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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구 기자의 정국 View] 노대통령 vs 이명박 그리고 정쟁의 사법화

    최근 이명박 캠프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맞짱구도’를 형성하는 것이 전방위적인 검증 국면을 피해나가는 수단으로 얼마나 유효한지를 검토했다고 한다.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여론조사기관을 비롯해 전문가들에게도 자문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후보쪽 인사들이 청와대를 각종 비리 의혹 유포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이 후보도 “음모에 청와대가 결탁한 조짐이 보인다.”며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것이 우연이 아니란 얘기다. 이 후보쪽의 전략적 선택은 결국 청와대 비서실과 이 후보쪽의 고소·맞고소전(戰)으로 비화하고 있다. 청와대의 고소·고발전은 지난 2003∼2004년 야당 정치인과 언론을 상대로 10건 남짓 이어졌다. 이후 뜸했던 청와대의 고소·고발전이 대선을 앞두고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건곤일척의 선거철을 맞아 정치가 또다시 법정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 네거티브 전략의 확대 재생산으로 ‘타협을 통한 합의’라는 정치 본연의 기능이 실종되고 있고, 대통령의 선거중립 논란이 선관위와 헌법재판소를 정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한나라당 내부에서 이 후보 관련 파일이 열린우리당쪽으로 흘러오고 있다. 과거 이 후보를 취재한 경험이 있는 언론인 출신 일부 의원은 나름대로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이 후보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제기한 열린우리당 김혁규 의원이나 정부 산하기관의 한반도 대운하 보고서 작성의 당위성을 강조한 한덕수 국무총리 등이 이 후보쪽의 타깃이 되고 있는 것도 정치권의 이전투구가 법적 다툼으로 이어지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는 정치권이 스스로 정치의 과도한 사법화를 부추기는 꼴이다. 대선 정책검증이나 대통령 탄핵, 행정수도 이전, 이라크 파병, 호주제 등 정치·사회적 핵심 의제를 정치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법적으로 시비를 가리려는 것은 한마디로 ‘정치의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다. 청와대 비서실이 지난 15일 이 후보쪽 박형준·진수희 대변인을 고소하면서 “청와대 내에서는 무책임한 음모론과 근거 없는 의혹 제기가 다반사인 우리 정치관행에서 청와대가 형사고소까지 하는 게 각박하지 않으냐는 의견도 있었다.(이 후보쪽이)청와대를 끌어들여 검증공방의 소나기를 피해 나가려는 정치적 의도에 말려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다.”고 밝힌 것도 이같은 고민을 드러낸 대목이다.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은 “청와대가 전략적 고려를 떠나 구태정치에 원칙적으로 대응하는 기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 후보로서는 비(非)한나라당 진영과 박근혜 후보의 공격을 비켜가면서 검증 국면을 ‘선방’할 수 있는 효과를 기대할 법하다.”면서 “하지만 청와대가 이번 싸움을 확대하려 하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청와대와 이 후보의 대립전 추이는 추가적인 네거티브 소재가 얼마나 파괴력을 지닐지에 달렸다는 분석이다. 이 후보가 청와대와 상징적인 대척점에 서는 게 당장 검증의 파고를 넘기에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겠지만, 비노(非盧)진영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는 포지티브 효과를 가져오긴 힘들 것이라는 시각도 많다. 김호기(사회학) 연세대 교수는 “정치의 사법화는 상대를 과도하게 비방하는 구태정치에서 비롯된다.”면서 “대선 국면에서 내용있는 정책담론은 고사하고 네거티브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ckpark@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1970년대 3대 저항가수 양병집(Ⅱ)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1970년대 3대 저항가수 양병집(Ⅱ)

    아메리칸 포크에 당시 한국 현실을 빗댄 가사로 대부분 채워져 있는 양병집의 첫 음반 ‘넋두리’의 금지 사유는 ‘가사와 창법 저속’이었다. 결국 ‘저주받은 걸작’이 되어버린 이 음반에는 대체 어떠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을까. 첫 곡은 우디 거슬리의 ‘뉴욕타운’을 개사한 ‘서울하늘’이다.‘내 안경이 졸도할만한 서울에 올라와 나도 한번 벌고 싶어 헤매 다녔으나 내 맘대로 되지 않더라.’는 푸념은 1970년대 이농(離農)의 드림과 좌절이다. 그럼에도 ‘노래나 한 번 불러 보자.’는 식의 자조 섞인 넋두리가 바로 1970년대 젊은이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과정에서 벽이 되어버린 문턱에서의 어쩔 수 없는 넋두리인 셈이다. 피터 폴 앤드 메리가 발표한 미국민요 ‘위프 포 제이미’를 전혀 다른 내용의 우리말로 개사한 ‘잃어버린 전설’은 또 어떤가.‘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참다, 참다 스러져간 꽃’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른바 최루탄 가득한 거리에서 이미 사라진 젊은이들을 애도하는 노래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동시에 사회 전반에 드리웠던 월남 파병문제, 그리고 산업화의 그늘을 떠올리게 한다. 전래가요 ‘타복네’는 어머니로부터 들으며 자란 노래다. 모친 김경패(金景貝)여사는 정태춘 곡인 ‘양단 몇 마름’의 2절 가사를 직접 만들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후에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들(88년)’ 음반을 통해 발표하는 ‘엄마엄마 아 엄마’와 독립군가였던 ‘부활가’ 등도 그의 모친이 유년시절에 귀동냥으로 배웠던 노래를 소중한 패물 건네듯 아들에게 물려준 유산들이다. 한때 새로운 미국국가로 추천되기도 했던 유명한 곡 ‘디스랜드 이즈 유어 랜드’는 분단국가, 한국의 젊은이 양병집에게로 와서 ‘너와 나의 땅’이 된다. 이 노래가 나올 즈음, 거리마다 마을마다 나붙은 구호는 온통 반공·방첩이었고 분골쇄신이었다.‘빨갱이’라는 용어가 그러했듯 온 국민 전체가 집단으로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때로 이남과 이북에서 제각기 불리는 노래는 똑같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으되 그 통일에 깊이 박혀 있던 서로간의 공통 인식은 전혀 달랐다. 때문에 ‘백두산에서 제주도까지, 너(이북)와 나(이남)의 땅’이라는 노랫말 주장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념 아래 금기시된 논조였고 언어였다. 음반은 ‘노래나 불러보자’는 ‘서울하늘’에서의 넋두리로 시작되어 풍자, 관조 등을 거친 뒤 ‘나는 다시 기타를 집어 들고 그 다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자조 섞인 말로 끝맺는다. 과거형의 시제를 사용했지만 노래만큼은 현재진행형이 되어주길 바라는, 그래서 그는 노래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다분히 포함시키고 있다.(계속)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파타·하마스 두쪽난 팔레스타인

    파타·하마스 두쪽난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이 1994년 자치정부 수립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됐다.BBC 등 외신들은 15일(이하 현지시간)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이 지난 3월 출범한 하마스와의 공동내각을 해산하고 빠른 시일 내에 조기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마스, 대통령궁 등 가자지구 장악 BBC는 15일 가자지구가 이미 이슬람 과격 무장단체 하마스의 손에 넘어갔다고 전했다. 하마스는 자체 보안군 6000여명과 1만 5000여명의 산하 무장조직 이제딘 알카삼 여단 조직원을 동원해 대통령궁을 포함한 가자지구내 주요 보안시설을 모두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팔레스타인은 하마스 지지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가자지구와 미국이 지원하는 파타당의 영향력이 큰 요르단강 서안지구로 나뉘어 있다. 전문가들은 아바스 수반의 이번 선언으로 하마스와 파타당 무장조직 사이의 충돌이 격화, 내전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실제 하마스 출신 팔레스타인 총리 이스마일 하니야는 “아바스의 어리석은 결정이 우리의 합의를 배신했다.”면서 아바스의 결정을 즉각 거부했다. 반면 하마스가 장악한 자치정부 내각을 신임하지 않았던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이번 아바스 수반의 결정이 ‘합법적인 권리’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美 개입 시사… 유엔도 파병안 검토 유엔도 아바스 수반의 요청에 따라 파병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기문 총장은 1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15개국 대사들과의 오찬에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다국적군을 파견하는 방안이 논의됐다며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공동내각 붕괴의 결정적인 구실을 제공한 것은 가자지구내의 무력 충돌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번 사태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압력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주류다. 공동내각을 구성한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미국은 하마스 고사 작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팔레스타인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유럽연합(EU)이 약속한 재정지원을 중단시키고, 이스라엘이 자치정부에 제공하기로 한 월 5500만달러를 동결시킨 재정압박 정책이다. ●美·이, 하마스 고사작전이 파국 불러 그 결과 팔레스타인 국민의 생활은 피폐해졌고 하마스 내각의 국정 추진 능력은 악화된 여론에 의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공동내각 출범시 하마스에 넘기기로 한 보안군에 대한 통제권을 아바스 수반이 거부한 것도 무력충돌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런 상태라 아바스 수반이 조기 총선을 강행한다면 팔레스타인의 분열은 기정사실화된다. 아울러 조기총선이 치러진다 하더라도 하마스가 점령한 가자지구가 참여하지 않는 ‘반쪽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파타당이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어 내각을 점령한다 해도 정당성 시비에 휘말려 내전의 빌미만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미국이나 이스라엘 또는 유엔이 정치적 혹은 군사적으로 관여할 경우 주변 이슬람 국가를 자극해 중동전쟁의 불씨를 되살리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구동회기자 kugija@seoul.co.kr
  • [사회플러스] “美, 자이툰 파병연장 요청”

