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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와 단동시(압록강 2천리:22)

    ◎폭격에 끊긴 신의주행 철교는 관광명소로/전쟁발발 2개월 뒤부터 미군기 공습피해/중국지원군으로 참전… 눌러앉은 한인 많아/저목장에 화재잦아 일명 “화도”… 한국전으로 “이름값” 압록강 우안에 자리한 요령성 단동시는 중국에서 제일 큰 인구 70만의 변경도시다.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장장 7백90㎞를 흘러 내려온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금강산을 등지고 있다.단동시는 이름 그대로 「붉은 동방」이라는 뜻을 지녔거니와 중국 변경의 사회주의 혁명화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당나라 때 안동도호부관할지역이었다는 점과 연관시켜 1965년까지는 안동으로 불렀다. 단동에서 압록강 건너를 바라보면 북한땅 신의주다.「모진 사람 곁에 있다 벼락 맞는다」는 속담처럼 신의주를 가까이 한 탓에 한국전쟁 당시 피해도 꽤 입었다. 예부터 저목장에 불이 자주 나 「불의 도시」(화도)라고도 했는데 특히 한국전쟁 때 그 이름이 적중한 셈이다.그리고 19 50년이 저물면서 한국전쟁에 참가한 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도시여서 「영웅도시」라는 칭호도 가지고있다. ○30년전 지명은 안동 단동은 어떻든 간에 한국전쟁에 피해를 입어 그 전쟁의 흔적이 아직도 멀리 보였다.당시의 안동∼신의주를 잇는 철교가 신의주쪽으로 절반은 교각만 앙상하게 남게 된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다.단동시에서 펴낸 「단동시정」을 보면 한국전쟁에서 입은 피해기록이 나온다.「1950년 9월22일 미군 비행기 1백여대가 신의주를 폭격,압록강대교를 끊었으나 안동철도분국에서 그날 밤 10시에 복구했다.그러나 1951년 2월 폭격에 너무 심한 손상을 입어 운수가 중단되었다」는 내용이다. 한국전쟁 때 미군기의 단동시 첫 폭격은 전쟁발발 2개월 뒤인 1950년 8월27일에 있었던 것으로 「단동시정」은 기록했다.이날 하오 4시40분 B­52폭격기 두대가 시내 랑두비행장 상공에 날아와 약 2분여 동안 기총소사 하는 것으로 시작된 첫 공습의 피해는 노동자 3명 사망과 19명 부상,자동차 2대 파손으로 집계되었다.또 같은해 9월22일 두번째 공습에는 B­29 중폭경기 한대가 떠서 12개의 폭탄을 떨어뜨렸다.이 공습으로 2명이 죽고 28채의 집이 무너졌으며 폭음으로 파손된 집도 3백여채를 헤아렸다는 것이다. 오늘 날의 단동은 평화도시다.북한의 국경도시 신의주와는 사뭇 다른 도시인 것이다.그래서 전쟁으로 끊어지고 기관포탄이 무수히 박힌 단동쪽 압록강철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광명소가 되었다.특히 몰골사납게 교각만 앙상한 신의주쪽의 전흔은 전쟁이 남긴 교훈을 보여준다.10원씩을 주고 절반쯤 건너간 철교 위에서 한국전쟁 당시 중국 지원군 번역관으로 일했다는 김인형(69)선생을 우연히 만났다. ○요양원서 만나 화촉 그는 경북 의성 태생이었는데 전쟁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전쟁이 나면서 인차 남한 전체를 점령하는 줄 알았지.그런데 시월 잡아서 부터 조선 피란민과 군인들이 중국으로 물밀듯 들어오는기라.그해 5월 성간부학교에 들어가 다섯 달을 공부한 나는 지원군 번역관으로 일했지.통화에서 겨우내내 조선인민군과 피란민속에 묻혀 살다 보이 눈코 뜰새가 없데. 중국 변경이 전쟁에 시달리는 판이었으니 강 건너 북한땅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장백·임강·집안·관전·안동(단동)지역 맞은편 북한땅 혜산·중강·만포·삭주는 미군기폭격에 불바다를 면할 날이 없었다.임진왜란 때 의주에 통곡동이라는 동네가 하나 생겼다고 하지만 한국전쟁에서는 압록강유역 북한땅 모두가 통곡동이 되었다. 단동에 살고 있는 윤옥순(65)씨는 전쟁이 나던 해 겨울 안동의 중국지원군병원에 근무했다.함북 무순 태생으로 16살부터 동북해방군에 참전한바도 있는 그녀는 당시의 참상을 몸서리치듯 털어놓았다. 『부상병들이 들것에 실려 매일 쏟아져 들어왔지비.팔다리가 끊어지고 코가 떨어진 사람,사지가 다 날라가 덩그러니 몸뚱이만 남은 부상자들도 있었구마.몸뚱아리나마 남은 부상자들은 애기 눕히듯 보자기에 싸서 한 침대에 넷씩을 눕히기도 했슴매.새파란 나이에 죽기가 원통해 발악하는 걸 보면 불쌍해서 같이 울기도 했지비.공습경보가 울리면 부상병을 업고 방공호로 뛰어가는 일을 얼마나 했는지….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원망스럽더구마』 안동은 한국전쟁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얼떨결에 북으로 올라온 남쪽의 사람들이안동에 들어왔다가 주저앉기도 했다.북으로 가기도 싫고,그렇다고 남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이방인들이었다.단동에 머무는 동안 그런 처지의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경북 영천군 고경면이 고향인 최정순(64)씨도 그런 사람이다.지원군병원 간호원이었던 그녀는 한국군과 미군포로 부상자에게 까지 남다른 애정을 쏟은 것 같았다. 『인민군과 중국지원군 뿐 아니라 국군과 미군 부상병까지 들이닥쳤지예.인민군 부상자들은 포로들을 보면 때려 죽인다고 날뛰어 병동을 구분했십니더.미군에게는 빵과 같은 음식을 주었는데,처음에는 독이 들었는 가봐 안먹데예.그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가 먹어야 그제사 입을 댔십니더.어떤 한국군은 우리 병원에서 다리 절단수술을 했는데 수혈할데가 없다 아닙니꺼.그래서 내가 두 번이나 피를 주고 대소변도 받아내고….업고 다니며 영화도 구경시키곤 했십니더.상처가 아물어 포로수용소로 가는 날 그렇게 울더니…』 단동시 오룡배 영예군인 요양소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박명심(66)씨도 남한 출신이다.전쟁전까지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살았다.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군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2학년 때 6·25를 맞았어요.전쟁전에 이미 지하혁명조직에 가담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요.인민군에 있다가 후에 중국지원군 20병퇀 67군 정치부로 전속되어 전선으로 갔어요.선전방송 임무를 맡고 일하는데 참호에 포탄이 날아들어 그만 허리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었지 뭡니까.53년 7월21일 안동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지금까지 요양원에 살고 있습니다』 ○44년째 이산의 아픔 박씨의 남편도 두 다리를 잃은 불구자다.남편 위덕렴(65)은 한족으로 중국지원군 116사 346퇀 통신병으로 전쟁에 참가해서 큰 부상을 입었다.그가 1954년 안동요양원에 들어와서 서로 만난 이들은 이듬해 10월 결혼했다.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다.박씨는 지난 94년 서울에 편지를 해서 조카들이 다녀갔다고 무척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한국이 놀랍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이야기로 들었다면서 날보고 서울에 가보았느냐고 물었다. 단동에서 만난 또 다른 여인 전명옥(67)씨는44년째 가족소식을 모르는 이산의 아픔을 갖고 있었다.당시 북한땅이었던 강원도 화천 태생인 그녀는 집 근처 임시 인민군병원에서 간호일을 돕다가 후퇴명령이 급히 내려 2백m 밖에 안되는 집에도 못 들르고 떠나왔다.이제나 저제나 하다가 화천이 남한땅이 되고,가족소식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것이다.
  • 「악마의 시」작가 샐먼 루시디/새 소설「무어의 마지막 한숨」출간

    ◎7년째 도피중 집필한 작품/인도 무어가의 가문사 복원 지난 89년 자신의 작품 「악마의 시」가 신성모독이라 해서 이란의 회교지도자 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7년째 도피중인 샐먼 루시디.화제의 작가 루시디의 신작이 번역·출간됐다.지난해 9월 영국에서 출간된 최신작 「무어의 마지막 한숨」 상,하를 문학세계사가 내놓았다.(오승아 옮김) 인도 다 가마­조호비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룬 이 작품은 루시디의 작가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작품은 「다 떨어진」 조호비 가문의 마지막 핏줄 무어가 4대에 걸친 가문사를 복원해 들려주는 형식이다. 이 시기는 영국 식민지배와 독립투쟁,독립후 혼돈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인도의 근·현대사와 일치한다.인도의 알아주는 갑부였던 다 가마 가문이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데는 이같은 인도역사의 부침이 커다란 배경으로 작용한다.이런 식으로 작품에는 개인사와 인도민족의 역사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 맞물려 있다. 무어 일가붙이들의 면면은 이 작품에 결코 낙관적으로 드러나있지 않다.향신료공장 주도권을 둘러싸고 친척끼리 잔인한 패싸움과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가 하면 마약과 환락에 빠져 난교나 동성애를 일삼는다.이때문에 무어는 하늘의 단죄인지 날때부터 나이의 두배씩 늙어가는 저주받을 조로증을 안고 살아간다. 이처럼 너저분하고 추잡스러운 현대사가 가차없이 까발려지는데도 작품속의 인도는 결코 비관적인 윤곽속에 묻혀버리지 않는다.그것은 심오한 인도의 신화며 풍물이 작품의 배경에 풍요롭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루시디는 「악마의 시」 파문 이래 돌아갈 엄두를 못낸 고국 인도의 던적스러운 일상 세목들을 극진한 애정으로 되살려내고 있다.인도의 사회적 낙후가 서구인들의 눈에 야만처럼 비칠지라도 그 바탕엔 어떤 합리적 이성도 따라잡지 못할 풍요로운 생명력이 깔려있다는 말을 루시디는 하고 싶어하는듯 보인다. 이 작품은 인도독립의 지도자인 자와할랄 네루나 간디 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정작 인도당국에서는 수입을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하지만 영국 최고권위 부커상의 96년가장 강력한 수상후보로 거론되는 등 서구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있다 한다.위대한 작가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민족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유효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을 샐먼 루시디는 잘 보여주고 있다.
  • 20만원 강탈한 택시강도 기사 트렁크에 감금 방화/대전서

