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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 플러스-정치·안보] 국민 76%가 “해외 파병 찬성”

    국방부는 지난 8월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해와 파병 정책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 응답자의 75.5%가 우리 군의 해외 파병에 찬성했다고 11일 밝혔다. 반대는 20.9%, 모름(무응답)은 3.6%로 나타났다. 해외 파병의 장점과 관련해서는 응답자의 88.4%가 유사시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는 데 용이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반면 단점으로는 79.9%가 파병 지역의 위험을 꼽았다.
  • “저임금·체불… 외국인 노동자 부당 대우 개선이 목표”

    “저임금·체불… 외국인 노동자 부당 대우 개선이 목표”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됐습니다.” 10년에 걸친 한국 정부와의 소송 끝에 지난 6월 합법노조로 인정받은 이주노조(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우다야 라이(44·네팔) 위원장은 ‘코리안 드림’을 꿈꿨던 청년이었다. 라이 위원장은 25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면서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앞으로 정부와 대화를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노조는 사업장을 바꿀 때 기존 사용자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기본 3년, 연장 시 최대 4년 10개월까지만 한국에 머물 수 있도록 한 현행 고용허가제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 등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2005년 4월 24일 설립된 이주노조는 그해 5월 3일 서울지방노동청(지금의 서울고용노동청)에 노조 설립 신고서를 냈지만 반려됐다. 노동부와의 10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지난 6월 25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달 21일에는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 설립신고필증을 교부받고 공식적으로 합법 노조가 됐다. 라이 위원장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합심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얻지 못했을 결실”이라면서 “정식 노조가 된 만큼 앞으로 사업주와의 교섭을 통해 장시간 노동, 저임금, 임금 체불 등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는 2001년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아 3년을 경기 고양 원당동과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봉제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국내 체류기간 만료에 따라 2007년 네팔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 “하루 14시간 뼈빠지게 일을 해도 월급은 휴일·야간근로 수당 등까지 다 합해도 100만원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는 “근로 환경도 열악하지만 우리를 무조건 불쌍하고 미개한 사람들로 보는 한국 사회의 차별도 견디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현재 그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 결혼 이민(F6) 비자로 합법 체류 중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권 신장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주노조는 출범 초창기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반대, 정부의 이라크 파병 반대 등 국내 정치적 시위 활동에도 참여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라이 위원장은 “한국의 정치적 이슈에 발을 담그기보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보장, 근로조건 개선 등을 위한 활동에 전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 사진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월드피플+]‘400원짜리 청진기’ 제작…생명 살리는 의사

    [월드피플+]‘400원짜리 청진기’ 제작…생명 살리는 의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한 의사가 ‘저렴이 청진기’를 개발, 의료기구가 턱없이 부족한 지역에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영국 인디펜던트 등 해외 언론의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가자지구의 알시파병원(Al Shifa Hospital)에서 수 년간 일한 캐나다 출신 의사 타레크 로바니는 최근 3D프린터를 이용해 청진기를 제작하는데 성공했다. 로바니는 그간 성능이 좋지만 비싼 단점이 있는 고가의 청진기 대신, 일정 수준의 성능을 보장하는 동시에 제작비용이 훨씬 낮은 청진기 개발에 주력해왔다. 그가 청진기 개발에 몸소 나선 이유는 2012년 내전이 한창인 가자지구에 도착했을 당시 열악한 의료 환경 때문에 의사들이 진료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로바니는 “동료들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우리는 마땅한 청진기조차 없는 환경 때문에 환자의 가슴에 직접 귀를 대고 심장의 움직임과 호흡의 변화를 살펴야만 했다”면서 “이런 환경은 비극 그 자체였다. 그나마 있는 청진기들은 모두 모조품이었고 사용할 수조차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결국 그는 직접 ‘로바니의 글리아 프로젝트’(Loubani’s Glia project)라는 운동을 시작하고 청진기 등 의료기기를 제작할 수 있는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이 운동을 통해 모은 돈은 1만 유로(약 1312만 원). 로바니는 단 1만 유로를 3D프린터 및 청진기 기술개발에 사용했고 그 결과 단돈 30센트, 한화로 약 400원의 제작비로 고성능 청진기를 생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번에 개발한 청진기는 전 세계 의사들이 애용하는 유명 브랜드의 청진기인 ‘리트만 카디올로지3’에 버금가는 성능을 자랑한다”면서 “지난 6개월간 가자지구 내에서 3D프린터를 이용해 성공적으로 제작해 냈으며 보급을 앞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은 ‘자급자족’이다. 가자지구 내에서 직접 생산함으로서 유통 및 제작비를 줄여야 했다”고 덧붙였다. 캐나다-팔레스타인 혈통의 의사인 로바니가 만든 청진기는 현재 캐나다 의료기기 인증협회에서 정식 의료기기 인증절차를 거치고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해외여행 | 터키,누군가는 내 뼈 위에서 파티를 즐기리라① Turkish People

    해외여행 | 터키,누군가는 내 뼈 위에서 파티를 즐기리라① Turkish People

    이상한 일이다. 터키를 다녀와서 터키를 꿈꾼다. 잠을 자면서 꿔야 할 꿈을, 깨어나서 꾸는 식이다. 주말이면 동네 도서관에 가서 터키 관련 책을 빌리고 시내에 약속이 있으면 대형 서점에 들러 검색대 앞 컴퓨터에 ‘터키’라고 친다. 여행의 ‘뒷북’을 이렇게 둥둥둥 치고 있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니 이상한 일이다. 그 이유, 그 예감 감정은 이유가 있으니 생기는 것이다. 좋은 이유가 있으니 좋은 감정이, 불쾌한 이유가 있으니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긴다. 여행은 연기緣起의 법칙이 적용되는 대표적인 체험이다. 그 말은 터키의 ‘어떤 이유’가 나의 뒷북을 자극했다는 말이다. 터키에서 만난 사람들이 너무 친절했거나, 풍경이 억 소리 나게 좋았거나, 음식이 기가 막혔거나, 공기와 바람과 햇볕이 노곤한 고양이처럼 사람을 한 없이 흐느적거리게 했거나,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었거나…. 터키의 지중해 남서부 쪽, 안탈리아와 으스파르타, 데니즐리와 파묵칼레, 보드룸을 여행했지만 멀지 않은 시간에 터키의 또 다른 곳을 여행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위에 열거한 이유들이 치우침 없이 골고루 내 오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갑게도, 꽤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낯선 공간과의 연애 감정이 맹렬히 깨어나기까지 했으니 예감은 거의 확신이 되어 버렸다. 터키가 준 이 이상함이 고마울 뿐이다. ●Turkish People 의도가 거세된 사람들 지중해에서 만난 터키 사람들은 여행자에게 경계심이 없었고 무한히 열려 있었으며 댓가 없이 친절했다. 1만2,000km에 이르는 실크로드를 걸은 감동적인 기행문 <나는 걷는다>의 출발점은 터키다.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가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여정이다. 터키, 즉 아나톨리아 대륙을 횡단하는 제1권에는 ‘터키식 환대’라는 꼭지가 있다. 이런 내용이다. ‘도회르멘차하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던 작가에게 자신의 방을 숙소로 내준 사람은 찻집에서 만난 후세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옆 방 소파에서 잤던 집 주인은 외출을 한 상태고 올리비에는 고마움을 전달하기 위해 메모와 지폐를 놓고 집을 나온다. 그러나 오후에 그는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으며 후세인이 모욕감까지 느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여행자를 자기 집에서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이슬람 교도의 의무라는 사실을 올리비에는 몰랐던 것이다. 말을 전달한 사람은 말한다. “ 터키식 환대라는 것은 주인이 손님과 잠자리, 먹을거리를 아낌없이 나누며 손님에게 모든 권리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손님에게가 아닌 알라 왕국에서 받는 것이니 후세인은 당신이 터키인의 환대 전통을 위반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베르나르 올리비에처럼 나는 현지인의 집에서 잠을 잔 적도 없고 터키식 환대를 체험한 적도 없다. 오히려 처음 며칠 동안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노동의 모습이었다. 오렌지 쥬스를 파는 사람, 쇼핑 거리의 가게 주인과 점원, 기념품을 파는 사람 등 대부분이 얼굴에 수염을 산적처럼 기르고 팔에 털이 시커멓게 난 덩치가 산만한 남자들이었는데, 저 정도의 비주얼이라면 ‘공사현장’이나 ‘체험 삶의 현장’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이 믹서기를 사뿐히 갈아 오렌지 쥬스를 짠하고 내놓는다거나 1리라짜리 열쇠고리를 방글거리며 판다거나 하릴없이 벽에 기댄 채 이웃집 남자와 수다를 떨고 있으니 그 모습이 내게는 영 낯설 수밖에. 터키 사람에 대하여 내가 탄성을 지른 것은 여행 사진을 정리하면서였다. 수천장이 넘는 사진 중에 인물 사진이 꽤 많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고 맑고 천진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사람들은 모델처럼 포즈를 취해 줬으며 손을 흔들어 줬고 이를 드러내고 웃어 주었다. 마치 여행자가 사진을 찍고자 하면 기꺼이 생업을 멈추고 웃어 주어야 하는 것이 터키의 전통 환대법인 양 그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의 한국 사랑은 또 얼마나 지극한가. 20년 전 이스탄불을 여행할 때, 그랜드 바자르에서 수없이 들었던 ‘브라더’라는 말이 단순한 호객의 단어가 아니었음을,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터키 사람들에게 과분한 짝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이번 여행에서 절절히 확인했다. 차붐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프랑크푸르트를 여행해 봐야 알고 신동파가 얼마나 위대한 농구선수인지는 마닐라를 여행해 봐야 인정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전쟁에 1만5,000명을 파병하고 750명이 전사했으며 3,200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이유로 한국을 ‘피를 나눈 형제칸타르데시’라 부르는 그들의 정서는 터키 땅에 발을 딛어야만 제대로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데니즐리Denizli의 불단Buldan에서 만난 요사르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1956년, 6차 파병 때 참전한 분이다. 당시 한국으로 가는 배가 너무 흔들려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토하기만 했다고 어제 일처럼 회상했다. 행여라도 당신이 생각하는 형제 나라에 대해 서운한 것이 없냐는 질문에, 한국이 잘 되기를 바랄 뿐이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아크야카Akyaka의 바닷가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곱게 나이를 드신 백발의 할머니가 한국인들이냐며 손녀와 함께 다가와 우리들의 손을 잡고 한참을 목메어 했던 것도 당신의 돌아가신 남편이 스스로를 ‘코렐리한국인’라 부르는 ‘코레 가지한국군 참전 용사’였기 때문이다. “낯선 도시에서 비밀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했던 프랑스 작가 장 그르니에Jean Grenier가 그 공간으로 게크겔렌 군도를 꼽았다지만 내가 같은 꿈을 꾼다면 나는 의도가 거세된 사람들이 사는 터키의 지중해를 선택할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무한히 호의적이나 계산과 실리를 따지지 않는 사람들의 땅. 에디터 트래비 글 윤용인 사진 Bar & Dining 김은주, 윤용인 취재협조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02-336-3030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대통령의 스캔들 정책 결정에 영향 끼쳤다

