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파병
    2025-12-27
    검색기록 지우기
  • 문콕
    2025-12-2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520
  • 고관대작 집이었다는데… 옹기종기 한옥은 ‘조선 건축왕’ 항일의 상징

    고관대작 집이었다는데… 옹기종기 한옥은 ‘조선 건축왕’ 항일의 상징

    호기심이 없으면 질문이 없고, 질문이 없으면 새로운 발견도 있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기 위한 시도는 새로운 앎과 그걸 통한 성찰의 필수 조건이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0회 ‘삼청동’ 편이 지난 1일 삼청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번 투어는 잘 알려진 곳을 대상으로 했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그래서 더 놀라운 발견이 가능한 곳, 굳이 서울 사람이 아니어도 모르는 이 없는 서울 북촌이 이번 대상지였다. 맹사성 대감의 집터를 포함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한옥 등 조선 시대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전통문화를 이어 왔다고 알려진 서울 북촌. 과연 북촌은 그렇기만 한 곳일까.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한 이번 투어는 이동은 최소화하되 공간의 맥락은 조금 더 깊게 살펴볼 수 있도록 코스를 잡았다. 시작점은 북촌의 터줏대감 격인 정독도서관. 유심히 살펴보면 현관에 한자로 ‘正讀圖書館’(정독도서관)이라고 걸려 있는 글씨체가 어딘가 낯익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놀랍게도 서울도시계획의 대전환과 관련 있는 흔적이다. 1968년은 그야말로 남북 갈등의 최정점을 찍던 해였다. 그해 1월 21일 김신조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 초입까지 잠입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로 이틀 뒤엔 원산 앞바다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와 북한군 간에 교전이 벌어진 끝에 1명의 사망자를 포함한 83명의 승조원 모두가 납치돼 끌려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더욱이 그해 말에는 울진과 삼척에 100명이 훌쩍 넘는 무장 공비가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 버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남북 충돌이 전방만이 아니라 청와대 앞에서, 그리고 경북 지역에서까지, 심지어 미군과의 사이에서도 벌어진 것이었다.●美 남북 충돌에 무관심… 자력갱생 계기로 문제는 미국의 반응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을 위해 연인원 30만명이 넘는 장병을 베트남에 파병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미국은 한반도에서 벌어지던 이 극한 대결의 순간에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었는데 주요 쟁점이 베트남전에서 가능하면 빨리 발을 빼는 것이었다. 베트남전 조기 종식을 내걸고 당선된 리처드 닉슨 입장에서는 유권자들의 의지를 거슬러 섣불리 확전을 결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을 비롯해 한국민들은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1968년이면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15년 정도밖에 안 됐을 때다. 서울 시민의 뇌리에 각인돼 있던 전쟁의 기억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도강할 수단이 만만치 않다 보니 피난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던 현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1968년에 연이어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은 시민사회에 분노와 함께 공포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시작한 것은 행여 있을지 모를 전쟁과 피난에 대비해 서울 인구의 상당수를 미리 한강 이남으로 분산시키는 것. 당시 영동지구라 불렀던 지금의 강남 개발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다만 문제는 누구도 강남 이주를 원치 않았던 데 있었다. 개발 도상에 있던 나라의 특성상 중산층을 중심으로 자녀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기를 염원하고 있었기에 명문고가 있는 강북을 떠나 강남으로 이주하기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나선 게 박 전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와 서울시였다. 당시 최고의 명문고로 이름 높았던 경기고 관계자들을 설득해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 가는 데 동의를 얻어 냈고, 이후 휘문고와 서울고를 비롯한 명문고들이 강남 일대로 이전해 가게 된다. 그 뒤 벌어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 한국 사회가 걸어온 남북 대결의 역사를 소리 없이 웅변하는 증거물인 정독도서관이 바로 옛 경기고의 본관 건물이고, 그런 공간이기에 박 전 대통령의 글씨가 남은 것이다. 서울의 경우 평균적으로 지가가 높은 강남과 목동 등이 기본적으로는 학군의 문제와 직결돼 있는 듯하지만, 동시에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에서도 자유롭지 않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1968년 김신조 트라우마로 생긴 연막탄 지주 정독도서관에서 발걸음을 조금 옮기면 또 다른 흔적도 만날 수 있다. 삼청로를 건너 팔판길 16과 30, 31을 연이어 지나다 보면 전봇대처럼 보이지만 전봇대는 아닌 구조물을 만나게 된다. 북촌과 청운동 등 청와대 주변 골목 사이에 있는 연막탄 지주들이다. 대통령 경호와 청와대 경비를 위해 낮에는 연막탄 발사대 지주로, 밤에는 조명탄 발사대 지주로 이용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물들이다. 총 68개의 연막탄 지주가 확인됐는데 그중 북촌 일대에 산재한 12개의 지주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됐다. 물론 1968년의 트라우마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혈맹이라고 늘 혈맹일 수 없음을 인식한 한국은 스스로 힘으로 일어서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제2, 제3사관학교를 개교했고, 후방에서의 군사적인 대응을 위해 제대한 군인들에게 지역 방위를 맡기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반상회를 조직했으며, 교련이란 이름의 교과목을 만들어 학생들도 전쟁에 대비하게 했다. 평상시에는 차량 소통의 목적으로 쓰지만, 유사시엔 각각 십수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공호 성격의 남산 1, 2호 터널을 팠고, 북쪽 주요 교통로와 하천에 대전차장애물을 설치했으며,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직접 신무기 개발에 나섰다. 남북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언제 벌어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준비한 응전의 증거물들이 북촌 한옥마을 사이사이에 박혀 있을 줄이야.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려 할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발견들이다. 그러고 보면 북촌의 한옥도 자세히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몇 안 되는 한옥을 제외한 한옥들이 너무나 비좁아 보이지는 않는가. 북촌로5나길 84 정도의 위치에 서서 한옥 지붕들을 조망하거나 한옥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 보면 그야말로 다닥다닥 옹기종기 밀집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관대작의 주거지로 이름 높았던 북촌이라고 들었는데 그들이 살았던 한옥이 이렇게 작다? 사실 북촌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한옥 대부분은 근대의 유산들이다. 북촌로11가길 41 일대를 비롯해 계동길 100-8 일대의 한옥 밀집 지역이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돼 있는데, 이들 역시 일제강점기였던 1930~40년대의 한옥들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한옥이라고 해서 중요성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의 멋스러움과 근대적인 재료와 기능이 결합해 탄생한 새로운 양식으로서 의미가 있다. 나아가 한옥이 이렇게 작아진 연유를 알게 되면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애초 대형 한옥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 북촌에 이렇게 작은 한옥들이 많아진 것은 정세권(1888~1965)이라는 부동산 개발업자가 내린 고민의 결과다. 그는 단순히 사업 수완만 좋았던 게 아니라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고 조선어학회에 건물을 지어 기부하는 등 민족정신도 지닌 인물이었다. 그에게 걱정은 대대로 조선인들의 공간이었던 북촌에까지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확장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거대 한옥 부지를 사들여 필지를 쪼갠 뒤 상대적으로 빈약한 조선인의 경제력으로도 살 수 있는 소형 한옥을 지어 파는 것이었다. 그 노력의 흔적이 북촌 일대를 포함해 익선동과 성북동, 창신동, 행당동, 왕십리 등 서울 전역에 펼쳐져 있는 근대식 한옥들이다.●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헌법재판소 탄생 이번 투어의 종착점은 대통령 탄핵 사건을 거친 뒤 한국인이라면 그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을 헌법재판소였다. 과연 지극히 현대적인 건물이자 기관인 헌재가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된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은 광복 이래 삼권 분립을 한다고는 했으나 늘 대통령에 의한 독재가 횡행했던 게 사실이다.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늘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힘이 쏠렸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독재 정권에 힘없이 협조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인권 신장과 개인의 자유 증진을 위한 민주화운동이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의 결과 결국 1987년 6·10민주항쟁을 통해 쟁취해 낸 게 지금의 헌법이다. 또 그 헌법을 토대로 법치주의를 실현해 나가며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을 최종적으로 견제하고 심판하기 위한 기구로서 출범시킨 게 헌재였다. 광복 후 남북 분단이라는 뜻하지 않은 상황이 잉태한 부조리들 속에서 각종 모순을 극복하고자 쉼 없이 달려온 지난 70여년…. 보통 역사 답사를 위해 헌재를 찾을 때면 재동 백송에 시선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오늘과 내일의 민주주의와 관련해 헌재가 갖는 의미를 이해한다면 북촌 투어의 마지막 방문지로 삼을 만하지 않을까. 일상에 매몰되면 내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보이지 않는다. 또 낯익은 것을 낯익게만 대하면 그 어떤 새로운 지식과 성찰도 불가능하다. 휴가철이라고 해서 꼭 멀리 떠날 게 아니라 내게 익숙했던 공간을 낯선 시각으로 보려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동안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고민과 숙고의 순간을 맞이한다면 그만큼 훌륭한 여행도 없을 듯싶다. 글 권기봉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1회 서울의 영화(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출발 일시: 8월 8일 오전 10시 마로니에공원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조선군 피로 얼룩진 ‘호랑이 입’, 이 땅에 새겨진 日 침략의 상흔

