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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성호 선원/“북서 남한비난 회견 강요”/5명 어제 귀환

    ◎2명 총격사망… 1명은 병사/20년만에 처음 판문점 송환 【판문점=구본영 기자】 지난 5월 30일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나포당한 뒤 7개월간 억류됐던 우성호 선장 김부곤씨(34·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1048)를 비롯한 선원 5명과 사망선원 3명의 유해가 26일 하오 판문점을 통해 송환됐다. 선원들은 이날 하오 4시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군사정전위 회의실과 유엔군측 일직 장교회의 사무실 사이 통로를 이용,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했다. 선원들은 군사분계선 전방 2∼3m 앞까지 북한군의 인도를 받았고 군사분계선상에서 우리측에 인계됐다. 우리측에서는 군정위 소속 베이커 중령과 유엔사 경비대대 소속 최병혁 소령,이준구 남북회담사무국 연락부장 및 연락관 2명이 선원들을 인수했다. 사망한 선원 3명의 유골은 북한적십자사 요원으로 보이는 3명의 남자로부터 군사분계선상에서 대한적십자사 요원 3명에게 넘겨졌다. 지난 75년 이후 북한에 나포당한 17척의 선박에 승선했던 선원 1백50명 가운데 판문점을 통해 선원들이 송환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유엔사측과 북한군측은 이날 상오 10시 군사정전위 소장급 회의에서 유엔사측 옴스 대령과 조선인민군대표부 박임수대좌가 참석한 가운데 선원송환절차에 대해 논의했다. 이번 송환에서 북한측은 선박은 돌려보내지 않았다. 선장 김씨(34)는 송환직후 판문점 남북회담사무국 전방연락사무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5월30일 항해미숙으로 북한 영해를 침범해 도주중 북한경비정의 총격을 받아 선원 2명이 사망하고 1명은 북한 억류중 병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9월25일 평양에서 납치된 우성호 선원들이 우리측 당국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것과 관련,『북한측에서 시켜서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귀환자 명단 ▲생존자=김부곤(선장·34·인천) 이병소(기관장·38·〃)박재렬(선원·44·〃) 윤경순(선원·35·여수) 김우석(선원·36·하동) ▲사망자=심재경(선원·35·여수) 신흥광(선원·37·인천) 이일용(선원·59·마산)
  • 우성호 선원 오늘 판문점 통해 귀환/생존 5명·유해 3구 함께

    ◎가족면회뒤 북 행적 조사 지난 5월30일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나포당한 우성호선원 5명과 사망한 3명의 유해가 26일 하오4시 판문점을 통해 송환된다. 우성호선원의 송환은 지난 22일 북한측이 방송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알려옴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다. 정부는 이준구 남북회담사무국 연락부장을 단장으로 인수단을 구성,선원인수대책을 마련했으며 이날 하오 판문점에서 선원들을 북한측으로부터 인수받을 예정이다. 이날 송환은 사전에 당국간 연락관접촉이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특별한 절차 없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군사분계선상에서 유엔군사령부측과 북한군측간에 이뤄질 전망이다. 정부는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유엔사측으로부터 선원들을 인계받아 판문점공동경비구역 밖 남북회담사무국 전방사무소에서 선원들과 가족을 만나게 할 방침이며 이 자리에서 기자회견도 가질 예정이다. 정부는 가족면회에 이어 선원들을 적십자병원에서 종합건강진단을 받게 한 뒤 관계당국에 넘겨 북한에서의 행적을 조사할 방침이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25일 선원들의 북한내 행적과 관련,『북한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선원들이 현행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것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송환되는 선원과 사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귀환자명단 ▲생존자=김부곤(선장·34·인천 남동구 만수동 1048) 이병소(38·인천 남동구 구월동 1279의 18) 박재열(44·인천 중구 중앙2가 17) 윤경순(31·인천 남구 학익1동 91의 1) 김우석(36·경남 하동군 하동읍 비파리 611) ▲사망자=심재경(35·전남 여수시 남산동 350) 신흥광(37·인천 중구 중앙동 2가 17) 이일용(59·경남 마산시 합포구 산호2동 334)
  • 비방 중단·당국간 회담땐 대북 지원재개 신중 검토/정부

    정부는 식량부족과 수해로 인해 북한체제의 불안이 심화하고 있는 점을 유념,대남 비방 중지·당국간 회담 호응등 북한의 향후 태도변화와 연계해 단계적이고 신축적인 대북 지원방안을 검토키로 한 것으로 24일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우성호 선원 송환이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은 되겠지만 쌀추가지원등에 부정적인 국민여론을 설득하기에는 미흡하다』면서 『수해지원이나 쌀추가지원등은 우리 국민정서와 북한의 태도를 봐가며 단계적으로 대응한다는 게 기본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지난 22일 우성호 송환방송을 내보내기 직전 남북쌀회담 북측 단장 전금철명의 팩시밀리 전문을 우리측 수석대표였던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 앞으로 보내 선원 송환을 미리 통고 해왔다』면서 『이는 쌀지원 대화를 재개하자는 간접 메시지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다른 한 당국자는 이와 관련,『우성호 선원송환은 인도적 차원에서 진작 이뤄졌어야 할 사안』이라며 『북한이 26일 우성호 선원들을 약속대로 돌려보낸다고 하더라도 당장 정부가 쌀을 주려 한다면 국민감정이 허용치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북한이 최근 부쩍 격렬해지고 있는 대남 비방을 중지하는 등 당국간 관계개선에 성의를 표시하면 긴급한 수재지원을 위한 다각적인 방안을 우선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대남비방 중지를 전제로 당국간 협의 또는 적십자 채널을 통해 『수해복구에 필요한 모포·의류·목재등을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이어 『다만 쌀추가지원은 북한당국의 공식요청에 따른 판문점등 한반도내 당국자회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정부의 입장은 아직 확고하다』고 밝혔다. 정부가 이처럼 북한의 태도와 연계해 신축적인 대북 지원방침을 정한 것은 식량폭동 가능성 및 북한군부의 득세등 북한체제의 위기지수가 높아지고 있고,이같은 상황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 부처 연두 업무보고 폐지/내년부터/행정 낭비… 시·도순시도 없애

    ◎김 대통령 청와대 수석회의서 지시 김영삼 대통령은 22일 하오 청와대에서 비서진 개편후 첫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내년초부터 대통령에 대한 각 부처 연두업무보고를 폐지하라고 지시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부처별 연두업무보고는 3공화국때부터 생긴 제도로 이 때문에 모든 부처가 12월부터 업무보고준비에 매달리고 정책실천은 그 이후로 미루는 등 허례허식과 비효율적 측면이 많아 행정낭비를 초래했다』면서 『이를 96년부터 폐지하라』고 밝혔다.부처별 업무보고 폐지는 근 30년 만의 일이다. 김대통령은 이어 『연두업무보고를 없애는 대신 분기에 1회씩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안보관련 회의도 수시로 주재하며 필요하다면 해당부처도 직접 방문,보고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경제에 있어 민간자율이 커지는데 연간목표를 설정,추진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통령은 30년만에 연두업무보고 청취제도를 폐지하면서 각 시·도에 대한 초도순시도 하지 않을 계획이다. 김대통령은 또 『경제 전체가 성장한다 하더라도 경기양극화현상이 생기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고 경제수석실은 특별히 이를 챙기라』고 지시했다. 재재인자 기 자 입 력 가제목:우성호송환;10판용 기자명:구본영 부서명:정치부 북한은 지난 5월30일 서해상에서 피랍된 86우성호 선원 5명과 사망한 3명의 유골을 오는 26일 하오 4시경 판문점을 통해 송환할 것이라고 22일 발표했다. 북한은 이날 관영 중앙통신 보도문을 통해 나포된 선원들이 『자기들의 범행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하였으며 관대하게 용서해줄 것을 해당기관에 청원하였다』고 주장하고,이에따라 『처벌하지 않고 관대히 용서하여 돌려보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보다 앞서 상오 11시께 북경 쌀회담의 남북 당국 창구인 전금철대외경제협력추진위고문 이름으로 우리 정부 이석채정보통신부장관에게 송환 사실을 팩시밀리를 통해 알려 왔다. 북한측의 이같은 태도가 쌀회담을 재개하자는 간접적인 메시지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향후우리측의 반응에 귀추가 주목된다. 북한은 나포 당시 사망한 2명의 시체와 북한에서 체류중 병사한 1명의 시체는 86우성호 선원들의 의사에 따라 화장하여 보내게 된다고 밝히고 그러나 나포된 어선은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날 이와 관련,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이번 조치의 주요 내용을 분석하고 앞으로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등에 대해 협의했다. 이날 회의에서 정부는 북한이 우성호 선원을 송환키로 한 것에 대해 환영하나 이번 조치는 추가 쌀지원이나 대북 지원과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보고,향후 북한의 태도를 더 지켜본뒤 정부의 대북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고 김경웅 통일원대변인이 밝혔다. 김대변인은 『정부와 적십자사는 우성호 선원 납치 사건 발생후 북한을 상대로 직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선원 송환 노력을 기울여 왔다』며 『이번 조치는 따라서 북한이 더이상 인도적 문제를 외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변인은 이어 북한의 우성호 선원 송환에 대한 성명을 내고 『북한이 늦게나마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나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대변인은 특히 『북한이 비무장한 순수 민간어선을 무력에 의해 나포하고 7개월 동안이나 억류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사망한 선원의 유가족들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귀환자 명단 ▲생존자=김부곤(선장·34·인천) 이병소(기관장·38·인천) 박재열(선원·44·인천) 윤경순(선원·35·전남 여수) 김우석(선원·36·경남 하동) ▲사망자=심재경(선원·35·전남 여수) 신흥광(선원·37·인천) 이일용(선원·59·경남 마산)
  • “평양태도 더 지켜볼것”/김경웅 통일원대변인 문답

