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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 대통령 베트남 방문­金 대통령 행보·이모저모

    ◎루옹 主席 “한국 외환위기 대처 성공에 경의”/김 대통령 “양국 함께 도움되는 방향으로 협력하자”/아세안 정상회의 공식의전차 ‘체어맨’ 사용 【하노이 梁承賢 특파원】 金大中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 첫날인 15일 오후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공식환영 행사에 이어 트란 둑 루옹 베트남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등 2박3일의 베트남방문 일정에 들어갔다. ▷정상회담◁ 하노이 주석궁에서 열린 정상회담은 매우 따뜻하고 정감어린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林東源 청와대외교안보수석은 “한·베트남 양국은 서로를 존중하고,필요로 하기 때문에 의기투합한 실질적 회담으로 평가된다”고 정상회담의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로 두 정상은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으로 인한 ‘과거사’ 문제를 ‘미래로 매듭짓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경제통상 분야에서도 金대통령은 베트남의 대한(對韓) 불만사항인 무역불균형 문제를 먼저 거론,“무역불균형 문제가 있는 것을 알지만 이는 베트남의 경제발전에 맞춰 시설재 수입증대에 따른 것”이라며 “그러나양국간 무역을 확대해 가며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루옹 주석은 “한국이 지난 30년간 낙후한 농업국에서 선진공업국으로 발전한 과정과 경험에 감명을 받고 많이 배우고자 한다”며 “1년전 닥친 외환위기에 대처하는 金대통령과 한국의 노력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데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베트남 총리 주최 만찬◁ 金대통령은 이날 저녁 숙소인 대우호텔 연회장에서 열린 카이 베트남 총리 내외 주최 만찬에 참석했다.만찬에서는 ‘아시아 멜로디 나이스’라는 제목의 민속공연이 펼쳐졌는데 자국의 노래와 춤이 끝날 때마다 해당국 정상들이 무대에 올라와 꽃을 전달했다.이 자리에서 金대통령이 추안 태국 총리에게 “아시안게임 축구에서 태국이 한국을 이겼다”고 축하하자 추안 총리는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겸양. ▷기업인 초청간담회◁ 金대통령은 이날 오후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베트남 진출 기업인 158명을 초청,간담회를 갖고 우리나라 경제회생을 위해 베트남 진출 기업인들이 적극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金대통령은 한·베트남 정상회담 내용을 설명한 뒤 “지난 75년 우리가 이곳에서 철수할 때 다시 올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현재 5,500명이나 되는 기업인이 진출해 있다니 참으로 마음 든든하게 생각한다”면서 “한국과 베트남이 함께 도움이 되도록 경제활동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오늘 서울을 출발하기 전 누가 어느 은행장 인사문제를 상의하러 왔기에 ‘나는 간섭하지 않는다.가장 공정하게 처리하라’고 얘기했다”고 소개,정경유착이 없을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간담회에는 부인 李姬鎬 여사와 대우 金宇中 회장 등이 참석해 끝까지 지켜봤으며,호치민 지역 기업인 20여명도 초청됐다. ▷환영 행사◁ 金대통령은 공항에서 趙源一 주 베트남대사와 지아 베트남 투자계획부장관 등의 영접을 받고 군악대의 환영음악 연주 속에 숙소로 향했다.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 9개 회원국과 참관국인 캄보디아,초청국인 한·중·일 등 13개국 정상들이 모두 공식 의전 승용차로 대우자동차의 ‘체어맨’을 사용하게 됐다고 정부 외교관계자들이 전했다.의장국인 베트남은 당초 이번 회의를 위해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사에서 승용차를 구입할 계획이었으나 대우자동차가 체어맨 6대를 무상으로 기증하자 이 계획을 취소,체어맨 7대를 추가로 구입했다는 후문이다. ▷출국◁ 한·베트남 정상회담 및 동남아국가연합과 한·중·일 3국간 정상회의 참석차 이날 오전 출국한 金대통령과 부인 李姬鎬 여사의 서울공항 출국 행사는 1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간소하게 치러졌다. 출국 행사장에는 金鍾泌 총리 내외를 비롯,洪淳瑛 외교통상·金正吉 행정자치·千容宅 국방장관 등이 나왔으며,청와대수석비서관을 포함한 환송인사는 20명에 불과했다.
  • 베트남 국빈 방문/金 대통령 오늘 출국

    金大中 대통령은 부인 李姬鎬 여사와 함께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 9개국과 한·중·일간 정상회의(9+3)와 베트남 국빈방문을 위해 15일 출국한다. 金대통령은 아세안 국가와는 역내 금융위기 극복 방안,베트남지도자와는 정치·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미래지향적 관계발전을 위한 방안을 논의한다. 金대통령은 이번 방문 기간동안 호치민묘소에 헌화하고 레 카 퓨 공산당서기장 예방 및 트란 둑 루옹 주석 내외 주최 만찬자리에서는 한국군의 월남전파병 등 과거문제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계획이다.아울러 16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와도 정상회담을 갖는다.
  • 32년전 찍은 사진 한장에 담긴 추억

    ◎베트남 방문 金 대통령의 메시지/월남전 한창이던 66년/파월 반대당론 설득/퀴논주둔 맹호부대 위문 15일부터 베트남을 국빈방문하는 金大中 대통령은 60∼70년대 월남전 파병으로 인한 두나라 관계를 언급하고 호치민 묘소도 참배한다.金대통령이 지난 92년 베트남과 수교 이후 우리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과거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양국관계가 성숙했음을 의미한다.정치인으로서 金대통령의 베트남 현장체험과 개인적 소신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지난 66년 월남전이 한창일 때 민중당 대변인 자격으로 맹호부대가 주둔한 퀴논을 방문,대민사업의 하나로 부대안에 세운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찍은 빛바랜 사진이 그 단초다. 당시 尹潽善 전 대통령의 신한당과 朴順天 여사가 이끌던 민중당 등 야당의 당론은 파월 반대였다.“젊은 청년의 피를 돈에 팔 수 있느냐”는 게 반대의 주된 논리였다.때문에 위문방문 얘기를 꺼낼 분위기조차 되지 않았다고 당시 함께 방문했던 국민회의 金相賢 의원은 전했다. 이를 관철한 이가 바로 당시 대변인인 金대통령이었다는 게 金의원의 회고다.“국군이 공산주의와 싸우는데 우리가 파월을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현실이다.국군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정치인의 도리다”.이것이 金대통령이 당론에 맞서 펼친 논리의 요체였다.방문은 일주일 정도였고,金대통령과 金의원이 감명을 받은 것은 서로 전쟁중인데도 월남과 월맹 주민들이 물물교환하는 시장터였다고 한다. 청와대는 이번 방문을 계기로 金대통령과 함께한 베트남 고아들을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을 통해 수소문중이다.베트남 당국의 협조도 요청할 계획이다.
  • 日 자위대 해외파병 규제 완화/오부치 총리 PKO법 개정 시사

    【도쿄 黃性淇 특파원】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2일 자위대의 유엔 평화유지군 참여 관련 금지 조항을 일부 철폐할지 모른다며 자위대 해외파병 규제 완화를 강력히 시사했다. 오부치 총리는 참의원 본회의에서 와타나베 히데오 자민당 의원의 질문에 이같이 답하고 “국제평화 정착에 적극 기여하기 위해 헌법 정신에 따라 유엔평화유지활동(PKO)법의 재고를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92년 6월 제정된 PKO법에 따르면 자위대는 PKO의 일환으로 도로 건설이나 난민 지원 등과 같은 비전투 임무만 수행토록 제한돼 무장해제 감독이나 무기 수거등에는 직접 참여할 수 없다.
  • 방송인 서유석­가수 안혜경(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말한다:11)

