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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54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7)

    儒林(54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7)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7) ‘자신의 마음을 편안케 해 달라.’는 혜가의 첫마디를 들은 순간 달마는 대답한다.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리하면 내가 평안케 해주리라.” 혜가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대답한다.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평안케 하였다.” 달마와 첫 제자였던 혜가와의 대화에서 그 유명한 안심법문(安心法門)이 탄생된 것. 퇴계와 율곡과의 ‘마음이 편안한 이후라야 능히 사려할 수 있다(安而後能慮)’의 토론은 그런 의미에서 달마와 혜가 사이에 오간 ‘안심법문’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혜가가 ‘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스님께서 평안하게 해주소서.’하고 호소하였을 때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평안케 해주리라.’라고 대답함으로써 아무리 찾아봐도 그 마음은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달마처럼 퇴계는 율곡이 ‘편안한 마음을 얻지 못하겠다.’고 하소하자 그 마음은 탐구하고 또 탐구하여 나가면 쌓이고, 깊이 익숙해져서 점점 밝아지고 사리의 실체가 나타나게 돼 자연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본성이 아님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결국 퇴계는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본성이야말로 이(理)임을 설법해준 것이었다. 이는 주자사상의 핵심인 ’성즉리(性卽理)’, 즉 ‘본성이 곧 이’임을 가르쳐준 것이었다. 실제로 달마의 소림사 앞뜰에서 신광이 왼쪽 어깨를 벤 그날 밤 밤새도록 큰 눈이 내린 것처럼 율곡이 머물렀던 계당에서의 마지막 밤에는 이틀 연속 내리던 봄비는 어느새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율곡이 강릉으로 떠나가던 날 아침에는 밤새 내리던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변하여 온 강산에 흰 눈이 쌓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간신히 꽃망울을 터트리던 매화꽃잎에 참따랗게 눈이 쌓여 설중매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가지 위마다 눈부신 설화를 피어나게 하고 있었지만 매화꽃은 여전히 꿈결 같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오면 스승님.” 크게 깨달음을 얻은 율곡이 다시 퇴계에게 물었다. “스승님 말씀대로 주자가 말한 ‘편안한 뒤에 능히 사려 깊은 것’과 ‘사려가 깊은 것에 능히 얻는 것’의 가장 나아가기 어려운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理)다.” 단호하게 퇴계가 대답하였다. 이(理).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 작은 아버지 이우로부터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을 배울 무렵 논어를 배우던 퇴계는 문득 이해할 수 없는 글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理)라는 글자였다. 숙부에게 이의 뜻을 물었더니 숙부가 머뭇거리자 퇴계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시(是)가 이(理)가 아닐까요.”
  • 儒林(54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6)

    儒林(54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6)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6) “그러나” 퇴계는 한바탕의 웃음이 사라진 후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내가 비록 노마와 같은 둔지(鈍智)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안회처럼 사리를 깊이 탐구하여 나아갈 수는 있지 아니하겠소이까. 이치를 탐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니, 한 가지 방법에만 얽매일 수는 없소이다. 한 가지 일을 깊이 탐구하다가 되지 않으면 곧바로 싫증을 내어 다시는 사리를 깊이 탐구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실로 미적미적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러나 이렇게 탐구하고 또 탐구하여 나가면 쌓이고 깊이 익숙해져서 자연 마음이 밝아지고 명덕의 실체가 눈앞에 확연히 나타나게 될 것이 아니겠소.” 퇴계의 대답은 실로 명언이다. 율곡은 결벽증을 가진 완벽주의자처럼 보인다. 그가 던진 질문은 주자가 대학에서 말하였던 대로 ‘마음이 편안해진 이후라야 능히 사려할 수 있음(安而後能慮)’인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 그렇다면 안회처럼 모든 마음의 근심과 번뇌와 집착을 끊어버린 사람만이 ‘인간의 밝은 덕(明德)’을 밝힐 자격이 있다면 ‘쓸데없이 한 곳에 매어달린 조롱박’과 같은 자신이 과연 대학의 도를 밝힐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순간 퇴계는 율곡의 질문이 과공비례(過恭非禮)임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율곡의 질문은 일종의 허언(虛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퇴계는 율곡이 ‘지나치게 사장(詞章)을 숭상하고 있다.’고 제자 조목(趙穆)에게 편지를 써 보낼 정도로 율곡의 수사학적 문장과 화려한 말솜씨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퇴계가 자신을 노마(駑馬), 즉 걸음이 느린 말로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한바탕 크게 웃었던 것은 율곡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일종의 할(喝)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율곡이 금강산에 있을 무렵 암자에 숨어살던 노승과 한바탕 선문답을 벌인 것처럼 이번에는 퇴계를 상대로 유교적 법거량을 펼쳐 보인 것을 깨닫고 퇴계는 한방망이 후려갈긴 것이었다. 퇴계의 이러한 모습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중국에 있어 달마의 첫 번째 제자였던 혜가(慧可)와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밤새 큰 눈이 내렸는데도 달마를 찾아온 신광은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여 눈 속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에 달마가 ‘부처의 위없는 묘한 도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참아야 하거늘 네 어찌 작은 공덕과 작은 지혜와 교만한 마음으로 참법을 배우겠는가. 이는 헛수고만 할 뿐이다.’라고 거절하자 신광은 칼을 뽑아 왼쪽 팔을 끊는다. 순간 이 끊어진 왼쪽 팔을 달마에게 내어들자 잘린 왼쪽 팔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무릎을 지나도록 쌓인 눈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본 달마는 마침내 신광의 이름을 혜가라고 고쳐주고 정식 제자로 맞아들인다. 이때 혜가는 스승에게 첫마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스님 제 마음이 편안치 못합니다. 스님께서 평안하게 해주소서.”
  • 儒林(54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5)

    儒林(54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5)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5) 이제 남은 마무리는 율곡이 미래지향적으로 취해야 할 학문의 방향. 마침내 떠나기 전날 밤 두 사람은 계당에 마주앉아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감히 스승님께 묻겠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율곡이 입을 열었다. “주자가 말씀하시기를 ‘정함(定)’과 ‘고요함(靜)’,‘편안함(安)’들은 비록 절차는 나누어져 있으나 이 모두가 학문에 대한 공부가 용이하게 진전되게 하는 필수적 요소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자는 ‘마음이 편안한 이후라야 능히 생각할 수 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주자는 공자의 수제자인 오직 안회만이 이것을 실천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오면 소인과 같은 사람은 학문에 정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율곡은 유교의 4대 경전 중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대학의 제1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대학의 도는 ‘인간의 밝은 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지극한 선(至善)’에 이름에 있다. 이를 안 뒤에 뜻의 정함(定)이 있으니, 뜻이 정하여진 뒤에는 마음이 능히 고요하고, 마음이 고요하여진 뒤에는 그 처한 바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함 뒤에 능히 사려가 깊고, 사려가 깊은 뒤에 능히 얻은 바가 있다.” 따라서 율곡의 질문은 대학에는 ‘마음이 편안한 이후라야 능히 사려할 수 있다.(安而後能慮)’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한때 불교와 같은 외도에 마음이 빼앗기기도 하고 아직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여 평안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과연 학문에 정진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내용을 담고 있음이었던 것이다. 율곡의 질문을 들은 순간 퇴계는 곧바로 율곡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퇴계는 율곡이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평안(平安)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불안(不安)하게 여기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주자께서 ‘평안한 뒤에 능히 사려하는 것은 실로 안회가 아니면 이것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진실로 그대가 의심한 바와 같소. 그러나 주자의 말씀은 위아래로 모두 통하고 정밀한 것과 조잡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어떤 사람의 학문이 낮고 깊은 정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루 ‘평안한 뒤에 능히 사려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오. 즉 조잡한 쪽으로 말하면 보통사람이라도 힘써 나아갈 수 있고, 그 정밀한 것의 극치로 말한다면 큰 선비가 아니고서는 진실로 얻은 바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오. 주자의 말씀은 그 극치를 말씀하신 것뿐이오. 만약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가 아니면 명덕(明德)을 밝힐 수 없다는 주자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나와 같은 노마(駑馬)는 어찌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겠소. 아니 그렇소이까. 허허 허허허허.” 퇴계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크게 웃었다. 좀처럼 희언을 하지 않던 근엄한 스승 퇴계가 자신을 가리키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율곡도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스승께서 노마시라니요. 지나친 겸손의 말씀이시나이다.”
  • 儒林(54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4)

    儒林(54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4)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4) 그러나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처음 만난 율곡의 모습은 의기소침하고 염세적이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일까, 퇴계는 예리하게 율곡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였다. 마침내 퇴계는 율곡의 상심이 한때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불교적 방황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그러한 마음속의 어둠을 율곡 스스로 털어놓도록 짐짓 유도했던 것이다. 퇴계는 잘 알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은 오직 고백으로 가벼워지고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그뿐인가. 고백이야말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최고의 묘약임을. 따라서 율곡이 퇴계를 찾아온 것이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죄의식의 형량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백할만한 상대를 발견하기 위해서였음을 비로소 퇴계는 깨달았던 것이다. 과연 율곡은 찾아온 첫날 하루 종일 자신의 사상적 갈등을 고백하고 이를 하소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이에 대해 가타부타 그 어떤 견해도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주자가 스승 이연평을 처음 만났을 때 이연평이 ‘그것(주자가 선에 몰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만 짤막하게 대답하고 ‘다만 성현의 말씀을 보라.’고만 훈계하였던 것처럼 퇴계도 율곡에게 ‘다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율곡으로부터 모든 고백을 전해들은 퇴계는 마침내 율곡의 마음을 달래고 격려하기 시작한다. 율곡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퇴계가 선택한 방법은 주자 역시 10년 이상 율곡처럼 불교적 선에 몰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주자 역시 불교적인 사상 갈등으로 고뇌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학문적 오류에서 벗어나 유가의 종지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한때 율곡의 불교적 방황은 오히려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퇴계의 따뜻한 격려내용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율곡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껍질을 찢고 무거운 허물을 벗은 듯 율곡의 표정은 밝아지고 자신감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앞으로 정진해 나가야할 학문의 방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율곡이 머물렀던 2박3일의 짧은 기간은 실로 절묘하게 구성된 전3막의 연극무대와 같은 것이었다. 제1막이 율곡의 고백을 통한 기(起)였다면, 제2막은 주자와 간접적으로 비유함으로써 치유의 승(承)과 그리고 심기일전의 반전(反轉)이었다. 이제 남은 마지막 제3막은 마무리의 결(結). 이 모든 드라마를 연출한 사람은 바로 퇴계. 퇴계는 2박3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율곡의 전 일생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마무리로 완성시킨 위대한 연출자이자 참스승이었으니, 율곡이 이처럼 젊은 시절 퇴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율곡은 불교와 유교 사이에서 사상적 방황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자포자기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풍산그룹-류진 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풍산그룹-류진 회장家