    ◎“남북 막후접촉” 질문엔 확답 피해 김경웅 통일원대변인은 22일 북한의 우성호 선원 송환발표와 관련,당장 남북대화 재개문제와 연결시킬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우성호 송환을 계기로 한 쌀 추가지원이나 남북대화 재개 문제는. ▲쌀 지원문제와 우성호 송환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연결시켜 말할 성격이 아니다.그러나 앞으로 북한의 태도를 주시할 것이다. ­정부 대책회의는 몇차례 열렸나. ▲여러차례 열렸다.시기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북경 3차쌀회담에서 제시한 한반도내 회담개최와 북한당국의 공식요청이라는 남북회담의 전제조건은 유효한가. ▲(나로서는) 말할 입장이 아니다.현재로서는 26일 선원들이 돌아온다는 발표만 있었다.선원들이 돌아온 후 정황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발표주체가 불분명하고 국제방송을 통해 제일 먼저 보도된 의미는. ▲주체를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 의미를 두지 않는다.국제방송을 통해서 최초로 보도한 것이 아니다.중앙방송과 평양방송,중앙통신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발표했다. ­송환절차는. ▲26일 판문점을 통해 돌려보낸다고 북한이 발표했다.절차 협의는 적십자가 될지 아닐지 더 두고봐야 안다. ­소환전에 접촉이 있었나.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 ­분명하게 밝혀달라. ▲이번 송환이 지난 15일 홍지선 무역진흥공사 북한실장이 북경에 출장을 다녀온 것과 관련이 있나. ▲관련 없다. ­다른 것과는 관련이 있나. ▲내 입장에서 말할 수 없다. ­송환 배경을 무엇으로 보나. ▲알다시피 정부와 적십자사가 엄청난 직·간접 노력을 한 결과다.인도적 문제이니 북한이 언제까지 외면하기 어려웠지 않겠나. ­북경 쌀회담은 끝난 것인가. ▲내가 말할 입장이 아니다. ­정부의 막후노력이 있었나. ▲그 답변은 내 입장에서 좀 벗어나 있다. ­우리가 인도적 차원에서 대북 지원을 할 생각은. ▲송환과 지원은 별개 문제다.(송환이) 갑작스러운 일이니 우리도 좀 더 생각해보야 할 것이다.
  • 북 “우성호선원 5명 26일 송환”/억류 7개월만에 돌연발표

    ◎유골 3구와 함께 판문점 통해 북한은 지난 5월30일 서해상에서 피랍된 86우성호 선원 5명과 사망한 3명의 유골을 오는 26일 하오 4시경 판문점을 통해 송환할 것이라고 22일 발표했다. 북한은 이날 관영 중앙통신 보도문을 통해 나포된 선원들이 『자기들의 범행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하였으며 관대하게 용서해줄 것을 해당기관에 청원하였다』고 주장하고,이에따라 『처벌하지 않고 관대히 용서하여 돌려보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보다 앞서 상오 11시께 북경 쌀회담의 남북 당국 창구인 전금철 대외경제협력추진위고문 이름으로 우리 정부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에게 송환 사실을 팩시밀리를 통해 알려 왔다. 북한측의 이같은 태도가 쌀회담을 재개하자는 간접적인 메시지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향후 우리측의 반응에 귀추가 주목된다. 북한은 나포 당시 사망한 2명의 시체와 북한에서 체류중 병사한 1명의 시체는 86우성호 선원들의 의사에 따라 화장하여 보내게 된다고 밝히고 그러나 나포된 어선은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날 이와 관련,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이번 조치의 주요 내용을 분석하고 앞으로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등에 대해 협의했다. 이날 회의에서 정부는 북한이 우성호 선원을 송환키로 한 것에 대해 환영하나 이번 조치는 추가 쌀지원이나 대북 지원과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보고,향후 북한의 태도를 더 지켜본뒤 정부의 대북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고 김경웅 통일원대변인이 밝혔다. 김대변인은 『정부와 적십자사는 우성호 선원 납치 사건 발생후 북한을 상대로 직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선원 송환 노력을 기울여 왔다』며 『이번 조치는 따라서 북한이 더이상 인도적 문제를 외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변인은 이어 북한의 우성호 선원 송환에 대한 성명을 내고 『북한이 늦게나마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나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대변인은 특히 『북한이 비무장한 순수 민간어선을 무력에 의해 나포하고 7개월 동안이나 억류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사망한 선원의 유가족들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귀환자 명단 ▲생존자=김부곤(선장·34·인천) 이병소(기관장·38·인천) 박재열(선원·44·인천) 윤경순(선원·35·전남 여수) 김우석(선원·36·경남 하동) ▲사망자=심재경(선원·35·전남 여수) 신흥광(선원·37·인천) 이일용(선원·59·경남 마산)
  • 김일성 북군부에 밀리고 있나

    ◎북 경수로협상 고비마다 군부 “들먹”/최근 일도 「실권없는 1인자설」 제기 15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간의 경수로 공급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몇차례 고비가 있었다는 후문이다.특히 11월말 한때 북한의 협상대표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등 결정적 결렬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긴박한 고비마다 북측 대표들이 북한 군부를 들먹였다는 점이다.경수로기획단의 한 관계자는 16일 북측이 『군부를 설득할 명분을 달라』며 KEDO측 대표들에게 양보를 「요구」했다고 귀띔했다. 이 때문인지 당초 통상적인 공급범위를 벗어나는 부대시설 제공을 거부한다는 입장이었던 KEDO측이 상당한 양보를 했다.「바지선 물양장」이라는 옹색한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며 부두접안시설등의 추가지원을 약속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처럼 북한의 대외정책이 군부에 의해 좌우되는 양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이를테면 ▲북경쌀회담에서 전금철 북한대표단장이 약속한 우성호 선원송환 불발 ▲삼선비너스호 억류사건 ▲개설 예정인 평양연락사무소의 미외교행낭의 판문점 통과거부등이 바로 군의 비토권 행사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과연 김정일이 북한군부를 제대로 통제하고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이와 관련,최근 일본에서 우리측 당국자와 일본의 정보관계자들이 심각한 토론이 있었다는 뒷얘기다. 이 자리에서 일본측의 일부 전문가들이 『김정일이 실권없이 북한군부에 엎혀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고 한다.이들은 간질병 증세등으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김을 견제하기 위해서 군부의 혁명1세대들이 그의 핵심측근들을 제친 채 최광을 새 인민무력부장으로 밀었다는 첩보까지 소개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측 당국자들은 이같은 가설을 일축했다고 한다.우선 최광의 처 김옥순이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과는 각별한 사이로 최와 김의 신뢰관계도 돈독한 점이 반박의 근거였다.더욱이 최근 북한군부의 김정일에 대한 충성맹세가 잇따르고 있는 등 북한군이 국방위원장겸 최고사령관인 김의 통제하에 있다는 정황이 더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군부의 입김강화는 식량부족등 경제난에 따른 내부동요를 막으려는 김정일의 의지가 반영된 수순이라는 게 현재로선 다수설이다. 다만 김정일이 북한의 내부 위기를 군부에 기대어 모면하려는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이 경우 필연적으로 그의 권위약화와 군부의 전면등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치 않고 있다.
  • 미­북 관계개선“빠른 걸음”예고/경수로협정 타결뒤 양국관계 전망

