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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이 만난사람] 마지막 서커스단 ‘동춘’ 박세환 단장의 서커스 인생 50년

    [김문이 만난사람] 마지막 서커스단 ‘동춘’ 박세환 단장의 서커스 인생 50년

    고독한 예술가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다. 외롭고 쓸쓸한 영혼으로 몸부림치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남긴 ‘곡예사의 가족’ 또한 그렇다. 하여 곡예사를 떠올린다. 그들은 언제나 고독하고 아찔한 인생길을 걷는다. 가느다란 줄에 의지한 채 늘 기적의 안식처를 찾아 헤맨다. 문득 슬픈 어릿광대의 노래가 들려온다. ‘줄을 타며 행복했지/춤을 추면 신이 났지/손풍금을 울리면서 사랑 노래 불렀었지/공 굴리며 좋아했지 노래하면 즐거웠지/~영원히 사랑하자 맹세했었지/~어릿광대의 서글픈 사랑~’ 1970년대 후반 박경애씨가 불러 인기를 끌었던 ‘곡예사의 첫사랑’이다. 허름한 천막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은 곡예사들의 아찔한 곡예를 보면서 그들의 애환과 고단한 삶을 이해했기에 수많은 남녀노소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로 추억된다.2004년 8월 국립극장 무대.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매우 이례적으로 서커스가 ‘극중극’ 형식으로 등장했던 것. 공연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서커스를 관람했다. 이어 만담과 차력, 마임, 트로트, 공중 곡예, 마술, 악극 화술 등이 곳곳에 등장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파격은 이윤택 감독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커스의 애환과 묘기를 담아 내기 위해 동춘서커스단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 새로운 대중극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동춘서커스단은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남철, 남성남 등 당대의 스타를 배출하는 산실이었기에 관객들은 추억의 곡마단을 연상하며 많은 향수를 누렸다. 2009년 11월 동춘서커스단은 서울 청량리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는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네티즌들은 정부 당국의 무관심한 처사를 거세게 비판했다. 아고라 토론방에 ‘동춘이 문닫으면 유인촌이 무인촌이 된다.’ 등의 게시물이 올라왔고 접속 건수만 무려 16만건에 달했다. 결국 동춘서커스단은 다시 살아났다. 동춘서커스단의 박세환(68) 단장. 올해로 서커스 인생 50년을 맞는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이 시대의 마지막 서커스단’을 꿋꿋하게 이끌어 오고 있다. 박 단장의 열정으로 요즘 동춘서커스단은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지난해 안산시 대부도에서 6개월 동안 장기공연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올해도 지방 공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경기 포천(5일)과 울산 해맞이 공연(6일)에 이어 다음 달 30일부터 6월 10일까지 경남 고성 공룡엑스포장 내 특설빅탑극장에서 공연을 갖는다. 또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6월부터 1년간 대부도에서 상설 공연을 할 예정이다.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중구 약수동 사무실에서 박 단장을 만났다. 먼저 다음 달 공연 준비가 잘 되는지부터 물었다. 그는 “동춘서커스단의 이미지가 있는 데다 공룡엑스포가 합쳐져 많은 관객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매율도 나쁜 편이 아니라는 얘길 듣고 있다.”면서 “지난해 대부도 공연 때에는 안산시 측과 협의를 통해 특산물과 음식물 판매를 연계했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와 함께 달라진 서커스의 모습을 설명한다. “작년에도 시도했지만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아트 서커스’의 면모를 보여 줄 생각입니다. 공중 곡예뿐만 아니라 연극과 음악, 악극, 뮤지컬 등이 다 들어간 한 차원 높은 예술 서커스를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앞으로 해외에 나갈 때에는 ‘코리아 로빈 후드 서커스’라는 이름으로 업그레이드된 동춘서커스를 보여 줄 계획입니다.” 그가 밝히는 ‘코리아 로빈 후드 서커스’는 이미 지난해 국내 공연에서 ‘뉴 홍길동 서커스’로 선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막과 막 사이에 홍길동과 포졸, 그리고 사또 등이 등장하면서 곡예 서커스로 이어지는 ‘막간극’ 형태를 새롭게 추가했더니 아주 재미있게 달라지더라는 것이다. 박 단장은 이러한 ‘뉴 홍길동 서커스’에 자신감을 얻어 ‘코리아 로빈 후드 서커스’라는 브랜드로 새로운 한류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다. 특히 내용과 곡예면에서도 세계적인 서커스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줄타기할 때 한복을 입고 등장하고 부채춤과 국악 곡예 등 한국적 테마를 되도록 많이 삽입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계 모든 관객들에게 100분 공연 내내 1분1초도 따분하지 않게 할 자신이 얼마든지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서커스는 눈속임이 없는 비언어적 공연예술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재미와 감동을 충분히 선사할 수 있다.”고 거듭 자신한다. “저는 ‘태양의 서커스’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양의 서커스’는 1985년 국가에서 100억원을 지원받아 연간 매출 1조원을 올리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국가에서 지원받지 않고 외롭게 공연을 하면서도 묘기만큼은 ‘태양의 서커스’보다 더 강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진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대예술이 서커스라는 판단 아래 오래전부터 라스베이거스 호텔에 상설 전용극장을 마련했으며 독일 등 유럽은 물론 중국, 일본, 북한 등도 여러 곳에 전용극장을 만들어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전용극장이라고는 한 곳도 없고 국가에서 관심조차 없습니다. 동춘서커스단이 잘 살려고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유일한 서커스단이 없어지면 문화의 한 장르가 없어질뿐더러 이는 국가적 망신 아니겠습니까.” 이어 박 단장은 68세된 한 노인의 얘기를 꺼냈다. 지난 1월 17일 그 노인이 전화를 걸어와 “서커스단 운영에 어려움을 겪을 텐데 3000만원을 기부하겠소.”라고 했던 것. 이에 박 단장은 “우리나라 서커스 발전을 위해 뜻깊게 쓰겠다.”고 여러 번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런 일이 있는가 하면 돈 잘버는 대기업이 동춘서커스단 상표를 무단으로 도용하는 경우도 있어 개탄스럽다고 했다. 그렇다면 서커스단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잘나갈 때는 단원만 150명이 넘었습니다. 무용수만 7~8명이고 가수에 10인조 악단까지 있었지요. 지금은 고정단원이 30명이고 계절별로 50~80명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원들의 급여도 조금씩 다르지요. 관객들이 많은 봄과 가을에는 아무래도 많이 지급할 수가 있습니다. 손해볼 때도 있고 이익이 좀 날 때도 있지요.” 요즘에도 서커스를 배우고 싶어 하는 지망생이 있느냐고 하자 “대학에서 7년 동안 강의하면서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연극과 뮤지컬 배우가 되려는 지망생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역동적인 서커스를 여전히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50년 서커스 인생을 살아온 소감이 간단치 않을 터. 잠시 벽에 걸린 왕년의 포스터를 쳐다보다가 “참 세월 빠르다. 배삼룡, 남철, 남성남, 이봉조 악단 등 서커스단을 거쳐 간 많은 단원들이 새삼 생각난다.”면서 “송해 형님이 지금도 노래자랑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데 저 역시 계속 사회를 보고 있다.”며 웃었다. 서커스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궁금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지요. 마침 동춘서커스단 공연을 보게 됐습니다. 까만색 양복에 하얀 머플러를 걸친 사회자가 관객들을 사로잡는 것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커스단을 찾아가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지요. 한 3개월 동안 심부름하면서 지내다가 1년쯤 지났을 때 처음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던 얼마 후 사회자가 서커스단에서 나가 버리자 사회 보는 연습을 했다. 당시 사회자는 원맨쇼와 가수, 배우 역할까지 했다. 이때 연극 ‘물레방아 도는 내력’, ‘원한 맺힌 두 남매’, ‘홍도야 울지 말아’ 등에 1인 다역으로 출연했다. “동춘서커스단은 1925년 목포에서 창설됐습니다. 일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동춘 박동수씨가 독립해 30여명의 조선인으로 출발했지요. 노래, 코미디, 연기 등 예능에 자질 있는 사람들은 전부 서커스단으로 몰릴 정도로 인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박 단장은 계속되는 할아버지의 반대로 1975년 서커스단을 떠나 부산극장에서 선전부장을 지낸 뒤 생필품 도매상을 차려 돈을 벌기 시작했다. 1978년 9월, 인천에서 공연 중인 동춘서커스단 빅탑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과 함께 동춘서커스단이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박 단장은 얼른 달려가 500만원을 선금으로 주고 인수한 뒤 오늘날까지 동춘서커스단을 이끌고 있다. 그가 요즘 간절히 바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서커스 전용극장 설립이다. 이어 서커스 아카데미와 박물관을 만들어 후대에 남기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내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계서커스 경연대회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박세환 단장은… 1944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경주고 1학년 때 동춘서커스단 공연을 처음 보고 감동해 1962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동춘서커스단에 입단했다. 이후 가수와 연극배우, 사회자 등 1인 다역을 했다. 1975년 서커스단에서 잠시 나와 부산극장 선전부장으로 일했고 부산극장 옆에서 생필품 중간도매상을 운영했다. 이때 번 돈으로 1978년 동춘서커스가 매물로 나오자 인수했다. 이후 서커스단 운영은 물론 총감독과 배우, 사회까지 맡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서커스단을 이끌어 오고 있다. 1982년 연세대 사회과학원을 거쳐 서울예술대 등에서 7년간 강의를 했으며 198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곡예협회 총회장을 맡고 있다.
  • 잭 콘돈의 ‘베이루트’ 드디어 한국서 첫 내한 공연