    미국이 최근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부대의 주둔 연장을 요청해온 것으로 14일 확인됐다. 김장수 국방장관은 이날 오전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달 초 싱가포르에서 열린 한·미 양자대화 당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이 자이툰부대 주둔연장을 요청했느냐.”는 맹형규 한나라당 의원의 질문에 “요청이 있었다.”고 답했다. 자이툰부대 주둔문제와 관련, 미국측의 요구가 있었다고 국방부가 시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日 헌병정치 부활하나”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 육상자위대가 정당·시민단체·언론인 등을 광범위하게 사찰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은 “헌병 정치의 부활”,“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자위대의 즉각적인 사찰 중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7일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일본 공산당 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6일 기자회견에서 육상자위대 정보보전대가 지난 2004년 이라크 자위대 파견을 전후로 전국 41개 광역자치단체의 289개 단체와 개인 등의 동향을 집중적으로 수집·정리한 ‘내부 문건’을 입수해 폭로했다. 정보보전대는 육상자위대의 정보유출 방지를 전담하는 기관이다. ‘주의문서’로 분류된 문건은 정보자료와 이라크 자위대 파견에 대한 국내세력의 반대 동향 등 2건으로 A4 용지 166쪽 분량이다. 이라크 파견 기본계획에 대한 정부의 결정을 앞둔 2003년 11월부터 육상 자위대가 이라크에 도착한 2004년 2월까지 주간 단위로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시민단체나 노조, 정당, 종교 단체, 지방의회 등의 반발을 비롯해 언론의 취재활동 등을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이라크 파병을 반대한 고교생들의 집회나 영화감독의 움직임도 들어 있다. 시민·노동운동의 경우 민주당계·공산당계·사민당계·신좌익 등으로 나눠 집회나 시위, 전단지 배포 등의 일시·장소·상황뿐만 아니라 참가자의 사진, 개인이 보낸 엽서의 내용 등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또 ‘정보자료’에는 이라크 파병 이외에 ‘연금 개악 반대,‘소비세 증세 반대’,‘의료비 부담 증가에 대한 재검토’ 등 시민의 생활과 직결된 사안에 대한 시민단체 등의 동향도 파악돼 있다. 시이 위원장은 “자위대가 시민단체나 언론인 등을 감시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는 위헌”이라면서 “전쟁 전 또는 전쟁 중(군국주의 시대)의 ‘헌병 정치’를 부활시키려는 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며 자위대의 사찰 중지를 요구했다. 앞으로 국회 심의를 통해 정부의 책임도 따지기로 했다. 이에 대해 스즈키 세이지 관방 부장관은 “법률에 따라 이뤄지는 조사 활동이나 정보 수집”이라고 주장했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방위성이 자위대원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업무 범위 안에서의 활동이라고 하지만 잊어서는 안될 점은 무력을 가진 실력 조직은 치안기관으로 전환되기 쉽다는 역사적 교훈”이라면서 “정부는 (자위대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상세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hkpark@seoul.co.kr
  • [사법연수원 24시] (중) 변화의 바람 부는 연수원

    [사법연수원 24시] (중) 변화의 바람 부는 연수원

    5일 찾은 경기도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연수원생들을 만나리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강의실과 도서관에는 야구모자에 면 티셔츠,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의 연수원생들이 대부분이라 연수원이라기보다는 대학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복장 자유화에 짧은치마·청바지 유행 “요새 여성 연수원생들의 치마가 자꾸 짧아지는 통에 부장 판·검사까지 지낸 점잖은 교수님들이 꾸짖지도 못하고 얼굴만 벌개지는 경우가 있어요.” 연수원에서 만난 2년차 남성 연수원생의 말이다. 연수원생들의 복장이 완전 자유화된 것은 지난해. 원래는 정장 차림이 원칙이었지만, 지나친 규제라는 비판에 자유화된 것이다. 그는 “연수원 과정이 시작된 3월까지는 눈치를 봐가면서 정장을 입지만,4월로 접어들면서 대부분 청바지, 면바지로 바꿔 입었다.”고 말했다. 프린트 티셔츠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면 스커트를 입은 여성 연수원생의 모습은 연수원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대한민국 최고의 공부벌레’라는 딱딱한 이미지의 사법연수원생들에게 이같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윤성식 교수는 “연수원생들이 너무 대학생 차림을 하고 다녀서 제발 공무원증이라도 패용하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라며 웃었다. ●남다른 승부욕…체육대회 때는 부상자도 속출 연수원에 가까운 지하철 3호선 역이 마두역. 그래서 붙여진 사법연수원의 별칭이 ‘마두고등학교’다. 고3이나 마찬가지로 빡빡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데다 담임선생님에 해당되는 지도교수가 정해져 있다.4월이면 체육대회도 갖고,2학기에는 수학여행과 엠티도 떠난다. 이윤식 기획총괄교수는 “공부에 다른 활동까지 하려면 스트레스도 받겠지만 사회 경험이 없는 연수원생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예비 사회인으로서 소양을 쌓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체육대회에서는 연수원생들의 남다른 승부욕 때문에 부상자가 나와 휴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외교통상부에 근무중인 이지형(32·여·34기) 변호사는 “축구 시합을 하다 사람에 깔려 갈비뼈가 부러진 동기생도 있었다.”면서 “남성 연수원생들은 같은 반 여성 연수원생들이 발야구에서 지는 걸 참지 못해 응원석에서 훌리건처럼 흥분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상과 시비가 잦아 올해부터는 국제공인심판제가 도입됐을 정도다. 축구·농구·발야구 등 구기종목 예선경기는 원래 한 달 동안 토너먼트로 진행됐지만 일부 팀이 “그 시간에 공부나 더하자.”면서 일찌감치 일부러 탈락하는 현상이 빚어지자 올해부터 리그전으로 바뀌었다. 연수원생 1000명 시대이지만, 교수와 연수원생들의 관계는 전보다 훨씬 친밀해졌다고 한다. 이윤식 교수는 “분위기가 자유로워지면서 교수를 스승이라기보다는 법조계 선배나 멘토(조언자)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연수원생이 많아졌다.”면서 “많은 연수원생 사이에서 자기 존재감을 느끼기가 어렵고, 장래에 대한 불안도 커지면서 지도교수에게 의지하려는 분위기도 많다.”고 말했다. ●5급 공무원…월급은 150만원 연수원생들은 5급 공무원 신분이다.15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아 자치회비·동창회비·세금 등을 떼고 나면 실제 손에 쥐는 것은 100만원 남짓. 연수원생은 기본적으로 국가공무원법의 적용을 받으며, 품위손상 행위 등으로 연수원 규정을 어기면 징계대상이다. 수업에 빠지면 결석이 아니라 결근 처리가 되고, 근무태도 평정 점수도 깎인다.50점 만점의 근무태도 평정 점수에서 무단 결근 한 번에 2점, 무단 지각·조퇴는 1점씩 감점된다. 지난 2005년 수료한 연수원 34기 출신의 변호사는 “2003년 노동법학회 동기 회원들이 연수원생 500명으로부터 이라크 파병 반대 서명을 받아 청와대에 제출한 적이 있다.”면서 “공무원의 집단행동 금지 규정 위반 등으로 1명이 3개월 감봉의 징계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지난 2003년에는 휴대전화 통화로 알게 된 여성의 나체사진을 찍은 뒤 협박, 금품 등을 빼앗은 혐의로 한 연수원생이 구속됐다. 연수원 사상 최초의 파면이다. 윤성식 교수는 “연수원생들이 월급을 받으며 공부하는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도 많다.”고 말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연수원생의 ‘사랑이야기’ “저희 정보업체에 괜찮은 신부감이 많은데 관심 없으세요?” “전 결혼했는데요.” “결혼 생활은 행복하세요?저희가 재혼도 전문인데요.” 실제로 한 연수원생이 결혼정보업체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이다. 예전처럼 ‘열쇠 3개’를 들먹이면서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뚜쟁이’는 거의 없지만, 사법연수원생은 여전히 제1의 신랑감·신부감이다. 수백만원씩 하는 일류 결혼정보업체 특별 회원 가입비도 연수원생들에게는 몇십만원 수준으로 대폭 할인된다. 연수원생들의 이름과 사진, 연락처 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연수원생 수첩이 나오는 날이면 자치회 사무실에 전화가 빗발친다. 맞선 시장에서는 수첩이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서 연수원생 1인당 수첩 1부의 원칙이 세워져 있지만, 수첩은 어떻게든 유출되고야 만다고 한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연수원생들이 맞선에 당당하게 나가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맞선 자리에서 상대방이 연수원 성적까지 꼼꼼하게 따지고 드는 경우가 많아 맞선 자리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한다. 변호사로 활동 중인 한 35기 수료생은 “보통 1학기가 끝나면 벌써 대형 로펌 등 쟁쟁한 곳으로 갈 사람이 정해진다.”면서 “그 시점에서 진로가 확정되지 않거나 성적이 상위권이 아니면 맞선 시장에서 등급도 내려간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최근 들어 연수원 커플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새로운 현상이다. 반·조 모임을 하면서 늘상 붙어지내는 데다 사시 합격자 1000명 시대의 치열한 취업전선을 함께 헤쳐나가는 입장에서 서로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 헤어지기라도 하면 남은 연수원 생활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커플 선정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치회 이정원 사무국장은 “연수원 커플을 두고 ‘총알은 한 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면서 “보통 1학기는 사귀어도 절대 티내지 않는 커플 잠복기이고,2학기가 되면 공식 커플이 서서히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전했다.‘총알은 한 방’이란 표현은 커플이 됐다 헤어지기라도 하면 남은 연수원 기간동안 여간 불편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편 한 결혼정보회사가 올해 초 미혼 남녀들이 선호하는 배우자 직업을 조사한 결과, 남성의 경우에는 1위가 판사·고위공무원·해외스포츠선수로 나타났고 검사는 4위, 변호사는 14위였다. 여성의 경우에는 판사 8위, 검사 14위, 변호사 15위였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자치회’ 이야기 사법연수원에서는 기수별로 ‘자치회’가 구성된다. 자치회란 후생 복리 문제 등을 다루는 학생회 성격의 자율적인 모임이다. 체육대회, 수련회 등 연수원생 친목 도모를 위한 행사를 주관하고, 학회활동 지원 및 학회 세미나 자료집 발간도 자치회의 역할이다. 연수원생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자치회 몫이다. 자치회 회장·부회장 등의 간부진은 나이순으로 정해진다. 최고령자가 회장을 맡고 다음 고령자가 부회장을 맡는 식이다. 연수원의 전통이다. 조·반장 등 다른 팀 리더도 나이순으로 뽑는다. 그러다 보니 자치회 등의 간부는 나이만큼 늦어진 이색 경력의 ‘늦깎이 예비 변호사’들이 많다. 올해 연수원에 발을 디딘 38기 자치회장은 최고령자인 김재용(47)씨. 그는 전남대 80학번으로 대학 1학년때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겪은 뒤 노동운동에 투신, 인천에서 위장취업을 했다가 구속됐다. 조원룡(46) 부회장은 한국해양대 81학번으로 소위 임관까지 두 달을 남겨놓고 반강제로 학교를 자퇴해야 했다. 서울대 학생회에서 활동하던 형이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가 내려진 것. 조 부회장은 일반 사병으로 군생활을 한 뒤에도 대학 중퇴의 학력으로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포장마차에서부터 유흥업소 종업원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대입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게 됐고, 이를 계기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봐서 서울대 법대 99학번으로 입학했다. 박성구(39) 기획실장은 지상파 방송사 PD출신이고, 정영선(36) 언론매체실장은 6년 동안 변리사로 일하다 진로를 바꿔 1년 반 만에 사법시험을 통과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사시에 합격한 이들은 임관보다는 경력과 관련있는 분야에서 일하는 쪽으로 이미 진로의 가닥이 잡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유있게 자치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사회플러스] 자이툰 오중위 자살 결론