    ◎운전사 극적 탈출… 20대 2명 수배 【대전=이천렬기자】 인천에서 대전까지 택시를 타고 가던 20대 남자 2명이 돈을 빼앗고 운전사를 트렁크에 감금한 채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운전사는 택시가 전소되기 직전,극적으로 탈출했다. 21일 상오4시쯤 대전시 서구 복수동 유등천 제방에서 인천 제물포택시 소속 인천2바1869호 스텔라택시(운전사 조동빈·34·인천시 서구 가좌4동)를 타고 가던 20대 남자 2명이 강도로 돌변,현금 20만원을 빼앗았다. 범인들은 미리 준비한 압박붕대로 운전사 조씨의 손·발을 묶은 뒤 뒷트렁크에 감금한 채 제방을 2백m쯤 택시를 몰고 가다 불을 질렀다. 트렁크에 갇혔던 운전사 조씨는 연기가 스며들어오자 불을 지른 것을 직감,머리로 트렁크 뚜껑을 수차례 부딪쳐 열고 가까스로 빠져 나왔다.뚜껑을 여는 과정의 몸부림으로 손을 묶었던 압박붕대가 풀리자 불붙은 점퍼를 벗고 유동천으로 달려가 내복에 붙은 불을 껐다.택시는 92년식으로 곧 폐차될 낡은 차였다. 조씨는 머리가 크게 다치고 손·발 등에 중화상을 입었으며 택시는 완전히 불탔다. 경찰은 파란색 점퍼에 청바지 차림과 카키색 외투에 청색바지를 각각 입은 키 1백70㎝가량 20대 초반의 남자 2명을 전국에 수배했다.
  • 정일권 회고록/정일권 지음(화제의 책)

    ◎북간도서의 어린시절·정치생활 등 담아 제3공화국에서 국회의장,국무총리,공화당의장 등을 오래 지낸 고 청사정일권의 회고록.1917년 연해주 니콜스크(지금의 우스리스크)에서 출생해 87년 한국자유총연맹을 발족시키기까지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담한 어조로 회고했다. 모두 4부로 구성됐으며 1부에서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 공산당에 쫓겨 가족이 함북 경원,북간도 용정으로 흘러다니며 고생한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2부는 만주군에 입대해 군사학을 배우며 조국광복을 꿈꾸던 시절,3부는 한국군 창설과 함께 최고 군지휘관으로서 국방을 떠맡던 시절,4부는 정계진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는 이 책에서 국군에 몸담고 있을 때가 가장 보람있었다고 밝혔다.따라서 한국전 때 삼군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한 일,그뒤 미국을 상대로 한국군 전력증강책을 마련한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오히려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은 간략하게 서술했다. 정일권은 암치료를 받기 위해 지난 90년 하와이로 떠나 이 회고록을 집필하던 중 94년 1월 타계했다.별책부록으로 「청사 정일권 기념사업회」가 엮은 「청사 정일권을 기리며」가 함께 나왔다.고려서적 1만2천원.
  • 한의대생 집단 유급/경원·동의·원광대생 7백30여명

    ◎경희대 등 9개대 3천여명도 내달 1일이 시한 지난해 9월부터 약대내 한약학과 설치를 반대하며 전면 수업거부를 해온 경희대 등 9개 대학 한의대생들의 유급시한이 3일부터 각 대학별로 시작됨에 따라 대량 유급사태가 불가피해졌다. 3일 교육부에 따르면 한의학과가 설치된 전국 11개 대학중 경원대와 동의대가 각각 지난해 12월 26일과 27일 유급시한을 넘겨 3백70여명이 유급처리된데 이어 경희대·동국대 등 9개 대학 3천여명의 한의대생들도 3일 원광대 3백60여명이 유급된 것을 비롯,다음달 1일까지 대학별로 적용되는 최종 유급시한에 따라 본과 4학년과 수업에 참여한 일부 학생을 제외하고 전원이 유급당하게 됐다. 대학별 유급시한은 경희대(유급대상 5백50여명)가 4일,대전대(4백20여명) 5일,경산대(6백여명)·세명대(1백30여명) 11일,상지대(2백70여명) 12일,동국대(3백90여명) 15일,우석대(1백30여명) 17일,동신대(90여명) 2월1일 등이다. 한의대생들이 집단 유급될 경우 각 대학의 한의대 교수 2백50여명도 일제히 교수직을 사퇴키로 방침을 정해앞으로 상당한 파란이 예상된다. 한편 교육부는 이번 수업거부가 화재등으로 인한 수업불능 상태등 수업일수 감축 승인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지난 93년 한약분쟁 당시와는 달리 수업일수를 감축해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 「건물 조명예술」 국내 첫 연출/갤러리 현대

    ◎불 작가 얀 케르샬레 초청 설치 조명예술의 환상적인 빛의 조화가 전체를 에워싼 건물이 국내최초로 등장했다. 경복궁옆 삼청동 가는 길인 종로구 사간동에서 최근 새 건물로 문을 연 갤러리현대가 지난 22일 밤 조명쇼의 첫 불을 밝힌 것. 밤이 긴 요즈음 어스름한 저녁 5시쯤부터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이 조명쇼는 프랑스의 유명한 조명예술가 얀 케르샬레(40)가 내한,1주일간 설치한 작품. 연말이 되면 거리를 수놓는 많은 불꽃등들과 같은 장식용 조명과는 달리 이 조명예술은 건물내부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거리의 흐름을 조절하는 듯 오묘한 멋을 풍기고 있다. 이번 작품은 외벽의 9개 창문에 흰색,오렌지색,파란색의 조명을 설치했다.무생물 건물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변환되도록 연출했다. 이 작가는 지난 80년대 이후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바스티유오페라,샹제리제거리,노르망디다리등에 네온 할로겐 형광등 등 수천개 조명재료를 동원한 조명쇼를 선보여 세계정상의 조명작가로 인정된 인물.현대적인 감각에 금빛보다는 흰빛을 즐기며 센서에따라 자동적으로 빛의 강도가 조절되는 동적인 개성을 보이는 게 특징.
  • 파리 7대학 한국학 과장 최승언 교수(세계속의 한국인:5)

    ◎「한국학 불모지」서 한국어 심기 15년/69년 석사취득후 도불… 학부부터 다시 공부/정식교수론 단 한명… 불 교육계에서도 인정/부친은 문학평론가 최재서씨… 누님도 미서 한국학 가르쳐 서울과 파리의 거리는 1만4천여㎞(8천7백12마일).비행기를 타고도 14시간을 쉬지않고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머나먼 거리다. 그런 파리에서 두나라 사이를 가깝게 하는 가교역할을 하면서 프랑스와 세계에 한국을 심는 사람이 있다.파리7대학의 한국학과 최승언(50)학과장.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파리시내를 수놓은 지난 19일 파리동쪽에 위치한 파리7대학의 강의실.12명의 프랑스 학생의 파란눈은 최교수의 한국어강좌에 집중됐다. 최교수가 「너」와 「당신」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자 「합니다」와 「하십니다」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날카로운 학생들의 질문도 이어졌다.파비앙 뷔트군(20)은 한국어를 배우는 이유를 『희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뷔트군의 말처럼 한국은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에서 희귀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직은 먼나라다.88서울올림픽과경제성장으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지리적 괴리만큼 아직도 여전히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다.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가 하면 심지어 3개월이상 머물려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체류증에 국적을 「북한」으로 기재해 발급해주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수업태도 진지 이런 한국의 불모지 프랑스에서 최교수는 외롭게 한국과 한국어를 심어 나가고 있다.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곳은 몇군데가 있지만 모두 더부살이를 하는 상태다.동양학연구소(INALCO)에서는 일본·한국학과이고 리옹대학과 보르도대학에는 한국어 강좌만 개설돼 있을 뿐이다. 파리7대학 한국학과는 독립된 과로서는 유일한 교육기관이고 현재 한국인 정식교수는 최교수 혼자다.그의 실력은 한국인 사회만이 아니라 프랑스 교육계에서도 그대로 인정받고 있다. 파리4대학의 로제총장이 아는 한국인 교수의 이름은 최교수밖에 없고 파리7대학의 드동데 문과대학장은 『최교수의 실력은 탁월하다』고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그의이런 실력은 남들과는 전혀 다른 학문적 역정에서 비롯된다.최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대학생으로 공부를 시작했다.서울대불문과에서 학사·석사학위를 받고 69년 프랑스에 도착해 툴루즈대학에서 3년동안 박사과정을 밟다가 다시 대학교 학생생활로 불어를 처음부터 공부했다.학위만 받으면 열리는 순탄한 대학교수의 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바닥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서울대 교수직 사양 『박사과정에 있으면서도 교수의 강의를 듣고 노트 필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논문을 쓰고 불문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프랑스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괴심 때문에 대학교 학부생활을 다시 하게 됐다』고 최교수는 설명한다.요즘도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박사논문을 써내 당당히 대학교수가 되는 적지않은 유학생들에게도 그의 이런 「용기있는」 행동은 귀감이 될 것 같다. 예비교수에서 대학생이 된 그는 프랑스학생들과 함께 밤새워 공부하고 치고박고 싸우기도 하면서 학사와 석사·박사학위를 받아냈다.지난 79년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파리에 도착한지 꼭 10년.그만큼 그의 학위는 노력과 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문학적인 감수성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프랑스를 완벽히 이해하는 몇 안되는 불문학자 가운데 한사람이다.또 이런 실력이 프랑스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고 동료 프랑스인 교수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다. 최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뒤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로 초빙됐으나 개인적인 이유등으로 서울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지난 82년부터 이국땅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이런 보기드문 경력등으로 파리교민사회에서 그는 「기인」으로 꼽힌다.교수로서의 권위보다는 학자로서의 「최교수」일 뿐이다.번드르한 각종행사에 초대받아도 가지 않고 교수로서의 직업에만 충실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이런 행동에는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부친 최재서(1908∼1964)씨의 영향이 많았던 듯하다.최교수는 주지주의적 비평을 시도,한국문학사에 과학적 비평방법을제시한 최재서씨의 4남2녀중 막내이다.바로 위 누님 양희씨(62)도 미국 캔버라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어학 가족을 이루고 있다. ○학생유치 적극 활동 그의 수업법은 독특하다.언어학이나 문학을 가르치기 보다는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예를들어 『설렁탕 한그릇 주세요』라는 표현이 학생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한다.수업을 받은 학생들의 입에서는 한국어가 스스럼없이 튀어나온다. 최교수는 학생들의 문학이나 언어학적 소질이 자신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학생들에게 한국과 한국어 이해능력을 심어주는 데 중점을 둔다.이를 테면 학생들의 소질에 날개를 달아주는 보조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학을 배우려는 학생들의 숫자가 88서울올림픽이후 한때 30여명까지 올라가 한국학 붐이 잠깐 일어났었으나 오래지않아 시들어버렸던 일도 있었다.그래서 단 2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바로 옆의 중국학과나 일본학과 학생의 숫자가 1백명정도씩으로 북적대는 점을 감안하면 프랑스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장서 2만3천권 소유 그래서 최교수는 적극적인 학생유치에 나서 동양학부 학생들에게 2개 언어를 배우도록 했다.상대적으로 학위받는 데 많은 부담을 주지 않도록 배려도 하는 등 학생들이 한국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런 노력탓에 이제는 한국학을 배우는 학생은 1학년에 30여명을 비롯해 모두 60여명.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한국학을 부수적으로 배우는 학생들이 적지 않아 최교수는 안타까워한다. 동양학을 배우는 학생들의 최대관심은 동양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에 있고 그다음이 경제대국인 일본이다.최교수는 『경제력이 학생들마저 불러모으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며 한국학의 전파는 국력과 직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최교수가 중국학과나 일본학과에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점이 있다.한국학과는 유일하게 자체 도서관을 갖고 있고 소장 장서만도 2만3천권에 이른다.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올해부터는 한국국제교류재단측이 한해에 5만달러씩(약 4천만원)지원,큰 도움을 주고 있다.5명의 학생들에게 1인당 5천달러씩의 장학금도 줄 수 있는 부유한 학과가 됐다.국립인 프랑스 대학에서 장학금은 거의 생각할 수 없어 한국학과의 장학금은 앞으로 한국학 희망자들을 더욱 늘어나게 할 것으로 최교수는 기대한다. 최교수가 파리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일이 있다면 한국인 입양아 문제다.한국인 입양아는 프랑스에만 모두 1만명 가까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한국인 입양아들이 한국학을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어왔지만 3년전부터 부쩍 늘었다. 이제는 프랑스인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의 모습으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한학년에 3∼4명씩 된다.프랑스인 부모들이 『너의 모국은 한국이니 한국을 알아야 한다』며 한국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한다는 것이다.모국찾아주기의 배려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 모국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영어를 배울 때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특히 어려서 입양된 학생들의 경우 이런현상은 심할 수 밖에 없다. ○“한국전문가 양성” 자부 최교수는 이들에게 경제학이나 지리학등을 복수전공으로 택하도록 권유한다.한국학과 경제학을 함께 공부하면 프랑스에서는 한국경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3백만명 이상의 실업자가 득실대는 프랑스에서 한국을 공부하면서 취업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은 한국전문가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한 프랑스인 한국전문가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면 한국과 유럽의 거리는 그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최승언 교수 신상메모◁ ▲45년 서울출생 ▲63년 경기고등학교 졸 ▲67년 서울대 불문학과 졸 ▲69년 서울대 불문학과 석사 ▲69년 프랑스 툴루즈대학 박사과정 ▲73년 툴루즈대학 언어학 학사 ▲75년 툴루즈대학 언어학 석사 ▲79년 툴루즈대학 문학박사 ▲80∼81년 서울대 조교수 ▲82∼88년 파리7대학전임강사 ▲88년∼현재 파리7대학 한국학과장 ▲역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강좌」
  • 옛제도 부활 시도…실현성 희박/본지입수 러 공산당「입법초안」내용

