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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 갈무리 펴냄) 해체론적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서술한 문화연구서. 인도 출신으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거장인 저자는 초국가적 문화연구를 통해 미국의 다원주의 또는 다문화주의가 유포하는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한다. 저자는 오늘의 지구촌 현실에서 영어를 매개로 한 문화접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만큼 무엇보다 번역의 필요성과 효과를 집중 조명하는 ‘번역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비판의 정치학에서 이제 번역의 정치학 또는 협상의 정치학으로 바뀌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3만원.●성서의 역사(크리스토퍼 드 하멜 지음, 이종인 옮김, 미메시스 펴냄) 13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자이언트 성경 대신 휴대용 성서가 주류를 이루고 역사 속 언어가 돼버린 라틴어 대신 일상 언어로 성서를 번역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존 교회는 이런 움직임을 엄격히 제지했다.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위클리프 성서라고 불리던 영어 번역본은 이단으로 간주돼 책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화형됐다. 성서의 다양한 판본을 중심으로 2000년에 걸친 성서의 기술적, 문화적, 역사적 변천과정을 재구성했다. 저자는 25년 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중세 채색필사본 경매를 담당한 채색필사본·고문서 분야의 권위자.4만 5000원.●페르낭 브로델(김응종 지음, 살림 펴냄) ‘역사학의 교황’으로 불리는 페르낭 브로델의 저서 ‘지중해’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분석했다. 브로델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함께 현대 역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 아날학파의 대표적 역사가. 개인, 정치, 연대(年代)만을 중시하는 기존 역사학에 반대해 집단, 사회, 구조를 탐구했다.‘지중해’는 16세기 지중해 역사를 다룬 책. 전통적 역사학이 단기적인 시간 속에 매몰된다는 점을 비판하며 장기지속·중기지속·단기지속이라는 시간의 세 층위에 입각해 역사를 바라본다. 자본주의를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 ‘필요악’으로 비판하는 브로델은 불평등은 그 자체로 악이지만 불평등하지 않으면, 즉 위계가 없으면 흐름이 없어 정체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1만 900원.●세계사를 바꿀 달러의 위기(빌 보너 등 지음, 이수정 등 옮김, 돈키호테 펴냄)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 미국은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전 세계 120곳에 군사기지를 둔, 로마제국 이래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됐다. 이 책은 하나의 제국이 어떻게 성장과 발전, 절정과 쇠퇴기를 거쳐 붕괴에 이르는가를 역사와 경제를 접목시켜 살핀다. 고대 로마제국 쇠퇴기에 제국의 통화인 아우레우스의 금 함유량이 계속 감소했던 것처럼 달러도 가치가 하락하면서 종국엔 휴지조각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에서 제국은 영원할 수 없다.1만 7000원.●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조병옥 지음, 한울 펴냄) 동백림사건에 연루됐던 공광덕 박사의 부인인 저자의 수기. 이화여대 교수로 촉망받는 음악가였던 저자가 동백림사건으로 전과자가 된 공 박사와 결혼하기까지의 과정, 독일에서 부부가 벌인 민주화투쟁, 암 선고를 받은 남편이 암세포를 굶겨 죽이기 위해 42일간 단식하며 투병생활을 했을 때의 심정 등이 담겼다.1만 1000원.
  • 삶의 고비서 만난 희망의 메시지

    “집안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라, 둘째 남과의 약속은 작은 약속이든 큰 약속이든 일단 약속했다면 지켜라. 셋째,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어느 하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느냐. 그러니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라. 그 다음은 네 멋대로 살아가라.”(18쪽) “한 자루의 장도를 샀을 때도 못을 박는 데 쓸 것이 아니라 못을 빼는 역할에 먼저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지금 대하고 있는 것에는 당신으로부터 어떤 의의가 주어지고 있는지요?”(118쪽) 월간 ‘샘터’의 뒤표지에는 창간 이후 단 한번도 광고가 실린 적이 없다. 대신 진솔한 언어로 삶의 희망을 전하는 한 편의 글이 매번 그 자리를 채워 왔다. 1970년 창간호부터 뒤표지글을 써온 이는 샘터사 고문인 우암 김재순이다.‘평범한 사람들의 행복 추구’라는 ‘샘터’의 창간 이념 그대로 우암은 인생의 절정이나 내리막길에서, 혹은 좌절과 패배의 질곡에서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지혜를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대장암으로 투병하던 시절에도 연재를 멈추지 않았다. ‘그 다음은, 네 멋대로 살아가라’(샘터)는 지금까지 우암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뒤표지에 연재했던 글을 한데 모은 것이다.“뒤표지를 복사해서 아들 책상에 붙여둔다.”는 어머니부터 “막막했던 이십대에 위안과 용기를 주었던 나의 멘토”라고 말하는 독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여름부터 봄까지 네 개의 장으로 나눠 모두 85편의 글을 실었다. 각 계절의 머리마다 수필가 장영희 교수, 소설가 최인호, 화가 조광호, 이해인 수녀가 추천사를 썼고, 우암의 오랜 친구의 딸인 화가 황주리가 정감어린 그림들을 보탰다.9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독재시절의 우울한 시험답안

    <1987학년도 2학기 서울대 사회학과 사회변동론 기말고사>문제=사회심리학적 변동론에 대하여 논하시오./답=사랑하는 후배의 분신 소식을 듣는 순간, 책을 잡고 있는 제 모습이 너무 역겨웠습니다. 지금 제게는 지식이 아니라 비굴한 저를 벌할 수 있는 채찍이 필요합니다.(경영학과 4학년 김○○) 진보학계의 거두였던 고 김진균(1937∼2004)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과목에서는 유난히 이런 시험 답안이 많았다. 여러 학과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문제와 상관 없이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답안지에 토해내곤 했다. 그 속에는 시대의 아픔을 스승과 함께 나누려는 제자들의 정열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고인의 수택(手澤·손때)이 밴 제자들 답안지 1만 1000장이 오는 10월 세상에 공개돼 제자들과 해후한다. 답안지는 고인의 학교기증 유품의 일부. 딸 지인(36)씨는 2004년 2월 타계한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해 6월 부친이 갖고 있던 자료를 서울대에 기증했다. 책, 논문, 강의록, 연구자료, 비디오자료 등 5t 트럭 하나 가득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답안지를 문서파일(PDF)로 바꿔 저장한 석장의 CD는 고인이 투병 중에 손수 제작했다는 데서 더욱 의미가 크다. 줄곧 대장암과 싸워 온 고인은 2003년 정년퇴임 후 제자들과의 인연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1985년부터 퇴임 직전까지 18년간 단 한장도 버리지 않고 모아 온 1만 1000여장의 답안지를 딸의 도움을 받아 일일이 스캐닝해 PDF파일로 만들었다. 고인은 독재정권에 의해 필화, 해직 등 갖은 수난을 당했지만 학생들을 통해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았다. 제자였던 86학번 김모(회사원)씨의 말.“학생들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 되기도 했던 김 교수님을 진보적 실천 지식인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수업·시험 거부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운동권 학생들을 포함해 많은 학생들이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답안에는 87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씨가 당선된 뒤의 절망과 체념도 녹아 있고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성적이 좋지 않음을 헤아려 달라는 애교도 담겨 있다.“올해는 기필코 해방을 쟁취하는 해가 되길 바라며 저희들도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시험거부 과목이 너무 많아 성적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대기과학과 3학년생) 서울대 기록관은 10월 개교 기념일에 즈음해 김 교수 유품을 기획전시할 계획이다. 기록관 관계자는 “방대한 양의 답안지들 중에서 시대상황에 따른 학생들의 의식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추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평화軍 올때까진 무력충돌 계속될듯

