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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박순부·허은·이은숙 여사…그들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박순부·허은·이은숙 여사…그들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네 어머니와 아내를 무겁게 대하라.” 지난달 8일 시인 이윤옥씨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 10권 완간 기념 ‘책 잔치’가 열렸다. 권마다 20명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시와 산문으로 담은 책이다. 속표지에는 이런 짧은 헌사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이 땅의 모든 남성에게 바칩니다.”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다음은 지은이의 머리말 일부. “원고 뭉치를 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봤지만 선뜻 이 책을 찍어 준다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이 남성의 전유물이 돼 버린 풍토에서 여성독립운동가만의 책을 출간하는 것은, 독립운동처럼 십시일반의 정성을 모아야 가능했다.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홍수를 이뤘다. 그동안 여성의 역할을 액세서리 정도로 평가절하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반성치고는 너무 피상적이었다. 양적으로만 늘었지 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선택 기준은 언제나 ‘남성 못지않은 활동상’이었다. 삼종지도의 억압구조 속에서 수행했던 여성 혹은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은 외면당했다. 건국훈장 서훈자 1만 5537명 가운데 여성 독립지사가 전체의 2.3%(357명)에 불과한 현실이나, 5등급의 건국훈장 가운데 대부분 마지막 등급인 애족장을 서훈했거나, 훈장이 아닌 건국포장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은 이런 기준 때문이었다. 일송 김동삼 선생의 며느리 이해동 여사는 1987년 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 때 보훈처 초청으로 중국에서 잠시 귀국했다. 개관식 치사에선 온통 일송 이야기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이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아버지께 공이 있다면 반 이상은 시어머니(박순부 여사) 몫이었다. 독립운동도 의식주가 있어야 가능한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건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다. 여자들은 하루 스무 시간씩 일하며 밥해 먹이고 옷 지어 입히고 땔감 마련해 추위를 피하게 했다. 공산주의 나라에서도 남녀를 동등하게 대하는데, 왜 한국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하찮게 보는지 모르겠다.” 박순부 여사는 만주 벌판을 호랑이처럼 떠돌며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옥사한 남편 일송과 그 동지들의 후방을 말없이 지키다가 만주에서 쓸쓸하게 돌아갔다. 이 여사 역시 1989년 영구귀국할 때까지 77년간 여러 남매를 낳아 키웠지만, 둘째 중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맏아들 이준형은 출소한 뒤 “일본 놈들 밑에서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은 치욕”이라며 자결했다. 다음은 그가 남긴 네 가지 유언 가운데 하나.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자들의 고생이 심했다. 여성을 대할 때 보통으로 대하지 말고 무겁게 대하라.” 허은 여사는 조부 허형, 재종조부 허위 등 집안이 모두 독립지사였다. 어른들을 따라 1915년 만주로 망명한 허 여사는 1922년 석주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한 뒤 끝없이 찾아오는 독립군을 수발하는 ‘독립군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시집온 첫해 집에서는 서로군정서 회의가 서너 달 계속됐다. 만주의 독립지사치고 그의 집을 드나들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며, 따듯한 밥 한 그릇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가 부족해 삼시세끼가 녹록지 않았다. 양식이 없을 때는 좁쌀 쭉정이로 죽을 끓였다.” “의복도 단체로 만들어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대량생산을 했다. (중략)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밥 짓다가 기절해 가마솥 안으로 고꾸라질 뻔하기도 했다. “시집온 이듬해, 한번은 감기에 걸렸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 안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잡아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꼬박 24시간을 혼절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시조부, 시부에 이어 남편도 7년간의 옥고 탓에 일찌감치 세상을 떴다. 남겨진 5남2녀를 키우고 가문을 지키는 것은 온전히 허 여사의 몫이었다. 형제들이 때론 고아원에도 가고, 보육원에도 보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4남1녀는 허 여사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혁명 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의 간난신고는 ‘고초당초’보다 매웠다. 결혼 당시 지금 시세로 수천억 혹은 수조 원에 달한다는 남편 우당 이회영 여섯 형제의 재산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경학사 등을 경영하는 데 모두 썼다.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하루 잘해야 일중식이요, 한겨울에도 절화하기(불피우지 못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었다. ‘매일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했다. “언젠가 이을규 형제분과 백정기, 정화암 네 분이 오셨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도미라고 하층민들이 먹는 곡식조차 살 수 없었다. 강냉이로 멀건 죽을 쑤어 연명했다.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서간도 시종기’에서) 이 여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고무공장 직공으로, 부잣집 침모로, 심지어 유곽 여인네의 옷을 수선하는 삯바느질까지 했고, 몇 푼 벌면 송금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 경찰서로 불려가곤 했다. 이 과정에서 두 손녀와 아들 규오가 성홍열로 차례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규숙, 현숙 자매는 천진 부녀구제원에 보내야 했고, 외손녀 현덕은 늑막염으로, 딸 현숙은 폐렴으로 그리고 외손자는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둘째 아들 규학은 친일파 암살 과정에서 체포돼 고문으로 청력을 잃었고, 셋째 아들 규창 역시 13년형을 받았다. 이 여사 자신은 마적떼의 총격으로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우당은 1932년 일제의 감옥에서 고문당한 끝에 세상을 떴고 첫째 시숙 이건영은 질병으로, 조선 10대 갑부로 꼽히던 둘째 시숙 이석영은 영양실조로, 셋째 시숙 이철영은 풍토병으로, 여섯째 시숙 이호영은 일본군에 의해 가족 전체가 몰살당했다. 함께 망명했던 식솔 60여명 가운데 살아서 귀국한 이는 다섯째 시숙 이시영 선생 포함 20여명뿐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는 살아서는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고, 죽어서는 단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 망명 전 박 여사는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던 엘리트였다. 파업 태업 등을 주도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터였기에 1922년 귀국한 뒤 온갖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나석규 의사 등 국내로 잠입한 독립운동가들의 거사를 뒤에서 도왔다. 단재는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고 둘째 아들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했으며, 그 자신은 잦은 체포와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단칸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단재는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탓에 2009년 가족관계등록부가 생기기까지 무국적자였다. 가족관계부가 생기고도 혼인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하여, 단재의 가족관계부에는 지금도 아들과 손주 이름만 달랑 올라 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경 15명을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 김점순 여사도 세 아들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다. 김 여사는 평소에도 잠입한 독립지사들을 숨겨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줬다. 백범의 부인 곽낙원 여사는 시장에 버려진 배추 겉껍질을 모아 김치를 담갔고, 그것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둘도 없는 반찬이 되었다. 베트남에는 ‘어머니 영웅’이란 칭호가 있다. 항불, 항일, 항미 독립전쟁에 자식을 바친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서훈’이다. 세상에 어머니를 배반할 자식은 없다. 베트남이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견고한 것은 그 덕분일 것이다. 2018년 허 여사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자 아들 이항증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첫 서훈이며 음지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쏟은 여성 독립지사에 대한 첫 훈장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어머니 영웅’, ‘아내 영웅’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와 아내가 없었다면 안중근도 이회영도 이상룡도 김동삼도 김구도 여운형도 신채호도 없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윤봉길 종손’ 윤주빈, 3.1절 편지 낭독 ‘뭉클’

