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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633)-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6)

    儒林(633)-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6)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6) 자신의 숙소를 찾아온 유지를 적극적으로 받아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매정하게 뿌리치지도 못한 채 ‘문을 닫을 것인가, 인정 없는 일. 동침할 것인가, 의리 없는 일(閉門兮傷仁 同寢兮害義)’이라고 노래하면서 병풍을 걷고 자리를 달리한 채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을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율곡. 그런 일이 있은 지 4개월 뒤인 1584년 1월 16일 마침내 율곡은 한양의 대사동(大寺洞)에서 숨을 거뒀으니 이처럼 유지는 율곡에게 있어 마지막 불꽃이었던 것이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황해도에 있던 유지는 율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람처럼 서울로 달려와 애통해하였고, 이후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두향이가 보내온 분매역시 퇴계가 죽기 2년 전의 일로서 그런 의미에서 분매는 퇴계와 두향이가 마지막으로 나눠 마신 ‘구슬미음(瓊漿)’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참동안 매화꽃을 바라보던 퇴계는 문득 생각난 듯 노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피봉을 뜯자 안에서 접힌 주지가 나왔다. 퇴계는 종이를 펼쳐서 편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하였다. “나으리.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나으리를 못 뵈온 지 벌써 십수 년이 흘렀사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으리.” 낯익은 필체였다. 필체를 본 순간 퇴계는 틀림없이 두향으로부터 보내온 편지임을 확신할 수 있음이었다. “소첩은 나으리와 함께 지내던 적성산 기슭에 작은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사옵니다. 바람이 전해오는 풍문을 통하여 나으리께서 그동안 어떻게 지내시온가는 대충 전해 듣고 있사오나 며칠 전에 꾼 꿈은 너무나 흉몽하여 나으리의 옥체에 무슨 나쁜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두렵고 송구하여 나으리께서 잘 알고 계시던 이방을 통하여 문안인사를 드리게 되었나이다. 나으리, 옥체 만강하시나이까, 아니면 소첩이 꾼 꿈처럼 고황(膏)에라도 병이 드셨나이까. 흉몽에서 깨어나 너무나 참람하여 통곡을 하며 울었사옵는데, 다음날이라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으리께서 계신 곳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사오나 차마 소첩의 몸으로 그럴 수는 없이 이처럼 인편으로 안부를 여쭙게 되었나이다. 나으리.” 퇴계는 읽던 편지를 멈추었다. 두향의 편지는 사실이었다. 그 무렵 퇴계는 심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퇴계 자신은 자신의 병을 ‘극병(劇病)’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종이 승하하고 인산하는 것을 보기도 전에 고향으로 도망치듯 내려와서 여론이 분분하였을 때 기대승이 편지를 보내어 퇴계에게 벼슬에 나오기를 간곡히 청하자 퇴계가 자신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기에 맞지 않는 점으로 ‘크게 어리석음(大愚)’,‘심한 병(劇病)’,‘헛된 명성(虛名)’,‘잘못 입은 은명(誤恩)’의 네 가지로 열거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儒林(63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5)

