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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109)-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훗날 이율곡으로부터 ‘진귀한 새,괴이한 돌,이상한 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기인.이지함처럼 이산해도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평생 조광조를 사숙하여 신도비도 함께 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이산해는 묘표에서 다음과 같이 조광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오호라, 묘비로도 진실로 선생의 경중을 나타내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다시 여기에 무엇을 기대할 것이 있겠는가.” 조광조의 무덤은 두 개의 석인과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이 보호하고 있었다.봉분은 잘 보존되어 있었고,무덤 위에 자란 풀들도 가지런히 깎여 있다.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풀 사이에 피어 있었고,한 떼의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들고 온 비닐봉지 속에서 소주병과 건어물을 꺼내어 상석 위에 내려놓았다.마개를 따고 종이컵에 술을 한 잔 부은 다음 무릎을 꿇고 조광조의 무덤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상석 위에는 누군가 꺾어 묶은 한 다발의 들꽃이 놓여 있었다.배를 올리고 나서 나는 종이컵에 든 술을 봉분 주위를 돌아가며 무덤 위에 뿌리기 시작하였다. 생전에 조광조는 주색에 엄격하여 절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20세도 되지 않았던 젊은 시절,한 여인이 추파를 보내어 머리 비녀를 보내오자 이를 여인숙의 벽에 걸어 놓고 온 것은 유명한 일화였지만,실제로도 조광조는 평생 첩을 두지 않고 일부일처로만 지냈다.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예에 속하고 있다.관직을 가지지 않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사람이라도 양반이면 첩 하나쯤 두는 것이 예사였고,사회적으로도 허용되던 때였음에도 조광조는 정실부인 하나만을 고집하였다. 이율곡도 첩이 둘이나 있었고,심지어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퇴계도 축첩하고 있었는데,조광조의 이러한 처사는 시대를 초월한 도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여자를 멀리하던 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기록에 의하면 중종 13년 5월,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남녀가 적합하게 서로 만나서 정도를 잃지 않는다면 이는 도심(道心)이지,사사로운 욕정이 아니며,또한 도에 지나치게 거절한다면 이 또한 사람의 정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술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술로 인한 동료들의 실수를 자주 보고는 철저하게 절주를 실천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조광조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도학의 정신을 철저히 지켜나간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광조도. 나는 술을 무덤의 주위에 뿌리면서 생각하였다. 막상 의금부에 의해서 한밤중에 체포되자 엉망으로 만취하였던 것이다.자신을 심문하던 이장곤에게 ‘이 못난 놈아,이 용가(龍哥)야.’하고 술주정하였으며,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이 답변한 공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아마도 그 날이 조광조가 일생일대에 만취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으니. 나는 한잔 가득 따른 술을 무덤에 남김없이 뿌리며 중얼거렸다. “조광조여,무덤 속에 들어 있는 조광조의 영령이여, 술을 권하노니 사양하지 말고 내 노래 한 곡에 귀기울여 보시오.금도 옥도 비단도 귀한 것이 못된다.다만 길게 취하여 깨어나지 않는 것이 원이로다.” 나는 술을 뿌리며 이백이 지은 장진주(將進酒)의 한 구절을 권주가로 중얼거려 말하였다. “옛적에 성현도 다 흔적이 없고 오직 마시는 자만이 이름이 남더라.주인이 어찌 술이 적다고 하느냐.즉시 많은 술을 사올 것이다.오화마(五花馬)와 천금구(千金)를 꺼내어 좋은 술로 바꾸어 그대와 더불어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다.” 나는 빈 잔에 술을 따라 혼자서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하였다.˝
  • 儒林(10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신도비명을 더듬어 확인하던 나는 한 구절에서 손이 멈췄다.다음과 같은 문장에서였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도다(有來有歸不亡不違在後在前).” 과연 그러한가. 조광조의 영령을 찾아가는 신도에는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이 없이 이어지고 있는가.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진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어차피 권력의 다툼은 힘을 가진 구세력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신세력의 신구갈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구세력은 자신을 보수라 하고 신세력은 자신을 진보라 일컫는다.그러나 어차피 진보를 표방하는 신세력도 언젠가는 스스로 청산해야 할 낡은 구세력으로 전락해가는 것이니,조광조가 살았던 16세기보다도 더 심각한 국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옵는가. 그러나 아니었다. 조광조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다.조광조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듯 조광조는 살아서도 절벽의 생애였고,죽어서도 단애(斷崖)의 운명이었다.따라서 조광조의 무덤은 끊겨서 더 이상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차안(此岸)의 언덕인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1520년 봄,조광조의 시신을 심곡리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전해 오고 있다. “소달구지로써 용인으로 관을 옮겨와서 장례를 마치고 나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동쪽 서쪽으로는 세 번 두르고,남쪽과 북쪽으로는 각각 한 번씩 둘러섰고,남북쪽에 둘레 밖으로 두 줄기의 무지개가 띠를 둘러놓은 듯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쌍무지개가 떴던 무덤주위로는 홍예(虹)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에 닿을 것같이 띠를 두르고 서 있었고,깎아내린 산기슭에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가 개통되어 수많은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분명히 심곡리의 언덕이라고 표기된 기록과는 달리 조광조의 무덤은 급격한 경사를 이룬 비탈길 위에 마치 낭떠러지 위에 세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길 양옆에 무덤들이 보였다.이곳 어딘가에 조광조의 선친이었던 조원강의 무덤도 있을 것이고,조광조의 차남이었던 용(容)의 무덤도 있을 것이다.조광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장남 정(定)은 일찍 죽었고,둘째아들 용은 판관으로 있어 훗날 이퇴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비명을 써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는 것이 행장기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곳 일대가 조광조의 선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조광조의 부인이었던 한산 이씨는 비교적 오래 살아 조광조가 죽은 지 38년 후에 이곳에 묻혀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조광조와 합장되었다.그러나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 묘비도 사라져버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황폐한 무덤들만 곳곳에 산재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파른 비탈길을 빠르게 올랐다.짧은 거리였지만 급경사였으므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무덤 바로 앞에는 묘표(墓表)가 서있었다.