    ‘윤봉길 종손’ 윤주빈, 3.1절 편지 낭독 ‘뭉클’

    윤주빈이 3.1절 기념식서 심훈 선생의 편지를 낭독했다. 탤런트 윤주빈은 1일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된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날 윤주빈은 과거 심훈 선생이 옥중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낭독했다. 앞서 일왕 승일 기념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해 스물다섯의 나이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의 종손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은 윤주빈은 윤봉길 의사와 똑 닮은 외모로 할아버지의 업적을 기려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지난 28일 생방송 된 KBS2의 3.1운동 100주년 특집 전야제 ‘100년의 봄’에서 한수연, 박환희와 함께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할아버지들에게 영상 편지를 보냈다. 이들은 “할아버지, 잘 지내시나요? 2019년 봄의 문턱에서 아직 많이 춥기만 했을 1919년의 봄을 떠올려 봅니다. 할아버지의 용기 덕분에 대한민국의 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그 덕분에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몸을 던져서 나라를 구한 할아버지의 뜻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라고 전했다. 특히 이들은 각자 할아버지의 사진을 소중히 안은 채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으며 “저희에게 주어진 매일을 감사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며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여기는 완전한 봄이 왔어요”라고 말해 시청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사진 = 방송 캡처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월드피플+] 1400만원 현금 뭉치 돌려준 환경미화원 ‘훈훈’

    [월드피플+] 1400만원 현금 뭉치 돌려준 환경미화원 ‘훈훈’

    쓰레기통에서 수거한 거금을 주인에게 돌려준 중국인 환경미화원의 선행이 알려지며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 중국 장쑤성 쑤저우시 신취(新区) 일대 청소 담당자인 환경미화원 천진원 씨. 천 씨는 최근 자신이 담당하는 공동주택에 마련된 쓰레기통을 수거하던 중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현금 뭉치를 발견했다.천 씨가 수거한 비닐봉지 속에는 100위안(약 1만7000원)짜리 현금으로 약 8만 위안(약 1400만원)이 들어있었기 때문. 올해 춘제(春节) 명절 동안 연휴 근무자로 지정된 탓에 고향을 방문하지 못했던 천 씨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검은 봉지를 발견할 당시만 해도 아파트 주민들이 사용 후 폐기한 폭죽 더미로 추측했다. 더욱이 사용한 폭죽의 경우 일반 쓰레기로 폐기할 경우 화재 등의 위험성이 높다는 점에서 천 씨는 검은 비닐봉지 더미를 분리수거, 그 과정에서 무려 1400만 원에 달하는 거금을 확인한 셈이다. 현금 뭉치를 확인한 천 씨는 곧장 이를 관리사무소 직원에 신고, 거금의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 인근에 설치된 CCTV를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일 천 씨와 함께 인근 CCTV를 확인했던 관리사무소 직원 징 씨는 “관리사무소 복도를 급하게 뛰어왔던 천 씨의 두 손에는 빨간색 100위안짜리가 가득 든 거금이 들려 있었다”면서 “그때의 천 씨는 큰돈을 잃어버리고 초조해하고 있을 현금 뭉치의 주인을 찾아 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뚜렷해 보였다”고 설명했다. 징 씨는 이어 “천 씨의 경우 월평균 봉급 수준이 약 2000위안(약 34만 원)에 불과한 사원인데 연휴 근무자 지정 등으로 고향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도 현금 뭉치에 대해 욕심내지 않고 주인을 찾아주려고 했다는 것에서 칭송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당시 CCTV를 통해 확인한 결과 천 씨가 현금 뭉치를 발견하기 약 18분 전 한 명의 중년 남성이 검은 봉지를 쓰레기통에 투척한 뒤 사라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남성에 대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던 천 씨와 관리사무소 직원 징 씨는 이후 담당 지역 공안국에 거금의 돈을 신고, 도움을 청했다. 공안국 신고 후 약 23시간이 흐른 직후 공안국 관계자를 통해 소재가 파악된 현금 뭉치의 주인은 인근에 거주하는 오 사장이라는 중년 남성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당일 쓰레기통에 거금을 투척한 오 씨의 한 손에는 분리수거를 위한 쓰레기봉투가,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직원들을 위한 인센티브 현금 뭉치를 들고 집을 나섰던 것으로 확인됐다.오 씨는 해당 현금 뭉치와 쓰레기를 착각, 실수로 거금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오 씨가 실수로 버린 해당 금액은 그가 운영하는 회사 사원들을 위한 인센티브 봉급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거금을 주인에게 되찾아 준 천 씨의 선행이 공개된 직후 천 씨가 재직 중인 신취(新区) 환경미화부 측은 천 씨에게 보너스 명목으로 500위안(약 8만 5천 원)의 성과급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담당 환경미화부 측은 이 일대를 담당하고 있는 약 400여 명의 직원을 대상으로 천 씨의 선행 사실을 공개, 그의 정신을 본받기 위한 홍보를 시행 중이라고 밝혔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경찰에게 푸딩 투척 中여대생 추방될 듯

