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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 투병도 막지 못한 금메달…맥스 패롯의 감동적인 열정

    암 투병도 막지 못한 금메달…맥스 패롯의 감동적인 열정

    암 투병도 금메달을 향한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맥스 패롯(28·캐나다)는 7일 중국 장자커우 젠팅 스노우 파크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슬로프스타일 결승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2018 평창올림픽 슬로프스타일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패롯은 이번에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패롯의 금메달은 암투병을 이겨내고 따낸 것이기 만큼 팬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평창올림픽이 끝나고 2018년 12월 암 질환인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당시 새로운 시즌이 시작할 때였던 만큼 패롯도 선수 생활을 그만둘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 왔다. 하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투병에 임했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투병기를 공개하며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팬들에게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 당시 그는 “이것은 내가 직면해야 하는 새로운 종류의 경쟁”이라며 “나는 이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암은 그를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2019년 중반까지 암 투병을 이어간 그는 기적처럼 다시 경기장에 복귀했다. 치료에 집중하며 발생한 근육 손실도 온종을 체육관에서 매달리며 재활에 집중했다. 결국 그는 항암 치료를 마치자 마자 두 달 만에 노르웨이에서 열린 X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패럿은 오히려 암 투병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는 지난 1월 인터뷰에서 “만약 2년 전으로 돌아가 암을 예방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씨줄날줄] 사형수/박홍환 논설위원

    [씨줄날줄] 사형수/박홍환 논설위원

    사형이 확정된 재소자는 교도소에서 사형수가 아닌 ‘최고수’로 불린다. 인간에게 부과할 수 있는 최고 엄한 형벌인 사형을 언도받은 수감자라는 뜻에서다. 빨간색 수인번호 표찰은 사형수들의 상징이다. 교도관이나 일반 재소자들은 어지간해서는 사형수들의 일탈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 범행의 잔혹성에 대한 두려움도 크지만, 공포와 안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사형수들의 극단적 삶에 대한 배려심도 일정 부분 작용한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은 동료 재소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어 교도관들이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지난해 1월 60대 사형수 한 명이 암 투병 중 숨진 사실이 최근 뒤늦게 확인됐다고 한다. 1995년 여성 3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이듬해 사형이 확정된 임모씨로 그는 25년간 하루하루 “언제 불려 나갈까?” 하는 두려움 속에 사형 집행을 기다리다 형장이 아닌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임씨 사망에 앞서 2019년 7월에는 사형수 이모씨가 병사하는 등 1998년 이후 병사한 사형수가 임씨와 이씨를 비롯해 모두 7명에 이른다고 한다. 매일 엄습하는 형장의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형수도 5명이나 된다. 생존해 있는 사형수는 모두 55명. 우리나라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 12월 30일 지존파 조직원 6명을 비롯해 사형수 23명이 한꺼번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후 25년째 사형 집행이 중단된 상태다. 법적으로 사형제도는 유지하면서도 집행을 하지 않는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된다. 실효성 상실을 이유로 판사들의 사형 선고가 거의 없는 상황이어서 사형수 숫자는 점점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사형제도 존폐 문제가 계속해서 거론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잔혹 범죄가 재발할 때마다 사형제도 유지 및 강력한 집행 여론이 비등해지지만 사형제도는 조만간 또다시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눈에 띄는 대목은 시간이 갈수록 위헌 판단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1996년 제1차 심리 때는 7대2로 합헌 의견이 강했지만 2010년에는 5대4로 비슷했다. 2019년 2월 접수된 세 번째 헌법소원에서 헌재가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 “우리 삶이 곧 기적”… 두 원로가 짚은 생사고락의 지혜

    “우리 삶이 곧 기적”… 두 원로가 짚은 생사고락의 지혜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행복은 인간답게 사는 노력, 과정, 그 성취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중략) 그런데 행복을 욕심내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잃어버려요.”(‘김형석의 인생문답’ 34쪽) -기적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지금 기적 속에 살고 있어요.(중략) 오늘 하루 살아서, 특히 나처럼 병을 앓는 사람은 ‘아침 해가 또 뜨는구나’ 하고 감사해하지요. 내가 어제 죽었으면 절대 (이 태양을) 못 봐. 이게 기적이죠.”(‘메멘토 모리’ 228쪽) 새로운 시간을 다짐하는 지금, 이 시대 어른들의 지혜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책들이 독자들을 찾는다. 끊임없는 탐구와 통찰력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김형석(102) 연세대 명예교수와 이어령(88) 전 문화부 장관이 삶과 죽음, 종교와 신 등 다양한 주제의 식견을 풀어내는 문답집이 잇따라 출간됐다. 김 교수는 20~60대 일반 독자 100명에게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질문을 받아 공통된 물음 31가지를 추려 답한 ‘김형석의 인생문답’(미류책방)을 통해 한 세기를 살아온 철학자의 지혜를 전한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일은 왜 하는 걸까요’처럼 쉬울 것 같지만 막상 뚜렷한 답을 내기 막막한 질문들에 김 교수는 “내가 살아 봤더니 이렇던데, 여러분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면 어떨까요”라고 권한다. “생각해 보면 각자 무거운 짐을 지고 허락된 시간을 걷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진리라도 다정한 노교수의 목소리에 담으면 더욱 와닿는다.‘메멘토 모리’(열림원)는 죽음과 신, 종교를 핵심 키워드로 과학과 예술, 문명, 문학 등 여러 영역으로 뻗어 간 이 전 장관의 성찰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 죽음에 대면했을 때 가톨릭 신부에게 전한 24가지 질문에 30여년이 지난 현재 암 투병 중인 이 전 장관이 다시 답한 내용을 엮었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등 철학과 신학을 관통하는 물음들이 이어진다.누구나 의문을 품어 봤을 질문들에 대한 답에 이 전 장관의 오랜 경험을 녹였고 특히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보내고 있는 고통의 시간을 버티게 해 주는 희망의 메시지도 건넨다. 이 전 장관은 이 책을 시작으로 그간 인터뷰를 통해 세상과 나눈 방대한 문답을 모아 총 20권의 대화록을 낼 예정이다.
  • “최종 점수~ 몇 대 몇?” 국민오락관장 하늘로

    “최종 점수~ 몇 대 몇?” 국민오락관장 하늘로

    ‘허 참, 자기 이름 모르나’서 예명 따 말솜씨 좋아 50년간 진행자 활약 주위 걱정 우려… 병환 알리지 않아 장수 예능 프로그램 ‘가족오락관’을 비롯해 50년간 진행자로 활약한 ‘국민 MC’ 허참이 간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73세. 황해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한 고인은 서울의 음악 다방을 거쳐 라디오에서 활동하다 1970년대 중반 TBC ‘7대 가수쇼’로 TV에 입문했다. 재치 있는 말솜씨와 유머 감각으로 사랑받던 고인은 1977년 TBC의 인기 프로그램 ‘쇼쇼쇼’의 진행을 맡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1984년 4월부터 2009년 4월 종영까지 진행한 KBS ‘가족오락관’이 대표 프로그램이다. 1980년대 중반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던 일주일간 자리를 비웠을 뿐 25년 동안 줄곧 자리를 지켰다. 이 프로그램에서 “최종점수 몇 대 몇”이라고 외치는 우렁찬 멘트는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가족오락관’ 이후에도 SBS ‘트로트 팔도강산’, KBS ‘도전 주부가요스타’, 경인방송 ‘8도 노래자랑’, 엠넷 ‘골든 힛트송’ 등 음악 프로그램을 맡아 꾸준히 활동을 이어 갔다. 2005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TV진행상, 2006년 KBS 연예대상 공로상을 받았다. 본명 이상용 대신 예명을 쓰게 된 과정은 유명한 일화다. 방송 데뷔 전인 1973년 겨울 DJ 이종환이 운영하던 음악 다방 쉘부르에 들렀던 고인은 우연히 무대로 올라갔다가 “이름이 뭐냐”는 진행자 물음에 “기억이 안 난다”며 능청을 떨었다. 진행자가 “허 참,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자 “아, 제 이름이 바로 허참”이라고 답한 것을 계기로 예명을 정했다. 1978년 앨범 ‘허참 새노래 모음’, 2007년 싱글 ‘추억의 여자’를 발매하며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KBS ‘불후의 명곡-전설의 명MC 특집’,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 등에 출연했고 지난 1월 방송된 JTBC ‘진리식당’에서 근황을 알렸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것을 우려해 투병 사실은 알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동료들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6년간 ‘가족오락관’에서 호흡을 맞춘 방송인 손미나는 소셜미디어 계정에 “아나운서 1년 차 때부터 진행자의 모범적인 모습을 몸소 보여 주신 제 롤모델”이라며 “최고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힘찬 응원을 보내는 영원한 치어리더 같았던 분”이라고 썼다. MBN ‘엄지의 제왕’ 등을 함께한 오정연은 “당신이 하는 일에 기쁨과 책임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좋은 영향을 풍기셨다”며 “어딜 가나 어른이신데도 무게를 잡지 않고 후배들을 배려하셨다”며 추모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3일 오전 5시 20분.  
  • 3만원 들고 무작정 상경한 부산 청년, 국민MC로 날다...허참 별세