    잭 콘돈의 ‘베이루트’ 드디어 한국서 첫 내한 공연

    발칸반도, 프랑스, 혹은 미국의 고전적인 팝음악 등 다채로운 음악들을 자신의 음악세계에 녹여 큰 호평을 받은 싱어송라이터 잭 콘돈의 ‘베이루트’(BEIRUT)가 첫 번째 내한공연을 갖는다. 싱어송라이터, 트럼펫, 플뤼겔호른, 우쿨렐레 등에서 수준급 연주 실력을 보이는 팔방미인 잭 콘돈을 주축으로 구성된 6명의 밴드 베이루트는 3장의 정규 앨범과 다수의 싱글 레코드를 발표해 찬사를 받았다. 일반적인 팝스타나 록밴드가 아닌 독창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인디 아티스트들의 내한이 잦아지는 추세에서, 피치포크, 페이스트, 롤링 스톤, 모조, NPR 등 전세계 음악 매체에서 뜨거운 호평을 얻고 있는 베이루트의 내한 공연은 음악팬들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 리더인 잭 콘돈은 10대 시절부터 전 세계를 여행하며 돌아다녔고, 아트하우스에서 팝콘을 팔면서 감상한 유럽 영화들을 보면서 집시음악, 샹송 등 다채로운 음악들을 자신의 음악 안에 접목시켜 온 뮤지션이다. 때문에 베이루트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음악 속에는 새로운 체험이 가득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집시음악과 샹송, 일반적인 팝음악 팬들까지 포괄할 수 있는 그의 음악에 대다수 관객은 만점에 가까운 평점을 남기고 있다. 무엇보다 전 세계 음악 매체와 팬들을 열광시킨 그의 앨범은 공연에 대한 만족을 더욱 높인다. 여기에 플루겔호른, 프렌치 혼, 투바 등 평소에 대중음악 공연에서 보기 힘든 악기들이 사용된다는 점도 이 공연의 매력 포인트다. 뉴욕 타임스는 밴드의 응집력을 극찬했으며, 스펙트럼 컬처는 시공간을 이동하는 듯한 경험을 준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MOT의 이이언이 특별 게스트로 나서는 베이루트 내한공연은 오는 1월 25일 저녁 8시 서울 악스코리아에서 펼쳐진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안창호, 아시아인 첫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에

    안창호, 아시아인 첫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민권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민권의 전당을 운영하는 트럼펫어워즈재단은 지난 6일(현지시간) 미 조지아주 애틀랜타 소재 마틴 루터 킹 목사 유적지에서 도산의 외손자인 플립 커디 등 유족을 비롯해 김희범 애틀랜타총영사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2년도 전당 헌액식을 가졌다. 행사는 도산의 생애와 업적 소개, 선생의 발자국이 새겨진 조형물 설치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올해 헌액자는 도산을 비롯해 시어도어 헤스버그 노틀담대 총장 등 9명이다. 제로나 클레이턴 재단 부이사장은 헌액사를 통해 “안창호는 평화를 사랑했던 한국의 마틴 루터 킹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비췄다.”며 그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유족 대표로 헌액식에 참석한 손자 커디는 소감을 통해 ‘나꼼수’ 진행자인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이 구속된 것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돼 있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나꼼수라는 시사풍자 프로그램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그토록 강조했던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며 “정 전 의원처럼 어떤 견해 표명을 이유로 구속되는 사람이 생겨선 안된다.”고 말했다. 민권의 전당은 세계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 구현에 앞장선 인물들을 기념해 2004년 만들어졌으며 린든 존슨, 빌 클린턴, 지미 카터 등 3명의 전직 미국 대통령과 민권운동가인 앤드루 영 전 유엔대사, CNN 설립자인 테드 터너, 팝스타 스티비 원더, 남아공 투투 대주교 등이 헌액돼 있다. 이에 따라 민권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102명으로 늘어났다. 애틀랜타 연합뉴스
  • 매력적인 라이브의 강자 ‘3인3색’ 내한공연 기대되네

    매력적인 라이브의 강자 ‘3인3색’ 내한공연 기대되네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CD보단 현장에서 듣는 맛이 각별한 뮤지션이 있다. 이달 내한공연을 하는 3명 모두 라이브의 강자라는 교집합이 있다. ●‘치명적 중독성’ 데미안 라이스 ‘치명적인 중독성’을 지닌 아일랜드의 포크 싱어송라이터 데미안 라이스는 오는 11일 오후 8시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한다. 사랑을 둘러싼 네 남녀의 엇갈린 심리를 묘사한 마이크 니컬스 감독의 영화 ‘클로저’(2004)에 삽입된 ‘더 블로어스 도터’(The Blower’s Daughter)로 전 세계 영화·음악팬의 심장을 후벼 판 주인공이다. 단 두 장의 앨범을 발표한 가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국내 팬층도 두껍다. 지난해 12월 티켓 판매가 시작된 지 하루 만에 2500석이 모두 팔려나갔다. 근래 들어 전례가 없는 속도.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반환표를 노리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13만 2000원~16만 5000원. (02)3141-3488. ●‘최고의 재즈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 현존하는 최고의 재즈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는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선다. 6회 연속 그래미 수상을 비롯, 총 17회의 수상으로도 메스니의 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최근 2년 연속 내한한 만큼 희소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오랜 파트너인 베이시스트 래리 그레나디어와의 무대는 국내에서 처음이기 때문에 기대치가 한껏 높아진 상황이다. 둘의 무대는 앞서 열린 북미·유럽투어에서 극찬을 받았다. 지난해 발표한 ‘왓츠 잇 올 어바웃’(What’s It All About)과 ‘원 콰이어트 나이트’(One Quiet Night)의 수록곡을 라이브로 듣는 것 역시 국내 팬에겐 처음이다. 5만 5000원~13만 2000원. (02)563-0595. ●프로젝트 밴드 ‘베이루트’ 싱어송라이터 잭 콘돈의 프로젝트 밴드 베이루트도 25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악스코리아에서 첫 내한공연을 한다. 콘돈은 미국 가수이지만, 기타-베이스-드럼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미국식 록음악 편성과는 다른 음악을 추구한다. 관악기 선율이 먼저 귀에 꽂힌다. 트럼펫으로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 일부 매체들은 그의 음악을 두고 ‘집시음악’ 내지 ‘발칸음악’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베이루트는 “저널리스트들이 게으른 탓이다. 19세 때 발표한 데뷔앨범은 발칸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후 사운드와 편곡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발표한 앨범 ‘더 립 타이드’의 수록곡 등 히트곡을 5명의 객원 멤버들과 함께 소화한다. 8만 8000원. 1544-1555.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영혼 울리는 가을밤 재즈선율…트럼페터 크리스 보티 내한