    경찰에게 푸딩 투척 中여대생 추방될 듯

    필리핀에서 현지 경찰관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 비난 여론을 들끓게 했던 중국 여대생이 추방될 것으로 보인다. 15일 일간 필리핀 스타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필리핀 이민국은 지난 12일 밤 중국인 유학생 장모(23)씨를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 만달루용 시의 한 디자인 대학에 다니는 장씨는 지난 9일 도시철도역에서 두유 푸딩의 일종인 ‘타호’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경찰관에게 던져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다.필리핀 도시철도는 폭탄테러 위협 때문에 액체류 반입을 금하는데, 타호를 든 채 승강장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제지당한 장씨가 홧김에 이런 짓을 벌였다. 이 때문에 해당 경찰관의 상의와 팔 등이 두유 푸딩으로 범벅이 됐다. 장씨는 당시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공공의 이익에 위험이 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외국인’으로 지정돼 추방 절차를 밟게 된 것이다. 장씨는 또 폭행 등의 혐의로 조사받고 있어 유죄 판결을 받으면 최고 징역 4년형을 받을 수 있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신간] ‘박재혁-적의 심장에 폭탄을 던져라’

    [신간] ‘박재혁-적의 심장에 폭탄을 던져라’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부산경찰서 서장실에서 천둥과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은 1층 천장을 뚫고 2층 창문까지 모조리 박살 내며 밖으로 퍼졌고 화약 냄새와 연기가 새어 나왔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에게 폭탄을 던진 이는 부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박재혁 의사(義士)다. 박 의사도 파편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갔다. 이후 모진 고문과 재판이 이어졌고 끝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대구 형무소에서 일본의 손에 죽기 싫다며 단식을 시작했고 결국 27세의 나이로 스스로 순국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박 의사의 생애를 담은 동화책이 나왔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펴낼 ‘부산을 빛낸 5인’ 동화책 시리즈 중 첫 번째인 ‘박재혁-적의 심장에 폭탄을 던져라’다. 동화작가 안덕자가 집필한 박 의사 이야기는 박 의사의 이손녀 김경은(55)씨 인터뷰를 기반으로 해 의열단 가입부터 폭탄 투척, 순국까지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기술했다. 명지대 박철규 교수,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개성고 역사관 관계자 등의 자문과 고증을 받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사료가 부족해 일부 허구를 가미할 수밖에 없었다. 박 의사는 독립운동가 이전에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나아가 여린 생명을 사랑했던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책에서는 그의 혁명가 기질이 의협심이나 애국심을 넘어 인간에 대한 따스한 관심과 사랑에서 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호밀밭출판사.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천안에서 애완견 11 마리 떼죽음 경찰수사 나서

    강릉 애완견 투척사건이 공분을 자아내는 가운데 충남 천안의 한 원룸에서 애완견 11 마리가 떼죽음 당한 채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12일 천안서북경찰서에 따르면 지난달 21일 낮 12시 40분쯤 서북구 성정동 한 원룸에서 애완견인 11 마리의 ‘말티즈’ 사체가 발견됐다. 살아 있던 암컷 1마리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랜 굶주림으로 장기 손상이 심해 회복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발견 당시 33㎡ 크기의 원룸에는 2~4년생 말티즈 수컷 6마리와 암컷 6마리가 있고 한 마리만 겨우 살아 있었다. 학대 당한 흔적은 없었다. 이 개들은 원룸 관리자가 장기간 월세를 체납한 세입자를 찾아갔다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농림축산검역본부에 의뢰해 정밀 검사한 결과 장기간의 굶주림으로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떼죽음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세입자가 제때 월세를 내지 못해 방 안에서 키우던 개를 그대로 두고 달아난 것으로 보고 세입자의 행방을 쫒고 있다. 경찰은 세입자를 붙잡아 유기 사실이 드러나면 동물보호법위반 혐의를 적용할 방침이다. 천안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우파 독립단체 통합 나선 김구 피격… 만주독립군과 광복군 창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우파 독립단체 통합 나선 김구 피격… 만주독립군과 광복군 창설