    ◎현실비판·운동권 노래… 고난의 ‘언더’ 인생/가수·방송인 서유석/유신반대 ‘맷돌’ 공연중단 시련/심의 묶인 금지곡만 10여편/방송에서도 강한 정치풍자/‘윗분’에 밉보여 도중하차 가시밭길 “가는세월 그 누구가/잡을 수가 있나요/흘러가는 시냇물을/막을 수가 있나요/…/이내몸이 흙이돼도/내마음은 영원하리”(가는 세월). 70년대 텁텁한 목소리로 사회성짙은 노래를 부르던 청년문화의 기수 徐酉錫씨(53)의 대표곡이다. 가수와 방송인으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낸 徐씨의 체념한듯 하면서 굽히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徐씨가 부른 노래는 ‘가는 세월’ 말고도 창작곡만 70곡. 1985년 마지막 레코드 ‘뚝잘라 말해’를 발표할 때까지 낸 음반도 11집이나 된다. ‘타박네’‘파란많은 세상’‘세상은 요지경’‘대답은 없어라’ 등 심의에서 묶인 금지곡도 10여곡. 이가운데 녹음을 끝내놓고도 가사내용 때문에 레코드를 수거당했던 ‘마지막 노래’는 2년뒤 다른 가수가 불러 심의를 통과한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다. 교통관련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20년째 맡아 이젠 가수보다 방송인과 교통 전문가로 더 알려진 徐씨. 세월은 흘렀지만 사회성 짙은 ‘운동권 가수’로 찍힌뒤 극적으로 시작한 방송인 생활의 기억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성균관대 졸업무렵 학교앞 카페 ‘카사노바’에서 지배인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통금직전 具鳳書씨가 徐永春씨(86년 작고)등 연예인들과 함께 들러 徐씨의 노래를 청해 듣고 다음날 다시 TBC 쇼프로듀서와 함께 들러 徐씨를 소개했다. 그 다음날 곧바로 쇼쇼쇼에 출연한게 가수 생활의 시작이다. 그러다가 대학시절 핸드볼선수 경력을 살려 한동안 직장 핸드볼선수로 활약하며 안양예술인학교에서 묵고 있던 70년도 봄이었다. 신세계레코드사 작사가가 찾아왔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같이 본뒤 주제가 ‘어타임포어스(A time for us)’를 번안해 레코드를 취입하자고 했다.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옴니버스 레코드 타이틀사진으로 실렸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방송국 프로듀서들이 ‘徐씨 모시기’ 경쟁에 나섰다. 이때는 매일 YWCA강당에서 ‘청개구리모임’을 갖던 시절. ‘청개구리’가 알려지면서 통기타 언더그라운드 계열 가수들이 모인게 바로 ‘맷돌’이다. 매주 수요일 명동 코리아나백화점 강당에서 자작곡 공연을 가졌는데 ‘군사독재반대’‘유신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14회 공연도중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끝이 났다. 그리고 73년 4월 TBC 심야 라디오프로 ‘밤을 잊은 그대에게’ 진행을 맡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가을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이 제2차 한국군 월남파병 압력차 방한했을 때다. 방송도중 UPI 종군기자의 월남전 참전미군의 만행을 기록한 ‘추악한 미국인’을 죽죽 읽어내렸다. 즉각 중앙정보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잡으러 온다”는 말을 듣고 방송국 앞 목욕탕으로 도망,4일간 숨어 지냈다. 그리고 3년간 모든 활동이 철저하게 금지됐다. 그때 당국이 대마초사건을 핑계로 대중가수들을 줄줄이 묶어 들여 빈사상태에 빠진 연예계의 대안을 찾던중 徐씨를 대상으로 삼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전까지 내려와서 상경을 권유해 일단 서울로 올라왔다.그리고 당국의 통제를 시험해보기 위해 취입한 노래가 ‘가는 세월’이다. 그때 MBC 라디오에서 ‘정오의 희망곡’ 진행 제의가 들어왔다. 물론 당국의 입김이었다. 같은 방송 라디오프로 ‘안녕하십니까 서유석입니다’와 TV프로 ‘여의도1번지’를 맡아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77년 ‘푸른 신호등’을 맡아 진행한지 1년쯤 됐을 무렵 청와대로부터 진행자 교체지시가 떨어졌다. 프로 시작전 항상 정치판과 사회비리를 강도높게 비판한게 문제였다. 그후 동아방송으로 옮겨 ‘명랑 교차로’를 맡았다가 시사풍자 코너 ‘형님 이래도 됩니까’로 인해 79년 단명으로 끝났다. 81년 ‘푸른 신호등’을 맡았고 이후 지난 15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때까지 이 프로를 진행했다. 15대 총선이 끝난뒤 지금까지 줄곧 교통방송 ‘출발서울대행진’을 맡고 있다. 교통관련 논문도 2편을 발표하고 (주)다물대표로 교통관련 기기를 2건이나 상품화하는 벤처사업가로 변신했다. “지난 70·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통기타 가수들은 현실과 벗어난 노래를 부르기가 어색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 부도덕을 보고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니 당연 제약이 많았고 음악계로서도 퇴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가수 안혜경/반체제로 옥고 아버지에 영향/성악도서 운동권 가수 변신/계엄령 속에서도 민중가요 배포/여성밴드 결성 ‘저항 노래’ 1970년대말부터 지금까지 대학가에서 변함없이 불리는 ‘민주’란 노래가 있다. 운동권 노래의 고전중 하나지만 정작 이 노래를 만든 이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인조 여성 록밴드 ‘마고’를 이끌고 있는 安惠敬씨(41). 이화여대 성악과 재학시절 노래운동에 뛰어든뒤 노동·여성·환경과 관련한 메시지 강한 노래들을 쉼 없이 발표해오고 있는 개성파다. ‘까치길’‘민주’‘황혼’ 등 초기의 노래에서 우리 역사와 사회의 모순들을 담았다면 ‘커피카피 아가씨’‘일이 필요해’에선 여성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켰다. 또 ‘침묵의 봄’‘검은 민들레’ 등은 환경오염을 다룬 것이고 ‘평화공원’‘너희나라를 위해’등은 반전평화의 메시지가 강렬하다. 모두 현실비판과 역사의식이 흠씬 밴 자작곡이다. “70년대 사회 부조리와 부패에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던 아버님의 영향이 컸지요. 반체제적인 발언으로 옥고를 반복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당부는 제삶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수감중이던 아버지에게 음악대 진학의 꿈을 알렸고 “대중을 위한 진정한 예술인이 돼라”는 아버지의 편지글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성악과에 진학해 현실과 동떨어진 귀족적인 음악에 반발했고 자신이 할 일에 대해 고민하던중 金敏基씨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 참여한 게 노래운동의 시초. 1학년때 사전 정보누출로 불발에 그친 집회때문에 줄곧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레슨을 받으러 교수 집에 갈때도 항상 검은 색 짚차에 태워져 갈 정도였다. 졸업음악회 대신 혼자 작업한 노래 16곡을 담은 불법테이프를 만들어 선후배 동료들에게 돌렸다. ‘민주’도 여기에 실려 있다. 이 노래들이 자신도 모르게 대학 노래패들을 통해 퍼졌다. 80년도 대학 졸업후 바로 교사생활을시작했지만 노래 만들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TBC 방송국에서 ‘횃불’‘해방가’‘농민의 노래’ 등 민중가요 20곡을 숨죽이며 녹음해 배포했는데 이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청계천 복사가계에서 복사한 테이프 20여개를 돌렸고 임진각에 가서 통일을 생각하며 이 테이프 1개를 던졌다. 온산 여천공단의 오염실태를 고발한 마당극 ‘청산리 벽폐수야’ 금지도 잊지못할 일. 공연윤리위원회에 심의를 냈는데 전면 공연금지 지시가 떨어졌다. 결국 워크샵 형식을 가장해 서울 아현동 애오개소극장에서 4회공연을 어렵게 가졌다. 87년부터는 여성 환경 시민단체와 연계해 대학 교회무대와 소극장 운동을 벌였다. 92년 첫 공식 음반 ‘여성 환경 노래’를 출반했는데 이때도 노래 ‘평화공원에서’가 탈락됐다. 그리고 95년 2집 음반부터는 비교적 편한 음악을 택해 실었다고 한다. 지난해 여성5인조 록밴드 ‘마고’를 조직해 전국을 다니고 있고 지난 91년 결성된 ‘여성문화예술’에도 기획위원을 맡아 문화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솔로로 전국의 공연장을 다니며 공연을 병행한다. 성악과 출신이면서 운동권 가수로 방향을 잡았고 일부러 고전악기를 배웠다는 安씨. 1남1녀의 자녀를 둔 주부 가수지만 남자들만의 영역이란 편견을 깨기 위해 베이스 기타를 배워 그룹 마고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는 고집센 여성이다. 앞으로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원하는 것에 달려들 것”이란 말로 대신했다.
  • 건군 50돌… ‘국민의 군대’ 되기까지