    조선군 피로 얼룩진 ‘호랑이 입’, 이 땅에 새겨진 日 침략의 상흔

    임진왜란은 수백만명이 학살되고 전 국토가 황폐화된, 역사상 최대의 외침이었다. 7년간 침략 전쟁은 36년간 일제강점보다 훨씬 처절한 피해를 입혔고, 동남해안에 남겨진 왜성들이 그 참혹한 역사를 증언한다. 한반도에 현존하는 30여 왜성 가운데 서생포왜성이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비교적 양호하다. 임진왜란의 주적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축조한 성으로 사명대사가 강화 교섭을 벌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임진왜란, 전투와 협상의 양면전쟁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왜군 1진이 부산포에 침략했다. 바로 뒷날, 가토 기요마사의 2진이 부산 다대포와 울산 서생포를 동시 침공했다. 임진년 침략 초기 12만명의 왜군은 17일 만에 한양을, 두 달 만에 평양을 점령할 정도로 일방적 판세였다. 고니시와 가토는 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다이묘(유력자)였다. 고니시가 숙고형의 지략가였다면 가토는 무모할 정도로 타고난 무골이었다. 두 다이묘는 침략의 최선봉을 차지하려 경쟁했는데 조선을 자신들의 영지로 삼으려는 탐욕 때문이었다. 고니시는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성에 주둔했으며, 가토는 한발 늦게 한양에 입성했다가 함경도로 진격했다. 두만강을 건넌 가토는 여진족의 저항으로 후퇴했고, 평양의 고니시는 명나라와 부딪치지 않으려 압록강 진격을 멈췄다. 그사이 조선 조정은 명에 원군을 청하는 등 실낱같은 반전의 기회를 만들었다. 파병을 결정한 명은 협상가 심유경을 평양에 보내 고니시와 강화협상을 시작했다. 본격 파병에 앞서 시간을 벌려는 기만술이었다. 이듬해 1월,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해 전세를 바꾸었고, 왜군들은 행주대첩 패배 후 경상도 남부로 후퇴해 장기전에 돌입했다.1593년 8월부터 동남해안 일대에 19개의 왜성을 쌓아 일부 왜군을 남기고, 주력은 일본으로 철수했다. 명왜 협상으로 이룬 일시적 휴전이었다. 무력으로 대륙 정복을 꿈꾼 도요토미와 달리, 고니시는 싸우지 않고 한반도를 점령하기 위해 4년간 명과 협상을 지속했다. 반면 가토는 6000여 병사와 함께 서생포왜성에 주둔했고, 강화 중에도 2차 진주성을 공격해 함락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으로 조선 정부에 강화 교섭을 요구했고, 조선 측은 사명대사 유정을 대표로 내세웠다. 심유경·고니시 라인에서 소외된 가토와 조선의 이해가 일치한 결과였다. 4차례 교섭을 시도했는데, 1·2차는 사명대사가 직접 서생포왜성에 들어가 회담했다. 협상의 여러 조건이 있었지만 일본은 경상·충청·전라의 하삼도 분할 지배가, 명은 조속한 종전과 조선 철병이 본심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 낀 조선은 왜군의 완전 철수를 위해 명왜 협상을 어떻게든 결렬시켜야 했다. 사명·가토의 교섭은 이런 배경에서 진행됐다. 결국 1596년 9월 명왜 협상은 결렬되고, 1597년 14만 왜군이 재침공하니 정유재란이었다. 협상이 아닌 무력을 통해 하삼도 분할 점령을 시도한 2차 침략전쟁이었다. 임진년 직후에 축조한 왜성들은 주둔용 방어기지로 군수조달을 위해 부산 일대에 밀집했다. 반면 정유재란 때 신축한 왜성들은 전투용 전진기지였고 왜성 간 사이도 멀었다. 순천·남해·사천·고성·거제·마산·양산·울산의 8개 신축왜성은 최후의 남부 전선이기도 했다. 고니시는 서쪽 끝의 순천왜성에서, 가토는 동쪽 끝 울산왜성에서 농성했다. 결국 고니시는 노량해전을, 가토는 울산성전투를 치르고 구사일생 일본에 철군해 전쟁은 끝났다.●서생포왜성, 일본성의 실험 모델 서생포왜성이 자리한 울산시 서생면 서생리는 배산임해의 요충지로 원래 조선 수군의 만호진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후, 조선 수군은 왜성을 접수해 서생포진을 설치했다. 조선말까지 군사기지로 활용했기에 비교적 잘 보존됐다. 왜성은 진하해수욕장을 내려다보는 곳으로, 예전에는 바로 아래까지 바다여서 해상 보급이 용이했던 곳이다. 왜성은 동쪽 저지대의 외성과 서쪽 133m 높이 정상의 내성,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성곽의 총길이는 2.5㎞, 내부 면적은 4만 6000여평에 달한다. 왜군들이 설치한 지상 건물은 없고 성벽만 남았지만 일본 성곽 특유의 지형 이용법과 공간기법을 잘 살필 수 있다. 외성부에는 계단식으로 대지를 조성해 병사들의 주둔지로 이용했다. 최근 굴립주 건물지를 발굴했는데, 초석 없이 땅에 박은 굴립주는 일본의 전통적인 기법이며, 기다란 건물형태로 보아 병사들의 숙소였을 것이다. 내성부는 급경사를 따라 여러 겹의 성벽으로 감싸고 정상부에 텐슈가쿠(天守閣·성주의 거소)를 세웠던 천수대가 남아 있다. 내성은 다이묘와 가신 무사들의 핵심영역으로 최후의 방어지였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보편적인 성벽 기울기는 80도 이상의 수직에 가깝다. 그러나 서생포왜성의 성벽은 하부가 60도 정도로 완만하고 위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는 오목한 곡선형이다. 성곽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외부로 통하는 출입문이다. 왜성의 주출입구는 양쪽의 성벽을 복잡하게 꺾어 문을 앞뒤에서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성벽 위에 야구라(櫓) 등의 방어용 건물을 설치했다. 이러한 출입구를 고구치(虎口)라 하는데 ‘호랑이 입’이라는 이름처럼 철통같은 방어용 시설이었다.가토는 1597년 11~12월에 울산왜성(학성, 도산성)을 급히 축성했다. 정유재란을 일으켰으나 급성장한 조명연합군의 전투력에 밀려 최후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존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그 석재를 가져다 쌓았기에 단기 완성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2만 3000명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했다고 한다. 동해로 연결되는 태화강을 배후로 하고 동산을 중심으로 3겹의 성곽을 둘렀다. 서생포왜성에 구현했던 오목형 성벽, 방어용 고구치 등도 적용했다. 이곳에서 정유재란 최대의 전투인 울산성전투가 벌어졌다. 조명연합군의 총공세를 가토의 1만 6000명 규모 왜군이 2주간 농성한 전투다. 인근 왜성에서 구원병 4만명이 올 때까지 가토군은 군마를 찔러 피를 마시고 말고기를 먹으며 겨우 버텼다고 한다.●왜성, 무엇을 지키려 했는가 귀국 후 가토는 자신의 영지에 구마모토성을 축성했다. 일본인들은 이 성을 오사카 나고야와 함께 일본의 3대성이라 하고, 가토를 축성의 달인이라 평가한다. 서생포와 울산왜성의 경험을 살리고 조선의 성들을 공격하면서 얻은 지식을 더했다. 아예 세이쇼류(淸正流)라 부르는 오목형 성벽의 곡선은 더욱 완만해졌고, 고구치나 텐슈가쿠는 더욱 견고해졌다. 돌출된 성벽(치) 등은 완연한 조선적 요소였다. 건물 바닥에 까는 다다미를 유사시 먹을 수 있도록 토란 줄기로 엮었고, 성안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울산성전투에서 겪었던 처참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방어용 건축인 성곽에 의미 없는 형태나 요소는 없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동화 속의 성들을 보자. 아래보다 위가 넓은 형태는 성벽에 붙은 적들을 바로 위에서 공격하기 위함이다. 높게 솟은 첨탑은 보다 멀리 적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함이다. 뾰족한 지붕과 매끈한 성벽은 외부의 잠입을 막기 위함이다. 단단하고 튼튼하다 보니 아름다워진다. 유려한 형태의 수원화성, 장대한 중국의 만리장성, 화려한 인도 델리의 레드포트 등 세계의 중요한 성들은 기능적인 디자인과 미니멀한 공법의 유산이다.한국과 중국은 물론 중세 유럽의 성곽은 곧 도시의 경계였다. 보호의 대상은 시민과 백성이었고, 보호 대상에 차별이 없어 한 겹의 단일한 성곽을 둘렀다. 반면 왜성과 일본의 성 안에 백성은 없고 무사들만 있을 뿐이다. 성안의 인원도 다이묘·가신·하급무사로 계급화해 여러 겹의 성벽으로 감쌌다. 보호의 대상은 오로지 성주인 다이묘였다. 한국의 성곽은 땅을 깊게 파서 기초를 튼튼히 하고 성벽을 쌓는다. 기간이 오래 걸리지만 성벽을 수직으로 세울 수 있었다. 반면 왜성들은 기초를 하지 않고 지상에 바로 성벽을 쌓기 때문에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야 무너지지 않는다. 일상이 전쟁이었던 전국시대에는 빨리 쌓아야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생포왜성의 존재는 과거 일본의 야만적 침략을, 낯선 형태는 봉건적인 호전성을 기억하게 한다. 역사적 상처의 아픔을 잊어선 안 된다. 아픔을 기억해야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고속도로변 그리스군 6.25 참전 기념비, 영월공원으로 이전

