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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양 아주기자회의에 언노련,위장 보내기로/주민접촉신청 방침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16일 국제언론인기구(IOJ)주관으로 오는 21일부터 24일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아시아및 대양주지역 기자단체위원장협의회」에 권영길위원장을 보내기로 하고 북한주민접촉신청을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와관련 관계당국은 『초청의도가 모호하고 일정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이번 평양회의 준비위원장이 이날 하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 회의실에서 「언론노련」에 보내려던 편지의 접수를 거부해 권위원장의 방북은 어려울 것으로 알려졌다.
  • 「범민족대회」 왜 맥없이 끝났나

    ◎국민호응 못얻어 「시늉대회」로 전락/북방정책 결실로 「운동권 통일논리」 퇴색/북한의 전략 답습… 세계변화에 적응 못해 「전대협」등 재야운동권이 주최한 이른바 「서울범민족대회」는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반쪽대회」로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다. 운동권의 「통일운동」이 이처럼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채 맥없이 끝나게 된 것은 정부의 적극적인 북방정책이 실효를 거두고 있고 운동권학생들의 철없는 주장에 모두가 식상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른바 「범민족대회추진본부」측은 당초 18일까지로 예정되어 있었던 이번 행사를 사실상 15일로 서둘러 마치면서 그 이유를 『정부의 탄압으로 더이상 대회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둘러대고는 있으나 사실 이번 행사는 그 어느때보다 일반의 호응을 얻지 못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은 국민들에게 정부당국에 의한 통일이 멀지 않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이들의 주장에 등을 돌리게한 한 요인이 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게다가 재야운동권측은 이번 행사에서 통일을 앞당긴다는 이유로 「한반도의 비핵지대화」「연방제통일안 지지」「국가보안법 철폐」「주한미군 철수」등을 결의하는등 북한의 통일전략을 그대로 복창,여론의 비난을 샀다. 「전대협」등은 이와함께 임수경양의 밀입북때와 같이 「통일열기」를 고양시킨다는 구실로 지난 3일과 10일 박성희양(22·경희대 작곡과4년)과 성용승군(22·건국대 행정학과4년)을 밀입북시켜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의 북측 행진에 참가토록 했다. 이들역시 판문점등에서 판에 박은듯이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읊어 오히려 국민들의 눈총을 받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대협」등은 앞으로도 「연방제통일방안 논의」를 활성화하는 것과 함께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위한 1백만 서명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박양 등을 오는 9월17일 유엔총회때까지 북에 머물게 하면서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을 반대하고 남·북·해외동포학생들의 「통일을 위한 범민족학생연합」을 구성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국내적으로는 개강과 함께 「범민족대회」봉쇄에 따른 「규탄대회」를 통해 위축된 운동권을 재결속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부당국의 대응도 만만치 않아 박양과 성군은 물론 미리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재야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검거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여 운동권이 그들의 생각대로 통일열기를 고양시킨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또 그들의 주장 자체가 세계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에 놀아나는 격인데다 국민들의 호응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이들이 현재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끝까지 반대한다든가 하는 것은 오히려 북한의 입장마저 난처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남북 양쪽으로부터 고립을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5