    3만원 들고 무작정 상경한 부산 청년, 국민MC로 날다...허참 별세

    허참을 만난 것은 2016년 11월 말 그의 남양주 농장에서였다. 농장을 자신만의 휴식, 휴양 공간으로 활용하다가 외부 손님을 받는 전원형 레스토랑으로 리뉴얼해 ‘참스팜스’라는 간판으로 새로 문 연 직후였다. 마당 한켠에서는 아직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자기 분야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사들의 삶을 긴 호흡으로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를 담당하고 있던 나는 MC계 거목인 그를 연예담당 기자를 통해 어렵사리 섭외할 수 있었다. 그는 농장 건물 내부를 1층부터 2층까지 안내하고 자신이 아끼는 뒷마당 텃밭도 구경시켜 주었다. 밭에서 채소들을 직접 길러 먹고 손님들에게도 내놓는다고 했다. 2층에는 MC, 가수, 배우로서 다양한 인생 궤적이 담긴 사진과 포스터 등이 전시돼 있었다. 수많은 전시물 중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25년간 진행했던 KBS ‘가족오락관’의 네온사인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쉴새 없이 풀어내는 인생 이야기는 3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잠시 쉬어갈 때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자신의 건강지식을 풀어놓았다. 당시 그는 종편채널에서 ‘엄지의 제왕’이라는 건강정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정 제품 홍보가 될 수 있어서 방송에서는 말하기 어렵지만, 김 기자에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라며 몇가지 ‘건강비책’을 일러주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에는 “언제 가족들과 한번 놀러 오세요. 우리 농장에는 없는 게 없어요. 꼭 오세요 꼭.”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가 1일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73세. 그가 5년 전 풀어 놓았던 자신의 인생역정을 약간의 가필을 거쳐 다시 싣는다. 기사의 지면 게재일은 2016년 12월 8일이었다.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31>MC계의 ‘팔방미인’ 허참 허참(67)은 얼마 전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자기 농장을 일반에 오픈했다. 음식을 먹고 노래를 듣는 전원형 레스토랑으로 꾸미고 ‘참스팜스’라는 간판을 세웠다. 2층은 일종의 기록실로 만들었다. 자신의 예능 40여년 역사가 담긴 사진, 포스터, 앨범들을 한데 모았다. 자신이 직접 그린 회화 작품들도 걸었다. 그래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서울 여의도 KBS 녹화홀에서 25년 동안 실제로 썼던 ‘가족오락관’ 네온사인이다. “창고에 처박아 두면 그냥 썩는다고, 방송국에서 선물로 주더군요. 그걸 여기 가져와서 전원을 연결하니까 불이 들어오는데, 눈물이 납디다. 그 오랜 시간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느라 고생했다. 이제는 내가 널 지켜봐 줄게, 이렇게 다짐했어요.”●1973년 여동생 결혼 밑천 3만원 들고 ‘무작정 상경’ -기차가 덜컹거리며 부산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속으로 웃음이 났다. 아무 대책 없는 ‘무작정 상경’의 주인공이 내가 되다니. 군에서 막 제대한 1973년의 어느 날이었다. 지갑 속엔 3만원이 들어 있었다. “오빠가 나중에 돈 벌면 몇 배로 갚아줄게.” 결혼 밑천 삼는다고 고이 모아 온 여동생의 돈이었다. -서울살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애초부터 내집 같은 것은 없었으니 군대나 고향 친구들 집을 번갈아가며 하루하루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정동 MBC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 집에 얹혀살게 됐는데, 자전거로 채소나 생선 같은 것들을 배달해 주며 공짜 숙식의 대가를 치렀다. 그러고 있다 보면 코미디언이 됐든, MC가 됐든, DJ가 됐든 뭐라도 하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그해 겨울 군대 친구와 함께 종로에 나갔다가 통기타 라이브 클럽 ‘쉘부르’를 지나치게 됐다. 문앞에 탄산음료 ‘오란씨’ 시음 행사를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공짜 음료수 한 잔 얻어먹을 요량으로 안에 들어갔다. (입구에 유난히 코가 큰 사람이 서 있었는데, 쉘부르의 주인이자 당시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PD 겸 DJ로 활동하던 이종환 선생이었다) 무대에서는 이태원, 전언수씨로 구성된 통기타 듀오 ‘쉐그린’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노래를 마친 그들이 객석 손님들에게 경품을 나눠주는 행운권 추첨을 시작했다. 내가 당첨됐다. -“무대로 잠깐 올라오세요.”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내 말 몇 마디에 공연장은 폭소와 박수로 가득 찼다. 정신없이 웃던 이태원씨가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아, 그게…기억이 안 나네요.” “허 참, 자기 이름도 몰라요?” “앗, 제 이름을 어떻게 아셨나요? 저는 허참입니다.” 공연이 끝나고 이종환 선생이 나를 불렀다. “여기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월급은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준다니 그걸로 감지덕지였다. 청소나 허드렛일을 하면서 틈틈이 손님들 신청곡 받아 노래를 틀어주는 게 나의 일이었다. 그러다 잠깐씩 무대에 올라 짤막하게 MC를 볼 일이 생겼는데, 차츰 “쉘부르에 명물이 하나 들어왔다”고 입소문이 났다. 날 보러 오는 손님들이 하나둘 늘면서 몇 달 후에는 어니언스, 쉐그린, 김정호, 김세화, 권태수 같은 포크 스타들의 공연을 진행하는 정식 MC로 승격이 됐다. 스탠딩 코미디와 노래를 섞은 ‘허참쇼’라는 코너도 만들어졌다.-MBC의 라디오 PD 겸 DJ였던 박원웅 선생이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우리 회사에서 ‘청춘은 즐거워’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DJ 한번 해 볼 생각 없나.” 정신이 아득해졌다. ‘자전거에 동태 궤짝이나 채소 꾸러미를 싣고 지날 때 그토록 높게만 보였던 MBC 사옥. 그곳에 내가 입성한다.’ 나는 그때까지도 쉘부르의 객석에서 소파 몇 개 붙여놓고 슬리핑백에서 잠을 자는 신세였다. 노래 ‘편지’의 성공으로 형편이 나아진 어니언스 임창제가 물려준 슬리핑백이었다. 방송 DJ를 시작하면서 동대문 근처에 방을 얻은 나는 임창제의 슬리핑백을 의기양양하게 다른 친구에게 물려주고 쉘부르 시대를 마감했다. ●남다른 입담… 통기타 라이브 클럽 ‘쉘부르’에서 운명의 MC 제안 -우리 집안의 뿌리는 황해도다. 나도 1949년 거기에서 태어났는데, 이듬해 6·25 전쟁이 나자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월남을 했다. 어쩌다가 땅끝인 부산까지 와서 부민동에 터를 잡고, 부산지방 법원에 주사로 취직을 했다. 공무원 아버지를 둔 덕에 생활은 적당히 풍족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소고기 반찬을 싸 주면 나보다 못사는 아이가 배급받아온 옥수수빵과 바꿔 먹기도 했다. -그 당시 법원 주사 정도면 마음 먹기에 따라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부정한 청탁으로 위에서 압력이 들어오자 신분증 집어던지고 며칠 동안 출근을 안해서 같은 부서 동료들이 와서 겨우 모시고 갔던 기억도 있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대쪽처럼 살면 뭐하냐. 실속 좀 차리지”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나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1956년 부민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 여러 번 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그려 팔아 용돈을 벌기도 했다. 미술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었다면 남다른 끼와 말솜씨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소풍 가서 사회를 보는 일은 늘 내 차지였다. 그래선지 말이나 행동에 남다른 스타 의식이 강했다. 이를테면 아침에 교문에서부터 영화배우처럼 겉멋을 부리며 걸었다. 저 멀리 3층 교실 창문에서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여자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과장되게 폼 잡으며 사진 찍히는 것도 좋아했다. 그때 사진을 지금 보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주위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만들었던 것은 나의 성우 흉내였다. ‘삼국지’, ‘수호지’,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라디오 드라마를 듣고 외워 성대모사를 하면 식구들, 친구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국어 시간에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미망인 모씨는~’으로 시작하는 고전 ‘조침문’을 ‘전설 따라 삼천리’의 성우 유기현씨 목소리로 읽어주면 교실은 난리가 났다. -웅변도 좋아해서 영도섬 등대 앞에 가서 소리 높여 목이 쉴 정도로 연습했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한번은 중학교 때 ‘북괴 공산주의’를 타도하자는 주제의 웅변대회에 나가 목청 높여 “이 어린 연사 소리높여 외칩니다”를 말하고 마무리 국면으로 들어가는데, 어떤 아저씨들이 학교 바깥에서 철조망에 개를 매달아 놓고 사정없이 몽둥이질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때 개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 팔고 멍하니 서 있다가 고배를 마신 적도 있다.