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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36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김성일이 기록한 대로 퇴계는 혼자 말을 타고 소백산에 올랐다가 여러 날 만에 돌아올 만큼 소백산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찌하여 소백산을 그토록 좋아하였을까. 그것은 김성일의 표현처럼 ‘남악(南嶽)의 흥’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악의 흥. 이는 일찍이 주자가 남악에 올라 속세를 떠날 뜻을 시로 읊은 사실을 의미한다. 남악은 형산(衡山)의 별칭으로 중국 오악(五岳) 중의 하나이다. 호남성에 있는 명산으로 주자는 29살 때부터 33세 때까지 남악에 살면서 사묘(祠廟)를 관장하는 벼슬을 지냈다. 이때 주자는 남악에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공부의 본령(本嶺)’임을 깨닫고 세속을 떠날 결심을 하는 것이다. 형산에는 72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높고(1290m),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봉우리는 축융봉(祝融峯)이었다. 주자는 축융봉에서 산의 본령을 본 것이 아니라 학문의 본령을 본 것이었다. 학문의 본령이야말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세속을 떠나는 길임을 깨달은 주자는 축융봉에서 ‘축융봉을 내려오며 쓴 시(醉下 祝融峯 作時)’란 제목의 시를 짓는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만 리를 와서 기(氣)바람을 타니/끊어진 계곡, 겹친 구름에 가슴이 호탕해지네. 막걸리 석 잔에 호기가 일어/멋대로 읊조리며 축융봉을 날아서 내려온다.” 주자가 28살 때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남악에 칩거한 이후로 오직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듯이 퇴계 역시 48살 때 죽령고개를 넘은 이후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단호히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퇴계에 있어 소백산은 주자의 남악과도 같은 인생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죽령 고갯마루에 앉아서 묵묵히 마음을 다잡아 결심하였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던가.34세의 늦은 나이로 첫 출사한 뒤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4개 아문(衙門)에서 총 29종의 벼슬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주자는 28세의 나이 때 과감히 퇴직하여 남악의 형산으로 올라가 속세를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주자에 비하면 나는 이미 15년이나 늦은 것이다. 아득한 시야 저편으로 굽이쳐 흘러내린 소백산은 그야말로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휘황찬란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순간 퇴계의 머릿속으로 주자의 목소리가 천둥이 되어 울려 퍼졌다. “도가 있으면 반드시 완전히 태평해지기를 기다려서 나아갈 것이 아니오. 도가 없으면 또한 반드시 어지러워지기를 기다려서 숨는 것이 아니다. 도가 있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새벽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밝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밝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도가 없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밤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어둡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어둠을 향해 가는 것이니 모름지기 기틀을 보아서 행동하여야 한다.” 퇴계의 존경하는 스승 주문(朱門)의 육성은 사자후가 되어 퇴계의 뇌리에 내리 박혔다.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퇴계는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주문의 말처럼 하늘이 새벽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아직 밝지는 않았어도 밝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더 이상 늦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차피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퇴계는 종자가 준 냉수를 단숨에 들이켜면서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순간 퇴계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 儒林(36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를 태운 말은 마침내 버들밭을 지나 죽령고개에 이르렀다. 오르막 30리의 길을 다 올라 이제 내리막 30리의 고갯마루에 이른 것이었다. 아침 일찍 떠난 길이라 산마루턱에 이르렀어도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었다. 오르는 중간고비마다 퇴계는 산신당에 들러 보기도 하고 한때는 거대한 석굴사원이 있었던 보국사 절터를 둘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꼬박 하룻길 죽령을 넘으면서 퇴계는 지금까지 살아온 오십 평생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숙고하고 있었으므로 마부가 이끄는 대로 말위에 앉아 줄곧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퇴계의 모습은 진흙으로 빚은 석인처럼 보였다. 퇴계는 말이 죽령고개에 이르자 마부에게 일러 말을 세우고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지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짐을 들고 가는 종자도 쉬게 할 요량이었다. 이제 고갯마루를 넘으면 그대로 경상도. 그러므로 버들밭을 지난 고갯마루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갈림길인 것이다. 퇴계는 종자가 가져온 찬물을 마시고 묵묵히 산 아래로 펼쳐 보이는 아득한 벌판을 바라보았다. 옛 속담에 ‘마루 넘은 수레 넘어가기’란 말이 있듯이, 이제 풍기까지는 삼십 리의 산길이라 하더라도 꼬불꼬불 내려가는 길이었으므로 지척지간인 것이다. 퇴계는 연화봉에서부터 연결된 백두대간이 도솔봉으로 이어져 산맥을 이루고 있는 소백산의 준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험준한 산맥 사이로 죽령의 고갯길이 아슬아슬하게 펼쳐져 있었다. 소백산. 퇴계는 단양과 풍기 사이에 있는 소백산을 특히 사랑하고 있었다. 해발 1440m의 소백산은 일찍이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라 불리던 예언자, 남사고(南師古:1509∼1570)가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고 넙죽 절하고 갔다던 명산. 백두대간인 태백산 어름에서 문득 서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려 내륙으로 달리다가 한껏 가뿐 숨을 몰아 쉬는 곳이 바로 소백의 연봉들인 것이다. 퇴계가 소백산을 사랑하였다는 사실은 죽령고개를 넘어 풍기군수로 전근한 이퇴계가 당시 충청감사로 있던 형이 고향 예안으로 다니러 갈 때면 죽령에 쉼터를 마련하고 마중하고 배웅하던 두 곳의 주호자리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잔운대’와 ‘촉령대’로 불렀다는데 지금은 그곳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퇴계가 소백산을 사랑하였다는 것은 제자 김성일이 쓴 ‘언행록’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선생이 두 고을(단양과 풍기)에 있을 때에는 맑은 바람이 씻어간 듯이 조금도 사사로운 일에는 개의하지 않았다. 공무의 여가에는 책으로써 스스로 즐기고 혹은 초연히 혼자 나가서 수석(水石) 사이를 거닐기도 하였는데 들의 농부들이 이를 바라보고 마치 신선같이 생각하였다. 군(郡:풍기군·그때 선생은 풍기의 군수로 있었다.)에 소백산이 있으니 곧 남쪽 갈래의 명산이다. 선생은 일찍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그 봉우리에 올랐다가 여러 날 만에 돌아오시곤 하였다. 표연(飄然)히 남악(南嶽)의 흥(興)이 있었다.”