    ◎「도끼만행」은 월남전뒤 “미 의지 시험용”/운명의 날 8·18… 4분만에 미군 2명 살해/참모회의중 일보… 스틸웰장군에 “귀환 급전”/북측 병사 30여명,「가지치기 현장」 포위… “의도적 도전” 내가 다시 한국에 근무하게 된것은 1976년 봄 소장으로 주한유엔군사령부의 참모장을 맡게 되면서였다.이 직책은 주한미군 참모장과 미8군 부사령관등을 겸하며 또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의 수석대표도 맡았다.나는 대장이 된 스틸웰사령관과 다시 만나게 된것이 기뻤다. 7월1일 아내 메리와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용산 유엔군사령부까지 가는 동안 놀랍게 발전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그러나 이도시의 불과 25마일 북방에 싸늘한 긴장이 감도는 DMZ(비무장지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한국은 평화롭다고만 할수 없었다. ○군 배치 공격형으로 그당시 판문점에는 긴장이 높아가고 있었다.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난후 김일성은 군대의 현대화 및 증강에 박차를 가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부대배치를 방어형에서 공격형으로 전환시켜 놓고 있었다.이 사실의 발견은 당시 정보활동의 개가로 평가되고 있다.베트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CIA나 DIA(미국방정보처)의 사진분석가들이 인도차이나에만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북한관련 정찰사진이나 위성사진들이 제대로 분석되지 않은채 그대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남북한이 비슷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판단된 70년도의 평가를 아직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었다.미국은 그같은 정보판단하에 닉슨독트린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갑자기 7사단을 철수시켰으며 북한은 72년부터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해 왔다. 그러나 74년 민간 정보분석가들에 의해 북한이 엄청난 양의 철강과 콘크리트를 생산,불명확한 군사목적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음해부터 북한의 군사적 능력과 의도에 관한 조사가 국가안전국 특수조사팀의 일원인 베트남참전 보병장교 출신 민간인 존 암스트롱에 의해 행해졌다. 14개월간의 연구끝에 그는 북한의 군사력이 70년의 평가보다 80%이상 증강됐고 대부분이 DMZ 부근에 전진배치돼 있음을 밝혀냈다. 이같은 북한군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엔군사령부는 76년말 김일성이 남침배치를 완료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이는 복잡한 국내문제와 외채압박등 경제난으로 전쟁도발은 어려울 것이라는 CIA보고와는 정반대 견해였다. 남침용 땅굴이 처음 발견된 것은 74년 11월로 그후 연달아 발견된 땅굴들은 북한의 침략의도를 보다 명백히 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특히 내가 부임하기 수개월전부터 북한군은 한국군 순찰대에 사격을 가해오고 부비트랩을 설치하는등 DMZ에서의 도발을 한층 강화시켜오고 있었다.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에서도 북한경비병들의 도발 횟수가 늘고 있었다.우리정보기관들은 이를 지난 50년전쟁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침략을 위한 구실로 삼으려는 것으로 평가했다. ○“새 침략구실 노린듯” 북한군들이 저지른 대표적인 잔악한 도발이 부임후 두달이 채못돼 8월18일 아침 판문점에서 발생했다.JSA에서 북쪽을 연결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까이에 높이12m 가량의 무성한 포플러가 있었는데 유엔군측 경비초소의 시야를 가려 가지를 칠 필요가 있었다.이날 북측에 사전통보를 하고 10명의 경비병과 도끼 사다리 톱등 작업도구를 든 5명의 작업단이 2.5t트럭을 타고 현장으로 들어갔다.아더 보니파스대위와 마크 바레트중위가 그들을 인솔했으며 한국군 김문환대위는 통역장교로 동행했다.적에 의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20명의 신속대응군이 JSA 바로 안쪽 제2경비초소 옆에 배치돼 있었다. 상오 10시30분 작업단은 두개의 사다리를 나무에 걸쳐놓고 작업을 시작했다.5분정도 지난후 북측트럭 한대가 오더니 장교2명과 사병9병이 내렸다. 