    儒林(63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5)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5) 율곡이 유지에게 준 이별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쁘게도 태어났네 선녀로구나/10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목석 같은 남자는 아니지만/병들어 늙었기로 사절함일세/길가에 버린 꽃 아깝다말고/운영(雲英)은 언제 배항(裴航)을 만날까/함께 ‘구슬 미음(瓊漿)’마시고 신선될 수 없네/헤어지면서 시를 써주니 부끄러운 마음뿐일세.” 율곡이 인용하였던 ‘구슬 미음’은 ‘태평광기’에 나오는 배항이라는 청년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 어느 날 배항은 운교(雲翹) 부인을 만난다. 그때 그녀는 ‘한번 구슬 미음을 마시고 나면 온갖 느낌이 일어난다오. 검은 서리(玄霜)라는 신선의 약을 찧어주고 운영(雲英)을 만나게 될 것이오.’라는 시를 한 수 지어준다. 훗날 배항이 남교 역을 지나면서 어떤 할머니에게 마실 것을 청하였더니 그 할머니가 절색의 미인 운영을 시켜서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배항이 그것을 받아 마셔보니 진짜 ‘구슬 미음’. 이후 배항은 100일간 절구를 찧어주고 운영을 아내로 맞아들여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기생 유지와 함께 ‘구슬 미음’을 마심으로써 신선이 되고 싶었던 율곡. 율곡은 그런 내용의 이별시뿐 아니라 유지를 노래한 3편의 시를 더 읊는다. 그 중의 한 편은 장시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황해도 여성이여/맑은 기운 모았구나. 선녀가 따로 있나./곱기도 해라, 그 태도여/맑기도 해라, 그 얼굴이여./승로반(承露盤:새벽이슬을 받는 대야) 같구나. 이슬을 먹는가/어쩌다 버려졌나, 길가에/봄도 한창이구나, 꽃의 신선로처럼/황금의 집으로 옮기지 못함이여, 슬프다 일색이여./처음 만났을 때 언제런가. 아직 피지 않은 꽃이더니/마음의 정만 연달아 가는구나. 서로 가슴 통하니/파랑새는 가버렸구나. 중매도 없네. …(중략)… 슬프다 인생의 녹음(綠陰)이러니/늙었구나, 나는 여색을 멀리해야 하네./이 몸의 욕망이여, 재같이 식어졌다네. 아득한 들이여 달은 어둡구나/범 우는구나 빈 숲 속에서/나를 따라옴인가 무슨 뜻이랴/옛날의 명성을 그리워해서라네./문을 닫을 것인가 인정 없는 일/동침하랴 의리 없는 일/집어치워라, 병풍이여/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마음을 거두어라, 근원을 맑게 함이여/처음으로 돌아가리라 청명함이여/3생(전생, 금생, 내생)을 배회함이여/빈말이 아니라네./연꽃 핀 아름다운 나라에서 그대를 다시 만나리.” 평생 동안 성리학에 종사하였던 대학자로서 한갓 기생에 대한 이와 같은 헌시를 남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유지라는 기생을 노래한 율곡의 화려하고 기교적인 사장을 보면 오히려 그 어디에서도 두향에 대한 상사를 표현하지 않고 두향을 다만 매화꽃에 비유하여 ‘거문고 대에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莫向瑤琴嘆絶絃)’라고 노래하거나 ‘원컨대 님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때 청진한 옥설(玉雪)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 주오.’라는 식으로 은유하여 노래한 퇴계의 마음이 훨씬 더 애절하고 진실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 儒林(631)-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4)

    儒林(631)-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4)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4) 두향은 퇴계와 헤어질 때 거문고의 줄을 절현함으로써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며, 또한 퇴계가 잘라준 저고리의 옷섶을 강선대 바위 밑에 파묻음으로써 퇴계를 위해 종신 수절할 것을 맹세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두향에 대한 상사를 매화꽃과 암향에 빗대어 은근히 노래한 퇴계의 정취와는 달리 율곡은 보다 적극적이며 노골적이다. 율곡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해주에 있을 때인 38세 때, 관기로 있었던 유지(柳枝)라는 기생과 로맨스를 펼친다. ‘버들가지’란 뜻을 가진 그 기생에 대해서 박종홍씨는 ‘당시 28세로서 몸이 가냘프고 자색이 수려할 뿐 아니라 영리하며 귀엽고 매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또 한편으로 당시 유지는 아직 16세가 채 안된 소녀였다고도 알려져 있다. 율곡은 자신이 만났던 유지에 대해서 48세 때인 1583년 9월,‘사(詞)를 지어서 그 정(情)을 깨우쳐 주는 글’이란 헌사를 남긴다. 기록의 원문은 ‘율곡전서’에 전해지지 않고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율곡이 직접 쓴 원문의 내용으로만 남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지는 선비의 딸이다. 신분이 몰락하여 황주 기생으로 있더니, 내가 황해도 감사로 갔을 적에 어린 기녀로 수종들었으니, 날씬한 몸매에 곱게 단장하여 얼굴은 맑고 두뇌는 영리하므로 내가 가련하게 여겼으나 처음부터 정욕의 뜻을 품은 것은 아니다. 