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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빈라덴 사살 국제테러 종식의 계기 삼자

    미군 특수부대가 9·11 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공식 발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정의의 승리라고 기뻐하는 등 미국 언론들은 환호하는 분위기다. 빈라덴은 전 세계를 경악시킨 테러를 주도했고, 그날 이후 10년간이나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을 잉태시킨 핵심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테러를 지휘하지 못하게 됐다는 점만으로도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그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테러와의 전쟁이 끝나지는 않는다. 빈라덴의 사망을 테러와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무장 테러단체인 알카에다가 저지른 테러로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등 국제사회는 아프간 전쟁을 시작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고,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은 무자비한 보복테러로 맞서 왔다. 이로 인해 숱한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환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소모전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장기전에서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인 미국 등 막강한 서방국에 맞설 만큼 빈 라덴의 지도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는 알카에다의 정신적 지주이며, 그를 잃은 알카에다는 위축될 수도 있다. 반면 2인자 역할을 해 온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후계자로 나서 조직의 결속력을 강화하려고 빈 라덴 사살에 대한 보복 테러를 자행할 수도 있다. 오히려 후자의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보는 게 후회하지 않는 결과를 남긴다. 지금은 빈라덴의 죽음으로 국제테러가 사그라질 것이라고 섣부른 기대를 할 때가 아니다. 전 세계가 제2의 빈라덴, 제3의 빈 라덴 등장 가능성을 더 경계해야 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심야 성명을 통해 빈라덴의 사살 소식을 전하면서 알카에다의 도발에 대한 경각심을 주문했다. 알카에다 역시 민간인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현재의 투쟁방식을 전환하려는 변화를 시도해야 할 때다. 물론 이런 기대만으로는 아프간에 파병돼 있는 국군 오쉬노 부대 장병의 안전을 기약할 수는 없다. 합동참모본부는 탈레반 세력이 춘계 공세에 나선다는 첩보가 있어 부대 경계를 강화했다고 밝혔다. 한치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일이다.
  • “주한미군 해외훈련 일상화될 것”

    “주한미군 해외훈련 일상화될 것”

    “(국방개혁을 통한) 변화는 한·미동맹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존 D 존슨 미 8군사령관(중장)이 20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하텔하우스에서 가진 국방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 군의 국방개혁과 관련, “한국군이 지휘구조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이 안건에 관해서는 현재 토의가 진행 중이며 결정된 사항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한·미관계를 더욱 강하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존슨 사령관은 이어 “미군은 오는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이후 한국군이 미 공군과 해군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할 것”이라면서 “(군의 변화는) 6·25전쟁 이후 (한·미가)함께 겪어 왔던 변화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주한미군의 전투능력 강화를 위해 해외 훈련이 일상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8군은 지난해와 올해 필리핀과 태국에서 다국적군이 모여 실시한 훈련에 참가한 바 있다. 최근 북한의 동향을 묻는 질문에 존슨 사령관은 “지금 한국과 미국 군의 정보공유가 잘 되고 있고 역사적으로 어느 때보다 강력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정보 수집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지 계속 고민하고 있으며, 현재 특별히 이상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전작권 전환 이후 미군 전력에 대해서는 “한국에 전개하도록 계획된 증원부대 규모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한국군 중심으로)지휘구조만 바뀌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8군사령부가 군수·행정 기능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유사시 미 국방부에 전력 증원을 요청했지만 지금은 그 기능이 태평양군사령부로 이관돼 사령부에 직접 요청하면 된다.”면서 “유사시 지원 병력과 장비의 전개가 더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존슨 사령관은 또 주한미군 병력 유지와 관련해 “그간 특기가 있는 장병을 이라크로 파병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이들이 전개됐을 때 같은 능력을 갖춘 인력이 한국에 들어와 인력 공백은 없었다. 한·미 간 합의된 주한미군 2만 8500명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주한미군이 해외 훈련에 참가할 때 한반도 위기 발생 시 즉시 복귀할 수 있는 이동수단을 확보해 놓는다.”면서 “미 8군 병력은 한국에서의 임무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간담회에 배석한 미 8군사령부 참모장인 도널드 잭슨 대령은 “(미8군은)미 태평양군사령부와 태평양육군사령부가 주관하는 훈련에 참가하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한국 내 작전지원 능력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英 야전사령관 투입·佛 전투기 추가 급파

    리비아전이 장기화하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숙련된 사령관과 연락 장교를 파견하고 공습 수위를 강화하는 등 다양한 해법을 내놓고 있다. 지상군 투입은 아니지만 내부에서는 베트남전에서 고배를 마셨던 미국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영국이 군사 자문단을 파견한 데 이어 아프가니스탄전 등 다수의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사령관 1명을 리비아에 보내 반군을 조직화할 계획이라고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안 문제로 사령관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는 민간인과 군인 20여명으로 꾸려진 자문단의 일원으로 반군의 근거지인 벵가지에 투입된다. 윌리엄 헤이그 영국 외무장관은 “(자문단은) 전투부대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이들은 군사작전 실행이나 계획에 참여하지 말라는 엄격한 지시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들의 역할은 반군이 이끄는 국가위원회에 군대 구조와 소통, 실행계획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알려주는 데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도 20일 리비아에 연락업무를 담당할 군 장교 일부를 보내기로 하는 등 영국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일부 프랑스 의원들은 전투부대 배치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정부 대변인인 프랑수아 바루앵 예산장관은 “우리는 지상군 파병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며 선을 그었지만 프랑수아 피용 총리는 “공습에 대한 군사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발맞춰 프랑스는 카다피군에 대한 정밀 공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전투기를 샤를드골 공항을 통해 격전지인 미스라타 인근에 추가로 급파했다. 이탈리아도 이날 리비아 반군 전투지역에 군 교관을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카다피군에 포위돼 있는 미스라타의 반군 지도자들도 영국과 프랑스에 공격을 강화하고 전투부대를 배치해 줄 것을 촉구하면서 “그들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다.”고 읍소했다. 영국 내부에서는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걱정이 나오고 있다. 자유민주당 당수였던 멘지스 캠펠경은 “베트남전도 미국 대통령의 군사 자문단 파견으로 시작된 만큼 주의 깊게 진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美 신용등급전망 하향 파장] ‘주식회사 미국’ 부채 14조弗… ‘빚내 빚막기’ 惡性구조 심각