    3부 고난의 행군: 이동 시기 ③ 한국광복군 창설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터지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던 한국국민당은 항일투쟁에 나서고자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과 우파 연합 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 12월 임정의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도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과 좌파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두 세력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하에 정규군을 편성하는데, 바로 한국광복군(임정파)과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반임정파)다.중·일 전쟁이 일어난 지 5개월째인 1937년 12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이 일본에 함락됐다. 30만명의 중국인이 처참하게 살해된 ‘난징 대학살’도 일어났다. 국민당 정부는 자신들 혼자서 일본군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보고 중국 공산당과 2차 국공합작(1937~1945)을 체결했다. 국민당 주석 장제스(1887~1975)는 그간의 태도를 바꿔 한인들도 항일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 시기 임정은 일본을 피해 다시 한 번 피난길에 나섰다. 1937년 11월 말 난징을 출발해 후난성의 성도(省都) 창사에 도착했다. 김구(1876~1949)는 백범일지에 이곳에 온 이유를 “곡식값이 매우 싼 곳이고 장차 홍콩을 통해 해외와 통신을 이어 갈 계획 때문”이라고 적었다. 김구와 친분이 있던 국민당 핵심간부 장즈중(1890~1969)이 후난성 주석으로 온 것도 큰 힘이 됐다. ‘장천’, ‘장전추’ 등의 가명을 쓰던 김구는 이때부터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본명으로 활동했다.●임정, 日 패망 확신… “독립전쟁 성공 시기 왔다” 임정은 중·일 전쟁이 한국 독립에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봤다. 그간 항일 투쟁에 미온적이던 국민당 정부가 일본과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어 일본의 패망이 앞당겨질 것으로 판단해서였다. 당시 임정이 동포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여러 문건에 이런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중·일 전쟁의 시작은 우리의 독립 전쟁이 성공할 시기에 도착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적(일본)은 중국의 저항 능력을 과소평가했고 러시아의 내부 모순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판단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가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망령되게 단정했기 때문에 중국대륙을 침략한 것이다.”(1937년 12월) 1932년 상하이 윤봉길 의거 직후 서울로 압송된 안창호(1878~1938)도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유언처럼 일본의 미래를 예견했다. “일본은 자기 힘에 지나치는 큰 전쟁(중·일 전쟁)을 시작했기에 반드시 이 전쟁으로 패망한다.”●독립운동세력 갈등 극심… 김구 저격 사건 발생 김구는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우파 진영부터 힘을 모았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속했던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통합하기 위해 나섰다. 이들은 1938년 5월 6일 조선혁명당 당사인 난무팅에 모였다. 만주에서 창당한 조선혁명당에서 이청천(1888~1957)과 유동열(1879~1950), 과거 임정의 여당 역할을 한 한국독립당에서 조소앙(1887~1958)과 홍면희(1877~1946), 한국국민당에서 김구와 이동녕(1869~1940)이 각각 참석했다. 한참 통합 논의를 벌이던 때였다.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생몰연대 미상)이 회의장에 뛰어들어 권총을 난사했다. 이것이 김구가 첫 번째 저격을 받은 `난무팅(남목청) 사건’이다.현장에서 조선혁명당 간부 현익철(1890 ~1938)이 숨지고 유동열과 이청천이 총상을 입었다. 김구는 가슴 한가운데 총탄을 맞고 곧바로 샹야의원(현 중난대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졌다. 중국인 의사는 그가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응급처치를 포기했다. 백범의 장남 김인(1917~1945)에게 사망 통지까지 보냈다. 그런데 총격 발생 4시간이 지나도 숨이 붙어 있자 그때부터 치료를 재개해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김구는 이 사건으로 수전증이 생겨 마치 흔들리는 곳에서 글씨를 쓴 듯한 필체를 얻게 됐는데, 이를 ‘총알체’라고도 부른다.●이운한, 첫 발 김구 쏴… 일제 밀정 증거는 없어 이운한은 첫 발을 김구에게 쐈다. 애초부터 그를 타깃으로 범행에 나선 것 같다. 중국에 의존하던 한국국민당이 우파 통합을 주도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운한은 중국 감옥에 있다가 탈옥한 뒤 종적을 감췄다. 일각에서는 그가 일제의 밀정이 아니었나 의심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그가 밀정이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난무팅 사건은 서로 힘을 모아야 할 한인 독립운동세력 간 갈등이 극에 달해 자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역사의 단면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 창설… 中과 항일 전쟁 이 시기 임정 안팎에서는 “2차 국공합작으로 중국 공산당이 팔로군을 갖춘 것처럼 조선 민족도 독립된 부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졌다. 장제스도 1938년 말부터 독립운동계 대표 격인 김구와 김원봉(1898~1958), 유자명(1894~1985)을 따로 불러 단결을 촉구했다. 한인 세력의 분열을 막고 이들을 무장해 중국의 항일 전쟁 체계에 편입하기 위해서다. 사회주의 계열이 먼저 나섰다. 일본인 반제국주의 혁명가 아오야마 가즈오(1907~1997)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조선의용대 편성 아이디어를 냈다. 조선인 독립부대를 창설해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이 지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국민당이 이를 받아들여 1938년 10월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후베이성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김원봉이 대장을 맡았다.우파 진영도 군대를 조직했다. 1939년 1월 한국독립당이 세운 당군(黨軍)을 모태로 이청천과 이범석(1900~1972) 등 만주 독립군과 연합해 1940년 9월 쓰촨성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세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정규군 부대로 국군의 모태로 평가받는다. 총사령관은 이청천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작성된 임정 문서에는 광복군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돼 있다. 광복군 대원 출신인 독립운동가 김득명(1923~2009)은 “이것도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타내고자 상당히 부풀려진 수”라고 증언했다. 현재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600명에 가깝다. 이 때문에 “상당수가 가짜”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국가보훈처도 이런 지적을 의식해 올해부터 가짜 독립유공자 색출을 위한 전수조사에 착수했다.●中 남부서 포도 年 4차례 수확… 세계적 산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차 찾아간 후난성 창사의 후난농업대학. 넓은 캠퍼스를 걸어 한참을 들어가니 제2, 제3 강의동 사이 잔디밭에 부드러운 인상의 학자 흉상 하나가 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남북한과 중국 세 나라에서 모두 유공자가 된 유일한 독립운동가 유자명이다. 캠퍼스 안 그의 옛집 터에는 제자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관을 짓고 있었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유자명은 세계적인 농학자로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라며 “비유하건대 우리나라에서 우장춘(1898~1959)에 해당하는 국보급 과학자”라고 소개했다.충북 충주 출신인 그는 수원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충주간이농업학교(현 충주농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스물다섯 살이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 어릴 때 이름은 흥갑, 학생 때는 흥식이었지만 한성임시정부 설립자인 홍면희( 1877~1946)가 “독립운동을 하려면 새 이름이 필요하다”며 자명(子明)이라고 지어 주었다. 무장 투쟁에 뜻을 품고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에 가입해 신채호(1880~1936) 등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노선에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나석주(1892~1926)가 1926년 12월 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겠다고 하자 톈진까지 찾아가 그에게 직접 돈과 폭탄, 권총을 건넸다. 유자명은 탁월한 어학 능력과 국제 감각으로 좌파 진영을 대표하는 인재로 손꼽혔다. 1930년대에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을, 1940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학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교육부 등) 차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해방 뒤 한국전쟁 등으로 귀국 시기를 놓치자 후난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벼의 기원이 중국 남서부 윈구이 고원 일대라는 것을 밝혀냈다. 세계 농학계도 이를 정설로 인정하는 추세다. 중국 남부는 기후가 습하고 병충해도 많아 포도 재배에 적절하지 않았지만 그가 수십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신품종을 개발했다. 현재 중국 남부는 해마다 포도를 네 차례까지 수확할 수 있는 세계적 산지로 탈바꿈했다. 그가 개량한 포도로 빚은 와인이 지금도 중국에서 생산된다. 난징·창사·전장·구이린·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카타르, 외교 고립·부정선수 논란 딛고 아시안컵 첫 우승