  • 儒林(362)-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2)-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철두철미(徹頭徹尾). 책을 읽고 학문에 정진하는 퇴계의 태도는 마치 코끼리가 한발 한발 내딛는 것과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 언행록’에는 제자들이 평한 스승의 태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책을 읽을 때에는 바로 앉아 엄숙하게 외웠다. 문자에서는 그 새김을 찾고 글자에서는 뜻을 찾아서 비록 한자 한 획에 미세한 것에서도 예사로 지나치지 않아서 어로시해(魚魯豕亥)의 헷갈리기 쉬운 것도 반드시 분별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일찍이 기왕있는 글자를 지우거나 고치지 않고 그 글 위에다가 주를 붙이기를 ‘아무글자는 마땅히 아무글자로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곰곰이 생각하였으니, 그 자세하고 삼가고 정밀함이 이와 같았다.” 특히 언행록에는 ‘기거와 어묵(語默)의 절(節)’이란 항목이 별도로 취급되어 있는데, 이곳에 나타나고 있는 퇴계의 면학태도는 대략 다음과 같다. “거처하는 곳은 조용하고 정돈되었으며, 책상은 반드시 말끔하게 치우고, 벽장에 가득한 책은 가지런히 순서대로 되어 있어서 어지럽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향불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 온종일 책을 읽어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갓을 쓰고 띠를 띠어서 서재에 나가면 얼굴빛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조금도 어디에 기대는 일이 없었다. 하루 종일 책을 읽다가 때로는 고요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시를 읊조리기도 해서 세속사람들이 즐기는 바는 절대로 그의 마음을 스쳐가는 일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고요히 앉아 마음을 삼가고, 생각에 잠길 때에는 마치 흙으로 빚어 만든 사람 같았다. 그러나 학자들이 와서 묻는 일이 있으면 샅샅이 파고 캐서 환히 가르쳐 주었으므로 비록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모두 감동되어 깨달음이 있었다.” 이렇듯 응연(凝然)하고, 적연(寂然)한 면학태도는 퇴계의 백세사표였던 주자의 뿌리를 뽑는 철저한 학구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니, 실제로 퇴계는 주자를 학문의 문이라고까지 숭상하여 주자를 일러 ‘주문(朱門)’으로까지 극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주자를 ‘주문’으로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말년에 쓴 퇴계의 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병인년 겨울에 안동대도호부사로 있었던 행당공 윤복(尹復:1512~1577)은 아들들을 퇴계에게 보내어 학문을 배우도록 한다. 아들들의 이름은 강중(剛中)과 흠중(欽中). 이들은 퇴계를 뵈옵고 ‘주서(朱書)’의 뜻을 묻는다. 몇 달을 퇴계에게서 배운 이들이 안동으로 돌아가려할 때 퇴계는 시를 지어 그들의 아버지인 행당공에게 보내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문(朱門)의 글과 예법 두 가지 공부 온성인의 근원이 예와서 밝아지네. 알뜰히 남긴 글 극진한 가르침이요. 정미로운 심법은 뭇 영재(英才) 길렀네. 하염없이 나는 늙어 머리만 희였으니 그대가 거둔 공에 비하면 부끄럽기 한이 없네. 다시 여러 아들 보내어 장님에 물어주니 어린 정 저버림을 앓아누워 깨닫노라.”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대한축구협회 이회택 기술위원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대한축구협회 이회택 기술위원장

    ‘축구, 그분이 오셨다.’ 우선 2006독일월드컵 본선진출 여부가 곧 판가름난다. 네덜란드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도 이달에 열린다.3년전 한반도를 뒤흔든 ‘6월의 함성’이 다시 들려온다. 축구는 가장 스펙터클한 스포츠다. 감동과 환희, 좌절과 한숨…. 남녀노소를 동시에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거대한 응집력은 차라리 신화요, 전설이다. 누가 태극전사의 내달림을 보면서 웃고 울고, 마음 졸이지 않을 수 있으랴. ●축구인생 50년 ‘그라운드 풍운아’ 추억의 방송멘트가 있다.“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메르데카배 축구대회가 열리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입니다.” 1970년대초였다. 농촌의 여름밤,TV는 물론 라디오조차 귀했기에 저녁밥 일찍 먹고 서둘러 라디오가 있는 이웃집으로 속속 모인다. 이어 중계방송이 시작되고 아나운서의 “슛, 아깝습니다. 슈∼웃, 골인!”하는 목소리에 탄식과 환호가 교차한다. 상상속에서 슛동작을 흉내내는 모습은 저마다의 흥분이요, 잊지 못할 추억거리였다. 맞다. 그때의 우상이었다. 아시아의 표범, 그라운드의 풍운아로 표현된다. 네살 때 아버지가 월북해 ‘고아’나 다름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버려진 깡통과 길가의 돌멩이들을 속절없이 걷어차기 일쑤였다. 파란과 곡절의 축구인생 50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회택(60)씨.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맡아 대표팀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그를 만났다. 키 173㎝, 짧은 머리에 어깨가 딱 벌어져 다부진 체격, 왕년의 스트라이커를 연상하는 데 어렵지 않았다.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 역시 그대로였다. 독일월드컵 본선진출을 장담한 그는 먼저 한국축구에 대해 “월드컵 4강에 오른 팀이다. 다만 월드컵 4강 당시 수비수 3명, 즉 홍명보 최진철 김태영 가운데 한 명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박주영 골결정력·패싱·순발력 3박자 겸비 공격라인에 대해서는 “박지성 차두리는 힘과 스피드가 좋아졌고, 안정환도 부상에서 회복됐다. 최근에는 박주영까지 가세했다. 경쟁이 아주 치열해졌다.”고 분석했다. 특히 박지성의 경우 공수에 걸쳐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패싱기술이 뛰어난 선수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박주영을 가리켜 골 결정력, 패싱력, 순발력 등 3박자를 모두 갖춘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여기에 이천수와 설기현이 들어오면 경쟁은 정말 가열된다고 부연했다. 송종국 선수를 거론하면서 “(송 선수가)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슬럼프에 빠져 있어 정말 아쉽다. 빨리 회복해 이들과 경쟁대열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본프레레 감독의 전술과 리더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히딩크 감독도 처음에는 욕을 먹었다. 결국 월드컵 4강에 올려놨다. 선수들도 죽어라 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선수들은 자만심에 차 있고, 상대국가들은 우리나라를 반드시 꺾으려고 한다. 수비수를 더욱 보강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속에서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승부세계에서는 이기는 방법밖에 없다. 응집력과 투지가 관건이다.” 화제를 돌렸다. 현역시절인 70년대와 지금의 축구를 비교해달라고 했다.“당시에는 태클을 잘 하는 선수, 개인돌파가 좋은 선수 등 개인기술이 특징이었지만 지금은 체력과 체격이 아주 좋아졌다.”면서 “그때만 해도 잔디구장에서 축구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지금은 운동장 사정도 매우 좋아졌다.”고 말했다. 게다가 요즘에는 4-4-2,3-4-3 등 포메이션이 다양하고 국제정보에도 밝지만 그때는 전술과 정보가 보잘 것 없었다고 회고했다. ●67년 중앙정보부서 징발 ‘양지팀’ 창단 #에피소드 1.67년 2월. 이회택은 연세대 입학을 일주일을 앞두고 축구부원들과 동계훈련 중이었다. 검은 지프 한 대가 훈련장에 도착했다. 한 사내가 내리더니 “이회택이 이리 나와.”라고 했다. 사내는 중앙정보부 감찰실의 임경옥씨. 당시 ‘중정’은 누구도 거역 못할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회택이 사내와 함께 도착한 곳은 이문동 중정 본부. 사연은 이러했다. 북한이 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르자 박정희 대통령이 크게 충격받았다. 김형욱 중정부장이 팔을 걷어붙였다. 축구깨나 한다는 사람들을 모두 징발했다. 감독 최정민, 골기퍼 이세연, 이회택 김호 김정남 김삼락 등 이른바 ‘양지팀’이 곧바로 조직됐다. 김 부장은 팀 창단식 때 이들을 불러모아 “모든 것을 지원해 줄 테니 빛을 보도록 만전을 기해달라.”고 훈시했다. 아울러 팀에서 뛰는 동안 군복무를 인정해주고 매달 2만원씩(쌀 한 가마니 4000원) 월급을 약속받았다. 잔디구장과 기숙사도 제공됐다. 갑작스러운 호강이 오히려 술과 도박을 가깝게 했다. 전적도 보잘것없었다.68년 5월 바그다드에서 열린 세계군인선수권대회에서 3전3패의 수모를 당했다. 이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전까지만 해도 축구가 인생의 전부였으나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 양지팀 시절은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회고했다. ●메르데카배 내기건 교민 비기기 작전 주문 #에피소드 2.68년 여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메르데카배 축구대회에 참가했다. 양지멤버가 주축인 대표팀은 패전을 거듭해 5,6위전으로 밀려났다. 상대는 인도. 당시만 해도 교포들이 거의 없어 외교관 부인들이 김치를 들고 와 응원할 정도였다. 그런데 말레이시아 교포라는 사람이 찾아와 고참선배를 만나고 갔다. 잠시 후 고참선배는 이회택 등 공격수들만 불러 비기는 작전을 주문했다. 교포가 비기는 쪽으로 상당액의 돈을 걸었으며 그럴 경우 배당액의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이회택은 말이 되느냐며 출전했다. 