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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병중 ‘50억 복권’ 당첨男 “돈 모두 쓰겠다”

    투병중 ‘50억 복권’ 당첨男 “돈 모두 쓰겠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란 말이 틀리지 않나보다. 무려 500만 달러의 복권당첨 행운이 신장질환으로 수년 째 투병 중이었던 50대 미국 남성의 손으로 들어갔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 사는 필립 위뎀(54)은 수년째 신장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일주일에 3번씩 신장투석을 하고 모진 치료를 견뎌내느라 다니던 직장도 그만둔 지 오래. 신장이식이 시급한 상태지만 조건이 맞는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아 막막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평생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투병의 고통은 그를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위뎀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25달러(3만원)을 주고 구입한 복권들 가운데 한장이 500만 달러(한화 약 54억원)의 잭팟을 터뜨린 것. 위뎀은 “여전히 믿기 어렵다.”며 벅찬 심경을 드러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당첨금을 수령한 위뎀은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취미로 복권을 자주 샀었지만 한번도 이렇게 큰 금액에 당첨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기뻐했다. 위뎀은 당첨금액의 상당부분을 어려운 이웃들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 나눌 계획이다. 그는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자 자선단체에 당첨금 일부를 기부할 생각”이라면서 “투병할 때 도와줬던 친구들을 위해서도 한 턱 크게 쏘겠다.”고 밝혔다. 치료비와 수술비를 빼놓고는 당첨금액 전부를 흔쾌히 쓰겠다는 것. 위뎀은 “힘든 나날들 가운데 이런 행운이 찾아와서 기쁘다.”면서 “하루빨리 신장 기증을 받아서 많은 이들과 기쁨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소망을 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그림 통해 꿈과 희망 주며 살고 싶은데…”

    “그림 통해 꿈과 희망 주며 살고 싶은데…”

    경남 창원의 명곡교회에서는 지난 11일부터 ‘못다한 이야기’라는 소박한 그림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전시회의 주인공은 지적장애 3급인 노태준(29)씨. 2009년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부터 ‘지적장애인 청년화가’로 알려진 주인공이다. 그의 이번 전시회가 특별한 것은, 어쩌면 생애 마지막 전시회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폐암 4기 판정… 병세 급격히 악화 ‘노씨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한 가족들은 애써 그에게 이번 전시회를 마련해 주었다. 노씨가 지난해 6월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던 것.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화가가 되겠다던 노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상심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던 가족들은 급기야 지난 4월 주치의로부터 ‘길어야 2개월’이라는 선고를 전해 들었다. 그런 가운데 최근 들어 노씨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가족들은 그가 그려 놓은 작품 30여점을 모아 부랴부랴 전시회를 열었다. 급하게 전시회를 준비했으나 장소가 마땅찮아 노씨가 다니던 교회를 전시장으로 삼았다. 작품 팸플릿도 그림과 안내문을 실은 간단한 엽서로 대체했다. 노씨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고등학교 때. 미술을 전공한 교회 지인의 딸로부터 처음 그림을 배웠다. 주변에서는 “지적장애인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세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며 그를 격려했다. 그 후 2006년부터 노충현 화백으로부터 그림을 배우며 유화와 드로잉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지적장애인 청년화가’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2009년 첫 개인전 ‘하느님이 채우신 그림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회는 기독교와 풍경을 주제로 한 유화와 드로잉으로 구성됐다. 들판에서 기도하고 있는 예수를 그린 ‘광야의 기도’와 베네치아의 풍경을 담은 ‘물의 도시’가 가족들이 꼽는 대표작. 노씨는 힘든 암투병 기간 동안 그림을 5점밖에 그리지 못했다. 노씨의 어머니 최영혜(56)씨는 “암투병하느라 더 많은 그림을 그리지 못해 아들이 무척 아쉬워한다.”고 전했다. ●‘광야의 기도’ 등 30여점 선보여 안타깝게도 생애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전시회에 그는 한 번밖에 가 보지 못했다. 암세포가 온몸으로 전이돼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고열에 시달리는가 하면 호흡도 점차 가빠지고 있다. 가족들이 부를 때야 겨우 의식을 차리고 간단한 대화를 나눈다. 병상의 노씨는 가족들에게 “하느님이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을 주셨기 때문에 전시회도 열 수 있는 것”이라면서 “찾아 주는 분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어머니 최씨는 “아들이 투병 중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명랑수녀님 귀여운 춤사위에 앙코르 쏟아지다