    지난 8일 미국 정치권의 예산안 합의 지연으로 연방정부 폐쇄가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 CNN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한 군인의 아내를 인터뷰했다. 그녀는 “정부가 폐쇄돼 봉급이 제때 나오지 않으면 1~2주 안에 생활비가 바닥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눈에 정부 폐쇄보다 놀라운 것은 한달 치 저축도 안 남겨 놓고 맘놓고 쓰는 그 군인 가족의 재정 상태였다. 이 군인 가족의 살림살이를 ‘확대복사’하면 미국 정부의 그것이 된다. 미 연방정부 총부채는 지난해 말 14조 달러를 돌파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92.8%에 달한다. 정부부채 과다 논란이 있는 한국의 부채가 GDP 대비 34.2%인 점을 감안하면 미국의 빚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선진국 중 일본(198.4%), 벨기에(102.5%)보다는 적다. 하지만 ‘주식회사 미국’의 부채는 악성(惡性)이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일본은 국민들의 저축률이 높아 최악의 경우 국민들의 돈으로 빚을 털 수 있다. 반면 미국은 빚으로 빚을 돌려 막는 구조다. 미국은 달러화가 기축통화라는 점에 안주,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대신 해외로 빠져나간 달러를 채권 발행으로 메워 왔다. 그래도 안 되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달러를 펑펑 찍어 내고 재무부가 빌려 쓰는, ‘봉이 김선달’식 수법도 병행했다. 그러는 사이 빚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김선달식 놀음을 할 수는 없다.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 내면 값어치가 떨어져 휴지 조각처럼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달러 대신 유로화나 위안화 등 다른 화폐를 찾거나 귀금속 보유를 늘리려 한다. 달러화 추락의 시초는 베트남전을 치르느라 달러 발행을 남발하면서부터다. 레이건 대통령 때 군비경쟁이 소련의 몰락을 불렀지만, 미국도 큰 내상을 입었다. 적자는 클린턴 정부 때 흑자로 됐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개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다시 골병이 든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미국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대신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고 빚은 급속히 증가한다. 물론 미국은 아직 저력이 있기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면 늦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미 ‘복부 지방’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맬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다. 내년 대선을 앞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도 인기 없는 정책을 펴기가 쉽지 않다. 18일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사의 평가는 그런 딜레마를 간파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미 정가에서 검토했던 부실 신용평가기관 퇴출 입법에 대한 신용평가기관 측의 보복성 평가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이 예전처럼 강성했다면 감히 그런 ‘도발’을 감행할 여지가 있었을까. 만약 먼 훗날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쇠락했을 때 돌이켜보면 지금이 그 출발점일 수도 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휴가 중이던 군인 ‘1억 복권’ 당첨 대박

    휴가 중이던 군인 ‘1억 복권’ 당첨 대박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미국 군인이 휴가 중에 복권에 당첨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국 일간 ‘애틀랜타저널-콘스티튜션’에 따르면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사는 그레그 커리 (47)원사는 지난 4일(현지시간) 25만 달러(한화 약 1억 7200만원) 복권에 당첨됐다. 미국 중부 사령부 소속 커리 원사는 지난 7개월 동안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에 주둔했다가 2주 휴가를 받고 고향에 돌아온 상태였다. 오랜만에 재회한 부인과 물을 사려고 들른 편의점에서 호기심에 긁은 복권이 뜻밖의 행운이었던 것. 자녀를 3명 둔 커리 원사는 1억원 넘는 돈을 육아와 생활비로 쓸 것이라고 말했다. 또 남는 돈은 전장에서 돌아온 뒤 가족과 함께 즐겁게 여행을 다니며 쓰고 싶다고 복권협회 측에 전했다. 18일 바그람기지로 복귀하는 커리 원사는 5개월 간의 복무를 마친 뒤 미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사진=애틀랜타저널-콘스티튜션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트위터(twitter.com/newsluv) 
  • “청바지보다 군복… 해병가족 代잇고 싶어”

    “청바지보다 군복… 해병가족 代잇고 싶어”

    정예 특전사 중사로 전역한 20대 ‘여전사’(女戰士) 귀신 잡는 해병대에 다시 입대한다. 주인공은 오는 19일 경북 포항 해병교육단에 입소하는 이지현(29·충북 보은군)씨. 이씨는 해병대 부사관이 돼 3년간 의무복무를 마친 뒤 장기복무로 전환해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했다. ●고공강하 377회… 무술 9단 ‘철녀’ 대학에서 경호비서학을 전공한 이씨는 2002년 특전사에 입대해 5년간 생활하며 남자들도 견디기 힘든 고강도 훈련을 거뜬히 해낸 ‘철인’이다. 낙하산에 400여 차례(고공강하 377회)나 몸을 실었고, 2005년에는 이라크 아르빌 전투지역에 파견돼 6개월 동안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했다. 태권도, 합기도, 특공무술, 검도 등을 합쳐 무술 9단의 유단자다. 남동생(27)도 누나를 따라 특전사에 입대해 한때 남매가 나란히 검은 베레모를 쓴 적이 있다. 지난 2월에 제대한 남동생도 레바논에서 파병 생활을 한 정예 용사다. 2007년 중사로 전역한 이씨가 4년 만에 다시 해병대 군복을 입게 된 것은 해병(357기) 출신인 아버지 이덕희(52)씨의 영향이 컸다. 이지현씨가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씨의 아버지는 자식 가운데 누군가가 해병대에 입대해 해병가족의 대를 이어가기를 바랐다고 한다. ●“빨간 이름표 달 생각에 가슴 설레” 이씨는 “체력적인 부담이 따르겠지만 빨간 이름표를 단 모습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면서 “거울을 봐도 청바지보다 군복이 잘 어울려서 평생 군인으로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보은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글로벌 시대] 오바마와 서방의 리비아 다루기/류진즈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교수

    [글로벌 시대] 오바마와 서방의 리비아 다루기/류진즈 베이징대 국제관계학 교수

    리비아 사태가 밀고 밀리는 공방전 속에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반군의 석유 생산지와 전략 요충지를 탱크로 밀고 들어가 폭탄을 쏟아부어대면서도 해외에 외교적 중재를 시도하고, 반군과의 협상 의사를 흘리면서 출구를 찾고 있다. 카다피는 공습을 중단하고, 리비아 문제는 리비아인들끼리 해결하도록 내버려 달라는 호소를 담은 편지까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오바마는 카다피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미국은 리비아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하나. 카다피에 대한 오바마와 미국의 정책 목표는 분명하다. 카다피 축출이다. 지난 2월 26일 연설 등 오바마의 여러 차례 연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여러 발언과 조치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도 미국의 후속 조치들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나그네처럼 조심스럽기가 그지없다. 정권교체라는 정책 목표와는 달리, 오바마의 미국이 전과 달리 조심스럽고 제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왜일까. 오바마의 미국은 이라크처럼 미국 혼자 나서서 군사 개입의 모든 결과와 책임을 지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란 입장이다. 새로운 형식의 대외 개입, 즉 제한적 개입과 국제사회 앞세우기를 내용으로 하는 ‘오바마 독트린’을 미국 정부는 인내심 있게 리비아 케이스에 적용하고 있는 참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을 앞세우고, 유엔 결의 뒤에 숨어 있다. 오바마가 전쟁 반대와 민주주의라는 기치를 들고 백악관에 입성했기 때문일까. 리비아 문제는 미국 안전의 핵심이익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적고 리비아는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다. 또 나토 회원국 간의 입장 차는 각자의 국익과 처지가 달라 좁히기 어렵고, 반카다피의 반군세력에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는 물론 반미·반서방적인 세력들이 숨어 있는 것도 미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저하게 한다. 벌여놓은 아프간·이라크 전쟁의 부담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미국은 새 전쟁을 벌일 의지도, 힘도 없다. 장기전이 뻔한 리비아 내전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무고한 국민들의 학살을 중지하고, 민주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국제 개입의 명분으로 내세우며 나토 회원국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이같은 점에서도 ‘오바마 독트린’은 우리에게는 냉전 후 미국의 대외개입주의 정책의 연속 정책으로 읽힌다. 클린턴 대통령 당시 소말리아에서의 군사 개입에 실패한 뒤 미국은 해외파병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했다. 핵심 국익과 연결될 것, 국회 동의를 얻을 것, 군사작전은 속전속결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투자보다 효과가 클 것 등이다. 오바마 정부 들어서는 미국의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 다자적인 행동을 취하고 책임은 다른 나라에 떠맡긴다는 입장은 더 강화됐다. 클린턴 시대 “인도주의적 재난에 인도주의 간섭으로 맞선다.”는 원칙은 ‘평범한 시민 보호’란 말로 포장됐다. 부시 전 대통령이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서 ‘동맹국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강조했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폭넓은 동맹의 결성’을 입에 담고 있다. 나토 공습만으로는 카다피 축출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인지 영국과 프랑스를 앞세운 서구 국가들의 지상군 개입도 고려되고 있다. 그러나 외국군의 지상전 개입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인도주의적인 재난에 부채질을 할 우려가 높다. 무정부상태의 악화도 불 보듯 뻔하다.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들의 반발과 견제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인도주의 명분을 내세운, 주권을 넘어선 군사 개입의 관례화는 국제사회를 더 불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 리비아 상황은 군사 개입보다는 협상과 외교적 방식을 통한 해결이 더 아쉬운 처지다. 리비아의 개인 전제정치, 가족통치는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아쉬운 것은 교전 당사자들의 휴전협상과 대화, 대화를 통한 변화와 미래의 모색이다.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국가들이 이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리비아가 미국과 서방국가들에 또 하나의 아프간, 이라크가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 “妻子와 愛人을 음독시킨 아, 내이름 家長”