하지만 경기내내 그 말이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영문을 모르는 수비수들은 몸을 날리며 열심히 뛰었다. 그날따라 이세연 골기퍼는 인도선수들의 슛을 잘도 막아냈다. 경기 종료 직전. 이회택은 상대의 공을 뺏어 김기복 선수한테 슬쩍 패스를 했더니 그냥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결과는 1대0으로 이겼다. 이씨는 국민가수 조용필씨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72년 어느날 저녁. 서울 퇴계로의 라이온스 나이트클럽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조용필(보컬그룹 25시 멤버)과 처음 만났다. 이씨는 밴드를 무척 좋아했다. 이후 이씨는 조용필의 매니저 역할까지 했다. 잘 아는 킹레코드사의 박성배 사장에게 레코드 취입까지 부탁했다.‘돌아와요 부산항에’‘너무 짧아요’ 등을 이때 취입했다. 또 방송국 PD 등에게 연락해 조용필의 노래를 자주 내보내 줄 것을 부탁했다.‘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뒤에는 바로 이씨가 있었다. 이와 관련, 이씨는 “2년여전 조용필씨의 부인 장례식 때 만난 이후로 서로 바빠서 잘 안 만나게 된다.”면서 “언젠가 골프 라운드도 한번 했다.”고 말했다. 이씨의 골프실력은 이븐파를 기록할 정도. ●한때 국민가수 조용필 매니저 역할도 축구인 이회택. 비록 키는 작았지만 빠른 몸놀림과 날카로운 슈팅과 드리블, 그리고 대담성을 가진 천부적인 골잡이였다. 김포가 고향인 그는 어릴 적 돼지 오줌보와 깡통 등으로 축구놀이를 즐겼다. 초등학생때는 동네 형의 손을 잡고 조기축구회에 나가기도 했다. 중3 때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끼리 축구부를 조직, 대회에 출전했다. 고등학교 진학은 축구부가 있는 한양공고에 먼저 원서를 냈다. 퇴짜맞았다. 빠르지만 기술이 없다는 이유에서. 마음을 돌려 얼른 영등포공고에 진학했다. 고교 2년 때였다.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전국고교 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첫시합은 부산상고였고 두번째는 광주상고. 연거푸 2골씩 넣어 이겼다. 축구신동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어 동북고로 스카우트됐다.65년 청소년대표에 이어 이듬해 국가대표에 뽑혔다.75년까지 10년 동안 한국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다. 이후 86년 프로리그의 포항 아톰스의 감독을 맡아 두 차례 우승을 이끌었다.90년 대표팀 감독으로 이탈리아월드컵 본선에 참가해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74년 결혼한 그는 결혼한 딸(사위는 농구선수)이 얼마전 손자를 낳아 할아버지가 됐다. 아들은 한양대 1학년에 다니다 해군복무 중이다. 부인은 현재 방이동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에 살던 부친은 2년전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 1946년 경기 김포 출생 ▲ 65년 서울 동북고 졸업 ▲ 65년 청소년 국가대표팀 선수 ▲ 66∼76년 국가대표팀 선수 ▲ 69년 한양대 졸업 ▲ 83∼85년 한양대 감독 ▲ 86∼92년 포항제철 감독 ▲ 90년 이탈리아월드컵 대표팀 감독 ▲ 93∼2003년 대한축협회 이사 ▲ 2003년 전남드래곤즈 상임고문 ▲ 2004년∼현재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기술위원장
  • 儒林(361)-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1)-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이처럼 퇴계는 주자를 ‘자신의 어두움’을 깨트리는 ‘밝은 해’로 비유하였을 뿐 아니라 주자의 진리는 삼라만상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백세의 스승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태도는 또 다른 애제자 이덕홍(李德弘)이 찾아와 물었던 질문에 대답한 퇴계의 내용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덕홍이 퇴계에게 ‘재질이 노둔하고 뒤처지므로 과연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근심하며 묻자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준다. “공자의 문하에서 도를 전한 사람은 바로 재질이 우둔하다고 알려져 있던 증자였다. 그러니 어찌 노둔하다고 걱정을 하겠느냐. 다만 노둔한데도 독실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근심일 따름이니라.” 그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이덕홍에게 전해준다.‘완락재에서 우연히 쓰다(齋中偶書)’라는 제목의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네 편으로 나누어 풀 매는데/한 편은 느릿느릿, 손 빠른 세 편이/모두 그를 꾸짖네. 빠른 사람이 뿌리 남겨/번거롭게 다시 뽑으니, 느린 자만 못하겠네, 처음부터/모조리 뽑아 버린 것만.(四兵耘草一兵遲 捷手三兵共伊 捷者留根煩再拔 不知遲者盡初時)” 자신의 노둔함을 근심하는 제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준 퇴계의 이 절구는 유명한 주자의 일화를 인용한 것이었다. ‘주자의 말씀을 분류함(朱子語類)’이라는 언행록에는 주자가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명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주자는 병산(屛山) 서당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여러 문인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랐는데, 풀이 무성한 것을 보고 여러 편으로 나누어 풀을 매게 하였다. 한편은 뿌리까지 찾아 뽑아버렸는데 그리 많이 김을 매지 못하고, 나머지가 김 맨 곳은 일제히 끝이 났다. 주자는 김을 다 매지 못한 사람을 보고 여러 학생들에게 물었다.‘여러분들은 여럿이서 김 맨 것을 봤는데 어느 쪽이 빠른가.’ 그러자 여러 학생들이 ‘여러 패가 모두 빠른데 유독 이 한 사람만이 느립니다.’하고 손가락질하며 말하였다. 그러자 주자는 대답하였다.‘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이 사람만이 빠르다.’ 그래서 여러 패가 김 맨 것을 자세히 보았더니 풀이 모두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다시 불러와 새로 김을 매도록 하였다. 이에 주자는 다시 말하였다.‘저 패는 비록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보면 뿌리까지 찾아 없애도록 하였다. 따라서 비록 한때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오히려 한번으로 공부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빠른 패의 몇몇은 또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 하니, 다만 처음에 빨리 하려고 하다가 실로 소홀히 하여 이렇게 힘을 낭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보는 것이 곧 학자가 책을 읽는 방법인 것이다.’” 속도가 빠르기보다 다소 늦더라도 뿌리까지 뽑아내는 철저한 공부를 강조한 주자의 가르침은 그대로 퇴계의 평생 학습법이 되었다.
  • 儒林(36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자 정유일(鄭惟一)은 스승의 학문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한결같이 정·주(程·朱)를 표본으로 삼았다. 경·의(敬·義)를 함께 가지고 지·행(知·行)이 아울러 나아가 표리가 일치하고 본말이 겸비하여 큰 근원을 밝게 보고, 큰 근본을 굳게 세웠으니 만일 그 조예(造詣)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에서 선생님 하나뿐일 것이다.” 이처럼 정·주를 학문의 표준으로 삼았던 퇴계의 태도는 또 다른 제자 김부륜(金富倫)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선생은 ‘학자가 도로 들어가는 문을 알고자 하거든 반드시 주자대전 가운데서 찾으면 학문의 힘쓸 곳을 얻기가 쉬울 것이다.’하셨다.” 이처럼 퇴계는 주자를 학문의 문으로 보고 있었으며, 주자를 자신의 학곡(學鵠)으로 섬기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만년에 도산서당에서 지은 잡영(雜詠) 속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일찍이 공자의 제자 자공이 스승을 ‘감히 엿볼 수 없는 문장(文墻)’으로 표현하였듯이 퇴계도 주자를 ‘감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담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정자인 오건이 떠나려하여 지어 주다(吳子强正宇將行贈別)’라는 시에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운곡의 주자가 남긴 글/백 세대의 스승이라 하늘에 닿고 땅에 서리어/털같이 가는 실에서 들어 있네 그대에 감격스럽네. 나귀에 책상자 실어 와/바로잡아 달라고 함이 나 부끄럽네. 높은 담장/늙어서 엿볼 수 없었음이(雲谷遺書百世師 際天蟠地入毫絲 感君驢來相訂 愧我宮墻老未窺).” 이 시는 오건이 나귀에 책상자를 싣고 와 잘못된 학문을 바로 잡아달라고 간청하자 비록 내가 늙어 궁궐의 담장 안을 엿볼 수는 없지만 일찍이 맹자가 ‘성인은 백세의 스승이다.(聖人百世之師也)’라고 말하였듯 하늘과 땅, 심지어 터럭같이 가는 실에도 숨어 있는 주자의 진리를 추천할 뿐이라는 퇴계의 마음을 나타내 보인 시인 것이다. 주자를 향한 퇴계의 존경심은 스스로 편찬한 ‘도산잡영(陶山雜詠)’이란 만년의 시집 속에 몇 수 더 남아 전하고 있다. 퇴계는 애제자 김성일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있음이다. “운곡의 주자의 글은/모든 성인의 마음 전하여 읽어 보니 해와 같아/어두운 그늘 깨뜨리네. 평생에 나부산에/올라 바라보지도 않고 몇 차례나 어두운 길로 뛰어들어/잘못 찾아 헤매었던가(雲谷書專千聖心 讀來如日破昏陰 平生不上羅浮望 幾向冥塗枉索尋).” 이 시는 주자께서 운곡에 서당을 짓고 살면서 천고의 모든 성인들의 마음을 다 온전히 전하였다. 읽어 보니 마치 밝은 해와 같아 여태까지 몰랐던 어두운 의혹을 다 알게 하셨으니, 명나라의 진헌장(陳獻章:학문을 하는 것은 오직 마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명대 심학의 거두)은 나부산(羅浮山)에 올라 힘써 게으르지 말기를 경계하였지만 나는 한번도 그곳에 올라가 보지도 않고 어두운 길로 잘못 뛰어들어 길을 잃고 헤매었음을 스스로 한탄하는 내용인 것이다.