    11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이어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휴전 합의로 한달여를 끌어온 레바논 사태가 일단락지어졌다. 하지만 이 지역에 영구적인 평화가 오리라고 예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유엔 결의 이행되기까지 일단 1만 5000여명의 유엔 평화유지군(UNIFIL)과 레바논 정부군이 레바논 남부에 배치되기 전까지는 양측의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치피 리브니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휴전 수용 직후 기자들에게 “평화유지군이 올 때까지 철수하지 않겠다.”면서 “안보리 휴전 결의안은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안보리 결의도 ‘가급적 빨리 철군’을 명시했을 뿐이다. 또 경제·군사제재와 같은 강제성을 담보하는 유엔헌장 7장에 대한 언급도 없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휴전을 앞둔 12,13일 영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막바지 공격의 불을 뿜었다. 베이루트에 20기의 미사일을 퍼붓는가 하면 접경에서 30㎞ 올라간 리타니강까지 진격해 ‘완충지대’를 장악했다. 안보리 결의에 따르면 이곳에는 향후 유엔과 레바논군 외에는 무장인력과 무기 등을 둘 수 없다. 헤즈볼라도 반격해 이스라엘 군용 헬기 1대를 격추시켰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폭력 종식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헤즈볼라가 납치한 이스라엘 병사 2명과 이스라엘이 생포한 헤즈볼라 전투요원의 처리, 유엔 평화유지군의 구성 문제도 논란이다. 프랑스가 평화유지군을 이끌 것이란 관측 속에 다른 나라들이 전투병 파병에 소극적이어서 실제 파견까지는 열흘 정도 걸릴 전망이다. ●승리자는 누구? 겉으로는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거점을 상당 부분 파괴했다는 점에서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승리자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예상 밖으로 헤즈볼라의 화력과 정보전 능력이 뛰어남을 만천하에 확인시켜 줬고 아랍권에서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영웅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반면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와 아미르 페레츠 국방장관의 지지도는 하락했다. 레바논 공격 초기 75%가 넘었던 총리 지지도는 최근 48%로 내려 앉았다. 진보지 하레츠는 총리 사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속전속결’의 기대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좌파를 중심으로 전쟁에 염증이 제기됐다. 민간인 희생에 따른 국제사회의 비난은 이 지역 이스라엘의 고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에서 모두 51억달러(약 5조원)를 썼다고 이스라엘 경제지 ‘더 마커’가 전했다. 직접 비용과 전쟁복구 비용, 국내총생산(GDP) 1.5% 감소 등을 감안해서다. 이스라엘의 정보통신(IT) 거점인 북부 하이파가 헤즈볼라의 로켓포 공격에 노출되면서 향후 이 도시의 고급인력 유치가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번 안보리 결의는 완곡하게나마 제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이 점령한 주변국 땅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태도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0%에 가깝다.‘5차 중동전쟁’의 불씨는 살아 있는 셈이다. 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하얀 나비’ 가수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2)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하얀 나비’ 가수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2)

    그의 재능은 외탁인 듯하다. 서편제의 큰 줄기이자 창작판소리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던 월북 소리꾼, 박동실 선생이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다. 월북으로 인해 그의 존재는 판소리사에서 한때 묻혀져 있었지만 박동실은 명창 김소희와 박송희 등을 키워냈던 인물로 김정호의 어머니인 박숙자 여사와 함께 ‘아성극단’을 만들어 만주나 상하이 등지로 공연을 다니기도 했던 ‘명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박숙자씨는 아들 정호가 6살 때 집안에 있던 국악기를 모두 내다버렸다. 심지어는 가야금 줄까지 모두 끊어버렸다. 그 힘들고 고된 악극단 생활을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기억이 잡힐 듯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김정호는 운명처럼 ‘금지된 길’을 걷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생의 전부를 걸어 음악에 몰입했다. 여운이 긴 애상적인 바이브레이션을 구사했던 김정호, 노래들이 유독 슬프게 들렸던 것은 그가 노래 속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은 혹 아니었을까. 처음 김정호가 노래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은 대동상고 시절, 밴드부에 합류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졸업 후엔 기타를 둘러멘 채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종로 낙원상가 주변을 배회했으며, 심지어는 잠자리조차 없어 거리에 내놓은 이삿짐 속 캐비닛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 이즈음 잠시 미 8군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얼마 안돼 또다시 떠돌이가 되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것은 ‘음악’보다 먼저 ‘배고픔’이었다. 당시 한 그릇에 5원하던 노동자 합숙소의 국수, 한 대접에 10원이었다던 남대문 시장의 수제비 등으로 허기를 채우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한때 가수 백순진씨와 함께 ‘4월과 5월’의 멤버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어니언스가 그의 곡인 ‘작은 새’를 히트시키기에 이르자 음악성을 주목받으면서 작곡자에서 가수로 변신, 무대에 선다. 통기타를 멘 채 눈을 지그시 감고 꿈꾸듯이 노래하는 그의 독특한 모습. 그는 76년 3월, 자신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날, 부인 이영희씨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하나 이 축복도 잠시였다.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방 공연하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방위 소집에 응하지 못해 결국 탈영병으로 군 영창에 갇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군복무를 마치게 되지만 가정은 이미 어려워져 매번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는 그의 부인은 자신에게 ‘늘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부인은 그가 건강이 나빠져 공기 좋은 곳으로 가자면 그렇게 했고, 친구 곁으로 가자면 또 그렇게 했다. 경제적으로 정 버틸 수 없어 어머니 곁으로 가야겠다고 말하면 또 그의 뜻에 따랐다. 그러나 80년, 끈질긴 투병과 부인의 보살핌으로 완전히 나았다던 그의 결핵은 다시 재발되고 급기야 각혈이 시작되자 결국 인천요양소에 격리되어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공백’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했다. 비록 그 시기에 대중들 앞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스스로는 늘 음악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그는 많은 곡을 만들었고 악기소리를 연구했으며 음반 또한 취입했다. 그가 타계하기 얼마 전, 담당의사는 그에게 경고했다. 최소한 6개월에서 3년 정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고. 심지어 ‘노래를 다시 부르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까지 경고했다. 결핵환자에게 노래는 호흡기관에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되레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병보다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음악에 대한 열병을 또 그렇게 앓고 있었다. “꽹배기(꽹과리)소리에 미쳐 삽니다.” 인터뷰 당시 그는 자신의 생활을 이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했다. 우리만의 것, 우리만의 맛, 우리만의 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무엇인지 이제서야 비로소 찾은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때문에 그 무렵 뜻 맞는 친구들과 사물놀이 패를 조직하기도 했고 또 항시 꽹과리를 들고 다녔다. 병이 악화돼 병원에 다시 실려 갈 때도 꽹과리를 병실에 까지 가지고 들어가 담당의사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남은 열정을 모두 국악에 바치겠다.’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의지를 내보이던 김정호, 오늘 그가 새삼 그립다. sachilo@empal.com
  • [씨줄날줄] 포스트 카스트로/강석진 수석논설위원

