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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 “관련국에 금강산 투자자제 요청”

    정부는 6일 북한의 금강산지구 남측 재산권 침해와 관련해 외교 채널을 통해 관련국에 관광 및 투자 자제를 요청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관련국 주재 우리 공관에 관련 지침을 보낼 예정이다. 정부는 통일부, 외교통상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으로 구성된 ‘금강산관광사업대책반’ 회의를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통일부는 “앞으로도 정부는 북한의 관련 동향과 조치 사항 등을 봐가면서 적절한 대응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대북 수해지원 물자가 추석 연휴 직후인 15일 북측에 전달된다. 정부는 6일 판문점 적십자채널을 통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대한적십자사 명의의 통지문을 북측에 전달했다. 정부와 한적은 첫 인도분으로 영·유아용 영양식 20만개를 경의선(15만개)과 동해선(5만개) 등 육로를 통해 북측에 지원할 예정이다. 북측이 특별한 거부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한 지원물품은 수해가 심했던 북측 황해도와 강원도 지역에 15일부터 10월 중순까지 매주 1~2회에 걸쳐 지원된다. 지원물품은 영·유아용 영양식(140만개)과 과자(30만개), 초코파이(192만개), 라면(160만개) 등 총 50억원 규모다. 민간 대북지원단체인 ‘경암’도 이날 통일부 승인을 얻어 라면 61만개(2억 6000만원 상당)를 황해북도 지역에 전달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표류 北주민 4명 판문점 통해 송환

    군 당국은 지난 11일 오후 서해 백령도 인근 북방한계선(NLL) 남쪽 지역에서 표류 중인 북한 선박 3척과 선원 7명을 구조했다고 12일 밝혔다.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11일 오후 7시 12분과 오후 9시 30분에 각각 백령도 서방과 서북방 NLL 이남에서 침수돼 침몰 위험에 처해 있던 북한 전마선(1.5t급) 2척을 발견하고 선원 4명을 구조했다.”면서 “전마선 2척은 발견 당시 각각 80%와 60%쯤 물에 잠겨 있었고, 선원을 구조한 뒤 침몰했다.”고 말했다. 당시 선박들은 NLL 이남으로 각각 6.3㎞, 6.6㎞까지 조류에 떠밀려 내려온 것으로 확인됐다. 선박에는 각각 선원 2명씩 타고 있었다. 관계 당국은 이들을 상대로 표류 경위 등을 조사한 결과 귀순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오후 6시 40분쯤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다. 군은 이어 오후 11시 35분쯤 백령도 북쪽 NLL 이남 지역에서 연료 부족으로 표류하던 동력 목선을 발견하고 배에 타고 있던 북한 주민 3명으로부터 귀순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뒤 인도적 차원에서 연료를 주고 12일 오전 2시 38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백령도와 3.4㎞ 떨어진 NLL 남쪽 4.5㎞ 지점에서 발견된 선박에는 북한 주민 3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합참 관계자는 “당시 해무로 인해 시계가 300m에 불과했고 조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상태였다.”면서 “북한 선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NLL 남쪽에서 표류한 경위에 대해선 현재 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발파작업 오인” 또 안쐈다 억지

    “발파작업 오인” 또 안쐈다 억지

    군은 지난 10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의 포격과 관련, ‘발파 작업을 오인한 것’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탐지 장비로 확인했기 때문에 포격이 확실하다는 게 우리 군의 확고한 입장이다. 합동참모본부 관계자는 11일 “당시 폭음이 북한 용매도 인근에서 들렸다는 초병의 보고가 있었고, 탐지장비로 낙탄지점을 확인했다.”면서 “두 차례 사격으로 발사된 5발 가운데 3발은 용매도와 가까운 NLL 북쪽에, 2발은 NLL 인근 해상에 떨어진 것을 정확히 확인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앞서 남북 군사실무회담 북측 단장과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인터뷰 형식을 빌려 “10일 서해 5개 섬과 가까이 하고 있는 황해남도 일대에서 인민생활 향상을 목표로 대상물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이에 따른 정상적인 발파작업이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또 오전 8시 40분쯤 이 단장 명의의 전통문을 우리에게 보내 우리 군의 대응 사격을 문제 삼으며 “대화 분위기를 파괴하고 악화된 남북관계를 유지하려는 남측의 고의적인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 명의로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중지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이번 사건을 날조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북한의 전통문은 상투적인 억지 주장이어서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군은 전날 용매도 인근에서 폭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지난달부터 서북도서방위사령부에 배치된 최신 음향 표적 탐지장비 ‘할로’(HALO)를 통해 포탄의 탄착지점 등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할로는 포 사격 때 발생되는 폭음 등을 추적해 탄착 및 발사지점을 분석해내는 장비다. 군 관계자는 “1·2차 포격 때 음향 표적 탐지장비를 통해 포탄의 궤적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과 미국 정부는 10일(현지시간) 이번 북한의 연평도 포 사격의 의미를 축소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워싱턴에서 미국 당국자들과 만난 뒤 기자들에게 “이번 포 사격은 선박이나 영토에 대한 포격과 같은 충돌이 아니기 때문에 천안함 공격 같은 차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한·미 간에 큰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인명 피해나 물질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안보상 중요한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얘기”라고 부연했다.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에서 “남북 간 포 사격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는 바람직한 일”이라면서 “이번 사태가 종료된 만큼 이제는 현안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북한에 우려를 표시해 왔고, 계속 자제를 촉구할 것”이라면서 “우리의 메시지는 북한이 한국에 손을 내밀고 대화 진전을 위한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서울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광주아시아인권학교 8일 개막

    아시아 인권 활동가들의 소통 공간인 ‘광주아시아인권학교’가 8일부터 3주 동안 열린다. 5·18기념재단은 세계 16개국 22명의 인권·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올해 8번째 맞는 광주아시아인권학교에 참가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판문점, 김대중도서관, 5·18묘지 등을 방문할 예정. 이어 한국 민주화운동사, 남북관계, 과거사청산 등과 관련한 강좌에 참석하고 국내 시민사회 활동가들도 만난다. 수료식은 오는 25일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열린다. 인권학교 사업은 5·18기념재단과 전남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가 공동 주관하고 성공회대학교가 후원한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국제항공소년단 한국캠프 열어