    ◎사유재산 인정… 구공산주의와 달라/급진정책 많아 정부와 마찰 불보듯 총선 결과 제1당으로 떠오른 러시아 공산당은 앞으로 옐친정부의 개혁속도를 늦출뿐 아니라 공산주의시절의 여러 제도 부활을 꾀할 것이란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같은 지적은 18일 본사가 입수한 「사회경제 위기탈출과 국가재앙 방지를 위한 몇가지 극단의 처방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공산당정책 입법초안을 분석하면 쉽게 알 수 있다.모두 8개항으로 된 이 초안은 러시아공산당이 복수정당제와 사유재산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공산당 정책과는 구별되고 있다. 초안은 특히 공산당의 주요정책을 원내에서 관철하기 위한 최초의 법적 토대라는 점과 향후 공산당의 정책방향을 조망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중을 가지고 있다. 초안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재민영화」 조항.여기서는 옐친정부 민영화 조치의 토대였던 모든 법적 조항의 개정,국영기업에 대한 더이상의 민영화를 즉각 중지할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이미 민영화된 기업에 대해서는 다시 국유화하지 않겠다는 방침과 중소기업의 보호·민영화는 계속 살려나가겠다는 방침이 천명돼 있다. 다음으로는 지방정부 통제 아래 「인민자치기업체」를 창출하겠다는 것.국부의 원천인 에너지업체 등 유수기업을 국유화시키려는 한 방편으로 풀이된다.또 국가계획경제체제를 수립하고 화폐·금융제도를 계획경제체제에 맞게 개혁하고 한편으로 주요 공산품의 가격통제정책도 부활시킨다는 방침이다.화폐·금융제도의 개혁 가운데는 국영은행에서 통화의 수급조절뿐만 아니라 저축기능을 부가하는 내용도 들어있다.이는 민영화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불법」이 개입됐다고 판단한 모든 재산을 몰수,국고로 환수시키려는 계획의 하나로 평가된다.이밖에도 국가기획위원회를 대통령직속으로 신설,단기적으로 「현재의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2개년계획」을 별도로 수립하겠다는 내용도 눈에 띈다.이 기구는 바로 경제에 관한 국가통제를 확립하기 위한 상설기구다.또 다분히 상징적인 정책이지만 소비에트시대처럼 「인민들을 국가권력의 최상위기관」으로 선포하는 내용도 담겨있다. 이같은 계획들은 오히려 국민들에게 엄청난 재난과 쇼크만을 가져다줄 뿐이라는 것이 서방 외교소식통들의 분석이다.이미 러시아는 민영화대상기업의 80%인 11만8천여기업체가 민영화돼 있으며 러시아국민의 27%인 4천만명이 개인주식을 가지고 있다.또 러시아국민의 33%인 5천만여명은 이미 민영화부문에서 각자의 몫을 챙기고 있어 공산주의의 계획경제는 러시아 전역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다.공산품가격 통제제도 역시 국가세입을 감소시켜 되레 그들이 강조하던 사회복지 부문에의 투자를 감소시키는 모순을 낳을 수도 있다. 이 초안은 급진적 정책전환인 동시에 공산당의 정강정책과 상호모순되는 점이 많아 옐친정부와는 물론 외회내에서도 파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 참담한 “제2의 국치일”/황진선 사회부 기자(오늘의 눈)

    1995년 12월18일은 제2의 국치일이다.전직대통령이 「파렴치범」으로 법의 심판대에 섰기 때문이다. 2천8백38억원의 뇌물을 받은 노태우 전대통령이 서울지법 417호 법정에 선 이날은 당사자인 노씨뿐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두었던 우리 국민 모두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것이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를 겪고 난 뒤 일제하와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헌정사에는 파란과 우여곡절이 많았다.그러나 이날처럼 창피스러운 날은 없었던 듯하다. 일각에서 「세기의 재판」이라고 표현했듯이 흰색 저고리와 회색 바지차림의 수의를 입고 고무신을 신은 노씨의 모습은 이날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타전됐다.법정 주변에는 노씨 재판을 취재하느라 3백여명이 내·외신기자가 북적댔다. 노씨는 이날 다시 한번 자신의 파렴치함을 확인시켜주었다.법정 안에는 노씨가 재임기간중 5천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해 현재 1천8백억원의 잔액을 보유하고 있다고 발표할 때처럼 잔잔한 분노가 일기도 했다. 그는 88년 대통령선거당시 『기업인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겠다는 선거공약을 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어처구니없게도 『이권을 전제로 한 성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고 답했다.『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기 때문에 대형사고가 잇따라 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도 『회계는 변칙처리했겠지만 건전한 이익에서 성금을 내는 것으로 알았다』고 했다. 그는 얼굴이 다소 부어 부수수하고 참담한 모습으로 자신을 추궁하는 질문에 「모기」만한 목소리로 답하거나 얼버무리고 자신을 변호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2∼3차례 『잘못했습니다』 『반성합니다』라는 표현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 반성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날 노씨의 재판을 지켜본 전체적인 느낌은 「어떻게 저런 사람이 대통령을 했을까」하는 갑갑함이었다.분노보다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참담함이 앞섰다. 「세기의 재판」이라는 표현처럼 이날 노씨의 법정에는 내로라하는 사람이 즐비했다.재벌총수와 변호인은 물론 방청객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한때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던 지도급인사들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날 재판을 우리 스스로도 「세기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을까,과연 이 재판이 노씨만을 단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날 재판에 나온 기업인은 노씨에게 거액의 돈을 건넨 재벌총수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고,이제 곧 전두환 전대통령도 뇌물수수혐의로 기소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면서 답답함이 더욱 가슴을 옥죄오는 듯했다. 아마 이날 노씨와 재벌총수에 대한 뉴스를 접한 지구촌 방방곡곡의 사람은 한국을 「부패의 왕국」 대명사로 여겼을 것이다.노씨만을 지목해 「부패왕국」의 수괴로 여긴 것은 아닐 것이다.그렇다면 노씨에 대한 재판은 결국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물론 노씨와 재벌기업인은 국민으로부터 단죄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그리고 이날 재판은 영원히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 선진화의 기틀이 되어야 한다.그러나 우리 국민 모두가 노씨 재판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국민의 수준일지도 모른다는 자리감때문이었다.
  • 이수성 총리에 힘실어주는 청와대/전면개각 20일께로 늦추는 배경