  • 儒林(35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16살 때 지은 퇴계의 오도송이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를 모방하고 있을 정도로 퇴계는 주자를 자신의 사표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퇴계의 태도는 언행록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을 대충 헤아려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학문에 힘쓴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밝은 스승과 벗을 얻지 못하여 의혹된 것을 질문하여 풀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리에 있어서 진전을 본 것이 없고, 또 학문이 성취되기도 전에 문득 벼슬길에 오르게 되어 또 학문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읽고 조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문장’이 길고 그윽한 것이야 어찌 감히 엿볼 수가 있겠느냐.” 퇴계가 말하였던 문장(門墻)이란 ‘대문과 울타리’를 말하는 것으로 일찍이 논어에 나오는 자공의 말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공을 빗대어 스승 공자보다 더 낫다고 빈정거리자 자공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승의 위대함을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문과 울타리는 겨우 어깨에 미치는 정도라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가 있지만 부자(夫子:공자)의 문장은 높이가 두어 길이라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그 안의 모든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퇴계는 스승의 위대함을 칭송한 자공의 말을 인용하여 주자의 ‘길고 그윽한 경지’를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이 ‘주자전서’를 자신의 교본(敎本)으로 삼았다. 일찍이 한여름에 ‘주자전서’를 구해 읽다가 누가 더위로 몸을 상할까 걱정하면 ‘이 글을 읽으면 가슴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라고 대답하였던 것은 이미 상기한 내용이고, 언행록에 보면 퇴계가 이 주자전서를 얼마나 정독하였는가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을 정도이다. “선생의 집에 ‘주자전서’수사본(手寫本: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책)이 한 질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것으로 글자의 획이 거의 희미하여졌으니 선생이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주자전서’를 인출(印出)한 것이 많았는데, 선생은 새 책을 얻을 때는 반드시 교정하면서 다시 한 번 읽음으로 장(章)마다 환하고 구(句)마다 익숙해져 그것을 몸과 마음에 수용(受用)함이 마치 직접 손으로 잡고 발로 디디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하고 침묵하며, 동(動)하고 정(靜)하며,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며, 나아가 벼슬하며(進), 들어와 집에 있고(退) 하는데 있어 ‘주자전서’의 글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쩌다 남이 질문하는 일이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이 책에 의거해서 대답하여 사정(事情)과 도리(道理)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실제로 알고 실제로 믿어 정신이 융합(融合)된 소치로써, 한갓 책에만 의지하고 귀와 입으로만 따르는 자의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수사본으로 베껴서 책을 만들만큼 금과옥조로 삼았던 ‘주자대전’. 너무나 정독해서 글자의 획이 희미할 정도로 닳아졌던 ‘주자대전’. 이러한 스승에 대해서 제자 우성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대게 주자로써 근본을 삼았으니 공리(攻利)에도 그 뜻을 빼앗기지 않으셨고, 이단에도 현혹되지 않으셨다. 널리 알면서도 잡되지 않았고, 간략히 잡아도 고루하지 않았다. 학문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성현을 근본으로 하면서 자신이 얻은 바의 진실을 참고하였다.…”
  • 儒林(35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소크라테스의 후계자인 플라톤은 인식(理性)의 발생을 다음과 같이 힐난한 적이 있었다. “주체(사람)가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 있다면 인식은 생겨날 수가 없다. 절대 무지라는 조건에서는 인지(認知)의 문제는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주체가 어떤 대상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경우에도 인식의 문제는 대두되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인식을 진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핵심철학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에서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지와 유지의 두 가지 대립을 걸쳐, 인식을 선천적 지식의 기억으로 여기는 회고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맹자가 공자에 있어서 서양철학의 플라톤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맹자는 플라톤과는 달리 ‘스스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무지함이 아니라 지식추구의 출발점, 즉 인식의 출발점으로 봄으로써 공자의 유가사상에 인식, 즉 이성의 숨결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자연은 의지의 충동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항상 이성의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맹자는 이성을 ‘나에게 있는 것(在我者)’과 ‘외부에 있는 것(在外者)’으로 구분하였다. 공자는 비교적 초기에 인식, 즉 이성을 발견했던 사상가였으나 근대적 의미의 의식론 체계를 수립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교육자로서 공자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학습의 경험을 총동원하여 인식론의 문제를 제시해 놓고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에 대해 맹자는 유가사상 속에 이성과 문제를 불어넣었던 아성(亞聖)이었다. 아성. 이는 유교에서 ‘공자에 버금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오직 맹자에게만 사용되는 위대한 칭호이다. 이러한 맹자의 ‘이’사상은 후대의 유가들에 의해 보다 확대되고 보다 심화되었다. 맹자에 의해서 발전된 유가사상은 천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때로는 역사적으로 공격목표가 되어 비난을 받고 수면으로 가라앉기도 하고, 때로는 칭송을 받는 등 부침을 거듭해 오다가 마침내 주자(朱子)를 비롯한 이정(二程:정호와 정이 형제)에 의해서 맹자의 사후 1300년 후인 송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양사상의 원류가 되는 것이다. 특히 주자는 사상과 이론의 양면에서 맹자의 사상을 해설하고 숭상하였으며, 맹자사상의 지위를 높이는 데 힘써 ‘맹자’를 ‘논어’‘중용’‘대학’과 나란히 사서(四書)로 규정하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였다. 또한 ‘논맹정의(論孟精義)’‘사서혹문(四書或問)’을 펴내 맹자사상을 세계적으로 확대시켰는데, 퇴계는 바로 주자로부터 12살 때 이의 화두를 얻음으로써 평생 동안 주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찍이 퇴계는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뜻을 깨우쳐 줄 스승과 벗이 없어 헤매기를 수십년에 어디서부터 착수할지를 몰라 헛되게 마음만 허비하였다.’고 탄식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퇴계는 공자에서 맹자로 다시 주자로 내려오는 유가사상의 법통을 이어받았던 유일한 적자였다. 주자. 그는 퇴계에 있어서 단 하나의 스승이자 오직 한 사람의 벗, 즉 도반(道伴)이었다.