    명랑수녀님 귀여운 춤사위에 앙코르 쏟아지다

    누구도 그를 4년째 암과 싸우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 자신조차 마찬가지였다. 무대 위에 올라 얼굴 가득 눈웃음 지으며 얘기했다. 노래에 맞춰 고운 손동작 만들어가며 춤도 췄다. 삶을 힘겨워하는 이들의 고단함을 듣고 다독거려주는 위로의 말은 진지하면서도 유쾌했다. 2008년 직장암 진단을 받은 뒤 오히려 행복 지수가 높아졌다는, 그래서 4년째 ‘명랑 투병’하고 있다는 이해인(66) 수녀다. 그가 최근 내놓은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샘터 펴냄)는 두 달 만에 10만부가 팔렸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 지난 14일 저녁 서울 광화문 KT 드림홀에서 열린 이해인 수녀의 북콘서트는 200석 객석이 가득 찬 가운데 진행됐다. ‘책의 노래 서율(書律)’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밴드가 이해인 수녀의 시로 만든 노래를 불렀고, 배우 소유진씨가 수녀의 시 ‘6월의 장미’를 낭송했다. 오랜 지인(知人) 강지원 변호사도 예정에 없던 시(‘잎사귀 명상’) 낭송을 마다하지 않았다. 50~60대 여성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객석에는 젊은 남성들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객석과의 대화. “얼마 전 친한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해줘야할지 모르겠어요.” 한 젊은 남성의 간절한 고백에 객석은 순간 숙연해졌다. 너무 ‘진지 모드’였다고 판단했는지, 남성은 재빨리 “기도하는 것 말고요. 기도는 이미 하고 있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이내 쏟아진 폭소. 더불어 웃던 이해인 수녀는 “나, 기도하라는 말 안 하려고 했는데….”라고 능청스럽게 응수한 뒤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들이 제게 보내준 편지를 모두 모아 (친구의) 남은 가족들에게 보내”줬단다. 그 친구들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 장영희 서강대 교수, 법정 스님, 박완서 소설가가 포함돼 있다. 가까운 벗들을 최근 몇 년 새 잇달아 떠나보내야 했던 그다. “친구가 생전에 좌절했거나 못다 이룬 꿈이 있다면 그것을 대신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은 방법 아닐까요. 슬픔 자체에 빠져 그리워하는 것도 치유의 한 과정이죠.” 그래도 못내 마음이 쓰였는지 수녀는 “이메일을 보내 주면 더 깊이 생각해 답하겠노라.”고 했다. 결혼하라는 성화에 너무 시달리다보니 가족조차 싫어진다는 한 여성의 하소연에는 “상상이별을 해보라.”고 했다. “매 순간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용서 못할 게 없다.”는 게 이해인 수녀의 얘기다. 올해 입사했다는 한 여성 신입사원은 “20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어릴 때 수녀원에 들어와 교과서 같은 말만 들으면서 평생 살아 별로 해 줄 말이 없는데 어떡하나.”라는 수녀의 재치 있는 응수에 객석은 또 한번 웃음바다가 됐다. 수녀는 이내 정색한 뒤 “매일 새로운 기회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 기회를 잘 찾으세요. 본받고 싶은 이의 전기를 찾아 읽는 것도 좋은 일이죠.”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콘서트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율동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요란한 박수와 함께 객석에서 터져나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수줍은 표정으로 무대 위에 선 이해인 수녀는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로 시작하는 ‘사랑의 송가’를 온몸으로 불렀다. 수녀복을 살짝살짝 들어올려 고운 선을 만들고, 고개 들어 허공을 쳐다보는가 하면 손가락도 살짝살짝 비틀었다.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찍는 사람, 앙코르를 연신 외쳐대는 사람, 기립박수를 치는 사람, 시쳇말로 객석은 ‘뒤집어’졌다. ‘명랑소녀 이해인’은 사양하는 법을 몰랐다. 동요 ‘동구 밖 과수원길’을 진지한 표정으로 부르며 다시 한 번 열심히 춤을 췄다. 환하게 웃는 얼굴 어디에도 암세포의 그림자는 없었다. “이렇게 독자들을 만나니 병도 잊을 수 있고, 더 행복하다.”는 이해인 수녀는 “마지막 날까지 계속 글 쓰고 희망을 나누고 싶다.”고 말하며 콘서트장을 떠났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부고] ‘스파이더맨’ 제작자 지스킨

    영화 ‘스파이더맨’의 제작자인 로라 지스킨이 12일(현지시간) 숨졌다. 61세. 미국 엔터테인먼트산업재단은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던 지스킨이 이날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의 자택에서 숨졌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지스킨은 35년 이상 영화 제작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프리티 우먼’을 비롯해 ‘노 웨이 아웃’,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등의 영화 제작을 주도했으며 숨지기 전까지 ‘스파이더맨 4’ 제작에 몰두했다.
  • 암투병 소녀의 ‘죽기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화제

    암투병 중인 영국의 15세 소녀가 병상에서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가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담은 블로그가 감동을 주고 있다고 영국 데일리 메일이 보도했다. 영국 컴브리아 주(州) 울버스톤에 사는 앨리스 파인(15)은 4년 동안 림프계에 발생하는 암의 일종인 ‘호지킨 림프종’을 앓고 있다. 긴 머리는 항암치료를 하면서 모두 빠졌다. 언제 병마가 그녀를 데려갈지 모르는 가운데 2007년 영화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 주연의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감명 깊게 본 이 소녀는 엄마의 제안으로 그녀만의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담은 블로그를 개설했다. 그녀의 리스트에는 그녀의 애완견인 ‘마블과 예쁜 사진 남기기’, ‘마블과 애완 쇼에 나가보기’, ‘가족과 사진 찍기’, ‘캐러밴 차에서 지내보기’, ‘미용실에서 머리해보기’, ‘케냐 여행하기’, ‘상어와 수영해 보기’,’바다에서 고래보기’, 그녀의 우상인 영국 보이밴드 ‘테이크댓 만나 보기’등 15세 소녀의 감성이 묻어 있는 리스트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골수 기증에 등록하게 하기’도 있다. 그녀의 블로그는 영국, 호주언론을 통해서 알려지면서 그녀를 응원하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영국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까지 ‘골수기증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 앨리스는 최근 글에서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며 “많은 사람들이 이 병의 위험성과 골수 기증에 대해 좀 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김경태 tvbodaga@hanmail.net
  • “어머니 유언에…” -100kg 감량한 남성 화제

    “어머니 유언에…” -100kg 감량한 남성 화제

    “어머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미국의 한 남성이 12개월 만에 ‘반쪽’으로 변신해 화제를 모았다. 폭풍 다이어트에 성공한 남성은 “수년 전 사망한 어머니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이유를 밝혔다. 미국 조지아 주에서 태어난 알렉스 레스페스(23)는 불과 1년 전 만해도 육중한 몸매 때문에 혼자서 화장실을 갈 수 없었고 현관문에 몸이 끼여 제대로 외출도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불과 12개월 만에 레스페스는 180도 변신했다. 200kg를 육박하던 몸무게가 절반수준인 92kg까지 빠진 것. 최근 미국 ABC방송 쇼프로그램에 출연한 레스페스는 몰라보게 날씬해진 몸매를 공개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4년 전 암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리며 독하게 다이어트에 도전했다고 밝혔다. “아들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어머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려고 3개월 동안 약 40kg를 감량하는 데 성공한 것. 레스페스는 이후 9개월 동안 꾸준히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하며, 수술을 받지 않고도 몸무게를 100kg 이하로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뚱뚱했을 때는 외출하는 게 무서웠지만 이젠 자신감이 생겼고 행복하다. 곧 취업도 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또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건강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게 안타깝다.” 며 “하늘에서라도 어머니가 나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흐뭇하고 자랑스러워 하셨으면 좋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전범’ 믈라디치 법정에 첫 출두