    ◎신임 각별… 각료 제청절차 충분히 고려/이 총리 의중인물 1∼2명 수용 할듯 김영삼 대통령은 「삼고초려」끝에 이수성 총리내정자를 발탁했다.그외에 다른 인선은 고려한 흔적이 없다.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총리내정자가 계속 고사했다면 이번 개각에서 총리를 바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렇듯 김대통령의 이총리내정자에 대한 신임은 각별하다.「역사 바로세우기」의 대표주자로 그를 상정하고 있는 느낌이다.때문에 김대통령이 앞으로 이총리내정자에 대해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이총리내정자가 「힘있는」 총리로 부각되려면 이번 개각때부터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김대통령도 그 점을 알고 있다.개각일정을 그리 서두르지 않고 있다.이총리내정자의 각료제청 절차를 충분히 고려하겠다는 생각으로 여겨진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18일 국회의 총리 인준절차가 끝나면 김대통령은 이신임총리의 제청을 받는 형식을 거쳐 개각 내용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이어 『빠르면 18일 하오나 19일중 개각의 뚜껑이 열릴 수도 있지만 이총리의 제청형식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20일쯤 전면개각이 단행될 여지가 높다』고 점쳤다.18일에는 노태우 전대통령의 첫 공판,19일은 5·18특별법 처리 및 정기국회 폐회라는 일정이 있다는 점에서도 20일 개각 전망이 설득력이 있다. 이총리내정자는 18일 국회 인준이 끝나면 김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뒤 취임식을 갖게 된다.이어 19일 정례국무회의를 주재,각료들의 일괄사의를 모아 김대통령에게 전한뒤 신임 각료 제청절차를 밟으리라 예상된다.물론 개각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총리 제청은 일종의 「참고사항」인 셈이다.김대통령은 또 이미 대부분 개각의 골격을 짜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신임총리가 의중에 있는 인물 1∼2명 정도를 추천한다면 김대통령도 그를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이총리내정자가 학자로서 외길을 걸어왔으면서도 특유의 인화력으로 「마당발」로 불렸던 점도 적극적 각료 제청권 행사에 도움이 될 것 같다.학계,법조계,언론계 등의 폭넓은 지면을 바탕으로 내각에서호흡을 맞출 인사를 천거할 수도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의 내각이 정권 안정측면을 우선하던 것과 달리 이수성 총리내각은 역사 바로세우기,그리고 내년 총선 등의 과제를 놓고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내각이 될 것』이라면서 『김대통령도 내각이 힘을 갖고 문민정부 후반기의 개혁을 추진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민정부 출범후 14차례 개각/첫 내각 출신 오 공보처·홍 부총리 남아/박희태 법무·허재영 건설·박양실 보사 「11일 천하」도/총리 4명중 이회창씨 5개월 최단명 지난 93년 2월 25일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모두 14차례 총리 또는 장관이 경질되는 개각이 단행됐다.개각 폭의 크고 작음을 떠나 두달반 만에 한번 꼴이다.그만큼 사건도 많고,파란도 많았다는 얘기다. 김대통령이 구성한 첫 내각 출신으로 지금까지 똑같은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각료는 오인환 공보처장관이 유일하다.문민 첫 재무부장관에서 옛 기획원장관,다시 재경원장관으로 자리바꿈을 한 홍재형 부총리 겸 재경원장관까지 합치면 김대통령 취임후 계속 자리를 지킨 각료는 오직 두사람이다. 현정부에서 2년 가까이 장관직에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다.이민섭 전문체부장관이 지난 5월15일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 동안 역임,홍부총리와 오장관에 이어 「장수3호」를 기록한 정도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첫 조각때 포함됐다가 비교적 장관직을 오래 유지한 경우는 5명에 불과하다.지난 해 12·23개각 때 경질,1년10개월 동안의 재임기간을 기록했다.이들은 한승주 전외무,김철수 전상공,윤동윤 전체신,김시중 전과기처,권영자 전정무2장관 등이다. 문민정부의 국무총리로는 4명이 거쳐갔다.문민 초대총리인 황인성,이회창,이영덕,이홍구 총리의 순이다.이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8개월 반이다.최장수 총리는 지난 15일 새 총리로 발탁된 이수성 서울대총장의 전임인 이홍구 전총리로 1년을 역임했다. 가장 짧은 재임기간을 기록한 인물은 이회창 전총리다.지난 93년 12월 16일 취임,이듬해 4월 22일 이영덕 전총리에게 넘겨줄 때까지 5개월 7일동안 역임했다.다음으로 단임은 이영덕 전총리로 8개월,황전총리는 10개월 동안 재임했다. 장관들 가운데 가장 짧은 재임기간을 기록한 인물은 박희태 전법무,허재영 전건설,박양실 전보사부장관 등 3명이다.93년 2월 26일 김대통령 첫 조각에 포함되는 영예를 안았으나 11일만에 후임자에게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모두 자녀 부정입학,축재 물의 등으로 김대통령 출범 초기 거세게 불어닥친 「개혁태풍」에 휩쓸려 도중하차했다. 이회창전총리 내각은 같은 해 12월 21일 닻을 올렸다.닷새 전인 12월 16일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결과와 관련,사표를 제출한 황전총리의 후임으로 발탁돼 14개 부처의 장관들을 경질하는 전면 개각과 함께였다.하지만 감사원장 시절 성역없는 감사로 개혁작업을 충실히 보좌,김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 아래 출발했지만 미묘한 갈등관계로 물러나야 했다. 여기에 후덕한 이영덕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이 받쳐주고 최형우내무·서청원 정무1장관 등 민주계 인사들이 포진했다.이병대 국방·김숙희 교육부장관 등은 숱한 「설화」를 뿌리면서도 지난해 12월23일 개각 때까지 1년여 동안 재임해 비교적 장수한 편이다. 이전총리 시절 새로이 입각하거나 자리를 바꾼 장관들은 이홍구 통일·홍재형 경제부총리,박재윤 재무부장관등 3명에 불과하다. 이홍구 전총리 내각은 세계화의 기치를 내걸고 출발했다.「작은 정부」의 깃발 아래 정부조직 개편이 단행된 뒤여서 17명의 장관이 바뀌는 대규모 개각이 단행된 때였다. 홍재형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은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합친 재정경제원장관에,보사부에서 이름이 바뀐 보건복지부에는 서상목 장관이 유임됐다.상공자원부에서 바뀐 통상산업부에는 박재윤 장관이 새로 기용됐다.환경처에서 승격한 환경부에는 김중위 신한국당의원이 발탁됐다. 이홍구 전총리 내각 가운데 당시 주목을 받은 인사는 서석재 전총무처,김윤환 전정무1장관등을 꼽을 수 있다.문민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면서도 동해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유랑생활을 해야 했던 서전장관은 5년만에 정계에 복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 2월21일에는 김덕 통일부총리가 안기부장 시절 안기부에서 작성한 「지자제 연기문건」파동으로 물러나자 신한국당 의원인 나웅배통일부총리가 뒤를 이었다.이어 5월15일 김숙희 전교육부장관이 「월남전 용병」 발언파문으로,서상목 보건복지부장관이 「한약분쟁」때문에 경질되자 박영식·이성호 장관이 후임에 기용됐다. 이제 지난 15일 이수성 국무총리 내정자의 전격 발탁에 이어 전면개각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 「대쪽판사」부친 이어 학계서 두각/「이수성 총리 4형제」 스토리

    ◎동경대수석졸업 외삼촌 영향 “학문의 길”/모두 서울대 출신… 세동생부인도 강단에 이수성 국무총리 내정자는 명문가 출신으로 4형제 모두 그 맥을 잇고 있다.맏아들로 서울대 총장출신인 그에 이어 수인(54)수윤(52)씨는 교수로,수억씨(50)는 언론인으로 재직하고 있다. 부친 이충영씨(6·25때 납북·작고)는 일제 때 동경제대를 나온 법조인 출신.일제때 평양 복심법원 판사로 재직중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판사직을 내던지는 등 「대쪽 판사」로 명성을 날렸다. 어머니 강금복여사(85)도 일본 여자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재원이다.외삼촌 강정택씨 역시 제일고보(현 경기고)를 거쳐 동경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동경대 강단에 섰던 인물이다.이총리 내정자 가족들이 학문의 길을 택하게 된 것도 외삼촌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4형제는 모두 서울대를 나왔다.이총리 내정자는 법대,수인씨는 경제학과를 나와 정치학과로 학사편입,수윤씨는 문리대 철학과를 나와 정치학과로 학사편입,수억씨는 정치학과 출신이다.이총리 내정자와 수인·수윤씨는 서울고 동문이고,수억씨는 경기고를 나왔다. 이총리 내정자 집안은 대부분이 교수로서의 길을 가고 있다.그에 이어 수인씨는 영남대 정외과,수윤씨는 교원대 철학과 교수다.또 수인씨의 부인 김인자씨는 영문학,수윤씨의 부인 권희경씨는 음악전공으로 대학강단에 서고 있으며 수억씨의 부인 전수용교수도 경희대 영문과 교수로 있다. 하지만 4형제가 걸어온 길은 저마다 다르다.형법학자로 지난 72년 이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해 온 이총리 내정자는 지난 1월 직선 최다득표로 서울대 총장에 선출되는 등 교수들로부터 신망이 두텁다. 영남대 교수인 둘째 수인씨는 인혁당 사건과 관련,「청맥회」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했다.수인씨는 젊은 재야 학자들의 모임인 「한국정치연구회」회장을 지내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이때의 인연으로 국민회의 김대중총재에게 발탁돼 지난 90년 밀입북혐의로 구속된 서경원의원이 내놓은 전남 함평·영광지역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영남사람임에도 당선돼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셋째 수윤씨는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해온 두 형과는 달리 학문에만 몰두해 왔다.지금은 교원대 교수로 정치철학을 전공하고 있다.서울고 시절에는 「교내 제일의 주먹」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넷째 수억씨는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고 미국 시카고대에 유학했다가 SBS출범 때 언론계에 몸담았다.
  • 「12·12전 최 전대통령 조사」 자료 내용

