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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모송환의 결단과 이후과제(사설)

    정부는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비전향장기수출신 이인모씨(76)를 북한으로 송환한다는 결단을 내렸다.남침인민군의 일원으로 내려왔다가 돌아가지않고 빨치산활동을 했으며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는가하면 석방후 간첩활동을 하다 재투옥되고 전향을 거부하며 보호감호조치를 감수했던 사람이다.엄밀히 따져 송환의 의무도필요도우리에겐없는그런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정부는 그를 조기에 무조건 돌려보내기로 한것이다.인도주의차원의 이 결단은 여러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진전의 중요장애의 하나가 되어온 이씨 문제를 과감히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겠다는 강한 의사표시라 할수 있다.이씨의 사정은 국내잡지보도로 91년 처음 알려졌으며 이후 북한은 그의 송환을 남북회담의 중요현안으로 삼아왔다.북한은 이씨 송환을 조건삼아 이산가족 노부모등의 교환방문합의를 파기하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 국내에서도 인도주의 뿐아니라 남북관계개선의 중요장애제거차원에서도 돌려보내야 한다는 견해와 북한의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면서 다른 좌익사범과의 형평이나 보안법상의 문제 그리고 북한의 동시호혜주의필요성등을 내세운 반대견해의 대립으로 논란이 많았다.양쪽주장이 모두 일장일단의 측면을 갖는 것이어서 통치권차원의 정치선택의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무조건 송환으로 낙착된 것이다.그것도 새대통령의 정부가 내린 첫대북정책결정인 것이다.대북정책방향의 유연성있는 온건화를 예고하는 것이 아닌가 주목된다.김영삼대통령은 당선후 이제부턴 북의 인권도 거론하겠으며 핵문제는 안되면 유엔안보리제소를 해서라도 막겠다는 등의 수차례 강성발언으로 주목을 받은바 있다.이번 결단은 그런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것이다.결국 줄것은 과감히 주고 찾고 지킬 것은 철저히 찾고 지키겠다는 김영삼대통령 특유의 자신감에 찬 적극대응의 의사표시로 보인다.새정부가 추구하는 변화와 개혁이 대북정책에도 구체화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 할수 있다. 우리는 이번 대북화해조치가 정부의 희망대로 남북관계발전의 새돌파구가 되기를 바란다.북한은 돌아가는 이씨를 새로운 정치선전도구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새한국정부의 무조건송환의 선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여 적극호응의 성의를 보여야 할것이다.작년의 8차고위급회담에서 이씨송환이 이루어지면 이산가족상호방문및 판문점면회소설치운영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북측의 의사표시도 있었다. 북한의 대응이 비상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이산가족문제등에 대한 성의있는 호응은 경협등 보다 전향적인 화해협력의 새돌파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북한의 선택과 대답의 차례다.
  • 비영리목적 영화도 제작 등록해야 상영/대법,원심 파기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영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하려면 사전에 반드시 정부당국에 영화제작업자 등록을 마쳐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김석수대법관)는 10일 재야 노동현장등에서 상영돼 파문을 일으켰던 극영화 「파업전야」를 제작한 영화제작사 장산곶매 대표 이용배씨(34)에 대한 영화법위반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이씨의 영화제작행위를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원심은 잘못』이라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취지로 사건을 서울형사지법 합의부로 되돌려 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심은 현행 영화법 제4조에 규정된 「영화제작업을 하고자 하는 자」를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계속 영화를 제작하는 자」로 보고 이 조항이 영화제작사 장산곶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나,해당 법 조항이 영리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 박군치사 은폐조작/강민창씨 1년6월/서울고검 구형

    서울고검 안대찬검사는 8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은폐·조작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강민창피고인(60)에게 직권남용 등 혐의를 적용,원심구형대로 징역 1년6월,자격정지 2년을 구형했다. 강피고인은 88년1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박군의 사체부검을 의뢰받은 황적순박사에게 『가혹행위가 없었던 것처럼 해달라』고 압력을 행사한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8월,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91년12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었다.
  • 쌀 생산량 대폭 줄인다/농림수산부,「신농정방향과 구조개선안」 마련

    ◎2001년까지 3,270만섬으로/영농규모 확대… 경쟁력 강화 정부는 오는 2001년까지 쌀 생산량을 3천2백70만섬으로 대폭 감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쌀농사 경쟁력강화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는 김영삼대통령의 신농정 방안의 하나로 이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농업의 생산기반확충,유통현대화,농법개선,전업농육성등 각종 시책을 총체적으로 시행할 방침이다. 7일 농림수산부가 마련한 「신농정 방향과 구조개선대책추진」방안에 따르면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등 농산물시장개방에 대비,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적정생산량을 위해 지난해 3천7백30만섬이던 쌀 생산량을 자급도 1백%를 유지하는 선에서 98년에 3천4백40만섬,2001년에는 3천2백70만섬으로 감축하게 된다. 이에 따라 지난 91년 1백21만㏊이던 쌀재배면적은 98년에 1백10만㏊,2001년에는 1백5만㏊로 축소해나갈 계획이다. 또 91년 1백50만호에 달하던 쌀 생산농가도 규모화를 통해 98년에 1백10만호,2001년에는 1백만호로 줄일 방침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농업진흥지역내 전업농과 쌀작목반영농조합법인등 조직화된 경영농이 전체 쌀생산의 60%이상을 담당하게 하고 5㏊이상을 경작하는 전업농의 경우 2001년까지 10만호를 육성하기로 했다. 지난 91년의 경우 전체 농가 1백50만호 가운데 3㏊이상의 농가는 1만8천호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는 이같은 경영규모확대를 위해 경지소유규모를 3∼5◎이상,임대차규모도 7∼15㏊로 늘리고 5년이상의 장기 임차농에게는 장려금을 지원,임대차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전업농등 조직화된 경영농들이 대형농기계 작업을 할 수 있도록 96년까지 수도작의 경우 기계화율을 1백% 달성하고 농업진흥지역을 중심으로 한해 4만㏊씩 농지의 정비·재정비를 통해 2001년까지 모든 농지에 대한 정비를 마치기로 했다. 정부는 벼 직파재배와 유기농법등 신농법을 과감히 도입,2001년까지 논 60만㏊에 직파재배를 실시할 수 있도록 트랙터 13만5천대,직파기 7만대,무인헬기 40만대등 첨단농기계를 보급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같은 영농의 규모화와 기계화작업으로 2001년에는 미국등 선진국의 5배에 이르는 현재의쌀 생산비를 50∼60%정도 절감,경쟁력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부는 이밖에 전국 3천3백개의 진흥지역 지구마다 쌀종합처리시설을 설치하고 쌀종합처리장이 처리하는 물량과 연계시켜 출하조절자금을 지원하는등 쌀 가격을 안정시킬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함께 마련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정부의 쌀 비축물량은 연차적으로 쌀종합처리장에 수매자금을 지원,매입·보관하도록 하는등 정부의 쌀 수매도 줄여 민간유통기능을 활성화하기로 했다.
  • 작업중 라면 끓여먹던 공원/들키자 전기선 잡아 감전사(조약돌)