    영혼 울리는 가을밤 재즈선율…트럼페터 크리스 보티 내한

    “그를 죽도록 좋아해요. 영혼부터 귀까지 만족하게 하는 음악을 찾는다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죠.”(글래디스 나잇), “그에 대한 첫인상은 ‘정말 연주를 잘하는 아티스트’란 것과 ‘정말 잘생겼군’이었어요.”(스팅) 날렵하게 떨어지는 턱선과 아름다운 금발. 잘생겨서 손해를 보는 일도 가끔 있다. 혹자는 그를 ‘데이트 콘서트’ 음악가라고 헐뜯는다. 재즈 순수주의자들은 레퍼토리가 대중적이란 이유로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논쟁에는 관심 없다. 유일한 관심은 ‘내 공연에 더 많은 관중을 오게 하는 것’과 ‘내 공연에서 팬들이 진심으로 즐거워했는가’뿐”이라고 말한다. 트럼펫 연주자 크리스 보티(49)의 얘기다. 오늘날의 보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가수 스팅이다. 보티의 트럼펫에 푹 빠진 스팅은 1999년 ‘브랜드 뉴 데이’ 투어에 솔로 트럼페터로 그를 영입했다. 이후 보티는 2004년 ‘웬 아이 폴 인 러브’, 2005년 ‘투 러브 어게인: 듀엣’, 2007년 ‘이탈리아’까지 연이어 3장의 앨범을 빌보드 재즈차트 1위에 올려놓는 진기록을 세웠다. 보티가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3년 만에 한국팬과 해후한다. 함께 무대에 서는 동료의 면면도 만만치 않다. 게스트 보컬 리사 피셔는 1992년 그래미 최우수 여자 R&B보컬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한 디바다. 기타리스트 마크 휫필드와 드러머 빌리 킬슨은 오랫동안 보티 밴드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보티는 공연프로그램을 리허설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아직은 알 수 없다. 5만~15만원. (02)3461-0976.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자라섬, 그곳엔 재즈가…

    자라섬, 그곳엔 재즈가…

    경기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1번지. 비만 오면 북한강에 잠겨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섬이 알려진 것은 오롯이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JIJF)의 힘이다.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누적관객 75만여명. 지난해에만 16만 8000명이 찾았다. 올해도 21개국 36개팀이 풀어놓는 재즈선율을 오는 1~3일 들을 수 있다. 첫날은 1968년 결성된 미국의 10인조 밴드 ‘타워 오브 파워’가 불을 지핀다. 리더 에밀리오 캐스틸로(테너 색소폰)를 비롯한 5명의 창단 멤버가 활약하고 있다. 43년 동안 다진 팀워크는 설명이 필요 없을 터. 색소폰과 트럼펫, 트롬본 등 관악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밴드 특유의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매력적인 그루브를 기대해도 좋다. 2일에는 프로젝트밴드 ‘쿠바노 비, 쿠바노 밥’을 주목해야 한다. 영화 ‘모 베터 블루스’의 동명(同名) 주제곡으로 친숙한 트럼펫 연주자 테렌스 블렌차드와 라틴 재즈 중흥을 이끈 콩가 연주자 폰초 산체스의 밴드가 뭉쳤다. ‘쿠바노 비, 쿠바노 밥’이란 전설적인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1917~1993)와 타악기 연주자 차노 포조가 1947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연주하면서 아프로-쿠반 재즈에 한 획을 그은 명곡에서 따온 이름이다. 프랑스 출신 기타리스트 마크 듀크레의 트리오 공연도 두고 볼 만하다. 2000년대 들어 3년마다 발표한 석 장의 앨범이 모두 최고 평점을 받았다. 3일에는 냇 킹 콜(1917~1965)의 동생이자, 내털리 콜의 삼촌이란 이유로 평가절하됐던 프레디 콜이 이끄는 퀄텟(4인조) 공연에 눈길이 간다. 형의 아류 취급을 받았지만, 프레디는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형이 숨진 지 35년 만인 1990년 발표한 앨범 ‘아임 낫 마이 브러더, 아임 미’는 그의 역량을 집대성한 노작으로 꼽힌다. 1일권 3만 5000원(이하 예매 기준). 2일권 5만원. 3일권 7만원. (031)581-2813~4.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문화마당] ‘나가수’와 바비킴/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문화마당] ‘나가수’와 바비킴/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MBC ‘나는 가수다’(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편곡이었다. 원곡의 틀을 바꾼 편곡의 묘미는 가창자를 통해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흡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알았던 이 노래가 이런 느낌의 노래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퍽 놀랐을 것이다. 최근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바비킴은 비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편곡해 바비킴만의 색깔을 선사했다. 랩 부분에는 자신이 리더로 팀을 이끄는 힙합그룹 부가킹즈의 노래 ‘틱택토’를 차용해 곡과 곡을 넘나들며 경계를 허물었다. 우리나라에서 흑인음악과 레게음악을 제대로 하는 뮤지션도 얼마 없지만, 손에 꼽히는 뮤지션 중 한명이 바비킴이다. 색다른 무대로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던 바비킴의 음악적 내공은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도 닮아 있다. 바비킴은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버락 오바마를 보면서 감개무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면식도 없지만 동시대를 미국에서 함께 살아온 바비킴에게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자신의 어린 날을 투영할 만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종 편견’이라는 거대한 삶의 암초에 부딪히면서 미국 사회에서 좌초하지 않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는 점에서 바비킴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바비킴은 “오바마가 당선되고 취임식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죠. 그의 권좌는 능력이 있으면 출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상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편견과 차별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거죠. 어렸을 때 나는 피부색이 노란 흑인인 줄 알았습니다. 점점 커가면서 내가 토종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만큼 인종차별은 가슴을 아프게 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참는 법을 가르친 일종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라고 소회했다. 1975년, 두살배기 바비킴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갔다. 1993년 20살의 나이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31살의 늦깎이로 인기 가수에 이름표를 올렸다. 2006년에 발표한 음반에서 ‘고래의 꿈’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바비킴은 음악적 찬사와 인기를 누리기까지 그 역경이 한편의 소설 같다. 미국 ‘토머스 에디슨’ 초등학교를 다니던 바비킴에게 백인 친구들의 멸시는 차치하고라도 담임선생이 보여주었던 피부색에 대한 편견과 그 차별은 영원히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였다. 언제나 꼬투리를 찾아서 매일같이 구박을 일삼는 선생에 맞서 끝까지 버텨냈다. 지금 생각하면 동화나라 이야기 같다고 털어놨다. ‘너의 머리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며 얼굴을 찡그리는 선생의 지적이 너무 싫어서 같은 반 한국인 친구와 집에서 샴푸를 수차례 하고 머리카락을 말린 다음 린스를 다시 바르고 등교하곤 했다. 편견과 차별로 얼룩진 미국 사회에서 그는 음악이 유일한 탈출구였고 희망이었다. 알려진 대로 바비킴의 아버지는 70년대 가요사를 풍미한 유명 트럼펫 연주자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열풍처럼 불었던 힙합음악에 자신의 인생을 던진 바비킴은 한국으로 귀향하고서도 꼭 10년 동안 무명의 설움을 속으로 삭였다. 1994년 레게음악을 선보인 그룹 ‘닥터레게’에서 래퍼로 몇달 활동했지만 생활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그후로 바비킴은 “안 해본 것이 없다.”는 말로 생활의 절박함을 표현했다.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에서 괴물1 배역을 맡은 성우로, 사극 드라마에서 프랑스 군인 역할의 엑스트라로, 새벽에는 래퍼로 녹음실을 기웃거린 적도 있다. 바비킴의 음악을 들으면서 아주 독한 사랑의 애절함을 느꼈다면 아마도 그의 불굴의 이력이 이입되었을 것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가수가 인기를 얻는 것에는 행운도 따르겠지만, 그 이면에 말하지 못하는 전쟁과 같은 치열한 현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숙연한 사실을 안 연후에 노래를 음미하는 일은 또 다른 감회와 맞닥뜨리게 된다. 감동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 “생황협주곡 꿈 이룰 임자 제대로 만났죠”