    ‘풍산’하면 어떤 회사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소비재를 만들지 않는 회사인 까닭이다. 하지만 풍산은 이미 생활속에 깊이 스며있다. 누구나 사용하는 동전에 무늬를 넣기 이전 상태인 소전(素錢)을 생산한다. 그래서 ‘돈을 만드는 회사’라고 하면 ‘들어봤다.’는 사람이 많다. 군대 갔다온 남자들은 ‘총알 만드는 회사’로 알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방위산업체라고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이런 것으로 풍산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반도체 칩에 전기를 공급하고 이를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리드프레임 등 기초소재를 생산하는 등 첨단기업으로 변신 중이다. 이 모든 것을 꿰뚫는 것은 구리 합금기술이다. ●한 손엔 돈, 다른 손에 총알을 2세 경영인 류진(48) 회장이 이끄는 풍산은 ‘동전의 왕국’으로 불린다. 지난 1970년 4월부터 한국조폐공사로부터 소전 생산업체로 지정된 풍산의 기술력은 세계적이다. 오는 2008년까지 호주에 1억달러어치의 소전을 공급하기로 최근 계약을 맺었다. 유럽연합(EU) 동전의 소전도 공급하고 있다. 풍산의 소전은 세계 시장의 5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73년 타이완 수출을 시작으로 세계 60여개국에서 30억여명이 풍산의 소전으로 만든 동전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생산했던 소전을 이어면 지구를 40바퀴 돌 수 있는 분량이다. 소전은 구리를 기본으로 한다. 기원전 6000년경부터 사용해왔던 케케묵은 소재다. 하지만 동에 니켈 등을 적당히 합금만 하면 되는 그렇고 그런 굴뚝산업이 아니다. 까다로운 제조기술이 요구되는 첨단산업이다.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지난 73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방위산업에 진출했다. 소구경 총탄뿐만 아니라 포탄까지 국군이 쓰는 탄약 국산화를 시작했다. 이후 모든 탄약을 국산화했다. 수입대체 효과를 매우 높였다. 지능화와 정밀화 등을 통한 첨단 탄약 개발에도 적극적인 국내 대표적인 방위산업체로 성장했다. 창업자 류찬우(1923∼1999) 회장이 ‘방위산업의 대부’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풍산의 출발은 미미했다. 눈에 띄지도 않았다. 풍산은 지난 1968년 10월 창업주 류 회장이 일본에서 번 1000만달러로 출발한 신동(伸銅·구리가공산업)업체다. 창업주 류회장은 기업을 일으키지만 돈을 벌기보다도 당시 허약했던 국가 산업발전에 힘을 쏟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비철금속소재 가운데서도 구리를 골랐다. 현대문명에서 구리가 들어가지 않는 제품은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창업 다음해인 1969년 부평공장 준공과 함께 정부의 5대 핵심업체로 지정되면서 사업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73년 경북 안강공장을 준공하면서 방위산업을 통한 자주국방의 의지를 실현했다. 방위산업 진출에는 조선시대의 명재상인 그의 조상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을 읽고 유비무한 정신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1980년에는 온산신동공장을 세워 한국을 세계적인 신동산업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아울러 92년부터 미국 현지공장,2000년 12월 태국 현지법인을 가동하면서 풍산은 연산 46만 5000t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다국적 신동기업인 KM유로파 메탈에 이어 세계2위이다. 쉽게 설명하면 비철금속에서 풍산의 위상은 철강에서 포스코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첨단업종으로 변신중 구리가공산업이란 한 우물을 파던 풍산은 지난 79년 서울 퇴계로 극동빌딩에 세들어 사무실을 마련한 뒤 지금까지 본사로 사용하고 있다. 방위산업체인 까닭에 군관련 인맥 네트워크가 해외까지 탄탄하다. 풍산에서도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지난 97년부터 2세 류진 회장 체제가 구축되면서 풍산은 기업변신을 꾀하고 있다. 류 회장은 벤처기업에 투자를 하는가 하면 첨단 통신사업 등에도 조금씩 발을 담그고 있다. 이문원 풍산 사장은 “정보기술(IT)과 자동차·가전 등 전기가 통하는 곳은 어디나 동 압연재가 필요하다.”며 주력인 신동산업을 통한 사업 다각화 가능성을 강조했다. 현재 풍산그룹의 계열사는 핵심기업인 ㈜풍산을 중심으로, 풍산마크로텍, 풍산산업 등 16개(해외법인 포함)에 이르고 있다. 특히 류 회장이 경영을 맡은 이후 일본, 미국, 상하이 등지에 법인을 설립했다. 풍산이 안고 있는 과제 중 하나는 점차 줄어드는 방위산업을 첨단산업에 어떻게 접목시켜 나가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고민의 중심에 선 류 회장은 해외시장 개척을 통해 타개하는 것과 신사업 진출을 통해 기업변신을 꾀하는 두 가지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핵심사업인 동, 스테인리스, 티타늄 분야에서 신기술, 신제품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 새로운 첨단소재산업 분야로 진출할 도모하고 있다. 또 방위산업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정밀 지능탄 개발을 통해 세계 최고의 탄약 전문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전략도 세웠다. 이와 함께 항공기와 유도무기에 필수적인 가속도계, 속도 및 고도측정센서 등 정밀 센서류와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등 정밀산업분야에서도 영역을 확대하는 등 첨단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류 창업주의 4남매 가운데 막내인 류 회장은 82년에 풍산에 입사한 지 15년 만인 97년 풍산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지난 2000년 4월 회장에 올랐다. 일본에서 아메리칸 고교를 거쳐 서울대 영문학과를 마쳤다. 미국 다트머스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수료한 류 회장의 영어 구사력은 재계의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동전의 제왕’ 류 회장은 미국통 류 회장은 ‘미국통’이다. 김대중 정권 이후 대통령의 방미에 단골로 수행하는 경제인 가운데 한사람이다. 특히 지난 2003년 초 출범한 노무현 정부의 대미외교와 관련해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는 그해 4월 W 부시 대통령의 부친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을 국내에 초청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부시 전 대통령의 방한은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의 전초전 성격이 강했기에 큰 관심을 모았다. 공식적으로 부시 전 대통령의 방한은 전경련 초청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경련 부회장인 류 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류 회장은 7월28일 전경련 주최로 열린 한국전 참전용사 환송 만찬의 사회를 보는 등 단순히 경제인 차원을 넘어서 민간외교 분야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 앞서 지난 2002년 12월 국내에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고로 인해 촛불시위가 연일 이어질 당시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과 전화를 한 것도 류 회장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후문도 있다. 이런데서 보듯 류 회장은 부시 공화당 행정부 인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지난 92년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풍산의 미국법인 PMX인더스트리의 공장 준공식에서 바버라 부시 여사가 기념 테이프를 자르면서 직접적인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풍산이 방위산업체라 일찍부터 대미관계에 공을 들였고, 미국의 거대 방위산업체 인맥은 물론 정계 인맥과도 긴밀히 연결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류 회장은 일년 중 반 이상은 미국 등 해외에 머물며 사업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활약에도 국내에는 풍산이나 류 회장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류 회장이 매우 겸소한 성품이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질 기회가 없었던 것. 유교적 가풍이 심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가업을 이어받은 부담도 한 몫하고 있다는 게 주위의 전언이다. 족보상 명문가의 후손인 풍산의 류진가는 재계의 혼맥에서도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풍산 류씨 서애종파의 류 회장은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13세손이다. 바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류씨 가문의 후예다. 류 창업주는 회사 이름을 풍산 류씨인 자신의 본관을 따서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류 창업주는 병산교육재단을 세워 고향인 풍산에 풍산중·고등학교를 세웠다. 이 재단에 서애가 후학을 양성했던 병산서원과 그 일대 땅을 기증하기도 했다. 류 회장이 지난 99년 11월 숙환으로 별세한 뒤 풍산그룹의 경영권은 차남 류진 회장으로 이어졌다. 류 회장은 풍산그룹 계열의 ㈜풍산과 풍산마이크로텍 등 주요 계열사의 대표이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풍산의 공익법인인 병산교육재단과 93년 설립된 학록장학재단(학록은 류 창업자의 호)와 서애기념사업회의 이사장으로 명실상부하게 풍산가의 대표자 역할을 하고있다. ●대통령가에 닿았던 화려한 혼맥 류 창업주는 부인 배준영(79) 여사와의 사이에서 2남2녀를 두었다. 배씨는 한국여자테니스연맹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1969년 풍산의 첫 공장인 부평공장을 지을 당시 배 여사는 동대문시장에서 장을 봐 부평 공장의 종업원들의 음식 뒷바라지를 할 정도로 창업고생이 많았던 것으로 전한다. 이문원 사장은 “모든 직원들을 따뜻하게 감싸줄 정도로 온화한 성품”이라고 치켜세웠다. 장남이자 류 회장의 형 류청(57)씨는 풍산의 미국 현지법인 PMX인더스트리 사장을 지냈다. 지난 198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딸인 박근령(53·당시 이름 박서영)육영재단 이사장과 결혼해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대통령 딸과의 결혼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결혼은 1년도 못돼 파경을 맞아 더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류청씨는 미국을 오가며 개인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배 여사는 여전히 박씨를 “큰 며느리”로 부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류 회장의 큰 누이인 류지(54)씨는 서울 강남에서, 작은 누이 류미(52)씨는 미국 LA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류진 회장은 노신영(77·롯데복지재단 이사장) 전 국무총리의 딸과 혼인했다. 류 회장의 부인인 노혜경(47)씨는 노 전 총리의 딸이다. 노씨는 미국 스탠포퍼드 법대 출신에 두 개의 석사학위와 한 개의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서울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들 부부는 성왜(17)양과 성곤(14)군을 두고 있다. 이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풍산의 류진가는 노 전 총리와의 통혼을 통해서 재계 혼맥의 중심부에 진입하게 됐다. 노 전 총리의 장남 노경수(53)서울대 교수는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작고)의 딸 숙영(47)씨와 결혼했다. 노 교수는 정몽규(44)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매형이 된다. 류 회장은 노신영가를 통해 현대가와 순환혼맥을 이룬다. 노 전 총리의 둘째아들 노철수(51)씨는 P.Wian&Associate 대표이사 사장. 그의 부인은 홍진기 전 내무장관의 막내 딸인 홍라영(46)씨로 삼성그룹 비서실을 거쳐 레오버넷 코리아 사장을 지내고 삼성리움미술관 부관장이다. 이건희 삼성회장의 부인 홍라희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로써 풍산의 류진가는 이건희 삼성 회장,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과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노 전 총리 셋째아들 노동수(48)는 고려서적 사장을 맡고 있다. chuli@seoul.co.kr ■ ’동전 왕국’ 일군 숨은 일꾼들 신동(구리가공산업)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한 오늘의 풍산은 창업주 류찬우 회장이나 2세 경영인 류진 회장 못지않게 숨은 공로자들이 많다. 풍산은 대표적으로 정훈보(68) 전 사장, 류민하(78) 전 부사장, 이진우(72) 전 부사장, 김사철(70) 전 감사, 류인한(79) 전 부사장 등을 꼽고 있다.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농협 중앙회 금융계획과장을 지냈던 정 전사장은 지난 78년 풍산의 전신인 풍산금속공업에 이사로 입사했다. 타고난 기획통으로 사세 확장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지난 80년대 초 중동건설 붐이 일어났을 당시 바닷물을 담수화하는 플랜트를 수출할 때 백동관을 자체 기술로 개발, 공급함으로써 회사가 한 단계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97년 풍산 부회장을 거쳐 99년 한국철도차량 사장을 지냈다.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거쳐 농협중앙회 자금부장을 지낸 류민하 전 부사장은 지난 73년 풍산금속공업의 상무로 입사, 류 창업주와 함께 초창기의 회사 기틀을 다졌다. 회사가 해마다 2배씩 성장을 거듭할 70∼80년대 자금과 인사 등 회사의 안살림을 두루 맡았다.80년 부사장을 거쳐 90년 감사를 지냈다. 풍산의 후배들은 학자풍인 그를 ‘선비형 매니저’로 기억하고 있다. 역시 고려대를 거쳐 농협 중앙회 출신인 이진우 전 부사장은 지난 75년 회사에 합류했다. 그는 80년대 초 회사의 경영정보관리시스템(MIS)을 도입, 당시로서는 국내의 어느 회사보다 빨리 선진적인 경영관리시스템을 받아들였다. 특히 90년 노사대립이 한창일 때 헌신적인 대화를 통해 노사관계 증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후 정부로부터 노사협력우수기업으로 인정도 받았다. 지난 97년 중앙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서울대 상대 출신의 김사철 전 감사의 경우 뛰어난 분석력과 판단력을 가진 타고난 최고재무관리자(CFO)이다. 세무사·공인회계사·공인감정사 자격을 갖춘 그는 재무부·국세청·총무처 등 정부의 여러 부처를 거쳐 76년 풍산금속에 이사로 들어왔다. 재무업무의 기본 프로세스를 조성했으며 시설·자재·감사 등에서 회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정부로부터 녹조근정훈장도 수상했다. 한양대 공대 출신의 류인한 부사장은 세계 최상급의 품질과 능력을 자랑하는 동제품을 만들기 위해 기계설비와 생산프로세스의 토대를 구축한 산증인으로 전통적인 엔지니어 출신의 임원이다. 지난 73년 부평공장 공무부장으로 입사, 동제품 생산기술과 공정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78년 온산공장 건설본부장으로 온산공장 건설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온산공장장을 지냈다. 풍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토대가 됐다. 88년 온산공장 제2공장을 준공해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연간 25만t 생산능력의 신동공장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온산공장 건설경험을 바탕으로 90년대 이후 풍산의 세계화 전략에 따라 건설한 미국 현지법인 PMX사와 태국 공장건설에도 공헌했다. chuli@seoul.co.kr ■ “선조에 누 되는 일 하지 마라” 풍산의 창업주 류찬우 회장은 조선시대 명재상으로 임진왜란을 넘긴 서애 류성룡의 12세손이다.“선조에 누가 되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게 류 창업주의 확고한 인생관이다. 이런 정신이 2세 경영인 류진 회장에게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런 까닭으로 지난 68년 순수민족자본에 의해 창업, 세계적인 신동기업으로 발전한 풍산은 전통 문화의 계승에 남다르다. 풍산이 유비무환과 자주국방이라는 방위산업에 참여하게 된 동기이다. 서애의 가르침이자 영향이다. 풍산의 기틀이 잡힌 지난 76년 12월 류 창업주를 중심으로 서애의 후손들과 학자들이 ‘서애선생기념사업회’를 설립했다. 서애가 징비록에서 남긴 유비무환과 자주국방의 뜻을 계승하고 역사왜곡을 바로 잡는다는 뜻에서 기념사업회를 세웠다. 또 류 창업자는 지난 80년 4월 사재를 출연, 육군사관학교에 서애관이라는 체육관을 기증했다. 지난 일을 되살려 앞날을 대비하자는 서애의 가르침을 호국 간성에게 일깨우고자 건립된 상무의 도장이다. 지난 91년 5월 서애의 정치·경제사상과 애국애민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서애전서 전4권을 출간했다. 일본 도쿄대 종합도서관, 미국 하버드대 동아시아연구소, 러시아 과학대 동방연구소, 중국 베이징대 등 30여개국 50여개 대학과 연구소 등에 흩어져 있었다. 약 10년 동안의 편찬사업 끝에 서애의 저술과 관계자료를 수집, 망라한 것으로 그동안 흩어져 있던 자료를 규합해 완성한데 의미가 깊다. 이로부터 10년 뒤인 2001년 7월 서애전서 국역본을 발행, 일반인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새롭게 했다. 특히 지난 2003년 임진왜란의 극복 경험과 교훈을 적은 ‘징비록(The Book of Corrections)’ 영역본을 출간, 세계화시켰다. 호남대 최병현 교수가 6년에 걸쳐 번역한 것으로,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출간됐다. 기념사업회는 특히 내년 서애 서거 4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또 범유림기념사업회에서 당파를 초월해 서애 서거 400주년 기념행사를 계획중이다.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儒林(543)-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3)