인솔자 박철중위는 JSA에 오래 근무했으며 성질이 고약하기로 이름나 있었다.박철이 자꾸 작업을 간섭하더니 20분쯤 후에는 보니파스에게 작업중지를 요청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작업은 계속됐다.이어 북측 경비병 10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왔으며 근처 경비초소에서 6명이 더와 모두 30여명의 북측병사들이 작업장일대를 포위한 형상이 되자 박은 가지 하나라도 더자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해 왔다. 보니파스가 작업계속의사를다시 명확히 하는 순간 박이 『죽여!』라고 외치며 보니파스를 세게 걷어차 수로로 쓰러뜨렸다.이것을 신호로 북측병사들은 주머니에서 쇠파이프와 곤봉등을 꺼냈으며 작업중이던 도끼도 빼앗아 주로 장교와 하사관을 공격했다.보니파스는 수로바닥에 쓰러진채 발길질과 쇠파이프를 피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그때 한 북측병사가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려 찍자 그자리에서 바로 죽고 말았다.바레트중위는 공격을 피해 트럭쪽으로 뛰었으나 뒤따라온 6명의 북한병사들에 의해 역시 도끼와 쇠파이프등으로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졌다.신속대응군이 도착했을때는 북한군은 이미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으로 달아난 후였다.정확히 4분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속 대응 군 힘못써 키티호크기지의 당직장교로부터 전화보고를 받은 것은 참모회의 중이었다.나는 우선 사령부 지하벙커에 있는 「월 룸」(전쟁지휘소)으로 갔다.그러나 사령관 스틸웰대장은 일본자위대의 초청으로 교토를 방문중이었고 부사령관 존 번 공군중장은 월례 연습비행을 위해 서해쪽으로 출격중이었다.리처드 스나이더주한미대사도 업무협의차 워싱턴에 가있었다.또 한미1군단사령관 존 쿠시맨중장은 의정부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유엔군사령부의 최고 선임자였다. 몇분후 보다 상세한 보고가 올라왔다.보니파스대위와 바레트중위가 살해당했고 수명의 경비병이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이것은 분명 우리가 예측하고 있던 공산당의 의도적 도발이 틀림없었다.나는 즉시 주한미공군사령관 돈 피트만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스틸웰장군 귀환을 위한 비행기 급파와 연습비행중인 번중장에게도 급거귀환 연락을 하도록 지시했다.그다음 의정부의 쿠시맨중장에게 판문점의 상황을 보고하고 전투준비태세를 위한 데프콘 등급을 의논했다. 데프콘은 가장 약한 상태인 5등급에서 1등급까지 있는데 한국에서는 보통때도 데프콘4 상태였다.그러나 이를 높이기 위해서는 명백한 군사적 움직임이 수반돼야하기 때문에 적의 공격적인 대응을 예상해야했다.마침 스틸웰장군과 통화가 되어 그문제를 상의했다.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이번 사태에 대한우리의 대응은 보다 확고해야했다.분명히 북한측이 우리를 테스트하려 할것이기 때문이었다.또 그해는 선거의 해로 조지아주지사 지미 카터가 베트남전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제리 포드대통령에게 강력히 도전하고 있었다. 북한은 포드가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에서 도박을 걸어온 것이었다.앞으로 48시간내에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도발에 대해 전쟁을 개시하느냐,그대로 주저앉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좋소』 마침내 사령관의 대답이 떨어졌다.『당신이 펜타곤과 한국군측 그리고 우방국에 상세히 상황을 설명하시오. 정전위원회를 내일 열도록 요청하고 모든 부대는 데프콘3에 대비,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전부대원이 영내대기토록 하시오』 즉시 참모회의를 소집,우리의 대응계획인 OPLAN 작성에 바쁠때 서울의 미대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마침 이날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비동맹회의 기조연설에서 북한측대표 김정일이 이날 아침의 사건을 미군장교들의 인솔하에 저질러진 북한군에 대한 이유없는 공격이라고 설명하고 비동맹회의가 미국의 행위를 비난하는 동시에 유엔사령부의 해체와 한국으로부터 미군의 철수를 주장,쿠바의 열렬한 지지로 이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것이었다. 이날밤 김포공항에 도착한 스틸웰사령관에게 나는 세가지 대응책을 보고했다.
  • 박양,정부비난 연설/성군과 다시 북으로