    ○…작업시간에 감독자 몰래 라면을 끓여 먹던 10대 공원이 작업반장이 부르는 소리에 놀라 엉겁결에 전기선을 잡아 감전사. 지난 6일 상오 11시쯤 부산시 북구 모라1동 282의 4 동양알미늄(사장·안해남·42)조립공 김성철군(19·부산 북구 덕포1동 421의 14)이 전기에 감전돼 신음중인 것을 동료 조정원군(19)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조군에 따르면 김군은 자신과 함께 작업장내에 있는 가스버너에 감독자 몰래 라면을 끓여 숨어서 먹던중 작업반장인 변모씨(21)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일어서다 벽에 설치된 2백20v짜리 고주파기 스위치 전기선을 손으로 잡는 순간 감전됐다는 것.
  • 중­북한관계 최악사태/북,우호조약 파기·채무탕감 요구

    ◎중국선 “정치·군사관계 진전없다” 천명 【홍콩 연합】 중국은 현수준에서 더이상 북한과 정치·군사관계를 확대하지 않는 한편 남북대화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협상을 지지한다는 대남북한정책을 마련했다고 홍콩에서 발행되는 중국문제전문 시사월간지 경보가 4일 보도했다. 중국사정에 정통한 이 잡지는 이날 배포된 최신호(3월5일자)에서 중국 국무원총리 이붕이 지난 2월초 한 외교부 회의에서 한중수교이후 중국의 대한반도정책 기본입장을 이같이 밝혔다고 전했다. 이 잡지는 또 북한이 지난해 한중국교수립이후 중국에 항의서를 보내 중·북한 우호협력조약의 파기를 비롯,북경주재 북한대사를 소환하겠다는 의향을 밝혀 놓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보는 북한이 중국에 진 빚 2백50억원(약 46.4억달러)을 탕감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다고 보도했다.
  • 국악인 양승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8)