    올해 에든버러페스티벌을 관통하는 주제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다. 예술가들의 진검승부가 펼쳐지는 가운데 남다른 주목을 받는 작곡가는 한국인 진은숙(50)이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진은숙은 에든버러 데뷔전인 올해에만 두 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지난 18일(현지시간) 퀸즈홀에서는 켄트 나가노의 지휘로 트럼펫과 트롬본, 피아노, 대규모 퍼커션을 활용한 ‘판타지 메카닉’을 선보였다. 24일에는 어셔홀에서 정명훈의 지휘로 생황협주곡 ‘슈’를 공연했다. ‘슈’란 이집트 말로 ‘공기의 신’이란 뜻이다. 서양인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생소한 생황을 내세운 ‘슈’와 협연자 우웨이에 대한 청중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부 마지막 곡으로 연주됐는데, 이례적으로 협연자 우웨이가 휴식시간을 앞두고 앙코르 연주까지 했다. 진은숙은 “어릴 때부터 생황의 음색을 좋아해서 언젠가는 저 악기를 활용해 작곡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생황을 연주할 임자를 못 만났다.”면서 “2007년 독일 베를린에서 중국 연주가 우웨이를 만난 뒤 ‘너를 위한 곡을 쓰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생황협주곡의 ‘단점’은 다룰 이가 많지 않다는 데 있다. 진은숙은 “개량 생황인데 연주가가 우웨이밖에 없어서 ‘네가 죽으면 큰일이다. 빨리 제자를 키워라’라고 농담처럼 말한다.”며 웃었다. 깜짝 반전이 일어나는 ‘슈’의 마지막 대목에 대해 진은숙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산 위에서, 우주를 향해 연주하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청중은 볼 수 없는 바깥에서 연주가 들려오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궁금한가. 직접 들어 보시라. 에든버러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재능보다 목표” “감각보다 노력”…비슷한 두 남자

    “재능보다 목표” “감각보다 노력”…비슷한 두 남자

    열살 터울의 두 남자는 여느 클래식 연주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한 명은 스물다섯에 뒤늦게 유학길에 올라 8년 만에 오스트리아 유명 음악원의 교수가 됐다. 퍼커션 연주자 정건영(36)씨다. 다른 한 명은 중 3때 독일로 유학을 떠나 연주자와 과학자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다. 첼리스트 고봉인(26)씨다. 두 사람은 지난 13일 끝난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대관령국제음악제 참가를 위해 각각 모국을 찾았다. ‘늦깎이’와 ‘천재’에게 음악과 인생을 물어보았다. <정건영>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중학교 때까지는 음악과 담을 쌓고 살았다. 고교 입학식날, 밴드부 선배가 불던 ‘은색 악기’에 반했다. 나중에 트롬본이란 걸 알았다. 다음 날 음악실을 기웃대던 소년에게 선배는 트롬본을 불어보라고 했다. 웬걸, 팔이 짧아서 트롬본 슬라이드를 끝까지 뻗지 못했다. 선배는 트럼펫을 불어보라더니 입술이 너무 두꺼워 안 된다고 했다. 풀이 죽어 음악실을 나가려던 찰나, 마림바를 툭탁거리던 선배가 두드려 보라고 했다. 정 교수는 “화도 났던 터라 미친 듯이 두들겼는데 선배가 재능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동기들도 ‘천재’라고 하며 모두 꾀었더라.”고 회상하며 웃었다. 늦깎이인 데다 시골에서 음대에 진학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지방대를 다녔는데 수업은 딱 7번 나갔다. 대신 유명 타악기 연주자의 공연 비디오와 교본을 구해놓고 혼자 미친 듯이 연습했다. 2000년 오스트리아 린츠로 떠났다. 독일어는 입도 뻥긋 못 했고 나이까지 많은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졌고 돈도 떨어졌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빈 국립음대에 응시했다. 18명의 지원자 중 유일하게 합격했다. “‘드럼라인’(미국 대학 밴드부의 드럼 배틀을 다룬 영화)에 나오는 ‘루디멘털’ 장르를 실기시험 자유곡으로 연주했다. 클래식 타악기 테크닉만 구사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접시닦이, 관광가이드 등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빈 음대에서 8년을 갈고닦았다. “표현할 수 있어야 예술”이라는 지도교수 발터 파이글의 권유로 지휘과정도 이수했다. 2008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빈의 프라이너 콘서바토리움 교수가 됐다. 올 초까지 빈 국립음대 초청교수로도 일했다. 둘 모두 동양인 최초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음악을 통한 소통. 유튜브에 레슨 동영상을 올리고 국내 공연에서 애프터스쿨의 곡과 안무까지 소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객들이 1시간을 1분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즐거움에 감동과 의미를 더해야 한다.” 재능이 노력보다 중요하다는 게 클래식계의 주된 의견이다. 정 교수는 “타고나야 하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다.”면서 “어릴 때부터 음악을 배운 것도, 한국에서 유명한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지만, 최고의 타악기 연주자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어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고봉인> 누이가 바이올린을 먼저 배웠다. 엄마가 누이만 챙기는 걸 보고 질투심이 났다. 소년도 여덟 살 때부터 첼로를 시작했다. 요즘 음악영재들에 비하면 늦은 출발. 불과 1년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오디션을 볼 만큼 빨리 늘었다. 그곳에서 은사인 정명화 교수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심각하게 음악을 하려던 게 아니어서 기교적으로는 정말 별로였다. 그런데 부담 없이 즐기는 모습을 보고 정명화 선생님이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고향 전주의 초·중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한예종 예비학교에서 정 교수에게 사사했다. 신흥중 3학년 때 정 교수의 권유로 독일 유학을 떠났다. 여느 유학생처럼 음대에 조기 진학하는 대신 일반 고교에 다니면서 학업을 병행했다. 그런데도 발전 속도는 괄목상대였다. 1997년 차이콥스키 국제청소년콩쿠르에서 우승했고, 2000년 독일 크론베르크 마스터클래스에서 가장 유망한 첼리스트에게 주는 ‘란드드라프 폿 헤센’상을 받았다. 원래는 아버지(고규영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교수)처럼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미국 하버드대와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복수학위 프로그램으로 생물학과 첼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프린스턴대 분자생물학 박사과정(2년 차)에 적을 둔 고봉인씨는 세포와 단백질의 상호 영향 메커니즘을 밝혀 유방암 치료 열쇠를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실험이 워낙 많아 연주활동을 병행하는 게 쉽진 않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과학자를 꿈꿨고 음악가의 길을 줄곧 걸어왔기 때문에 하나가 없으면 삶의 균형이 깨져 불행해질 것 같다.”는 고봉인씨는 “특별한 연주를 통해 수백 수천 청중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유방암 치료 방법을 찾는다면 수천 수만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둘 다 매력적”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 중 어떤 게 중요한지. “실내악 앙상블처럼 다른 이의 연주에 반응하면서 같이 협연하는 것은 누가 가르치거나 노력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선천적인 재능, 본능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물론 노력은 당연한 얘기다.” 우문이었나 보다. 모두 그를 천재라고 말하는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난 노력파다. (첼로) 시작도 늦었고,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노력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은 숱한 실험을 해야 한다. 80~90%는 실패하다 보니 천재성보다는 노력과 인내심, 성실함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나와 맞는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장애극복 이미지보다 능력으로 평가받고 싶어”

    “장애극복 이미지보다 능력으로 평가받고 싶어”

