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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주일 못 먹어”…췌장암 4기 유상철의 도전

    “일주일 못 먹어”…췌장암 4기 유상철의 도전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유상철이 근황을 전했다. 유상철은 18일 유튜브채널 터치플레이가 공개한 다큐멘터리 ‘유비컨티뉴’에 출연해 항암치료의 고통을 떠올렸다. 이날 유상철은 이천수, 최진철, 송종국, 이운재 등 2002월드컵 멤버들과 만났다. 그는 “얼굴이 점점 좋아지시는 거 같다”는 이천수의 말에 “살이 쪄서 그런가. 배하고 얼굴만 찐다. 배꼽이 깊어졌다”고 했다. 유상철은 “같이 고생했던 친구들, 후배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조금이나마 내가 아팠던 것을 잊을 수 있었다”며 웃었다. 그러나 항암치료 이야기가 나오자 “항암치료를 하는 게 보통이 아니다. 버티는 게 진짜 힘들다. 나도 맞고 나면, 안 맞아본 사람은…(잘 모른다)”고 말끝을 흐렸다. 유상철은 “항암 주사를 맞으면 일주일 정도는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면서 “냄새나 맛이나 이런 게 굉장히 예민해져 있다. 일주일을 못 먹으니까 그 일주일이 지나고 컨디션이 좋을 때 내가 막 일부러 더 많이 먹나보다”고 힘든 치료과정을 털어놨다. 2019년 11월 췌장암 판정을 받은 유상철은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등 모든 활동을 중단한 채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유상철은 당시 “췌장암 판정을 받은 것은 지난해 10월 18일이다. 전날부터 황달기가 심상치 않아서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받았는데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정밀 검사를 진행한 결과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유 감독은 지난해 6월까지 13차례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약물치료에 돌입했고, 9월 MRI 촬영 결과 암세포가 거의 사라졌다는 소견을 받았다. 지금은 야외 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을 많이 되찾은 상태다. 지난해 5월 JTBC 예능 ‘뭉쳐야 찬다’에 출연해 “더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 치료 잘해서 꼭 이겨내겠다”고 다짐을 전했다. 말기 암 판정 후 5년간 생존 확률 단 1%. 유상철은 기적에 도전 중이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여기는 남미] 315일 만에 코로나 극복한 스페인 여성, 축복 속에 퇴원

    [여기는 남미] 315일 만에 코로나 극복한 스페인 여성, 축복 속에 퇴원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300일 넘게 입원 치료를 받은 스페인 여자가 의료진의 축하인사를 받으며 퇴원했다. 엘파이스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진자 엘사(53)는 16일(이하 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그레고리오 마라뇬 병원에서 생일을 하루 앞두고 퇴원했다. 이 병원에 입원한 지 정확히 315일 만이다. 의료진은 병원 복도 양편에 도열해 마드리드 최장 기간 입원치료 기록을 세우고 퇴원하는 엘사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며 격려와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장기 투병 탓에 말까지 어눌해졌지만 엘사는 "나쁜 기억은 곧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며 "이젠 감사할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엘사의 코로나 투병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두에로 협곡 투어를 앞두고 코로나19에 걸린 엘사가 그레고리오 마라뇬 병원에 입원한 건 지난해 4월 7일. 입원 15일 만에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그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렇게 시작된 중환자실 생활은 5개월 넘게 이어졌다. 진정제와 수면유도제를 맞고 대부분의 시간을 평온하게 잠자듯 보냈지만 이 기간은 그에겐 급박한 상황이 반복됐다. 자가 호흡이 힘들어 인공호흡기를 달고 지내야 했고, 특히 1달 동안은 에크모(체외막 산소 공급장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혈전증, 뇌졸중, 감염증이 줄줄이 꼬리를 물었다. 엘사를 담당한 의사 에우헤니아 가르시아는 "코로나19 환자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모두 경험했다고 보면 된다"며 "엘사가 코로나19를 이겨낸 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워낙 오랜 기간 입원치료를 받다 보니 엘사는 치료에 투입된 의료진 수에서도 신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4월부터 퇴원까지 그를 담당한 의사와 간호사는 자그마치 300명을 웃돈다. 엘사는 "(중환자실에서 나온 후)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서 이동하다 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더라"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두 나를 돌봐준 의료진들이었다고 말했다. 가족처럼 친해진 의사와 간호사도 여럿이다. 간호사들은 엘사의 부탁으로 염색을 도와주기도 했다. 엘사는 "병원에서 무슨 염색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며 "간호사들이 이런 뜻을 알고 염색을 도와주곤 했다"고 말했다. 엘사는 지난 17일 53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는 "약간의 두려움도 드는 게 사실이지만 바이러스와의 치열한 전쟁 끝에 건진 소중한 인생인 만큼 더욱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레고리오 마라뇬 병원은 포스트 코로나19 프로그램을 통해 엘사의 건강을 살피고 재활을 지원할 예정이다. 사진=엘파이스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단독] 인권위 “전명규, 故노진규 골육종 투병에도 무리하게 출전”