    대통령의 스캔들 정책 결정에 영향 끼쳤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대통령/래리 플린트·데이비드 아이젠바흐 지음/안병억 옮김/메디치/432쪽/1만 8500원 역사가들은 사적인 스캔들 들추기를 꺼려 한다. 정사(正史)의 사료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흔히 영웅담과 신화는 ‘허구’라 불린다. 그러나 역사 속 인물들은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켰고 그 파장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기 일쑤였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대통령’은 그 신화와 진실의 간극을 파고들어 흥미롭다. 저자는 성인잡지 ‘허슬러’의 설립자이자 발행인인 래리 플린트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정치사를 강의하는 데이비드 아이젠바흐 교수다. 그들이 미국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의 사생활을 들춰냈다. 건국 초기부터 빌 클린턴까지 훑어 미국사의 민낯을 보여 준다. 책의 특징은 숨은 스캔들 공개에 그치지 않는 데 있다. 두 저자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된다. “방탕함은 자유이다. 말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 행각이 현실의 중요한 문제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제어할 수는 있다.” 책의 큰 흐름은 미국사를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정치인들의 사생활이 정책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 주는 식이다. 신문 기사며 각종 사료를 동원해 풀어낸 상관관계가 생생하다. 대표적인 사례는 빌 클린턴 대통령-르윈스키 스캔들과 9·11 테러의 연관성이다. 클린턴은 1998년 12월 알카에다가 항공기를 납치해 테러를 벌일 계획을 갖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 스캔들에 휘말려 있을 때였다. 그해 8월 알카에다는 아프리카의 미 대사관 두 곳에 폭탄을 던지면서 테러 강도를 높이고 있었다. 클린턴은 정보 당국에 오사마 빈라덴 사살과 테러기지 공격을 주문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당시 참모들은 대통령이 스캔들에 쏠린 관심을 분산하기 위해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며 군 통수권자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 부인에 얽힌 이야기도 충격적이다.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여러 비서와의 성관계와 밀애로 숱한 염문을 뿌렸다. 이에 충격받은 대통령 부인은 동성애자들과 어울리며 정체성을 찾았고 여성·인권운동의 기수로 변신했다. 대통령 부인은 루스벨트가 백악관에 입성한 뒤 남편의 뉴딜 정책을 비롯한 정책의 대변과 홍보에 나서 결국 대공황과 2차대전의 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위엄 있고 점잖았다’고 여겨지는 건국 초기의 위인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마흔둘의 나이에 여러 언론사를 거느린 미국 최초의 언론재벌이 된 벤저민 프랭클린은 자유분방한 카사노바로 명성을 떨쳤다. 독립전쟁 초기에 영국군과 미국 반란군의 규모는 두 배나 차이가 났다. 프랑스의 지원이 필요했던 대륙회의(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논의한 식민지 대표자 모임)는 감수성, 특히 성 규범에 개방적인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로 프랭클린을 선발했다. 프랭클린은 특유의 카사노바 기질을 발휘해 미국 지지 바람을 일으켰고 루이 16세는 워싱턴 장군의 오합지졸을 지원하려 육해군을 파병했다. 루이 16세가 미국 독립전쟁 지원에 지출한 13억 리브르 때문에 프랑스 재정은 파산했다. 책에서는 이것 말고도 다양한 가설이 역사적 사실과 자료들에 얹혀 풀어진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정부(情夫)가 베르사유조약과 국제연맹·제2차 세계대전에 미친 영향,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동성 비밀 연애와 노예제도 존속의 관련성, 매카시즘으로 잘 알려진 조지프 매카시의 몰락과 동성애 사건, 최장수 FBI 국장을 지낸 후버의 애정 행각과 직무 유기…. 책에서 주목할 대목은 스캔들을 이용하는 세력들이다. 저자들은 정치인의 합리적 정책 결정을 막는 건 그 사생활이 아니라 흠집 내고 학대재생산해 유권자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또 다른 정치인과 언론이라고 지적한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사르코지 대통령,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 등 지도자의 섹스 스캔들을 대하는 유럽인의 경우와 미국을 비교한다. 성 스캔들에 관심을 덜 가지면 정치 전반을 좀 더 성숙하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책을 읽는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뉠 것 같다. 한쪽은 스캔들을 따라잡는 재미의 탐닉이다. 번역자가 말했듯이 책은 침실과 성관계까지 까발려 외설적으로 비칠 수 있다. 다른 쪽은 그 스캔들을 어떻게 사회의 긍정적인 면에서 해석할지를 생각하는 부류다. 결국 무엇을 얻을지는 독자의 몫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국산 ‘명품 복합소총’ 왜 애물단지가 됐나

