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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 원로배우 황해씨 원로배우 황해(본명 전홍구)씨가 9일 오후 9시12분 지병인 당뇨로 별세했다.83세. 고인은 97년부터 당뇨를 앓았으며, 최근 몇년간은 이틀에 한번꼴로 병원에서 혈액 투석을 받으며 투병생활을 했다고 유족들은 전했다.1922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성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악극단 등에서 활동하다 1949년 한형모 감독의 영화 ‘성벽을 뚫고’로 데뷔했다. 이후 ‘청춘 쌍곡선’(1956) ‘도망자’(1965) ‘독 짓는 늙은이’(1969) ‘특공대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1970) 등 2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 한국 영화계는 ‘007’시리즈의 영향으로 첩보 액션물이 전성기를 이뤘는데, 고인은 작지만 다부진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개성 넘치는 연기로 박노식, 장동휘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액션 배우’로 명성을 떨쳤다.1990년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을 마지막 작품으로 은막을 떠났다.‘부초’(1978)로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최우수연기상,‘평양폭격대’(1971)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영화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3년 10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백설희씨와 아들 영록씨를 비롯해 옥(주부)영남(사업)학진(사업)진영(작사가)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02)3010-2294. ■ 美미시간대 임길진 박사 미국 미시간주립대 석좌교수인 임길진 박사가 9일(현지시간) 미시간주 랜싱 시내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59세. 임 박사의 미국내 영결식은 오는 12일 랜싱의 한 장례식장에서 열리며 곧 한국내 가족들에게 시신이 인도될 예정이다. 임 박사는 서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에서 도시계획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일리노이주립대, 미시간주립대에서 지리학과 및 도시계획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개발연구원(KDI) 석좌교수 겸 국제정책대학원장을 역임했다. 미국 연락처 (517)862-7686,(517)256-0862 ●남병협(전 쌍용 이사)씨 별세 귀현(아남전자 대표)선현(KBS 글로벌센터장)상건(LG전자 부사장)상욱(봉우물산 이사)씨 부친상 이장렬(사업)최정민(협성대 교수)씨 빙부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2)3410-6924 ●김세창(전 신한은행장)씨 상배 정인(미국 브로드웨이은행 지점장)하경(한림대 의대 교수)진경(한국수출입은행 국제협력실장)태경(온세통신 상무)씨 모친상 양성택(미국 씨티은행 지배인)씨 빙모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410-6908 ●최철호(케이블TV 수원방송 사업부장)씨 모친상 인병택(국정홍보처 홍보협력국장)박영국(대우캐피탈 차장)최병석(한국산업인력공단 대리)씨 빙모상 9일 서울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2072-2014 ●김성기(우진상사)형기(삼성물산 상무)경숙(서울월정초등학교 교사)씨 부친상 허범(미래용선 대표)김동현(대우건설 이사)백충렬(한국알박 대표)씨 빙부상 류필재(서울보훈병원 수간호사)씨 시부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3일 오전 (02)3410-6917 ●윤흥식(한국방송 주간)씨 모친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410-6916 ●김준홍(제일모직 대리)씨 모친상 김지현(경희중 교사)씨 시모상 정재우(자리코리아 대표)씨 빙모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410-6907 ●황재홍(대한투신운용 채권팀장)씨 부친상 서범원(정남개발 대표)이일택(한전 강릉지점 과장)씨 빙부상 7일 경기도 가평장례식장, 발인 11일 오전 8시 (031)581-4448 ●임양은(경기일보 주필)씨 상배 7일 수원 아주대병원, 발인 11일 오전 9시 (031)219-4117 ●임병철(대한아이스하키협회 고문)씨 별세 윤규(광운중 아이스하키부장)씨 부친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3일 오전 7시 (02)3410-6901 ●박노운(금동공업 대표)씨 별세 준규(재정경제부 행정사무관)씨 부친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010-2239 ●김시화(전 하남시의회 의장)씨 모친상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010-2293 ●심재훈(전 서대문구 약사회 회장)씨 별세 태보(중국 현태유한공사 사장)성보(정한정보통신 이사)씨 부친상 박상표(한라산업개발 팀장)씨 빙부상 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1일 오전 9시 (02)3010-2268 ●한정자(삼흥 수원컨트리클럽 명예회장)씨 별세 김효석(〃 회장)씨 모친상 우현(〃 전무이사)씨 조모상 이광수(대륙통상 대표)씨 빙모상 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30분 (02)3010-2270 ●안영기(인본건설 대표)남기(한국국제협력단 이라크 지원팀장)평기(한국건설 품질연구원 총괄이사)씨 모친상 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2)3010-2292 ●김경락(전 전국생활체육 테니스협회장)덕락(한국냉장 사장)씨 모친상 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02)3010-2265 ●문순재(김해전국화물 소장)씨 부친상 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1일 오전 11시 (02)3010-2236 ●최광선(경북대 교수)충길(최충길안과의원 원장)씨 모친상 김현주(소원기건 사장)이수길(공구랜드 〃)씨 빙모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410-6911 ●이종석(전 성환로타리클럽 회장)씨 별세 문우(자영업)씨 부친상 홍선기(전 대전시장)공동준(남성토건 대표)씨 빙부상 10일 천안 단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10시 (041)550-7185 ●이광신(국방부)광재(금강프린텍 대표)은기(세강병원 원무과장)씨 부친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2)3010-2264 ●강기봉(서울아산병원 인사팀 직원)씨 부친상 배명직(기양금속 대표)손인범(워커힐호텔)이석우(서울시청)장준원(은평구청)김진만(환인제약)씨 빙부상 윤흥주(포스코 홍보실)씨 시부상 9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1일 오전 7시 (02)3010-2238 ●조규섭(재외사업가)씨 부친상 함창용(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씨 빙부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30분 (02)3410-6919 ●정연욱(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씨 부친상 9일 부산 금정구 남산동침례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51)583-8906
  • ‘낙화’ 시인 하늘로 지다

    원로시인 이형기씨가 2일 오전 10시20분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73세. 이 시인은 11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아왔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동국대 문리대를 졸업한 고인은 1950년 17세에 등단, 한국현대시의 중추로 역할해 왔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낙화)라는 대표적 시구에서 드러나듯 그는 존재론적 고민을 시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작가였다. 7년전 발표한 시집 ‘절벽’에서도 생명의지와 존재의 소멸에 천착한 글쓰기 면모를 보였다. 비평 소설 수필 등 전방위 문학활동을 펼친 그는 투병 중에도 부인의 대필로 시창작을 했을 만큼 작품활동 의지를 꺾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양통신, 서울신문, 대한일보 등의 기자를 거쳐 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1981년 부산산업대 교수를 시작으로 1987년부터 모교인 동국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1974년 ‘월간문학’ 주간을 지냈고 1994년부터 2년동안 한국시인협회장으로 활동했다. 시집 ‘적막강산’‘심야의 일기예보’‘절벽’, 비평집 ‘감성의 논리’‘한국문학의 반생’ 등을 남겼다. 생전에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대산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은숙(68)씨와 딸 여경씨, 사위 김태윤(한국와이어스 대리)씨가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4일 오전 8시. 장례는 이날 오전 9시 서울 도봉구 방학동 성당에서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02)929-4099.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비 첫 단독콘서트… 어머니 생각에 눈물

    “어머니 사진 앞에서 노래하고 싶었지만…” 가수 비가 데뷔 3년 만의 첫 단독 콘서트에서 노래 도중 3년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얘기 하며 눈물을 쏟아 5000명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비는 29일 오후 7시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1집 수록곡 ‘익숙지 않아서’를 부르며 “어머니 사진을 무대위에 걸어놓고 노래하고 싶었는데, 예전에 집에 불이 나 어머니 독사진이 한장도 남지 않았다.”면서 “지금 이 공연을 어머니도 하늘에서 보고 계실 것이다.”라고 말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비는 노래를 마치고 “오늘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합시다. 부모님들도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비의 어머니는 당뇨합병증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다 3년 전 세상을 등졌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美연방대법원도 부시가 장악?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2기 행정부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적 이슈는 대법원 구성이라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이 24일 보도했다. 미국 최고의 사법기관인 연방 대법원 대법관들이 신병 치료와 고령 등을 이유로 조만간 상당수 사임할 것이 확실시돼 대법관 충원 문제가 여야 대결의 최대 분수령이 될 것이란 분석이다. 현재 연방 대법원은 공화당과 민주당 성향의 대법관이 각각 5명과 4명인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2000년 대선 당시 플로리다주(州) 대법원의 재검표 결정에 대해 연방 대법원이 부시 후보의 손을 들어 위헌이라고 판결했을 때 위헌 대 합헌 숫자가 ‘5대4’였다. 문제는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 등 조만간 사임할 것으로 예상되는 4명 가운데 2명이 민주당 성향인데, 부시 대통령이 이들을 모두 공화당 성향의 인사로 충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80세로 전립선암 투병 중인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수개월 내에 사임할 것이 확실시되며 84세로 최고령인 존 폴 스티븐스,74세의 샌드라 데이 오코너,71세인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도 건강상 이유로 사임을 원하고 있다. 특히 오코너 대법관은 공화당계로 분류되면서도 성향은 민주당쪽이어서 대법원 구성이 현재 ‘5대4’에서 ‘7대2’나 ‘8대1’ 구도가 될 가능성도 있다. 대법원장을 비롯한 연방 대법관 임명권은 대통령이 가진다. 상원의 인준 절차가 있지만 공화당이 다수이기 때문에 걸림돌이 없다. 인디펜던트는 종교와 낙태권, 동성결혼 논란과 같이 의회가 아니라 대법원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 이슈들이 중요해진 상황에서, 렌퀴스트 대법원장 퇴임 시점부터 대법관 임명을 둘러싼 대대적인 여야 공방이 시작될 것으로 내다봤다. 연방 대법관은 평생 임기가 보장돼 일단 임명되면 스스로 퇴임을 원하지 않을 경우 해임할 수 없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30년간 NBC 투나잇쇼 진행 자니 카슨 타계