    “妻子와 愛人을 음독시킨 아, 내이름 家長”

    [선데이서울 73년 7월 8일호 제6권 27호 통권 제 247호]  귀여운 두 아이들의 영혼은 지금 어느 곳을 헤매고 있을까? 꿇어 엎드린 그 젊은이의 뺨에는 하염없이 회한의 눈물만 흘러내린다. 아내는 복역 중에 있고 연인은 영원히 떠나버렸다. 사랑과 미움의 갈림길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천애의 골짜기로 굴러 떨어진 어떤 가장. 재기의 몸부림과 속죄의 절규로 썼다는 애독자 김모씨(기사 원본엔 풀 네임 적시돼 있음)의 수기를 싣는다.   아마 기억하고 있는 독자는 흔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지난 해(1972년) 9월8일자 각 일간지 사회면에는「일가족 집단 음독자살」 제하의 기사가 난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의 일가족 가장이다. 이제 내 나이 30살. 그리하여 나는 이 사건으로 귀여운 아이들을 잃고 속죄의 몸부림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건의 시초는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독자살 미수에 그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鄭京淑(25·가명)이라는 여인 이야기를 신문을 통해 보고 왠지 동정심에 이끌려 찾아가 치료와 퇴원 수속까지 자비로 해준 일이 있었다. 동정은 사랑으로 변하여 결국 부모와 친척이 없다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 동거하게 되었다.  그 뒤 나는 군에 입대했고 파월(월남 파병을 말함) 되었다가 69년 8월에 귀국, 제대했다.  제대를 한 뒤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어머님과 가족들에게 얘기했으나 과거가 있는 그 여자(실연 후 음독했다고 함)와는 절대로 결혼시킬 수 없다는 완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끝내 69년 8월27일 나의 집이 있는 서울을 도피해 인천시내 K예식장에서 가족들이라고는 한 사람도 참석치 않은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약 1년 동안은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서울 금호동 변두리에 셋방을 얻어 생활했다. 아내가 첫딸을 낳자 어머니도 어느 정도 이해하여 집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녀와의 결혼을 극력 반대하던 어머니의 감정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은 탓인지 어머니와 아내는 서먹서먹 했고 보이지 않는 불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아내는 또 아들을 낳아 우리는 1남1녀를 두었다.  당시 나는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인천으로 전근이 되어 그곳으로 출퇴근을 했다.  교통이 불편해서 나는 직장 부근에 하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집에는 일주일에 한두번 갈 정도가 되었다. 그 즈음 나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지(池)모양(20)과 사귀게 되었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 졌으면 결국 몸을 하락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가 있다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池양은 펄쩍 뛰며 아내와 헤어질 것을 요구해 왔다. 결국은 아내와 본격적인 이혼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때 나는 장님이 되었던 것 같았다.  아내도 설마 내 말이 거짓이겠지 하며 『사실이라면 사귀고 있는 여자와 직접 만난 다음에 합의해 주겠다』고 얘기했다. 그 후 두 여인은 몇차례 만났으며 그때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두 여인의 사이는 외면적으로는 사이가 좋아보였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이혼 조건으로 요구하는 위자료를 그 당시 나의 입장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어 어렵게 되어 하루 하루 이혼문제는 지연되었으며 자연 池양과 나는 시내 여러 곳으로 남의 눈을 피해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池양의 가족들은 나의 환경을 알게 된 후 자기 딸을 집에다 감금하다시피 꼼짝 못하게 했다. 더우기(더욱이)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머리까지 가위로 빡빡 깎아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수건으로 쓰고서라도 또 집을 뛰쳐나와 나에게 빨리 이혼할 것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해 9월4일 아내는 이혼 조건을 대폭 완화하여 9월5일 합의이혼 수속을 끝내자고 말해 池양은 이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 하지만 깊은 정이 든 아내와 막상 헤어지자니 망설여졌다. 나는 나의 확실한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아는 선배를 찾아가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어떠한 판단이 옳은 지를 상의했다.  선배는 두 자식을 위해서 절대로 아내와 이혼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나도 그것이 옳은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두 여인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池양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池양은 여태껏 미루어 온 결정을 눈 앞에 놓고 무슨 얘기냐고 흥분하여 서로가 옥신각신 심한 언쟁을 했다.  이 광경을 옆에서 보고있던 아내는 池양이 처녀의 몸으로 당신과 사귄 것인만큼 또 한 여인을 희생시킬 수 없으니 자기가 물러나겠다고 했다. 나는 아내의 말에 지금의 내가 말한 것은 심중히 생각한 결론이며 움직일 수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얘기가 쉽게 끝나지 않아 그날 밤 10시경 두 여인과 나는 집 부근에 있는 여관으로 장소를 옮겨 밤 늦도록 얘기를 나누었지만 결론을 못 얻었다.  밤이 늦어 잠깐 잠이 들어 새벽 5시경 눈을 떠보니 두 여인은 어린 것을 데리고 내가 풀어논 팔뚝시계와 외투에 든 돈 등을 꺼내 가지고 행방을 감춰버렸다.  나는 혹시 집으로 간 것이 아닌가 하여 집으로 가본즉 池양이 새벽 4시경 집에 들어와 잠자고 있던 맏딸 주현(3세)을 마저 업고 나갔다는 사실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불길한 예감에 하루 온종일 두 여인의 행방을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밤 9시가 조금 못되어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금 집 근방에 있는 여관마다 두 여인을 찾아 헤맸다. 겨우 신림동에 있는 K여관 101호실에 투숙한 사실을 알고 방문을 「노크」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여관 종업원이 창문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었다.  방에는 싸늘한 체온의 두 자식과 시체와도 흡사한 두 여인이 눈 앞에 뒹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인근 파출소에 신고를 하고 급히 S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밤 자정이 조금 지나 주현이가 숨지고 다음 날 하오 2시경 장남 재훈이마저 숨이 끊어졌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정으로 그때까지도 의식불명인 두 여인의 회복을 미칠 것같은 심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약 46시간만에 점차 의식이 회복되는 두 여인을 뒤로 하고 나는 당면한 병원비와 입원비를 마련코자 집으로 뛰어가 세간살이와 집을 헐값에 급히 팔아 가지고(내놓고의 뜻으로 보임) 병원으로 돌아오니 이미 대기했던 각 신문사 기자와 방송사 기자들의 취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시작되었다. 동시에 관할 경찰서 형사가 두 여인과 나에게 조서를 받아가고 다음 날 아내는 (직계)비속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며 회복되는대로 구속된다는 사실을 형사로부터 들었다.  