    ◎세계속의 ‘자주强軍’ 급성장/48년 경비대로 출발… 정치개입 오점/평시작전권 환수­장비첨단화에 박차/PKO활동 등 국제평화 수호 큰 기여 1일로 건군 50주년을 맞은 우리 군의 발자취에는 반세기의 나이테 만큼이나 두터운 영욕의 역사가 담겨 있다. 군은 한국전쟁과 월남파병 등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성장,병력 수로만 따지면 중국 러시아 미국 인도 북한에 이어 세계 6위인 69만명의 거대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군은 그러나 5·16군사혁명과 12·12,5·18사태를 통해 30여년간 이 나라를 통치해온 ‘독재군부’의 온상이라는 오점도 남겼다. ▷국군 50년 역사◁ 우리 군은 48년 9월5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고 49년 10월1일 공군이 창설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육·해·공군 3군체제를 갖추며 출발했다. 창군 당시 육군은 국방경비대 660명,해군은 100t급 증기선 1척,공군은 수류탄과 폭탄을 손으로 투하했던 경비행기 20대 등 초라한 규모였다. 1945∼1950년까지 건군기를 거친 군은 창군 2년만인 50년 6·25전쟁에서북한의 기습남침에 맞서 백척간두에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사투를 벌여야 하는 시련기를 맞았다. 유엔군의 6·25 참전으로 작전지휘권을 넘기는 수모도 감내해야 했다. 국군은 53년 휴전과 함께 52년 발효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군사력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4·19와 5·16의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꾸준히 체계를 정비해 65년 이후 월남전에 참전하는 등 용맹성을 내외에 떨쳤다. 70년대들어 朴正熙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정책을 주창하면서 미국 의존도의 군사력에서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북 억제력 및 자위전력 증강계획에 따라 율곡사업이 착수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93년 소말리아에 공병대를 파병한 이후 앙골라와 서부사하라,인도·파키스탄,그루지야 등에서 유엔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했고 94년에는 한미연합사로부터 평시작전권을 환수받아 ‘세계속의 국군’으로 성장하게 됐다. ▷향후 위상 및 과제◁ 건군 50주년을 맞는 군은 북한의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과 통일 한국군의 위상을 재정립해야 하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육군은 기존 재래전력 외에 북한의 미사일공격에 대비한 ‘미사일 요격용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는가 하면 전술 지대지미사일(ATACMS)과 227㎜ 대구경다연장 무기체계(MLRS)를 도입중에 있다. 해군은 KDX­Ⅰ(구축함사업)에 이어 KDX­Ⅱ사업과 잠수함 건조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공군은 KF­16전투기를 비롯해 공대공·공대지 미사일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 “림팩98 합동훈련은 한반도의 가상전쟁”/美 군사문서 공개

    【도쿄 교도 연합】 미국 하와이 인근에서 실시되고 있는 림팩 98(환태평양합동훈련)은 한반도와 같은 분단국에서 발발한 가상전쟁 훈련인 것으로 최근 공개된 림팩 관련 미 군사문서에서 밝혀졌다. 지난 6일 시작돼 1개월여 계속되는 이번 훈련에는 한국과 미국,일본,캐나다,호주,칠레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중국과 인도네시아,싱가포르,페루가 옵서버를 파견했다. 미 제3함대 사령관인 허버트 브라운 부제독은 이번 작전의 시나리오가 미래에 발발할 수 있는 전쟁 가능성에 대비한 현실적인 훈련이라고 말했다. 군사문서에 따르면 시나리오는 호놀룰루에 기지를 둔 작지만 풍요로운 민주주의 ‘블루 랜드’와 거대하지만 가난하고 군사독재가 지배하는 농경 사회주의 ‘오렌지 랜드’와의 전쟁이다. 가상전쟁은 오렌지 랜드가 양국의 통일문제와 관련해 블루 랜드가 제안,실시한 국민투표 결과를 거절하면서 블루 랜드를 침공함으로써 발발했다. 유엔은 즉각 오렌지 랜드에 제재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고 블루랜드를 지원하기 위해 다국적군을 파병한다는 것이다.
  • 육군박물관(생활속의 박물관·미술관:5)

    ◎“조국사랑” 참군인 정신 일깨운다/선사시대 이래 군사자료 8,600점 한눈에 金日成 작전명령서·베트콩 전단까지/부서진 총열·녹슨 수통·구멍뚫린 철모…/장렬히 숨져간 무명용사의 외침 절절이 불암산의 서기(瑞氣)가 어린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호국 간성의 요람인 이곳에 들어선 육군박물관은 일반인들의 군(軍)에 대한 거리감을 친근감으로 바꿔주는 묘한 공간이다. ‘한국의 시인 건축가’ 金重業씨(88년 작고)가 조국통일의 염원을 담아 그 물꼬를 트는 상징으로 열쇠 형상을 택해 설계했다는 이 건물은 흰색 화강암 건물로 잔디와 숲으로 차분히 정돈된 육사 캠퍼스 남쪽 끝에 들어앉아 있다. 정면에 연병장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고 바로 앞에는 고 姜在求 소령 동상이 달려가는 듯한 자세로 서 있다. 30여년전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훈련장에서 부하를 구하고 산화한 그의 모습은 오늘날 이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참군인정신과 함께 참나라사랑의 정신을 일깨워 준다. 육군박물관은 이 땅에서 ‘저질러진’ 전쟁에 관한 많은 것을 증언한다.지상3층 지하1층 건물중 고대실·현대실 등 두 개의 전시실에는 가깝게는 6·25전쟁에서부터 임진왜란,멀리는 선사시대의 군사 관련 유품과 문화재까지 모두 8,6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의 가치는 유형의 물질에서 옛 사람들의 혼과 정신을 만나는데 있다고 했던가. 전시실을 떠받치고 있는 14개의 원추형 돌기둥이 두 열로 돌아나간 옥외 전시장에서 당시의 총통과 대포들이 전장의 신음을 오늘에 전한다. 건물 중앙으로 맞닿은 기둥 사이에 朴正熙 대통령이 서거 때까지 타던 캐딜락과,맹호부대가 월남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한 ‘안케패스 전승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군인으로 시작해 대통령이 되고,또 독재자로 총에 맞아 생을 마감한 한 불운한 정치인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볼 수 있다. 3층에 위치한 현대실에는 광복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각종 무기와 장비 복식 문서 등 4,500여점이 전시돼 있다. 현대사의 흐름을 요약한 다양한 색과 제각각 형태의 볼 것들이 눈을 자극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은 6·25전쟁이다. 전쟁에 쓰였던 장비와 전단 복장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붉은빛 일색인 공산군의 그것들은 지금도 섬짓한 느낌을 전한다. 어느 시인은 뜰 안에 핀 장미꽃 빛깔에도 가슴이 내려앉는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 0097호’에는 金日成이 전쟁중 직접 작전을 명령한 극비사항이 적혀있다. 1951년 8월8일로 찍혀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지령문’도 있다. 특히 6·25전적지인 설악산 소청봉에서 유골과 함께 발굴된 무명용사의 유품 앞에는 관람객들이 유난히 많다. 소총의 총신부분과 녹슬은 수통·구멍뚫린 철모.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전장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다가 외롭게 숨져갔을 그의 외침이 귓전을 때리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6·25전쟁중 물자가 고갈되자 인민군이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쓴 병뚜껑으로 만든 모표,허름한 방한화,버선,철모,수통 등이 월남전 당시의 궁색한 베트콩 군수품과 나란히 진열돼 있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고향의 달밤,임이 그리워 밤마다 웁니다.”“그리운 이여! 딸라도 선물도 싫어요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대의 산 목숨뿐” 등 월남전 당시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살포됐던 전단도 눈길을 끈다. 2층의 고대실에는 선사시대부터 대한제국 이전까지의 군사관련 문화재 4,128점이 시대순으로 전시돼 있다.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주먹도끼 등 석제무기와 3∼4세기 신라의 철검·무쇠도끼·무쇠창 등 철제무기들은 인류를 말살할 수 있을 정도의 현대무기에 비하면 정겨운 느낌마저 든다. 한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조선후기 화살 연발장치인 녹로노나 부녀자도 쏠 수 있게 만든 수노(手弩)인 삼시수노기(三矢手弩機)가 복원품이긴 하지만 눈길을 끈다. 화살을 4개까지 장전해 쏘던 조선전기의 사전총통(四箭銃筒),조총,화강암 탄알인 단석(團石),발사기인 대완구(大碗口)와 비격진천뢰쯤에 이르면 본격적인 전쟁 분위기가 풍긴다. 대완구는 국내 유일한 것이며 비격진천뢰도 연세대박물관과 함께 유일한 소장자로 돼있다. ‘부산진 순절도’와 ‘동래부 순절도’는 임진왜란 당시 군민(軍民)들의 처절한 항전모습을 담은 보물들이다. 박물관 건물을 나와 연병장 길을 따라 오른 쪽으로 접어들면 헬리콥터 장갑차 곡사포 전차들이 도열한 야외전시장에 접어들게 된다.50년 6월25일 남침의 선봉에 섰던 북한군 탱크 T­34와 이에 맞섰던 미제 M46탱크,전쟁초기 투입된 적 관측및 업무연락용 항공기 L­19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40여년 전 서로를 죽이기 위해 첨예하게 대치했던 주인공들이 지금은 친구가 되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관장 姜性文 중령/“40년 전통 국내 유일 군사종합박물관”/군사문화 발달과정 전시/전쟁유적지 학술 조사도 육군박물관의 현 관장 姜性文 중령(53·18대)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주2회씩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수이기도 하다. 지난 96년 12월 관장직을 맡아 박물관 운영을 책임지랴 강의준비 하랴 하루하루가 바쁘기만 하다. 특히 지난해 2월부터 육사 경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관람객이 늘어나는 바람에 할 일이 부쩍 많아졌다. “용산의 전쟁기념관이 한국전쟁에 초점을 맞춘 전쟁과 무기중심의 기념관 성격을 갖추고 있다면 육군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군사관련 종합 박물관입니다. 40년이 넘은 전통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경내를 둘러보는 관광상품이 마련되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지요” 육군박물관은 56년 육군사관학교 기념관으로 처음 문을 연뒤 10년만인 66년 육군사관학교 군사(軍事)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83년 지금의 자리에 새 건물이 완공돼 2년뒤인 85년 개관했다. 주변의 넓은 공원 분위기와 어울려 딱딱하게 느껴지는 군사문화를 순하게 바꿔낸다. 군사유물을 통해 군의 업적과 전통·발전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시형태가 독특하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유형적인 군사관련 소장품들이 무형의 자산을 표현한다고 할까요.외침이 있을 때마다 민군(民軍)이 일치단결해 민족 수호에 나섰던 조상들의 자취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자부심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지요” 비록 군사문화를 다룬 박물관이지만 전통문화 유지역할에 큰 몫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는게 姜관장의 설명이다. 휴전선 일대 군사유적지에 대한 학술조사와 군사유물에 대한 논문지 발간도 활발하다. 지난 94년부터 파주·연천·철원·포천군 지역의 산성·봉수대·한국전 격전지에 대한 지표조사를 벌여 보고서를 작성해 왔고 학술 논문지 ‘학예지’도 통권 5권을 펴냈다. 육군 박물관이 군사(軍史)를 다룬 박물관인 만큼 대학 역사교육의 보조 기능을 무시할 수 없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대학의 역사교육에는 군사 문화재의 발달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빠져 있지요. 이 틈새를 메울 수 있는 박물관이 바로 육군박물관입니다. 소장품들이 모두 가치있는 자료들인 만큼 영구보존을 위한 전시장 보완이 시급합니다” ◎육군박물관 가는 길/전철·노선버스 연계/육사후문으로 입장 70만평의 캠퍼스안에 다양한 레포츠 시설과 편의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는 특수목적 대학인 육군사관학교 안에 자리잡은 이색 박물관이다. 육군사관학교가 관리 운영하는 군 관련 시설인만큼 일반인들의 접근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그러나 지난해 봄부터 육사 경내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됐고 관광코스도 마련돼 있어 뜻만 세우면 얼마든지 알찬 볼거리들을 만날수가 있다. 전철 1호선이 석계역,7호선이 먹골역까지 닿아 있고 노선버스는 45­2,803,45,745번이 운행한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서울여대 앞에서 내린다. 매일 상오 9시 호텔신라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도 있다. 육사 후문에서 안내를 받아 박물관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으며 정기 관광코스는 상오 10시와 하오 2시 등 매일 두차례. 화요일∼일요일 개관하며 관람시간은 상오 10시부터 하오 4시까지. 관람료는 어른 2,000원,학생 1,000원.
  • 미즈시마 아사호 와세다大 교수 아사히신문 칼럼(해외논단)