    “역경을 극복한 이미지가 아니라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능력 있으니까’ 이렇게 합당한 평가가 내려졌으면 해요. 저도 그걸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거고요.” 현관에 들어서니 키 182㎝의 훤칠한 청년이 수줍은 듯 손을 내밀었다. 기자가 다가서던 각도와 약간 틀어진 채였는데 기자 목소리를 듣고 이내 바로 잡았다. 짙은 속눈썹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라틴계 호남을 연상시키는 이창훈(26)씨는 지상파 방송 사상 처음으로 KBS에 프리랜서 앵커로 기용돼 1년간 활약하게 된다. <서울신문 7월 26일 자 29면> 지난 29일과 30일 케이블채널 서울신문STV를 통해 방영된 ‘TV 쏙 서울신문’ 스튜디오에 나온 이씨는 지금까지의 삶과 앵커로서의 각오 등을 특유의 중저음과 빛나는 재치로 풀어냈다. 오는 8일부터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집에서 방송국 근처의 9호선 국회의사당역까지 지하철과 도보로 출퇴근해야 하는 이씨는 “어머니와 몇 번 왕복해 봤는데 평소에도 지하철 등을 이용해 왔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자택과 스튜디오를 오가며 진행된 이씨와의 일문일답. →시력을 잃은 뒤 많이 힘들었을 텐데. -태어난 지 7개월 됐을 때 시력을 부분 상실했는데 어둠과 밝음 정도만 분간할 수 있었어요. 억울함이나 분노 같은 건 없었고 무섭고 아팠을 뿐이지요. 가위에 눌려 잠에서 깰 때마다 어머니를 때리고 깨물곤 했다고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고요.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며 뒷바라지해온 어머니 이상여(57)씨는 “창훈이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 없어 구석에 숨어 잠을 청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용케도 아이가 냄새를 맡고 찾아내 정말 힘들었다. 온 몸이 꼬집힌 자국투성이였다.”고 말했다.) →학교 생활은 어땠나. -여덟살 때 시각장애인 학교가 진주에 없어 서울로 왔어요. 한빛맹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뇌수막염이 재발, 시력을 완전히 잃었어요. 사지도 마비돼 의사들은 다시 움직이기 어렵다고 했는데 용케 이겨냈습니다. 나 혼자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 티 안 내려고 애써야 했지요. 다른 아이들이 집에 가는 주말에 혼자서 기숙사 생활을 하려니 외롭고 힘들었죠. 3~4학년 때 브라스 앙상블에서 트럼펫과 피아노를 배우면서 재능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주변에서 잘한다고 얘기해 줘 성격도 밝아졌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내내 흥얼거리길래) 성격 참 좋은 것 같다. -늘 살아 오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느낌을 가졌어요. 그런 안정감이 제 장점입니다. 그런 분야의 책도 많이 보고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하지요. →인터넷 방송 경험이 밑거름이 됐을 텐데. -한국시각장애인방송(KBIC)에서 매일 밤 9~11시 방송 중 제가 한 시간을 맡고 있습니다. 노래 두 곡 들려주고 다른 동료가 장애인계 뉴스를 전하는데 전 전체 진행을 맡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의 방송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함께 도전한 분들뿐만 아니라 KBIC에도 재주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은 대체로 목소리가 좋은데 뉴스에 어울리는 목소리도 있고 예능 끼를 갖고 있는 분도 있어요. 함께하면 능력이나 기회를 공유하고 교류하며 힘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3개월 연수를 빼면 실제 활동할 시간이 짧은 것 같은데. -KBS에서도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공고한 뒤 절 뽑기까지 한 달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거든요. 어떤 대우를 할지에 대해서도 아직 정해진 것이 없고 계약도 맺지 않았습니다. →비장애인들이 어떻게 대했으면 하나. -모르면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영화 ‘말아톤’ 포스터에 ‘5세 아이 지능을 가진 스무살 청년’ 이런 식이에요. 정신지체 3급이라고 정확한 정보를 주면 되는데 ‘아, 다섯 살짜리 아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유도하는 거예요. →그런 이들의 마음을 열려면. -마음을 열 수는 없고 삶을 보여 줘야죠. 대학 다니면서도 ‘시각장애인이니까 이런 건 이렇게 해줘.’, ‘이런 부분은 강하고 이런 건 약하다.’ 분명히 얘기했어요. 신뢰감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친구들은 절 장애인으로 의식하지도 않아요. →‘장애 극복’ 이런 식의 표현을 싫어한다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상황을 겪으면서 견뎌내는 것이죠. 안 보이는 건 안 보이는 거잖아요. 벽에 들이받을 수 있는 거지요. ‘벽이 있었네.’ 하고 웃는 거지요. 시각장애인 앵커나 스포츠 캐스터, 작가, 배우가 되는 일이 특별한 일이 안 되는 사회가 됐으면 해요. →좌우명이 있다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란 야구판 명언이 있어요. KBS 장애인 라디오에서 장애인들이 직접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중계한 적이 있어요. 그만큼 시각장애인들 중에 야구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1년에 5~10회는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LG 경기를 응원하러 갑니다. 응원 소리와 그라운드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도 충분히 야구를 즐길 수 있어요. 2009년 장애인의 날 전날에 KIA-LG 경기 때 시각장애인 장남석(당시 26)씨가 시구한 적이 있는데 저도 꼭 해 보고 싶습니다. →배우자 이상형은. -신앙이 있어야 하고 가치관이 같았으면 좋겠어요. 잘 웃고 생기 넘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팔로어가 50명쯤 된다는 그의 트위터 계정은 @lch85 글 사진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느끼한 색소폰·방구쟁이 튜바… ‘인간 악기’와 떠나는 모험

    느끼한 색소폰·방구쟁이 튜바… ‘인간 악기’와 떠나는 모험

    게임을 제일 좋아하는 동훈이는 게임 캐릭터인 ‘크크크 대마왕’에게 납치된 엄마를 구하려고 게임 속 소리마을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느끼한 색소폰, 새침데기 클라리넷, 방구쟁이 튜바, 잘난 척하는 트럼펫, 귀염둥이 호른, 의젓한 트롬본과 함께 엄마를 구출하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다음 달 11~21일(16·17일 제외) 서울 필동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국내 첫 창작 어린이 오페레타(Opereta) ‘부니부니’의 얼개다. 오페레타란 희극적 요소와 연극적 요소가 도드라진 ‘작은 오페라’를 뜻한다. 뮤지컬 ‘마리아마리아’와 연극 ‘친정엄마’의 제작사가 만든 작품으로 지난해 12월 예술의전당 초연 당시 90%의 객석점유율을 뽐냈다. 대부분의 어린이오페라가 성인용 작품을 각색한 것이었던 반면, ‘부니부니’는 제작 단계부터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꾸몄다. 아이들이 클래식과 친해지기 쉽도록 트럼펫, 색소폰, 튜바 등 악기를 의인화한 것도 애니메이션과 친한 아이들을 배려한 설정. 오는 9월 대구에서 열리는 국제오페라페스티벌에 초청된 작품이니 ‘애들이나 보는’ 작품쯤으로 여길 일은 아니다. 바리톤 장철유·최경훈, 소프라노 강현수·주혜림 등이 출연한다. 공연 1시간 전부터 관악기 체험교육 등이 마련된다. 4만~5만원. 다음 달 1일까지 예매한 가족관객에게는 최대 40% 할인해준다. (02)324-5551.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배달되지 않는 편지’ 강인섭 전 의원 통일시 낭송행사

    ‘배달되지 않는 편지’ 강인섭 전 의원 통일시 낭송행사

    언론인 출신의 시인 강인섭(75·관훈클럽 33대 총무) 전 의원이 24일 오후 3시 서울 반포동 심산 김창숙 기념관(지하철 9호선 구반포역 5번 출구)에서 ‘배달되지 않는 편지’라는 제목의 시 낭송 행사를 갖는다. 6·25 전쟁 61주년을 맞아 한국시낭송문예협회 주최로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서 강 전 의원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과 시낭송가들은 호국영령을 추모하면서 민족의 염원인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담은 통일시 18편을 낭송한다. 이 밖에 트럼펫 연주와 판소리 등 다양한 공연도 선보인다. 강 전 의원은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산록’으로 등단했다.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4대, 16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집 ‘녹슨 경의선’, ‘녹슨 경의선과 그 이후’, ‘강인섭 통일시집’ 등과 ‘4·19 그후’ 등의 정치평론집이 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안창호 선생 ‘세계 인권 명예의 전당’ 헌액