그 후 두 여인의 건강은 놀라울이(놀라울) 만큼 빨리 회복돼 갔으며 음독을 하게 된 경위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새벽에 여관을 나선 그들은 시계를 팔아 받은 돈으로 수십 곳의 약방을 돌아 음독할 약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이혼을 해주고 어린 자식들을 다른 여자에게 주느니 차라리 자식과 함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池양은 나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닥쳐올 가족들의 비난과 자신의 운명을 비관한 나머지 각자의 이유는 달랐으나 죽는다는 것에 합의를 보아 기묘한 동반자살을 (시도)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며칠 뒤 池양의 가족들은 나를 혼인빙자 간음죄로 고소했으나 웬일인지 고소를 취하, 나는 풀려났으며 그 해 10월27일 두 여인은 노량진경찰서에 구속되었다.  나의 잘못으로 죄 없는 어린 두 자식이 희생됐고 또 두 여인이 구속된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는 수차 자살을 기도했으나 뜻을 못 이룬채 두 여인이 구속돼 있는 경찰서로 면회를 갔었다. 그러자 아내가 그 전 내가 자기 오빠뻘이 되는 사람 집에 있을 때「타이어」 2개를 갖고 간 일이 있다고 해서 절도죄로 피소, 나 역시 11월1일 구속되어 한 경찰서 감방 안에는 뭇사람들의 웃음과 조롱거리가 된 두 여인과 내가 마주 쳐다보이는 쇠창살문 안에서 고통스런 3일을 함께 지냈다.  11월5일 두 여인은 먼저 영등포구치소로 넘어가고 나 혼자 있다가 11월10일 나도 구치소로 넘어가 영등포구치소로 내에 3인이 같이 수감됐다. 검치가 시작되어 매일 검사 앞에 푸른 수의를 걸친 두 여인과 나는 같은 검사실에서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아내는 범행을 순순히 시인하나 池양은 내가 약을 사줬으며 자기는 절대 간여한 사실이 없다고 끝내 부인했다. 그러나 나는 살인죄에는 간여한 사실이 없다고 인정되어 절도죄로 10월 구형에 6월형을 선고받아 머리를 깎고 기결수로 노역장에 출역을 했으며 복역 중에는 두 여인의 공판 하루 전날 증인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두 연인은 구형에서 징역 5년씩을 선고받았다. 池양 측에서는 변호인을 선정하여 변론을 했으나 아내는 변호인도 없이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됐으며 池양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되어 석방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나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며 돌이킬 수 없는 과오인가를 뉘우치며 짧은 복역기간 동안이나마 열심히 반성하고 일했다.  나는 형기가 만료되어 지난 5월3일 구치소의 육중한 철문을 나와 자유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 날 나는 아직도 구치소 안에 혼자 남아있는 아내를 면회하였다.  아내는 슬프게 흐느끼면서 『당신을 전과자로 만들고 두 자식을 죽인 내가 죄가 많아요. 이제라도 당신의 행복을 위해 池양과 결혼하라』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당신이 석방되어 나오는 날까지 나는 꼭 당신만을 기다리겠소. 당신의 깊은 사랑을 나는 이해할 수 있으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몸 건강히 있으라』고 일러둔채 말문이 막혀 돌아서 나왔다. 이렇게 해서 첫날 면회를 간 후 이틀이 멀다 하고 나는 면회를 가며 매일 편지를 띄우고 있다. 이제 오직 나에게는 아내가 나오는 날까지 과거의 아픔을 거울삼아 힘껏 못다 이룬 둘만의 행복을 향해 줄달음칠 결심이다. 그래서 참되게 살겠다.  ■한 가족 음독자살 당시의 보도  「선데이서울」제207호 72년 9월24일자 P16에 보면 9월8일 金모여인과 정부 池모양이 신림1동 C여관에서 함께 음독자살을 꾀한 사건이 났다고 보도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金씨의 수기에서와 같이 金씨의 아들(1살) 딸(3살)도 함께 어른들에 의해 음독, 72년 9월8일 현재 아들만 죽고 나머지 3명은 가료 중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기사에는 池양과 金씨가 동거하는 곳에 나타난 金씨의 아내 鄭여인이 『위자료를 내면 양보하겠다』고 요구하여 옥신각신 하던 끝에 집에 돌아온 金씨가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라. 둘 다 꼴보기 싫다』며 내쫓아 버렸는데 엉뚱하게 본처와 정부가 동반자살을 하려다 실패, 딸만 절명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 리비아전 이끄는 정상 3인 속내는

    리비아전 이끄는 정상 3인 속내는

    19일 ‘오디세이의 새벽’을 가장 먼저 열어젖힌 정상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다. 그는 대(對)리비아 군사행동 관련 주요국 회의를 주재했고 개전 선언을 했다. 프랑스 전투기들은 앞장서 리비아 영공 안으로 진입했다. 2003년 이라크전 때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전쟁에 반대하며 뒤로 빠져 있었던 그림과 확연히 대조된다. 반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앞장서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개전 사실을 워싱턴이 아닌 브라질에서 발표했다. 전례를 찾기 힘든 경우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사르코지의 발표가 있은 지 한참 뒤에 따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이라크전 선언을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나란히 서서 했던 모습과 대비된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팔을 걷어붙인 데는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가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튀니지와 이집트 민주화 시위 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다 스타일만 구겼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이번 전쟁을 연임을 위한 지지율 견인의 기회로 삼았을 법하다. 사르코지 개인의 친미적 성향이 반영됐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라크전에서 미국 병력을 대체할 국제 연합군의 파병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르코지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미국에 우호적인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오바마는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절 ‘과감하게’ 이라크전에 반대하면서부터 전국적 정치인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또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아랍권에 우호적 메시지를 보냈다. 개인적으로 반전(反戰)과 반미(反美) 정서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미국 정부 차원에서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어 ‘제3의 전선’까지 도맡기는 벅차다. 그래서인지 미국 정부는 리비아 공습이 정식 전쟁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애쓰는 느낌이다. 오바마가 워싱턴을 비운 것도 그렇고, 1991년 걸프전 개전 때 미 국방부 건물이 북새통을 이룬 데 반해 지금은 썰렁한 것도 미국이 이번 전쟁에 거리를 두려는 기류로 읽힌다. 실제 미 정부 당국자들은 “미군의 개입은 초기 며칠 동안만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고 미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브리핑에 나선 미군 관계자도 ‘미군’이라는 말대신 ‘연합군’이라는 단어를 애써 사용하는 모습이다. 캐머런 영국 총리가 ‘조연’을 자처하는 것은 그동안 영국이 미국에 군사적으로 너무 퍼준 것 아니냐는 여론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안 그래도 지난 1월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이라크전 진상조사위원회에 불려나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미 언론들은 “그래도 캐머런으로서는 참전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덜 잃는 게임이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아크부대 총기사고 1명부상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파병된 특전부대인 ‘아크부대’에서 총기 오발사고가 발생해 1명이 부상했다. 합동참모본부는 17일 “16일 오전 9시40분쯤(현지시간) 아크부대 남쪽 3㎞ 떨어진 도시지역 작전 훈련장에서 훈련 중이던 최모(23) 하사가 동료 박모(24) 중사(진급예정)의 총에 맞아 왼쪽 옆구리에서 뒷목 방향으로 관통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日 지진현장 파병 현실적으로 어렵다”