    儒林(543)-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3)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3) 지난 이틀 동안 계속 내린 봄비로 계당 앞의 시냇물은 성난 뱀의 모가지처럼 부풀어 있었다.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 춘3월이어서 계상 앞 뜨락에 심은 매화나무의 철골(鐵骨)처럼 묵은 등골은 기고(奇古)한 검붉은 용틀임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틀 내린 봄비로 그 싸늘한 가지 끝에도 어느덧 꽃망울이 부풀고 있어 꿈결 같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퇴계와 율곡은 좁은 계상의 방안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은 이제 날이 밝아 내일 아침이면 끝이 날 판이었다. 퇴계는 율곡에게 며칠을 더 묵어가라고 권유하였지만 강릉으로 먼 길을 가야 하는 율곡으로서는 서둘러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음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계상은 이미 낡아 양이 적은 봄비에도 지붕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물이 새는 곳에는 종지하나를 놓아 두고 물이 가득 고이면 뜨락으로 물을 던져버릴 만큼 초라한 초당이었다. 퇴계는 51세 때 지은 계상서당에서 10년 동안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계상서당은 좁고 허술하고 비바람이 잠자리에 밀려들 만큼 누옥(陋屋)이었다. 퇴계는 계당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처음 내가 계상의 터를 가려 시내에 다다라 두어 칸의 초가집을 얽어 책을 저장하고 못난 마음을 기르는 곳으로 정하였는데, 이윽고 그곳에서 세 번이나 이사를 하게 되자 갑자기 비바람에 무너지게 되었고, 또 계상이 너무 막히고 적적하여 가슴을 열어주기에는 부적당하였다.” 퇴계 자신이 표현하였던 대로 계상은 ‘비바람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초가집이었고, 막히고 적적하여 가슴을 열어주기에는 부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23세의 청년 율곡과 58세의 노학자 퇴계는 운명적인 지우(知遇)를 하게 되었으니, 이로 인해 이 초라한 장소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두 철인(哲人)들이 운명적인 만남을 펼친 성지라 불릴만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끊고 쉴 새 없이 내리는 봄비가 소록소록 매화꽃잎 사이로 스며드는 적요(寂寥)한 정적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청년 율곡이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스승님.” 지난 이틀 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율곡은 쉴 새 없이 퇴계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러할 때마다 퇴계는 율곡의 말을 신중하게 경청하였고, 그리고 율곡의 질문에 성의를 다하여 대답해 주었었다. 처음 퇴계를 찾아왔을 때에는 율곡의 표정은 어둡고 상심에 가득 차 있었다. 퇴계는 율곡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율곡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퇴계가 지은 화답시에 ‘높은 명성에 헛된 선비 없음을 이제 알겠구려. 지난날의 공경치 못한 몸가짐 부끄럽구려.(始知名下無虛士 堪愧年前闕敬身)’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 [코드로 읽는책] 중국 사상의 이단아 ‘이탁오’ 재조명

    “따라 짖는 한 마리 개는 되지 않겠다.”며 유교의 전제에 맞서 사상의 절대자유를 주장한 중국 명대의 지식인 이탁오(1527∼1602, 본명 이지). 그는 그 도저한 자유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시대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2000여년 동안 만세의 사표요 지극히 성스러운 스승으로 추앙받던 공자를 정면으로 비판,16세기 ‘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것이 그 한 예다.열 두 살 때 이미 공자를 비웃는 ‘노농노포론(老農老圃論)’이란 글을 써 지성의 싹을 보여준 그는 50대 중반엔 “배고픈 사람에게 좋고 나쁜 음식을 가릴 여유가 없듯, 도를 배우는 데도 공자와 석가, 노자를 구분할 여가가 없다.”고 선언하는 ‘경계 없는’ 사상가의 경지에 이른다. 마음과 수양을 중시하는 양명학자들 중에서도 과격한 편에 속해 양명좌파로 분류되지만 그는 사실 유학과 양명학, 불학을 넘나들며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은 야생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이탁오’(신용철 지음, 지식산업사 펴냄)는 중국 사상사의 이단아 이탁오의 파란만장한 삶과 철학의 자취를 살핀 평전이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이탁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경희대 명예교수)가 평생 천착해온 이탁오 사상의 결정판이다. 그동안 ‘분서’(한길사),‘이탁오 평전’(돌베개)등 이탁오에 관한 번역서는 몇 권 나왔지만 그의 삶과 사상을 국내 학자가 본격적으로 조명한 연구서가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중세사회의 어둠을 뚫고 근대의 여명을 밝힌 시대의 횃불. 이탁오는 만세불변의 진리로 통하던 거대한 유교의 허위의식을 깨뜨리고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등 과감한 주장을 펼치다 체포돼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20세기 초 그는 중국의 5·4신문화운동 당시 ‘타공가점(打孔家店, 공자의 상점을 타도하자)’을 외친 오우 등에 의해 비로소 재조명되기 시작한다.자신의 책을 분서(焚書), 곧 태워버려야 할 책이라고 이름지을 만큼 도도했던 이탁오는 현대 중국에선 ‘비판의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중국 최초의 근대인’이란 평가를 얻고 있다. 책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돼온 이탁오와 동시대 인물인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사상적 만남 가능성도 짚고 넘어가 눈길을 끈다. 이탁오가 양명학 좌파인 것처럼 허균은 이퇴계 등 조선 정통유학의 좌파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학자 고 이가원 교수는 허균을 아예 ‘한국의 이탁오’라고 부른다. 저자 또한 ‘홍길동전’이 사회부조리와 여성차별 문제를 다룬 것은 이탁오로부터의 사상적 세례와 무관치 않다는 견해를 밝힌다.국내 학계에서 이탁오가 ‘미치광이’나 ‘정신분열자’ 쯤으로 치부되던 30여년 전 일찍이 그의 사상에 주목한 저자의 이 책은 무엇보다 한국인의 처지에서 이탁오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2만원.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54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2)