그 뒤 내가 원접사(중국사신을 맞아들이는 벼슬)가 되어 평안도로 오고 갈 적에도 유지는 언제나 안방에 있었지만 일찍이 하루도 서로 몸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계미년(癸未年,1583년 율곡의 나이 48세)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을 뵈러 갈 때에도 유지를 데리고 여러 날 술잔을 함께 들었고, 해주로 돌아올 때에 그녀는 조용한 절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그리고 이별하였는데 내가 밤고지(황해도 재령) 강촌에 묵게 되었는데 밤에 어떤 이가 문을 두들기기로 나가 보니 그녀였다.…마침내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 기생이란 다만 뜨내기 사내들의 정을 사랑하는 것이거늘 누가 도의를 사랑하는 자가 있을 줄 알 것이랴. 게다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며 도리어 감복하는 것은 더욱 보기 어려운 일이다. 아깝다. 여자로서 천한 몸이 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다니 그래서 노래를 지어 사실을 적어 정에서 출발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니 보는 이들은 그렇게 짐작하시라.” 율곡 자신이 직접 쓴 글의 내용을 보면 유지라는 기생은 ‘날씬한 몸매에 곱게 단장하여 얼굴은 맑고 두뇌는 영리하였던 미인’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자신이 유지에게 ‘정욕을 품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심지어 한적한 강촌에 묵게 되었을 때 한밤중에 문을 두들겨 찾아온 유지를 맞아들였으나 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유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몸을 주러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감복하였다는 유지. 날이 밝아 유지가 남의 눈을 피해 율곡이 머물렀던 집을 떠나려 하자 율곡은 유지에게 이별시를 지어준다.
  • 儒林(63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3)

    儒林(63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3)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3) 매화를 노래한 임포의 대표적 시는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작품이다. 임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모든 꽃이 떨어진 겨울에 매화만이 홀로 볕 받고 아름답게 피어서 온갖 풍정을 독차지하며 작은 정원을 향해 서 있으니 성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고도 얕은 물에 비치고 은은히 풍기는 향기는 으스름 달빛 아래 떠돌고 있다. 서리 속의 저 새는 아래로 내려오르다가 꽃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 조심스레 보고 있고 흰 나비가 만일 이 매화꽃 핀 사실을 안다면 (기막힌) 그 향기에 놀라 혼비백산할 것이다. 다행히도 이 몸은 가만히 시를 읊으며 매화와 서로 친해질 수 있으니 저 세속의 돈 많은 인간들의 박자 치는 악기와 금 술잔(金尊)이 어찌 필요하겠는가.” 매화를 노래한 임포의 이 시중에서도 절창은 ‘성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고도 얕은 물에 비치고 은은히 풍기는 향기는 으스름 달빛 아래 감돌고 있다.(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는 구절. 이 유명한 구절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던 문장으로, 이로 인해 매화가 ‘횡사(橫斜)’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마침 어둠이 내려 완락재로 스며든 으스름 달빛은 서탁 위에 놓인, 두향이가 보낸 매화를 향해 비치고 있고 꽃에서 풍기고 있는 은은한 암향은 임포가 노래하였던 대로 ‘흰 나비가 이 매화꽃 핀 사실을 안다면 기막힌 그 향기에 놀라 혼비백산할 정도’로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간 퇴계는 마시던 열정의 우물물을 분매에 가득 뿌려주었다. 두향이가 보내온 사랑의 정표 분매는 이로부터 퇴계에게 있어 매처(梅妻)가 되었다. 그날 밤. 퇴계는 그 매처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평생 동안 백수가 넘는 매화시를 썼던 퇴계였지만 그날 밤 지은 퇴계의 시는 다른 시와는 달리 연애시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퇴계가 말년에 지은 이 시 한 수는 퇴계가 두향이를 그리워하며 지은 단 하나의 ‘상사별곡(相思別曲)’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아 있노라.