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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유고 또 전쟁 임박/나토 협상결렬땐 즉각 세르비아 공습

    【워싱턴·브뤼셀 AP AFP 연합】 코소보 사태와 관련, 신유고에서 또 한차례 큰 전쟁이 일어날 것같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관계자들은 신유고연방 코소보주 사태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로 끝날 경우 나토군은 공격 명령을 받은 지 수시간내 세르비아를 공습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유고연방도 ‘임박한 전쟁 위협’에 처해 있다며 만약 공격을 받을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방어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토는 세르비아 공격 여부가 리처드 홀브룩 미국 특사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간의 회담 결과에 달려 있다면서 8,9일쯤 공격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6일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코소보 사태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나토는 행동을 취할 준비가 돼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반면 러시아와 중국은 나토의 세르비아 공격에 강력한 반대입장을 표했다.
  • 박영효의 귀거래(秘錄 南柯夢:25)

    ◎고종 “日本있는 박영효 불러들여라”/갑오경장으로 쫓겨났다가 하루 아침에 ‘구국재상’ 귀국/장안 환영물결 가시기도전에 며칠만에 日로 줄행랑/3년뒤엔 친일파되어…/‘헤이그’에 허찔린 이토 분통속에 잠 못이루다 이완용 내각 음모세우고/대책 고심하던 황제는 “꿩대신 닭격… 그래도 매국노보다 역적이 낫겠다” 헤이그 특사사건이 터지자 서울 남산아래 있던 통감부에서 야단이 났다.을사오조약을 늑약(勒約)하고 스스로 통감자리에 앉아 청주잔을 기울이던 이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여간첩 배정자(裵貞子)와 양아버지라 하면서 공공연히 잠자리를 같이하던 이토는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 대책을 구상하는데 급급하였다. 고종황제에게 또다시 급소를 찔린 것이니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고종은 본시 을사오조약을 무효로 봤기 때문에 외교권은 아직 황제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을사오조약을 강제체결한 이토로서는 헤이그사건 하나로 자신의 모든 공이 수포로 돌아가는 판이었다.명치유신의 원로로서 후배에게 무안할 뿐 아니라 일왕 명치에게는 더이상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사건을 역습의 호기로 이용하기로 했다.이토는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몰아낼 음모를 꾸민 것이다.일단계 조치가 박제순(朴齊純) 내각을 해산하고 말 잘듣는,이완용(李完用)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하는 일이었다.박제순보다 이완용이 훨씬 더 적극적인 매국노였기 때문에 그를 시켜 고종의 양위를 강박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음모였다. 그러나 고종 황제 역시 호락호락 넘어갈 분이 아니었다.이토의 음모를 예상하고 이것을 미연에 막을 인물이 누구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금능위 박영효의 이름이 떠올랐다.박영효(朴泳孝)는 철종의 부마(사위)였으나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심취,1884년 갑신정변,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했던 친일 개화당의 거두였다. 그는 갑신정변후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한 뒤 12년동안 돌아오지 못한 유랑객이었다.그러나 1907년 5월 어느날 박영효의 부하 신철희(申哲熙)가 정환덕에게 접근,복권운동을 벌였다.요즈음 같으면 각종 정치범이 미국으로 도주하지만 그때는일본으로 도주하여 기회를 노렸다.그런 인물이 일본에는 우굴우굴했다.박영효 역시 그런 기회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신철희는 문경사람이다.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때 아문주사(衙門主事)로 있다가 박영효의 덕분에 문경군수로 임명받았던 사람이다.그가 일본에 갔다가 돌아와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이제 우리 한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으나 각부 대신들은 작록만 탐내고 자리를 지키는데만 연연합니다.이럴 때 일본에 망명해있는 금능위(錦陵尉)박영효와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바라건대 대감께서 황상께 아뢰 그를 소환해 귀국토록 하시고 내각을 다시 조직해 국가증흥을 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고 했다.이에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황상께 아뢰니 “금능위에게 빨리 전보를 쳐 귀국토록 하라”는 분부가 계셨다 오죽했으면 고종황제가 박영효같은 인물에게 매달리게 되었을까.재위 44년만에 아무도 믿을 놈이 없게 됐기 때문이다.충신은 죽고 측근에 친일 매국노만 득실거리니 박영효는 꿩 대신 닭격이었다. 황상께서 직접 전화를 거시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듯이 났는데 박영효에게서 온 전화였다.부르심을 받은 박영효는 급히 행장을 정돈한 뒤 윤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부두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그를 환영했는데 이튿날 아침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서울역 대합실에는 높은 벼슬아치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일제히 안부를 물은 뒤 박영효를 앞뒤에서 가려주듯 동행하여 회퇴루(回退樓)에 들어갔다.이때가 밤12시였다.날이 밝기를 기다려 조반을 든 뒤 곧바로 대궐에 나아가 승후방(承候房)에서 대령하였다 박영효는 과거에 두차례나 역모를 꾸민 인물이다.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해 갑신오역(甲申五逆)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망명하였고 10년 뒤 돌아와서 다시 갑오경장(1894년)에 가담,역모에 몰려 두번째로 일본에 망명했다.그후 12년만인 1907년에 귀국하였으니 감개무량하였을 것이다.부산에 도착하자 그는 땅에 엎드려 고종황제에게 예를 올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고종으로서는 비록 박영효가 과거에 역적이라 하더라도 이완용같은 매국노와 다르다는 사실을 믿고 그를 궁내부 대신으로 맞아들였으니 황실을 보호하는데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따라서 고종황제와 박영효는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상감부자분께서 아침 수라진지를 드시고 난 뒤 박영효를 부르니 오전 11시경이었다.문안인사가 끝난 뒤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 해를 해외에서 풍상을 겪었으니 고생이 많았을 터인데 어떻게 감내 하였소”라고 물으셨다.이에 대답하여 아뢰기를 “성상(聖上)의 은총이 융성하시어 이와같이 다시 해를 우러러보게 되오니 참으로 황송하여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릅니다”고 하였다. 이에 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근년이래로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데 우선 경이 내각을 조직해 정치가 잘되고 백성이 화평하게 되면 나라의 위세가 만회될 것이니 이것이 일본의 ‘유신정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하시었다.박영효가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황상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마음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황상께서는 특별히 비취옥술잔(翡翠玉圈) 남색전포(藍色戰袍) 도홍띠(桃紅帶) 오사모(烏紗帽) 분홍조복(粉紅朝服)등을 각각 한벌씩 하사해 입게 하시므로 그 경황이 찬란하였다 역적 박영효가 하루아침에 구국의 재상으로 돌변한 것도 그렇거니와 장안 사람들이 그가 대궐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기쁨으로 지화자를 부른 것도 괴이한 일이었다. 박영효가 마침내 황제에게 사은숙배하고 물러 나와 장안 대로상을 걸어가는데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갈채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모두들 말하기를 “오늘에서야 한관(漢官=옛 관료)의 위의(威儀)가 되살아났다”고 격찬하였다.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산두박첨지(山頭朴僉知)’라는 희극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늦어도 한참 늦었다.그런데도 1907년 6월30일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박영효 환영대회가 열렸다.장소는 북서(北署) 농상소(農桑所)였는데 왕년의 개화당 동지들이 부부동반하여 모여들었다.환영회장 유성준,위원 정운복이 축사를 낭독하고 연회에 들어가려 할때 돌연 총성이 울렸다. 알고 보니 정재홍(鄭在洪)이라는 분이 권총자살을 시도한 것인데,원래 이토가 모임에 나타나면 그 권총으로 사살하려 했던 것이다.박영효가 이날 환영회에 병을 핑계하고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토도 나타날 리가 없었다.정재홍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갈때 혼미한 가운데 유언하기를 “나는 평생 품었던 우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습니다.그러나 대감(박영효)은 더욱 분발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국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그는 또 유서를 남기고 노래를 지었다.“살아서 욕되니 죽어서 영화를 보자”(生辱死榮)는 제목의 노래였다.그러나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를 막지 못하고 궁내부 대신이 된지 며칠만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고 3년 뒤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한국근대사에는 이렇게 지조없는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지금도 그 후배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며칠을 지나지 않아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 하면서 박영효는 제주도 유람길에 올랐으나 실은 일본으로 망명하는 것이었다.그러니 개각(改閣) 따위의 얘기는 풀이 우거진 울타리가에 버려두고 도망을 갈 것이다.옛말에 “운이 가면 영웅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運去英雄不自由)는 말이 있으니 개탄한들 무얼 하겠는가.
  • 민주열사 열전:8/金永哲 5·18시민군기획실장(정직한역사되찾기)