    한국항공소년단(총재 김홍경 KAI 대표이사)은 20일부터 14박 15일 동안 6·25 참전 국가인 미국, 영국, 호주, 터키, 네덜란드의 국제항공소년단원 10명을 초청해 ‘2011 국제항공소년단 한국캠프’를 연다. 한국항공소년단원 10명과 함께 경주의 불교 유적, 서울의 경복궁, 박물관, 남대문 등을 방문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한다. 땅굴 및 판문점, 공군사관학교, 전투비행단을 견학하는 등 한국의 안보 현실을 이해하는 자리도 마련됐다.
  • [나와 통일] (25) ‘통일부 인턴’ 맥네어·추정한

    [나와 통일] (25) ‘통일부 인턴’ 맥네어·추정한

    추정한(21·미 미들베리칼리지 정치학 전공)과 제이 맥네어(24·미 데이비슨칼리지 정치과학 전공)는 특별한 여름방학을 보냈다. 통일부에서 마련한 ‘해외대학생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해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 남북회담, 남북경협 업무 등을 배우고 하나원, 판문점 등을 방문했다. “북한과 통일문제에 한발짝 다가선 계기가 됐다.“고 했다. 지난 15일 1기 과정을 수료한 이들을 만나 인턴십 한달간의 소회와 통일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봤다. 제이 맥네어 한 달은 조금 짧았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을 만나 북한을 이해하는데 많은 배경지식도 얻었지만 그럴수록 생기는 질문에 대해선 답을 다 얻을 수는 없었다. 추정한 전에는 꼭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안정적으로 이양되면 20년 이상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봤다. 그런데 최근 북한이탈주민도 크게 늘고 생각보다 북한 내부 상황이 불안정해서 10년이면 통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맥네어 궁극적으로는 되겠지만 10~20년 안에는 힘들 것 같다. 50년 후쯤엔 가능하지 않을까?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북한에는 종교나 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얘기였다. 탈북자 대학생들에게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신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들었다. 추 나는 탈북 대학생들이 남한에 온 뒤 그냥 평범한 대학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는 점에 놀랐다. 사투리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똑같이 연예인 얘기를 하는, 내 또래 대학생이었다. 탈북주민 가운데 대학을 가는 비율은 6~7%로 아주 극소수였다. 통일이 되면 적어도 50년은 서로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의 대학생들은 통일보다는 북한의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다. 상대적으로 한국의 대학생들은 인권에 관심이 적은데 아마도 정치적 견해 때문인 것 같다. 맥네어 맞다. 많은 미국사람들이 “남한과 북한은 미국의 사우스 다코다, 노스 다코다 처럼 원래 다른 곳 아니냐.”고 생각한다. 통일보다는 북한은 실패한 국가이고, 어떻게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인권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추 판문점은 갈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콘크리트로 된 국경을 보면서 ‘중국과 맞닿아 있는 북한 국경은 진짜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건너오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맥네어 나는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발짝만 넘어가면 북한인데 관광객들이 드나드니까 국경이 가짜 같았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긴장감이 매우 팽팽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긴장감을 조성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추 통일은 북한의 상황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김정은 체제의 정착 여부에 따라 통일의 가능성도 달라진다. 김일성→김정일 때와 달리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10년내에 통일이 될 가능성도 비교적 높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30~40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맥네어 주변국가의 정책에 따라 북한이탈주민이 받는 영향이 다르다. 이들은 돌아가면 정치적 탄압을 받는 난민인데도 중국은 탈주자(defector)라는 용어를 쓴다. 인권문제를 이슈화해서 중국이 책임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관광객 1000만 달성 릴레이 제언 (13)] 문화예술관광의 힘/이기종 경희대 관광학과 교수