    지난달 이라크 자이툰부대 영내에서 숨진 채 발견된 오모(27) 중위는 해외 파병지라는 특수 환경에서 업무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국방부가 4일 밝혔다. 하지만 유족들은 조사결과를 수긍할 수 없다며 강력 반발하고 있어 사건의 실체를 둘러싼 공방은 법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외부 침입과 격투 흔적 등 타살로 볼만한 증거가 없었다.”면서 “시신 부검과 총기 감정 결과 등을 종합해 오 중위가 자신의 총을 턱에 대고 실탄을 발사해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 [막오른 美대선 경쟁] (상) 민주당 후보 뉴햄프셔 토론회

    [막오른 美대선 경쟁] (상) 민주당 후보 뉴햄프셔 토론회

    |맨체스터(미 뉴햄프셔 주) 이도운특파원|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합동 토론회에서 ‘기선’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뉴햄프셔 주 세인트 안셀름 대학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클린턴 의원은 이라크전과 의료보험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조리’있고, 똑부러진 답변으로 8명의 후보 가운데 청중으로부터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 토론 직후 CNN 방송이 빌 슈나이더, 제임스 카빌,J C 와츠 등 저명한 정치 전략가 3명에게 “오늘의 승자가 누구냐.”고 문의한 결과 2명이 “힐러리”라고 답변했다. 한 명은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존 에드워즈 전 상원의원이 공동 1위라고 답변했다. 이와 함께 상원 외교위원장인 조지프 바이든 의원은 현안에 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진 후보로 평가됐다. 반면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는 예상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후보로 평가됐다. 클린턴 의원은 CNN이 이날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민주당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클린턴 의원의 지지율은 38%로 오바마 의원(24%)을 훨씬 앞섰다. 에드워즈 전 의원은 12%를 기록했다. CNN과 뉴햄프셔의 현지방송 WMUR, 현지신문인 ‘뉴햄프셔 유니온 리더’가 공동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민주당 후보들은 이라크전과 건강보험, 세금 문제 등을 놓고 격한 토론을 벌였다. 특히 클린턴·오바마 두 선두권 후보에 대한 다른 후보들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에드워즈 전 의원은 이들 두 후보가 조지 부시 대통령에 맞서 이라크 주둔 미군을 철군시키는 데 너무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공격했다. 그는 “지난달 철군 일정이 없이 이라크전 재원을 대주는 법안에 대해 다른 상원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여 확실하게 반대했는데,‘다른 의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두 후보를 향해 직격탄을 퍼부었다. 클린턴 의원은 이같은 공세에 조목조목 반박한 뒤 ‘9·11 테러’ 이후 현 정부의 대 테러전을 “정치적 선전에 불과한 것”이라고 규정지었다. 클린턴 의원은 “뉴욕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서 소규모 테러주의자들이 우리나라에 끼칠 끔찍한 해악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바로 나”라며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비해 더 안전해졌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의원은 에드워즈 전 의원이 지난 2002년 이라크 파병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과 관련,“이 문제에 대해 올바른 지도력을 보여주는 데 4년 반이나 늦었다.”고 공격했다. 에드워즈 전 의원은 “나의 판단이 틀렸었다.”고 시인한 뒤 클린턴 의원에게 당시 투표와 관련해 입장을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클린턴 의원은 “매우 진지하게 투표했다.”고 말했을 뿐 당시 투표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클린턴 의원은 이날 키가 큰 남자 후보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연단에 발받침을 놓고 올라서 토론을 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이라크전과 건강보험, 이민개혁, 고유가 및 대체에너지 개발 등 주요 정책과 관련된 질문 말고도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어떻게 활용하겠는가 ▲군대 내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정책은 무엇인가 ▲영어가 미국의 공식언어가 돼야 하는가 등의 색다른 질문도 제기됐다. dawn@seoul.co.kr ■ “북핵 해법은 외교뿐” |맨체스터 이도운특파원|“북한 핵 문제의 해법은 외교” 미국 민주당의 대통령 경선 후보들은 집권하면 북한 핵 문제를 북한 및 주변국과의 협상을 통해 외교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입을 모았다.3일 뉴햄프셔 주 세인트 안셀름 대학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 후보 합동 토론회에서는 2시간 동안 ‘코리아’라는 단어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한반도 문제가 미 대외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토론회가 끝난 뒤 각 후보와 후보 캠프의 전략가들을 직접 만나 한반도 정책을 묻고 답변을 들었다. ●조지프 바이든 후보 조지 부시 대통령은 지난 6년간 ‘정권 교체(Regime Change)´ 정책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 한마디로 미친 아이디어였다. 그 때문에 우리가 정말 원하지 않는 것, 말하자면 북한이 더 많은 핵무기를 갖게 되는 상황이 왔다. 북한은 핵무기 제조와 핵 물질 생산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그럴 경우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주변국들과 협력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기본적으로 미국과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본다. ●빌 리처드슨 후보 북한 핵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현재 (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동결된 자금 2500만 달러 문제가 걸려 있지만 곧 해결되고 북한 핵 시설도 동결될 것으로 본다. 최근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핵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북한이 한국전쟁 당시 실종된 미군의 유해 6구를 반환한 것도 매우 좋은 신호다. ●데니스 쿠치니치 후보 (쿠치니치 후보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정확한 발음으로 ‘안녕하십니까.’라고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한 정권은 주민을 먹여살리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미국이 먼저 북한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북한에 전해야 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북한이 세계의 모든 나라로부터 존중받기를 원하는 것을 안다.” ●마이크 그라벨 후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한과 협상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이 취하고 있는 정책이 올바른 것이다. 국경을 넘어 북한에 손을 내밀고, 경제적으로 도와야 한다. 한국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미국이 막아서는 안 된다. 미국의 경우 클린턴 정부 시절의 정책이 옳았다. ●엘리자베스 에드워즈(존 에드워즈 후보 부인) 현재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실망이 크다. 다만 최근 들어 북핵 문제에 진전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의 일대일 협상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시점이 너무 늦었다. 지난 몇년 사이에 불필요하게 북한으로 하여금 플루토늄을 더 많이 보유하도록 만든 것이다. 해결책은 외교적 방법이다. ●데이비드 악셀로드(버락 오바마 후보 수석 미디어 전략가) 부시 대통령이 지금까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다. 현재의 상황을 반전시켜야만 한다. 현재 진행중인 6자회담에서 좀더 성과가 나와야 한다.6자회담을 통한 ‘인게이지먼트(포용) 정책’의 수행이 너무 늦게 시작됐다. 일단 부시 대통령의 임기말까지 북핵 문제와 관련해 일정한 진전이 있기를 희망한다. ●존 라스 하원의원(크리스 도드 후보 캠프) 미국의 기본적인 대외전략은 외교, 억지, 봉쇄라고 본다. 북한 핵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돼야 한다. 북한과 일대일 협상을 해야 한다. 군사적 해결방식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일방적인, 예방적 선제공격식의 군사적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토드 후보는 케네디 전 대통령이 말한 전략을 원용하고 있다.“두려움 때문에 협상을 해서는 안 되지만 협상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마크 펜(힐러리 클린턴 후보 캠프 전략가) (8명의 후보 캠프 가운데 가장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일단 북한 핵 문제는 오늘 토론의 이슈가 되지 않았다. 물론 북핵과 관련한 정책도 만들고 있지만 아직은 밝히지 않겠다. dawn@seoul.co.kr
  •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7) 한국민주주의 운동 토론회-지상중계(상)