    [밀리터리 인사이드] 국산 ‘명품 복합소총’ 왜 애물단지가 됐나

    현대화된 국산 소총의 시초는 무엇일까요. 1974년 군이 미국 콜트사의 라이센스를 얻어 생산한 M16A1이 시작이었습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69년 베트남을 포함한 모든 아시아 국가 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자극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국산 소총 생산계획을 서두르게 됩니다. 1968년부터 시작된 미국 콜트사와의 라이센스 협상은 한미 양국의 합의로 1971년 3월 정식 계약을 맺으면서 현실화됐죠. 1973년 11월 부산에 국방부 조병창이 들어섰고 이듬해부터 M16A1을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순수 우리 기술로 개발한 무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갈증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1970년 창설된 국방과학연구소는 K-1A 기관단총과 K-2 소총을 자력으로 개발해 각각 1982년과 1984년부터 군에 보급했습니다. 이 총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군에 제식 소총으로 보급돼 있습니다. 군은 이후 누구도 개발하지 못한, 심지어 군사 강국인 미국도 개발에 실패한 총기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명품무기라던 K-11, 폭발사고로 신고식 국방과학연구소가 2000년부터 8년 동안 185억원을 들여 ‘미래형 명품무기’로 개발했다던 K-11 복합소총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K-11은 사실상 애물단지로 전락했습니다. 애초 이 무기는 5.56mm 자동소총과 20mm 공중폭발탄 발사기를 갖춰 군은 물론 많은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이용해 조준점을 잡으면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거리를 탄환의 회전수로 환산해 공중폭발탄을 적의 상공에서 터트릴 수 있다는 기능이 크게 부각됐죠. 1정당 가격은 1600만원 수준으로 책정됐습니다. 그러나 2009년부터 지금까지 900정 가량 군에 보급한 총기는 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2011년 10월 야전 운용성 확인사격 중 20mm 공중폭발탄이 총기 내부에서 폭발해 병사 1명이 얼굴과 손등에 열상과 찰과상을 입은 사건이 시작이었습니다. 2012년 2월까지 약 5개월간 진행한 국방부 감사에서 전자기파 간섭현상이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사업을 주관하는 방위사업청은 문제를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방사청은 다음해 사격통제장치와 격발장치를 개선하고 유탄이 일정 회전을 한 뒤에 폭발하도록 신관(기폭장치)을 개량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3월 경기 연천군 국방과학연구소(ADD) 다락대사격장에서 또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3명이 다치는 사고였는데요. 이번에는 레이저 거리 측정기와 사격통제장치 이상이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2~3번 눌렀는데 사격통제장치가 이것을 방아쇠 격발로 오인해 신관에 신호를 줬고 유탄이 폭발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결국 앞서 조사와 마찬가지로 총기 내부의 문제로, 개선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국방부는 자석만 대도 폭발한다는 지적까지 나오자 아예 군 관계자, 기자, 일반인들을 다락대사격장으로 초청해 실제로 총기에 자석을 갖다대는 시연회까지 벌이며 국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총기 외부에 폭발을 일으킬 요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다른 방향으로 나왔습니다. 방사청은 지난 4월 “공중폭발탄에 영향을 미치는 전자기파 간섭현상은 저주파수 고출력 전자파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외부의 전자기파에 공중폭발탄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구형탄은 모두 해당되고 전자기파 충격 센서를 단 신형탄만 문제가 없답니다. 비축한 구형탄 15만발은 1발당 16만원입니다. 하지만 240억원의 예산이 공중에 날아갈 위기에 처한 것보다 더 황당한 것은 여전히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문제는 전자기파 간섭현상…개발 사업 나락으로 방사청은 언론의 문제 지적에 “규정이 없어 탄약에 대한 전자기파 시험을 하지 못했다. 미국도 탄약에 대한 조사 규정은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무기이기 때문에 규정이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이어진 사고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그제서야 방사청은 저주파수(60Hz) 대역의 180dBpT 수준의 강한 자기장을 방출하는 장비가 존재하는 지, 있다면 무엇인지 전자파연구소를 통해 조사에 착수했다고 했습니다. 대신 신형탄을 사용하면 된다고 거듭 해명했습니다. 비난여론이 높았습니다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무기 개발 과정에 벌어지는 여러 시행착오 중 하나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빈번한 총열 고장 등 다른 문제도 많이 있었고, 올해 사업 예산이 60%나 삭감되는 수모를 당했지만 많은 이들이 완전히 기대를 버리진 않았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총기 가격의 77%(1306만원)를 차지하는 핵심 장치인 ‘사격통제장치’의 품질이 엉망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완전 전자식 총기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배경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방산 비리’가 있었습니다. 사격통제장치 문제는 2011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오쉬노 부대에서 처음 발생했습니다. 사격통제장치가 사격 도중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방위사업비리 합동수사단 조사에서 납품업체는 충격량을 3분의 1로 줄여 검사를 마친 뒤에 불량 부품으로 납품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시험검사를 납품업체가 직접 진행했고, 지난해까지 검사 조작 문제는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군에는 국방기술품질원이라는 품질검사기관이 있었지만 ‘눈 먼 봉사’나 다름없었습니다. 방산업체 E사 사업본부장 이모(52)씨와 차장 장모(44)씨, 과장 박모(37)씨가 구속 기소됐고 비난여론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질 않습니다. ●사격통제장치 방산비리에도 ‘눈 먼 봉사’ 완제품으로 보급된 사격통제장치 250대 가운데 208대가 결함으로 반품됐습니다. 나머지 660여대에서도 각종 균열과 이물질 발생 등 결함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폭발 사고가 벌어진 2011년부터 숱하게 감사를 벌인 국방부나 사업을 주관하는 방사청도 이 문제를 짚어내지 못했습니다. 문제가 있는 무기는 다시 만들면 됩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모두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눈 먼 봉사나 다름없는 군 기관들이 변화하지 않는 한 이런 문제는 또 벌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극소수 수출물량을 제외하면 군납 외에는 총기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주먹구구식 총기 개발 계획을 진행한 군에 대한 비난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릅니다. 척박한 시장이지만 투자는 부실하고 장기계획은 미흡하니 개발이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습니다. 양욱 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은 “평상시에 총기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사례가 없다. 누구도 보병 화기에 대한 얘기를 제대로 내놓지 못했고, 기본화기에 대한 투자 자체가 부실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현대전은 첨단장비의 각축장이라지만 전투력의 핵심은 보병의 전투력인데 전투기다, 전차다 대형 사업에만 골몰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닌다”면서 “사업 자체가 없는데 누가 총을 개발하려고 하겠나”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화기를 개발하는 업체에서 직접 사업을 끌고 나갈 수 밖에 없는 수준”이라면서 “정말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총기 개량사업조차 업체 재량에 맡긴 군 첨단 장비에만 골몰해 개발한 지 수십년이 된 기본 장비에 대한 개량조차 이제서야 이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K-1A 기관단총을 대체할 카빈형(총신이 짧은 돌격소총) K-2인 ‘K-2C’는 지난해부터 28사단에 시험 보급돼 올해 본격적인 도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개발업체가 이라크군 특수부대에 수출한 총기를 IS(이슬람국가) 병사가 노획해 사용하는 모습이 공개돼 눈길을 끌기도 했는데요. “우리가 만져보지도 못한 총을 IS군이 먼저 쏴봤다”는 우스갯 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K-2C에는 해외 유명 소총에는 기본으로 장착된 피카티니 레일시스템을 달아 조준경과 레이저 표시기 등 각종 광학장비를 추가로 장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미군 M4 소총에 도입한 신축형 개머리판을 장착해 휴대성과 견착 기능을 동시에 높였습니다. K-1A는 슬라이드식 개머리판이어서 견착이 쉽지 않은데 단점을 보완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K-2 소총에 접이식 대신 신축형 개머리판을 부착한 K-2A도 K-2C와 마찬가지로 군 보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량형이긴 하지만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만든 총기들인데요. 군은 이런 총기 개량 사업마저 업체의 재량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습니다. 짧은 총기 개발 역사 탓만 할 것이 아닙니다.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밀리터리 인사이드는 핫한 아이템을 가지고 매주 화요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더 많은 기사를 보시려면 아래 리스트를 보세요. (12)왜 한국 병사의 월급은 ‘세계 최하위’인가 (13)전투복 교체 돌고 돌아 6년…장병복지를 논하다 (14)6·25 전쟁 때 쓰던 수통 지금도 쓰고 있을까 (15)F-16D에 참패했다는 F-35A를 위한 변명 (16)미군 ‘물고기집 전차’가 서해를 지키는 이유
  • [폭주하는 아베] ‘전쟁 가능 나라’ 한발 더… 아베, 국민·야당 반발에도 軍國 야욕