    ◎“김재규에 「계엄」 알려줘 내란방조” 추궁/“시해범 체포지시 왜 안했나” 압박­신군부/약점잡혀 정 총장 연행 재가→하야­최씨 최규하 전대통령이 12·12사건이 일어나기 12일전인 79년12월1일 신군부측에 의해 내란방조혐의로 처음 조사받았다는 사실은 최근 최전대통령의 「진술거부」와 관련,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6월과 8월 2차례 검찰에서 소환조사를 받은 이학봉 전의원의 피의자 신문조서내용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측의 정권탈취음모가 이때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사상 유례가 없는 피의자조사는 그 이후의 12·12 정승화 육참총장연행 재가강요,80년 4월14일 전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발령 실현 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12·12사건의 실체와 그 성격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검찰은 전씨를 비롯한 핵심측근들의 내란죄 성립을 지난해 파악하고도 군사반란죄부분만 혐의를 인정한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문조서에서 신군부측은 최전대통령에게 시해범 김재규 체포를 지시하는 등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날 새벽 4시부로 계엄이 선포된다는 사실을 김재규에게 알려 주는 등 내란을 방조한데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따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결정적인 약점을 잡힌 최전대통령이 이후 12월12일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재가와 5·17비상계엄확대 등 신군부측의 계속된 강압적 요구에 이끌려다니다 결국 하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까지 신군부측이 최전대통령을 피의자신분으로 조사한 사실이 공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검찰의 12·12 및 5·18사건발표에도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2·12사건 재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지난 14일 민주당 강창성의원이 『최전대통령은 80년3월12일 전 당시보안사령관·이 당시보안사대공처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에 의해 대통령집무실에서 박대통령시해사건의 방조혐의로 4시간동안 조사받았다』고 폭로했으나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따라서 최전대통령의 조사를 직접 담당한 이학봉전의원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의 공개로 강의원이 주장한 것보다 무려 석달전에 신군부가 최전대통령을 직접조사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이 이같은 사실을 지난해 12·12사건조사당시 밝혀 놓고도 공개하지 않고 은폐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엇갈린다.우선 당시 「조사의 한계」를 안고 있던 검찰이 이 사건을 불기소처분하기 위해서는 신군부측의 내란죄 입증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최대통령조사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같은 질문을 이학봉·장세동·유학성·허삼수·허화평씨 등 전씨의 핵심측근 5명에게 모두 던졌으나 이씨만 구체적으로 답변했을뿐 나머지 4명은 『모른다』고 잡아뗀 것으로 피의자신문조서에는 기록돼 있다. ◎최규하 전대통령 성명서 요지 친애하는 국민여려분.작금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국민앞에 본인의 입장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88년 국회광주특위 이래 지난 7월 검찰에서의 12·12와 5·18고소·고발에 이르기까지 국회와 검찰에서는 본인에 대한 증인 또는 참고인 조사를 요구하였으며 본인은 그때마다 당국요구에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온 바 있습니다.보도를 통해 다 아시겠지만 이를 다시 요약하면 『대통령 재임중의 공적인 행위,즉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책무에 따라 처리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국정은 소신대로 처리할 수 없으며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전례를 남기는 것이고 또 그러한 전례는 앞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마저 없지 않아 이러한 전례는 앞으로 수많이 탄생할 대통령들의 직무수행에 두고 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되는 바 전직대통령으로서는 후임 대통령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전례를 남겨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점과 비록 일시적 비난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의 정통성과 계속성을 유지함과 아울러 대통령직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택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고 생각하여 왔고 지금도 그 소신과원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소신 때문에 본인이 검찰에 직접 진술은 하지 않았으나 진실규명의 협조차원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진상이 알려지도록 노력한 바 있습니다.12·12사건 조사에 있어서도 그날 밤을 같이 지새며 공관접견실에서 사태에 대처한 국무총리와 재임시 보좌하던 분들이 이미 참고인 자격으로 대통령에 관한 사항까지 소상히 진술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17사태의 조사 경우에도 그동안 검찰은 본건과 관련하여 80년 당시 국무총리·관계장관·측근보좌관·각군 사령관·관계 공무원 및 기타 장병들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참고인들의 진술을 청취하여 당시 상황이 파악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10·26사건이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적 비극과 비상사태에서부터 1980년 여름에 이르는 격동기는 첨예한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황 속에서의 안보문제의 심각성 뿐만 아니라 제2차 석유파동의 엄습에 의한 경제적 난국,극심한 사회혼란 등 참으로 예측불허의 국가적 위기였으며 본인과 정부는 이 일련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데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검찰 2차방문 조사 시도 안팎/최씨 평소 생각 전달한 듯/최씨측근 전언/“금품수수설엔 진노” ○…서울 서교동 최규하씨의 사저에는 이날 하오 3시 28분쯤 김상희부장과 이문호검사 등 수사팀 3명이 도착,대기중이던 최흥순비서실장 등의 안내로 최씨를 2차 방문. 김부장과 이검사는 질문자료가 담긴 파란색 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최비서실장과 악수를 나눈 뒤 『오랜만입니다』라고 짧게 인사말을 건네고 부속실로 직행. ○…최비서실장은 『최씨가 전두환씨로부터 1백75억원을 받았다는 민주당 강창성의원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검찰수사가 끝나면 밝혀질 것인데 왜 미리 지레 짐작등을 하느냐』고 반문. 한 측근은 『이기창 변호사와 평소 친분관계가 있던 강의원이 서교동측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금품수수설을 제기해 어르신이 몹시 분노했다』면서 『명예훼손혐의로 소송을 제기키로 하는 등 법적대응을 신중히 검토한 것으로 안다』고 전언. ○…검찰수사팀이 2차 방문한지 1시간여만인 이날 4시30분쯤 최비서실장과 이검사가 최씨 집을 나와 검찰수사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가 팽배.그러나 검찰조사가 이루어졌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비서실장이 『아니야』라고 답해 검찰수사가 순조롭지 못함을 간접 시사. ○…최전대통령에 대한 2차 방문조사를 마친 검찰수사팀은 하오 4시50분쯤 최씨 집을 나서면서 『수사가 잘 됐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씨는 검찰의 수사에 응했다.다만 질문내용에 대해서는 종전 입장과 같이 국민과 국익을 위해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면서 답변을 회피. 최씨 측근들은 기자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최 전대통령이 검찰의 2차방문 조사에서는 나름대로 평소생각을 전달한 것 같다』고 전언,1차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조사가 진행됐음을 시사.
  • 전씨,노씨등과 작당해 군사반란/전씨 구속­주요 혐의 내용

    ◎수차례 회합… 군권 장악계획 음모­반란 모의/총장공관 무력 점거… 정 총장 연행­반란 실행 3일 구속수감된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 검찰이 적용하고 있는 범죄 내용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만큼이나 「화려」하다.영장요지를 분석한 전씨의 주요 범죄혐의 내용을 정리한다. ○거사일정 등 논의 ▷반란모의◁ 10·26사건 합수본부장인 전씨는 군장성 진급심사에서 하나회소속 군인들의 진급이 여의치 않게 되고 권한 남용 문제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과 잦은 갈등을 빚어 인사조치당할 우려가 있자 정총장을 김재규 내란사건 관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불법 연행해 제거함으로써 군의 실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79년 11월 중순부터 노태우 9사단장·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황영시 1군단장·박준병 20사단장 등과 수차례 회합,논의한 끝에 12월12일을 정총장 연행 거사일로 정했다.정총장 연행에 반발,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 등을 거사 당일 하오 6시30분 만찬초청 명목으로유인하여 부대지휘를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전씨 등은 같은 시각에 보안사와 인근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정총장 추종세력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 병력을 동원해 제압하기로 모의했다. ○초병 현장서 살해 ▷반란실행◁ 12일 하오 7시경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우경윤 육본 범죄수사단장·최석립 수경사 33헌병대장 등은 보안사 수사관과 헌병을 동원,총장공관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에게 권총을 난사,제압한 뒤 하오 7시30분경 정총장을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했다.하오 9시30분쯤 정동호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고명승 대통령경호실 작전담당관 등이 경호실 병력을 동원하여 대통령 관저인 총리공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전씨 등은 최규하대통령에게 정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 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했다. 하오 11시30분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박종규 3공수여단 15대대장은 특전사령관실에 3공수여단 병력을 투입,총격을 가해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낭 소령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정 특전사령관에게 부상을 가한 후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박희도 1공수여단장·서수렬 1공수여단 2대대장 등은 13일 0시30분경 1공수여단 병력을 동원하여 육본과 국방부를 점거하고 노재현 국방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근무초병인 정선엽 병장에게 총격을 가해 현장에서 사망케 했다.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신윤희 헌병부단장 등은 김진선 수경사 상황실장의 지원을 받아 수경사사령관실에 진입,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히고 육본수뇌부의 무장을 해제한 후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장태완 수경사령관,문홍구 합참 대간첩본부장 등을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전씨 수괴역 담당 ▷혐의내용◁ 전씨는 수괴로서 노태우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탈취,반란을 일으키고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없이 부대를 동원해 중요 지점을 점거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수소를 이탈했다.또 김오낭을 살해하고 정병주와 하소곤·이재천·김인선 등을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특별법제정 발표에서 전씨 구속수감까지 ▲11월24일=김영삼 대통령 5·18특별법 연내제정 발표 ▲29일=정동년 등 5·18 고소인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소취하 ▲30일=헌재,「5·18선고」 연기 공식발표 ▲12월1일 하오 6시10분=검찰,전두환씨 2일 하오 3시까지 출두통보 ▲2일 상오 9시=전씨 대국민성명발표후 고향인 합천으로 출발 ▲하오 6시10분=검찰,반란수괴등 6개죄를 적용,사전구속영장 청구 ▲하오 11시23분=법원,구속영장발부 ▲밤 12시=서울지검 수사1과장 등 수사관 9명,전씨가 머무르고 있는 합천 전규명씨 집으로 급파 ▲3일 상오 5시57분=수사관 9명,합천 도착 ▲6시9분=전씨에게 영장제시 ▲6시 34분=전씨,영장집행 완료 ▲6시 37분=전씨 호송차량 합천 출발 ▲10시 37분=안양교도소 도착,수감
  • 멕시코서 태권도장 운영 문대원 관장(세계속의 한국인:2)

