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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동북아 안정, 아베 총리의 선택에 달렸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어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특사 일행을 접견했다. 일본 측 요청에 따라 접견이 이뤄지긴 했으나 당선인으로서 첫 외교 대상이 일본이라는 상징적 의미는 적잖다. 박 당선인이 특사 일행과 한·일 관계 등에 대해 주고받은 외교적 수사의 밑바닥에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당선인의 깊은 우려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 한·중·일의 동북아 정세는 위태롭다.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와 식민지 지배 및 침략의 역사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수정하면서 역사 뒤집기를 시도하려 한다. 일본은 우경화 분위기에 편승해 앞으로 독도에 대한 도발과 망언의 수위도 한층 높여 나갈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 자민당과 극우 성향의 유신회는 평화헌법 제9조를 수정하고 자위대를 수시로 해외에 파병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국방군’ 창설로 이어져 군사력을 증강하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에 참가할 수도 있게 될 개연성을 높일 것이다. 지난 연말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상공에는 중국과 일본의 전투기가 날아다니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빚어졌다. 동북아 정세를 뒤흔드는 핵심 원인은 일본의 과거사 부인에 있다. 물론 중화 부흥을 내건 중국의 영토 확장 움직임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지만 일본의 과거사 부인에 비할 바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역사를 부정하려는 일본의 또 다른 시도’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보다 아시아의 안정에 더 중요한 관계는 없다”고 전제하고 “아베 총리는 한·일 간 긴장을 고조시키고 협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 ‘중대한 실수’로 자신의 임기를 시작하려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과거사를 왜곡하지 말라는 충고인 셈이다. 중국인 류창의 도쿄 야스쿠니 신사 방화 사건도 일본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려는 정치적 이유에서 나왔다는 게 그제 서울고법이 내린 판단이다. 일본은 자국 사법부 판결에 승복하듯 우리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기 바란다. 일본은 특사 파견으로 관계를 추스르려는 시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한국·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려면 그 첫 단추는 과거사 반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장기 불황과 동일본 대지진으로 침체된 민심 수습용으로 국수주의에 빠져들어 주변국과 충돌을 일으켜선 곤란하다. 동북아 평화와 안정은 전적으로 아베 총리의 결단에 달렸다.
  • 아베 “한국은 중요한 이웃 국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일 한국은 중요한 이웃 국가이므로 관계가 개선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교도통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특사로 파견되는 누카가 후쿠시로 전 재무상을 사저로 불러 “한국은 이웃으로 아주 중요한 국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한·일의원연맹 간사장인 누카가 전 재무상은 오는 4일 박 당선인을 방문해 아베 총리의 친서를 전달할 예정이다. 아베 총리는 누카가 전 재무상에게 “양국에서 새로운 정권이 시작됐으니 좋은 출범이 됐으면 좋겠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시장주의 등 가치관을 공유한 국가”라면서 “내 생각을 전달해 달라”고 말했다. 누카가 전 재무상은 아베 총리와 만난 뒤 기자들에게 “순조롭지 못한 양국 관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의원 외교의 입장에서 환경 정비를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아베 총리가 독도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도쿄 이종락 특파원 jrlee@seoul.co.kr
  • ‘울릉도 방문 강행’ 극우파도 각료로… 외교갈등 격화 예고

    ‘울릉도 방문 강행’ 극우파도 각료로… 외교갈등 격화 예고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이 26일 출범했다. 자민당의 아베 총재는 이날 오후 열린 특별국회에서 중의원과 참의원의 총리 선출 투표를 거쳐 제96대 총리에 지명됐다. 아베 총리는 2006년 9월 총리에 취임했다가 1년 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한 번 퇴진한 총리가 다시 집권한 것은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 이후 64년 만이다. 아베 총리가 조각에서 극우 성향의 측근 의원들을 대거 배치함에 따라 일본의 우경화가 가속화될 전망이다. 파벌의 영수들에게 자리를 주고 측근을 중용한 ‘친구 내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아베 총리는 총무상과 행정개혁담당상에 각각 신도 요시타카(54) 전 경제산업성 부대신(차관)과 이나다 도모미(53) 전 자민당 부간사장을 임명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8월 한국의 독도 지배 강화 실태를 보겠다며 울릉도 방문을 강행했다가 김포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된 극우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자민당이 야당 때 만든 ‘그림자 내각’에도 포함됐지만 실제로 각료로 기용된 것은 정치권에서도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해 독도 방문 소동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무명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방위상과 신설한 오키나와·북방상에도 영토 문제 강경론자인 오노데라 이쓰노리(52) 전 외무성 부대신과 우익인 야마모토 이치타(54) 전 외무성 부대신을 각각 임명했다. 아베 총리는 새 내각의 핵심인 부총리 겸 재무·금융상에 후원자인 아소 다로(72) 전 총리, 관방장관에 심복인 스가 요시히데(64) 간사장 대행을 배치했다. 교과서 검정제도 개편 등 ‘교육 개혁’을 주도할 문부과학상에 시모무라 하쿠분(58) 전 관방부장관, 외무상에는 당내 유력 파벌인 기시다파(전 고가파) 회장 기시다 후미오(55) 전 국회대책위원장을 기용했다. 기시다 외무상은 외교 경력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의외의 기용으로 꼽힌다. 아베 총리가 기시다를 주요 각료인 외무상에 임명한 것은 계파 중시 원칙을 지키면서 외교는 직접 챙기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아베 내각에 놓인 과제도 산적해 있다. 최우선 정책은 경기 부양이다. 이를 위해 10조엔(약 127조원) 규모의 추가 경정예산을 편성하기로 했다. 재정정책과 함께 일본은행을 통해 대담한 통화 완화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시중에 돈이 넘치게 하기로 했다. 그는 일본은행이 자민당의 총선 공약인 ‘인플레이션(물가) 2% 목표’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행법을 고쳐서라도 강제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아베 정권은 외교 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들고 있다. 그는 내년 1월 말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동맹 관계를 심화하기로 했다. 한국과의 불편한 외교 관계 복원에도 애를 쓰고 있다. ‘다케시마의 날’(2월 22일) 행사의 정부 개최를 유보하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특사 파견을 제안해 놓은 상태다. 하지만 내각에 영토 문제 강경파들을 포진시킨 점을 감안할 때 정권 초기 유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 내내 한·일 간 빈번한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베 총리는 또 내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해 중의원과 참의원을 완벽하게 장악한 뒤 평화헌법 개정의 길을 튼다는 방침을 세웠다. 도쿄 이종락 특파원 jrlee@seoul.co.kr
  • 日 극우공약 유보한 날… 中 항공기 또 센카쿠에