    儒林(54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2)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2) 주자는 자신의 참스승이었던 이연평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주자어류(朱子語類)’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 뒤에 동안(同安)에 부임하였을 때 내 나이 24,5세였다. 처음 연평 선생을 뵙고 선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다. 연평 선생은 다만 (그것이)옳지 않다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도리어 연평 선생이 아직 이것(禪)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을 품고 재삼 질문을 드렸다. 연평 선생은 사람됨이 간명하고 중후했으나, 말씀은 그다지 잘 하지 못하셨고, 단지 성현의 말씀을 보라고만 하셨다. 나는 마침내 저 선을 잠시 놓아두고자 했다. 마음속으로 선을 또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인의 책을 읽어나갔다. 읽고 또 읽기를 하루하루 더해가면서 성현의 말이 점점 맛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문득 머리를 돌려 석씨(석가)의 설을 살펴보니 점점 파탄이 일어나고 갖가지 결함이 드러났다.” 이글은 주자가 이연평을 처음 찾아뵈었을 때 선학과 유학 사이에 사상적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율곡이 퇴계를 만나 2박3일의 짧은 기간을 보내고 있을 때 율곡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대립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가 ‘선에 대해서 말씀드리자 연평 선생이 다만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으므로 도리어 연평 선생이 아직도 이것(禪)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하였던 것처럼 율곡도 자신의 해박한 선학적 지식으로 유가의 교의를 접근함으로써 유·불을 통합해 보려는 관점에 퇴계가 다만 ‘옳지 않다.’라고만 대답한 것을 의심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이연평이 주자가 선학에 깊이 빠져 불교와 유교의 교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다만 성현의 글을 보라.’고 짤막하게 충고하였던 것처럼 퇴계도 율곡에게 별다른 충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퇴계는 율곡의 천재성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으므로 율곡의 학문적 모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율곡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방법보다는 스스로 체득하여 주자로 하여금 유·불의 차이를 자각하도록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본 이연평처럼 퇴계도 율곡이 직접 성현의 글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성현의 말에 맛을 느끼고, 불교의 학설이 점점 파탄을 일으키고 이치에 맞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게 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율곡에게 큰 용기가 되었던 것은 주자도 한때 불교에 심취하여 선에 몰두하였다는 전력이었을 것이다. 주자는 10년 이상을 선에 몰두하였다가 마침내 31세 때부터 이연평을 정식으로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유학에 정진하여 유학에 있어 종주(宗主)가 될 수 있었으니, 그에 비하면 율곡은 1년 반의 짧은 기간동안만 선에 몰두하였을 뿐으로 이에 대해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것이 퇴계가 율곡을 위해 던진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자가 이연평을 통해 학문적 방향을 바꿔 유학으로 나가는 계기를 얻은 것처럼 율곡도 퇴계와의 만남을 통해 불교적 방황에 마침표를 찍고 유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급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얻었다는 점일 것이다.
  • [김인성의 산울림] 경기도 최고봉 화학산

    [김인성의 산울림] 경기도 최고봉 화학산

    강원과 경기 북부의 산에는 지나가는 겨울이 아쉬운지 흰백의 설화가 만발했다. 일년 중 ‘산’이 가장 아름다운 때가 바로 지금이다. 겨울 끝자락의 눈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과 신선한 공기에 빠져보자. 일주일 동안 받았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간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경기도 인근에도 눈 구경할 수 있는 산들이 많다. 이번 주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의 경계에 있는 화악산을 소개한다. 일반인들은 전방지역 최고봉으로 지레 겁을 먹을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가족끼리 쉽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다. ●바람이 머무는 경기 제일봉 수도권에서 접근성이 좋고 겨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화악산이다. 해발 1468m로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정상에 서면 시야가 탁 트인다. 동쪽의 응봉(1436m), 서쪽의 국망봉(1168m)과 함께 광주산맥(廣州山脈)의 주봉(主峰)을 이루며 백두대간으로 달음질 치는 명산이다. 가평천 계곡을 사이에 두고 명지산과 마주보고 있는데, 가평읍에서 북쪽으로 약 20㎞ 떨어져 있고 경기 5악 중 으뜸으로 친다. 화악산을 중앙으로 동쪽에 매봉, 서쪽에 중봉(1450m)이 있으며, 이 3개 봉우리를 삼형제봉이라 부른다. 산의 서·남쪽 사면에서 각각 발원하는 물은 화악천과 가평천을 만나 위세를 키워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북위 38도선이 정상을 가르며 가장 높은 화악산 정상에는 군사기지가 있어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중봉을 지나 애기봉을 거쳐 주능선에 오르면 춘천호를 굽어볼 수 있다. 중봉 정상에서는 100㎞까지 멀리 바라보이는데 남쪽으로는 애기봉과 수덕산, 남서쪽으로는 명지산을 볼 수 있다. 산세가 중후하고 험하며 산 중턱에는 잣나무 숲이 울창하다. 화악산 등산은 화악리에서 시작하여 화악리로 내려오는 것이 대부분이나 이 경우 오르는 시간이 너무 길어 가족이나 등산 초심자들에게는 다소 무리. 접근성을 쉽게 하기 위해 사창리 방향에서 시작, 가평으로 내려오는 길이 비교적 좋다. 서울에서~퇴계원~일동~이동~광덕고개를 넘어 삼일계곡를 따라 사창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화악터널 가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6㎞가량 오르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화악터널(보강 공사중)이 자리잡고 있다. 산행은 화악터널을 마주보고 오른쪽 비포장 도로를 따라 40여분 오르면 화악터널 바로 위. 화악터널에 올라서면 화천군 사창리가 분지를 이룬 듯 한눈에 들어오고 남 서쪽으로 화악산의 능선 아래로 군사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있다. 등산로는 이 도로를 따라 가면 되는데 도로가 시멘트라서 다소 불편함은 있으나 화악산 건너편에 늘어선 크고 작은 산들을 굽어보며 걷는 조망은 매우 좋다. 도로를 따라 1시간여 가면 중봉 정상 700m 전방에 건들내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나오고, 여기서 400m를 더가면 정상 300m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을 오른쪽으로 보며 좁은 길로 들어서면 너덜 바위지대로 흰눈을 머리에 이고 선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너덜 지대의 거리는 250m로 이곳을 지나면 중봉 능선 삼거리. 왼쪽은 화악산 애기봉과 석룡산, 관청리 방향이고 중봉은 오른쪽이다. 중봉에서는 경기 제일의 전망대로 발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움에 세상 시름이 날아간다. 하산은 올라온 길을 되돌아오면 된다. 동서울~사창리. 사창리~동서울/상봉~사창리. 사창리~상봉 동서울~사창리 6:50∼20:30분.21회 찻삯:8200원, 소요시간:2시간10분 사창리~동서울 6:30∼19:20분.21회 사창리~화악터널 택시요금 1만 8000원 계곡을 빠져나오면 수령 275년된 소나무(가평 보호수 18)가 있는 왕소나무집(031-582-5257)이 있다. 주인이 산에서 직접 키운 닭과 화악산에서 나는 곰취, 참취, 초록취, 평풍취 등을 직접 채취하여 손님에게 대접한다. ■ 김인성은 1988년부터 서울의 ‘성수산악회’와 ‘메아리산악회’의 등반대장을 맡고 있다. 김씨(49)는 백두대간 종주 등 웬만한 전국의 산은 한두번씩 오르내린 베테랑. 국내 300여곳의 산 정보를 모아 홈페이지를 곧 개설할 예정이다.
  • 儒林(541)-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1)

    儒林(541)-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1)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1) 서림사(西林寺)는 여산(廬山)에 있던 사찰로 한때 주자가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던 곳. 따라서 시 속에 나오는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를 배우러 암자(禪林)에 들렀다.’는 내용은 퇴계 자신도 스승 주자의 도를 배우기 위해서 불교의 선림에 들었음을 암시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어째서 불교적 사찰에 머물면서 자신의 도를 이루었음일까. 실제로 퇴계가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던 주자는 한때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연보에 의하면 ‘처음 선생(주자)이 배울 때 일정한 스승이 없이 경전에 드나들었고, 노자와 석가를 두루 넘나든 것도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자 자신도 직접 ‘내 나이 15,16세 때 일찍이 선에 마음을 두었었다.’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주자가 살았던 송대에는 불교의 교의는 모두 쇠퇴하고 오직 선종만이 성행하고 있었다. 반야(般若), 유식(唯識) 같은 인도의 교의와 천태(天台), 화엄(華嚴) 등 중국불교의 교의는 모두 쇠퇴하고 중국인의 사유방식에 맞게 중국화된 선종만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시기였으므로 높은 벼슬아치와 모든 지식인들 중 선학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연보에 기록된 대로 뚜렷한 스승이 없었던 주자도 한때 선에 마음을 두어 불교에 정진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주자는 15세의 어린나이 때부터 선학에 심취하여 그 도리를 강구하였으며, 선학에 대한 이해와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이 비상하였다. 이러한 주자의 선에 대한 이해수준은 당대 최고의 선걸이었던 도겸(道謙)으로부터 선문답을 주고받은 후 다음과 같은 인증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자의 선은 소소명명(昭昭明明)하다.” 소소명명.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 한치의 의혹도 없이 명백함을 나타내는 말. 당대 최고의 선사였던 도겸으로부터 ‘소소명명’하다고 인증을 받았다면 이미 주자의 깨달음의 경지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주자는 도겸의 의견으로 유학의 교리를 불교적으로 풀이함으로써 과거시험에까지 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자의 나이는 19세.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청년시절 주자는 가히 선의 천재였다는 점인 것이다. 주자의 선학에 대한 탐구는 주자의 나이 24세 때 이연평(李延平:1088∼1158)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거의 10년을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연평을 만나게 된 이후로 주자의 학문의 방향은 불교적 선학에서부터 유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의 사상형성 과정에서 이연평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연평의 가르침을 통하여 젊은 시절 불교를 넘나들던 사상적 방향에 종지부를 찍고 유학에 관한 연구로 자신의 학문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연평은 주자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참스승이었던 것이다.
  • 儒林(54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0)

    儒林(54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0)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0) ‘무진육조소’에 나오는 불교에 대한 퇴계의 태도는 확고부동하다. 불교는 노자와 장자보다, 심지어 관중과 상앙이 부르짖었던 법가(法家)보다도 더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이라고까지 못박은 것이었다. 퇴계의 이러한 불교에 대한 적대감정은 물론 선왕 명종대에 있었던 문정황후와 보우스님과의 유착관계에 따른 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퇴계는 ‘비록 선왕(명종)께서는 곧 불교의 그른 것을 깨달으시고 빨리 씻어버릴 것을 힘쓰셨으나 그 여파와 유산이 아직도 남아있사옵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아직도 그 후유증이 광범위하게 남아있음을 경계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퇴계는 불교를 이처럼 동방의 가장 심한 폐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일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퇴계도 한때 짧은 기간이었으나 선사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선 공부를 하였다는 점이었다. 이때 퇴계의 나이는 47세. 퇴계가 머물렀던 암자는 월란암(月瀾菴)이라고 불리던 작은 선찰이었다. 퇴계는 이 암자에서 주자가 쓴 ‘심경(心經)’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었다. 이때의 심정을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경을 얻은 뒤로 비로소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신명(神明)과 같이 받들고 섬기고, 이 책을 엄한 아버지 같이 공경하였다.” 퇴계는 노년에도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엄격하게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한번씩 읽었다고 하니, 작은 암자에서 깨달았던 ‘심경’의 영향은 실로 퇴계의 전생애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월란암의 암자에 은거하였던 것은 주자를 스승으로 삼고 주자학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결심하였던 은퇴시기 직전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월란암은 퇴계에 있어 적멸궁(寂滅宮)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째서 주자학에 전념하기 위한 결심을 불교의 선림(禪林)에서 하였음일까. 율곡처럼 비록 1년 반 이상을 금강산에서 입산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퇴계는 어째서 불교가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이라고까지 극언하고 있으면서도 불교의 선사 속에서 주자를 스승으로 삼기 위한 초발심을 단행하였던 것일까.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다.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를 배우러 암자(禪林)에 들렀더니 서림사 벽에 붙였던 그 시가 감개 깊어라. 천 년 뒤 우리나라 도가 없어 적막하니 여산 비추던 그 달빛 나의 침실 비춰다오(從師學道寓禪林 壁上題詩感慨深 寂寞海東千載後 自燐山月映孤衾).”
  • 儒林(539)-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9)