    [6월 항쟁 20주년 ‘그날의 함성’ 그 이후] (7) 한국민주주의 운동 토론회-지상중계(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는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해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학술단체협의회와 공동으로 4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의미, 평가, 전망’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정해구(성공회대)·김호기(연세대)·김세균(서울대)·조희연(성공회대) 교수 등이 한국 민주화 운동 및 6월 민주항쟁의 의미와 평가, 민주화·세계화 이후 한국 시민운동, 민중운동, 국제연대운동의 전개와 평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으며, 에드워드 베이커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자문위원과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기조 발표했다.5일에는 홀거 하이데 독일 브레멘대 명예교수의 기조발표에 이어 강명세(세종연구소)·김종서(배재대), 박경(목원대)·서이종(서울대) 교수 등이 정치와 제도, 인권의 권리(평화, 인권, 생존), 민주화의 주체와 민주화의 길, 소통과 미래(미디어와 사상) 등 분야별 토론을 진행한다.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비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수구 정치세력들의 가슴에 안겨 권력의 단맛을 보았다는 점에서 비롯됐다. 그들이 실현했다고 하는 그 민주주의는 이미 낡은 것이 되어 ‘시대의 징표’를 담지 못하고 있다.” 이광일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4일 ‘6월 항쟁, 더 많은 민주주의의 좌절’이라는 발제문에서 1987년 6월 항쟁 이후 등장한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보수화 자유주의세력 민주주의 걸림돌 이 교수는 “6·29선언으로 직선제를 얻어낸 자유주의 정치세력에게 ‘더 많은 민주주의’는 더 이상 관심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전향, 자본과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어 “6월 항쟁의 현재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3차례의 집권을 거치면서 보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이라면서 “이들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행동할 때만이 6월 항쟁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6월 항쟁을 지도했다는 국민운동본부조차도 자유주의적 제도권 야당이 직접 참여했고, 그들과 연결된 종교계, 그리고 재야의 ‘비판적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했으며 민중운동세력은 지배적인 위상을 점하지 못한 채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우파와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좌파로 분류했다. 우파는 지주 계급에 기반을 둔 야당세력으로 공정선거를 통한 정부와 의회 구성이 목표이며, 좌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소외된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또다른 축으로 삼는 세력이다. 좌파는 재야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진보 아니다” 토론자로 나선 박명림 연세대 정치학과 교수는 이 교수의 주장에 대해 “6월 항쟁 전후 민주화 세력의 분화가 과연 이념적 분화인지 의문이 든다.”면서 “당시 상황을 면밀히 보면 이념적인 분화는 정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토론자인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도 “이 교수는 과도하게 정치 사회 중심으로만 6월 항쟁을 분석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특히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면 보수이고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면 진보라는 도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 “한국경제의 개방문제와 신자유주의는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정 교수와 박 교수의 비판은 자유주의에 대한 낡은 정치관에 기반하고 있다.”며 재반박했다. 그는 “신자유주의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이라면서 “다만 지구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노무현 정부와 범여권 등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진보가 아니다.”면서 “그들과 한나라당의 갈등은 신자유주의 대연정으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일 뿐이며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의견이 수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시민운동과 현실 괴리…민중 삶 개선 못해” 6월 항쟁 기념 토론회에서는 시민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발표문 두 편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배성인 한신대 교수(정치학)는 ‘신자유주의 시대, 변화하지 못한 시민운동의 한계와 과제’라는 발제에서 “시민운동 위기의 핵심은 ‘시민 없는 시민운동’ 혹은 ‘정치적 중립성’ 같은 문제가 아니라 시민운동의 운동노선과 현실의 괴리가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권력과 자본에서 자유롭게, 사회 공공성을 올바로 인식하며, 풀뿌리 운동에 주목하고, 급진적 운동으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시민운동의 과제로 꼽았다. 배 교수는 최근 시민운동의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는 “홍보적 시민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일부 환경단체와 몇몇 유명 단체는 홍보 효과를 통한 기업 후원 기금을 마련해 자체 사옥을 확보하고 재단을 만드는 등 사실상 시민사회에서 귀족단체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제 영역에서 재벌 개혁과 투명성 강화, 소액주주 운동을 했지만 이는 재벌의 자산을 초국적 자본의 먹잇감으로 돌려놓았다.”면서 “17대 총선에서는 양극화나 이라크 파병이 아니라 부패 청산과 탄핵 찬성을 기준으로 낙선운동을 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발제자인 김정훈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시민운동은 여전히 민주화의 동력인가.’라는 주제에서 정책대응 능력을 높일 것을 시민운동 진영에 주문했다. 그는 “한국 사회운동세력은 정책역량을 너무나 무시해왔다.”면서 “정책을 무시한 결과 진보학계는 거의 세대 단절 상태에 이르렀고 사회 전반은 보수화됐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는 “시민사회가 보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담론 전략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물적 토대를 갖춰야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와 함께 “사회운동이 분화되는 상황에서 사회운동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정책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역량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방위비 전용 논란’ 美기지 이전 차질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미 2사단 이전 비용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한국 내 논란에 대해 “주한미군 기지이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우려를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게이츠 장관은 또 올해 말로 철군이 예정된 아프가니스탄의 동의·다산 부대와 관련, 한국측의 추가적인 기여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츠 장관은 2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김장수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이런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3일 “게이츠 장관은 회담에서 한국측 방위비 분담금을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사용하지 말라는 한국 국회의 견해를 들었다면서 이는 주한미군 기지 이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이에 김 장관은 “(이미 분담금 협상이 끝난) 2007∼2008년 방위비를 기지이전에 사용하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2009년 이후) 외교채널을 통한 새로운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 나가자.”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시민단체 등에서는 2사단 이전은 주한미군의 희망에 따라 이뤄지는 만큼 이전에 따른 비용은 한국측이 부담한 방위비 분담금이 아닌 미측 자체 비용으로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와 관련, 한국과 미국은 5일 서울에서 한국의 주한미군 주둔비용 분담액 산정 및 운용 방식의 개선 방안을 협의한다. 게이츠 장관은 또 올해 말 철수가 예정된 아프가니스탄 동의·다산 부대에 대해 “(내가) 전 세계에 다니며 아프간 문제를 도와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며 “아프간의 중요성을 감안, 한국이 더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사실상 파병 연장을 기대했다. 김 장관은 “동의·다산 부대는 국회 의결에 따라 올해 철수할 예정”이라면서도 “아프간의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며 지방재건팀(PRT) 등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PRT는 지방정부의 능력개발과 재건, 경제 발전을 위해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미 국무부 주도의 다국적 종합 민수용 사업팀이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사설] 자이툰 파병연장 더는 안 된다