    안창호 선생 ‘세계 인권 명예의 전당’ 헌액

    도산 안창호 선생이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는 킹 센터 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동상 건립도 추진된다. 흥사단 미 동남부 지부(지부장 이무선)는 안창호 선생이 애틀랜타 시내 킹 센터 내에 세계 인권 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 인권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로 헌액될 예정이라고 14일 밝혔다. 흥사단은 지난달 애틀랜타 시내에서 명예의 전당을 운영·관리하는 트럼펫 어워즈 재단의 제노나 클레이턴 회장을 만나 안창호 선생을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고, 동상건립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이날 밝혔다. 흥사단 동남부 지부의 이강공 대외협력위원장은 “도산 선생의 신발을 본뜬 발자국이 명예의 전당에 새겨지며, 기념행사는 내년 1월 6일 마틴 루터 킹 기념일에 킹 센터에서 열린다.”고 말했다. 인권 명예의 전당은 세계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 구현 등 인권운동을 위해 앞장 선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설치됐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앤드루 영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 흑인 인권운동가인 로사 파크 여사 등이 전당에 입성해 있다. 인권 명예의 전당은 미 연방정부가 관리하는 애틀랜타시내 킹 목사 유적지에 위치해 있다. 흥사단은 또 안창호 선생의 동상을 킹 센터내에 있는 마하트마 간디 동상 옆에 건립하기로 구두합의를 하고, 2013년 5월 13일 흥사단 창립 100주년에 맞춰 동상 제막식을 한다는 목표 아래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이 위원장은 “도산 선생의 동상을 킹 센터에 건립키로 클레이턴 회장과 구두협약이 이뤄진 상태”라고 말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45t 거물’ 파이프오르간 켄 코완에게 몸을 맡기다

    ‘45t 거물’ 파이프오르간 켄 코완에게 몸을 맡기다

    1978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개관과 함께 높이 11m, 폭 7m에 무게 45t, 8098개의 파이프로 이뤄진 엄청난 ‘덩치’가 설치됐다. 제작사인 독일 칼 슈케사(社)는 독일인 기사 1400명을 포함해 총 4000여명을 동원해 8개월여에 걸쳐 설치를 끝냈고, 이후 정음 및 조율을 하는 데 5개월이 더 걸렸다. 몸값만 해도 125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6억원가량).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중국에서 더 큰 ‘덩치’를 영입하기 전까지 30년 동안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파이프오르간이 주인공이다. 거문고 모양을 살린 디자인과 한옥의 처마를 본뜬 상단부의 스패니시 트럼펫, 국악기 범종 32개를 갖춘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오르간은 98개의 음색을 지녀 악기의 제왕으로 손색이 없다. 이 파이프오르간이 모처럼 ‘임자’를 만났다. 오는 1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캐나다 출신의 파이프오르간 연주자 켄 코완에게 온몸을 맡기는 것. 코완은 장엄한 음색 때문에 종교음악 일부처럼 여겨지는 파이프오르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공연 제목도 ‘댄싱 파이프’(Dancing Pipes)다. 주최 측은 춤을 추듯 현란한 코완의 테크닉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무대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그의 손과 발을 클로즈업할 계획이다. 프로그램도 흥미진진하다. 바흐의 ‘칸타타’와 ‘푸가’ 등 오르간 작품뿐 아니라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더 유명해진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등 클래식 명곡들을 편곡해 들려준다. 바이올리니스트인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의 협연으로 꾸며질 비탈리의 ‘샤콘’을 기대해도 좋다. 바이올린의 애잔한 음색을 파이프오르간이 묵직하게 받쳐준다. 파이프오르간을 더 알고 싶다면 공연에 앞서 오후 5시부터 진행되는 ‘렉처 콘서트’에 참가하면 된다. 코완이 자신의 작품세계와 파이프오르간의 특징을 설명할 계획이다. 티켓 구매자 가운데 선착순 500명을 무료로 초대한다. 본 공연은 2만~7만원. (02)399-1114~6.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보고 듣고 즐기세요]

    대중음악 ●2011 임재범 콘서트-다시 깨어난 거인 6월 25일 오후 7시, 26일 오후 6시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나는 가수다’를 통해 대중 곁으로 다시 돌아온 가수 임재범의 전국 투어. 8만 8000~12만 1000원. 1544-1555. ●이승환 the Regrets 소극장 콘서트 6월 23일~7월 3일 서울 대학로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콘서트의 황제’ 이승환이 7인조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해 펼치는 소극장 공연. 8만 8000원. (02) 747-1252. 국악·클래식 ●서울시향 실내악시리즈Ⅱ:아드리앙 페뤼숑 리사이틀 27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세종로 세종체임버홀.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과 서울시향의 수석 팀파니스트를 겸하는 페뤼송의 리사이틀. 크세나키스 ‘리바운드 파트 B’, 오하나 ‘해석의 연습 11·12번’ 등. 트럼펫 알렉산더 화이트, 피아노 임수연, 첼로 이정란. 1만~3만원. (02)1588-1210. ●브루크너 교향곡 7번 28일 오후 5시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대학 음악학도들이 모인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지휘 박태영)는 1년전 단원 설문조사로 레퍼토리를 선정해 2월부터 이 공연을 준비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안톤 브루크너 ‘교향곡 7번’. 5000~3만원. (02)399-1790. ●막심 벤게로프&서울시립교향악단 30일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벤게로프의 솔로 연주와 지휘 솜씨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재미교포 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도 함께한다. 림스키코르사코프 ‘부활절 서곡’ ‘세헤라자데’, 차이콥스키 ‘명상곡’ 등. 6만~15만원. (02)585-0136. 연극·뮤지컬 ●연극 ‘별 헤는 밤’ 6월 14~22일 서울 대학로 공간 아울. 윤동주의 시를 모티브로 어머니의 마음을 그렸다. 어머니 장례식에 모인 삼형제는 변호사로부터 유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산은 어머니가 낸 수수께끼를 푸는 단 한 명의 아들에게만 상속된다. 수수께끼의 단서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수수께끼의 답은 무엇일까. 1만~3만원. (070)8272-9001. ●뮤지컬 ‘넌 특별하단다’ 6월 12일까지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 문화극장. 마음씨는 착하지만 실수투성이인 펀치넬로가 마을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친구 루시아를 만나면서 진정한 우정을 발견한다는 가족 뮤지컬. 1만 5000원. (02)322-4111. ●연극 ‘예술하는 습관’ 6월 21일~7월 10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세계적 문호 W H 오든과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의 가상의 만남을 극중극(劇中劇)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1만 5000~4만원. 1644-2003. 미술·전시 ●이기칠 개인전 6월 1~7일 서울 공평동 공평아트센터. 뭔가를 채우기보다 비워낸 공간을 통해 조각과 건축의 의미를 되묻는다. (02) 3210-0071. ●신페이 오카와 ‘전조’전 6월 7일까지 서울 수송동 갤러리 고도. 깔끔하고 완벽해 보이는 일본의 건물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그림들을 전시한다. (02)720-2223. ●오만철 개인전 31일까지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 전통적인 수묵화에서부터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동양적인 심미감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02)736-1020.
  • ‘현대 재즈의 아이콘’ 허비 행콕 이메일 인터뷰