    儒林(539)-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9)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9) 선조로부터 친서를 받은 퇴계는 어쩔 수 없이 그해 6월 한양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워낙 건강이 좋지 않았던 터라 도중에 쓰러진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전의를 보내 치료토록 하였으며, 간신히 건강을 회복한 퇴계는 한양에 올라와 홍문관과 예문관에 대제학을 제수받는다. 그리고 경연에 나아가 선조에게 경서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선조를 위해서 쓴 글이 바로 ‘무진육조소’인 것이다. ‘신 이황은 삼가 재배하고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아뢰나이다.’로 시작되는 이 ‘무진육조소’에는 선조가 임금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여섯 가지의 도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상소하고 있다. “첫째, 임금으로서 계통(繼統)을 중요하게 여겨 ‘어짐과 효도(仁孝)’를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둘째, 간악한 말로 남을 모함하며 이간질시키는 것을 막아 양궁(兩宮:선조와 인순황후 심씨)이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셋째, 성학(聖學:유교)을 돈독히 하여 임금으로서 학문을 충실히 닦아 정치에 근본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넷째, 바른 도덕으로써 인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다섯째, 공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뽑아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백성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여섯 번째,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함으로써 하늘의 권애(眷愛)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퇴계로부터 받은 ‘무진육조소’를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림으로 그려 병풍으로 만들고 항상 나랏일을 살피는 지침으로 삼았는데, 퇴계는 ‘바른 도덕으로써 민심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넷째 조항의 세부사항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순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그릇과 같으니 그릇이 모나면 그 속에 담긴 물도 모나고, 또 임금은 푯대와 같으니 푯대가 바르면 그림자도 곧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참으로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비록 그러하오나 보잘것없는 신의 삿된 근심과 지나친 생각으로는 인심을 방황케 하고 미혹되게 하는 학설에 대하여 느낀 바가 있습니다.” 퇴계는 특히 ‘인심을 방황케 하고 미혹되게 하는 학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부연설명하고 있다. “신이 감히 보건대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은 불교이니, 고려는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사옵니다. 비록 아조(我朝)의 융성한 다스림으로도 오히려 능히 그 불교의 밑뿌리를 끊지 못하여 때때로 틈타서 침투하여 퍼지니, 비록 선왕께서는 곧 불교의 그른 것을 깨달으시고 빨리 씻어버리실 것을 힘쓰셨으나 그 여파와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사옵니다. 그리고 노장학(老莊學)의 허망한 망발을 혹 깊이 숭상하여 성인을 업신여기고 예법을 멸시하는 풍습이 더러 일어나고 관중(管中)과 상앙(商)의 학술과 사업은 다행히 전술하는 자는 없으나 공리를 계획하고 이익을 꾀하는 폐단은 오히려 고질이 되고 있습니다.”
  • 儒林(53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8)

    儒林(53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8)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8) 그러므로 율곡이 퇴계의 서당에 머물러 있었던 2박3일 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는 자연 율곡의 불교행적에 대한 고백과 그에 따른 퇴계의 답변이 주화제였을 것이다. 훗날 퇴계가 쓴 글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율곡이 불교서적을 읽고 거기에 깊이 중독되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실상을 감추려하지 않고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니, 감히 도에 함께 나갈 만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하고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2박3일의 짧은 만남 중에 율곡은 자신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실상을 감추려하지 않고 충분히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더구나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듬해 봄, 한성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에 응시하였을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작당하여 율곡을 묘정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너는 한때 이단에 빠졌던 자이다. 그런 네가 어찌 공자를 위시해 여러 성인들을 모셔놓은 이곳에 감히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있겠느냐.’는 공격의 수모를 당한 후였으므로 율곡은 그때 받았던 마음의 충격을 조심스럽게 퇴계에게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의 고백을 들은 퇴계는 어떤 태도를 보였음일까. 물론 퇴계는 불교를 이단시하고 있었다. 이단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은 불교’라고까지 극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태도는 퇴계가 선조를 위해서 바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진육조소’는 퇴계가 선조로부터 부름을 받고 예순여덟 살의 나이에 한양에 올라와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직책을 제수 받고, 경연(經筵)에서 임금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도리에 대해서 강론하였던 내용을 문장화한 일종의 제왕학(帝王學)이었다. 이듬해 12월에 퇴계가 죽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무진육조소’는 퇴계가 공복으로서 국가에 봉사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남다른 것이었다. 임금위에 오르자마자 선조는 퇴계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한양으로 올라와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퇴계가 칭병을 하고 올라오지 않자 선조는 직접 붓을 들어 친필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내린다. “이공, 어진임금은 어진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성군이 되는 것이오. 그러나 짐은 갑자기 임금이 되어 어진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소. 그대가 병중이지만 선왕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생각되는 바이오. 중국에서 제갈공명은 유비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유선이 왕위에 오르자 유비황제의 큰 은혜를 입었으나 아직 다 갚지 못했으니 새 황제인 유선에게도 은혜를 갚고자 한다, 하였소이다. 그러니 그대도 선왕을 생각하여 짐을 돌봐주어 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기 바라오.”
  • 샛길로 핸들틀면 고향길이 FUN해