    [단독] 인권위 “전명규, 故노진규 골육종 투병에도 무리하게 출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에이스 고 노진규 선수가 지난 2016년 골육종으로 세상을 떠난 이유가 전명규 전 한국체대 교수(전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와 백국군 코치 등 당시 코칭스태프들이 고인의 투병 사실을 알고도 올림픽 메달 획득을 위해 혹사시키며 병원 치료를 늦췄기 때문이라는 국가인권위원회 판단이 나왔다. 17일 인권위가 공개한 익명결정문에는 “부상을 당한 피해자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못한 채 과도한 훈련과 무리한 대회 출전을 지속한 사실이 있고, 이러한 배경에 피진정인들의 영향력 등이 있었다는 정황이 상당하며, 과도한 훈련과 무리한 대회 출전으로 인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렀다고 볼 개연성도 있다”고 돼 있다. 이는 지난해 법원이 피해자의 죽음에 의사의 오진이 영향을 미친 것을 인정한 데이어 인권위가 피해자 죽음에 빙상계 인사들의 책임이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유가족들은 2019년 3월 당시 노진규 선수의 누나 노선영 선수가 그해 동계체전을 끝으로 은퇴를 결정하면서 노진규 선수가 부상을 당했음에도 대회 출전을 강요한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칭스태프들에 대한 진정을 인권위에 제기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상 공소시효나 민사상 시효가 지난 사건은 피진정인에 대한 징계권고를 할 수 없어 각하하도록 돼 있지만 인권위가 이 사건을 중요 사건으로 정해 약 1년 반 동안에 걸쳐 조사해 노 선수 사망 원인을 혹사에 있었다는걸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노 선수는 2013∼2014 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1,3,4차 시리즈에 출전해 2014 소치 동계 올림픽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 5000m 단체 계주 출전권을 따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골육종이 악화하면서 결국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전명규 전 교수 등 관계자들은 “피해자가 올림픽 출전을 위해 여러 대회에 참가한 것은 외부 병원의 진단 결과에 따라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고 대회 출전과 훈련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인권위는 피진정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권위는 “2013년 9월 30일 이미 좌측 어깨에 종양이 발견돼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는 외부 병원의 조언을 받은 상태였으며, 육안으로 보기에도 좌측 어깨가 돌출되는 등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며 “노진규 선수는 일기장에 지속적으로 어깨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하였고, 특히 훈련 중 빙판에 손을 짚는 것이 불편하다고도 기재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노진규 선수는 골육종이 발견되기 전인 2013년 4월 이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4위를 하면서 국가별로 최대 3명이 출전할 수 있는 소치올림픽 개인전에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리하여 소치올림픽 개인전 출전권을 따기 위한 2013/2014 국제빙상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3,4차 대회에 참가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으며 피해자의 경력을 감안하면 부상 치료를 미뤄가며 참가할 만큼 의미가 있는 대회가 아니었다는 견해가 중론”이라고 판단했다. 의정부지방법원 제13민사부(재판장 최규연 판사)는 지난해 6월 “노진규 선수를 진단한 건국대학교 병원 정형외과 박모 의사가 의료상 주의의무를 위반하여 망인으로 하여금 골육종의 조기진단 및 치료를 받을 기회를 상실하게 하였고, 설명의무를 위반하여 망인의 진단 및 치료 방법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였으며, 그로 인해 망인의 생존기간이 5년보다 단축되었다”며 노 선수 유족에게 2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인권위는 “성적 지상주의나 국위 선양 등을 이유로 대회나 훈련 참가에 있어 건강 상태나 부상 정도에 대한 객관적인 심의를 받지 못한 채 참가해야 할 가능성이 크므로 이해관계자를 배제한 상황에서 부상을 당한 국가대표의 대회 출전이나 훈련 참가에 대해 심의하는 절차를 만들고, 관련 규정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며 “대한체육회가 ‘국가대표 선발 및 운영규정’이나 ‘국가대표 훈련관리지침’에 국가대표 선수의 부상 예방, 관리, 보호, 훈련 방안 등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라”고 의견을 표명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는 운동선수(국가대표 등)들의 부상 예방·재활·복귀가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재활 컨디셔닝 센터’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에게는 국가대표 선수가 부상을 당했을 경우 해당선수의 대회 출전과 훈련 참여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심의 절차를 마련하고, 「위원회 규정」 등에 위 심의 절차를 반영하여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한국체육대학교 총장에게는 ▲한국체육대학교총장의 허가 없이 소속 교원이 교내 운동부 활동과 별개의 훈련을 자의적으로 지도하지 못하도록 관리·감독하는 절차와 이를 위반할 경우 징계하는 절차를 마련할 것 ▲소속 교원이 대한체육회의 회원종목단체의 임원 등으로 참여할 경우, 겸직 신고 및 허가 절차에 대한 관리·감독을 실시 ▲전문실기분야 교원의 경기지도실적을 평가함에 있어 종목 및 각 대회별 특성을 고려한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고, 해당 시스템에서 경기지도실적이 전체 평가 항목에서 과도하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도록 조정할 것을 의견 표명했다. 김현수 인권위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장은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이번 사건을 포함한 빙상계 폭력 사건은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이 인권위에 만들어진 이유”라며 “고통 받는 스포츠 폭력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이 언제든지 용기를 낸다면 확실히 죄를 밝혀내겠다는 믿음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명규 전 교수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저는 노 선수 가족과 의사와 협의해서 훈련을 하겠다고 결론을 내리면 도와줄 것이고, 수술을 하겠다고 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리곤 며칠 후에 와서 당사자가 악성으로 종양이 발전할 확률이 없다는 판단을 가지고 와서 훈련을 하겠다고 해서 허락을 했을 뿐이다“라며 ”당시에 저는 노 선수의 훈련과 시합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관여할 권한이 제게 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남김없이’… 하얀 리본 품은 추모 물결

