 단체들 만나고 여러 좋은 정책 배우기 위해 33개 도시 가서 벤치마킹하고 유럽, 일본, 중국도 틈틈이 가서 좋은 시설 많이 보고 듣고 그렇게 지났다. 나머지는 코로나19 대비하고 조치하고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전력투구해 왔던 1년 반이다. 코로나19 진정 뒤 주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드리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구상하고 계획하고 있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소중하고 뿌듯한 시간이었다. 벌여 놓은 일 마무리하면서 체감되는 정책, 미래 준비 게을리하지 않고 속도와 성과를 내겠다.” -남은 1년 계획은. “노원의 미래 먹거리를 위한 일자리 단지 사업 계획을 확정하는 게 큰일이다. 바이오단지에 어떻게, 어떤 병원을 유치할 것인지. 대강 큰 그림은 남은 1년 임기 내에 다 그리고 확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민선 8기로 넘어가야 한다. 광운대 역세권 개발도 차질 없이 추진해야 하고 백사마을(중계동 104번지) 철거민들 판자촌 개발이 확정됐는데 차질 없이 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당고개 뉴타운 재개발은 잘 가고 있는데 6개 구역 중 잘 안 돼 가는 구역을 챙기는 것도 큰 숙제고 중요한 일이다. 기왕 만들어 놓은 힐링타운, 명소 잘 관리·운영하고 업그레이드할 부분은 하고, 아직 시작하지 못한 수락산 힐링타운 조성은 올해 시작하고 2년 걸릴 건데 설계 행정절차 등 챙겨 보겠다. 그런 일들을 모두 잘 마무리하고 싶다. 또 코로나19 때문에 ‘문화도시’ 공약 가운데 아직 못 지키고 중단된 부분을 1년 동안 좀 해보고 싶다. 공연이나 좋은 전시를 통해 문화지수를 높이는 부분, 해보고 싶은 일이다.” -주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처음 자연·문화 슬로건 걸었을 때 주민들이 많이 낯설어했는데 3년 되니 이해해 주신다. 믿고 따라와 주셔서 고맙다. 반대하고 비판하셨으면 지금까지 힘있게 못 왔을 텐데 믿고 힘 실어 주셔서 좋은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옳다고 칭찬해 주셔서 방향을 잘 잡았구나 생각한다. 만들어 놓은 것들 소중히 잘 이용해 주시고 불편한 점 말씀해 주시면 개선하겠다. 구청 일에 관심과 참여를 하면 아무래도 좋아질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이 신경을 쓰게 되고, 이익은 오롯이 주민에게 돌아간다. 지금처럼 열정 갖고 참여해서 노원의 가치가 상승할 수 있게 응원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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