    ◎‘광주 고통’안고 18년 투병끝 숨져/‘투사회보’ 제작… 계엄군 잔학상 시민에 알려/좌수족 마비·정신질환 앓다 지난 8월 영면 5·18 광주 민중항쟁도 18년이 지난 올 8월19일 광주시 전남도청 5월 추모탑 앞에서 ‘5월 시민군’ 金永哲 열사의 민주시민장이 치러졌다. 영결식에서 시인 文炳蘭은 영면한 고인을 다음과 같은 조시로 추모했다. …여기 한 사나이는 무너진 도시 캄캄한 절망을 안고 18년을 앓으며 살았다 18년을 죽으며 모질게 살았다. …꽃도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둠이 흐르는 정신병동 쇠창살에 18년을 죽어온 당신의 신음소리는 18년을 앓아온 광주의 고통이었다.… 5·18 당시 시민학생 투쟁위에서 기획실장을 맡았던 金永哲은 계엄군 진압대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다.질환 초기 몇몇 순간을 제외하곤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대부분을 가족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를 분간하지 못하는 정신병자로 지내야 했다. 5·18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많은 무고한 인명을 비롯해 숱한사람들의 육신과 정신에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가했다.이들은 32세의 金永哲을 18년간의 정신병동 폐인으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金永哲은 광주항쟁의 시민군 기획실장 이전에 최하층 빈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쓴 빈민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먼저 빛난다.의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작고한 후 어머니가 고아원 보모를 하게 되어 목포의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성장했다.지역 명문인 광주 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5급 공무원이 됐다.그러나 면사무소와 농협의 비리에 통탄하고 공무원 생활을 그만뒀다. 군복무를 마친 金永哲은 신문배달 과일행상 목장잡부 우산팔이 등을 하면서 소외받는 사람들과 평생을 같이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결혼한 지 1년도 못된 77년 부터 광주의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와 주민들과 직접 부딪혔다.시가 피난민 부랑민들에게 지어준 후 판자촌이나 다름없게 황폐해진 이곳에 청년회를 재조직하고 마을청소와 어린이 주말학교를 이끌었으며 신용 협동조합을 정립하고 아파트의 개조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빈민들 삶 개선위해 혼신 78년 7월 이곳 빈곤 청소년들을 상대로 尹祥源과 朴寬賢 등 전남대생들이 강학으로 나선 ‘들불’야학이 시작되고 金永哲은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 이 야학의 교장이 됐다. 80년 5·18이 터지자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한 金永哲은 19일 저녁부터 尹祥源 등 들불야학 팀과 논의하여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 소식을 알리는 ‘투사회보’제작에 나선다.투사회보는 광주시민들이 한데 뭉치는 데 큰 힘을 발휘했으며 고아로서 金永哲과 의형제를 맺고 같이 살던 박용준과 광천동 야학생들이 제작과 배포에 중요한 역을 맡았다.20일 金永哲은 금남로 시위 도중 계엄군이 던진 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이 부상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좌수족 불구로 고생했다. 金永哲은 22일 자신이 신용조합 참사로 있던 YWCA의 여성 회원들과 함께 포목점에서 검정 천을 사와 수천개의 검정 리본을 만들어 시민 학생들이 가슴에 달도록 했다.그는 계엄군이 철수한 후 열린 23일의 1차 시민궐기대회에서 투쟁 경과보고를 했다.계엄군에게 무기반납을 주장해오던 기존 수습위가 물러나고 25일 金宗培·尹祥源 등이 주도하는 새 시민학생 투쟁위가 도청에 들어서자 金永哲은 조직 업무를 총괄하여 차량과 유류 통제,도청출입 통제,무기 및 보급품을 관장하는 기획실장 일을 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해온 27일 새벽 金永哲은 尹祥源 등과 도청을 사수하다 尹祥源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붙잡히면 죽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것을 직감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계엄군에 체포됐다. ○간첩으로 몰려 자살 시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계엄수사대가 모진 고문을 가하며 자신을 간첩으로 몰고 가자 다시 자살을 결심한다.그는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있는 힘을 다해 이마를 여러 차례 찍었다.이를 발견한 헌병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지까지 흥건히 젖은 金永哲을 군화발로 밟고 밖으로 끌어냈다.그들은 그를 긴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내리쳤다.그리고 나서 두 손과 두 발을 포승으로 묶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실어 갔다.그러나 수술한 이마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왔다.심한 환각과 환청 증세에 시달리며 80년 10월 1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이미 金永哲은 왼쪽 다리와 팔을 쓰지 못할 뿐 아니라 머리의 통증을 참지 못해 엉엉 울면서 사방에 머리를 찧고 이상한 소리만 되풀이하는 정신질환자였다.석방된 뒤 몇 차례의 수술에도 불구,정신이상 증세가 더욱 심해져 84년부터 나주 정신병원에서 투병생활을 계속해왔다.그러나 끝내 온전한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지난 8월16일 세상을 떴다. ◎金永哲 열사 연보 1948년 전남 순천 출생 55년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64년 광주서중 졸업,광주일고 입학 68년 5급 지방 공무원 76년 결혼 77년 광주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발운동 78년 광천동 들불야학 80년 5·18 ‘투사회보’제작 참여,시민학생 투쟁위 기획실장 80년 10월 ‘내란중요임무 종사’혐의로 1심 12년 선고 81년 12월 특사 석방 84년 나주정신병원 입원 98년 8월16일 영면 ◎부인 金順子 여사/병수발 18년… 세자녀 키우느라 안해본 일 없어/“야학교장 등 즐겁고 보람된 생활 못내 그리워” 金永哲 열사가 계엄군에 끌려갈 때 당시 26세였던 부인 金順子 여사는 임신 8개월 만삭의 몸이었다.아버지가 상무대에 갇혀 있을 때 태어난 막내딸은 지금 고3이고 그 위의 1남1녀는 나란히 대학2년생이다.18년간 정신이상의 남편을 병수발하면서 없는 살림에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金여사는 안해본 일이 없다. 우유배달원,구멍가게,옥수수 행상,과일·채소장사,공장 일,파출부,사글세 음식점 등. “병원에 10여년 입원했었지만 최근에야 정부로부터 기초적인 의료지원을 받았다.부상자에 대한 의료지원 카드도 뒤늦게 발급됐다”고 부인은 말한다.이번 민주시민장도 조의금으로 치러야 했다고 한다. 자녀들과 앞으로 살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면서도 金여사는 80년 당시 남편이 ‘광천동 삼화신협 이사장,새마을 지도자,반장,조기 축구회 회장,야학 교장’ 등으로 활동하던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못내 그립다고 말한다. ◎吳壽成 전남대 교수가 분석한 정신손상 유형/기질적 장애­총상·몽둥이 등에 머리다쳐 사고기능 단계적으로 와해/정신분열증­계엄군에 무차별 폭행 당해.감정 통제·현실적 판단 마비/외상후 스트레스­공수대원 고문 후유증으로 군인 공포·모든 일에 무관심 5·18 항쟁의 진압이 잔혹했던 만큼 金永哲 열사 같은 참혹한 정신 손상자들이 많다.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인 吳壽成 교수(심리학)에 따르면 5·18로 인한 정신장애는 3가지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기질(器質)적 정신장애로 항쟁 와중에 직접적으로 두뇌에 총상을 입었거나 개머리판이나 몽둥이에 머리를 다쳐 뇌의 손상을 갖게 된 경우로 金永哲 열사가 대표적 사례다.그의 병증은 외상(外傷)성 성격장애,정신분열증,간질 및 뇌수종에 의한 기질적 정신장애,기질적 정신병으로 심화됐다.한 마디로 인간이 단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사고기능이 와해되어 있고 사고 자체가 지리멸렬된 상태다. 두번째는 정신분열증.5·18 당시 아침운동을 하려고 운동복 차림으로 집밖에 나갔다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붙들려 눈을 가리운 채 지하실로 끌려간 시민이 있었다.깜깜한 속에서 여러날 전신을 구타당한 뒤 승용차에 태워져 외곽도로에 버려졌다.그후 그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고 집에 있으면 무섭다고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날 후에 초라한 몰골로 돌아오곤 했다.집안 사람들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리며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말에 조리가 없으며 연상 장애,비현실적 판단이 두드러진다. 세번째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시위대에 참가했던 한 시민은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깨어나 보니 여러 명이 같이 손을 묶인 상태로 고개를 땅에 처박힌 채 군화발에 차이고 곤봉으로 맞고 있었다.같이 있던 사람이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조사과정에서 무수히 맞아서 이빨이 나가고 코뼈가 부러졌다.20여일 만에 석방됐다. 이후 그는 후유증으로 7개월 동안 몸져 누웠고 10여년 동안 직장 한번 제대로 갖지 못했다.당시의 일이 자꾸 기억나고 같이 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군용트럭의 군인들만 보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직도 두려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못한다.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으며 모든 일에 관심을 잃게 되었다.
  • 헤이그 특사 파견(秘錄 南柯夢:24)