-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 할머니가 등대 쪽에서 꼼장어 장사를 하셨는데 매일 같이 달려가서 꼼장어 먹고, 딱딱한 알사탕 입에 넣고 책가방 던져 놓고 물놀이를 했다. 앙장구(성게), 해삼, 멍게 이런 게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중학교 입학 이후 가세가 기울었다. 초등학교 때는 아무렇지 않게 싸가지고 다녔던 소고기 구경을 중학교 때부터는 거의 할 수가 없었다. “크면 반드시 정육점을 할 거야. 그래서 소고기를 실컷 먹으리라.” 공부도 못했고 가세도 기울어서 대학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영남상고에 들어갔는데, 막상 졸업을 할 때가 되니 아버지는 “네가 장남인데 대학을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재수를 시작했는데, 길게 하지는 못했다. 안 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공부에 대한 아쉬움은 지금도 크다. -1972년 군 복무 중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박정희 정부는 전군에 ‘문화선전대 경연 행사’를 열어 유신의 필요성을 병사들에게 홍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사단 웅변대회 선수로 뽑힌 나를 대대장이 불렀다. “이상용, 너는 오늘부터 웅변 대신에 유신헌법을 홍보하기 위한 문선대 경연 준비를 해라.” -유신헌법이 뭔지 내가 알 리 없었다.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우리 몸에는 우리 옷을 입어야 하는데, 유신헌법이야말로 우리 몸에 맞는 옷이다’란 내용을 주제로 코미디를 구성해 연기했고, 그걸로 사단에서 1등을 했다. 그때부터 MC 겸 코미디 담당으로 예하부대를 돌며 유신 홍보 공연을 다녔다. MC와 코미디언으로서 능력을 자연스럽게 기를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얼마 후에는 사단 내 방송 DJ도 맡게 됐는데, ‘쌀’을 ‘살’로 발음하고 ‘의사’를 ‘어사’라고 말하는 억센 부산 사투리가 문제가 됐다. 문선대 공연에서야 사투리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수단이었지만, 방송에선 아니었다. 교정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매일 책과 신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 또한 나중에 사회에 나와 큰 도움이 됐다. ●‘수그려라’가 제 좌우명… 저를 방송인으로 남게 한 건 8할이 ‘노력’ -박원웅 선생의 스카우트로 MBC 라디오 데뷔를 한 이후 몇몇 프로그램이 나를 더 따라왔다. 사람들은 나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리듬감 있는 말투를 좋아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위기가 찾아왔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가요계를 평정할 때였으니 1976년쯤인 듯한데, MBC 라디오의 간부 한 분이 나를 호출했다. “라디오 진행자를 모두 전문 아나운서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위에서 내려왔다. 미안하다.” 교통정보 프로그램 ‘푸른 신호등’에서 하차하라는 말이었다. 방 한 칸 신혼살림에 아내는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 세간이라곤 쌀통 하나뿐이고, 찬장도 없어 사과상자로 대신하고 있던 우리 부부였다. “저, 좀 더 잘하겠습니다. 이거 그만두면 생계가 막막해집니다.” 소용 없었다. 다시 실업자가 됐다. 폭음을 하고 들어가 아내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방송하는 사람은 방송국에서 안 불러 주면 끝이다. ‘푸른 신호등’에서 졸지에 잘린 뒤 나는 장사를 하기로 했다. MBC 근처에 신발가게를 차렸다. 동대문 시장에서 패션구두 같은 것을 떼어다 아내와 같이 팔았다. 조용필이나 이은하 같은 당대의 스타들이 찾아와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6개월도 안 돼 망했다. 장사는 말주변만 갖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었다. 묘하게도 신발가게를 폐업하자 연달아 방송 요청이 들어왔다. 잠깐 동안의 실업자 생활과 신발가게 실패를 통해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에 간단한 것은 없다. 무엇이든 필사적으로 해야 한다.’ -라디오로 주가가 오르면서 TBC ‘7대 가수쇼’ MC로 TV 데뷔를 했다. 운현궁 공개홀에서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 당대의 스타들과 인사를 했다. ‘내가 여기까지 왔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시 고려진씨와 짝을 이뤘는데 최초의 남녀 공동 MC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150명 정도의 여성 MC들과 호흡을 맞춰왔다. 얼마 후에는 MBC ‘토요일 밤에’와 함께 주말 저녁을 양분하고 있던 TBC ‘쇼쇼쇼’의 MC로 위키리(이한필)의 뒤를 이어 발탁됐다. 쇼쇼쇼에서 나와 최고의 콤비를 이뤘던 정소녀씨를 만났다. ‘허참’ 하면 ‘정소녀’, ‘정소녀’ 하면 ‘허참’이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나와 같이 MC를 보던 정혜경씨는 내 이름에 이어 자기 이름을 말하는 순서에서 돌연 ‘정소녀’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보기 드문 방송사고를 내기도 했다. -한창 때에는 새벽부터 심야까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방송을 했다. 아침에 ‘푸른 신호등’ 2시간 진행하고, 잠깐 쉬었다가 ‘싱글벙글쇼’ 2시간, 좀 있다가 ‘허참의 가요앙콜’ 2시간. 이런 식이었다. 방송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극심한 스트레스다. 수십년을 해도 마찬가지다. 거기에서 오는 긴장과 피로, 고독감을 술로 달래면서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무교동 식당들에서 배달시킨 짬뽕, 짜장면에 소주를 마셔가면서 방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청취자들은 내 옆에 배달음식 빈 그릇과 소주병이 수북이 쌓여있는지를 전혀 몰랐을 것이다. 방송이 끝나면 심신이 헛헛해져 또다시 무교동 낙지골목 등을 훑고 다녔다. 그렇게 일에 술에 파김치가 돼서 집에 갔다가 새벽에 나오는 생활이 이어졌는데, 방송국에서 쓰러져 응급차로 실려간 적도 있었다. -나를 대표하는 ‘가족오락관’은 1984년 4월 3일 벚꽃이 한창일 때 처음 전파를 탔다. 내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공교롭게 마지막 1237회 녹화일이 2009년 4월 2일이었다. 하루도 어긋나지 않는 만 25년. 나의 청춘과 중장년이 그대로 녹아 있는 사반세기와 좀 더 따뜻하게 이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은 참 아쉽다. 새로운 포맷의 참신한 가족오락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해서 갑자기 관두게 됐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KBS는 가족오락관 후속으로 ‘가정오락관’이란 프로그램을 편성했지만, 몇 번 내보내고는 시청자 반응이 안 좋다며 폐지해 버렸다. 지금은 온 가족이 모여 볼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수그려라’가 나의 좌우명이다. 남을 존중하고 경청하려고 애쓴다. 남들 앞에 과하게 나서지 않으려 한다. 나는 항상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염두에 두고 무대에 오른다. 후배들한테 말한다. 분위기 뜨고 흥겹다고 해서 객석에 마이크 들이대며 반말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방송인으로서 나의 능력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끼’는 타고났을지 몰라도 나머지를 채운 것은 나의 부단한 노력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젊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 위해 시중에 있는 거의 모든 유머집을 구입해 외우고 또 외웠다. 소설이건 수필이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중요한 부분을 메모해 암기했다. 교수, 의사, 성악가, 요리사, 언론인 등 자기 분야의 고수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겼다. 그들과의 얘기는 모두가 살아 있는 공부였고, 나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단련될 수 있었다. ■허참은 누구 본명은 이상용. 1949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민 MC’ 중 한 명이다. TBC 동양방송, KBS 한국방송, MBC 문화방송에서 수많은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26년 동안 진행한 KBS ‘가족오락관’은 그의 이름과 동일시된다. 코미디언, 가수,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영남상고, 동아대, 중앙대 국제경영대학원 수료 ▲TV 프로그램 TBC ‘7대 가수쇼’ ‘쇼쇼쇼’ ‘전국 TOP10 가요쇼’, KBS ‘가족오락관’ ‘도전! 주부가요스타’ ‘왕건오락관’ ‘지구촌 노래자랑’, MBC ‘젊음은 가득히’ ‘지붕뚫고 하이킥’, 대전MBC ‘허참의 토크&조이’, SBS ‘빙글빙글 퀴즈’ ‘잉꼬부부 재치부부’, MBN ‘엄지의 제왕’ ▲라디오 프로그램 MBC ‘싱글벙글쇼’ ‘푸른 신호등’ ‘청춘은 즐거워’, SBS ‘허참의 즐거운 저녁길’ ▲음반 ‘왜 몰라주나’(1976년) ‘추억의 여자·소낙비’(2007년) ▲제29회 한국방송대상(2002년) 제12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2005년) KBS 연예대상(2006년)
  • “몇대 몇!”…‘가족오락관’ MC 허참, 간암 투병중 별세