    밀입북한 박성희양(22·경희대 작곡과4년)과 성용승군(23·건국대 행정학과4년)등 「전대협」대표2명은 15일 상오 「북측국토종단대행진단」6백여명과 함께 판문점에 도착,지난 13일에 이어 두번째로 신들의 주장을 밝힌뒤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 갔다. 상오 11시40분쯤 판문각으로 나온 박양은 남쪽을 향해 15분동안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연설문을 낭독했으며 이어 하오1시45분쯤에는 성군이 「남북학생 및 해외동포들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 총리회담 3차접촉/오늘 판문점서

    남북한은 16일 상오10시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제4차 고위급회담(평양·8월27∼30일)준비를 위한 제3차 실무대표접촉을 갖고 기본합의서·불가침선언·3통협정 등의 타결방안에 대한 절충을 벌인다.
  • 제2차범민족대회/북측 통일각서 개최

    【내외】 북한은 15일 판문점 북측지역인 「통일각」에서 제2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한데 이어 판문점 통일염원합토비앞에서 이른바 희생된 남조선의 애국열사들을 추모하는 추모제를 진행했다고 평양방송이 이날 하오2시 뉴스를 통해 보도했다.
  • 서울 「한민족철학자대회」/북,사실상 참가 거부

    북한은 14일 「한민족철학자대회」 북측 철학자 참가와 관련,오는 20∼24일 사이에 열기로 돼있는 대회일정을 연기해달라고 요청,대회참가를 사실상 거부했다. 북한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김창원소장은 이날 판문점 연락관접촉을 통해 철학자대회 준비위원장 소광희교수(서울대)에게 전달된 편지에서 범민족대회 북측 대표단의 서울방문이 차단되고 있는 형편에서 북측 철학자들이 서울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민족의 통일 염원에 부합되지 않는다며 대회가 예정대로 열릴 경우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 남북대학생 2차접촉 불허의 언저리

    ◎대학생 앞세운 「북의 정치책략」 봉쇄/북,취재범위 제한… 체제홍보 저의 표출/「범민족」등 불법집회 남 학생 참여 유도 서울지역대학신문기자연합(서대기련)소속 대학신문기자들의 방북취재가 13일로 예정된 제2차 남북대학생 실무접촉불허로 사실상 실현되기 어렵게 됐다. 정부가 12일 분단이후 첫 판문점 민간인 남북접촉으로 관심을 모았던 남북대학생들의 실무접촉을 허용한지 하룻만인 13일 쌍방의 재차 접촉을 불허한 것은 비록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일부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북측의 정치적 책략에 더이상 무장해제된 채 놀아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린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날 상오 최병보통일원대변인이 논평에서 밝혔듯 서대기련측에 방북초청장과 신변안전보장 각서를 전달해 주는 한편 간단한 실무문제들을 협의하자고 한 북측의 제의를 「순수하게」받아들여 12일의 실무접촉을 허용했으나 그 접촉내용을 검토한 결과 북측의 태도가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 정부는 지난달 19일 서대기련측이 방북취재계획을 승인받은후 취재 개시일로 잡았던 지난 10일까지 깜깜 소식이던 북한측이 11일 중앙방송 보도,12일 조선학위원회 명의와 서신전달 등 뒤늦게 부랴부랴 호응해 나온 것은 대학신문기자들의 방북취재를 허용하겠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우리측이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있는 범민족대회,청년학생통일축전 등에 남측대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특히 북한측 학생들이 12일 접촉에서 「13일 입북,판문점행사취재」를 집요하게 요구했던 것은 박성희양과 성용승군의 판문점통과 의미를 최대한 증폭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화한 단적인 실례라는 것. 북측 대학생들은 12일 판문점 대회에서 처음부터 이미 정돈된 회의좌석을 임의로 바꾸면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등 우리 학생들을 현혹시키는 한편 「민족사의 역사적 순간」인 박성희·성용승군 등의 「판문점돌파」만은 반드시 취재해야한다고 강조하고 그외 취재문제는 평양에 가서 추후 합의하자고 주장,대학신문기자들의 초청목적을 오로지 범민족대회취재에 국한시키려는 저의를 드러냈다.따라서 13일의 실무접촉도 12일 접촉이 그러했듯 방북초청장및 신변안전보장각서 전달수순이 되기보다 우리학생들에게 북측의 판문점 행사를 편법으로 취재토록하고 동시에 북측 대표단을 고무하는 장으로 바뀔 개연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현재 정부의 입장은 범민족대회(13∼17일)가 열리는 동안 대학신문기자들의 방북이 성사되거나 판문점 접촉이 이뤄질 경우 서대기련이 방북중 계획하고 있는 ▲북한대학생들의 일반적인 의식조사 ▲북한대학의 취재 ▲북한대학생과의 통일토론회 ▲김일성주석과의 인터뷰 등은 뒷전으로 밀리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홍보하고 남한체제를 비난하는데 주력하는 범민족대회의 동참내지 취재가 주가 될 수 밖에 없는 명백한 상황을 직시하면서 이를 허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어쨌든 서대기련의 방북논란으로 올 8월도 서로간의 정치적 입장이 판이하게 다른 남북당국간,우리정부와 학생간의 밀고 당기는 공방전으로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 미 싱글로브장군 회고록/위험한 임무:4