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월일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운 푯돌은 당대문장가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솜씨였다.이산해는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 글을 배웠으며,지함은 평생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土亭)이라 불렸던 조선시대의 기인으로 ‘토정비결’의 저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 儒林(108)-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신도비명을 더듬어 확인하던 나는 한 구절에서 손이 멈췄다.다음과 같은 문장에서였다.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망하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며,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도다(有來有歸不亡不違在後在前).” 과연 그러한가. 조광조의 영령을 찾아가는 신도에는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이 없이 이어지고 있는가.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진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지 아니한가.어차피 권력의 다툼은 힘을 가진 구세력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신세력의 신구갈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구세력은 자신을 보수라 하고 신세력은 자신을 진보라 일컫는다.그러나 어차피 진보를 표방하는 신세력도 언젠가는 스스로 청산해야 할 낡은 구세력으로 전락해가는 것이니,조광조가 살았던 16세기보다도 더 심각한 국론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에도 조광조는 여전히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도 계시옵는가. 그러나 아니었다. 조광조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다.조광조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듯 조광조는 살아서도 절벽의 생애였고,죽어서도 단애(斷崖)의 운명이었다.따라서 조광조의 무덤은 끊겨서 더 이상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차안(此岸)의 언덕인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1520년 봄,조광조의 시신을 심곡리의 언덕에 반장(返葬)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전해 오고 있다. “소달구지로써 용인으로 관을 옮겨와서 장례를 마치고 나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동쪽 서쪽으로는 세 번 두르고,남쪽과 북쪽으로는 각각 한 번씩 둘러섰고,남북쪽에 둘레 밖으로 두 줄기의 무지개가 띠를 둘러놓은 듯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그러나 쌍무지개가 떴던 무덤주위로는 홍예(虹)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하늘에 닿을 것같이 띠를 두르고 서 있었고,깎아내린 산기슭에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가 개통되어 수많은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달려가고 있을 뿐이었다.분명히 심곡리의 언덕이라고 표기된 기록과는 달리 조광조의 무덤은 급격한 경사를 이룬 비탈길 위에 마치 낭떠러지 위에 세운 제비집처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길 양옆에 무덤들이 보였다.이곳 어딘가에 조광조의 선친이었던 조원강의 무덤도 있을 것이고,조광조의 차남이었던 용(容)의 무덤도 있을 것이다.조광조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장남 정(定)은 일찍 죽었고,둘째아들 용은 판관으로 있어 훗날 이퇴계에게 사람을 보내어 비명을 써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는 것이 행장기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곳 일대가 조광조의 선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조광조의 부인이었던 한산 이씨는 비교적 오래 살아 조광조가 죽은 지 38년 후에 이곳에 묻혀 장사를 치른 후 다시 조광조와 합장되었다.그러나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 묘비도 사라져버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황폐한 무덤들만 곳곳에 산재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파른 비탈길을 빠르게 올랐다.짧은 거리였지만 급경사였으므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무덤 바로 앞에는 묘표(墓表)가 서있었다.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연월일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운 푯돌은 당대문장가였던 이산해(李山海)의 솜씨였다.이산해는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 글을 배웠으며,지함은 평생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土亭)이라 불렸던 조선시대의 기인으로 ‘토정비결’의 저자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조광조를 동방사현이라고 불렀던 이율곡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하여 자신이 세운 은병정사내의 주자사(朱子祠)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았을 정도였다.그는 또한 조광조의 묘지명을 직접 썼으며 그 묘지명에서 이율곡은 ‘저 울창한 용인땅 산 서리고,물굽이 긴대,빛나는 그 덕업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감탄사로 조광조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 원년에는 당시 백인걸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 등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부제학이던 박대립은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선조는 경연에서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에 관해 물었다.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는 성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동시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다하였습니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남곤·심정 등을 모함하고 구신들을 물리치려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인 이퇴계가 내린 조광조에 대한 평가야말로 단연 최고봉일 것이다.이퇴계는 자신이 직접 조광조의 행장기(行狀記)를 썼으며,이 행장기에서도 이퇴계는 조광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뜻이 너무 속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잘못됨을 면치 못하여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조급하게 굴어서 장황하고 과격하며 또는 나아가 젊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유행에 뜻이 맞아 함부로 날뛰는 자가 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고,늙은 신하들이 새 시의(時議)에 배척당하여 이에 따라 공박(攻駁)을 당한 자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퇴계는 자신이 조광조의 행장기를 짓는 이유를 ‘황(滉)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선생의 문하에 공경히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지 않게 많은데,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가 또 행장마저 짓지 않으면 더 어찌 정(情)이 지극하니 일(事)이 따른다고 하겠는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조광조에게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조광조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원래는 깊은 심산유곡이었는데 산기슭까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중턱으로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묘역은 야산으로 변해있었다. 