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다시 보니/거문고 대에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黃券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이 시의 내용 중 처음 두 행은 비어 있는 방 완락재에 앉아서 옛날 책을 읽으며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퇴계의 근황을 노래한 것이지만 뒤의 두 행은 비록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매화를 보고 거문고를 타면서 꿈같은 운우지정을 나눴던 아련한 옛 추억을 반추해 보는 사랑노래가 아닐 것인가. 절현(絶絃). 퇴계의 시 속에 나오는 절현은 중국 전국시대 때 거문고의 명인 백아(佰牙)가 자기 거문고의 가락을 알아주던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은 후에는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
  • 儒林(629)-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2)

    儒林(629)-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2)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2) “놓고 가거라.” 퇴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언제 단양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이제 나으리께 두향 아씨로부터 받은 모든 물건을 전해 드렸으니, 당장이라도 밤을 도와 돌아가려 하나이다.” “벌써 날이 저물었다.” 퇴계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하였다. 이미 뉘엿뉘엿 기울던 햇살은 저물어 곧 땅거미가 스며드는 저녁녘이었다.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떠나시게나.” 마침 완락재 옆에는 작은 쪽방이 하나 있었다. 서당을 지을 때 대목수 역할을 맡아하던 정일 스님이 머무르던 당직실이기도 하였다. 그곳에는 작은 부엌 아궁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는 취사용이 아니라 난방용 공간이었다. 몸이 쇠약하여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는 퇴계를 위해 장작 같은 것을 쌓아두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곳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자연 완락재의 방바닥에 온기가 전달될 수 있도록 설계된 작은 쪽실이었다. 유생을 불러 노인을 그곳에서 하룻밤 유하도록 하게 한 후 퇴계는 묵묵히 완락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서탁 위에는 노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두향의 편지가 있었으나 퇴계는 피봉을 뜯지 않고 여전히 묵묵히 매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퇴계는 평생 동안 매화를 사랑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퇴계의 매화사랑은 북송시대의 학자 임포(林逋)를 마음깊이 사숙하고 있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었다. 임포는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20여 년간 산을 내려오지 않고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오직 학을 사육하고 매화를 완상하면서 살았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처럼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렸다. 후세사람들은 ‘매처학자’란 말로 청빈한 선비생활을 비유하였는데, 이 무렵 퇴계야말로 아내도 없이 오직 매화를 사랑하는 매처학자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평소에 임포와 일치된 삶을 본받고자 했던 퇴계였으므로 평생 동안 75제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퇴계는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해 부르면서 매화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퇴계는 살아생전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매화를 노래한 시집까지 편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두향이가 보낸 매화야말로 퇴계가 지금까지 보았던 매화 중에 으뜸이었다. 매화꽃을 꺾고 책상 위에 두고 바라보기도 하고, 뜨락의 매화를 바라보고 매화와 서로 묻고 화답하는 문답시까지 읊었던 퇴계. 때로 매화를 형이라 부르면서 찾아온 문인들과 술잔을 나누기도하고, 매화가 겨울추위에 손상되었음을 슬퍼하는 애상(哀想)의 시를 읊기도 했으나 두향이가 보내온 매화야말로 임포가 아내로 삼았던 매처(梅妻) 그 자체였던 것이다.