    ◎기술자 방북·물자 수송 통해 교류 확대/평양 연락사무소 조기개설론도 대두 대북 경수로공급협정 타결은 북­미간의 관계에도 「청신호」로 작용,관계개선의 속도를 어느 정도 가속시켜 줄 것으로 예상된다.미국측은 이번 「마라톤협상」에서 보여준 북한측의 「인내」자세에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미국측의 이같은 평가는 북한의 제네바합의 이행태도 표명이라는 판단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이는 북­미간 관계개선 지렛대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미국도 나름대로 북핵합의사항을 이행하려 노력하고 있어 북­미간의 관계개선을 위한 분위기는 일정선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미국은 우선 첫 1년간의 대북 중유제공 약속분(15만t)을 합의된 일정에 따라 단계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또한 ▲북­미간 직통전화허용 ▲언론사 지사설치 허용 ▲미국은행을 경유한 북한과 제3국간의 거래허용 ▲일부 동결자산의 해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대북 경제제재완화조치를 지난 1월 발표하기도 했다.물론 이 완화조치는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규제완화로 미최대전화회사인 AT&T사는 북한정권수립이래 처음으로 지난 4월 북한과의 직통전화를 개설했다. 이번 뉴욕회담에서 합의된 경수로관련 기술자들의 방북과 물자수송은 지금까지의 북­미간 걸음마 교류단계를 한단계 높여 상당한 인적·경제적 교류 확대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특히 현재 난항을 겪고 있는 연락사무소개설 문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미국과 북한은 그동안 5차례의 전문가회담을 통해 연락사무소 개설문제를 협의,일단 영사문제와 대부분의 기술적인 현안들은 타결됐으나 아직 일부 쟁점들이 남아있다.사무소 부지선정,직원들의 외교관직 허용과 활동범위,외교행낭 전달체계 확립 등이 합의되지 않고 있다.미국측은 평양주재 연락사무소가 개설될 경우 외교행낭의 판문점 통과를 요구하고 있으나 북한측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미 행정부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서는 미측의 양보로 예상보다 빠르게 연락사무소가 조기개설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외교소식통들은 『늦어도 내년상반기중에는 연락사무소가 개설될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경수로공급협정이 연락사무소의 조기개설 물꼬를 터놓았다는게 외교전문가의 분석이다. 그렇지만 전반적 북­미 관계는 남북대화의 진전 등 남북관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일거에 발빠르게 전개되기는 어렵다는게 일반적이다.한국은 「북­미 관계는 남북관계의 진전속도와 조화와 균형을 이뤄야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한반도에 경색국면이 지속될 경우 미국이 독단적으로 북­미관계개선을 서두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은 남북한 쌀회담을 포함,남북대화가 보다 진전되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으며,북한에 대해서도 남북대화에 보다 탄력적으로 대응해줄 것을 직간접 경로로 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KEDO­북 경수로 공급협정문 요지 ▷전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 정부간 협정을 체결한다.▲KEDO는 미­북 기본합의문에 따라 경수로사업의 재정과 공급을 담당한다.▲미­북 기본합의문과 6·13 미­북 공동 언론발표문은 경수로사업에서 미국의 주접촉선 역할을 규정한다.▲북한은 미­북 기본합의문의 관계 규정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고 6·13 미­북 공동언론발표문에 규정된 내용에 따라 경수로사업을 수락한다. ▷노형·공급발전소(제1조)◁ ▲KEDO가 노형을 선정,턴 키 베이스로 1천메가와트 발전용량의 가압경수로 2기를 공급한다.▲경수로 사업의 기술기준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미국의 기술기준에 상당한 것으로서 1조 1항의 노형(KEDO 선정 노형)에 적용된 기술기준임. ▷상환조건(제2조)◁ ▲KEDO는 경수로 사업의 재정을 담당하며,북한은 각호기 완공후 3년거치기간 포함,20년에 걸쳐 무이자 연2회 균등분할 상환하며,현물상환도 가능하다.▲북한의 상환액수는 경수로 상업(주)계약의 기술명세,공정하고 합리적인 시장가격,KEDO가 계약자 및 하청계약자에게 지불하는 금액에 기초하여 KEDO와 북한이 공동 결정한다. ▷인도일정(제3조)◁ ▲2003년 완공을 목표로 한다.인도일정에는 부속서 3에 명시된 미­북 기본합의문상의 북한의 의무 이행이 포함됨.경수로 공급과 부속서 3의 북한의 의무 이행은 상호조건부임.▲완공은 「성능검사(Performance Test)완료」를 의미하며 완공 즉시 북한은 각각의 발전소에 대해 KEDO에 인수증을 발급한다. ▷이행구조(제4조)◁ ▲KEDO는 주계약자를 선정하며 주계약자와 상업 공급계약을 체결한다.KEDO는 KEDO의 경수로 사업 이행 감리 지원을 위해 미국 기업을 사업 감리 조정자(programcoodinator)로 선정한다.▲KEDO는 경수로 사업의 신속하고 원활한 이행보장을 위해 경수로 사업자간 효율적 접촉 및 협조를 포함한,필요한 실질적 조치를 도모한다.▲KEDO와 계약자는 현장 및 인근 항만·공항등 직접 관련 지역에 사무소를 설치할 수 있다.▲북한은 KEDO의 독자적 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KEDO 및 임직원에 대해 특권·면제 부여.▲북한은 KEDO 및 계약자가 파견하는 모든 인원에 대해 신변안전 보호 조치를 취하며 확립된 국제 관행에 따라 적절한 영사보호를 허용한다. ▷부지선정·조사(제5조)◁ ▲신포시 인근 금호 지역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다. 품질보증·보증서(제6조) ▲KEDO는 완공시 경수로 1천메가와트 발전성능을 보장한다.주요 기자재 및 시공에 대해 완공후 2년간 품질을 보증하며 원전사업관례기준에 따라 핵연료를 보증한다. ▷훈련(제7조)◁ ▲KEDO는 원전 사업 관례기준에 따라 포괄적인 훈련프로그램을 수립,시행한다. ▷운전 및 유지(제8조)◁ ▲KEDO는 북한이 상업계약을 통해 핵연료 및 스페어 파트를 구입하는 것을 지원한다.▲북한은 KEDO의 요청이 있을 경우 경수로 사용후연료의 소유권을 포기하며 동 사용후연료의 국외반출에 동의한다. ▷서비스(제9조)◁ ▲북한은 경수로사업 완공에 필요한 모든 허가신청을 신속하게 무료로 처리한다.▲KEDO·계약자 및 그 임직원에 대해 세금·관세를 면제한다.▲이 사업에 파견되는 모든 인원은 북한이 지정하고 KEDO와 북한이 합의하는 적절하고 효율적인 통행로(해·공로 포함)에 방해받지 않는 접근 가능.경수로사업 진척에 따른 필요시 추가통행로가 고려됨.▲KEDO·계약자 및 그 임직원은 북한내 기존 통신수단을 방해받지 않고 사용 가능.또한 북한은 KEDO및 계약자의 독자적 보안통신수단의 설치를 허용한다. ▷핵안전 및규제(제10조)◁ ▲북한은 부지조사 완료 즉시 KEDO에 부지인도증을 발급한다.예비안전성 분석보고서(PSAR)검토에 기초하여 발전소 기초굴착공사 이전 KEDO에 건설허가 발급.최종 안전성 분석보고서(FSAR)검토에 기초하여 최초 연료장입전 시운전허가서 발급. ▷핵사고 책임(제11조)◁ ▲무과실 책임주의 및 책임 집중의 원칙 규정 ▲북한은 핵연료 선적전 KEDO와 배상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며 KEDO·계약자 및 임직원을 보호하기 위한 핵사고보험 또는 여타 재정적인 보증및 보장을 한다. ▷지적재산권(제12조)◁ ▲양측은 산업재산권 보호에 관한 파리협약 등에 따라 상대방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한다. ▷보장(제13조)◁ ▲북한에 이전된 원자로·기술·핵물질 등은 평화적·비폭발적 목적에만 사용한다.▲핵물질의 재처리 또는 농축도 제고는 금지된다.▲핵장비·기술·핵물질 등의 제3국 이전을 금지한다. ▷불가항력(제14조)◁ ▲양측의 이행이 국제적으로 불가항력이라고 인정되는 사건에 의해 지연되는 경우 이를 양해한다. ▷분쟁해결(제15조)◁ ▲국제법원칙에 의거 당사자간 합의 해결을 우선한다(조정위원회 설치).▲최종적 해결은 중재재판소에서 결정하며,기속력을 인정한다. ▷불이행시조치(제16조)◁ ▲어느 일방의 공급협정 불이행시 상대방은 재정적 손실과 기투입된 금액의 즉각 상환을 요구할 권리를 보유한다.▲일방의 상환 지연 또는 거부시 상대방은 벌칙 부과가 가능하다. ▷개정(제17조)◁ ▲쌍방의 서면 합의로 개정이 가능하다. 발효(제18조) ▲공급협정은 국제법에 따라 쌍방에 구속력을 가지며 서명과 동시에 발효한다. ▷언어본(종결문)◁ ▲영어본만 작성한다. 케도의공급범위(부속서1) ▲경수로 발전소 2기에 필요한 발전소 체계 ▲경수로 건설에 필수적이고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건설전 하부구조 ▲부지조사,부지준비 ▲중·저준위 방사폐기물의 10년간 저장시설 ▲원전운영 2년간의 스페어 파트 ▲실물크기의 모의훈련대를 포함한 포괄적 훈련프로그램 ▲최초장전 핵연료 등. ▷북측 의무사항(부속서2)◁ ▲부지확보 ▲경수로 원전의 시운전을 위한 전력의 안정적 공급 ▲기존 항만·철로·공항 시설에의 접근 ▲골재원 및 채석장 확보 ▷경수로공급조건(부속서3)◁ ▲북한의 NPT잔류 ▲흑연로 및 관련시설 동결 ▲새로운 흑연로 및 관련시설 건설 포기 ▲공급협정 서명 즉시 북한은 IAEA의 임시·일반사찰 재개 허용 ▲경수로사업의 상당부분이 완료되고 핵심 핵부품이 인도되기 전까지 IAEA 안전협정 전면 이행 ▲경수로 1호기 완공시 북한은 흑연로 및 관련시설 해체를 시작하여 2호기 완공시 완료 ▲핵심 핵부품 인도가 시작되면 메가와트 원자로의 사용후연료 북한으로부터 반출이 시작되며 경수로 2호기 완공시 완료. ▷부속서4◁ ▲기타사항
  • 경수로 협정 타결 배경과 전망