    보스니아 내전의 특급 전범 용의자로 지난달 26일 전격 체포된 라트코 믈라디치(69)가 법정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믈라디치는 3일 오전(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제1법정에 출두해 인정신문을 받았다. 믈라디치는 회색 양복에 모자를 썼으며, 다소 초췌했지만 변호인이 “암 투병 중”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믈라디치는 “나는 국민과 조국을 지켰을 따름”이라고 항변했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내가 장도영이오’… 5·16 그날의 육참총장은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장도영이오’… 5·16 그날의 육참총장은 눈빛으로 말했다

    31일 아침(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 공항에서 서북쪽으로 40여분 떨어진 소도시 윈더미어에 들어서자 쾌적하고 고급스러운 주택가가 펼쳐졌다. 택시 기사는 “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라면서 “프로골퍼 타이거 우즈, 프로농구(NBA) 선수 샤킬 오닐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스타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영화배우 존 트래볼타도 한때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집값이 적게는 수백만 달러, 많게는 수천만 달러를 호가할 것이라고 했다. 50년 전 이 땅을 뒤흔든 5·16의 주도 세력도, 그렇다고 그들과 맞선 저항 세력도 아니지만 그를 빼놓고는 5·16을 얘기할 수 없는 인물. 전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그가 그곳에 있었다. 한국 현대사 그 격동의 세월을 뒤로한 채 그는 이역만리 미국 동남부의 어느 한적한 동네에서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써 가고 있었다. 그는 비록 ‘얼굴마담’ 격이기는 했으나 한때 ‘혁명세력’에 의해 내각 수반으로까지 추대됐었다. 잠시나마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머물렀던 인물이 이국 땅에서 말년을 보낸 경우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말고 예를 찾기가 어렵다. 장씨는 1962년 미국에 건너온 뒤 10년 전인 2001년 조용히 회고록을 낸 것 말고는 한국과의 연락을 거의 끊다시피 하며 지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마저 얼마 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미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을 만큼 그는 철저히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던 인물이다. 타이거 우즈의 저택에서 5㎞ 정도 떨어진 동네에 자리한 장씨의 집은 고급 골프장 건너편의 단층 저택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부인 백형숙씨가 문을 열어 줬다. 그녀는 남편 장씨가 3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아 의사소통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마비 증세… 거동 힘들어 장씨는 파킨슨병을 진단받기 전에 세 차례 가벼운 뇌출혈이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지나친 데다 크게 한번 넘어지면서 큰 병을 얻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사실상 치매 증상을 앓고 있다고 백씨는 말했다. 몸 이곳저곳이 마비되면서 장씨는 휠체어가 없으면 거동을 할 수 없는 처지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목욕하는 것도 간병인과 부인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식탁에서 수저를 드는 정도만 겨우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백씨는 말했다. 장씨는 거실에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조차 날아갈 것처럼 야윈 노인의 모습이었다. 두툼한 얼굴에 건장한 체격의 39세 육군 참모총장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옛날 부리부리했던 눈매가 아직 살아 있어 ‘내가 장도영이오.’라고 외치는 듯했다. “서울신문 특파원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넨 뒤 “올해가 5·16 50주년인데 소감이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눈으로 기자의 인사를 받은 장씨가 입을 열었다. 가녀린 목소리. 들릴 듯 말 듯했다. “다 넘어갔어. 어쩔 수가 없었어.” 온전히 답변할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부인 백씨가 눈빛을 반짝이며 거들었다. “다 넘어갔대. 어쩔 수가 없었대.” 투병 중에 어렵게 말문을 연 남편이 ‘대견한 듯’ 입에는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박정희·김종필씨를 기억하십니까.”라고 묻자 장씨는 “그럼, 기억하지….”라고 답했다. “그분들한테 서운한 감정은 없으세요.”라고 물었다. 장씨는 “음…. 그렇지 않아요. 서운한 건 없어요.”라고 했다. 50년 세월은 그렇게 감정의 때마저 지워버린 듯했다. 뒤로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그러나 더는 말이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채 다시 기억의 저편을 더듬기 시작했다. 백씨는 “남편이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하도 말을 많이 해서 내가 그만하라고 말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저렇게 말을 못한다.”고 했다. 3년 전 병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부부는 같이 교회에 다니고 골프도 즐겼지만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장씨는 부인이 카메라를 가리키면서 웃어 보라고 하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악수할 때 어렵게나마 손을 내밀기도 했다. 마비 증상이 극도로 심각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장씨는 마비·치매 증상 말고 다른 질병은 없기 때문에 병원에 갈 일은 많지 않고 대신 부인이 타 온 약으로 투병 중이다. 백씨는 “(남편이) 병을 얻은 뒤로 잠자는 시간이 아주 많아졌다. 아기처럼 많이 잔다.”고 했다. 백씨는 남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김종필씨 등에 대해 가족 앞에서도 울분을 토로하거나 비난한 적은 없다고 했다. 장씨가 “외국에 나와서 자기 나라를 욕하면 누워서 침뱉기”라며 일절 험담은 안 했다는 것이다. 백씨는 “우리가 박정희씨 욕을 안 하니까 생활비를 보태 줘서 그런가 보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그쪽으로부터 땡전 한 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정착 초기엔 친정의 도움을 받았고, 백씨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고 했다. 백씨의 친정은 당시 장안의 유명 병원이었던 ‘백내과’였다. 그녀는 “미시간에 살 때 정보요원 같은 사람들이 항시 우리를 감시했고, 우리와 알고 지내는 교민 중에서도 감시 요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7년간 자녀들과 생이별 백씨는 “우리 부부가 미시간 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지정해준 것”이라고 했다. 군사정부가 처음엔 장씨를 하버드대로 보내려 했으나 거기서 자칫 똑똑한 한인 학생들을 부추겨 반정부 활동을 할 것을 우려했고, 나중엔 캘리포니아주립대(UCLA)로 보내려 했으나 그쪽에도 흥사단 등 교민들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교민이 거의 없는 미시간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장씨 부부는 미국으로 사실상 쫓겨난 뒤 자녀들과 7년간 생이별하고 지냈다. 일단 미국에 정착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에 친정어머니가 아이들을 맡아 키웠다. 나중에 모두 미국으로 데려온 4남 1녀의 자녀 중 둘이 하버드대를 졸업하는 등 말썽 피운 자식이 하나도 없이 잘 자라준 게 고맙다고 백씨는 말했다. 그중 장씨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장남은 풍산금속 회장 딸과 결혼, 10년 정도 살았다고 백씨는 말했다. 그런데 백씨에 따르면 묘하게도 풍산금속 회장의 아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 근영씨와 결혼생활을 했었다. 장씨와 박정희 가문의 인연이 자식 대에서 불쑥 얽힌 셈이다. 백씨는 원래 5·16 당일이 딸 생일이라 점심에 육군본부 장성 부인들을 초청해 식사할 계획이었는데, 새벽에 정변이 일어나 놀랐다고 했다. 백씨는 “5·16 이전에 남편이 집에서 쿠데타 조짐이 보인다는 얘기를 한 적은 없다.”고 했다. 두 시간가량의 인터뷰를 마친 뒤 백씨는 “오늘은 남편 이발하는 날”이라면서 외출에 나섰다. 자식들이 사 줬다는 승용차 조수석에 남편을 태우고 뒷자리에는 미국인 여성 간병인을 태운 뒤 백씨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물끄러미 쳐다만 보는 장씨에게 차창 너머로 답례 없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글 사진 동영상 윈더미어(플로리다)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年 2만명이 심정지로 쓰러지는데…