    ◎日 평화활동 확대할때 일본정부는 일·미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의 실행을 위해 관련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으나 지금 일본이 해야할 일은 군사활동의 확대가 아니라 평화활동의 확대라고 일본 와세다대학의 미즈시마 아사호 교수(헌법학 전공)가 주장했다.그는 군사면이 강조된 일·미 안보조약을 민주주의와 기본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미우호조약’으로 바꾸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아사히신문에 실린 그의 칼럼을 요약한다. 입법작업의 기본원칙은 명확한 법률용어를 사용하여 오해가 없도록 해야하는 것이다.그러나 일본정부가 일·미 방위협력지침의 실행을 위해 국회에 제출한 ‘주변사태 법안’은(해외파병과 무력사용 등을 금지한) 헌법9조와의 저촉문제 이전에 여러가지 법률제정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日·美 방위협력지침의 문제 먼저 법안 제목인 ‘주변사태’의 개념자체가 매우 애매하다.그것은 지리적 개념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태의 규모와 상황 등에 따라 결정되는 개념이라고생각할 수 밖에 없다.일본정부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고 하는데는 특정 지역·해역을 정해 미군과의 협력의 장을 제한하는 표현을 가능한한 피하려고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정부내에는 ‘주변’을 극동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그러나 ‘적’의 범위를 분명히 하지않음르로써 그 애매함이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주변사태 개념이 미국과의 군사협력 범위를 넓히는 공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어느 의미의 시간적 개념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현재의 자위대법은 유사(有事)사태를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과 그러한 위협이 있을때로 규정하고 일·미 공동작전도 일본과 주일 미군기지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때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나 새로운 법안은 상당히 빠른 단계에서 대응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태’의 단계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한신(阪神) 대지진이후 자위대의 출동이 재해파견의 경우 빨라졌다.하지만 전투부대로서의 출동은 법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그러나 미군에 대한후방지원이라는 간접적인 형태의 경우 출동요건이 완화됐으며 그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 법안은 ‘일본을 방위한다’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위대와 그 관련법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될지 모른다.그것은 실질적으로 일본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전수방위개념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헌법의 전수방위개념 깨져 새 법안은 또 미군과의 협력에 있어서 신속성과 효율성을 우선하고 있다.국회에 대해서는 사후 보고만으로 충분하다고 규정하고 있다.‘군사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가능한한 현장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그러나 국민주권국가에서 그러한 현장판단만을 우선하는 것은 헌법의 제약이 없는 미국과 같은 ‘보통 국가’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헌법상 외국에 대한 무력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일본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군사적 합리성’ 우선의 발상은 무기사용 규정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새 법안 2조는 무기사용 요건을 확대하여 소형무기에 한정하지않고 있다. 선박검사활동과 수색구조활동은 해상자위대의 함정과 헬기가 담당하도록돼 있는 가운데 요건만 갖추면 고성능 기관포와 속사포 등의 사용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그런 의미에서 새 법안은 일본이 자체 영역외에서 무력행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기본권 중시 우호협약 전환 지금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요구되는 것은 헌법에 기초한 ‘평화적 합리성’이지 ‘군사적 합리성’은 아니다.이때문에 군사적 역할의 확대를 규정하고 있는 새 법안은 폐기돼야한다.새로운 일·미 방위협력지침도 마찬가지다.군사동맹적 색채가 짙은 일·미 안보조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민주주의와 기본적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미 우호조약’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그것이 헌법이 규정한 국제협조주의의 진정한 구체화이다.
  • 주한미군:上(대한민국 50년:16)