    ◎죽파의 가야금산조 득음 “외길 인생”/혹독한 수련 견디며 「명인」 향한 일념 불태워/뉴욕 독주회땐 “동양의 신의 경지” 격찬받아/세계 명대학에 한국학과설치 위한 모금연주 등 활동 활발 가볍게 튕기고 힘차게 엮는 줄은 가락마다 깊은 시름,희비가 엇갈려 가슴속에 묻어둔 사연을 한없이 풀어낸다.길어도 길어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옥수 어느 때는 성긴 빗방울에 오동잎 스치듯,일렁이는 파도에 하늘이 소스라치듯 성난 폭우에 수면이 갈라지고 뇌성이 번뜩인다.활짝 핀 꽃송이가 삽시에 저버리는 아픔을 안으로 삭이는 절제미,청정과 청쾌가 선명한 양승희의 가야금 산조를 듣고있노라면 문득 연전에 돌아간 죽파의 운율이 되살아난다. 명인의 길에 오르기엔 젊고 눈부신 나이,화사하고 여린 용모,그러나 무대에서의 능란하고 당당한 연주솜씨는 당대 명인을 계승한 후계자다운 풍모다. 경건함 중에도 정한의 기개가 감돌고 줄을 타는 손끝에서 처절과 애련이 여울져 스승을 잃고 홀로서기까지의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절감케 한다. 양승희는 스승인 죽파 가야금산조 하나에 그의 전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산조 일인자를 꿈꾸며 오로지 이 한길을 위해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초를 스스로 감내해왔다.자신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새삼 돌이켜볼 여유는 없다.다만 그것이 지금보다 더 험난하고 가파르다해도 미동도 지체도 할 수 없는 위치다.두 아들의 어머니로서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길 이전에 「죽파 가야금 산조의 가문」을 이어갈 공인이며 예인의 사명감이 있을 뿐이다. 죽파 김란초는 가야금 산조 창시자의 한사람인 김창조(1865∼1920)의 친손녀로 그는 조부의 산조에다 단몰이(세산조시)를 창작해넣어 독자적인 죽파류 가야금 산조를 성립,국내외에 1백여명이 넘는 제자를 두고있었으나 양승희를 후계자로 삼아 바로 이 산조를 계승시키고 있었다. 양승희는 스승으로서의 죽파의 삶을 전적으로 맡아 극진히 모셨을 뿐만 아니라 죽파의 모든것,예술혼과 예술성,인간의 도리와 예의범절에 이르기까지 스승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분신과도 같은 인연이다. ○곡해석·연주력 출중또 「뛰어난 곡해석과 연주력,끈질긴 노력과 집념,죽파가야금산조를 잇는데 최선을 다하는 지속적인 마음가짐은 누구에게도 비견될 수 없는 비범등이 후계자로 지목된 이유의 하나라는 것이 국립국악원 이승렬원장의 지적이다. 스승댁에 머물면서도 새벽에 눈뜨자 연습,장고에 맞춰 다시 한번,그리고 스승과 맞춰보고 학교에 다녀와서 한바탕 연습,단 한번도 스승을 거스르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교수」보다는 「연주가」이기를 원하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국악의 세계무대 진출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황병기 나인용 백병동등 국내작곡가들의 창작곡을 받아 초연으로 기량을 확대시켜 나가기도 했다.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시립국악관현악단·시향·KBS교향악단과의 대연주회 협연,1년에 수십차례의 해외연주 활동등은 죽파로 하여금 어느 자리에서나 제자를 마음껏 자랑삼을 수 있게 해주었다.특히 85년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 홀에서 가진 독주회 평과 사진이 실린 워싱턴 포스트지를 보고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그때 미국의 저명 음악평론가인 마리온 자콥슨은 양승희의 가야금연주를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의 솔로를 보는 듯한 황홀감」에 비유,「55분동안의 연주는 꼼짝없이 청중을 사로잡아 마치 동양의 선의 경지를 경험케 했다」고 쓰고 있다. 89년 79세의 나이로 스승이 몸져 눕게되자 양승희는 고려병원에 모시고는 꼬박 3개월을 그의 곁을 지키면서 스승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려면 「몸이부어 손가락자국이 깊이 남는다」고 안타까워 했고 이를 지켜본 국악계의 김소희씨며 박귀희씨는 『형님은 훌륭한 제자를 두셔서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겠다』고 부러워 했었다. 같은해 9월17일 임종하기 직전에 죽파는 양승희부부를 불러 유산정리와 함께 자신의 장례를 부탁했다.스승의 유언이 아니더라도 양승희는 당연히 상주가 되어 장례기간의 상례지휘는 물론 삼우제와 사십구제,소상제와 대상제,91년에는 고인을 위한 추모음악회를 여는등 스승과 가까웠던 국악계의 원로들을 참여시킨 무대를 마련하여 「난죽같은 사제의 정」을 변함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양승희는 본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그러나 국민학교 3학년때 정치를 하는 부친을 따라 집안이 모두 강원도 원주로 이사.피아노와 무용을 배우다가 한 미국선교사의 권유로 원주여고 2학년 되던해 가야금을 시작했다. 서울을 오가며 서울대 김정자교수에게 가야금을 사사,처음부터 가야금의 가락이 마음속에 파고들어 타고난듯 악기에 밀착되는 감이었다. 대학교 2학년인 70년 4월 역시 김정자교수의 소개로 사직동에 있는 죽파문하에 입문,그때부터 만19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고2때 가야금 시작 유난히 청각이 예민한 스승은 한올의 음정차이도 족집게로 집어내듯 가혹하게 교육시켰다.하루 6시간에서 7시간,어느때는 10시간을 해내야만 비로소 만족하는 듯 했다.마음에 들지않으면 노안에 광채를 번뜩이며 가차없이 바로잡아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오랫동안 교제해온 부군 노만균씨와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3년후인 76년에야 뒤늦게 결혼해야 했다. 「결혼하면 가야금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스승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으나 「결혼후에도 가야금 계속은 물론 예술가의 길을 걷는데 적극 협조하겠다」는 시댁측의 다짐을 받고나서야 안심하는 빛이었다.혈육이 없던 그는 친딸같은 양승희에게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옥가락지를 물려주면서 「부디 가야금 가문의 대를 이어줄 것」을 두번 세번 당부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7년간의 혹독한 피나는 훈련과 수련에도 득음하지 못한 제자를 몹시 나무라는 눈빛에 양승희는 결혼 1년만에,낳은지 백일도 안된 아들을 시어머니(송재임여사)에게 맡기고 다시 스승의 문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로서의 행복을 추구했다면 그는 그때 가야금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어린 자식을 떼어놔야 하는 마음은 문자 그대로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부군은 고대와 프랑스유학후 국립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시댁은 훌륭한 가문과 가풍으로 양승희는 얼마든지 풍족한 환경에서 아마도 안락을 누릴 수도 있었다.그러나 남편과 시어머니가 죽파와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오히려 「예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박사과정까지 서둘러주었다. ○지난의 수련과정 겪어가야금은 악기를 다루거나 기교를 가르치는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말과 마음으로 전하는 구전심수만이 참다운 예도였다.그해 6개월 다음해 다시 6개월,80년에는 9개월간이나 스승곁에서 성음을 얻기위한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했다. 「학이 살포시 나무가지에 내려앉듯 햇빛 찬란한 해변에 잔물결 반짝이듯 용이 승천하는 힘찬 기운과 동시에 사방이 잠잠하여 침묵하듯 연주하라」는 것이 스승의 연주 지침이었다.차차 국악계의 원로들로부터 「죽파 전성기때의 소리가 난다」는 칭찬과 「매운 손끝에 만만찮은 도전적인 개척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그럴수록 그는 혼신의 힘으로 가야금에 매달렸다.이는 판소리에서의 폭포수같은 성음을 위한 폭포독공백일수련에 못지않은 지란의 과정이었다. 죽파의 총애와 편애로 동료들의 질시와 따돌림이 따랐으나 스승은 그때마다 「높이 나는 새는 눈에 띄는 법,어중간히 날면 백발백중 돌에 맞기 쉽지만 힘찬 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고 감싸주었다.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 그의 나이가 다했음을 애석하게 여겼다.커다란 회오리가 지나간듯 어쨌든 지난 세월속의 시련은 그에게 인간적인 성숙을 주었다. 그는 세계 각 유명대학에 한국학과 설치를 위한 기금모금 연주등 91년에 10여차례,지난해 20여차례,올해도 연초와 2월까지 유럽지역 순회와 터키연주등 연말까지 해외연주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있다.물론 그에게 남겨진 가장 큰 과제는 죽파기념관을 세우는 일,전수생들을 위한 연주무대 마련,이에 앞서 스승의 이야기를 창극으로만들기 위해 극본과 음악을 작가와 작곡가에게 의뢰해놓고 있다.그리고 이 모든 진행은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보살핌이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진양조에서 중몰이 중중몰이에서 자진몰이 휘몰이 단몰이 장단배열을 갖는 죽파산조를 한바탕 타고나면 인생살이 희로애락이 한낱 물거품이라던 스승의 말이 불현듯 새삼스럽다.원형리정,이제 사계의 순리처럼 자연스러운 산조가락의 하나하나가 그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그 자신이 바로 가야금이 되어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마음으로 음조를 울리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산조미의 극치에 이르고 싶은 것이 오직 절실한 그의 기원이다. □연보 ▲1948년 6월 서울출생,양주창씨(92년작고)와 박정옥여사의 2남4녀중 장녀 ▲58년 집안이 원주로 이사 ▲73년 서울대 음대 국락과졸업 ▲75년 서울대 대학원 졸업 ▲86년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예술철학박사학위) ▲75년∼93년2월 서울대 국악과강사 ▲76∼80년 동덕여대·목원대·성심여사대강사,이대·중앙대출강,한국가야금연주단단장,중요무형문화재23호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이수자,준인간문화재 죽파 김란초를 비롯,이창규 황병기 이재숙 김정자 사사 ▲71년 서울대 음대 정기연주회 「죽파류 가야금 산조」독주 데뷔 ▲75년 서울국립국악원주최 신인음악회협연(이성천지휘) ▲77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극장소극장) ▲79년 가야금 독주회(세종문화회관)·제1회 유네스코주최 2인음악회(가야금 양승희,거문고 김선한) ▲80년 가야금 독주회(공간사랑)죽파류 55분 가야금 산조 ▲82년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지휘 발터 길레센) ▲83년 무형문화재 예술단 창단 1주년기념 특별연주 ▲85년 대한민국음악제 KBS교향악단 협연(지휘 홍연택) ▲85년 미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 독주,자유중국·일본 독주회 ▲86년 자유중국 NewAspect 초청 국제예술제 국제 고쟁 명가대회참가 ▲88년 가야금 독주회(국립국악원 국악당) ▲89년 서울시향 범세대연주회(세종문화회관) ▲89년 KBS국악대상 축하공연외 해외연주8회 ▲90년 백두산 제천대회,가야금독주회(예음홀)해외연주 7회 ▲91년 KBS 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 해외연주 10여회 ▲91년 고 죽파 김난초선생 추모음악회주관(국립영화제작소 영화제작)등 해외연주 20여회 ▲92년 미 조지워싱턴대 초청연주 ▲92년 대한민국음악제 연변 김진교수와 남북한 가야금 비교연주등 해외연주 20여회 ▲93년 우즈베크스탄 공화국대 한국학과 설립기금모금외 유럽지역 연주 황병기 작곡 「비단길」「영목」 「밤의소리」「남도소리」 관현악곡 「7현을 위한 새봄」편곡 「Amaging Grace」나인용작곡「가야금 협주곡 도약」「용」「영상」이강덕작곡 「가야금 협주곡Ⅴ」정윤주작곡 「황병기주제에 의한 가야금 콘체르토」백병동작곡 「환명」 제1회 KBS 국락대상,중요무형문화재 예술상 공로상,KBS FM 명인 CD 출반
  • 박종철군 치사관련/전 경관 3명 집유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김대환부장판사)는 26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이 사건을 은폐조작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전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피고인(66)등 3명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취지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서 박피고인에게 범인도피죄를 적용,원심대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전 대공수사2단 5과장 유정방(54)·전 대공수사 2단5과장 2계장 박원택(52)피고인등 2명에게도 같은 죄를 적용,원심대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씩을 선고했다.
  • “북한 핵 용납불가” 메시지전달/IAEA 결의안 채택 안팎