    年 2만명이 심정지로 쓰러지는데…

    11년 전, 경기 도중 그라운드에 쓰러졌던 롯데 자이언츠 임수혁 선수는 오랜 투병 끝에 끝내 숨졌다. 유족은 물론 전문가들도 “수만 관중 가운데 누구 하나 심폐소생술만 빨리 했더라도….”라는 아쉬움을 나타낸다. 1일 밤 12시 35분 SBS 특집 다큐멘터리는 이 문제를 다루는 ‘당신이 구하는 생명-심폐소생술 5분’을 방영한다. 심장이 일시적으로 기능을 중단하는 심정지는 의외로 많다. 통계로 따져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연간 2만명 정도의 환자가 발생한다. 이 가운데 30% 정도는 평소에 아무런 문제 없이 건강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온몸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이 갑작스레 정지하면 인체는 치명타를 입는다.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서 저산소증이 발생하는데 4분 안에 심폐소생술을 받지 못하면 뇌 손상이 시작된다. 10분이 지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때문에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곁에 있던 누군가가 재빨리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간단해 보이는 이 작업이 실제로는 그리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은 2.4%. 절대적으로도 수치가 낮지만 미국, 일본 같은 선진국이 10% 안팎을 기록하는 것에 비해서도 크게 낮다. 심정지 환자의 생존율이 가장 높은 곳은 미국 시애틀이 꼽힌다. 생존율은 11.2%. 이런 생존율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친다. 심폐소생술을 비롯해 각종 응급처치 교육을 시킨다. 직장에서도 요구한다. 입사 때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기본으로 요구하는 회사들이 많다. 여기다 ‘메딕 원’(Medic One)이라는 시스템도 구축해 뒀다.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소방대원만 출동하는 게 아니라 ‘패러메딕’(Paramedic)이라 불리는 전문가가 함께 동행하도록 한다. 패러메딕은 심폐소생술을 비롯해 각종 응급처치 요령에 숙달된 전문가들이다. 일본은 아예 심정지 환자에게 소생술을 시행할 수 있는 장비인 자동제세동기(AED·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를 곳곳에 설치해뒀다. 치과, 정부 사무실, 도서관, 전망대는 물론,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는 자판기에도 AED를 넣어 뒀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뿌려둔 AED 장비만 해도 모두 30만대. 덕분에 심정지 환자 생존율을 2004년 2%에서 2008년 12.8%까지 끌어올렸다. 한국에서도 이런 노력은 시작됐지만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무엇을 더 해야 할까.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투병정보 나누고 치료의지 다지는 1박2일

    투병정보 나누고 치료의지 다지는 1박2일

    지난 28일 오후 5시 충남 금산군 마달피삼육수련원. 화창한 날씨 속에 이름표를 목에 건 사람들이 모여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족끼리 배드민턴을 치는가 하면 대여섯명의 아이들은 따로 모여 축구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모두 백혈병 환자와 그 가족들이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모두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백혈병 환우들의 모임인 ‘루산우회’의 일곱 번째 캠프가 이곳에서 열렸다. 루산우회는 백혈병(leukemia)의 영어이름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다. 루산우회를 만든 최종섭(58)씨는 덥수룩한 수염에 구릿빛 피부의 도드라진 외모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백혈병 환자들은 약물 부작용으로 얼굴이 창백하고 붓는 특성을 보이지만 최씨는 산을 타느라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탓에 누가 봐도 백혈병 환자는 아니었다. 2000년에 백혈병이 발병했다는 최씨는 “의사한테 전부 다 꼬치꼬치 묻기도 어려워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병원 안에서 백혈병 환자들을 상담해 주다가 주치의인 김동욱 교수와 상의해 루산우회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루산우회 소속 백혈병 환자들은 매월 산을 오르기도 하고, 해마다 캠프를 열어 투병 의지를 다지고 의료진과 소통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 캠프에 참여한 환자들의 병력과 치료 경험은 비슷하지만 사연은 제각각이다. 16년째 투병 중인 주모(47)씨는 1997년 3월 형으로부터 골수를 이식받아 완치됐다가 다시 재발했다. 그는 완치 후 괜찮겠지 싶어 건강관리에 소홀했던 게 문제였던 듯하다고 말했다. “백혈병에 걸리기 전 일상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데다 술과 담배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나쁜 생활습관을 완치 후에도 깨끗이 털어내지 못한 게 문제였던 것 같다.”는 주씨는 “재발 후 글리벡을 투약하고 있는데, 지금은 괜찮다.”며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상심과 함께 또 다른 희망이 묻어났다. 정모(45)씨는 2000년부터 백혈병과의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치료제에 적응이 안 돼 구토증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 때문에 직장까지 그만둬야 했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정씨는 “그나마 가족들이 나를 이해하고 도울 수 있어 행운이다. 루산우회에서 동료 환우들을 보면서 치료 의지를 다진다.”고 귀띔했다. 어둠에 잠긴 밤 10시. 캠프의 하이라이트 격인, ‘환우들의 멘토’ 김 교수의 특강이 이어졌다. 강당에 모인 230여명의 환자와 가족들은 김 교수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그의 강연을 경청했다. 휴대전화로 김 교수의 강연을 녹음하는가 하면 꼼꼼히 필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약이 나와 백혈병 완치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는 김 교수의 말에 모두가 기대에 부푼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의가 끝난 후 젊은 부부가 환아인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김 교수를 찾아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 의사인 한 참석자는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대신해 캠프에 참석, 김 교수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애써 태연한 듯했지만 환우들의 얼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그런 그들을 김 교수는 “결코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나와 함께 가자.”고 격려했다. 더러는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다. 29일 오전 10시 30분. 환우들이 씩씩하게 수련원 인근의 산에 올랐다. 겉보기와 달리 대부분이 환자들인 탓에 산책하듯 담소하며 걷는 시간이었지만 오랜 투병생활에 지친 환아들은 “숲길이 정말 좋다.”며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올해로 투병생활 10년째인 주부 박모(57)씨는 “김 교수님 말씀대로 치료를 받으면서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예전에는 언론에서 찾아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하지만 지금은 병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자신있게 이런 말도 한다.”며 걸음을 내디뎠다. 1박2일의 짧지만, 결코 짧지만은 않았던 루산우회의 캠프였다. 얼굴에 드러나는 웃음보다 마음속에 숨겨둔 투병 의지가 더 간절한 환자들은 캠프 내내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곁을 내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걸으며 고통 속에서 희망을 일구고 있었다. 글 사진 금산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부고] 국내 첫 화랑초대 김종하 화백