    열대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 케브라초의 비중은 1.49. 물에 던지면 가라앉는다. 일명 카과이란이라고도 불리는데 잘 썩지 않고 조밀하며 강도가 높아 건축용 자재로 쓰인다. 타닌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어 그 추출물을 제혁용으로도 사용한다. 장수술을 받아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수술 후 친구들을 만나 “나는 카과이란”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의 전언이다. 달변가인 카스트로가 불사조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의 나무에 비유해 다시 일어설 것임을 호언한 것이리라. 하지만 카스트로가 워낙 고령인 데다 투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포스트 카스트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 칠레의 바첼렛 등 온건 좌파 지도자들은 카스트로의 쾌유를 기원하는 데 머물지만, 반미의 깃발을 높이 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나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등은 반미 세력의 구심점 역할에 대한 희망을 숨기지 않는다. 이들이 반미의 구심점이 되겠다고 나서는 데는 라틴 아메리카의 기막힌 현실이 놓여 있다. 쿠바는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한때 기름도 비료도 다 끊기는 고통을 받았지만 유기농업, 의료 인력 양성, 관광산업 진흥 등으로 2005년도 1인당 국민소득을 35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반면 쇠고기 굽는 향기가 도시의 골목을 흐르던 아르헨티나는 미국이 처방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모범적으로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소득이 2003년 3860달러에 머물고 있다. 좌파가 미국을 향해 두루두루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차베스나 모랄레스가 카스트로만한 권위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민주화로 장기집권이 어렵다든가, 반대파를 제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있고,“쿠바 혁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효력을 다했으며 카스트로 없이는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정권은 시계추처럼 좌로 우로 흔들린다. 펜듈럼 이론도 있다. 흔들리는 추 너머로 카스트로 이후를 내다보는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고민은 깊어 간다. 주여,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강석진 수석논설위원 sckang@seoul.co.kr
  • 효녀골퍼 김소희 “하늘에서 편히 경기모습 보세요”

    “이제 하늘나라에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편히 보실 수 있겠죠.” 효녀 골퍼로 소문난 김소희(24·빈폴골프)가 눈물을 쏟았다. 더 이상 필드에서 아버지를 볼 수 없어서다. 폐암 투병중에도 필드에 나와 응원해주던 아버지 주영씨가 31일 53세로 세상을 떠난 것. 김소희가 골프를 시작한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주영씨는 초등학교 때 수영을 했던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골프채를 쥐어주며 줄곧 뒷바라지를 했다.2003년 폐암 진단을 받고서도 최근까지 캐디 역할을 자청, 연습장과 집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골프 팬이라면 2004년 레이크사이드 여자오픈을 기억할 것. 국가대표로 뛰기도 했던 김소희는 이 대회에서 프로 데뷔 첫 우승컵을 품에 안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경기장에 나온 아버지를 뜨겁게 포옹하며 눈물을 쏟았다. 갤러리도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한번 더 우승하고 싶었다는 김소희는 “올시즌엔 아빠가 힘드셔서 골프장을 찾지 못했어요.”라면서 “성적도 좋지 않아 (TV)화면에도 잘 안 잡혔는데 이제 하늘에서 경기하는 모습을 편하게 보실 수 있을 것”이라며 울었다. 주영씨 빈소는 수원 한독병원 영안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일 오전 8시30분이다.(031)235-5321.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하얀 나비’의 가수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1)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하얀 나비’의 가수 김정호와의 마지막 인터뷰(1)

    본명이 조용호인 가수 김정호는 1952년 3월27일 태어났다. 그리고 85년 11월29일 떠났다.33년 8개월간의 짧은 생애. 마치 ‘33과 3/1’ 속도로 도는 레코드판처럼, 그의 삶의 수치는 그 시점에서 멈췄다. 그와 가졌던 인터뷰, 그 기억이 지금도 새삼스럽다. 74년 5월 ‘작은 새’ ‘이름 모를 소녀’ 등을 발표하며 통기타 가수 대열의 선두에 섰던 그. 당시 ‘김정호 노래의 코드로 기타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하얀 나비’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꽃잎’ ‘푸른 하늘 아래로’ ‘보고 싶은 마음’ 등을 발표하며 한국적 포크를 지향했던 김정호. 통기타를 멘 채 지그시 눈을 감고 꿈꾸듯이 노래하는 그의 독특한 모습. 그러나 그는 이미 폐가 몹시 나빠 투병 중이었다.‘폐결핵 가수 김정호’라는 말은 이미 나돌고 있었으나 음악만큼은 누구보다도 건강했으며 또한 아름다웠다. 그는 75년 ‘대마초 파동’과 함께 대중들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마초 가수들이 해금되어 하나 둘씩 활동을 재개할 때도 그는 등장하지 않았다.‘행방불명설’ ‘잠적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로 온갖 추측 보도도 많았다. 그러던 그가 84년 홀연히 나타났다.83년 6월부터 11월까지,5개월이라는 최장 녹음시간을 기록한 4집 앨범으로. 호흡조차 힘들어져 한 곡 녹음하는 데도 수십 번씩 끊어 편집해야 했던 이 앨범, 결국 ‘유작’이 되어버린 이 앨범을 들고. 그러나 이 앨범이 나온 뒤에도 그는 공개석상을 기피했다. 이 앨범 중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제법 방송을 타고 있었지만 그는 어느새 ‘얼굴 없는 가수’가 되어 있었다. 이 노래가 같은 요양소에서 보게 된 어느 여 환자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애틋한 얘기만이 화제가 된 채. 필자가 그를 만나 그간의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이 무렵으로 처음에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지금은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하는 입장을 이해해달라.’고도 했고, 또 통과의례처럼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석 달을 매달려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다만 조건은 그냥 만나는 것, 그리고 자기와 나누는 얘기는 절대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의 아파트에서였다. 그 핏기 없던 얼굴, 그리고 기침소리 속에 겨우 나누던 얘기들. 정말이지, 이러한 식의 기사는 나도 결코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송창식의 고집에 관해 얘길 했으며 김수철의 ‘별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에 관해 서로 격의 없이 의견을 나누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내 얘기에 따라 빙그레 웃기도 하고, 간호원이 주사를 놓으러 왔을 때는 나에게 ‘잠깐이면 되니 기다리라.’고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몇 번이나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자꾸 괜찮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노래 ‘님’을 들어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때까지 그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가 음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님’. 그 때, 그 느낌이란. 그 노래를 듣는 내내 엄습해오는 불길함을 어쩌지 못했다. 그의 아파트를 나서는 늦은 시간에 그는 마침내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공기 좋은 야외로 함께 나가보고 싶다고. 의외로 그가 쾌히 승낙했다. 그러면서 말했다.“기왕이면 사진 잘 받는 곳으로 가지. 그리고 오늘 내가 했던 얘기 중 노래에 관한 얘기라면 기사로 써도 좋겠는 걸….”한번도 웃지 않고 옆에 있던 부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다음다음날 아침, 우리는 ‘뚝섬’엘 갔다. 우리가 서로 약속한 시간은 한 시간 정도였지만 정작 촬영은 오후 다섯시 무렵에나 끝났다. 그가 무리를 하면 안 되기에 사진 찍는 중간중간 쉬어야 했고 그런 중에도 그는, 그때까지 밝히지 못했다던 얘기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얘기, 탈영해 군 영창에 갇혔던 얘기까지. 띄엄띄엄 노래를 불러 이은 그의 마지막 노래처럼 촬영도 그렇게 되었다. 오히려 나는 이 정도의 사진이면 충분하다고 말렸으나 되레 그가 사진 찍는 일에 더 열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진 촬영에 임하던 그의 표정이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이따금씩, 그는 함께 동행했던 그의 후배에게 담배를 빼앗다시피 해 때론 냄새만 맡기도 하고, 직접 불을 붙여 입에 물기도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의사는 내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면 죽는다고 경고했지, 허나 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되레 죽을 것 같아.” ‘남은 열정을 모두 국악에 바치겠다.’고 밝히던 김정호, 이 말은 그가 자신 있게 한 말이라서 더 안타깝다. 얼마 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의 죽음이 ‘병’ 때문이 아니라 ‘한’ 때문이었다고 생각되어졌다. 허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오히려 그에게 늘 부족했던 ‘산소’를 노래 속에 다 연소시키고 행복하게 간 것이라고.
  • [길섶에서] 희망의 투병/이목희 논설위원