  • 儒林(62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1)

    儒林(62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1)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1) 강선대(降仙臺). 문자 그대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바위. 노인의 입에서 강선대란 말이 나오자 시종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퇴계의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단양 제일의 절경 옥순봉(玉筍峰). 희고 푸른 암석봉 천여척이 죽순모양으로 우뚝 솟아올라 신묘한 형상을 하고 있는 단양팔경의 제1경. 특히 단양의 풍광을 사랑하여 ‘단양산수기’란 기행문을 쓴 퇴계는 다음과 같이 옥순봉을 노래하고 있다. “구담봉에서 여울을 거슬러나가다가 남쪽언덕을 따라가면 절벽아래에 이른다. 그 위에 여러 봉우리가 깎은 듯이 서있는데, 높이가 가히 천길 백길이 되는 죽순과 같은 바위가 솟아있어 하늘을 버티고 있다. 그 빛이 혹은 푸르고 혹은 희어 푸른 등나무 같은 고목이 아득하게 침침하여 우러러 볼 수는 있어도 만져볼 수는 없다. 이름을 죽순봉이라 이름 지은 것도 그 모양 때문이다.” 불과 9개월의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희고 푸른 암벽이 비온 뒤에 죽순처럼 솟은 것 같다’하여 퇴계가 직접 이름 지어 부른 옥순봉. 그 옥순봉이 마주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있는 넓은 바위 강선대. 그 강선대야말로 퇴계와 두향이가 함께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며 신선처럼 놀던 사랑의 바위가 아니었던가. 강선대가 굽어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종신수절하고 있는 두향. 그 두향이가 오매불망하여 20여 년 동안 키운 매화꽃을 상사의 정표로 퇴계에게 보내 온 것이었다. “…조그만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홀로 수절하고 계시옵기에 쇤네도 그동안 어찌 지내시온지 통 몰랐사온데, 며칠 전 사람을 보내어 두향 아씨가 저를 찾으셨나이다. 뵈었더니 수고스럽지만 나으리께 이 분매를 전해 드려달라고 부탁하셨나이다. 쇤네 역시 나으리를 뵙고 싶은 마음 간절하던 차에 쾌히 승낙하고 이처럼 내쳐 달려왔나이다.” “잘하셨네.” 퇴계는 짧게 대답하였다. 주로 노인 혼자 말하고 노인 혼자 대답하는 형식이었지만 퇴계는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퇴계의 눈치를 살피던 노인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걸망 속에서 다시 물건을 꺼내며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두향 아씨는 나으리께 분매와는 따로 다른 물건도 보내셨나이다. 아씨께오서는 나으리를 뵙지 못하면 분매만 전해드리고 오라고 말씀하시옵고, 혹여 친견하게 되면 따로 이 물건을 전해 드리라고 하셨사온대, 황공하게도 나으리께서 이 천한 쇤네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친히 맞아들여 주시매 두향 아씨로부터 받은 다른 물건을 전해 드리게 되었나이다.” 노인은 걸망에서 꺼낸 물건을 두 손으로 퇴계에게 바쳐 올렸다. 노인의 손에는 접은 편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안에 편지내용이 들어 있는 태봉투(苔封套)였다. 태봉투는 편지지인 주지(周紙)를 넣어 봉한 서통(書筒)으로 남이 볼 수 없고 오직 당사자만이 뜯어 읽어볼 수 있는 친전(親展)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 儒林(627)-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0)

    儒林(627)-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0)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 (10) 그러나 퇴계는 이방이 가져왔던 삼다발을 단호하게 물리치지 아니하였던가. 이덕홍(李德弘)이 기록한 ‘퇴계언행록‘에는 퇴계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자 선생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왜 그것을 가져왔느냐.’하고 물리치셨다.” 이를 퇴계는 20여년이 흘렀으나 노인의 행동거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오시게나.” 퇴계는 노인을 완락재로 불러들였다. 그러잖아도 유생이 가져온 분매를 본 순간 퇴계는 그 매화꽃이 두향이가 보낸 것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는데, 단양에서 온 아전을 확인하자 퇴계는 정확하게 전후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좌하여 앉고서도 퇴계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유생이 떠온 열정의 우물물을 말없이 들이켜던 퇴계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어 말하였다. “그래 언제 단양을 떠났는가.” “이틀 전에 떠났사옵니다.” 단양에서 안동까지의 거리는 200여리. 도중에 소백산을 넘고 죽령의 고갯마루를 넘는 험준한 태산준령의 연속이었다. 이틀 만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먼 길을 내쳐 달려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쇤네가 나으리를 뵙기 위해서 불원천리하고 안동까지 달려온 것은 다름아닌 두향 아씨의 청원 때문이었나이다.”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비로소 노인의 입에서 두향의 이름이 흘러 나왔지만 퇴계는 묵묵부답, 아무런 대답 없이 물끄러미 서탁 위에 놓인 두향이가 보낸 매분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으리께오서 단양을 떠나시자마자 두향 아씨는 신임 사또의 관아를 찾아가서 기적에서 빼어 달라 소청을 하시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두향 아씨는 면천을 받아 관기에서 벗어나 상민이 되셨나이다.” 예부터 조선의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란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봄을 기다리곤 하였다. 동지로부터 날짜를 세기 시작하여 81일간이 구구에 해당하는 것이다. 흰 매화 81개를 그려놓고 매일 한 봉오리씩 붉은 색을 칠하여 81일째가 되면 백매가 모두 홍매로 변하는 그림으로 이때가 대충 3월10일 무렵이 되는 것이다. 퇴계가 두향으로부터 받은 분매가 도착하는 것이 바로 그 무렵. 즉 두향이가 보낸 매화꽃과 더불어 입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입춘방(立春榜). 두향이가 보낸 20년 기른 고매는 그 해의 봄을 알리는 일지춘심(一枝春心)이었던 것이다. “나으리”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두향 아씨는 기적에서 면천되자마자 강선대가 눈 아래 굽어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조그만 초당을 짓고 그곳에서 종신수절하고 계시나이다.”