    ◎“이준 열사 피뿌리며 救國자결” 소문/4,000년 역사­500년 조선 당당히 알리지만 열강들은 쳐다보기만/약소국 울분 누르며 ‘오냐 이한목숨 죽어…’/일제,施政改善 핑계로 덕수궁 관리들 모두 쫓아내고/고종은 ‘행여 國運 도움될까’ 누각동 移居 준비하는데… 고종은 을사오조약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국왕이 날인하지도 수결(手決)도 하지 않은 조약을 어찌 유효라고 할 수 있는가.더욱이 저들이 국새를 훔쳐 찍었으니 절대 국가간 조약이라 할 수 없었다.그것은 협박이요 강압에 의한 국권 탈취였다.그래서 고종의 분노는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재위 43년 동안에 외우내환의 대다수가 일제침략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황상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시기를 “짐이 보위에 오른지 40여년이지만 본시 박덕한 사람이라서 왕위에 올랐으나 한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뒤 10년만에 병자왜란(1876년 강화조약)이 있었고 그 뒤 6년만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역대 성조(聖朝)에 없었던 일이다. 그후 2년만에 일본 유학생들이 갑신정변(1844)을 일으켜 몰래 창덕궁에 들어와 충신과 양민을 살해해 한사람도 남기지 않았다.그 뿐인가.1892년 임진년과 이듬해 계사(癸巳)년에는 동학당 무리들이 또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조선 전국이 공포에 쌓여 바람소리 학울음 소리에도 놀라 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뒤 갑오년(1894)에는 갑신년에 망명했던 개화당들이 외국인을 데리고 와서 귀국한 뒤 무수한 변란을 일으켰다.이어 을미년(1895)에는 왜적이 중궁(中宮=명성황후)을 시해하였다.병신년(1896)에는 의병이 일어나 민심을 요동시켰으니 무슨 이런 세월이 있었겠는가.그 뒤 무술년(1898)에 독립협회가 난리를 일으키고 갑진(1904)년에는 러일전쟁,1905년 을사5조약이 성립되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7개월만인 1906년 6월 어느날 한 통의 외교문서가 고종에게 전달되었다.이것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가 보내온 초청장이었다.화란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데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이 얼마나반가운 소식인가. 니콜라이황제가 고종황제의 뜻을 알아서 보낸 것이었을까.고종은 즉시 극비리에 외교사절을 임명하였다.이상설(李相卨)을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조직해 위임장을 써 이준에게 전달했다. 어느날 밤 고종황제는 이준에게 직접 돈2만원을 하사하시었다.물론 덕수궁 함녕전 동반침(東半寢)에서 있었던 일이다.이준은 사은숙배(謝恩肅拜)한뒤 물러나 곧바로 인천항으로 향하였다.인천에서 화륜선을 탄 이준은 주야로 달려서 목적지인 해아(海牙=헤이그)에 도착하였다.해아에서는 각국 대표들이 엄숙하게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준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의관과 문화는 우리와 달랐고 그 위의(威儀)는 산과 바다와 같았으니 마치 신왕(神王) 신제(神帝)가 노는 것 같아서 이것이 하늘인가 땅인가 했다.모두가 후한 봉급을 받고 고관복을 입었으며 가슴에는 은빛 훈장을 달고 어깨와 팔뚝에는 금줄로 누볐다.또 얼굴에는 금테안경을 쓰고 한결같이 남만격설(야만인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을 하니마치 까마귀떼가 모인 것과 같았다. 이런 곳에 멀리 조선의 일개 백면서생이 참가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도 아니요,받아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이준의 사람됨이 8척이나 되는 키에 위엄이 당당하여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그래서 각국 대표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중략).이때 이준이 4천년 역사와 조선왕조 5백년의 내력을 한가지도 빼놓지 않고 자세히 진술하였다.그러나 가부간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 모사는 사람이 하고 성사는 하늘에 달려 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는 것인가. 본래 서양사람들은 성질이 느리고 의심해 결정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다. 평생 하는 짓거리가 바위아래 노불(老佛)같고 구멍속의 긴 뱀과도 같으니 무슨 의리로 남의 나라를 구해 주겠는가.이에 이준은 한번 죽어 국가에 보답하는 것(一死報國)이 낫다고 생각,칼을 빼 스스로 목을 찔러 각국의 대표들의 의관에 뜨거운 피를 뿌리고 죽었다.이날 해가 빛을 잃고 푸른 하늘이 캄캄했다. 서양사람들은 비록 의리를 알지 못하였으나 입에서 입으로 이 소식이 전해져 이준의 충렬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위대하고 장하도다.이상은 내가 이준과 가까운 사람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이준열사가 헤이그에서 울분끝에 순국한 것은 1907년 7월14일의 일이었다.비록 일제의 방해와 열강의 우유부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준열사의 죽음으로 온 국민이 항일독립의지을 굳게 다졌다. 한편 일제는 남산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앉아 시정개선(施政改善)이란 명분을 걸고 덕수궁의 고종에게 수발을 들었던 모든 궁중 관리들을 밖으로 쫓아냈다.정환덕도 쫓겨나 고종과는 서신으로 통신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 일본군사령부가 명령하기를 덕수궁안에 기거하는 모든 시종들은 궁밖으로 나가라고 하여 나도 대궐을 물러나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서상궁을 통해 극비리에 봉서(封書)를 보내셨으니 나는 3일이 멀다고 봉서를 받아 보았다. 폐하께서 정환덕에게 분부하시기를 “지난 10년동안 궁 안의 대소사를 너와 더불어 상의해왔는데 조물주가 시기하여 너를 만나 보지 못하게 하는 구나.저들이 차마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니 우린들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서상궁으로 하여금 통신하게 할 것이니 경은 시골로 내려가지 말고 서울에서 대기토록 하라”고 하시었다. 정환덕이 그래서 서대문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청국인 왕대유(王大有)가 찾아와서 고종의 이거(移居)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닌가. 청국인 왕대유는 본시 풍수지리에 밝기로 유명하였다.하루는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고종황제께서 지금 어거(御居)하고 계신 덕수궁 함녕전 터를 보면 북악산이 조금 멀어 정기가 미치지 못하고 남산은 너무 가까이 압박하고 있으니 이런 형상으로 인하여 외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정년(丁年 1907)에 수(數)가 다하고 경년(庚年 1910)에 국토를 잃게 되고 무년(戊年 1918)에 식록(食祿)이 없어질 것입니다.그러니 지금 당장 경복궁으로 폐하의 어거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그렇지 못하면 화변(禍變)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술년 7월 이화(李花)가 떨어진다느니 방부과인구혹다화(方夫戈人口或多禾=國移라는 뜻)라는 말이 떠돌고 있어 불안한 판이라 주상에게 이 말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황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국고가 탕진되어 창졸간에 경복궁을 수리해 이거할 수가 없다.그러니 차차 형편을 보고 시행하기로 하자”고 하시었다. 이 말에 이거를 결심하였던가.하루는 고종이 정환덕에게 은거할 집을 구하라는 명을 내렸다.상감께서 봉서하시었는데 꼼꼼하게 풀칠한 봉투를 뜯어보니 내용은 이러했다.“지금 시국이 막다른 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만일 사태가 끝나지 않는다면 나도 잠시 피신할까 생각하고 있다.길성(吉星)이 비추는 곳에 몇 칸의 집을 구입해 준비하여 두라”하시었다.그래서 명을 받들어 팔문생사방(八門生死方)에 따라 누각동(樓角洞) 가장 한적한 곳에 50여칸의 집을 사서 미리 준비했다. 고종이 몰래 집을 지금의 적선동 근처 누상동에 은신처를 구해두었다는 사실은 필자도 금시초문이다.물론 이 50칸 집이 현존하지는 않겠지만 통감부가 자리잡았던 남산이 일제 침략을 의미하였다는 사실,그리고 북한산이 침략을 막아주는 큰 기둥이었던 사실을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 9월16일자 ‘南柯夢’23회 글 앞부분에 “1905년 1월17일 을사오조약”이라 한 것은 “1905년 11월17일 을사오조약”의 오기(誤記)로 바로 잡습니다.
  • 아난 유엔 총장 프로필/30여년 유엔서 일한 국제행정통