    [관광객 1000만 달성 릴레이 제언 (13)] 문화예술관광의 힘/이기종 경희대 관광학과 교수

    한국의 경제력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3위권으로 운위된다. 수출입 무역총량 규모로는 세계 9위권, 수출 규모로는 세계 7위의 위상이다. 한국경제는 그동안 제조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성장 정책이었다. 하지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서비스업의 획기적 발전이 요구된다. 특히 서비스 산업의 꽃인 관광 산업의 경쟁력 제고가 시급한 과제이다. 세계경제포럼(WEF)에 의하면 한국의 관광 경쟁력은 지난 2년간 세계 31위에서 올해 32위로 한 단계 더 내려앉았다. 한국은 가격 경쟁력과 외국인 환대 서비스 수준에서 하위에 랭크되고 있는 반면, 정보통신기능과 문화관광자원이 상대적으로 상위의 위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관광 경쟁력 제고 방안은 자명하다. 올해 외래관광객 1000만명 달성 및 향후 2000만~3000만명 시대를 맞이하려면 중저가 호텔의 지속적 증축으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범국민적 차원의 관광객 환대 서비스 마인드가 고양되어야 한다. 한국의 자연관광자원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반면, 문화관광자원 매력도 순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프랑스가 세계 제일의 관광대국이 된 비결은 문화예술관광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은 대륙문화와 해양문화의 교차점에 위치해 다양한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세계 최고의 유교문화, 불교문화가 꽃피었다. 구한말 이후 순교의 역사 속에 전개된 기독교의 빠른 성장 등 종교문화도 소중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또 유네스코가 선정한 10개의 세계문화유산이 한국 문화관광자원의 저력을 더하고 있다. 특히 자연유산으로서 제주도는 금년도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될 경우 가히 폭발적인 한국 관광의 힘이 될 것이기에 전 국민의 관심과 적극적인 투표가 요망된다. 최근 일본도 문화국가를 목표로 관광입국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관광청도 새로 발족시켰다. 싱가포르는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 금융, 컨벤션, 관광을 통합 서비스 산업으로 키우면서 관광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20세기 후반 외래관광객 시장 규모가 한국과 비슷했으나 최근 2000만명을 넘어 두배, 세배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 관광은 이웃효과를 누릴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경제대국 일본과 세계 최고의 인구 대국 중국, 동남아 각국 등 20억 인구가 우리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 특히 중국 관광객의 지속적 증가에 따른 특단의 대비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관광강국은 정부와 기업, 대학의 거버넌스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구축되고, 관광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서비스 정신이 공유되어야 이뤄질 수 있다. 또 올해 1000만 외래관광객 달성을 위해 K팝 등 한국 문화관광의 새로운 힘인 ‘한류’가 더욱 꽃필 수 있는 상설 공연장 ‘한류 문화 예술 회관’(가칭)이 조속히 건설되어야 한다. 아울러 관광의 양보다 질을 중요시하는 고급화 정책이 동반되어야 하며,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으로서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 생태 문화 관광을 차별화된 관광상품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모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자신의 공훈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피 흘려 싸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할까. 18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 비에나시에서 만난 미국인 참전군인 앨 오티즈(82)는 그것이 또 하나의 편견임을 일깨워 줬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째를 맞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적탄에 사랑하는 전우를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공격에 적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전쟁의 비극을 논하는 것은 애당초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습이 웅변했다. 61년 전 오티즈는 텍사스 앨파소에 사는 평범한 21세의 청년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모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는 1950년 11월 강제 징집명령을 받는다. 심경이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그는 솔직했다. 오티즈는 루이지애나에서 기초 훈련을 거친 뒤 1951년 5월 일본 홋카이도에 배치됐다. 한국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 위한 혹한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통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이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였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그런 감정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는 그때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오티즈는 미 45보병사단 179연대 1소대 소대장으로 강원도 철원의 ‘포크찹 힐’(255고지) 전투에 배치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고지의 모양이 포크찹이라는 요리를 닮아서 붙은 별명이었다. 이름은 익살스러웠지만, 그곳은 아군과 적군이 빼앗고 빼앗기기를 거듭한 가장 격렬한 전장 중 하나였다. 오티즈 소대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을 받았다. “북한군은 사납고 잔인했어요. 총도 없이 호미 같은 것을 들고 우리한테 돌진하기도 했죠.” 중공군은 인해전술이었다. “마치 개미떼 같았죠. 수백명이 밀고 올라왔어요. 우리는 대포와 수류탄으로 맞섰어요. 특히 수류탄이 효과가 컸어요. 중공군도 나무로 된 수류탄을 던졌는데 우리는 그걸 다시 주워서 되던지기도 했죠.” 오티즈는 “한번은 중공군 포로를 잡고 보니 12살 정도밖에 안 되는 소년이어서 깜짝 놀란 기억도 있다.”고 했다. 실탄이 떨어진 양측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지는 것도 예사였다. 오티즈는 검지와 중지로 적의 눈을 찌른 적도 있고 칼로 적의 목을 벤 적도 있다고 했다. 전쟁은 해맑은 청년을 야수로 바꿔 놓았다. “처음엔 중공군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곁에 있던 전우가 죽는 것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쳤죠. 점점 그들을 증오하게 됐어요.” 그는 1952년 7월 박격포 파편으로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됐고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1953년 5월 전역한 뒤 참전군인에 대한 정부 지원으로 텍사스주립대에 들어갔고, 국무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버지니아로 이사했다. 그는 결혼해서 1남3녀를 뒀다. 그에게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놀랐다.’는 답변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숨과 함께 나온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한국에 먼저 다녀온 참전용사들은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뉴욕같이 변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전우들을 잃은 기억이 떠오를까 봐 두려웠어요. 내가 이끌던 40명 중에 33명이 전사했죠.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에는 이슬이 비쳤다. 하지만 부상 미군 단체(Purple Heart)의 일원이었던 그는 이 단체의 방한 요청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2000년대 초 한국을 찾았다. 반세기 만이었다. 한국에 있는 사흘간 동료들은 판문점 등을 돌아다녔지만, 그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의 기억이 떠오를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같은 참전용사라도 나처럼 격렬한 전투에 참여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힘들다.”고 했다. “61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을 꾸죠. 육박전에서 내가 찌른 적이 죽어가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는 “우리가 그렇게 싸웠는데 남북한이 여전히 분단국가라는 점이 걱정”이라면서 “나는 북한이 다시 도발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도와준 것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참전용사)한테 뭔가를 보답하려 한다.”면서 여러 차례 고맙다는 말을 했다. 준비해 간 질문 가운데 차마 꺼내지 못한 게 있다. ‘다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도 기꺼이 참전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이다. 그 질문을 준비해 간 게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글 사진 비에나(버지니아)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北 “즉시 송환 안 하면 남북관계 더 악화”

    북한이 지난 11일 귀순한 북한 주민 9명의 송환을 요구하는 전통문을 보내왔다. 통일부는 16일 “북측 조선적십자회가 ‘보도에 의하면 북측 주민 9명이 연평도 해상에서 월선해 (남측의) 조사를 받고 있다’면서 이들의 조속한 송환을 대한적십자사 측에 요구해 왔다.”고 밝혔다. 북한의 전통문은 이날 낮 12시께 판문점 적십자채널을 통해 접수됐으며 이들이 타고 온 선박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측이 전통문에서 “귀순 의사니 뭐니 하면서 즉시 돌려보내지 않으면 남북관계에 더욱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면서 위협했다고 전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11일 오전 북한 주민 9명이 무동력 소형 선박 2척을 이용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와 귀순 의사를 표했다.”면서 귀순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한편, 북한이 전통문에서 ‘보도에 따르면’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귀순자들의 정확한 신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수교 121년만의 첫 한국계 주한 美대사 Sung Kim