    국내 처음으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연 김종하 화백이 30일 오후 4시 10분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93세. 1918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4세 때인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최연소 입선한 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재학 당시 교내 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56년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꽃과 나무, 산, 바다, 숲, 여인 등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다. 고인은 프랑스 유학 직전인 1956년 반도호텔에 문을 연 한국 최초의 상설화랑인 반도화랑 개관전에서 박수근과 함께 2인전을 열었다. 현대화랑(현 갤러리 현대)이 1970년 문을 연 이후 초창기에 초대해 전시회를 연 화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고인은 2003년 이후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특히 최근 4~5년 동안은 건강 악화로 투병 생활을 했다. 지난 3월 롯데호텔 갤러리 개관기념으로 백영수, 권옥연 등과 함께 연 ‘한국 근현대미술의 재발견’ 전이 고인의 마지막 전시가 됐다. 2001년 대한민국예술원 미술상과 2002년 은관문화훈장, 2010년 서울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딸 명순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6월 1일 오전 8시 30분. (02)2072-2011.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퇴역 美軍 “1968년 군산 미군기지서도 고엽제 살포”

    퇴역 美軍 “1968년 군산 미군기지서도 고엽제 살포”

    주한미군의 고엽제 매립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전북 군산 등 비무장지대(DMZ) 외의 미군기지에서도 고엽제가 광범위하게 사용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미군은 공식적으로 1968년 DMZ에서만 고엽제를 살포했다고 밝혀왔다. 퇴역 미군인 토니 나톨리(63)는 30일 서울신문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국에 주둔했던 많은 전우가 DMZ 외의 지역에서 직접 고엽제를 사용하거나 뿌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면서 “친구들이 후유증을 앓는 모습을 보며 한국에서 고엽제가 광범위하게 사용됐음을 확신했다.”고 밝혔다. 그는 같은 주장을 퇴역 주한미군 사이트인 ‘한국전 프로젝트’에도 남겼다. 나톨리는 특히 1968년 군산 미 공군기지에서 근무했던 자신의 친구 던 프태크닉(63)이 당시 고엽제에 노출돼 현재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고엽제의 한 종류인) 에이전트 오렌지는 모기를 쫓기 위한 목적으로 흔히 사용됐다. 특히 공군기지나 미사일기지 인근의 야산에 많이 뿌려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프태크닉이 고엽제의 주성분인 다이옥신에 노출될 때 발병하는 염소성여드름 증상을 보였고 현재 심장병을 앓고 있지만 미군이 인정하는 고엽제 살포 지역에 근무하지 않아 어떠한 금전적 보상이나 의료 지원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베트남에서 미 해군으로 근무하던 중 고엽제에 노출돼 암 투병을 했던 그는 캠프 캐럴에 고엽제를 매립했을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이 있다.”면서 “미 해군이 바다에 고엽제를 던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육군도 자연에 버리는 방식으로 처분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미군부대 주둔 후 40가구 중 19가구서 암환자”

    경북 칠곡 미군기지의 고엽제 피해가 사회문제인 가운데 과거 미군부대 주둔으로 암 환자가 속출한다고 주장해온 충남 보령시 갓배마을 주민들이 역학조사와 함께 인근의 군부대 이전을 요구하고 나섰다. 갓배마을 주민들은 최근 정부와 국회에 이런 내용을 담은 진정서를 발송한 것으로 전해졌다. 29일 이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대천해수욕장과 인접한 이곳에 1958년부터 1977년까지 주한미군이 주둔했고, 이후 육군 방공포부대에 이어 1991년부터 공군이 사격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대 옆 갓배마을은 1997년까지 우물의 지하수를 식수로 써왔다. 주민들은 미군부대 주둔이 암 발병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을의 40여 가구 중 19가구에서 27명이 갖가지 암에 걸려 17명이 숨졌고, 10명이 투병 중이다. 이 문제가 처음 불거진 2009년 당시 18명(14명 사망)에 비해 9명이 늘었다. 마을의 통장 장성호(57)씨는 “이전에도 주민이 암으로 많이 숨졌는데 혼사가 끊길까봐 쉬쉬했다.”면서 “지난해 단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주민 80~90%에서 종양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미군부대 식당에서 일했던 한 주민이 ‘미군들이 기름을 많이 버렸고, 그때마다 냇가에서 붕어가 떼죽음을 당했다’고 말했다.”면서 “당시 마을 안에서 흙을 파면 기름이 나와 놀랐던 적도 많았다.”고 전했다.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는 이 마을 지하수에서 발암물질인 테트라클로에텔렌(자동차 금속세척제)가 기준치의 3배에 육박하고, 휘발유 첨가제로 쓰이는 메틸터트리부틸에테르가 미국 기준의 10배까지 검출됐다고 발표한 바 있다. 문수환 공군사격장환경피해협의회장은 “환경단체, 농민단체와 연대해 역학조사와 군부대 또는 주민 이주를 관철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8일 미 8군사령부는 ‘캠프 캐럴’의 고엽제 매립 의혹을 조사하고 있는 공동조사단이 전직 주한미군 군무원인 구자영(72)씨를 면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 8군은 “27일 용산 미군기지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1972년 화학 물질들이 캠프 캐럴의 독신장교 숙소와 소방서 근처에 파묻혔다는 주장에 대해 조사를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보령 이천열·서울 오이석기자 sky@seoul.co.kr
  • 서규용 장관후보의 ‘나눔의 삶’