    우리 군(軍)이 일본 대지진 현장 수습을 돕기 위해 파견될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정부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군사전문지 디앤디포커스는 16일 이명박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순방길에 “우리 군의 일본 파병에 대해 검토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파병에 대한 검토를 하고 있지 않다.”면서 “맞춤형 지원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해외 파병 당사자인 국방부와 군은 현실적으로 일본 파병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역사적인 관계를 고려할 때 우리 군의 일본 파병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낳을 수 있어 어렵다는 것이다. 군 고위 관계자는 “우리 군대가 일본에 들어가면 역사상 처음인데, 그런 면에서 보면 (일본이) 승낙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중국은 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 외교 채널을 통해 일본 정부에 의료구조부대·위생방역부대·해군병원선 등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의 파견 지원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반관영 통신 중국신문사 등이 지난 15일 보도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바레인軍 발포 300명 死傷

    바레인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면서 시위 사태가 더 큰 충돌을 향해 치닫고 있다. 셰이크 하마드 빈 이사 알할리파 바레인 국왕은 15일(현지시간) 밤 3개월 시한의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어 16일에는 군경이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뉴욕타임스는 군경 수백여명이 탱크와 헬기 등을 전진 배치하고 최루가스와 고무탄을 쏘며 시위대 해산작전을 벌여 2시간 만에 반정부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고 농성시설을 철거했다고 전했다. AFP, AP통신 등은 이날 충돌로 시위 참가자 3명, 경찰 3명 등 6명이 숨지고 300여명이 부상당했다고 전했다. 시위대는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바레인 군경의 진압 작전은 하마드 국왕이 계엄령을 선포한 지 하루 만에 이뤄졌다. 그는 수니파 왕정 교체를 촉구하는 시아파의 시위가 한 달째 이어지며 격화할 조짐을 보이자 아라비아반도 6개국으로 구성된 걸프협력협의회(GCC)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사우디아라비아군 1000명과 아랍에미리트(UAE) 경찰 500명이 바레인으로 진입했고, 이틀 만에 진압작전이 강행됐다. 시아파 주민들은 시위진압에 대한 항의 표시로 모스크로 몰려들어 새로운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바레인의 시아파 야권과 이란 등 시아파 국가들은 바레인 당국의 강경진압에 반발하면서 시위 사태는 국제적 분규로 번지고 있다.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외교부는 “외국군 파병은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하면서 테헤란 주재 사우디 및 바레인 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사우디의 바레인 파병에 항의했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바레인 국민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추악하며 실패로 돌아갈 것”이라고 비난했다. 바레인 정부도 내정간섭이라며 이란 주재 자국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미국은 현지 자국민들에게 대피를 권고하는 한편 제프리 펠트먼 국무부 중동담당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해 사태 해결에 나섰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바레인사태 종파 분쟁으로 치닫나

    바레인 정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에서 군 병력을 수혈받은 데 이어 국가비상사태를 15일(현지시간) 선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위대 옥죄기에 나섰다. 시종일관 안보를 내세우고 있지만 바레인 사태는 사실상 수니파와 시아파 간 종파 분쟁으로 치닫고 있다. 셰이크 하마드 빈 이사 알할리파 바레인 국왕은 이날 성명을 통해 3개월간 국가비상사태를 유지하겠다면서 “군총사령관은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고 밝혔다. 전날 사우디 정부는 바레인 정부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1000명이 넘는 군병력을 파견했다. UAE도 500명의 경찰 병력을 바레인에 투입했다. 바레인 정부는 걸프협력회의(GCC)에도 파병을 요청했다고 확인했다. 파병의 표면적 이유는 ‘걸프국의 안전 수호’다. 하지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가 바레인의 수니파 왕정을 보호함으로써 혁명의 여파가 자국으로 옮겨 붙는 것을 차단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바레인은 전체 인구 75만명 중 70%가 시아파이지만, 수니파인 알할리파 가문이 200년 넘게 나라를 지배해 왔다. 바레인에 해군 5함대를 두고 있는 미국은 걸프국에 바레인 국민의 권리를 존중하라고 경고했으나 퇴거를 촉구하지는 않았다. 미 정부 당국자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UAE 외무장관에게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사우디는 미국에 병력 지원을 미리 통보했다고 AFP가 미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지만 미 국방부는 이를 부인했다. 이란은 바레인의 걸프국 병력 수혈이 ‘외세 개입’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호세인 아미르 압둘레히안 외교부 국장은 “외국 군을 동원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 시위대를 탄압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비난했다. 바레인 7개 주요 야당연합은 “외국 군의 월경은 명백한 점령이고 바레인 국민에 대한 음모”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바레인에서는 한달째 이어진 시위로 지금까지 7명이 숨졌고 지난 13일에는 200명이 부상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양말사업 성공 前개그맨 정이래씨