    샛길로 핸들틀면 고향길이 FUN해

    ■ 45번국도 확장·포장 용인~안성 걱정 뚝 서울에서 수원 또는 용인으로 내려오는 구간에는 샛길이 많지 않으므로 다소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서울∼성남∼용인가기 고속도로나 국도보다 덜 막히는 서울 양재∼성남간 393번 지방도 또는 수서에서 국지도 23번을 타고 판교 또는 분당을 거쳐 용인 신갈까지 내려온다. 이때 분당과 죽전·용인구간에서 극심한 체증을 빚게 되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용인까지 진입하면 안성 또는 평택까지 한번에 연결하는 우회도로나 샛길을 이용할수 있어 한숨 돌릴 수 있다. 구성에서 경찰대학교입구와 용인 어정가구단지를 거쳐 42번 국도와 연결되는 샛길을 이용할 수도 있다. 판교와 수지를 거쳐 용인 신갈오거리까지 내려오면 체증이 예상되는 42번국도를 피해 23번 국지도를 타고 민속촌방향으로 직진한다. ●지곡리·용인대 샛길 민속촌입구를 끼고 좌회전하면 용인정신병원을 거쳐 용인시내까지 이어지는 왕복 4차선 도로가 펼쳐진다. 그러나 정신병원구간에서 심한 정체가 예상되므로 지곡리 샛길을 이용한다. 남부CC입구 앞까지 이르러 우회전한후 이 길을 따라 3㎞쯤 가다 두갈래 길에서 한국소방검정공사쪽으로 좌회전, 직진한다. 고개를 넘어 영진골프연습장 진입로를 따라 내려가면 42번 국도와 만난다. 그러나 42번 국도는 용인시내까지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500여m쯤 진행하다 용인대학교 진입로로 우회전한후 계속 진행하면 안성으로 이어지는 321번 지방도를 만날 수 있다. ●용인∼안성구간 수월해져 이 길은 45번 국도와 맞나는데 최근 용인시 마평동과 평택시 고덕면 동고리를 연결하는 45번국도가 확포장돼 고향가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킨다. 안성쪽으로 내려가고 싶으면 이동저수지 인근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서 82번 국지로를 갈아타면 안성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다.45번 국도가 막힌다면 용인대에서 321번 지방도를 타고 계속 내려가 23번 국지도를 이용한다. 수원에서 오산을 거쳐 82번 국지도로 진입한 후에는 레이크힐스 골프장앞을 지나 송전·고삼면을 거쳐 안성으로 진입한다. ●안성도 다소 여유 용인 42번 국도구간에서 명지대 용인캠퍼스 정문 앞길 또는 45번국도를 거쳐 와우정사 등 57번국도와 연결되는 샛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57번국도를 이용할 경우 곧바로 안성시내쪽으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중간에 318번 지방도와 17번국도를 차례로 이용해 일죽 IC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탈 수 있다. 안성에서는 진천쪽으로 가는 귀성객은 325번 지방도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개산초등학교와 마둔저수지를 거쳐 상중리 배타고개까지 이른후 중앙컨트리클럽 샛길로 진입하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남한산성 순환로 타면 경충국도 장지IC가 금방 강릉을 포함한 영동지역은 영동고속도로와 이 도로를 우회진입할 수 있는 경충국도(3번국도)를 이용한다. 여주까지가 짜증나는 구간이지만 이곳만 지나면 대부분 정체구간에서 벗어난다. 경충국도를 염두에 두는 경우 서울 북부지역 거주자들은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타거나 명절이면 한가해지는 서울 중심도로를 이용해 일단 성남까지 가야 한다. ●광주 가는 길(약도 (1)) 경충국도 모란시장 진입로는 해마다 심각한 교통체증현상이 빚어진다. 그러나 남한산성을 넘으면 이 국도의 체증구간을 건너뛸 수 있다. 서울 복정동 사거리에서 남한산성 방면으로 차를 몰다 표지판을 보고 산성으로 진입, 매표소 2곳을 지나면 삼거리길(43번국도)이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해 광주시청을 지나면 경충국도 광주인터체인지를 탈 수 있다. 남한산성순환도로를 이용할 수도 있다. 남한산성입구 표지판에서 좌회전하지 말고 직진하면 이 도로가 산성순환도로.3∼4㎞정도 가면 터널이 나오고 곧바로 고가도로 아래 경충국도와 광주방면으로 나누어지는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광주로 향하는 이배재고개가 나온다. 길이 높고 굴곡이 심하지만 지름길이다. 고개를 넘어 현대아파트 사거리에서 좌회전(45번국도)하면 경충국도 장지인터체인지다. 분당신시가지에서 출발하는 귀성객들은 분당열병합발전소를 지나 광주시 오포면으로 직진해 안내표지판을 따라 경충국도로 진입하는 것이 낫다. 용인지역은 죽전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광주방면으로 직진한다. ●샛길로 곤지암까지(약도 (2)) 광주시청앞(43번국도)에서 청사를 등지고 오른쪽은 경충국도, 왼쪽은 퇴촌방향이다. 오른쪽으로 500m가량 지나면 파발교 못미쳐 샛길이 나오고 이 길(500∼600m)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회전,300m가량 지나 우회전한다. 이 곳부터는 직진이다. 길 초입 오른쪽에 광주소방파출소가 있고 왼쪽으로는 광주기도원이다.1㎞정도 지나면 389번 지방도와 200m가량 겹치고 삼육재활원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초월갈비집이 보인다.1㎞정도 지나 337번 지방도로 접어든다. 곤지암 표지판과 함께 소머리국밥집들이 눈에 들어오면 곧바로 경충국도다. 좌회전하면 중부고속도로 곤지암IC가 나온다. 이천 하이닉스반도체공장을 지나면 영동고속도로 이천IC가 나온다. 다음은 여주군이고 명성황후기념관 옆으로 영동고속도로 여주IC가 보인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국도 3호선 우회로·중랑천 자동차 전용로-의정부 도심체증 피하고 쌩쌩∼ 경기북부 주 간선축인 연천·동두천·양주∼의정부간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국도 3호선(평화로)과 포천∼의정부간 국도 43호선의 의정부 구간 상습정체를 피하는 게 관건이다. 또 최근 인구가 크게 는 파주읍과 탄현, 양주시 서북부 등지에서 출발하는 남행 귀성객들은 일산신도시와 1번국도(통일로)의 체증을 피하는 노선을 택해야 한다. ●양주·동두천, 포천∼의정부∼경부·중부고속도(약도 (1)) 양주·동두천에서 출발하면 의정부 시계에 들어선 직후 국도3호선(평화로) 대신 경민대학∼의정부시청 방향에 나있는 국도 3호선 우회도로를 이용해 의정부 도심의 체증을 피해 동부간선∼경부고속도로 연결한다. 이 도로는 올 하반기 부터 통행료를 징수할 예정이지만 현재는 무료다. 중랑천 자동차전용도로를 이용해도 의정부 구간 체증을 피할 수 있다. 이 도로는 오는 3월10일부터 영구 폐쇄돼 올 추석엔 이용할 수 없다. 중부고속도로를 찾아갈 때는 중랑천 자동차 전용도로 입구에서 의정부 성모병원 방향으로 진행,43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포천 방향에서 남행하는 차량들은 의정부시계로 들어서기 직전 축석고개 검문소 전방 200m 지점 SK 주유소앞에서 죄회전, 경희궁 식당을 돌아 4차선으로 확장된 의정부 시도 29번으로 빠진다. 이후 직진해서 마주치는 43번 국도에서 의정부교도소 방향으로 좌회전해 퇴계원∼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구리 IC∼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축석고개에서 4㎞ 직진, 우측으로 의정부 성모병원을 바라보면서 좌회전 43번 국도로 진입해도 된다. ●파주∼경부·서해안고속도로(약도 (2)) 1번 국도(통일로)와 일산신도시의 체증을 피하는 방법으로 368번 지방도를 이용해 볼 만하다. 이 도로를 이용해 통일동산을 거쳐 자유로에 연결, 서울외곽 순환도로와 김포대교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남행한다. 의정부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제2경인도·외곽순환路로 핸들 돌리면 가다서다 짜증운전 훌훌∼ 인천은 물론 부천·김포 등 수도권 서부에 사는 시민들이 영·호남이나 영동권으로 귀향하려면 일단 안양·성남 또는 수원을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이곳까지만 가면 다양한 샛길이 있어 일단 ‘절반의 성공’이지만 이곳까지 가기가 녹녹지 않다. ●인천∼성남(약도 (1)) 인천시와 부천시 경계를 통과하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도로는 평상시에도 속을 썩인다. 때문에 인근에 있는 제2경인고속도로와 시내도로를 번갈아 이용하는 등 머리를 써야 한다. 일단 제2경인도(인천∼안양)를 탄 뒤 안현분기점에서 외곽순환도로 옮겨간 뒤 성남으로 간다. 안현분기점은 체증이 심한 계양IC∼서운분기점∼중동IC∼송내IC∼장수IC 구간을 벗어난 곳이다. 문제는 제2경인도와는 멀리 떨어져 처음부터 외곽순환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인천 부평·계양구, 부천시, 김포시 거주민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외곽순환도 노선과 비슷하게 나 있는 시내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외곽순환도 김포공항IC 인근인 인천시 하야동에서 시작해 부천 오정동∼중동∼상동을 통과해 인천 장수동에 이르는 길이 이 경우 안성맞춤이다. 장수동에서 1㎞ 정도 전진해 서창분기점에서 제2경인도를 탄 뒤 안현분기점에서 외곽순환도로 옮겨타면 된다. ●인천∼안양∼성남(약도 (2)) 또다른 문제는 외곽순환도 평촌 지점에 이르면 또다시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곽순환도로 바꿔타기 이전에 고속도로이용정보(1588-2505)를 들어 평촌∼판교 구간이 막힌다는 소식을 접하면, 이 때는 과감하게 외곽순환도를 포기하고 막히는 일이 거의 없는 제2경인도를 계속 타고 종점인 안양까지 간 뒤 비산동∼관양동∼인덕원∼판교를 거쳐 성남까지 이어지는 시내길을 이용해야 한다. 제2경인도에서 빠져 수원 쪽으로 2㎞ 가량 가다 왼편으로 이마트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계속 직진하면 청계산을 넘어 판교가 나온다. ●인천∼수원(약도 (2)) 일반화된 코스인 영동고속도로(인천∼수원∼강릉)는 처음부터 떠올리지 않는 것이 좋다. 곳곳이 막혀 동수원이나 신갈IC까지 가는 데도 서너 시간씩 소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천시 장수동부터 시작되는 39번 국도(수인산업도로)를 이용해 수원까지 가는 것이 좋다. 수인산업도로도 차선 확장이 안된 것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정체가 있기는 하나 고속도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도 정체가 우려된다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제2경인도로 안양까지 간 뒤 안양∼수원간 국도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