    ◎중공군 대공세… 해리고지 3차례 사수/술주정뱅이 연대장과 불화로 지휘권 뺏겨/전선 교착되자 미 병사들 귀국날만 기다려 「철의 삼각지대」로 불리는 철원 부근의 MLR(MainLineofResistance:유엔사령부 주저항선)에 배치된 15연대 2대대의 대대장 명령을 받은 것은 52년 12월말이었다.정보계통에만 근무해 평소 보병대대장을 원했던 나로서는 매우 만족했으며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연대는 중부전선을 맡고 있던 미9군단 산하 3사단에 속해 있었고 대대는 9백여명의 병력으로 완전편성돼 있었다.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이때문에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투의욕을 잃은채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는 미국방부가 실시한 순환근무제의 영향 때문으로 MLR근무의 경우 보병은 한달근무에 4점,포병과 기갑은 3점을 주는데 그 점수가 36점이 되면,즉 9∼12개월만 무사히 넘기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첫 대대야간훈련을 실시한 것은 부임 3주후였다.밤새 실시된 이 훈련은 실제 야포와 박격포의 사격지원을 받으며 산악에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없이 치러졌다.다만 빙판에서 내 오른쪽 발목이 부러진 것이 사고였다.이동외과병원까지 후송됐으나 깁스만 하고 치료도 끝나기 전에 대대로 돌아와버려 상당기간 애를 먹었으며 병원일지에는 「탈영」으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2주후 연대는 25사단 35연대와 교대,다시 전선을 맡게됐다.우리 대대는 동쪽으로 배치됐는데 전선을 시찰해보니 벙커보수는 물론 교통호 개수,철조망및 지뢰지대 설치등 손을 봐야할 곳이 너무 많았다.더욱이 MLR에서 동북방으로 2㎞쯤 떨어진 전초진지인 해리포스트가 문제였다. 전선 왼쪽에는 이지중대,오른쪽에는 폭스중대를,중앙의 해리포스트에는 조지중대를 배치한후 각중대에 공병팀을 배속시켜 대대적인 진지보수작업을 펴게했다.건너편의 중공군 진지에서도 부대가 바뀐 것을 눈치챘는지 사흘밤을 82㎜와 1백20㎜ 박격포로 신고를 해왔다.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하기 위한 많은 자재들의 수송작업은 한국인 근무지원단이 전적으로 맡았는데 사격위험을 무릅쓰고 추위에 험한산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용감하게 일했다. 그러나 며칠후 나는 해리포스트에 갔다 오던중 길아래로 굴러떨어진 보급트럭을 발견하고 내려갔다가 적의 포격을 받고 오른쪽 팔꿈치에 부상을 입어 다시 후송되는 신세가 됐다. 적과의 큰 교전없이 진지강화에 힘을 쏟고 있는 동안 3월중순 스틸웰연대장이 1군단으로 전출되고 러셀 F 에이커대령이 새로 부임했다.그는 술주정뱅이였다.점심부터 마시기 시작하면 보통 밤까지 계속됐다.나도 술은 좋아했지만 전선에서 술만큼은 치명적이라고 생각,대대로 나오는 맥주 쿼터도 모두 유보시킬만큼 엄격했기 때문에 그와는 부임후 첫회식 때부터 충돌이 일어났다.그는 직접 마티니 칵테일을 만들어서 권했다.커피를 마시겠다고 우겼더니 나중에는 욕을 하며 『명령』이라면서 내밀었다.나는 끝내 마시지 않고 나와버렸다. 첫공세는 4월2일밤 개시됐다.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처음에는 60㎜ 박격포 몇발이 해리포스트 위에 떨어지더니 이내 82㎜,1백20㎜ 박격포 세례가 퍼부어졌다.잠시후 천둥소리처럼 큰소리가 나더니 적의 포병사격도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해리포스트는 화산이 폭발하는것 같았다.이따금 섬광에 적 보병부대들이 해리포스트의 등성이로 기어올라가는 것이 보였다.지상공격도 시작된 것이었다.우리 포병의 응사도 곧 개시됐다. 그러나 적들은 주도면밀하게 공격을 가해왔으며 해리포스트는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으나 대대본부와의 연결통로가 적에 점거된 상태여서 자칫 포위되기 직전의 상태였다.예비대의 반격을 개시할 시점이었다.오른편 전선을 맡고 있는 폭스중대쪽의 능선을 타고 해리포스트의 우측 적을 섬멸시키는 작전을 전개했다.폭스중대와 포병의 엄호사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본부예비대를 내가 직접 지휘했다. 해리포스트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얼마동안 교통호를 따라가다 개활지를 건너야 하는 아주 위험한 이동이었다.적들은 이 반격을 기다렸다는 듯이 교통호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해왔다.내가 먼저 개활지의 한쪽으로 올라서 쏜살같이 건너갔다.모두들 아직 교통호속에 올라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해리포스트 남쪽 통로를 점령하고 있던 적들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해리포스트를 빼앗기느냐 마느냐의 처절한 싸움이었다.치열한 포성이 멎고 우리 예비대가 해리포스트 위에 올라선 것은 동녘이 밝아올 때였다.우리측 사망자는 9명,부상 21명이었으며 우리가 거둔 중공군 시체만 50구에 달했다. 이틀후 나와 애킨슨중위등 17명은 사단장 스마이드소장으로부터 이날의 공으로 은성무공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중공군들은 끈질기게 공세를 감행,20여일후인 4월24일밤 2차공세가 있었고 또 5월10일밤에는 3차공세를 가해왔지만 해리포스트는 끝까지 사수했다.그러나 나는 3차공세를 잘 막아낸후 에이커연대장과의 불화로 그에 의해 대대장직을 박탈당했다.
  • 박양·성군·북한학생 6백명/판문점서 되돌아가