    수교 121년만의 첫 한국계 주한 美대사 Sung Kim

    서재필이 갑신정변에 실패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얻은 때가 1890년 6월 19일이다. 이로써 서재필은 첫 한국계 미국인이 됐다. 그로부터 121년 만에 한국계 미국인이 주한 미국대사에 내정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차기 주한 미국대사에 성김(51) 국무부 북핵 6자회담 특사를 내정하고 한국 정부에 아그레망(주재국 임명동의)을 요청한 것으로 지난 3일 확인됐다. 성김은 1970년대 중반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1980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재미교포 1.5세다. 성김이 한국 정부의 임명동의에 이어 미 상원 인준을 통과해 8월쯤 22대 주한 미대사로 부임할 경우 1882년 양국 수교 이후 129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과 똑같은 얼굴을 한 미국대사가 서울에 오는 셈이다. 성김의 한국 이름은 김성용이다. 1960년생인 그는 부촌인 서울 성북동에 살면서 은석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고,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다가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갔다. 1994년 미국에서 작고한 그의 아버지 김재권씨는 1973년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주일공사로 재직 중이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김재권씨가 당시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성김 가족이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 간 것도 이 사건의 여파 탓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김대중 납치사건의 핵심인물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자서전을 통해 김재권씨가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성김이 6자회담 특사로 임명됐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 진영에서는 내부적으로 적절성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 전 대통령 자서전을 정리한 유시춘씨는 2009년 한 시사주간지 인터뷰에서 “성김이 당시 (납치)사건에 관여했던 김재권(일명 김기완) 주일공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물론 미국대사관 관계자로부터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관련 내용을 자서전에 몇 줄 담을까 생각했는데 김 전 대통령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말고, 쓰지도 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성김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마당에 굳이 과거 아버지 얘기를 거론하는 것은 교포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고 유씨는 밝혔다. 충북 음성 출신의 김재권씨는 1958년 부산발 서울행 경비행기에 탔다가 탑승자 30여명과 함께 괴한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된 뒤 20여 일 만에 판문점을 통해 송환됐다는 얘기도 있다. 성김은 또 방송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인기를 모은 가수 임재범씨와 사촌지간으로 알려졌다. 성김의 어머니 임현자씨가 임재범씨의 아버지 임택근(79) 전 MBC 전무와 남매지간이라는 것이다. 성김에겐 임재범이 외사촌 동생이고, 임재범에겐 성김이 고종사촌형인 셈이다. 청와대 정진석 정무수석과는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내왔다. 성김 내정자가 어린 시절 성북동에 살 때부터 친구로 지냈고 그가 미국으로 간 뒤에도 꾸준히 교분을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성김이 결혼할 때는 부인과 어학연수원을 함께 다닌 정 수석이 함을 지기도 했다고 한다. 성김은 펜실베이니아대, 로욜라 로스쿨을 거쳐 로스앤젤레스 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가 외교관으로 전직했다. 그는 2003년 주한 미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면서 북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후 6자회담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북한을 10차례 이상 방문했다. 2006년 주한 미대사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차관보에 의해 국무부 한국과장으로 발탁돼 전시전작통제권 전환, 북핵문제, 한국 대선 등의 업무를 처리했다. 2008년 상원 인준을 거쳐 ‘대사’(ambassador) 직함을 얻은 이후 6자회담 특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언론을 통해 한국민들에게 얼굴이 알려졌다. 그는 윗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인성의 소유자다. 성격이 온화하고 겸손하며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발언을 절제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성김이 조지 W 부시 정부 에 이어 오바마 정부에서도 고속 승진을 하는 것은 이 같은 장점 때문이다. 물론 북한 문제에 대한 그의 전문성도 신임을 받는 주요한 이유다.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대북정책 결정과정에서 성김에게 의존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그를 “성”이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한다고 한다. 성김은 한국어로 웬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원어민만큼의 완벽한 어휘는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 등 공식석상에서는 영어를 쓴다. 그는 “한국말을 할 때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더 긴장이 된다.”고 말하곤 한다. 그는 2남 3녀 중 넷째다. 어머니는 LA에 살고 형제들도 모두 미국에서 변호사 등으로 활동한다. 성김은 이화여대 미대 출신 한국 여성과 결혼해 두 딸을 두고 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성김은 누구] ▲1960년 서울 출생 ▲1975년 미국으로 이민 ▲펜실베이니아대, 로욜라 로스쿨 졸업 ▲로스앤젤레스 검사 ▲주한 미대사관 1등 서기관 ▲미 국무부 한국과장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미 국무부 대사 ▲북핵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
  • [드러난 남북 비밀 접촉] 조선중앙통신이 주장한 ‘남북 비밀 접촉’ 안팎

    1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A4 용지 3장 분량으로 남한이 북한에 정상회담 개최를 요청한 상황과 비밀 접촉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했다. 통신은 “남한 정부가 약 두 달 전인 4월부터 북측에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 접촉을 요청해 왔다.”고 주장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일방적으로 진의나 사실관계를 왜곡한 주장으로 이에 대해 일일이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통신은 “비밀 접촉이 이명박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른 것으로 현인택 통일부 장관,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임태희 대통령 비서실장 등 극소수만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첫 접촉에 대해서는 “5월 9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이 베를린 선언을 한 것이 9일로,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에서는 비밀 접촉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자리에는 통일부 김천식 정책실장, 국정원 홍창화 국장, 청와대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 등이 참석했다고 밝혔으나, 북측의 참석자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우리 측은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지혜롭게 넘어야 할 산’”이라면서 사과를 요구했다고 통신은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총 세 차례의 정상회담 개최를 목표로 ▲5월 하순 장관급 회담 ▲6월 하순 판문점서 1차 정상회담 ▲8월 평양에서 2차 정상회담 ▲내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3차 정상회담이라는 타임테이블을 내놓았다고 통신은 보도했다. 이어 말레이시아에서 2차 접촉을 하자고 요청했다고도 보도했다. 통신은 남측이 북측에 상당히 저자세로 정상회담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고,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유감만 표시해 달라.”고 굴욕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남측이) 제발 딱한 사정을 들어 달라고 구걸했다.”면서 “(천안함·연평도)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으니 제발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 접촉을 갖자.”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천안함·연평도 문제는 현재 남북관계에서 핵심적 문제다. 이게 풀려야 다른 남북관계도 발전할 수 있고 정상회담도 가능하다고 말했다.”면서 “공식적으로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비밀 접촉 과정에서 돈 봉투까지 내놓았다고 보도한 것에 대해 “참 황당한 얘기다. 말도 안 된다.”고 부인했다. 또 다른 당국자도 “북한과 접촉할 때 이런 식으로 (저자세로) 하지는 않는다.”면서 “비밀 접촉 상황에 대한 묘사는 날조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통신은 우리 측이 “비밀 접촉이 오고 간 이야기가 이남에 알려지면 좋지 않으니 꼭 비밀에 부쳐 달라.”고 했다고도 보도했다. 통신은 “진정으로 북남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다면 애당초 ‘베를린 제안’과 같은 악담을 늘어놓지 말았어야 하며 비공개 접촉 사실을 왜곡해 신의 없이 공개하는 연극도 놀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난했다. 정부 당국자는 “우리의 요구에 대해 북한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이틀 전 국방위 대변인 성명 형식을 통해 ‘우리 당국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해 접촉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 이해했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이어 “이렇게 공개한 것은 처음이고 분명히 이례적인 상황”이라면서 “북한의 의도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복잡한 내부사정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특파원 칼럼] 미국은 무서운 나라다/김상연 워싱턴특파원