    고속도로변 그리스군 6.25 참전 기념비, 영월공원으로 이전

    그리스군의 6.25전쟁 참전 기념비가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의 현장조정회의와 중재에 따라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에서 경기 여주시 영월공원으로 이전된다. 24일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974년 그리스군의 참전 기념비를 만들 당시에는 주변 일대가 한적한 동산이었지만, 이후 물류창고와 수소가스 충전소, 흡연장 등이 들어서면서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리스 한국전참전용사협회가 참전기념비의 주변환경을 정화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권익위는 여러 차례 현장 조사와 관계 기관 협의를 거쳐 영월공원으로 이전하는 최종 중재안을 마련했다. 국가보훈처는 내년 말까지 참전기념비를 영월공원으로 옮기고 경기 여주시는 영월공원을 참전기념비 이전 부지로 제공하기로 했다. 또 국방부는 이전 공사후 기존 참전기념비 일대를 정리하고 향후 그리스군 참전과 관련한 현충행사를 지원하기로 했다. 주한 그리스대사관은 이전 공사에 필요한 대리석 등 자재 운반을 지원한다. 권익위는 이날 전현희 위원장 주재로 경기 여주시청에서 현장조정회의를 열고 민원을 신청한 그리스 참전용사들과 화상회의를 통해 이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권익위는 “이번 현장조정회의는 권익위 출범 이후 처음으로 외국에서 신청한 고충민원을 현장조정으로 해결하는 자리였다”면서 “민원을 신청한 그리스 참전용사들이 화상으로 참전 기념비 이전에 따른 소감과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밝혔다. 그리스는 6.25전쟁 기간 중 5000여명을 파병했으며 이 가운데 200여명이 전사하고 6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스군 참전기념비는 1974년 국방부가 그리스에서 직접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국가보훈처가 2003년 현충시설로 지정했으며 여주시가 관리해오고 있다. 세종 박찬구 선임기자 ckpark@seoul.co.kr
  • 덴마크 달려간 폼페이오… 화급한 현안 뭐길래

    덴마크 달려간 폼페이오… 화급한 현안 뭐길래

    영국을 방문했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덴마크로 달려갔다. 미국 국무장관이 덴마크를 방문한 것은 2016년 이후 4년 만으로, 코로나19 이후 사실상의 해외 방문이 재개됐다. 덴마크의 국민 정서는 지난해 8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후 곱지 않다. 덴마크 국민적 반발에 트럼프 대통령의 덴마크 방문도 취소됐다. 폼페이오 장관은 22일(현지시간)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 및 예페 코포드 총리와 회동한 뒤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북극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움직임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AP통신이 전했다. 중국은 2018년 ‘북극 실크로드’ 청사진을 밝히면서 중국 국영기업이 그린란드 공항 리노베이션 공사 입찰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공항은 북극 지역 200만㎢를 커버한다고 AFP가 전했다. 기후 변화에 따라 북극해는 천연자원과 전략적 측면에서 중요성이 더해간다고 dpa통신이 전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나는 우리 모두가 약간 순진해서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이 여기에서 점점 더 공격적으로 경쟁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고 생각한다”며 “우리는 미국과 덴마크 국민의 번영과 안보를 증가시키는 방향을 대응하는 것이 더 좋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코포드 장관은 덴마크가 나토의 일원으로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리비아 등에 파병했다면서 “덴마크는 미국을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그린란드 매각 문제와 관련, 코포드 장관은 “작년의 문제이고, 이번에는 의제에 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은 ‘돌아선’ 그린란드 민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덴마크의 승인으로 지난달 인구 5만 7000여명에 불과한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앞서 지난 4월에는 경제 회생을 위해 1210만달러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그린란드에는 미국의 전략적 공군기지 툴레가 있다.덴마크의 또다른 자치령으로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 중간 해역에 위치한 섬인 푀로 외무장관인 야니스 아브 라나는 덴마크 방송 TV2에서 “북극해가 러시아와 중국을 포함한 지구촌 강대국의 또다른 전장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말했다. 북극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처럼 변화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라나 장관은 푀로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과 덴마크의 갈등 요소도 여전하다. 미국은 러시아에서 발트해를 통해 독일로 들어가는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길이 1200㎞) 건설에 대해 나토 국가들이 적으로 삼는 러시아에 지나치게 에너지 의존적으로 된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가스관이 경유하지 않는 동유럽도 같은 이유로 반대한다. 이와 관련해 덴마크 환경당국은 영해를 지나는 가스관에 대해 지난해 10월 건설해도 좋다는 승인을 내줬다. 반면 미국은 지난주 러시아 국영기업 가스프롬의 노르트스트림2 건설에 참여하는 서방기업에 대해 제재를 가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이와 관련해 폼페이오 장관은 노르트스트림2에 대한 명확한 언급없이 “국가 안보의 또다른 중요한 측면인 국가 에너지 수요에 충촉하기 위해 공급원과 수단을 다양화하려는 덴마크 조치”에 감사를 표했다고 AP가 전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이라크 교민 수송에 공중급유기 투입…첫 민간 수송임무

    이라크 교민 수송에 공중급유기 투입…첫 민간 수송임무

    코로나19 감염에 노출된 이라크 파견 근로자 수송을 위해 군 당국이 다목적 공중급유기(KC330)를 투입했다. 교민 수송에 공중급유기가 이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3일 공군에 따르면 이날 KC330 2대는 경남 김해공항에서 현지로 출발했다. KC330은 이라크에서 교민을 태우고 24일 오전 8시쯤 인천공항으로 복귀할 예정이다. KC330에는 군의관과 간호장교, 검역관 등 의료진 등으로 구성된 정부 합동 신속대응팀이 탑승했다. 현지 도착 후 교민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귀국 희망인원 290여명을 국내로 수송한다. 유럽 방위산업체 ‘에어버스’가 제작한 KC330은 공군의 첫 공중급유기로 2018년 11월 1호기가 도입됐다. 이어 지난해 4월 2호기, 8월 3호기, 12월 4호기를 순차적으로 들어왔다. KC330의 최대 항속 거리는 약 1만 5320㎞다. 최대 연료 탑재량은 약 108t이다. 공군 주력인 F15K나 KF16 수십대에 급유할 수 있어 ‘하늘의 주유소’로 불린다. 민간 항공기 기반으로 제작돼 긴 항속거리를 가져 수송 임무에도 적합하다. KC330은 도입 이후 바쁜 수송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 해외파병부대인 아크부대 교대에 활용됐다. 또 6·25 전쟁 70주년 기념 행사 당시 미국 하와이에서 6·25 전쟁 국군전사자 유해 147구를 송환하는 임무에도 투입됐다. 공군은 도입 당시 KC330의 수송 임무도 고려해 해당 기종을 도입했다. 정부는 또 KC330을 이용해 이라크 정부에 방역마스크 5만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국방부가 2만장, 현지 진출기업이 3만장을 기부했다. 공중급유기 조종사 김완성(37) 소령은 “코로나19 방역대책을 철저히 강구한 상태에서 이라크에 계신 재외국민을 안전하게 모셔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리비아서 터키-이집트 충돌 가능성에 ‘대리전’ 우려 가중

