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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최하림론(1)

    *역사와 개인이 만나는 시의 자리-최하림론. 1.거친 육성(肉聲)과 혼돈을 넘어서 고야의 한 그림에는 황폐하고 공포스러운 표정의 크로노스가 자식을잡아먹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그림 속의 주인공 크로노스는 ‘시간’을 상징하는 신으로서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 삼키는데,자식 중에하나인 제우스를 삼켰다가 제우스의 아내 메티스〔‘숙려(熟慮)’라는 뜻의 여신〕가 준 약을 마시게 되어 그를 토해놓는다.아버지의 뱃속에서 놓여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무한지옥인 타르타로스에가두어 버리고 은(銀)의 시대를 펼친다. 인간 상상력의 한 중요한 테마가 실현되어 있는 크로노스의 신화에서,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류의 뿌리 깊은 욕망을확인할 수 있다. 크로노스의 자식들인 우리 인간은 그의 뱃속에서 삶을 영위하지만,그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을 열망한다.종교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신화적 상상력을 실현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 밖에 존재할 수 없으며,인간의 삶이란 결국 시간과 벌이는 고투의 흔적이다.시간은 모든 고통의 원천이자 자기동일성의 근원적 조건인 것이다.우리는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서 생의 좌표와 의미를 가늠하고 수정한다. 시간이 거쳐가고 남은 자리에 부려져있는 소모와 쇠약, 또 한켠에서 벌어지는 생성의 현장은 인간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는 냉엄한 지표이다. 인간의 경험과 욕망을 담아내는 문학은 궁극적으로 시간과 투쟁하는존재의 모습을 형상화한다.시의 경우,이 대결의 양상은 정서적 직접성과 대상의 중층성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데,여기서 대상의 중층성이란,현실과의 역동적 상호 작용 속에서 구축되는 한 시인의 작품 세계에는 현실의 시간적 궤적과 생리적 연치가 더해가면서 변모하는 한자연인의 모습이 함께 담겨있음을 말한다. 시에는 시대와 개인을 통과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시는 시대와 개인,역사와 인간이 삼투하며 길항하는 생생한 내면의 현장이다.한 시인의 시세계를 조감함으로써 우리 자신 속에도 깃들어 살고 있는 시간의 신이 한 인간의 몸을 빌어 건네는 전언을 들을 수 있으며,아울러 몸 속에 지핀 시간과의 길고도 험한 싸움을 수행하는 한 정신의 고언(苦言)도 듣게 되는것이다. 이미 다섯 권의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1976),『작은 마을에서』(1982),『겨울 깊은 물소리』(1987),『속이 깊은 심연으로』(1991),『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1998) ― 을 상재한 바 있는 최하림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압축된 풍경과 서정적 형식을 통해 형상화해 왔다.그의 시에서 우리는 지나온 역사의 의미와 그 현실을 통과한 한 개인의 정신의 풍경을,더불어 몸을 받은 존재로서 시간을 경험하는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의역정을 보게 된다. 최하림의 시가 현실참여적 성격을 보이는 1970,80년대는 전사회적으로 정치적 열기가 강렬한 시기였다. 소위〈시의 시대〉로 불렸던 이 연대(年代)에 시가 발휘한 힘은 분화(噴火)를 꿈꾸던 당대인의 욕망과 상상력에서 발원한 것이었다.극렬한 용출을 욕망하게 만든 억압적 상황은 역설적으로 시에 힘을 실어주었던 배후(背後)였으며,현실의 후광 속에서 시는 단일하면서도강렬한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와 현실의거대한 깃발 아래,개인의 실존에 대한 시적 사유의 깊이나 언어적 성취가 상대적으로 소외되기도 하였다. 시 장르의 폭발력이 외부에 있었던 만큼,현실적 열기가 지나간 현장에는 작부들의 사이비 신세타령만이 웅성댈 뿐,역사와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들은 이제 실종되고 없다.80년대가 부려놓고 간 피폐하고 앙상한 언어의 잔해들 위로,묵시록적 상상력과 정신분열증적 언어들이 쇄말리즘의 안개 속에 밀려와 있고,‘시의 죽음’이 풍문처럼떠도는 상황에서 한 세기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미만하던 세기말의 암울한 전망과 우려가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함께 말끔하게 제거되면서,그 자리에는 기술자본주의의 지칠 줄 모르는 광란의 질주에 도취되어,그것에 저항하고 개입할 의지를 포기한상혼(商魂)들이 혼몽 속을 헤매고 있다. 최하림 시의 독자적 가능성은,‘역사적 연대’의 흔적들이 썰물처럼빠져나간 이 흉흉한 시점에서도 여전히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천착을 서정적긴장 속에서 일관되게 수행해 오고 있다는 점,아울러그러한 작업이 자기 존재,나아가 존재 일반에 대한 깊은 성찰에까지닿아있어 시적 사유의 폭과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7,80년대의 날선 육성(肉聲)과 90년대의 세기말적 언어들을 넘어서는 치열한 시적 사유를 만나게 된다.깊은 고통과오랜 침잠의 시간들이 동행하는 그 세계에서,우리는 ‘역사의 시대’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개인의 실존적 고뇌들이 진지한 역사적 상상력과 조우하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다.역사와 개인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최하림의 시적 태도는 우리 시대 문학의 자리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강인한 정신 속에 길이 있다.길을 만들고,그 길을 가는 것은 문학의 태생적인 운명이다.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꿈이,문학의 배태(胚胎)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2.역사의 공범의식,그 도덕적 순결성〈아우슈비쯔〉는 시간의 진행을 진보의 역사로 인식했던 인류에게근본적인 반성의 계기였다.근대의 쌍생아인 자본주의와 역사주의 모두에 가능태로 잠복해 있던 폭력적 욕망이 그 포악성을 드러낸 자리에서 역사는 시간의 근본적인 의미와 방향을 인간으로 하여금 되묻도록 요구하였다.20세기의 인류에게 〈아우슈비쯔〉가 있었던 것처럼우리 현대사의 한 극점에는 〈광주〉가 놓여있다.역사적 상상력의 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결과적으로 역사적 현실로부터 선회하는 최초의 기점이 되었다.그것은 고통의 진원지를 응시하는 힘의부족에서 연유한 것이었는데,〈광주〉를 문제삼던 많은 사람들은,아예 〈광주〉가 서있던 ‘역사의 자리’를 떠나버리고 말았다.바로 이지점이, 최하림을 여타의 시인들과 갈라놓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한국사의 비극적 상징인 [광주]를 통과하면서,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권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변혁을 지나면서 최하림은 역사와 존재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사유 속으로 침잠한다.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의 붕괴를 그는 외부적 현실을 통해서 해소하지 않고, 역사를 내면속에 소환하는 방식으로 끌어안는다.역사의 내면화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윤리학의 차원으로 환원한다.역사는 익명의 타자의 것이 아닌,주체의 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에 대한공격적인 정서보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반성적 사유가 시의 주를 이루게 된다.낭만적 격정과 들끓는 고뇌로부터 한걸음 비켜선 자리에서 최하림은 지나온 역사와 시간을,그리고 시와 인간을 응시한다. 어둠과 함께 온 기억들에 싸여 나는/나를 밝혀주지 못하는 불빛을본다/빛이 멀면 편안하다 죄가 많은/우리는 죄들이 두렵고 어둠이 내려서/아름다우니 어둠에 몸 섞는다/이런 밤 새들은 얼마나 조심스레/그들의 하늘을 날았던지/내 영혼은 어디를 방황했던지/검은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길들은/보이지 않게 밤으로 이동하고/새로운 추억이짐짝처럼 마른 나무 밑에 쌓인다/시간이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흘러 간다/시간을 따라서 광목도로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곳이 있을것이다/잠시 유숙할 집이 있을 것이다/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다/한 사람에게만은 사랑이었고 배반이었던 여자도어디쯤 있을 것이다/그러나 세상은 결국너를 버리고 달려간다/세상은 고통스럽고 일어서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하다/내 가슴은 사직처럼 허물어져간다/예감을 노래해선 안 된다/나는 밤으로 간다 잘있거라/한번도 힘껏 꽃잎 피지 못하고/한번도 힘껏 울어보지 못한/정다운 말들아 내 딸들아 ―「光木道路」 전문 한바탕의 회오리 같은 역사가 훑고 지나간 내면 세계에,짙은 허무와체념이 배음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쓸쓸한 어조 사이로 배어나오는고통과 절망 속에,내면으로 귀환한 역사의 흔적이 음각되어 있다. 이흔적이 구체화된 기억의 형상은 최하림의 역사 인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초로서,그의 시 곳곳에는 역사가 남기고 간 상처가 고통의 기억으로 잔존해 있다.그 기억의 공간은,‘절망의 부레 찢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악마구리같이 아우성치며’(「말하기 전에,나는」) ‘피투성이 된 붉고붉은 입술들’(「우리들은 오늘도」) ‘갈가리찢긴 육신의 목소리’(「무등산」)들이 ‘합창을 이루는’, 아비규환의 절규가 가득한 곳이다.이러한 고통스러운 공포의 기억을 조성한과거는‘몇 대의 트럭이 난폭하게 거리를 질러가고’(「부식 동판화」) ‘탐욕스러운 개들이 안개 속으로 달려가’ (「고통의 문지방」)며 ‘사나이가 시간을 죄스레 칼질하고 생채기에서 뚝,뚝, 피가 흐르는’(「상처」),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진 광란의 시간이다.주목할 점은 이러한 과거의 기억이 역사 자체의 이미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시적 화자를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만드는 ‘죄와 벌’의 이미지로 출현한다는 사실이다.