    미국 TV의 신화를 일궈냈던 NBC방송의 간판 프로그램 ‘투나잇 쇼’를 30년간 진행하며 ‘심야 토크쇼의 황제’로 군림했던 자니 카슨(79)이 23일 새벽(현지시간) 캘리포니아에서 숨을 거뒀다. 카슨의 조카 제프 소칭은 이날 “카슨이 일요일 새벽 가족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편안하게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그는 “별도의 추모행사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 언론들은 카슨이 로스앤젤레스 인근 말리부에서 지병인 폐기종으로 숨졌다고 전했다.‘투나잇 쇼’를 진행하는 도중에도 가끔 담배를 피울 만큼 애연가였던 카슨은 2002년 폐기종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오하이오주 코닝 태생인 카슨은 해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1940년대 말 네브라스카주 지방 TV에서 TV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후 1950년 로스앤젤레스 KNXT-TV로 이적,1951∼53년 스케치 코미디쇼 ‘카슨의 지하실’로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자니 카슨쇼’(1955∼56),‘후 두 유 트러스트’(1957∼62) 등 숱한 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어린 소년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시청자와 초대손님 모두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으며 특유의 풍자와 유머로 미국인들을 웃겨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동료였던 에드 맥마흔이 그를 소개하며 외쳤던 “여∼기 자니를 소개합니다.”(Heeeeere’s Johnny.)라는 말도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92년 5월 단골 초대손님이었던 제이 리노에게 ‘투나잇 쇼’를 물려주고 은퇴하기까지 거의 30년 동안 NBC 간판프로그램을 이끌어 경쟁사 CBS를 압도했다. 한때 500만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아 TV출연자 가운데 사상최고 ‘몸값’을 기록하기도 했다.‘투나잇 쇼’ 최종회 방송에서는 무려 5500만명의 시청자가 지켜봐 그의 퇴장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카슨은 은퇴방송에서 “이제 물러날 때가 됐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매순간 이를 즐길 수 있었던 나는 행운아”라고 말해 갈채를 받았다. 카슨은 1987년 미 TV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으며 은퇴하던 1992년 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수상하는 등 방송인으로 완벽한 성공을 거뒀지만 사생활에서는 굴곡이 심해 무려 4번이나 결혼하고 세차례 이혼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1991년에는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리키(39)를 자동차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기도 했다. 유세진기자 yujin@seoul.co.kr
  • 안에선 ‘댄스’ 밖에선 ‘반전’

    |워싱턴 이도운특파원|20일(현지시간) 열린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2기 취임식은 지지자들의 축하와 반대자들의 시위가 극명하게 엇갈린 행사였다. ●‘나’ 대신 ‘우리’ 일체감 강조 부시 대통령은 낮 12시 정각(한국시간 21일 새벽 2시)에 의사당 앞에 마련된 취임식장에서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에게 취임 서약을 했다. 올해 80세인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암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로 선서를 받는 임무를 다했다. 부시 대통령은 연설에서 나(I) 대신 우리(We)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이는 최근 미국 언론이 부시에 반대하는 국민과 국제사회를 의식해 우리라는 표현으로 일체감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연설을 마친 부시 대통령은 딕 체니 부통령과 함께 의회 안으로 옮겨 의회 지도자들과 오찬을 함께한 뒤 의장대를 사열하고 전용 리무진에 탑승, 백악관까지 약 2.7 마일 구간에서 2시간여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어 부시 대통령은 저녁 7시부터 21일 새벽 1시까지 워싱턴 컨벤션센터, 유니언 스테이션 등 9곳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모두 참석, 잠깐씩 얼굴을 내밀고 로라 여사와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선보였다. ●연단 바로 앞에서 야유 부시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던 도중 식장 곳곳에서 반 부시 구호가 터져나왔다. 특히 기자들이 주로 앉아있던 연단 앞 7번 섹션에서 한 청년이 부시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야유를 보내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다른 참석자들이 함께 야유를 보내거나 ‘USA’ 등을 외쳐 부시 대통령의 취임사는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이날 워싱턴 시내에서는 하루종일 반 부시 시위가 이어졌다. 일부 시위대는 성조기를 불태웠으며 ‘부시는 전범’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피켓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반면 부시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 ‘4년 더’라는 구호를 외쳤다.9·11 테러의 여파로 경찰과 군인 등 1만여명이 동원된 사상 유례없는 철통 보안속에 열린 이번 취임 행사에는 당초 예상했던 50만명보다 훨씬 적은 10만여명이 취임식과 퍼레이드를 지켜보는 데 그쳤다. ●부시 일가의 세번째 취임식 부시 대통령 일가는 아버지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의 취임식까지 포함해 모두 3차례에 걸쳐 대통령 취임식을 치르는 기록을 세웠다. 취임식에는 아버지인 부시 전 대통령과 도로, 닐, 마빈, 젭 등 형제가 모두 참석했다. 또 젭의 아들로 정치적 야망이 큰 것으로 알려진 조지 P 부시도 눈에 띄었다. 취임식 참석자들은 젭 부시와 그의 아들 가운데 누가 대선에 나올 것인가를 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취임식에는 지난해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과 경쟁했던 민주당의 존 케리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도 하객으로 참석했다. ●1기 때와 이슈는 같지만 상황은 변해 부시 대통령의 2기 취임사를 4년 전의 첫 취임사와 비교해보면 거론한 이슈들은 대체로 비슷한 편이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취임사의 중요성도 달라졌다. 부시 대통령은 1기 취임사에서도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또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감세와 사회보장 개편도 제안했다. 그러나 2001년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이었던 당시에는 그같은 연설에 크게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밋밋한 취임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9·11이후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이 테러와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게 됨에 따라 2기 취임사에는 국제사회가 큰 관심을 보였다.2기 취임사의 가장 큰 특징은 9·11로 촉발된 테러와의 전쟁을 자유의 확산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LG전자 PDP TV 생중계 취임 행사는 LG전자의 PDP TV가 공식 중계TV로 선정돼 운집한 축하객들에게 행사 화면을 생중계해 눈길을 끌었다. 의사당 광장 주변에는 50∼60인치급 PDP TV 20여대가 VIP석 등 곳곳에 배치돼 먼 곳에서 단상을 잘 볼 수 없는 시민들에게 취임선서 등 주요 장면을 현장 중계했다. 이어 열린 VIP 리셉션과 축하연회장 등 주요 행사장에도 대형 PDP TV가 배치돼 주요 인사들의 움직임 등 현장 화면을 참석자들에게 전달했다. dawn@seoul.co.kr
  • 암투병 장영희 교수 3월부터 강단 복귀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넘어질 때마다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삶의 희망을 전하는 아름다운 글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서강대 영문학과 장영희(53) 교수가 오는 3월 강단에 복귀한다. 장 교수는 대학원 수업인 ‘19세기 미국문학’과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영문학 개론’과목을 맡을 예정이다. 미혼으로 노모와 함께 살고 있는 장 교수는 지난해 9월 중순 3년전 완치된 유방암이 척추암으로 전이되는 바람에 강의를 접고 입원하게 된 사실을 한 일간지 칼럼을 통해 공개했다.2개월 동안 입원해 방사선 치료를 받은 장 교수는 지난해 11월말 퇴원, 지금까지 집에서 통원하면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장 교수는 “항암치료를 막 시작한 단계라 조심스럽지만 통증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여서 강의를 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면서 “젊은 학생을 만나면 정신적으로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강단에 복귀하게됐다.”고 말했다. 그는 “일간지에 연재한 ‘영미시 산책’칼럼을 묶어 올 여름 책도 출간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 교수는 1살 때부터 두 다리를 못쓰는 소아마비 1급 장애를 앓고 있다. 하지만 시련을 딛고 영문학자가 돼 선친인 고 장왕록 박사와 함께 펄벅의 ‘살아있는 갈대’를 번역,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비내리는 호남선’ 작곡가 박춘석

    [어떻게 지내세요] ‘비내리는 호남선’ 작곡가 박춘석

    “와병 중이지요. 틈틈이 치료를 받고 있지만 썩 차도가 있는 편이 아닙니다.” 가요계의 거목 박춘석(본명 박의병·75)씨는 11년째 병마와 외롭게 싸우고 있다.20대 젊은이들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가수 이미자를 키워낸 작곡가로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같다. 현재 박씨가 사는 곳은 서울 송파구 잠실동 20평짜리 주공아파트.24시간 간병인에 의지한 채 지낸다. 같은 작곡가이자 박씨의 동생인 박금석(73)씨가 바로 옆집에 살면서 주변을 관리하고 있다. 박금석씨는 전화통화에서 “친한 지인의 얼굴조차 못알아볼 정도이기 때문에 인터뷰는 불가능하다.”면서 “형님은 일주일에 두번씩 현대아산병원 재활의학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다리에 보조기계를 끼고 1시간30분 동안 걷기 운동을 한다는 것. 4년전에는 폐렴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다행스럽게 극복했다. 하지만 뇌졸중의 후유증은 여전하다. 또한 투병생활이 힘들고 안타깝다고 부연했다. 박금석씨는 “(형님의)저작권료로 병원비 내고 한달 생활비를 겨우 쓰고 있다.”면서 “요새는 병문안차 찾아오는 동료 작곡가나 가수들이 거의 없다.”고 쓸쓸한 처지를 대신 말했다. 박춘석씨가 평소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무엇이냐는 물음에 박금석씨는 “이미자의 ‘노래는 나의 인생’을 작곡하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쓰러졌다.”면서 “다 아끼는 곡들이지만 ‘가을을 남기고 산 사랑’이나 ‘가시나무 새’도 평소 애착이 많았다.”고 전했다. 박춘석은 ‘살아있는 트로트의 전설’로 평가받는다. 특유의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2700곡을 발표, 고 길옥윤씨와 더불어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어릴 적 고무 공장을 하는 아버지 덕에 피아노와 오르간 앞에 앉아 자유자재로 화음을 생산해내기도 했다. 경기중학 5학년(고교 2년)인 1948년 당시 서울대에 다니던 길옥윤씨와 만나 음악활동을 함께 했다. 데뷔곡은 최양숙이 부른 ‘황혼의 엘레지’이다. ‘비내리는 호남선’은 손인호가 부른 공전의 히트곡.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 ‘기러기 아빠’ ,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패티김의 ‘초우’ 등 다양한 노래풍을 만들어낸 작곡 천재이다. 김문기자 km@seoul.co.kr ‘어떻게 지내세요’ 는 독자와 함께합니다. 각계 명사는 물론 한때 스타였던 인물, 화제를 뿌렸던 사건 속 주인공들의 근황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추천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연락처 : km@seoul.co.kr)
  • 절망과 희망의 경계에서 본 빛