    서규용 장관후보의 ‘나눔의 삶’

    서규용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후보자의 ‘나눔의 삶‘이 관가의 화제다. 개인적 길상사(吉喪事)로 걷힌 부의금과 축의금, 퇴직금 등을 주위의 어려운 이들과 나누며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농식품부 내에는 불의의 재난이나 신병 등으로 생활이 어려운 직원을 돕기 위한 ‘정성분 상조기금’이 있다. 이 상조기금은 지난 2000년 4월 서 후보자가 농림부 차관보 시절 모친인 정성분 여사가 작고했을 때 조문객들로부터 받은 부의금 2283만원을 어려운 직원을 위해 써달라고 기탁하면서 설립됐다. 서 후보자는 2002년 3월 부친이 작고했을 때도 부의금 1300만원을 쾌척했고, 그해 6월엔 자녀 결혼 축의금 중에서 500만원을 떼내어 기탁했다. 자신의 퇴직금에서도 570만원을 기금에 보탰다는 후문이다. 농림부 차관 시절부터 마사회 감사, 한국농어민신문사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매월 월급에서 50만원을 자동이체 방식으로 기탁해 3150만원을 기탁하는 등 총 8003만원을 기금에 쏟아부었다. 이 기금은 2000년 선천성 저신장증을 앓는 직원의 자녀 치료비에 100만원이 지원된 것을 비롯해 암투병 직원 치료비 등 지금까지 31명의 직원에게 총 6900만원이 전달됐다. 서 후보자는 2008년 2월 한국농어민신문사 사장에서 물러나면서 받은 퇴직금 등 1740만원을 어려운 농어민신문사 직원들을 위해 써달라며 기탁했다. 농어민신문사는 이를 ‘서규용 기금’(가칭)으로 운영해 나갈 예정이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지금 서 후보자를 둘러싸고 몇 가지 잡음도 없지 않지만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서 후보자의 모습도 공정하게 평가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질서와 무질서 속 그 어디쯤에서 또 다른 ‘나’를 찾다

    질서와 무질서 속 그 어디쯤에서 또 다른 ‘나’를 찾다

    지난해 초 우리 문학계는 한 가지 우울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2006년 장편 역사소설 ‘제4의 제국’ 이후 소식이 뜸했던 소설가 최인호(66)가 암투병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평소 왕성한 필력으로 독자들과 꾸준히 만나 온 그였기에 4년여의 침묵으로 그동안 갖가지 소문이 무성하던 중 날아든 소식이었다. 1975년부터 34년 6개월 동안 이어져 온 소설 ‘가족’의 연재를 중단한다는 갑작스러운 그의 선언 또한 팬들에게 많은 걱정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듯 소설가 최인호는 이제 새롭고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과 마주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 펴냄)는 영원한 청년작가 최인호가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소설이란 점에서 우선 반갑게 눈길을 끈다. 특히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지난 30여년 동안 몰두했던 역사와 종교소설 성향을 과감히 버리고 현대소설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백제와 가야, 조선을 넘나들던 작가의 상상력이 다시 현대로 돌아온 것. 작가의 의미심장한 사고의 변화도 엿볼 수 있다. 머리말에서 그는 “이 작품은 암이 내게 선물한 단거리 주법의 처녀작이다. 하느님께서 남은 인생을 더 허락해 주신다면 나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이후 ‘제2기 문학’에서 ‘제3기의 문학’으로, 이 작품을 시작으로 다시 출발하려 한다.”면서 “남에게 읽히기 위한 문학이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나중에는 단 하나의 독자인 나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창세기를 향해서 당당하고 씩씩하게 나아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일까.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는 그동안 접해 보지 못했던 시공간, 즉 질서와 무질서가 뒤섞인 스스로의 혼돈의 공간을 창조해 냈다. 처제의 결혼식이 있던 그날, 주인공 K는 잃어버린 휴대전화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지난밤 술자리에서 끊겨 버린 기억과 자신의 행적을 추적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K는 계속해서 역할을 바꾸며 등장하는 같은 얼굴의 사람들과 부딪치고, 시공간적으로 전혀 개연성을 찾을 수 없는 간밤 자신의 행적을 확인하면서 자신이 발을 딛고 선 현실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깨닫는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K는 조작과 속임수의 실체가 자기 자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런 의혹을 풀기 위해 ‘나’를 만나러 떠난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다. 작가는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실재에 배신을 당한 주인공 K가 또 다른 실재를 찾아 방황하는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의 과정을 통해 현대인이 맺고 있는 ‘관계 고리’의 부조리를 흥미진진하게 파헤치고 있다. 1만 2800원.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이젠 ‘이발소 그림’도 그려 보고파”

    “이젠 ‘이발소 그림’도 그려 보고파”