    [특파원 칼럼] 미국은 무서운 나라다/김상연 워싱턴특파원

    미국은 무서운 나라다. 테러를 저지르고 가뭇없이 사라진 범인을 10년 만에 기어이 찾아낸 정보력이 섬뜩하고, 전광석화처럼 작전을 뚝딱 해치운 군사력이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이 ‘할리우드적 스펙터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국이 오사마 빈라덴의 시신을 처리한 방식이다. 그들은 시신을 물로 씻기고 하얀 천으로 감싼 뒤 이슬람식으로 장례를 치러줬다. 정말 그렇게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했다고 밝힌 게 중요하다. 3000여명의 국민을 죽인 ‘나라의 원수’라면 능지처참해도 분이 안 풀리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미국은 망자에 대한 예를 갖췄음을 애써 부각시켰다. 람보의 덩치를 가진 나라의 이런 소심한 뒤처리는 반미 감정을 최소화하려는 계산에서 나왔을 것이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그 감성의 상황에서 어쩌면 그토록 ‘드라이한’ 이성적 계산을 할 수 있는지, 나는 미국이란 나라가 소름 끼친다. 어떤 나라의 의사결정이 이성과 감성의 배합으로 이뤄진다고 할 때,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이성의 비율이 큰 판단구조를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빈라덴의 참혹한 시신 사진이 이슬람권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한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진을 (승리의)트로피로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정말 그런 나라가 아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토머스 윌슨 대통령은 “승리 없는 평화”를 주장한다. 미국은 연합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으면서도 후환을 우려해 패전국을 가혹하게 징벌하는 데는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성적 판단은 다른 승전국들에 의해 무시됐고, 이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됐다. 미국은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등을 빼앗을 때도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방식을 구사한다. 전승국이라면 그냥 눈을 부라리며 새 땅을 꿀꺽하면 될 텐데 굳이 멕시코에 돈을 주고 구매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후환의 싹을 잘라 버린 셈이다. 미국은 판단을 내릴 때 머릿속에서 희로애락은 사라지고 딱딱한 계산기만 남는 것 같다. 미국의 ‘이성으로 판단하기’는 역설적으로 지금껏 북한 정권의 생존에 도움을 줘 왔다. 만약 미국이 조금만 더 감정적인 나라였다면 판문점에서 미군이 북한군의 도끼에 맞아 죽었을 때 평양을 폭격했거나, 그보다 앞서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했을 때 베이징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머릿속에 북한 침공은 득보다는 실이 많은 게임이다. 북한은 석유가 나는 금싸라기 땅도 아닌 데다 중국이라는 거구의 후견인이 뒤에 버티고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북한은 미국의 ‘이성으로 판단하기’로 인해 치명적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때문이다. 최근 미군 수뇌부는 “북한은 5년 안에 미 본토에 닿을 수 있는 미사일 개발이 가능하다. 북한은 점점 미국에 직접적 위협이 되고 있다.”는 우려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이성으로 사고하는 미국의 이런 우려를 허풍이나 과장, 엄살과 같은 감성적 언어로 해석하면 오산이다. 북한이 핵과 단거리 미사일로 동북아에서 장난치는 것과 미 본토를 위협하는 ICBM을 개발하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다. 미국이 감성적인 국가라면 ‘설마 북한이 우리한테 쏘겠어. 허풍이겠지.’라면서 평가절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성적 판단을 하는 미국은 단 1%의 확률이라도 미 본토로 미사일이 날아올 것이라는 계산을 내리면 북한을 반드시 손보려 할 것이다. 그때는 중국이건, 어떤 나라건 아무리 반발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미국의 전쟁사는 웅변하고 있다. 벼랑끝 전술은 ‘고위험 고수익’의 매력이 있지만, 단 한번의 아차하는 실수로 파국을 맞는다는 점에서 리스크가 치명적이다. 이 위험성을 무시했다가 미국한테 사담 후세인도 당했고, 오사마 빈라덴도 당했다. carlos@seoul.co.kr
  • 시미즈 前의원은 누구