    양말사업 성공 前개그맨 정이래씨

    ‘한때 잘나가다 망가진 연예인’에서 양말 사업가로, 변신에 성공한 전 개그맨 정이래(48)씨의 ‘역전 인생 2막’이 화제가 되고 있다. ●빚더미에 공사판 전전… 한때 자살 생각도 요즘 신세대들은 잘 모르지만, 정씨는 1990년대 인기 개그맨이었다. 1987년 M방송사의 개그콘테스트에서 동상을 받으며 데뷔한 그는 정신없이 방송에 출연하며 승승장구했다. 개그맨을 하기 전 광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했고, 대학졸업 후 광고회사의 조감독 겸 카피라이터로 근무하기도 했다. 개그 작가로 뛰면서 탁월한 친화력을 바탕으로 영화제작사의 홍보일도 했다. 1995년 어느날 그는 MC 강호동이 출연해 인기를 끌었던 MBC의 ‘오늘은 좋은날’을 마지막으로 홀연히 방송계를 떠났다. 미래가 불투명한 연예인보다 늦기 전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뭔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란 자신감도 들었다. 처음 정씨는 속옷 사업에 뛰어들어 괜찮은 돈벌이를 했다. 하지만 얼마 후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빚더미에 내몰린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국의 공사판을 돌아다녔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늘 모자를 눌러 쓰고 다녔다. 너무 힘들어 자살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정씨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린 두 딸 때문이었다. 정씨는 “떨어져 사는 두 딸이 너무 보고 싶어 삶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면서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의 인생철학은 ‘살아서 행복하다.’가 됐다. ●군부대 직접 돌며 영업… 올해 매출 10억 예상 마음을 다잡은 정씨는 2005년 경기 의정부시에 사무실을 차리고 양말 사업(www.jung7.co.kr)에 도전했다. 군 복무시절 무좀과 발 냄새로 고생했던 기억에서 착안한 것이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음이온 전문가의 도움으로 무좀과 발냄새를 없애는 양말 40여종을 개발했다. 상품 이름이기도 한 ‘J7’은 정씨의 성을 딴 ‘J’와 행운의 숫자를 뜻하는 ‘7’을 합한 것. 사업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갈 무렵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사업은 적자로 돌아섰고, 매출은 급감했다. 그러나 10여년 전만큼 좌절이 크지 않았다. 정씨는 직접 영업에 나서며 양말을 들고 군부대 등을 돌아다녔다. 친화력과 개그맨 경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난해 해외파병 부대인 동명부대를 시작으로 정씨가 만든 양말이 군부대에 납품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매출은 1억 4000만원. 올해 예상액은 10억원이 넘는다. 정씨의 성공담이 인터넷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는 요즘 보험사 등으로부터 강의 요청을 받고 있다. 정씨는 “살아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며 “퇴직자나 은퇴자들 모두 고민하는 그 순간에 절대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주말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OBS 토요일 밤 11시 20분) 강남의 최고급 호텔 1207호에서 칼에 9군데나 찔려 발견된 카피라이터 정유정. 휘발유 통을 들고 현장에서 바로 검거된 의문의 용의자 김영훈(신하균·왼쪽). 증거 확보를 위해 현장에 투입된 수사팀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 이들과 함께 발빠르게 움직이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바로 방송국 PD와 스태프들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범죄 없는 사회 만들기 캠페인’의 일환으로 살인사건 수사가 공중파를 타고 생중계되려는 상황. 이름하여 특집 생방송 ‘정유정 살해사건,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다. CCTV로 연결된 현장 수사본부에서는 검사와 용의자 간의 불꽃 튀는 수사가 벌어진다. 동물적 감각을 지닌 검사 최연기(차승원·오른쪽)와 샤프하지만 내성적인 용의자 김영훈. 전 국민의 유례없는 참여와 관심 속에 1박 2일간의 버라이어티한 수사극은 활기차게 진행된다. 그러나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점점 미약해지고 수사는 미궁속으로 빠지고 만다. ●명화극장 허트 로커(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폭발물 제거반’이라는 특수 임무를 띠고 이라크에 파병된 샌본 병장과 엘드리지 상사는 임무 수행 중 불의의 사고로 톰슨 팀장을 잃는다. 두 병사는 죽은 톰슨을 대신해 제임스라는 새 팀장을 맞이한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제임스는 폭발물 제거 현장에서 독단적이고 무리한 행동을 일삼으며 본인뿐 아니라 팀원들까지 위험에 빠트린다. 늘 팽팽한 긴장과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샌본과 엘드리지는 새 팀장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갈등이 깊어진다. 하지만 사막 한복판에서 교전을 벌이면서 제임스와 신뢰를 쌓는다. 그러던 중 그린 존 내에서 유조 탱크 폭발 사고가 나자 폭탄물 제거반은 현장 조사를 나가게 된다. ●오발탄(EBS 일요일 밤 11시) 가난한 집안의 가장 철호는 정신착란증을 앓고 있는 노모를 모시고 산다. 그의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생활고에 찌들려 살고, 남동생 영호는 한국전쟁으로 부상을 입고 제대한 청년으로 상이군인들과 어울려 다니며 울분을 어쩌지 못하고 폭발 일보 직전이다. 그의 여동생은 콜걸이며, 막내아들은 빈곤을 견디지 못해 신문팔이로 나선다. 철호는 만성 치통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치과에 갈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다. 견디다 못한 동생 영호는 마침내 권총을 마련해 은행을 털 결심을 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노모는 제트기의 폭음 환청에 시달릴 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가자, 가자’ 하며 외친다. 아내는 출산 일이 되어 병원에 갔으나 난산 끝에 절명하고 마는데….
  • [열린세상] 기록문화의 위기다/임상빈 중앙대 경영전문대학원 주임교수

    [열린세상] 기록문화의 위기다/임상빈 중앙대 경영전문대학원 주임교수

    얼마 전 청주를 다녀왔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을 둘러봤다. 관람객들이 집중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말투에 힘이 있는 노신사. 직지활자와 직지 제작과정 모형 그리고 신라·고려·조선시대의 목판본, 금속활자본, 목활자본 등 전시물에 대해 정성껏 설명하고 있었다. 교직에서 정년퇴임한 뒤 고인쇄물에 대해 설명하는 자원봉사자 일을 5년째 하고 있단다. 귀경길에 낭보를 접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도서 297권이 5월 반환된다는 소식이었다. 프랑스가 약탈해 간,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직지)의 친정’을 막 다녀온 여행에 기쁜 소식이 겹치면서 여러 감회가 교차됐다. 연구실에 돌아와 외규장각도서의 반환 협상 자료를 찾아봤다. 이 도서가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것은 1975년이다. 이 도서관에서 일하던 박병선씨가 파손도서 창고에서 발견한 것이다. 모리스 쿠랑이 ‘조선서지’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문화재는 국제법상 프랑스 소유를 인정받고 있다. 그 실존을 확인한 것만도 당시엔 대단한 성과였다. 우리 정부가 무려 17년이 지난 1992년 처음으로 약탈도서 반환을 요구했다. 이듬해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테제베 매각협상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이 문서의 반환을 약속했지만 곧 반환협상은 무산됐다. 프랑스가 등가등량교환을 조건으로 세운 탓이다. 약탈문화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똑같은 가치의 문화재를 자신에게 주고 고도서를 찾아가라고 ‘생떼’를 쓴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 정부는 이에 합의했다. 국민여론이 폭발했다. 합의 자체가 없던 일이 됐다. 5년이 지난 뒤인 1998년 민간 차원의 형식으로 외규장각도서 반환협상이 재개됐다. 그 이후 민간은 물론 정부의 갖은 노력 끝에 영속 귀속을 의미하는 장기 대여의 쾌거를 얻어낸 것이다. 문화재 반환을 둘러싸고 ‘생떼’를 쓰던 18년 전과 지금의 프랑스 정부 입장에 변화가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형식적 소유권을 끝까지 고집하는 프랑스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우리 국민의 요구대로 무상반환을 한다면 이것이 선례가 되어 세계 3대박물관으로, 프랑스의 자존심인 루브르박물관은 텅텅 비게 될지도 모른다. 노신사의 목소리가 이명 현상처럼 계속 달라붙는 느낌이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문명국만이 할 수 있는 대역사다. 그 기록을 제대로 보존하고 지키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일이다. 기록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우리의 기록역사문화는 세계 최고임을 인정받고 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문화유산이 직지, 훈민정음, 팔만대장경, 동의보감 등 7개나 된다. 우리보다 역사가 깊은 중국도 5개에 불과하다. 그것도 청나라 왕조에 국한된 것이다. 일본은 하나도 없다.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기준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세계 역사와 문화발전에 기여, 또는 세계사의 중요한 변화를 반영했다고 인정되지 않으면 등재가 불가능하다. 이같이 우리 기록문화를 인정받을 수 있음도 우리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다. 국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가치를 설파하던 노신사의 열정, 그에게 열중하던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이날, 아니 어느 날이든 청주고인쇄박물관을 다녀간 청소년과 어린이는 자발적으로 관람감상문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스스로 기록문화의 소중함을 깨닫고 기록의 필요성을 찾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도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본 사람들만큼 기록을 소중하게 여길까.’라고 되물어 본다. 왠지 답답하다. 외규장각도서가 발견된 이후 반환 요구를 요청하는 국민의 소리를 17년 동안 외면했던 정부, 등가등량교환에 합의했던 과거 정부의 모습에서 현재 정부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인 사찰, 대포폰, 하드디스크 파기, 아랍에미리트연합 파병 등에서 왜곡된 기록문화를 보게 된다. 현재 우리는 기록을 지키고 빼앗긴 기록물을 찾아오는 문제가 아니라 기록하는 자체의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기록문화의 위기다.
  • [데스크 시각] 럼즈펠드의 ‘역사적 기억상실증’ /박찬구 국제부 차장