  • 儒林(35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거경궁리. 이처럼 퇴계는 12살 때부터 학문에 뜻을 세웠으며, 그 뜻을 거경하여 마음을 바로 지키면서 자신이 제자들에게 설법하였던 대로 말할 때도, 움직일 때도, 앉아 있을 때도 항상 지극한 마음과 정선된 마음으로 지경(持敬)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이다. 거경이 퇴계의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이었다면 궁리(窮理)는 퇴계 학문의 한결 같은 화두였다. 궁리는 문장 그대로 ‘이(理)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인데, 일찍이 12살 때 논어를 읽다가 주자의 집주를 통해 ‘이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마침내 송재공에게 ‘이란 모든 사물이 마땅히 그래야할 시(是)를 이라고 하는 것입니까’하고 질문함으로써 ‘너의 학문은 이로서 문리를 얻은 것’이라는 극찬을 받은 이래 퇴계의 평생화두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퇴계는 제자들에게 ‘공부를 잘 하고 못함은 이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거나 잘하지 못함에 달려 있다.’라는 결론을 내릴 만큼 이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것도 결국 ‘이’의 핵심을 꿰뚫어 본 퇴계 사상의 골수인 것이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인, 의, 예, 지와 같은 도덕률, 즉 ‘인간의 조건’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성(理性)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공자보다 1세기 후에 태어난 공자의 후계자인 맹자(孟子)였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켜 끌어 올린 중시조로 유교가 ‘공맹사상’으로까지 불리는 것은 맹자로 인해 비로소 공자의 유가사상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자는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사상이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면서 일종의 이성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기독교나 불교 같은 세계적종교가 신에게 의지하고 인간의 이성을 신적인 전지능력에 의지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공자의 유가는 오직 인간이 가진 이성을 지식의 근원으로 보고 있음을 맹자는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공자는 지식의 근원이 이성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공자는 다만 인간의 지식은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것(生而知之), 즉 천부적으로 형성된 지식과 다른 하나는 배워서 알게 되는 것(學而知之), 곧 후천적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부터 천부적인 지식(理性)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을 더 중요시하고 있었다. 공자가 남긴 중요한 어록 중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란 말은 그러한 공자의 인식론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음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不知)’을 ‘지식이 없는 것(無知)’으로 동일시한다. 그러나 ‘부지(不知)’와 ‘무지(無知)’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공자가 말하였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유지(有知)이지 무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는 바로 그것이 실제로는 ‘아는 것을 추구해 가는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공자는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 儒林(356)-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6)-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특히 퇴계는 ‘거경궁리’를 주창한 정이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심법의 근원으로 삼고 있었다. “흩어진 마음(心)이 거두는 마음을 찾는 까닭이 흩어진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所以求 放心之心是乃 放心之法)” 실제로 퇴계는 오로지 한마음으로 정신 통일하는 심법에 홀로 매달린다. 심지어 퇴계는 한발짝 걸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한걸음에 집중되는지 아닌지 혼자서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핏 보면 이 발걸음 하나도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퇴계는 깨닫는다. 발걸음 하나가 습관적이거나 일상적이 되지 아니하고 마치 천지가 움직이는 것 같은 무게를 지니기 위해서는 한걸음 동안에 온 마음이 그곳에 실려 있어야 하는데, 한걸음 동안에 이미 만감이 교차하고, 나중에는 걷는다는 자의식이 생겨나 마음이 산란해지고 분열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선불교에서 우리가 무심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하나하나 끊어서 숨을 들이쉴 때는 오직 들이쉬는 것만 생각하고 내쉴 때는 오직 내쉬는 것만 생각하여서 나와 외계가 혼연일치되는 무심에 들어가는 것을 정진하듯 퇴계는 심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이 독특한 걸음공부를 혼자서 연구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마음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젊었을 때 나는 걸음을 걸으면서 마음을 실험해 보았는데 한걸음 동안에 마음이 오직 한걸음에 머물러 있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먼 훗날 도산서당에서 제자 김성일이 퇴계에게 마음이 어지러운 까닭을 묻자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 주었다. “대개 사람은 이(理)와 기(氣)가 합해서 마음(心)이 되는 것이니, 이가 주인이 되어 기를 거느리면 마음이 고요하고 생각이 한결같아서 스스로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지지마는 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기가 이기게 되면 마음은 어지럽기 그지없어서 사특하고 망령된 생각이 뒤섞여 일어나 마치 물방울바퀴가 둘러 도는 것 같아 잠깐 동안의 고요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은 생각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실없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경(居敬)만한 것이 없으니, 경하면 마음이 한결같고, 마음이 한결같으면 생각은 스스로 고요해지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 이덕홍이 ‘거경(居敬)’이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퇴계는 주자의 가르침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이 일을 하려면 반드시 뜻을 세움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뜻을 삼지 않으면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며, 또 비록 뜻을 세웠다고 해도 진실로 거경하여 이 마음을 바로 지키지 않으면 또한 범연(泛然)히 주장이 없어져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나날을 보낼 것이니, 다만 실속 없는 말에 그치게 될 것이다. 뜻을 세우려면 모름지기 사물 밖으로 높이 뛰어 넘어서야 하고 거경하려면 항상 사물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과 사물로 하여금 어긋나지 않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말할 때도 모름지기 경해야 할 것이고, 움직일 때도 모름지기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도 모름지기 경해야 할 것이니, 잠깐이라도 이 경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이 말은 학자의 생활에 가장 절실한 것이니 반드시 깊이 체험하여 실행해야 할 것이다.”
  • 儒林(355)-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5)-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일찍이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어 노래하는 기생이 눈앞에 가득하였을 때 문득 한 가닥 환희심이 일어나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기미(機微)는 살고 죽는 갈림길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이 말은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의미심장하다. 퇴계는 ‘화려하고 시끄럽게 쾌락에 빠지는 것’과 ‘그것에 초연할 수 있는 평상심’을 ‘살고 죽는 생사의 갈림길(機則生死路頭也)’로 보고 있음인 것이다. 특히 퇴계는 술을 경계하고 있었다. 일찍이 15살 되던 해 송재공을 따라 안동에 갔을 때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진 실수를 한 이래로 술에 대해 평생 근신하였다. 퇴계는 병약했으나 술은 즐기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는 퇴계가 만년에 도산서당에서 지은 시 중에 술에 관한 시가 서너 수 나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퇴계는 직접 집 뒤의 산속에 술 빚는 창고를 두어 서당에 손님이 찾아오면 산봉우리로 불러 술을 마셨다고 한다.‘달밤에 이 문량이 도산으로 찾아오다(月夜大成來訪陶山)’란 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좋은 밤 함께 즐겁네/좋은 손님들 찾아오니, 산봉우리 넘어 불러/탁주잔 기울여 마시네. 관란헌에 셋이서 솥발처럼 앉아/그윽한 마음 열고, 다시 난초 배에 올라/달 놀이 하다 돌아왔네(良夜同欣好客來 隔岑呼取濁 盃 臨軒鼎坐開幽款 更上蘭舟弄月回).” 이밖에도 절우사(節友社) 화단의 매화가 늦봄에 피어나자 읊은 퇴계의 시는 아취(雅趣)를 느끼게 한다. 그 시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지금 어찌 필요하리오/난초향기 같은 말. 하늘가에 옛 친구들/볼 수가 없어, 그대 더불어 날로 아무 일 없이/술잔 기울여 마시네(今者何須蘭臭言 天涯故人不可見 與爾日飮無何尊).” 이처럼 술을 좋아하던 퇴계였으나 평생 술을 절제하여 취하지는 않았다. 술에 대한 경각심을 퇴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벼슬에 올라 서울에 있을 때에 늘 사람에 이끌려 날마다 술을 마시고 놀았다. 그러나 얼마 뒤 한가한 날에는 문득 심심한 마음이 들어서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랐다.” “또 내가 일찍이 금문원(琴聞遠:제자))의 집에 놀러간 일이 있었는데, 산길이 몹시 험하였다. 갈 때는 말고삐를 잔뜩 잡고 조심스러워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길 험한 것을 아주 잊어버리고 마치 탄탄한 큰 길을 걷듯 하였으니, 마음을 잡고 놓음이 이처럼 심히 두려운 것이다.” 