    카타르, 외교 고립·부정선수 논란 딛고 아시안컵 첫 우승

    3년 뒤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을 개최하는 카타르가 집중 투자의 효과를 보며 사상 처음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했다. FIFA 랭킹 93위의 카타르는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최대한의 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외국 선수들을 귀화시키는 등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개막을 앞두고 우승 후보로 분류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한국, 일본, 이란, 호주 등 우승 후보들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더욱이 경기 외적으로 굉장히 불리한 여건이었다. 이번 대회 개최국인 아랍에미리트(UAE)와 2017년 단교 이후 주변 국가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특별히 허가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곤 카타르인이 UAE에 입국할 수 없어 사실상 응원 관중 없이 이번 대회를 치렀다. 항공 직항편도 없어 이동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카타르는 예상을 뒤엎었다. 조별리그 첫 경기 레바논에 2-0으로 승리한 뒤 북한을 6-0으로 일축했고,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제압했다. 16강 이라크전과 8강 한국전을 모두 1-0 승리로 장식했다. 개최국 UAE와 4강전에선 홈 관중이 물병과 신발을 투척하고 상대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도 무려 4-0 대승을 거두며 가볍게 결승에 진출했다. 4강전이 끝난 뒤 UAE의 이의 제기로 결승 진출 자격을 발탁당할 뻔했다. 수단 출신 알모에즈 알리와 이라크 출신 바삼 알라위를 영입했는데, UAE는 두 선수가 부정선수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AFC는 결승전을 몇 시간 앞두고 기각해 카타르는 우여곡절 끝에 결승전에 나설 수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고 자기 플레이를 펼치며 아시안컵 최다 우승(4회)에 빛나는 일본을 보기 좋게 요리했다. 아부다비의 자예드 스포츠시티 스타디움을 3만 6700여명이 찾아 사상 최악의 결승 흥행 우려를 잠재운 이날 킥오프 12분 만에 알리가 오버헤드킥을 넣어 기선을 제압했다. 알리 다에이(이란)의 8골을 넘어 단일 대회 가장 많은 9골로 득점왕을 확정하는 순간이었다. 전반 27분 압둘아지즈 하템이 추가 골을 기록했다. 후반 24분 미나미노 다쿠미에게 만회골을 내줄 때까지 카타르는 10시간 8분 동안 한 골도 내주지 않는 철벽 방어를 펼쳤다. 아크람 아피프가 후반 38분 요시다 마야(사우샘프턴)의 핸드볼 파울을 유도해 비디오 판독(VAR) 끝에 페널티킥을 넣어 이날 어시스트 둘을 추가해 대회 10개를 채우고 마침내 골맛을 봤다. 일본은 90분 내내 유효 슈팅 하나로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편 스페인 축구대표팀 출신 사비 에르난데스(39·알사드)는 다른 측면에서 주목받게 됐다. 지난해 12월 아시안컵 개막을 앞두고 카타르 방송에 출연, 아시안컵 조별리그 통과 팀과 토너먼트 결과를 예상했는데 카타르가 결승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8강 진출국 중 베트남과 UAE를 제외하고 여섯 팀을 맞혔고, 4강 중 세 팀을 맞혔다. 또 한국을 꺾으면 우승한다는 묘한 징크스가 네 대회째 이어진 점도 흥미롭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신발과 물병 그라운드에 어지러이 AFC “카타르-UAE전 조사”

    신발과 물병 그라운드에 어지러이 AFC “카타르-UAE전 조사”

    그라운드에 날아든 신발들이 이 경기를 압축한다. 신발은 이슬람권에서는 상대를 모욕하거나 경멸하는 대표적 상징이다. 2008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기자회견 도중 이라크의 한 기자가 신발을 던진 것은 아랍권에서 신발 투척이 갖는 상징성을 잘 보여줬다. 심지어 신발 끝으로 상대방을 가리키며 앉는 것조차 아랍권에선 무례한 일로 받아들여진다고 로이터통신은 설명했다. (사실 위 사진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라운드에 난입한 관중 모습을 중계 방송사가 보여주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UAE 관중들이 얼마나 축구의 본뜻을 잃어버렸는지를 보여주려고 게재한다.) 아랍에미리트(UAE)는 30일(이하 한국시간) 새벽 아부다비 모하메드 빈 자예드 스타디움에서 끝난 카타르와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준결승을 0-4로 완패했다. 개최국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은 물론, 관중석을 하얗게 물들인 3만 8000여명의 UAE 관중 응원도 문제가 됐다. AFC는 신발과 물병이 날아든 상황 조사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AP통신은 전했다. UAE와 카타르는 지난 2017년 6월 단교 이후 갈등을 겪고 있다. 당시 UAE와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이집트 등은 카타르가 테러를 지원한다고 주장하며 외교와 교역을 중단했다. 카타르인은 특별 허가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곤 UAE 입국이 원천 금지됐다. 이전 카타르 경기에선 그나마 중립국인 오만인들을 비롯한 일부 카타르 팬들이 응원을 펼치기도 했으나 이날은 개최국과의 충돌 우려 때문에 카타르 관중의 입장이 일체 금지됐다. 경기 시작 전부터 UAE 관중은 카타르를 향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카타르의 국가가 울려 퍼질 땐 야유도 터져 나왔다. 카타르가 일방적으로 앞서자 그라운드에는 성난 관중들이 던진 물병이 날아들었다. 카타르 아크람 아피프는 코너킥을 차려고 할 때 자신을 겨냥해 물병이 날아들자 심판에 항의하기도 했다. 전반 37분 알모에즈 알리가 두 번째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할 땐 신발도 날아왔다. 그는 8골로 대회 득점 선두를 질주했다. 후반 35분 하산 알하이도스의 세 번째 득점 직후에도 살렘 알하즈리가 머리에 신발을 맞았다. 후반 추가시간 1분 하메드가 거친 플레이로 퇴장 당할 정도로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하지만 적대적인 분위기에도 카타르 선수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경기를 이어갔고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대회 최고의 족집게 도사 사비 에르난데스(38·알사드)가 예언한 대로 일본과 카타르는 다음달 1일 밤 11시 우승을 다툰다. 과연 그의 예측대로 카타르가 우승할지 궁금해진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비장한 한용운·처연한 유관순… 감시받은 4858명의 흔적