이는 “기억의 아이들이 붉은 얼굴로 지나가고/어디서인지 흰 이를 드러내며 킬킬킬킬/웃는 아이”(「섬진강」)와 같이 과거의 기억에 대응하는 심리적 이미지가 대체로 자조적이고 자학적인 형상으로 각인되어 시인의 내면에 환기된다는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역사적 현장을 투과하면서 굴절,각인된 이러한이미지들은 시인이 과거의 역사를 자기반성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최하림에게서 과거는 부정적 실체라기보다,폭압적 상황을 결과적으로 방기했던 고통스런 부채의 시간인 것이다. 역사를 내면화하는 이러한 방식은 최하림의 많은 시편들을 의식의풍경으로 읽게 만든다.인용된 시의 배경인 ‘어둠’의 상황은 죄의식속에 고통스러워하는 화자의 내면을 상징한다.‘빛’과 대조되는 ‘어둠’은,공포와 방황의 시간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윤리적 자의식의내면 상태를 보여준다.이 어둠 속에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적 경험과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이 각인시켜놓은 고통스러운 상흔,시간을 역사의 진보로 인식한 20세기적 사유의 참담한 좌절이 가로놓여져 있다. ‘빛’으로 생각했던 역사와 시간의 배반을 절망적인 체념으로 추억하면서도,자신을 ‘어둠과 함께 온’ 역사의 주체로 사유하는 시인에게 과거의 기억은 ‘짐짝’ 같이 둔중한 고통의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광포한 역사의 기억이 형벌과 같은 공포의 대상이라면,그 기억의공간 속에서 시인은 자신을 유형수(流刑囚)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인 역사,패배의 역사를 주체가 되어 감내하려는 태도는 최하림시의 역사 의식과 도덕적 순결성의 원천이다. 역사의 폭력에 희생된영혼들이 ‘보이지 않는 내 맘속의맘까지도 감시한다’(「죽은 자들이여,너희는 어디 있는가」)는 토로나,‘말’에 대한 자학적인 공격,그리고 시의 언어를 형벌로 인식하는 태도 등은 최하림이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의식의 내면으로 소환하여 현재의 윤리적 검열의 내적장치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베드로] 연작시들과 [소록도] 시편들은,자신을 불행한 역사의 공범자로 인식하는 시인의 이러한 의식을 반영한다.가롯유다뿐만 아니라베드로 역시,예수를 로마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긴 공범자라는죄의식이 죽음과 패배의 시대를 통과한 최하림의 내면 속에 자리잡고있는 것이다. 포악한 현실의 암묵적 공범이라는 이러한 윤리적 자의식은 “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대용서의 전제를 마련한다.이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으로서,우리는 최하림의 시에서 개인의 윤리성의 문제로 화육(化肉)한 역사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그에게 있어서 역사는자신의 [시와 삶]을 향해 끊임없이 윤리적 질문을 투척하는 고통의실체인것이며,시는 역사에 바치는 고해성사인 셈이다.따라서 시 초반부의 ‘빛이 멀면 편안하다’는 진술은,회한과 고통이 배어있는 역설적 고백으로서,이러한 도덕적 순결성은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종교적인 성격에까지 닿아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최하림의 시는 시간을 보는 시각에서 지상으로 복귀한다. ‘사랑’이자 ‘배반’이었던 역사와, 역사의 연인들은 시간의 무심한흐름 속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것이기 때문이다.시인은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멸하는 역사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다. ‘세상은 결국 너를 버리고 달려갈’ 것이고 역사의 전망을 모색하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할’ 것이지만, 그래도 시인은 다시그 역사의 암담한 ‘밤으로 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예감을 노래해선 안 된다’는 당위적 진술과 ‘나는 밤으로 간다’는 고백 사이에는, ‘역사의 진보’라는 믿음의 종말이 몰고온 뼈아픈 각성과 현재의 암담함을 감내하겠다는 고뇌의 의지가 가로놓여 있다.시간의 냉혹함을 응시하는 유한한 역사적 존재의 허무와 절망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도 결코, 역사적 삶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한 정신의 비장한 모습을 보게 된다. 역사를 자신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계기로 수용하면서도,다시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최하림의 엄격한 현실주의에서 우리는 고결한 지상의 세계와 만난다.미래를 밝혀줄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자기 성찰의 자리로 삼는 그 강인한 정신의 고도(孤島)는 우리에게시의 자리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3.인간의 실존,그 처연한 고요 현재는 과거의 기억 위에서 진행되며 모든 삶은 시간 속에 묻힌다는명제는,최하림 시의 기본 전제이다. 최근 시집『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에는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와 실존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이 시집에 수록된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동일 제목의 두 편의 시는 최하림의 시적 작업이 그동안 집요하게 천착해온 두 테마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두 편의 작품에서 추구하는 [집]이란,하나는 우리 모두가 다시 꿈꾸며 세워야 할 역사적 미래를 의미하고,나머지 하나는 실존적개인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적막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 두 개의 테마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작품 속에 나타나는데, 인간실존의 주제가 보다 근원적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것이 최하림 시의보다 깊은 심층을 이룬다고 하겠다.이는 역사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개인적 실존의 문제를놓지 않고 역사적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자세는, 한 평론가의 지적대로 그를 ‘고전적 정신의 표상’으로 이해하게 하는 요인이다.개인의존재성에서 출발하여 현실의 문제에 육박해가는 이러한 특징은 최하림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그의 시의 미덕이다.[집으로 가는 길] 두 번째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도달한 개인적 실존의 한 극점을 보게 된다.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고요/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내 고요를/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집으로 가는 길」(88쪽)전문 이 작품은 소리가 멎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깊은 고적(孤寂)의 세계를 보여준다.원초적 고요에 휩싸인 흑백필름 같은 이 침묵의 세계에서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의 풍경을 본다.모성의 자궁에서 나와 영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인간은,그가 출발한 고요의 세계와 도착할 침묵의 집 사이에 존재한다.그 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길을 가야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 ‘많은 길을 걸어’ 귀환하는 ‘고향집’은 실존의 근원지로서,길의 출발이었던 ‘어머니’조차 존재하지않는 무(無)의 세계이다.‘공기는 썰렁하고’ ‘치운 바람이 도’는그 적막의 세계에서 ‘벌렁 드러눕는’,이 시의 가장 처연한 대목은존재의 고단한 무게와 허무함을,행위를 통해 서늘하게 표현하고 있다.존재의 무게를 부려놓는 행위는 주검이 되어 땅에 몸을 누이는 행위를 환기시킨다.여기에서 시인이 도달한 ‘처연한 고요’가 감도는 ‘마룻바닥’은 내가 떠나온 어머니,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도달했을 인간 보편의 공간이자 삶 속에 내재한 근원적인 침묵의 세계이다.죽음이란,결국 존재를 끌고 다니던 침묵이 보편적인 고요의 세계로 돌아가 합류하는 영역인 것이다.그 거대한 절대 침묵의 세계 속으로의 편입,그것이 바로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처연한 고요’의 세계에 도달했다는 진술은, 시인이 이미 이 상태를 경험했음을 의미한다.그것은 사물로부터의 소외를 처절하게 체험했던 투병기간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시인이 도달한 이‘처연한 고요’의 세계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무색계’(「구천동시론」)의 심연을 이루는 정서이다.색신(色身)과 물질의 속박을 벗어나 순정신적 세계를 의미하는 무색계는,최근 시집(『굴참나무 숲에서아이들이 온다』)에 다수를 차지하는 만물과 교감을 누리는 시들의정신적 바탕이라 할 수 있다.사물로 스며들고 사물에 개방되어 만물과 동화(同和)를 경험하는 투명하고 정결한 세계는,이미 무색계에 들어와 있는 상태로서,사물과의 자유로운 정신적교감을 보여주는 이시들 속에 처연한 정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이 ‘무색계’가 육체적 실존의 끝을 기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의 시세계에 한 축을 이루는 개인적 실존의 문제는 그의 시에배어있는 허무와 쓸쓸함의 원천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존재의 막막함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실존의 처연함,그 서늘한 고요를 감지하게 된다.어떠한 과장이나 포오즈도 용납하지 않고 존재의 현실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그의 준엄한 태도는,현학적 사변과 요설,감상적 자기 연민과 소영웅주의가 만연한 오늘의 문학적 현실을 반성케 하는 시정신의 본질을 보여 준다.언어의 사원에서 울려나오는 서늘한 사유는,삶이 부과한 시의 자리이자 시가 돌아가야 할 시원(始原)이다. 김문주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9.끝)일본 도쿄