    ‘남김없이’… 하얀 리본 품은 추모 물결

    권영길 전 대표 “혁명 꿈꾼 로맨티스트”홍세화 “사랑·명예·이름도 없이 가셨다”가수 전인권·김동명 위원장 등 빈소 찾아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에는 부음 이튿날인 16일에도 노동·사회·정치 등 각계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빈소를 찾은 시민들도 전날보다 더 늘었다. 3층 장례식장 입구는 조문객들이 하얀 리본 모양의 종이에 쓴 추모 문구로 가득했다.지난 15일 고인이 폐렴으로 별세한 뒤 50여개 시민단체가 주축이 돼 구성된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18일까지 일반 시민에게도 빈소를 개방하고 공식 조문을 받는다”며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전국 13곳에 분향소를 차렸다”고 밝혔다. 장례위원회는 장례 마지막날인 19일 오전 8시 발인 뒤 오전 9시 대학로 거리에서 노제를 하고, 오전 11시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열기로 했다. 이후 장지인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동해 오후 2시 하관식을 한다.장례식장을 찾은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백 소장은 혁명을 꿈꿨던 로맨티스트였다”면서 “통일운동가로 단정 짓기 힘든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민주화운동 동지로서 오랜 세월 함께했다. 특히 권 의원은 1997년, 2002년,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 후보로 출마했고, 백 소장은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민중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고인은 투병 중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 참여했다”며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해고 노동자들의 편에 섰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홍세화 장발장은행 대표는 “우리 시대의 큰 별이 가셨다”며 “고인이 지은 노랫말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가셨다”고 애도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도 “살아 계실 때 너무 힘들게 애 많이 쓰셨는데 이제 뒷사람들이 이어서 잘할 테니 하늘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수 전인권씨는 고인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생전에 고인께서 공연도 자주 보러 오셨다”며 “어제 백 교수에게 전화해 ‘건강을 꼭 챙겨야 고인도 마음이 편하시다’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임순례 영화감독,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 김두관·양이원영·김영주·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등도 차례로 빈소를 찾았다. 시민들도 옷에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에서 따온 ‘남김없이’라고 쓰인 하얀 리본을 달고 빈소로 들어섰다. 한편 이날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전두환 정권 당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를 주도하다 고인이 구속되자 미 하원의원들이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전문 2건을 공개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이낙연, 백기완 조문 “선생님의 꿈과 투혼. 잊지 않겠다”

    이낙연, 백기완 조문 “선생님의 꿈과 투혼. 잊지 않겠다”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일생을 헌신해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지난 15일 향년 89세로 영면한 가운데, 빈소 마련 이틀째인 16일 오후에도 시민·정치인 등의 조문이 계속됐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이날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했다. 이 대표는 조문을 마친 뒤 페이스북에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선생께서는 한 번도 굽히지 않고 통일, 민주, 정의, 복지를 줄기차게 외치셨다”고 애도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선생께서는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같은 아름다운 우리 말을 새로 만드셨다. 외국 민주화 시위에서도 불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인류에게 선물하셨다”며 “선생께서 저희 세대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 선생님의 꿈과 투혼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백 소장은 지난 15일 오전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 별세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이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 소장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동부리 출생으로, 1950년대부터 농민과 빈민운동 등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적극 참여했다. 1960년대에는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백 소장은 1967년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웠으며, 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 등 활동에도 참여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지만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이후 1992년 독자 민중후보로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대선에서 낙선한 백 소장은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지원했다. 백 소장은 창작활동에도 힘을 썼는데, ‘장산곶매 이야기’와 ‘부심이의 엄마생각’ 등 소설과 수필집을 펴내기도 했다. 한편 백 소장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엄수된다. 발인은 19일 오전 8시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백기완 빈소 이튿날... 권영길, 홍세화, 이부영 등 민주화 운동 동지들 조문