묘역으로 들어간 산자락에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그 나뭇가지에도 용인 땅의 수원편입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언덕으로 오르는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漢陽趙公靜菴趙光祖先生墓域” 그 표석을 보자 나는 마침내 조광조의 무덤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던가. “이승은 짧다.무덤은 기다린다.무덤은 배고프다.” 배고픈 무덤.보들레르의 절창처럼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조광조의 무덤.옛말에 무덤을 ‘백골청태(白骨靑苔)’라 하였다.죽은 후 500년이 흘렀으므로 이미 흰 뼈와 푸른 이끼로만 남아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러운 난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조광조의 무덤을 마침내 오늘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6)-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조광조를 동방사현이라고 불렀던 이율곡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하여 자신이 세운 은병정사내의 주자사(朱子祠)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았을 정도였다.그는 또한 조광조의 묘지명을 직접 썼으며 그 묘지명에서 이율곡은 ‘저 울창한 용인땅 산 서리고,물굽이 긴대,빛나는 그 덕업 영원토록 잊지 못하리’라는 감탄사로 조광조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선조 원년에는 당시 백인걸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 등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부제학이던 박대립은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선조는 경연에서 퇴계 이황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에 관해 물었다.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는 성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동시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다하였습니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남곤·심정 등을 모함하고 구신들을 물리치려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조광조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인 이퇴계가 내린 조광조에 대한 평가야말로 단연 최고봉일 것이다.이퇴계는 자신이 직접 조광조의 행장기(行狀記)를 썼으며,이 행장기에서도 이퇴계는 조광조의 실수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뜻이 너무 속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잘못됨을 면치 못하여 무릇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조급하게 굴어서 장황하고 과격하며 또는 나아가 젊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유행에 뜻이 맞아 함부로 날뛰는 자가 그 사이에 많이 끼어 있었고,늙은 신하들이 새 시의(時議)에 배척당하여 이에 따라 공박(攻駁)을 당한 자의 원망이 골수에 사무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퇴계는 자신이 조광조의 행장기를 짓는 이유를 ‘황(滉)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비록 선생의 문하에 공경히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 적지 않게 많은데,이미 비명(碑銘)을 사양한 데다가 또 행장마저 짓지 않으면 더 어찌 정(情)이 지극하니 일(事)이 따른다고 하겠는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조광조에게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조광조의 무덤 쪽으로 걸어갔다.원래는 깊은 심산유곡이었는데 산기슭까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고 중턱으로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묘역은 야산으로 변해있었다. 묘역으로 들어간 산자락에는 소나무와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그 나뭇가지에도 용인 땅의 수원편입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언덕으로 오르는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그 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漢陽趙公靜菴趙光祖先生墓域” 그 표석을 보자 나는 마침내 조광조의 무덤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던가. “이승은 짧다.무덤은 기다린다.무덤은 배고프다.” 배고픈 무덤.보들레르의 절창처럼 누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조광조의 무덤.옛말에 무덤을 ‘백골청태(白骨靑苔)’라 하였다.죽은 후 500년이 흘렀으므로 이미 흰 뼈와 푸른 이끼로만 남아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지러운 난세를 살고 있는 우리를 기다리는 조광조의 무덤을 마침내 오늘 내가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 의왕 새 아파트단지 명칭 건설사 브랜드는 빼고 친근감 물씬 우리말로

    ‘청계·기차·고니·백조‘. 앞으로 경기도 의왕지역에 건설되는 아파트단지 명칭은 건설사 브랜드 대신 순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 의왕시는 13일 건물 외벽에 무분별하게 표시된 건설회사 중심의 아파트 단지 명칭을 지역의 여건과 마을의 유래 등을 고려한 순우리말을 사용토록하는 내용의 ‘공동주택단지 구조개선 표준안’을 마련,시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시는 “입주자들의 정주의식을 높이기 위해 이같은 방안을 마련했다.”며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건축심의 과정을 통해 사업주측에게 적극 권유할 방침”이라고 말했다.시가 마련한 방안에 따르면 앞으로 건설되는 모든 아파트 단지의 명칭에 건설사 상호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대신 해당지역의 특색있는 이미지와 어울리는 순우리말 명칭을 부여하기로 했다. 주요 명칭은 내손동의 경우 민배기·갈미·청계·백운,오전동은 금잔화·난초·초롱·백합마을,왕곡·고천동은 퇴계·백범·추사,부곡동은 기차·고니·백조·파랑새마을 등이다. 시는 사업주체로부터 건물 사용승인 전 또는 분양시점에서 3개 이상의 단지명칭(안)을 제출받아 시 지명위원회에서 단지 명칭을 결정하기로 했다. 시 관계자는 “아파트 명칭을 통해 자사 브랜드를 홍보하려는 건설회사들이 다소 불만스럽겠지만 큰 반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의왕 김병철기자 kbchul@˝
  • 삼일로 중앙버스차로제 ‘삐끗’ 도심진입 승용차 체증 부채질

    “남산1호 터널을 지나 퇴계로로 빠져나오는 데 20분 정도 걸린다면 누가 믿겠습니까?모두 어정쩡한 중앙버스전용차로 운영 탓입니다.” 7일 S운수 택시기사 이모(38)씨는 맥빠진 모습으로 이같이 말했다. 지난 1일부터 삼일로(퇴계로2가∼종로2가 교차로) 약 1㎞ 구간에 시행 중인 중앙버스전용차로제가 가뜩이나 극심한 이 일대 교통체증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평소 출퇴근시간대와 함께 가장 붐비는 시간대인 이날 낮 12시쯤 남산터널을 지나 도심으로 들어가려는 승용차들은 을지로2가 사거리에서 시청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려고 100m 이상 길게 꼬리를 물고 기다리는 모습이었다.한 차로를 버스에 모두 내준 데다,버스 중심의 도로체계여서 버스 직행신호 우선이다 보니 좌회전 차량들에 상대적으로 신호대기 시간이 늘어난 것이 주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반면 붉은색 아스콘으로 포장된 중앙전용차로를 달리는 버스들의 소통은 비교적 수월한 듯했다. 삼일로 중앙버스전용차로제를 실시한 뒤 버스의 통행속도는 50%가량 빨라졌지만 승용차의 통행속도는 오히려 20∼30% 느려졌다는 서울시 분석도 승용차 운전자들의 불만을 그대로 뒷받침한다. 서울시는 이 구간 정체를 덜기 위해 을지로2가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는 차선을 1개 차로에서 2개로 늘리거나 지하철 4호선 명동역 쪽에서 오는 차량이 퇴계로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못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택시기사 이씨는 “도로 한복판에 설치한 버스전용차로 정류장 근처에서는 버스와 시설물 때문에 횡단보도 쪽이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특히 야간에 길을 건너는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도 따르는 등 문제점이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송한수기자 onekor@˝