    [폭주하는 아베] ‘전쟁 가능 나라’ 한발 더… 아베, 국민·야당 반발에도 軍國 야욕

    아베 신조 정권이 16일 집단자위권을 허용하는 무력공격사태법 개정안 등 11개 안보 관련법 제·개정안을 일본 중의원(하원)에서 야당의 반발과 퇴장 속에 표결, 통과시켰다.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는 안보 관련법안의 입법화가 9부 능선을 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위헌 논란과 시민사회의 반발 속에서 법안은 이날 최종 관문인 참의원으로 보내졌다. 참의원에서 표결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집권 자민·공명당 양당은 60일 안에 출석의원 3분의2 찬성으로 재가결할 수 있다. 법안은 오는 9월 27일 정기국회 폐회 직전까지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연립 여당은 중의원 본회의에서 자위대법 개정안을 비롯한 11개 안보 관련법 제·개정안을 여당 단독으로 가결시켰다. 이를 반대했던 민주·유신·공산·사민·생활당 등 주요 5개 야당 의원들은 표결 직전 퇴장했다. ●껍데기만 남은 日 평화헌법 아베 총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정적인 견해가 더 강한 집단자위권 법안 등의 안보법안 개정안에 대해 수적 우위를 앞세운 ‘정면 돌파’를 택하며 승부수를 던졌다. 집단자위권을 골자로 한 안보 관련법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방어를 위해서만 무력을 행사한다’는 전수(專守)방위 개념에 따라 자위대에 부과되던 각종 제약이 사라지게 된다. 자위대의 무력행사가 가능해져 평화헌법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자위대의 활동 범위도 전 세계로 확대된다. 무력공격사태법 개정안은 타국에 대한 무력 공격이라도 자위대가 무력행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제3국이 공격당할 경우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반격하는 권리인 집단자위권 개념을 담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지난 5월 “일반적으로 해외 파병이 금지돼 있지만 (무력행사의) 조건에 합치하면 타국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 유사시 미군 후방 지원을 상정한 현행 주변사태법을 대체할 중요영향사태법안은 ‘방치할 경우 일본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태’ 때 전 세계 어디에서나 자위대가 미군 등 외국 군대를 후방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조문을 담았다. 사실상 미군의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이들 법안에 대해 국제 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교전권을 부정한 헌법 9조에 위배된다는 헌법학자들의 지적과 시민사회의 반발이 확산되면서 아베 정권의 인기도 40% 이하로 떨어졌다. 반대 여론도 50%에 육박한다. 절차상, 내용상 위헌 논란 속에서도 아베 내각은 지난해 7월 1일 종래의 헌법 해석을 변경해 집단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방침을 각의에서 결정했다. 안보 관련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이번 회기 내 통과를 밀어붙이고 있다. 자민당 측은 “국가의 안전 보장 환경이 매우 까다롭게 변화하고 있고, 억지력과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관련 법안을 고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후쿠시게 다카히로도 “국제 정세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군사대국화와 남중국해에서의 공세적인 활동이 안보법제 제·개정의 주요 배경이 되고 있지만 일본 일반 여론은 아베 정권의 무리수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국민 8할 “안보 법안 이해 못 해” 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한 뒤 아베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일본을 둘러싼 안보 환경이 더욱 엄중해지고 있다는 인식 속에서 일본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전쟁을 미연에 막기 위해 꼭 필요한 법안”이라고 설명했다. 또 “참의원에서 논의에 대한 국민의 이해가 깊어지도록 설명에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의 집단자위권 법안 강행 처리에 대한 야당과 시민의 반발도 확산 일로에 있다. 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한 이날 밤 국회 주변에는 수만명의 시위대가 모여 중의원 통과를 규탄했다. 집권 여당의 안보법안 강행 통과에 반발하고 있는 오카다 가쓰야 민주당 대표는 “국민 8할이 정부 설명이 부족하다고 하고, 과반이 위헌이라고 보거나 법안에 반대한다고 답하는 와중에 강행 처리하는 것은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큰 오점”이라며 “아베 총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즉각 법안을 철회하는 것뿐”이라고 비판했다. ●中 “안보법 본질은 우릴 적으로 삼는 것” 아베 정권의 폭주에 대해 중국은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관영 환구시보는 이날 ‘자신의 망상에 취한 아베’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아베는 자위대가 해외에서 전투할 권리를 얻어 ‘정상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안보법의 본질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삼는 것”이라면서 “일본이 미국 뒤에 숨어 도발한다면 중국은 일본에 치명적인 반격을 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양제츠(楊潔?)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보국장은 이날 오후 베이징에서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첫 중·일 고위급 정치대화를 가졌으나 안보 법안 문제로 분위기는 싸늘했다. 양 국무위원은 회담에서 “일본 중의원이 안보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전후 일본이 군사안보 영역에서 채택한 사상 유례없는 행동”이라며 “우리는 엄중한 항의와 엄정한 입장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일본이 역사적 교훈을 깊이 새기고 평화 발전의 길을 지속적으로 걸을 것을 정중히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베이징 이창구 특파원 window2@seoul.co.kr
  •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덕분에 한국 발전”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덕분에 한국 발전”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12일(현지시간)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희생 덕분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3차 개발재원총회 참석차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방문한 윤 장관은 시내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을 방문해 이같이 밝히고 멜레세 참전용사회장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에게 “한국전쟁에 황실근위대와 같은 최정예 부대를 보내줘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윤 장관은 한국전 전사자 122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06년 건립된 참전용사기념비에 분향하고 묵념했다. 에티오피아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황실 정예부대(황제 근위대) 6037명을 파병했다. 윤 장관은 참전용사들과 10여분간 카뉴부대 전쟁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이들 장병은 한국을 위해 피를 흘렸을 뿐만 아니라 한 달에 40달러씩 기부해 전쟁고아를 돕는 데 사용했다”는 전쟁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에 감사한 마음을 거듭 표했다. 윤 장관은 참전용사들에게 “우리는 한 형제이자 가족”이라면서 “참전용사를 전담으로 돌볼 수 있는 상주무관이 조만간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윤 장관은 13일(현지시간)에는 아디스아바바 하옐롬 아라야 장군 초등학교에서 열린 어린이 도서관 개소식에 참석해 “한국은 교육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룬 모범 사례로 전 세계 친구들과 우리의 경험을 나누고 싶다”고 강조했다. 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외교부 공동취재단
  • [포토] 태권도 검은띠 수여받는 외국인들

    [포토] 태권도 검은띠 수여받는 외국인들

    태권도 사범인 서민욱 중위가 8일(현지시간) 남수단 보르 한빛부대 연병장에서 UN에 파병된 에티오피아, 우간다, 인도, 과테말라 등 18명의 군인들에게 검은띠를 수여하고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화정 서강준, 이연희와 첫 키스 ‘전쟁 속 격정적인 입맞춤’ 안타까운 로맨스

    화정 서강준, 이연희와 첫 키스 ‘전쟁 속 격정적인 입맞춤’ 안타까운 로맨스

    화정 서강준, 이연희와 첫 키스 ‘전쟁 속 격정적인 입맞춤’ 안타까운 로맨스 ‘화정 서강준’ ‘화정’ 서강준과 이연희가 위태로운 첫 키스를 나눈다. MBC 월화드라마 ‘화정’측은 정명(이연희 분)과 주원(서강준 분)이 위태로운 전쟁터 한복판에서 입맞춤을 나누는 스틸을 공개했다. 앞서 지난 24회 방송에서는 광해(차승원 분)가 계속되는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명과 후금의 전투에 조선군사를 파병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명공주(이연희 분)는 반대를 무릅쓰고 화기도감 장인의 신분으로 파병에 가담해 주원(서강준 분)과 함께 전쟁터로 향했다. 공개된 사진 속 정명과 주원은 격정적인 입맞춤을 나누고 있다. 위태로운 전쟁터 한가운데서 두 사람은 뜨거운 눈빛을 주고 받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다. 제작사는 “오는 25회, 정명과 주원이 역사적인 첫 키스를 나누게 될 예정”이라며 “정명과 주원이 전쟁터라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함께 놓인 만큼,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 역시 갈수록 깊어질 것이다. 두 사람의 안타까운 로맨스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한 회가 될 것이다. 기대해달라”고 전했다. 한편 서강준과 이연희의 키스신은 6일 오후 10시 MBC 드라마 ‘화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MBC ‘화정’(화정 서강준 이연희)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열강에 둘러싸인 조선… 강경했던 대외 정벌의 역사