    ◎협상력 뛰어나 ‘평화 해결사’ 별명 제4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코피 아난 국제연합(UN) 사무총장(60)은 30여년간 유엔에서 잔뼈가 굵은 국제행정 전문가. 38년 아프리카 가나의 명문가인 판트족 출신으로 미국 매컬리스터대학에서 경제학사를 취득했고 62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학대학원에서 역시 경제학을 전공했다. 72년에는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은 경제통이기도 하다. 62년 세계보건기구(WHO)의 행정 및 예산담당 직원으로 유엔과 인연을 맺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행정부국장,유엔 예산국장,인사관리담당 사무총장보,계획·예산 및 재무담당사무총장보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93∼96년에는 유엔평화유지군(PKO) 담당 사무차장을 맡았고 유고 문제 유엔특사 등을 역임한 뒤 지난 96년 12월부터 사무총장으로 유엔 살림을 떠맡았다. 그가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배경은 90년대 들어 냉전이 끝난 뒤 세계 각지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국지적 내전,인종갈등 등 각종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크게 공헌해왔다는 점이다. 91년 걸프전 기간 이라크에 억류됐던 서방인질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평화사도’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지난해 5월에는 유엔의 대북한 식량지원에 대한 일본의 참여를 촉구하는 등 남북한 문제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올 2월에도 극한 대결로 치닫던 미국의 이라크 핵사찰에 개입,이라크를 직접 방문해 유엔·이라크의 협정을 이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 美·北 고위급회담 일괄 타결/주내 회담 재개키로