    전화를 거니 둘째형의 목소리가 밝았다. 투병수기 공모에 입상했다는 것이다.3년전 형은 폐암 선고를 받았다.“안색이 안 좋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병원에 간 그날 입원해야 했다. 수술도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그로부터 시작된 고난의 시기. 형은 그래도 잘 버텼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져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낫는다는 종교적 믿음, 의사 처방 준수, 형수의 뒷바라지. 좌절과 희망을 수십차례 오간 끝에 조심스럽게나마 기적을 바랄 단계에 이르렀다. 큰딸은 그 사이 대학을 마치고 직장인이 되었고, 작은딸은 졸업반이다. 이런 과정을 담담하게 쓴 글이 다른 투병인에게 도움을 줄 거라고 심사위원들은 생각했나 보다. “모범 환자, 축하합니다.” 같이 기뻐하면서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형이 아프다는 것을 안 지 두달만에 돌아가셨다. 집안 어른들은 “모친이 아들의 병을 대신 지고 갔다.”고 말했다. 하늘나라의 어머니도 형을 돕고 있는데, 나는 뭘 해줬는지…. 형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미안하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이종현의 나이스 샷] 그린 위 ‘정신적 지주’ 황제의 눈물은 빛났다

    지난 24일 막을 내린 브리티시오픈골프대회에서 타이거 우즈의 챔피언 퍼팅을 지켜봤던 지구촌 팬들은 형언할 수 없는 뜨거움에 북받쳤다. 우즈가 우승을 확정지으며 두 손을 치켜들었지만 평상시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절제돼 있었고, 그린을 빠져나오는 그의 커다란 두 눈엔 촉촉함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우즈는 캐디 스티브 윌리엄스와 포옹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린 밖으로 나와서는 아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불과 2개월 전의 아버지 얼 우즈가 떠오른 때문이다. 우즈에게 있어 아버지는 골프의 스승이고, 친구이며, 동반자였다. 우승 순간 아버지가 없다는 무존재의 그리움으로 인해 우즈는 맑고 투명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영화의 한 장면도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없었다. 골프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감동이다. 단체경기라면 이렇게 또렷하게 한 인물의 슬픔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생생하게 전달되기 힘들 것이다. 골프 실력을 좌우하는 건 스윙이고,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멘탈’이다. 그러나 이번 우즈의 눈물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멘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 지주’의 존재 여부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은 저마다의 지주를 가슴에 품고 플레이했다. 크리스 디마르코(미국)는 대회 출전 직전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준우승이라는 호성적을 거뒀다. 허석호의 어머니 역시 오랫동안 암과 투병 중이다. 비록 함께 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그들의 ‘지주’에 대한 그리움과 보상심리가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다면 과장일까. 우즈는 4일 내내 아버지와 함께 라운드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골프 황제의 눈에서도 눈물이 나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아버지의 힘이다. 특히 흑인 아버지와 태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동양적인 정서가 남보다 달랐기에, 한국 골퍼들은 그의 눈물에 함께 기뻐하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가 흘린 눈물은 우승보다 값졌다. 코스에서 늘 으르렁대는 ‘타이거’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었기에 올해 브리티시오픈은 어느 때보다 특별한 메이저대회였다.레저신문 편집국장 huskylee1226@yahoo.co.kr
  • [브리티시오픈] ‘밥 퍼주던 남자’ 허석호 11위 절정퍼팅

    [브리티시오픈] ‘밥 퍼주던 남자’ 허석호 11위 절정퍼팅

    ‘종묘공원에서 밥 퍼주는 남자.’ 널리 이름을 날린 어느 목사의 얘기가 아니다.24일 끝난 브리티시오픈골프에서 한국선수로는 역대 최고의 성적인 공동 11위에 오른 허석호(33)의 얘기다. 무의탁 노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한 단체에 쌀 100부대를 기증한 허석호는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밥을 퍼주며 노인들을 대접했다. 선행을 베풀어 온 지 벌써 5년째. 물론 현재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바람에 종묘공원을 찾지 못한다. 허석호는 당초 경기 도중 목뼈를 다쳐 하체가 마비된 한 체조 선수의 사연을 접한 뒤 대회에서 버디를 잡을 때마다 1만원씩 적립하기 시작, 모은 돈을 휠체어 사주기 운동 성금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모친의 중병으로 자신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프로가 될 때까지 받은 주위의 도움에 보답키 위한 하잘것없는 정성”이라고 둘러쳤다. 꼭 50년 전 연덕춘, 박명출 등 2명이 첫 브리티시오픈 무대를 밟은 이후 8언더파 280타로 공동 11위라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허석호는 착한 이미지가 너무 강한 탓에 근성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의 삶은 누구보다 질기고 거칠었다. 군생활을 마친 1998년 허석호는 무릎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을 위기에 처했다.6개월간의 재활치료도 허사. 뒷심이 받쳐주지 못해 프로 데뷔 6년만에야 한국프로골프(KPGA) 첫 우승을 잡았다. 이번 대회에서도 그는 출전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일본에서의 상반기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그는 출전 포인트가 걸린 미즈노오픈에서 우승, 오뚝이같이 극적으로 티켓을 거머쥐었다. 투병중인 어머니와 늘 힘이 돼주는 아내, 그리고 12월 태어날 2세를 위해 그는 아이리시해의 바닷바람에 맞서 혼신의 샷을 날렸고,‘브리티시맨’으로 거듭났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시문학상 5관왕 문태준 새 시집 ‘가재미’ 출간