    백기완 빈소 이튿날... 권영길, 홍세화, 이부영 등 민주화 운동 동지들 조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에는 이튿날에도 노동·사회·정치 각계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층 장례식장 입구에는 조문객들이 하얀 리본 모양의 종이에 쓴 추모 문구로 가득했다. 지난 15일 고인이 폐렴으로 별세한 뒤 50여개 시민단체가 주축이 돼 구성된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18일까지 일반 시민에게도 빈소를 개방하고 공식 조문을 받는다”며 “광주, 대구, 대전, 부산, 춘천, 제주 등 전국 13곳에 분향소를 차렸다”고 밝혔다. 장례 마지막날인 19일 오전 8시 발인 뒤 오전 9시 대학로 거리에서 노제를 하고 오전 11시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연 뒤 장지인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동해 오후 2시 하관식을 한다. 장례식장을 찾은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혁명을 꿈꿨던 로맨티스트였다”면서 “통일운동가라는 단순한 한마디로 단정짓기 힘든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민주화 운동 동지로서 오랜 세월 함께 했다. 특히 권 의원은 1997년, 2002년,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 후보로 출마했고, 백 전 소장은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민중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고인은 투병 중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청와대 앞 기자회견에 참여했다”며 “(살아계셨다면)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해고 노동자들의 편에 섰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1시쯤 장례식장을 찾은 홍세화 장발장은행 대표는 “우리 시대의 큰별이 가셨다”며 “고인이 지은 노랫말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가셨다”고 애도했다.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도 “살아계실 때 너무 힘들게 애 많이 쓰셨는데 이제 뒷사람들이 이어서 잘 할테니 하늘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수 전인권 씨는 흰 상복을 입은 고인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문학과 교수와 인사를 나눴다. 그는 “생전에 고인께서 공연도 자주 보러 오셨다”며 “어제 백 교수에게 전화해 건강을 꼭 챙겨야 고인도 마음이 편하시다고 당부했다”며 유가족에 대한 걱정을 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박수현 전 청와대 대변인, 임순례 영화감독, 정현백 전 여성가족부 장관, 김두관·양이원영·김영주·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 최열 환경재단 이사장 등도 차례로 빈소를 찾았다. 정근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은 “백기완 선생님은 70년대 중반 긴급조치 등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오·남용을 이겨낸 증인”이라며 “진실화해위원들과도 큰 별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김두관 의원은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라는 고인이 남기신 과제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날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전두환 정권 당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를 주도하다 고인이 구속되자 미 하원의원들이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전문 2건을 공개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한일협정 반대로 민주화 운동 전면 나서YMCA 위장결혼 사건 등 수차례 옥고백원담 “父 마지막 글귀는 ‘노나메기’”“김미숙·김진숙 힘내라” 병상 메시지도 “그 돈 이웃 도와야” 유지… 靑조화 거부전국 16곳 분향소… 19일 대학로 노제“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폐렴 투병 끝에 별세했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장쾌한 수호자 ‘장산곶매’가 돼 하늘로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교수)·미담(화가)·현담(출판사), 아들 일(울산과학대 교수)씨가 있다. 90년 가까운 그의 삶엔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질곡의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못 배우고 못 가진, 그리하여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서서 나가는’ 삶을 선택했다.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인 데다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지만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 중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 위해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직전에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송경동 시인은 “백 선생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전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평소 지론답게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냈다. 우리말 사랑도 남달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젊은 날’, ‘버선발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민주지도자 백기완 석방 촉구”…1987년 美 하원 외교 전문 공개

    “민주지도자 백기완 석방 촉구”…1987년 美 하원 외교 전문 공개

    고(故) 백기완 선생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감됐을 당시 그의 석방을 요구했던 미국 하원의원들의 외교 전문이 공개됐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16일 미국 하원의원들이 1987년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 전문 2건을 발표했다. 백 선생은 1986년 7월 19일 개최된 ‘부천서 성고문 범국민폭로대회’와 관련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그해 12월 10일 경찰에 검거돼 구속된 백 선생은 건강 악화로 같은 달 29일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듬해 2월 28일 백 선생은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재수감됐다. 로버트 므라젝 등 미국 하원의원 8명은 1987년 2월 13일 김경원 당시 주미 대사에게 외교 전문을 보내 “한국의 민주 지도자인 백기완의 구속에 유감을 표하며 양심수인 백기완의 즉각적인 석방과 인권회복을 한국 정부에 촉구한다”고 밝혔다. 백 선생이 재수감된 후 같은 해 3월 5일에도 미국 하원의원 7명은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백 선생 석방과 인권회복을 위해 전두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내용의 외교 전문을 보냈다. 이들은 이 외교 전문에서 “백기완의 건강이 나쁘므로 우선 최소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당시 조직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한편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온 백 선생은 지난 15일 오전 향년 89세 나이로 영면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전두환 정권 당시 ‘백기완 선생 석방 촉구’ 옛 미 외교문서 공개