    “절망 속에 고통스럽다고 오늘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내일은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오지요.” 제주도에서 7년째 병마와 싸우는 사진작가 김영갑(48)씨. 사진수필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요즘에는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생명의 자연치유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그가 ‘내가 본 이어도1, 용눈이 오름’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서울 중구 태평로1가 서울갤러리·10∼15일)을 열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투병으로 전시회에 참석하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여러 차례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몸이 불편해 말도 할 수 없다는 똑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김씨의 측근인 서양화가 임현자씨는 “전화 통화조차 힘들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누워 지내고 있다.”고 요즘의 상황을 전했다. 아울러 김씨의 최근 심정이 담긴 글을 전달했다. 김씨는 이 글에서 “어두워지면 직원들이 모두 돌아가고, 혼자 있다 보면 진통이 심해지고 잡생각에 시달린다.”면서 “카메라를 메고 동서남북 정신없이 떠돌던 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해진다.”고 토로했다. 아울러 “삶의 마지막 고지까지 내몰려 절망과 희망의 경계를 오락가락했다. 체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빛이 보인다.”면서 “이제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오늘이 소중하다.”고 투병상황을 전했다. 또한 그는 “제주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상상속의 섬 이어도 때문이었다.”면서 “이어도는 제주사람의 삶과 희망이었지만 이제는 이어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이같은 이유에 대해 “드넓은 방목장은 골프장으로 변했고 아름다운 들녘은 리조트와 펜션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그가 직접 쓴 최근의 일상에 대한 글(발췌). ‘육신의 움직임이 둔해질수록 활동반경이 좁아져 방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손의 움직임이 약해져 책장을 넘기거나 글을 쓸 수도 없다. 의자에 앉아 있기도 힘에 부친 날은 사람들과 만날 수도 없다. 혀가 꼬여서 어눌해진 발음 때문에 전화 통화도 어렵다. 혼자 지내는 하루는 느리고 자루하다. 일상은 단순하고 탄력이 없다. 방안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다. 눈을 뜨면 천장과 벽만 보인다. 장애를 가진 내 육신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지평선과 수평선이 보인다.(중략)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어 좋다.(중략)20년 동안 오류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도 모르면서 두세 개 욕심을 부렸다. 중산간 오름 도두를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하겠다는 조급함에 허둥댔다. 침대에 누워 지내지 않았다면 그같은 과오를 범했을 것이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올해부터 암환자 가정방문 관리

    올해부터 가정에서 투병중인 암 환자들도 방문보건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보건복지부는 10일 현재의 방문보건사업 대상을 재가(在家) 암환자까지 확대키로 하고 이에 대한 서비스 내용과 수준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재가 암환자 관리사업’을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이를 위해 올해 12억 2000만원의 예산을 편성, 보건소 암예방관리사업에 투입할 방침이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위안부 피해 김분선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을 안고 살아온 김분선 할머니가 10일 오후 4시45분 별세했다.84세. 1922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5세이던 1937년 고무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인을 따라 나섰다가 만주 봉천을 거쳐 타이완 신지쿠와 필리핀 마닐라 등지로 끌려다니며 7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1944년 귀국해 대구에서 독신으로 지내다 지난해 여름 방광염과 폐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한데이, 아가야.”라며 밝은 웃음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시신은 대구 중구 수동 곽병원 영안실에 안치됐으며, 경북 칠곡 공원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발인은 12일 오전 9시.
  • 가수 길은정 어제 장례식

    가수 길은정 어제 장례식

    “나는 ‘록시’에서나 다른 공연 때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함께 무대에 서면 반드시 그 파란색 기타를 메고 파랑보다 더 싱그럽게 연주하고 노래하리라 마음먹었다.…나는 걸을 수 없어졌고 휠체어에서만 생활할 수밖에 없어졌다.…무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지난 7일 직장암으로 타계한 가수 길은정이 마지막 일기를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9일 삼성 서울병원을 떠난 길씨의 운구는 서울 여의도를 거쳐 경기도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한 뒤 일산 청아공원에서 추모식을 연 후 안치됐다. 길씨는 유언에 따라 수의 대신 지난 97년 KBS TV ‘빅쇼’ 무대에서 입었던 미색 드레스를 입고 화장됐다. 운구 행렬 맨 앞에는 오빠 길연하씨가 영정을 들었고, 길씨가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노래 하나 추억 둘’에서 ‘라이브 우체통’ 코너를 함께 진행했던 우종민씨와 팬클럽 회원, 후배 가수들이 영구를 들고 그 뒤를 이었다. 암으로 투병하던 길씨는 타계하기 직전까지 ‘노래 하나 추억 둘’ 방송을 진행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길…” 인터넷에는 길씨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이 넘쳐났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장애 딛고 취직했다 좋아했는데…”

    “얼마나 뜨거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내 아들아….” 지난 8일 오전 6시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학산리 장갑제조공장인 시온글러브에서 발생한 화재로 숨진 장애인들은 정신지체라는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생활해온 것으로 밝혀져 주위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있다. 장애인 80여명을 고용하고 있는 시온글러브에서 발생한 불은 기숙사에서 잠자던 장애인 근로자 4명을 숨지게 하고 5억여원(소방서 추산)의 재산피해를 낸 뒤 2시간 만에 꺼졌다. ●안타까운 사연들 이동열(26)씨의 어머니 김모(51)씨는 형체도 알 수 없이 타버린 아들의 시신을 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며 통곡했다. 김씨는 “동열이는 강릉전문대를 졸업한 뒤 지난 2003년 2월 이 회사에 입사했다.”며 “2주에 한 번 집에 왔는데 얼마 전부터 차비를 아끼기 위해 설날 연휴까지 공장 기숙사에서 주말을 보낸다고 연락이 왔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50여만원에 불과한 월급이었지만 꼬박꼬박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착하고 성실한 아들이었다.”며 “기숙사에 사감이라도 한 명 있었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애통해했다. 이재훈(22)씨의 어머니 장모(49)씨는 “말이 어둔하지만 착한 아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들은 지난 2002년 포항의 고교를 졸업한 뒤 시온글러브에 취직했다.”며 “얼마 안 되는 월급이지만 안정된 일자리를 찾았다며 좋아했다.”고 눈물을 훔쳤다. 장씨는 “기숙사가 방화와 대피시설을 제대로 갖췄으면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 근로자들의 맏형 역할을 해왔던 최상재(38)씨도 변을 당했다. 유윤성(29)씨는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최 과장은 “유씨는 월급 대부분을 부친 약값으로 송금하는 효자였다.”고 말했다. ●화재발생 이날 오전 6시 발생한 불은 공장 2층에 있던 기숙사로 옮겨붙어 유씨 등 장애인 근로자 4명이 불에 타 숨졌다. 김모(34)씨 등 5명은 대피 과정에서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화재 당시 기숙사에는 14명의 장애인이 자고 있었으며,5명은 무사히 대피했다. 불은 2층짜리 공장 건물 내부 3900여㎡와 기계 등을 태워, 소방서는 5억여원의 재산피해를 낸 것으로 추산했다. 이 업체는 건물과 기계에만 47억원의 보험을 들었을 뿐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보험에 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칠곡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부고]

    ●가수 길은정 가수 길은정씨가 7일 오후 8시경 경기도 분당의 자택에서 사망했다.44세. 1984년 ‘소중한 사람’으로 가수로 데뷔해 MC와 DJ, 연기자로 폭넓은 활동을 해온 길 씨는 1996년 이후 직장암으로 투병하다 지난해 가을 골반으로 암세포가 전이되면서 끝내 세상을 떠났다. 새 앨범 ‘만파식적’을 발매한 직후인 지난해 11월에는 KBS 1TV ‘열린음악회’에 출연해 투병 중에도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러 팬들을 안타깝게 했었다. ●정동우(전 노동부 차관)씨 별세 희섭(KBS PD)씨 부친상 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8일 오전 9시 (02)3410-6916 ●송만식(자영업)경식(LG카드 이사)씨 모친상 6일 평촌 한림대성심병원, 발인 9일 오전 8시 (031)384-2464 ●소영철·영기(자영업)영식(유니콘전자통신 대표)영진(한국전산원 단장)씨 부친상 남재두(대전일보사 회장)김학렬(신광휀스 대표)씨 빙부상 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0일 오전 10시 (02)3410-6914 ●이승희(한터주식회사 사장)승숙(원자력병원 과장)씨 모친상 정창섭(경기도 행정1부지사)이석호(서울의대 교수)씨 빙모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0일 오전 7시30분 (02)3010-2236 ●이천룡(본외과의원 원장)도영(테크다임앤컴퍼니 상무)씨 모친상 양의조(양의조소아과 원장)김원섭(김원섭비뇨기과 〃)김성준(광주고검 부장검사)씨 빙모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9일 오전 8시 (02)3010-2291 ●유문승(동진산업사 대표)씨 모친상 우유철(INI스틸 전무)씨 빙모상 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0일 오전 8시30분 (02)3410-6915 ●한응수(국정홍보처 주 뉴욕홍보관)씨 부친상 6일 경기 양평 양수장례식장, 발인 8일 오전 8시 (031)775-0063 ●임영건(서광정밀 대표)창건(KBS 보도본부 취재3팀장)삼건(사업)씨 모친상 6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8일 오전 9시30분 (02)3410-6914 ●김현진(수원 성빈센트병원 교수)씨 모친상 최승언(자인건축사 대표)김갑수(서울고등법원 사무관)박성원(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씨 빙모상 7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11일 오전 8시 (02)590-2609 ●조영증(대한축구협회 파주트레이닝센터 센터장)씨 부친상 7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9일 오전 8시 (02)3010-2295 ●김봉기(우리은행 여자프로농구단 부장)씨 부친상 7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9일 오전 8시30분 (02)590-2579 ●유원상(전 대한전선 대표)씨 상배 연국(박영사 편집국장)연호(다이나믹인터내셔널 이사)연철(외교통상부 서기관)씨 모친상 안종만(박영사 대표)씨 빙모상 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0일 오전 9시 (02)3410-6927 ●김영완(사업)영만(전 동아일보 사진부장)씨 모친상 7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9일 오전 9시 (02)3410-6906
  • 루게릭병 투혼 김영갑 사진전