    시문학상 5관왕 문태준 새 시집 ‘가재미’ 출간

    이름 난 시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문단의 상찬을 독차지하는 것이 젊은 시인에게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 출간을 앞두고 만난 문태준(36) 시인은 인사차 건넨 문학상 얘기에 조심스러워했다.“주변에서 ‘마음고생 많겠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사실 부담도 되고, 불편하기도 하고…. 이제는 ‘시 곁에서 떠나지 말고 살라는 격려구나.’하고 마음을 바꿨어요. 시를 못 떠나게 붙들어매는 끈이 생긴 셈이지요.” ●전통 서정시인 계보 잇는 대표주자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한 그는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2000)에 이어 두번째 시집 ‘맨발’(2004)을 내놓으면서 주목받았다.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미당문학상에 이어 올해 소월시문학상까지 휩쓸었다.2년 연속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소월, 백석, 박목월 등 전통 서정시인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평단의 환대에 우쭐할 법도 한데 이 겸손한 시인은 정작 요즘에서야 ‘아, 내가 시인이 되어가는구나.’ 느낀다고 했다. 시에 대한 책임감도 달라졌다. 단어 하나에도 예민해지고, 시의 음악성에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누가 울고 간다’, 소월시문학상을 받은 ‘그맘때에는’을 비롯해 67편의 시가 수록된 세번째 시집 ‘가재미’는 그렇게 지난 2년간 자신을 시인으로 담금질해온 결과물이다. 그의 시적 관심사는 사라지고, 변화하는 존재의 본질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계절이 순환하듯 모든 존재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맞닿아 있다.“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빈손이다/…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그맘때에는’중)에서 드러나듯 시인은 존재의 사라짐을 자연의 섭리로 순하게 받아들인다. 표제작인 ‘가재미’ 연작 3편은 가까운 친척의 죽음을 겪으며 그를 기억에서 떠나보내는 일련의 심정을 담고 있다.“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누워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가재미) 떠올린다. 친척이 죽은 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 집으로 돌아”(가재미2)오고,“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가재미3)내며 피붙이와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는 “다섯살 아이에게 수두가 지나가듯 우리 인생도 홍반처럼 돋았다가 사그라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인은 늘 오감이 활짝 열려 있어야” 직장인(불교방송 PD)인 그는 항상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든 시를 받기 위해서다.‘시를 받는다’니, 무슨 소리일까.“시골에서 장마철이 지난 뒤 사방의 문을 열어두듯 시인은 늘 오감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해요. 그래야 바깥의 세계를 잘 받아들일 수 있지요. 저에게 시는 쓰는 게 아니라 받는 겁니다.” 경북 김천의 소읍에서 나고 자란 그는 선배의 꼬드김으로 대학 문예창작반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번도 시를 써본 적이 없다. 농사일 돕고, 학교 공부하느라 시를 읽을 형편이 안됐다. 그는 “문학 수업은 못했지만 대신 시적인 자연환경에 몸이 젖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 그때부터 몸으로, 오감으로 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쉬우면서 속 깊은 시 많이 나왔으면…”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 시인 역시 고민이 크다.“쉬우면서 속 깊은 시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못잊어’처럼 사람들이 노래로 흥얼거릴 수 있는 그런 시들 말이에요. 그건 시의 품격을 해치는 속된 짓이 아니라 대중과 친밀하게 만나는 귀한 일이지요.”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펜타곤 관료주의가 美 안보의 敵?

    펜타곤 관료주의가 美 안보의 敵?

    1개 비행대대(10∼18대) 규모의 신형 전투기를 개발·구입하는 데 20년씩 걸리는 나라. 서류 하나가 장관 책상까지 전달되려면 17단계를 거쳐야 하는 곳. 다름아닌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미국 국방부(펜타곤)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2001년 ‘관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국방부 개혁에 나섰지만 펜타곤의 현실은 정반대로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11일(현지시간) ‘펜타곤의 관료주의’가 최첨단 신형 무기를 도입하는 데 걸림돌이 되면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치명적 존재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무기 가격의 ‘뻥튀기’가 예산 초과의 원인이며, 의회 군사위원회가 국방부의 방만한 예산 운영을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해 12월 실전에 배치된 미 공군의 미래형 주력 전투기인 ‘F-22A 랩터’. 국방부가 1986년 록히드 마틴사에 개발 제안을 한 후 20년이 걸린 것이다.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2010년에야 미 공군은 주문한 전량을 확보하게 된다. 무려 24년이 걸리는 셈이다. 국방부는 당초 F-22A 전투기를 811억달러에 648대를 주문했다. 그러나 20년이 걸리면서 대당 가격은 1억 2500만달러에서 3억 6100만달러로 껑충 뛰었다. 국방부는 당초 주문량의 4분의1에 불과한 181대만 구입했다. 펜타곤이 도입하려던 첨단 무기들이 모두 같은 운명을 밟고 있다. 우주 적외선 위성시스템(SBIRS)은 대당 8억 2000만달러에서 34억달러로 315%나 비용이 증가했다. 비용이 늘다보니 당초 5대를 도입하려고 했으나 3대로 줄었다. 미 육군 등 전투병에게 도입할 컴퓨터 전투장비는 826억달러에서 1275억달러로 급증했다. 이는 국방 예산에 부담이 되고 있다.2001년 9·11테러 전 3000억달러(약 300조원)였던 미 국방 예산은 5년만에 5000억달러(약 500조원)를 넘었다. 현재 미 해군은 신형 잠수함과 구축함 개발 비용으로 1500억달러를, 공군은 전투기 재편 비용으로 3200억달러를, 육군은 지상군 전투장비를 디지털로 대체하는 데 1300억달러를 각각 쓰고있다. 미 회계감사원(GAO)은 지난 4월 미국이 도입하는 23개 신형 무기 시스템의 예산 초과액이 230억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펜타곤은 지난해 무려 80억달러라는 거액의 보너스를 무기 하청업체들에 뿌린 것으로 나타났다. 럼즈펠드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내부의 적으로 규정한 ‘펜타곤의 관료주의’는 느린 의사결정, 책임 회피,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럼즈펠드 국방장관마저 매년 30억∼40억달러의 세금을 낭비하는 조직이라고 개탄했었다. 미 최대 방위산업체인 록히드 마틴사의 전 최고경영자인 노먼 오거스틴은 뉴욕타임스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단 1명의 소비자(국방부)가 장악하는 곳이 바로 무기 시장”이라면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무조건 이 소비자에게 맞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방위산업의 경우 민간 기업과 달리 신형 무기를 개발하는 단계부터 국가 예산으로 비용을 부담한다. 그는 “새로운 무기 도입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와 중단할 때 그리고 예산을 늘리거나 심지어 삭감할 때조차 돈이 새고 있다.”고 말했다. 부패와 비리가 끊이지 않는 미 군수산업의 현실인 것이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카누선수 프레드릭손 사망

    4차례 하계올림픽에 출전해 조국 스웨덴에 6개의 금메달을 선사했던 게르트 프레드릭손이 지난 5일(현지시간) 숨졌다.86세.7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하계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남자 카누 선수로 꼽혔던 프레드릭손은 그동안 암과 투병하던 중 이날 그의 고향인 뉘셰핑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그는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해 1인승 카약 1000m와 1만m에서 우승했다. 특히 1만m에서는 2위를 무려 30.5초차로 제쳤다. 이 기록차는 역대 최대폭이라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밝혔다. 프레드릭손은 이후 3차례 더 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 4개와 은, 동메달 1개씩을 추가한데 이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7개의 금메달을 땄다.로스앤젤레스 연합뉴스
  • [부고] ‘한국축구 1세대’ 김화집 선생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원로 축구인 김화집옹이 7일 별세했다.97세. 지난해 5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 끝에 이날 오전 4시30분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별세한 김옹은 지난 1909년 평양에서 출생, 배재고보와 보성전문에서 현역시절 공격수로 활약했다.1930년대 경성축구단에서 대표선수를 지낸 뒤 심판으로 변신,1951년 한국 최초의 국제심판에 선임돼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영안실 33호(02-3010-2293). 영결식은 9일 오전 8시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치러진다.
  • 전략적 유연성 대비? 남북 교류 대비?