    일본의 차기 총리인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가 한국에 이어 중국과 러시아에도 유화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우익 성향의 아베 총재가 집권 후 영토와 과거사 문제에 대해 강경 방침을 펼 것이라는 주변국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아베 총재는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단독제소 유보 방침을 시사한 데 이어 한국, 중국 등의 반발이 예상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미룰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재는 지난 22일 야마구치시에서 기자들과 만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실효 지배 강화를 위한 공무원 상주를 유보하기로 했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해 “일·중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면서 “전략적 호혜 관계의 원점으로 돌아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1월 중 중국에 일·중우호의원연맹 회장인 고무라 마사히코 자민당 부총재를 특사로 파견할 예정이다.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영토분쟁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 아베 총재는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분이 각별한 모리 요시로 전 총리를 내년 2월 특사로 러시아에 파견키로 했다. 영토분쟁으로 인한 양국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양국 간 신뢰회복을 증진하기 위해서다. 2001년 모리 전 총리와 푸틴 당시 대통령은 ‘쿠릴열도 4개 섬 중 2개 섬(하보마이 제도와 시코탄 섬)의 반환을 명기한 1956년 일·소 공동선언은 유효하다’는 내용의 이르쿠츠크 성명에 공동서명했었다. 앞서 아베 총재는 자민당이 공약한 ‘다케시마(竹島)의 날’ 행사의 정부 주최를 유보하는 한편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인 누카가 후쿠시로 전 재무상을 특사로 파견해 정상회담을 제안하기로 했다. 아베 총재가 한국과 중국, 러시아 등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고는 있지만 영토 갈등으로 경색된 한국, 중국 등과의 외교 관계를 조만간 복원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영토문제는 쉽사리 양보할 수 없는 당사국 간 국익이 걸린 문제이고, 일본내 우익 세력의 목소리가 커질 경우 아베 정권은 자민당의 공약을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베 정권이 영토문제를 외교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중국은 외교 노력과는 별개로 최근 들어 해양감시선과 항공기를 번갈아 센카쿠 열도 주변에 진입시키는 등 영유권 공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중국 국가해양국 소속 소형 프로펠러기 한 대가 지난 13일에 이어 22일 또다시 센카쿠열도 북방 약 120㎞까지 접근, 일본 자위대 전투기가 긴급 출격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아베, 우경화 숨고른다

    일본 중의원(하원) 선거 과정에서 우경화 발언을 일삼았던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가 한국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한국과의 관계 복원에 나서는 양상이다. 아베 총재는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행사 등으로 한국을 자극하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도 특사를 파견키로 했다. 일본의 차기 총리인 아베 총재는 21일 ‘다케시마의 날’을 정부 행사로 개최하겠다는 공약과 관련해 “종합적인 외교 상황을 감안해 생각하겠다.”며 유보 가능성을 시사했다. 매년 2월 22일에 열리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는 그동안 시마네현이 주최하는 지방 행사였으나 자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이에 대해 “앞으로 정부 행사로 승격시키겠다.”는 공약을 내놓은 바 있다. 아베 총재의 입장 변화는 박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식(내년 2월 25일)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다케시마의 날을 정부 행사로 강행한다면 축하 분위기 속에 치러져야 할 한국 대통령 취임식에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양국 관계가 더욱더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베 총재는 한·일 관계의 조기 개선을 위해 이르면 다음 주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인 누카가 후쿠시로 전 재무상을 박 당선인에게 특사로 파견할 계획이다. 누카가 특사는 조기 정상회담을 요청하는 아베 총재의 친서를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날 아베 총재가 한국의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을 경우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아베 총재가 직면한 외교 안보의 최우선 과제는 미국과의 동맹 강화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급하며 독도 문제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이런 차원에서 아베 총재가 독도 문제의 국제사법재판소 단독 제소를 유보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양국의 새 정부는 외교 안정을 위해 독도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의 민감한 현안과 경제 협력, 민간 교류 등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관계 정상화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베 정권이 우경화를 본격화할 경우 또다시 갈등 국면이 재연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선택! 역사를 갈랐다] (31)서재필 vs 윤치호