    리비아서 터키-이집트 충돌 가능성에 ‘대리전’ 우려 가중

    이집트 의회 “국가 안보… 리비아에 무장군 파견 승인”2011년 독재자 무아마르 카디피 정권 붕괴 이후 10년째 혼란에 빠진 리비아의 최근 정세가 다시 심상찮아 졌다. 수도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 무장 세력이 전략적 요충지로 접근하자 이웃 나라 이집트 의회가 파병을 승인했다. 터키와 이집트 간의 직접 충돌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리전으로 혼란 가중이 우려된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와 아랍권 영어매체 알자지라가 전했다. 이집트 의회는 20일(현지시간) 이날 성명에서 “무장 범죄 세력 및 테러리스트로부터 국가 안보를 위해 국경 외부에서 무장군의 전투 임무 전개”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성명은 리비아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무장군은 리비아와 접한 “서부 국경”에 전개될 것이라고 이들 매체가 전했다. 의회 승인에 앞서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이 터키의 지원을 받는 무장 세력이 리비아 북부 지중해에 접한 연안도시 시르테와 주프라에 있는 공군기지를 공격하면 국경 방어를 위해 즉각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집트 서부 국경쪽으로 탱크가 집결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집트, 리비아 동부 터키군 주둔은 안보 위협으로 여겨이집트는 리비아 동부에 터키군이 주둔하는 것에 대해 국가안보 위협으로 여긴다. 특히 터키가 2013년 엘시시 대통령이 권력에서 쫓아낸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하는 것도 거슬린다. 엘시시 대통령은 지난주 “국가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움직임을 한가하게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집트와 터키의 지원을 받는 세력들이 직접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집트는 리비아와 사막을 국경으로 삼고 있다. 스테파니 윌리엄스 리비아 유엔 특별대사 대행은 “리비아 시민 12만 5000명이 위험지역에 있다”며 즉각적인 내전 종식을 촉구했다. 터키는 이날 앙카라에서 리비아 및 몰타와의 3자 회의에서 반군 지도자인 칼리파 하프타르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훌루시 아카르 터키 국방장관은 “리비아의 평화와 안정, 통합을 깨뜨리는 반군 주모자 하프타르에 대한 온갖 종류의 지원과 도움을 즉각 그만두라”고 말했다. 유엔이 인정한 리비아통합정부(GNA) 내무장관 파티 바샤가는 “하프타르를 지원하는 비현실적이며 잘못된 계획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리비아 동부 장악한 터키 “반군 지원 중단하라”이집트 지원을 받는 하프타르는 터키가 내전에 개입하면서 트리폴리 장악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 있다. 지난주 하프타르와 공동보조를 취하는 리비아 동부지역 의회는 터키가 리비아의 영토를 침략한다는 이집트에 군사개입을 촉구했다. 지난 16일엔 리비아 동부지역 부족장 수십명이 카이로로 날아가 엘시시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이집트 개입을 요구했다. 이집트가 개입하면 리비아의 불안이 심화될 수 있다. 리비아의 두 세력에 대한 지원도 나라마다 엇갈린다. 이집트와 아랍에미리트(UAE), 러시아, 프랑스는 동부지역을 장악한 하프타르가 이끄는 리비아국민국(NNA)를 지원하고 있다. 리비아에 미그29기와 첨단 전투기 등이 주둔하는 부대를 두었던 러시아는 하프타르에게 무기와 드론, 용병 등을 지원한다고 FT가 전했다.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한 GNA에는 터키를 필두로 카타르, 이탈리아가 지지한다. 터키는 연안에는 소형 구축함, 지상에는 용병, 하늘에는 전투기까지 보내는 등 군사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리비아 “터키 지배 오래 받아”··· 반군 지도자에도 회의적문제의 시르테는 이집트 국경에서 800km 떨어져 있지만 이집트로 보내는 원유 수출의 가장 중요한 터미널이 있다. 이집트는 이 도시를 넘어서는 안 될 ‘금지선’으로 보고 리비아의 두 세력에 대화를 촉구해왔다. 터키와 GNA는 하프타르가 먼저 철수해야 종전 협상을 할 수 있다고 대응해 왔다. 벵가지에서 사업을 하는 여성 파와지아 알푸르자니는 오스만 투르크를 거론하면서 “우리는 터키 식민지배를 충분히 오랫동안 받았다”고 말했지만 상당수 국민은 하프타르가 그들의 구세주가 될지에는 회의적이라고 본다고 이코노미스트가 전했다. 리비아는 2011년 나토 지원군이 카다피 정권을 붕괴시킨 이후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하프타르를 중심으로 한 서부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WSJ “트럼프, 미 국방부에 한국·독일·아프간 철군 압박해왔다”

    WSJ “트럼프, 미 국방부에 한국·독일·아프간 철군 압박해왔다”

    WSJ, 두어달 전에 소문 듣고 취재 시작“독·한국 안전하다고 했는데 독일 철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비롯해 독일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하라고 국방부를 압박한다는 이야기를 두어달 전에 들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8일(현지시간) 전했다. WSJ은 이날자 신문 12면에 실린 ‘트럼프의 한국 철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미 국방부가 백악관에 주한미군 감축 옵션을 제시했다는 전날 보도와 관련해 이같이 보도했다. 당시 WSJ은 이런 소문을 듣자마자 사방에 전화를 돌려 취재한 결과 ‘아프가니스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한국과 독일 등 나머지 두 나라는 선거가 치러지는 올해에는 ‘안전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3만 4500명의 주독미군 중 9500명의 철수를 명령했고, 이제 주하미군에서 같은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보도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언제부터 국방부에 이들 국가에 주둔 중인 미군 철수 압박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WSJ이 지난달 5일 주독미군 감축 지시 사실을 처음 보도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같은 달 15일 이를 직접 확인한 시간적 흐름을 고려하면 WSJ이 처음에 안전하다고 들었던 독일의 경우 5월말~6월초쯤 소문과 달리 감축 쪽으로 내부 결론을 내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WSJ은 “이번에 유출된 내용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용 엄포인지는 알 수 없다”면서도 “그러나 이것(주한미군 감축)은 그가 지난해 탈레반을 캠프데이비드에 초대하겠다는 방안을 언급했던 이후 최악의 국가안보 구상”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일부 병력 감축을 포함한 옵션들을 검토 중”이라면서 “그러나 동아시아의 화약고(한국)에서 부분적일지라도 미군을 철수하는 것은 세계에 미국의 약함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울려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게다가 주한미군을 미국으로 데려오려면 미 국방부가 직접 비용을 내야 하고, 유사시 다시 동아시아에 파병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비용이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주한미군 철수하면 중국 매파에 선물될 것”“한국·대만·일본 등 아시아 동맹들에 큰 충격” 또 2만 8500명의 미군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키는 주요 목적은 북한으로부터의 방어지만, 동시에 중국의 위협에 맞서 ‘미국의 친구들’을 지켜주는 데 전념하겠다고 동아시아 동맹들을 안심시키는 역할도 한다고 신문은 강조했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는 미군을 역내에서 몰아내고 싶어하는 중국 내 매파들에게 “선물이 될 것”이며 “미국은 쇠퇴하고 있고 더는 신뢰할 수 없다”는 중국 내 매파들의 견해를 확인시켜 줄 뿐이라고 WSJ은 전망했다. 반면 일본과 대만 등 다른 미국 동맹국들을 충격에 빠뜨릴 것으로 예상했다. WSJ은 “동맹들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무관심한 대접, 그리고 오랜 동맹국에서 철군할지 모른다는 위협은 두번째 임기의 위험 요인”이라며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을 제외하면 가장 기뻐할 사람은 시진핑”이라고 평했다. 아울러 주한미군 감축은 대선 경쟁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 바보’로 묘사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전략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WSJ은 주장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참전용사 후손에게 써달라… 1000달러·손편지가 왔다

    참전용사 후손에게 써달라… 1000달러·손편지가 왔다

    “우연히 참전용사 후손 장학사업 알아생활고 겪는 이들 돕는데 보탬 됐으면”당시 에티오피아 정예군인 122명 전사지난 11일 강원 화천군청 교육복지과 앞으로 낯선 우표와 영어 주소를 적은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국제우편 도장이 찍힌 편지 봉투 속에는 꾹꾹 눌러 정성껏 쓴 편지 2장과 1000달러(약 120만원)짜리 수표 1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미국 뉴저지주 교민인 할머니 A씨였다. 봉투에 A씨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A씨가 미국에서 강원도 작은 마을까지 큰돈과 정성 담은 편지를 보낸 이유는 한국을 위해 싸운 참전용사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 고마움은 손편지 2장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A씨는 ‘얼마 전 우연히 화천군이 진행하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 장학사업을 알게 됐다’고 썼다. 이어 ‘이후 6·25 전쟁에서 싸운 황실근위대 칵뉴 부대원들이 현재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사실도 접했다’고 밝혔다. 휴전선을 지척에 둔 화천지역은 참전용사들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곳이며, 그중에는 에티오피아 젊은이들도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6·25 전쟁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황실근위대 소속 정예부대 칵뉴 부대원 6037명을 파병했다. 화천은 이들이 처음으로 교전을 벌인 곳으로 당시 에티오피아 군인 122명이 양구와 철원 등지에서 전사했다. 이 중 귀환한 참전용사들은 1970년대 쿠데타로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홀대를 받았다. A씨는 편지에 ‘한국에 살면서 어렵게 지낸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며 ‘조국을 위해 피 흘린 참전용사와 후손들을 돕기 위해 화천으로 수표를 보내게 됐다’고 썼다. 화천군은 A씨 뜻에 따라 1000달러를 에티오피아 현지 장학사업 기금으로 소중히 사용할 계획이다. 화천군은 앞서 2009년 평화의 댐 인근에 세계평화의 종 공원을 만들고 한국전쟁 당시 사용된 탄피를 모아 무게 1만관(37.5t)의 평화의 종을 건립했다. 화천군은 타종 시마다 돈을 받아 기금으로 조성,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최문순 화천군수는 “참전용사 후손들이 에티오피아 발전을 이끌어나가는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화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공중급유기, 국군전사자 유해 송환 이어 파병부대 수송 투입

    공중급유기, 국군전사자 유해 송환 이어 파병부대 수송 투입

    미국 하와이에서 6·25전쟁 국군전사자 유해를 송환했던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기(KC330)가 첫 해외 파병부대 수송 임무에도 투입됐다. 30일 국방부에 따르면 KC330 1호기는 이날 아크부대 17진 130여명과 10t가량의 물자를 싣고 인천공항을 출발해 약 7000㎞를 비행한 뒤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알리프 군 공항에 도착했다. 기존 16진 130여명은 17진이 탑승했던 KC330을 타고 오는 3일 서울공항으로 복귀한다. 이번에 투입된 KC330은 첫 해외수송 임무를 맡고 지난 24일 하와이에서 147구의 6·25전쟁 국군전사자 유해를 싣고 돌아온 기종과 같은 KC330 1호기다. 민항기 기반으로 제작된 KC330은 공중급유 작전 외에도 유사시 재외국민 이송, 해외 파병부대 수송지원 등에도 활용할 수 있다. 항속거리 1만 2500㎞로 중간 기항지 없이 바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승객 좌석도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을 구분하는 등 민항기와 비슷한 형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열일’하는 공중급유기…유해송환 이어 파병부대 수송도 첫 투입