    ◎「경수로 비용」 한·미·일 줄다리기 예상/핵동겨틀 유지… 한국형·중심역 관철 평가/북서 미에 매달려 남북대화 기피땐 난관 『이제 북한땅에 한국표준형 경수로를 건설하기 위한 첫관문을 통과했다.하지만 아직은 넘어야할 산이 많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간의 경수로공급협정 서명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13일 한 정부당국자의 첫논평이었다. 이처럼 경수로공급협정의 체결은 대북 경수로 사업을 구체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첫발판이 마련됐다는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15일쯤 양측이 공급협정에 서명을 한 이후에도 후속협상을 통해 구체적 공급일정과 행정적 협조절차등을 합의해야 하는등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더욱이 공급협정 타결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과 남북대화 재개등 기왕의 제네바 합의내용을 모두 지켜나갈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넘어야할 관문 많아 이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이번 공급협정 타결은 북한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타협구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즉 북한이 제네바 북­미 합의라는 정해진 궤도를 계속 달리도록 일단 발목을 잡았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측은 이번 뉴욕협상을 통해 대북 경수로사업에서 한국형 원전 제공과 한국의 중심적 역할이라는 목표가 대체로 관철됐다고 평가하고 있다.13일 상오 열린 통일관계장관회의에서 공급협정문 시안을 원안대로 승인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경수로 건설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대신 북한을 개방사회로 이끌어낸다는 우리측의 희망을 이루기엔 아직도 갈길이 멀다는 지적이다.한마디로 북한땅에 「트로이의 목마」를 보내게 됐다고 자족하기엔 시기상조라는 얘기다. 어떻게 보면 이번 공급협정 타결 이후 KEDO를 무대로 한 남한과 북한,그리고 한국과 미·일간의 숨바꼭질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지적이다.우선 한·미·일간 경수로 비용 분담문제가 초미의 현안이다. 미국은 45억달러 이상으로 추정될 경수로 비용의 70% 이상을 한국측에 떠넘기려 한다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일본이 20∼30%,미국이 10% 이내에서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우리측의 복안이 실현될 수 있을지 사뭇 우려스런 상황인 것이다. 경수로 건설과정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우리측이 그 중심적 역할을 해야한다는 논리도 훼손될지 모른다는 염려가 야기되고 있다.공급협정에 한국의 경수로공급주체와 북한측간의 직접접촉 여지를 차단할 소지가 있다는 의심을 낳고 있는 프로그램코디네이터(PC)를 두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북 한국접촉 기피 일관 물론 미국측은 PC는 KEDO가 선정하는만큼 순수한 자문역에 그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긴 하다.그러나 경수로협상 과정에서 한국측을 기피하려는 북한의 일관된 자세를 감안하면 악용될 소지가 완전 불식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갖가지 「함정」들은 근본적으로 제네바 합의의 불완전성에 기인한다.제네바 합의 자체가 북한의 핵동결 의무이행과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적 반대급부를 상호 연계시켜 놓은 교묘한 정치협상의 산물에 불과한 탓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제네바 합의 기본틀중 핵동결 이행등 미국과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약속은 그럭저럭 지키고 있다.반면 남북대화재개등 등 남북관계 개선과 관련한 약속은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 ○특별찰 이행 미지수 이번 뉴욕회담에서도 북한은 우리측 기술자의 판문점 통행을 거부하는등 유독 남한의 역할 확대에 대해서 알레르기반응을 보였다.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과거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사찰등 IAEA의 안전조치 의무이행도 마찬가지의 불확실성이 상존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이 공식 접촉선은 KEDO로 국한하고,남북간 실질대화를 기피한다면 경수로사업 이행은 원초적인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대북 경수로 사업에서 비용의 대부분을 떠안는 상황에서 사실상 미국측이 그 중심적 역할을 할 경우 정부로서도 국민을 설득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이때 북한이 약속한 「핵동결 유지」가 다시 파기되는 등 경수로를 매개로 한 북한핵문제가 원점으로 회귀될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 대북경수로 협상 타결이후(사설)

    지난 9월30일부터 뉴욕에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간에 진행돼 온 대북 경수로공급협상이 원만히 타결돼 서명절차만 남겨놓았다고 한다. 공급협정은 본래 올 4월까지 끝내기로 돼 있었던 것인데 북한측의 추가 요구로 그동안 협상이 지연되긴 했으나 뒤늦게나마 타협점을 찾게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또 한고비를 넘기면서 다시한번 생각해두지 않으면 안될 대목이 있다.4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거금을 들여가며 북한에 경수로를 공급하는 본뜻이다.그것은 한반도에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간 화해를 이끌어 내자는 것이다.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시간은 우리편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그래도 답답한 구석들을 보게될 때마다 안타까울 때가 없지 않다. 이번 협상내용만해도 남한측 전문가와 기술자들이 북한에 들어가는데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들어가면 반나절 길인 것을 해로와 공로로 국한시켜 놓은 것이 한 예다.해로는 동해안 항구에서 신포로 선박을 이용해서,공로는 북경을 통해 들어가도록 하고있다.북한측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나 이런 것들이 과민이고 편협이다.육로로 들어가도 자동차편으로 곧장 가면 그만인 것을 북한사람들이 보면 무엇을 본다고 이런 불편을 겪어야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경수로가 완성되자면 줄잡아도 연인원 1천5백명이상의 우리 전문가들이 신포를 드나들어야 하는데 그 번거로움이 이만저만인가. 이번 협상을 통해 얻은 하나의 부수효과는 한국의 양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북한측이 확인했다는 점이다.이제까지 북한은 미국과만 짜면 모든 일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북한측의 이런 확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한반도문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남북한 당사자들인 것이다.남북간의 모든 문제는 92년 남북합의서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없음을 북한측은 다시한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경수로공급은 남북화해의 길이고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이어야 하는 것이다.
  • 불교 인권위원회 북 접촉 불허 방침/통일원