    시미즈 스미코(83) 전 일본 참의원(사민당)은 후쿠이현 출신의 2선 의원이다. 1972년 북한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일본과 남·북한관계의 다방면에서 가교역할을 해 왔다. 위안부 문제는 물론 한국인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입장에 서서 일본의 사과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 왔다. 2010년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강제병합 원천적 무효”를 주장하며 일본 총리의 식민지배 사과 담화를 요구하는 ‘2010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현재 북·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뛰고 있다. 1991년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은 사실상 시미즈 의원의 치밀하고 오랜 준비 끝에 이뤄 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민간단체의 특성을 살려 양측 간 비방이 없었고, 정부도 ‘판문점에서 민간인 접촉 불가’ 원칙을 깨고 준비과정을 지원하는 등 한 단계 성숙된 남북교류로 평가된다. 다음 해 평양에서 3차 대회, 일본에서 4차 대회를 열었으나 이후 정치상황이 악화돼 더 이상 개최하지 못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나와 통일] “한국은 北에 식량 지원하고 北은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나와 통일] “한국은 北에 식량 지원하고 北은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1991년 11월 25일. 남북의 여성이 분단 46년 만에 서울에서 얼굴을 맞댔다. 분단 후 처음으로 북한 여성이 판문점을 넘어와 남북통일과 평화를 노래한 것. 이를 성사시킨 사람은 남한의 여성도 북한의 여성도 아니었다. 4년 넘게 남북한의 메신저 역할을 한 시미즈 스미코 전 일본 사민당 의원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남북 분단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주장하는 시미즈 의원으로부터 남북 여성 교류를 성사시키기까지의 뒷얘기와 현 남북관계에 대한 소회를 들어 봤다. →4·15 김일성 생일을 맞아 북한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요즘 평양의 분위기는 어떤가. -김일성 주석 탄생 100년(2012년)을 앞두고 축하 분위기였다. 작년에 북한에 갔을 때와 달리 주택이 잘 정비돼 있다는 느낌이었다. 살구꽃과 개나리꽃이 아주 예쁘게 폈고, 분위기가 휴일에 축제가 더해져 즐거워 보였다. →외부에서는 북한이 매우 빈곤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빈곤한 것은 사실이긴 하다. 그래도 내년에 강성대국을 앞두고 국민 경제 강화를 최우선하는 한편 굉장히 자신감에 차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술 등 여러 측면에서 늦었지만 그런 가운데서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겠다는 의욕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몇 번째 방북인가. -24번째다. 1972년에 간 게 처음이었다. →어떤 계기로 북한 문제에 관여하게 됐나. -1972년 북한의 초청으로 처음 평양을 방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조선반도가 인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시 북한에서 박물관, 역사전시관 등을 보고,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른바 여성운동, 평화운동을 하는 내가 일본의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모르고 있었다니 엄청 충격을 받았다. →남북이 분단된 데에 일본의 책임을 느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한반도가 짓밟힌 뒤, 해방되지 못하고 오히려 연합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지 않았나. 일본이 패전했기 때문에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보고 희생자가 된 것이다. 식민지배가 원인이 돼 분단이라는 희생을 강요받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본은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1년 남북한 여성 교류에 어떤 계기로 참가하게 됐나. -1987년 8월 이우정 당시 여성단체연대 공동대표가 ‘원자폭단 금지 세계대회’ 참석차 일본에 왔다. 감시를 피해 밤에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가 한국의 민주화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이 대표가 북한 동포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이 대표는 “동족인데도 사십년 넘게 못 만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일본에서 북한 여성을 만날 수 없겠느냐.”면서 남북한 여성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일본이 북한과 국교가 맺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로서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 대표의 열정에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무려’ 여연구 당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몽양 여운형의 딸)을 말하는 게 아닌가(웃음). 그 이후 4년간 인편을 통해 북한에 편지를 보낸 끝에 일본 대회 개최가 결정됐다. 아마도 김일성 주석에게 편지가 전달됐던 것 같다. →굉장히 긴 노력 끝에 이뤄 낸 결실이었다. -이 대표는 남북이 만난다고 하면 정부의 간섭을 받을 테니 ‘아시아 평화의 여성의 역할’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냈다. 행사 준비도 문서로는 일절 남기지 않고, 구두로만 전달해 몰래 준비했다. 정체가 드러날까 봐 참가자도 모호하게 했다. 미키 무쓰코(고 미키 다케오 전 총리의 부인), 오타카 요시코 자민당 참의원 등을 초청했다. 나중에 정부으로부터 “자민당 행사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대성공이었다(웃음). 일본에서 열린 첫 대회에 1000명 이상이 모여 대성황을 이뤘다. →집회에서 남북한이 뜻을 모았나. -일본이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남북한 여성의 교류를 확대하고, 위안부 문제도 함께 해결하자고 뜻을 모았다. 정치의 벽을 부수는 것은 역시 민중의 힘이라는 것을 느꼈다. →같은 해 11월에 서울에서 제2차 대회가 열렸다. -한국 여성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가 통일원을 움직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이 집회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결국 여연구가 아버지 여운형의 묘소를 참배했는데, 약속한 일정엔 없었던 일이라고 정부에서 문제를 삼아 도중에 북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깨진 건 참 유감이었지만, 집회 당시 마치 남북이 통일된 것처럼 흥분하고 감격했다. 남북한 여성들이 껴안고 울고 웃는 모습에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 분단의 책임을 느꼈다.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남북 교류가 굉장히 활발했던 것 같다. -민중들의 교류, 대화가 없으면 화해와 통일로 갈 수 없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을 때 드디어 밝은 시대가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군사적 관점으로만 상대를 보면 미움과 분노밖에 생기지 않는다. 작년에 여러 군사적인 문제가 있었지만 어떻게 하면 긴장을 없앨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남북통일이 일본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그렇지 않다. 일본이 (남북통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고, 동북 아시아 지배의 역사뿐 아니라 앞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지역의 새로운 미래, 새로운 상황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이런 시대는 100년도 더 갈 것이다.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지 않으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나라가 되기 어렵다. 그걸 이룩하는 게 우리 세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등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식량지원은 인도주의 차원의 문제다. 남북 간의 대립이 있더라도 지원 의지가 없으면 대화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인간은 한번 지원을 해 준 나라는 잊지 않는다. 일본인은 전쟁 후 미군의 건빵·탈지분유 등을 받으면서 점령군에 대한 적대감이 없어졌다. 역시 음식이라는 건 인간에게 일상생활에서 없으면 가장 괴로운 것 아니냐. 북한도 여러 지원에 대해 한국 동포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게 좋다. →남북통일이 된다면 어떤 형태가 가장 좋을까. -다른 나라가 말할 문제는 아니지만 가장 좋은 건 다른 나라의 간섭 없이 같은 민족끼리 스스로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양측의 좋은 점을 취하고 통일을 다른 나라의 간섭이나 군사적 대립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실현될 것라고 생각한다. 조선 민족은 긴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항일운동이나 민주화 투쟁에서 조선의 민족성에 크게 놀랐다.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경제 발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발전을 위해 지혜를 살려 주었으면 좋겠다.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면 좋은 지혜가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정부, 北에 적십자 접촉 제안

    정부는 27일 북측에 남북적십자 실무 접촉을 가질 것을 제안하면서 북측이 요구하는 귀순자 4명의 자유의사 확인뿐 아니라 국군 포로 납북자 문제도 함께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통일부는 이날 대한적십자사 명의로 북한 조선적십자회에 전통문을 보내 “5월 4일 오전 10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적십자 실무 접촉을 하자.”고 제의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북한 지역에 억류되어 있는 우리 국민의 자유 의사를 확인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전통문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국군 포로 납북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현정화 “1991년 세계탁구 金 따고 작은 통일 느껴”

    현정화 “1991년 세계탁구 金 따고 작은 통일 느껴”