    루게릭병 투혼 김영갑 사진전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제주도로 내려가 20년 가까이 제주의 풍광을 담아온 사진작가 김영갑(47).6년째 루게릭병으로 투병해온 그가 투혼의 전시를 마련했다.10일부터 15일까지 서울 태평로 서울갤러리 전관에서 열리는 ‘내가 본 이어도,1 용눈이 오름’이 화제의 전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번 전시에서 김씨는 미발표작 70여점을 선보인다. 제주의 오름과 주변의 억새, 소나무숲이 어우러진 시적인 풍광을 담았다. 김씨는 근육이 마비돼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인 루게릭병으로 미라처럼 온몸이 바짝 마르고 전화조차 받기 어려운 상태. 다행히 그는 전시회에 부치는 글을 통해 “아직도 갈 길이 아득한데 중도에서 낙오했다고 모두 안타까워하지만 난 결코 멈추지 않으렵니다. 모두의 사랑과 채찍이 헛되지 않도록 삶의 열정을 잃지 않으렵니다.”라며 “이번 전시가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믿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렵니다.”라고 말했다.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섬에 살아보지 않고서는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무작정 제주에 정착해 한라산과 마라도, 노인과 해녀, 오름과 바다 등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그동안 16차례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누구를 초대한 적은 없다. 사진을 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난은 그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 동굴 같은 곳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할 정도로 제주의 삶 역시 가난 그 자체였다. 이번 전시도 재력있는 지인이 강남의 한 화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했지만 상업화랑이라는 전시공간과 자기 작품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동안 김씨를 도와온 ‘김영갑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그와 마주앉아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면서 아무쪼록 이번 서울갤러리의 전시가 작가의 마지막 전시가 되지 않길 기원하고 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98세 할머니 최고령 시신기증

    백수(白壽·99세)를 사흘 앞두고 세상을 떠난 98세 할머니가 생전 약속대로 시신을 대학에 기증, 국내 최고령 시신 기증 기록을 남겼다. 암으로 눈을 감은 남매도 암 연구를 위해 나란히 시신을 기증했다. 1907년 인천 강화군에서 태어난 고 유정심 할머니는 지난 달 28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시신을 경희대 의대 해부학 교실에 기증했다. 유 할머니는 2000년 며느리, 장손자 등 3대가 함께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사후 장기기증을 등록했었다. 전날 대구에서는 간암으로 투병하다 숨진 김중영(46·경남 거제시 장목면)씨가 시신을 대구한의대 한의과대학에 기증하기도 했다. 김씨는 2003년 위암으로 숨진 뒤 같은 대학에 시신을 기증한 여동생 영란(당시 38세)씨의 친오빠. 이들은 숨지기 전 “세상을 떠나면 시신이라도 꼭 좋은 일에 쓰였으면 좋겠다.”고 말해 왔으며 거제도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마을 오지에서 농사 일을 지으며 어렵게 살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을유년 새해소망은 입양 장애 두딸의 건강”

    “을유년 새해소망은 입양 장애 두딸의 건강”

    “엄마, 아빠, 복 많이 받으세요. 사랑해요.” 새해 아침 서울 송파구 석촌동 19평 짜리 연립주택의 김산석(51·중소건설업체 부장)씨 집에는 예지(5)·은지(4)의 재롱으로 웃음이 넘쳐 흐른다. 몸 왼쪽의 성장과 발육이 늦은 은지는 팔로 하트를 그리며 활짝 웃었다. 마음으로 낳아 사랑으로 키운 두 딸을 위해 새해도 더 힘차게 살 것이라는 소망이 가득하다. ●“입양 후 거짓말처럼 아픈 곳 나아” 부부가 입양을 결정한 것은 2000년 새해 첫 날. 대부도로 새해맞이 여행을 떠난 길, 부인 이준희(49)씨의 제안을 남편과 아들 용갑(24)씨·딸 다정(19)양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씨는 10년 동안이나 투병생활을 했다. 이씨가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1991년 과로와 스트레스로 몸에 이상이 생긴 것. 온몸이 아프고 툭하면 깊은 잠에 빠져 잘 깨어나지 못했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몰라 치료를 포기했다. 이씨는 고통을 겪으면서 “건강을 되찾는다면 불우한 처지에 있는 아기를 데려다 성심껏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생후 1개월인 예지를 입양한 것이 2000년 7월이었다. 예지가 집에 들어오면서 거짓말 처럼 이씨는 웃음을 되찾았고, 아픈 곳도 없어졌다.2001년 12월에는 생후 1개월인 은지까지 입양했다. 용갑씨와 다정양도 “동생이 생겨 너무 좋다.”며 반겼다. ●두딸 장애와 중병을 사랑과 의지로 감싸 그러나 2002년 7월 시련이 찾아왔다. 시름시름 앓던 은지가 정형외과와 소아과를 전전한 끝에 그해 11월 뇌성마비 장애 1급 판정을 받은 것. 이씨는 “당시엔 솔직히 키울 자신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낳아준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은지가 장애까지 안고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싶어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이씨는 은지를 업고 이곳 저곳 병원을 찾아다니며 물리치료를 받았다. 치료비만 수백만원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해 봄 예지마저 선천성 피부병인 각화증 진단을 받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 딸의 병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럴 수록 더 잘 키워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부부의 정성이 통했는지 은지는 32개월째 되던 지난해 8월 처음으로 “엄마 물 주세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씨는 “한가닥 희망이었다.”고 돌아봤다. 게다가 장애 1급 판정을 받은 지 2년 만인 지난 달 29일에는 장애 3급으로 호전됐다. 왼쪽 다리가 조금 짧아 보조기를 착용한 것을 빼고는 잘 걷고 웬만한 의사표현도 무리없이 할 수 있는 만큼 좋아진 것이다. ●새해엔 건강했으면 김씨 가족은 예지와 은지의 입양으로 또다른 희망을 얻었다. 김씨는 “각박한 세상에 집에 오면 토끼같은 두 딸이 맞아주니 얼마나 행복하냐.”며 흐뭇해했다. 얼마 전 예지가 “아빠는 할머니가, 엄마는 외할머니가 낳았는데, 예지는 다른 엄마가 낳은 거지?”라고 물었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하지만 부부는 어릴 때부터 입양을 사실대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거리낌없이 설명해 주고 있다. 부부는 “입양 전에는 조금 불안했지만 배 아파 낳은 자식과 똑같다.”면서 “마음을 열고 조금만 용기를 내면 큰 행복이 기다린다.”고 말했다. 김씨 가족의 새해 소망은 건강이다. 예지의 각화증이 번지지 않고 은지의 상태가 좋아진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김씨는 “큰 욕심 없이 매일매일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싶다.”면서 “큰아들의 군입대, 딸의 입시, 은지의 병 때문에 한번도 같이 못한 여섯 식구의 가족 여행을 올해는 꼭 해보고 싶다.”고 소박한 새해 소망을 밝혔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빛이 스며든 자리/우승미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빛이 스며든 자리/우승미