    정부는 「불교인권위원회」(공동대표 진관 스님)측이 출소공산주의자(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문제를 다루기 위해 신청한 북한 조선불교도연맹(위원장 박태호)과의 접촉을 허가치 않기로 했다고 31일 밝혔다. 통일원 김경웅대변인은 이날 불교인권위원회측이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측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판문점회담 개최를 추진하고 있는 점을 중시,불법적 행위임이 인정된다는 공문을 30일 검찰에 보냈다고 공개했다.
  • 한국전 참전 영국군 유해 1구 북서 인계

    주한유엔군사령부는 30일 상오 판문점에서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국군 유해 1구를 북한군으로부터 인도받았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유엔측이 북한에서 인도받은 유엔군 유해는 모두 2백8구이며 올들어 유해를 인도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피납북자들의 비극(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2)

    ◎총 8만여명… 김규식·안재홍 등 각계 명사 다수/귀향길 막혀 고난의 세월… 대부분 비참한 최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한국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무리가 있다.그들은 바로 납북인사들이다.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끌려가 휴전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에트랑제였다.그래서 더욱더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만 2만여명 한국전쟁 기간중 북한군에 납치당한 사람들은 서울 2만7백38명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8만4천5백32명이나 됐다.이 납북자들은 대부분 북에서의 삶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소외된채 베일에 싸인 이들이 만난 비극적인 운명은 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강철교 폭파로 미처 피란을 못했던 요인들이 북한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우선 포섭대상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7월4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피란하지 못한서울과 점령지역의 주요 정치·종교·경제·문화인 등 각계 인사를 찾아내 포섭하려는 것이었다.군사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를 친·반공의 정도에 따라 5개 부류로 분류했다. 북한은 7월4일부터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 실무 집행자들로 하여금 이를 추진시켰다.이에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시청)와 성남호텔(서울 광교부근)에 납북 대상자 심사장이 설치됐다.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인사,임정요인에 대한 심사를 거쳐 이들을 북으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이들 중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요인이 들어있었다.안재홍 박열 백관수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방응모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문단 인사들이 포함됐다.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쳐 만포로 들어갔다.도중에 정인보와 이광수,최규동,방응모,김붕준,류동열이 미공군의 폭격과 지병으로 숨졌다.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장래의 한국 지도자로 꼽았던 김규식은 만포에서 16㎞ 정도가 떨어진 별오동이라는 마을에서 1950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납북인사들과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북한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별오동에는 유엔군에게 쫓겨온 북한의 주요기관이 모두 있었는데,김규식은 지병인 해소와 노환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날 때 지니고 간 약이 모두 거덜났다.당시 상황으로 약을 구할 수 없어 해소에 좋다는 토끼똥까지 달여 먹였다는 것이다.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별오동에서 8㎞를 더 들어간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홍명희를 만나 중국에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그날 압록강변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꽃다발이 개인 이름으로 도착했다.추도사를 맡은 조소앙은 날씨가 하도 추워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김규식의 시신은 상여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 트럭에 실려 장지에 갔다.땅이 얼어붙어 내려놓은 관을 땅에 제대로 묻지못하고 가장을 하다시피 장례절차를 마쳤다.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렇게 한만국경에서 막을 내렸다. ○독자 휴전운동 불발 납북자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됐던 납북자들은 전쟁이 끝나 남한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이들의 환향의지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사가 휴전과 관련한 토의를 제의한후 시작된 휴전회담은 납북인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납북자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답보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자적인 휴전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 적도 있다.북한측 연락장교들의 인솔로 안재홍 조소앙 김약수 원세훈 윤기섭은 51년 1월25일 판문점까지 오기도 했다.그러나 북한의 조종을 받은 이들은 유엔군측 연락장교 키니대령을 만나는 선에서 활동을 끝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됐지만 납북자들은 여전히 환향의 길이 막힌채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북에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휴전협정 체결 90일만인 19 53년 10월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회의 초반부터 미국측과 북측이 회담방법 등 정치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나 미·영·소·불 등 4개국이 1954년 4월부터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납북자들은 조소앙이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을 제네바회의에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북한당국에 건의했다.북한은 납북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의 통치속셈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54년 4월 중순 엄항섭과 권태양 등 납북자 대표는 제네바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소련 외무성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다.그러나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결국 이들을 제네바 국제회의에 보내지 않았다.스위스 정부가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처음부터 북한당국이 납북자들을 제네바 회담에 참가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제네바회담 참가 무산 1955년부터 김일성은 평화통일과 평화이미지 선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를 계기로 북한은 납북인사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평화통일 방안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이용을 서둘렀다.그래서 1955년 11월13일 납북요인들의 첫 공동성명으로 알려진 11·13성명을 발표하는데 납북자들이 실제 이용됐다.이 성명에는 납북인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된채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내세운 정치적 허구라 할 수 있는 선전문구만 나열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납북자들은 이후 북한에서의 독립적인 정치활동 보장을 위한 조직체 구성을 시도했다.1956년 7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결성대회가 그것이다.각지에서 모인 납북 및 월북 인사 4백여명 등 7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합법적 통일정부 구성과 국제적 중립화 선언,남북의 자유로운 내왕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협의회에는 북한의 노동당 등 친공세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또 분열이 이미 고질화돼 있었던 만큼 납북자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이 협의회는 1958년 9월9일 지도자인 조소앙이 숨을 거둔후 본래의 취지와는 멀어진채 북측의 대남 위장 정치선전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쿄대 「납북자 행적」 단행본/“북,납북 인사들 협박… 대남공세 악용”/56년 조국 통일전선 중앙위에 “동원”/“총일 앞장” 조소앙 등 강요된 맹세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의 족적을 기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란 단행본 책자를 입수했다.이 단행본은 1956년 5월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주요문헌과 참가자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납북 임정요인과 인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 재북인사들은 1956년 4월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당대회 직후인 같은해 5월24∼25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재북인사들을 대부분 초청한 것으로 밝혀져 이들을 여러 수단으로 회유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홍명희의 보고와 토론으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남한출신 정치인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윤기섭 엄항섭 송호성 김약수,국회의원 출신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박윤원 이구수 강욱중 최태규 김옥주 배중혁 구덕환 이문원 신성균이 참석했다.이밖에 남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 정치인을 대표해 토론에 나선 송호성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토론 내용을 소개했다.이들은 분단의 원인과 평화통일의 방책에 대해 토론한후 자신들이 앞장설 것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 자료는 납북인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보여 주었다.더구나 휴전 이후 정치공세를 강화한 폐쇄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 자료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 밀입북 박용길 장로 구속집행정지 석방

    서울지법 형사4단독 조승곤 판사는 20일 김일성 1주기 추도행사에 참석하러 지난 6월28일 밀입북,김일성동상에 헌화하는 등 친북활동을 하고 판문점을 통해 귀환,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76)씨가 이덕우 변호사를 통해 낸 구속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여 박씨를 석방했다.
  • 대북정책 통일원 통괄기능 강화/이 총리(의정중계)