    ◎회원국들,“핵확산 방지노력 초석” 인식/“해명기회 재부여는 강자의 여유” 분석 국제원자력기구(IAEA)이사회가 25일 한스 블릭스 사무총장의 북한에 대한 핵 특별사찰 요구를 전폭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북한의 핵무기개발 의혹을 둘러싼 북한과 IAEA간의 힘겨루기는 분명한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다. 이날 결의안에서 북한에 대해 다시한번 한달동안의 해명기회를 준것은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벼들」 가능성을 우려한 강자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IAEA의 관계자들은 북한을 특별사찰쪽으로 끌어당기기는 하되 너무 세게 당겨서 북한을 묶어둔 밧줄이 끊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말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이사회가 시작되기 전만해도 IAEA의 분위기는 매우 강경했었다.이라크의 핵무기개발 노력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IAEA에 대한 신뢰성이 이미 크게 실추돼 있었는데다 북한의 핵개발의도마저 사전에 막아내지 못한다면 IAEA가 존재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었다.핵의 확산을 막으려는 국제사회로서는 북한핵문제가 핵무기확산 방지를 위한 국제노력의 성패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북한핵문제를 적당히 얼버무려 넘겼다가는 「숨길 수 있는데까지는 숨기면서 시간을 끌면 잘 넘길 수 있다」는 좋지못한 선례를 남겨 핵확산방지 노력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여러나라들로부터 제기됐었다.더욱이 IAEA로서도 최초인 사무총장의 특별사찰 요청을 이사회가 지지하지 않는다면 특별사찰의 규정자체가 사문화돼 국제적인 핵확산방지 노력의 존립기반이 무너지게 될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북한은 운이 없게도 시범케이스로 호되게 걸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북한의 핵무기개발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국제사회의 메시지는 이번 이사회를 통해 북한측에 분명하게 전달됐다.북한은 그들의 선전기관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거나 IAEA와의 핵협정을 파기하겠다는등 강경입장을 밝혔지만 그같은 위협이 전혀 통할 수 없음을 이번 이사회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이다.일부의 관측처럼 핵을 이용해 서방측으로부터 최대한의 이득(예컨대 관계개선이라든가 경제지원등)을 얻어내려는게 북한의 진정한 의도라고 하더라도 현재로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됐을 것이다. IAEA는 북한으로부터 완벽한 투명성을 얻어내기 위해 한단계 한단계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으며 이번 이사회를 통해 그 마지막 수순에까지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결의안의 공동제안국에 러시아가 포함되고 북한을 두둔해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 할 수 있는 중국마저 한반도의 비핵지대화 지지라는 기본입장 위에서 북한입장 옹호에 소극적 태도를 보인데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해서 완벽하게 고립돼 있다.북한이 이번 결의안마저 거부해 북한핵문제를 다루기 위한 IAEA의 특별이사회가 열린다면 북한핵문제는 새 고비를 맞게될 것으로 보인다.
  • “북한 핵사찰 무조건 수용” 촉구/IAEA