    열강에 둘러싸인 조선… 강경했던 대외 정벌의 역사

    조선의 대외정벌/임홍빈·유재성·서인한 지음/알마/464쪽/1만 9800원 삼국시대 이래 2000여년의 한국사에서 900~1000번 이상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가운데 ‘대외 출병’ 횟수는 얼마나 될까. 삼국시대 이외에는 그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한데 드물긴 해도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원정’에 해당하는 군사작전이 있었고, 그 역사적 의미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책은 그간 중요도에 비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조선의 대외 정벌에 대해 살피고 있다. 필자 셋이 3부로 주제를 나눠 조선 대외 정벌의 실체를 재구성하고, 재평가했다. 1부 ‘대마도 정벌’은 세종 때의 왜구 토벌작전을 담고 있다. 조선의 기본 외교정책은 ‘사대교린’이었고, 이는 왜구에도 해당됐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어도 조선의 회유정책은 변함없이 유지됐다. 한데 세종 초기에 이르러 갑자기 강경노선으로 돌아섰고 대마도 정벌까지 단행했다. 1부에선 이 같은 공세적 대처가 지니는 군사적 의의, 두 차례에 걸친 왜란과 병탄 그리고 최근 일본의 군국주의화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살피고, 이에 담긴 역사적 함의를 짚어 본다. 2부 ‘보주 강 야인토벌’ 역시 세종 대에 이루어졌다. 야인, 즉 여진족은 숙신, 말갈 등으로 불리던 중국 동북지역의 민족이다. 개국 초기 조선의 북방은 세종의 개탄처럼 ‘야인들의 사냥터’였다. 여진족의 침탈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세종은 과감히 이들을 토벌하고 사군과 육진을 개척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여진족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해 불씨를 남겼고, 이후 두 차례 호란으로 청과 군신지맹을 맺는 치욕을 겪게 된다. 이는 훗날 조선의 쇠망과 일제식민지화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3부 ‘나선정벌’은 이전 두 차례의 대외 원정과 성격이 다르다. 우선 ‘나선’(러시아)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파병도 조선의 의지가 아니라 청의 강요로 이뤄졌다. 17세기 중반, 동진정책을 펼치던 제정러시아와 청나라는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군신 관계에 있던 조선으로서는 번번히 패하던 청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고 실제 청의 승리에 일조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은 ‘소중화’ 의식, ‘친명배금’ 정책 등에 매달려 갑론을박하고 있었지만, 냉혹한 국제관계는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힘의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것을 나선정벌은 여실히 보여 줬다. 저자들은 특히 효종의 ‘북벌’이란 이상이 현실의 벽에 부닥쳐 좌절한 것은 우리가 여러 각도에서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英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여왕부터 전원 군복무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英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여왕부터 전원 군복무

    ▲ 여왕도 군용트럭 몬 수송장교 영국 왕실의 왕위 계승 서열 5위인 해리 왕자(Henry Charles Albert David Windsor)가 19일(현지시간) 10여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고 영국 왕실이 밝혔다. 해리 왕자가 군 복무를 마치면서 영국 왕실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가문이라는 칭송이 쏟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왕은 물론 왕실 남성 모두가 군 복무를 했으며, 대부분 최전선에 자원해 전투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여왕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송보급장교로 근무하며 직접 군용트럭을 운전했고, 아들인 찰스 왕세자(Prince of Wales) 역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6년간 해군장교로 복무했다. 찰스 왕세자의 동생인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Andrew Albert Christian Edward) 역시 1979년 소위로 임관해 2001년 해군중령으로 전역하였고, 복무기간 중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해 최전선에서 헬기 조종사로 활약했으며, 해리 왕자의 형인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William Windsor) 역시 영국 공군에서 근무하고 전역했기 때문이었다. 왕실 인사 대부분이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군 복무를 했다면, 이번에 전역한 해리 왕자는 진심으로 군대가 좋아서 군복을 입었던 특이한 케이스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군복을 입고 장난감 총을 들고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유난히 군대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 “진짜 장군 계급장을 달겠다”...아프간 파병 자원 영국 최고의 사립 명문 이튼 칼리지(Eton College)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했다. 그는 사관학교 입학 전에는 누드파티 파문과 대마초 흡연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샌드허스트 입학 이후에도 파키스탄에서 유학 온 교환생도에게 ‘파키'(Paki)라는 비하 표현을 사용해 징계를 받기도 하는 등 잦은 구설에 시달렸다. 그러나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소위로 임관하면서부터는 철이 든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자대 배치를 영국 육군 내에서도 최정예 부대로 손꼽히는 근위대, 그 중에서도 400년 전통의 블루스 앤 로열스(Blues and Royals) 근위기병연대에 배치 받았는데, 부대에 짐을 풀자마자 지휘관을 찾아가 이라크 파병 부대에 차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왕실이 극구 반대하면서 해리 왕자의 이라크 파병은 좌절되었지만, 그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자원했고 할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해 아프가니스탄 남부 헬만드(Helmand) 지역으로 파병되었다. 탈레반 거점이었던 이 지역에서 해리 왕자는 적진 한복판에 침투해 전투기나 공격헬기의 공중 공격을 유도하는 합동최종공격통제관(JTAC : Joint Terminal Attack Controller)로 활약하며 실전을 겪었다. 해리 왕자가 이 부대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비밀이었으나, 미국의 한 폭로 전문지가 해리 왕자의 임무수행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하면서 탈레반은 눈에 불을 켜고 해리 왕자를 찾아 나섰고, 결국 당시 왕위계승 서열 3위의 왕세손의 안전을 우려한 국방부는 해리 왕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본토에 있는 부대로 전출 명령을 내렸다. 그는 본토 복귀 이후 지휘관과 국방부에 “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장에 파병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와중에 헬기 조종사가 되면 파병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항공장교에 지원해 합격했다. 대위로 진급한 그는 2011년 공격용 헬기인 아파치 AH Mk.I(AH-64D)의 조종사(Pilot) 및 사수(Co-pilot gunner) 자격을 취득했는데, 그는 교육 수료식에서 최우수 특등 사수(Best co-pilot gunner) 상을 수상하고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지원했다. 그는 2012년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되어 실전에 투입됐는데, 실제 전투에 나가 적지 않은 탈레반 병사들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임무를 마치고 영국에 복귀했을 때 “사람을 사살한 일이 있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빼앗았다”면서 아프가니스탄군과 NATO 치안유지군 부상자 구출 작전에 투입되어 상당한 수의 탈레반을 사살한 사실을 시인했다. 해리 왕자는 2013년 영국 본토로 돌아온 뒤 제3항공연대에서 지휘관 및 참모로 근무했으며, 2015년 1월 영관장교 자격시험에 통과, 소령 진급 대상자가 되었다. 그는 자격시험 통과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징적인 계급이 아닌, 진짜 군 복무를 통해 장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결국 5개월 만에 군복을 벗었다. 그가 전역을 결심한 배경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와 더불어 위험한 전장을 선호하는 해리 왕자를 걱정한 찰스 왕세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해리 왕자는 전역 후 3개월 일정으로 아프리카를 찾아 환경보전 활동에 나설 예정이며, 추후 상이군경들을 대상으로 한 복지 사업에 뛰어들 것으로 알려졌다. ▲ 노블리스 오블리제 : 권리와 책무 영국 왕실 인사들은 모두 명예계급을 가지고 있다. 여왕의 남편이자 윌리엄·해리 왕자의 할아버지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The Duke of Edinburgh, Philip Mountbatten)은 영국 육·해·공군 명예원수 계급을, 대위로 전역한 윌리엄 왕세자 역시 육·해·공군 명예원수 계급을 가지고 있으며, 중령으로 전역한 앤드루 왕자 역시 명예 해군소장 계급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의전을 위한 상징적인 명예계급이지만, 이들은 모두 실제 군에서 복무했고, 실전에 참가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다. 영국 왕실이 병역에 엄격한 것은 지도층으로서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다. 해리 왕자의 가문인 윈저(Windsor) 왕가는 해리 왕자의 고조할아버지인 조지 5세(George V)부터 병역 명문가(?)였다. 조지 5세는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당시 영국 해군 최강의 전함이었던 1급 전열함(1st rate ship of the line) HMS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견습 생도로 해군 생활을 했으며, 그 아들인 조지 6세(George VI) 역시 해군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포술장교로 활약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런던 대공습 작전을 벌여 런던 곳곳에 초토화되었을 때 조지 6세는 아내인 메리 왕비와 함께 폐허가 된 런던 시내를 누비며 장병과 시민들을 격려하고 구조 및 복구 작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딸인 엘리자베스 2세를 군에 입대시키며 솔선수범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에서 영국인들이 적지 않은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60~70% 이상의 지지율로 군주제 유지를 지지하는 것은 그동안 영국 왕실이 보여주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 다이애나비 사건부터 앤드루 왕자 불륜 사건,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의 마약 및 퇴폐 파티 사건 등 온갖 추문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던 왕실이지만, 왕실 구성원들은 스스로 군복을 입고 자청해서 전장에 나가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전장을 누볐고,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영국 국민들은 왕실 인사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부와 권력, 명예를 가진 자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공동체 구성원들의 화합과 단결, 이를 통한 공동체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군복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자에게만 시민의 자격을 부여했고, 공화정 당시 로마에서는 의회를 구성하는 귀족들은 물론 귀족들 가운데 선거를 통해 선출된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Consul)들 사이에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공공시설이나 도로를 신축하거나 보수하는 일은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졌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은 앞다투어 로마군의 선봉에 서서 싸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16년간의 전쟁에서 사망한 집정관의 수는 무려 13명에 달했다. 사회 지도층이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과 재산, 명예를 기꺼이 내놓는 전통이 있는 나라는 혼란이 있더라도 빠르게 사회통합을 이루어 위기를 극복했고, 대개의 경우 강대국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부정부패와 사회분열을 거듭하다가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망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가 보여주는 불문율이다. 이러한 불문율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사회 저명인사나 부유층은 병역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 기부나 봉사활동에 대단히 인색하다.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정치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고, 자녀의 병역비리에 관여하거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갑질’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자녀에게는 수억대의 최고급 외제차를 선물하고 매달 여가생활에만 일반 봉급자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쓰면서도 길거리의 자선냄비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넣는 데에는 대단히 인색하다. 부와 권력, 명예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해리 왕자도 그랬고, 미국의 주요 대권주자나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군복을 입고 전장을 누볐거나 심지어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인사도 적지 않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아는 자가 사회지도층이 되어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니 여기에 국민들도 호응하여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OECD 가입,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 진입을 논하기에 앞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지도층의 인식부터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인천상륙작전 성공 하고도…맥아더 해임된 결정적 이유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하고도…맥아더 해임된 결정적 이유는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 한다. 16개국에서 전투부대를 파견한 국제전이었던 이 전쟁은 결코 잊지 못할 전쟁임에도 정치, 이념적 시선에 따라 판이하게 평가된다. 우리 민족에겐 여전히 상흔이 씻기지 않는 최대의 비극이다. 6·25전쟁 발발일을 즈음해 관련 서적들이 봇물을 이룬다. 논란이 분분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아 주목된다. 이 가운데 ‘맥아더’(플래닛 미디어), ‘6·25전쟁과 미국’(청미디어)은 한국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와 미국 수뇌부 동향을 집중 분석했다. 미국의 전쟁전문가 리처드 B 프랭크가 쓴 맥아더 평전 ‘맥아더’는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진짜 얼굴이 도드라진다. 책 속의 맥아더는 ‘최고의 업적과 최악의 실패가 공존하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한국전쟁은 특히 그에겐 ‘최고 영광과 최악 수모를 함께 안겨 준 사건’이다. ‘5000대1 확률’의 도박 같은 인천상륙을 감행, 전세를 역전시키고도 중공군 개입을 불렀다. 합동참모본부 명령과 반대로 국경 근처까지 돌진해 중국을 자극한 것이다.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 확산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을 공개 비난하고 맞서 해임됐다. 책에서 그 해임 사건은 “너무나 분명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국가 정책에서 벗어나 해임당한 것이며 적절한 조치였다”고 평가된다.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군 731부대장이 전후 전범재판서 무죄받는 조건으로 미국에 실험자료를 건넨 거래에 맥아더가 개입됐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언론인 출신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의 ‘6·25전쟁과 미국’도 맥아더 행적을 촘촘하게 추적하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 애치슨 국무장관과 비교한 맥아더의 전쟁 수행 과정이 도드라진다. 트루먼 행정부가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군사력으로 방어할 대상 국가에서 제외한 한국에 지상군까지 파병하기로 결정한 과정이 명쾌하다. 당초 38선 이북으로의 북한군 격퇴를 목적으로 했던 유엔군 작전 목표를 북진통일로 바꾼 과정, 북한 완전 점령을 눈앞에 둔 크리스마스 공세가 중공군 개입으로 참패한 원인도 흥미롭다. 맥아더 해임을 놓고는 “맥아더의 아시아 중시주의에 대한 트루먼과 애치슨의 유럽 중시주의의 승리”라고 잘라 말한다. 트루먼, 애치슨이 전략적으로 유럽을 중시하고 한반도에 깊게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고 한 반면 맥아더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한반도를 굳게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차이가 6·25전쟁 당시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책에 혼선을 불렀다고 본다. 전쟁 전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을 빼는 애치슨 발언이나 트루먼이 1951년 4월 맥아더를 해임하고 휴전으로 나아간 것도 유럽 중심주의 때문이다. 반면 맥아더는 공산주의 척결을 위해 북진 당시 평양∼원산 라인에서 방어선을 치고 중국 참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한 채 압록강까지 진격해 패했다는 주장이다. 트루먼, 애치슨, 맥아더의 긴밀한 협력이 있었다면 맥아더 해임 사태가 없었을 것이며 6·25전쟁도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6·25전쟁 당시 외국 군대의 개입 배경과 전쟁 실상을 추적한 책들도 눈길을 끈다.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책미래 펴냄)은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지상군을 조명하고 있다. 영국인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이 50여명의 생존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책에서 저자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은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치른 전쟁 중 가장 인명 피해가 크고 잔인했다. 그럼에도 당시는 물론 지금도 영국인들은 그 전쟁을 모르고 있다.” 전쟁에서 영국군은 포클랜드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전사자를 모두 합친 수(783명)보다도 더 많은 1087명이 전사했다. 영국 제27여단과 41코만도 부대, 그리고 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의 참전기를 통해 전황이 가장 격렬했던 1950년 마지막 몇 개월의 최전선 상황이 생생하다. 특히 불과 1주일 전에 출발 명령을 받아 무기나 보급품도 제대로 없는 상태로 파병된 영국군의 부산 방어선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작전 수행 등 극적인 순간들이 소개된다. 박실 전 의원이 쓴 ‘6·25전쟁과 중공군’(청미디어 펴냄)은 1990년대 이후 풀리기 시작한 공산권 공문서·자료를 통해 전쟁 시기 중공군의 움직임을 집중 추적했다. 북한 인민군의 주력이 된 팔로군의 조선인들, 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이 40여 차례나 스탈린을 조른 이야기, 마오쩌둥의 아들까지 참전한 배경, 마오쩌둥의 지구전 방침, 38선 경계를 둘러싼 줄다리기 과정이 실감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미 “IS 격퇴” 군사고문단 450명 추가 파병