  • 외곽순환로 30일 부분 개통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일산∼퇴계원 구간이 오는 30일 부분 개통되고 요금은 3000원으로 정해졌다. 경기도 제2청은 15일 건교부가 일산∼퇴계원 구간중 사패산 터널구간(송추 IC∼의정부 IC간 7.5㎞)을 제외한 28.8㎞구간을 개통한다고 밝혔다. 통행료는 5000원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3000원으로 내렸다. 구간별 요금은 양주영업소에서는 1900원, 불암산영업소에서는 1100원, 그 밖의 나들목에서는 기본요금 1000원을 받는다. 일산∼퇴계원간엔 일산·고양·통일로·송추·의정부·별내·퇴계원 등 6개의 IC가 신설되고, 사패산 터널구간은 오는 2008년 6월 개통된다.의정부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儒林(626)-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9)

    儒林(626)-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9)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9) 노인은 유생을 따라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서당 안 동쪽구석에 조그마한 연못 하나가 있었다. 아직 철이 아니어서 연꽃이 피어 있지 않았지만 퇴계가 직접 땅을 파서 만든 연못이었다. 정우당(淨友塘). 퇴계가 스스로 지은 시속에 ‘조용히 떠나는 모습 가만히 생각하니 진실로 어려운 친구로다.’고 표현하였던 것처럼 ‘청정한 벗’인 연꽃을 상징하는 정우당. 그 연못가에 퇴계가 홀로 서 있었다. 퇴계를 보자 노인은 그 즉시 무릎을 꿇고 문안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아이고 나으리,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뉘시온지” 퇴계는 미천한 사람을 만나도 결코 ‘너’라고 부르는 식의 하대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젊은 제자들을 만나도 공대를 하곤 하였다. 그러자 노인이 황송하여 몸을 굽히며 말하였다. “나으리, 쇤네를 모르시겠나이까.” 퇴계는 물끄러미 노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알 것 같이 낯이 익긴 하였으나 가물가물하여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소이다만” “나으리” 노인은 읍을 하며 대답하였다. “쇤네는 나으리께오서 일찍이 단양에 군수를 하시 올 때 이방으로 있던 자이나이다.” 순간 퇴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인의 말을 들은 순간 희미한 옛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20여 년 전 퇴계가 9개월 동안 단양의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무렵 퇴계를 도와 인사와 비서노릇을 하던 이방아전이었던 것이다. “그대의 이름이 여삼이가 아니었던가.” “그렇습니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쇤네의 이름까지 아직 기억해 주시다니요.” “그뿐인가. 그대는 나에게 삼베까지 주려하지 않았던가.” 퇴계의 말은 사실이었다. 퇴계가 20여 년 전 명종4년 10월, 단양군수를 사직하고 이웃한 풍기로 전근가기 위해서 죽령고개를 넘고 있을 때 퇴계가 탄 가마를 관졸들이 헐레벌떡 쫓아왔었다. 그 중에 앞장을 선 사람이 이방 여삼이었던 것이다. 그때 여삼은 손에 다발을 들고 뛰어오지 않았던가.‘무슨 일이냐.’고 퇴계가 묻자 이방이 나서서 ‘나으리, 이것은 삼베를 짜는 삼이옵니다. 이것은 아전에서 거둔 것인데, 퇴임하는 사또께서 노자로 쓰기로 전례가 되어 있어 가져온 것이기에 바칩니다.’하고 삼베다발을 내어 밀지 않았던가. 아전이란 관청에 딸린 밭으로 동원근처에서 심은 삼이었던 것이다. 아전은 국가의 토지인 만큼 대부분 관아에서 사용하는 비용이나 특히 사또의 개인사비로 충당하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관례에 따라 이방을 앞세운 군졸들이 삼베를 거두어 퇴임하는 퇴계에게 가져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 儒林(625)-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8)

    儒林(625)-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8)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8) 비록 간략하게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책만이 벽에 쌓여있고, 서탁 위에는 분매 한그루가 놓여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서탁 위에 놓인 분매 한그루는 바로 두향이가 퇴계를 위해 보내온 정표이니, 퇴계가 ‘비록 옛사람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결코 얕지 않도다.’