    ◎45년 日 항복후 4만5천명 첫 진주/6·25땐 최대 32만명 파병 ‘韓國수호’/국력 신장 따라 우리방위비 분담 늘어 이땅의 주한미군 역사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지 25일만인 1945년 9월 8일부터 시작됐다.이날 하지중장 휘하의 제7사단이 1진으로 인천에 상륙했다.인천 내항에는 해방군으로서 입성하는 미군을 환영하는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으며 부두는 온통 태극기와 성조기의 물결을 이루었다.이어 29일과 10월 8일 40사단과 16사단이 부산과 목포에 도착,38선 이남지역을 지배하는 점령군으로 주둔하기 시작했다.당시 주둔병력은 4만5천명. 이후 주한미군의 존재는 대한민국 50년사의 전개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이땅의 정치·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특히 주한미군의 철군을 둘러싼 한미간 논쟁과 갈등은 두나라 관계의 본질을 대변해줄 만큼 양국의 정치적 상황과 국민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며 전개됐다. ○닉슨 ‘괌독트린’ 2만명 철수 주한미군에 의한 군정통치는 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끝났다.그리고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는 애치슨라인이 설정됨에 따라 49년 5월부터 6월 사이에 군사고문단 500명만 잔류시킨뒤 철수했다.주한미군의 첫번째 철군이다.이 과정에서 당시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측에 충분한 보상과 확실한 안전보장 등을 요구했지만 결국은 점령군의 철수완료 시기만을 통보받았다. 그러나 미군은 이로부터 1년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유엔 참전국의 일원으로 재진주해야 했고 이때 치른 대가는 컸다.전쟁기간중 가장 많을 때는 32만7천의 병력을 파견했으며 전사 3만3천여명,부상 10만3천여명 등 인명피해만도 엄청났다.하지만 종전 이후인 8월8일 한국정부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합의하고 10월1일 조인함으로써 한반도에 합법적으로 주둔할수 있게 됐다. 70년대 들면서 한미간에는 또 한차례 주한미군의 철수를 둘러싸고 신경전과 갈등이 전개됐다.70년 닉슨이 아시아에서의 미국역할의 축소를 밝히는 이른바 괌독트린을 선언함에 따라 그해 후반기부터 71년 3월에 걸쳐 7사단 병력 2만명이 철수했다.한국측은 미국의 일방적인 주한미군 감축계획은 66년한국군이 월남에 증파될때 맺은 ‘브라운 각서’의 주한미군 감축시 사전협의 약정을 위반한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결국 이후 열린 협의에서 미국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약 15억달러의 군사원조및 차관을 제공하는 한편 양국간 연례안보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우리의 방위산업 육성과 국군현대화 등의 추진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세번째 철군은 이로부터 5년이 지난 76년 7월 인도주의를 표방한 민주당대통령후보 카터가 대선공약으로 내걸면서 쟁점화됐다.당시 한국은 유신의 철권통치하에 있던 시기로 한국의 인권문제가 미국내에서 여론의 쟁점으로 부각돼있었다.미의회 프레이저소위원회 청문회가 “한반도가 적화되더라도 미국과 일본의 안전에 영향이 없는 만큼 인권탄압적인 한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못박을 정도로 미국내의 반한여론은 드높았다.한국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의 논리와 핵개발 위협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양국관계에는 살얼음판 같은 핵긴장이고조됐다.朴正熙는 75년 6월 12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고 있으나 지금은 개발하고 있지 않다.만일 미국이 핵우산을 걷어가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게 될 것이다”고 공개선언,미국정부를 압박했다.그런 한편으로는 ‘선보완 후철군’론을 주장하며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균형 유지책과 한국의 자체 방위력 증강조치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카터의 철군결정은 미의회 및 군부로부터 많은 비판과 반발을 샀고 이에 카터는 싱글러브 장군을 주한 미8군 참모장에서 해임,철군 반대론에 쐐기를 박기도 했다. ○韓·美軍 역할­위상 큰 변화 아무튼 3차 철군을 둘러싼 한미간의 밀고 당기기에서 한국은 20억달러 상당의 무기 및 군사시설을 제공받고 미공군의 강화,한미 합동군사훈련 실시,한미연합사령부 설치 등의 부수적 성과를 거뒀다.또한 3천4백명의 철수가 이뤄진뒤 미국은 대북한 군사력 재평가결과에 따라 81년까지의 주한미군철수 동결조치를 발표함으로써 3차 철군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로 일단락됐다. 이상에서 보듯 80년 이전에 거론되거나 실행된 주한미군 철수는 철저하게 미국의 입장에서 결정된 것이며 한국의 입장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80년대 초 한국이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됐다.광주의 참극에서 행해진 주한미군의 역할문제다.주한미군은 전에 한국의 정치적 격변기 때마다 민주화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하기는 했으나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61년 5·16 쿠데타때는 매그루더 사령관이 이의 저지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79년 12·12 쿠데타태도 위컴사령관이 신군부에 항의를 했다고는 하나 항의로 그쳤다.그러나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신군부측의 병력이동과 관련,주한미군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부대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주한미군이 직·간접적으로 신군부를 지원 내지는 묵인했다는 비난을 샀다.그리고 이때부터 한국민들로부터‘반전반핵’‘양키 고홈’의 야유를 받으며 시위의 대상으로 몰리기에 이르렀다. 어쨌든 철군을 둘러싼 양국간 대립과 해소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역할 및 위상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즉 한국전쟁 이후 70년대 말까지는 한반도의 안보를 미군이 주도하고 한국군이 보조하는 관계에서 80년대초 동반자관계로 격상했고 90년대 들어서는 94년 미군의 평시작전통제권 이양이 상징하듯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보조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점 미묘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의 문제다.한국의 경제력 신장을 반영하기도 하는 방위비 분담은 78년 한미연합사 창설이후 어김없이 제기되면서 특히 대한군사판매차관(FMS)를 졸업한 86년 이후로는 연례안보협의회의 최대 관심사로 등장했다.
  • 국군의 발자취(대한민국 50년:15)