    전두환 정권 당시 ‘백기완 선생 석방 촉구’ 옛 미 외교문서 공개

    지난 15일 폐렴 투병 끝에 별세한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과거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를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돼 투옥됐을 당시 미국 하원의원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한 외교 문서가 16일 공개됐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2월과 3월 미 하원의원들이 각각 당시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외교전문 2건을 이날 공개했다. 앞서 1986년 7월 16일 부천서 성고문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검찰은 “사건 당시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면서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 사건 피해자인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성고문을 가한 문귀동 경장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이에 사흘 뒤인 1986년 7월 19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당시 야당과 여성단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 폭로대회’가 열렸고,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이었던 백 소장은 이 대회에서 개회사를 하며 ‘군부 독재·폭력 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쳐 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수배됐다. 결국 백 소장은 1986년 12월 7일 경찰에 검거돼 같은 달 10일 구속됐다. 평소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던 백 소장은 건강 악화로 1986년 12월 29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1987년 2월 28일 다시 수감됐다. 당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 시기(1983년 12월~1985년 2월)에 미국에서 조직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이 문제를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알렸다. 연구소와 소통하며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미 하원의원들은 외교전문을 통해 백 소장의 석방과 인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미 하원의원 8명은 1987년 2월 13일 당시 김경원 주미 한국대사에게 백 소장의 구속에 유감을 표명하여 양심수인 백 소장의 즉각적인 석방과 인권 회복을 한국 정부에 촉구하는 외교전문을 보냈다. 미 하원의원들은 특히 과거 고문 후유증으로 백 소장의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안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른 미 하원의원 7명은 1987년 3월 5일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백 소장의 석방을 위해 전두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내용의 외교전문을 보냈다. 이들은 백 소장의 건강이 나쁘기 때문에 최소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했다.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월드피플+] “그까짓 암, 이겨내자!” 암투병 딸 위한 엄마의 삭발 응원

    [월드피플+] “그까짓 암, 이겨내자!” 암투병 딸 위한 엄마의 삭발 응원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세상에 있을까? 새삼 이런 생각에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한 편의 영상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 화제다. 브라질 중남부 캄푸 그란지에 사는 여성 루시아는 최근 머리털을 완전히 밀었다. 자궁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머리카락이 숭숭 빠져 모습이 흉하게 보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명 바리캉으로 불리는 이발기로 삭발을 했다. 루시아가 삭발을 부탁한 사람은 사랑하는 엄마였다. 슬픈 일이지만 의미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 루시아는 자신의 삭발을 영상으로 남기기로 하고 촬영 준비를 했다. 드디어 시작된 삭발식. 루시아의 엄마는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치기 시작하더니 딸의 머리털이 짧아지자 바리캉으로 불리는 이발기를 손에 들었다. 길지는 않았지만 정성껏 관리해온 머리털이 밀려나가자 루시아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삭발할 때 곁에 있던 어린 딸을 보니 괜히 눈물이 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이 발생한 건 바로 그때였다. 딸의 머리털을 밀던 그의 엄마가 갑자기 바리캉을 자신의 머리 쪽으로 가져가더니 머리카락을 죽죽 밀어버리기 시작한 것. 스마트폰으로 영상으로 찍다가 갑자기 삭발을 하는 엄마를 본 루시아는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삭발을 할 때 곁에 있던 어린 딸을 보고는 딸의 머리카락을 밀고 있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라는 생각에 죄송했는데 갑자기 엄마가 머리털을 밀자 슬픔이 북받쳤다"고 말했다. 엄마는 머리털을 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얼굴엔 딸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표정으로 분명하게 전달됐다. 루시아의 귀에는 "딸아, 힘을 내거라. 암 따위는 이겨버리자"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고 했다. 지난해 자궁암 판정을 받고 1개월 전 항암치료를 시작한 루시아는 "삭발을 하면서 엄마와 함께라면 암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용감하게 병과 싸워 건강을 되찾겠다"고 말했다. 한편 루시아가 영상을 올린 인스타그램에는 모녀를 응원하는 댓글이 꼬리를 물고 있다. 사진=루시아 인스타그램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전두환 정권 당시 ‘백기완 선생 석방 촉구’ 옛 미 외교문서 공개