    ◎핵동결협정 준수·식량지원 재개 합의 【워싱턴=崔哲昊 특파원】 미국과 북한은 5일(현지시간) 뉴욕에서 제7차 고위급회담을 갖고 핵동결협정 이행과 미사일 문제 등 주요 현안을 일괄 타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측 찰스 카트먼 한반도 평화회담특사와 북한측 金桂寬 북한 외교부 부부장 등 대표들은 상오 9시부터 열린 회담에서 지난 94년 체결된 제네바 핵동결협정과 미·북 미사일협상,한반도 4자회담,대북 경제제재 완화,식량지원 등 사항을 일괄타결키로 의견을 모았다고 관계자들이 전했다.양측은 본국정부와 협의를 가진뒤 다음주쯤 다시 회담을 열어 세부합의를 매듭지을 방침이다. 따라서 최근 영변 부근 새로운 핵시설 건설 의혹과 북한 미사일 시험발사에 따른 양국간 고조된 긴장이 풀릴 전망이다. 소식통들은 양측이 지난 94년에 체결된 제네바 핵동결협정을 계속 준수하기로 했으며 미·북 미사일협상과 4자회담 재개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 北,미사일 포기대가 美에 10억달러 요구

    북한은 최근 미사일 개발 포기 대가로 미국측에 10억달러를 요구한 것으로 3일 알려졌다. 북한은 찰스 카트먼 미국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와 金桂寬 북한외교부 부부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는 뉴욕 고위급회담에서 미사일 포기 대가로 10억달러를 요구했으며,미국은 북한측의 이같은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康仁德 통일장관은 이와 관련,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 참석,‘북한의 미사일 개발현황 및 시험발사 의도분석’이란 보고를 통해 “북한은 미사일 개발 포기대가로 최근 미국에 상응하는 보상을 요구했다”며 “97년도 북한의 대외 수출은 9억달러”라고 밝혔다.
  • 민족의 살길과 지도자의 결단/金承均(서울광장)

    나는 8월 21일 반나절 거리밖에 되지않는 평양을 가기 위해 반 백년 민족분단의 한을 품은 채 전 통일원 부총리 韓完相 박사와 북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얼마나 가보고 싶던 금단의 땅 북녘에의 나들이인가?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설레임도 기쁨도 없었다. 담담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을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났다. 분단의 아픔은 왜 북한에 가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식량이 부족해 굶주림과의 전쟁을 치르는 북쪽에 가서 배고픈 어린이를 한 눈으로 쳐다보고 수려한 자연을 감상하는 한가한 구경꾼으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귀여운 남북어린이가 한데 어울려 어른들의 한을 풀고 어린이들 대에서는 상호신뢰하고 화해하는 아름다운 모습의 시발점을 만들고자 남북어린이종합축전(미술·음악·체육)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소나마 풀기 위해 이산가족 생사확인 민간기구 창구를 개설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북경에서 우리를 만나러 나온 사람은 지난번 북경 비료회담의 북측 수석대표였던 전금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일행이었다. 그는 얼굴에 풍을 맞은채 마침 비행기가 없어서 아픈 몸으로 23시간의 긴 기차여행 끝에 가까스로 북경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韓完相 전 부총리와 전금철 부위원장은 여러가지 현안에 대해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은 ▲우리 민족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 우수하다 ▲민족간에는 가슴에 칼을 숨기고 손을 내밀어서는 안된다 ▲민족의 이익은 계급의 이익에 우선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많은 분야에서는 견해가 달랐다. 하지만 남북의 책임있는 인사들이 서로 터 놓고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중요한 수확이었다. 전금철 부위원장은 비료회담이 국민정부 대북정책의 시금석이었는데 무산되어 무척 아쉽다면서도 회담 결렬의 원인이 된 상호주의가 통일부 장관의 결정이지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기를 은근히 바라며 대통령에게 기대를 접지 않고 있었다. 방북연기 요청의 이유로는 지금 국가적 사업이 중첩되어 있고,귀빈을 모시면 직접 모셔야 하는데 손이 모자라고,우리가 제안한 것들은 아직 연구 중이라 빈 손으로 보낼 우려가 있으니 8월22일 방북예정을 10월말 이후로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북의 지체 높은 사람이 그런 악조건속에 북경까지 와서 예의를 갖추어 간곡히 동의를 구해왔으므로 서운하지만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예의를 숭상하여 경조사를 중시한다. 지난번 김일성 주석 사망시의 정부 태도가 적절치 못했다는 논의가 있는 터에 김정일 주석 취임 때는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늘 있는 죽음도 아니고 늘 있는 취임도 아니다. 북쪽이 주석 취임식에 특사를 요청할 수도 있고 남쪽이 특사파견을 제안할 수도 있지 않는가? 경조사를 통해 민족의 한을 푸는 계기로 삼는다면 먼 미래 역사가는 어떻게 기록할까? 남이고 북이고 간에 말한마디에 천냥 빛을 갚는다 하지 않는가?또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다지 않는가? 남북지도자의 숙고가 절실할 때다.
  • 民和協 3일 출범… 산파역 韓光玉 위원장