    ◎정부,두학생만 통과귀환 허용 이른바 「범민족대회」와 관련,밀입북했던 박성희양(22·경희대 작곡과4년)과 성용승군(23·건국대 행정학과4년)등 「전대협」대표 2명은 13일 「국토종단대행진」 북쪽대표단 6백여명과 함께 판문점군사분계선을 넘어오려다 개성으로 되돌아갔다.이들은 박양과 성군을 중심으로 팔짱을 끼고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넘어오려다 여의치 않자 낮12시50분쯤 통일각으로 철수한 뒤 「북쪽대표단의 통과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등을 들어 하오1시15분쯤 타고온 차량에 올라 개성으로 돌아갔다. 박양등은 이에따라 광복절인 15일이나 경희대에서 열리고 있는 「범민족대회」가 끝나는 오는 18일쯤 다시 군사분계선 통과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사전 통보 정부는 전대협대표로 밀입북한 박성희양과 성용승군이 13일 판문점을 통해 입국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결정,이날 아침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했다.
  • 대학생기자 방북 취재/18일 이후 추진땐 지원

    ◎정부,어제 2차접촉은 불허 서울지역 대학신문기자연합(서대기련)의 방북취재와 관련,13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있을 예정이던 제2차 남북대학생 실무접촉이 불허됐다. 통일원의 최병보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발표,『12일의 실무접촉내용 등을 종합해 볼때 북한측은 학생들의 순수한 방북취재의 실현보다는 이를 범민족대회와의 연계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제2차 실무접촉을 불허하는 정부의 입장을 밝혔다. 최대변인은 그러나 『서대기련측의 방북취재가 이미 승인된 상태이며 유효기간이 1년인 점을 감안,범민족대회가 끝나는 오는 18일이후 다시 추진할 경우에는 정부도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12일 판문점에서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 대표들과 방북취재에 관한 첫실무접촉을 가졌던 「서울지역대학신문기자연합」대표 3명은 이날 두번째 접촉을 위해 하오2시50분쯤 임진각앞까지 가 판문점에 들어가려다 정부의 불허방침에 따라 돌아섰다.
  • 외언내언

    13일자 조간신문에 실린 두장의 사진이 눈길을 끈다.분단 46년만에 남북의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남과 북의 학생들이 서로 얼싸안은 사진도 있고 마주보고 웃는 사진도 있다.북한지역방문 취재를 준비중인 서울지역대학 신문기자연합대표 3명과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 대표 3명이 사진의 주인공들.◆그런데 그 사진이 감격스럽기 보다는 생소하게 느껴지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지난12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남북의 학생들이 마주치는 순간 북쪽 학생들이 먼저 남쪽 학생들을 소련식으로 포옹했고 남쪽 학생들은 잠시 당황했으나 같이 끌어 안았다.북쪽 학생들은 또 회의실중간에 마주앉도록 되어 있는 의자와 책상을 치워버리고 『자유스럽게 이야기하자』면서 북측지역에 다시 자리를 만들었다.◆모든 것이 북쪽 학생들의 뜻대로 되어갔다.이런일들을 자연스런 모습으로 보면 그만이다.그러나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남쪽 학생들은 글자 그대로 학생이지만 북쪽 학생들은 「학생」의 가면을 쓴 이른바 「통일일꾼」들.◆남북 학생들의 나이만 비교해 보아도 그런 사정은 금방 드러난다.남쪽 대표들은 모두가 20살을 갓 넘겼지만 북쪽 대표들은 26살,27살,32살.북쪽에도 우리와 비슷한 나이의 대학생들이 많지만 이날 나온 북쪽 대표들은 군대와 직장을 거쳐 당에서 특별훈련까지 받은 통일전선의 전위대라고 봐야한다.◆그렇다면 북한의 의도는 불을 보듯 뻔하다.지난12일부터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열리고 있는 「범민족서울대회」를 부추기기 위한 선동굿판에 남쪽의 학생기자들을 이용해 보자는 것.우리는 모르고 끌려가고 때로는 알면서 따라가는등 선전·선동·전술면에서는 그들에게 말려드는 인상.천하대세는 이미 우리편.「통일」「민족」「민주」라는 마술적 용어에 걸려 북의 장단에 춤추는 어리석은 놀음일랑 이제 그만했으면.
  • 남북한 대학생 첫 판문점 접촉/방북취재 일정·목적 이견