    ◎한일 합동 정신대조사위 구성 용의는­질문/한미 미사일 쌍무규제 폐지 다각적 노력­답변 ○질문 ◇권노갑 의원(국민회의)=법적 근거도 없이 대통령의 구두지시로 설치된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를 철폐할 용의는.남북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종교지도자나 각계 덕망있는 지도자를 대북특사로 파견할 용의는.현재의 지역편중적 군 인사관행을 청산하고 능력있는 전문 직업군인이 대우를 받는 인사원칙을 정착시킬 방안은. ◇이세기 의원(민자)=북경 쌀회담은 남북관계사에 있어서 최악의 부실회담이 되고 말았다.무엇 때문에 통일원의 북한전문가를 소외시키고 북한을 잘 모르는 경제관료를 수석대표로 내세웠는가.분단 5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판문점 지역 관할권을 계속 유엔군(사실상 미군)에 위탁,남북왕래때나 판문점 출입시 유엔군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절차상의 번거로움은 한민족의 자존심,대한민국의 체통이 더 이상 허락치 않는다. ◇장준익 의원(민주)=현재 여건에서 북한의 핵도발을 억지할 수 있는 실질적 핵정책으로 문서상 보장을 통해미국의 대한 핵지원을 보장받는 것이 필요하다.우리의 기본 군사전략은 「한·미연합억지전력」을 병행하면서 「자주적 억지전력」에 중점을 둔 전략무기체계 전력화에 중점 투자,대북단독 억지전력을 시급히 육성해야 한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정재문 의원(민자)=북한이 계급투쟁노선을 견지하는 한 상호신뢰를바탕으로 하는 호혜적 경제협력도 이루어질 수 없고,현재로서는 무엇보다 국가안보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 총리의 견해는. ◇임채정 의원(국민회의)=정부는 2년반동안 평균 60일에 한번씩,무려 16번이나 대북정책의 기조를 바꿔 무철학·무정견·무책임 등 대북정책의 「3무현상」을 노정했다.김대통령이 최근 북한과 일본에 대해 강경발언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대북쌀회담에 실망한 국민여론을 무마하고 내년 총선에 대비하려는 선거전략이 아니냐. ◇박명환 의원(민자)=대만과 중국과의 군사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유사시에 대비,교민들에 대한 안전대책은.또 향후 대만과의 관계개선에 대해 어떤 소신을 갖고 있는가.북한에 나포된 우성호 선원중 총격을 받고 사망한 선원의 시신과 생존 선원들의 송환대책은. ◇박구일 의원(자민련)=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을 통상마찰과 압력속에서 충분한 검토 없이 부자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명분만 갖고서 서두르는 것은 아닌가.직업군인이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대책은. ◇김원웅 의원(민주)=정부는 간도협약을 폐기,간도를 되찾아야 한다.통일정책기조도 바뀌어야 한다.그간 북한문제도 오히려 손해를 본게 아니냐.북핵문제로 통상부문에서 미국에 얼마나 많은 양보를 했는가.중국이 길림성 통화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한국에 대한 무력시위가 아니냐.정신대문제와 관련,진상규명을 위한 한·일양국합동조사위 구성을 제의할 생각은. ◇박근호 의원(민자)=북한의 과거 핵문제 규명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무엇이며 우리가 핵을 개발할 용의는 없는가.북한이 최근 개발한 노동1호는 생화학무기 탑재가 가능한 데 이에 대한 대비책은 무엇이며 한·미미사일협정을 파기해 미사일개발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 ○답변 ◇이홍구 국무총리=대북정책에 있어 통일원의 통괄조정기능을 강화해 나가겠다.최근의 대북강경 자세는 평화위협에 대해 가볍게 넘기지 않겠다는 것이며 대북정책의 기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대북경수로 지원은 국민합의를 바탕으로 추진할 것이며 특히 비용문제로 국민의 재정부담을 줄 경우 국회 동의를 거치겠다.국가안전보장 회의체제를 강화하는 방안은 신중히 검토해보겠다.대북 쌀제공 과정에서의 불미스런 일은 실무차원의 안정된 관행부족과 업무처리 미숙에 원인이 있었다. 한·미 자동차 협상과정에서 협상안이 사전에 누출된 바는 없다.해외교민들이 세계화에 동참하도록 교민청 신설문제등을 포함한 전반적인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난 9월 외무부에 지시했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은 금융및 외환개방등 우리의 능력을 고려해 서둘지 않고 차분히 추진하겠다. ◇나웅배 부총리겸 통일원장관=북한이 정부와 민간의 이간전략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종교인이나 명망가를 특사로 파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않다.국가안보 정책은 중요한 정책인 만큼 유관부처와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북한은 체제유지와 경제난 해소등을 위해 대미관계 개선을 최대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는 북·중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양호 국방부장관=미국주도의 연합방위체제에서 한국주도체제로 단계적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미국의 핵우산 보장은 확고하다.한·미 미사일 쌍무규제의 폐지를 위해 미국측과 다각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 최근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임진강 주변침투로및 군사시설과 경계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단기정찰활동으로 판단된다.북한의 스커드미사일과 화학무기 위협에 대비,공군력·지대지유도탄·특수전부대에 의한 제압대책 등을 강구하고 있다. ◇이시영 외무부 차관=미·일의 대북관계 개선은 북한핵문제와 병행해 추진할 것이며 남북관계 개선을 고려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추진되지 않을 것이라는 원칙을 확고히 지켜나가겠다.미군피의자 신병확보 방안은 물론 주한미군의 노무·환경문제 등도 개선하는 방향으로 한미주둔군협정(SOFA)을 개정하기위해 미국측과 진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 「이·로버트슨 회담문서」를 보고/김광운 국사편찬위 연구원

    ◎한·미 줄다리기 외교 상세히 밝혀/미,휴전동의 얻으려 설득·협박 병행 서울신문이 워싱턴에서 발굴한 이승만·로버트슨 회담문서는 1953년 6월 25일부터 7월 11일까지 계속된 전쟁상태의 종결이 아닌 휴전을 위한 한국과 미국 사이의 협상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당시 로버트슨의 방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미간 계속된 협상의 배경을 알아야만 한다.그것은 휴전회담을 둘러싸고 악화된 양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동시에 조속한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것이었다.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휴전협정의 시급한 체결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의 협조를 지속적으로 구하였지만,이승만 대동령은 미국의 전쟁정책에 계속 도전하였다.그는 휴전협상을 방해하려는 적극적인 조치로써 1953년 6월 17∼18일 밤에 또 다시 약2만4천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워싱턴 정가는 이승만의 조치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였다.휴전의 지연으로 당시 2주간에만 유엔군사령부는 약1만7천명의 전투손실을 입었으며,그중 3천3백33명이 전사하였기 때문이었다.미국은 이승만을 직접 설득하기 위하여 로버트슨 차관보를 서울에 파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자료에 의하면 로버트슨의 끈질긴 설득과 일종의 협박은 결과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굳세었던 휴전 반대 의지를 꺾었다. 로버트슨이 회담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간 것은 7월12일이다.이날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동시에 이승만·로버트슨회담을 통해 한국의 휴전,포로의 처리및 장차의 제휴를 위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합의에 도달하였음을 강조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같은 시간에 미 국무부는 별도의 성명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휴전에 동의하였다고 분명하게 성명하였다.이것은 판문점에서 공산군과의 협상까지 휴회한 채 진행된 이승만·로버트슨회담이 얼마나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료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로버트슨이 7월4일 방위조약 초안을 전달한 이후 이대통령이 지극히 우호적으로 나왔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이대통령은 휴전 이전에 미 상원의 방위조약 승인을 요구했지만 휴전 이후에 실현되었다.
  • 한국 전쟁의 평가(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0)