    ◎“통일 논의 국민적 합의 도출에 온 힘”/170여개 통일운동단체 묶어 남북교류 뒷받침/보수·진보노선 총망라… 명실상부한 민간 구심체 “우선 통일논의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데 진력하겠습니다” 3일 공식 출범하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韓光玉 상임위원장의 각오다. 韓위원장은 민화협의 5인 상임위원장단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새정부 내에서 그의 정치적 비중과 태동 단계에서부터 산파역을 맡아온 이력때문에 민화협의 ‘사실상 대표’로 꼽힌다. 민화협은 민간 통일단체로선 해방 이후 최대 규모다. 정부에 등록된 기존의 165개 통일단체와 미등록 500여 민간기구 중 현재까지 200여개 단체를 하나로 엮은 통일운동의 민간 구심체인 셈이다. 3일 결성식을 갖는 이 기구에는 이념적으로 폭넓은 스펙트럼의 단체들이 참여했다. 자유총연맹,이북5도민회 등 보수단체에서부터 진보적 노선의 민주노총,민변 등까지 망라하고 있다. 韓위원장은 과격 운동권 단체로 알려진 한총련에도 문호를 열어둘 뜻을 내비치고 있다. 물론 한총련이 변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다. 특히 국민회의 등 원내의석을 가진 3개 정당도 모두 참여시킨다는 입장이다. 민간차원의 남북교류를 뒷받침하는 명실상부한 범국민적 상설협의체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다. 韓위원장은 “아직 참여를 유보중인 한나라당을 설득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질적인 단체들을 하나로 아우르다보니 ‘불협화음’이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韓위원장은 타협과 조정에 능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대선전에 金大中 후보와 金鍾泌 후보간의 이른바 DJP 후보단일화 성사의 막후 주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선후에도 1기 노사정위원장으로서 노사정 대타협을 일궈낸바 있다. 민화협을 이끌며 남북 민간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그의 ‘솜씨’가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특히 金大中 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한 현직 국민회의 부총재다. 탁월한 ‘협상력’으로 남북 문제를 푸는 데 모종의 막후 역할이 예상된다. 실세급이면서 원외라는 독특한 정치적 위상 때문인지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앞으로 대북특사역을 맡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 對北 경수로 재원 분담안/KEDO,서면 결의키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대북(對北) 경수로 분담금과 관련,지난달 28일 뉴욕 이사회에서 잠정합의한 재원분담안을 서면 결의로 대체키로 했다. 경수로사업지원기획단은 27일 미국의 찰스 카트먼 한반도담당 특사가 북·미 고위급회담을 이유로 29일 서울에서 열릴 KEDO 집행이사회에 불참한다고 통보해옴에 따라 이처럼 결정했다고 밝혔다. 지난 7월 28∼29일 열렸던 KEDO 집행이사회는 경수로 총공사비 46억2,000만달러 가운데 한국이 전체의 70%,일본은 정액기준 10억달러를 부담하기로 하고 나머지 재원조달 문제는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맡기로 잠정 합의했었다.
  • “편파 司正 절대 않겠다”/金 총리,국회본회의 답변

    ◎北 금강산 관광수입 年 1억弗/金榮煥 의원 “청구 돈 200억 舊여권 유입 의혹” 국회는 26일 하오 본회의를 열고 金鍾泌 총리와 康仁德 통일·洪淳瑛 외교통상·朴相千법무장관 등 관계 국무위원들을 출석시킨 가운데 여야의원 7명이 차례로 정치·통일·외교·안보분야에 대한 대정부 질문을 했다. 金총리는 답변에서 “정부 여당이 야당파괴공작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고 “일부 야당의원들의 당적 변경은 여러 인과관계와 상대적인 이유가 있으며,개인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金총리는 이어 “편파사정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朴법무장관도 “정치인에 대한 수사는 표적수사 시비가 일지 않도록 여야를 막론하고 엄정히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金총리는 내각제 개헌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경제가 나아지고 나라 사정이 좋아지면 공개적으로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내각제 채택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답변했다. 金총리는 북한 金正日 주석의 취임식 때 축하사절단을 파견할 것이냐고 묻자 “정부는 현재 아무런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康통일장관은 “金大中 대통령이 제안한 남북 특사교환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측의 반응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국민회의 金榮煥 의원은 질의를 통해 “12조원에 이르는 부실채권을 만들고 IMF 초래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던 기아그룹의 비밀장부 속에서 900억원의 비자금이 조성·사용되었다”면서 “92년 총선때 金모의원이 13억원,96년 총선 당시 李모의원이 13억원,또 다른 李모의원 7억원,金모의원이 3억원을 각각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청구그룹의 자금 200억원이 구여권에 뿌려졌다고 폭로했다. 국민회의 柳在乾 의원은 “金大中 대통령이 제의한 남북 상설대화기구 창설을 위한 정부의 준비상황과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무엇이냐”고 묻고 “판문점에 프랑스의 퐁피두센터같은 한반도 공동학술조사 연구센터를 건립할 것”을 제안했다. 한나라당 李源馥 의원은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의원내각제 개헌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할 용의는 없느냐”고 묻고 “현재의 지방자치제도를 개혁할 필요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 美 “北 지하 核시설 不容”/카트만 한반도 특사 경고

    【워싱턴 AFP 연합】 미국은 북한이 비밀 지하 핵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경고했다고 워싱턴 포스트지가 26일 보도했다. 포스트는 익명의 미 관리들을 인용, 25일 뉴욕에서 3일 만에 중단된 미·북 고위급회담에서 찰스 카트만 미한반도특사가 북한측에 이같은 경고를 전달했다고 전했다. 미 대표단은 이번 회담에서 북한이 영변에 지하 핵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미국으로선 수용할 수 없으며,언제라도(핵개발 계획을)재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들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 특사로 풀린 前 한총련 간부 3명/의경 묘소 찾아 뒤늦은 사죄

    ◎96년 연세대 사태 진압중 돌맞아 절명/“일생의 가장 큰짐” 21일 상오 10시30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지난 96년 8월20일 한총련의 연세대 점거농성 진압과정에서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숨진 金鍾熙 의경의 묘소 앞에서는 울부짖는 金의경의 어머니 朴귀임씨(46)와 아버지 金秀逸씨(49) 앞에서 젊은이 3명이 고개를 숙인채 사죄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金의경을 숨지게한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해 오다 지난 15일 8·15 특사로 풀려 나온 李承宰씨(29·당시 한총련 정책위원)와 李允熙씨(24·당시 충청총련 의장),朴炳彦씨(25·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이들은 20일 金의경의 기일을 맞아 경기도 수원에 있는 金의경의 집을 찾아가 아버지 金씨를 만나 사죄한데 이어 이날 金의경 묘소에 참배를 하러 온 것. 전날 찾아온 이들에게 술을 사주면서 “그래도 교도소에서 풀려나자마자 찾아온 것이 고맙다”고 했다는 金씨는 숨진 외아들 묘소에 찾아와 엎드린 이들을 보고 모든게 허망한 듯 먼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 朴씨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 학생들을 애써 외면했다. “벌써 용서가 되겠어요,생떼같은 외아들을 앞세운지 이제 겨우 2년밖에 안됐는데…” 李承宰씨는 “앞으로 내 일생의 가장 큰 짐이 될 것 같다”고 털어놨다.
  • 체제동요 우려 대화 기피/北,金 대통령 對北제의 거부 안팎