    미국 의회가 ‘한반도 유엔사령부 소속 회원국가의 군병력 증강과 관련한 연구’를 해달라고 자국 정부에 요구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으로 4일 알려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단순히 남북교류 확대에 따른 참모요원 확충 방안이라는 관측에서부터 전시작전통제권 이양과 전략적 유연성 정책에 따른 후속 대비책이라는 분석에 이르기까지 해석이 무성하다. 미 상원은 지난달 22일 통과시킨 ‘2007 회계연도 국방수권법’ 제1221조에서 국방장관에게 국무장관과 협의 하에 법 발효 180일 이내에 한반도 유엔사 회원국의 역할 확대에 관한 보고서를 상·하 양원에 제출토록 명시했다. 국방수권법은 보고서에 ▲유엔사 국가들이 한국 주둔 군사력을 증가시킬 경우 주한미군의 군사적·정치적 필요조건에 미칠 영향에 대한 평가 ▲유엔사의 대북 억지 임무를 보강키 위해 평시에 군병력을 배치토록 미국이 설득할 수 있는지와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 ▲추가 병력을 배치하는 참전국이 있을 경우 북한 핵 도전의 외교적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 등의 내용을 포함시키도록 했다. 보고서 제출 요구는 지난 3월 버웰 벨 사령관이 상원 군사위 청문회에서 “참전국들의 유엔사 요원 증원, 작전계획 수립 및 훈련 참관 등을 통해 유엔사의 실질적 다국적 연합 기구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한 발언에 이어 나온 것이어서 예사롭지 않다. 군 관계자들은 이같은 움직임이 정전상태인 한반도의 안보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도 있는 문제라며 촉각을 세우고 있다. 미군을 제외한 유엔군 소속 전투병력이 사실상 한반도를 빠져나간 마당에 유엔사 이름으로 병력을 다시 끌어모으려는 의도가 무엇인지가 관심의 초점이다. 우선, 전략적 유연성에 따른 후속조치라는 관측이 있다. 미군이 한반도를 수시로 드나듦에 따라 발생하는 병력공백을 유엔사 강화로 메우려는 의도라는 해석이다. 한편에선 전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에 이양된 이후 미군의 주도권이 약화되는 상황에 대비, 유엔사 강화로 위상을 유지하려는 의도란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정전상태인 한반도에 전투부대를 파견할 회원국이 없을 뿐더러, 중국·러시아 등의 반대가 명약관화할 것이란 정황을 들어 병력 증강은 현실성이 없다는 게 군사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때문에 미 의회가 언급한 ‘군병력(military force)’이 전투부대가 아니라 단순히 정전체제 관리를 맡는 참모요원(staff)을 지칭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벨 사령관은 3월 청문회에서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남북 수송로 2개의 개통으로 유엔사 강화 필요성이 더욱 긴요해졌다.”고 말했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서울 자치구 새얼굴] 정동일 중구청장 당선자

    정동일 중구청장 당선자는 ‘자수성가’한 중견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 출신이다. 중학교를 중퇴한 뒤 상경해 자동차 정비사·운전기사와 과일행상 등을 하며 학업을 마쳤고, 지금은 전세계에 체인점을 둔 굴지의 중견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성공한 CEO가 일선 구청장으로 변신한 것은 ‘배 고팠을 때 보리밥 한 그릇 준 사람의 은혜를 절대 잊지 말라.’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다. 그의 성공 발판이 된 ‘제 2의 고향’인 중구 발전을 위해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유년시절의 고생이 인생의 전환점 그는 5살 때 어머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시면서 궁핍하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 집안형편 때문에 국가재건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재건중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가 문을 닫아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15살 때 상경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날’(현재 어버이날)이 되면 아이들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았는데, 어머니가 있는 아이들은 빨간 카네이션을,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은 하얀 카네이션을 달았죠. 친구들이 ‘너 엄마가 없구나.’라는 말을 할 때마다 너무 서러워 아직도 가슴에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집안이 넉넉했다면 아마 지금의 내가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았겠지요.” 이런 어려움들이 자신을 강하게 만든 것은 물론,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게 했다. 그는 당선 직후 맨 먼저 양로원과 고아원 등 관내 사회복지시설과 재래시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내는 내 인생의 등대 서울로 올라온 그는 월급도 없는 자동차정비소에서 일을 하며 기술을 배웠다. 당시 운전면허자가 귀했던 탓에 군입대해 장성의 운전병으로 발탁됐고, 제대후 모 기업 이사의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여기서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아내 용옥화씨를 만났다. 당시 돈 한푼 없었던 자신을 택한 아내는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하며 하루 연탄 한 장으로 추운 겨울을 보내면서도 자신을 믿고 따라줬다. 그는 과일행상과 안주 배달 등을 하며 돈을 모았고,1990년 명동에 ‘둘둘치킨’이라는 조그만 치킨점을 냈다. 이 가게는 전국에 300여개가 넘는 체인점과 미국과 일본 등 전세계 7개국에 진출한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아내는 제 인생의 ‘등대’입니다. 지난 27년 동안 내가 힘들어 좌절할 때면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정치에 입문할 때도 제 뜻을 믿고 따라줬습니다.” ●세계적인 중심구로 만드는 게 목표 그는 1998년 중구의회 제 3대 구의원에 당선되면서 지역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2002년에는 서울시의회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등 지역사회 봉사에 앞장섰다. “구 발전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경영 노하우를 풀어놓을 생각입니다. 낙후된 중구를 대한민국, 더 나가 세계적인 중심구로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구민들이 저에게 기회를 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먼저 도심 재개발 사업을 통해 도심에 미국 맨해튼의 록펠러센터처럼 중구를 상징할 초고층 빌딩 건설을 추진할 생각이다.70∼8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을 만들어 강북의 ‘랜드마크’를 만든다는 복안이다. 또 특목고 유치, 사회보장 시스템 확대, 남산에 테마공원, 청계천에 자전거 도로 설치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구민들과 더 많은 유대관계를 갖기 위해 구청장실을 1층으로 옮길 생각이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프로필 ▲출생 1954년 전북 무주 ▲학력 동국대 경영학과, 북한학과 졸업, 동국대 행정대학원 석사 3학기(지방자치 전공),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 3학기(정치행정 리더십 전공) ▲경력 일동인터내셔널(프랜차이즈 둘둘치킨 회장), 동국대 총동창회 부회장, 중구경제포럼 이사장, 중국 옌볜대 객좌교수, 중국 지린대 겸직교수, 제 3대 중구의원,5·6대 서울시의원, 한나라당 서울시당 부위원장 ▲저서 희망을 튀겨내는 치킨 아저씨 ▲가족관계 용옥화씨와 1남2녀 ▲취미 등산, 독서 ▲존경하는 인물 이병철, 김구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일서 ‘희망 전도 회고록’ 내는 박치기왕 김일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일서 ‘희망 전도 회고록’ 내는 박치기왕 김일 씨