    서재필(1863~1951)와 윤치호(1865~1945) 두 사람은 개화파의 막내들로서 10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을 거쳤고, 1884년 갑신정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에 거의 유일하게 미국에서 정식 대학교에 진학해 근대 서구문명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근대적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들인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엇갈린다. 서재필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반면 윤치호는 친일파의 대표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무엇이 두 사람을 극단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을까. ●갑신정변 행동대장 vs 美 공사관 통역관 서재필은 19세였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으나 무관으로 과감히 변신해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학교를 나온 후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변 과정에서 고위 대신들을 살해하는 행동대장이었다. 따라서 정변이 실패하자 일본 망명 길에 올랐다. 한편 윤치호는 16세였던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었다가 남아서 도진샤(同人社)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그는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발탁돼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정변에 반대했고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치호는 당시 김옥균 일파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중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정변 실패 후 일본에서 냉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재필은 홀로 서기를 감행하였다. 그는 워싱턴 DC에서 야간 의과 대학을 나와 마침내 1893년에 의사 면허를 받았다. 1890년에는 미국인으로 귀화해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4년 뒤에는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그는 미국 주류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어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였다. 한편 윤치호는 1885년 초 중국 상하이 중서학원에서 유학을 시작했으며 1887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1888년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으로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미국 생활에 잘 적응하였지만, 시민권 취득이나 국제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았고 유학을 마친 후 중국 중서학원으로 돌아가 교사가 됐다. ●서재필, 의사 되며 ‘원조’ 아메리칸드림 이뤄 서재필은 1894년 갑오개혁 정권의 귀국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마침내 1895년 12월 귀국했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중추원 고문관에 취임하였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데 고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1897년 후반 러시아의 만주 침략과 조선 진출 정책이 강화되자 반러적 입장을 드러내다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당시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행세해 이름을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으로 사용했다. 굳이 한글로 표현할 때는 제손 박사 또는 피제선(皮堤仙)이라고 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갑오개혁 이후 귀국하여 학부협판이 되었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했으나 ‘정동파’로 분류됐고 을미사변으로 미국 선교사와 공사관에서 피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그는 고종의 특사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다녀왔다. 따라서 독립협회 창립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귀국 후 부회장에 취임하면서 독립협회를 계몽단체로 개조했다. 그는 서재필이 떠난 후 독립신문을 운영했고, 이완용에 이어 1898년 8월부터 독립협회 회장을 맡아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개혁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만민공동회가 폭력화되어 결국 강제 해산되자 지방관으로 떠남으로써 독립협회 회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바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20년 동안 조선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서재필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며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잡지, 책자를 발행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군축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였다가 실패하자 항일활동을 마감하였다. 윤치호는 대한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한 후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대한자강회의 회장이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으며 안창호와 협력해 대성학교 교장과 청년학우회 회장을 맡았고 YMCA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2년에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윤치호에 대한 조선인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러나 그는 3·1 운동을 전후하여 파리 강화회의 대표, 임정 참여, 워싱턴 군축회의 참가, 미국 망명 등 모든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열강이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의 통치정책에 대해서는 반감을 품었지만 조선인들이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설령 독립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성 개조를 통한 민족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인으로 산 서재필 vs 일본인 된 윤치호 서재필은 1922~1927년 갑자기 국내 일간지와 잡지 등에 다시 등장하여 식민지배에 순응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식민지화의 책임을 전적으로 대한제국 지배층의 무능과 민중의 무지에서 찾았고, 독립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보다는 경제적 활동에 주력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그가 1937~1938년에 미주 한인 2세를 위해 ‘신한민보’에 영문으로 기고했던 ‘MY DAYS IN KOREA’(나의 조선 시절)를 보면 대부분 조선왕조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개화파를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일본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던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맞서 싸우는 미국 시민으로서 반일로 돌아섰다. ●윤치호, 日전쟁 승리를 백인인종차별 극복 간주 한편 윤치호는 일본의 대륙 침략이 시작되고 내선일체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일본 국민’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주도했으며 대표적 친일단체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1945년에는 마침내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까지 선임되었다. 그의 친일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강요라기보다는 당시의 조건 속에서 조선 민족의 현명한 선택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이 구미 열강에게 승리하는 것을 황인종이 백인의 인종차별주의를 이긴 것으로 열광하였다.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일본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기원하였다. 나아가 내선일체를 통해 민족차별 정책이 철폐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서재필은 점령국 미국의 시민으로서 미군정 고문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대해 반대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결국 고국에 머무르기보다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윤치호는 더는 공적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죽기 몇 달 전에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거기서 그는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 그리고 조선의 해방은 항일민족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친일파를 사면하여 민족단결을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다. 윤치호가 1945년 12월 사망하여 1947년 7월 미군정 고문으로 귀국한 서재필과의 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말년 볼 것인가 vs 인생 전체 평가할 것인가 서재필은 전 생애에 걸쳐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들 만큼 도전과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자신은 안전지대에 머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투쟁과 희생을 요구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서 민족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희생적 자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사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것은 불과 27세까지였고 나머지는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해방 후 부모의 묘소조차 참배하지 않았다. 그의 묘지명에는 분명히 필립 제이슨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그가 스스로 택한 필립 제이슨의 유해를 억지로 국내로 모셔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은 분명히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반면에 윤치호는 모든 판단을 함에 지나치게 신중했고 근대 시민윤리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국내에서 교육과 종교 활동을 통해 조선인들의 민족성을 개조하여 근대 국민으로 발전할 것을 희망했다. 그는 안창호를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필요로 한 민족 저항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거부하고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통해 결과적으로 친일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했던 기간이 합해서 5년이 안 되지만 대체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같은 입장에서 행동하였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이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본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비슷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긴 세월을 자의에 의해 미국인으로서, 윤치호는 타의에 의해 일본인으로 살았다. 그 결과 오늘날 서재필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반면에 윤치호에 대해서는 매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친일을 옹호할 마음은 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을 단죄하기에는 안타까운 연민의 심정이 든다. 하지만 그의 친일을 ‘협력’ 또는 ‘친일 민족주의’라고 정당화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한 인물의 굴곡에 찬 긴 인생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사학자로 살아가면서 점점 마음속으로 느끼게 된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탈레반 피격 소녀 상태 호전