    눈을 떴다. 문밖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암실에 있으면 의식도 시간도 모두 멎었다. 이곳에 온 후 나는 주로 암실에서 지냈다. 둥글게 몸을 말고 바닥에 누워, 불필요한 감각이 퇴화된 심해의 생물처럼 눈과 귀를 닫았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촉각이었다. 밀폐된 공간의 공기는 아래로 가라앉았다. 공기는 욕조 속의 더운 물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내 몸을 감쌌다. 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 경쾌한 리듬의 허밍이었다. 멜로디가 귀에 익었다. 가게 안으로 누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힘겹게 팔을 들어 몸 마디마디를 주물렀다. 피가 돌면서 눌려있었던 몸 왼쪽이 저려왔다. 암실 문을 열자 빛이 쏟아졌다. 손그늘을 만들고 부신 눈을 떴다. 딱딱한 알루미늄 가방 위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햇빛 속에 앉아있는 여자는 스스로 빛나고 있는 빛 무더기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주변을 감싸고 있던 빛이 스러지면서 여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자는 얼굴빛이 유달리 희었다. 여자가 내 쪽으로 팔을 뻗어 손을 내밀었다. 여자의 팔은 윤곽이 희미했다. 홀로그램의 영상처럼 반쯤은 투명해보였다. 악수를 청하는 것인지 자신을 일으켜 달라는 것인지 몰라 잠시 주춤거리다가 여자의 손을 맞잡았다. 여자는 손아귀 깊숙이 손을 넣고 힘차게 흔들었다. 자칫하면 못 찾고 그냥 돌아갈 뻔했어요. 초행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도시에서 상가가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고 한다. 다리 건너편으로 버스터미널이 이전하면서 그쪽에 신시가지가 형성된 후로는 죽은 골목이 돼버렸다. 사진관은 옛 번화가의 뒷골목에 위치했다. 원래는 주택가였는데, 주택을 허물고 상업용 건물을 급조해 형성된 상가였다. 지금은 가게를 연 곳이 거의 없어서 대부분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이곳은 구식 양옥의 1층을 개조해 가게로 쓰던 것이어서 밖에서 보면 가정집처럼 보였다. 오기 전에 부동산에 들렀어요. 한 달 전에 이미 매매되었다고 하더군요. 혹시나 싶어 물어보는 건데 저에게 세 놓을 생각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임대를 목적으로 산 집이 아니었다. 여자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중고로 구입한 17분 컬러 현상기가 한 구석에 놓여있을 뿐,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진관을 하려고 산 건물이지만 한 달째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암실에서 보냈다. 배가 고프면 끼니를 때우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여자는 얼룩져 더러워진 벽을 따라 걷다가 쪼그리고 앉아 바닥의 나뭇결을 들여다보았다. 곳곳의 정경들을 기억 속에 새겨두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세밀하게 보았다. 여긴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오래전에 아버지가 여기서 사진관을 했어요. 위층에 살림을 차리고요. 여자의 나이를 가늠해봤다. 캐주얼한 옷차림 때문에 언뜻 보면 어려보였지만 눈가에 옅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나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아래쯤일 것이다. 여기서 함께 지내게 해주세요. 처음엔 그냥 둘러보고만 가려고 했어요. 막상 와보니 여기 있고 싶어지는군요. 세를 놓는 건 싫다고 하셨죠? 대신 일을 하겠어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가게를 열면 가게일도 도와드릴게요. 여자는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말끄러미 보았다. 여자의 눈빛 속에는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과 거절할 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한데 섞여 있었다. 어떤 말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있을 때 집안일과 병간을 도맡았던 아주머니와 6개월여를 함께 지내본 적은 있지만, 나는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여자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점.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와 그곳에 살고 싶어 한다면 무언가 절박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어딘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가 태어났다는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투병 중이었던 어머니와 묏자리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어머니는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도로의 모퉁이에 나 있는 골목을 가리켰다. ―저기가 느이 아버지가 사진관을 하던 자리다. 나는 자동차 속도를 줄이며 어머니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린 골목은 동굴의 입구처럼 어두웠다. 가로수에 가려 골목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무성한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음산한 소리가 났다. ―예전에는 이 길이 번화가였지. 세가 워낙에 비싸서 느이 아버지가 저 골목 끝에 있는 집을 사서 아래층을 가게로 개조했다.2층에다 신접살림을 차렸고, 너도 거기서 낳았어.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저기서 오래 살았을 게야. 그때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 골목 어름을 언뜻 보고 지나쳤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진관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안으로 성큼 들어서고 싶어졌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생전의 아버지처럼 사진관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내 머릿속은 어두운 골목으로 가득 찼다. 그곳에 가면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의 유순한 흐름을 따라 유유히 나의 생을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49재를 치르고 어머니의 무덤에 왔다가 이곳에 들렀다. 이곳은 비어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는지 뽀얀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무성한 것은 지붕까지 뻗어있는 담쟁이덩굴뿐이었다. 근처의 부동산을 찾아가 가격을 흥정하지 않고 곧장 계약서를 썼다. 다니던 잡지사에 사직서를 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내 사진기자로 일하던 직장이었다. 지구 곳곳의 풍경을 주제로 하는, 사진 중심의 다큐멘터리 잡지였다. 사직서는 그날로 수리되었다. 잡지는 상업성이 강한 잡지들을 출간하는 모(母)기업의 품격을 위해 창간된 것이었다. 전문적인 사진이 실리는 잡지를 다수의 대중은 외면했다. 독자가 많지 않으니 당연 광고도 들어오지 않았다. 경기가 침체되자 모기업은 서서히 경영에 압력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사직서를 내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권고사직을 당할 형편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는 동료들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내가 사무실 문을 나서자 동료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의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통장으로 입금된 퇴직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아파트를 내놓았지만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보험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내려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남긴 상자에는 어머니의 결혼 예물과 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세 장의 보험증서가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나는 보험증서를 쥐고 오열했다. 오십 몇 년의 삶의 흔적이라기에는 세 장의 종이는 너무도 가볍고 쓸쓸한 것이었다. 2층의 방을 쓰세요. 저는 여기 암실에서 지내면 되니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해선 안 됩니다. 어려운 조건은 아니로군요. 여자는 알루미늄 가방을 메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자연스럽게 밟고 올라갔다.2층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반으로 접히는 휴대용 침대를 암실에 갖다놓고, 내 물건들은 거실에 놓았다. 여자가 식사준비를 했다. 여자는 냉장고 뒤쪽 구석에 쑤셔 넣어두었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여자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자기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처럼 양념통이나 필요한 재료가 있는 곳을 단번에 찾아냈다. 무언가 도와야 할 것 같아서 주위를 서성대던 나는 머쓱해져서 1층으로 내려왔다. 여자가 차린 상은 정갈했다. 냉장고에는 맥주와 인스턴트식품만 가득했었는데, 여자가 차린 밥상에는 찌개에 윤기가 흐르는 밑반찬까지 고루 갖춰져 있었다. 여자의 음식은 어머니가 해주던 것과 맛이 흡사했다. 이 정도면 합격인가요? 여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싱긋 웃었다. 환한 빛이 얼굴 가득 퍼졌다. 이곳에 머무는 대가로는 좀 과분하군요.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여자는 늘 조용히 움직였다. 내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나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암실에서 보냈다. 여자는 시간에 맞춰 요리를 했다. 거실로 내어 놓은 옷장 속에는 바싹 마른 옷가지들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여자가 내게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거칠게 그린 가게 구조도와 비용에 관한 세목이 적혀 있었다. 사진관을 열었으면 해요. 여자가 건넨 종이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종이 몇 장으로는 가게의 모습이 요연하게 잡히지 않았지만 내 생각보다는 훨씬 구체적이었다. 우선 가게에 있는 17분 현상기는 되팔았으면 좋겠어요. 오랫동안 사진과 관련된 일을 해왔지만 사진관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증명사진이나 간단한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작은 스튜디오를 갖추고, 현상·인화 서비스를 하면 되겠다 싶어 17분 컬러 현상기를 중고로 구입한 것이었다. 여자는 내 옆으로 바투 다가와 앉아 손끝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계획을 설명했다. 암실은 공간이 꽤 넓으니까 두 개로 나누었으면 해요. 조명기기와 카메라 장비를 구입해서 작은 스튜디오를 만들고요. 표준화된 QSS방식으로는 사진을 기록물로만 여기는 사람들의 기대만 충족시킬 수 있죠.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돼서 현상만으로는 가게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요. 암실을 개방해서 수작업을 할 수 있게 하고, 차나 맥주를 마시며 자유롭게 지식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곳, 제가 꿈꾸고 있던 사진관이에요. 암실에서 나와 보니 벽에 호두나무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가게 구석에 있던 자동 현상기는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무릎을 대고 엎드린 채 기름걸레로 바닥의 나무를 닦고 있었다. 여자의 손이 닿는 곳마다 켜켜이 나무의 결이 살아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암실 공사하러 인부들이 올 거예요. 가벽을 세우는 거라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조금 시끄러울 거예요. 어디 잠깐 다녀오는 건 어때요? 카메라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이곳에 내려온 후로는 첫 외출이었다. 나오기는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종착지를 알 수 없는 시내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SLR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내내 들고 다녔던 것인데, 검은 몸체의 카메라가 낯설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카메라가 이물스러워 보였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버스에서 내려 몇 컷의 사진을 찍었다. 내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이국의 풍경처럼 주위의 모든 것이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풀조차 자라지 않는 들판에 앉아 서서히 땅에 내리고 있는 어둠을 응시했다. 구릉처럼 낮은 산의 언저리에는 스러진 햇빛이 모여 검붉은 노을로 타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도 차도 없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사물의 윤곽이 어둠에 검게 물들어 보이지 않았다. 길을 따라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피로하지 않았다. 끼니를 걸렀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몸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불현듯 여자가 몹시 보고 싶어졌다. 가게에 걸려 있는 간판에 불이 환했다. 간판에는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암실카페 - 빛이 스며든 자리’라고 씌어 있었다. 공사가 끝났는지 가게 안은 조용했다. 출입문을 열자 직사각의 탁자 세 개가 보였다. 한쪽 면을 벽에 붙인 탁자에는 어림잡아 20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암실과 스튜디오 사이의 자투리 공간에는 주방이 들어섰다. 주방은 음료와 간단한 안주를 만들 수 있는 바bar 형태였다. 주방 옆에는 냉장고가 놓여 있었다. 여닫이 유리문이 달린 업소용 냉장고 안에는 캔음료와 몇 종류의 맥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암실 옆의 공간에는 몇 개의 조명기구가 놓여있는 작은 스튜디오가 꾸며졌다. 스튜디오를 제외한 가게의 정경은 카페에 가까웠다. 늦은 시간에 맥주를 마시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겠군요. 사진관보다는 호프집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죠. 하지만 저는 이 이름이 썩 마음에 들어요. 어두운 방에 스며든 빛의 흔적, 그게 바로 사진이니까요. 여자는 벽의 진열장을 닦고 있었다. 이곳에 카메라를 진열해 놓았으면 해요. 예전에는 사진관에 카메라 진열대가 있었지요. 집집이 가정용 카메라를 구비해놓기 이전에는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대여했으니까요. 가방 속에 묵혀두는 것보단 가게로 내오면 오래된 사진관 이미지도 풍기고, 손님들에게 쉽게 접할 수 없는 클래식 카메라도 보여주고 좋을 것 같은데요. 진열대는 애초부터 카메라를 놓으려고 만든 것 같았다. 천장에 진열대를 비추는 작은 조명이 있었다. 나무판으로 만든 선반 형식의 진열대에는 유리문이 달려 있었는데, 먼지가 새어들지 않도록 틈새에 실리콘으로 패킹 처리가 되어 있었다. 2층에서 카메라들을 가져왔다. 케이스에 넣어 상자에 보관해왔지만, 오랫동안 손을 타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사진기자 생활을 하면서 클래식 카메라를 사용할 기회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오토포커스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부착해 사용했고, 얼마 전까지는 디지털 카메라를 썼다. 내게는 꽤 많은 카메라가 있었다. 사진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보유하게 마련이었다. 클래식 카메라는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카메라는 내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되던 해 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내게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내게 그리움 따위의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사진첩에 꽂혀있는 사진이나 카메라처럼 정물적인 것이었다. 어머니는 단 한 대의 카메라도 팔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진을 찍지는 않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카메라를 꺼내 닦았다. 그 일은 어머니에게 지난 일을 추억하게 하는 사진첩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카메라를 닦으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듣기 싫었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되풀이되는 추억은, 흐려지지 않는 아버지라는 존재의 그림자는, 사막에 묻힌 수천 년 전의 미라처럼 영원히 썩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어머, 이건 콘탁스II네요. 여자의 음성이 높아졌다.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기 전에는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어요. 처음 사진을 배울 때부터 이걸 썼어요. 사진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주로 갖고 있는 카메라는 니콘FM2였다. 가격에 비해 성능이 꽤 괜찮은 제품이었다. 간혹 클래식 기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라이카를 들고 다녔다. 콘탁스를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 카메라는 아버지가 월남전에서 돌아올 때 구입한 것이라 들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이 카메라의 각별한 내력을 말했으나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가 2층으로 올라가 알루미늄 가방을 들고 내려왔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앉아있던 가방이었다. 여자가 가방을 열었다. 거기에는 콘탁스와 똑같은 디자인의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카메라 앞면에는 키릴문자로 киев라는 로고가 각인되어 있었다. 이 카메라는 1949년에 생산된 키예프 카메라예요. 생산지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지방이지만 부품은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왔지요.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소비에트는 전쟁배상금으로 콘탁스 카메라의 메이커인 자이스 이콘(Zeiss Ikon)을 요구했어요. 공장의 모든 부품과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우크라이나로 이송됐지요. 파견된 드레스덴의 노동자들이 자이스 이콘의 부품을 조립해서 만들었으니 이 카메라는 콘탁스II와 완전히 똑같은 쌍둥이인 셈이지요. 여자는 수건으로 자신의 카메라를 닦았다. 카메라를 만지는 여자의 손놀림은 병든 육친의 몸을 닦아주는 손길처럼 조심스럽고 애틋해 보였다. 이 카메라는 제게 존재증명과도 같은 거예요. 아버지가 남기신 유일한 유품이거든요.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했었지요. 월남에서 번 돈으로 이 카메라를 샀어요. 지금이야 회사원의 한 달 월급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 돈이면 읍내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해요. 어렵게 구입한 카메라지요. 아버지가 월남에서 부쳐온 돈을 큰아버지가 들고나갔었다니까요. 장사를 해보겠다고요. 그 사실을 안 어머니가 읍내의 모든 술집을 뒤졌대요. 동생이 목숨 걸고 번 돈인데 술맛이 나더냐고 꾸짖어 모셔왔대요. 정혼한 사이긴 했지만 결혼 전이고 손위 시숙인데, 어머니는 무슨 용기로 그랬을까요. 큰아버지는 하는 일 없이 술과 여자로 평생을 보냈어요. 나쁜 분은 아니에요. 어느 집안에나 그런 무능하고 호방한 큰아들이 있는 법이잖아요. 그때 만약 어머니가 큰아버지를 말리지 못했더라면 제게 유품 같은 건 남지 않았겠지요. 지금은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저 혼자니까요. 이 카메라 외에는 제 존재를 증명해줄 무엇도 남지 않았어요. 같은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일까. 나와 비슷한 삶의 내력을 갖고 있는 이 여자가 오래전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혈육처럼 가깝고도 멀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이 사진관으로 온 것도 여자가 카메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나는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그 막연한 불안감은, 이 세상에 나의 존재를 증명해 줄 무엇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회귀성 어류처럼 내가 태어난 이 사진관으로 흘러들었던 것인지도. 사진관에는 손님이 없었다. 몇 차례 늦은 시각에 술에 취한 사람들이 들어와 맥주를 찾았다. 