    비장한 한용운·처연한 유관순… 감시받은 4858명의 흔적

    처연하지만 어딘가 결연해 보이는 유관순의 눈빛, 파르라니 깎은 머리로 정면을 차갑게 응시하는 한용운의 비장함, 대형 태극기 앞에서 무표정하게 자세를 취한 이봉창….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등록문화재 제730호)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이다. 1920~1940년대 조선총독부 경기도경찰부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일제 경찰이 감시했던 4858명에 대해 작성한 신상카드다. 안창호, 이봉창, 한용운, 유관순, 김마리아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를 포함해 한때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나 후일 친일 활동에 나선 이광수, 주요한, 최린 등도 포함돼 있다. 카드 중에는 ‘고등과 수배용’, ‘형사과 수배용’이라고 적힌 경우도 있는데 중요 범죄자의 사후 관리를 위한 용도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감시대상 인물은 4858명이나 사람에 따라 카드가 복수로 작성된 탓에 전체 카드 매수는 6264매다. 카드 앞면과 뒷면에는 상반신 사진(경우에 따라 전면 혹은 측면 사진)과 나이, 키, 본적, 출생지, 주소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 외에도 죄명, 형기, 언도관서(재판소 명), 언도 연원일, 입소 연월일, 출소 연월일, 형무소 명 등의 수형 정보가 펜으로 적혀 있다. 죄명을 살펴보면 ‘보안법’, ‘치안유지법’, ‘국가총동원법’, ‘폭탄투척사건’, ‘안녕 질서에 관한 법’, ‘출판법’, ‘육군형법’, ‘주거침입’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사진은 대부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면 상반신 사진의 경우 현재 백과사전 등에서 해당 인물을 소개하는 사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희귀한 사료로서 항일 민족운동가나 독립운동가들을 조사하거나 연구할 때 신빙성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는 “1919년 3·1운동 이후 각종 사회 사상운동과 비밀결사 운동이 증가하면서 일제가 대상자들을 신속하게 검거하고 탄압하기 위해 제작한 카드로, 어떤 사람들을 감시 대상으로 삼았고, 어떤 명목으로 감시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설명했다. 6000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카드의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980년대 치안본부(현 경찰청)에서 국사편찬위원회로 이관돼 앨범에 보관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http://db.history.go.kr)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작년 집회·시위 역대 최다… 불법·폭력 시위는 매년 감소

    화염병 투척·쇠파이프 사용은 줄어 지난해 전국에서 열린 집회·시위 건수가 역대 최다를 기록했지만, 불법·폭력시위는 예년과 같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20일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 열린 집회·시위는 6만 8315건으로 역대 가장 많았다. 2017년 4만 3161건보다 58% 증가했으며, 야간집회가 처음 허용된 2010년(5만 4212건)보다도 많았다. 특히 노동 분야 집회가 3만 2275건 열려 2017년(1만 8659건)에 비해 73% 정도 늘었고, 남녀 성차별이나 성 소수자 등 이슈가 다양해지면서 사회 분야 현안 관련 집회도 2만 1387건으로 전년(1만 2873건)보다 66% 증가했다. 집회·시위 건수는 늘었지만, 불법·폭력시위는 전년(12건)과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화염병 투척, 투석, 쇠파이프·각목 사용, 시설 피습, 도로 점거 등 5가지 기준으로 불법·폭력시위를 규정한다. 불법·폭력시위는 2013년 45건에서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해 미신고 집회 건수는 53건이었고, 경찰이 집회 신고자 간 장소 중첩, 신고서 미비, 중요시설 보호 등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통고한 사례도 12건으로 집계됐다. 미신고 집회 건수는 2017년(144건)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금지통고는 2017년(118건)의 10분의1 수준이다. 합법적인 집회·시위 문화가 정착하면서 경찰도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코미디빅리그’ 김구라 특별 출연..양세형·양세찬과 호흡

    ‘코미디빅리그’ 김구라 특별 출연..양세형·양세찬과 호흡

    ‘코미디빅리그’에 김구라가 특별 출연해 웃음 폭탄을 투척한다. 20일 방송되는 tvN ‘코미디빅리그’에는 방송인 김구라가 출격, 공채 개그맨 출신다운 국보급 존재감으로 업그레이드된 재미를 안긴다. 김구라는 ‘가족오락가락관’ 코너에서 양세형, 양세찬, 이용진, 이진호와 호흡을 맞춘다. 처음으로 공개 코미디 무대에 오른 김구라는 개그맨들의 거침없는 애드리브 폭격에 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시니컬한 독설로 촌철살인 입담을 자랑해 관객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는 후문. 찰떡같은 캐릭터 소화력으로 스튜디오를 쥐락펴락한 김구라의 활약은 이날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2019년 1쿼터 3라운드를 달리고 있는 ‘코빅’은 기존 코너와 새 코너 간 경쟁이 벌써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번 쿼터 들어 2주 연속 1위를 차지, 대세로 떠오른 ‘가족오락가락관’ 코너에는 김구라의 지원사격이 더해져 역대급 폭소를 유발한 가운데, 2위에 오른 ‘국주의 거짓말’ 코너 역시 다채로운 콘텐츠로 시청자들의 배꼽을 저격한다. 특히 관객들과 주거니 받거니 호흡을 이어가던 중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도 특유의 노련함을 뽐내는 이국주의 센스가 시선을 사로잡을 예정. ‘국주의 거짓말’과 더불어 공동 2위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는 선수다’는 황제성, 문세윤, 최성민의 열정적인 하드캐리가 폭발적 호응을 얻어냈다는 전언이다. 뿐만 아니라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갑분싸’, ‘석포4리 마을회관’, ‘흔들려’, ‘뽀스 베이비’ 등도 강력한 비밀 병기를 탑재, 한층 풍성한 볼거리를 예고해 궁금증을 높인다. 과연 이번 주에는 어떤 코너가 방청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1위에 오르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tvN ‘코미디빅리그’는 20일 오후 7시 40분에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지난해 집회·시위 6만 8315건으로 역대 최다, 불법폭력시위는 매년 감소