  •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이종호 지음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문인으로 태어나 문인으로 살다 문인으로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문예는 조선 사대부들의 삶 그 자체이자 필생의 화두였다.유교라는 거대한 주제 아래 그들은 치열하게 책을 읽고 문장을 닦았다. 퇴계 이황 같은 이는 완물상지(玩物喪志),즉 하나의 사물에 몰두하는 것은 학문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길이라 해 문장에 지나치게 매혹되거나 몰두하는 것을 경계했지만 대부분의 사대부들에게 문예는 학문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문예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였던 것이다. 안동대 한문학과 이종호(49) 교수가 펴낸 ‘조선의 문인이 걸어온 길’(도서출판 한길사)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조선조 사대부들을 탐구하고 해석한 책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떻게 ‘자신만의 문장’을 키웠고 어떤 문장에 빠져들었으며 또 비판의 시선을 보냈을까.저자는 조선조 문인들의 작업을 낱낱이 추적하며 그들의 문장을 독해하고 그 안에 담긴 문예인식과 비평의식을 읽어낸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분석 대상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정약용이나 김시습,박지원 같은 조선 한문학의 ‘간판스타’들로 구색을 맞추기보다는 일반에겐 좀 낯선 인물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남긴 개성의 자취를 훑어간다.영남 사림의 거두인 점필재 김종직을 비롯해 조선중기 한문 4대가 가운데 한 명인 상촌 신흠,홍길동전의 작가 허균,18세기 안동지역의 처사 권구,신유한,최성대,조구명,송백옥 등이 그들이다. 저자는 조선의 문예는 고려 중기 문예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여말 익재 이제현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이제현은 최씨 무신정권기의 문예를 칼날 앞에 붓이 줏대를 잃고 형식과 기예의 노예로 전락한 ‘껍데기’ 문예로 보았다.그 대안으로 제창한 것이 성리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실용적인 고문 창작이다.조선의 문예는 숭유억불의 화신인 삼봉 정도전이나 양촌 권근 같은 이제현의 정신적 계승자들에 의해 시작됐다는 게 저자의 견해다. 책은 15세기 조선 한문학의 거목 김종직을 조선조 문예 흐름의 원류에 속하는 인물로 규정한다.경상도 산골 출신의 선비인 김종직은 온건한 품성과 남다른 문장으로 훈구세력이 주도하는 ‘본류적 흐름’에 뛰어들어 그들을 압도했다.저자에 따르면 김종직이 씨앗을 뿌린 ‘도문(道文)합일론’은 주자학적 세계관을 구현하고자 했던 퇴계와 율곡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유교적 문학관은 이내 한계와 문제를 드러낸다.여기에 신흠이 등장해 양명학과 노장사상에 심취하게 된다.신흠이 문을 연 개방적인 사고는 허균에 와선 열정과 광기로 폭발하고,이어 18세기엔 다양한 인간상을 펼치는 작가군이 크게 늘어난다.권구는 민중의 삶을 담고자 했으며,조구명은 ‘나만의 글’을 쓰고자 했고,신유한은 일천한 가문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문학적 재능으로 극복하고자 몸부림쳤다. 저자는 이처럼 구체적인 인간 형상을 중심에 두고 그들의 문예를 논한다.76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미시적인 접근으로 통사에 버금가는 성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3만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삼일로 퇴계로2가~종로2가 새달부터 중앙버스차로 실시

    최근 고가도로 철거에 이어 입체교차로가 들어선 삼일로에 다음달 1일부터 중앙버스전용차로제가 시행된다. 서울시는 삼일로 일대 퇴계로2가∼종로2가 980m 구간에 대한 중앙버스전용차로 설치공사를 오는 30일 마무리짓고 5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총 사업비 27억 1400만원이 들어간다. 시는 이 구간의 중앙버스전용차로제 운영을 위해 승강장 4곳을 설치하고,전용차로를 적갈색 아스콘으로 포장하기로 했다.이 구간의 도심미관과 보행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영락교회 등 건물의 낡은 옹벽을 보수하고 중앙극장앞 보도 폭을 넓힌다.주변 경관도 이에 걸맞게 바꾼다.영락교회 옹벽을 걷어내고 200여평의 녹지를 조성하고 보도도 너비 4m,길이 120m로 단장한다. 송한수기자˝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나의 창업노트] (4) 버섯요리점 ‘남북통일’ 황을용 사장

    직장을 그만둔 사람,집에만 있던 사람이 창업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음식점이다. 큰 손해를 보지 않을 것 같고,낯익은 업종이라 만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음식점을 차려보면 준비 부족과 판단 잘못으로 후회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 서일대학교 사회교육원 1층에 있는 버섯전문 요리점 ‘남북통일’(사장 황을용·50)은 음식점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는 벤치마킹 사례가 될 만하다. ●“광우병 끄떡없어요” 이색적인 간판을 내건 이곳을 찾은 때는 지난 8일 오후 5시30분쯤.음식점 앞에는 시외버스가 다니는 왕복 2차로가 있고,주변에는 허름한 농가 주택들이 눈에 띈다.3∼4㎞ 떨어진 곳에 아파트촌이 들어서 있다. 주인의 안내를 받아 구석진 테이블에 앉은 지 30여분쯤 지나자 저녁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가족단위나 단체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100평 남짓에 4명씩 앉는 테이블 42개 중 절반가량이 순식간에 꽉찼다. 하루 손님은 600여명,매출은 350만원쯤 된다고 황 사장은 말한다.하루 테이블당 회전수는 세번(점심 한번,저녁 두번)가량 된다는 얘기다.황 사장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어 한달 매출액은 1억원,순이익은 매출의 30%(3000만원)쯤 된다.”고 했다.주방장,종업원 등 15명의 인건비(1인당 140만∼200만원)와 재료비,임대료(보증금 7000만원,월세 400만원) 등을 뺀 나머지다.한때 광우병 파동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최근 종전 수준으로 회복됐다고 한다. 메뉴는 버섯을 주재료로 한 모듬버섯전골을 비롯해 모듬버섯차돌박이,모듬버섯생불고기,모듬버섯삼겹편채 등이 있다.가격은 4인가족 기준 2만원으로 모두 같다.주 메뉴를 다 먹으면 야채볶음밥과 얼큰한 칼국수가 나온다.밥과 칼국수는 돈을 받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 준다.모듬버섯은 느타리·팽이·표고·송이·총각·노루궁뎅이 등으로 다른 음식점보다 종류가 훨씬 많고,생산지에서 배달된 뒤 3일간 숙성시켜 사용하기 때문에 신선도가 뛰어나다. 이런 촌동네에서 유별나지도 않은 메뉴로 매월 수천만원대의 수입을 올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황 사장은 “싸면서 맛있고,정성스레 대하면 그만”이라며 비결 아닌 비결을 털어놨다. ●예비 정치인에서 식당주인으로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황 사장은 원래 꿈이 정치인이었다.1980년대 초 고려대를 졸업한 뒤 정치판을 기웃거리다 87년부터는 당시 민정당 출신의 김중위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장애인신문 부사장도 지냈고,무역회사도 경영해 목에 힘깨나 주고 다녔다.하지만 90년대 들어 경기침체 등의 여파로 사업이 잇따라 실패했다.그러다 98년 우연히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됐다.건강식을 즐기는 현대인들의 기호를 살려 버섯요리점을 차리면 잘 될 것 같다는 남동생의 권유에서였다.외환위기 당시여서 ‘값싸고 맛있으면’ 대박이 터질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이 때부터 음식점을 차리는 데 매달렸고,창업 관련 책만 수십권을 읽었다.음식과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라면수프’ 맛을 배운다 버섯과 고기를 끓인 국물에 넣어 살짝 데쳐 먹는 전골 메뉴는 국물맛이 제대로 나야 한다.이곳저곳 다녀봤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그러던 중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와닿는 국물맛은 구수하면서도 익숙한 라면국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무릎을 쳤다.