라고 도산을 영탄(詠嘆)하는 것은 두향이가 보내온 분매가 뿜어대는 천향(天香)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물끄러미 분매를 완상하던 퇴계가 한 곁에 물러서 있던 유생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누가 이 매화를 가져왔더란 말이냐.” 그러자 유생이 대답하였다. “웬 낯선 노인 하나가 선생님께 드릴 물건이 있다면서 걸망에서 꺼냈나이다.” “그 노인은 어디 있느냐. 이 매분만을 전해주고 떠나버렸느냐.” “아니옵니다.” 유생은 대답하였다. “아마도 서당 앞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나이다. 선생님께오서 매화꽃을 받아보신 후 자신을 부르시면 들어와서 문안인사를 여쭐 것이고, 부르시지 안 사오면 그대로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 것이라 하였나이다.” “그러면 어서 가서 그 노인을 들어오도록 하게나.” 퇴계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생은 알았다는 듯 물러서며 대답하였다. “알겠나이다. 가서 노인을 불러 대령토록 하겠나이다.” 유생은 서둘러 완락재를 벗어났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은 서당에서 함께 기거하고 있는 제자들이나 문인을 빼어놓으면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퇴계언행록’에 보면 제자 김성일은 스승 퇴계가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 앞에서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퇴계가 문인이나 제자들을 제외하고 찾아오는 손님들 앞에서 침묵을 지켰던 것은 오로지 ‘마음을 휘어잡고 이치를 궁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침묵은 마치 화두에 전념하기 위한 불교적 묵언(默言)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스승께서 남루하기 짝이 없는 낯선 노인을 손님 대접하여 직접 자신의 완락재로 부르고 있음이 아닌가. 과연 노인은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이제라도 먼 길을 떠나려는 채비를 갖추듯 신고 있던 헌 짚신을 버리고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 있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유생이 나타나자 노인은 일어서면서 물어 말하였다. “선생님께오서 잠시 들어오시랍니다.” 순간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식의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 [씨줄날줄] 대통령의 귀향/진경호 논설위원

    예부터 귀향(歸鄕)은 버림의 이웃 말로 통했다. 중국 진(晋)나라 시인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통해 부와 명예를 버리고 낙향하는 기쁨을 노래했다.‘世與我而相違 復駕言兮焉求(세여아이상위 복가언혜언구)-세상과 내가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 다시 수레를 몰고 나간들 뭘 얻겠는가.’ 일개 현령에 불과했으나 그는 이마저도 털어내야 할 짐으로 봤다. 이 도연명을 흠모한 퇴계 이황도 마흔셋 나이에 성균관사성의 관직을 버리고 지금의 경북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 고향 땅으로 내려가 시를 읊었다. 낙동강 상류에서 따온 아호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로 바꾼 것도 이 무렵이다. 귀향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파는 많은 장삼이사들에게 귀향을 성공한 자의 특권으로 만들었다. 버릴 것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 고향인 게다.8명의 역대 대통령조차 퇴임 후 귀향을 꿈 꿨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고향 대신 교도소로 향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 불행한 우리 정치의 질곡을 말해 준다. 노무현 대통령이 귀향의 꿈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후년 2월 퇴임한 뒤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살려고 땅을 물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차례 낙향의 뜻을 밝혀 왔다. 지난해 9월 시인인 아벨 파체코 코스타리카 대통령과 만나 “시골로 내려가 시를 쓰고 싶다.”고 했고, 올 1월엔 임업인들과의 오찬에서 “고향에서 숲과 생태계 복원 일을 하고 싶다.”고,4월 제주에선 “읍·면 수준의 자치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의 귀향은 반가운 일이다. 후임 아이젠하워의 취임식 다음날 고향 미주리주행 열차표를 손에 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사진을 우리도 가졌으면 한다. 하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나라당은 “국민은 퇴임 뒤가 아니라 당장 살 길이 막막하다.”고 날을 세웠다. 