여자는 암실을 이용할 수 있는 사진관이라고 가게에 대해 설명한 후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첫 손님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자애였다. 주민등록증에 쓸 증명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했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로 즉석에서 사진을 올린다고 말했다. 여자애는 알고 있다며 한 음절씩 힘주어 말했다. “꼭 필름사진이어야 해요.” 여자애는 탁자에 앉았다. 움직일 때마다 유난히 검은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여자애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주었다. 커피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여자애가 중얼거리며 코코아를 홀짝거렸다. 여자애는 기름종이로 이마와 콧등의 유분을 닦고, 콤팩트 퍼프로 꼭꼭 눌렀다. “왜 꼭 필름사진이어야 해요?” “이건 증명사진이니까요. 처음 발급받는 주민등록증이거든요. 원판이 있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사진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주민등록증으로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숫자와 지명과 이름과 125분의 1초 동안의 모습과 소속된 나라 외에 또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증명이라는 말이 하나의 역설처럼 느껴졌다. 증명이 목적인 플라스틱 카드는 정작 중요한 것은 증명할 수 없었다. “저는 디지털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요. 디지털 사진은 원판이 없잖아요. 디지털 사진은 곧바로 확인할 수 있고, 삭제하는 것도 복사도 고치는 것도 쉽지만, 어쩐지 그것들은 떠도는 이미지들처럼 느껴져요. 상이 음각으로 새겨진 필름의 원판은 이를테면 이미지가 깃드는 집 같은 거죠.” 여자애의 오른쪽 눈 아래에 점이 있었다. 작고 까맣고 윤기가 도는 점이었다. 나는 보정을 원한다면 점을 없애주겠다고 했다. 여자애는 고개를 저었다. “눈 아래에 있는 점은 눈물점이라고 어른들이 빼라는 말을 많이 해요. 하지만 저는 이 점이 좋아요. 점도 제 몸의 일부니까요. 사람들은 이 점 때문에 저를 쉽게 기억해요. 아마 아저씨도 그럴걸요.” “사진은 내일 찾으러 와요. 여기서 직접 현상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려요.” 사진을 담아두는 봉투를 내밀었다. 여자애는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자신의 이름을 썼다. 동글동글한 귀여운 글씨였다. 여자애는 이현아라는 이름 옆에 한쪽이 지나치게 부푼 하트 문양을 그려 넣고, 내게 찡긋 윙크를 했다. 여자애가 지갑을 꺼냈다. 첫 손님이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여기 암실도 이용할 수 있나요?” “암실에서 직접 현상할 수도 있고, 현상을 맡길 수도 있어요. 스튜디오도 사용할 수 있고요.” “좋은데요.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곧 손님이 늘어날 거예요.” 암실에 누워 있다가 몹시 갈증이 나 밖으로 나갔다. 진열대의 조명등만 켜져 있었다. 여자는 탁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들고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암실은 깊은 바다 속 같아요. 햇빛이 닿지 않아 어둡고 추운 곳. 암실에서는 눈을 감아도 떠도 온통 농밀한 어둠뿐이에요. 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무서워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거기에 있으면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그런데 당신은 왜 그곳에 있나요? 거기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요? 두려움, 고독, 침묵, 약간의 위안, 그리고 나. 암실에 누워 있으면 또 다른 내가 보여요. 조금은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예요. 수면에 비친 모습처럼 좌우가 바뀐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해요. 암실에 누워있는 나와 나를 응시하는 나 중에 진짜 나는 누구일까. 나는 존재하는 걸까. 당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주변이죠. 당신이 존재할 수 있는 건 당신을 보고 있는 내가 있기 때문이에요. 불빛을 등지고 있어서 여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여자가 조금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주 앉아있는 여자의 모습이 거울 속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거울에 비친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진 반물질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빅뱅 직후 물질과 반물질이 각각 우주와 반우주를 형성했으며, 이 둘은 서로 맹렬한 속도로 멀어져갔다고 추측했다. 반물질은 물질을 만나는 순간 백만 분의 1초보다 빠른 속도로 상쇄되기 때문에 물질계에 있는 우리들은 반물질을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맥주잔을 쥐고 있는 여자의 손을 잡고 싶었다. 여자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었다. 내 손이 여자에게 닿는 순간, 물질을 만난 반물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사진관에 온 두 번째 손님은 가게로 들어와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잡은 손을 경쾌하게 흔들었다. 그는 이현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눈에 그가 이현아의 오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현아의 증명사진이 든 봉투를 건넸다. “현아 오빤 거 어떻게 아셨어요? 신기하네. 남매지만 닮은 데가 별로 없거든요.” 굳이 닮았다고 한다면 이미지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이미지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아가 다녀가고 난 후 그 다음 손님이 현재였기 때문이었다. 곧 손님이 늘어날 거라던 현아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예요, 형.” 그는 가방에서 세 통의 필름을 꺼냈다.‘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아마추어 사진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론으로만 접했던 현상·인화 작업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두 개의 필름을 그에게 다시 건넸다. 외형발색 필름이었다. 외형발색 필름은 유제층 안에 발색제가 없어서 필름제조회사에서만 현상할 수 있었다. 암실 수납장 안에는 약품부터 액정에 불이 들어오는 디지털시계, 라텍스 장갑까지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현재가 알고 있는 것은 암실작업의 일반적 과정뿐이었다. “암실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말 놔요, 형.” 현재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암실 작업도 사진 찍는 것과 같아.” 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말을 놓는 편이 아니었다. 막상 말을 놓고 보니 현재가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서글서글한 눈매 때문인지, 웃음기 많은 얼굴 때문인지 현재에게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느껴지는 거리감이 없었다. 세이프라이트를 켜자 현재가 암실 문을 닫았다. 작업을 하며 가능한 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현재는 손바닥만 한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열심히 이론공부를 해도 직접 찍어보기 전에는 실력이 늘지 않잖아. 암실작업도 그래. 온도와 시간을 지킨다고 발색현상이 잘 되는 건 아냐. 날씨나 환경에 따라 그날그날의 기온과 습도가 다르니까. 적절한 온도와 시간은 암기가 아니라 감이야. 감을 잡으려면 결국 많이 해보는 수밖에 없어.” 현재는 인화된 사진을 보며 뿌듯해 했다. 그의 사진은 대부분 인물사진이었다. 수준급인 사진도 더러 있었지만 사진의 노출이 대부분 오버돼 있었다. 현재는 다음 동호회 모임은 이곳에서 갖기로 했다며, 이제부터는 손님이 꽤 늘어날 거라고 했다. 동호회 사람들은 현재와 비슷했다. 제일 먼저 현재가 현아와 함께 왔고,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암실에서 작업을 하거나 각자의 사진을 돌려보았고, 더러는 일찌감치 술판을 벌이는 치들도 있었다. 열 명 남짓 되는 인원이었다. 그들은 나이도 직업도 각색인 듯 보였다. 그들은 내 이름을 부르거나 현재처럼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격 없이 대했다. 그들은 원래는 풍경사진을 주로 찍는,‘미라지Mirage’라는 비교적 큰 규모의 동호회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이 자연 속에 있다고 믿었던 그들은 시야를 좁혔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내게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 물었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밤늦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한 잔 더 해야겠다며 여관방을 잡아 나갔다. 현재가 가게 정리하는 것을 돕겠다고 했지만, 돌려보냈다. 가게 문을 닫고 어질러진 탁자를 그대로 놓아둔 채 암실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신데다가 몸이 몹시 피곤했다. 구석에 접어놓은 침대를 펼치자마자 나는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문소리에 잠이 깼다. 열린 문 사이로 새어든 달빛이 바닥을 은백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는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내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여자는 내 뺨을 감싸 쥐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 사이로 여자의 혀가 들어왔다. 여자는 혀로 내 잇바디를 훑었다. 여자의 혀는 복족류의 속살처럼 차고 부드럽고 미끈거렸다. 가슴이 더워졌다. 나는 팔로 여자의 등허리를 감고 입을 열어 여자의 혀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잠이 든 체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뜨거워진 가슴을 달랬다. 여자는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걸어 나가 문을 닫았다. 늦게야 일어나 암실에서 나왔다. 여자의 둥근 등이 보였다. 여자는 암실을 등지고 탁자에 앉아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가게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여자는 내가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몸속의 색소가 다 바랜 것처럼 여자의 얼굴빛이 창백했다. 당신의 사진에는 색이 없군요. 하나같이 흑백사진뿐이에요. 게다가 당신의 사진은 너무 어두워요. 노출이 부족해요. 노출이 모두 -2스톱이군요. 글쎄요. 저는 적정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슬라이드 필름을 쓸 때에는 노출이 오버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배웠거든요. 카메라는 어두운 방이죠. 무언가를 찍기 위해서는 빛이 들어와야 해요. 조리개를 조금만 더 열고 셔터 속도를 늦춰요. 햇빛 때문일까. 뒷면에 양면테이프를 붙인 사진을 스크랩하는 여자의 손끝이 투명하게 보였다. 물에 떠 있는 한천질의 자포생물처럼 손가락 아래로 사진이 흐릿하게 비쳤다. 여자의 얼굴은 창백한 것이 아니었다. 눈과 코와 입술의 윤곽이 희미해져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여자를 봤다.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을 감았다 뜬 사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탁자를 보자 여자는 여전히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여자를 보자 여자는 싱긋 웃었다. 여자는 자주 사라졌다. 몇 시간 또는 며칠씩 사라지기도 했다. 돌아온 여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집안일을 하고 가게를 돌봤다. 손님이 점차 늘어서 가게일이 바빴다. 손님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자가 어딘가로 떠난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가게 안에 있던 여자가 어느새 연기처럼 희미해져 실루엣으로만 넘늘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여자가 완전히 사라지던 날, 현재가 현아와 함께 찾아와 라이트 페인팅 작업을 했다. 사진 관련 잡지에서 루미노그램(Luminogram,光跡사진)에 대한 글을 보고 실제로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끝에 불이 들어오는 펜 모양의 라이트를 들고 온 현아는 이민 간 친구에게 라이트 페인팅으로 편지를 써서 보낼 거라며 몹시 들떠 있었다. 라이트 페인팅은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비교적 단순한 작업이었다. 암실에서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시키고 릴리즈를 연결한 후 세이프라이트를 껐다. 셔터 속도를 Blub에 놓았다. 현아는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읽으며 글씨를 썼다. 제2노출에서 셔터를 Blub에 맞추고 1 스톱 부족의 노출에서 스트로보를 조사하면 글씨를 쓰고 있는 연출자의 모습이 사진에 나온다. 현아의 작업이 끝난 후 여자가 펜라이트를 들었다. 여자는 허공에 대고 천천히 글씨를 썼다. 제2노출에서 스트로보를 켜자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떠있던 라이트펜이 따닥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님들은 여전히 가게로 찾아와 암실을 사용하고 차를 마시고 더러 늦게까지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누구도 여자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여자가 사라진 후로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암실로 들어갔다. 암실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나는 무기력하게 어둠 속에 누워있었다. 나는 스스로 어둠 속에 갇혔다. 시간은 여전히 흘렀고, 어두울수록 더욱 명징해지는 의식은 여자에 대한 기억을 쫓고 있었다. 문밖에서 경쾌한 멜로디의 허밍이 들려왔다. 처음 내게로 왔던 날처럼 빛에 둘러싸인 채 여자가 앉아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문을 열었다. 가게 안은 어두웠고 텅 비어 있었다. 여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외로움이 불러낸 환영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자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우주의 반대편에서 달려온 또 다른 나는 아니었을까. 내가 마음을 열려는 순간 물질을 만난 반물질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현상한 라이트 페인팅 사진을 꺼내보았다. 필름의 마지막 장에는 서정주의 시구가 씌어 있었다. 물 위에 뜬 유성물감처럼 글씨의 획이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었다.‘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여자가 서 있었을 사진의 오른쪽 모서리 공간은 검은 어둠만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낮은 소리로 시의 남은 구절을 읊조렸다.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바람처럼 사라진 여자는 이 사진 한 장으로 내게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여자가 택한 이별이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것이라면, 나는 조금 더 담담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언젠가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다시 입 맞춘다면, 거리낌 없이 이를 열어 여자가 내민 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여자의 둥근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꼭 지금이 아니어도 좋았다. 내 몸이 완전히 스러지고 난 후 먼먼 내생의 어느 날이어도 좋았다. 진열대에는 여자가 남기고 간 키예프 카메라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 옆의 콘탁스를 꺼냈다. 노출을 오버스톱으로 다시 맞추고 뷰파인더에 키예프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여자가 자신의 유일한 존재증명이라고 말했던 키예프 카메라는 내게는 여자에 대한 기억의 증거가 되었다. 이 사진은 어두운 방에 잠시 스며들었던 빛, 그 빛의 흔적을 기록한 한 장의 루미노그램으로 남을 것이다.(끝) ■ 당선소감 제게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셨다는 사진관을 스쳐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상가 2층 건물이었지요. 그 후부터였습니다. 어찌할 수 없이 사는 일이 힘들어지면 아버지의 사진관이 떠올랐습니다. 그곳에서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사진관을 열고 싶었습니다. 유리로 된 진열장에 오래된 사진기가 들어있는 곳. 증명사진을 찍으러온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웃으세요, 한 마디에 어색한 미소를 짓는 곳. 소읍의 탄생과 죽음과 기쁨과 슬픔을 기록하는 곳. 돈을 벌어도 좋고 벌지 못해도 좋은, 그런 사진관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에 사진관을 넣어두고 저는 수시로 꺼내보곤 했습니다. 그러면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도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언젠가부터 사진관 안에는 허약한 식물이 자랐습니다. 제 소설은 결여의 토양에서 결핍의 양분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지닌 게 없어도 너무 지독하게는 살지 말자고 제 마음을 다독일 즈음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약한 소설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구효서 선생님!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릴 수 있어 기뻐요. 한결같이 제게 여여한 미소를 보여주셔서 마음이 든든했어요. 가족과 문우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응오씨, 당신은 제 삶에서 만난 가장 큰 행운입니다. 저를 존재하게 하는 건 당신이에요.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우승미 ●약력 1974년 강원도 양구 출생 200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 ■ 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9편의 작품은 각기 그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젊은 문학도들에게 패기와 정열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삶의 이름으로건 예술의 이름으로건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소설 같은 소설’ 한 편을 적당히 꾸려내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 아닐까. 그러나 그 가운데 좋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이 특별히 주목한 작품은 ‘소년’‘달을 보고 짖는 개’‘펑크로커 실종기’‘빛이 스며든 자리’ 등 4편이었다. ‘소년’은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난 한 소년의 미래없는 삶을 진지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호감을 샀지만,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삶에 대한 진실을 움켜 쥘때 문학적 형상화도 함께 따라올 것이다.‘달을 보고 짖는 개’는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솜씨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지만, 주제와 구성에서 독창성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잘 만든 이야기, 그러나 너무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반복되는 낡은 이야기에 새로운 진실이 담기기는 어렵다. ‘펑크로커 실종기’는 누아르 서사의 형식 속에 펑크족들의 생활양태를 담은 소설로 문장이 경쾌하고 구성이 치밀했다. 훌륭한 작품이지만 아쉬운 점도 그만큼 많았다. 무엇보다도 한 세계의 겉과 속을 심도있게 성찰하려 하기보다는 이미 알려져 있는 문화적 코드들을 조합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펑크족은 펑크족이다.’라는 말 이상의 매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풍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시선에서 온다. ‘빛이 스며든 자리’는 구렁각시의 민담과 피그말리온의 전설을 현대의 사진예술론으로 재해석하는 가운데 현실과 환상을 정교하게 봉합해서 꾸며낸 예술가 소설이다. 새로운 창조의 자리가 아버지의 자리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다는 주제의 설정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내며, 모든 응모자들의 정진을 빈다. 현길언 황현산
  • [조영증의 킥오프] 세밑 달군 ‘산타 스타’