    영화 ‘시네마천국’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인생은 네가 본 영화와는 달라, 인생이 훨씬 힘들지….’ 그곳엔 영웅을 노래하는 시(詩)가 있었다. 고난과 감동의 파노라마, 눈물과 회한이 켜켜이 쌓인 흑백필름이 소리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현해탄이 대수로냐 타작질이 대수로냐/땀방울 핏방울로 모진 세월 이겨냈다/백두호랑이 포효하니 온 세상이 잠잠하다/박치기 한번, 맺힌 속 뚫어지고/박치기 두번, 주린 배 불러오고/박치기 세번, 대한이 하나된다’(시인 최석우) 그랬다. 살아 있는 전설로 여긴다. 배고프고 암울했던 시절, 희망과 용기를 선사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국민적 영웅이었다. ‘박치기 왕’으로 유명한 김일(78) 전 프로레슬러. 손바닥만한 이마 하나로 세계 무대를 쥐락펴락했다. 지금의 40대 이상에겐 ‘김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여전히 찐한 전율로 다가온다. 압둘 자바, 안토니오 이노키 등 내로라 하는 세계 거인들과 싸우다 결정적 순간에 박치기 한방으로 때려눕히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었다. 특히 호랑이 모습에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은 김일 선수가 일본 선수를 때려눕히는 광경은 민족적 울분을 씻어주는 대표적 카타르시스였다. 1960∼70년대 흑백TV조차 귀했던 시절, 마을 이장이 “오늘 저녁에는 김일 선수가 레슬링을 하는 날입니다. 밭일을 마치고 테레비가 있는 아무개 집으로 오세요.”라는 동네방송까지 할 정도였다. 또 당시 어린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김일 선수처럼 힘세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야.”라는 대답이 나오곤 했다. ●14년 투병에도 후배 시합땐 꼭 격려 이런 김씨가 영광의 세월을 뒤로 하고 14년째 투병 중이다. 박치기 후유증으로 뇌혈관 질환, 당뇨와 고혈압, 임파부종, 그리고 작년에는 거대결장으로 대장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휠체어에 의존할 만큼 거동 또한 불편하다. 그럼에도 후배들의 시합이 있을 때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현장을 찾아 격려해준다. 지난 10일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세계프로레슬링대회(WWA)에도 참석, 많은 관중들로부터 케이크와 꽃다발 세례를 받았다. 특히 김씨는 최근 동화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전도사로 나섰으며, 올해 안에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회고록을 펴낼 계획이어서 관심을 끈다. 서울 노원구의 모병원 7층 병실에서 김씨를 만났다.3평 남짓한 병실 벽에는 팬들이 그려준 초상화, 김씨를 칭송하는 시, 외신 인터뷰 기사, 그리고 왕년의 사진들이 쭉 붙어 있었다. 근황을 물었더니 먼저 일본에 다녀온 얘기부터 나왔다.“지난 3월 말인가 그래.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과거 레슬링을 같이하던 사람 100여명을 만났어. 반갑게 파티도 열어주더군.”이라며 웃는다. 스승인 역도산의 같은 문하생이었던 안토니오 이노키(63) 등과도 반갑게 해후했다. 또 역도산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부인 다나카 게이코(64)도 만나 옛날 얘기를 나눴다. 한 출판사 대표와는 올 연말까지 한·일 양쪽에서 회고록 발간을 약속했다. ●日 이노키와는 10년동문이자 라이벌 이어 동료 레슬러였던 장영철(73)씨와 41년만에 만난 얘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국내 레슬링계를 주도했던 김씨와 장씨는 65년 11월 ‘레슬링은 쇼’ 파문 이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응어리진 것 풀어야지, 그래서 부산으로 직접 갔어. 실로 오랜만이었지. 그도 나처럼 병원에 입원해 있어. 희한한 것은 치매증도 있는데 나를 보더니 금방 알아보더군.‘형님 내가 옛날에 철이 없어서 그랬어요.’라고 해 손 붙잡고 울었지 뭐….” 장씨는 파킨슨병과 중풍, 약간의 치매증세로 입원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180㎝의 키에 100㎏의 몸무게였으나 지금은 65㎏으로 줄어들었다. 김씨 역시 1m85㎝의 키에 130㎏의 몸무게가 75㎏로 줄어들었다. 또 현역 때 한 끼에 생선 99마리까지 먹기도 했지만 지금은 죽과 같은 가벼운 음식을 먹고 있다. 비록 김씨가 병상에서 쓸쓸히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팬들의 방문은 여전하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 지만씨가 얼마전 결혼식 직후 다녀갔다.“박 전 대통령이 서울 정동에 ‘김일체육관’을 지어주셨지.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이 문화체육관으로 바꿔버렸어. 강제로 뺏어갔지….” ●박 전 대통령이 ‘김일체육관´ 지어줘 할아버지 손잡고 오는 어린이도 있다. 최근에는 병마와 싸우는 한 어린이와의 만남을 전해들은 동화 작가 고정욱씨가 ‘박치기왕과 울기대장’(대교출판)이란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김씨가 동화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한 어린이와 진솔하고 희망이 담긴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 훈훈하다. 다음달 초 출판 기념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우문 하나 불쑥 던졌다. 시합 때 피가 나면서까지 왜 박치기를 했느냐고 하자 “이마는 조금만 긁혀도 피가 나와.”하면서 피식 웃는다. 박치기는 피눈물 나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얻어진 기술이라고 했다. 재떨이, 벽, 나무 등 닥치는 대로 이용해 이마 근육을 단련시켰다고 했다.“다른 선수와 달리 독특한 기술을 익혀야 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다. 일화 한토막.“링 로프에 있는 상대 선수에게 다가가 박치기를 했는데 피해버렸어. 때마침 로프의 고무가 벗겨져 있어서 내부에 있는 와이어에 부딪혔지. 이때 눈알이 튀어나왔어. 급한 김에 손으로 밀어넣고 시합했지. 끝나고 집에 가서 소고기로 마사지를 했어. 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안 좋아졌지.” ●선수시절 시합중 눈알 나온 적도 있어 국내 레슬링이 왜 시들해졌느냐고 하자 “TV 중계가 필요해. 축구나 야구는 매일 하는데 레슬링은 방송에서 멀어지고 있어. 한달에 한두번이라도 중계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하고 아쉬워했다. 스포츠를 워낙 좋아하는 김씨는 요즘 독일 월드컵 기간이어서 축구중계를 보느라 TV 앞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일본에서 활약 중인 최홍만의 이종격투기 시합도 자주 본다. “희망이 있어야 인생이 아름다워져. 그걸 버리면 안 되지, 허허허….” 불치병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도하는 박치기왕 김일 할아버지. 그의 미소에는 세계를 제패한 불굴의 투혼이 여전했다. ■ 그가 걸어온 길 ▲1929년 전남 고흥 출생 ▲57년 역도산 문하생 1기입문 ▲58년 ‘오오키 긴다로’라는 이름으로 데뷔 ▲63년 WWA세계 태그챔피언 획득 ▲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65년 극동헤비급챔피언 ▲67년 WWA세계챔피언 ▲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챔피언 ▲95년 도쿄돔에서 은퇴식 ●상훈 국민훈장석류장(94년), 체육훈장맹호장 (2000년) 주말매거진 We팀장 km@seoul.co.kr
  • [World cup] 닮은꼴 양팀 공수주역 벼랑끝 창을 겨누다