퇴계의 두 번째 고백 역시 학문의 길은 몹시 험한 산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항상 말고삐를 잡고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하며, 마치 탄탄한 큰길처럼 함부로 가면 낭패를 본다는 내용으로 제자들에게 내리는 경책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젊은 날의 퇴계는 마음을 다잡고 거경(居敬)의 마음으로 한결같이 학문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 儒林(35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4)-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결론부터 말하면 퇴계가 종명하던 날 아침, 제자들이 스승의 운명을 점쳐보았을 때 나온 ‘군자유종’이란 점괘는 신통하게 들어맞는다. 바로 그날 밤 퇴계는 수를 다해 죽었지만 주자와 정이천의 풀이처럼 그 후광은 세월이 갈수록 찬연하게 빛나는 것이다. 우선 선조가 부음을 듣고 곧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이라 작호를 내렸으며, 우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였다.5년 후에는 도산서원을 세워 사액까지 하고, 시호를 문순(文純)이라 내렸으니, 이것만으로도 유종의 후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의 제자와 문인들이 그 뒤 제제다사(濟濟多士)로 이어 나와 그의 학통을 계승한 것과, 퇴계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저서들이 학술사상사에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그 빛이 현해탄을 넘어 일본에까지 뻗쳐 퇴계학파의 결실을 맺은 것! 그리고 사후 500년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퇴계의 사상이 바로 군자 퇴계가 남긴 진정한 광배(光背)인 것이다. 이처럼 주역에 몰두한 퇴계는 21세 때 용수사에서 내려와 허씨 부인과 결혼하였으며,24세 때 첫아들 준을 낳는다. 잠시 서울에 올라와 태학에 유학하였으나 도학을 기피하는 성균관의 경박한 풍조에 크게 실망한 후 두 달 만에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때 퇴계는 자신의 생활을 산거(山居)라는 제목으로 짧게 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莫道山居無一事) 내 평생 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平生志願更難量)” 26살 때 지은 이 짧은 시는 퇴계의 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때까지 퇴계는 벼슬에 관심 없이 오직 ‘헤아리기 어려운 평생 하고픈 일’, 즉 이학(理學)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퇴계가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지방에서 실시하는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 그 다음해인 27세 때 일이었으니, 이 시를 지을 무렵에는 그야말로 초야에 묻혀 사는 산중거사(山中居士)였던 것이다. 12살 때 논어에 나오는 이(理) 자의 화두를 얻음으로써 문리(文理)를 터득한 퇴계는 오직 14년 동안 스승이나 벗도 없이 혼자서 거경궁리하였던 것이다. 거경(居敬)이란 말은 일찍이 송대의 대유였던 정이천과 주자가 주장하였던 ‘마음의 긴장상태를 정신통일의 경지로까지 유지’하는 일종의 심법(心法)이었다. 퇴계는 이를 지경(持敬)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같은 것이었다. 즉, 몸과 마음을 일심으로 몰두하여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을 뿐이며, 잠을 잘 때는 오직 잠을 자는 일에만 열중하는 참선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분산시키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화려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쉽게 빠져들게 한다. 나는 일찍부터 여기에 힘을 써서 이러한 일에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 儒林(35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자들이 스승의 운명을 점쳐 보았을 때 나온 겸괘는 ‘간하곤상(艮下坤上)’. 땅(坤)밑에 산(艮)이 있는 괘상이었다. 땅위에 산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땅밑에 산이 있다니 도대체 무슨 뜻일 것인가. 이 괘상에 대해 주역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겸(謙)은 형(亨)이니 군자유종(君子有終)이다.” 이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겸이란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진 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에 그치고 밖으로 순한 것이 겸의 뜻이다. 산은 지극히 높고 땅은 지극히 낮은 것인데, 이에 높은 것이 굴하여 낮은 아래에 그쳤으니 이는 겸의 상(象)이다. 점치는 자가 이러하면 형통하여 끝이 있으리라. 끝이 있다는 말은 굴하다 뒤에 펴진다는 뜻이다.” ‘군자유종’ 퇴계가 종영하던 날 아침, 제자들이 주역을 통해 스승의 운명을 점쳐 보았을 때 나온 점괘. 문자 그대로 ‘군자에게 끝이 있다.’라는 뜻은 퇴계가 수를 다해 죽는다는 점괘이지만 그 뜻을 풀이해 보면 주자의 말처럼 지극히 높은 산이 지극히 낮은 땅 밑에 있으니 이는 ‘겸의 상’인 것이다. 그 괘상을 풀이하자면 이 점괘는 오히려 유종(有終)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뜻인 것이다. 덕이 있으면서도 있는 체 아니하고 항상 겸손하고 퇴양(退讓)하니 그럴수록 사람들은 도리어 더 존경하고 덕은 더욱 빛나서 크게 형통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이 점괘의 괘상인 것이다. 이 점괘를 정이천(程伊川:1033∼1107)은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정이천은 북송 중기의 유학자로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이다. 그는 훗날 퇴계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정이천은 주역에 관한 연구가 깊었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긴 거인이었다. 훗날 그의 철학은 주자에게 계승되어 집대성되었는데, 그는 사람은 이(理) 그 자체이고, 본래 선하지만 기질(氣質)의 성(性)은 실체를 구성하는 청탁에 의해서 선하고 악하게 나뉜다고 하였다. 그래서 학문과 수양이 필요하며 그 방법은 마음의 긴장상태를 정신통일의 경지로까지 유지하는 ‘거경(居敬)’과 사물의 이(理)를 밝히는 ‘궁리(窮理)’라고 하였다.‘거경궁리’를 통하여 이른바 도학자적인 몸가짐과 학문태도를 확립한 정이천의 학설은 남송의 주희에게 계승되어 주자학으로 발전되었는데, 주희가 수용한 것이 대부분 정이천의 학설이므로 주자학을 ‘정주학’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정이천은 ‘군자유종’의 점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겸은 형이 있는 도(道)이다. 덕이 있으면서도 있는 체 아니하니 겸이라 이르는 것이다. 사람이 겸손으로 자처(自處)하면 어디를 간 듯 형통하지 않겠는가.‘군자는 유종하리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즉 군자는 겸손에 뜻을 두고 이치에 통달하므로 천(天)을 즐기어 경쟁하지 아니하고 안으로 충실하므로 퇴양하여 자랑을 아니하여 겸손함을 편하게 지키어 종신토록 변치 않는다. 그리하여 스스로 낮추면 남이 더 존경하고 스스로 감추면 덕은 더욱 빛나게 드러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가 끝(終)을 가진다는 뜻인 것이다.”
  • 儒林(352)-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2)-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역경의 원작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팔괘는 옛날에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고 전해오며, 이를 64괘로 중괘한 사람은 주나라의 문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64괘의 각 효(爻), 즉 384효에 이르는 효사(爻辭)는 주공(周公)이 지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어쨌든 역경은 점책으로 주나라 초기에 완성되었으므로 흔히 ‘주역(周易)’이라고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인 공자가 한갓 점술책인 주역에 그토록 심취하여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정독하였을까. 그것은 주역이 한갓 점책이긴 해도 공자가 이상적인 인물로 사숙하고 있었던 주공이 효사를 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논어에는 공자가 만년에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히도 내가 노쇠하였구나. 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 주공은 주나라 건국의 공신이며, 문물제도의 창제자였다. 공자는 언제나 이 주공을 꿈꾸며 주공이 제정한 문물제도를 자신의 시대에 새로이 살려내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주공에게 걸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역은 점책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원리를 논하자면 자연히 우주론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섭리, 만물의 기원, 인생론, 음양론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송대에 이르러 만물의 근원이나 자연의 원리로 공자의 학문을 연구하는 성리학이 발전하고부터는 역경은 자연 유가의 철학을 논하는 중요한 경전으로 크게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퇴계는 그야말로 침식을 잊고 고찰에 틀어박혀 주역을 읽고 또 읽었다. 퇴계 역시 점을 치는 복신이나 미신에 관심이 있어 주역을 공부했던 것이 아니었다. 퇴계는 평소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미신행위에 대해서 단호할 정도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언행록 가훈(家訓)편에는 퇴계가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그 편지 중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또 들으니 무당들이 자주 집을 드나든다는데 이것은 우리 집의 가법을 매우 해치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대부터 전혀 미신을 숭상하지 않았고, 또 나도 늘 그것을 금하여 그들이 드나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이것은 다만 어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것뿐이 아니라 감히 가법에 어긋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 그 뜻을 모르고 가벼이 고쳐서야 될 일이겠느냐.” 이처럼 미신을 혐오하였던 퇴계가 20살의 젊은 나이 때 산사에 들어가 지병을 얻을 정도로 주역에 몰두하였던 것은 이미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음과 양의 태극으로 보는 소강절의 태극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자연적으로 우주론에서 시작하여 모든 자연의 섭리를 다루고 있는 주역에 깊은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퇴계는 제자들과 더불어 이따금 주역을 통해 점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퇴계가 종명하던 날 선조 3년(1570년) 12월8일 아침. 