    [데스크 시각] 럼즈펠드의 ‘역사적 기억상실증’ /박찬구 국제부 차장

    이라크전을 이끈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이 최근 회고록에서 한국인의 ‘역사적 기억상실증’(historical amnesia)을 거론했다. 2003년 방한 때 한국에서 일던 이라크 파병 논란을 되돌아 보면서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지구 반대편 이라크로 가서 죽고 다쳐야 하느냐.”라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50여년 전 미국이 젊은이들을 지구 반대편 한국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미군의 참전으로 자유와 경제적 성공을 일군 한국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느꼈다.”는 얘기다. 일방적 외교와 패권주의에 젖은 미국 내 대표적인 강경 우익 인사라는 점에서 럼즈펠드의 역사 인식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에서 미군이 보인 비윤리적이며 독선적인 행태가 서방의 다른 6·25전쟁 참전국들로부터 외면당한 사실도 재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한국인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과 다양한 가치의 표현을 ‘맏형’의 은혜도 망각하는 몰염치한 태도쯤으로 폄하하는 그의 시각에서는 섬뜩함을 넘어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의 오만을 떠올리게 된다. 굳이 럼즈펠드가 ‘역사’를 거론했으니, 한반도의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몇 가지 역사적 사실만 짚어 봐도 그의 인식이 얼마나 편의적이고 일방적인지 알 수 있다.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가열되던 1866년 대동강에 출몰한 이양선(異樣船)이 조선 관리의 퇴거 요구를 무시한 채 총과 대포를 쏘며 평양 주민들을 살육하고, 조선 상선을 약탈했다. 미국의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이다. 역사는 조선 영토에서 일어난 서양과의 첫 무력 충돌로 기록하고 있다. 5년 뒤에 미국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콜로라도호를 비롯해 군함 5척과 함재 대포 85문, 군사 1200여명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했다. 당시 광성진 전투에서는 어재연(魚在淵) 형제를 포함한 조선 관군 53명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몰살당했다. 미국과 한반도의 역사는 이렇게 침략과 희생으로 시작됐다. 가까운 해방 정국을 돌이켜 보면, 한반도를 대립과 긴장으로 몰아가며 자국의 이념과 국익을 확장시킨 냉전 구도의 한 축에는 분명 제국주의 미국이 있었다. 1945년 12월 전후(戰後) 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각각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으로 갈라져 격렬히 대립했다. 3상회의 결과의 핵심은 남북에 걸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과 최장 5년의 신탁통치안이었다. 당초 한반도 신탁통치안은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과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 먼저 제시했다. 소련 총리 스탈린은 임시정부 수립 후 4개국 원조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내 한 신문에서 미국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련은 찬탁, 미국은 반탁’이라는 구도를 대서특필함에 따라 국내에는 사실과 정반대로 알려지게 됐고, 이후 좌우의 극심한 대립으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이라는 과제는 희석되고 말았다. 이어 미국과 특수 관계를 맺고 있던 이승만은 사실상의 남북 분단을 의미하는 남한만의 단정(단독 정부)·단선(단독 총선거)을 처음으로 공개 주장했다. 1946년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 이른바 ‘정읍(井邑) 발언’을 통해서였다. 민족 자주독립 국가의 좌절과 남북 분단, 그로 인한 6·25전쟁의 연원에서 미국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이처럼 역사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물론 역사가 과거에만 머물 수는 없다. 과거에서 진보하고, 현재를 디딤돌 삼아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것이 역사다. 하지만 불편한 과거는 외면하고 무시해 버리는 역사 편식 증후군은 상호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의 역사 발전에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 럼즈펠드의 역사적 ‘팩트’ 상실증을 우려하는 이유다. ckpark@seoul.co.kr
  • “지난 8일 아프간 PRT 공격 현지 경호업체 소행으로 추정”

    국방부는 지난 8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지방재건팀(PRT) 기지를 공격한 것은 계약 해지된 현지 경호업체로 추정된다고 11일 밝혔다. 장광일 국방부 정책실장은 기자들에게 김관진 장관의 해외 파병부대 방문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PRT 기지 공격에 대해 “현지 경호업체 간 인수인계 과정에서 있었던 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 실장은 “현지에서 휴대용 로켓(RPG-7)에 의한 공격이 있기 하루 전 기존 경호업체가 정리됐고, 외곽 경비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업체를 새로 선정했다.”면서 “전 경호업체가 탈락한 것에 불만을 품고 공격한 것으로 현지 수사당국이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탈레반과 같은 적대세력의 공격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장 실장은 “아프간 정세는 안정적으로 보였다.”면서 “PRT 기지가 위치한 파르완 지역에서 산발적인 위협 활동은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상당히 안정적이었다.”고 전했다. 아프간에서 PRT 경호 임무를 수행하는 오슈노부대는 차리카시 주둔지(PRT 기지) 시설 공사가 끝남에 따라 지난달 24일 미군 바그람 기지에서 차리카 기지로 이전했다. 한편 지난달 11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으로 파견된 특전부대인 ‘아크부대’는 이달 중순부터 현지 특전부대와 연합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수출금융 지원은 국제관례… 이면계약 아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자력발전 수주를 둘러싸고 과도한 수출금융 지원과 이면계약 의혹이 제기되자 주무 부처인 지식경제부가 적극 해명에 나섰다. UAE 파병과 더불어 금융 지원까지 사실로 밝혀지면 ‘사상 첫 한국형 원전 수출’이라는 취지가 상당 부분 퇴색되기 때문이다. 최중경 지경부 장관은 31일 경기도 성남 분당의 한 반도체 업체를 방문한 자리에서 수출입은행의 금융지원 관련 이면계약 의혹에 대해 “처음부터 입찰할 때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이라면서 “일부 주장처럼 이면계약이라고 하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 장관은 그 사실을 왜 공개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원래 원전 수주에 관한 조건은 잘 밝히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경부도 이날 자료를 내고 “원전 등 해외플랜트 수주에 대한 수출금융 지원은 국제적인 관례”라면서 “미국(EX-IM 은행), 일본(JBIC) 등도 자국의 해외플랜트 수주를 위해 수출금융 대출을 제공한다.”고 해명했다. 또 “대출 규모와 금리 등 조건은 발주처인 UAE원자력공사(ENEC)와 협의를 통해 확정될 예정”이라면서 “원전 수출에 대한 수출금융대출 금리는 반드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이드라인에 따라야 하는 만큼, 저금리 대출에 의한 역마진 발생 우려는 없다.”고 말했다. 최근 한 방송사는 “순항할 것 같았던 원전 공사가 시작 단계부터 삐걱거린 배경에는 우리 국민들이 까맣게 모르는 미공개 계약이 있었다.”면서 “한국이 22조원에 달하는 공사 대금 중 12조원을 UAE에 빌려주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보고서-민족에 관하여’ 전시회 연 ‘물의 작가’ 나현 인터뷰