    도쿄시내를 동서로 가르는 지하철 유라쿠초센(有樂町線)의 중간지점에는 사쿠라다몬(櫻田門)이라는 역이 있다.이 역의 3번 출구는 경시청 입구로,4번 출구는 사쿠라다몬으로 나온다.황궁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사쿠라다몬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고색창연한 법무성 건물이,오른쪽으로는 멀리 일본 의회의사당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로 정면,불과 80m 정도의 거리에는 일본 치안의 총본산인경시청 건물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기자가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이었다.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인근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사쿠라다몬을 지나 황거(皇居·황궁)앞 광장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다.일본사람들이길조(吉鳥)로 여기는 까마귀는 떼를 지어 날아다녔고,그 아래로 일본의 상징 일황이 거주하는 황거가 적막에 갇혀 있었다. 일제하 항일 독립투사들의 의열투쟁은 조선 땅이나 중국·러시아 등망명지는 물론 적지의 중심부인 일본 본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1932년 1월8일.일황 히로히토(裕仁)는 도쿄시내 서북부에 위치한 요요기(代代木)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을 마치고 황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일황이 탄 마차가 황궁 입구의 사쿠라다몬에 다다를 무렵 난데없이 폭탄 하나가 날아들었다.폭탄은 일황이 탄 마차 뒷편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마리가거꾸러졌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황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金弘壹·전 광복회장,작고)은 회고록에서 “군중과 일황의 거리가 100m 정도가 될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지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가볍게 만들다보니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거사의 주인공인 이봉창(李奉昌·1900∼1932)의사는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9월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10일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백범 김구 선생이 이끈 한인애국단 소속인 이의사는 의거에 앞서 “물품(폭탄)을 1월8일 방매하겠다(터뜨리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백범에게 보내 거사일을 미리 알렸다.당일 이의사는 일황이 관병식을 마치고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을 통과하여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본인으로 가장해 기다리다가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의거후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식민지 백성인 조선인이 도쿄 중심부,그것도 일본 치안의 총지휘부인 경시청 앞에서 일황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었다.일본은 이 사건을 ‘사쿠라다몬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최서면(崔書勉)국제한국연구원장은 “엄격히 말해서는 ‘경시청앞 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나 ‘사쿠라다몬사건’역시일황과 관련된 표현이므로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이의사의 의거현장인 경시청 정문 오른쪽에는 ‘경시청 창립 100주년 기념식수’라는 자그마한 기념표석이 서 있으나 이의사의 의거를 알리는기념물은 어디에도 없었다.일본 경찰로서야 ‘수치스런 기억’이겠지만 이는 또 하나의 역사은폐가 아닐까. 경시청 앞에서 사거리를 지나 황거를 에워싼 해자(垓子,궁성 주위에방어용으로 파놓은 연못)를 건너 사쿠라다몬으로 들어서면 황거의 분위기가 완연히 느껴진다.도쿄 시내 한가운데 위치하면서도 마치 외떤 섬과 같은 분위기가 든다.문 안으로 들어서면 거목과 잘 포장된 길이 황거로 안내한다.포도((鋪道)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자갈이 깔린길이 나타나는데 넘실거리는 해자의 물결과 함께 황거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쿄 시내 치요다(千代田)구에 위치한 이 궁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시대에 만든 것으로 해자가 이중으로 조성돼 있다.황거의 면적은 총30만평 규모로,제122대왕인 메이지(明治)가 황거를 교토(京都)에서 옮겨온 뒤 도쿄성으로불린다.자갈밭 중간지점 쯤에는 이중으로 된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흔히 이를 니주바시(二重橋)라고 부른다.바로 황거를 연결하는 다리로,길이는 약 29m,폭은 약 7m정도다. 지방에서 도쿄 관광을 온듯한 일본인들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무리를 지어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기념사진 촬영용으로 만든 계단식 간이의자가 있었고 전담 사진사도 두 명이나 됐다.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다나카 아키코(田中明希子·22·국제관광사진주식회사 소속)씨는 “관광객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즐겨찍는다”고 말했다.사진값은 2장 1세트로 2,100엔(송료 별도)이라고했다. 니주바시 입구에는 3명이 경비를 서는데 근처까지 관광객의 접근이가능했다.회청색이 감도는 황거 건물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사진 몇장을 찍고는 다시 기념사진 찍는 곳으로 내려와,잠시짬을 내 쉬고 있는 다나카씨를 찾아갔다. 기자는 일제강점기때 이곳에서 발생한 ‘조선인 폭탄투척’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봉창의사의 사쿠라다몬사건은 물론 김지섭(金祉燮·1884∼1928)의사의 니주바시폭탄투척 사건도 전연 몰랐다.학교에서 그런 내용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더러 한국인 관광객이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곤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했다. 1924년 1월5일 오후7시쯤 한 조선인이 니주바시에 던진 폭탄사건으로 일본은 소용돌이에 빠졌다.신(神)으로 받드는 일황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내무차관견책에 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국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 파면되었다. 의열단 소속 김의사는 1924년초 도쿄에서 일본총리를 비롯해 조선총독 등이 참석하는 제국의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폭살할목적으로 23년말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일본으로 향했다.그러나 제국의회가 갑자기 연기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의사는 계획을 변경,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황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그러나 접근이 불가능하자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궁성 입구인 니주바시에폭탄을 던진 것이다. 아깝게도 김의사가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다.타고온 배가 습기 많은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 폭탄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김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중 고문 후유증으로1928년 2월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했다. 76년전 김의사가 목숨을 내놓고 폭탄을 던진 니주바시 아래로 백조들이 무리를 지어 쌀쌀한 초겨울 날씨를 한가로이 즐기고 있었다. 도쿄 글 정운현기자 jwh59@. *연재를 마치며. 구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을 되살려 민족정론지로 거듭 태어난 ‘대한매일’이 금년 7월초부터 매주 수요일(일부화요일)자에 장기기획물로 연재한 ‘해외항일전적지를 찾아서’는 일제강점기하 선열들의 항일투쟁 현장을 관련자료와 현지 전문가들의도움을 받아,현장답사를 통해 생생히 복원한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 금년초 대한매일은 김삼웅 주필과 편집국 특집기획팀 소속 취재기자와 사진기자,외부전문가 등으로 특별취재반을 편성해 해외에 산재한항일유적지 실태를 파악한 뒤 구체적인 지역선정과 일정확정에 들어갔다.논의 끝에 최종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 4개국을 답사대상지로 선정했다. 무장투쟁 본거지인 중국의 동북3성을 첫 답사지로 결정했다.중국은지역이 광범위한데다 항일운동 주무대였다는 점에서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벌인 동북3성과,임시정부·광복군의 활동무대인 관내지역을 2차로 나눠 답사했다.이어 미국 러시아 일본의 항일유적지 현장답사와취재 순으로 이어졌다. 이번 기획연재는 ‘청산리전투’등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전과로 기록된 독립투쟁의 현장을 기자가 직접 답사하여 딱딱한 논문 형태가아닌,재미있고 현장감있는 신문기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그러면서도 관련자료와 현지 역사학자·주민 증언을 토대로 해 학술적 가치도 결코 적지 않다고 인정받았다. 특히 답사과정에서 보존가치가 크나 방치된 유적을 현장사진과 함께실감있게 보도함으로써 관계당국이 적극적으로 발굴·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토록 자극을 주었다.또 독자들에게는 선열의 위업을 현창하고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자부한다. 아울러 취재반은답사과정에서 북한 김일성주석이 소년시절 다닌,중국 길림시 소재 육문(毓文)중학을 남한 최초로 취재하였으며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 졸업 당시 사진을 발굴하는 등 과외의 성과도 거두었다.취재반은 이번 답사를 통해 취재·보도한 내용을 보완,내년초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 독립운동가 강우규의사 80주기 기념식

    평안남도 중앙도민회(회장 禹潤根)와 평안남도(지사 金麟善)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 강당에서 일우(日愚) 강우규(姜宇奎) 의사 순국 8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강 의사의 우국충정을 기릴 예정인 이날 행사는 강 의사의 약력 소개,추모사 낭독,이북7도 부녀연합회 합창단의 추모가 합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강 의사는 평남 덕천군 태생으로 1919년 예순의 고령임에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일본 사이토 미노루(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남대문역 앞에서 폭탄을 투척,곧바로 일경에 붙잡힌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현재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강 의사의 시비가 있으며 지난 62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정기홍기자 hong@
  • 金대통령 동교동 사저 ‘역사속으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의 애환이 서려 있던동교동 사저가 지난 8월28일 철거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사장 吳淇坪)은 지난 8월초 재단이사회회의에서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 1에 위치한 건평 30평의 1층 단독주택인 김 대통령의 사저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대신 인근 부지를 합쳐 내년 9월까지 지하 3층,지상 5층 규모의 재단건물 신축공사를시작했다. 동교동 사저는 지난 62년 3월 김 대통령이 신촌의 사글세방에서 이사와 지난 95년 말 일산 사저로 옮겨가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71년 사제폭발물 투척과 80년대 가택연금 등 김 대통령이 33년간 측근들과 고통의 세월을 함께 버티어 냈던 장소다. 이런 상징성 때문에 동교동 사저는 보존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아태재단측에서 퇴임후 경호문제 등을 고려,새 재단건물을 짓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청와대측과 협의를 거쳐 철거공사를 단행한 것으로알려졌다. 지난 95년 김 대통령이 일산으로 이사가면서 맏아들 김홍일(金弘一·민주)의원에게 넘겼던 동교동 사저는 지난해 7월 김 의원이 서교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어머니 이희호(李姬鎬)여사에게 팔렸다.철거 전까지는 비서관이 기거하면서 관리해왔다. 이송하기자 songha@
  • “동메달 만큼은 절대 양보 못해”