    자이툰부대 파병연장안이 또다시 제시됐다. 국방부 산하 국방연구원이 지난 23일 “자이툰 부대의 철수를 현시점에서 확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국방부에 냈다는 것이다. 자이툰부대는 올 연말 임무를 종결키로 돼 있다. 군은 이에 앞서 7월까지 임무종결 계획서를 국회에 내기로 예정돼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 더 이상의 파병 연장은 안 된다. 이런저런 명분으로 연장을 시도할 일이 아니라는 게 우리의 분명한 입장이다. 정부가 국방연구원의 파병연장 제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보고를 받은 국방부 장관이 긍정평가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우려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보고서는 한국 기업이 이라크에서 더 많은 비즈니스 활동을 벌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파병을 이미 2차례나 연장한 상황이다. 그동안 우리 기업이 파병연장 효과를 얼마나 봤는지 의심스럽다. 특히 김선일씨 사망이후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기업진출을 사실상 포기해 왔던 상황이 아닌가. 이제 와서 기업진출 운운하는 것은 그동안의 실정을 모르거나, 국민들을 현혹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석유 채굴권 확보를 위해서라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확보하지 못한 채굴권을 따내겠다는 발상도 그렇고, 설령 그런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파병연장과 맞바꿀 사안은 아니다. 우리 부대는 쿠르드 지역에서 그동안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현지 자치정부와 주민들로부터도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충분한 역할을 했고, 이제 예정대로 철군하는 게 순리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연장을 한다거나, 현지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일 상황도 아니다. 또 다른 논란과 갈등만 부를 뿐이다. 파병연장 논의는 더 이상 없길 바란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21)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Ⅲ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것은, 폐모논의와 궁궐 건설 문제 등 내정(內政)의 현안들을 해결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명의 압력과 내부의 채근에 밀려 군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1619년(광해군 11) 2월,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1만 5000 가까운 병력이었다. 광해군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했던 심하 전역(深河戰役)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이 전역을 보통 사르후(薩爾滸) 전투라고 부른다. 명군과 후금군 주력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戰場)이 사르후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명군은 거의 궤멸될 정도로 참패했고 두 나라의 향후 운명도 확연히 갈렸다. 사르후 전투는 명청교체(明淸交替)의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광해군, 강홍립을 발탁하다 광해군은 심하 전역의 향방에 대해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명군이 동북(東北)의 오지인 허투알라(赫圖阿拉)까지 장거리 원정에 나서는 것의 위험성을 간파했다. 실제로 명군 가운데는 내륙 지역인 쓰촨(四川)에서 출발하여 산하이관(山海關)을 통과하고, 랴오양(遼陽)과 선양(瀋陽)을 거쳐 허투알라에 이르는 수천㎞의 거리를 행군해야 하는 병력도 있었다. 장거리 행군에 지친 명군이, 가만히 앉아 대비할 수 있는 후금군을 상대하기란 버거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또한 명군 지휘부가 조선군을 몹시 닦달할 것이란 사실도 예측했다. 그가 조선 원정군의 도원수(都元帥)로 문관 출신의 강홍립(姜弘立)을 임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강홍립은 어전통사(御前通事:왕의 직속 통역관)를 역임할 정도로 중국어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명의 강요에 밀려 ‘내키지 않는’ 출병을 단행한 이상,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적어도 명군 지휘부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작전권을 틀어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광해군은, 출정하기 직전 강홍립에게 지침을 주었다.‘그대는 조선군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있으니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평안도에 머물 때부터 닦달을 시작했다. 총사령관이었던 경략(經略) 양호(楊鎬)는 강홍립에게 조선군 화포수(火砲手)부터 속히 도강(渡江)시키라고 요구했다. 조선군 부대 가운데 명군 지휘부가 가장 크게 탐냈던 병력이 바로 화기수였기 때문이다. 강홍립은 양호의 명령대로 화기수 5000명을 미리 들여보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명군의 우익남로군(右翼南路軍) 사령관인 유정(劉綎)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강홍립을 질책했다. 명군 지휘부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라는 자신의 지침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의 질책은 당연했다.3월4일, 유정 휘하의 명군이 후금군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궤멸될 때 배속된 조선군도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낯선 땅에서의 행군, 또 행군 평안도 창성(昌城)을 출발한 조선군 본진은 1619년 2월23일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좌영(左營), 우영(右營), 중영(中營) 등 3개 진영으로 구성되었다. 조선군 가운데는 항왜(降倭)들도 참전했다. 항왜는 임진왜란 당시 투항했던 일본군 출신의 병사들을 말한다. 그들은 조총을 잘 다루고, 검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용맹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정예 병력이었다. 압록강을 건넌 후 허투알라에 이르는 조선군의 행군로에는 산악과 강이 널려 있었다. 날씨 또한 좋지 않았다. 양마전(亮馬佃)이란 곳에 도착했던 25일에는 눈이 내리고 강풍이 불어 날씨가 몹시 추웠다. 병졸 가운데 얼어죽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무엇보다 문제는 군량 운반을 맡은 수송 부대가 본진을 제 때 따라오지 못하는 점이었다. 2월26일, 진자두(榛子頭)라는 곳에 이르러 강홍립은 유정을 만났다. 강홍립은 유정에게, 군량 운반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사정을 설명하고, 조선군의 행군을 잠시 늦춰 달라고 요청했다. 유정은 거부했다.‘약속한 시간은 정해져 있고 군율은 지엄한 것이기에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조선군은 할 수 없이 계속 걸었다. 2월27일, 진자두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배동갈령(拜東葛嶺) 부근에 도착했을 때 조선군 3영의 장졸들은 모두 휴대했던 군량이 떨어졌다. 보병들 가운데는 행군에 지쳐 정강이와 발 뒤꿈치에 유혈이 낭자한 병사들이 많았다. 계속 행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명군 ‘고문관’ 우승은(于承恩)이 달려왔다. 그는 강홍립에게 칼을 빼서 휘두르며 ‘조선군이 뒤처지면 자신의 목이 날아간다.’고 소리쳤다. 당시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이 군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망하려 하기 때문에 일부러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유격 교일기(喬一琦)와 우승은을 고문관 겸 감시자로 붙여 강홍립을 계속 몰아붙였다. 3월2일, 허기와 명군 지휘부의 채근에 시달린 끝에 조선군은 심하에 도착했다. 허투알라까지는 6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조선군과 명군은 약 600명의 후금군 기병과 조우한다. 적병은 높은 산 쪽에서 화살을 쏘아댔지만 조선군이 조총으로 응사하여 물리쳤다. 서울 포수 이성룡(李成龍)은 적장을 쏘아 맞혔고, 병사 한명생(韓明生)은 그의 목을 베어왔다. 조명연합군이 최초로 거둔 작은 승리였다.‘만주실록’에 보면 ‘토부(托保)와 에르나(額爾納)가 이끄는 병력이 유정에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성룡이 사살한 장수는 둘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강홍립의 투항 작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3월3일 조선군은 다시 ‘굶주림과의 전투’를 치러야 했다. 강홍립은 병사들을 풀어 주변의 후금인 부락을 뒤져 숨겨진 양곡을 찾아냈다. 그것을 돌로 빻아 죽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먹게 했다. 3월4일 아침, 조선군은 계속 행군하여 부차(富車)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세 발의 대포 소리를 듣는다. 이윽고 교일기 등이 강홍립에게 달려와 유정이 이끄는 명군 본진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난 밤, 무리하게 행군을 감행하다가 귀영가(貴盈哥)와 홍타이지,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후금군의 매복, 습격에 휘말린 것이었다. 명군의 궤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선군도 후금군의 공격에 휘말렸다. 좌영과 우영이 먼저 후금군 철기(鐵騎)의 공격을 받았다. 조선군은 조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두 번 째 탄환을 장전하기 전에 철기는 두 영을 유린했다. 선천(宣川) 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雲山) 군수 이계종(李繼宗), 영유(永柔) 현령 이유길(李有吉) 등이 전사하고 두 영은 무너졌다. 이민환(李民 )의 ‘책중일록(柵中日錄)’은 ‘강홍립이 거느리던 중영은 좌우영과 불과 1000보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달려가 구원할 겨를도 없이 두 영이 무너졌다.’고 당시 상황을 적었다. 후금군 철기의 가공할 파괴력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후금군의 포위 속에서 중영의 조선군 지휘부에서는 ‘마지막 결전을 치르자.’는 논의가 나왔지만 병사들 가운데는 아무도 움직이려는 자가 없었다. 눈앞에서 두 영이 무너지는 참상을 목도한 데다,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던 것이다. 싸울 의지가 없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강홍립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투항한다. 그런데 투항 상황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상당히 다르다.‘광해군일기’와 ‘책중일록’은, 강홍립이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후금군이 먼저 통사를 보내와 항복을 종용했다고 적었다.‘만주실록’은, 후금군이 조선군 진영을 공격하려 할 때, 강홍립이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다고 적었다. 양자의 기록에는 분명 각각의 주관적 서술과 윤색이 가해졌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적었는지를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강홍립이 남은 생령(生靈)들을 살리기 위해 항복을 선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3월5일 허투알라로 들어가 누르하치에게 항복했다. 곧 이어 항복 소식이 서울로 날아들었다. 조야를 막론하고 사대부들은 ‘매국노’ 강홍립의 가족들을 수금하라고 아우성이었다. 광해군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홍립의 항복과 함께 그의 정치적 운명도 조락(凋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종교건축 이야기] (29)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종교건축 이야기] (29)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한국정교회. 신교인지, 구교인지, 아니 한국에선 그 존재마저도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 하지만 엄연히 전국에 2000명의 세례교인이 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교회다. 서울을 비롯해 인천 부산 전주 춘천 양구 용미리 등 7개의 정교회 성당에서 매일 하루 두번씩 예배가 열리며 주말엔 어김없이 성찬예배가 진행된다. 이 가운데 서울 마포경찰서 맞은 편 언덕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마포구 아현1동 424-1)은 한국정교회의 총본산격으로, 한국에선 처음 세워진 비잔틴 양식의 독특한 공간이다. “하나인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정교회 교인들은 신앙의 신조 ‘니케아 신경’을 외울 때 이렇게 말한다.‘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오순절에 거룩한 사도들에 의해 세상에 널리 전파되었고 위대한 교부들에 의해 조직되고 지역공의회와 세계 공의회의 보호를 받은 교회’.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 5대 교구가 형성되어 내려오던 그리스도교는 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로 인해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의 4개 지역을 관할하는 정교회와 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졌다. 이 가운데 정교회는 서방교회라 부르는 로마 가톨릭과 구분해 동방교회로 통한다. 한국정교회는 아직 독립교회나 자치교회로 인정받지 못한 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를 모교회(母敎會)로 선교활동을 펼치는 작은 교회. 그리스에서 파송된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를 중심으로 그리스 출신의 주교와 한국인 신부 6명, 한국인 보제신부 1명, 러시아 출신 신부 1명 등 9명의 사제가 사역하고 있다. 종교로서의 정교회는 1900년에야 이 땅에 처음 들어왔지만 정교회와 우리와의 만남은 800년전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 몽골 군이 유럽을 유린하던 중세시대 몽골에 파견되었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들여다 보면 몽골의 왕실은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大公)을 후하게 대접했다. 당시 볼모로 잡혀가 있던 고려 왕실 등의 귀족 자제들이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조선 영조시대 청나라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던 이윤신은 ‘문견사건(聞見事件)’에서 ‘큰 코 오랑캐’라는 의미의 대비달자(大鼻獺子)를 만났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 대비달자는 바로 ‘코 큰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 조선 선교책임자로 입국한 러시아 흐리산토스 쉐헤트콥스키 대신부가 그해 2월17일 러시아 공사 관저의 큰 방에서 성찬예배를 드린 것이 한국정교회의 시초. 한국정교회는 그 날을 생일로 삼고 있다. 고종으로부터 부지를 하사받아 지금 경향신문 자리인 서울 정동 22번지에 첫 성당을 세웠는데 러시아에서 제작해 들여온 7개의 크고 작은 이색 종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소리가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이후 정교회는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의 선교사가 모두 추방되면서 사실상 단절됐지만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교구로 조직되어 교세를 늘여가다가 한국전쟁을 맞아 다시 철퇴를 맞았다.1947년 한국인 사제 알렉세이 김의한이 서품되었지만 전쟁 발발 두 달뒤 납북되어 처형되었고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던 것이다. 정동성당도 전쟁의 와중에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당시 한국에 파병된 그리스 병사들이 매월 1달러씩 모아 성당 복구 비용에 보태기도 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육군의 종군 사제인 안드레아스 할쿄풀로스 대신부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보리스 문이춘이 교회재건에 나서 1968년 아현동 언덕에 지금의 성당을 세워 놓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들이 긴 사각형의 공간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신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바실리카 양식을 택한다면 정교회 교회들은 한결같이 중앙의 둥근 돔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의 빛을 수렴하는 비잔틴 양식을 쓴다. 성니콜라스 대성당도 다르지 않다. 멀찌감치서 볼 때도 지붕의 둥근 돔이 가장 먼저 눈에 든다. 성당 입구 왼쪽에 선 아치형 종탑도 보통 교회나 성당의 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모두 5개의 크고 작은 종들에 내리 걸린 줄을 잡아당겨 치도록 했는데 요즘도 매일 예배 때 어김없이 종이 울린다. 정교회가 처음 들어오면서 선교사들이 러시아에서 7개의 종을 들여왔는데 전쟁중 2개만 남긴 채 모두 파손되었고 지금은 이 2개와 나중에 그리스 정부가 기증해온 3개의 종을 모아 5개의 종을 걸었다.1978년 종탑을 세울 때도 파병 그리스 병사들이 모금한 돈이 쓰여졌다고 한다. 정문 위에 걸린 수호성인 성 니콜라스의 금색 모자이크상을 보며 성당 문을 들어서면 비잔틴 양식 그대로 천장의 거대한 돔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앙 돔을 기준으로 신자석과 전례공간인 지성소가 나뉘지만 중앙 돔 양쪽에 사각형 공간을 각각 두어 결국 내부 공간은 십자가 모양을 갖추고 있다. 성당 문 바로 앞에는 양쪽에 촛불을 밝히는 성초대가 있는데 신자들이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나를 희생하고 이타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정화의 공간이다. 전례공간으로 가다 보면 신자석 앞 왼편에 세례조가 눈에 띈다. 전통적으로 침수 세례를 고수하는 정교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 지하 1.5m 깊이의 공간에 물을 채워 신자들이 세번 물속에 잠기는 과정을 통해 세례를 받는다.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화(聖畵)를 중시한다고 한다.4세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성화는 대부분 복음서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의 심오한 진리를 신자들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보조교재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성당 안은 온통 성화로 도배되다시피 장식됐다. 모두 그리스 아테네대학의 소존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제작해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중앙 돔 역시 거대한 성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상 만물을 주관하는 꼭대기의 예수를 정점으로 성모 마리아와 천사·세례요한, 구약의 예언자 아브라함·다윗·모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는 이른바 구약의 의인들이 차례로 그려져 있다. 결국 이 돔은 천상의 예수님부터 지상의 인간까지 연결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신자석과 전례공간인 지성소를 구분하는 이코노스타시스(성상 칸막이)도 천주교 성당과는 달리 높게 쳐져 있어 독특하다. 꼭대기에는 정교회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꽃봉오리 십자가가 올려져 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 짊어진 예수의 고귀함을 아름답게 표현한 십자가이다. 성상 칸막이 중간의 ‘아름다운 문’ 양쪽에는 역시 예수와 세례요한, 성모마리아상이 새겨졌다. 성상 칸막이 안쪽의 전례공간 구성은 천주교 성당과 비슷하지만 제대 벽은 성모상과 아기예수, 최후의 만찬을 형상화한 성화로 마감하고 있다. 성당 왼쪽, 선교사관과 사무실·교육실로 쓰이는 건물의 지하엔 성 막심 성당이 있다. 중앙 성당이 일요일 성찬예배가 열리는 곳이라면 이곳은 평일 두차례씩 예배가 열리는 소성당. 초기 선교사들이 입던 제의와 18세기 제작된 성화, 복음경, 한글 기도문, 성가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러시아 신자들을 위한 예배와 영어 예배도 이곳에서 열린다. kimus@seoul.co.kr ■ “교세 확장보다 진실된 믿음 전파에 힘써” 소티리오스 트람바스(78) 대주교는 1975년 문이춘 신부의 후임으로 그리스 정교회에서 부임해 32년간 한국정교회를 이끌고 있는 한국정교회의 가장 웃어른. 교인 2000명에 불과하지만 한국정교회를 대표하며, 세례며 온갖 성사를 주례하는 ‘영적 아버지’로 통한다.“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달랑 성당 하나밖에 없었어요. 종탑도 없이 성당 한 쪽에서 종 몇 개를 매달아 예배를 알리곤 했는데, 돌이켜 보면 놀랄 만한 성장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정교회는 천주교 못지않게 이 땅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세계 어느 지역 정교회에도 뒤지지 않는 신자들의 열성과 신심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소티리오스 대주교. 그는 “한국의 정교회 교인들은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가르침’의 의미를 가진 정교회 교리에 존경스러울만큼 충실한 채 성숙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거듭 자랑한다. “서구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인해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지만 정교회는 초기 교회의 진리를 훼손하지 않은 채 진실된 믿음(복음) 전파에 치중해온 역사를 갖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정교회는 이같은 초기 교회의 정신을 올곧게 지키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이 분쟁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한국은 지구상 유례없는 다종교국가라는 소티리오스 대주교는 “그러나 같은 종파이면서도 분열을 재생산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며 “성장과 신자 확보에 치중하지 않는 정교회를 주목해 달라.”고 주문했다.
  • 오중위 장례식 무기연기