    ◎내일 대북 후속제재 결의안 채택/북,특별사찰 공식 거부 【빈=유세진특파원】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문제를 집중 논의하고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3일(현지시간)한국·미국등 35개 이사국이 참석한 가운데 이틀째 정기이사회를 열고 북한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찰의 조기 수용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공식 제출키로 결정했다.그러나 북한은 이날 IAEA의 특별사찰요구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대북한 후속제재 경고와 특별사찰 수용시한까지 포함될 이 결의안은 25일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북한은 22일 IAEA에 핵폐기물저장소로 추정되는 영변 핵단지 인근 2개 미신고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요구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김계관 북한외교부순회대사는 이날 하오 IAEA 이사회에서 이 시설들이 북한의 핵활동과는 관계없는 군사시설이라고 주장,이에 대한 IAEA의 특별사찰요구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김대사는 또 북한의 핵신고가 IAEA 사찰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북한의 핵기술이 독자적으로 개발된 때문이며 이같은 불일치는 양측의 과학기술적 논의를 통해 해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제네바에 주재하는 북한의 한 고위관리는 이날 IAEA가 영변의 2개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고집한다면 국제사찰팀의 핵시설접근을 허용키로 한 핵안전협정을 파기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9)

    ◎64일간의 대립/“양기택 석방하라” 영,대일압력/배설 추방 실패… 일제,양 총무 전격구속/대영보복 간주… 총영사 강력항의/양국 외교관 경질요청으로 비화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때까지의 통감정치 5년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야욕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던 시기였다.매국적 친일인사들로 들어찬 대한제국정부는 이미 꼭두각시로 전락돼 있었다.국제적으로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무적의 상황을 맞은 일제는 기고만장했다.이무렵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가로막는 유일한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병합 걸림돌” 한국병합이 착착 진행돼가고 있던 시점에서 의표를 찌르는 신보의 예리한 보도와 논설은 일제를 당황케 만들었다.또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해 의병운동,교육구국운동,민족산업육성등 신보가 앞장선 일련의 항일구국계몽운동은 일제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까지 받아들여졌다. 일제가 신보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침략정책상 당연한 것이었다.그러나 일제의 신보탄압정책은 엉뚱하게 영국과 일본간의 외교분쟁으로 비화되었다.당시 영국과 일본은 두차례의 영 일동맹(1902·1905)을 통해 중국에서의 영국의 배타적 권리와 한국에서의 일본의 배타적 권리를 상호 인정하는등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그럼에도 일제의 신보탄압을 위한 양기탁총무의 구속사건에서 비화된 양국간의 외교마찰은 전시에나 가능한 외교관대표 사이의 「통신기피」 단계에 까지 이를정도로 악화되었다. 1906년 2월 정식으로 발족된 통감부는 적극적으로 배일논조를 펴온 신보의 발행을 금지시키기 위해 2단계 공작을 폈다.첫단계로는 사장 배설의 추방을 시도,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한 영국측이 그에게 두차례의 근신형과 3주의 금고형등을 가했다.그러나 배설은 상해에서 형을 복역한뒤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신보는 폐간은 커녕 오히려 배일논조를 더욱 강화시켰다.더욱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국채보상운동의 총본산이 되어 이운동을 진두지휘했다.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다음 단계로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양기탁이 경시청의 와타나베경부에 의해 전격 연행된 것은 1908년7월12일밤 회사안에서 였다.국채보상운동수집금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내용이다.급보에 접한 당시 신보사장 만함(A W Marnham·그해 5월27일 부임)은 이를 곧 헨리 콕번 영국총영사에게 알렸다.이 사건을 배설의 영구추방에 실패한 일제의 영국에 대한 보복행위로 간주한 콕번총영사는 통감부 외사과장에게 즉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는 동시에 화이트서기관을 직접 보내 다음날인 13일 하오7시까지 석방할것을 통보하는등 강력하게 항의했다. ○약속 위반에 분노 콕번이 양총무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할수 있었던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불과 27일전에 열렸던 배설재판에서 재판장이었던 자신이 통감부 외무부장 나베시마로부터 확약을 받아낸 사항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배설의 증인으로 출두한 어떤 한국인도 대한제국정부나 통감부의 탄압을 받지 않는다는 확약을 일제가 파기했던 것이다. 통감부는 영국측의 뜻밖의 강경태도에 당황,본국에는 양기탁이 자진출두한 것이라고 허위보고하고 경시청으로 하여금 양의 기소를 서두르게 했다.이에따라 경찰은 18일 양을 정식기소,황급히 경성재판소에 송치했다.영국정부는 이같은 일본측의 행위에 항의,다음날인 19일 도쿄의 맥도날드대사를 데라우치외상에게 보내 공판 전이라도 양기탁을 바로 보석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양기탁구속사건이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자 휴가차 본국에 와있던 통감 이등박문은 22일 부통감 소네에게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도록 지시하기에 이른다. 영·일양국간에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종로서 유치장에 수감중이던 양기탁을 면회한 만함이 감방의 위생불량과 양기탁의 쇠약을 콕번총영사에게 호소했다.콕번은 8월1일 경성이사청의 미우라이사관에게 감방 상황및 양기탁의 건강상태를 공문으로 조회하면서 인도적 입장에서 즉각 보석허가를 요청하고 나섰다.도쿄의 맥도날드대사도 이등박문에게 이례적으로 사신을 보내 양기탁의 보석을 요구했다. 마침내 이등박문은 만약의 경우 양기탁이 사망할 경우를 우려,입원치료 허락 뜻을 밝혔다.그러나 미우라이사관이나 소네부통감등 한성의 보고는 한결같이 『감방상태도 많이 좋아졌으며 양기탁의 건강도 전과 다름없으므로 보석이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결국 이등박문이 단안을 내려 8월10일 양기탁의 입원을 긴급지시,11일 하오5시 양기탁은 대한의원에 입원하기 위해 종로서에서 일단 풀려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 발생되었다.양기탁이 호송경찰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그길로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피신했던 것이다.발칵뒤집힌 통감부와 경성이사청은 만함 사장과 콕번 총영사에게 양총무의 인도를 정식으로 요구했다.그러나 콕번은 본국정부의 훈령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고 15일로 예정돼 있던 양의 공판을 연기해달라고 미우라와 맞섰다. 그 유명한 콕번과 미우라 사이의 이른바 「미우라기피사건」은 이때 양기탁의 인도를 둘러싼 서로간의 오해에서 비롯됐다.미우라는 콕번에게는 공판연기 불가를 밝혔으나 막상 사건을 담당한 검사장에게는 공판연기를 청구해놓았던 것이다.이때문에 15일 하오영국정부로부터 훈령이 도착,콕번이 양기탁 인도를 미우라에게 통고했을때는 이미 공판은 연기된 뒤였다. 여기서 콕번은 미우라가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하는 자라고 규정한뒤 당일인 8월15일부터 그와의 통신을 일체 기피했다.또 17일에는 통감부로 공한을 보내 대화상대를 교체해줄 것도 요청했다.그러자 통감부는 즉각 반발에 나섰고 일본의 언론들도 영국총영사에 대한 신임장을 취소해야 한다는등 여론을 일으켰다.통감부는 21일자 보고서에서 『미우라이사관의 행동에는 비난할 점을 발견치 못했기 때문에 미우라의 경질을 요구하는 영국측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고 오히려 콕번의 경질을 영국측에 요구할 것』을 건의했다. ○두달뒤 무죄선고 그러나 당시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양국간에는 이같은 문제로 인한 긴장관계 발생을 서로 원치않고 있었다.결국 영국정부가 한발 양보,콕번총영사에게 양기탁의 공판에 협조토록 훈령을 내림으로써 양은 21일 대한의원에 입원케 됐다.그는 이 병원에서 이상없다는 판정을 받고 27일 경찰서로 다시 이감되었으며 8월31일 첫공판이 개정되었다.그후 다섯차례의 심리가 더있은후 9월29일 양기탁은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선고를 받았다.이로써 양기탁 구속으로 말미암은 영·일 양국간의 64일간의 숨 막히는 드라마는 끝을 맺게 되었다. *참고문헌:「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일제의 문화침탈사」(한기언외·민중서관 1970)
  • 뇌사판정 6개기준 마련/의협/혼수상태·동공확대고정·호흡정지 등