    *농구. 한국 여자농구가 미국의 벽에 막혀 3·4위전으로 밀려 났다. 한국은 29일 시드니 슈퍼돔에서 열린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전반내내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선전했으나 후반 교체멤버 나탈리 윌리엄스(188㎝·10점 11리바운드)에게 바스켓을 점령당하면서 흐름을 놓쳐78-65로 졌다. 16년만의 우승 기회가 무산된 한국은 30일 오후 4시(한국시간) 홈팀호주에 52-64로 진 브라질과 동메달을 다툰다. 한국은 전주원(12점) 정은순(11점) 두 노장의 노련미를 바탕으로 속공과 지공을 번갈아 펼치는 ‘템포 바스켓볼’을 효과적으로 구사한데다 박정은(14점 3점슛 4개) 양정옥(3점슛 3개)의 3점포가 매끄럽게터져 호주 관중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으며 전반을 40-42로 마쳤다. 한국은 그러나 후반들어 미국이 전반전과는 달리 골밑을 집중 공략하는 전술의 변화를 꾀하면서 수세로 몰렸다.미국은 5분쯤 주전센터 리사 레슬리(15점 12리바운드) 대신 힘이 좋은 나탈리 윌리엄스를 투입해 바스켓 밑에 포진시키고 스피드가 뛰어난 세릴 스웁스(19점 12리바운드)와 돈 스탤리가 과감하게 드라이브 인을 시도하면서 안정세를타기 시작했다.윌리엄스는 교체 직후부터 6분여동안 10점을 몰아 넣어 대세를 가르는 위력을 보였다. 당황한 한국은 외곽포로 점수차를 줄이려 했지만 전반과는 달리 적중도가 떨어진데다 체력마저 달려 13분쯤에는 51-67까지 밀리면서 승리에서 멀어졌다. *육상. 여자 창던지기의 이영선(정선군청)이 한국 투척 사상 첫 결선 진입은 커녕 어이 없는 기록으로 예선에서 미끄러졌다. 98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영선은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계속된 예선에서 자신의 한국기록(58m15)에 무려 9m 가까이 뒤진 49m84를 던져 출전선수 35명중 33위에 머물렀다.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13위에 올라 기대를 모았던 이영선마저 예선탈락함에 따라 한국육상은 이번 대회 트랙 및 필드 종목에서 출전선수 7명 전원이 자기 기록도 내지 못한 채 예선 탈락하는 최악의 성적을 냈다. 한편 육상 첫날 남자 20㎞ 경보에서 베르나르도 세구라(멕시코)의실격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던 로베르트 코르제니오프스키(폴란드)는 50㎞경보에서도 3시간42분22초로 정상에 올라 올림픽 사상 첫 2종목동시 제패에 성공했다. *카누. 남성호(대구동구청)가 카약 1인승 남자 500m 2회전에서 탈락했다. *요트. 김호곤(보령시청)이 요트 레이저급에서 종합 27위로 일정을 마쳤다. 시드니 특별취재단
  • 백범 中 피난처 복원 모금운동 전개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의 피난처였던 중국 저장성(浙江省) 자싱시(嘉興市)의 정자를 사적지로 보존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전개된다. 경기도 성남시 모란장 상인회(회장 전성배)는 10월1일 성남시청 앞광장에서 바자회를 열어 이익금 전액을 김구선생 피난처 복원에 사용하기로 했다고 29일 밝혔다.이날 바자회에서는 상인회 소속 화훼·잡곡·야채·의류 등 13개 분야 상인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이 기금모금운동은 시청,상공회의소,분당YMCA 등이 후원하는 범시민운동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김구선생의 피난처였던 저장성 영안정(永安亭)은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사건으로 일본군에 쫓기던 김구선생이 중국인 저부성(저輔成) 저장성 성주의 도움으로 도피생활을 했던 곳으로 독립운동가인 이용상(77·성남시 수정구 신흥동)씨의 현지답사로 존재가밝혀졌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투포환 이명선 예상밖 예선 탈락

    시드니올림픽 종반을 향해 치닫고 있는 27일 한국선수단은 야구 드림팀이 ‘숙적’ 일본을 꺾고 구기종목 첫 메달 안긴데 이어 레슬링58㎏급의 김인섭이 은메달을 추가하는 선전을 펼쳤지만 육상과 배구등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육 상]이명선(익산시청)이 여자투포환 예선에서 탈락,한국 육상 필드 첫 메달의 꿈이 좌절됐다. 아시아 1인자 이명선은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속개된 예선에서 17m44로 15위에 그쳐 12강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야니나 크롤치크(벨로루시)는 이명선의 한국기록인 19m36을 기록,1위로 결선에 올랐고 발렌티나 페드주쉬나(오스트리아)는 17m84의 기록으로 12강에 턱걸이했다. 이명선이 어이없게 탈락함에 따라 한국 육상 투척(투창·투포환·투해머)은 29일 여자 창던지기 예선에 출전하는 이영선(정선군청)에게사상 첫 결선 진출의 희망을 걸게 됐다. [하 키] 여자 하키가 남아공을 꺾고 9위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한국은 올림픽파크 스테이트하키센터에서 열린 9∼10위전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펼친 끝에 3-0으로 완승했다.이로써한국은 이번 대회 10개 출전팀 중에서 9위를 기록했다.한국은 김은진(한국통신)이 전반종료 12분여를 남겨 놓고 잇따라 골을 성공시켜 2-0으로 앞서 나갔다.전반 종료 직전 유희주(한국통신)의 페널티 코너로 3-0까지 점수차를 벌린 한국은 후반에도 일방적인 공격을 펼쳤지만 더이상 점수를얻지는 못했다. [배 구]아쉽게 4강 진출에 실패한 여자배구가 중국에도 져 7∼8위전으로 밀려났다. 한국은 시드니 올림픽파크의 제4 파빌리온에서 열린 중국과의 5∼6위전에서 주전들의 체력 한계를 드러내며 1-3(25-23 19-25 23-25 19-25)으로 역전패했다.전날 미국과의 4강전에서 지나치게 체력을 쏟은탓인지 한국은 장소연(11점) 박미경(11점)만이 제몫을 했을 뿐 구민정(10점) 박수정(7점) 등 대부분의 주전들이 부진했다.한편 이희완감독이 이끄는 독일은 크로아티아를 3-1로 꺾고 중국과 5∼6위전을갖게 됐다. 한국은 28일 오전 10시30분 크로아티아와 최종전을 갖는다. 시드니 특별취재단
  • 웃지못할 어느 고교의 시험답안