육수를 만들기로 했다.라면수프의 재료를 완전 분해해 벤치마킹했다.소뼈에다 닭발(구수함),무·파(개운함),후추(매콤함),다시다(은은함) 등을 적절히 배합한 ‘황을용식 육수’를 개발해냈다.손님들의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고,매출도 급성장했다.입소문이 퍼져 지금은 퇴계원,의정부,광릉 등에서도 온다.남양주 본점을 비롯해 친·인척들에게 서울,강원도,경기도 지역 등 20여곳에 분점 형태로 내주었다.성업 중이다. ●간판·장소도 경쟁력이다. 간판 이름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 가사에서 착안해냈다.남북통일이 대중성이나 상징성에서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다. 음식점 장소는 그만의 독특한 판단으로 이뤄졌다.남양주 인근을 뒤지다 현재의 음식점 공간이 임대로 나와 있다는 말을 들었다.대학교의 외딴 부설 건물인 데다 인근에 유동인구가 많지 않아 주위에서 극구 말렸다.지역 여건이 상권과 분리돼 있다는 것이었다.건물을 지은 지 6년이 지나도록 입주자가 없었다. 하지만 강행했다.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이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건물 2층에는 학원,3층에는 헬스클럽,4층에는 수영장이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유동인구가 적지만 한번 손님이 몰리면 장사가 제대로 될 것으로 봤다. 차량으로 10분쯤 거리에 아파트단지가 많이 들어서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다.맛만 있으면 차량으로 20분거리에 있는 고객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예상대로 구전(口傳) 마케팅 등에 힘입어 월 1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식당 내의 주방 등 시설 설비도 시공업자들과의 직거래로 비용을 적게(6000만원) 들였다.관련업체에 맡길 때보다 2000만원이 덜 들었다. ●베푼다는 생각 가지면 손님은 저절로 ‘(아줌마)예쁘십니다.(애들이)참 착합니다.어머님(노인들) 또 오셨어요(손을 꼭 잡으며).’ 그는 손님들로부터 ‘서비스가 예술’이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어린이,주부,노인 등을 망라해 이곳을 찾는 사람치고 그의 칭찬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한번 온 손님이 또 올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스킨십(대화)이 더없는 무기”라며 “돈만 버는 장사꾼이 되기보다는 남들한테 베푼다는 생각을 가지면 절로 손님이 오게 돼 있다.”며 영업방침을 소개했다.이어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창업을 원하는 사람에게 창업준비,상권분석,음식비법과 경영노하우 등을 지원해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주병철기자 bcjoo@seoul.co.kr ˝
  • 수도권 주공아파트 노려볼만

    실속있고 알찬 주택을 찾는 청약저축 가입자라면 주택공사가 공급하는 아파트에 관심을 가질만하다. 주공 아파트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 작은 분양아파트와 임대주택으로 나뉜다.처음 내 집을 마련하는 서민들의 몸에 꼭 맞는 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올해 수도권 택지지구에서 청약저축가입자가 분양받을 수 있는 유망 분양,임대아파트를 소개한다. ●보라지구·봉담지구 등 인기 끌 듯 용인 보라지구에서는 오는 9월 32평형 450가구가 분양된다.11월에는 21∼24평형 600가구의 공공임대(5년)도 예정돼 있다.경부고속도로와 국도가 가깝다.저밀도의 쾌적한 전원도시로 개발된다.인근에 한국민속촌,에버랜드,경희대 등이 있다. 화성시 봉담지구에서는 공공분양 아파트 1400여가구가 대기하고 있다.수원 서남권에 위치해 국도 43호선,지방도 84호선 등을 이용할 수 있다.봉담∼동탄 민자고속도로,수원 영통∼화성 분천간 국도가 새로 놓일 예정이다. 오는 10월 공급되는 고양시 풍동지구 국민임대 아파트도 관심을 끌고 있다.저소득층들이 저렴한 가격에 내집 마련의 징검다리로 이용할 수 있다.20∼24평형 822가구이다.저소득 청약저축가입자에게 청약자격을 준다.단지 안에 각급 학교가 들어서고 도시기반시설을 잘 갖추고 있다. 남양주시 호평지구 주공 국민임대 아파트도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456가구이며 9월쯤 내놓을 예정이다.16평형 120가구,19평형 120가구는 청약저축과 무관하게 저소득자가 청약할 수 있다.25평형 216가구는 청약저축에 가입한 저소득자가 청약할 수 있다.경춘선이 통과하고 퇴계원에서 마석까지 자동차 전용도로가 개통되면 서울외곽순환도로 접근이 좋아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 관악구 신림1구역에서는 청약저축 가입자들이 청약할 수 있는 공공분양 아파트 315가구를 분양한다.3322가구가 들어서는 재개발 아파트 단지다.일반 분양 아파트는 24∼44평형이며 이중 24,30평형은 청약저축가입자의 몫이다.관악산이 가까워 쾌적한 주거환경을 누릴 수 있다. ●청약자격 청약저축 가입자가 청약할 수 있는 아파트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 아파트.무주택 세대주로 청약저축에 가입,24회 이상 납입하면 1순위,6회 이상 납입하면 2순위,이 외는 3순위 자격이 주어진다.공공분양,공공임대 모두 청약할 수 있다. 국민임대주택 가운데 전용면적 15평 미만은 청약저축 가입과 상관없이 공급한다.그해 월평균 소득이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 평균소득의 50% 이하(139만6200원)이면 된다.전용면적 15∼18평형은 가구당 월 평균소득이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 평균소득의 70% 이하(2003년 195만 4680원)인 무주택 세대주로,청약저축 가입자가 청약할 수 있다. 류찬희기자 chani@˝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

    “퇴계선생은 로맨스나 스캔들이 없었나요?” “왜요,단양의 기생 두향(杜香)이 하고 연애한 것은 유명하잖아요.” “낮퇴계,밤퇴계가 달랐다면서요?” “그런 속전이 있지.” “자네 퇴계선생의 매화음(梅花吟)이라는 걸 들어봤나?” “아뇨.” “퇴계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알고 싶으면 매화에 관한 시를 읽어봐.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하셨고 내내 아무 말 없다가 저녁에 일으켜 앉히니 앉은 채로 서거하셨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에서 저자와 한 퇴계연구가 사이에 오고 간 선문답이다. 혹자들은 100여년전에 ‘서유견문’의 유길준(兪吉濬)이 있다면 이 시대에는 ‘문화견문’을 쓴 유홍준(兪弘濬·55·명지대 미술사학)교수가 있다고 얘기한다.공교롭게도 둘은 이름의 ‘돌림자’도 같은 기계(杞溪)유씨 ‘충목공파’의 문장가 집안 출신이다. 유 교수는 우리나라 반도 구석구석 안 가본데가 없다.북한까지 다녀왔다.발품으로 일궈낸 밀리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2·3권이 이를 입증한다.1,2권만 합쳐 250만부나 팔렸다.작고한 소설가 이문구는 생전에 그를 가리켜 ‘문화재급 역마살’이라고 했다. ●‘살아 있는 국토 박물관’으로 불려 그는 지난 10년동안 ‘나의 문화유사 답사기’(이하 답사기)를 비롯해 ‘완당평전’‘화인열전’ 등 13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대부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특유의 감각적 글솜씨로 ‘해방후 최고의 베스트셀러’‘살아 있는 국토박물관’이라는 수식어가 곧잘 붙어다닐 정도로 평판이 높다. 시인 박노해씨는 옥중에서 ‘답사기’를 읽고 저자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제 눈을 맑게 열어준 운명같은 마주침의 책,펼칠 때마다 선방의 죽비처럼 내 등짝을 때리는 책,내 마음속 가장 은밀한 자리에 꽂아둔 우리 시대 고전같은 책입니다.…유 선생의 ‘답사길’을 따라가다보면 내 속에 갇혀 있던 나 아닌 것들이 벌떼처럼 살아나서 나를 깨뜨립니다.나는 어쩔 수 없는 이 땅의 자식이구나,조상님들이 내속에 살아계시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소설가 박완서씨는 ‘답사기’를 읽고 이렇게 언론에 기고했다.“읽고 깨우친 바 기쁨이 하도 커서 말하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다.기막힌 비경이나 특별히 맛있는 음식점을 발견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풍기고 싶어 입이 근지러운 심정이라고나 할까….” 지난 주말 명지대 행정관 4층 복도끝에 위치한 그의 연구실을 노크했다.한창 집필중인 ‘답사기’ 4,5권의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연구실 문을 열자 ‘고색 창연한’ 냄새가 코끝에 확 밀려왔다. 산골 오지의 어느 노인이 밤새 새끼꼬아 촘촘히 기워만들었음직한 멍석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그위에는 낡은 궤짝 하나가 앙증맞게 놓여 있었다.또 양쪽 벽에 쭉 늘어진 책꽂이에는 ‘답사의 노정’을 말해주듯 때묻은 고서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1만권은 훨씬 넘지요.