    ‘현대 재즈의 아이콘’ 허비 행콕 이메일 인터뷰

    선인들은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했다.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 不踰矩·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란 말에서 비롯됐다. 공자의 ‘논어’에 등장하는 이 표현은 현대 재즈의 아이콘인 미국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71)에 적용해도 틀리지 않을 듯 싶다. 행콕은 11살 때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할 만큼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천재성은 1963년 실험성이 강한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1926~1991) 퀸텟(5인조 연주 그룹)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너지를 발휘했다. 1983년 ‘퓨처 쇼크’(Future Shock) 앨범을 계기로 재즈의 경계를 넘어 록과 팝, 클래식, 알앤비(R&B), 일렉트로니카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14개의 그래미상은 카멜레온 같은 변신에 대한 음악계의 평가를 반영한다. 새달 10일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내한공연을 앞둔 행콕과의 인터뷰는 공연기획사 서던스타엔터테인먼트 관계자가 서울신문의 서면질의서를 갖고 베벌리 힐스 자택을 방문해 진행됐다. →내한공연 포인트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앨범은 최근작 ‘이매진 프로젝트’다. 앨범 주제는 ‘평화’다. 11개국 음악가들과 합동 작업을 했고, 아프리카어·포르투갈어·아일랜드어 등 7개 국어가 사용됐다. 다른 문화들을 하나로 연결한다는 의미다. →8년 전 방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나 모든 상황이 기억나지는 않는다(웃음). 확실한 건 아름다웠던 콘서트홀(코엑스)과 진지하고 따뜻했던 관객이다. 첫 인상은 테크놀로지의 성장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는 것이다(그는 신기술을 빨리 체험해보는 얼리 어댑터로 유명하다). 재즈가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늦게 소개돼서인지 젊은 층 관객들이 많았다. →1970년대 일렉트로닉과의 접목 등 다양한 실험을 했다. 반면 최근 앨범들은 전보다 편안한 곡들로 채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현란한 피아노 솜씨를 자랑하듯 표현하는 것보다 앨범의 주제의식이 우선이다. (이매진 프로젝트 앨범) 주제가 ‘평화’와 ‘우리’(We) 아닌가. →순회 공연 일정이 살인적이다. 칠순이 넘었는데 힘들지 않은가. -육체적 건강 못지않게 영혼의 건강도 중요하다. 나는 40년이 넘도록 불교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 종교의 가르침이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도움을 준다. 세상과 나의 관계, 죽음과 탄생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솔직히 음식 조절도 한다.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얼마 전부터 줄였다(웃음). →재즈는 어렵다는 인식이 있다. 친해지는 방법을 소개한다면. -가장 중요한 건 즐기는 것이다. 관객들도 열린 마음으로 공연장에 왔으면 좋겠다. →존경하는 뮤지션은 누구일지 궁금하다. -음악적으로는 물론, 인생에 있어서 마일스 데이비스는 동료이자 조언자였다. 항상 그는 “상자 밖의 세상을 생각하라.”(Think outside Box)고 말했다. 정해진 기준을 넘어 탐험하고, 실험하란 얘기다. 나 역시 정해진 기준들을 넘어서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배울 수 있다. 더 크고, 높은 곳에 이를 수 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아직까지 행콕의 뒤를 잇는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후계자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를 꼽을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원한다면 말해주겠다(웃음). (재즈 피아니스트인) 다닐로 페레스(파나마), 애런 팍스(미국), 티그란 하마시안(아르메니아) 등이 훌륭하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보고 듣고 즐기세요] 클래식

    ●콜린 커리&호칸 하르덴베리에르 오는 17일 오후 7시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트럼펫의 제왕’ 하르덴베리에르와 ‘두드림의 마법사’ 커리가 한국 무대에 처음 함께 선다. 이들은 오케스트라 감초 역할을 해 왔던 퍼커션과 트럼펫을 솔리스트 악기로 등극시킨 주인공. 3만~7만원. (02)2005-0114. ●이병우&화음챔버오케스트라-로맨틱 멜로디 오는 22일 오후 8시 서울 대흥동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 클래식 기타리스트 겸 영화음악 감독 이병우와 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 솔리스트 16명으로 구성된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협연. 투리나 ‘투우사의 기도’, 로드리고 ‘아랑페즈 협주곡’,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등 연주. 4만~6만원. (02)3274-8600.
  •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김문이 만난사람] ‘힙합의 대부’ 바비 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 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 때부터 겪은 쓰디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 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다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그의 노래가 듣는 이에게 위안이 된다는 이유로 세대를 뛰어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 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솔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 만에 10만 관객을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 볼 예정이어서 또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동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먼저 이번 공연의 의미와 공연을 앞둔 소감을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하는 ‘솔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 때 2~3곡 정도 불러 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르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 나, 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도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는 가사에 영어발음을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 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으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고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 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 노래 발표회에도 솔로로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 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방망이를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 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 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을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중 고 3때 한 스카우트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 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공감을 통해 하나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라는 이름은 세살 때 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 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며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달프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바비 킴은 누구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살 때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도 음악과 운동을 병행한다. 음악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트럼펫을 배웠고 노래도 했다. 학교 발표회 때마다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야구와 미식 축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특히 야구는 포수와 1번 타자를 맡았는데 고교 때는 학교 대표로 출전해 3할대의 타율을 자랑했다. 고교 졸업 무렵 클럽 바에 가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고 래퍼로 활동했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 음반사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1994년 앨범 ‘닥터 레게’로 데뷔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이후 터보, 젝스키스 등을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 나갔다. 1999년 룰라 이상민의 14인 프로젝트 그룹 브로스의 멤버, 2000년에는 무브먼트 크루의 멤버, 다음 해 부가 킹즈를 조직하면서 활동범위를 넓혔다. 그러던 중 2004년 8월에 발표한 새 앨범 ‘고래의 꿈’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의 독특한 창법이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찾사’의 ‘나몰라 패밀리’를 통해 패러디되기도 했다. 지난해 세 번째 정규 앨범 ‘하트 앤드 솔(Heart & Soul)’을 발표했으며 ‘쩐의 전쟁’ ‘하얀 거탑’ 등 드라마 OST에도 참여했다. 2009년부터 전국 투어 공연에 나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 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