    ‘열일’하는 공중급유기…유해송환 이어 파병부대 수송도 첫 투입

    미국 하와이에서 국군전사자 유해를 송환했던 공군 다목적 공중급유기(KC330) 1호기가 해외 파병부대 수송 임무에도 투입된다. 국방부는 30일 “아랍에미리트(UAE)에 파견된 아크부대가 해외 파병부대 최초로 공중급유기를 활용해 교대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해외 파병부대 수송 임무에 공중급유기가 투입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크부대 17진 13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인천공항을 출발해 UAE 아부다비 알리프 군 공항에 도착한다. 공중급유기는 17진 병력과 10t가량의 물자를 싣고 아부다비 군 공항까지 직항으로 약 7000㎞를 비행한다. 16진 130여명은 17진이 탑승했던 공중급유기로 다음달 3일 오전 9시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할 계획이다. 그동안 군 당국은 해외 파병부대 수송에 전세기를 활용해 왔으나 최근 코로나19로 전세기 항공편 마련이 어려워지면서 빠른 투입이 가능한 공중급유기를 투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부는 “아크부대 교대에 공중급유기를 이용함으로써 예산 절감뿐 아니라 작전수행능력 향상과 코로나19 상황에서 더욱 안전한 교대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공군이 지난해 말까지 총 4대를 도입한 공중급유기는 최근 각종 해외 수송 임무에 투입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는 모습이다. 이번에 파병부대 수송에 투입되는 공중급유기는 지난 24일 하와이에서 국군전사자 147구의 유해를 싣고 돌아온 공중급유기와 같은 KC330 1호기다. 당시 정부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예우 차원에서 유해 송환에 공중급유기를 투입했다. KC330의 첫 해외 수송 임무였다. KC330은 유해 송환 임무를 끝내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병력 수송 임무에 투입됐다.공군은 공중급유기 도입 당시 공중급유 작전이라는 원래의 임무 외에도 유사시 재외국민 이송, 해외 파병부대 수송지원 등 다양한 임무에 활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공중급유로 공군 주력인 F15K나 KF16의 작전반경을 넓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항공기 기반으로 제작돼 긴 항속거리를 가져 먼 거리에도 한 번에 도착할 수 있다. KC330은 항속거리 1만 2500㎞를 가져 별도의 기착지 없이 한 번에 목적지 도달이 가능하다. 좌석 구성도 일반 민항기와 비슷한 형태다. 지난달 24일 공개된 국군전사자 유해 송환 장면에서도 유해 상자는 공중급유기 화물칸이 아닌 승객 좌석에 안치한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약 300명 탑승이 가능한 것으로 전해졌다. 군 당국은 아크부대 17진 출국 전 2주간의 격리와 전원 유전자 증폭(PCR) 검사 등 예방조치를 취했다. UAE에 도착한 이후에도 외부와 접촉없이 별도의 차량을 이용해 아크부대 주둔지로 이동할 예정이다. 귀국하는 16진은 귀국 즉시 전원 PCR 검사 후 2주간 자가격리를 실시할 방침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김구 처단은 의거”… 서북청년회 후계자들 남북 신뢰를 깨다

    “김구 처단은 의거”… 서북청년회 후계자들 남북 신뢰를 깨다

    일부 ‘서북청년’들의 난동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의 저지, 주민들의 호소에도 대북전단을 마구 살포하며 남북의 신뢰를 파탄 내고 있다. 결국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됐다. 남북 관계의 이정표이자 신뢰의 상징이었으니 난동은 성공했다. ‘서북청년회’(서청)가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극우세력의 칼과 몽둥이가 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테러하고 린치했던 단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영화 ‘지슬’의 내용은 대부분 ‘서북청년’들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실제 만행이었다. 약탈하고 능욕하고 토끼몰이를 하고, 학살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대검으로 할머니를 난자하고, 며느리를 겁간한 뒤 찔러 죽이고, 시신 옆에서 피 묻은 대검으로 사과를 깎아 처먹었다. 육지에선 백색테러로 민족지도자와 양심적인 지식인을 암살하고 진보적 사회단체들을 파괴했다. 백범 김구 등이 희생됐고 학생과 교사들이 린치를 당했으며 노조나 언론사가 파괴됐다. 다음은 ‘만인보’(지은이 고은)의 ‘선우기성’(전 서북청년회 집행위원장) 내용 중 일부. “이승만의 두 주먹이 돼…, 38선 이남이 떨었다, 모든 도시 촌락들, 선우기성의 대낮이 벌벌 떨어댔다.” ●“이승만의 두 주먹 돼… 38선 이남이 떨었다” 그러나 김구도 제거되고 군과 경찰이 정권의 폭력으로 자리잡자 이승만은 ‘서청’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그들은 더러운 비밀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었다. 제거해야 했다. ‘서청’을 이끌던 김성주의 운명은 상징적이었다. 1954년 5월 29일 김성주 사형집행 소식이 일간지에 짧게 보도됐다. 5월 6일 고등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으니, ‘개처럼 살다가 개처럼 간’ 그의 삶은 그것으로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가족의 요청에도 군은 시신을 내주지 않았다. 5월 6일 선고 공판엔 김성주가 출정하지 않았다. 4월 7일 결심 공판에서 검찰의 구형은 징역 7년에 불과했다. 이듬해 1월 국회에 ‘김성주 살해 및 암장 사건 규명 청원’이 접수됐다. 국회는 진통 끝에 진상조사를 의결했다. 하지만 심증만 확인했지 실체적 진실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적법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등을 처벌하라는 내용의 보고서만 채택했다. 진실이 드러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 4·19혁명 이후였다. 다음은 동아일보 1960년 8월 5일자 관련 기사의 주요 내용. 1954년 4월 16일 오후 1시 헌병총사령부 소속 지프가 3군 육군형무소에서 빠져나왔다. 지프 뒷자리엔 한쪽 눈이 실명한 듯한 미결수 한 명이 타고 있었다. 김성주였다. 지프는 아현동 한 민가에 머물다가 어둠이 깔린 뒤에야 신당동 원용덕 헌병총사령관 관저로 이동했다. 관저 앞 공터엔 지휘관용 군용천막이 있었다. 그날 밤 천막 안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시신은 천막 인근의 헌병총사령관 방공호로 옮겨져 암장됐다. 시신은 6월 10일께 화장됐다. 김성주. 평안북도 출신으로 1946년 초 월남했다. 5월 평안남도 출신인 문봉제와 함께 탈북한 뒤 부랑하는 서북청년들을 모아 ‘평안청년회’(평청)를 결성했다. 평청은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평청은 출범 후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옥 파괴 및 점거 등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 잇따라 탈북 청년단체가 등장했다. 11월 함북·함남청년회, 황해회 청년부 등이 서북청년회로 통합됐다. 이승만, 조병옥 등은 경찰이 내놓고 저지를 수 없는 린치, 암살 등 테러를 서청에 맡겼다. 서청은 1947년 3월 1일 중도 및 좌파의 삼일절 행사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부산극장사건,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사건, 정수복 검사 암살 사건 등도 서청의 짓이었다. 사회단체나 신문사를 습격했고 노조에 침투해 노동운동을 파괴했다. 그런 활동에 비례해 친일기업과 우익 정치인의 후원이 쏟아졌다. 1947년 9월 귀국한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은 우익 청년조직을 대동청년단으로 흡수하려 했다. 김구와 이승만 모두를 지지했던 선우기성 서청 집행위원장 등 다수파는 찬성했다. 이승만의 단정노선만 지지하던 문봉제나 김성주 등 강경파는 통합을 거부하고 서청(‘재건 서청’)을 이어 갔다. 테러는 더 극렬해졌다. 선거를 방해하고 독립지사를 암살했다. 5·10총선 땐 이승만을 무투표 당선시키기 위해 민족지사 최능진의 출마를 막았다. 제주도에서의 만행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군정의 실정에 지쳤던 제주도민의 민심은 1947년 경찰의 삼일절 행사 발포사건으로 돌아섰다. 육지 출신의 유해진이 새 지사로 임명됐다. 그는 4월 20일 부임하면서 서청 출신 7명을 경호원으로 대동했다. ‘서청’이 제주도로 몰려가는 물꼬였다. 그해 11월 서청제주도단이 결성됐다. 이듬해 4·3사건 이전까지 제주도에 들어온 서청 회원은 제주읍 300명, 면마다 40~50명 등 760여명에 이르렀다. ●서청제주도단 결성해 주민 학살·약탈 이들은 이승만의 사진이나 태극기를 강매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멀쩡한 주민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해 가족들로부터 금품을 뜯어냈다. 심지어 ‘보급이 시원찮다’는 이유로 제주도 총무국장을 두들겨 패 죽이기도 했다. 이런 만행은 이듬해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 봉기의 한 원인이 됐다. 당시 미군정청의 특별감사 결론은 이러했다. “(서청에 의존한 유해진 지사는)반복적으로 무능함을 드러냈고 폭력적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 했다.” “테러 행위를 수없이 자행했다.”(넬슨 특별감찰보고서) 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더 많은 서청을 제주도로 보냈다. ‘14연대의 제주 파병’ 문제로 터진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서청 1000여명을 경찰이나 경찰보조원 혹은 국방경비대로 제주에 투입했다. 제주도는 피바다가 됐다. 1949년 6월 26일 김성주의 직계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김성주는 자랑하고 다녔다.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내가 안두희를 시켜 백범을 죽였다.’ 안두희 공판일에는 회원들과 떼거리로 법원에 몰려가 ‘안두희는 민족의 영웅’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며 석방을 요구했다. 김성주가 함께 모의했다는 ‘88구락부’ 멤버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총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특무대장, 김태선 서울시경국장, 정치 브로커 김지웅이었다. 이승만은 김성주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김성주는 미군에 줄을 댔다. 서청 회원들과 함께 미군 극동군사령부 직속의 북파공작대인 켈로부대에서 활약했다. 미군은 보답으로 그를 평안남도 도지사에 임명했다. 문봉제를 이미 평남 도지사로 발령했던 이승만은 분노했다. 전선이 교착되자, 이승만은 김성주 소령을 예편시켰다. 1952년 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성주는 무소속 조봉암 후보 편으로 돌아섰다.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이승만을 비난한 것이 빌미가 돼 헌병대에 체포됐다. 1954년 1월 김성주는 두 가지 혐의로 기소됐다. 국가변란이나 대통령 살해 음모. 하지만 군 검찰조차 혐의를 인정하기 힘들었다. ●김성주 살해·암장 진실 사망 5년 뒤 드러나 1960년 8월 군검합동조사단은 원용덕 자택 2층에서 한 장의 밀서를 발견했다. “김성주는 반드시 극형에 처해야 한다. 그는 외국인이 임명한 평양지사였다. 이는 반역사건이기 때문에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국방장관에게도 말했지만, 당신에게도 명령한다. 신속하고 아주 조용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2014년 9월 28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서북청년단’ 재건추진위원회라는 단체가 등장했다. 위원장 배성관은 일베에 이런 글을 올렸다. “서북청년단원 안두희가 김구를 처단한 것은 의거였다.” 앞서 2005년엔 자유개척청년단(단장 최대집 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란 ‘서북청년단의 정신 계승’을 표방한 단체가 결성됐다. 박상학, 박정오 형제는 자유북한운동연합, 큰샘이란 단체를 만들어 대북전단 살포로 돈도 벌고 ‘명성’도 얻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가 막아도 막무가내다. 이들 앞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벌벌 떤다’. 그러면 현대사의 저주, 서북청년단의 망령은 무엇으로 부활하는가. 4·15총선 때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는 태구민, 지성호 등 두 탈북자를 지역구(서울 강남갑)와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했다. 김종인 통합당 비대위원장은 ‘국가적 망신’이라고 반발했다. 서북청년들을 괴물로 만든 이승만은 문봉제 서청 회장을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과 교통부 장관에 중용했다. 부회장 김성주는 ‘아스팔트 위의 김창룡’이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여기는 베트남] 베트남 전쟁 후 48년 만에 아버지 만난 아들