    유니텔을 이용하는 한 고교생이 올린 글이 요즘 인터넷에서 화제다.학교에서최근 치른 시험의 주관식 답안 채점을 검토하는 일을 맡았던 이 학생은 친구들의 답안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또 인터넷에서 이 글을 본 기성세대들도 놀랐다. 먼저 국사과목. 1932년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거행된 일본의 전승축하식에폭탄을 투척한 의사를 묻는 문제에 ‘정말 많은’ 학생들이 ‘안중근’이라고 적었다.답은 윤봉길.‘윤복길’이라는 답도 있었다. 지능발달이 떨어지고 인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정신장애를묻자 ‘돌대가리’라고 적은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정답은 정신박약. 독립된 기업들이 기술 합리화를 위해 지역적·다각적으로 결합하는 기업집단(콤비나트)을 ‘벤처기업’‘콤비나이트’로,대기업간의 사업교환으로 인한구조조정(빅딜)을 ‘IMF’‘구제금융’‘벤처기업’으로,수신자가 요금을 부담하는 전화(클로버 서비스)를 ‘나는 018이다’‘끝내주는 서비스’로 적는등 기발한 오답들이 즐비했다. 가장 포복절도할 대목은 95년 출범해 공산품과 농산물 및 서비스 교역에까지무역자유화를 추구하는 국제기구(WTO·세계무역기구)를 묻는 문제.빈칸은 세칸.한 학생이 용감하게도 ‘U-N’이라고 적었다.그외 ‘IMF’‘WHO’라고 적은 답도 상당수. 의식불명 상태의 응급환자 발생시 가장 먼저 해야할 일로 환자의 무엇을 확보해야 하느냐는 문제에는 ‘포지션’‘목숨’‘119’‘의식’‘돈’이라고쓴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서울 B중학교 교사 김모씨(41)는 “아이들이 개념이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정확하게 전달할 줄을 몰라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현상이나 개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슬하다”고 말했다. 임병선기자 bsnim@
  • “美軍범죄 기소때 신병 인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이달초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 미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에 협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청와대측이 19일 밝혔다. 황원탁(黃源卓)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SOFA 개정 협상 방향에 언급,“범죄를 저지른 미군을 기소시점에서 신병을 인도받는 것과 미군기지에 사유재산을 억울하게 빼앗기게 되는 문제는 이번 협상에서 관철시켜 나갈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황 수석은 매향리 문제 해결방안과 관련,“사격장 폐쇄와 주민이주 가운데이주를 원하는 주민이 75%라는 보고를 받았다”면서 “이 문제는 시간을 갖고 지혜롭게 해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장관도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빠르면 다음주나늦어도 다음달초까지는 미국과 SOFA 개정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장관은 “정부는 이번 협상에서 미국이 다른 나라와 맺은 SOFA와 비교해실질적으로 불평등한 요소가 없도록 적극적인 자세로 임할 것”고 밝혔다.특히 “미군 피의자의 신병인도 시기를 앞당기고 환경조항을 신설하는 등 국민들의 관심사를 우선적으로 해결해 나갈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매향리 사격장 주민들의 피해문제에 대해 “한·미 양국의 조사결과 피해가 확인되는 대로 적절한 보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장관은 “SOFA 협상,매향리사건에 따라 주한 미 대사관의 월담 및 화염병 투척사건 등이 발생하는 등 최근 바람직스럽지 못한 행동이 일어나고 있다”고지적하면서 “과격한 방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면 한·미관계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김규환기자 khkim@
  • ‘평화시위’ 다시 무너지나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평화시위 문화가 무너지나. 1일 대학생들이 고려대 앞에서 근로자의 날 시위를 벌이면서 1년만에 화염병을 던져 폭력시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5월에는 근로자의 날 집회를 시작으로 대학가와 노동계의 집회가 줄줄이 잡혀 있어 과거의 폭력시위로 되돌아가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주요 집회만 꼽아봐도 18∼19일 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서총련) 출범식,22∼25일 통일대동제,31일 민주노총의 ‘주5일 근무제를 위한 총파업’등이다. 경찰은 화염병 재등장에 대해 크게 두갈래로 분석하고 있다.하나는 최근 경찰이 최루탄 사용을 자제하는 등 시위대와 충돌을 피하면서 시위효과가 떨어지자 관심을 끌기 위해 폭력시위를 했다는 것이다.다른 하나는 26∼28일 예정된 한총련 출범식을 앞두고 한총련과 운동방향이 다른 PD계열(민중민주주의) 중심의 전국학생협의회 소속 학생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화염병을 던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경찰은 앞으로도 폭력시위에 대해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방침이다.감정적으로 대응하다가는 이제 겨우 정착돼 가고 있는 평화시위 문화가 물거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1일 시위에서도 전경 27개 중대 3,000여명을 동원해진압했지만 최루탄은 사용하지 않았다. 경찰청 정보학원반 관계자는 “학생들이 폭력시위를 통해 요구와 주장의 선명성을 부각시키려 한 것 같다”면서 “학생들도 대승적 견지에서 과거의 잘못된 시위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손낙구(孫洛龜·38) 교육선전실장은 “평화시위 문화가 정착되고있는 가운데 화염병이 다시 등장해 유감”이라면서 “국민 정서에 동떨어진폭력시위 문화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동국대 사회학과 이건(李健·46) 교수는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으려는문화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면서 “자신들의 이익을우격다짐으로 관철하려하는 것은 ‘공동체적 사회’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재천 전영우기자 patrick@. *경찰, 집회 허가요건 강화 추진. 경찰청은 지난 1일의 노동절 화염병 시위와관련,공공질서 유지와 일반 시민의 안전을 위해 집회허가 요건을 강화하는 쪽으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의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무영(李茂永) 경찰청장은 2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현행 집시법은 집회를여는 단체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전제,“집회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하되 개최 단체의 과격시위 전력과 집회 참가인원 등에 따라 집회허가를 제재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청장은 “사회질서 유지 차원에서 집시법 개정안을 마련,공청회 등을 거쳐 의견을 수렴한 뒤 올 하반기쯤 정기국회에 상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경찰은 이에 따라 폭력·과격시위 전력이 있는 단체의 집회 참가 배제를 의무화하고 위반시 처벌 규정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경찰은 또 질서유지선(폴리스 라인)을 침범할 때 처벌을 강화하고 주말과 공휴일 도심지에서대규모 집회 및 시위를 제한하는 방안,집회신고때 내는 질서유지 각서를 법으로 규정하는 방안도 개정안에 담을 방침이다. 경찰은 이와 함께 소음도가 일정기준을넘어서는 집회,한 장소에서의 장기집회,다른 사람의 집회 개최를 방해하기 위한 집회,특정인을 겨냥한 음해성집회 등의 허가를 제한하는 방안도 마련키로 했다. 김경운기자 kkwoon@. * 화염병 투척자 전원 구속수사. 서울지검 공안2부(부장 朴允煥)는 2일 ‘전국학생협의회’(전학협) 소속 대학생들의 고려대 앞 화염병 시위와 관련,화염병 투척자 등 극렬 가담자를 전원 구속수사하라고 경찰에 지시했다. 검찰 관계자는 “화염병 제조·투척자,투석자 등 폭력시위 적극 가담자는현장체증사진 판독작업을 거쳐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모두 구속수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편 성북경찰서는 가두행진을 벌이다 연행된 141명 가운데 격렬하게 시위를 벌인 17명을 조사하고 있다.경찰은 수사전담반을 편성,화염병 투척자 등에 대한 검거에도 나섰다. 이종락기자 jrlee@. *축협조합원 격렬 시위. 농·축협 통합에 반대하는 ‘통합농협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소속 축협조합원 800여명이 20일 오전 9시 서울 충정로 농협중앙회 주변에서도로를 점거하는 등 산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통합농협중앙회장 선출 장소인 농협중앙회 건물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무산됐다.조합원들은 진입이 저지되자 도로에 드러눕는 등저항했으며,이 바람에 이 일대가 3시간 남짓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이창구기자 window2@. *폭력시위 대학생 5명 영장. 경찰은 2일 근로자의 날을 맞아 불법시위를 벌인 이모씨(22·연세대 경제학과3) 등 5명에 대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15명을 입건했다. 이씨 등은 지난달 29일 오후 민주노총 주최로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근로자의 날 기념집회를 마친 뒤 종로1가 부근에서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거나돌을 던지는 등 불법 시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창구기자
  • 선거폭력사범 구속 수사

    검찰은 2일 불법선거운동을 감시하는 선관위 직원·선거부정감시단원 및 후보자를 폭행한 선거폭력사범 19명을 입건해 4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대검공안부(부장 金珏泳)는 이날 지난달 28일 법정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선거자유를 침해하는 선거폭력이 늘고 있다고 보고 관련자를 구속수사하고 선거법에 따라 징역 10년 이하의 중형을 구형하라고 일선 지검·지청에 지시했다 검찰의 중점단속 대상은 ▲선관위 직원·선거부정감시단원에 대한 폭력행위,후보자에 대한 테러·폭행,선거운동원 상호간 폭력,선관위 및 정당사무실에대한 난입 등 선거폭력사범 ▲연설회장에 대한 위험물 투척 등 소란행위,연설방해 행위 등 합동·정당연설회 등 방해사범 ▲청중동원 대가 현금살포,선거구민을 동원한 조직적인 음식물 제공 등 기부행위 등이다. 검찰은 이같은 방침에 따라 전남 해남에서 무소속 후보의 사전선거운동을단속하던 선관위 직원 2명의 상의를 붙잡고 협박을 한 선거운동원 문모씨(39)와 강원도 태백시시의회 의장실에 찾아가 집기 등을 부순 전 시의원 이모씨(42) 등을 구속했다.또 경남 거제에서 연설후 유세용 차량에서 내려오는 모정당 후보의 뺨을 때린 지역신문사 대표 박모씨(48)에 대해 이날 구속영장을청구했다. 강충식기자 chungsik@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15)이봉창 의사