    지난해 집회·시위 6만 8315건으로 역대 최다, 불법폭력시위는 매년 감소

    야간집회 첫 허용된 2010년보다 빈번하게 개최된 집회·시위 화염병 투척, 투석, 쇠파이프·각목 사용 등 불법·폭력은 매년 감소지난해 전국에서 열린 집회·시위 건수가 역대 최다를 기록했지만, 불법·폭력시위는 예년과 같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20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열린 집회·시위는 6만 8315건으로 역대 가장 많았던 것으로 집계됐다. 2017년 4만 3161건으로 58% 증가했으며, 야간집회가 처음 허용된 2010년(5만 4212건)보다 많았다. 특히 노동분야 집회가 3만 2275건 열려 2017년(1만 8659건)에 비해 73% 정도 늘었고, 남녀 성차별이나 성 소수자 등 이슈가 다양해지면서 사회분야 현안과 관련된 집회도 2만 1387건으로 2017년(1만 2873건)보다 66% 증가했다. 집회·시위 건수는 늘었지만, 불법·폭력시위는 2017년(12건)과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화염병 투척, 투석, 쇠파이프·각목 사용, 시설 피습, 도로 점거 등 5가지 기준으로 불법·폭력시위를 규정한다. 불법·폭력시위는 2013년 45건에서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해 미신고 집회 건수는 53건이었고, 경찰이 집회 신고자들 간 장소 중첩, 신고서 미비, 중요시설 보호 등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통고한 사례도 12건으로 집계됐다. 미신고 집회 건수는 2017년(144건)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금지통고는 2017년(118건)의 10분의 1 수준이다. 합법적인 집회·시위가 정착하면서 경찰도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경찰 관계자는 “대화경찰관제 시행으로 경찰관과 집회참가자 간 소통이 강화되고, 우발적인 현장 불법상황이 사전에 방지되는 등 긍정적인 면이 확인됐다”며 “앞으로도 집회·시위 자유 보장과 성숙한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한결같이 법을 집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대법원장 차량 화염병’ 70대 “반성하지만 부당재판은 억울”

    ‘대법원장 차량 화염병’ 70대 “반성하지만 부당재판은 억울”

    출근 중이던 김명수 대법원장 승용차에 화염병을 던진 70대 남성이 법정에서 “잘못을 반성한다”면서도 “사법부로부터 부당한 일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최병철)는 17일 현존자동차방화 혐의로 구속기소된 남모(75)씨의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었다. 남씨는 지난해 11월 27일 오전 9시 8분쯤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출근 승용차에 페트병으로 만든 화염병을 던진 혐의를 받고 있다. 남씨는 강원도 홍천에서 돼지농장을 운영하며 유기축산물 친환경 인증 사료를 제조해 판매하던 농민이다. 2013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친환경 인증 부적합 통보를 받은 뒤 영업에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농장 전체가 경매로 넘어갔다. 이후 정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1·2심에서 패소한 남씨는 대법원에서도 상고 기각 결정이 나자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조사됐다. 화염병을 투척하기에 앞서 남씨는 3개월간 대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남씨는 이날 법정에서 “사법부로부터 부당한 일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재판장에게 감히 말한다”면서 “제 사건에 대해서 증거가 충분히 될 수 있는 서류를 위조 내지는 변조해서 재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에서 정당한 재판을 해줄 것으로 굳게 믿고 상고했는데, 상고심에서도 1·2심에서의 위법한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재판을 해주지 않았다”면서 “더는 합법적 수단으로는 소송 행위를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는 “무리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는 깊이 반성한다”면서도 “정당방위로서의 범행은 재판장이 조각 사유로 판단해 주면 대단히 감사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남씨의 변호인은 “피고인이 법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위법성 조각이라기보다는 피고인이 사건에 이르게 된 경위에 다소 억울하게 느낀 부분이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사건 당시 승용차에 함께 타고 있었던 대법원자의 비서관은 재판부에 “법질서 원칙상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피고인이 이에 이르게 된 경위나 동기 등을 고려해 관대한 처벌을 해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내달 28일 첫 재판을 열고 바로 변론을 종결하기로 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100년 전 좌초 독일 잠수함 U보트 동체 프랑스 해변에 떠밀려와

    100년 전 좌초 독일 잠수함 U보트 동체 프랑스 해변에 떠밀려와

    1차 세계대전 때인 1917년 7월 프랑스 북부 해변 앞바다에서 좌초됐던 독일군 잠수함 UC-61 동체가 무려 100여년 만에 칼레 근처 위쌍 모래뻘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U보트로 불리며 대서양 등을 오가는 유럽과 미국 등 연합국 상선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독일 잠수함은 어뢰나 기뢰 공격으로 수백 척의 상선을 파괴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UC-61호는 적어도 11척의 배를 공격해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마지막 임무 때 벨기에 제브뤼헤를 떠나 볼로냐 수 메르와 르 하브레 연안에 기뢰를 투척하기 위해 순항하다 동력을 잃고 좌초됐다. 26명의 승조원들은 물이 들어오게 해 잠수함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모두 프랑스에 투항했다. 1930년대 뻘 속에 완전히 묻혔던 동체가 수십년 전부터 조금씩 모습을 보이다 이제 제법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위쌍 시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붙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잠수함 동체 두 조각이 물이 빠질 때 해안 사구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베르나르 브라크 위쌍 시장은 “2~3년 전부터 동체가 조수와 모래의 움직임을 가져오는 바람의 영향에 따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다가 바람이 잔잔해지면 다시 사라지는 모습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그는 관광이 허용되더라도 배를 타고 돌아보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현지 관광 가이드 뱅상 슈미트는 바람과 조류의 영향으로 UC-61의 모습이 조금 더 나타나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위쌍의 모든 주민들은 잠수함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체가 파도에 많이 쓸려와 이제 볼 수 있게 됐다. 과거에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렇게 많이 눈에 띈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양승태 소환] 대법원에 갑자기 등장한 검정 우산부대는?