    ◎6시간후 재확인 거쳐 뇌파검사 대한의학협회는 19일 뇌사판정기준을 비롯,뇌사판정기구및 장기이식의료기관의 심사인준기준을 최종 확정했다. 의협이 마련한 뇌사판정기준은 외부자극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혼수상태,양쪽눈 동공의 확대고정,자발적 호흡의 비가역적 소실등 6가지이며 이를 6시간뒤 재확인하고 뇌파검사를 거친후 평탄뇌파가 30분간 지속되는지를 확인,뇌사여부를 최종 결정토록 했다. 의협은 또 뇌사판정기관으로 지정받고자 하는 병원은 혈액가스측정기·인공호흡기·뇌파기·중환자실 등의 시설을 반드시 갖추도록 명시했다. 장기이식을 실시하는 의료기관은 무균조작실·면역학검사실·장기보존실 등의 시설을 갖추어야하며 해부병리·내과·안과 등 5개 분야 전문의가 상근하는 3차진료기관 또는 이에 준하는 특수의료기관이어야 한다.이에따라 뇌사판정이나 장기이식을 행하는 의료기관은 뇌사판정 의사명단과 장기이식에 필요한 시설장비 보유현황을 미리 의협에 서면 보고,반드시 인준을 받아야 한다.지금까지는 각 대학병원이 교통사고·산재 등으로 의식을 잃은 환자에 대해 뇌사판정을 자의적으로 내리고 뇌사자가족들의 허락을 받아 장기이식을 해왔으나 앞으로는 의협이 마련한 이 기준에 따라 자격을 갖춘 병원만이 뇌사판정과 장기이식을 실시할 수 있게 됐다. 의협은 오는 3월초 이들 기준에 대한 선포식을 가질 예정이다.
  • 우크라 핵관리 미비/유출 위험 시인

    【키예프 UPI 연합】 우크라이나는 16일 자국 배치 다탄두 미사일 등 핵무기에 대한 정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는 등 「위험한 상태」임을 시인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의 핵무기 폐기 책임자는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하면서 러시아가 핵무기 파기 협상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 “IAEA 특별사찰 결정땐/북,핵협정 파기”/주러 손성필대사

    【도쿄 연합】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에 대한 특별사찰을 결정할 경우 IAEA와 맺은 핵사찰 협정을 폐기할 수도 있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으로 일본의 요미우리(독매)신문이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을 인용,16일 모스크바발로 보도했다.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손성필 러시아 주재 북한 대사는 지난 15일 모스크바에서 IAEA의 특별 사찰 요구와 관련한 회견을 갖고 『IAEA가 북한에 대해 특별사찰을 요구하고 있는 2개소는 군사 시설로 그들의 요구를 절대 받아 들일수 없다』고 강조하고 『IAEA가 임시 이사회에서 특별사찰의 실시를 강행 결정할 경우 북한은 IAEA와 맺은 핵사찰 협정을 파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손은 또 『IAEA가 특별 사찰을 요구하고 있는 북한의 군사시설은 핵관련 시설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IAEA의 사찰대상이 될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주장했다. IAEA는 북한이 군사 시설이라고 주장하는 문제의 시설이 「핵 폐기물 지하 저장시설」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보고 있다.
  • 「5·18」 선진상 규명/광주문제해결 바람직/기념사업 추위 건의

    【광주=남기창기자】 5·18광주민중항쟁 위령탑건립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강신석목사·57)는 13일 하오7시부터 전남 장성군 백양레저타운에서 「광주문제해결을 위한 대토론회」를 갖고 선 진상규명을 통한 광주문제해결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을 김영삼차기대통령에게 건의키로 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특별법제정을 통한 구속자들의 원심파기 ▲5·18시민의 날 제정 ▲묘역성역화를 위한 공익법인설립 ▲5·18부상자 국가지원치료등의 내용을 건의하기로 했다.
  • “생수제조 신규허가불허 잘못/입법미비 이유… 지나친 규제”

    ◎대법,원심파기 보사부가 지금까지 생수업체의 시설기준과 성분에 관한 규칙을 입법준비중이라는 이유로 생수제조업체 신규허가를 불허해온 조치는 부당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이에따라 지금까지 당국의 허가를 받지못한 채 불법적으로 생수를 시판해온 생수업체들의 신규허가 불허처분과 관련된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특별3부(주심 김상원대법관)는 12일 화니음료가 전남도지사를 상대로 낸 광천음료수 제조업 불허가처분 취소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이같이 판시,화니측에 패소판결을 내린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개정된 식품위생법 시행령에도 생수를 암반이하에서 취수토록 하고있는 등 생수제조시설 기준은 개정전 시행령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원고회사가 이미 법규에 명시된 시설기준을 갖추고 있는만큼 세부적인 위생기준등을 정하는 시행규칙을 준비중이라는 이유로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은 지나친 행정규제로서 부당하다』고 밝혔다.
  • 영 보수당「유럽통합」비준 양론/전 의장 파기 촉구…메이저총리 위기