    ‘보고서-민족에 관하여’ 전시회 연 ‘물의 작가’ 나현 인터뷰

    “제 작품은 미술계 관계자들만 보시거나, 보신 분들도 감상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전 살기 위해서라도 제 스스로를 잘 포장해야 하는 작가라니까요. 하하. 아, 그리고 저 그림 잘 그려요. 못 그려서 이런 작업 하는 거 아니에요.”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나현(41) 작가. 신작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 2008-2011’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02-737-7650, 2월 27일까지)에서 그를 만났다. 작가의 너스레가 이해될 법도 한 것이 전시장은 미술관보다 박물관 같은 풍경이다. 1층에는 작가의 예전 작품들이 걸려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벽면의 액자. 프랑스 병사 12명의 실종 기록이 적혀 있다.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3000명을 파병했다. 당초 알려지기는 7명이 실종됐다. 작가의 집요한 탐문작업 끝에 12명으로 기록을 바로잡았다. 국가를 위해 희생된 개인, 그럼에도 실종자 숫자조차 틀릴 정도로 무관심한 대상, 무심히 걸려 있는 12개의 액자는 이들의 얘기를 품고 있다. 바로 옆에 전시된 ‘다리’ 연작 시리즈는 아연판 위에 물을 채운 뒤 그 물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대로 말린 작품이다. 12개 액자와 마찬가지로 흐릿한 기억의 층위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적 기억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려는 의도다. 성곡미술관의 ‘2011 내일의 작가’에 뽑힌 것을 기념해 내놓은 신작 ‘보고서-민족에 관하여’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출발한다. 바이칼호 올혼섬과 천일염 산지인 전남 신안군을 연결한 것. 연결고리는 질 좋은 소금을 따라 이동했다는 ‘맘모스 스텝’이다. 작가는 신안에서도 염전 물 위에 올혼섬을 그려넣는 작업을 했다. 물론 그림은 없고 영상자료로 만날 수 있다. 미술관 측은 “제한된 스튜디오에서의 작업이 아니라 직접 몸을 세워 발로 밟고 만난 경험에 근거하여 작업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내일의 작가’ 선정 이유를 밝혔다. →홍익대 회화과 출신이니 출발은 서양화였을 것 같다. -맞다. 대학 때까지는 교수님에게 칭찬도 받고 공모전 같은 데서 상도 받아 봤다. 그런데 미술 하면 이미지로만 생각하는 게 와닿지 않았다. 다른 작업을 하고 싶었다. →특별히 물을 택한 이유가 있나. -캔버스는 물감을 고정시키기 좋은, 쉽게 말해 말 잘 듣고 다루기 쉬운 매체다. 반면 물은 물감이 흩어지는, 다루기 어려운 매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오랜 시간 풍화작용을 겪는 기억의 특성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힌트는 한석봉에게서 얻었다. 가난 때문에 먹과 종이를 구하기 어려워 물에 붓을 찍어 바위에다 글씨를 썼다고 한다. 물로 쓴 글씨는 햇볕에 말라 날아가도 한석봉의 팔은 그 필법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사서 고생’이란 느낌이 든다. 한 작품에 2~3년은 걸리는데. -하하. 맞는 얘기다. 왜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느냐는 얘기 수없이 듣는다. 개인작업이라 비용도 부담스럽고, 주변의 이해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더욱이 물 위에 그린 그림은 비디오로나 남지, 미술품으로는 남지도 않는다. 심지어 이게 미술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내 관심은 역사를 보는 시각과 해석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다. 역사에 대한 고정 해석이 갖고 있는 견고한 틀 같은 것을 무너뜨려 시야를 틔우고 싶었다. →고고학적 작업인데 대중들이 받아들이긴 어렵지 않겠나. (이번 전시엔 퇴적물이 쌓인 신안 갯벌 사진이 있는데, 역사적 퇴적물에 집중하는 그의 작업은 이에 대해 오마주로 보인다.) -안 그래도 한국 올 때(2004년 영국 옥스퍼드대 순수미술학 과정을 마친 뒤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교수 직을 제안하면서 말린 분도 있었다. 지금 같으면 냉큼 제안을 받았을 텐데…(웃음). 흔히 중세를 암흑기라 하지만 당시 종교그림에는 세계관과 철학이 담겨 있다. 르네상스 이후 부르주아적 근대미술이 시작되면서 이게 단절됐다. 대중들은 그림을 보며 좋군, 나쁘군 하는데 그친다. 이래서는 소통이 안 된다. 작품이란 게 결국 작가와 대중이 대화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작가의 문법을 이해해야 한다. 작가가 작품으로 한발 내밀었을 때, 대중도 그만큼 한발짝 내밀어 줬으면 좋겠다. 판단은 그 다음 문제다. →다음 작품도 비슷한 방식인가. -주제는 4대강이다. 이미 독일 뒤셀도르프 라인강변에 큰 목책 하나 박아뒀다. 이 목책에 기록되는 물결의 흔적을 응용해 볼 생각이다. 한국에서도 4대강 유역에 설치한다. 예전에 한국의 청계천 복원공사와 영국 런던의 파링던 지역 복원공사를 비교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하다. 작가의 작품은 한곳에 더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미지의 틈’ 전시(02-2124-8941, 2월 13일까지)다. 반투명 슬레이트로 둘러쳐진 채 문이 잠긴 집이 그의 작품이다. 무슨 의미일까 이리저리 살펴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닐 거야. 이건 그들이 잊고 바꿔놓지 못한 역사의 한 조각이지.”라는 낙서를 발견하게 된다.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이 남긴 말이다. 작가는 한국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아니 재빨리 망각되는 게 더 충격적인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작가의 의도와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그 충격적 사건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흐릿한 퇴적물로 기억의 지층을 일깨우려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난다.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사진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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