    ◎정부서 승인… 오늘 다시 논의 분단이후 최초의 판문점 민간인접촉이 12일 하오 우리 대학신문 기자들의 방북취재와 관련,남북 대학생들간에 이뤄졌으나 「방북시기」등 체류일정을 놓고 쌍방의 의견이 조정되지 않아 방북성사여부가 불투명하다. 서울지역대학신문기자연합(서대기련)의 방북취재공동기자단장 김기헌군(22·성대신문사편집장)등 대학신문기자 3명은 이날 당국의 승인아래 판문점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북한 조선학생위원회측과 만나 방북취재를 위한 북측의 초청장및 신변안전보장각서 등을 전달받으려 했으나 「13일 방북·범민족대회 판문점행사취재」를 요구하는 북측의 주장과 「15일이후 방북·북한대학생에 대한 의식조사」등을 밝힌 서대기련측의 의견이 맞서 13일 하오3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 위축된 운동권 재결속 안간힘/전대협등 재야단체,왜「범민족대회」여나

    ◎북한학생·해외동포등 초청,세 과시 시도/“연방제통일·한반도 비핵화” 북 주장 복창 「전민련」과 「전대협」등 재야운동권이 정부의 불허방침을 무시하고 이른바 「서울범민족대회」를 강행하고 있어 정부당국과 또 마찰을 빚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몇개월동안 모처럼 안정추세를 보이던 사회분위기가 다시 긴장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대협」등은 12일부터 서울 경희대에서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및 「해외동포대표」등 3천여명을 모아 「범민족대회」를 열고 이른바 「연방제통일방안」과 「한반도의 비핵·군축 실현」등 두가지를 집중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북한당국의 일정처럼 오는 95년을 「통일원년」으로 설정해놓고 있는 이들은 정부의 통일정책을 『영구집권과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정부당국과는 별도로 자기네들 방식으로 조국통일운동을 벌여나간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따라 이들은 이번 행사 기간동안 이른바 「조국통일의 양대과제」로 선정한 「연방제통일방안」의 당위성을 선전 홍보하는 한편 「비핵지대화와 주한미군철수」등 반미선전활동을 강화할 방침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연방제 통일방안」이란 「하나의 민족,하나의 국가,두개의 정부,두개의 제도」를 주장하는 북한의 통일방안과 거의 다름없는 내용이다. 바로 이 대목이 정부가 「범민족대회」를 문제삼고있는 부분이다. 정부는 또 이번 대회를 주관하고있는 「범민족대회추진본부」가 이미 이적단체로 규정돼있으며 「전대협」간부들도 그동안 각종 불법집회와 시위를 주도해 수배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 행사를 원천봉쇄하려는 것이다. 「전대협」등은 이같은 정부방침에도 불구하고 이미 지난 5일 「통일선봉대」1천여명을 경남 진주와 전남 목포에서 각각 출발시켜 12일밤 서울에 들어오는 「국토순례대행진」을 가졌다. 이들은 이와함께 베를린에 파견했던 박성희양과 성용승군등 2명을 북한에 밀파,「통일대장정」행사에 참석시켰다.박양등은 13일 북측 대표단들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들어온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으나 정부당국은 박양등이 넘어오는 대로 바로 구속수사할 방침이다. 이처럼 「전대협」등이 남북한 유엔동시가입등 정부의 통일정책이 착실히 진척되고 있음에도 이같은 불법적인 행사를 강행하는 것은 여론의 악화와 핵심간부들의 대량구속등으로 위축된 재야·학생운동권을 다시 결집시켜보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있다. 이들은 이번 행사가 정부의 제지로 반쪽행사가 되거나 무산된다 하더라도 정부당국을 「반통일세력」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빌미를 잡을수 있을 것으로 보고있다. 따라서 정부당국으로서는 되도록 이같은 빌미를 잡히지 않는 범위안에서 이들의 기도를 무산시킨다는 방침일 것이 분명하다.
  • “방북취재 실무접촉/판문점에 3명 파견”/서대기련