    이라크군 훈련을 위해 미국이 군사고문단 450명을 추가 파병한다고 알자지라가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라크 내 미 군사고문단 규모는 3080명에서 3500여명으로 늘어난다. 이라크 북부 도시 모술을 점령하고 일년째 건재한 이슬람국가(IS)가 최근 안바르주 주도인 라마디를 함락하고, 이곳에서 110㎞ 떨어진 수도 바그다드까지 위협하는 등 이라크 안에서 세력을 키우자 취해진 조치다. 조시 어니스트 미 백악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하이데르 알 아바디 이라크 총리 요청을 받아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면서 “안바르주 타카둠의 이라크 공군기지에 배치될 이들은 이라크 정부군과 친정부 수니파 부족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추가 파병 결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IS 상대 지상전 병력을 투입할 계획은 없고, 이에 대해 미국 공화당은 오바마 정부를 비판 중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특히 IS와 같은 종파인 수니파를 훈련시키는데 관심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안바르주는 수니파 지역으로 바그다드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과 가까운 요충지”라면서 “IS 격퇴를 위해 수니파의 참전, 수니-시아파 연합전선이 필수적”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IS의 세력 확장 와중에 9·11 테러를 저지른 알카에다 조직은 와해됐고,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는 “IS와의 전투”를 선언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보도했다. 알카에다가 분파 격인 IS로 인해 쪼개졌고, 알카에다 최고 지도자인 아이만 알자와히리도 의지할 데 없는 상태로 전해졌다. 역으로 헤즈볼라 지도자인 사예드 하산 나스랄라는 TV 연설을 통해 “시리아와 레바논 국경 지대인 콸라문에서 IS와의 전투가 시작됐다”면서 “알카에다 대신 헤즈볼라가 IS를 상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태국의 원빈’도 못 피한 軍입대 제비뽑기