    전두환 정권 당시 ‘백기완 선생 석방 촉구’ 옛 미 외교문서 공개

    지난 15일 폐렴 투병 끝에 별세한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과거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를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돼 투옥됐을 당시 미국 하원의원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한 외교 문서가 16일 공개됐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2월과 3월 미 하원의원들이 각각 당시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외교전문 2건을 이날 공개했다. 앞서 1986년 7월 16일 부천서 성고문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검찰은 “사건 당시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면서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 사건 피해자인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성고문을 가한 문귀동 경장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이에 사흘 뒤인 1986년 7월 19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당시 야당과 여성단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고문·성고문·용공조작 범국민 폭로대회’가 열렸고,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이었던 백 소장은 이 대회에서 개회사를 하며 ‘군부 독재·폭력 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쳐 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수배됐다. 결국 백 소장은 1986년 12월 7일 경찰에 검거돼 같은 달 10일 구속됐다. 평소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못했던 백 소장은 건강 악화로 1986년 12월 29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1987년 2월 28일 다시 수감됐다. 당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 시기(1983년 12월~1985년 2월)에 미국에서 조직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이 문제를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알렸다. 연구소와 소통하며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미 하원의원들은 외교전문을 통해 백 소장의 석방과 인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미 하원의원 8명은 1987년 2월 13일 당시 김경원 주미 한국대사에게 백 소장의 구속에 유감을 표명하여 양심수인 백 소장의 즉각적인 석방과 인권 회복을 한국 정부에 촉구하는 외교전문을 보냈다. 미 하원의원들은 특히 과거 고문 후유증으로 백 소장의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안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른 미 하원의원 7명은 1987년 3월 5일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백 소장의 석방을 위해 전두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내용의 외교전문을 보냈다. 이들은 백 소장의 건강이 나쁘기 때문에 최소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했다.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민주지도자 백기완 석방 촉구”…1987년 美 하원 외교 전문 공개

    “민주지도자 백기완 석방 촉구”…1987년 美 하원 외교 전문 공개

    고(故) 백기완 선생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감됐을 당시 그의 석방을 요구했던 미국 하원의원들의 외교 전문이 공개됐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은 16일 미국 하원의원들이 1987년 주미 한국대사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외교 전문 2건을 발표했다. 백 선생은 1986년 7월 19일 개최된 ‘부천서 성고문 범국민폭로대회’와 관련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그해 12월 10일 경찰에 검거돼 구속된 백 선생은 건강 악화로 같은 달 29일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듬해 2월 28일 백 선생은 건강이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재수감됐다. 로버트 므라젝 등 미국 하원의원 8명은 1987년 2월 13일 김경원 당시 주미 대사에게 외교 전문을 보내 “한국의 민주 지도자인 백기완의 구속에 유감을 표하며 양심수인 백기완의 즉각적인 석방과 인권회복을 한국 정부에 촉구한다”고 밝혔다. 백 선생이 재수감된 후 같은 해 3월 5일에도 미국 하원의원 7명은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백 선생 석방과 인권회복을 위해 전두환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내용의 외교 전문을 보냈다. 이들은 이 외교 전문에서 “백기완의 건강이 나쁘므로 우선 최소한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당시 조직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다. 한편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온 백 선생은 지난 15일 오전 향년 89세 나이로 영면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월드피플+] “그까짓 암, 이겨내자!” 암투병 딸 위한 엄마의 삭발 응원

    [월드피플+] “그까짓 암, 이겨내자!” 암투병 딸 위한 엄마의 삭발 응원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세상에 있을까? 새삼 이런 생각에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한 편의 영상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 화제다. 브라질 중남부 캄푸 그란지에 사는 여성 루시아는 최근 머리털을 완전히 밀었다. 자궁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머리카락이 숭숭 빠져 모습이 흉하게 보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루시아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명 바리캉으로 불리는 이발기로 삭발을 했다. 루시아가 삭발을 부탁한 사람은 사랑하는 엄마였다. 슬픈 일이지만 의미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 루시아는 자신의 삭발을 영상으로 남기기로 하고 촬영 준비를 했다. 드디어 시작된 삭발식. 루시아의 엄마는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치기 시작하더니 딸의 머리털이 짧아지자 바리캉으로 불리는 이발기를 손에 들었다. 길지는 않았지만 정성껏 관리해온 머리털이 밀려나가자 루시아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결국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루시아는 "삭발할 때 곁에 있던 어린 딸을 보니 괜히 눈물이 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이 발생한 건 바로 그때였다. 딸의 머리털을 밀던 그의 엄마가 갑자기 바리캉을 자신의 머리 쪽으로 가져가더니 머리카락을 죽죽 밀어버리기 시작한 것. 스마트폰으로 영상으로 찍다가 갑자기 삭발을 하는 엄마를 본 루시아는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는 "삭발을 할 때 곁에 있던 어린 딸을 보고는 딸의 머리카락을 밀고 있는 엄마의 심정은 어떨까 라는 생각에 죄송했는데 갑자기 엄마가 머리털을 밀자 슬픔이 북받쳤다"고 말했다. 엄마는 머리털을 밀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얼굴엔 딸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표정으로 분명하게 전달됐다. 루시아의 귀에는 "딸아, 힘을 내거라. 암 따위는 이겨버리자"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고 했다. 지난해 자궁암 판정을 받고 1개월 전 항암치료를 시작한 루시아는 "삭발을 하면서 엄마와 함께라면 암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용감하게 병과 싸워 건강을 되찾겠다"고 말했다. 한편 루시아가 영상을 올린 인스타그램에는 모녀를 응원하는 댓글이 꼬리를 물고 있다. 사진=루시아 인스타그램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못다 한 ‘임을 위한 행진’… 저 하늘에서 계속되리라