    조금 당황스러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딱히 화가의 집이라 할 만한 게 눈에 띄지 않아서다. 민중미술을 했던 사람이라 예술적인 작업실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파트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방 한 칸이 작업실의 전부일 줄은 몰랐다. 한국 근·현대사 시리즈, 중산층 시리즈, 갑돌이와 갑순이 시리즈처럼 대작을 그려 온 작가인데 말이다. 신학철(68) 작가를 만나기 위해 지난 25일 서울 장안동 자택을 찾았다. 개다리소반에 과일과 커피를 손수 내왔다. →오랜만에 신작을 내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다. -아휴. 난 시간 딱 정해 놓고 작품 못 한다. 이렇게 저렇게 준비는 계속하고 있는데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 집사람도 누워 있고(부인은 9년째 투병 중이다). 하긴 하는데 언제 할지 알 수 없죠. →원래부터 작품의 양 자체가 많지는 않았는데. -그러니까. 그리다 적당히 모이면 전시하고 그런 식이다. 그러다 보니 대충 10년에 한 번 정도 전시를 하게 되더라. →시대가 다시 작가를 다시 불러내는 건가. -그런 면이 없다곤 말 못 한다. 요즘 뉴스 보니까 현대사학회인가 하는 게 있더라. 예전에 이미 다 끝난 얘기를 다시 끄집어내는 모양인데 그걸 보고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구나 싶었다. →그런 부분이 작품 구상에 영향을 주나. -그렇다. 그래서 4·19혁명을 한번 다뤄 보고 싶다. 잠시 말을 멈추고 작품을 위해 모으고 있는 이런저런 사진 자료를 보여 줬다.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내놓은 뒤 시민들이 시내에 들어와 있는 탱크 위에 올라가 환호하는 4·19혁명 당시의 사진이다. 탱크 위에 올라가 있는 걸 찍은 사진이다 보니 그가 한국 근대사 시리즈에서 보여 줬던 강렬한 수직적 이미지가 고스란히 반복된다. 이번엔 수직적으로 쓰지 않고 파노라마처럼 옆으로 길게 펼쳐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한다. →시대가 작가를 불러낸다면 이명박 대통령도 빠지기 어려울 것 같은데. -맞다. 안 다룰 수가 없다. 작업실에 들어간 김에 다른 작품도 봤다. 하나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노 전 대통령이 비행기 안에서 공기압 때문에 귀가 멍해지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코를 막고 있는 사진을 골랐다. 사진 속 노 전 대통령의 한쪽 팔에 십자가를 끼웠고, 그 주변에 작가가 좋아하는 화가 보스(15세기 네덜란드 화가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의 그림에서 따온 기괴한 인물들의 형상을 채워 넣었다. ‘그를 죽게 만든 건 현 정권이 아니라 보통의 일반 사람들’이라는 게 작품에 대한 설명이다. ‘따봉’을 비롯한 중산층 시리즈로 중산층의 위선을 통쾌하게 비웃었던 작품의 연장 선상으로 보인다. →‘한국 근대사-종합’이 삼성 리움미술관(6월 5일까지 ‘코리안랩소디’전)에 걸렸더라. 기분이 묘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거, 가나아트인가에서 사 갔던 건데 삼성으로 넘어간 것 같더라. 아마 ‘행복한 눈물’ 때문에 삼성과 미술관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안 좋아졌으니 그걸 만회하고 바꿔 보기 위해서 그런 전시를 기획하고 내 그림도 전시한 게 아닌가 싶다. 가 봤더니 나 말고도 민중미술 쪽 작품들이 꽤 있더라. 물타기 아니겠나. 그를 말할 때 ‘모내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87년 작 ‘모내기’를 두고 검찰은 북한을 찬양한 이적 표현물이라 보고 1989년 그를 구속했다. 표현의 자유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재판은 10여 년을 끌다 1999년 결국 유죄 판결로 마무리됐다. 그런데 유엔에서 이 사건을 문제 삼으면서 작품을 폐기하지 말라고 권고해 아직 작품은 남아 있다. →그 뒤로 ‘모내기’를 봤나. -2000년 초엔가 우연히 한 번 보고 못 봤다. 재판하는 동안 늘 법정에 걸어 놨었는데, 어느날 보니 들고 올 때 돌돌 말아서 찌그러뜨리거나 테이프로 찍 붙여 놨더라.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고 항의했더니 다음부터는 정중하게 잘 보관한답시고 네모반듯하게 접어서 서류봉투에 넣어 가지고 다니더라. 유화물감으로 그린 작품을 말이다. 어이가 없었다. →작가에게 작품은 자식 같은 존재일 텐데. -그러게 말이다. 서류봉투 안에 접혀 있으니 오죽 답답하겠나. 유엔에서 뭐라 하는 바람에 정부가 잘 보관하겠다고 했으니 어딘가 있겠거니 할 뿐이다. →이젠 좀 가벼운 작품을 그려 보고 싶지 않나. -그런 생각도 많이 한다. 흔히 말하는 ‘이발소 그림’이란 것도 한번 해 보고 싶다. 집 안에 자그맣게 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그림 말이다. 예전엔 그런 게 싫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게 정말 민중미술 아닌가 싶다. 글 사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부산 美문화원 방화 사건’ 주도 김은숙씨 하늘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주도했던 김은숙씨가 위암 투병 중 24일 오전 7시 40분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숨졌다. 52세. 김씨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미국이 눈감고 있는 것에 분노해 82년 문부식·김현장씨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과 함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5년 8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 왔다. 지난달에는 임수경씨 등 지인들이 그녀의 쾌유를 비는 ‘작은 음악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김씨의 동생은 “어제 갑자기 하혈을 하고 의식을 잃으면서 상태가 나빠졌다.”면서 “숨지기 직전 산소호흡기를 뗀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큰 소리로 ‘사랑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김씨를 곁에서 후원해온 통일운동가 임수경씨는 이날 오전 트위터에 “김은숙님의 온가족이 밤새 병상을 지켰다.”면서 “주치의 선생님이 야간 당직이라 수시로 환자 상태를 봐 주셨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 제발 힘을 내세요.”라고 쾌유를 비는 메시지를 올렸다. 그러나 김씨는 2시간여 뒤 눈을 감았다. 김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소설과 번역서를 펴내며 두 딸과 생계를 이어 갔다. 지난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기 전까지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했다. 김씨는 지난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사단법인 오월어머니집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어머니들에게 주는 ‘제5회 오월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김씨의 빈소는 녹색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 오전 9시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씨줄날줄] 황혼/허남주 특임논설위원