이쪽은 한국미술사,저쪽은 중국미술사,저기 저쪽에는 서양미술사 책자들이지요.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마다 중독처럼 사다놓은 결과물입니다.” 담배 하나 꺼내 물었다.97년 이전에 3년정도 끊었으나 북한을 다녀오면서 다시 피우게 됐다고 그는 말했다.네모난 성냥곽에서 성냥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성냥은 충청도 어딘가에 있는 국내 유일의 공장에서 만든것입니다.그런데 자동이래요.이렇게 열었다 놓으면 뚜껑이 저절로 닫히니까.나원 참….”답사도중에 얻어온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가지 놀라운 일,책상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컴퓨터가 없었다.600자원고지와 만년필이 대신해 있었다.그는 “컴퓨터로 글을 쓰면 이쪽저쪽에서 글을 퍼오기 때문에 신선도가 떨어진다.쓰다가 잘못되면 원고지를 과감히 버리고 다시 써야 글이 살아 숨쉰다.”며 특유의 ‘원고지철학’을 늘어놓았다.컴퓨터는 인문적인 것을 쏙 빼버린 기계적인 빠름일 뿐,고뇌도 없고 과정도 없으며,잃어버린 게 많다고 했다. 문득 독자들을 사로잡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했다.기다렸다는 듯이 “최고의 취미는 여행이다.여행이라는 매체를 넣고 글을 썼다.마침 독자들이 거기에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거침없는 답변이 계속됐다. ●“학자인지 문필가인지 나도 몰라” “가끔 내 자신이 학자인지,문필가인지,평론가인지를 물어보곤 합니다.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에겐 문사(文士)가 없어요.고행과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문사말입니다.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해서 문사일 수 없으며 지조있는 선비정신이 내재돼야 합니다.‘답사기’를 3권까지 썼지만 갈수록 글쓰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현재 절반쯤 진행중인 4,5권 집필도 더 어려운 작업이라고 토로했다.제주도를 답사했더니 4·3사건을 안 다룰 수가 없고,경상도를 갔더니 거창학살사건을 다시 조명해야 하기 때문이란다.이런 과정을 거쳐 ‘답사기’의 완결편 2권을 올 상반기중 마무리할 작정이다. 그런 다음 일생의 또다른 역작,즉 독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어떤 강렬한 요구에 답을 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새로운 다짐이다.그것은 온국민이 함께 읽을 수 있는 ‘한국미술사’를 집필하는 일이다.준비는 오래전부터 해와 곧바로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미술사는 문화사의 꽃입니다.학식과 학덕을 쌓은 사람이 그 시대의 역사관을 잘 반영했을 때 더욱 향기나는 꽃이 되겠지요.또 복잡한 현상을 단박에 단도질할 수 있는 깊이와 연구업적이 뒤따라야 합니다.영어로 쓰여진 한국미술사는 물론 번역할 수 있는 마땅한 텍스트도 없습니다.” ●한국인 대부분 문화적 자존심 강해 이곳저곳 강의 경험으로 볼 때 한국인은 대부분 문화적 자존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그는 반면에 열등의식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했다.결국 ‘짬뽕’식이 되다보니 단군 이래 세계문화를 주도해본 적이 한번도 없이 중심부가 아닌,늘 주변부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이제는 주변이 아닌 중심적인 문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동아시아문화의 ‘주주’로서 다른 나라에 문화적 영향을 줘야 한다는 필연이 도래했다고 역설했다.한국미술사를 집필하는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이란다. “일본은 동아시아를 주도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기네들만 살려고 해서 실패했습니다.더이상 도덕적으로 동아시아를 주도하기는 틀렸습니다.중국사람들은 우리보다 5,6년 뒤져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한류가 퍼져나가는 것을 보십시오.대중의 힘은 어마어마합니다.미국의 문화가 오기전에 마를린 먼로가 우리들에게 가장 먼저 왔지 않습니까.이제는 세계에서 1등이 나와야 합니다.노무현 대통령도 동아시아물류중심국가를 외쳤는데 이는 반쪽에 불과합니다.물류와 문화가 합쳐진 그런 정책이어야 하지요.” 나이 40이 넘어가면 과거의 이력이 얼굴에 하나둘 새겨진다는 말을 꺼내자 그는 “파란과 곡절도 많았다.93년 이전까지는 정말 별볼 일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14년반만의 대학졸업,교수직 박탈,8년동안의 백수상태,운동권 이론가라는 제도권 교수의 따돌림 등만 떠올려도 그렇단다. ●고3때 담임선생님 권유로 미대 진학 청운초·중학을 나온 그는 경복고교 입학시험에 낙방했다.중동고로 방향을 튼 그는 1967년 고3때 국문학과를 택하려고 했으나 담임선생의 권유로 서울대 미학과에 진학했다.그러나 ‘예술학개론’‘예술비평’ 등의 딱딱한 강의가 많아 연극회에 가입해 유치진의 ‘토막’,천승세의 ‘만선’ 등 민족극 공연에 적극 참가했다.공부는 뒷전이었다.연출은 주로 서울대 미학과 선배인 김지하씨가 맡았다. 대학시절 그의 서울 종로구 창성동 집에는 소위 ‘의식있는’ 친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보안 경찰관에게 데모꾼 소굴로 인식됐다.결국 69년 4월 ‘3선개헌 풍자극’의 대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그해 7월 무기정학을 받았다.시련을 호되게 겪은 그는 서둘러 군입대를 하게 됐다.제대 후 한국미술사 연구에 필생을 걸고 뜻을 세우지만 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됐다.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현상수배중이던 이철(전 국회의원)에게 남의 주민등록증을 빌려줬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75년 2월 그는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방황하던 그는 7개월 뒤 군복무중 미술관에서 만난 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다.원래는 장준하 선생이 주례를 맡기로 했으나 의문의 실족사로 리영희 교수로 바뀌었다.결혼 후에는 금성출판사,공간사 등에 다녔다. 80년 10월,입학한 지 14년 반만에 겨우 졸업장을 받고 이듬해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전공에 들어갔다.대학원을 마친 그는 건국대 교수로 채용됐으나 미복권 상태임이 밝혀져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이때 그는 ‘미술속에서 현실을 찾자’는 구상 아래 그 유명한 슬라이드강좌 ‘젊은이를 위한 한국 미술사’를 열어 떠돌이 생활로 대중속에 파고들기 시작했다.‘답사기’라는 역마살도 이때 시작됐다. “인세요? 한 15억원정도? 세금 한 4억 냈을테고….집사람한테 물어봐도 안 가르쳐줘요.장관이라도 돼야 정확히 알 수 있을란가?(웃음)” ‘답사의 달인’에게 꼭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전문화의 진수는 경주,건축의 아름다움은 병산서원·부석사라고 했다.또 자연의 풍요로움을 느끼려면 제주가 으뜸이라고 했다.그러면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알면 보이나니,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유홍준 교수는 ▲1967년 중동고 졸.80년 서울대 미학과 졸.83년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98년 찰학박사(성균관대). ▲77년 공간 편집부.78년∼83년 중앙일보 계간 미술부 근무.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91년∼2002년 영남대 회화과 조교수.2002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박수근미술관 명예관장.2003년 문화재위원. ▲저서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다시 현실과 비평에서,정직한 관객,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나의 북한유산 답사기,완당평전,화인열전 등. ˝
  • 중앙박물관 ‘토요명품감상’ 첫날 200여명 몰려