    낚GO, 먹GO, 웃GO, 즐기GO…. 얼음낚시는 겨울 강태공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다. 최근 들어 가족과 함께 겨울철에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레포츠로 각광받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더욱 다양하게 각종 낚시 대회 및 축제가 열리는 것도 이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강원도 화천 일대의 산천어 축제는 매년 100만명의 인파가 찾을 정도로 겨울 축제의 대명사가 됐다. 아울러 춘천, 인제 등 강원도 곳곳에서 펼쳐지는 빙어 축제의 열기 또한 우리를 점점 더 유혹한다. 뿐만 아니다. 주말 강화도 인근에는 얼음판을 깨고 낚싯대를 드리운 밤샘 부부족들도 늘어나고 있다. 자, 이 겨울철 얼음낚시를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을까. 가족, 연인, 부부끼리면 그 기쁨 또한 몇배가 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 현장을 다녀온 생생 스토리가 여기에 있다. 글 사진 화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얼지 않는 인정, 녹지 않는 추억’강원도 화천에서는 지금 산천어 축제(ice.narafestival.com)가 한창이다. 올해 4회째를 맞은 이 축제는 행사기간동안 100만명이 다녀갈 것으로 예상돼 대표적인 겨울철 가족축제로 자리잡았다. 화천천 2㎞ 구간에 펼쳐진 행사장은 ‘겨울 해방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다양한 놀이시설과 프로그램들로 가득 차 있다. 축제의 대표 선수격인 산천어 얼음낚시,‘겨울의 고전’ 썰매타기와 눈썰매 봅슬레이 등, 얼음 위에서 하는 모든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산천어 낚시와 스노 모빌 등을 제외한 놀이시설 대부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축제의 자랑. 지갑이 얇은 이들에게 이처럼 ‘얼지 않는 인정’을 베푸는 축제도 드물다. # 산천어 잡기 행사장에서 산천어를 잡는 방법은 얼음낚시와 루어낚시, 그리고 맨손잡기 등 모두 세가지. 이 가운데 1만개의 얼음구멍이 뚫려있는 넓은 낚시터에서 펼쳐지는 얼음낚시는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다. 서울 화곡동에서 온 박라리사(34)씨는 “3시간만에 다섯마리를 잡아 짜릿하게 손맛을 봤다.”며 입술이 귓불에 닿을 만큼 환하게 웃었다. 바로 옆 칸에서 낚시를 하던 신미자(40·서울 용두동)씨는 딸 배영은(13)양이 산천어를 잡아올리자,“얼른 회를 떠야죠.”라며 가방에서 칼을 찾느라 부산스러운 모습이다. 인조미끼인 루어를 얼음구멍 아래 바닥까지 가라앉힌 다음, 위 아래로 들었다 놨다 하면서 산천어를 유혹하는 것이 얼음낚시 요령이다. 산천어의 유영층인 바닥위 10∼50㎝사이를 집중공략하는 것이 포인트. 오전 9∼11시와, 오후 3∼5시 사이에 하류쪽이나 낚시터 펜스주변에서 낚시를 하면 마릿수 조과를 얻을 수 있다. 루어낚시는 앉아서 구멍만 바라보는 얼음낚시와는 다른 재미가 있다. 조과도 나은 편. 하지만 낚싯대와 릴 등 전문적인 장비가 필요하다. 맨손잡기는 10m짜리 원형수조 속에 풀어 놓은 산천어를 제한시간 5분동안 맨손으로 잡는 행사.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는 주최측에서 제공한다. 세 행사 모두 주말엔 1만원, 평일엔 5000원씩 입장료를 받지만, 5000원은 농촌사랑나눔권으로 돌려준다. 이 상품권으로 행사장 주변의 향토웰빙촌에서 농특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 먹거리 장터 축제 조직위가 운영하는 물빛누리 산천어부페(033-441-1010)에서는 다양한 산천어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일품요리인 산천어회는 1㎏에 2만원, 구이는 한접시에 1만 2000원. 훈제는 1마리 1만 2000원이다. 이외에도 장터주변 50여개소의 음식점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다. # 준비된 낚시, 두배로 즐겁다 화천천의 겨울바람은 동장군도 울고 갈 만큼 매섭다. 모자와 장갑, 두툼한 방한복은 필수. 방한효과가 좋은 스티로폼을 앉기 적당한 크기로 잘라 가져가는 것도 좋다. 낚싯대는 행사장 주변 낚시점에서 2000∼3000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 릴 낚싯대는 1만 5000원선. 미끼는 낚싯대에 달려 있다. 산천어알 등 생미끼를 사서 쓰는 경우도 있지만, 조과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잡은 산천어로 직접 회를 떠서 먹고 싶다면 상추 등의 야채와 초고추장, 회칼 등을 가져가야 한다. 행사장내 회센터에서 회를 떠주기도 하지만, 마리당 3000원(야채포함)으로 다소 비싼 편이다. # 산천어 축제장, 이렇게 가세요 서울에서 46번국도를 타고 춘천방향으로 가다, 강촌을 지나 5번국도로 갈아탄 후 직진하면 된다. 호평 등 남양주시를 우회하는 사능-답내간 신설 46번국도를 이용하면 기존 46번국도보다 30분 이상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100번) 퇴계원IC에서 퇴계원방향으로 나와 47번국도→진관IC→383번 지방도 순으로 가면 신설 46번 국도와 연결된다. 임시개통 중이어서 군데군데 공사구간이 많으니 조심운전은 필수. 춘천∼화천간 5번국도는 주말이면 행락객들 차량으로 몸살을 앓는다. 가급적 평일이나 주말 이른 시간대를 이용하는 것이 혼잡을 피할 수 있다. ■ 머루와인으로 언몸 녹여요~ 쥐꼴래미(zicolaemi). 강원도 화천에서 시인으로, 또 귀농민으로 살아가는 박종수(62)씨가 생산하는 머루와인의 이름이다. 머루농장(033-442-1529)이 있는 산양리의 백암산 자락을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하다. 격동의 70년대 후반에 권력에 항거하는 저항시를 쓰며,‘민족정신’이란 월간지를 내기도 했던 ‘시인’ 박씨가 ‘농민’으로 화천에 정착한 것은 1997년. 평소 “농민을 사랑하지 않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말해왔던 그가 이데올로기 때문에 버려진 땅, 화천을 주목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엔 ‘돈이 될’것 같아 닥나무를 재배해봤지만, 기후 때문인지 제대로 자라질 않아 손해만 봤다.1차산업과 2차산업을 병행할 수 있는 품종이 뭘까를 고민하다 생각해 낸 것이 화천 같은 고랭지에 적합한 머루. 당도나 영양가 면에서 포도보다 뛰어나, 와인으로 만들면 수익성이 있어 보였다. 우리라고 ‘불란서’처럼 좋은 와인을 생산해내지 못하란 법은 없다는 오기도 생겼다. 박씨는 “쥐꼴래미 와인의 가장 큰 장점은 머루에 농약을 단 한방울도 치지 않고, 미생물을 이용해 재배한다는 거죠.”라고 하면서 “발효과정에서도 직접 배양한 효모만을 사용한다.”며 친환경적인 제품임을 강조했다. 3년의 숙성과정을 거쳐 연 5000병 정도가 생산되는데, 전국적으로 공급하기엔 절대부족한 수량. 가격도 병당 2만 5000원으로 싸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작년엔 주문이 밀려,800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단다. 명실상부한 중농으로 변화한 셈이다. 상래당(想來堂). 박씨가 모든 걸 버리고 숨어살고 싶다는 의미로 지은 머루농장의 당호지만,‘쥐꼴래미’와 함께 다시금 세상 밖으로 ‘등단’할 날이 멀지 않은 듯했다. ■ 춘천은 빙어축제가 한창이래요 동지(冬至)무렵에 나타나 입춘(立春) 즈음이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물고기.‘호수의 요정’빙어(氷魚)가 요즘 제철을 만났다. 겨우 손가락만한 크기지만, 빙어만큼 국민적인 사랑을 듬뿍 받는 물고기도 드물다. 맛도 좋으려니와, 남녀노소 어렵지않게 잡을 수 있는 것도 ‘식지 않는 인기’의 비결. 춘천에서 화천에 이르는 북한강변은 숫제 빙어 낚시터로 착각될 정도다. 주말이면 빙어를 잡으려는 사람들로 ‘파시’를 이룬다. 바다 빙어과에 속하는 빙어는 대부분의 물고기들이 동면하는 겨울철에 모습을 드러내는 냉수성 어종.2∼3월초에 단 한번의 산란을 마치고 죽는 단년어로 알려져 있다. 간혹 2∼3년을 사는 놈들도 있다. 해마다 빙어축제 행사를 벌이는 강원도 인제군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나흘간의 축제기간 동안 무려 70만명이 행사장을 찾았다고 한다. 금년에는 75만명 정도가 다녀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호수의 요정’빙어의 국민적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간단한 장비로 누구나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이 빙어 낚시의 가장 큰 매력.2000∼3000원 정도의 견지 낚싯대와 2000원짜리 구더기미끼 한통이면 온가족이 먹기에 충분한 양의 빙어를 잡을 수 있다. 어린이들도 요령만 가르쳐주면 곧잘 잡아낸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얼음판 위에서 썰매를 타며 뛰노는 것만큼 즐거운 놀이가 또 있을까. 지난 11일 가족들과 함께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 북한강변을 찾은 이하림(10·서울 은평구)양은 “이렇게 넓은 얼음판은 처음 봤어요. 빙어를 잡는 것도 재밌었지만, 썰매를 타고 놀 때가 신나고 즐거웠어요.”라며 ‘썰매예찬론’을 폈다. # 어디로 갈까 빙어 낚시터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춘천호와 소양호 등이 우선 떠오른다. 춘천호에서는 제1회 오월리 빙어축제 한마당 행사가 열리고 있는 오월리와 원평리, 신포리 등이 많이 알려져 있다. 대부분 승용차로 서울에서 2시간이내의 거리에 있어 서울, 경기지역의 출조객들이 많이 찾는다. 소양호에서는 인제군 남면 부평리 신남선착장이 대표적이다. 해마다 이곳에서 빙어축제가 열릴 만큼 빙어자원이 풍부하다. 갈수기인 겨울철에 이곳까지만 물이 차, 마치 빙어를 몰아넣는 형국이 된다는 것이 인근 낚시점 주인의 설명이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남전대교 부근도 일급 빙어 낚시터. 경기도권에서는 강화도가 제일이다. 춘천호 등과는 달리, 대부분의 빙어낚시터가 5000원정도의 입어료를 받고 있다. # 많이 잡고 싶다면 의암호변에서 에이스마트(033-244-9438)낚시점을 운영하고 있는 유대식(43)씨는 첫째, 빙어를 많이 잡아 놓은 사람 옆자리에서 할 것. 둘째,3∼5초에 한번씩 살짝 챔질을 해줄 것. 셋째, 빙어의 입질이 집중되는 아침시간대, 특히 동틀 무렵부터 오전 10시까지의 시간대를 놓치지 말 것 등을 주문했다. 채비를 물밑바닥에서 10㎝정도 띄운 다음 고패질을 해주는 것도 마릿수 조과의 비결. # 미끼는? 단연 구더기가 최고다. 구더기하면 흔히 ‘해우소’를 연상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양식업자들이 어류의 몸속에서 양식을 한다고. 빙어의 입이 작기 때문에 한마리꿰기가 원칙이다. 바늘끝이 꼬리쪽 껍질에 살짝 걸치도록 꿰는 것이 좋다. 구더기가 든 미끼통의 뚜껑을 연 채 얼음판위에 놓으면 동사의 우려가 있으므로 주의할 것. # 어떻게 먹을까 빙어낚시의 재미는 먹는 맛. 구태여 미식가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빙어를 산 채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맛은 가히 일품이랄 수 있다. 소주 한잔이 곁들여진다면 금상첨화. 차마 산 것을 통째로 먹지 못하겠다는 이들은 소금구이나 고추장구이가 좋다. 튀김가루를 발라 식용유에 튀겨낸 빙어튀김도 일미. 김에 싸서 먹으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 향수어린 애니메이션 박물관 어린이가 있는 가족이나, 만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춘천시 서면의 애니메이션박물관(animation.com)에 들러볼 만하다.1976년작 ‘로보트 태권V´부터 2002년작 ‘마리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북한관, 일본관 등 국제관도 마련되어 있다. 특히 일본관에는 ‘은하철도 999’와 같은 오래된 만화영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관람객들의 향수를 자아내기도 한다.3D입체 영화관에서는 15분짜리 ‘둘리의 나무속 환상여행’이란 입체영화를 볼 수 있다. 입장료와 별도로 1000원을 내야 한다. 이밖에도 ‘공포의 스튜디오’와 ‘핀스크린 체험기’ 등,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 만한 체험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다. 주변 풍광이 수려하다는 것도 이 박물관의 자랑. 건물밖으로 나서면 소양2대교와 얼어붙은 의암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청소년 2500원, 어린이 2000원이다. 동절기(11월∼2월)엔 아침 10시에 개관해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은 휴관일.46번국도에서 화천방향 5번국도로 갈아타고 20㎞정도 가면 나온다. 문의 033-243-3112,3266. 글 사진 춘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새 1000원권 내년 상반기 나온다

    새 1000원권 내년 상반기 나온다

    새 1000원짜리 지폐는 지금보다 크기는 작아지고, 색깔도 현재 보라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뀐다. 한국은행은 17일 내년 상반기에 새 1만원권과 함께 발행할 예정인 새 1000원권 시제품의 도안을 일반에 공개했다. 새 1000원짜리는 가로 136㎜, 세로 68㎜로 현재의 1000원짜리보다 가로는 15㎜, 세로는 8㎜가 줄었다. 새 5000원짜리와 비교하면 세로는 같고, 가로는 6㎜가 작다. 색깔도 현재 보라색에서 파란색 계열로 바꿨다. 적황색 계열인 새 5000원권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인물초상은 퇴계 이황을 그대로 썼다. 앞면의 보조소재로는 성균관내 명륜당과 매화를 썼다. 그러나 뒷면의 배경은 현재의 도산서원 전경 대신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로 바꿨다. 현행 1000원짜리 뒷면에 있는 도산서원 전경에는 지난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일본이 원산지인 금송(錦松·비단소나무)이 들어 있어 그동안 ‘왜색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것과 무관치 않다. 금송은 현재 1000원짜리 뒷면 왼쪽 모퉁이 ‘1000WON’이라고 쓰인 부분 ‘N’자 바로 위에 있는 길쭉한 나무다. 한은 김두경 발권국장은 “새 1만원권의 도안도 올 상반기내에 공개할 방침”이라며 “새 1000원과 새 1만원권은 내년 상반기 중 같이 발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윤정희 “통닭 자시소예”

    윤정희 “통닭 자시소예”