    [밀리터리 인사이드] ‘태국의 원빈’도 못 피한 軍입대 제비뽑기

    우리에게 동남아국가 ‘태국’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관광’일 겁니다. ‘아시아의 진주’로 불리는 푸껫부터 치앙마이, 파타야 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춰 전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주목할 만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계 군사력 비교 사이트 ‘글로벌 파이어 파워’(GFP)에 따르면 정규군 30만 6000명(한국 62만명)으로 데이터를 취합한 106개 국가 중 20위(한국 7위)에 랭크돼 있습니다. 한 해 국방 예산은 우리나라의 6분의 1인 54억 달러입니다. 남과 북이 대치해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있는 우리와 비교할 수준은 못 됩니다만, 동남아시아 해군 중 유일하게 항공모함(헬기항모)을 보유하고 있고 F-16 전투기도 운용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황태자 피스트 디스퐁사-디스쿨 소장을 사령관으로 육군 3650명, 해군 2485명, 공군 45명을 파병했고 T-50 고등훈련기 등 우리 무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고마운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나라, 참 재밌는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징병제 국가이긴 한데 뭔가 다릅니다. 우리는 군 면제자가 극소수여서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군대 가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운을 시험해야 한답니다. 군 면제자를 비난할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바로 운을 시험하는 과정이 ‘제비뽑기’이기 때문입니다. ●검정색과 빨강색…그날, 운명이 갈린다 제비뽑기로 군대가는 나라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시죠?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물의 축제 ‘송크란 축제’를 앞둔 4월 초 태국 전역이 들썩들썩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제비뽑기가 시행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체검사는 통과해야 합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겠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즐거운 표정으로 이 황당한 행사에 참가합니다. 뽑기함에 슬쩍 손을 넣고 종이를 하나 쥡니다. 빨간색 종이를 뽑았다면? 당신은 군대를 가야 합니다. 반대로 검은색 종이는 면제라고 하네요. 색상이 있는 종이 대신 작은 글씨가 씌어 있는 종이나 구슬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슬아슬할 것 같지만 징집될 확률은 20% 정도로,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 결과는 그 자리에서 통보해주는데요. 오히려 면제 판정을 받은 이들 가운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상당수 남성이 징집 대상이 됐다는 얘기에 두 손을 번쩍들고 기뻐하는데요. 징병담당자를 부둥켜안기까지합니다.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데요.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는 연간 징집 가능 인구가 68만명으로,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군대를 가야 합니다만, 태국은 상황이 다릅니다. 태국에서는 남성이 21세가 되면 징집 대상이 됩니다. 인구 6770만명인 태국은 해마다 징집 대상이 되는 남성이 104만명에 달합니다. 군 복무자의 3배가 넘기 때문에 모두가 나라의 부름을 받을 순 없겠죠. 군의 대우도 좋습니다. 태국의 대졸자 초임은 월 1만~1만 2000바트(33만~40만원) 수준입니다. 가정을 꾸려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가 되는 수입이 1만 5000바트(50만원)입니다. 그런데 군에서 숙식을 제공하면서 월 3200~9000바트(10만~30만원)를 준다고 하니 솔깃할 수 밖에 없겠죠. 병장 기준 17만원을 받는 우리와 비교해도 사병에게는 적지 않은 돈입니다. 아니, 물가를 감안하면 훨씬 더 많이 받는 셈이죠. 빨간색 종이를 뽑고도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트랜스젠더들도 제비뽑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그럼 자원입대하는 게 낫지 않냐”고 말씀하실 분이 있을텐데요. 네. 자원입대도 가능합니다. 단, 복무기간이 짧습니다. 징병되면 2년, 자원입대는 6개월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들 중에는 차라리 뽑기를 잘해서 더 오랜 기간 군에서 복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태국은 트랜스젠더가 많은 나라입니다. 트랜스젠더를 만나도 그다지 혐오하거나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습니다. 성 소수자라기보다는 그냥 일반 여성이나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여성으로 살고자하는 이들이 군 복무를 원할리 없겠죠. 그래서 여성으로 살아왔다는 이력을 증명하면 신체검사 과정에 복무 면제 판정을 받습니다. 2010년까지는 일괄적으로 ‘심리 이상자’로 분류해 군 복무를 하지 않아도 됐는데요. 트랜스젠더 권익 단체가 문제를 제기해 다음해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태국은 트랜스젠더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합니다. 1형은 외형이 전형적인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 2형은 가슴 수술을 한 사람, 3형은 성기 수술을 한 사람입니다. 3형만 면제이고 1형과 2형은 징병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성기수술은 위험이 따를 뿐만 아니라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형과 2형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트랜스젠더 상당수가 제비뽑기를 해야 하는 것이죠. 결과가 좋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타깝게 빨간색 종이를 뽑아 군 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죠. 수입이 많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도 군 입대보단 안정적인 활동을 원할 겁니다. 하지만 제비뽑기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관문입니다. 한국 언론엔 보도되지 않았지만 ‘태국의 원빈’으로 불리는 배우 마리오 마우러도 올해 4월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마리오 마우러는 영화 ‘시암의 사랑’, ‘피막’, ‘잔다라 더 비기닝’ 등의 히트작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결과는 검은색 종이였습니다. 팬들은 물론 징병담당자까지 두 손을 들고 기뻐할 정도였죠. 마우러도 살짝살짝 웃음을 내비치긴 했지만 전반적으론 진지한 표정을 잃지 않았는데요. 속으론 기분이 무척 좋았겠죠? 그룹 2PM의 멤버 닉쿤도 제비뽑기로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고 잘못 알려졌는데요. 닉쿤은 2009년 군 지원자가 너무 많이 몰려 추첨을 하기도 전에 면제 판정을 받았습니다. 닉쿤이 참여한 제비뽑기 영상은 실제 뽑기 장면을 촬영하지 못한 현지 매체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 것이라고 합니다. ●TV 방송국도 보유한 軍…막강한 영향력 태국은 1932년 혁명으로 전제군주 국가에서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했습니다. 하지만 정국은 늘 불안했고, 지금까지 군부 쿠데타만 19번이나 일어났습니다. 군 수뇌부는 이 과정에서 모두가 주목하는 엘리트 집단으로 부상했고, 국민들도 그런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군부는 지난해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주축인 탁신 일가를 권력 중심에서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죠. 군부는 지난달 10개월 만에 계엄령을 해제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선 불편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방콕시민들은 오히려 “계엄령 때문에 탁신 일가 찬반 시위가 일어나지 않아서 좋았다”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육군참모총장 출신 프라윳 찬-오차 총리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얼마 전 총선 대신 “국민이 원하면 2년 더 집권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기도 했습니다. 군은 해마다 홍수 피해 복구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데다 농민 교육과 치안을 담당해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 태국 육군은 놀랍게도 6대 TV 방송국 가운데 시청률이 높은 방송국 1곳(BBTV CH7)을 직접 소유하고 있는데요. 전국의 200여개 라디오 방송국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합니다. 높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지름길인 육군사관학교의 인기도 어마어마합니다. 지난달 치러진 예과 입학시험은 200명을 뽑는데 1만 8000명이 지원해 무려 90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1)“힘들어 죽겠다는” 예비군 훈련장…무슨 일이?(2)군통령들의 꿈의 무대 ‘걸그룹 대첩’ (3)대한민국 육·해·공군 무기의 세계 (4)‘로보캅2’에 등장한 국산총 아시나요 (5)한국 vs 일본 군사력 우위 논쟁…진실은? (6)모르면 간첩? ‘군대리아’ 얼마나 아시나요 (7)‘폭탄 실은 개’ 기상천외한 실패작들의 세계 (8)北 탄도미사일, 정말 바지선에서 발사됐을까 (9)예비군 훈련비 ‘10만원’ 약속, 잊으셨나요? (10)이순신 장군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 [세종로의 아침] 2.7g과 45.9g 사이/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2.7g과 45.9g 사이/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골프 대디’의 길은 험하디 험하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자식에게 바쳐야 하고, 대회에 나간 자식을 지켜보는 자신이 행여 부담이 될까 카트길 대신 산길 숲속을 숨어 다니는 사람이 골퍼의 아빠다. 금전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다. 국내 여자골프를 호령하다 4년 전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로 진출한 서희경의 아버지 서용환씨는 “골프쟁이 아빠가 되는 건 타고난 업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의 서희경을 만들기 위해 운영하던 슈퍼마켓 세 개를 차례로 아낌없이 날렸다. 서희경뿐이랴. 초등학생 시절 한국을 방문했던 타이거 우즈가 가장 먼저 보고 싶어 했던 장하나의 뒷사정도 다르지 않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장창호씨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지금의 장하나로 키우기 위해 꽤 잘나가는 서울 잠원동의 삼겹살집을 포함해 모든 것을 딸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골프 대디는 유난히 여자 골퍼들의 경우에 많다. 남자는 배상문의 어머니 시옥희씨 정도인데, 골프 대디가 아니라 ‘골프 맘’이니 여간해선 남자 골퍼의 ‘대디’를 기억해 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해외 선수라면 우즈의 부친 얼 우즈가 생각난다. 그는 엘드릭 톤트 우즈라는 본명 대신 자신이 복무했던 월남전 파병 부대의 마스코트였던 ‘타이거’를 아명으로 부르며 승부사의 DNA를 자식에게 심어 줬다. 우리 주위에도 노승열의 부친 노구현씨, 뉴질랜드 교포 대니 리(이진명)의 아버지 이상주씨 등 얼 우즈 못지않은 훌륭한 아버지들이 있다. 모두 골프 외길을 걸었다. 최근 유러피언프로골프(EPGA) 투어 BMW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안병훈의 골프 대디 안재형씨는 조금 특이하다. 3일 서울 광화문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그는 한·중 커플 1호 탁구 선수 출신이다. 대다수의 골퍼 아빠들은 골프에 대한 내공이 상당하지만 그는 지금도 90대 타수를 치는 주말 골퍼 수준이다. 안재형씨는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아들의 그림자 노릇을 자처했다. 지금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캐디 딘 스미스가 따라다니지만 지난 8년 동안 안재형씨는 아들의 백을 멨다. 그런데 왜 그는 골프백을 내려 놓았을까. 안재형씨는 “캐디는 선수가 감정 기복 없이 플레이할 수 있도록 최고의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한다”며 “병훈이가 커 가면서 상호 간 감정의 간극이 벌어지는 것 같더라”고 털어놨다. “캐디 바꾸길 정말 잘한 것 같다”며 만족감을 나타낸 안병훈은 결국 유러피언투어에서 생애 첫 우승을 일궈 냈다. “좀 섭섭하지만 골프 대디라면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라고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선 아쉬움이 배어났다. 하지만 이 사소한(?) 것만 빼면 그는 행복한 남자다. 2.7g의 탁구공과 45.9g의 골프공을 곡예하듯 모두 겪어 본 사람 아닌가. “중국에서 통신회사(옴니텔차이나) 대표로 있는 제 처(자오즈민)와 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더니 갈라섰다는 얘기도 나오더라고요. 옛날에는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않은 걸 두고 천만 명이 자오즈민 하나를 못 이겼다 는 말도 우스갯소리처럼 돌았고요.” 파안대소 중에도 그는 곧 US오픈 골프대회에서 있을 가족과의 ‘재회’에 부풀어 있었다. cbk91065@seoul.co.kr
  • [아시아 안보회의] 北 겨냥 공격 적용엔 딴소리…韓 “동의 필요” 日 “추후 논의”