    국립중앙박물관의 ‘토요 명품 감상’에 문화유산 애호가들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큐레이터와의 대화’라는 부제처럼 박물관의 전문학예직이 주도하여,하나의 주제로 5점 이하의 명품만 집중 감상하는 대(對)국민 서비스다. ‘토요 명품 감상’은 지난 6일 ‘금속공예’를 주제로 막을 열었다.금속공예를 전공한 이귀영 학예연구관은 이날 고려 현종 1년(1010년)에 만들어졌다는 국보 제280호 천흥사 동종을 설명하는 데 한 시간을 모두 소비했다.고려 범종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천흥사 종에서 시작한 설명은 자연스럽게 우리 종의 역사에서부터 한·중·일 범종의 특징으로 이어졌다. 관람객들은 천흥사 종 하나만 봤을 뿐이지만,결과적으로 범종에 대한 종합적 지식을 섭취하고,기초적인 범종 감식능력을 터득할 수 있었던 셈이다. ‘토요 명품 감상’은 중앙박물관이 용산 이전을 앞두고 휴관하는 10월 말까지 매주 주제를 달리하여 이어진다. 13일은 국보 제61호 청자 어룡무늬 주전자,20일은 조희룡의 매화그림,서예를 주제로 하는 27일은 퇴계 이황의 칠언시를 다룬다.새달 3일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10일은 조선시대 반가(班家)의 사랑방,17일은 국보 제101호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을 중심으로 감상한다. 현재의 중앙박물관은 고고·미술사 박물관의 성격을 갖고 있다.용산으로 이전하면 역사 박물관의 성격을 강화하겠다며 역사부를 신설한 것이 최근이다.그동안 고고·미술사 박물관으로 만족스럽다고 하기도 어려웠다.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린 뒤 용산 박물관을 잇는 임시 박물관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초라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늦었지만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데는 어디에 내세워도 자랑스러운 우리 미술품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토요 명품 감상’은 보여준다.한 시간 이상 설명해야 할 만큼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범종을 갖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앞으로 감상할 반가사유상과 감은사 서탑 사리장엄구 등은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종일 설명하고도 모자랄 만큼의 의미를 담고 있다.청자와 백자·분청사기 등도 마찬가지다. 사실 ‘토요 명품 감상’은 중앙박물관이 국민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지난 1월 공표한 ‘대 국민 서비스 강화’방침에 따라 급작스럽게 준비한 프로그램이다.그렇지만 홍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첫날,예상을 두 배나 뛰어넘은 200여명의 관람객이 찾아왔다.국민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관람객은 몰려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중앙박물관은 실감했을 것이다. ‘토요 명품 감상’에 참가하려면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중앙박물관 2층 안내데스크를 찾으면 된다.(02)398-5140 중앙박물관 미술부. 서동철기자 dcsuh@˝
  • [CEO칼럼] 소박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해/오상현 대한손해보험협회 회장

    이제 사회지도층은 공적 의무를 도외시한 소모적 논쟁과 분열을 그만두고 자기희생적 노력을 통해 공동선에만 오로지 헌신해야 한다. 천지기운을 보니 기어이 봄이 오려나 보다.섭리인즉슨 진정한 봄은 꽃샘추위를 거치고서야 온다.최근 불법 정치자금 때문에 사회 전체가 시끄럽다.이것을 혹자는 사회불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꽃샘추위처럼 피할 수 없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견해가 맞는 듯하다. 정치자금의 예에서 보듯 과거에는 알게 모르게 용인되던 도덕률이 점점 투명하고도 엄격한 형태로 진보하고 있다.선진국일수록 이러한 도덕률은 더욱 철저한데,미국 공직자의 경우 20달러 이상의 접대만 받아도 법으로 처벌받는다고 알고 있다. 또 이러한 도덕률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책무는 영향력이 큰 국가 엘리트 혹은 사회지도층에게 더 엄격히 적용되는 게 당연하다.왜냐하면 사회지도층이야말로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계층이기 때문이다.이들은 지대한 권력이나 명예,혹은 부를 누리며 그만큼의 사회적 대우도 받는다. 영국만 보더라도 웰링턴 국립묘지의 묘비에는 일반 서민들의 이름보다는 작위를 받은 귀족들의 이름이 훨씬 더 많이 새겨져 있다.포클랜드 전쟁 때 앤드루 왕자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해 최전방에서 싸운 일화는 유명하다.그래서 일반 영국 국민은 위난시에 목숨을 버리며 앞장선 사회지도층에 대해 기꺼이 존경하고 흔쾌히 대우하는 것이다.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1950,1960년대에는 소를 팔아야 대학을 보낸다고 하여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이 유행했다.6·25전쟁 때에는 대학생이면 병역연기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는데 소 한마리 값이 없어서 대학에 못 보내는 대신 전쟁터로 보낸 멀쩡한 자식을 한 줌 뼛가루로 돌려받는 일도 많았다. 얼마 전까지도 자랑스러워야 할 병역의무가 공평하게 부과되지 않아서,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자기희생적 의무는 이행하지 않는 사회지도층을 지켜보는 많은 민초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다. 양반과 상놈으로 차별해 서민대중을 무시하고 핍박하던 섣부른 선민의식 탓인지,친일을 하던 반민족주의자들이 적반하장격으로 득세하던 탓인지 모르겠으되,사회갈등을 야기하고 국민평등에 위배되는 이러한 악습은 앞으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16세기 조선조에 퇴계 이황은 선비의 역할로 사회적 공의정신(公儀精神)을 강조한 바도 있다.이러한 선비정신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지조의식으로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런 면에서 현대적 의미의 선비정신이란 자기만족의 고루한 이념이 아니라 몸을 낮춘 채 배운 자는 배움으로,힘 있는 자는 힘으로,돈 있는 자는 돈으로 서민대중 속에서 고통과 즐거움을 같이 나누려는 소명의식의 적극적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인간배아 줄기세포의 배양성공으로 세계적 찬사를 한몸에 받은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특허로 생기는 수입은 사회에 헌납하고 오직 조국과 인류의 공동선에만 기여하겠다고 밝힌 각오는 선비정신의 현대적 응용으로 혼탁한 세상에 던진 신선한 충격이 됐다. 이제 사회지도층은 공적 의무를 도외시한 소모적 논쟁과 분열을 그만두고 자기희생적 노력을 통해 공동선에만 오로지 헌신해야 한다.그런 후에만 비로소 지도층으로서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지도층이 거듭남으로써 부여받은 소명을 다하고 진정으로 존경받게 되는 사회야말로 국민 대통합의 토대가 될 것이며,이것은 그대로 한국적 민주주의의 소박하지만,아름다운 화원(花園)이 될 것이다. 오상현 대한손해보험협회 회장˝
  • [인사]

    ■ 해양수산부 ◇국장급 전보△장관 정책보좌관 李龍雨 ■ 금융감독위원회 ◇부이사관 승진△증권감독과장 兪在勳 ■ 하나은행 ◇부·실·팀장△가계영업기획부 金淳福△사무지원부 丁海鵬△검사부 曺正鉉△증권대행부 蔡孝植△기업금융부 韓星洙△감찰실 權吉周△PB지원팀 金永郁△신용관리팀 金榮鐵△채권관리팀 朴勝吳△외환업무센터 白濟旭△CS팀 李志賢△공보팀 安永根◇지점장△의정부 姜思遠△수원중앙 姜元善△제주 高베두루△청담사거리 具成煥△잠원역 丘在武△사상 金光秀△동부이촌동 金光淑△당산역 金基宗△연수 金大植△방배 金大廈△구포 金東圭△하계역 金美敬△과천 金先模△을지로 金秀權△천천동 金淳成△동대구 金榮都△문래동 金容述△주엽역 金鎔在△경인기업센터 金雲基△소사 金允權△상인동 金在根△영동 金宰台△용두동 金貞起△신사동 金正敏△대연동 金鍾成△경복궁역 金鍾烈△장유 金柱童△이태원 金周燮△한남동 金支榮△마포 金昌經△은평신사 金昌善△신당역 金澤尙△익산 金判中△답십리역 金炫祚△수성동 金鎬晩△동여의도 盧淵錫△성남중앙 盧學聖△영주 柳光進△퇴계로 문승환△범일동 閔炳權△수지상현 朴旦一△해운대 朴大龍△일원중앙 朴相洛△봉천동 朴勇俊△미아동 朴在夏△구미 朴在浩△충주 朴鍾鎬△인천 朴知煥△효자동 朴燦熙△아차산역 朴夏用△홍콩 朴亨埈△삼선교 朴勳基△강서기업센터 朴興烈△신촌 方承仁△화정 房永爀△수지 裵俊浩△망원2동 白承元△수유동 白永基△수원 徐秊鍾△남천동 徐在弘△청량리중앙 孫箕烈△강남역 柴昌洙△신길동 申德均△휘경동 申東晏△둔촌동 愼釘浩△대전 申鉉海△신월동 安基弘△보라매 安石鎬△의정부역 安泰憲△온천남 安熙甲△군산 梁俊承△서면역 吳奎煥△화명동 吳敏哲△안양중앙 柳桓△공항터미널 柳哲馨△잠실본동 柳會烈△석촌동 陸換洙△이천 尹碩鉉△목포 李庚昇△평택 李敬逸△돈암동 李都成△신포동 李東英△한남1동 李明賢△방배서래 李相冕△서초남 李相鳳△진주 李相肅△문정동 李相雨△천호동 李善和△홍은동 李承宰△광안동 李永琪△삼풍 李英珠△청담동 李旭永△장한평 李原式△노원롯데 李銀珠△메트로시티 이자늠△연신내 李在東△전주 李政奎△강선마을 李稷洙△우이동 李泰鍾△개포동 李漢求△대치동 李炯一△신흥동 任丙學△역삼동 林聖均△신월7동 任秩彬△독산동 任顯一△수송동 張基龍△금광동 張鎭炯△청주중앙 全濟昌△익산중앙 鄭大鴻△평창동 鄭明基△충신동 丁永石△장위동 鄭英鎬△대치역 鄭在林△금호동 鄭主燮△동대문 鄭鎭星△구리 丁贊日△고덕역 鄭熙錫△수유2동 鄭希淑△군산중앙 趙奇福△서강 曺英烈△중동 崔東賢△행당동 崔秉直△오류동 崔成天△동래 崔順雄△신대방동 崔潤根△제천 河福來△부전동 河相旭△분당중앙 咸泳周△김해 許盛△고척동 許舜雄△언주로 洪上裕△중계동 洪春植△안양 黃明煥△무역센터 黃仁山△인사동 黃載夏△영업2부 姜熙秀◇개설준비위원장△구미공단 李錫守◇가계영업팀장△서면 金善道△철산동 金判燮△동수원 金鶴鎭△울산 朴洙東△창원 徐廣補△역삼역 徐榮珠△부산 安炳完△성남 吳春根△포항중앙 兪炳吉△인천 柳在晳△독산동 陳世得◇RM(기업금융전담역)△중부기업금융본부 姜炫敦△중기업금융1본부 高亨錫△〃2본부 金永洙△〃3본부 金泰範 全閏洙△금남로 金成龜△남동공단 柳成旭△창원중앙 朴泰奎△창원 吳光根△경인중기업금융본부 全湊龍△대기업금융1본부 鄭完澈 ■ 병무청 ◇서기관 승진△공보담당관실 羅美洙△동원소집국 金鐵洙 △서울지방병무청 秋榮民 ■ 산림조합중앙회 △총무부장 朴來德△금융〃 金壽範△개발〃 全甲辰△개혁기획단장 柳世馨△사업개발기획〃 李炯敏△녹색복권사업소장 崔奎哲△엔지니어링사업본부장 李康植△중부임산물종합유통센터분사장 李謹培△경기도지회장 金永喆△강원〃 金順來△임업기술훈련원장 金龍林△산림토목사업소 남부지소장 權光德 ■ 국민대 ◇실장△관재팀 禹永泰△공로연수 金鍾完 ■ goodday △사업본부 기획사업팀장 金必源 ■ 행정자치부 ◇서기관 전보△복지과장 崔熙男 △복무〃 全聖泰 △조직기획〃 沈德燮 △지방세심사〃 李熙鳳 △방재계획담당관 權永洙 △중앙공무원교육원 金松一 ◇서기관 파견△정부혁신세계포럼준비기획단 朴東勳 金尤鎬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柳淳鉉 △지방분권지원단 李在官 △정책기획위원회 朴宰民 △정부혁신기능분석단 張鎭福 △수질개선기획단 張洙完 ■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부이사관 전보 △조사총괄과장 趙誠烈△조사관리〃 金康壽 ◇서기관 전보 △민원평가담당관 宋宗永 △조사2과장 鄭光容