    「스타」윤정희(尹靜姬)가 통닭구이집을 개업했다. 서울 퇴계로4가 대한극장 건너편에 새로 단장한 통닭집 「姬의 집」이 그것. 영화속의 얘기가 아니고 실제로 통닭집 여사장이 된 윤정희. 어려서부터 닭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마침내 그의 이름자를 딴 통닭집 간판을 내걸었다. 정부의 축산정책장려에도 호응하는 뜻으로 『 맛 좋고 영양 많은 통닭 사자시소 예 』 백만원내고 전셋집 얻어 30평홀 테이블 12개놓고 「姬의 집」간판을 올린 게 바로 5월15일. 여사장 윤정희는 자신이 벌인 최초의 사업에 느긋한 희열을 맛본 것 같다. 30평 남짓한 「홀」에 둥그런 「테이블」이 12개.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그만큼 아늑한 분위기다. 「테이블」은 한「세트」에 1만5천원짜리 고급품이고 실내장식도 제법 호화판. 단층 고옥의 외형은 조금도 사치스럽지 않다. 전 업종이 철공소라니까 그럴 수 밖에. 이 집을 1백만원에 전세 낸게 지난 4월말. 1백만원에 전세에 월세가 3만원이다. 그래도 이집을 여는데 3백만원이 들었다. 바깥은 볼품 없지만 적어도 실내만은 화려하다. 「스타」사장 윤정희의 「이미지」를 손상치 않게 하려고 가욋돈 30만원은 더 발랐다는게 윤양의 어머니이자 실질적인 경영주 박여사의 말. 박여사는 당초 이 집을 윤정희의 것이라고 밝히지 않으려 했단다. 아무리 닭고기를 좋아 하지만 왜 하필 통닭장수냐고. 그리고 이왕 사업을 벌일양이면 좀 더 큼직한 기업체를 갖는 게 체면상 옳다고. 그런데 주인공 윤정희가 반대였다. 『이왕 하는거뭐가 부끄러워 숨기느냐, 내돈 들여 내가 하는데 떳떳하지 못할 게 뭐냐』그래서 간판까지 『姬의 집』으로 내걸고 사장은 윤정희로 낙착됐다. 「스타」가 부업을 갖는 예는 최근에 하나의 유행처럼 성행한다. 얼마전엔 고은아가 충무로 2가 합동영화사 자리에 2층으로 「로스」구이 집을 낸다고 했다. 은퇴후의 생활대책으로 스타의 부업은 유행처럼 낡은 2층집을 헐어버리고 새로 지을 예정인데 아직 착공도 안했으니까 언제쯤 「빌딩」이 완성되고 「로스」구이집이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부업을 가질 생각은 있는 것 같다. 이빈화(李嬪華)가 남산동에 고급요정을 경영하고 김진규(金振奎)가 도염동에 음식점을 갖고 있다는 건 옛 얘기. 최근엔 문희(文姬), 남정임(南貞妊)도 마땅한 사업을 물색중이다. 「스타」가 되어 돈을 벌면 우선 집을 사고 자가용을 굴리고 그 다음은 은퇴후를 대비한 사업체를 잡는 게 공식. 이것은 과거의 「스타」들이 막 벌어 막 쓰다가 비참한 사양을 맞는 예와 좋은 대조가 된다. 그만큼 「스타」도 생활인화 했다고 할까. 66년도 「청춘극장」으로 「스타돔」에 오른 윤정희는 정상극복의 「스피드」에 있어 첫손을 꼽아도 무방하다. 그는 「데뷔」1년이 채 못되는 사이에 그 보다 선배인 고은아, 문희, 남정임의 3파전에 끼어 들었고 2년째는 3파전의 「스크린」판도를 남정임, 문희, 윤정희의 것으로 바꿔놓았다. 현재 출연작품이 『저 눈밭에 사슴이』외 21편. 금년예상이 50편 이상이니까 월수입 1백만원은(세금포함) 너끈하다. 사실 그는 「데뷔」당시 서울 가회(嘉會)동의 전셋집에서 현재 1천만원짜리 석조양옥의 주인이 됐고 2대의 자가용(코로나 와 오스틴)을 굴리고 있다. 그러나 윤정희의 치부가「스타」재벌에 낄만큼 풍성한 건 아니다. 윤양의 어머니 박여사의 말을 빌면 『벌어서 제몸 치닥거리 하고 세금내면 남는 게 없는 상태』. 그래서 조그맣게나마 부업을 벌이게됐다는 것이다. 금년 상반기 윤양이 납부한 세금은 95만원. 겹치기 출연에 시달리는 우리「스타」들의 가장 큰 걱정은 역시 「건강관리」다. 그런데 윤정희는 다른 여배우와 달리 건강을 자랑한다. 사흘쯤 꼬박 철야촬영을 하고도 끄떡않는 건강체. 지나치게 자신했다가 입원한 일도 있긴 하지만. 동생넷의 학비(學費)를 대주며 기틀잡히면 사업도 확대 그 건강의 비결은 『잘 먹는 것』에 있다고 한다. 우선 윤양의 닭고기 정량은 중간치 2마리. 3백만원 투자의 통닭집을 연 이유가 단순히 「좋아서」가 아닌 건 물론이다. 윤양은 이것을 기반으로 차차 사업을 확대할 계산이다. 배우중 성격이 꼼꼼하고 검소하기로 정평인 윤양이 사업면에서 어떤 솜씨를 발휘할지 주목된다. 배우 되기 이전에 국제관광공사등 직장생활도 했고 비교적 규모있는 생활을 영위한 가정. 6남매의 맏이로 그자신 우석대학(右石大學)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 동생 둘이 숙대, 서울문리대에 다니고 고교 1, 중학 1명등 학생만도 5명이다. 윤양이 부업을 생각한 건 차라리 이런 소비적인 가정형편을 뒷받침하려는 억척의 소산같다. 15일, 몇몇 측근을 초대한 조촐한 개업 「파티」에서 「스타」사장 윤정희는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물론 그가 이 「姬의 집」에 붙어있을 시간이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점심은 꼭 이 곳에 와서 닭고기를 먹고 한가한 시간은 이 곳에서 보내겠어요」라고. [ 선데이서울 69년 5/25 제2권 21호 통권 제35호 ]
  • 이황 ‘성학십도’ 佛 출판기념회

    조선시대 최고 유학자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가 프랑스어로 번역돼 16∼23일 파리 한국문화원과 세르프 출판사 등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한국문학번역원(원장 진형준)의 번역ㆍ출판지원을 받은 ‘성학십도’는 한국 유학서로는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됐다. 이 책은 고향 도산에서 학문과 강학에만 전념하던 퇴계가 17세의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제왕학’을 가르치려고 쓴 작품으로 유학의 진수를 모은 대표작으로 꼽힌다.‘성학십도’의 프랑스어판은 파리 7대학 한국학과와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한국 종교학을 전공하고 있는 조혜영씨가 번역했다. 책을 낸 세르프 출판사는 80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 철학 전문출판사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51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8)

    儒林(51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8)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8) 물론 율곡은 이 상소문에서 한때 자신이 심취하였던 불교의 교리에 대한 비난은 자제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 상소는 요승 보우의 악행에 대한 논척(論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교를 ‘이단’이라고 분명히 못 박음으로써 한때 자신이 ‘이단’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맹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율곡의 이러한 태도는 율곡이 가진 남다른 엘리트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퇴계와 율곡 두 거인의 차이점이기도 하였다. 만약 퇴계가 율곡처럼 한때 궁향(窮鄕)에 들었더라면 설혹 불교의 폐단을 알고 있다 해도 퇴계는 불교를 이단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퇴계가 율곡에게 ‘권하노니 그대는 제때에 바른 길을 추구하고 궁향에 들었던 일 슬퍼하지 말아 주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을 미뤄 보면 율곡은 그 무렵 자신이 불교에 심취했던 것을 슬퍼하고 그러한 고민을 사흘 동안 퇴계에게 모두 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율곡이 이처럼 한때 불교에 심취하였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였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불경을 좋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율곡의 아버지가 벼슬에 관심이 없고 유유자적한 청빈생활을 즐겨하였던 것은 이처럼 불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율곡은 불교와 많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호가 율곡, 즉 ‘밤나무계곡’이라고 불린 것도 본가가 있는 파주의 노추산에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율곡리’에서 불리는 데서 따온 것이지만 노추산에 밤나무가 많게 된 것은 율곡과 한 스님과 맺은 불교적 인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율곡이 다섯 살 무렵,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강릉에서 성장하고 있던 율곡에게 어느 날 스님 한사람이 찾아온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탁발을 하고 있던 스님에게 외할머니 이씨는 얼른 광으로 가서 쌀 한 되를 퍼서 스님에게 시주하였다고 한다. “복 받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이 합장하고 인사를 할 때 현룡이 할머니를 부르며 뛰어왔다. 현룡은 율곡의 아명. 뒤로 돌아서려던 스님은 그 소리를 듣고 현룡을 쳐다 보았다. 한참을 쳐다 보던 스님은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참 총명해 보이는 아이로군요.” 스님의 말에 외할머니는 기분이 좋아서 웃으며 대답하였다. “네 아주 똑똑한 아이랍니다.” 그러나 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꼭 살아있어야 하는데, 쯧쯧.” 혀를 차는 스님의 말에 외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러자 스님은 다시 합장을 하며 말하였다. “저 아이는 분명 영특한 아이지만 하늘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스님은 말을 마치고 벼랑을 꾸며 훌쩍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이 너무 궁금하였던 외할머니는 스님을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곧 스님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스님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 儒林(51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

    儒林(51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 쇄언에 보이는 퇴계의 격려내용을 율곡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예안에서 이틀을 유숙하고 작별을 드렸다. 강릉으로 돌아가 있을 당시 퇴계선생은 나에게 편지와 시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셨다. ‘세상에 영명한 재질이 어찌 한정이 있을까마는 다만 옛 학문에 마음 두기를 즐겨하지 않음이 도도한 물결같이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 중에 스스로 이러한 세속에서 벗어난 자가 있어도 혹 재질이 미치지 못하거나 나이가 이미 늙거나 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높은 재주와 약관의 나이로 바른 길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니, 후일에 성취할 바를 어찌 측량할 수 있으리오. 바라건대 오직 천만번 원대(遠大)해지기를 스스로 기약하고 소득(小得:문사나 부귀와 같은 도학에서 벗어난 공리적인 헛된 명성)에 스스로 자족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나서 율곡은 퇴계로부터 받은 다음과 같은 시 두 편을 전재하고 있다. “고래로 이 학문은 세상이 놀라고 의심했는데 이(利)를 노려 경(經)궁리 도는 더욱 멀어졌네. 아, 그대 홀로 능히 추서(墜緖)를 찾아 말을 듣고 새로운 지식을 찾으려 함이오.(從來此學世驚疑 射利窮經道益離 感子獨能尋墜緖 令人聞語發新知).”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첫 번째 시의 내용은 ‘지금 세상이 혼탁하여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이익만을 탐하고 올바른 도에는 더욱 멀어지고 있지만 오직 그대만이 추서(墜緖:땅에 떨어진 도의 실마리)를 찾아 말을 듣고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길을 찾아 새로운 지식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인 것이다.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시골로 돌아와 오래할 바를 몰라 탄식하다가 고요한 가운데 틈새로 비치는 빛 겨우 엿보았소. 권하노니 그대는 제때에 바른 길 추구하고 궁향에 들었던 일 슬퍼하지 말아주오.(歸來自歎久迷方 靜處才窺隙光 勸子及時追正軌 莫嗟行脚入窮鄕)” 퇴계가 율곡에게 준 이 시는 2박3일의 짧은 만남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주된 내용이 무엇이었던가를 강렬하게 암시해주고 있다. 궁향(窮鄕). 두 번째 시 속에 나오는 궁향은 원래 ‘궁벽한 시골’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불교를 말함이었던 것이다. 이 용어는 사기의 ‘조세가(趙世家)’에 나오는 ‘궁향은 괴이한 것이 많고 곡학은 말이 많다.(窮鄕多異曲學多辨)’라는 구절에서 빌려온 것. 그러므로 ‘궁향에 들었던 일을 슬퍼하지 말아주오.’라는 마지막 문장의 뜻은 ‘불교에 심취하였던 과거를 너무 상심해 하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19세 된 해 봄 3월에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 금강산으로 입산하였다. 이듬해 하산하여 강릉의 외갓집으로 돌아왔으니 그가 불교에 입문하였던 것은 이처럼 1년 반에 가까운 오랜 기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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