    탈레반의 만행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지난주 탈레반에 의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영국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파키스탄 소녀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고 담당 의료진이 16일(현지시간) 밝혔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영국 버밍엄 퀸엘리자베스병원은 이날 성명을 통해 파키스탄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14)가 “지금까지 치료에 반응하는 것으로 볼 때 잘 회복할 것 같다.”고 밝혔다. 데이비드 로서 병원장은 유사프자이의 상태가 호전돼 의료진이 기뻐하고 있다면서, 그녀가 “매우 특별한 의료팀”에 의해 재건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은 이날 유사프자이의 피격은 파키스탄의 모든 소녀에 대한 공격이자 교육과 문명에 대한 공격이라며 탈레반을 비난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유사프자이에게 ‘용기의 메달’을 주기로 했으며, 저격범 현상금으로 10만 달러를 내걸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또 유사프자이에게 총격을 가한 파키스탄탈레반(TTP)이 전국의 다양한 기관을 상대로 테러를 감행하기 위해 대원들을 파견했다는 정보에 따라 전국에 경계령을 내렸다고 현지 일간지 익스프레스 트리뷴이 17일 보도했다. 유사프자이의 피격 사건으로 어린이 교육권을 위한 글로벌 캠페인도 확산되고 있다. 할리우드 배우이자 유엔난민기구(UNHCR) 특사인 앤절리나 졸리는 이날 인터넷 매체 데일리 비스트에 ‘우리 모두가 말랄라다.’라는 글을 통해 “전 세계에서 소녀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위협받고 있다. 우리가 모두 행동할 때”라고 강조했다. 가수 마돈나도 지난주 콘서트에서 유사프자이에게 노래를 바치면서 “교육과 여성을 지지하라.”고 외쳤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日 “외교회담 추진”…시진핑 “평화해결”

    일본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주변에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를 투입해 중국 측 동향을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중국 측의 반발과 맞대응이 예상된다. 일본 자위대가 최근 공중조기경보통제기와 조기경보기(E2C), 화상정보수집기(OP3)를 센카쿠열도 상공에 보내 중국 군함이나 해양감시선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다고 21일 산케이신문이 보도했다.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과 만나 미국의 개입을 경고하고, 일본의 센카쿠열도 국유화를 ‘웃기는 짓’이라고 강력 비난했던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부주석은 “평화해결”을 강조하는 등 한발 물러섰다. 강경 입장이 ‘중국 위협론’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시 부주석은 이날 광시(廣西)좡족자치구 난닝(南寧)에서 열린 중국·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엑스포 개막식 기조연설을 통해 “우리는 국가 주권과 안보, 영토를 굳건히 지켜 나가겠지만 이웃 나라와의 영토, 영해, 해양 권익 분쟁 문제를 우호적인 담판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센카쿠열도 해역의 대치 국면은 장기전 양상으로 가고 있다. 중국 관공선은 지난 14일과 18일 센카쿠열도 해역에 두 차례 진입한 뒤 추가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접속수역 바깥쪽에서 항해하고 있는 중국 해양감시선 등 모두 13척을 경계, 감시하고 있다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중국 어선들은 센카쿠열도에서 200㎞ 이상 떨어진 해역에서 조업 중이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이날 오후 8시 20분쯤 우오쓰리섬 접속수역(24해리·44㎞) 안에서 타이완 해안순방서(해경) 경비함 ‘허싱(和星) 101호’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타이완 정부 선박이 센카쿠열도 부근 해역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는 지난 19일 중국에 특사 파견 방침을 밝힌 데 이어 20일에도 ‘적당한 시기’를 잡아 중국 지도자와 정상회담을 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연일 사태 진화에 나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일본 외무상은 25일 열리는 유엔 총회 기간에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을 추진하고 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중국 측도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는 있지만 중국은 대화 재개의 선결 조건으로 국유화 철회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대화 성사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경제보복 움직임은 전방위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베이징시 당국이 지난 14일 시내 일부 출판사에 일본 관련 서적을 출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일본과의 문화 교류 등도 금지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특히 일본 우익단체인 ‘분기일본전국행동위원회’는 22일 주일 중국대사관 앞에서 수천명이 모이는 대규모 반중 시위를 벌일 예정이어서 진정단계로 들어간 양국 관계가 다시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 한편 1972년 중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센카쿠열도 문제 논의를 보류하기로 합의했지만 일본이 공식 기록에서 이런 내용을 삭제하고 합의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일본의 중국 문제 전문가 다바타 히카리가 주장했다. 도쿄 이종락·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rlee@seoul.co.kr
  • 中, 인민해방군 3급 전투대비태세 발령