    [여기는 베트남] 베트남 전쟁 후 48년 만에 아버지 만난 아들

    베트남 전쟁 (1960~1975) 당시 미군과 사랑에 빠졌던 베트남 여인들의 러브 스토리는 대부분 이별로 끝을 맺었다. 수십 년이 흐른 현재, 헤어졌던 연인을 찾기 위해 베트남을 다시 찾는 미군들의 이야기가 종종 들리는 가운데, 이번에는 베트남 여인과 미군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48년 만에 친부를 찾은 사연이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베트남 현지 언론 VN익스프레스는 앤드루 응우옌(48)이 DNA 검색으로 48년 만에 친부를 만난 사연을 전했다. 사연은 베트남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짬 낌 응우옌(여)은 사이공(현재 호찌민)에서 미군 마이클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낌이 임신 4개월째 접어든 시기 마이클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이후 연락이 끊겼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앤드루는 호찌민에서 자라다가 가족과 함께 필리핀으로 이주, 16살에는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에 정착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앤드루는 페루 여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다. 현재 경찰관으로 웨스트팜비치에서 살고 있다. 평생 친부를 찾아보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그에게 변화가 생긴 건 그의 아들 매튜로 인해서다. 매튜는 늘 할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을 품어왔고, 할머니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할머니는 선뜻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매튜의 끈질긴 질문에 할머니는 마침내 할아버지의 본명이 ‘마이클 스트렌지’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앤드루의 생일날, 아들과 딸은 아빠에게 DNA 진단 키트를 내밀었다. 당시 그는 심장 수술을 앞두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수술 전에 아빠가 꼭 할아버지를 찾기를 간절히 바랐다. 결국 앤드루는 자녀들의 요구에 응했고, 이후 DNA를 통한 검색 과정은 빠르게 진행됐다. 앤드루의 DNA와 관련된 사람들을 좁혀 나가는 과정에서 친부의 누나를 찾게 됐다. 드디어 지난 4월 17일 친부 마이클과 전화 연결이 되었다. 처음 몇 분간 정적이 흐른 뒤 이윽고 48년 만에 연결된 부자는 눈물을 흘리며 2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낚시와 사냥을 즐기는 등 놀랄 만큼 동일한 취미 생활을 즐기는 사실을 발견하고, 핏줄의 강한 유대감을 확인했다. 사실상 앤드루가 그동안 친부를 만나길 꺼려온 것은 돌연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어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전화 통화 이후 친부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반면 마이클은 “48살 된 아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면서 “심지어 아들이 처음 정착했던 뉴포트뉴스는 내가 사는 곳에서 1시간 30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고 전했다. 마이클은 1968년 3월 베트남에 파병되었고, 미국에 돌아온 뒤에서야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내슈빌에서 가정을 이뤄 4자녀를 두었지만, 20년 전 이혼했다. 긴 세월 동안 마이클은 ‘사이공 여인’ 낌을 잊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1980년대 재향 군인회를 통해 낌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48년이 흐른 현재, 마이클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사실에 하루하루가 감동의 연속이었다. 미국 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이동이 수월치 않자, 날마다 전화기로 아들, 손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마침내 지난 5월 10일, 마이클은 앤드루의 집을 찾았다. 48년 만에 친부를 마주한 앤드루는 “안녕, 아빠!”라고 인사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가족 모두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부자 간의 감격스러운 만남을 바라보았다. 마이클의 네 자녀도 아버지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았다는 소식에 함께 기뻐했다. 앤드루의 할머니, 즉 마이클의 모친(94)도 손자와의 감격스러운 포옹을 나눴다. 할머니는 차를 타고 오는 14시간 30분 동안 내내 한 번도 눈을 부치지 못했다. 손자와의 만남에 가슴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고, 처음으로 손주를 끌어안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마이클은 심장 수술을 받은 아들 곁에 9일 내내 머물렀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지금은 주말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플로리다까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달려온다. 48년의 세월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면 14시간 30분의 자동차 운전 길도 고단치 않다고 전했다. 이종실 호치민(베트남)통신원 litta74.lee@gmail.com
  • 참전 여군은 그냥 잊혀져도 되나요

    참전 여군은 그냥 잊혀져도 되나요

    여군 참전유공자 1400여명에 불과 발굴 더디고 추모행사 찾기 어려워 제도 고쳐 추모 분위기 확산시켜야 ‘1427.’ 지난 5월까지 국가보훈처가 발굴한 생존 6·25전쟁 여군 참전유공자 수다. 대부분 박순애씨처럼 어린 나이에 참전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주인이 남성이었던 시대에 여성이 조국을 위해 전선에 뛰어드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참전 여군들은 육·해·공군·해병대 등 각 군으로 배치됐다. 군번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학도의용군, 민간간호대, 유격대에 편입돼 활약한 여성들도 있다. 육군 여자의용군은 1950년 9월 1일 창설된 여자의용군교육대에서 배출됐다. 전쟁 기간 총 1058명이 수료했다. 부대에 배치돼 행정지원, 정훈교육, 대적방송, 첩보수집, 통신 등의 업무를 했다. 해군 여해병은 제주 지역의 미혼 여교사와 여중생, 1950년 8월 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모집한 해병 제4기 75명 등으로 이뤄졌다. 진해와 부산 등지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의 활약은 좀처럼 조명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증언과 기록 확보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 기존 자료들은 대부분 전쟁 당시 상황보다는 퇴역 이후를 조명하고 있다. 이들이 전투부대가 아닌 행정, 군수 등 작전지원분야에 주로 복무하면서 전공 기록이 별로 없다. 전공이 없으니 새로운 사례를 발굴하기도 어렵다. 당시 민간유격대 등 비공식 참전자도 많아 정확한 수도 파악이 불가능하다. 참전 여군을 기억하는 정부나 지역 행사도 부족한 실정이다. 국방부의 ‘6·25전쟁과 베트남 파병 참전 여군의 활약 및 국위선양 사례 발굴을 위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참전 여군 추모가 국가와 주(州), 지역단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참전 여군을 위한 범국민적 기부문화도 널리 퍼져 있다. 반면 한국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전승 및 추모행사는 50여개에 이르지만, 참전 여군을 추모하는 행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소규모 민간단체 행사에 보훈처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게 전부다. 여군이 참전한 전투나 공적 발굴 연구도 미진하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자 여군 창설 70주년이다. 정부는 올해 여군 창설 70주년을 맞아 오는 9월 4일 참전 여군과 보훈단체 등을 대상으로 기념식을 진행한다. 국민적 추모 분위기를 확산하려면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동족상잔 70년, 기록으로 기억하다