    [양승태 소환] 대법원에 갑자기 등장한 검정 우산부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대법원 정문 앞 기자회견에 ‘우산 부대’가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11일 오전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출석에 앞서 대법원 정문 앞에서 입장을 발표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탑승한 승용차가 대법원 정문 앞에 도착하자, 검정색 정장을 입은 남성 약 10명이 우산을 들고 양 전 대법원장을 에워쌌다.  이들은 양 전 대법장에게 위해가 발생할 것을 대비한 경찰들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등장하기 전부터 서울 서초경찰서 경비과장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계란 등을 던질 경우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 있다”고 알렸고, 일부 시민들은 “똥을 뿌리겠다”고 말하며 흥분한 상황이었다.  경찰은 시민들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계란 등 물건을 투척할 경우를 대비해 우산을 든 경찰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의 이러한 ‘우산 경비’는 지난해 말 발생한 김명수 대법원장을 상대로 한 테러가 영향을 줬다. 지난해 11월 27일 오전 대법원 인근에게 1인 시위를 하던 남성이 김 대법원장의 출근 차량을 향해 인화물질이 담긴 페트병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대법원 경비 등을 고려해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출석한 이후인 오전 9시 40분쯤 출근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양승태 소환] 법원노조·지지 반대 집회·취재진·경찰까지…수천명 북적인 대법

    [양승태 소환] 법원노조·지지 반대 집회·취재진·경찰까지…수천명 북적인 대법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출석하는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과 서울중앙지검 인근에는 수 천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집회·시위에 대비하기 위한 경찰 1800명, 취재진 수백명, 집회 참가자 100여명, 법원노조 60여명, 유튜버 수십명까지 양 전 대법원장의 검찰 출석을 지켜봤다.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정문 앞에 오전 8시 59분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문 안쪽에는 법원공무원 노조 60여명이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집회를 벌이고 있었는데, 양 전 대법원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법원 노조와 취재진을 한 번 둘러봤다. 어두운 표정의 양 전 대법원장이 입장문을 발표하는 동안 법원 노조는 계속해서 “양승태를 구속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법원 노조는 “양승태의 말이 기자들에게 전달되면 안 된다”며 기자회견이 지속되는 6분 동안 확성기로 구호를 계속 외쳤다. 취재 구역까지 접근한 일부 시민은 양 전 대법원장을 향해 험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경비를 담당한 서울 서초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서초동에 운집한 인원은 수 천명에 달한다. 경찰 18개 중대 1800명이 경비를 담당했고, 민중당과 대한애국당 등 집회 신고자는 약 100명이다. 이 중 대법원 앞에는 경찰 1200명, 기자 100명, 법원 노조 60명이 양 전 대법원장을 목도했다. 경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정문 앞에 도착하기에 앞서 “계란이나 물병 등을 투척하면 현행법에 따라 현행범으로 체포하겠다”며 수차례 안내 및 경고 방송을 했다. 일부 몸싸움을 빚어지기는 했으나 큰 돌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이 기자화견을 마친 뒤 탑승한 차량을 향해 일부 시민들이 돌진하기도 했으나 경찰에 제지당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친정’ 대법서 입장발표…피의자 양승태의 오만

    ‘친정’ 대법서 입장발표…피의자 양승태의 오만

    “사법농단 최종 책임자 부적절 처신” 영향력 행사 우려에 법원 내부 비판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에서 대국민 입장을 발표하기로 했다. 사법농단 사태의 최종 책임자인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 포토라인이 아닌 대법원에서 입장을 발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법원 내부에서도 빗발치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은 9일 “11일 오전 9시쯤 서울중앙지검 출석 전에 대법원에서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건물 내부는 아니라도 정문 안쪽 로비에서 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대신 검찰 포토라인에서는 취재진 질의도 받지 않을 계획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1975년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시작해 2017년까지 40년 넘게 법관으로 일했다. 특히 대법관, 대법원장으로서 오랜 기간 근무한 대법원에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에 개입하고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한 의혹을 받는 전직 사법부 수장이 대법원에서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은 사법 불신 사태의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다. 보수 성향의 법관들이 결집하기를 노린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지난해 6월에도 경기 성남 자택 인근 놀이터에서 기자들을 불러 놓고 책임을 부인했다. 검찰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는다고 청와대에서 입장 발표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며 “구속영장이나 재판을 염두에 두고 법원에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직 대법원장이 대법원에서 입장 발표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한 전례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원이 이미 최악의 상황에 놓였는데 이제 와서 대법원에서 입장 발표를 한다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도 “전직 대법원장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걸로 보이지만 대다수 판사들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찰도 비상이 걸렸다. 출입이 제한된 검찰청사 내 포토라인이 아닌 대법원 정문 밖에서는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 수도 있다. 불과 40일 전에 대법원 정문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화염병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11일 오전 서초동 인근에는 집회 신고가 2건 접수됐다. 사전 신고가 필요 없는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 형태로 지지 혹은 반대 단체가 현장에서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왜 그래 풍상씨’ 유준상, 분노 가득 눈빛으로 돈다발 투척 ‘무슨 일?’

    ‘왜 그래 풍상씨’ 유준상, 분노 가득 눈빛으로 돈다발 투척 ‘무슨 일?’

    ‘왜 그래 풍상씨’ 유준상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돈다발을 투척하는 사진이 공개돼 관심이 쏠린다. 9일 첫 방송되는 KBS2 새 수목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는 극중 아버지의 사망으로 상복을 입은 풍상씨(유준상 분)가 검은 양복을 입고 험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앞으로 돈을 던지는 장면이 담긴 스틸을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엔 돈뭉치를 손에 쥔 풍상씨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는 가운데 상복을 입은 풍상씨의 결연한 눈빛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풍상씨는 이내 누군가가 탄 차량을 온몸으로 가로막고 돈을 하늘 위로 던진다. 그의 분노가 느껴지고 돈은 하늘 위로 흩날린다. 가진 건 ‘텅장’뿐이던 풍상씨가 이 큰 돈을 어디서 구했는지, 왜 돈을 내던졌는지, 풍상씨가 위험을 감수하고 달리는 자동차를 가로막은 이유는 무엇인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 돈을 뿌리자 돈을 줍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드는 검은 양복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관심이 쏠린다. 공개된 사진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풍상씨가 돈다발을 던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해 분노가 폭발, 돈다발을 투척하는 장면. 오늘(9일) 첫 방송을 통해 이 돈다발을 투척하게 만든 장본인이 공개될 예정이어서 관심을 높인다. ‘왜그래 풍상씨’ 측은 “아버지의 장례 중 돈다발을 던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감정이 폭발하는 풍상씨의 짠내 나는 스토리가 오늘 첫 방송에서 공개된다”면서 “장례식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과 복잡한 감정선은 풍상씨가 그동안 동생들을 돌보면서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 수 있어 짠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한편, KBS2 새 수목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는 9일 오후 10시에 첫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8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87회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경건한 자세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한인애국단 단원인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벌였지만 실패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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