  • [인사]

    ■ 해양수산부 ◇국장급 전보△장관 정책보좌관 李龍雨 ■ 금융감독위원회 ◇부이사관 승진△증권감독과장 兪在勳 ■ 하나은행 ◇부·실·팀장△가계영업기획부 金淳福△사무지원부 丁海鵬△검사부 曺正鉉△증권대행부 蔡孝植△기업금융부 韓星洙△감찰실 權吉周△PB지원팀 金永郁△신용관리팀 金榮鐵△채권관리팀 朴勝吳△외환업무센터 白濟旭△CS팀 李志賢△공보팀 安永根◇지점장△의정부 姜思遠△수원중앙 姜元善△제주 高베두루△청담사거리 具成煥△잠원역 丘在武△사상 金光秀△동부이촌동 金光淑△당산역 金基宗△연수 金大植△방배 金大廈△구포 金東圭△하계역 金美敬△과천 金先模△을지로 金秀權△천천동 金淳成△동대구 金榮都△문래동 金容述△주엽역 金鎔在△경인기업센터 金雲基△소사 金允權△상인동 金在根△영동 金宰台△용두동 金貞起△신사동 金正敏△대연동 金鍾成△경복궁역 金鍾烈△장유 金柱童△이태원 金周燮△한남동 金支榮△마포 金昌經△은평신사 金昌善△신당역 金澤尙△익산 金判中△답십리역 金炫祚△수성동 金鎬晩△동여의도 盧淵錫△성남중앙 盧學聖△영주 柳光進△퇴계로 문승환△범일동 閔炳權△수지상현 朴旦一△해운대 朴大龍△일원중앙 朴相洛△봉천동 朴勇俊△미아동 朴在夏△구미 朴在浩△충주 朴鍾鎬△인천 朴知煥△효자동 朴燦熙△아차산역 朴夏用△홍콩 朴亨埈△삼선교 朴勳基△강서기업센터 朴興烈△신촌 方承仁△화정 房永爀△수지 裵俊浩△망원2동 白承元△수유동 白永基△수원 徐秊鍾△남천동 徐在弘△청량리중앙 孫箕烈△강남역 柴昌洙△신길동 申德均△휘경동 申東晏△둔촌동 愼釘浩△대전 申鉉海△신월동 安基弘△보라매 安石鎬△의정부역 安泰憲△온천남 安熙甲△군산 梁俊承△서면역 吳奎煥△화명동 吳敏哲△안양중앙 柳桓△공항터미널 柳哲馨△잠실본동 柳會烈△석촌동 陸換洙△이천 尹碩鉉△목포 李庚昇△평택 李敬逸△돈암동 李都成△신포동 李東英△한남1동 李明賢△방배서래 李相冕△서초남 李相鳳△진주 李相肅△문정동 李相雨△천호동 李善和△홍은동 李承宰△광안동 李永琪△삼풍 李英珠△청담동 李旭永△장한평 李原式△노원롯데 李銀珠△메트로시티 이자늠△연신내 李在東△전주 李政奎△강선마을 李稷洙△우이동 李泰鍾△개포동 李漢求△대치동 李炯一△신흥동 任丙學△역삼동 林聖均△신월7동 任秩彬△독산동 任顯一△수송동 張基龍△금광동 張鎭炯△청주중앙 全濟昌△익산중앙 鄭大鴻△평창동 鄭明基△충신동 丁永石△장위동 鄭英鎬△대치역 鄭在林△금호동 鄭主燮△동대문 鄭鎭星△구리 丁贊日△고덕역 鄭熙錫△수유2동 鄭希淑△군산중앙 趙奇福△서강 曺英烈△중동 崔東賢△행당동 崔秉直△오류동 崔成天△동래 崔順雄△신대방동 崔潤根△제천 河福來△부전동 河相旭△분당중앙 咸泳周△김해 許盛△고척동 許舜雄△언주로 洪上裕△중계동 洪春植△안양 黃明煥△무역센터 黃仁山△인사동 黃載夏△영업2부 姜熙秀◇개설준비위원장△구미공단 李錫守◇가계영업팀장△서면 金善道△철산동 金判燮△동수원 金鶴鎭△울산 朴洙東△창원 徐廣補△역삼역 徐榮珠△부산 安炳完△성남 吳春根△포항중앙 兪炳吉△인천 柳在晳△독산동 陳世得◇RM(기업금융전담역)△중부기업금융본부 姜炫敦△중기업금융1본부 高亨錫△〃2본부 金永洙△〃3본부 金泰範 全閏洙△금남로 金成龜△남동공단 柳成旭△창원중앙 朴泰奎△창원 吳光根△경인중기업금융본부 全湊龍△대기업금융1본부 鄭完澈 ■ 병무청 ◇서기관 승진△공보담당관실 羅美洙△동원소집국 金鐵洙 △서울지방병무청 秋榮民 ■ 산림조합중앙회 △총무부장 朴來德△금융〃 金壽範△개발〃 全甲辰△개혁기획단장 柳世馨△사업개발기획〃 李炯敏△녹색복권사업소장 崔奎哲△엔지니어링사업본부장 李康植△중부임산물종합유통센터분사장 李謹培△경기도지회장 金永喆△강원〃 金順來△임업기술훈련원장 金龍林△산림토목사업소 남부지소장 權光德 ■ 국민대 ◇실장△관재팀 禹永泰△공로연수 金鍾完 ■ goodday △사업본부 기획사업팀장 金必源 ■ 행정자치부 ◇서기관 전보△복지과장 崔熙男 △복무〃 全聖泰 △조직기획〃 沈德燮 △지방세심사〃 李熙鳳 △방재계획담당관 權永洙 △중앙공무원교육원 金松一 ◇서기관 파견△정부혁신세계포럼준비기획단 朴東勳 金尤鎬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柳淳鉉 △지방분권지원단 李在官 △정책기획위원회 朴宰民 △정부혁신기능분석단 張鎭福 △수질개선기획단 張洙完 ■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부이사관 전보 △조사총괄과장 趙誠烈△조사관리〃 金康壽 ◇서기관 전보 △민원평가담당관 宋宗永 △조사2과장 鄭光容
  • 타악기 연주대가 김대환 별세

    타악 연주자이자 세서미각(細書微刻)의 달인으로 알려진 흑우(黑雨) 김대환(金大煥)씨가 1일 오후 7시20분 지병으로 별세했다.71세. 1933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열 손가락 사이에 여섯개의 북채를 쥐는 독특한 연주로 주목받은 우리나라 재즈계의 거목이었다. 70세가 넘도록 검은색 가죽점퍼에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던 기인이기도 했다.초대 그룹사운드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30여년 동안 대중음악계에서 활약했다.1970년대 중반 알토색소폰의 강태환,트렘펫의 최선배와 밴드 ‘강트리오’를 결성하면서 프리재즈 아티스트로 변신했다.1980년대 중반부터는 ‘울타리굿’ 동인으로 참여해 미국 인디언 페스티벌과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등에서 공연했다. 말년에는 세서 작업으로 유명해졌다.1990년에는 쌀알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 넣어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유족은 부인 권명희씨와 딸 지양씨가 있다.발인은 3일 오전 6시30분.인사동과 할리데이비슨오토바이협회가 있는 퇴계로,대학로 재즈카페 ‘천년동안도’에서 노제가 열린다.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화장터.(02)392-3099. 박상숙기자 alex@˝
  • 서소문 출근길 시속11.8㎞ ‘엉금엉금’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 조성공사로 시청 앞 교통체계가 확 바뀐 2일 오전,우려했던 ‘교통대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시청 주변 주요 구간별 통행속도는 시속 16∼27㎞로 지난달 화요일 평균 속도와 비교해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서소문로·태평로 등 일부 구간에서는 신호체계 미흡과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차량들로 극심한 체증을 빚었다. 서울시 이경순 교통정보분석담당은 “출근 피크시간대를 기준으로 교통대란은 없었지만 개선할 점이 노출됐다.”고 말했다. 이날 아침 가장 막힌 도로는 서소문로 아현삼거리에서 시청방향으로,출근시간대(오전 7∼9시) 시속 20.1㎞이던 통행속도가 11.8㎞로 뚝 떨어졌다.서소문 쪽에서 남산3호터널로 진입하는 차량과 남대문 쪽에서 남산3호터널,또는 을지로로 향하는 차량이 프라자호텔 뒤편인 북창동길에서 만나면서 병목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태평로에서 남대문로 양방향 역시 출근시간대에 큰 혼잡을 빚었다.교통정리에 나선 전모(22) 의경은 “서울역과 용산 쪽으로 가는 차량들이 한 곳으로 모이면서 서울역까지 정체의 꼬리가 이어졌다.”면서 “갈 방향을 몰라 헤매는 차량들도 많아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평소에도 막혔지만 을지로도 교통 흐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퇴계로는 평소보다 흐름이 좋았다. 남대문로에서 세종로 쪽으로 가는 차량들이 태평로에 신설된 신호를 받으면서 정체구간이 길어졌다. 소공로에서 시청 뒷길을 통해 세종로로 진행하는 차량들을 위해 우회전 신호가 생겼기 때문이다.모범택시 운전사 전병찬씨는 “시청 뒷길에서 우회전하도록 한 신호체계가 오히려 태평로의 정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개선의 필요성을 지적했다.정체가 가장 심한 서소문로 시청방향으로의 원활한 흐름을 위해서는 아현고가에서 내려오는 차량들에 대한 신호주기 조정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서울시 이제원 도심교통개선반장은 “전체적으로 보면 큰 문제는 없었지만 부분적으로 개선할 점이 발견됐다.”면서 “정체구간에 대해서는 신호·차로조정을 통해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최용규기자 yk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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