    [아시아 안보회의] 北 겨냥 공격 적용엔 딴소리…韓 “동의 필요” 日 “추후 논의”

    한국과 일본은 지난 3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한반도에서 한국의 동의 없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에 구두 합의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공격 등 각론에 있어서는 여전히 이견이 표출됐다. 중국이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 배치를 반대하며 미·중 갈등 구도가 격화되는 가운데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는 앞으로도 한·미·일 3각 안보 협력을 좌우할 주요 의제로 남게 될 전망이다. 4년 만에 성사된 이번 회담이 3각 안보협력에 매달리는 미국이 우리 정부에 종용해서 이뤄진 결과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은 미군 함정을 호송하거나 한국 내 일본 민간인을 소개하는 작전, 유사 시 한국에 증원되는 주일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에 파병되는 경우 등이 예상된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유사 시 주일미군이 한반도에 파병되는 문제는 한·미연합방위체제와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31일 “일본 집단 자위권 행사와 관련 법제 개정 시 평화헌법 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가지고 절차와 범위에 대한 실무협의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 장관은 회담에서 “북한도 대한민국 영토이기 때문에 일본이 북한 미사일 기지를 공격하려면 우리 측 요청이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추후 기회에 다시 논의하자”며 즉답을 피해 실무협의 과정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일본이 북한 지역까지 한국 정부의 사전 동의를 얻어야 할지에 대해 회의적임을 보여준다. 국방부는 일본 측이 이번 회담에서도 강력히 요구했던 군사정보보호협정과 상호군수지원협정 체결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난색을 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미뤄뒀던 한·일 국방교류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게 됐다. 일본은 오는 10월 요코스카에서 열리는 관함식에 한국 함정이 참가해줄 것을 요청했고 국방부는 이를 수락했다. 우리 군이 일본 관함식에 참석하는 것은 2002년 이후 13년 만이다. 한편 나카타니 방위상은 지난 30일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 앞서 열린 미·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에게 “카터 장관이 최근 한국 방문에서 내가 한국 국방장관을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주었다”면서 “그래서 오늘 그것(한·일 국방장관 회담)이 실현됐고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도 열 수 있게 됐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국방부는 한·일 국방장관 회담 개최 배경에 대해 “안보와 역사를 분리해 대응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라고만 설명했었다. 한편 카터 장관은 이날 한 장관과의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최근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에 탄저균이 배달된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해 한·미 갈등의 불씨를 제거하고자 했다. 싱가포르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미·일 ‘日자위대 진출 사전동의’ 협의체 추진

    세계 27개국 국방 고위 당국자가 참석하는 제14차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가 29일부터 31일까지 싱가포르에서 개최된다. 한국과 미국, 일본은 일본 자위대가 유사시 한반도에 진출할 경우에 대비해 한국의 사전 동의 등 필요한 절차를 논의할 실무협의체 구성을 추진할 방침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에서 한·일 양국을 화해시켜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을 추진하려는 미국과 이에 반대하는 중국의 힘겨루기 양상만 부각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28일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30일 3자 회담을 통해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 이후 한반도에서의 일본 집단자위권 행사 절차 등을 논의한다. 3국은 특히 유사시 미군을 지원할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파병되는 것에 대한 한국인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한·미·일, 한·일 간 실무협의체 구성 방안도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우리 측은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은 우리 요청과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고 일본 측이 우려를 해소하는 조치를 취해야 집단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점을 주지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일 군사협력만 속도를 내는 것 아니냐는 반대 여론을 의식해 뒤늦게 “현재로선 일본 자위대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대한 실무협의체 구성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발 물러섰다. 일본 측은 4년 만에 열리는 한·일 국방장관회담을 통해 상호군수지원협정과 군사정보보호협정 재추진도 요청할 방침이다. 30분간의 회담에서는 상호 탐색전 정도만 펼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다만 일본은 미·일 간 새 가이드라인을 8월 이후 법제화할 방침이라 그때까지 한국과 지속적 협의를 벌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이번 회의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 동향을 살피고 지지를 얻을 기회로 여겨 왔다. 하지만 카터 장관이 30일, 중국 측 대표인 쑨젠궈(孫建國) 부총참모장이 31일 각각 아태지역 안보에 대한 연설을 할 예정이라 전반적으로 미·중 간 팽팽한 기싸움에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26일 국방백서를 통해 해군의 작전 범위를 원양으로 확대하고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과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을 안보 위협 요인으로 꼽는다고 밝혔다. 미국과의 패권 다툼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미국은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이행하기 위해 지난달 일본과 미·일 가이드라인을 개정했다. 싱가포르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전·현 軍간부, 탄창 4만여개 밀수출… 레바논 무장단체로 넘어간 듯

    전·현 軍간부, 탄창 4만여개 밀수출… 레바논 무장단체로 넘어간 듯

    군 전략물자인 탄창을 중동에 밀수출해 수억원을 챙긴 전·현직 국군기무사령부 간부 등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2011~2012년 M16과 AK47 등 소총용 탄창 4만 6600개를 불법으로 수출해 3억 6400만원을 벌어들인 예비역 소령 이모(41)씨와 탄창 제작·판매 업자 노모(50)씨를 대외무역법 위반으로 구속했다고 13일 밝혔다. 기무사 소령 양모(38)씨 등 5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2007~2008년 중동 평화유지군(PKO)으로 레바논에서 파병 근무를 했던 이씨는 2011년 1월 전역 후 정세가 불안정한 현지에 탄창을 수출하는 사업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기무사 시절 알고 지낸 후배 양 소령을 끌어들인 뒤 친동생(40) 등과 함께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방위사업청에 M16과 AK47 등 탄창 수출 허가를 요청했으나 “레바논은 분쟁 지역이라 수출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자 이들은 2011년 7월 국내 제조업체에서 사들인 탄창 200개를 자동차 오일필터와 브레이크 패드 등으로 허위 기재한 수출신고증 등을 부산세관에 제출했다. 통관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당은 같은 방식으로 부산항 및 부산 세관을 통해 3차례에 걸쳐 탄창을 선적했다. 이씨는 레바논 파병 근무 당시 알게 된 현지 군수품 수입업자에게 탄창을 넘긴 것으로 조사됐다. 수사당국은 해당 수입업자가 레바논의 무장단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양 소령은 창업 초기 3000만원을 투자하는 한편 외국 바이어들을 만나 노씨가 운영하는 탄창 생산업체로 안내하는 등 적극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군 간부 출신이 외국 근무에서 만든 인맥을 이용해 전략물자인 탄창을 불법 수출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안”이라면서 “군수품 생산업체의 밀수출 등 불법 행위 예방을 위해 유통과정에 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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