퇴계의 제자들은 모여서 주역을 통해 스승의 운명을 점쳐 보았다고 한다. 이때 나온 점사는 군자유종(君子有終), 이 점사야말로 퇴계의 인생행로와 그 후광을 잘 알아맞힌 기막힌 점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儒林(351)-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1)-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그러나 퇴계에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을 깨우쳐줄 스승도 벗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뜻을 깨우쳐줄 스승과 벗이 없어 헤매기를 수십 년이나 하였다. 어디서부터 착수할 줄을 몰라 헛되이 마음만 허비하여 사색하기를 마지않아 때로는 눕지도 않고 고요히 앉아서 밤을 새우기도 하여 이 때문에 심병을 크게 얻게 되어 여러 해 동안 학문을 중지하였다. 만약 스승과 벗을 일찍 만나 이러한 길을 지시해 주었더라면 어찌 심력(心力)을 헛되어 써서 늙도록 얻은 바가 없기에 이르렀겠는가.” 스승의 이러한 말에 제자 김성일은 ‘이것은 겸손한 말이지만 스승의 학문은 스승과 벗의 힘을 입지 않고, 초연히 독학으로 얻은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라고 촌평을 내리고 있다. 특히 퇴계가 항상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평생의 지병을 얻은 것은 20세 때 이르러 주역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기에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연보에 의하면 퇴계는 용두산 용주사에서 역학 공부에 몰두하였다고 하는데, 퇴계가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던 것은 마치 공자가 말년에 역(易)을 좋아하여 스스로 역경(易經)을 편찬했던 사실을 연상시킨다. 역에 심취한 공자를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공자는 말년에 역을 좋아하여 역을 읽는 사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게 몇 년의 여유만 더 주어져 이렇게 공부를 해나가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옛날 중국에서는 종이가 나오기 전에는 주로 대나무에 글을 써서 그것을 끈으로 묶어 책을 만들었다. 이것을 죽간(竹簡)이라 하는데, 공자는 그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진다.’라는 말은 사기의 공자세가에 나오는 고사를 성어로 만든 용어. 이는 곧 책이 닳도록 정독하였음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공자가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에 열중하였다면 퇴계도 평생의 지병을 얻을 정도로 주역을 탐독하였던 것이다. 원래 역경은 팔괘(八卦)가 변화하여 이뤄지는 64괘의 변화를 따라 길흉을 점치는 점술책이었다. 역점은 본시 시초(蓍草)라 불리는 풀줄기로 만든 99개의 점가치인 서(筮)로 그때그때 괘를 이루어 역경에 있는 그 괘의 성격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책이었다. 이것과 함께 말린 거북 껍질을 불로 지지어 생기는 균열의 모습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것을 복(卜)이라 하였는데, 이 거북점은 복서(卜筮)라고 불린다. 나라의 중요한 일은 물론 개인에 관한 중요한 일까지도 모두 이 복서를 통하여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옛 중국 사람들의 관습이었던 것이다. 말년에 공자는 역경에 심취하였다. 논어의 술이(述而) 편에도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나에게 몇 년을 보태 주어 50세에 이를 때까지 역을 공부할 수 있으면 큰 과오가 없게 될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 儒林(35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0)-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의 이 시는 일종의 선시(禪詩)이다. 퇴계가 노래한 대로 ‘다름없는 한 생각’이란 12살 때 발견한 ‘이’의 화두임을 알 수 있으며,‘이를 깨달아야만 마침내 성리학의 공부를 이룰 수 있다.’는 퇴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10년 동안 퇴계는 한결같이 ‘이’의 한 생각에 전념하며 비로소 근원과 마주쳤음을 노래하였는데, 노래 중에 나오는 태허(太虛)란 용어는 북송의 학자였던 장횡거(張橫渠·1020~1077)가 주장하였던 ‘기일원(氣一元)’사상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상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하였으며, 우주의 만유(萬有)는 기(氣)의 집산에 따라 생멸, 변화하는 것이며, 기의 본체는 태허로서 태허가 곧 ‘기’라고 설법하였던 송나라 유학의 기초를 세운 사상가였다. 장횡거의 ‘태허는 곧 기’라는 사상은 소강절(邵康節·1011~1077)의 태극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교의 역철학을 발전시켜 역(易)은 음과 양의 이원(二元)으로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음과 양의 태극(太極)으로 주장하였던 수리철학(數理哲學)의 대가였던 것이다. 퇴계가 유교의 도를 깨달아 태허를 알아보았다고 노래한 것은 이미 19살 때 이들의 철학에 깊이 빠져 음과 양, 그리고 강(剛)과 유(柔)의 사원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이에서 파생되는 기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퇴계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을 통해 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때 심경을 퇴계는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19살 때 처음으로 ‘성리대전’의 첫 권과 끝 권 두 권을 얻어 시험 삼아 읽어 보았더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듯하여 숙독(熟讀)하기를 오래하여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비로소 학문의 길을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학문의 길. 퇴계는 비로소 학문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일찍이 공자가 논어에서 ‘아침에 도에 대해서 들어 알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자신이 득도(得道)하였음을 드러낸 말이었다. ‘성리대전’은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의 명을 받아 호광(胡廣) 등 42명의 학자가 편찬한 책으로 송나라와 원나라의 성리학자 120여명의 학설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었다. 퇴계는 장횡거와 소강절과 같은 성리학자들을 바로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은 일종의 성리학 대백과사전이었는데, 퇴계는 이 책을 통해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심안(心眼)’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얼마만큼 공부에 열심이었던가는 이 무렵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이 학문에 뜻을 두고 낮에는 쉬지 않고 밤에는 자지도 않고 공부를 하다가 드디어 고질을 얻어 지금까지 병폐(病廢)한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였다. 학자들은 나를 따라올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의 기력을 헤아려서 잘 때는 자고 일어날 때는 일어나며, 때와 곳을 따라 자기 마음을 살피고 헤아리며, 이 마음으로 하여금 방일(放逸)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나처럼 병이 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 儒林(34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주자의 ‘관서유감’과 퇴계의 ‘야당’시의 차이점은 주자는 연못이 저리도 맑은 것은 그 속 어디엔가 맑은 샘이 있어 계속 흘러나오기 때문이니, 그것은 우리의 마음 어디엔가 이(理)가 있기 때문이라는 성즉리(性卽理)의 사상을 노래한 것이었다. 주자는 책을 연못에 비유하였으며, 책 속에는 인간의 기(氣)와 감정을 초월하는 이의 진리가 숨어 있음을 노래한 것이었다. 두 번째 시도 마찬가지였다. 연못 속에 들어 있는 거대한 전함도 아무리 힘으로 들어올리려 애를 써도 안 되지만 물이 불어나면 터럭처럼 떠올라 강 가운데 저절로 떠다닌다는 표현은 인간만사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리에 의해서만 생성되는 것이며,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이성에 의해서만 가볍게 다뤄질 수 있음을 노래하였던 것이다. 주자는 맑디맑은 못의 깨끗함을 마음 내부 속에 있는 심연속의 이로 보고 있었고, 퇴계는 맑디맑은 못의 깨끗함은 원래 그대로인데, 다만 그림자에 불과한 나는 제비가 물결을 참으로써 파문이 일어나고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라는 마음 바깥의 이로 본 것이었다. 따라서 훗날 퇴계가 이 처녀시를 가소롭다고 평가하였던 것은 주자의 ‘관서유감’이라는 시에서 영향을 받아 모작시를 썼기 때문보다는 사물의 현상을 성(性)바깥에서 찾으려 했던 자신의 미숙함이 유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18세 때 읊은 퇴계의 처녀시는 제자들의 평가대로 주자의 천리시(天理詩)를 방불케 한 것이었다. 퇴계는 송재공이 죽은 후부터 유아독존(唯我獨尊) 시대로 넘어간다. 홀로 공부하고, 홀로 깊은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깨달음보다는 깨달은 후인 보임(保任)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인데, 견성하여 참된 자아(眞我)를 발견한 뒤에는 참된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 나가는 생활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인 것이다. 즉 도를 이뤄 깨달음을 이뤘다 해도 그 것을 지키기는 참으로 어려워서 ‘얻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得易守難).’란 말이 생겨난 것이었다. 선불교의 중시조라 할 수 있는 육조혜능도 깨달음을 얻어 확철 대오하였으나 전국을 15년 동안이나 돌아다니면서 보임 생활을 하였고, 대매(大梅)선사도 깨달음을 얻은 후 40년 동안이나 산속에서 내려오지 않았으며, 위산(僞山)은 산으로 들어가 6년 동안이나 도토리와 밤을 주워 먹으면서 보임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자신의 깨달음을 인정해줄 스승도, 선지식도 없는 퇴계로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보임 생활에 침잠하였을 것인가. 19세 되던 해 퇴계가 읊은 두 번째의 시를 보면 바로 그러한 퇴계의 고통을 엿볼 수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림 속 초당에서 만권서 홀로 즐기며 다름없는 한 생각에 십 년이 넘었도다. 요새 와서야 근원과 마주친 듯 도 틀어 내 마음 휘어잡아 태허를 알아본다(獨愛林廬萬卷書 一般心事十年餘 邇來似興源頭會 道把吾心看太虛).”