    2004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국내외적으로 불우한 이웃에게 사랑과 온정을 전달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린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연합아동기구 유니세프가 주관하는 행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유명 스타들은 자신의 이름을 건 자선경기를 통해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 15일 스페인 산티아고 베르나우 스타디움에서는 세계적인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단 팀과 호나우두 팀으로 자선 경기를 가졌다. 유엔의 빈곤퇴치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열린 뜻깊은 행사를 6만 5000여명의 관중이 지켜봤고, 지네딘 지단과 호나우두, 데이비드 베컴, 루이스 피구 등 당대 최고 선수들과 이미 은퇴한 레돈도(아르헨티나) 슈케르(크로아티아) 등이 출전했다. 또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자갈로 감독과 페레이라, 스콜라리 감독 등 명장들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특히 축구선수가 아닌 자동차 레이스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가 그라운드에 나서 자선 경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됐다. 또한 그가 펼친 화려한 축구 실력은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 갈채를 이끌어 냈다. 이날 입장료는 무료였지만 관중들이 십시일반 스스로 내놓은 성금은 전 세계적으로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더없이 훌륭한 희망의 손길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26일 홍명보장학재단이 주최하는 소아암환자 및 소년소녀 가장 돕기 2004푸마 자선 축구경기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42명의 스타들이 사랑과 희망 팀으로 나뉘어 펼친 맞대결은 인천문학경기장을 찾은 2만 2000여 관중들에게 자선 경기에 동참했다는 자부심은 물론, 스타플레이어들과 호흡을 만끽하는 하루를 선사했다. 특별히 스카이박스에 초청된 30명의 소아암 투병 어린이와 200여명의 소년소녀 가장들은 모처럼의 여유를 가지고 운동장을 찾아 축구를 통해 즐거움을 느끼고 웃음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다. 더구나 그동안 모은 성금으로 뇌종양 수술을 받고 완쾌 단계에 접어든 이충만군의 시축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다른 어린이들에게도 희망의 모델이 될 것이다. 홍명보장학회는 이날 입장 수입과 후원금 등 모금되어진 2억원 전액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했다. 그동안 전 국민들로부터 성원을 받은 축구가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 베풀어준 사랑에 보답하는 진정한 의미의 축제가 아닐 수 없었다. 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위원 youngj-cho@hanmail.net
  • [2004 결산] 사라진 별들-꽃은 졌으나 그 향기는 영원하리라