    ◎김 대통령 비방은 자제 ‘U턴’여지 남겨 북한이 金大中 대통령의 8·15 대북 제의에 변칙적인 첫 반응을 보였다.20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의 ‘공개질문장’이 그것이다.조평통은 5개항의 질문으로 우리의 통일안보 정책을 맹비난했다. 과거에도 대화 제의시 북측의 반응은 럭비공처럼 종잡기 어려웠다.더욱이 이번의 공개 질문장같은 형식은 흔치 않은 일로 북한당국의 대남 메시지에 여러가지 복선이 깔려 있음을 뜻한다. 우선 “우리측 제의를 직접 거부할 명분이 없는 북측의 곤혹스러움을 반영한다”는(통일부 李浩 정보분석실장) 분석이다.‘대화상설기구 설치’,‘특사파견’등 제의 자체에 대해선 통일지향을 자처하는 북측으로서도 비난키 어렵다는 전제하에서다. 나아가 당국간 대화에 나설 수 없는 북측의 현 상황을 반영한다는 해석도 있다.최고인민회의와 金正日 주석 옹립 등 큰 정치행사를 앞두고 있는데다,무엇보다 당국간 대화시 파생할 체제동요를 우려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햇볕론’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이를 말해준다.공개질문장에서 북측은 “햇볕론이란 교류협력을 통해 우리를 개혁·개방으로 유도하려는 새로운 대결론”이라며 개방에 대한 거부정서를 드러냈다. 다만 북측은 金대통령에 대한 거명 비방은 자제했다.한 당국자는 이를 ‘U턴’을 위한 최소한의 포석으로 관측했다.金正日의 주석승계 이후 그들의 입장에서의 대화 ‘수요’에 대비하려는 자세라는 것이다.요컨대 북한은 대화 부재의 책임을 떠넘기면서 남한당국의 정책 변화를 ‘유도’하려는 속셈을 드러낸 셈이다.
  • 美­北 고위급회담 개막/北 核동결 이행 등 논의

    【뉴욕 연합】 미국과 북한은 21일 상오(현지시간) 뉴욕에서 고위급 회담을 열고 지난 94년 체결된 북미 핵합의 이행과 한반도 4자회담 재개 및 미사일 회담 등 양자간 현안 논의에 들어갔다. 미국측에서 찰스 카트만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가,북한측에서 金桂寬 외교부 부부장이 각각 수석대표로 참석,오는 25일까지 계속될 이번 회담에서는 제네바 핵합의 이행 외에 미사일 협상 재개와 대북한 경제제재 완화가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 오늘 美·北 고위급회담

    【워싱턴=崔哲昊 특파원】 미국과 북한은 21일 뉴욕에서 고위급회담을 열어 제네바 핵동결협정 이행과 한반도 4자회담 재개 및 미사일회담 등 양자간 현안을 논의한다. 이번 회담은 미국측에서 찰스 카트만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가,북한측에서 金桂寬 외교부 부부장이 각각 수석대표로 참석,오는 25일까지 열린다.
  • “새 통일정책 기조에 수긍” 73%/통일부 1,500명 조사

    ◎특사교환 우선 과제 “이산가족 상봉” 69%/“상설대화기구 북 수용 가능성 없다” 61% 국민 대다수가 金大中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밝힌 통일정책의 기조를 긍정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일부가 경축사 중 대북·통일정책에 대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전국의 20세 이상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다.총론에서 ‘신뢰할 만하다’는 반응이 72.6%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응답(20.6%)을 크게 앞섰다. 통일부가 19일 공개한 결과에 따르면 대통령 특사 교환시 우선 추진 과제로는 ▲이산가족 상봉 실현 69.0% ▲경제협력 활성화 33.6% ▲정상회담 개최 30.9% 순이었다.중복응답을 포함해서다. 남북상설대화기구 창설 제안에 대해서도 바람직하다는 평가는 83.6%나 됐다.다만 북한의 수용 가능성에 대해선 부정적인 전망이 60.9%였다. 정부의 통일정책을 큰 틀에서 지지하면서도 구체적 현안과 맞물리면 여론이 강온으로 크게 엇갈렸다.북한이 잠수정·무장간첩 침투사건에 대해 사과표명이 없는 상황에서도 대북 지원은 예정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반응은 36.5%였다.그러나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견해가 34.3%,북한의 명백한 사과가 있을 때까지 전면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도 27.9%로 나오는 등 편차가 컸다.
  • 러시아 모라토리엄­업종별 파장과 전망