    ◎승자·패자 없는 싸움… 이념 대립속 갈등 심화/“삶의 공동체 파괴시킨 반민족적 사건” 규정 새로쓰는 한국현대사 한국전쟁은 3년하고도 32일을 더 끌었다.단일지역의 국지전 치고는 길고도 지루한 전쟁이었다.제2차세계대전 절반에 해당하는 기간의 전쟁이었지만 전비는 엄청났다.미국은 2차대전 당시 유럽에 투하한 분량보다 더 많은 폭탄을 좁은 한국땅에 쏟아부었다.그래서 한국전쟁은 1·2차세계대전 다음가는 전쟁으로 기록된다.끔찍한 전쟁이 분명했다. ○5백여만명 사상 그러나 전쟁은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성급하게 미봉되었다.이는 1953년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 말에 잘 나타나 있다.이제 전쟁은 끝나고 내 아들은 돌아오게 되었다는 그의 말은 세상인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휴전은 영원한 평화를 위해 끝난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어떻든 휴전협정에 따라 한반도의 허리를 다시 가른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었다.제2분단기를 맞은 것이다. 한국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그 이상한 전쟁은양극화한 이데올로기 대립속에 골 깊은 갈등만을 표출했을 뿐이다.실리 없는 싸움으로 끝난 이 전쟁에서 2백10만∼2백50만명의 전투요원이 숨지거나 부상했다.이 가운데 공산군의 인적 피해가 1백42만명으로 유엔군에 비해 더 컸다.몰론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유엔군사령부의 유엔보고서,「군사정전위원회편람」 및 「조선전사」 등이 제시한 통계와는 차이가 있다.그러나 공산군 피해가 더 컸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설득력을 갖는다. 한국전쟁의 비극성은 실제 전쟁을 치르는 전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이념적 갈등이 빚어낸 더 크나 큰 비극은 전투와 직접 연관성이 없는 비전투지역에서 일어났다.그것은 남북 민간인의 희생이다.전쟁중에 3백1만∼3백67만명의 민간인이 피해를 보았다.이는 당시 전체인구의 10%정도에 버금하는 숫자다.전쟁의 장외에서 한국인의 희생이 얼마만큼 처절했는가를 다시 일깨우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민간인의 희생은 남북한이 상대방 지역을 점령 내지 장악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민간인의 희생유형은 사망·학살·부상·행방불명 등으로 되어 있다.이 가운데 학살은 전쟁으로 비롯된 비인도적 만행이었다.북한의 실상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남한에서는 12만8천9백여명이 학살되었다.행방불명자로 구분한 민간인 30만3천여명의 일부를 학살로 본다면 숫자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그리고 남한에서 8만4천5백여명이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갔다. 한국전쟁은 직접적인 인명피해 말고도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어냈다.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피난민은 45만∼1백만명으로 어림된다.우리 민족이 혈연공동체를 중심으로 정서적 유대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의 월남은 삶의 공동체를 무너뜨린 요인으로 작용했다.그러니까 한국전쟁은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삶의 공동체까지 파괴시킨 반민족적 사건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산업시설도 예외가 아니어서 1950년6월25일 이후 약 10개월간에 걸쳐 42%가 파괴되었다.그 피해액은 1953년7월 기준 4천1백12억환에 달했다.특히 경인지구와 삼척지역의 공업시설은 개전 3개월만에 회복불능상태의 피해를 입었다.여기에 5백72억환에 이르는 교통·전력시설의 파괴가 맞물려 돌아갔다. 전선은 전선대로 오래 버티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요요전쟁」이라 부를 만큼 오락가락을 거듭했다.전선이 이동할 때마다 한국민의 고향을 짓밟아버렸다.이에 따라 농업기반도 황폐화했다.휴전이 성립될 무렵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전체인구의 25%를 차지했다.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전쟁기간은 물론 전후에도 꽤나 오랜 기간을 비참한 생활고에 시달렸다.1인당 국민소득이 전쟁직전 90달러에서 60달러로 떨어졌으니 경제는 말이 아니었다. ○북측 소득 30%선 하락 북한의 피해 역시 심각했다.자업자득인 것이었지만 북한의 경제가 입은 피해액은 1949년도 국민소득의 6배에 이르렀다.이로 인해 북한의 경제발전은 5∼6년이 지연되었다.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3년의 전쟁을 치르면서 국민소득을 30%까지 떨어뜨려놓았다.이외에 5천개의 학교,1천1백68개의 병원과 휴양소,6백75개의 과학연구기관과 도서관이 파괴되었다.특히 전쟁말기에는 공산측을 휴전협상테이블로적극 끌어들이기 위한 유엔군의 집중폭격을 받았다.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에 의한 내전으로 시작되어 국제전으로 발전했다.그리고 한반도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총력전성격으로 전쟁이 수행되어 많은 인적 희생과 물질적 손실을 가져왔다.그 원인은 북한이 선제공격을 통해 무력으로 남한 흡수를 시도한 데 있다.그러나 북한의 의도가 일단 수포로 돌아가면서 두 정치세력은 민족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잔인한 전쟁으로 치달은 까닭도 여기 있다. 그러니까 전쟁은 남북간에 고도의 적대감을 안겨주었을 뿐이다.전쟁을 통해 형성된 적대감은 이념대립을 보다 부추겨 정치·경제·군사·외교분야에서 비타협의 갈등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그 갈등은 타민족 국가간의 대결양상을 뛰어넘는 심각한 것이었다.그래서 평화공존의 틀을 마련하기는커녕 이산가족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교류협력마저 실현을 보지 못했다. ○남북간 적대감 고조 남북 정치상황 역시 전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남한에서 지지기반이 취약하던 이승만대통령은자신의 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그는 적극적인 휴전반대운동을 주도하고 반공포로를 과감히 석방함으로써 이미지를 개선해나갔다.이는 장기집권의 기반이 되었다.특히 북한은 전쟁 중반기에 부수상 겸 외상 박헌영등 남로당계열 숙청에 나서 휴전이후 이를 실현했다.이와 더불어 연안파와 소련한인파를 숙청,일인독재체제를 갖추고 이른바 주체사상에 의한 우상화의 길을 재촉했다.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전쟁을 통해 새롭게 정립한 한·미관계다.물론 전쟁 내내 한·미간의 불협화음이 따라다니긴 했다.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접어든 1953년6월17일 이승만대통령이 북한 출신 반공포로 2만6천명을 석방한 사건이 그 대표적 케이스다.이는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어 미국은 이승만을 구금,한국을 미국 군사정부 아래 두고 휴전에 동의토록 한다는 작전까지 추진했다.이승만대통령의 모험은 그해 봄부터 요구해온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은 한국으로 하여금 미국을 핵으로 한 친서방화와 친국제연합화를 추구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따라서 국내 정치와 경제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국 역시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군사대국자리를 굳혔다.또 미국을 정점으로 서방진영의 군사동맹을 강화시켜 냉전시대를 마감하는 데도 공헌했다.그럼에도 전쟁의 무대 한반도는 동서냉전의 유산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아직도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승만­로버트슨 회담 문서/이 대통령,한·미 방위조약 체결 강력 요구/미측선 「유엔군이 한국군 관할」 동의얻어 한국과 미국은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회담을 미끼로 심각한 줄다리기외교을 진행한 것으로 밝혀졌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발굴한 국무성문서에 따르면 휴전회담을 놓고 한·미간에 상대방을 서로 윽박지를 만큼 팽팽히 맞섰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19 53년7월27일 휴전회담이 성사되기 이전인 6월25일 한국을 방문한 미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개인사절 월터 S 로버트슨과 이승만대통령과의 회담문서.당시 국무장관 덜레스의 서신을 휴대한 미 국무성 차관보 로버트슨은 이를 이승만대통령에게 전달했다. 회담은 로버트슨 도착 당일부터 시작했으나 아무 진전이 없었다.이때에 일부 미군 고위지휘관이 한국군에 대한 보급지연과 같은 압력수단을 제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그런데 7월1일 로버트슨이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메모 한쪽을 받는 것으로 회담은 활로를 찾았다.이승만의 메모는 미국과 어떻게든 합의를 보겠다는 것이었지만 전제조건은 물론 배수진까지 치고 있다. 메모에는 이승만대통령의 요구사항을 담았다.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은 한국과 함께 통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싸울 것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이같은 보장이 없다면 휴전이후 전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미국을 협박하면서 자신은 휴전을 결사반대하는 국민을 설득할 길이 없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미국은 이 회담에서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휴전을 거부하지 않고 한국군을 유엔군 산하에 두겠다는 동의를 얻어냈다.한국은 3월4일 로버트슨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을 받았고 휴전 이후에 이를 성사시켰다.
  • 휴전협정의 뒤안(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39)