    1991년 4월 29일 남북한 7000만명의 시선이 지름 40㎜짜리 흰색 공 하나에 집중됐다. 일본 치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 ‘코리아’로 출전한 리분희·유순복(이상 북한), 현정화팀의 여성단체전 결승전. 3시간40분에 걸친 숨막히는 접전 끝에 우승 금메달을 따낸 이 시합은 아직도 탁구사(史)의 명승부로 꼽힌다. 20년이 지난 2011년 그날의 감동과 선수들의 우정을 영화로 제작한다. 영화 ‘코리아’의 시나리오 작업부터 출연배우들의 연기지도까지 애정을 아끼지 않고 있는 현정화 당시 국가대표를 만났다. 그는 금메달을 땄을 때 “아, 우리가 작은 통일을 이뤘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영화배우 하지원이 본인 역을 맡는다고 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 -하지원씨는 내가 추천했다. 시크릿 가든이 막 끝날 때쯤이었는데, 하지원씨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었고, 주변에서도 “너랑 닮은 것 같다.”고 했다.(웃음) 리분희 역할은 배두나씨다.   이번 영화에서 새로 드러나는 에피소드가 있나? -영화에는 연애 에피소드가 추가됐다. 북한 남자선수와 남한 여자선수가 애정전선이 형성되지만, 대회가 끝나면서 남북으로 갈라진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다.   벌써 20년전 일인데 영화로 만든다고 하니까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당시 영상을 다시 보게 됐다. 경기하던 장면, 리분희 선수와 만났을 때, 헤어지던 모습 등을 다시 보니까 가슴이 울컥했다. 불현듯 리분희 선수도 보고싶고.   리분희 선수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가? -1993년 국제대회에서 보고 못봤다. 최근에 듣기로는 2010 광저우 장애인 아시안게임에 왔다고 한다. 장애인 스포츠 지도자 활동을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녀가 뇌성마비여서 이쪽으로 더 관심을 가졌다고 들었다.   리분희 선수를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가? -세월이 20년이나 흘렀고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각자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낳았고, 지도자를 했다. 다시 만나면 수많은 얘기를 쏟아놓을 것 같다.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는지 물어보고 도와주고 싶다.   리분희 선수와 원래 친했나? -1986년 국제대회에서 처음 만났다. 워낙 라이벌이었지만 내가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 만날 때 카세트 테이프나 한국 드라마 테이프를 건네주곤 했다. 한국이 어떻게 사는지, 가요, 드라마에 관심이 많았다. 돈은 얼마나 버는지도 궁금해 했다. 당시에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코리아’는 남북 단일팀의 합숙기간 30일, 시합 16일 등 총 46일간의 기록이다. 남북한 선수들은 46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때로는 동료로 때로는 형제, 자매처럼 살가운 시간들을 보냈다. 긴 시간 함께 지내면서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다. -사실 여자 선수들은 드라마틱한 에피소드가 없었다. 각자 방에 찾아가서 놀고 수다를 많이 떨었다. 이십대 초반의 여자들이다보니 남자 친구가 공통의 화제가 됐다.(웃음) 리분희 선수는 동료선수인 김성희와 사귀고 있는데 결혼할 거라고 했고, 나는 김성만 선수와 결혼할거라고 했다. 둘 만 아는 비밀이었다. 마지막 날에 엄마가 챙겨주신 반지를 줬다. 내 이름이랑 리분희 선수 이름이 쓰여진 한 돈 짜리 금반지다. 영화에서는 내가 끼고 있던 반지를 주는 것으로 나온다.   일본에서 합숙생활은 어땠나? -일본이 매우 미묘한 곳이다. 우리 덕분에 처음으로 민단과 조총련이 만났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합숙을 했는데 지역마다 민단과 조총련이 환영회,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헤어질 때는 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학생들이 한반도기 모양의 수를 놓아서 가져오거나 한반도 모양의 떡을 만들어 가져오면 잘라서 먹고 웃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1991년 2월 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체육회담에서 남북단일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분단 후 46년만에 처음이었다.   당시 탁구 단일팀이 어떻게 구성됐나? -어떻게 구성하게 됐는지 그 배경은 모른다. 통일부에서 주선해서 급하게 진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스포츠 교류를 통해 물꼬를 트려고 했던 것 같다.   가장 긴장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중국과의 결승전 게임스코어 2대2였다. 마지막 게임에서 유순복 선수가 가오준 선수를 이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경기 전에 유순복 선수한테 가오준을 이길 자신이 있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아, 이젠 졌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유순복 선수가 1세트를 19점으로 이기고 2세트에서도 21대 19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이겼을 때 기분은 어땠나? -이번에 영상을 보니 탁구 테이블 하나에 쏠린 관중석의 눈들이 보이더라. 한꺼번에 환호하고, 이긴 순간 기자들이 확 뛰쳐 나오는 것도 보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 땐 너무 많이 울어서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경기하면서 한번도 운 적이 없었는데 그 때는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울었나? -내가 경기를 끝냈으면 그렇게 안 운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게 있었던 것 같다. 남북한 7000만 동포가 지켜보고 있었고, 기자들이나 단장님, 남북 관계자들이 그런 사실을 많이 주입시켰었다. 특이한 상황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해냈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시상식 때 아리랑이 나왔는데 기분이 어땠나? -아리랑이 사실은 가락이 매우 슬픈 노래다. 희비가 교차했다. 기쁘다기 보다는 슬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끝나면 우리는 헤어질 것이고 단일팀은 연속적으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약간 미묘한 감정이 있었다. (당시 남북 합의 하에 국기는 흰 바탕에 파란색 한반도가 그려진 ‘한반도기’, 국가는 ‘아리랑’을 연주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보도를 보면 ‘하나된 남북이 세계 정상에 섰다.’고 대서 특필을 했다. -그 시합을 계기로 남북한 스포츠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질 거라고 기대했다. 정말로 “아, 통일이 되는구나.” 했다. 그러나 남북 청소년 축구 단일팀이 단 한번 이뤄진 후 그 다음 부터는 교류가 없었다. 나중에서야 정치적으로 반짝했던 이벤트였구나 생각했다. 나중에 리분희 선수를 다시 남북간 선수로 만났다. 나는 태극기, 그쪽은 인공기를 달았다. 나는 남북 단일팀 했던 당사자였기 때문에 당시에 우리가 하나라는것을 느꼈었다. 그런데 다시 적으로 맞붙게 되니까 기분이 미묘했다. 나는 남북 분단을 몸으로 느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그런 고통을 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인 이벤트를 할 바에야 차라리 단일팀 같은 거 하지 말고 각자 국가를 인정하고 사는 게 낫다고 마음이 굳혀졌다.   아이들한테도 그런얘기 하나? -우리 딸이 11살인데 이런 얘기는 잘 모른다. 이번에 영화가 나오면 통일에 대한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통일을 잊고 사는 세대 아닌가. 나는 통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한 세대지만 아이들 세대는 나름의 인생계획이 있고, 그 삶을 방해받고 싶어하지 않아 하는 세대다. 누구를 도와주고 끌고가겠다는 생각이 부족하다. 그런 생각을 가르쳐주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그건 영화사도 마찬가지다.   영화 제작은 어떤 계기로 하게 됐나? -1년전쯤 감독님한테 영화 얘기를 들었다. 이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우 감사했다. 전쟁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아픔을 주는 것이고 문화적인 소재는 간접적이지만 더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고, 남북한 선수로 나오는 20명에게 매일 3시간씩 탁구를 가르치고 있다. 앞으로도 탁구 장면을 찍을 때 디테일한 기술적인 것 모든 것들을 가르쳐 줄 예정이다. 하지원씨가 운동신경이 좋아서 자세도 좋고 잘 따라온다. 당시 촌스러웠던 내 커트머리를 그대로 했다.(웃음)   통일이 되기를 바라나? -나는 사실 반반이다. 원하는 것도 있고 그냥 ‘안했음 좋겠다.’는 생각도 있다.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장기적으로는 준비를 해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빠져서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도와줘야 한다. 정말로 손을 떼어버리는 상태까지 가면 안되지 않나.   스포츠인으로서 통일에 기여하고 싶은 꿈이 있다면? -스포츠만큼 (남북간)물꼬를 트기에 좋은 게 없다. 정치적 배경없이 순수하게 교류하고, 남북을 오가면서 시합을 하다보면 종목도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되지 않겠나. 스포츠도 이제는 마케팅이다. 관심있는 기업도 생기고, 북한을 도울 수 있는 길도 생긴다. 북한 친구들은 실력은 있는데 돈이 없어 대회에 못나온다. 차비가 없어 스무시간 넘게 차를 타고 중국 대회 밖에 못나가고 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무조건 돕겠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정치플러스] 남북 백두산회의 12일 개성 개최