    20세기 전반기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이 일제의 침략을받았다.일제의 침략을 받은 각 민족은 국가와 민족을 보존하기 위해 일본에저항해 싸웠다.그러나 한국민족만큼 강인하고 격렬하게 일제와 싸운 민족은드물었다.그 중에서도 침략의 괴수인 일왕 처단을 시도한 민족은 우리민족뿐이었다. 1932년 1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이 타고 가던 마차에 폭탄이 날아들었다.일왕을 처단하려는 조선인 애국지사가 던진 세번째 폭탄이었다.1924년 박열(朴烈) 의사가 히로히토의 결혼식에 폭탄을 던지려다 사전에발각되었고,1925년엔 김지섭(金祉燮) 의사가 일본궁성으로 들어가는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바 있었다.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한국인 청년은 이봉창(李奉昌) 의사였다.이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수원의 철로부근에 있던 땅을 일본인에게 빼앗긴 탓으로 그는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랐다.소년시절에는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와 용산역에서 기차운전 연습생으로일하기도 했다.그리고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뒤 6년여동안 나고야 등지를 떠돌며 노동으로 삶을 꾸려갔다.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이 의사는 일본인과 분간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일본말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습속도 잘알고 있어 겉모습은 일본인과 다를 바 없었다.그러나 일본인의 고용살이를 하면서,또 일본에서 막노동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민족의 피가 끓고 있었다.스무살때 경험한 3·1의거를 계기로 그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있었다. 1931년 1월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 의사는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라고 일왕의 처단을 촉구했다.일왕을 손쉽게 죽일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를 임시정부에선 의심스럽게 여겼다.그의 행색이나 말투가 일본인과 흡사하였기 때문에수상히 여긴 것이다.김구(金九)는 직원을 시켜 이 의사를 은밀히 떠보도록하였다.어느 술자리에서 이 의사는 “작년에 도쿄에서 일왕이 능행(陵行)한다고 행인들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생각하기를 지금 나에게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라며 자신이 일왕을 죽일수 있다는 얘기를 또다시 꺼냈다. 그를 은밀히 살피던 김구가 이 의사를 직접 만났다.그는 “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을 대강 맛보았습니다.이제부턴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몸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라며 자신의 진심을 김구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의열투쟁을 모색하고 있던 때였다.일왕을 죽일 수 있다는 것과 독립사업에 몸바치겠다는 이 의사의 각오는 김구를 감복케 하였다.두 사람은 자주 만났고,마침내 일왕을 폭살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준비는 김구가 맡았다.김구는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하여 상해 병공창에서 폭탄을만들었다.준비한 폭탄은 두 개였다.하나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이 의사 자신의 자결용 폭탄이었다. 1931년 12월 13일 이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였다.단장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 의사는 “나는 참된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국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살(屠殺)하기로 맹서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했다.적국의 괴수,그것은 일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가장한 이 의사는 이 해 12월말경 일본 도쿄로 향했다.그는 일왕이 1932년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김구에게는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 거사일을 알렸다.이 의사는 거사장소로 일본궁성 근처에 있는 경시청 앞을 택하였다.일왕은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櫻田門)을 통해 궁성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예정대로 신년 관병식이 거행되었다.이 의사는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을 기다리고 있었다.일왕이 탄 마차행렬이 앞을 지나자 이 의사는 뛰쳐나가며 손에 든 폭탄을 일왕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은 ‘회고’에서 군중과 일왕의 거리가 100미터 되는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질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 의사의 일왕 저격의거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그중에서도 중국의 반응은 남달랐다.중국의 각 신문은 이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적중하지 못하였다”고 하며,일왕을 폭살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해 했다.일제는 이러한 중국의 보도에 반발,1932년 1월 상해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놓은 일왕을 폭살시키려 했다는점에서,그리고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그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 10일 순국하였다. 해방후 김구는 일본에 있던 이 의사의 유해를 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효창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62년 이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이봉창의사 주변 일본제국주의의 총수격인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자신은 적지 일본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봉창 의사.순국 당시 이 의사는 32세로 미혼이었다.그런 이 의사에게 직계후손이 있을 리 없다.이 의사와 가장 가까운 혈손으로는 이복형의 딸인 질녀 은임씨가 유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은임씨는 이 의사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전 일본서 노동자생활을 할 때 이 의사의 뒷바라지를 했다.거사를 앞두고 이 의사는 백범에게 질녀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해방후 환국한 백범은 은임씨에게 집을 사주는 등 이 의사와의 약속을 지켰다.은임씨도 이미 수 년전 작고했다. 순국선열이나 애국지사 중에서도 번듯한 후손을 둔 경우는 그래도 낫다.기념관이나기념사업회를 운영하기도 하고 묘소를 돌보기도 한다.그러나 이 의사처럼 후사가 없는 선열들의 경우는 죽어서도 외롭다. 현재 이 의사를 기리는 기념사업회나 추모단체는 없는 실정이다.다만 효창원순국선열추모회가 4월 13일 합동추모제를 지내고 있을 따름이다.동상 역시 지난 95년에야 겨우 효창원에 건립됐다.이 의사처럼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한채 청춘에 간 애국선열은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다.당국이나 종친에서 ‘외로운 영혼’을 위해 양자라도 한 사람 세워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싶다. 정운현기자
  • [의열 독립투쟁] (13)곽재기 의사

    곽재기(郭在驥·1893∼1952)의사는 1920년대 항일 독립투쟁사의 전설적 존재인 의열단(義烈團)의 초대 부단장으로서 창단 직후 추진된‘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의 실행을 국내에서 지휘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7년 가까이 옥고를겪었다.흔히‘밀양폭탄사건’으로 일컬어지는 이 거사 계획은 총독부 당국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도 남을 만큼 대담무쌍했으며,일제의‘문화정치’틀속에 안주하려던 각계 유지층에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1893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곽 의사는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청남학교(淸南學校) 교사로 다년간 봉직했다.곽 의사의 항일운동 이력은 1909년에 창립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시작되었다.3.1의거가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적극 참가했던 곽 의사는 1919년 7월 부인 윤씨와 두 아들(大鉉·壽鉉)을 남겨둔 채 중국 동북지방 지린(吉林)으로 망명했다.서너달 후 곽 의사는 투탄·암살 등 의열투쟁 방식으로 조국 독립을 달성코자 결성된 소년단의 지린 지부장으로 등장한다. 이 해 10월 중순곽 의사는 신흥무관학교 생도인 김원봉(金元鳳·의열단장) 등과 알게 되었는데 그 무렵 이들은 ‘의열단’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를조직하고자 동지를 규합하고 있는 중이었다.소수 정예의 결사적‘직접 행동’으로 일제 침략세력을 타격하며 독립운동의 전투적 기운을 드높이려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 곽 의사는 곧 그들의 동지가 되기로 맹약했다.이들은 11월9일 밤 지린성 밖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창단 회합을 갖고 10개조의 공약을 정했다.단장에는 김원봉,부단장에는 곽 의사가 추대됐다.서상락(徐相洛)·배중세(裵重世)와 함께 27세의 최연장자라는 점 이외에 교사 경력과 그동안의 항일 경력,그리고 식견과 지도력이 두루 참작된 결정이었다. 의열 단원들은 처음부터 고강도의‘암살파괴운동’을 벌여나가기로 결의했다.표적은 총독부 일본인 고관과 친일 반역자,그리고 식민지배의 정치기관·선전기관·폭압기구·수탈기구와 부속 시설물들이었다.이 계획은 테러리즘의 소치가 아니라 민족독립 투쟁의 일환으로 행해질 기습 특공작전이요,그 원초적 범례가될 것이었다. 단원들은 지체없이 국내 거사 준비에 돌입했다.경성(서울)의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사 폭파와 사이토(齋藤)를 비롯한 총독부 수뇌·요인들을 저격,포살키로 목표를 정했다.김원봉은 중국에서의 제반 준비와지원을 책임지고 국내 현지에서의 거사 추진 및 실행은 곽 의사가 전담,지휘하기로 결정하였다.창단 직후부터 추진한 무기 구입 노력은 이듬해 3월에 가서야 성과를 보았다.상하이(上海)에서 구입한 탄피 3개와 폭약을 이용하여화약 투입식,도화선 점화식,투척 즉발식 폭탄 1개씩을 각각 제조했다.4월 하순 김원봉과 이성우가 폭탄 13개(점화식 7개,투척식 6개),제조용 폭약과 탄피,권총 두 자루,탄환 100발을 중국인으로부터 추가로 구입했다. 무기를 국내로 들여오는 일은 4월 초와 5월 초 두 차례에 걸쳐 이어달리기식으로 수행되었다.1차분 폭탄 3개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張建相)의이름을 빌려 안뚱현(安東縣)의 영국인 세관원 유스 포인에게 소포로 부친 후 곽 의사가 따렌(大連)을 거쳐 안뚱으로 가 소포를 찾아그 곳의 상주연락원 이병철(李炳喆)에게 넘겨주었다.이병철은 옥수수 스무 가마 속에 폭탄을 숨겨 포장해서 경남 밀양의 화물운송점으로 부친 후 기차편으로 밀양으로 가서 화물을 찾아 폭탄만 따로 빼내 청년회장 김환(金煥)의 집 마루 밑에 숨겨두었다. 2차분 무기 묶음은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성우가 의류상자로 위장해서 휴대하고 선편으로 안뚱까지 가서 이병철에게 건네주었다.이병철은 지난번처럼옥수수 다섯 포대 속에 무기를 넣어 포장하고 다른 열다섯 포대와 뒤섞어 화물로 위장해 부산진역의 한 운송점으로 보냈다.이것을 배중세가 수령해서 비밀표식이 된 다섯 포대만 따로 추려 창원 강산진(姜祥振)의 집 창고에 숨겨두었다.무기 반입이 완료되자 지도부는 인원 배치와 임무 분담,자금 조달 등의 후속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4월 중순 국내로 잠입한 곽 의사는 밀양으로 내려가 1차분 폭탄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먼저 귀국한 단원들을 만나 임무를 부여하고 격려하였다.그리고는 상하이로 돌아가 김원봉에게 제반 준비작업의 진척도를 보고한뒤 이성우와 함께 다시 국내로 잠입했다.서울 공평동의 전동여관(典東旅館)에 지휘소를 두고 단원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해 가며 거사날짜만을 기다렸다.거사는원래 6월 초 이내에 결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뜻밖의 사태로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었다.밀양에 숨겨둔 폭탄 3개가 밀정의 제보로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돼 가택수색 끝에 적발,압수되어버린 것이다.이 때문에 경성부 관내에는 경찰의 특별경계령이 내려지고 엄중한감시망이 가동되었다.게다가 이수택은 거사때 뿌릴 격문의 인쇄비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차 반입무기의 서울 이송을 누차 미루었다.자금마련을 위해 곽 의사가 대구와 청주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그래서 거사날짜는 7월8일로 잠정 연기되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잠행하며 대기중이던 단원 5명이 6월20일경 조선인경부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고 말았다.곽 의사는 무기 보관 상태 점검차 부산에 잠시 내려갔다가 김기득과 함께 부산서 체포되었다.다른 단원들과협력자들도 속속 검거되고 창원에 은닉해뒀던 무기도 모두 압수되었다. 1921년 6월21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은 곽 의사는 상고를 포기한 채 마포형무소 독방에서 복역 중 1927년 1월 특사조치로 1년10개월 감형돼 이 해 1월22일 만기출옥했다.출옥 후 3년 뒤 곽 의사는 다시 만주·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재투신한 것으로 전해진다.광복 후 1945년 11월 귀국한 곽 의사는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이끄는 등 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에 타계했다. 김영범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곽재기 의사 후손들 근황 곽재기 의사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애국지사에 속한다.동작동 국립묘지에 묘소가 마련된 것 외에는 기념사업회는 물론 변변한 기념물 하나 세워진 것이 없다.‘못 배우고 못 사는’ 후손 덕분(?)에 독립운동 관련 자료하나 제대로 전해오는 것이 없다.후손들 역시 곽 의사의 이름 석 자를 겨우기억하고 있을 뿐 곽 의사가 해방 후에 타계한 탓으로 연금 한 푼 주어지는것이 없다. 곽 의사의 부인 윤씨는 곽 의사보다 먼저 작고했다.두 아들 가운데 장남 대현(大鉉)씨는 일제때 작고했으며,차남 수현(壽鉉)씨는 80년대 중반 작고했다.장손 기수(琦洙·65)씨는 함북 청진 태생으로 일제때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며 일제가 국민학교 입학시험을 못 치르게 해 입학이 늦어졌다.해방 후 고아원을 전전하며 고등학교를 겨우 마친 기수씨는 62년부터 10여년 동안 교통부에서 역무원으로 종사한 바 있는데 지난 95년 부인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떠 현재 외롭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슬하에 2남2녀.최근 해방 후 작고한 독립운동가들의 손자들이 자신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과 관련,조상들의 건국훈장을 반납,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기수씨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조상을 팔아 잘 먹고 잘 살 생각은 없습니다.그러나 단지조부님께서 해방 후에 작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손자들이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은 형평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정운현기자 jwh59@
  • 서울지법,연세대 한총련사태 피의자 일부승소 판결