    ◎軍 정치적 중립 5·16구데타로 무너져/65년 월남 파병 계기로 환골탈태/軍장비 현대화­전투력 강화 한몫/6·25 직전 10만서 69만 大軍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 대한민국 국군의 총병력은 10만5천여명이었다.이 가운데 지상군이 9만6천여명,해군 7천여명,공군 2천명가량이다.참고로 북한 인민군은 총 19만8천명 규모였다. 국군은 6·25를 거치면서 미국의 원조와 지원 아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다.전쟁중에는 최고 80만에 이르기도 했지만 종전 무렵에는 60만 대군으로 자리잡았다.게다가 사회 각 부문의 성장이 더딘 상태에서 군은 미국식 교육·관리제도를 도입,운영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앞서가는 조직이 되었다. ○李承晩의 정치이용 거부 그러나 덩치가 커지긴 했어도 군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벗어나지는 못했다.제1공화국 시절 李承晩 대통령은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고 집권을 연장하는 도구로 군을 이용하려 했다.이에 따라 정치권이 인사에 개입하고 부정선거를 강요했으며,정치자금 조달을 요구하기도 했다. 갓 독립한신생국가에서,4억달러쯤에 이르는 미국의 군사원조와 국가예산의 40%가량을 이용하는 군만큼 재정능력이 풍부한 집단은 없었다.따라서 정치권으로서는 군이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자유당 정부 때의 군이 일방적으로 정치에 끌려다닌 것만은 아니다.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생한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종찬 장군은 육군훈령을 내려 군의 정치개입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60년 4·19가 일어났을때도 군은 질서유지에만 나섰을뿐 정치적으로는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던 군의 자세는 5·16군사쿠데타가 터지면서 일시에 무너진다.인사문제를 비롯한 군 내부의 부정부패가 누적되고 정치불안이 야기한 사회혼란이 이어지자 이를 빌미삼아 朴正熙 소장과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5·16은 朴正熙 집권 18년에 이어 全斗煥·盧泰愚로 연장되는 군사정권 시대의 출발점이 됐다.이 기간 군출신 정치세력은 특유의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일정부분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민주주의 발전은 억압됐고 인권탄압이 공공연히 자행됐다.국민의 군대여야 할 군은 국민에게 사랑받기 보다는 경원의 대상이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특히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군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 한편 대한민국 국군은 월남파병을 거치면서 다시 한번 환골탈태한다.1965년 1월8일 朴正熙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월남에 국군 2천명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다음달 24일 비둘기부대장병 583명이 첫 전투부대로 파병됐다.이에앞서 64년 9월11일에는 의료진과 태권도 사범 164명이 부산항을 떠나 열하룻만에 월남 사이공(현 호지명시)에 도착했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1961년 11월 朴正熙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사이에서 처음 논의됐다.파병의 명분은 ▲한미 양국은 자유우방으로서 아시아의 집단안보에 공동책임이 있고 ▲월남의 안전은 한국의 안보와 직결되며 ▲한국으로서는 6·25때 우방 16개국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이제 빚을 되갚아야 한다는것 등이었다. ○8년간 31만2천명 파병 하지만 파병이 쉽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우리 정부로서는 파병에 따른 제반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얻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한미간의 줄다리기는 월남전 내내 계속됐고,이같은 상황은 65년 5월17일 미국에서 열린 朴正熙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전후의 사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하튼 65년 6월14일 월남공화국 수상이 우리 정부에 1개 전투사단 지원을 공식요청한 것을 계기로 국군의 월남 참전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그해 10월16일 첫 전투사단인 맹호부대가 부산항을 떠났고 이어 백마부대·백구부대·청룡부대가 속속 파병대열에 합류했다. 1973년 3월23일 마지막 부대가 귀국하기까지 8년동안 대한민국 국군은 모두 31만2천여명을 월남에 파견했다.그땅에서 국군은 대대급 이상 작전만 1천100회를 실행했고,민간지원 사업으로는 3천500여채의 건물을 지어주고 1천700㎞의 길을 닦아주는 노력을 기울였다. 월남파병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종적으로 내리긴 아직 이르지만 국군장비 현대화와 전투력 강화라는 측면에서만 따질 때 크게 기여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아울러 국군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드높이는 데도 한몫을 했다. 최근 국군은 UN평화유지활동(PKO)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93년 7월 소말리아에 공병대대를 파견한 것을 시발로 그동안 앙골라,서부사하라,인도·파키스탄,그루지아 등지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유지군 활동을 벌였으며 이에 따른 국제사회는 그 증거라 할 만하다. 6공화국에서는 헌법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명시했다.이어 문민정부는 하나회 조직을 정비하는 등 군의 정치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군도 국방백서를 발간,군의 실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군내 민주화를 이루고자 군인복무규율을 개정하는 등 국민의 군으로 거듭 태어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지상군 56만,해군 6만7천,공군 6만3천 등 총 69만병력에 이른다.이에 견줘 북한군 규모는 1백14만7천명이다. ◎朴正熙­존슨 대통령 65년 월남 파병 담판/“전투병력 추가 파병 안하면 주한美軍월남으로 빼겠다”/“對韓 경제원조 확대 한국 군장비 현대화 해달라” 65년 5월 미국에서 만난 朴正熙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은 한미 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확인한 뒤 동아시아 안보에 관해 깊이있는 논의를 나누었다.그러나 실질적인 초점은 단연 한국군의 월남 증파 건에 맞춰졌다. 존슨은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한국군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이어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한미상호방위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가를 역설했다.이때는 한국이 전투부대로 비둘기부대 2천명을 파견한 정도였기 때문에 존슨의 치하처럼 월남에서 큰몫을 담당하지 못한 상태였다.존슨의 언사는 결국 한미상호방위에 더욱 관심을 가질테니 한국도 월남에 병력을 더 많이 보내라는 정치적 요구에 다름아니었다.이 자리에서 존슨은,한국이 병력 파견을 늘리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월남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암시도 함께 했다. 두 정상은 이 만남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한국군 현대화를 추진하는 군사원조를 늘이기로 합의했다.또 주월한국군 유지비용의 인상과 주한미군 유지 약속 등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음해 3월7일 브라운 주한 미대사는 국군의 월남 추가파병에 따른 미국측 보상조치를 약속한 14항목의 문서를 한국정부에 전달했다.주요 내용은 ▲추가파병 비용은 미국이 부담 ▲한국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 현대화 ▲월남 재건 및 구호사업에 한국업체 참가 ▲미국의 차관·군사원조 계속 및 신규차관 제공 등이다. 이 각서이후 곧바로 국군은 2만여명을 월남으로 보냈고,월남전이 끝날 때까지의 병력 31만여명은 월남전 참전국 가운데 미군에 이은 두번째 규모 였다.또 민간업체의 월남에 대한 수출액 할당도 연 6천만달러로 늘어났으며 건설사업 등에의 참여도 활발해져 우리 사회는 ‘월남특수’를 노렸다.그러나 월남에서 숱한 한국청년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하였다든지,참전용사와 그 자녀들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일따위는 월남파병에 따른 손실이기도 하다.
  • 日,유사시 각의 결정으로 파병/‘주변사태’ 인정 절차 생략

    ◎국회 승인 없이 사후 보고만 【도쿄=姜錫珍 특파원】 일본 정부는 미·일 방위협력을 위한 지침 개정에 따른 주변 유사사태 대응과 관련,주변사태 인정 절차를 생략하기로 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7일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또 주변유사시 미군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내용도 국회의 승인을 얻지 않고 각의의 결정 만으로 가능케 하되 국회에는 사후 즉각 보고키로 했다. 이같은 방침은 미·일 방위협력을 위한 지침(가이드라인) 개정에 따라 일본 정부가 새로 입법하게 될 ‘주변사태법’에 포함되게 된다. 일본 정부는 가이드라인 개정에 따라 미군에 대한 지원체제 정비를 위해 ▲주변사태법의 제정 ▲자위대법 개정 ▲미·일 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ACSA)의 개정 등 3가지 작업을 추진 중이다. 일본 정부가 이같이 결정한 것은 미군에 대한 지원을 기동성있게 실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본 언론들은 설명했다. 주변사태 인정 절차의 생략은 주변지역 유사시 언제부터 주변사태라고 인정할 것인지 판단이 어렵고 주변사태 인정,지원내용 확정의 2단계로 대응할경우 기민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변유사시 일본 정부가 ‘주변사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원를 하려 한다’는 결정 1단계로 미군에 대한 지원 절차가 간소화된다.
  • 미,공습 첫날 이라크 초토화

    ◎전투 시작 7일간 비행기 300대 1천회 폭격/위성 유도 미사일·지하벙커 파괴 폭탄 동원 【워싱턴〓김재영 특파원】 후세인 대통령이 무조건적인 사찰을 수락하지 않으면 미국의 대이라크 군사공격은 1주일 내에 감행될 공산이 큰 것으로 보이며 정확하고 예리한,질 위주의 공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후세인 정권을 철저히 봉쇄하겠다고 하던 91년의 걸프전과 달리 클린턴 대통령은 이번 공습이 “이라크의 대량파괴 무기 전체를 파괴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진해서 말했다.타켓이 분명하고 달성목표도 현실적으로 낮춰잡은 것이다. 50만명이 넘는 지상군이 투입됐던 걸프전과는 달리 1만명 정도의 미 지상군이 쿠웨이트에 파병되어 있는 현재 이번 공격은 철저히 공습에 한정될 전망이다. 이번에 동원될 군용 항공기는 300여대로 걸프전 때의 10분의 1 수준.걸프전은 6주일에 걸쳐 3만7천회의 공습을 퍼부었는데 2일에서 7일정도로 예상되는 이번 공습은 1천회 내외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공격기회가 ‘아까워서’명중률이 크게 높아질 전망이며 군사행동에 대한국제여론이나 지지가 7년전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 점을 감안해 공습 첫날 ‘대거’분쇄할 확률이 높다.중동의 기존 우방들이 지상기지 사용을 불허해 크루즈미사일은 물론 폭격기,전투폭격기 등이 항공모함 등 해상에서 주로 발진하는 제한을 받는 대신 무기 성능은 걸프전보다 ‘당연히’ 개선되었다. 크루즈미사일은 위성유도 장치를 겸비해 사막먼지나 연기에 잘못 유도되는 비율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사정거리도 확장되었다. 폭탄 가운데 자체 정조준 유도장치를 갖춘 ‘스마트’탄이 절반을 넘어 걸프전의 15%를 크게 웃돈다.GBU­28이라는 지하 시멘트 벙커를 날리는 폭탄이 개발됐다. F­15E 전폭기가 이를 투하할 수도 있으나 대당 제작비가 20억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폭격기인 B­2가 이를 떨어트리기 위해 처음으로 투입될 수 있다. 이 경우 미 중부 미주리 기지에서 발진,공중 중간급유을 받아 왕복 36시간 비행을 하게 된다.
  • 내한 미 상무장관의 경고/박희준 경제부 기자(오늘의 눈)