    中, 인민해방군 3급 전투대비태세 발령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간 대치가 군사 충돌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센카쿠열도 대치 국면은 중국의 해양감시선, 어업지도선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사이의 비무장 근접 대치와 양국 군함 간 원거리 무장 대치라는 복잡한 양상으로 변했다. 중국은 센카쿠열도 부근 해역에 군함을 파견한 데 이어 최근에는 인민해방군 산하 7대 군구 가운데 5대 군구에 3급 전투대비태세(전비태세)를 발령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군의 전비태세는 4단계로 1급이 발령되면 임전태세에 돌입하고 3급이 발령되면 전투 요원의 휴가, 외출 금지와 장비의 검사 및 보충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 중국 군은 남중국해에서 긴장이 고조됐을 때도 3급 전비태세를 발령한 바 있다. 중국은 무력 시위의 수위를 한껏 높이는 기세다. 중국 내부적으로는 ‘영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면서 국제 사회에는 센카쿠열도가 분쟁 지역임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센카쿠열도 주변 해역에 어업지도선과 해양감시선을 증강해 상시 배치하기로 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중국 농업부 어정국 관계자는 “국가의 주권을 지키겠다는 의사를 보여주기 위해 상시적으로 댜오위다오 주변에 감시선을 파상적으로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어선 보호를 명목으로 필요할 때마다 감시선을 파견하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센카쿠열도 해역에 연중 감시선과 지도선을 배치하겠다는 뜻이다. 중국 인민해방군 내에서는 일본의 자위대가 센카쿠열도에 출동할 경우 군사 행동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론도 잇따르고 있다. 홍콩의 친중국계 신문인 문회보에 따르면 지난 15일 베이징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한 중국군 장성 5명 가운데 한 명은 “일본 자위대가 댜오위다오의 중국 해역 12해리 내에 진입하거나 중국의 민간 선박이 공격받을 경우 단호하게 군사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나머지 4명도 주전론을 전개했다. 반일 시위는 지난 18일 이후 더 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센카쿠열도로 가려던 홍콩 시위대는 출항을 포기했다.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 때문에 ‘수위 조절’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이 제안한 림팩(환태평양훈련)에 참가하기로 하면서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추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첨예한 대치 상황에서도 양국은 대화 통로를 열어 놓고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센카쿠열도 국유화 의도 등을 설명하기 위해 중국에 특사를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외교부도 대변인 브리핑 등을 통해 “일본 정부는 담판을 통한 문제 해결의 길로 돌아와야 한다.”며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 한편 중국 세관 당국은 일본 상품에 대한 통관을 전방위로 강화하며 보복 조치에 나서고 있다. 20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중국 톈진시 세관 당국은 복수의 일본계 기업에 대해 전자제품 등의 원재료 수입과 관련한 검사 비율을 강화하겠다고 통보했다. 상하이 세관 당국은 일본에 수출되는 화학제품 원재료를 대상으로 통상 10% 정도의 검사 비율을 100%로 올려 전량 검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일 일본 정부의 센카쿠열도 국유화 이후 일본 제품에 대한 중국의 통관 강화가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도쿄 이종락·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rlee@seoul.co.kr
  • 시리아 ‘새 해결사’ 시작부터 삐걱

    시리아 사태 해결사로 등장할 새 유엔·아랍연맹 공동 특사가 취임도 하기 전에 시리아 반군과 설전을 벌인 데 이어 정부 측의 비난 포화까지 맞으며 시작부터 삐거덕대고 있다. 논란은 지난 17일(현지시간) 유엔으로부터 신임 특사로 지명된 라흐다르 브라히미(78) 전 알제리 외무장관이 18일 로이터통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에게 당장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말하면서 촉발됐다. 아직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이 발언은 줄곧 알아사드 대통령 퇴진 입장을 고수해 온 전임자 코피 아난 특사와 뚜렷이 대비되면서 더욱더 반군의 반감을 샀다. 반정부 단체인 시리아국가위원회(SNC)는 “시리아 국민들이 흘린 피와 자기 결정권을 무시한 처사”라며 브라히미 특사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브라히미 특사는 19일 알자지라와의 인터뷰를 통해 “아직 (국제사회의) 계획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만큼 시리아와 관련한 그 어떤 사안도 지금은 말하기 이르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시리아국가위원회는 내 말의 진위를 직접 물어봤어야 했다.”며 되레 반군의 사과를 촉구했다. 20일에는 알아사드 정권마저 브라히미 특사가 언론 인터뷰에서 시리아 사태를 ‘내전’이라고 표현한 데 대해 딴죽을 걸었다. 시리아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시리아 사태를 내전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현실과 모순될뿐더러, 음모 가담자들의 머리에서나 나올 만한 얘기”라고 비난했다. 이날 휴가에서 복귀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브라히미 신임 특사와 파리 집무실에서 만나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고 AFP가 보도했다. 오는 31일 임기를 마치는 아난 특사의 뒤를 이어 국제사회를 대표해 시리아 사태를 중재할 브라히미 신임 특사는 분쟁 전문가로, 알제리 외무장관(1991~1993년)과 아프가니스탄 유엔 특사(1997~1999년) 등을 지냈다. 난항을 겪던 유엔의 감시단 활동은 19일 밤 12시를 기해 파견 4개월 만에 공식 중단됐다. 같은 날 알아사드 대통령은 라마단 단식 기간이 끝났음을 축하하는 이슬람 명절 ‘이드 알피트르’를 맞아 다마스쿠스의 한 모스크를 방문했다.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달 4일 의회 연설 이후 처음이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열린세상] 김영환 사건과 한·중외교의 도전/이문기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열린세상] 김영환 사건과 한·중외교의 도전/이문기 세종대 중국통상학과 교수