    “몇대 몇!”…‘가족오락관’ MC 허참, 간암 투병중 별세

    예능프로그램 ‘가족오락관’을 25년간 진행한 MC 허참이 73세로 별세했다. 1일 방송가에 따르면 고인은 간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이날 세상을 떠났다. 1949년생인 허참은 1971년 동양방송 ‘7대 가수쇼’로 데뷔했다. 이후 그는 출연자와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는 입담으로 ‘쇼쇼쇼’, ‘도전 주부가요스타’, ‘가요청백전’, ‘올스타 청백전’ 등의 MC로 활약해왔다. 대표작은 KBS 예능 ‘가족오락관’으로 1984년 4월 첫방송부터 2009년 4월 최종회까지 진행했다. “몇대 몇!”이란 허참의 깔끔한 진행에 ‘가족오락관’은 오랜시간 사랑받았다.‘가족오락관’이 막 내린 이후에도 SBS ‘트로트 팔도강산’, KBS ‘도전 주부가요스타’·‘트로트 팔도 강산’, 경인방송 ‘8도 노래자랑’, 엠넷 ‘골든 힛트송’ 등 음악 프로그램 MC를 맡아왔다. 그는 최근까지 KBS ‘불후의 명곡- 전설의 명MC 특집’,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 등 방송에 출연해왔다. 2005년 제 12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TV진행자상을 수상하고 2006년 KBS 연예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 삼대가 모여 ‘쿵쿵쿵’…명절 층간소음 어떻게 막을까

    삼대가 모여 ‘쿵쿵쿵’…명절 층간소음 어떻게 막을까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진 비극날선 말 오가다 보면 감정 상해층간소음 전문가 차상곤 소장의 ‘팁’“아랫집에 층간소음 예상 시간 알리고무작정 찾아올라가는 것 참아야”9년 전 설 연휴 첫날이던 2013년 2월 9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 아파트에서 30대인 형제 2명이 A씨로부터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여자친구 집에 머물던 A씨는 명절을 맞아 부모 댁에 모인 윗집 가족들이 시끄럽다고 느껴 말다툼을 하다가 두 형제를 화단으로 불러내 흉기로 찔렀다. 이 여파로 당뇨로 투병 중이던 형제의 아버지마저 사건 발생 19일 만에 사망했다. A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명절에 층간소음 30% 증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면목동 층간소음 살인사건’은 극단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 시작은 보통의 층간소음 충돌과 다르지 않았다. A씨와 여자친구는 윗집에서 들려오는 쿵쿵거리는 소리에 잔뜩 예민해져 있었고, 윗집 가족들도 아이를 앉혀놓는 등 나름대로 조심했지만 날선 말이 오가다가 감정이 격해져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편히 쉬어야 할 명절에 벌어진 사건이라 더욱 비극적이었다. 실제 명절에는 층간소음으로 인한 이웃 간 갈등이 더 많아진다. 층간소음 피해를 소호하는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윗집에 삼대가 사는데 명절이 무섭다’거나 ‘코로나19 탓에 여행도 못 가 집에 머물러야 하는데 층간소음이 걱정된다’는 등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시가 2014년 추석과 2015년 설, 2015년 추석 전후 20일간 층간소음 민원을 비교한 결과 연휴 후에 민원이 약 30%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절에 갈등이 쌓였다가 연휴가 끝난 뒤 곧바로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집집마다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이니 ‘발망치’(걷거나 뛸 때 나는 소음) 소리가 커지는데다 평소에 중재 역할을 하는 아파트 관리실 직원들도 쉬기에 충돌이 더 격화할 수 있다. ●차상곤 소장 “층간소음 피해 호소하면 일단 받아들여야”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20년차 층간소음 전문가이자 책 ‘당신은 아파트에 살면 안 된다’(황소북스)의 저자 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장에게 30일 물었다. 차 소장은 우선 윗집에서 해야 할 일을 강조했다. 그는 “아랫집에서 소음 피해를 호소하면 윗집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하더라도 일단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이 정도도 못 참아?’라는 심리로 언쟁을 시작하면 갈등을 풀기 어렵다”고 말했다.차 소장은 구체적으로 소음이 언제 발생할지 아랫집에 미리 알려주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예컨대 “설 당일 오후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친지들이 우리집을 찾을 예정이라 다소 시끄러울 수 있으니 양해해달라”고 고지하라는 것이다. 차 소장은 “같은 정도의 소음이라도 미리 인지한 상태에서 듣게 된다면 조금 더 참을 만하다”고 말했다. 바닥에 매트를 깔거나 슬리퍼를 신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매트를 까는 것으로 성인의 발소음을 줄일 수 있지만, 아이들이 뛸 때 발생하는 층간소음을 막기 어렵다고 했다. 대신 매트를 깐 사진을 찍어서 아랫집에 보여줌으로써 층간소음 예방 노력을 했음을 강조할 수 있다. 차 소장은 “층간소음이 오래가면 감정의 문제가 되기에 피해본 쪽의 마음을 달래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랫집에서도 층간소음이 들렸을 때 무작정 찾아가 문 두드리기보다 인터폰을 통해 소통해보는 게 낫다. 감정이 격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차 소장은 “층간소음 피해를 본지 6개월 이내면 윗집과 직접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지만, 1년이 넘어가면 감정 문제가 되기에 아파트 관리소 등 3자의 중재를 청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또 소음이 들린다고 무작정 윗집에서 들리는 소리라고 확신하는 것도 위험하다. 차 소장은 “현장에서 조사해보면 바로 윗집에서 오는 소음이 65% 정도”라면서 “나머지는 아랫집에서 올라오거나 윗윗집에서 내려오거나 옆집에서 건너오는 소음”이라고 말했다. 바닥에 누워 진동이 느껴지면 아랫집에서 오는 소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차 소장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도 연휴 동안 당직하는 직원에게 층간소음 관련 업무를 충분히 설명하고, 충돌을 막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 ‘민주화 헌신’ 이을호 전 민청련 부위원장 별세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 고문 피해를 본 이을호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18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입원치료를 받던 중 26일 오전 10시 41분 지병으로 별세했다. 67세. 1955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전주고를 수석 졸업한 뒤 1974년 서울대 사회계열로 입학했다가 철학과로 전과했다.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투옥 생활을 했다. 졸업 이후 출판업에 종사하다가 1983년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주도한 민주화 운동단체 민청련 창립에 참여한 뒤 기획실장, 정책실장, 상임위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민청련 정책실장이었던 1984년 4월 내부 세미나 주제발표에서 당시 운동권의 운동론을 CDR(시민민주혁명론), NDR(민족민주혁명론), PDR(민중민주혁명론) 등 세 가지로 정리해서 ‘C·N·P 논쟁’에 불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1985년 민청련 활동으로 김 전 의장에 이어 검거돼 남영동 대공분실을 거쳐 남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겪었다. 이후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이 발병해 정신병원에 유치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후 질환이 재발을 반복하면서 본인과 가족이 장기간 고통을 겪었다. 민청련 탄압 이후 1986년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본격적으로 급진화되며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졌다. 2018년 우석대 김근태연구소 부소장에 취임해 세계철학사 번역서를 내기도 했다. 추모식은 27일 오후 6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이다. (02)2072-2011.
  • [길섶에서] 탈모/문소영 논설위원