    윌리엄 데일리 미 상무장관이 이틀간의 방한일정을 마치고 한국을 떠났다. 짧은 체류기간 동안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를 비롯,한국무역협회 관계자와 정해주 통상산업부 장관 등 정·재계 인사를 잇따라 접촉하면서 미국의 ‘메시지’를 전달했다.충직한 미국 공무원의 모습이었다. 그의 방문목적은 그의 발언에서 바로 나온다.그는 17일 하오 무협주최로 열린 만찬에서 연설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미국기업의 고충을 듣고 정보를 수집하며 방문국 관리와 만나 정부차원에서 공동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할 일을 모색하기 위해서 방문했다”고 운을 뗐다.우리나라와 관련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은 금융위기를 구실로 시장접근 확대 약속이행을 늦추거나 새로운 무역장벽을 도입해선 안된다”는 미 정부의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이 말을 하기 위해서 그는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 파병결정을 할 때 한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18일 정해주 장관과의 오찬회담에서도 이는 되풀이됐다. 현위기는 개혁과 개방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요지의말을 되풀이했다.반면 우리가 요청한 미국기업의 대한투자증대 등에 대해서는‘검토하겠다’는 말만 남겼다.물론 우리 관리들은 ‘인식을 같이했다’는 말로 이를 표현했다. 결국 그의 방문목적은 단하나로 압축된다.아시아 지역 특히 한국이 아무리 어려워도 미국의 국익은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한국은 미국기업이 2백50억달러를 수출하는 중요한 시장이다.규모로 봐서 미국의 5대 수출시장이다.이를 잃을 수는 없다는 인식이다.우리가 살기 위해서 소비절약을 하고 있지만 미국측은 소비절약이 외국상품 불매운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정부가 나서 수입을 장려해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소비절약은 우리의 살길이지만 미국은 국익의 잠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를 탓할 수는 없다.오히려 높이 사고 싶은 점도 없지 않다.관리로서 그는 미국의 정책목표를 한국에 분명히 그리고 충실히 전달했다.한국의 위기에 대한 감상적인 접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점이다. IMF체제이후 우리가 이만큼 했으니 환율과 금리가 떨어지겠지 낙관하는 것은 우리식의 감상적인 접근일 뿐이다.
  • 미 지상군 6천명 걸프 증파/1만명으로 늘어

    ◎클린턴,오늘 국민 설득 행사 【워싱턴·유엔본부 AP 연합 특약】 윌리엄 코언 미국방장관은 16일 자신이 5천∼6천명의병력을 쿠웨이트로 추가파병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코언 장관은 이날 CNN방송의 ‘래리 킹 라이브’ 프로에 출연,이같이 말하고 이들 병력을 파병하는 것은 이라크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침략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한 순수한 방어 목적에서라고 덧붙였다. 이들의 파병이 이뤄지면 걸프지역에 배치될 미지상군은 현재 쿠웨이트에서 훈련중인 1천500명과 이미 이동 명령을 받은 3천명을 포함해 모두 1만명 수준으로 늘어나게 되며 전함과 항공기를 조종할 해군병력들까지 합치면 2만5천명 수준에 달한다. 한편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자신이 바그다드를 방문,이라크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노력을 펴겠다고 밝혔으나 유엔 안보리는 유엔 사무총장의 바그다드 방문을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의 바그다드 방문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미해군 대변인은 미군 해병 2천여명이 헬기모함 USS괌호 등 4척의 수륙양용함대에 승선,이날 걸프만에 도착했다고 밝혔다.또 F­117 스텔스 폭격기 6대가 이날 쿠웨이트에 도착하는 등 걸프지역에서의 미국 병력증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해병대 파견은 이라크가 인근 국가들에 지상 공격을 가할 경우에 대비한 것이라고 대변인은 말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쿠웨이트 북서부 사막에서 약 150명의 미국 지상군 병력의 실탄 훈련이 실시된 가운데 이날 백악관 보좌진들은 모임을 갖고 이라크 군사공격을 염두에 둔 국민 설득 작업을 숙의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에 따라 17일 군 주요 지휘관들을 만나고 18일에는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국민과 대화를 갖는다.
  • 호,특수부대 190명 걸프 파병

    【캔버라 AP 연합】 공군특수부대(SAS)를 포함한 호주군 병력 190명이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이 발발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17일 걸프지역으로 출발할 것이라고 존 하워드 호주 총리가 16일 밝혔다. 하워드 총리는 이들 병력이 일단 쿠웨이트에 3개월동안 배치될 것이지만 이들이 실제로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에 돌입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걸프지역으로 떠나는 호주병력은 110명의 SAS 대원들을 포함한 특수부대 병력과 두대의 보잉 707기,정보 및 의료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 미,지상군 3천명 걸프 급파

    ◎연말 한국 배치 하려던 세균탐지 시스템도 【워싱턴·알자브르 공군기지(쿠웨이트) 외신 종합 연합】 미국은 유엔 무기사찰 활동을 둘러싼 이라크와의 긴장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쿠웨이트 방위를 강화키 위해 최고 3천명의 지상군을 파병할 예정이라고 9일 한 미군 고위장교가 밝혔다.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의 걸프지역 순방을 수행중인 이 장교는 텍사스주 포트 후드의 군대가 앞으로 10일에 걸쳐 쿠웨이트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새로 파병될 군대가 M1­A1 탱크 및 브래들리 장갑 병력수송차량 등을 이용하고 있는 1천500명의 기존병력과 함께 이미 계획돼 있는 군사훈련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수행 장교는 지상군이 쿠웨이트 방어를 지원할 방침이며 이라크에 대한 지상공격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군은 걸프 주둔 병력을 보호하기 위해 세균 등 생물학물질을 탐지하는 최첨단 시스템을 현지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군관계자들이 9일 말했다. 올 연말 한국에 배치될 예정이던 이 시스템에는 항구와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포틀 실드’ 가동팀과 생물학종합탐지시스템(BIDS) 운영소대가 함께 편성돼 있다.
  • 당 파견 인수위 전문위원·행정관 54명 확정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측으로부터 파견받는 전문위원 및 행정관 54명을 확정,발표했다. 국회의는 전문위원 15명,행정관 14명 등 총 29명을,자민련은 전문위원 13명, 행정관 12명 등 총 25명의 당직자를 인수위에 파견했다. ▷전문위원◁ ◇위원장실 ▲최상주 국민회의 의원보좌관 ◇정책분과위 ▲이상환 국회전문위원 ▲백계문 여론조사부실장 ▲곽해곤 정책위전문위원(이상 국민회의) ▲정원조 사무부총장 ▲김세호 청년단장(이상 자민련) ◇통일·외교·안보분과위 ▲최성 대통령후보안보보좌역 ▲문일섭 국가전략기획회의위원(이상국민회의) ▲김무환 직능국장 ▲이민상 청년국장(이상 자민련) ◇정무분과위 ▲전병헌 선대위조정위원 ▲배기운 기조실부실장(이상 국민회의) ▲김광식 대변인실행정실장 ▲박경훈 홍보국장(이상 자민련) ◇경제1분과위 ▲김요왕 선대위종합부실장 ▲강재홍 교육문화특위부위원장(이상 국민회의) ▲김창호 서초갑지구당위원장 ▲전만수 정세분석실장(이상 자민련) ◇경제2분과위 ▲서철용 선대위행정부실장 ▲김봉기 전문위원(이상 국민회의) ▲김건중 정책자문위원 ▲추재엽 의원국장(이상 자민련) ◇사회·문화분과위 ▲정은성 대통령후보홍보보좌역 ▲윤형규 총재언론특보(이상 국민회의) ▲조중형 송파병지구당위원장 ▲조성돈 정책국장(이상 자민련) ◇행정실 ▲조재환 국민회의사무부총장 ▲안태전 자민련기획조정실장 ▷행정관◁ ◇위원장실 ▲신원철 국민회의의원보좌관 ◇정책분과위 ▲정태호 서울관악을지구당사무국장 ▲위성부 선대위전문위원 ▲최민식 노동복지특위전문위원(이상 국민회의) ▲김창현 기조국부국장 ▲김충구 전문위원(이상 자민련) ◇통일·외교·안보분과위 ▲윤두석 정세분석실전문위원 ▲최병남 안보특위정보담당위원(이상 국민회의) ▲김익겸 정세분석위원 ▲이병우 전문위원(이상 자민련) ◇정무분과위 ▲정재성 기조실기획1부장 ▲이희준 농수산전문위원 (이상 국민회의) ▲최경헌 총재보좌역 ▲이화영 여성국부국장(이상 자민련) ◇경제1분과위 ▲이돈승 노동특위부위원장 ▲김형 방송전략기획팀장(이상 국민회의)▲김정열 전문위원) ▲정승재 전문위원(이상 자민련)◇경제2분과위 ▲황승택 대통령후보정책보좌관 ▲이철승 기획본부위원(이상 국민회의) ▲최용식 전문위원 ▲김원덕 전문위원(이상 자민련)◇사회·문화분과위 ▲정홍식 관악구의원 ▲김명진 총재특보보좌역(이상 국민회의) ▲문도연 전문위원 ▲강현구 전문위원(이상 자민련)
  • 정부수립부터 오늘까지/연표로 본 대한민국 50년