    며칠 전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학술행사차 서울에 온 중국의 소장학자 한 명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최근 양국관계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김영환씨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사건의 자세한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의 진상에 대해 설명해 주었더니,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한국에서 받아들이는 이 문제의 심각성은 2004년 ‘동북공정’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동북공정’ 문제가 부각될 당시 중국 정부가 초기에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안이하게 대응하면서 한국에서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위협인식’이 크게 확산되었던 사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보았다. 물론 한 학자의 개인적인 견해이고, 다소 직관적인 답변이지만 문제 해결에 참고할 만한 것도 있었다. “랴오닝성 국가안전부에서 저지른 이번 고문사건에 중앙 정부가 개입했을 것으로 보는가?” 중국 학자의 답변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정도 사안에까지 중앙에서 구체적으로 기획하고 개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탈북자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랴오닝성 공안부문에서 모종의 첩보를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하다 과잉대응한 것이고, 중앙 정부 입장에서는 사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졌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 국가안전부나 공안의 강압적 수사관행에 비춰볼 때, 고문수사의 개연성은 인정하고서 하는 말이다. 현재 한국 내에서의 강경한 여론을 소개하면서 문제 해결의 방법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뾰족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언급한 바는 사안의 성격상 중국 외교부 차원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누가 어떻게 고문을 가했는지 사실관계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데, 국가안전부가 자기조직 이익 때문에 쉽사리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중국 외교부가 한·중관계 악화를 우려해서 전향적인 해법을 모색한다 해도 국가안전부를 관장하는 정법부문의 협조 없이는 진상파악 단계부터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다. 참고로 중국의 권력구조는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 9인을 정점으로 8개의 부문(계통·系統)으로 대별되는데, 각 부문의 종적 관계 일처리는 막힘 없이 처리되지만, 부문 간의 횡적 관계는 복잡한 경쟁구조 때문에 일처리가 매우 더디고 꼬이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더구나 중국 내부의 전반적인 권력구도에서 정법부문이 외교부문을 압도하는 관계에 있다. 결국 이 사건의 실질적 주체는 정법부문인데,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외교부가 아니라 그 윗선일 수밖에 없다. 문제해결의 협상 창구는 중국 외교부이지만 실질적인 실마리는 최고지도부의 마음을 움직여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2004년 동북공정 문제에서 뒤늦게나마 중국 정부가 황급히 진화에 나선 적이 있었다. 이때 해결사로 한국에 파견된 인물이 당시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 왕자루이 부부장이었는데, 사실상 중국 최고 지도부의 의중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러면 어떻게 중국 최고 지도부의 전향적인 인식 전환을 이끌어 낼 것인가? 이번 사안은 고문이라는 전근대적 인권 유린이기 때문에 보편적 가치규범을 내세운 적절한 압박과 비판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활용한 외부적 압박만으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자칫 갈등의 골만 키울 수도 있다. 국내 여론과 국제 사회의 지지는 명분으로 삼고, 실질적 해법은 또 다른 수단으로서 양국 정부의 ‘신뢰채널’을 동원해야 한다. 현 정부 들어 양국관계의 신뢰채널에 상당히 금이 간 것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서로를 적대시하는 상황은 아니다. 마침 8월 24일이 한·중 수교 20주년이고,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접촉창구를 활용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비공식 특사 파견도 고려해볼 만하다. 양국 정부가 수교 20주년 행사의 공식표어인 ‘아름다운 동행’에 걸맞게 진솔하고 성의 있는 외교적 지혜를 발휘하길 기대해 본다.
  • [15일 광복절 맞는 독립기념관·문화재청·행안부] 이준·한용운 등 묘역 7곳 문화재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이준과 안창호, 한용운, 손병희 등 서울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독립유공자 묘역 7곳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13일 말했다. 문화재청이 이번에 등록 예고한 묘소 7곳은 모두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곳이라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1호 검사’인 이준은 고종의 명을 받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돼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현지에서 순국했다. 그의 묘가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이준의 묘를 비롯해 서간도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 성균관 대학을 설립한 유림의 대표인 김창숙,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회의장과 대통령에 출마했다가 암살된 신익희의 묘가 모두 수유동에 있다. 천도교의 제3대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의 실질적 대표인 손병희의 묘는 강북구 우이동에 있다. 독립협회 활동을 한 안창호의 묘는 강남구 신사동, ‘님의 침묵’으로 저항문학을 선도한 불교계의 지도자 만해 한용운 묘소는 중랑구 망우동에 있다.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北 “박근혜·정몽준·김문수 친북발언 공개할 수도”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은 11일 “정몽준, 김문수 등이 우리에게 와서 한 말들을 모두 공개하면 온 남조선 사람들이 까무러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조평통 서기국은 이날 우리 정부와 새누리당을 상대로 낸 공개 질문장을 통해 “최근 남조선에서는 보수패당에 의해 전례 없는 종북 세력 척결 대광란극이 벌어지고 있다. 보수패당은 통합진보당 사태 등을 계기로 저들의 반통일대결 책동에 거슬리는 사람들은 모조리 종북 좌파 감투를 씌워 매장하려 한다.”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조평통은 “박근혜는 2002년 5월 평양을 방문해 장군님(김정일)의 접견을 받고 평양시의 여러 곳을 참관하면서 친북 발언을 적지 않게 했다.”면서 “우리는 필요하다면 남측의 전·현직 당국자와 국회의원들이 평양에 와서 한 모든 일과 행적, 발언들을 전부 공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평통은 “남조선의 유신 독재자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평양에 밀사로 파견해 우리의 조국 통일 3대 원칙을 다 받아들이고 7·4공동성명에 도장을 찍은 것은 종북이 아닌가.”라면서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정권 역시 안전기획부장이었던 장세동과 서동권 등을 평양에 비밀특사로 파견해 우리 최고 수뇌부의 접견을 받고 진상품을 바쳤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은 반박 자료를 내고 “대선에 개입하려는 노골적 협박”이라며 “북한은 협박을 중단하고 스스로 공언한 대로 북한을 방문했던 주요 인사들의 발언이나 행적을 사실대로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中 “새달부터 남중국해 해양예보” 또 강수