    이라크 주둔 자이툰부대 영내에서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된 오모(27) 중위의 장례식이 28일 유족들의 반발로 치러지지 못했다. 유족들은 기자회견에서 “국방부가 장례식 전까지 유족에게 수사 기록을 제공키로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는 등 신뢰할 수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 중위의 매형 김모(33)씨는 이날 기자와의 통화에서 “장례가 ‘부대장’이 아니라 ‘가족장’이란 사실은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면서 “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자꾸 말을 바꾸는 등 국방부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유족들은 국방부에 모든 수사기록 사본을 요구하는 한편 조만간 변호사를 선임, 본격적인 소송 준비에 돌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초 가족장에 합의했던 유족들이 입장을 번복하고 있다.”면서 “유족이 바라는 국립묘지 안장이나 보상은 수사 결과에 바탕해 원칙과 규정에 따라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행법상 오 중위의 사망이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살로 판명되면 순직 처리나 국립묘지 안장이 어렵다. 자살이라도 ‘전장 스트레스’ 같은 외부요인이 작용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국방부는 그러나 전장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인정할 경우 해외 파병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주한미군, 윤장호하사 추모비 건립

    주한미군이 지난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병임무 중 폭탄테러로 전사한 고(故) 윤장호 하사를 기리는 추모비를 오는 31일 용산기지 사우스포스트 내 동산에 건립한다.윤 하사 추모비 건립과 추모 식수는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의 제안에 따라 이뤄지는 것으로, 주한미군사령관이 파병 임무 중 전사한 한국군 장병을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기는 처음이다.
  • [문화마당] 문화차별주의자 보십시오/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대한민국 사용후기’라는 책 표지에는 “고집스럽게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절대로 이 책을 읽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다. 당신은 서문에서 “한국을 무지하게 사랑”했지만,“결국 이 나라가 미치도록 미워졌다.”고 밝혔다. 사랑이 왜 증오로 변했나? 당신의 표현대로 대한민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필요에 맞게 소비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홍대 앞에서 당신이 “놀지 않은 지 한 2년” 되었다. 이유는 “미국의 어느 빈민촌 흑인 양아치인 줄로 착각하는 강남의 중산층 남자애들”과 “걸레 같은 한국 여자애들” 등 “그 동네 거의 모든 것을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 전에는 어땠나.1996부터 10년 동안 홍대 앞을 잘 사용했을 것이다. 잘 ‘놀’았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racist)가 아니라 문화차별주의자(culturalist)”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흰둥이’라며 비하하는 척한다. 한국인이 사용하지도 않는 ‘흰둥이’라는 표현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백인의 자신감과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을 드러낸다. 이 ‘흰둥이’ 전략은 문화차별에도 적용된다.‘개판’인 미국의 대통령을 흉본 뒤, 한국의 대통령을 부시의 “잘 훈련된 푸들”이라며 더 격하한다.“작은 미국이 되려고 용쓰는 한국”을 비판하면서 부지불식간 큰 미국을 암시한다. 백인과 미국인의 우월주의를 열등한 척 뒤집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더 차별하거나 더 열등하게 몰고 간다. 비주류를 가장한 주류의 관점이다. 당신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뜻을 구별해주면서, 한국에는 ‘천박한 민족주의’가 난무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꼭뒤를 비춘 일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라크에 군사를 파병해 달라.”는 요청을 한 조지 부시 대통령보다 그 요청을 받아들인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은 당신은 애국주의자인가 민족주의자인가. 천박한 민족주의 때문에 한국인이 “오로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상품을 파는 데 독도를 사용한다.”고 했는데, 당신이야말로 독도를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를 사용해서 상업적 이익을 얻고 있지 않은가. 얼핏 보면 당신의 독설은 새로운 문화적 시각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그 본질은 “일본과 미국은 남한의 3대 교역국에 포함되며, 남한의 지속적인 번영과 복지에 반드시 필요한 나라”이니 “그냥 어울려 지내”라는 것이다. 당신이 주장하는 ‘세계화’의 단면이다. 당신은 “한국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람들”로 천박한, 잘난 척, 술 취한, 차별하는, 멍청한 놈을 간추려 놓았다. 당신이 정의한 의미와는 다르지만 그 단어들이 당신에게도 전부 적용된다. 당신의 어휘는 똥꼬, 개판, 고자, 쓰레기, 걸레 등 의도적으로 천박하고,‘인정 많은 한국인’에 대한 메이어의 의견을 뭉개며 잘난 척하고, 술 취한 듯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대신 함부로 문화를 차별하고, 미국과 백인을 모독하는 척하면서 그들과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를 문화비평의 잣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한국에서 사라지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충분히 대한한국을 사용하고 나면, 홍대 앞을 떠나듯, 당신 스스로 한국을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작가라는 직업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작가라는 당신이 지나간 자리마다 왜 그다지도 ‘증오’와 ‘똥’과 ‘걸레’가 수북한가. 이는 작가의 눈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고통을 흡수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문화의 향기를 재생산하는 대신, 소비자의 눈으로 먹고 배설하고 소비해버렸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당신이 비주류의 관점을 가졌다면, 문화의 차별이 아닌 차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홍대 앞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나도, 같은 작가로서, 당신이 쓸 다음 책을 기대했을 것이다.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20)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Ⅱ