    ◎남미에 「한국 얼」 심기 26년/유단자 심사땐 한국역사 관련 논문 필수로/사재털어 한글학교 설립… 대사관에 기증도 『차렷,묵념.국기에 경례』 『관장님께 큰 절』 아즈텍문명의 나라,선인장의 나라,낭만적인 서반아기질이 한데 어우러진 지구 반대편의 나라 멕시코.해발 2400m의 고원에 위치한 그 수도 멕시코시티 남부 누에보 레온거리의 허름한 한 2층건물에서 거침없이 새어나오는 한국말은 세계속의 한국을 새삼 실감케 했다. 오늘은 두달에 한번씩 있는 승급심사날.하얀 태권도복에 검은색부터 흰색까지 빨강·파랑·노랑색등 제각각의 띠를 두르고 두주먹을 불끈 쥔 멕시코 청소년의 파란 눈망울에는 한국말로 된 태권도용어가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멕시코인에게 「그랑 마에스트로」로 통하는 문대원(52)관장이 중앙에 자리를 잡자 사범의 구령으로 간단한 의식이 치러진 뒤 바로 심사가 시작됐다.오늘 심사대상은 어린이 22명,성인 14명으로 모두 36명. 사범의 한국말 구령에 따라 먼저 어린이가 급별로 나와 기본동작을 선보이고 다음에는 둘씩대련을 한다.2시간 가까이 심사가 계속되는 동안 체육관 안에 꽉 들어찬 부모도 덩달아 손에 땀을 쥐었다. 심사가 모두 끝난 뒤 문관장은 개개인을 호명하며 지적사항을 알려줬다.이어서 부모를 향해 『단을 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청소년이 이같이 절도 있고 예와 도를 중시하는 태도를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자신의 습관으로 가질 때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함께 가질 수 있습니다.이는 개인성장에 큰 도움은 물론 멕시코 장래에 큰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역설하자 힘센 박수가 쏟아졌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호르헤 페레스군(12·코메르슈중학교 2년)은 『심사때 연습한대로 동작이 나오지 않았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번에 빨강띠를 따면 내년에는 단심사에 도전할 텐데…』라며 아쉬워했다.4년째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페레스군의 동생 빅터군(8·루돌프국교 4년)과 누나 아리아드나양(13·코메르슈중3)도 함께 심사를 봤다. 이 삼남매의 심사과정을 지켜본 엄마 마르탈루 솔리스씨(38)는 『애들이 태권도를 배우면서부터 몸도건강해지고 어른에 대한 예의도 발라졌으며 학교성적도 올라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그녀는 『요즘 아빠도 배우러 다니고 있다』면서 자신도 배울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심사에는 이 도장 출신의 유단자 선배 10여명이 나와 후배의 심사를 도와주고 멋진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청원경찰학교의 사범을 맡고 있다는 선배 에드와르도 샤릭 델리오씨(29·2단)는 『개인방어목적으로 시작했으나 문관장이 주는 신뢰감과 그에 대한 존경심에서 태권도에 깊이 빠져들게 됐다』고 입문경위를 설명했다. 문씨가 멕시코땅에 발디뎌 태권도를 처음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19 69년5월.그로부터 2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태권도는 멕시코시티의 46개 도장을 포함,32개주 전역에 1백84개의 도장과 3만여명에 달하는 인구를 가진 대중스포츠로 성장했다.70년대까지만 해도 멕시코 전역을 휩쓸고 있던 일본의 가라데 열풍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태권도의 우월성에 문씨의 성실성이 보태져 멕시코인에게 참정신운동으로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인에게 태권도는 바로 한국을 의미하고 그 정신은 한국의 정신을 의미한다.이는 문씨가 제자를 키우며 유달리 태권도의 역사와 기본정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유단자 심사 때는 운동 이외에 반드시 한국의 역사및 정신에 관한 논문제출과 1백시간 봉사를 필수로 해온 그의 엄격하고 독특한 교습법이 유단자에게 한국을 어버이의 나라로 자연스럽게 심어왔다. 문씨는 그동안 멕시코 대통령경호실과 육군사관학교·경찰청 등의 교관을 지내면서 많은 제자를 키워 그들이 오늘날 국회의원을 비롯,장관·주지사 등 멕시코정부내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등 멕시코 지도층을 지한파로 이끄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문씨가 83년 창설,13년째를 맞고 있는 멕시코 태권도 전국대회인 「대원문컵대회」는 단순한 체육경기가 아니라 멕시코인의 전국축제형태로 발전해가고 있다.32개주 대표가 제각기 다른 도복을 입고 출전,고향의 명예를 걸고 한판 승부를 가리는 이 대회는 창작품세로 우열을 가리기 때문에 매년 독창적인 품세가 개발되며 또 각종 호신술을 음악에 맞춘 율동으로 공연하는등 많은 볼거리 때문에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멕시코에 태권도를 전파하기 시작한 지 4년만인 73년 서울태권도세계대회에 처녀출전한 멕시코팀을 3위에 입상케 하는등 문씨의 헌신적인 노력은 멕시코정부당국의 주선으로 그에게 6년만에 국적을 취득케 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원래 멕시코정부의 이민불허정책 때문에 30∼40년을 멕시코에 살아도 국적을 얻기 힘든 현실을 감안할 때 그의 국적취득은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문씨가 그동안 멕시코정부당국이나 민간단체등으로부터 받은 표창장이나 감사장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지난해 멕시코 국회에서 받은 표창장이다.「지난 25년동안 이 사회에 모범된 사회인을 배출하는 데 애쓴 공로」라고 밝혀진 표창이유는 그에게 지난 세월 어려움에 대한 보상을 의미했다. 문씨는 이같은 자신의 활동에는 국악을 전공한 부인 정한희(42)씨의 내조의 힘이 컸다고 강조했다.인간문화재 23호 가야금병창 박귀희선생의 제자로 국내 무대에서 활약하던 정씨는 82년 결혼후에는 멕시코인과 교민에게 국악공연등을 통해 한국의 얼을 소개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정씨는 남편이 주관하는 대형 태권도대회의 중간에 국악공연을 선보이는 것은 물론 멕시코의 국제문화행사나 교민행사등에 자비를 들여서까지 참여하는 열성을 보이고 있으며 후진양성을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충남 합덕이 고향인 문씨는 대전중·홍성고를 거쳐 경희대 정외과 2년 재학중이던 62년 미국 텍사스대학의 교환교수로 가게된 부친을 따라 미국에 이주했다.이스턴 텍사스대 프리엔지니어링스쿨에서 전공을 건축학으로 바꿨으며 후에 텍사스공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중학교때 태권도를 시작,고등학교 2학년때 유단자가 되기는 했으나 문씨가 태권도인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미국에 가서도 5년이 지난 67년이었다.그전까지는 태권도에 호기심을 갖는 친구의 권유로 교내에 「블랙벨트 문」 태권도클럽을 만들어 가르치는 정도였다.그 무렵 휴스턴에서 태권도도장을 운영하고 있던 미국인 친구가 마약으로갑자기 도장을 떠나 하는 수 없이 도장을 떠맡게 되면서 인생항로가 바뀌게 됐다. 멕시코에 오게 된 것은 휴스턴에서 도장을 운영하던중 멕시코 가라데도장측의 초청으로 몇차례 멕시코시티를 방문하면서 그 진지한 분위기와 멕시코인의 열의에 마음이 끌려서였다.69년 멕시코의 가라데도장에 사범으로 초빙돼온 문씨가 처음 시도한 것은 일본인 전임사범이 만들어 놓은 일본색을 없애는 작업이었다.중앙에 걸린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고 사범이 앉던 높은 단을 치워 사범과 수강생이 같은 높이에 서게 했다.그리고 일본말투성이로 돼 있는 운동용어를 스페인말과 한국말 혼용으로 바꿨다. 문씨의 문하생은 다음 해부터 각종 대회를 휩쓸었고 국내대회는 물론 세계대회에서까지 입상,멕시코의 국위를 선양케 되자 태권도에 대한 인식은 날로 새로워졌다.그러나 당초 5년 뒤 파트너로 지위를 격상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도장주가 지키지 않자 74년 문씨는 독자적으로 「태권도 무덕관」 도장을 차리게 됐으며 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씨는 교민사회에 대한 애착또한 남달라 그동안 교민회장을 두차례 역임했으며 사재를 털어 한글학교를 만들어 스쿨버스 2대와 함께 대사관에 기증하기까지 했다.1년내내 전국의 도장을 돌며 심사를 봐주는등 매일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는 문씨는 이제 자신의 소망을 태권도와 한국고전무용을 가르치는 조그마한 학교를 설립하는 데 두고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 성악가 김자경(인물탐구:86)

    ◎오페라와 결혼한 “영원한 프리마 돈나”/“독특한 릴릭 소프라노” 50년 미 카네기홀 진출/68년 자비로 「오페라단」 창단… 정기공연 49차례/지난 10월 국내 첫 야외오페라 무대… 최근 국악에 입문 「앵두나무 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던 파랑새가 방안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 김자경을 낳았다」는 그 어머니는 「새소리가 어찌나 맑고 투명하던지 나의 딸 자경은 노래하는 사람이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딸은 지금도 독창회 무대에 서서 「불굴의 오뚝이」「작은 거인」 「분투의 또순」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할바와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의지의 원로다.얼핏듣기엔 드세고 거센 여장부의 이미지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해맑은 미소와 화사한 「이팔청춘」의 마음씨에서 우리의 「영원한 프리마 돈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지난해만해도 희수기념 독창회를 비롯,올해도 불우이웃들을 돕는 호스피스 건립기금을 위한 독창회를 열었고 연말에도 자선음악회 스케줄이 잡혀있다.벌써 19번째다.지난 75년당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손수운전을 하고 돋보기 없이 글씨를 읽고 쓸수 있는 눈과 귀를 주신 신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그는 맹인들의 개안수술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개안수술 사람은 50여명이 넘는다.「두손을 모으고 마치 기도하듯,신을 찬미하듯 혼신을 다하는 그의 노래는 진심으로 그들이 눈뜨게 되기를 비는 순수함과 열정이 담겨있다」는 게 작곡가 김동진씨의 말이다. ○맹인 50명에 개안수술 만년의 그의 독창회중 가장 감명깊은 것은 4년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결혼 50주년 기념」독창회라고 할 수 있다.수많은 자선음악회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노래한 이 무대는 그의 부군이자 서양화 일세대였던 심형구화백을 추모하는 자리로 「그리움」「못잊어」「그대있음에」「청산에 살리라」등 「부군에 대한 사모」의 정이 절절히 넘쳐 청중에게 찡한 감동을 안겨주었다.「나의 일생을 맡긴지 21년,2남1녀와 함께 나의 수많은 연주를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이 그는 예고도 없이 떠나가버렸고 29년이란세월을 혼자서 살면서 그 파란만장한 사연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그날 음악회 팸플릿에 쓴 글이다.그러나 『68년 성은 「오」씨이고 이름은 「페라」인 오페라와 결혼했고 이제는 김자경이가 오페라인지 오페라가 김자경인지 분별할 수 없이 일체가 되었다』고 일가를 이룬 예술가다운 의연함을 보이기도 했다. 김자경은 경기도 개성에서 약방을 경영하던 김영환씨와 백열소여사의 외동딸로 태어났다.3살되던해 서울에서 감리교 신학교에 다니게 된 부친을 따라 이사,이화유치원과 이화보통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원산에서 루씨여학교를 나왔다.그는 노래 뿐만 아니라 운동에서 미술 수학 물리 화학등 못하는게 없었고 언제나 전교수석,어릴 때부터 오페라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아들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도쿄여의전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그러나 도쿄로 떠나기 전날밤 그는 어머니를 붙들고 「어머니가 동생하나만 더 낳았어도 나는 성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한탄한 것이 부모의 마음을 움직여 부친은 당장 「성악을할것」을 권해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성악공부는 이화여전을 졸업하던해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신인음악회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했고 도미유학길에 오르기전까지 이화여고에 임시음악교사로 취직한 것이 심형구씨를 만난 계기가 된다.도쿄미술학교출신의 「멋쟁이화가」 심형구와 「만인의 애인」이자 「한국 최고의 소프라노」 김자경의 러브로맨스는 숱한 화제를 장안에 뿌리면서 41년 12월 드디어 결혼,「가정과 예술을 병행시키는 멋진 가정을 이루자」는 다짐과 함께 부군의 주선으로 김자경은 31세 되던해 오랜 숙원이던 줄리어드음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의욕적인 출발과는 달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에서 세기적인 소프라노 릴리폰즈의 노래를 듣고는 자신의 음악적 자질과 소양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그는 한동안 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다.단한번도 의심해 본적 없던 자신의 기량이 거대한 오페라가수 앞에서 무색해진 순간이었다.「메트로폴리탄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를 자책하며 밤새도록 흐느끼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비몽사몽간에 「너는 왜 세계적인 성악가만을 고집하는가.열심히 노력하여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을 세계무대에 세우라」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다.때마침 미국에 다니러 왔던 김활란박사도 「나는 릴리폰즈보다 네 목소리가 백배 더좋다」고 격려해주었다. ○31세때 줄리어드 입학 『그래,나두 해내고야 말겠다』 그는 굳게 결심하고 그 길로 지도교수를 찾아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에 서겠으며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교수는 놀라서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하려면 먼저 학교측이 주최하는 오디션에서 통과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그는 7명의 심사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벨리니의 「노르마」중 「카스타티바」를 열정적으로 불렀고 「독특한 음질의 아름다운 릴릭 소프라노」로 인정되어 1950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카네기홀 무대에 서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메트로폴리탄 가수들과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카르멘」에 출연,남부 60개 도시에서 80회연주를 비롯,한번 투어에 나서면 3개월이상 걸리는 전미순회공연에도 빠지지 않게되었다.그러나 좋은 일에는 흔히 마장이 생긴다고 한 것처럼 그가 「종달새처럼 푸른 창공을 마음껏 비상하며 노래부르고 있을 때」 그해 62년 여름,방학을 맞아 속초로 스케치여행을 떠났던 부군의 익사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전신마비 증세를 일으키는 등 긴 슬픔에서 헤어나기까지 실로 오랜시간이 걸렸다.그러다가 65년 봄,호화여객선 빅토리아호를 타고 세계일주 여행길에 오르면서 48세의 나이로 「퀸 오브 빅토리아」에 선발되자 당선 사례로 아르디티의 「일바치오」와 「오솔레미오」를 부르는 동안 그의 내부 깊숙이 움츠려있던 프리마 돈나의 기백과 보석 같은 기량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불굴의 투지” 여장부 유럽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계획했던 대로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했다.그리고 그해 5월 창단기념공연으로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를 준비하면서 티켓을 들고 각기업체와 동창 후배들을 찾아다녔다.그러나 그들의 호의와 적극적인 협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더이상 버틸 수 없이 창단 3년만에 문을 닫는 위기를 맞는다. 그는 자살을 생각했으나 「죽을 결심으로 뛰어들면 안될 일이없다」고 다시한번 자신을 일깨웠다.그때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진 고초와 수난과 시련」을 거치면서 후원회와 고정관객 확보로 그의 오페단은 서서히 기반을 잡아나갔다.오페라단창단 만27년에 정기공연 49회,4년전부터 이사장직에 머물면서 지난 10월에는 1만2천명을 수용하는 잠실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레하르의 3막 오페라 「메리 위도우(즐거운 과부)」로 국내 처음 야외오페라를 해냈고 내년도 제50회 「카르멘」 캐스팅을 위해 최근에는 뉴욕에 다녀왔다. 호는 심설,「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면 어떤 어려운 일도 이루어진다(정신일도 김석가투)」는 그의 신조는 여전히 손수 차를 몰고 지난봄에는 한양대대학원 국악과에 입학,새로 우리「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줄기찬 한 흐름속에서 그는 불굴의 의지로 우뚝선채 음악성취 뿐 아니라 그늘지고 병든 이들에게 「이세상의 빛」을 실천하는 「천사」이며 그들을 위한 그의 목소리는 시들줄 모르는 「영원한프리마 돈나」로서 우리시대에 찬연한 빛을 발한다. ◇연보 ▲1917년 경기도 개성 출생 ▲40년 이화여전 졸업 ▲41년 제1회 독창회 ▲48∼50년 미 줄리어드음악학교 성악전공,「라 트라비아타」주역,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51∼58년 미남부 60개 도시순회공연,귀국독창회 ▲58∼83년 이대성악과 교수 ▲60년 오페라 「오델로」주역 ▲62년 국립오페라단 부단장 ▲65년 유럽지역 성악교육시찰 ▲68년 김자경오페라단창단,단장.베르디 「춘희」이후 49회 공연 ▲75년 제1회 「김자경 가곡의 밤」,국제음악인대회(IMC) 참가 ▲79년 김자경 오페라 관현악단창단 ▲81년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82년 한·미수교1백주년 기념독창회(워싱턴 케네디센터) ▲86년 김자경 오페라단 소극장 청소년부 창설기념 「노처녀와 도둑」 공연 ▲87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88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91년 결혼 50주년기념 독창회 ▲93년 홍난파선생 추모독창회 ▲94년 희수 독창회 ▲95년 호스피스 건립기금마련 독창회(19회),한양대대학원 재학중,김자경 오페라단 이사장 대한민국 예술원상·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74년)·중앙일보문화대상(76년)·국민훈장 석류장(83년)·세종문상(87년)·프랑스 문화예술훈장(92년)·문화공로패(93년)
  • 제2개척지 보산촌(압록강 2천리:14)