    「서울지역대학신문기자연합」은 11일 하오 건국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방북취재계획과 관련,『북한측이 12일 판문점에서 예비접촉을 갖자는 연락을 해왔다』고 밝히고 『통일원과의 협의를 거친 뒤 3명의 대표단을 판문점에 보내 구체적인 일정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서대기련」은 『당초 방북취재는 10일부터 실시키로 예정했으나 북측의 응답이 10일 하오에 전달된만큼 취재일정을 부득이 15일부터 20일까지로 변경했다』면서 『「조선학생위원회」와의 예비접촉을 통해 취재단의 초청장과 신변안전보장각서 등을 공식요청하겠다』고 밝혔다.
  • 체독 성용승군도 입북/안기부

    ◎밀입북 임양·성군 사전영장 받아 【내외】 전대협대표로 베를린에 파견됐던 성용승군(22·건국대 행정4)이 지난 5일 입북한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4)에 이어 10일 하오 조선민항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고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이 통신은 성용승군이 전대협대표 자격으로 이날 저녁 김일성경기장에서 진행되는 「백두­한라대행진대회」를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 대행진에 합류하게 된다고 밝혔다. 한편 국가안전기획부는 10일 「전대협」대표로 「국토종단대행진」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베를린을 거쳐 밀입북한 성용승군과 박성희양에 대해 국가보안법위반(탈출·회합)혐의로 미리 구속영장을 발부 받았다. ○“13일 판문점 귀환” 「전대협」은 10일 하오 「남·북해외동포청년학생통일대축전실무회담」대표로 베를린에 파견했던 성용승군이 이날 하오3시30분쯤 북경발 조선민항기편으로 평양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전대협」은 『오늘 상오 성군으로부터 9일 베를린에서 북경에 도착한뒤 계획대로 평양에들어간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밝히고 『성군은 지난 5일 북한에 가 국토종단대행진에 참가하고 있는 박성희양과 합류,활동한뒤 오는 13일 박양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 3통협정·불가침/타결방안을 협의/남북총리회담 2차실무접촉

    남북한은 10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제4차 고위급회담(평양 8월27∼30일)준비를 위한 제2차 실무대표접촉을 갖고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3통협정·불가침선언 등 3개 의제의 타결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벌였다. 양측은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접촉에서 이들 3개 의제에 대한 서로의 초안을 제시,합의방향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16일 3차실무접촉 양측은 또 오는 16일 상오10시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제3차 실무대표접촉을 다시 갖기로 했다.
  • 통일대행진 참가기도/대학생 2명 구속

    서울지방 경찰청은 7일 「전대협」이 추진하고 있는 「남북해외동포 청년학생 통일대축전」행사와 관련,판문점에 가려다 붙잡힌 고려대학생 강종오군(25·지리교육과3년)과 서울시립대학생 유중현군(22·환경공학과3년)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 “판문점 통해 13일에 귀환”/박성희양,평양 회견

    【내외】 「전대협」대표로 「백두∼한라국토종단대행진」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5일 평양에 도착한 박성희양(21·경희대 작곡과4년)은 이날 하오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북한의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갖고 입북경위와 북한에서의 활동 및 귀환계획을 밝혔다. 박양은 『오는13일 북한청년학생대표단 5백명과 함께 도보로 판문점을 통해 귀환을 시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양은 13일 판문점으로의 귀환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15일까지는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 「합의서」 이견 못좁혀/총리회담 10일 재개

    남북한은 5일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27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제4차고위급회담 준비를 위한 제1차 실무대표접촉을 갖고 합의서채택에 관한 절충을 벌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양측은 이에 따라 오는 10일 상오10시 판문점 북측지역인 통일각에서 제2차 실무대표접촉을 갖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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