    1990년대부터 일본 가정에 큰 변화가 시작됐다. 1960~70년대 고도성장시대 ‘일벌레’였던 남편들이 은퇴와 동시에 이혼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늙은 남편을 ‘젖은 낙엽’이라 표현했고, 한 일본학자는 황혼이혼을 ‘은퇴남편증후군’이라 명명했다. 황혼의 변화는 우리나라에도 체감된 지 오래다. 최근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부부의 자화상’에 따르면 지난해 이혼한 부부 중 결혼생활 20년 이상인 경우가 27.3%. 이혼 부부 10쌍 중 3쌍이 황혼이혼이라는 것이다. 1990년의 6.6%와 비교하면 4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철없는 젊은이들이 결혼의 소중함을 모른다거나, 이혼을 쉽게 생각한다는 기존의 상식은 완전히 깨졌다. 한편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50세 이상의 남성 결혼 건수는 1만 8791건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60세 이상의 결혼 건수도 1990년 1570건, 2000년 2010건이었으나 지난해에는 4812건으로 늘어났다. 황혼이혼과 황혼결혼이 늘어나는 것은 오늘날 우리 가정의 한 단면이다. ‘포기할 때도 됐다.’고 황혼이혼을 비난할 수도, 주책이라며 황혼결혼을 비웃을 수도 없는 상황임이 확인됐다. 흔히 ‘여자가 변했다.’고 말한다. 지난 시절의 어머니처럼 참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도, 무시에도 자식을 위해 참았던 여성들의 이런 변화는 남성들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남편과 자식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인 줄 알았던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것은 비난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기대수명 83세의 시대에 “한 30년만 더 참고 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물론 여성들이 경제력을 갖기 시작한 것이나 이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달라지고 있는 것도 이런 변화의 한 원인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50대 이후라고 해서 삶의 가치가 낮아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해가 질 무렵, 일순간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이는 황혼의 아름다움처럼 50대 이후의 인생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인간선언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오늘날의 중 년은 인생 100세 시대에 50~60대는 마무리할 때가 아닌 ‘서드 에이지’이자 ‘핫 에이지’임을 알게 된 첫 세대인지 모른다. 오늘은 부부의 날이다. 30년간 희귀병과 투병 중인 동갑의 아내를 극진하게 간병해온 이대일(67)씨는 ‘올해의 부부의 상’ 수상자가 된 소감을 “매 순간 아내를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
  • “장도영 美플로리다서 치매 투병… 군부가 정착지 정해줘”

    “장도영 美플로리다서 치매 투병… 군부가 정착지 정해줘”

    5·16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88)씨가 현재 미국 플로리다에 생존해 있으며, 치매로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5·16 당시 모호한 처신으로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5·16 성공 후 혁명세력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국방장관, 내각수반에까지 추대됐으나 결국 반혁명 모의 혐의로 숙청돼 미국으로 쫓겨났고, 근래 5·16 관련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생사와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다. 5·16 당시 육군 6군단장이었던 김웅수(88)씨는 15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기자와 만나 “얼마 전 버지니아에 사는 장도영씨의 친척으로부터 들었다.”면서 장씨가 투병 중이라고 근황을 전했다. 김씨는 “5년 전 내가 플로리다 올랜도 근교의 장씨 집을 찾았을 때는 장씨가 건강했는데, 몇년 사이 건강이 안 좋아진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5·16 당시 반혁명분자로 몰려 1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풀려난 뒤 군사정권의 간접적 압력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김씨는 “장씨와 나는 1962년, 같은 해에 미국으로 왔다.”면서 “나는 건강이 안 좋아 공기가 좋은 워싱턴 주 시애틀로 갔고, 장씨는 한국 사람이 적은 미시간 주로 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미국 내 정착지는 사실상 혁명정부가 정해준 것”이라며 “혁명정부는 장씨가 한국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무슨 사단을 일으키는 것을 경계한 것 같다.”고 했다. 김씨에 따르면 장도영씨는 미시간주립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정착했으며 부인과 단 둘이 지금껏 생활하고 있다. 김씨는 “장씨의 부인은 과거 서울의 유명 병원인 ‘백내과’의 딸”이라면서 “장씨 가족의 생계는 주로 유학생 출신이었던 장씨의 부인이 꾸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장씨가 전 부인과 낳은 아들은 한국 재벌가 딸과 결혼했다.”고 했다. 김씨는 “6년 전인가 장씨가 버지니아주 친척 집을 방문한다는 얘기를 듣고 미국에 온 뒤 처음으로 그를 봤다.”면서 “당시 버지니아에 사는 교민 몇 명과 장씨를 만났는데, 시종 5·16 때 자신의 처신에 대한 변명만 늘어놓더라.”라고 했다. 김씨는 “장씨가 5·16 때 취한 처신 때문에 그를 안 좋아해서 미국 생활 중 적극적으로 그를 찾지는 않았다.”고 했다. 장씨는 김씨와의 대화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혁명세력에 대한 원망을 나타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장씨는 1968년 일시 귀국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만났으며, 박 전 대통령의 권유로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던 현지 한국부대를 시찰한 적도 있다고 김씨에게 밝혔다고 한다. 장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로당 전력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구명운동을 해준 인연이 있으나, 5·16 때 혁명세력에게 자진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진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참모총장’이란 간판이 필요했던 혁명세력에 의해 떠받들어졌으나, 결국 2개월 뒤 김종필씨 등 소장파에 의해 투옥된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부고] 사찰생태연구소 김재일 대표

    김재일 사찰생태연구소 대표가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62세. 1949년 11월 포항에서 태어난 고인은 1994년 국내 최초의 생태 탐방 시민단체인 ‘두레 생태기행’을 설립했고, 2002년 사찰생태연구소를 만들었다. 사단법인 보리 이사장, 숲 해설가협회 공동대표, 조계종 환경위원회 명예위원을 지냈다. 올 1월에는 폐암 투병 중에도 7년간 전국 사찰을 돌아보고 쓴 ‘108사찰 생태기행’ 시리즈 10권을 완간했다. 유족은 부인 남숙향씨와 1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8일 오전 8시다. 영결식은 18일 오전 9시 30분 봉은사에서 조계종 환경위원회장으로 엄수된다. (02)3410-6915.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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