    동족상잔 70년, 기록으로 기억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가 평화를 이야기할 무렵, 한반도는 치열한 전투 끝에 두 개로 쪼개졌다. 이후 70년, 누군가에겐 여전히 욱신거리는 상처지만 대다수에게 한국전쟁은 그저 빛바랜 역사일 것이다. 반짝 평화모드였다가 다시 강대강 대치를 이어 가는 오늘의 남과 북을 거슬러 70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하는 책들이 눈에 띈다. 한국전쟁을 가장 오래 취재한 미국 사진기자의 생생한 컬러 사진집과 함께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집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면, 한국전쟁 70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한국전쟁:전쟁을 불러온 것들, 전쟁이 불러온 것들/이상호 지음/섬앤섬/328쪽/1만 9000원●가려졌던 진실, 생생한 증언들 ‘한국전쟁: 전쟁을 불러온 것들, 전쟁이 불러온 것들’은 냉전이라는 거대담론이나 미시적인 국내 기원론 대신 한국전쟁의 발발을 다른 시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우선 우리 시선을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이 아니라 1945년 2차대전 종전 직후로 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한미 관계, 한일 관계, 미일 관계 등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국제관계 정립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데올로기의 갈등 결과가 바로 한국전쟁이라는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맥아더 전문가인 저자는 이를 위해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 당시 맥아더 미국 연합국최고사령관이 일왕을 전범으로 기소하는 데에 왜 반대했는지 설명한다. 일본의 죄를 제대로 묻지 않은 까닭에 한국전쟁은 일본 재건을 위한 발판이 됐고, 한일 관계의 왜곡을 불렀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1948년 주한미군 철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첫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가 어떤 생각을 했고 한국전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설명한다. 한국전쟁에서 활약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미8군 사령관 워커의 죽음에 관한 진실도 흥미롭다.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신기철 지음/역사만들기/308쪽/1만 8000원‘전장의 기억과 목소리’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이 북한과 맞닿은 인천 옹진 주민의 목소리로 한국전쟁 전후를 다시 재구성했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은 그 특성 때문에 해방과 분단의 중심에 있었다. 군인이 아닌데도 청장년은 물론 여성과 아이들마저 전쟁에 동원됐다. “신도는 ‘대한민국’, 연결된 시도는 ‘인민공화국’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지역 주민은 말한다. “만약 덕적이 육지였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민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지역 민간인 학살은 섬이라서 더욱 잔혹했다. “빨갱이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며 두 손을 모아 “빨갱이님 저 좀 살려 주세요”라고 했던 주민들의 기억과 증언이 한국전쟁을 좀더 생생하게 재현한다. 인민군과 국군의 교차 점령기에 벌어진 비극을 주민들의 증언으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1950/존 리치 지음/존 리치 사진/서울셀렉션/320쪽/2만원●사진으로 보고, 소설로 생각하다 한국전쟁 관련 사진은 대개 전쟁의 참상만 부각하고 흑백사진이 대부분이라 다소 옛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 통신사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S) 도쿄특파원으로 일했던 존 리치의 사진집 ‘1950’은 당시 다양한 일상 풍경과 거리, 그리고 사람을 생생한 컬러 사진으로 담았다. 리치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으로 급파한 미 해병대 상륙함에 동승해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3년 동안 한국전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책은 차 상자 안에 담긴 채 그의 고향 집에 보관됐다가 50년이 지나서야 발견됐다. 사진 900장 가운데 150장을 추렸다. 한국군과 미군, 유엔군 장병의 현장감 넘치는 모습과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모습이다. 여기저기 총상을 입은 남대문, 절반이 날아가 버린 수원성, 여전히 모습을 보존한 서울역과 서울시청,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의 거리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들이 썼던 코닥사의 전설적인 컬러필름 ‘코다크롬’으로 촬영했다. 고인이 된 리치는 책 서문에서 “이 사진을 보는 독자들이 한국전쟁을 과거의 역사로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평화가 온다/류재향, 한정영, 박미연, 강리오, 문상은 지음/서해문집/224쪽/1만 1900원‘평화가 온다’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작가 5명의 단편소설을 묶은 청소년 소설집이다. 단편 ‘한반도 특급열차 2050’은 한국전쟁 80년이 되는 2030년이 배경이다.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 그리고 북한과 만주를 거쳐 독일의 베를린까지 일주일간 달리는 열차 개통식에 초대받은 한아와 할머니 이야기다. 실향민의 후손으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할머니와 손녀 한아의 속사정을 좇는다. 단편 ‘뼈’에서는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 아버지와 늦둥이 아들 해윤이 철원에 홀로 계시는 할머니 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마스코트 테디’에선 한국전쟁 당시 우연히 미군의 마스코트가 된 봉구처럼 독특한 인물의 서사를 그린다. 한국전쟁 당시 정찰 임무를 맡아 섬에 파병된 국군 범석과 북한군 병사 화수의 우정을 그린 ‘섬, 원추리´도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작가마다 여러 이야기를 펼치지만 소설의 지향점은 하나다. ‘전쟁은 잊지 말고, 평화를 생각하자.’
  • [여기는 남미] 병원 문앞에서 죽은 사람만 수십 명...코로나19로 의료 붕괴

    [여기는 남미] 병원 문앞에서 죽은 사람만 수십 명...코로나19로 의료 붕괴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왔지만 교대시간이라면서 받아주질 않았어요. 아침 7시부터 정문 앞에서 대기하다가 할머니는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코로나19가 의심되는 할머니를 코차밤바 병원에 데려간 손자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할머니를 잃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주민들은 "할머니가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했다"면서 "산소호흡기라도 가져오라고 주민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병원에선 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볼리비아의 병원시스템이 포화 상태에 도달해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현지 언론이 15일(이하 현지시간)보도했다. 죽어가는 할머니를 외면한 코차밤바 병원은 음압병동이 없어 코로나19 확진자를 중환자실에 입원시킨다. 이 병원엔 18개 중환자 병상이 있지만 지금은 빈 병상이 없어 더 이상 코로나19 확진자를 받지 못하고 있다. 코차밤바 병원노조 관계자는 "최근 병원 정문 앞에서 사망한 사람이 최소한 십수 명에 이른다"면서 "코로나19에 걸려 병원을 찾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밖에서 대기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비극적인 상황은 볼리비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산타크루스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남편을 병원에 데려간 한 여성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여성은 코로나19에 걸린 남편을 산타크루스의 팜파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코로나19 병동이 꽉 차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사들이 나와 입원 중인 코로나19 환자 중 누군가가 사망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명색이 수도지만 라파스의 공립병원 중환자실 병동은 고작 14명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현지 언론은 "지난 12일엔 라파스에서 입원이 거부된 한 코로나19 확진자가 이곳저곳 병원을 전전하다 끝내 숨졌다"고 보도했다. 안타까운 사례가 연이어 발생하자 볼리비아 의료인협회는 뒤늦게 정부에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했다. 의료인협회는 "전국적으로 100명 수준인 공립병원의 중환자실 정원을 최소한 7배로 늘리고, 중환자실 근무인력도 지금의 210명에서 배로 증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15일까지 볼리비아에서 발생한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1만8459명, 사망자는 611명이다. 브라질이나 페루, 칠레 등 다른 남미국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확진자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워낙 열악한 의료환경 탓에 안타까운 죽음이 꼬리를 물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칠곡군, 호국영웅 8인을 만나다