    ◎36년만의 주권 회복… 6·25 상흔 딛고 산업화 대장정/시련속에 꽃피운 민주화운동… ‘문민시대’ 열며 개혁의 길로 ▷48년 정부수립 과정◁ ◇정치 ▲1월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방한 ▲5월10일 남한 총선거 실시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 ▲6월10일 국회의장에 이승만 박사 선출 ▲7월17일 제헌절 제정 ▲7월20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통령 이시영 선출 ◇사회·문화 ▲1월7일 의무교육제 실시 ▲4월3일 제주도 무장폭동 ▷제1공화국◁ ◆정치 ▲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미군정폐지 ▲ 〃 9월13일 행정권의 한국 정부 완전이양 ▲ 〃 11월30일 국군조직법 공포 ▲ 〃 12월9일 유엔총회에서 한국 승인 ▲50년 6월25일 6·25동란 발발 ◇경제 ▲50년 12월10일 한·미 경제원조협정 조인 ▲55년 8월8월 증권시장 개장 ◇사회·문화 ▲48년 10월20일 여수·순천 반란사건 ▲50년 6월1일 6년제 의무교육 실시 ◇체육 ▲50년 4월12일 한국,보스톤 마라톤대회 제패 ▷제2공화국◁ ◇정치 ▲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실시 ▲ 〃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성명 ▲ 〃 4월28일 과도정부 구성 ▲ 〃 8월12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 의원 선출 ▲ 〃 8월19일 초대 총리에 장면 의원 ▷제3공화국◁ ◇정치 ▲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설치 ▲ 〃 5월20일 장도영 중장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출범 ▲62년 4월2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대통령권한대행 ▲62년 12월26일 헌법개정(대통령책임제) ▲63년 12월7일 제3공화국 출범(박정희 대통령 취임) ▲70년 12월23일 정부종합청사 준공 ▲72년 10월17일 박대통령,국회해산 및 계엄선포 ▲ 〃 12월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첫 대의원 선거 ▲ 〃 12월27일 유신헌법 공포 ▲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3호 선포 ▲ 〃 1월15일 고위공직자 숙정 ▲ 〃 8월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경제 ▲62년 1월5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66년 1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회·문화 ▲68년 11월29일 서울시내 전차철거 ▲ 〃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72년 4월10일 문교부,지명의 로마식 표기공표 ◇통일·외교 ▲65년 1월8일 월남파병 결정 ▲68년 1월23일 미 푸에블로호 북한에 피납 ▲68년 11월2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출현 ▲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71년 3월27일 첫 미군 철수 ▲ 〃 9월20일 남북적십자사 이산가족찾기 첫 예비회담 개최(판문점) ▲ 〃 12월27일 국가보안법 국회 통과 ▲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 〃 8월30일 남북적,본회담 평양서 개막 ▲74년 1월30일 한·일 대륙붕협정 체결 ▲ 〃 8월15일 서울지하철 개통 ▷제4공화국◁ ◇정치·행정 ▲75년 2월1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찬성률 73.11%) ▲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 ▲ 〃 1월6일 최규하 대통령 취임 ◇사회·문화 ▲75년 6월30일 예비군 창설 ▲ 〃 9월2일 학도호국단 발단식 ▲ 〃 9월22일 민방위대 발대식 ▲76년 4월30일 매월 말일을 반상회로 지정 ▲ 〃 8월1일 양정모 몬트리올 올림픽 첫 금메달 획득 ▲77년 9월15일 한국등반대 에베레스트 정복 ▲78년 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 〃 4월21일 대한항공기 소련 무르만스크강제착륙 ▲ 〃 10월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경제 ▲76년 6월18일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77년 6월19일 국내 최초 고리원자력1호 발전기 점화 ▲ 〃 7월1일 부가가치세 실시 ◇통일 외교 ▲75년 4월29일 주월 한국대사관 철수 ▲76년 8월18일 북한군 판문점에서 집단도끼만행 사건 ▲77년 11월7일 한미연합사 사령부 발족 ▷제5공화국◁ ◇정치·행정 ▲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 〃 7월9일 2급이상 고위공무원 232명 숙정 ▲ 〃 7월15일 3급이하 공무원 4천760명 숙정 ▲ 〃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 ▲ 〃 8월2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대통령당선 ▲83년 1월1일 공직자 윤리법 발효 ▲ 〃 7월13일 입법예고제 첫 실시 ▲ 〃 10월8일 아웅산 테러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공직자 17명 사망 ▲87년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대통령직선제 선언 ◇경제 ▲80년 11월8일 경제활성화대책 발표 ▲81년 8월21일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85년 7월4일 제6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사회·문화 ▲80년 7월30일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 〃 8월2일 컬러TV 시판 ▲ 〃 11월1일 사회정화위원회 발족 ▲81년 9월30일 서울올림픽 개최확정 ▲82년 1월5일 야간통금 해제 ▲83년 3월2일 중고생 복장자율화 ▲ 〃 6월30일 KBS 이산가족찾기운동 ▲ 〃 9월1일 KAL기 격추 ▲86년 1월13일 대입논술고사 첫 실시 ▲88년 2월15일 예술의 전당 개관 ◇통일·외교 ▲84년 2월1일 팀스피리트 훈련개시 ▲85년 7월23일 남북 국회회담 첫 예비접촉 ▲ 〃 9월20일 남북고향방문단 서울·평양에 도착 ▲86년 1월20일 북한,남북회담 일방연기 ▲87년 11월29일 북한,KAL기 추락 ▷제6공화국◁ ◇정치·행정 ▲88년 9월17일 제24회 서울하계 올림픽 개최 ▲ 〃 11월23일 전두환 대통령 재산헌납 발표 ◇경제 ▲91년 11월12일 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발표 ◇사회·문화 ▲89년 1월1일 해외여행제한연령 완전철폐 ◇통일·외교 ▲90년 6월5일 한소 정상회담(샌프란시스코) ▲ 〃 9월4일 남북 첫 총리회담 개최(서울) ▲ 〃 10월16일 2차 남북총리회담(평양)▲ 〃 9월18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91년 12월18일 노태우 대통령 한반도 비핵화선언 ▲ 〃 12월31일 남북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92년 한중 수교합의 발표 ▷문민정부◁ ◇정치·행정 ▲93년 2월27일 김영삼 대통령 재산공개,국무위원 등의 재산공개 당부 ▲ 〃 8월9일 정부 공직자윤리위 가동 ▲95년 12월3일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5일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97년 12월18일 15대 대통령선거,김대중 후보 당선 ◇경제 ▲93년 5월26일 신경제 5개년 계획발표 ▲ 〃 8월20일 경부고속도로 차종 TGV 확정 ▲ 〃 12월13일 쌀시장개방 합의 ▲94년 5월16일 금융실명제 실시 ▲96년 12월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97년 12월3일 IMF자금 요청으로 ‘IMF시대’ 도래 ◇사회·문화 ▲93년 4월6일 종합유선방송 허가 발표 ▲ 〃 8월20일 제1차 대학수학 능력시험 실시 ▲94년 1월6일 대입 본고사 14년만에 부활 ▲ 〃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 ▲96년 5월31일 한·일 2002년 월드컵공동개최 결정 ◇통일·외교 ▲94년 7월2일 남북정상회담실무절차 합의 ▲95년 6월29일 대북 경수로지원 합의 ▲97년 8월19일 대북경수로 부지공사 착공
  • 해외파병 자위대 총기사용 추진/일 방위청

    ◎“본국민 구출때 피격 위험”… 논란 일듯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방위청은 자위대가 해외에서 자국민 구출활동을 벌일 때 안전확보를 위해 기관총등 소화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자위대법을 개정키로 했다고 아사히(조일)신문이 30일 보도했다. 이같은 방침은 자국민 구출을 위해 함정을 사용할 경우 긴 수송시간 때문에 도중에 습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방위청은 내년 정기국회에 자위대법 개정안을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소화기 사용은 자위대의 해외 무력행사로 받아 들여질 우려가 있어이를 둘러싼 정부,여당내 조정이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고 신문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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