    [길섶에서] 탈모/문소영 논설위원

    집안 사람들 모두 머리숱이 많다. 유독 숱이 적은 이는 나뿐이라, 주워 온 아이라는 놀림에 어려서는 큰 상처를 받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숱이 한 차례 줄었고, 기자 생활을 30년 가까이 하면서 취재원과 가졌던 수많은 술자리로 숱이 더 줄었던 것 같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종전의 음주 관행을 고친 덕분에 머리숱을 그럭저럭 보전하고 있다가 복병을 만났다. 대상포진. 남들은 대상포진이 나타나는 부위가 대체로 팔뚝, 등짝, 어깨 등등 몸통인데 나는 유별나게 머리 속으로 쳐들어왔다. 오른쪽 두피 반쪽에 넓게 띠처럼 포진이 발생해 소염제를 두껍게 발랐더니 머리가 떡져 2주간 모자를 써야 했다. 누군가는 투병 하냐며 설핏 웃었던 거 같기도 하다. 대상포진이 가라앉으면 딱지가 남는데, 그 딱지가 떨어질 때마다 소중한 머리털이 한 움큼씩 함께 떨어져 나갔다. 피부과에 가면 탈모 처방을 해 준다고 알려 준다. 건강보험은 적용되지 않는다. 가 봐야 할까?
  • 끝까지 ‘온몸’ 주고 간 삶… 우리가 기억해야할 숭고한 나눔

    끝까지 ‘온몸’ 주고 간 삶… 우리가 기억해야할 숭고한 나눔

    20여년 전 일면식이 없는 20대 여성에게 신장 한쪽을 떼어 준 박옥순(70)씨가 지난 3일 숨을 거두면서 시신을 대학에 기증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암 투병 끝에 70세로 삶을 마친 박씨의 시신을 경희대 의과대에 기증했다고 20일 밝혔다. 박씨는 47세이던 1999년 3월 가족이나 지인이 아닌 20대 여성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전혀 모르는 타인을 위해 신장을 나눈 ‘순수 신장기증인’은 한 해 2000여건의 신장 기증 중 10건 미만에 그칠 정도로 드물다. 박씨가 신증 기증을 결심한 것은 그보다 6년 앞선 1993년 타인에게 신장을 기증한 언니 박옥남(76)씨의 영향이 컸다. 자매가 함께 순수 신장기증인이 된 사례는 국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옥남씨는 “동생은 신념이 곧고 특히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일을 한번 결심하면 흔들림이 없었다”면서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이어 가는 중에도 끝까지 나누는 삶을 살고자 했던 동생의 마지막 소원이 실현됐다”고 말했다. 박씨는 신장 기증 후 별다른 질환 없이 생활해 오다 2019년 위암 3기 진단을 받고 폐까지 전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해 3월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이 쉽지 않았다. 박씨는 가족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더이상 치료를 받지 않고 집에서 편안히 임종을 기다리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시신 기증의 뜻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숨지기 하루 전에도 국내 의학 발전을 위해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옥남씨는 “동생의 시신 기증을 곁에서 지켜보며 가족 모두가 시신 기증에 대한 뜻을 품었다”고 했다.
  • 간병인 폭행에 싹싹 빈 말기암 노인…“가슴 찢어져”(영상)

    간병인 폭행에 싹싹 빈 말기암 노인…“가슴 찢어져”(영상)

    말기 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인 69세 노인이 가족이 고용한 간병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코로나 방역지침으로 가족의 면회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간병인은 “말 좀 들으라”며 노인의 머리와 어깨를 밀쳤다. 노인은 두려운 표정으로 “때리지 말라”며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피해 노인의 딸은 19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11월부터 간병인을 쓰게 됐고, 간병인이 과거 재활병원에서 일을 했다며 자신하는 모습을 믿고 병간호를 맡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제보 영상을 통해 아버지의 폭행 피해 사실을 알게 된 딸은 “모르는 번호로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고 안 됐다며 연락이 왔다.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아버지가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니까 죄스럽고 상처를 드린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딸은 문제의 간병인을 경찰에 고소했고, 병원 역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조처했다. 간병인은 증거 영상이 있음에도 폭행 “이마를 잡고 눕힌 것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병원 안에서 제보자를 색출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간병인은 변호인을 통해 합의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단순 폭행 아닌 노인복지법 위반 피해 노인이 만 65세가 넘은 만큼 노인복지법 위반 혐의도 적용이 가능한데, 이 경우 반의사불벌죄가 아니어서 피해자와 합의를 하더라도 처벌을 피하기 어렵다.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보호자가 65세 이상의 노인을 상대로 폭행 등을 저지른 경우 노인학대로 처벌할 수 있다. 보호자는 가족을 포함해 업무·고용 등 관계로 사실상 노인을 보호하는 사람을 모두 통칭한다. 간병인이 보호 중인 노인을 폭행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지고, 이는 형법상 단순 폭행죄가 2년 이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되는 것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무거운 처벌이다. 
  • [정은귀의 詩와 視線] 울지 않는 아기에게/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정은귀의 詩와 視線] 울지 않는 아기에게/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 내 등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최승자 시, ‘시작’ 중에서 모든 아기는 태어날 때 운다. 울음으로 이 세상, 자기 자리를 증명한다. 나 여기 왔어요. 이 세상 모든 아기의 울음은 생명, 존재 자체다.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할 때 아기는 으앙, 운다. 여기 좀 봐주세요. 아파요. 울음은 아기의 존재다움을 선명히 보여 주는 환한 소리다. 그런데 울지 않는 아기가 있다. 늙은 아기다. 그 아기의 속울음을 잘 살펴야 한다는 걸 이모님과 영별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지난번 칼럼을 쓴 직후 애타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이모님께서 먼 길 떠나셨다. 하나의 거대한 우주가 닫히는 과정은 참 간단했다. 곤히 쉬던 숨을 쉬지 않는 것, 생명의 지표를 가늠하는 기계음이 삐익, 멈추는 것. 끝은 너무, 허무하게 왔다. 내게 이모님은 평생 곧은 나무였다. “높은 산 주목처럼 꿋꿋함이여” 언젠가 아부지께서 당신 처형인 이모님께 보내신 생신 축시에서 이모님은 주목에 비유된다. 그 꿋꿋한 어른이 투병 중에 서서히 연약한 아기가 되어 갔다. 당당한 주목이 연한 이파리가 되는 시간. 식사는? 약은? 우리는 열심히 살폈지만 그 어른-아기가 깊은 통증을 감추고 있는 건 몰랐다. 괜찮다, 물 좀 다오. 이 땅의 참을성 많은 어른들은 아파도 울지 않는다.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안간힘이다. 한 어른-아기가 울지 않고 잠든 곳에서 나는 최승자 시인의 이 시를 떠올렸다. 시는 생명에 바치는 아름다운 경외의 시선이다.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는 세상, 탄생의 자리. 거기서 새순이 돋고, 꽃이 핀다. 사랑해, 사랑해, 그 다정한 소리에 둘러싸여 하나의 대륙이 탄생하고 그 대륙은 깊고 넓은 우주가 된다. 그 우주에 온갖 다른 생명이 깃든다. 꽃씨들이 온 땅에 가득 뿌려진다.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이 거기서 무럭무럭 자란다. 예쁜 시 ‘시작’은 아이의 미소에서 시작하여 아이들이 자라는 풍경을 그리다가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강물은 시작되고//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로 끝맺는다. 나의 이모 류옥영 어머니나 이한열의 배은심 어머니, 그리고 수많은 우리의 부모님들, 사랑을 주는 법만 알던 어른-아가들이 속울음으로 앓으며 지상에서 흔들리다 머나먼 별이 되는 계절이다. 아픔을 삭이던 아기들이 떠나며 말하는 것 같다. 울지 않는 아기들을 더 세심히 살피라고. 이모님 가르릉 숨소리와 통증을 알아듣지 못한 내 회한을 울지 않는 아기들 낮은 숨에 귀 기울이겠다는 다짐으로 바꾸며 다시 시작하는 아침, 환한 칸나가 피어난다.
  • 박건섭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조직위원장 별세