    정부는 6일 백두산 화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제2차 남북 전문가회의를 12일 개성에서 개최하자고 북측에 제의했다고 밝혔다. 이종주 통일부 부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판문점 적십자 채널을 통해 남측 수석대표 명의의 전통문을 북측에 전달했다.”면서 “전문성과 과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분야인 만큼 이번 회의도 전문가회의의 기본 틀을 유지하는 방향에서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북측에서 일정 변경을 요구하지 않는 한 12일 2차 남북 전문가회의가 개성에서 열릴 것으로 보인다.
  • 北, 귀순자송환 접촉 제의… 통일부 거부

    북한은 지난달 목선을 타고 남하했다가 귀순한 북한 주민 4명의 송환 문제를 논의하자며 30일 남북 적십자 실무 접촉을 제의했다. 통일부는 “북한 조선적십자회가 오늘 오후 대한적십자사 앞으로 전통문을 보내 귀순자 4명의 대면 확인 및 송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 적십자 실무 접촉을 4월 6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해 왔다.”며 “귀순자 4명은 이미 자유의사에 따라 귀순을 결정한 것으로, 귀순자 송환과 대면 확인을 위한 적십자회담에는 응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통일부는 “우리 측 지역에서 귀순자 4명의 자유의사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확인시켜 줄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힌 바 있으며 이는 현재도 유효하다.”고 덧붙였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배 고치니 날씨가”… 北주민 27명 뒤숭숭한 남한살이

    지난달 5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월선한 북한 주민 27명이 이번에는 기상상황 악화로 북한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24일 “선박의 수리는 마무리 됐는데 서해의 풍랑 때문에 이번주 내 송환은 어려울 것 같다.”면서 “기상상태를 봐가면서 조속히 보낸다는 입장을 가지고 되도록 빨리 보내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북한 주민 31명이 NLL을 넘어 남측으로 내려온 것은 지난 2월 5일이다. 우리측으로 귀순 의향을 밝힌 4명을 제외한 27명이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한 생활을 한 지도 2개월이 다 돼 가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31명이나 되는 대규모 인원이 한꺼번에 내려오는 바람에 우리 측의 조사기간도 한달이나 계속됐다. 여기에 귀순 희망자 4명에 대한 남북 당국간의 신경전으로 판문점까지 올라갔다가 되돌아오는 수난도 겪어야 했다. 지난 15일 마침내 북한행이 결정됐으나 선박의 상태가 문제가 됐다. 이들이 타고 온 배가 오래된 목선이었기 때문에 수리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재봉틀 사용하다가 바느질 하기 어렵듯이 북한 선박이 낡아 기술자를 찾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라고 설명했다. 이제는 날씨마저도 이들의 송환을 돕지 않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현재 전 해상에 풍랑주의보가 내려져 있는 상태로 연평도 인근 서해 중부에는 2~3m 가량의 높은 파도가 예상된다. 기상청 관계자는 “5t급의 소형 목선은 바다를 통과하기에 매우 위험하다. 26일쯤 돼야 바다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난감해하고 있다. 27명을 겨우 북으로 돌려보내게 됐는데 선박 수리와 기상상황으로 지연되고 있는 데에 대한 부담이 하루하루 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마치 양치기 소년처럼 돼 버려서 답답하지만 안전하게 항해해서 보내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라면서 “상황이 좋아지면 주말에라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털어놓았다. 현재 27명은 정부 관계기관 보호하에 경기도 모처의 숙소에서 지내고 있으며 추가로 귀순을 희망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南 “백두산 민간전문가회의 29일 갖자”

    정부가 22일 백두산 화산 문제를 협의하자는 북측의 제의에 대해 민간 전문가 간 협의를 제안했다. 통일부는 “백두산 화산 활동과 관련, 남북 간 협력 필요성에 공감하며 우선 전문가 간 협의를 29일 우리 측 지역인 경기도 문산에서 갖자.”는 내용의 대북 전통문을 보냈다. 전통문은 기상청장 명의로 판문점 연락관 채널(적십자채널)을 통해 북측 지진국장 앞으로 전달됐다. 통일부 당국자는 “백두산 화산 활동 문제는 고도의 전문성과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선 양측의 전문가 간 협의가 먼저 진행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전문가 협의가 이뤄져도 우리 측에서는 기상청 등 관계 당국은 빠지고 순수 민간 전문가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통일부는 그러나 전문가 협의가 발전되면 당국 간 협의도 이뤄질 수 있다고 밝혔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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