    세월은 정직하다. 그 어김없는 흐름에 올해에도 각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사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사람은 가도 자취는 남는 법. 그들이 남긴 지혜와 역정은 오롯이 남아 후세의 귀감이 된다. 현실이 실타래처럼 꼬일 때마다 그들의 부재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각부 종합 ■ 국내 ●정·관계 지난 9일 한국 외교계와 야당사에 큰 획을 그은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과 이민우 신민당 전 총재가 나란히 타계해 세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 전 장관은 10여년 동안 한국 외교사의 주요 현장을 지킨 ‘외교사의 산 증인’으로 65년 한·일협정을 비롯, 베트남 파병 등 외교사의 길목에서 기틀을 다졌다.1958년 4대 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는 6선을 거쳐 87년 신민당 총재로 정계 은퇴하기까지 정치 인생 40여년을 외곬으로 야당을 지켰다. 유도 10단으로 대한유도회장, 대한체육회 고문 등을 역임하며 남다른 체력을 자랑하던 5선 의원 출신의 신도환 전 신민당 최고위원도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다. 관계 인사로는 장예준 초대 동력자원부 장관을 비롯, 79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이한빈 전 부총리,98년 한은법 개정 뒤 첫 한은 총재에 부임해 외환위기 타개를 이끌었던 전철환 전 한은 총재, 내무부와 보건사회부 장관을 거친 뒤 노태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씨 등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밖에 5·16 직후 군정에 반대하다 군복을 벗은 원충연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캐나다에서 생을 마감했고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도 세상을 떠났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수사받던 안상영 전 부산시장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시절 인사·납품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던 박태영 전 전남지사는 ‘자살’로 삶을 마감해 충격을 던졌다. ●재계 카지노의 대부로 불렸던 전낙원(77)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지난 11월 지병으로 타개했다. 그는 73년 국내 최초의 서울 워커힐호텔 외국인전용 카지노를 관광공사로부터 인수, 이를 기반으로 호텔과 면세점, 건설 등 관광·레저산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며 파라다이스그룹을 일궈냈다. 대한산업그룹 창업주의 아들로 40여년간 대한전선을 중견그룹으로 키워낸 설원량(62) 대한전선 회장도 지난 3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박남규(83) 전 조양상선그룹 회장도 해체된 조양상선그룹의 재기를 보지 못하고 지난 2월26일 세상을 떴다. 또 장기하(72) 전 진로그룹회장은 9월에, 이은범(76) 전 범양사 사장은 5월에, 양회문(53) 대신증권 회장은 9월에 타개했다. ●사회·체육계 사회분야에서는 종군위안부로 고통을 겪은 김순덕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만년에 김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머물며 종군위안부의 피해실태를 증언하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다. 원일한 전 연세대 재단이사와 설대위 전주예수병원 원장 등 두 사람의 미국인도 눈에 띈다. 원씨는 연세대와 YMCA를 설립한 언더우드가(家)의 3세이다. 미국 이름이 데이비드 존 실인 설씨는 전쟁 고아와 버림받은 노약자를 위해 평생을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체육분야에서는 1970년대 씨름왕 김성률씨와 국가대표 농구선수 출신 이원우씨, 송만덕 한양대 배구감독 등이 많지 않은 나이에 부음을 알려 안타까움을 더했다.1935년 프로자격을 얻은 한국인 프로골퍼 1호로 국제대회 첫 출전과 국내대회 첫 우승 기록을 보유한 연덕춘씨도 타계했다. ●문화예술계 문화예술계에서는 우리 문학의 든든한 뿌리 역할을 해온 큰 인물들이 잇따라 세상을 등져 안타까움을 남겼다. 연작시 ‘초토의 시’에서 한국전쟁의 고통을 초월해 구원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줬던 한국 시단의 원로 구상(85) 시인은 7개월여의 폐질환 투병 끝에 지난 5월11일 별세했다.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 ‘다보탑’으로 친숙한 시조 시인 김상옥(84)은 부인 김정자 여사가 먼저 세상을 뜨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 장례식 이틀만인 지난 10월31일 세상을 하직해 세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국민의 애송시 ‘꽃’의 시인 김춘수(82)는 기도폐색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4개월간 투병을 벌이다 지난달 29일 끝내 타계했다.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과꽃’‘꽃밭에서’등 350여편의 주옥 같은 동시를 지은 아동문학가 어효선(79)도 지난 5월15일 소천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농부 작가 전우익(79)은 지난 19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등의 저서를 통해 그가 전해준 소박한 삶의 소중함은 더욱 가치있게 다가온다. 1953년 출판사 ‘일조각’을 설립, 반세기 동안 출판 외길을 걸어온 출판계 원로 한만년 대표도 ‘한국사신론’(이기백 저),‘고가연구’(양주동 저) 등 기념비적인 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예술계에서는 6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누빈 악역 스타이자 영화배우 독고영재의 부친인 원로배우 독고성(75)이 지난 4월10일 별세했다.‘빨간 마후라’를 작곡한 작곡가 겸 평론가 황문평(85)도 800여곡의 영화·드라마 음악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했다. 재즈계, 타악 연주계의 거목인 김대환(71),‘오뚜기 인생’의 가수 겸 음반제작자 김상범((66),‘곡예사의 첫사랑’을 부른 가수 박경애(50)도 올해 우리가 떠나보낸 스타들이다. ●학계 올해 학계도 훌륭한 스승을 잃었다. 사학계에서는 동양사학계의 거목 고병익(80) 박사와 연세대 황원구(74) 교수가 5∼6월 잇따라 별세했다. 실증주의사관의 확립자로 불리는 국사학계의 태두 서강대 이기백(80) 교수도 6월 타계했다. 한글학회에서도 ‘한글지킴이’ 허웅(86) 한글학회 회장이 1월26일 눈을 감았고 지난달 21일에는 KBS 라디오프로그램 ‘바른 말 고운 말’로 유명한 한글재단 한갑수(91) 이사장마저 세상을 떠났다. 진보사회과학계의 큰별 서울대 김진균(67) 교수도 2월14일 별세했다. 민족과 계급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한 김 교수는 늘상 정권의 핍박에 시달렸지만 그가 만든 산업사회연구회는 진보학술운동의 모태였다.‘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학술단체협의회’도 김 교수의 작품이다. 과학기술분야에서도 육각수이론을 창안해 ‘물박사’로 통했던 전무식(72) 박사와 한국 핵의학분야를 개척한 전 서울중앙병원장 이문호(82) 박사가 8월13일, 지난 5일 각각 별세했다. 또 전 과학기술처장관 최형섭(84) 박사도 5월29일 타계했다. 화학야금학을 공부한 최 박사는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대소장, 과기처 장관을 지내면서 과학발전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을 받았다. ●종교계 올해 종교계는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세수 77)의 입적이 무엇보다 큰 뉴스였다. 지난달 30일 원적에 든 숭산 스님은 달라이 라마, 틱 낫한 등과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추앙받으며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진력해왔다.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을 시작으로 40년 가까이 세계를 돌며 32개국에 120여개의 선원을 세웠다.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꽃)라는 가르침 속에 한국 불교 세계화에 일생을 바친 숭산 스님은 5만여 눈푸른 납자와 제자들을 뒀다. 기독교 쪽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지낸 조용술 목사가 지난달 15일 84세로 별세했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신대를 나와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재단이사장,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복음 전파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 국외 한 시대를 풍미한 지구촌의 별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숱한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한줌의 흙이 됐으나 그들이 남긴 자취는 또렷하다. 올해 사라진 인물들을 되돌아본다. 야세르 아라파트(75) 35년간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을 이끈 중동의 풍운아. 이집트 태생으로 지난달 파리의 군병원에서 사망했다.59년 무장단체 ‘파타운동’을 설립했다.67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96년 자치정부 수반이 됐다. 테러와 평화협상을 병행하면서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94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부패와 개인축재 등의 의혹에 시달렸다. 그의 사망으로 중동의 평화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로널드 레이건(93) 구두판매원의 아들로 태어나 B급 영화배우에서 미 40대 대통령(81∼89년)에 올랐다. 뛰어난 정치감각과 유머로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됐다. 공급경제학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했고 우주에서 미사일을 요격하는 ‘스타워스’를 구상,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 퇴임 이후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다 지난 6월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타계했다. 자크 데리다(74) 이성 중심의 전통적 서양철학에 반기를 든 ‘해체론’의 창시자.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현대철학의 거두로 10월 파리에서 췌장암으로 숨졌다. 언어의 명료성과 통일성이 아니라 다극적 의미를 강조, 니체나 하이데거와 같은 ‘반(反)철학’의 후계자로 평가된다. 레이 찰스(74) 노래로 미국 내 흑백통합을 이룬 흑인 솔 음악의 거장.7살 때 시력을 잃고 15살 때 고아가 됐으나 천부적인 자질로 13차례나 그래미상을 받았다.‘아이 캔트 스톱 러빙 유(I can’t stop loving you)’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8월 사망했다. 말론 브랜도(80) ‘대부’의 돈 콜리오네 역으로 유명한 미국의 영화배우.‘워터프런트(50년)’와 ‘대부(73년)’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나 두번째 상은 북미 인디언에 대한 미국의 차별정책에 항의해 거부했다.‘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51년)’,‘지옥의 묵시록(79)’ 등에서 열연했다.7월 타계. 크리스토퍼 리브(52) 가슴에 ‘S’자를 달고 붉은 망토를 걸친 불멸의 ‘슈퍼맨’.78년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슈퍼맨에 발탁된 뒤 83년까지 3차례 시리즈에 출연했다.95년 승마대회에서 목뼈가 부러져 전신이 마비됐다. 재활치료 끝에 휠체어를 타고 영화에도 출연했으나 10월 심장마비로 숨졌다. 장애인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했다. 에스티 로더(97) 지난 4월 타계한 미 화장품업계의 여왕. 그가 창안한 ‘공짜샘플’과 ‘고급매장’ 전략은 20세기 모든 마케팅의 표본이 됐다. 부엌에서 만든 미용크림으로 46년 에스티 로더를 창업했다. 뉴욕에 본사를 두고 현재 세계 130여개국에서 50억달러어치의 화장품을 판다. 프랜시스 크릭(88) 1953년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처음 발견한 영국의 생물학자. 지난 8월 결장암으로 미 샌디에이고에서 숨졌다. 인간의 유전정보가 다음 세대로 복제되는 과정을 밝힌 공로로 62년 노벨상을 탔다. 생명공학 산업의 기초를 일궈 다윈과 멘델에 견줄 만한 과학자로 평가된다. 이밖에 할리우드의 여배우로 ‘킹콩’의 페이 레이(96)와 앨프리드 히치콕의 스릴러 ‘사이코’에서 열연한 재닛 리(77)가 8월과 10월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스페인 내전을 카메라에 담은 전설적 사진작가 앙리 브레송(96)은 8월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슬픔이여 안녕’의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69)은 9월에 타계했다. 자신을 마담으로 부르도록 한 네덜란드의 여왕 줄리아나(94)는 1월에, 장징궈(蔣經國) 전 타이완 총통의 부인인 장팡량(蔣方良·88)은 지난 15일 사망했다. 1968년 북한에 피랍된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의 함장 로이드 부커(76)는 1월에 죽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창시자 셰이크 아메드 야신(66)은 이스라엘의 헬기 공격으로 숨졌다. 의약업계의 황제 잭 에커드(91)와 이탈리아 자동차 왕국 피아트의 움베르토 아그넬리(69)는 5월에 운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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