    박건섭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조직위원장 별세

    박건섭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조직위원장이 암 투병 끝에 지난 18일 별세했다. 75세.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일을 하며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은 고인은 1982년에 매주 토요일 학생들이 제작한 단편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토요단편’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70년대 영화사 신씨네에서 기획제작 이사를 지냈으며,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을 시작으로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1),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꽃잎’(1996), ‘편지’(1997), ‘약속’(1998) 등 199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을 기획 및 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2001), 홍기선 감독의 ‘선택’(2003), ‘엽기적인 그녀2’(2016) 등을 선보였다. 2016년 제2회 아시안월드영화제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았다. 2005∼2012년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예술대학에서 교수와 학장을 지냈고, 2018년부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유족은 부인 김명식 씨와 자녀 정민·규리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금천구 서울쉴낙원 5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1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도 고양 청아공원이다. (02) 2683-4444
  • 군산상고 ‘역전의 명수’ 50주년, 7월 행사로 또다른 역전 꿈꾼다

    군산상고 ‘역전의 명수’ 50주년, 7월 행사로 또다른 역전 꿈꾼다

    1972년 7월 19일 서울 동대문운동장 야구장. 제26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 열려 군산상고가 부산고에 9회초까지 1-4로 끌려가고 있었다. 9회말 모두가 군산상고의 패배를 점치는 순간, 선두타자 김우근의 안타와 고병석·송상복의 연속 볼넷으로 만루가 되며 차츰 달아올랐다. 김일권이 몸에 맞는 볼로 출루하며 1점을 따라 붙고, 그 뒤 양기탁의 적시타로 순식간에 4-4 동점을 만들었다. 2사 만루 기회에 군산상고 3번 타자 김준환이 끝내기 좌전안타를 때리면서 5-4 짜릿한 역전승을 올렸다. 지역차별에 쌓인 울분과 한을 야구공에 실어 보내곤 했던 호남인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안긴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한 대목이다. 서울과 영남 고교들에게 억눌려 있던 호남 야구의 자존심을 곧추 세운 짜릿한 역전승이기도 했다. 광주서중 야구부도 전국 대회를 제패한 적은 있지만 중학과 고교 과정이 분리된 이후로는 1968년에 창단한 지 4년 밖에 안되는 군산상고 야구부의 처녀 우승이 최초의 역사였다. 이날 역전승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뒤 유달리 군산상고는 1점 차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는 일이 많아 자연스럽게 ‘역전의 명수’란 별명을 얻었다. 당시 호남선 열차로 이리(현 익산)역에 야구부원들이 내리자 군용 지프로 군산까지 퍼레이드를 펼쳐 전북도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군산상고가 지금의 명성을 누리는 데 두 사람의 역할이 막중했다. 1931년 경성고무 창업주 이만수씨의 넷째로 태어난 이용일(91)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대행이다. 군산중학교를 다니다 2학년 때 서울 경동중으로 전학, 나중에 매형이 된 유복룡 이 학교 초대 감독의 권유로 야구부원이 됐다가 1950년 서울대 상대에 진학, 야구를 했고 한국전쟁에 입대 1953년 육군 야구단 창단 멤버를 거쳐 감독을 맡기도 했다. 제대 후 경성고무의 전무로 재직하던 이 옹은 사내 야구 동아리를 만들었다가 군산에 많았던 불량 청소년들을 교화시키는 데 야구를 활용해야겠다고 마음먹고 1962년 2월 군산국민학교, 중앙국민학교, 남국민학교, 금광국민학교등 4개 학교에 야구부를 창단했고 이들이 휘문고나 동대문상고로 진학하는 모습을 보고 안되겠다 싶어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를 창단했다.다른 인물이 1972년 황금사자기 우승의 주역인 최관수 감독. 이용일 옹은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주 대행을 맡기도 했는데 초대 감독에 김성근 감독을 임명할 정도로 선수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지도자를 높이 평가하는 구시대(?) 야구관을 갖고 있었다. KBO 초대 사무총장으로 국내 프로야구의 산파 역이기도 했는데 초기 구단 창단과 리그 운영의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그의 기획력 덕이었다. 최 감독 역시 이 옹의 마음에 쏙 드는 지도자였다. 열정만큼은 대단해 늘 선수들과 함께 뛰고 구르며 창단 4년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군산상고 야구부는 전국체전 우승을 하면 꼭 그 다음해 전국대회를 제패하는, 이상한 징크스를 갖고 있었던 점도 특이했다. 1971년 대통령배 준결승까지 진출할 정도로 신생팀 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데 김봉연과 김준환이 군산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다. 최 감독이 파출소를 찾아가 두 제자 앞에서 엎드려 뻗친 뒤 몽둥이를 건네 자신을 때리라고 했다. 이 일이 야구부가 똘똘 뭉치는 계기가 돼 다음해 우승으로 이어졌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1977년 정인엽 감독이 연출한 영화 ‘고교결전, 자 지금부터야’는 최 감독과 선수들의 하나된 모습을 그렸다. 최 감독은 30대였던 1979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감독 직을 그만 둔 뒤 군산 시내에서 홈런 세탁소를 차리는 등 어렵사리 투병했는데 해태 타이거스에 대거 입단한 제자들이 찾아와 치료비를 보태는 등 정성을 다했으나 57세 한창 때인 1998년 타계했다군산상고에 얽힌 전설 같은 얘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은 전북 군산시(강임준 시장)가 오는 7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사흘 동안 ‘역전의 명수 군산, 50주년 행사’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다. 이에 발맞춰 군산야구사기념관 건립도 추진돼 군산상고 야구부 출신들이 많은 물품을 모으고 있단다. 조계현 KIA 타이거즈 전 단장이 군산상고 야구부 출신 모임인 역전회 회장으로, 우종삼 군산시의회 예결위원장, 김기만 군산시야구소프트볼협회 부회장 등이 지난해 연말 강 시장을 예방해 GM자동차 공장 철수 등으로 지역에 불어닥친 한파를 역전의 기회로 돌리자고 의기투합했다. 조계현 회장은 “군산상고의 역전승은 군산시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기적을 낳는다’는 교훈을 남겼다”라며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출신으로 항상 자부심을 느낀다. 올해 50주년 기념 행사와 군산야구사 기념관 건립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군산 금암동의 이른바 째보 선창(죽성리 포구)도 또다른 역전 신화를 꿈꾼다. 언청이를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가 째보인데 주먹깨나 쓰는 언청이 객주가 일대 상권을 쥐락펴락했다는 유래와, 포구의 한쪽이 꼭 언청이 입마냥 움푹 들어가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맞서고 있다. 하여튼 낡고 칙칙하며 쇠락한 기운 물씬하던 어판장 건물을 도심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비어포트 1899’로 꾸몄는데 3월 정식 개장하면 새로운 명물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대형 맥주회사만 자체 호프를 생산하고 대다수 수제맥주 브랜드들은 수입 호프에 의존하는데 군산 보리 재배농으로부터 수거한 쌀보리에서 호프를 추출해 젊은 수제맥주 마니아들이 14개 점포를 운영한 뒤 그 수익을 농민들에게 돌려준다니 그 뜻도 갸륵하다. 갈매기떼가 끼룩끼룩 날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모습, 갯벌에 노을이 깃드는 장관을 바라보며 수제맥주로 목을 축일 수 있는 명소가 될 것 같다. 황민호 사장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호프를 갖고 이런저런 배합을 하는 등 좋은 맥주 맛을 선사하기 위해 젊은 사장들이 힘을 내고 있다”고 말했다.
  • 희소병 투병기 만화·영상으로 공개, 서로 응원하고 소통… 치유 돕는다