    후금을 치는데 동참하라는 명의 요구가 날아들었을 무렵, 광해군은 정치적으로 고비를 맞고 있었다. 외교적 감각이 탁월했던 광해군이지만, 내정(內政)에서는 적지 않은 난맥상을 드러냈다.‘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廢母殺弟) 패륜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이 대표적이다. ‘폐모’는 ‘살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양자 모두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광해군의 노심초사와 강박관념에서 비롯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논란 끝에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살해되었다.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광해군에게 극단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이이첨(李爾瞻) 등 광해군의 측근들은 인목대비마저 폐위시켜 후환을 없애자고 부추겼다. 하지만 모후(母后)를 폐위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폐모 논의’를 둘러싼 내우(內憂)가 한창일 때, 후금 정벌에 동참하라는 명의 요구는 외환(外患) 그 자체였다. ●대동법 시행·창덕궁 수리 등 국가재건 앞서 광해군이 이룩한 치적(治績) 가운데는 볼 만한 것이 적지 않다. 그는 자기 시대의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안으로 임진왜란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고, 밖으로 명청교체(明淸交替)가 몰고 올 파장에 대비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광해군은, 그 같은 과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정치판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위 직후 광해군은 당파(黨派)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는데 힘썼다. 비록 이이첨, 정인홍(鄭仁弘), 유희분(柳希奮) 등 북인(北人)들이 자신의 즉위 과정에서 일등공신이었지만 광해군은 그들만을 편애하지 않았다. 이원익(李元翼), 이항복, 이덕형 등 선조 이래의 중신들을 우대하여 그들의 경륜을 활용하려 했다. 이원익은 1608년 경기도에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왕실이나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貢物)을 백성들에게서 현물 대신 쌀로 받아들이는 조처였다. 자기 고장에서 나지 않는 공물을 현물로 납입하라고 강요할 경우, 필연적으로 청부업자들이 중간에서 설치게 된다. 백성들은 결국 방납인(防納人)으로 불리는 청부업자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물품을 구입하여 관청에 납부할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경제적 부담은 치솟고, 방납인들만 떼돈을 벌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자연히 방납인 중에는 상인뿐 아니라 사대부와 왕실의 인척 등 온갖 모리배들이 섞여 있었다. 쌀은 백성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청부업자들이 농간을 부리기가 쉽지 않았다. 대동법의 실시는 경기도 백성들에게는 ‘복음’이었지만 방납인들에게는 기득권을 흔드는 ‘비보(悲報)’였다. 방납인들의 반발과 아우성을 일축하고 대동법을 밀어붙인 것만으로도 광해군은 ‘현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광해군은 왜란 중에 불타버린 창덕궁을 수리하고, 종묘(宗廟)를 중건하고, 사고(史庫)를 비롯한 여러 관청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이 같은 외형적인 재건 작업뿐 아니라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심신을 다독이고, 무너진 사회질서를 다시 세우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반포하고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와 같은 윤리 서적을 간행한 것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폐모살제 멍에로 내정에 난맥상 광해군은 분명 임진왜란 이후 국가 재건과 외교에서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늘 정치적으로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라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이 지연되고, 부왕 선조로부터 견제받았던 ‘전력’은 즉위 이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집착으로 표출되었다. 더욱이 역모 사건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당파 사이의 갈등과 대결은 재연되었다. 특히 선조의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은 물론, 광해군 즉위에 앞장섰던 이이첨 등 대북파(大北派)에는 잠재적으로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1613년 4월, 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한 혐의로 국문(鞫問)을 받던 서얼 박응서(朴應犀)는 ‘엄청난 내용’을 실토했다.“은상에게서 빼앗은 자금으로 역도들을 모아 대궐을 습격하여 인목대비에게 옥새를 바친 뒤 영창대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역모의 우두머리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대북파의 정적이었던 남인(南人)과 서인(西人)들은 대부분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바로 계축옥사였다. 김제남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고, 여덟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도 유배된 직후 살해되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를 지켜 주지 못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 처절한 원한을 품은 것은 당연했다. ‘광해군일기’에는 박응서를 매수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데 이이첨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계축옥사는, 우유부단하고 심약했던 광해군이 ‘왕권 강화’에 골몰하다가 빚어진 비극이기도 했다. 이이첨 등은 이윽고 인목대비마저 ‘역모 관련자’로 몰아 처벌하려 했다. 대북파는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모자(母子) 관계는 끊어졌기 때문에 따로 거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논란 끝에 인목대비는 결국 서궁(西宮-오늘날 덕수궁)에 유폐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에 대한 충(忠)을 강조한 대북파의 ‘폐모’ 시도는 재야 사림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효(孝)를 무시한 ‘금수(禽獸)의 행위’라고 매도되었다.1618년 1월, 이이첨 등은 들끓는 비판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정청(庭請)이란 것을 벌였다. 조정의 모든 신료들을 동원하여 ‘국왕에게 불충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고 광해군에게 요청하는 절차였다. 광해군은 ‘폐모 논의’가 인륜에 관련된 사안이라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이첨 일파를 제대로 통제하지도 못했다. 인목대비가 유폐된 상태에서 ‘폐모 논의’는 결말을 보지 못했고, 그 와중에 명의 파병 요구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무리한 토목공사에 민심은 등 돌려 왕권 강화에 대한 광해군의 집착은 토목공사에 몰두하는 형태로도 표출되었다. 그는 1611년 창덕궁을 중건했지만 연달아 다른 궁궐들을 짓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신문로에 경덕궁(慶德宮, 뒤에 경희궁으로 개명)을 지었고, 정원군(定遠君,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仁祖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인왕산 부근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듣고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다. 단종과 연산군이 쫓겨났던 장소인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광해군은 궁궐이 완성된 뒤 이 궁궐, 저 궁궐을 옮겨다니는 행태를 보였다. 그럴듯한 궁궐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원구단(圓丘壇)을 짓고 하늘에 교제(郊祭)까지 지내려 했다. 그것은 중국의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다는 제천의식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궐들을 짓고, 교제까지 지내려 했지만 토목공사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인경궁과 경덕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장대한 궁궐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간에 전가되었다. 증세(增稅)에도 불구하고 재원이 부족하자 은이나 목재, 석재 등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관직까지 팔았다. 부족한 재원을 긁어모으기 위해 조도사(調度使)란 직책을 지닌 관원들을 전국에 파견했다. ●삐딱한 여론… 외교발목 잡아 백성들로부터 아우성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세금 부담뿐 아니라 목재 등을 운반하는데 사역되는 백성들의 반발도 컸다. 계축옥사를 통해 쫓겨났던 남인이나 서인 출신의 신료들은 ‘말세의 조짐’이라고 비아냥거렸다.‘폐모살제’ 때문에 얻게 된 ‘패륜’의 멍에 위에 ‘민생을 망쳤다.’는 비판까지 더해졌다.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려 했던 데에는 궁궐 건설을 비롯한 토목공사가 방해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자리잡고 있었다. 이미 토목공사 재원을 마련하는 문제로 민심이 술렁이고 있는 형편에 파병 비용까지 더해질 경우 상황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외교와 내정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빛나고 탁월한 외교라도 내정에 발목이 잡히면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폐모 논의’와 토목공사 때문에 삐딱해진 여론의 시선이 광해군의 외교를 좋게 봐줄 리 없었다. 내정의 난맥상은 결국 광해군 외교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美, 이라크전 최대 우군 잃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퇴장과 더불어 미국과 영국의 밀월관계도 끝을 맞을까. 블레어 총리는 “내가 떠나도 영국의 이라크 정책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미국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영국 차기 총리로 확정된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의 이라크 정책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영국 선데이텔레그래프 인터넷판이 21일 보도했다. 신문은 부시 대통령이 최근 백악관 참모진으로부터 브라운 장관이 여론조사에서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총리 취임 100일 이내에 이라크 파병 영국군의 철수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전의 최대 우군을 잃을 경우에 대비해 백악관 선임 보좌관과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英 고든 브라운 노동당 당수 지명 수락… 차기 총리 확정