    서울지법 민사합의14부(재판장 金龍均부장판사)는 10일 “지난 96년 연세대 한총련사태때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피해를 봤다”며 이모씨(29) 등 4명이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4,500여만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경찰관 직무집행상 불가피한 경우 인체에 직접 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최루탄을 쓸 수 있지만 돌을 던지거나 최루액을 뿌려항거불능 상황에서 밀집해 있는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투척해 부상케 한 것은 직무집행 범위를 넘어선 불법행위”라면서 “그러나 원고들도 불법 폭력 집회에 참가해 경찰이 과도하게 대응한 원인을 제공한 만큼 국가의 책임은 40%”라고 밝혔다. 이상록기자 myzodan@
  • [‘99프로야구 결산] (하) 새 천년의 과제

    지난해 ‘IMF체제’에서 비롯된 위기의 쌍방울 문제와 롯데-삼성의 플레이오프에서 표출된 어처구니없는 관중난동 등은 새천년을 맞는 프로야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지난 82년 6개 구단으로 출범한 프로야구는 86년 한화,91년 쌍방울이 가세함으로써 프로리그의 틀을 갖추고 현재까지 인기 스포츠로 군림해 왔다.그러나 지난해 모기업의 부도로 해체 위기에 몰린 쌍방울은 프로야구의 기본 틀마저 깰 우려를 낳으며 시즌 내내 촉각이 모아졌었다. 현재 법정관리 상태인 쌍방울은 매각쪽으로 가닥을 잡고 미국 프로야구 구단인 다이아몬드 백스와 줄다리기 인수 협상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이 때문에 내년 시즌에는 자칫 쌍방울을 제외한 7개 구단의 단일리그로 후퇴할 가능성마저 대두되는 힘겨운 상황이다. 이에 대해 한국야구위원회(KBO) 박용오 ‘자율총재’는 8개 구단의 골격을그대로 유지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으며 이를 위해 국내외 기업과 다각적인 접촉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취임 1년을 맞는 박 총재는 그동안 야구발전에 이렇다할 가시적 성과를 내놓지 못해 기대가 컸던 야구인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그러나 앞으로 쌍방울 문제의 처리 여부가 새천년을 이끌‘자율총재’의 시금석이 될 전망이어서 막판 활약(?)이 기대된다. 여기에 롯데-삼성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상식 이하의 관중과 선수가 보인 추태도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홈런을 친 상대 선수에게 오물을 투척하고 선수는 관중석에 방망이를 던져 맞대응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18년이나 되는 우리 프로야구의 현주소여서 안타깝기 그지 없다.이 사건을계기로 선수와 팬이 하나되어 성숙된 관람 문화를 정착시키고 야구장이 가족들의 즐거운 놀이공간이 될 수 있도록 모두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이밖에 시즌 초반부터 불거졌던 심판의 판정시비와 폭행 사건도 팬들을 무시한행태.팬들이 외면하는 프로야구 중흥의 외침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민수기자 kimms@
  • [의열 독립투쟁] (9)장진홍 의사