    희소병 투병기 만화·영상으로 공개, 서로 응원하고 소통… 치유 돕는다

    남들에게 털어넣기 어려운 투병 생활을 만화, 영상을 통해 공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서는 용기를 내 투병기를 공개하는 이들을 향한 응원, 공감 등 상호작용도 일어나고 있다. 투병기가 병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돼줄 뿐 아니라 이를 보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선순환’이 작동하는 셈이다. 지난해 2월 난소암의 일종인 미성숙 난소 기형증 진단을 받은 작가 류(필명·18)씨는 SNS에 자신의 투병기를 만화로 그려 올리고 있다. 류씨는 16일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어 무기력했고 불행하다고 느꼈다”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제 병을 당당히 알리고 ‘병 이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류씨의 만화 첫 회 도입부는 “고등학생인 내가 암에 걸렸다”로 시작한다. 그의 만화는 과하게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억지로 희망차지도 않다. 그저 솔직하다. ‘착한 암’이라는 주변의 반응에 “착한 암이 어딨냐”고 반문하거나 수험생이 되는 친구들을 보며 느끼는 소회를 덤덤히 그린다. 류씨는 “자신의 항암 팁을 전수해주거나 응원하는 댓글을 많이 받는다”면서 “투병기를 공개한 후 암도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삶일 수 있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유튜브에는 투병기를 영상을 통해 공개하는 채널이 60개가 넘는다. 구독자들은 동정보다는 응원하는 마음으로 환자들도 연대하고 있다. 유방암과 희귀질환 투병기를 올리는 유튜버 ‘연빛나라’를 구독하는 이모(28)씨는 “투병기를 보며 병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응원하게 됐다”면서 “투병기를 공개하는 유튜버에게 소통이 힘이 될 것 같아 꾸준히 구독하고 있다”고 말했다. 루게릭병 유튜버 ‘삐루빼로’, 뼈 전이암 유튜버 ‘김쎌’ 등 투병기를 챙겨보는 오모(28)씨도 “투병 자체도 힘들텐데 그 과정을 공개하고 공유해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전하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며 “유튜버의 안부를 옆에서 챙긴다는 기분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투병기를 공개하는 것이 환자들의 치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본인의 힘든 얘기를 주변에 공유하면 계획이나 목표가 분명해지고 병을 극복하기 위해 더 노력을 하게 되는 ‘선언 효과’가 발생한다”면서 “SNS라는 온라인 공간에서 낯선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이지만 이를 통해 감정적으로 정화되는 효과도 있다”고 했다.
  • “병 이전에 저입니다” 만화로, 영상으로 투병기 공개하는 사람들

    “병 이전에 저입니다” 만화로, 영상으로 투병기 공개하는 사람들

    SNS, 유튜브로 희소병 투병기 공개투병 사실 감추지 않고 당당히 소통“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고 싶어”전문가 “선언 효과 발생해 치유에 도움”‘고등학생인 내가 암에 걸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만화를 올리는 작가 류(18·필명)씨는 첫 회 도입부를 이렇게 시작하는 작품을 연재한다. 고등학교 2학년 새 학기를 준비하던 지난해 2월 배가 아파 찾은 병원에서 난소암의 일종인 미성숙 난소 기형종 진단을 받은 경험을 담은 작품이다. 항암치료를 받던 류씨는 자신의 투병기를 만화로 그려 세상에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남들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암 투병기를 솔직하게 꺼내고 경험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류씨는 13일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싶어 무기력했고 불행하다고 느꼈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제 병을 당당히 알리고 ‘병 이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만화는 과하게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억지로 희망차지도 않다. 그저 솔직하다. ‘착한 암’이라는 주변의 반응에 ‘착한 암이 어딨냐’고 반문하거나 수험생이 되는 친구들을 보며 느끼는 소회를 덤덤히 그리기도 한다. 류씨는 “자신의 항암 팁을 전수해주거나 응원하는 댓글을 많이 받는다”며 “투병기를 공개한 후 암도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삶일 수 있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이 변했다”고 말했다. 류씨처럼 용기를 내 본인의 투병기를 공개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들을 향한 응원, 공감 등 상호작용도 일어나고 있다. 투병기가 병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돼줄 뿐 아니라 이를 보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선순환’이 작동하는 셈이다. 유방암과 희귀질환 투병기를 올리는 유튜버 ‘연빛나라’를 구독하는 직장인 이모(28)씨는 “투병기를 보며 병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더 응원하게 됐다”며 “투병기를 공개하는 유튜버에게 소통이 힘이 될 것 같아 꾸준히 구독하고 있다”고 말했다. 루게릭병 유튜버 ‘삐루빼로’, 뼈 전이암 유튜버 ‘김쎌’ 영상을 챙겨보는 오모(28)씨도 “투병 자체도 힘들 텐데 그 과정을 공개하고 공유해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전하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며 “유튜버의 안부를 옆에서 챙긴다는 기분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병기를 공개하는 것이 환자들의 치유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본인의 힘든 얘기를 주변에 공유하면 계획이나 목표가 분명해지고 병을 극복하기 위해 더 노력을 하게 되는 ‘선언 효과’가 발생한다”면서 “온라인 공간에서 낯선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이지만 감정적으로 정화되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 ‘투병 중’ 이외수, 이재명 지지 메시지...李 “힘내겠다”

    ‘투병 중’ 이외수, 이재명 지지 메시지...李 “힘내겠다”

    이재명 “이렇게 큰 응원…힘 안 낼 도리 없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15일 투병 중인 작가 이외수 씨에게 “꼭 힘내주십시오. 코로나19가 우리를 막지 않는 그 날, 좋은 소식 가지고 찾아뵙겠다”며 쾌유를 기원했다. 이 후보는 이날 오후 페이스북에서 “선생님이 머물고 계신 춘천에 가는 길입니다. 찾아뵙고 싶었으나 코로나19가 우리 만남을 가로막네요”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몇 해 전 지방재정 개편 저지를 위해 단식 농성을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찾아오셨죠. 저를 보며 ‘대한민국에 아직도 희망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잊히질 않습니다”라며 “‘힘내라, 잘하고 있다’는 그때 선생님의 응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이어 “이번에도 제게 힘을 보내주셨다”며 “환자복을 입은 선생님의 모습은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지만 ‘이외수체’로 적힌 문장에서 선생님의 힘이 느껴져 또 미소 짓고 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 두 줄의 문장을 한 번, 두 번, 곱씹어 아껴 읽었습니다”라며 “이렇게 큰 응원을 받고 힘을 안 낼 도리가 있나요. 저 정말 힘내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후보는 이씨가 지지 메시지와 함께 병상에서 찍은 사진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씨는 지지글에서 “이재명 대통령 후보님, 힘 내십시오. 저도 힘 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소설 ‘장외인간’, 에세이 ‘하악하악’ ‘청춘불패’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쓴 이외수는 2014년 위암 2기 판정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는 2020년 3월22일 뇌출혈로 쓰러졌으며 현재 재활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 예비역 만난 이재명 “남자로 태어난게 죄도 아닌데…상응하는 보상해야”

    예비역 만난 이재명 “남자로 태어난게 죄도 아닌데…상응하는 보상해야”