    한일협정 반대로 민주화 운동 전면 나서YMCA 위장결혼 사건 등 수차례 옥고백원담 “父 마지막 글귀는 ‘노나메기’”“김미숙·김진숙 힘내라” 병상 메시지도 “그 돈 이웃 도와야” 유지… 靑조화 거부전국 16곳 분향소… 19일 대학로 노제“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폐렴 투병 끝에 별세했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그는 민중의 장쾌한 수호자 ‘장산곶매’가 돼 하늘로 떠났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원담(성공회대 교수)·미담(화가)·현담(출판사), 아들 일(울산과학대 교수)씨가 있다. 90년 가까운 그의 삶엔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질곡의 현대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못 배우고 못 가진, 그리하여 배우고 가진 자들에게 압제받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앞서서 나가는’ 삶을 선택했다.백 소장은 1933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고는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닌 게 전부인 데다 분단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을 겪었지만 독학으로 통일 문제와 사회 모순에 대한 인식을 키워 나갔다. 6·25전쟁 중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단일화를 압박하기 위해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직전에 사퇴했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노동자 민중후보로 추대됐지만 현실 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송경동 시인은 “백 선생이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는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전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선다’는 평소 지론답게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냈다. 우리말 사랑도 남달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젊은 날’, ‘버선발 이야기’ 등을 출간했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라’던 백기완 선생”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라’던 백기완 선생”

    “나는 한 마디로 소개하면 됩니다. 나는 내 눈앞에서 마음에 안들면은 그냥 놔두지 않았어.” 2019년 3월 13일.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된 ‘버선발 이야기’의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1950년대부터 농민·빈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한 그의 평생은 부조리에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15일 투병 끝 별세한 그를 수많은 여성 정치인들도 기렸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부천서 성고문 사건규탄대회를 여시려다 감옥에 갇히시기도 했다”며 “제가 경험한 사람 중 가장 특별한 연설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백 소장은 권 의원이 성고문 피해를 입었던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 일을 회상하며 권 의원은 “논리력, 선동력, 이야기하듯 엮어내는 구수한 문장력과 멋진 목소리가 엄청난 조화를 이루었고 87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왔을 때 많은 지지자와 함성을 모으셨다”며 조의를 표했다. 선생의 뒤를 이어 진보진영의 대선 후보로 나섰던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그의 뜻을 기렸다. 심 의원은 페이스북에 “심상정이, 비틀거리지 말고 똑바로 가.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뒤집어엎어버리란 말이야!”라던 선생의 생전 호령을 적었다. 이어 “수많은 진보 정치인, 운동가, 지식인들이 선생의 둥지에서 태어나 진보정당의 초석이 되었다”고 썼다. 일본군성노예제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전직 이사장을 지냈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수요시위에 나섰던 백 소장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는 “수요시위에 참석하시고 김복동 할머니 떠나시던 날 빈소에 들러 할머니 명복 빌어주시며 함께 해주시던 모습들, 가슴에 찡하게 남아있다”며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래서 너도 나도 잘 살되 올바르게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가겠다”고 했다. 서울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는 대학로에 있는 통일문제연구소에 들렀던 기억을 소환했다. 박 후보는 “저에게 ‘시원시원하고 단호해서 좋다’고 하셨던 선생님.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며 “선생님 영전에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시를 바칩니다”라고 썼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가 백 소장이다. 선생의 맏딸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1979년 선생이 출간한 책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언급했다. 책에서 선생은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고구려의 여성상을 예로 들며 현모양처의 허상과 수동적 역할을 벗고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여성이 될 것을 강조했다. 백 교수는 “1979년 딸에게 주는 편지를 책으로 엮어 평생을 살아가는 길라잡이를 일러주셨다”며 “예순 두 해 동안 아버님과 맏딸로, 사회운동의 선후배로, 끊임없는 긴장의 일상이 쉽지 않았지만 더없이 빛나고 참으로 벅찬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2019년 그날의 간담회에서 선생은 자기 소개에 이어 별안간 ‘미투’ 이야기를 꺼냈다. 소싯적 술을 먹다가도, 여성 옆에서 추태를 부리려는 남성들에 대한 일갈이었다. “‘야, 이 자식아. 술 먹고 술에 취하지. 왜 여성이라고 하는 특수한 사람에 취하려고 그래. 집어치워, 인마.’ 말 안들으면 술상 뒤집어 엎고 그랬어. 내가 그런 것도 실천인 줄 알았다니까. 내 젊은 날에 그랬어.” 젠더연구소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기득권의 벽, 두려움 없이 맞설 것”…이재명, 백기완 선생 추모