    중국이 필리핀과 충돌 중인 황옌다오(黃巖島·필리핀 명 스카보러 섬)는 물론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는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 열도)를 포함한 인근 해역에 대해 오는 6월부터 해양 예보를 실시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는 사실상 동중국해 전체를 자국 영해로 간주하는 행위로 향후 지역 내 영유권 분쟁 가능성에 쐐기를 박겠다는 의도로 해석돼 주변국들의 대응이 주목된다. 국가해양국과 국무원은 최근 해양관측예보관리조례를 제정하고 6월 1일부터 황옌다오와 댜오위다오는 물론 그 주변 해역 인근 53개 어장에 대한 해양 예보를 본격적으로 실시한다고 밝혔다고 인민일보 등 중국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이는 타이완 북쪽의 동중국해에서 남중국해까지 사실상 동중국해 전체에 대한 해상 기후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것으로 이들 지역에 대한 주권을 선포하는 의미를 갖는다. 조례에서는 또 기존에 이들 지역에서 이뤄지던 해양관측 정보를 다른 나라에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한편 관측설비를 파손할 경우 원상회복 조치는 물론 2만~20만 위안(약 369만~3690만원)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외국인이 관련 해역에서 해양 관측 활동을 벌일 경우 중국의 해양과학연구 관련 규정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도 명시했다. 이 모든 활동이 중국의 해상영토 안보를 위한 조치라고 의미를 부연해 주권 선포 의도를 확실히 했다. 특히 필리핀과 한 달째 대치 중인 황옌다오의 경우, 한쪽으로는 과일 수입 금지 등 경제 제재 압력을 통해 필리핀을 외교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영유권을 굳히기 위한 실력행사에 들어간 것이어서 ‘이중 플레이’라는 비난마저 나온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가 필리핀을 지원 중인 미국에 대해 간섭을 자제할 것을 촉구해 주목된다. 쿠다세프 필리핀 주재 러시아 대사가 어떤 비당사국도 남중국해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고 중국중앙(CC)TV 인터넷판이 필리핀 일간 더 마닐라 불리틴을 인용해 보도했다. 쿠다세프 대사는 “미국을 비롯한 비당사국이 황옌다오 분쟁을 가중하고 있는데 이는 타국의 내정간섭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규정한 뒤 “러시아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항행 자유를 존중하며 사태의 추후 진전을 예의주시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필리핀 측은 경제제재 압박 이후 유화 쪽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 6개월 임기로 파견한 주중 필리핀 특사에 중국계인 리융녠(李永年)을 임명한 데 이어 6월 말 마닐라에서 양국 간 친선 농구 시합을 갖자며 야오밍(姚明)이 이끄는 상하이(上海) 농구팀에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밝힌 바 있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러 “쿠릴열도 개발 韓·中 참여” 日 “우리 영토… 인정할 수 없다”

    러시아와 일본이 영토 분쟁을 빚고 있는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의 개발에 한국과 중국 기업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韓, 해안벽 건설… 中, 농장설립 예정 13일 교도통신에 따르면 쿠릴열도를 관할하는 러시아 사할린주의 알렉산드르 호로샤빈 지사는 12일 한국과 중국 기업이 쿠릴열도의 4개 섬 가운데 이투룹(에토로후)과 쿠나시르(구나시리)에서 인프라 정비와 농업 생산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쿠릴열도가 일본 영토여서 러시아가 추진하는 외국 기업의 쿠릴열도 투자와 개발 참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러시아는 최근 수년간 한국과 중국 등 외국 기업에 쿠릴열도 개발과 투자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해 왔으며 일본에도 공동 경제 활동을 제안했다. ●러, 일본에도 공동경제활동 제안 호로샤빈 지사의 발언은 일본의 참여가 없어도 외국 기업을 유치해 쿠릴열도를 개발하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기업은 연내 건설 예정인 이투룹의 해안 벽 건설 공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업 규모는 14억 루블(약 530억원) 정도다. 쿠나시르에는 중국 기업이 농장을 설립할 예정이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영토 문제 등 외교 현안의 논의를 위해 연내 러시아 공식 방문을 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모리 요시로 전 총리를 특사로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는 일본 홋카이도 북서쪽의 이투룹과 쿠나시르, 시코탄, 하보마이 등 4개 섬을 일컫는 쿠릴열도에 대해 2차 세계대전 이후 합법적으로 귀속됐다며 실효 지배하고 있으나 일본은 역사적으로 자국 영토라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배설 선생 서거 103주기] 대한매일신보로 일제만행 알린 파란눈의 독립투사

    [배설 선생 서거 103주기] 대한매일신보로 일제만행 알린 파란눈의 독립투사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대한 민족을 구하시오.” 배설(裵說·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1872~1909) 선생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1909년 5월 1일 37살로 인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결핵이었으나, 원인 제공자는 ‘상하이 옥살이’를 강제한 일본 제국주의였다. 영국 브리스틀에서 출생한 선생은 왜 한국식 이름으로 개명했으며, 왜 ‘한국 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까지 남긴 것일까. 브리스틀에서 출생한 그는 16살부터 32살까지 16년을 일본에서 살며 무역 일을 했다. 1904년 3월 10일 러·일 전쟁이 터지자 런던에서 발행하던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왔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 우호적인 기사를 강요하는 특파원 생활을 바로 접고, 7월 18일부터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등을 창간해 발행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영국 국적의 발행인을 자처했다.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던 대한매일신보에서 양기탁·박은식·신채호 등은 일본을 통렬히 비판하며 항일무장투장, 헤이그 특사 파견, 국채보상운동 등을 보도해 애국·계몽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일본은 눈엣가시인 그를 추방하기 위해 영국에 압력을 가했다. 배설은 1907년 10월과 이듬해 6월 두 차례나 재판을 받아야 했다. 특히 1908년 3월 23일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을 암살한 기사는 배설에게 치명적이었다. 1908년 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에 설치된 법정에서 영국인 본(F.S.A Bourne) 판사는 배설에게 3주간의 금고에 만기 후 선행 보증금으로 피고인 1000달러, 보증인 1000달러를 즉시 납부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상하이의 영국조계 안 형무소에서 3개월간 금고 생활을 마쳤고, 1908년 7월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쇠약해진 배설은 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장지연은 배설을 위해 1910년 추모의 글을 적었고, 그 문구로 비석을 세웠다. 하지만, 일제는 칼과 망치로 그 내용을 지워 버리고 훼손했다. 그렇게 훼손된 채 광복을 맞은 비석은 1964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한국의 언론인들은 장지연이 쓴 원래의 비문을 새긴 비석을 세우자는 운동을 벌였다. 현재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는 배설의 유언이 한국인들을 반기고 있다. 새 비석이 세워진 뒤 4년 뒤 베델은 1968년 3월 대한민국 건국유공자로서 건국훈장을 받았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충남, 왜곡교과서 日구마모토현에 ‘호통’