    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

     이 세상에서 고독이라는 말보다 더 고독한 단어가 있을까. 어느날 한 남자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바다에 ‘풍덩’ 빠진다. 그리고는 고독하게 헤엄을 친다. 왜 그랬을까? 노래로 답한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디에선가 있는 꿈과 사랑을 찾아서~/하얀 꼬리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다시 까닭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은 ‘나의 지친 몸짓은 파도 위를 가르네/나를 편히 쉬게 할 꿈인 걸 너는 아는지~’라는 진한 너울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 남자의 꿈은 척박한 토양에서 싹텄다. 어린 나이때부터 겪은 쓰디 쓴 인종차별과 이방인의 외로움이 우선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착해지는 자신이 나쁘다며 ‘오늘 단 하루만 착하지 말자.’고 외쳤을까. 그런 처절함에서 스스로 험한 바다를 택했고 한 마리의 ‘파랑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큰 고래가 됐다. 하여 아픔이 있어도, 그 어떤 고통이 가로 막아도 ‘편히 쉬게 할 꿈’을 향해 거친 파도를 넘고 또 넘었다. 지금도 그렇게 ‘고래의 꿈’은 계속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힙합 뮤지션 바비 킴(38). 그는 요즘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층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팬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고독과 처절함에서 나오는 특유의 창법이 심금을 울린다.’고 답한다. 특히 대표곡인 ‘파랑새’와 ‘고래의 꿈’에서 흘러나오는 바비 킴의 음악적 향기는 세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냄새가 짙게 깔려 있다고 한다.  사실 그는 무명세월 11년 설움을 견디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2004년에 발표된 앨범 ‘고래의 꿈’으로 비로소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반응은 폭발적일 만큼 계속됐다. 노래를 듣는 이에게 묘한 위안을 준다는 공통분모로 세대를 뛰어 넘어 많은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2009년부터 전국투어 콘서트에 나서면서 인기스타로서 바비 킴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해 3월부터 지난 해까지 그는 30개 도시에서 50회 이상의 공연으로 9만여 관객을 모았다. 이는 불과 2년만에 이룬 성과로 최고의 티켓 파워는 물론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임을 입증한 셈이다. 팬들은 바비 킴을 가리켜 ‘소울의 대부’ ‘힙합의 대부’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오는 26일 경기 고양시 아람누리 극장 공연을 시작으로 또 한번의 전국 투어 공연에 돌입한다. 상반기에 4개 도시, 하반기에 10여개 도시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5월 중에는 누적 관객 1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객석 수가 한정된 공간에서 콘서트 3년차만에 10만관객을 채우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공연에는 트로트를 ‘바비 킴’적으로 해석해 불러볼 예정이어서 또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바비 킴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이날도 특유의 중절모를 쓰고 나타났다.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속으로 ‘그래서 팬들이 힙합의 할아버지라고 하나.’라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먼저 이번 공연을 갖는 의미와 소감이 어떠한지 물었다.  “올해로 단독 콘서트는 3년째입니다. 그 중간에 조인트 콘서트가 있었지만 말이죠. 그동안의 콘서트가 바비 킴이 살아온 인생을 담았다면, 올해 콘서트는 바비 킴이 할 수 있는 음악과 바비 킴이 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팬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여러 음악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말 그대로 팬들과 함께 하는 ‘소울 투게더(Soul Together)’이지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좀 더 다양해진 콘서트 무대가 될 듯 싶다. 어떻게 달라질까.  “트로트곡을 제 스타일로 한번 소화해 볼 생각입니다. 물론 실험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트로트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트로트곡 10여곡을 선정해 하나 둘씩 들어가면서 선별할 예정입니다. 아직은 이거다 하는 것이 없지만 공연때 2~3곡정도 불러볼 생각입니다. 제가 트로트를 부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런 시도는 그를 좋아하는 마니아 계층들을 위한 팬 서비스 차원에서 ‘공연의 맛깔’을 더할 것으로 보여진다. 본인도 그런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여기서 잠깐, 한국말은 어떻게 익혔을까. 두살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국내 모대학 어학당에서 1년반 동안 배웠습니다. ‘가,나,다’부터 배웠죠.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을 몰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미국과 한국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이 상당히 컸죠. 한국어로 된 노래가사에는 영어발음으로 일일이 적어가면서 익히고 부르고 그랬습니다.”  한국에서의 적응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영어 테이프 녹음, TV드라마 엑스트라, 유아 TV프로그램 영어 강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울러 힙합 음악을 고집하면서 그룹활동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국인으로서 미국에서의 적응도 순탄하지는 않았을 터. 그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는 MBC 관현악단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던 아버지 김영근씨가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의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바비 킴은 초등학교때부터 적지 않은 따돌림을 당했다. 미국 아이들에게 ‘칭크(Chink:중국인을 비하하는 속어)’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이때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동양인들은 다들 똑같지 않느냐.’는 대답을 계속 들어야 했다.  “제가 살던 곳에는 필리핀과 중국인들이 살았어요. 또 백인과 흑인들도 많이 살았구요. 한국인은 별로 없었는데 어릴 때 미국인은 물론 똑같은 동양인 아이들에게도 왕따를 많이 당했지요. 화가 날 때에는 덩치 큰 선배들과 싸우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패배의식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바비 킴은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받아 중학교때 트럼펫을 몰래 배웠다. 또 학교에서 솔로로 노래 발표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때마다 성적은 아주 우수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고 혹시 음악하는 것이 직업이 될까봐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원래 음악적 자질도 타고 났지만 운동신경 또한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때 야구방망이 잡기 시작해 고등학교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1번타자와 포수를 맡았다. 특히 어깨힘이 좋아 1루에서 2루로 도루하는 상대방 선수들은 거의 다 아웃시켰을 정도였다. 타격면에서는 3할대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던 고 3때 한 스카우터로부터 ‘너는 동양인이어서 체격적으로 밀리기 때문에 서양인보다 3배 이상 훈련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했다.  “그때 야구도 그만 두고 좋아하던 미식축구도 그만 두었습니다. 몇날 며칠 방황과 좌절의 연속이었죠. 그러던 중 음악을 취미가 아닌 진짜 인생의 승부수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구요. 미국에는 클럽 바에 가면 오픈 마이크라고 해서 누구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자주 갔지요. 또 원맨쇼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나이트클럽 래퍼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1992년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자 바비 킴 가족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이듬해 한국에 온 바비 킴은 아버지의 묵시적인 허락하에 음반사 여러 곳에서 오디션을 봤다. 이때 단골로 부른 노래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였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리듬은 잘 타지만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바비 킴은 이에 대해 “어릴 때 흑인들과 자주 지내서 그런지 리듬을 타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며 웃는다.  그러던 1994년 ‘닥터 레게’로 첫 앨범을 냈지만 인기를 못얻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터보,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의 코러스와 랩 피처링 등을 하면서 실력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저에게는 무명 11년 세월이 고맙게 여겨집니다. 만약 처음부터 성공했더라면 자만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열심히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달았지요. 이제는 공연때마다 제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고, 또 관객들과의 진실한 공감을 통해 하나 하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다른 가수들과) 음악의 색깔도 다르고 창법도 특이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이 이제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바비 킴의 본명은 김도균이다. ‘바비’(Boby)라는 이름은 세살 때 친누나가 미국 TV시트콤을 보다가 바비라는 등장인물을 보고 그렇게 정했단다.  앞으로의 꿈에 대해 그는 “음악을 하다보니 취미가 없어졌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쪽 분야로 연구를 많이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팬들과 함께 하는 창조적 음악을 위해 열심히 꿈을 꾸며 살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는 현재 없지만 나이 마흔이 되면 할 생각.”이라면 웃는다. 중절모와 콧수염의 바비 킴. 특유의 애닯고 처절하고 고독한 창법이 앞으로 어떻게 더욱 깊어질지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전설의 록밴드 ‘이글스’ 첫 내한공연] 40년 목마른 기다림… 벅찬 감동 190분

    [전설의 록밴드 ‘이글스’ 첫 내한공연] 40년 목마른 기다림… 벅찬 감동 190분

     1971년 여가수 린다 론스태드의 반주를 담당하는 밴드가 있었다. 누구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았다. 1972년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레코드사와 정식계약을 맺고 데뷔앨범 ‘이글스’와 싱글 ‘테이크 잇 이지’를 발표했다.  꼭 40년 전, 미국이 자랑하는 명품밴드 이글스의 시작이다. 1982년 음악적 견해 차이로 깨졌지만 1994년 다시 뭉쳤다. 당시 한국 팬들도 환호했지만 먼 발치에서 바라볼 뿐. LP나 라디오, 혹은 DVD로 공연실황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호텔 캘리포니아’에 관객들 열광  15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공연시작 1시간여 전에 이미 올림픽대로부터 일대 도로까지 주차장으로 변했다. 약속된 오후 8시가 다가올수록 공연장을 촘촘하게 메운 1만 1000여명의 팬들은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글렌 프라이(63·기타), 돈 헨리(64·드럼), 조 월시(64·기타), 티머시 B 슈미트(64·베이스) 등 전성기 멤버가 고스란히 뭉친 터라 더 설렜을 것.  내한공연에서 ‘18번’은 막바지나 앙코르에 배치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이글스는 달랐다. 6번째 곡으로 대뜸 필살기를 꺼내들었다. 트럼펫 간주와 맞물려 익숙한 기타 전주가 흘러나왔다. 무대 뒤로는 석양이 질 무렵 듬성듬성 야자수가 놓인 황량한 캘리포니아의 낯익은 풍경(1976년 발표한 ‘호텔 캘리포니아’ 앨범 재킷)이 펼쳐졌다. 눈치를 챈 관객들의 함성으로 데시벨은 한껏 치솟았다. 팝 역사상 최고의 명곡 으로 꼽히는 ‘호텔 캘리포니아’. 1976년 발표됐지만 그보다는 재결성 직후인 1994년 내놓은 ‘헬 프리지스 오버’ 앨범에 삽입된 라이브가 더 유명한 곡이다.  너무 빨리 불을 붙인 건 아닐까. 기우였다. 한 호흡을 건너뛰더니 티머시 B 슈미트가 특유의 구슬픈 고음으로 또 다른 히트곡 ‘아이 캔 텔 유 와이’를 불러 들뜬 분위기를 이어갔다.  잠시 숨을 돌리고 무대에 돌아온 4명의 노병들은 어쿠스틱 기타를 메고 앉았다. 이번에는 주거니받거니 솔로 곡을 불렀다. 이글스란 밴드가 특별한 까닭은 탄탄한 연주는 기본인 데다 멤버 전원이 전혀 다른 컬러의 메인 보컬로 손색없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웠다. 웬만한 아카펠라 그룹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화음도 일품. 기타를 훑는 손놀림과 착착 감기는 드럼 연주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노장들이 27곡을 쏟아낸 뒤 무대에서 사라지자 팬들은 간절하게 기립박수로 “앙코르~”를 연호했다. 잠시 뒤 ‘테이크 잇 이지’와 ‘데스페라도’ 등 한국 팬들이 꼭 듣고 싶었던 3곡을 선물로 안기고 190분의 평생 잊지못할 무대를 끝냈다. 보통 내한공연에서 많아야 20곡 안팎임을 감안하면 40년 묵은 갈증을 풀기에 충분했다. ●무대서 사라지자 팬들 “앙코르 앙코르”  공연을 주최한 CJ E&M 관계자는 “이글스 몸값 때문에 큰 수익을 기대하는 건 애초 무리”라면서 “구매력을 가진 중장년층이 이글스처럼 차원이 다른 공연을 직접 경험토록 해 공연장을 찾는 층을 넓혀 간다는 목표는 달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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