    칠곡군, 호국영웅 8인을 만나다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66) 선장, 제2 연평해전 참전 용사 권기형(39), 천안함 폭침 생존자 전준영(33·천안함 전우회장), 북한의 목함지뢰사건으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26) 예비역 중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호국영웅 8명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다. ‘호국평화의 도시’ 경북 칠곡군은 오는 22일 칠곡호국평화기념관에서 호국영웅 8명을 초청해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하는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을 만나다’ 행사를 연다고 15일 밝혔다. 석 선장 등 4명 외에 한국전쟁 낙동강전투에서 반전 기틀을 마련한 조석희(95)옹,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발휘해 즉각 대응사격에 기여한 권준환(48) 예비역 해병 소령, 1969년 비둘기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이길수(74) 월참유공자회 칠곡군지회장, 2004년 자이툰부대 1진으로 이라크에 파병돼 한국대사관을 방어하고 파발마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강문호(53) 예비역 해병 대령 등도 초청한다. 칠곡군은 이날 호국영웅들에게 공모해 제작한 호국영웅 배지를 달아주고, 청소년들과 호국보훈에 대해 소통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기념식을 마친 뒤 왜관읍 호국의 다리로 이동해 추모식을 가질 예정이다. 호국의 다리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북한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폭파한 교량이다. 이번 행사는 백선기 칠곡군수가 한국전쟁 70주년 기념과 대한민국 호국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직접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천안함 전우회장은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한 게 존경받았으면 한다”고 했고, 석 전 선장은 “호국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중요한 일로 부디 이들의 헌신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백 군수는 “칠곡군은 앞으로도 호국과 보훈의 가치를 올곧게 세우고 선진 보훈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에 부단히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칠곡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이자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로 승리의 토대가 된 낙동강 방어선전투(1950년 8월 1일~9월 24일)가 벌어진 곳이다. 칠곡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칠곡군, 호국영웅 8인을 만나다 석해균 선장·제2 연평해전 용사 등 22일 초청… 희생·헌신 재조명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66) 선장, 제2 연평해전 참전 용사 권기형(39), 천안함 폭침 생존자 전준영(33·천안함 전우회장), 북한의 목함지뢰사건으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26) 예비역 중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호국영웅 8명이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다. ‘호국평화의 도시’ 경북 칠곡군은 오는 22일 칠곡호국평화기념관에서 호국영웅 8명을 초청해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하는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을 만나다’ 행사를 연다고 15일 밝혔다. 석 선장 등 4명 외에 한국전쟁 낙동강전투에서 반전 기틀을 마련한 조석희(95)옹,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발휘해 즉각 대응사격에 기여한 권준환(48) 예비역 해병 소령, 1969년 비둘기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이길수(74) 월참유공자회 칠곡군지회장, 2004년 자이툰부대 1진으로 이라크에 파병돼 한국대사관을 방어하고 파발마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강문호(53) 예비역 해병 대령 등도 초청한다. 칠곡군은 이날 호국영웅들에게 공모해 제작한 호국영웅 배지를 달아주고, 청소년들과 호국보훈에 대해 소통하는 자리도 마련한다. 기념식을 마친 뒤 왜관읍 호국의 다리로 이동해 추모식을 가질 예정이다. 호국의 다리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북한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폭파한 교량이다. 이번 행사는 백선기 칠곡군수가 한국전쟁 70주년 기념과 대한민국 호국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하자는 취지에서 직접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천안함 전우회장은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한 게 존경받았으면 한다”고 했고, 석 전 선장은 “호국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중요한 일로 부디 이들의 헌신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백 군수는 “칠곡군은 앞으로도 호국과 보훈의 가치를 올곧게 세우고 선진 보훈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에 부단히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칠곡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이자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로 승리의 토대가 된 낙동강 방어선전투(1950년 8월 1일~9월 24일)가 벌어진 곳이다. 칠곡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밀라노의 동상에 붉은칠, 열두살 아프리카 소녀와 결혼한 언론인

    밀라노의 동상에 붉은칠, 열두살 아프리카 소녀와 결혼한 언론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공원에서는 14일(현지시간) 한 동상을 물청소하는 인부들이 눈에 띄었다.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난 언론인 인드로 몬타넬리의 동상인데 얼굴에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기단에는 “인종차별주의자, 강간범”이란 낙서가 돼 있었다. 미국과 유럽을 휩쓸고 있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가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식민주의를 옹호한 정치인이나 역사적 인물의 동상에 공격을 가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처음 공격을 가한 동상이 언론인 동상이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시위대원들이 동상을 훼손하는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려놓아 돌아다니고 있다. 시위대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공원에서 이 동상을 철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쥐세페 살라 밀라노 총리는 몬타넬리의 언론인으로서 기여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언론 자유를 위해 싸웠던 위대한 기자였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오점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 삶은 여러 복잡한 맥락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의 반박이다. 1909년생인 몬타넬리는 군 복무 중이던 1930년대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에서 열두 살 소녀를 데려와 몸종처럼 부리다 결혼한 것으로 악명 높다. 극우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통치하던 이 무렵 파시스트 신문 일 셀바지오(야만)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기자로 부각된 것은 미국 뉴욕의 유나이티드 프레스 기자로 활약하던 때였다. 1935년 이탈리아 식민지였던 에리트레아와 소말리랜드에서 대군을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로 파병했다. 몬타넬리는 무솔리니가 내세운 대의에 공감해 기자로 종군했다. 물론 나중에 무솔리니에 환멸을 느꼈다고 털어놓긴 했다. 그는 나중에 스페인 내전에 파시스트 종군 기자로 참여했고, 2차 세계대전 때 여러 곳의 최전선에서 전황 기사를 썼다. 국제적으로도 평판을 얻어 2012년 국제언론연구소 세계언론자유 영웅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파시즘의 앞잡이란 멍에가 따라다녔다. 그는 1935~36년 에리트레아 침공 때 이탈리아 군이 독가스를 썼다는 의혹을 오랫동안 부인해왔다. 그의 말이다. “암바 아라담 공격작전에 가스가 사용됐다고 얘기들 한다. 나도 거기 있었다. 난 알아채지도 못했다. 우리 연대 동료였던 누디란 친구였던 것 같은데 내게 양파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겨자가스 냄새였다. 그러나 지금 얘기가 되는 것은 그런 종류의 무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쟁이었고, 가스는 쓸모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있던 지역에 적의 군대가 많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1996년 이탈리아의 저명 역사학자 안젤로 델 보카가 증거 문서들을 들이밀자 마지못해 겨자가스가 사용됐다고 인정했다. 그는 일간 코리에레 델라 세라에서도 몇년 동안 일한 뒤 1973년 우익 일간 일 조르날레를 창간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신문을 인수한 뒤 그에게 회사 운영을 맡기고 정계에 입문한 인연도 있다. 1977년 극좌파 붉은여단 조직원이 신문사 근처에서 총격을 가해 그의 다리를다치게 한 일로도 유명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파병부대 교대에 공중급유기 첫 투입…‘멀티 플레이어’ 본격화

    파병부대 교대에 공중급유기 첫 투입…‘멀티 플레이어’ 본격화

    공군의 다목적 공중급유기 ‘KC330’이 처음으로 병력 수송 작전에 투입된다. 14일 국방부에 따르면 KC330은 이달 말 파병 예정인 아크부대 16진과 17진의 교대를 위해 아랍에미리트(UAE)로 향할 계획이다. KC330은 17진 약 170여명과 10t 가량의 물자를 싣고 인천공항에서 출발한다. 파병부대 교대를 위해 공중급유기가 투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C330은 공군 전투기 급유작전 뿐만 아니라 국외 재해·재난 사고 때 국민 수송, 국외 파병부대 병력 수송 등의 임무도 고려해 도입됐다. 본래 전세기를 이용해 파병부대를 교대하지만, 최근 코로나19로 전세기 마련이 어려워진 탓에 공중급유기 파견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중급유기를 이용하면 기착지 없이 한 번에 직항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번에도 KC330은 약 7000㎞를 비행할 것으로 전해졌다. KC330은 다음달 초 아부다비 공항에서 16진 병력과 물자를 싣고 성남 서울공항으로 복귀한다. 2018년 공중급유기가 최초로 도입된 이후 올해 비군사적 작전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모습이다. 정부는 이달 25일쯤 미국 하와이에서 국군전사자 유해를 송환하며 KC330을 활용할 계획이다. 비군사적 임무에 KC330이 투입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까지 4대가 도입된 KC330은 지난해 1월 1호기가 처음으로 실전 배치됐다. 다음달 중 나머지도 작전 운용된다. 백조자리를 뜻하는 ‘시그너스’(Cygnus)로 명명된 KC330은 전폭 60.3m, 전장 58.8m, 전고 17.4m다. 최대 속도는 마하 0.86, 최대 순항고도는 약 1만 2600m이며, 최대 항속 거리는 약 1만 5320㎞에 달한다. 최대 연료 탑재량은 약 111t이다. 공군 주력인 F15K 전투기의 경우 최대 10여대, KF16 전투기 경우 최대 20여대에 급유할 수 있다. 최대 300여명의 인원과 47t의 화물 운송이 가능하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김해영, 금태섭 징계에 재차 반기 들자…이해찬 ‘버럭’

    김해영, 금태섭 징계에 재차 반기 들자…이해찬 ‘버럭’

    금태섭 전 의원에 대한 징계의 타당성을 둘러싸고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김해영 최고위원은 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 최고위에선 충돌 여지가 있다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헌법과 국회법을 침해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며 재차 이의를 제기했다. 김 의원은 바른미래당 오신환 전 의원 등의 권한쟁의 심판 청구를 기각한 헌법재판소의 최근 결정문을 인용하면서 “헌재의 결정은 국회의원 표결권만은 침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당시 헌재 결정은 5명이 기각하고 4명이 인용할 정도로 의견이 갈릴 수 있었지만, 금 전 의원 징계와 관련한 국회법 114조는 여러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규정이 명확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금 전 의원에 대한 결정에 있어 헌법적 차원의 깊은 숙의를 해주기를 윤리심판원에 요청한다”고 김 의원은 밝혔다. 그러자 이해찬 대표는 마무리 발언을 자청해 “우리 당이 비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데, 단 한 번도 비민주적으로 당을 운영해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 대표는 “수백 차례 회의했지만 먼저 내 의견을 제시하고 당원의 시간을 제한하거나 한 적은 없다”며 “거기에 대한 오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다”고 덧붙였다.한편 21대 개원 본회의를 앞두고 진행된 의원총회에서도 금 전 의원 징계 문제가 거론됐다. 박용진 의원은 징계가 부당하다며 “권고적 당론과 강제적 당론이 무엇인지, 기권과 투표 불참은 당론에 위배되는 것인지 등에 대해 당에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유기홍 의원은 15대 국회 당시 한나라당 이미경, 이수인 의원이 당론을 어기고 동티모르 파병 동의안에 찬성해 출당된 사례를 언급하며 “이번에는 가장 가벼운 경고 처분이 내려진 것”이라며 당의 결정을 옹호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