    【런던 AP 로이터 연합】 영국 집권 보수당의 일부의원들이 유럽 통합에 관한 마스트리히트조약 비준 문제와 관련,조약 개정안을 제시한 야당인 노동당에 합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다 정부측은 개정안을 통과시키기보다는 조약 자체를 비준하지 않겠다고 맞서고 있어 존 메이저 총리가 지난해에 이어 또 다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전보수당 당의장인 테비트경은 10일 기자회견에서 영국의 주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조약의 파기를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며 보수당의원들은 정부에 도전,노동당을 지지하라고 촉구했다. 더글라스 허드 외무장관은 이와 관련,보수당의원들이 마스트리히트조약의 주요조항 개정을 요구하는 야당에 동조해 현정부가 패배할 경우 영국이 조약을 비준할 가능성은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총리가 제외시킨 조항을 의회내 사회주의자들이 또다시 부과하도록 허용할 수는 없다.사회조항이 들어있는 조약을 비준시킬 수는 없다』고 강조하고 보수당의원들이 이에 혹할 것으로는 생각치 않는다고 말했다.
  • 윤석양피고 2년선고

    【대전=이천렬기자】 육군 고등군사법원(재판장 김태계중령)은 9일 전보안사의 민간인 정치사찰을 폭로한 윤석양피고인(26·육군 3사단 22연대)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2년을 선고했다.
  • 구심점 상실… 연쇄이탈 예고/국민당 어떻게 될까

    ◎여권에 부분흡수… 정계개편 가속화/대행체제 장기화땐 운영난 불보듯 정주영대표가 창당기념일이 하루 지난 9일 상오 대표최고위원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전격표명함에 따라 국민당의 장래가 매우 불투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3당체제로 유지되던 정치권 자체에도 개편이 뒤따를 것으로 엿보인다. 국민당은 지금까지 당운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정대표 1인에게 의존해 왔다.따라서 정대표의 정계은퇴는 당운영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특히 국민당의 존립근거가 정대표의 사재였다는 점을 고려할때 국민당이 존폐위기에 몰리는 상황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자칫하면 국민당은 창당 1주년을 간신히 넘기고 공중분해될 우려가 짙어진 것이다. 물론 정대표가 떠난다고 해서 국민당이 당장 와해되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당이 존폐의 기로에 서 있고 소속의원들의 정치적 장래가 난처한 지경에 빠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와같은 바탕에서 국민당의 정치적 앞날을 단기와 중·장기 두가지로 나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기적으로 보면 우선 국민당은 정대표의 은퇴로 생긴 정치적 공백을 양순직 또는 김동길최고위원을 대표직무대행으로 내세워 당을 이끌어 나가며 정대표의 복귀를 기다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될 경우 소속의원 상당수가 정치도의상 곧장 탈당을 결심하지 않고 정대표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의총에서 정대표의 은퇴의사를 단순한 2선후퇴로 의미를 축소시키며 일선복귀를 설득하자고 결의한데서 이를 알수 있다.또 원외지구당 위원장들도 이날 하오부터 정대표의 대표직 사임과 정계은퇴를 결사반대한다며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당내반응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선 정대표의 은퇴번복은 실현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것으로 분석된다. 정대표의 은퇴가 변할수 없는 사실이고 대행체제가 장기간 계속되어 당운영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럴 경우 민자당에서 탈당해온 이른바 「입당파」를 제외한 의원들중 상당수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탈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전망된다. 탈당예상의원들로는 강원출신 의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구의원들이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8일 이호정의원이 탈당한데 이어 이날 송영진의원이 탈당하자 평소보다 비난이 훨씬 더 심했던 것도 이로 인해 탈당파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하는 우려의 반증이다. 더욱이 몇몇 의원은 탈당시기를 놓친데 대해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해 이같은 우려의 가능성을 한층 더하고 있다. 국민당 소속의원의 상당수가 민자당에 뿌리를 둔 여권성향의 의원들이기에 별다른 대책이 없이 당이 표류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여당으로 회귀할 의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따라 정치권은 3당체제에서 거여체제로 부분적인 재편을 이룰 수도 있는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대선직전 민자당을 뛰쳐나온 이자헌 박철언 김용환 유수호 김복동 박구일의원등은 여당으로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성장배경이 전혀 다른 민주당에 갈수도 없을 것으로 보여 잔류를 고집하는 일부 창당파의원들과 합쳐 국민당을 지키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짙다.하지만원내교섭단체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변수가 하나 있다. 정대표가 비록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했으나 자신의 6남인 정몽준의원을 통해 당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정의원이 아버지인 정대표를 대신해 실질적인 당운영을 맡는 것이다. 이때는 지금보다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3당체제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방안은 당내일각에서 아이디어차원 또는 기대수준에서 언급되고 있을뿐 실현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민당은 창당 1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당이 와해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정주영대표 정치일지 ▲1월10일 통일국민당 창당발기인대회,정주영창당준비위원장 피선 ▲2월8일 창당대회 ▲2월13일 정대표일가소유 현대주식매각,정치자금 2천6백여억원 확보 ▲2월22일 국세청 현대그룹주식 조사 ▲3월5일 정대표 한국인간개발연구원 초청간담회에서 「원자탄저장고 공사했다」발언,물의 ▲3월24일 총선에서 31석 획득,제3당위치 확보 ▲4월3일 롯데호텔 국민당창당발기인 초청만찬에서 대통령선거 출마의사 피력 ▲4월17일 신문편집인협회 조찬간담회에서 「대통령후보로 도덕성 문제될 것 없다」고 언급. ▲5월15일 국민당 대통령후보로 정대표 선출 ▲6월9일 정대표일가 현대주식 1천5백억원어치 종업원들에게 매각 ▲11월16일 국민당 정대표와 채문식 가칭 새한국당 창당준비위원장 합당선언 ▲12월3일 관훈클럽토론회에서 「집권후 3년내 내각제 실시,재벌해체등」언급 ▲12월5일 현대중공업 자금담당여직원 국민당에 비자금제공 폭로 ▲12월14일 이종찬의원과 당대당 통합선언 ▲12월17일 한은,정후보의 「3천억원 여정치자금위해 발권」주장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 ▲12월18일 14대 대통령선거시 3위득표(3백88만표)낙선 ▲12월23일 경주 현대호텔에서 대선패배후 첫 의원총회에서 당무복귀선언 ▲1월5일 정대표 이종찬의원과 통합파기선언.한은발권발언 실수인정 ▲1월12일 정대표 2천억원 정치발전기금조성 백지화선언.검찰,정대표에 1차 소환장 발부 ▲1월13일 검찰,정대표에 현대비자금관련 소환장 ▲1월14일 정대표 출국금지,김해공항서 일본행저지 ▲1월15일 정대표 서울지검에 출두 ▲1월16일 정대표 클린턴 미대통령취임식 참석및 일본휴식차 출국 ▲2월1일 정대표 일본에서 귀국 ▲2월2일 정대표 검찰기소여부와 관계없이 정치 계속의지 천명 ▲2월6일 검찰,정대표 불구속 기소 ▲2월8일 창당1주년 기념식
  • 1년만에 막내린 재벌정치 실험/정주영씨 은퇴배경과 정치행적평가