    英 고든 브라운 노동당 당수 지명 수락… 차기 총리 확정

    |파리 이종수특파원|고든 브라운 영국 재무장관이 17일(현지시간) 차기 영국 총리로 사실상 확정됐다. 단독 당수 후보로 출마한 그는 이날 노동당 의원 353명 가운데 313명(89%)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노동당 당수직을 잇게 됐다. 새달 24일 특별전당대회에서 당수로 공식 취임하는 절차만 남았다. 이어 27일에는 관례에 따라 집권당 당수로서 자동적으로 총리가 된다. 브라운 장관은 이날 당수 지명 수락연설에서 정치에 대한 ‘신뢰 회복’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총리 취임 전까지 전국을 돌며 듣고 배우겠다.”며 “외교 정책만이 아니라 학교·병원·공공서비스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토니 블레어 총리의 10년 장기집권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과 노동당의 부패 이미지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특히 ‘교육·의료·주택’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구체적으로 ▲젊은 부부의 주택 마련 ▲최고의 교육 기회 ▲국립의료원 진료 서비스 강화 ▲보육 ▲환경 ▲범죄 예방 등을 지원하겠다고 거론했다. 이어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선 “영국 총리와 미국 대통령의 사이는 매우 강력한 관계여야 한다.”며 “미국 대통령과 그런 관계를 구축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미국 대선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핫이슈인 이라크 파병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인정하지만 급격한 정책전환은 없을 것임을 예고했다. 그는 “여론이 심각하게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라크 주둔 영국군은 이미 감축되고 있는 ‘새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설명했다. 파병군 규모가 4만명에서 현재 7000명으로 줄었고 이라크 3개주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앤드루 매킨레이 의원 등 일부 의원이 퇴임을 앞둔 토니 블레어 총리가 유럽연합(EU) 정상회담, 선진 8개국(G8) 정상회담에 참석하는 것을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블레어가 총리직을 수행하는 게 맞다.”고 방어했다. 정부 조직에도 약간의 변화가 예상된다. 그는 “헌법 혹은 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총리실 정치 보좌관들의 위상은 낮추고 정부 관리의 역할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vielee@seoul.co.kr
  • [월드이슈] 토니블레어 ‘제3의 길’ 10년 평가

    [월드이슈] 토니블레어 ‘제3의 길’ 10년 평가

    |파리 이종수특파원|블레어는 가도 ‘블레어리즘’은 남는다? 영국 언론들은 지난 10일 공식 사임 의사를 밝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10년’에 대해 이라크 파병으로 빛이 바랬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블레어리즘’이라고 불리는 그의 10년은 영국은 물론 유럽 대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노동당 개혁에서 시작해 영국, 잠자던 유럽 대륙을 깨운 블레어리즘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집중 분석해 봤다. “어떤 정권이든 실수를 하지만 ‘제3의 길’은 성공했다.” 토니 블레어가 선택한 ‘제3의 길’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런던 정경대 교수는 지난 9일 프랑스 일간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단정했다. 이어 그는 “신노동당은 중도 좌파로서 사회적 정의와 경제번영을 결합시키는 개혁 프로젝트를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경제를 가장 중시한 모델” 블레어가 추진한 ‘제3의 길’은 시장 경제와 유럽의 전통적인 복지국가 모델을 결합한 것이다. 경제발전 없이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무력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블레어리즘은 경제 특히 공공서비스 분야 확충에 주력했다. 공공분야의 투자를 대폭 늘려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45.4%까지 늘렸다. 그 결과 10년 동안 7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취업률을 75%대까지 끌어 올렸다. 특히 교육·보건 분야에서만 각각 30만,22만 4000여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JP모건 체이스 은행의 경제분석가 말콤 바는 “영국의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공공 서비스를 확충했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는 다양한 거시경제 수치에서 잘 드러난다.10년동안 경제성장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가 집권한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연평균 2.8%에 이르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올해 전망치는 3.25%다. 또 블레어시대 출범 직후인 1998년에 7.5%였던 실업률도 10년동안 4∼5%대로 내렸다. 인플레이션율도 2.6%에서 지난해 2.2%로 내렸다. 경제성장률과 인플레이션율은 선진7개국(G7) 가운데 가장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의 발전상은 프랑스와 견줘보면 극명해진다. 프랑스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2.1%였다. 그나마 최근 들어 나아진 것이다. 실업률도 8.3%에 이른다. ●‘잠자던 유럽’을 깨우다 블레어가 주창한 ‘제3의 길’은 프랑스와 독일 등 ‘낡은 대륙’ 유럽을 흔들었다. 그의 등장 이후 시장경제 혹은 영국과 미국식 발전 모델을 추진하려는 국가들이 늘어났다. EU 순회의장국인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미국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새 대통령도 후보시절 공공연하게 ‘영·미식 발전 모델’을 주창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 후보측도 “사회당이 지향할 성공모델은 블레어 총리가 이끈 노동당의 변화과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블레어는 또 유럽 통합에도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그는 “유럽연합(EU)은 영국의 미래와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하면서 2005년 크로아티아와 터키의 EU 가입 협상을 추진하는 등 유럽 통합에 박차를 가했다. 나아가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집행위원장과 함께 EU의 주축이던 프랑스와 독일을 변방으로 몰아내면서 대륙 통합과 시장경제 도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일 사민당의 유럽의회 의원인 엘마르 브로크는 “블레어는 유로존 가입과 EU헌법 채택에 주저했지만 유럽통합에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vielee@seoul.co.kr ■ 교육·빈곤퇴치 등 ‘삶의 질’ 대폭 개선 |파리 이종수특파원|블레어리즘 10년은 영국 사회의 여러 분야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최근 “블레어가 비록 ‘이라크 파병’이라는 암초를 만나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국내 분야로 눈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10년 사이에 영국 국민들이 체감하는 변화로 공공 서비스를 꼽은 뒤 구체적으로 ▲교육 ▲보건 ▲빈곤퇴치 분야에서 삶의 질이 대폭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공교육 강화…아동문맹률 41%→21%로 이에 따르면 블레어가 비중을 둔 ‘빈곤과의 싸움’은 두가지 축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세금공제 정책 등으로 53%의 빈곤층이 혜택을 봤다. 또 세제시스템 개혁으로 어린이 3명 가운데 1명꼴이었던 빈곤 아동이 현재 60만명 이하로 줄었다. 다른 축은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지원 확대다. 특히 ‘슈어 스타트’(빈곤 아동 구제정책)을 내걸고 3500여곳의 아동센터를 중심으로 아동 보육·건강·조기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22만여명의 인력을 늘려 공교육 강화에 나섰다. 급식여건 개선, 스포츠·문화 활동 등 방과후 수업 강화로 사립학교 의존율이 낮아졌다. 읽고 쓰기, 간단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아동 비율도 59%에서 79%로 늘어났다. 병원·학교 환경도 크게 나아졌다.10년 전에는 환자나 학생들은 지붕이 낡은 건물, 심지어 2차대전때 지은 건물에서 진료를 받거나 수업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새 건물로 단장됐다. ●보건환경등 공공서비스도 눈부신 발전 이에 힘입어 국민들이 체감하는 공공서비스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공립 병원에 30만여명의 고용을 늘리면서 보건환경을 대폭 개선했다. 통계에 따르면 10년 전에는 공립 병원에서 한번 수술을 받으려면 6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국민이 28만 3800여명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199명으로 급감했다. 이에 따라 사립병원을 찾는 횟수도 줄어들고 사보험 가입 비율도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암·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도 크게 줄었다. 부수적으로 공무원의 위상과 처우도 많이 나아졌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국민 70% 이상이 교사를 지망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또 노동시간 유연화, 유급 출산휴직제 등으로 여성 근로조건도 대폭 개선됐다. 블레어가 도입한 최저임금제의 혜택도 대부분 여성에게 돌아갔다. 이밖에 19세기 수준의 철도 사고 비율도 획기적으로 나아졌다는 분석이다. vielee@seoul.co.kr ■ ‘포스트 블레어’ 경제기조 안바뀔듯 |파리 이종수특파원|토니 블레어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은 사람이 후임 총리로 유력한 고든 브라운(57) 재무장관이다. 그가 다음달 24일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차기 당수로 선출돼 총리가 될 경우 어떤 점에서 블레어리즘과 만나고 어디에서 갈라질지 주목된다. 현재까지 나온 유럽 언론의 전망을 종합하면 전반적으로 ‘브라운 시대’는 블레어리즘의 연장선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주된 이유는 그가 블레어의 ‘정치적 동지’로서 블레어리즘을 자리잡게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잉글랜드 은행 독립이다. 그는 “정치 논리에서 벗어나 경제 논리에 맞게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잉글랜드 은행을 밀어붙였다. 경제정책에 이어 외교정책도 블레어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은 최근 좌파인 파비앙 소사이어트가 마련한 정견 발표장에서 “미국과 유럽의 가교 역할을 한 블레어 총리의 정책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약간 비판적이던 이전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유와 기회균등, 특히 개인의 자유라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항상 강력하면서도 특별한 관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블레어의 지지율 추락을 가져온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도 “상황이 급변하고 있는 데다 지금도 이라크 정부와 국민이 주둔을 원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영국 주둔군을 철수하면 ‘잘못된 행동’”이라고 밝혀 블레어와 비슷한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방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란 핵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적 협력과 조율을 통해 풀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다국간 공동정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북아일랜드식 해법’을 내놓았다. 두 국가를 모두 인정하면서 경제개발 지원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복안이다. vie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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