    ◎1인당 연소득 8백원… “조선족 부자마을”/20년간 65만평 개간… 곡물 연32만근 수확/137가구 482명 거주,교육열 높아 석학 많아/노인퉁소대 등 문화예술단 조직… 민속전통 보존 압록강유역의 길림성과 요령성에는 조선족자치현이 1군데,자치향이나 진이 16군데가 있다.자치현은 길림성 장백현이 유일하고 진은 길림성 집안시에 1곳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요령성에 분포돼 있다.그렇다고 해서 자치지역에 조선족만 사는 것은 아니다.한족과 만족·몽골족이 함께 살아가는 잡거지인 것이다. 그런데 요령성 단동시 관전만족자치현에 속하는 석호구향의 보산촌은 조선족 못자리판이다.비록 만족의 자치현이기는 하나 보산촌에 사는 한족과 만족은 「쌀의 뉘」와 같은 미미한 존재다.조선족이 1백37가구 4백82명인 데 비해 한족과 만족은 10가구 39명에 불과했다.모두가 파란데 하나가 붉다는 만록청중일점홍과 같은 조선족 마을이라고나 할까.보기드문 현상이었다. 보산촌은 망보산 자락 비산비야 지대에 자리잡은 오붓한 마을이다.관전만족자치현성과는 10리가채 못되었다.보산촌 당서기 문영빈(47)씨 집에 짐을 풀고 촌장 배일명(47)씨를 만났다.탱크부대 훈련단장을 지낸 그는 마을현황을 자세히 들려주었다.경작면적이 1.5㎦라는 것과 지난 1981년 현정부가 각지의 조선족을 이주시켜 마을을 만들었다는 사연 등을 이야기했다. ○평야지대의 보금자리 조선족의 마을 보산촌을 일구어낸 주인공 김창영(66)선생은 지금 요령성 단동시에 살고 있다.단동시 조선족노인협 부회장직을 맡아 만년을 보내고 있는 그는 1975년부터 관전만족자치현 상무(상임)현장을 역임하는 동안 보산촌을 세웠다.그는 일찍 보산촌지역에 욕심을 냈다.당시 보산촌일대는 군의 훈련장과 군량미 자급을 위해 개간한 수전지대가 있는 군사지역이었다. 그러나 논농사경험이 없는 군이 더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고 버려둔 상태였기 때문에 눈독을 들일 만했다.김부현장(김창영)은 부대장을 찾아가 훈련장과 논을 지방정부에 돌려줄 것을 요구한 끝에 이를 실현시켰다.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 8월1일을 상징한 8·1저수지라는 용수원까지 갖춘 군사지역은심양군구의 비준을 받아 결국 지방정부에 이양되었던 것이다. ○군지역 불하받이 정착 이에 따라 단동시는 1981년 봄 군사지역의 논을 조선족에게 풀어주는 일을 착수했다.조선족에게 땅이 돌아가기까지는 조선족의 벼농사기술과 소수민족 우대정책이 맞물렸다.보산으로 이주하는 조선족은 의무적으로 국가에 바치는 징구량을 3년간 면제받는 한편 농업세 역시 면제되었다.그리고 1무(3백평)를 개간하면 50원의 장려금을 대주었다.그리고 성정부에서 2년에 걸쳐 27만원을 들여 도로와 전기·수도 등을 건설했다. 그러니까 보산촌은 선조들의 서북간도 개척에 이은 제2의 개척지다.그 개척의 기수는 물론 당시 부현장이었던 김창영선생이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도 조선족이지만 조선족에게 남다른 애정을 기울였다. 『저는 세살을 먹던 해에 부친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왔디요.고향은 평안북도 초산입네다.관전에 사는 조선족들은 거개가 평북 초산·벽동·창성에서 이주한 사람들였디요.50년대말까지도 많이들 모여 살아서리 그런대로 생활이 편리했댔는데 지금은 그렇디가 않아요.문화혁명 이후 한 마을에 몇 가구씩 끼어사는 신세가 되어 한족에게 급속히 동화하고 말았다 이 말입네다.조선족학교가 엉망이라 말과 글을 제대로 못 배우고,짝 찾아 시집·장가가기도 어려워졌디요.그래서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방법을 강구했댔습네다』 지금 보산촌에 사는 한족과 만족은 군훈련장에 붙어살던 사람들이다.조선족의 이주는 1981년 31가구가 보산촌에 자리를 잡는 것으로 시작되었다.요령성과 관전현 이외지역 거주자는 이주할 수 없도록 원칙을 세웠으나 연줄을 대고 찾아와 죽치는 바람에 외지인 13가구도 결국 받아들였다.조선족끼리 살고 싶어서 찾아온 핏줄을 문전박대하지 못한 인심이 가상스러웠다. 내가 보산촌에 와서 머무르던 집주인인 당서기 문영빈씨는 조선족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보산촌으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조선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는 것이다.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는 이야기를 후회삼아 슬슬 풀어놓았다. 『한국과 민족만 사는 태평소현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조선말을 할 턱이 없었디요.1971년 연변 안도현 북흥촌으로 선보러 갔을 때 중매쟁이가 통역을 했디 뭡네까.나는 한족말만 하고 처가식구들은 조선말 말고는 못하니까 별도리가 없데요.우리 애들도 여기 오기 전에는 조선말 못했디요.이자 나나 애들이나 조선말 유창한 걸 보면 보산촌은 그 자체가 커다란 조선족 학교입네다』 ○비닐공장 등 개설 운영 고생인들 오죽했을까만 보산촌 사람은 모두가 잘 살고 있다.농토가 2천1백73무에 곡물수확량이 32만근에 이르는 부자마을이다.그리고 비닐제공장을 포함한 2개의 공장을 경영하여 36만원의 농공업총생산량을 기록했다.1인당 연간소득이 8백원(한화8만원)이고 학교경영비와 각종 세금을 공장경영이익에서 충당하고 있다.보산촌 소학교 출신 10명이 대학과 전문학교를 나와 2명이 석사학위를 받았다.현재 대학생도 6명이나 된다. 보산촌은 현이 지정한 조선족민족문화촌이다.조선족 고유민속 발굴과 보존은 물론 노인퉁소대와 같은 문화예술공연단체도 조직되었다.요즘은 연변을 통해 백두산을 구경한 한국의 관광단이 압록강을 따라 보산촌을찾고 있다. 그래서 보산촌 사람의 춤과 소리를 구경하고 함께 어울려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는 한국관광객을 곧잘 만나게 되었다. 지난 6월20일에는 보산촌을 들른 한국평생교육회가 보산촌노인협회에 중국 인민폐 1만원을 내놓았다.그 돈으로 노인들은 사과나무를 심고 밭머리에 「중·한노인친선사과원」이라는 푯말을 세웠다.사과나무는 3년이 지나면 혈육의 정이 담긴 꽃을 피울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나서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열매를 맺으며 보산촌 노인퉁소대가 「우리의 소원」을 또 연주할 것이다.
  • 수능답안지 표기란 개선/「0」자 아래 점선… 홀수란에 색칠

    국립교육평가원은 18일 수험생의 혼란을 막기 위해 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OMR답안지의 수험번호 표기란의 맨 위에 있는 0의 숫자 아래 점선을 새로 넣고 「1·3·5·7·9」홀수란은 파란색으로 덧칠을 했다고 밝혔다. 평가원은 학원에서 실시하는 모의수능시험 수험번호 표기란이 첫 숫자가 1부터 배열돼 일부 수험생이 착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어 이처럼 개선했다고 덧붙였다.
  • 백두산 산삼(압록강 2천리:13)