    “기득권의 벽, 두려움 없이 맞설 것”…이재명, 백기완 선생 추모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15일 별세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을 추모하며 “선생께서 평생 맞섰던 철옹성 같은 기득권의 벽, 두려움 없이 마주하겠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선생께서 작사하신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처럼, 그리고 전 생애로 실천하셨던 것처럼, 앞서서 나가시는 님을 산 자로서 충실히 따르겠다”며 이같이 추모했다. 그는 “고문으로 앙상해진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쩌렁쩌렁한 기백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삶 자체가 대한민국 현대사이셨던 분.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의 선두에서 온갖 모진 고난을 감내하셨던 분. 그러면서도 늘 우리 사회 보통 사람들, 낮은 자들의 유쾌한 연대를 꿈꾸셨다”고 했다. 이어 “영원한 스승 백기완 선생님, 편히 쉬시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덧붙였다.백기완 선생, 투병 끝에 별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서울대병원 등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영면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왔다.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 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백 소장은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고, 1974년에는 유신 반대를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7년 대선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포토] ‘건장한 청년’ 백기완 선생… 치열했던 삶 접고 영원한 안식

    [포토] ‘건장한 청년’ 백기완 선생… 치열했던 삶 접고 영원한 안식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백 소장은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고, 1974년에는 유신 반대를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7년 대선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사진은 1985년 3월 노동운동 탄압 규탄 및 최저임금 쟁취대회에 참석한 민통련 백기완 의장. 연합뉴스
  • 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돼도…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별세(종합)

    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돼도…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별세(종합)

    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될지언정 일제와 싸우고 독재 정치에 맞섰던 민주화운동의 큰 어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영면했다. 그는 통일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 시인, 작가 그리고 민중정치인이었다. 백기완 선생은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백태주는 천석꾼의 부자로 장련면의 유지로 있으면서 3.1 운동 당시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청년운동에도 나섰다. 두 부자는 각각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지방 수재 당시에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지만 조부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어주다가 발각돼 고문 끝에 옥사당한 이후 가계가 급격히 몰락했다. 백기완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다. 조부가 백범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극진히 돌보았고, 이후 백기완 선생 역시 백범을 따랐다.백기완 선생은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3선 개헌 반대와 유신 철폐등 민주화 운동에 많은 활동을 했으며 1974년 유신헌법철폐 100만인 선언 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5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40대까지 거구였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그의 몸은 반쪽이 되었다. 1987년 대선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열렬한 국어순화론자로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되도록 순우리말을 썼다고 한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의 같은 순우리말이 성공적으로 사회에 안착했다.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고 2021년 2월 15일 새벽 4시 88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백미담·백현담, 아들 백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속보] 민주화운동 큰 어른…백기완 선생 별세

    [속보] 민주화운동 큰 어른…백기완 선생 별세

    진보진영 원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89)이 15일 투병 끝에 영면했다. 서울대학교병원 등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운명을 달리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앞서 백 소장은 2018년 4월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같은달 23일 혈관이 불안정해 심장수술을 받은 뒤 퇴원하기도 했다. 1932년 황해도 출생인 백 소장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뒤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74년 2월 긴급조치 1호의 첫 위반자로 옥고도 치른 바 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모태가 된 장편시 ‘묏비나리’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속보] 진보원로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별세

    [속보] 진보원로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별세

    진보진영 원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89)이 15일 투병 끝에 영면했다. 서울대학교병원 등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오전 입원 중 운명을 달리했다. 그는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앞서 백 소장은 2018년 4월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같은달 23일 혈관이 불안정해 심장수술을 받은 뒤 퇴원하기도 했다. 1932년 황해도 출생인 백 소장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뒤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74년 2월 긴급조치 1호의 첫 위반자로 옥고도 치른 바 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모태가 된 장편시 ‘묏비나리’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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