    ◎미·유엔군,중공군 개입으로 확전전략 수정/군사분계선·포로문제로 2년남짓 줄다리기 1950년 6월25일 새벽부터 시작된 한국전쟁은 19 53년 7월27일 상오10시 유엔군과 공산군측 대표가 판문점에서 휴전 조인식을 가짐으로써 형식적인 종지부를 찍었다.전쟁 발발 만 3년1개월2일만이었다.전선에서의 공방만큼이나 휴전을 이루어내기 위한 협상전도 치열했다.유엔군과 공산군측은 장장 2년여에 걸쳐 험난한 설전을 계속했던 것이다. ○중공군 46만명 손실 그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어거지로 마감했던 휴전회담의 결과는 개전 이전보다 한국의 영토를 조금 더 확보하는 것으로 그쳤다.그러나 휴전회담에서는 한반도 통일을 꿈꾸었던 대다수 한국민들의 의지가 도외시됐다.휴전회담에 따라 종결된 「승리없는 전쟁」에서 비롯된 분단과 갈등이라는 후유증은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은채 중병으로 번져있다. 휴전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51년 5월 하순 중공군이 총공세에서 실패,열세에 빠지면서부터다.중공군은 이때쯤 한국전 개입이후 46만명에 달하는 병력손실을 입었다.더이상의 공격작전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그럼에도 미국과 유엔군은 당초 38도선 이북의 공산군을 격멸한다는 목표에서 후퇴했다.중공군 개입에 부닥치자 전략을 「명예로운 휴전성립」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미국은 5월31일 소련문제 전문가 케넌을 시켜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에게 협상의사를 타진했다.이어 유엔사무총장 T 리는 6월1일 「현재의 주어진 조건에 따라 어떤 형태의 협상을 통해 한국문제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는 미 행정부의 주장을 반영한 성명을 내놓았다.「대략 38도선에 머무는 휴전이 그 지역의 평화와 안전보장을 회복한다면 유엔은 주목적을 달성할 것」이라는게 그 내용이었다. 그와 동시에 애치슨 장관도 맥아더 청문회를 통해 같은 견해를 공식으로 밝혔다.6월22일 미 국무부의 미국의 소리(VOA)방송은 말리크에게 리의 호소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그 다음날 말리크도 마침내 유엔 라디오방송을 통해 휴전을 제의해왔다.이 제의에 대해 중공은 25일,북한은 27일 각각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그러나이처럼 한국전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입장이 협상쪽으로 기울면서 한국정부는 범국민적인 휴전반대운동을 벌여나갔다.6월5일 국회가 휴전반대 결의를 표명하자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38도선 휴전반대 국민궐기대회」가 일어났다.특히 6월30일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원산항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병원선에서 휴전회담을 열자는 제의가 나오자 변영태 외무부장관은 이날 즉각 5개항의 휴전조건 5개항을 발표하는 것으로 맞섰다. ○남한선 휴전에 반대 한국정부의 이 휴전조건은 중공군의 완전철수와 북한군의 무장해제,유엔이 북한공산당에 대한 제3국의 원조제공을 차단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사실상 휴전반대를 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이런 가운데 공산군측은 7월3일 회담개최에 동의한다는 회신을 보내왔다.공산군측은 회담장소를 원산대신 개성으로 바꿔 제의해왔다.유엔군측이 이를 받아들여 7월8일 개성의 연락장교단 예비회담을 열었다.그리고 7월10일 상오11시 개성시 고려동 내봉장에서 그리도 지루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채 첫 회담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담은 처음부터 암초에 걸렸다.전세가 불리했던 공산측은 현 상황에 관계없이 군사문제 일체를 전쟁전의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입장이었다.이에반해 유엔군은 군사적 문제만을 의제로 삼자는 제안을 내놓았다.공산측은 또 외국군 철수를 고집해와 5개항의 의제합의는 10차회담에서 겨우 이끌어냈다.그러나 군사분계선 설정을 놓고 공산군측은 종래 주장대로 38도선을,유엔군측은 쌍방 전투부대의 현 접촉선을 양보하지 않았다. 교착상태의 협상은 8월22일 공산측 대표 이상조가 38도선 안을 수정할 뜻을 비치면서 진전기미를 보이는듯 했다.그러나 공산측이 돌연 개성폭격 사건을 조작하는 통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유엔공군이 회담장소를 폭격했다는 북한측의 주장은 날조로 증명됐지만 결국 회담중단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말까지 대 공세에 나서 임진강 북쪽 연안∼역곡천∼중강리∼금성천변까지 장악했다.이로써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변경한다는데 공산측도 동의했다.10월25일 휴전회담이 재개됐다.11월27일 마침내 대치중인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결정하는 소위 11·27합의가 이루어졌다.그러나 이 합의는 30일 이내에 휴전협정 조인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이는 미국의 의도였지만 조기 종전노력은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개성 폭격사건 날조 그 다음 협상에서 공산군측의 유엔군 인원교체와 장비보충 금지,비행장 복구문제는 줄곧 협상을 가로 막았다.유엔군 수뇌부는 공산군의 공군력 증강을 막기위해 북한의 비행장 복구에 대해 크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해가 바뀌었다.그래도 유엔군 인원교체와 장비보충 문제는 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유엔군측은 미국정부의 훈령을 받아들여 결국 비행장 복구문제를 공산측에 양보했다.인원교체에 대한 공산측의 완강한 반대와 송환 거부 포로문제 처리에 막힌 회담은 결국 그해 9월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다. 그로부터 10개월후인 1953년 7월10일 판문점에서 재개된 휴전회담은 종전과는 달리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7월19일 양측은 그동안 대립했던 포로송환 문제등 모든 부분에서 최종 합의를 보았다.곧이어 20일 양측 참모장교들은 휴전협정 세부사항과 비무장지대의 경계선을 긋기 시작했다. 마침내 27일 상오10시 판문점에서는 두 개의 서류가 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휴전협정과 비무장지대에서 중립국송환위원회로 송환 거부포로의 인도를 인정하는 간단한 보조협정이 그것이었다.유엔군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북한의 남일은 휴전 조인식 내내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두 사람은 각각 9부의 서류사본에 서명한후 교환하고 상대방의 사본에 서명했다.조인식이 끝난 것은 10시12분이었는데 불과 12분이 걸렸다.그러나 양쪽의 포병사격과 해·공군 작전은 휴전 발효시간인 그날밤 10시까지 계속됐다. ◎미 방첨대 보고서/미·북한,휴전회담중 비밀교섭/박진목 등 3명 남북한 오가며 「특수 업무」/“전쟁 수행 능력 한계” 북한측 입장 전해와 한국전쟁을 일단 끝낸 휴전회담에도 미국과 북한의 비밀교섭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이같은 정황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으로부터 입수한 문서군(Record Group) 319상자 방첩대(CIC)보고서에서 확인됐다. 1951년 12월7일에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박진목(당시 39세)등 3명이 등장한다.박은 본래 공산주의자였으나 보도연맹에 가입,무사히 자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이후 안동전선에 참가했다.그이후 춘천에서 이탈,대구에서 머물다 어떤 경로를 통해 월북했다. 그리고 나서 북한에서 돌아온 박은 CIC요원을 만나 북한은 남침전쟁을 통해 조기승리를 예상했지만 유엔의 참전은 의외라는 북한의 입장을 전해주었다.또 중공군이 개입해도 더이상 전쟁수행 능력이 없다는 사실과 중공군 개입은 국제공산주의의 역량을 과시한 것이라고 말한 기록이 나온다. 1951년 1월 공산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자 박은 서울시인민위원회로 이승엽을 찾아가 만났다.박은 그해 7월28일 미군의 배려로 다시 월북했다가 40일만에 남하해 미군 CIC로 연행되어 간첩활동에 대한 신문을 받는 것으로 돼있다.미군 CIC는 박의 효용성을 인정,1천만원을 제공하고자 했고,또 다른 인물 최익환(당시 56세)은 미 국무부 요청으로 평양에서 업무를 수행중이라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어떻든 이 CIC 보고서는 박진목의 말 그대로 북한이 도발한 전쟁이 더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는 당시의 현실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다.이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재촉한 요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 밀입북 여대생 둘 보안법 위반 구속/어제 판문점통해 귀환

    국가안전기획부는 3일 「조국통일 범민족 청년학생연합」 대표로 밀입북해 친북활동을 한 혐의로 사전영장이 발부된 정민주(22·인천대 건축3년 제적),이혜정(20·카톨릭대 회계2년)양 등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소속 여대생 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안기부는 이날 하오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한 정양 등에 대해 구속영장을 집행,서울로 압송했다. 정양 등은 지난 8월14일 판문점 북측지역에서 열린 「통일대축전」에 참석키 위해 밀입북한 뒤 북한의 애국열사능,김일성 동상 등을 참배하고 각종 군중 집회에 참석,연방제통일·주한 미군철수 및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하는 등 반국가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 밀입북 여대생 2명 오늘 판문점 귀환

    조국통일 범민족 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은 범민족대회 남측 대표자격으로 지난달 14일 밀입북한 정민주(22·인천대 건축3제적),이혜정(20·가톨릭대 회계2)양등 한총련 소속 여대생 2명이 3일 하오 3시 판문점을 통해 귀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총련은 이날 판문점에 대규모 환영단을 파견키로 했으며 경찰은 밀입북 여대생 2명을 귀환 즉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환영단 학생들의 판문점 접근을 원천봉쇄 한다는 방침이어서 충돌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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