    너도나도 「방산」… 사라지는 산삼/“한뿌리만 캐도 가난 벗는다”… 이젠 전설로/집안 「신개하홍삼」 한때 고려인삼과 버금/인삼값 폭락… 꽃사슴 사육으로 대체 『화승총 메고 다닌 사람티고 범 잡디않은 사람 없고,홍실 가디고 산판 헤맨 사람티고 산삼 못캔 사람 없디요.그만큼 딤승이 우글대고 삼이 많았다 이겁네다』 노인들은 산 이야기만 나오면 으레 신바람이났다.얼핏 허풍스러워 보이나 백두산 자락을 깔고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의 말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깔려있을 것이다.왜냐하면 「장백현지」와 같은 기록에도 백두산 산삼이 심심치 않게 나오기 때문이다.최근 기록을 보면 지난 1979∼85년까지 국가가 장백현에서 거두어들인 산삼은 1백9·6량(5천4백80g)으로 되어있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산삼을 백초 가운데 으뜸(백초지왕)으로쳤다.그리고 만리장성 동쪽을 말하는 관동의 세가지 보물의 하나로 꼽은 명산물이 백두산 산삼이었다.질병을 없애고 노화를 방지한다는 산삼 한뿌리만 캐면 가난뱅이도 금방 부자가 되었다.청나라 연호로 함풍연간(1851∼61년)에 어떤 촌민은 산삼 여덟뿌리를 캐서 황제에게 바쳐 오품지부의 벼슬을 얻었다고 한다. ○산삼 진상… 벼슬 얻기도 산삼 캐는 일을 방산이라고 부른다.옛날에는 전적으로 삼만을 캐러다니는 직업 방산자들이 있었다.이들은 산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산삼의 생장과정까지 지켜볼 정도로 산삼에 도통한 사람들이었다.그래서 산삼이 자라는 자생지를 훤히 꿰뚫었다.산삼은 여간한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처음 산삼을 발견하면 먼저 『봉추요』라고 소리를 친다.그러면 옆에서 『뭐요?』라고 묻는다.발견자는 몇잎이라고 일러주고 즉시 홍실로 뿌리 위쪽을 묶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집안시 양수향 황차촌에 사는 송창철(36)씨는 지금 향정부에서 민족사무조리로 일하는 조선족 청년이다.그런데 부친 송병계(62)노인때부터 산삼을 캐러 다닌 터여서 한때는 방산에 나섰던 경험이 있다.그의 말을 들어보면 방산에는 삼매경같은 무아의 경지가 뒤따르는 모양이다. 『초막에서 밤새 모기에 물리는 고초를 겪지만 날이 밝아 산천을 바라보노라면 신선이 된 기분이 듭데다.시원한 실개천에 세수를 하고 그 물에 밥을 디어먹고 산을 타디요.배고픈 줄도 모르고 산을 헤매다 늦게 점심요기를 할 요량으로 자리를 잡았댔습네다.그런데 바로 맞은편에 빨간 꽃이 보이더라 이 말입네다.그거이 산삼이었디요.밥 보자기를 밀쳐놓고 봉추라는 소리를 냅다 지를 수 밖에….횡재를 만나서리 늦은 점심도 아예 굶고 정성들여 캤디요.세잎 짜리였는데,장사꾼한테 4천원을 받았습네다』 그 깊고 넓은 백두산 자락에는 산삼의 열매를 따 먹는 새가 분명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부리 아래가 빨갛고 파란털을 가진 새다.이 새를 쫓아 가면 반드시 산삼을 만난다고 해서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방초새나 산삼새라고 부르는데,백두산 인근 사람들이 흉내낸 새소리는 「왕간가­이오­」다.북송때 백두산에 산삼을 캐러갔다가 굶어죽은 산동성 기수현 사람인 왕간가와 이오의 울음이라는 전설이있다. ○초막 짓고 산에서 생활 한대의 약학서인 「신농본초경」을 보면 산삼의 약효는 대단하다.그래서 백초지왕이라 했고다른 약재에 비해 값도 엄청 높아 여늬 사람들은 먹을 수가 없었다.옛날에는 장백현이나 집안현에서 산삼을 캐면 안동이나 영구 같은 도시에 내다 약재상들에게 팔았다.요즘은 사정이 달라 중국을 찾는 한국인이 단골이 되었다.그래도 값이 싸다면서 닥치는 대로 사는 바람에 판로 걱정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두산 산삼이 도라지처럼 흔한 것은 아니다.점점 희귀해지고 있다.세월이 좀 더 흘러가면 백두산 산삼은 전설로만 남아있을지 모른다. 산삼씨앗을 따서 산에 뿌린 이산삼과 또 산삼씨를 뜰에 뿌려 재배한 원삼의 대를 이어 청나라 강희원년인 1662년에 압록강유역에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특히 집안시는 중국의 중요한 인삼재배지가 되었다. ○막차 탄 인삼농가 많아 오늘날 집안에서 가장 유명한 인삼은 「신개하홍삼」이다.그 질이나 약효가 고려인삼에 버금간다고 집안 사람들은 자랑하고 있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2만8천2백50장이었다가 1959년 집체화 시기에는 재배량이 11만2천1백8장으로 늘었다.그리고 1983년 개체화 시기로 넘어가면서는 더 늘어 57만1천1백12장이나 되었다.총 수확량은 74만2천2백88㎏으로 2천1백66만원어치를 생산했다. 그러나 요즘와서 인삼은 사양의 길에 접어들었다.양수향 황차촌에 사는 송명철(41)씨는 지난 19 88년부터 인삼을 재배했다.당시 1등품 인삼 1근에 37원8전을 홋가해서 인삼재배자들이 큰 돈을 벌 때였다.그래서 1만원을 대부받아 인삼재배를 시작했는데,재수 없는 사람 뒤로 넘어져도 코를 깨는 격이 되고 말았다.인삼값이 해마다 38%씩 내려가 4년동안 일만 죽도록 하고 대부금을 모두 날렸다. 『작년에 삼값이 얼마했는지 아십네까? 한근에 5원을 했으니 안망할 턱이 없디요.국가에서 안사니끼리 거간꾼들이 날도둑하듯 뜯어먹은 것입네다.개체사회에서 살라면 더 배와야디요.돈놓고 돈먹을 줄 알아야 농사도 짓는 세상이 됐지않나 합네다』 오랜 세월을 사회주의에 순치한 사람들인지라 시장경제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그저 국가가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일하고 입에 풀칠을 했던 사람들인 것이다.그런속에서도 시장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상황에따라 전업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벌고 있다.장백현 용강향 이도강촌의 김학준(60)씨는 시류를 잘 탄 농민이라 할 수 있다. 『인삼 경기가 좋다니까 너도나도 대들었디요.이러다는 인삼이 내리막질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네다.그동안 내래 인삼농사로 수만원 벌어놓은 처지고 해서 인삼농사에서 손을 떼었디요.대신 꽃사슴 두 마리를 샀지 않았갔시요』 그는 1만원을 들여 꽃사슴 2마리를 사서 지금은 12마리로 늘렸다.지난해 수놈 5마리의 뿔을 잘라 녹용으로 팔아 본전 1만원은 이미 건졌다.압록강 연안에도 시장경제체제에 의한 경쟁사회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 탈법 노동운동은 안된다(사설)

    법외노동단체인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창립대회를 갖고 세 과시 활동에 나섬으로써 노동계의 파란이 예상된다.「민노총」의 강령은 기존 노동운동의 질서를 정면 부정함으로써 한국노총과는 물론 경제단체및 정부와의 갈등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모든 노동운동은 법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하며 노사 어느쪽이든 탈법행위는 엄격히 처리되어야 함을 우리는 강조한다. 「민노총」은 곧 설립신고서를 당국에 제출할 예정이나 신청접수조차 거부될 것이 분명하다.이는 「민노총」이 현행 노동조합법에 규정되어 있는 정치활동금지와 복수노조 불인정,그리고 노동쟁의의 제3자 금지행위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민노총」이 내년 총선 이전에 산업 및 지역별 「정치위원회」를 설치해 독자후보를 출마시키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설립신고 자체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정황이다. 「민노총」이 정치활동과 사회개혁 활동을 공식화한 것은 법치주의의 원칙과 정부의 권위를 무시하는 태도로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더욱이 「민노총」은 신청서가 반려되면 합법성 쟁취를 위한 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정부와 「민노총」간의 정면대결로 인한 혼란도 우려된다. 노동운동은 근본적으로 노동자의 근로조건과 복지향상에 중점이 두어졌을때 사회적인 공감을 받을 수 있다.잘못된 점이 있으면 법개정을 촉구할 수는 있지만 현행법을 전면 부정해서는 안된다.노조가 정치세력화함으로써 근로자의 복지향상을 꾀하겠다는 것은 우회적인 방법일 수는 있으나 법을 어기면서까지 정치활동을 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민노총」은 가입 조합원이 39만5천여명에 달하는 거대 조직임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조직이 클수록 사회적인 책임이 막중하며 법치주의에 충실해야 한다.다수의 행동력을 바탕으로 탈법행위도 불사하겠다는 것은 법의 제재를 자초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우리는 「민노총」이 이성적인 자세를 갖고 노동현실을 개선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당국은 법치주의의 권위를 지키기를 촉구한다.
  • 민노총 내일 공식출범/노동계에 어떤 파장 미칠까

    ◎노총과 노동운동 주도권 대립 불보듯/정치활동 선언으로 정부와 마찰 예상 전국 민주노동조합 총연맹(민노총·공동대표 권영길 등 3명)이 11∼12일 창립대회에 이은 대규모 집회를 열고 공식출범한다. 그동안 민주노총준비위원회(민노준)를 구성,꾸준히 가입조직을 확대해온 민노총은 11일 상오10시부터 연세대 대강당에서 4백여명의 대의원이 모인 가운데 창립대회와 함께 이날 저녁 전야제를 갖는데 이어 12일에는 여의도광장에서 전국노동자 10만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집회를 열어 출범을 알릴 계획이다.61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립 이후 34년만에 실질적인 제2노총으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민노총은 현재 산업별 조직 7백33개에 노조원 29만8백72명,지역조직 1백8개에 노조원 5만1천8백44명,그룹조직 20개에 노조원 5만2천4백38명 등 8백61개 조직에 39만5천1백54명의 노조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창립대회 이후 농업·섬유·화학·화물 등의 업종이 추가로 가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규모는 4천4백26개 노조에 1백15만6천여명이 가입돼 있는 한국노총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만 자동차생산 및 조선업계·서울지하철공사·주요병원노조 등 대규모사업장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어 조직력과 동원력 등 노동운동역량에서는 오히려 한국노총을 밀어내고 실질적인 주도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아직 미가입상태이긴 하나 대규모노동운동을 이끌어온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노조의 가입이 확실하고 조합원수에서 5만명이 넘는 한국통신노조도 가입을 추진하고 있어 조만간 50만명선을 넘어설 전망이다. 따라서 민노총을 바라보는 업계와 정부의 시각이 곱지만은 않으며 민노총의 앞날도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여 파란이 예상된다. 다음주중 설립신고서를 공식제출할 예정인 민노총은 출범에 앞서 정치위원회를 상설기구화해 내년 총선에 대비하는 등 정치활동에 나서겠다는 선언과 동시에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등 강성투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정부의 입장도 상당히 강경하다.이미 진념 노동부 장관은 지난 7일 『민주노총을 합법단체로 인정할 수 없다』며 설립신고 자체를 거부할 뜻임을 밝혀 설립신고에서부터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민노총의 출범으로 인해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가운데 한국노총과의 노동운동 주도권을 건 불가피한 대립과 반목은 노·노간의 갈등도 그만큼 심화시킬 것으로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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