    이재명 “드론부대 같은 것 만들어야”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매타버스(매일 타는 민생버스)의 일환으로 예비역들을 만나 군복무와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특별한 희생을 치르는 것 아닌가. 남자로 태어난게 죄인도 아닌데. 어떤 형태로든 상응하는 보상해줘야 한다는게 제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후보는 15일 강원 인제군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명심토크콘서트 ‘충성! 인제 왔습니다!’에서 또 한 참석자가 “이재명 후보를 위한 진짜사나이가 만들어지면 참여할 의사가 있나”라고 묻자 “저는 안간다. 나이도 있는데 오바 같다. 다만, 아들 두명 다 공군 갔는데 헌병 이런 걸로 험하게 보냈다”라며 이처럼 밝혔다. 이 후보는 퇴역군인을 위한 정책 구상도 밝혔다. 그는 “매일 눈 치울 걱정하고, 식당에 가서 급식병하면서 얼굴 빨개지는 스팀쏘이고 이런 것은 하지말고 외주를 주고, 경계 이런 것도 첨단장비가 얼마나 좋나”라며 “드론 부대 같은 것을 만들어서 프로그래머를 양성하고, 그곳에서 첨단기술을 익히고 부대유지하다가 퇴역하면 관련회사 취업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후보는 “군 복무기간이 손해보는 기간이 아니고 뭔가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주면 되지 않겠나”라며 “제가 구상하는 것중 하나”라고 이 같은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이어 이 후보는 “전쟁을 병력수로 하는 시대가 아니다”라며 “장비 무기로 하는 건데, 그래서 그 부분을 보강해서 전문전투병으로 꼭 필요한 만큼만 하고 나머지를 기술장비병으로 키우고 월급을 제대로 주면 된다”라고 말했다. 또 이 후보는 “심정적으로 추운 시기가 있었나”라는 질문에 과거 재판을 받던 시기를 언급하며 “모가지가 날라갈 뻔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제가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뉴스에 법원 선고 재판 이런 말 나오면 가슴이 뚝뚝 떨어졌다”며 “어떤 느낌이냐면 옆에 쫙 사형수들이 대기하고 있는데 옆에서 목이 날아가는 걸 보고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섬뜩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표현했다. 단두대가 고장나서 살았다. 그 때 진짜 추웠다”라고 덧붙였다.
  • 엄마는 왜 사랑하는 딸에게 ‘약’을 먹였을까 [메디컬 인사이드]

    엄마는 왜 사랑하는 딸에게 ‘약’을 먹였을까 [메디컬 인사이드]

    극단적 아동학대 유형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아이에게 ‘병’ 만들어 ‘보호본능’ 욕구 충족‘극진한 돌봄’ 주변에 널리 알려지길 바래피해아동 사망률 9~12%…발견 쉽지 않아아동 분리, 가족 상담 등 종합적 대응 필요영화 ‘런’에서 주인공 클로이는 선천적인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닙니다. 부정맥과 천식, 당뇨를 함께 앓고 있는 딸이 안쓰러워 엄마 다이앤은 헌신적으로 딸을 돌봅니다. 클로이는 혼자 약을 먹고 주사도 놓을 만큼 꿋꿋한 아이입니다. 똑똑한 클로이는 집에서만 공부하고도 대학에 지원해 합격 소식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러다 우연히 엄마의 이름으로 처방받은 약병을 발견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관련해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딸. 엄마가 준 약의 성분을 알아내기 위해 직접 약국을 방문하는 모험을 하다 결국 들켜 방에 완전히 갇혀버립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불운한 인생이 엄마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분들은 이 내용을 영화적 상상력에 의해 꾸며진 것으로 보지만, 실제 현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드물게 발견됩니다. 엄마가 건강한 아이를 두고 주변에 “아파서 치료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심지어 아이에게 직접 상해를 입혀 없는 병을 만드는 사례도 있습니다. ●“없는 병을 만들었다…사랑하는 엄마가”자신의 극진한 돌봄이 외부에 널리 알려져 주목받길 원하고, 병을 앓는 자녀가 자신에게 정서적으로 완벽히 종속되길 원합니다. 이를 통해 보호본능에 대한 욕구를 충족합니다. 바로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입니다. 15일 대한법의학회에 실린 조선대 연구팀의 ‘아동학대의 원인으로서의 ‘대리인에 의한 뮌하우젠 증후군’ 논문에 따르면 대리 뮌하우젠증후군은 학대로 이어지는 정신질환으로, 3가지 동기가 있다고 합니다. 우선 배우자와의 불화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자녀가 입원하면 부모의 관심이 자녀에게 쏠리기 때문에 배우자와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아픈 아이를 돌보는 헌신적인 어머니’ 같은 역할을 추구하는 겁니다. 이를 통해 타인이 자신을 존경하고 칭찬하길 바랍니다. 외로움과 애착, 가족 내에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 일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유가 어떻든 결과는 명백한 ‘아동 학대’로 이어집니다.796명의 가해자를 조사한 한 연구결과에선 가해자의 97.6%가 여성이었고 95.6%는 ‘친모’로 나타났습니다. 45.6%는 의료와 관련된 직업을 가졌다고 합니다. 가해자의 30.0%가 어린 시절 학대받은 경험이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영화처럼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학대 사실을 확인하기 무척 어렵습니다. 주변에 늘 ‘자상한 엄마’, ‘헌신적인 엄마’라는 인식을 심기 때문에 같이 생활하지 않는 이상, 특별한 징후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동의 질병, 이상 증상 원인을 명확히 알면서도 숨기는 것을 발견하거나, 보호자로부터 아동을 분리한 뒤 병이 낫는다면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 진단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무도 몰랐다…‘헌신적인 엄마’이니까 81건의 해외 대리 뮌하우젠 피해사례를 조사한 결과 피해아동의 평균 나이는 5세였습니다. 피해자가 6세를 넘기는 사례는 매우 드물지만, 이 조사에서는 각각 21세와 23세인 여성 2명이 있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이런 가해를 참고 견디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엄마의 사랑’ 때문이라고 합니다. 연구팀은 “가해 과정에 엄마는 자신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하고 아이는 엄마와 가까워지거나 엄마에게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돼 둘 사이엔 일종의 공생관계가 성립된다”며 “분리불안 등으로 엄마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아동은 엄마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잃지 않기 위해 가해를 묵인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의 피해는 매우 심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화 ‘런’처럼 교육 기회를 박탈 당하거나 영구적 장애를 입을 수 있고 심지어 치명적 상해로 사망하기까지 합니다. 보고에 따르면 피해아동의 사망률은 9~12%에 이른다고 합니다. 형제까지 포함하면 25%에 이를수도 있습니다. 또 나머지 사망 아동도 원인 불명으로 처리돼 ‘영아급사증후군’으로 처리될 수 있다고 연구팀은 설명했습니다. 가해자는 학대를 통한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 아이를 원할 수 있습니다.●아이는 참았다…“사랑하는 엄마이니까” 2000년에 해외에서 보고된 대리 뮌하우젠 사례는 충격적입니다. 한 가정에서 조산으로 태어난 둘째 아이는 유리질막병으로 인한 호흡곤란, 잦은 무호흡과 경련, 발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인공호흡기 부착 후 뇌사상태로 있다 사망했는데, 부검 없이 사인은 ‘퇴행성 신경계 질환’으로 처리됐습니다. 엄마는 이후 염색체 이상이 있는 장애아를 입양했고 이 아이도 심정지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다시 임신해 미숙아를 출산했고, 이 셋째 아이가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생활을 하는 와중에 다시 임신해 또 미숙아를 출산했습니다. 셋째 아이의 혈액에서 4가지 종류의 장내 세균이 발견되는 등 상태가 악화하자, 엄마는 남편 몰래 “심정지가 발생하면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아달라”고 의료진에게 요청해 결국 병원의 의심을 사게 됩니다. 엄마는 버티다 못해 셋째 아이 혈액을 대변으로 오염시킨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했고 기소돼 3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국내에선 구체적 사례가 학계까지 보고되지 않았지만, 만약 의심 사례가 발견된다면 대응의 최우선 순위는 ‘아이’여야 한다고 연구팀은 거듭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모든 가족에 대한 심리상담과 아동 즉각 분리, 피해 아동과 관여된 모든 의료진 정보 공유를 통해 사례 관리를 진행,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색출해나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 끝까지 성실했던 표명일 코치, 투병 끝에 별세

    끝까지 성실했던 표명일 코치, 투병 끝에 별세

    표명일 양정고 농구부 코치가 12일 밤 지병으로 별세했다. 표 코치는 양정고와 명지대를 나와 1998년 프로농구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8순위로 기아에 지명됐다. 이후 KCC로 옮긴 그는 2003~04시즌 팀의 우승에 힘을 보태며 식스맨상과 기량발전상을 수상했다. 동부로 옮긴 2007~08시즌에는 11월 월간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2년 KT에서 은퇴한 후에는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동부에서, 2018년부터 2019년 1월까지 양정중학교에서, 이후 양정고등학교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성실한 플레이로 인정받았던 표 코치는 간암 판정 후에도 양정고를 이끄는 투혼을 보여줬다. 지도자로서도 끝까지 성실했던 그의 사망 소식에 많은 팬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유족은 부인 정현희씨와 두 아들(승우, 시우)가 있다.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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