    ◎전자 등 對러 수출 20∼30% 줄듯/선적 연기… 합작공장 설립도 재검토/현금결제로 직접적 타격은 적은편/러 숨은 달러 많아 구매 늘어날수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 수출에 주름이 늘게 됐다. 당장 수출에 미칠 1차 충격보다도 동유럽 국가와 일본 중국 등 주요시장의 환율인상,국내 투자자금 회수 등 연쇄반응으로 이어지는 2차 충격이 우려되고 있다. 지난 상반기 우리나라의 대(對) 러시아 수출은 7억1,800만달러로 전체 676억3,000만달러의 1.06%에 불과하다. 대(對) 아세안 수출액의 10분의 1 규모다. 기계류(1억6,000만달러)와 컬러TV 등 전자제품(1억4,500만달러),농수산물(1억3,500만달러),섬유류(1억2,300만달러)가 주류를 이뤘다. 수입 역시 5억1,300만달러에 그쳤다. 교역규모가 적은 만큼 당장 수출입 차질에 따른 파장은 그리 크지 않다. 더욱이 러시아 수출은 선적을 전후로 대금을 미리 받는 현금결제나 TT(전신환송금)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 당장 돈을 떼일 염려는 적다는 것이 수출업계의 설명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수출에 대해서는 이미 돈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우려할 상황은 아닌 셈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수출이다. 산업자원부 洪元柱 구아협력과장은 “러시아 경제불안과 이에 따른 수출업체들의 기피심리로 지난 상반기 10.8%가 감소한 러시아 수출이 더욱 얼어붙을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러시아 수출실적 1위를 차지한 전자업계는 이번 사태로 20∼30%정도 현지시장이 축소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적어도 30% 정도 수출시장이 감소할 것으로 보고 우즈베키스탄 생산공장 설립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LG전자도 현지의 TV 합작생산에 큰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고 대책을 강구중이다. 시장 침체 뿐아니라 루블화 평가절하에 따른 가격경쟁력 약화도 악재로 떠올랐다. 대(對) 달러 환율 변동상한선이 9.5루블로 50% 오른데다 앞으로 더 상승할 가능성이 높아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분석이다. 수출대금 회수 차질,시장 축소,가격경쟁력 약화 등의 악재 속에서 국내 종합상사들은 러시아 수출 선적을연기하거나 아예 수출선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상반기 1억4,000만달러로 국내업체 가운데 가장 많은 수출을 기록한 (주)대우는 일단 모든 수출품목에 대해 선적을 1개월 연기했다. 현지 주요 바이어들의 자산 등 신용도를 전면 재평가하면서 수출 지속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실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18일 현지 무역관들의 정보를 취합, 분석한 끝에 각 수출업체에 당분간 선적을 미룰 것을 당부했다. 러시아의 1,700여 민간은행들의 연쇄부도 가능성이 높은 만큼 현지 수입상의 신용도를 정밀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비관적 전망과 달리 일각에선 오히려 대 러시아 수출을 늘릴 호기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민간부문에 숨겨진 달러화가 의외로 많기 때문에 이번 루블화 평가절하가 구매력 증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분석이다. (주)대우 관계자는 “현지 지사측의 분석에 따르면 중·상류층의 구매력이 높아져 컬러TV등 가전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전망”이라며 “현금결제 등을 통해 리스크를 철저히 예방한다면 어느 정도 수출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亞洲 경제 또 난기류/印尼도 ‘지불유예’ 가능성/마르크 지키려 엔 매각땐 위안화까지 도미노 우려/日,시장개입 시기 저울질 아시아 지역 경제가 또다시 난기류에 휩싸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금융조치가 다시 아시아 경제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금융구조가 취약하고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이 제한된 인도네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일본 대장성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재무관은 18일 “모라토리엄 선언이 러시아에 가장 많은 채권을 가진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끌어내리고 달러화 강세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투자가들이 ‘엔화를 팔자’쪽으로 돌아설 것”이라며 “엔화를 끌어올리기 위해 시장 개입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 경제학자 첸 후안은 “아시아 금융위기와 양쯔강 대홍수,루블화 평가절하까지 겹쳐 성장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러시아 위기가아시아 통화 및 엔화 약세라는 새 국면을 유발,중국 위안(元)화에 거센 평가절하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일본과 중국은 러시아에 대한 투자액이 적고 교역량도 미미해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찮다. 요사노 가오루(與謝野馨) 일본 통산상은 “무역수지로 보면 1대 4 비율로 수입쪽이 많고 신용공여액도 구미(歐美)보다 훨씬 적어 영향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정부의 한 관리는 “러시아와의 교역량은 비교적 소규모여서 중국이 받는 충격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국 표정/세계 증시 충격 벗고 오름세로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지불유예) 선언과 루블화 평가절하에 대해 미국 유럽 일본 등 관련 각국으로부터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주요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은 18일까지 ‘러시아 악재’의 효과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17일 러시아의 결정은 일회성 사건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유사한 상황을 유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 겸 전망.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또 “국제통화기금(IMF)과 합의한 안정화 계획 등 신뢰회복 조치들을 신속하게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 ○…러시아 정부가 17일 모라토리엄을 발표했지만 시장에서는 대상범위를 놓고 해석이 분분. 추바이스 대통령 국제금융기구담당 특사는 이날 “이같은 조치는 단지 내부부채의 상환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혼란을 야기. 이 주장대로라면 모라토리엄은 외국인 소유의 단기국채(GKO)등 일부에 국한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 ○…미국 신용평가 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17일 러시아 장기 외화표시 채권의 신용등급을 지급불능가능 범주의 가장 낮은 단계인 ‘B-’에서 지급불능 범주인 ‘CCC’로 한단계 낮추었다고 발표. ○…일본 등 세계 주요시장은 러시아 정부의 조치로 인한 충격파를 발빠르게 벗어나는 모습. 일본 닛케이 평균 주가는 18일 단숨에 2%가 상승,1만5,000엔대를 회복했다. 필리핀 페소화는 2.7%가 올랐으며,인도네시아 루피아화도 2.5%가 회복됐다. 이에 앞서 미국 뉴욕 증시는 17일 개장초 급락했다가 급반등,1.8%가 올랐으며 영국이 0.22%,독일이 0.16% 올랐다.
  • 8·15 특사 공안사범들/법 위반땐 즉각 재수감

    법무부는 16일 8·15 특별사면을 통해 가석방 및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공안사범 94명이 출소한 뒤 국가보안법 폐지운동 등 현행법을 위반하면 사면조치를 곧바로 취소,재수감키로 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이적행위에 해당한다는 법원의 판례가 있는 만큼 보호관찰을 통해 공안사범들이 이같은 운동에 참가한 사실이 적발되면 사면을 취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공안사범들은 준법서약서에 서약했고 행형자료 검토와 검사 면담을 거쳐 재범의 위험성에 대한 검증을 했기 때문에 불법행위를 할 가능성은 적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법무부는 15일 상오 10시 사노맹 사건의 朴基平씨(41·필명 박노해)와 白泰雄씨(36·전 서울대 총학생회장),중부지역당 사건의 黃仁五·仁郁 형제·金洛中씨 등 공안사범 94명을 포함,2,174명을 전국 교도소에서 일제히 석방했다.
  • ‘당국간 대화’ 빨라질듯/남북관계 전망

    ◎상설기구 창설 첫 제의… 물밑접촉 활발/北도 주석취임 앞두고 관계개선 절감 金大中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방안으로 ‘대화창구의 복원’을 유난히 강조했다. 과거와 같은 ‘깜짝쇼’나 과시형 이벤트보다는 남북기본합의서의 충실한 실천을 바탕으로 남북간 상호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화해,군사,경제교류협력,사회문화교류협력 등 4개 공동위원회를 정상가동시키자고 제안했다. 이들 대화 채널은 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구성됐지만 지금껏 한차례도 열리지 못했다. 새 제의는 아닌 것이다. 때문에 가장 주목할 만한 내용은 장·차관급을 대표로 한 남북상설대화기구의 창설 제의다. 김대통령은 공동위원회의 정상운영에 앞선 과도적 조치로 이를 위한 대통령 특사(特使)파견도 제안했다. 남북상설대화기구는 현정부 들어 처음으로 거론된 것이다. 통일부는 이에 대해 정치나 경제 분야뿐 아니라 농업·종교·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당국간 대화창구를 마련하자는 취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최근 남북정상회의 개최를 위한 물밑접촉이 활발하다는 소문과 연계시켜 정상회의의 하부기구 개념으로 남북 상설대화기구가 거론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이 이번 金대통령의 대북(對北)제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의외로 빠른 시일안에 당국간 대화가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새정부가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적극적으로 남북경협에 나서왔고 이번에 ‘북한의 안정 지원’이란 표현으로 흡수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거듭 전달했기 때문이다. 최근 금강산 관광사업 추진과정에서 보여준 북한의 태도도 그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북측도 金正日 총비서의 주석 취임을 앞두고 경제난 극복을 위해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는 추론이다. 李長熙 외대 교수는 “대북(對北)정책 기조인 남북기본합의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새정부가 이에 대한 국회 비준동의를 받고 유엔에도 등록해야 한다’면서 “남북기본합의서는 북한의 실천여부와 관계없이 우리가 선도적으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남북 관계 개선 제의(·제의:내용) ·북한의 안정과 발전 지원:남북기본합의서에 입각,흡수통일 불원 ·남북 상설대화기구 창설:장·차관급 대표 ·대통령 특사 평양 파견:북한이 원하면 모든 문제 협의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조치:남북 양측의 인도적 정신과 동포애 기반 ·경제교류 협력 지원·장려:금강산 개발, 농업개발 포함 ·남북 공동위원회 조속한 재개:남북기본합의서상 4개 공동위원회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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