    [World cup] 닮은꼴 양팀 공수주역 벼랑끝 창을 겨누다

    대한한국 16강 진출의 명운이 걸린 스위스와의 벼랑끝 승부(24일 새벽 4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최전방과 중원, 후방을 가리지 않고 벌어질 처절한 사투가 불을 뿜을 전망이다. 양 국가의 지역별 사령관을 통해 승부를 점쳐본다. ■ 중원사령관 박지성vs포겔 ‘우정은 승부 뒤에 나누자.’ 한국대표팀의 ‘산소 탱크’ 박지성(25·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스위스의 정신적 지주 요한 포겔(29·AC밀란)이 우정의 악수를 잠시 미룬 채 중원에서 격돌한다. 둘은 이영표(토트넘)와 함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휘를 받으며 PSV에인트호벤을 네덜란드 리그 정상과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으로 이끈 주역. 포겔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1999년부터 에인트호벤에서 뛰었고, 박지성은 2002년 말 합류해 2년 반 동안 진한 우정을 쌓았다. 지난해 각각 빅리그인 잉글랜드와 이탈리아로 둥지를 옮겨틀었다. 둘은 포지션상 충돌이 불가피하다. 박지성은 일단 오른쪽 윙포워드로 선발 출장해 스위스 측면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설기현, 안정환 등의 투입 여부에 따라 공격형 미드필더로 자리를 옮겨 중원 지배에 나선다. 이른바 ‘지성 시프트’. 이때부터 박지성과 포겔은 사활을 건 중원 쟁탈전을 펼치게 된다.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비며 다른 선수들에게 공격 기회를 열어주는 박지성을 빼놓고는 한국 축구를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프랑스전에선 기적적인 동점골을 터뜨린 영웅이다. 그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지고 있다. 포겔도 박지성 못지않다. 한국으로 치면 ‘진공 청소기’ 김남일(수원)과 같은 역할을 맡는다. 유럽예선 전 경기를 풀타임으로 뛰며 강철 체력을 과시했다. 본선 두 경기에서도 역시 풀타임을 소화하며 팀의 무실점을 일궈냈다.18세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이듬해 주장 완장을 찰 정도로 리더십이 탁월하다. 풍부한 경험을 축적해 젊은 혈기가 뜨거운 스위스 대표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포겔은 “박지성, 이영표와 부딪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며 선전을 다짐했고, 박지성도 “포겔의 플레이를 잘 알고 있다.”며 중원 지배의 각오를 다졌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수문장 이운재 vs 추베르뷜러 한국-스위스전의 운명은 ‘거미손’ 이운재(33·수원)와 ‘추비’ 파스칼 추베르뷜러(36·FC바젤)의 활약과 궤를 같이할 전망이다. 둘은 나란히 1994년 A매치에 데뷔했지만 이후 행보는 전혀 다르다. 94미국월드컵에서 주전 최인영에 이은 백업 골키퍼로 선발된 이운재는 독일전에서 45분간 골문을 지키며 월드컵 신고식을 치렀다. 모두들 ‘이운재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96년 결핵에 걸려 2년간 투병을 하는 새 98프랑스월드컵의 수문장은 김병지(FC서울)의 몫이 됐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선 이운재는 한국의 독보적인 골키퍼로 자리를 굳혔고, 이번 스위스전에서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출장)’ 멤버로 가입하게 된다. 한국 선수로는 7번째이자 골키퍼로는 처음. 이운재는 토고·프랑스전에서 5개의 선방을 기록하며 극적인 역전승과 무승부를 견인, 경기당 실점률 ‘1’을 마크했다. 당초 이운재는 키 182㎝에 몸무게 82㎏까지 불어나 다소 무뎌 보였다. 하지만 토고·프랑스전에서 순간 판단능력과 수비진 조율 능력을 발휘, 건재함을 한껏 과시했다. 추베르뷜러는 이운재보다 세 살 많지만 A매치는 불과 42경기를 소화했다. 그의 축구인생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10대 시절 가정형편상 배관공으로 일하며 밤에 공을 찼다. 각고의 노력 끝에 20세때 프로팀에 입단했지만 부상이 찾아왔고 그를 신임하던 감독은 훌쩍 떠나버렸다. 하지만 추베르뷜러는 FC바젤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요르그 슈티엘 골키퍼가 은퇴하자 A매치 데뷔 10년 만에 비로소 ‘1번’을 차지했다. 스위스 국민들이 ‘추비’라는 애칭으로 부를 만큼, 늦깎이 추베르뷜러에 대한 믿음은 대단하다.197㎝,98㎏의 큰 체구의 추비는 탁월한 공중볼 처리 능력과 덩치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순발력으로 본선 2경기에서 무려 10개의 선방을 기록, 한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공격대장 안정환 vs 프라이 축구는 무엇보다 골이라는 결과로 말한다. 이 때문에 운명의 한국-스위스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매치업은 양팀의 킬러 안정환(30·뒤스부르크)과 알렉산더 프라이(27·스타드 렌)다. 둘은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 안정환은 화려한 공 컨트롤과 드리블을 바탕으로 반박자 빠른 슈팅을 날리는 ‘셰도 스트라이커’ 스타일. 이에 견줘 프라이는 한국의 이동국(포항)처럼 힘을 바탕으로 한 포스트플레이로 다른 공격수들에게 공간을 창출해주는 전형적인 ‘타깃맨’ 스타일이다. 안정환은 ‘골든보이’라는 별명답게 한·일월드컵과 이번 대회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빛을 발한, 큰 경기에 강한 스타다. 특히 상대팀의 체력이 떨어진 후반 ‘조커’로 기용돼 반드시 한 방을 터뜨리고야 마는 ‘해결사’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A매치 63경기에서 17골을 터뜨렸고 월드컵 본선 통산 3골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미 알 자베르(34·알 힐랄)와 함께 아시아 최다 기록을 공유하고 있다. 이탈리아 세리에A와 일본 J-리그, 프랑스 리그와 독일 분데스리가까지 해외 프로팀 경험이 풍부하다. 토고전에서 선제 결승골을 터뜨린 프라이는 유럽 지역예선 10경기에서 7골을 폭발시키며 스위스를 12년만에 본선으로 이끌었다. 위치 선정과 파워풀한 슈팅을 바탕으로 한 골 결정력이 탁월하다.2003년 1월 프랑스 리그 렌으로 이적한 뒤 첫 시즌 19골, 다음 시즌에는 20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근성이 뛰어나지만 다혈질 성격 탓에 유로 2004 잉글랜드전에서 스티븐 제라드(26·리버풀)에게 침을 뱉어 3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한국 수비진이 이점을 이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A매치 47경기에서 26골을 넣어 스위스 축구 사상 6번째로 많은 골을 기록하고 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마이애미 NBA 챔프

    마이애미 히트가 창단 18년 만에 챔피언의 꿈을 이뤘다. 마이애미는 21일 아메리칸에어라인스 아레나에서 열린 미국프로농구(NBA) 파이널 6차전에서 댈러스 매버릭스에 95-92로 승리,2연패 뒤 4연승으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파이널의 영웅은 ‘떠오르는 태양’ 드웨인 웨이드(24). 생고무같은 탄력과 동물적인 운동능력을 가진 3년차 웨이드는 이날 36점 10리바운드 5어시스트 4스틸 3블록슛을 기록,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웨이드는 2003년 드래프트에서 르브런 제임스(클리블랜드)와 카멜로 앤서니(덴버)에 밀려 전체 5순위로 입단했지만, 가장 먼저 우승과 MVP를 차지하며 자존심을 한껏 곧추세웠다. 스포트라이트는 웨이드에게 쏟아졌지만 ‘노병’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마이애미의 우승은 불가능했을 것. 마이애미 사장에서 시즌 중 코트로 전격 복귀한 ‘명장’ 팻 라일리(61) 감독과 ‘공룡센터’ 샤킬 오닐(34)은 각각 생애 5번째 및 4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의 기량을 지니고도 우승반지가 없어 ‘무관의 제왕’으로 불렸던 가드 게리 페이튼(38)과 치명적인 신장질환으로 투병과 운동을 병행한 센터 알론조 모닝(36)도 평생의 한을 풀었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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