    1927년 10월18일 11시20분경 대구시 중앙통에 위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허름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나타났다.청년은 곧바로 창구 앞으로 다가가 들고온 보자기를 풀어 네개의 상자 가운데 한 개를 창구로 내밀면서 창구의 직원에게 “이것은 벌꿀인데 우리 여관에 든 손님이 지점장님께 전해달라고 한선물입니다”고 디밀었다. 군대에서 포병대 근무경력이 있는 창구직원 요시무라(吉村)는 상자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상자를 열었다.아니나 다를까!상자 안에는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들어있었다.깜짝놀란 요시무라는 도화선을 끊고청년으로부터 보자기를 빼앗아 다급하게 나머지 상자를 열었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10여명의 순사들이 도화선을 끊으려고 하였으나이미 때는 늦었다. 곧이어 폭탄 하나가 터짐과 동시에 뒤이어 두개의 폭탄이 연속적으로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며 천지를 뒤흔들었다.이것이 저 유명한장진홍(張鎭弘)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다.폭탄을 전한 청년은장의사가 심부름을 보낸 덕흥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으로 이 사건과 별다른 관련은 없다. 장의사는 1895년 6월6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에서 아버지 장성욱(張聖旭)과 어머니 순천(順天) 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인동(仁同),호는 창려(滄旅).장의사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크고 의협심이 강했다.칠곡소재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졸업하고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군사지식을 배운 장의사는 1916년 고향에서 대한광복회에 가입했으나 일경의감시가 심해 1918년 만주로 망명했다. 동지인 이국필(李國弼)과 함께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조선인 청년 100여명을 규합해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나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와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하였다.1919년 3·1 의거가 일어나자 장의사는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하여 동생 진환(鎭煥)으로부터 600원을 받아 전국 각지를 돌며 일제의 만행사실들을 조사,수집하였다.이 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장의사는 경북출신조선인 하사관 김상철(金相哲)에게 이를 영문으로 번역,세계 각국에 배포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편 장의사는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일제의 만행을 응징키로 결심하고 대한광복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 이내성에게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이자 폭탄제조 전문가인 호리키리 시게미쯔로(堀切茂三郞)를 소개받아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27년 8월에 직접 제조한 폭탄의 성능실험을 마친 장의사는 동지들과 경북도청·경북 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식산은행 등에 폭탄을 투척하기로하고 10월16일 폭탄 여섯개를 제조했다.이튿날 6개의 폭탄 가운데 5개를 가지고 대구로 향한 장의사는 조선은행에서 가까운 덕흥여관에 숙소를 정하였다.18일 오전 10시40분 장의사는 여관의 사환을 불러 “이것은 조선꿀인데조선은행·도청·식산은행·경찰부 순서로 배달해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어 11시40분경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져 일본인순사 4명과 은행원 1명,행인 1명 등 모두 6명이 부상을 입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유리창 60여장이 깨졌다.그 순간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마모자를쓰고네 대의 금니를 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던 장의사는 말쑥한 양복 차림에 흰 운동화로 갈아신고 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다부원고개를 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일본경찰은 철저한 보도통제 속에 범인색출에 나섰으나 단서조차 잡지 못하였다.일본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장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막내동생 의환(義煥)에게 몸을 의탁하고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등을 왕래하며 1년반 동안을 지냈다. 한편 이 사건의 수사가 미궁으로 빠져들 무렵 엿장수로 변장,장의사 고향집 부근에서 탐문수사를 벌이던 한 형사가 장의사가 오사카에서 안경공장을 경영하는 동생집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일본경찰은 조선인 여자첩자를 오사카로 파견,장의사 동생부부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장의사가 2층에 숨어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29년 2월14일 밤 동생 장의환의 안경공장에서는 술자리가 벌어졌다.일본경찰에 매수된 한 조선인 첩자가 안경 1만5,000개를 산다며 계약금조로 30원을 내놓은 것이었다.오랜만에 목돈이 생긴 장의환이 벌인 술자리에는 조선인첩자를 포함해 김해중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던 장의사도 참석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취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일본경찰이 들이닥쳤다.장의사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전등을 손으로 쳐서 깨뜨리고 창문으로 뛰어내렸으나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장의사는 단독범행을 주장하며 심문하는 일경에게 “일본이 조선을 해방시켜주지 않으면,너희 일본도 망할 날이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취조하던 조선인경찰에게는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가 확정된 장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인 1930년 7월31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장의사의 순국소식이 옥중에 퍼지자재소자들은 ‘조선독립만세’,‘장진홍만세’를 외쳤고 이에 당황한 교도소측은 서둘러 장 의사의 사인이 뇌일혈이라고 발표하였다. [김순석 독립기념관 전시부 연구원] *장진홍 의사 후손들 근황 장진홍 의사는 후손으로아들,딸 각각 3형제를 두었는데 아들은 모두 어려운 형편 속에 살고 있다.세아들 가운데 장남만 보통학교 4년 중퇴를 했을 뿐나머지 두 아들은 모두 무학자이다. 96년 83세로 작고한 장남 형옥(衡玉)씨는 생전에 부친 장의사의 기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경제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별다른 성과는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차남 형술(衡述·81)씨는 구미시 옥계동에 살고 있는데 연로해서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다.또 대구에 살고 있는 3남 형태(衡泰·73)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행상 이발소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장남 형옥씨는 7남3녀를 두었는데 현재 8명이 생존해 있다.장손 상규(相圭·63)씨는 칠곡에서 전자제품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IMF 사태 후 모기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연쇄부도를 맞아서 살고 있는 집마저 근저당이 설정된 상태. 장의사의 후손 가운데 그나마 그럭저럭 살고 있는 사람은 세 딸이 고작이다.세 딸 가운데 위로 두 딸은 모두 작고하였고 현재 막내딸 형필(衡必·70)씨만 구미에서 살고 있다. 현재 장의사 추모단체나 기념사업회는 특별히 구성된 것이 없고 낙동강 기슭에 서있는 추모비 하나가 고작이다.장의사는 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았으며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128번)에 마련돼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중형 고급주택 중과세 백지화

    7인승 이상 10인승 이하 승합차의 세금이 오는 2007년까지 승용차 수준으로 올라간다.또 전용면적 50∼74평,거래가 6억원 이상인 아파트를 중형 고급주택으로 규정해 취득세를 일반주택의 2배인 4%로 중과세하려던 정부방침은 철회됐다. 정부는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같은 내용의 지방세법개정안을 의결했다. 7인승 이상 10인승 이하 승합차에 대한 세금은 ▲2005년 승용차 세금의 33%▲2006년 66% ▲2007년 100%수준으로 오른다. 또 휘발유 및 경유,대체유류 등에 대한 특별소비세의 3.2%가 내년 1월1일부터 지방세인 주행세로 전환된다. 정부 관계자는 주행세가 신설되더라도 특별소비세의 일부를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비자에게는 추가부담이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개정안은 아울러 농지소득에 부과하는 농지세의 세율을 소득세의 세율체제에 맞게 하향조정,과표 단계별로 ▲400만원 이하 3% ▲1,000만원 이하 10%▲4,000만원 이하 20% ▲8,000만원 이하 30% ▲8,000만원 초과 40% 등으로규정했다. 국무회의는 이와 함께 앞으로 시민들이 집회나 시위로 인해 피해를 볼 우려가 있을 경우 관할 경찰서장에게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내용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시행령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은 주거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집회 및 시위자들의 북·징·꽹과리·확성기 사용과 구호 및 낙서,유인물 배포,돌 및 화염병 투척 등으로 재산이나 시설에 피해가 생길 우려가 있을 경우 관할 경찰서장에게 보호를 요청할 수 있도록 돼있다. 이도운기자 dawn@
  • [방황하는 오빠부대] (상) 빗나간 스타사랑 광기의 공연장

    인기 연예인들에 대한 일부 청소년들의 맹목적인 우상화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오빠부대’로 표현되는 10대들의 빗나간 ‘스타사랑’이 사고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심지어 최근들어 청소년들의 비뚤어진 스타 우상화는 테러와 스토킹,오물투척,협박편지,유언비어 유포 등으로 이어져 사회문제로까지 확산되고 있다.10대들의 빗나간 스타사랑을 상하로 짚어본다. 지난 18일 인기그룹 HOT 공연 도중 여학생팬 200여명이 흥분한 나머지 졸도해 76명이 병원으로 후송됐다.이날 저녁 서울 잠실운동장에서 10대 청소년 4만명이 몰린 가운데 열린 공연도중 멤버 문희준이 빗물에 미끄러져 무대에서떨어진 뒤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 뒤 그룹멤버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담긴뮤직비디오가 방영되자 열광하던 여학생들이 집단 발작을 일으켰다. 이들은응급치료를 받은 뒤 다음날 모두 퇴원했다. 이에 앞서 HOT의 지난 1월 세종문화회관공연에서는 여고생 이모양(18·서울P고2년) 등이 몰려든 인파에 깔려 다치기도 했다. 일부 극성팬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경쟁자연예인에게는 살해 협박편지를 보내거나 공연장에서 오물을 던지는 등 행패로까지 이어졌다.지난 2일 5인조 여성댄스그룹 ‘베이비복스’의 멤버인 간미연양(17)에게 ‘살해협박편지’가 배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사귄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극성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집과 사무실,방송국 등에서 며칠씩기다리는 것은 기본이고 혈서와 유서를 써 보내는 등 ‘우상화 신드롬’은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청소년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맹목적인 열광은 억압된 심리를 표출할 수있는 공간이 없는데다 스타에 대한 동일시가 지나쳐 생긴 병적인 상태”라면서 “일부 업체들이 청소년들의 ‘광기’를 교묘한 상술로 이용해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서울대병원 정신과 홍강의(洪剛義)박사는 “청소년들의 맹목적인 열광이 심각해 지면 우울·불안·자살충동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청소년이 참가하는 연극이나 노래,춤 등의 공연기회를늘려 스타를 통한 대리만족에 대처할만한 활동무대를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 수서경찰서 방범과 관계자는 “인기그룹 공연의 경우 매번 비슷한 사고가 되풀이되지만 이벤트 업체들이 자신의 수익만을 위해 안전조치나소방서와 경찰서와의 협조없이 강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 이명선 女투포환 ‘세계 10강’

    [세비야(스페인) AP 연합] 이명선(23·익산시청)이 제7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투포환에서 처음으로 10강에 들었다.또 4관왕을 노리던 매리언 존스(미국)는 여자 200m 준결에서 허리 통증으로 쓰러져 3관왕마저 좌절됐다. 이명선은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계속된 여자 투포환 결선에서 자신의 최고기록(18.79m)에 훨씬 뒤진 17.92m를 던져 결선 진출자 12명 가운데 10위에 머물렀으나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투척종목에서 세계 ‘톱10’에 드는 기록을 세웠다. 남자 100m 챔피언 모리스 그린(미국)은 200m 준결을 20초10으로 통과,단거리 석권을 눈앞에 뒀다.유방암과 투병중인 35세의 노장 루드밀라 엥퀴스트(스웨덴)는 100m 허들에서 12초62의 예선 최고기록을 세워 ‘인간신화’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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