    일본 구마모토현 학교들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왜곡 교과서를 부교재로 채택하자 30년간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충남도가 강력히 항의하고 나섰다. 남궁영 도 경제통상실장은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달 중 특사를 파견해 구마모토현에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부교재 채택 철회를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도는 또 다음 달 도교육청, 시민단체 등과 합통 토론회를 열고 민관 합동 대응체계를 구축한다. 이어 전국시도지사협의회의 어젠다로 상정해 일본 지자체와 교류 중인 다른 지역 단체들과 연대해 철회하도록 힘쓴다. 일본의 의식 있는 시민단체와 힘을 합쳐 왜곡 교과서 철회 여론을 조성하고, 두 지자체의 30년 교류사 공동교재 편찬도 제안하기로 했다. 특히 도와 교류관계를 맺은 중국 장쑤성 난징시 등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했던 아시아 국가들과 범아시아 공동 대응체계를 구축하는 방안도 추진할 방침이다. 이 같은 활동에도 구마모토현의 태도에 변화가 없으면 연락관을 소환하는 강경책도 취하기로 했다. 충남도는 1983년 구마모토현과 자매결연을 한 뒤 여러 분야에서 교류했고, 양쪽 공무원이 1명씩 연락관으로 상대 자치단체에 상주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구마모토현 3개 학교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한 뒤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 영토다.”라고 기술한 왜곡 교과서를 부교재로 채택했고, 현이 이와 관련해 11만 4000엔의 예산을 지원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30년 우정이 삐걱거리고 있다. 남 실장은 “구마모토현이 왜곡 교과서 채택을 계속 고집하면 마지막에는 자매결연 중단 조치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시리아 “인구밀집 지역서 軍 철수”

    시리아가 오는 10일까지 인구밀집 교전 지역에서 정부군과 중화기를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들은 시리아 정부의 약속 이행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코피 아난 유엔·아랍연맹 공동특사는 2일(현지시간) 비공개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시리아 외무장관이 반정부 시위가 심각한 도시에서 즉각적으로 병력 철수에 착수해 10일까지 완료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공개했다고 수전 라이스 주유엔 미국 대사가 전했다. 아난 특사는 시리아 정부가 이를 이행할 수 있도록 반정부 세력에 향후 48시간 내에 적대행위를 중단하도록 설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시리아의 폭력사태가 중단될 경우 유엔의 지원을 받는 감시단을 파견하는 방안을 고려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바샤르 자파리 유엔 주재 시리아 대사는 이와 관련, “시리아 정부는 아난 특사가 제시한 6개항의 평화안을 전적으로 이행할 것”이라면서 “다만 반군 무장세력을 지원하는 일부 안보리 회원국들도 평화안을 지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CNN이 전했다. 라이스 대사는 “전례를 볼 때 시리아의 약속을 믿기 어렵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며 시리아 정부를 압박했다. 앞서 시리아 정부는 지난달 26일 아난 특사의 평화안을 수용하겠다고 밝힌 뒤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아 유혈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편 알아사드 정권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온 러시아도 정부군의 우선 철수를 요구했다. 세르게이 라프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날 “시리아 사태가 해결되려면 정부군이 먼저 도시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반정부 세력도 즉시 뒤따라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유엔특사 방문 날… 시리아, 반군도시 폭격

    시리아의 유혈 사태를 종식하기 위해 코피 아난 유엔 특사가 10일(현지시간)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만나는 와중에 정부군의 집중 폭격으로 이들리브에서 55명이 사망하는 등 이날 전국에서 98명이 숨졌다고 시리아인권관측소가 밝힌 것으로 CCN이 보도했다. 다른 반정부 단체인 지역조정위원회(LCC)는 이들리브에서 46명이 포격으로 숨지는 등 전국에서 최소 63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사망자가 집중된 이들리브는 터키와 국경선을 따라 인접해 있는 북서부 주의 수도로, 알아사드 정권에 맞서는 반군의 거점 도시다. 정부군이 오전 이들리브를 포위해 몇 시간 동안 융단폭격을 가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주민들이 황급히 담요와 생필품만 가지고 피신했지만 정부군은 도시의 주요 출입구를 모두 봉쇄했다. 반군 측의 아브델 아지즈는 “이들리브는 2분 간격으로 집중 포격을 받아 건물과 주택이 무참히 파괴됐다.”며 “정부군이 반군 참여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가택 수색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홈스에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일 정부군이 장악한 홈스에서는 주민 수백명이 처형된 것으로 전해졌다. 아난 특사가 알아사드 대통령을 만났지만 유혈 사태 종식에는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난 특사는 알아사드에게 즉각적인 포격 중단, 정치적 대화 시작, 국제구호 단체의 인도주의적 접근 허용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알아사드는 테러 단체들이 시리아를 위협하는 한 정치적 해결은 불가능하다며 이를 일축했다. 반정부 지도자들도 알아사드 정권이 학살을 계속하는 상황이어서 대화 제안을 거부하고,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아랍연맹(AL)과 러시아는 이날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시리아 사태를 논의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우리는 어떤 정권도 보호하지 않는다. 외부인들은 각 나라가 직면한 문제를 다룰 때 매우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시리아에 대한 외국의 개입에 반대한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밝혔다. 이에 대해 셰이크 하마드 빈 자심 카타르 총리는 “(시리아에) 무장 범죄 집단은 없으며 조직적인 학살만 있을 뿐”이라고 반박하며 시리아에 AL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엔 안보리는 12일 고위급 회담을 열고 시리아 사태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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