    ◎비자금 유입 등 행태에 국민평가 냉정/명분보다 사업적 계산으로 악수연발 정주영국민당대표의 「재벌정치실험극」이 1년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 최대 재벌그룹 총수였던 정대표는 지난해 2월8일 국민당을 창당,일약 3당체제의 한 축을 이루는 정당으로까지 키워놓았다.그러한 그의 정치은퇴선언은 14대 대선직전 김우중 대우그룹의 「출마포기」소동과 함께 재벌의 정치참여에 한계가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대표의 이날 퇴진발표는 전격적이긴 하지만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었다. 그의 정치실험은 이미 지난 대선패배로 사실상 종막을 고했으며 그 이후는 「연명」이라고 표현하는게 옳다는 지적이다. 정대표의 정계입문과 은퇴는 여러 면에서 교훈을 남기고 있다. 그는 긍정과 부정의 엇갈린 평가속에 정치를 시작했다. 기성 정치권,특히 「양김씨」에 대한 일부 국민의 불만과 경제난은 정대표가 정치권에 터를 잡을 여지를 만들어 주었다.국민당이 창당 50여일만에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획득,원내교섭단체구성에 성공한 것도 새로운 정치모델과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가 작용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정대표의 정치행보는 부정적 측면을 훨씬더 부각시켰다. 일부 떳떳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해온 재벌기업의 관행이나 운영방식이 정치에 그대로 전이되면서 정치판이 보다 흐려졌다. 더욱이 「김권정치」를 더욱 심화시켜 국민이 바라던 새정치의 모습을 보이는데 실패했다. 국민당은 재벌기업 현대와 밀착돼 정당도,기업도 아닌 「괴물」이 되어버렸다. 특히 정대표를 대통령에 당선시키자는 단일 목표를 추구하는 「사당적」 성격이 강했다. 이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냉정했다. 14대 대선결과 김영삼차기대통령이 압승한 반면 정대표는 3백38만여표(16.3%)를 얻어 3위로 낙선했다. 이번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한 김대중 전민주당대표가 정계를 은퇴,양금구도로 상징되던 기성정치권이 일대 변혁을 맞게됐다.때문에 이제는 정대표가 정치를 계속할 명분도 국민적 기대도 사라졌다는게 중론이었다. 그럼에도 정대표는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대선과정에서의 실수에 대한사법당국의 「선처」나 현대에 대한 「방패막이」를 위해 정치를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관측됐었다. 그러나 정대표의 생각은 오판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정대표가 정치에서 손을 떼느냐 여부와 관계없이 사법처리의 엄정함을 피할수 없는 상황이 지속됐다. 정대표가 「개인 욕심」에 의해 정치를 계속하려는 것에 대한 당내반발도 만만치 않았다.2천억원 당기금조성압력이나 정대표 2선퇴진요구가 공개리에 터져나왔다. 이같은 당내외의 갈등을 극복치 못하면서 대선이후 실수를 연발했다. 새한국당과의 통합약속 일방파기,김해공항에서 일본행저지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명분보다는 손실을 줄여야 한다는 사업가적 계산에 익숙한 정대표에게는 정계은퇴를 심각히 고려해야될 궁지에 처해버렸다. 따라서 지난1월 보름이상 미·일등지에서 해외구상을 마치고 귀국한 정대표는 이미 정계은퇴의 수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정대표에게 정치에서도 성공할수 있었던 기획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대권에뜻이 없으며 킹메이커로 만족하겠다』는 국민당 창당 초기의 공언을 실천했다면 14대 대선에서 의외의 「돌풍」이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는 지적이다.또 자신이 직접 나섰더라도 현대와의 고리를 완전히 끊고 선거과정에서 페어플레이를 펼쳤다면 대선후 입지가 보장됐을 수도 있었다. 선거가 끝난뒤에도 「사리」를 딛고 공당화 약속을 지켰다면 국민당의 장래도 확고해지고 자신의 명예도 실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 정대표가 이날 정계은퇴 선언에서 밝힌 정치입문의 잘못을 시인한 것이나 김영삼차기대통령및 김대중 전민주당대표에 대한 사과표명이 단순히 사법처리의 선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진심이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인식의 바탕위에 자신이 만든 국민당이 「미예」가 되지 않도록 음양으로 도울때 그의 정치행적이 조금이라도 나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정대표 의총 발언 오늘부터 통일국민당의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자 합니다.그래서 사직서를 써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동안 많은것을도와줘 고맙게 생각합니다.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이 짧기 때문에 잘못도 있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오늘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합니다. 나는 당을 떠난 다음 정치를 하기보다는 전에 하던 경제를 계속함으로써 우리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민자당의 김영삼후보와 민주당의 김대중후보를 선의의 동반자로 여기지 않고 경쟁자로만 생각,개인적으로 공격한데 대해 충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정치가 서툴러 상대방 공격을 한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미안합니다. 총선때처럼 대선에서 이긴곳이 별로 없어 인간이 다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잘 의논해서 국민당을 잘 이끌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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