  • 儒林(34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8)-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연보에 의하면 퇴계는 12살 때 평생 화두인 ‘이(理)’를 얻음으로써 문리를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사우(師友)는 얻지 못하였으나 대철학자로서의 기틀을 얻은 것이다. 14세가 되자 퇴계는 호학지인(好學之人)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무렵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그의 인격을 흠모하여 도시(陶詩)를 모작하여 지어보기도 하였으며,15세 봄에는 송재공을 따라 형과 함께 청량산에 가서 독서를 하였고,6월에 송재공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자 겨울에 안동으로 가서 친구들과 함께 수렵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 수렵에서 퇴계는 뼈아픈 교훈을 얻는다. 언행록에는 퇴계가 스스로 고백한 실수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젊었을 때에 숙부 송재공을 따라 안동에 가 있었다. 하루는 여러 사람들과 들에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술에 취하여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술이 깨자 어찌나 마음이 아픈지 견딜 수가 없었고, 그 후부터 스스로 술을 경계하는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여도 두려운 마음이 마치 어제 일과 같다.” 16세 때에는 봄에 사촌동생과 함께 안동의 천등산(天燈山)에 있는 고찰 봉정사(鳳停寺)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이 해에 송재공은 집안 젊은이들의 공부장소로서 안동의 자성(子城) 서북쪽에 애연정(愛蓮亭)을 세워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17세 되던 8월에는 순찰하러 온 경상감사 김안국(金安國)의 강연을 형과 함께 가서 경청하였다. 향교의 학생 모두가 참가한 일종의 ‘시국강연회’였는데, 퇴계는 김안국의 강연을 통해 견문을 넓힐 수가 있었다.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를 주장하였던 진보적인 문신이었으나 조광조와는 달리 급진적인 개혁은 반대하였던 온건한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통치강화에 힘쓰는 김안국의 강연은 퇴계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김안국은 ‘소학(小學)’을 관내 향교에 권함으로써 자라나는 유생들에게 생활 속에서 유교의 실천을 널리 권장하였는데, 퇴계가 평생 동안 소학의 내용과 일치한 행실로서 살았던 것은 이때의 깊은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정신적 스승이었던 숙부 송재공은 별세하였고, 퇴계는 마침내 독자적으로 연곡에서 오도송을 읊음으로써 12세 되던 해 ‘이(理)’를 통해 문리를 얻은 후 6년 동안 줄곧 머릿속으로는 주자의 사상에 천착(穿鑿)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퇴계의 오도송은 제자들의 평가대로 주자가 쓴 ‘관서유감(觀書有感)’, 즉 ‘책을 읽으며’란 시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주자는 두 개의 연작시를 지었는데, 그 첫 번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그 안에 떠 있네./무엇일까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샘이 있어 맑은 물이 흘러오기 때문이지.(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연작시의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밤 강가에 봄물이 불어나니/거대한 전함이 터럭처럼 떠올랐네./이전엔 힘을 들여 옮기려고 애썼는데/오늘은 강 가운데 저절로 떠다니네.(昨夜江邊春水生 蒙衝巨艦一毛輕 向來枉費推移力 此日中流自在行)”
  • 儒林(34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의 언행록에는 18살의 퇴계가 야당(野塘)이란 오도송을 노래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젊었을 때 우연히 연곡(燕谷)가에 가서 놀았다. 연곡에는 조그만 물이 있는데 물이 매우 맑았다. 선생은 시를 지으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운 풀 이슬에 젖어 물가를 둘렀는데 고요한 못 맑디맑아 티끌도 없네. 나는 구름 지나가는 새는 원래 비추는 것이지만 나는 저 제비 물결 찰까 두렵네.(露草夭夭繞水涯 小塘淸活淨無沙 雲飛鳥過元相管 只 時時燕蹴波)’” 퇴계가 고향에서 가까운 연곡으로 놀러가 즉흥적으로 읊은 이 시는 퇴계의 시 중에서 공식적으로 처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훗날 퇴계는 이 시를 스스로 가소로운 것이라고 평가하였지만, 이 시 속에는 12살 때 초견성한 ‘이’의 사상이 진일보하여 마침내 천리(天理)를 깨달았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본성은 원래 ‘모래 같은 티끌이 한 점도 없는 맑은 못처럼 맑고 깨끗한 것이다. 물론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구름과 나는 새 같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은 못에 비치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지만 다만 두려운 것은 그러한 새들이 못을 차고 지나감으로써 감정의 동요가 물결칠 것을 두려워한다.’라는 뜻의 오도송이었던 것이다. 스승의 처녀 시에 대해서 제자 이덕홍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선생이 천리가 유행하는데 혹시 인욕(人欲)이 낄 것을 두려워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이 시는 솔직히 말해서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제자 김부륜(金富倫)과 김성일도 이 시를 ‘주자의 관서유감이란 시와 그 뜻이 같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퇴계가 이 처녀작을 가소롭다고 일축하였던 것은 누가 보아도 이 시가 주자의 영향이 너무 짙게 드러나는 일종의 모작시(模作詩)라는 약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는 어쨌든 ‘이’의 화두를 타파한 퇴계의 오도송이며, 훗날 퇴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학문을 닦는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공부에 모두 차이가 나는 까닭은 오직 이(理)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은 퇴계의 학문이 시종일관 ‘이’를 추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 증거인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퇴계는 위대한 옛 성현이었던 공자의 ‘논어’에서부터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실질적으로 퇴계에게 문리를 가르쳐준 직계 스승은 주자였던 것이다. 퇴계는 평생토록 주자를 자신의 사표로 삼았다. 이는 퇴계가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구하여 문을 닫고 고요히 보아 한여름에도 그치지 않았다는 언행록의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더위로 몸을 상할 것을 경계하면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 가슴속에 문득 시원한 기분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잊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길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퇴계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능히 이 책(주자서)을 읽으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이미 그 방법을 알게 되면 반드시 느끼게 되어 흥이 날 것이다.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숙한 뒤에 사서(四書)를 다시 보면 성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 비로소 자기 몸에 수용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 儒林(346)-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46)-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또한 궁리(窮理)란 말은 문자 그대로 ‘만물의 이치를 골똘히 연구한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에 대해서 그 원리를 추구함으로써 완전한 지식, 또는 지혜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퇴계는 이처럼 몇날 며칠을 ‘거경(居敬)’속에 있으면서 ‘골똘히 이를 연구하였던’ 것이다. 12살의 퇴계는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문득 한 소식을 얻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종의 초견성(初見性)을 한 것이었다. 공자가 평생을 두고 말하였던,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 즉 인, 의, 예, 지, 신의 도덕적 윤리보다도 인간에게는 본성으로 갖고 있는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본성은 인보다 우선하고 심지어 불의하고 무례한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으며, 무식하거나 믿음이 없는 인간의 마음 속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마음이 마부라면 인, 의, 예, 지, 신과 같은 오상은 말에 불과하며, 이 본성이 주인이라면 오상은 주인을 따라가는 종인 것이다. 이 마부와 주인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이 바로 ‘이(理)’인 것이다. 며칠 동안 ‘거경궁리’하였던 퇴계는 다시 송재공을 찾아와 ‘이’에 대해서 말하였다. “몇날 며칠을 이에 대해서 궁리하였습니다.” “그래 무엇을 좀 깨달았느냐.” “너무 어려워 아직 아무것도 깨닫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송재공은 퇴계의 밝은 얼굴에서 뭔가 느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다시 물어 말하였다. “그래도 뭔가 얻은 것이 있을 터인데.” 그러자 퇴계는 대답하였다. “아직 정확히는 잘 모르겠사오나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시(是)를 이(理)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퇴계의 이 대답에 평소에 조금도 칭찬하거나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송재공도 크게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다. “…송재 선생은 크게 기뻐하면서 ‘너의 학문은 이로써 문리를 얻은 것’이라고 크게 평가하였다.” 12살의 퇴계가 ‘이’를 ‘모든 사물이 마땅히 그래야 할 시(是)로 본 것’은 이미 성리학의 대사상가와 대철학자로서의 기틀이 마련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장면인 것이다. 공자가 인간에게 ‘어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편 것은 강제조항의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인간의 본성에 의거한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양심(良心)’이라고 불리는 이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부터 가진 인간의 본성이 마음의 본체라면 인, 의, 예, 지, 신의 오상은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12살 때 초견성했던 퇴계는 마침내 18살에 이르러 다시 크게 깨닫는다. 이른바 오도(悟道)하였던 것이다. 원래 ‘오도’란 불교의 진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퇴계는 유교의 철학을 확철대오하였던 것이다. 이때 남긴 오도송(悟道頌)이 지금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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