민노당은 얼마 전 “김재록 게이트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하면 편히 귀향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퇴임 뒤 보자.”는 반노(反盧)진영 네티즌들의 결기는 섬뜩하다. 복잡다단한 정치현실이 62세의 젊은 전직 대통령을 놔둘지도 의문이다. 남은 기간에 달렸다고 본다. 역사를 바라보며 미래를 얘기하되 국민 곁에서 하길 바란다. 귀향의 맛도 결국 민심에 달린 게 아니겠나.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儒林(62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儒林(624)-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7) 그 무렵 퇴계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중병을 퇴계 자신은 ‘극병(劇病)’으로 부르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퇴계는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예감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퇴계의 심정은 퇴계 자신이 쓴 ‘도산기(陶山記)’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신유년(辛酉年)에 이르기까지 5년 만에 당사 두 채가 다 이루어지니, 비로소 거처할 만하게 되었다. 당은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라고 부르고, 동쪽 한 칸은 암루헌이라고 부르며, 합해서 도산서당이라고 현판을 내붙였다.…(중략)… 나는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으므로 비록 산중에 살아도 마음껏 책을 읽지 못한다. 항상 속이 울적하고 숨을 조절하기 힘들다.…” 자신의 표현처럼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었던 퇴계’. 그러한 퇴계에게 20여년 만에 두향이가 인편으로 붙여온 빙기옥골의 백매화분은 퇴계의 지친 심신을 쇠락하게 만드는 청량제(淸凉劑)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심정은 ‘도산기’에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때로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상쾌해지는 때가 있다. 이럴 때에는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고 하면 감개가 저절로 생긴다. 그러면 곧 책을 던지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서 난간에서 연못을 구경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사(社)를 찾기도 하며, 혹은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하며,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며, 혹은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기도 한다. 마음대로 걸어 다니며 시름없이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저절로 일어나 한껏 즐긴다. 집에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책만이 벽에 쌓여 있고, 서탁 위에는 분매 한 그루가 놓여 있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마음을 휘어잡고 이치를 궁구한다. 이따금 얻는 것이 있으면 다시 반기어 흐뭇함에 음식도 잊어 버린다. 혹 틀린 것이 있으면 벗을 찾아 물어보고 그래도 알지 못하면 분발하여 속으로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우선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끄집어내어 허심탄회하게 생각하며 저절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하다. 산새가 즐겨 울고, 초목이 우거지고, 바람, 서리 차가워지고, 눈과 다리 싸늘하게 빛을 내니 사시(四時)의 경치 서로 다르고 흥취 또한 끝이 없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바람이 너무 불거나 비가 너무 오는 경우가 아니면 어느 때 어느 날 나가지 아니함이 없다. 나가면 이러하고 돌아오면 또 이러하다. 이것이 한가롭게 병을 조섭(調攝)하는 하염없는 일이다. 비록 옛사람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결코 얕지 않도다.”
  • 儒林(62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6)

    儒林(62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6)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6) 서탁 위에 올려진 분매의 모습을 본 순간 퇴계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흰 매화꽃이 극채색(極彩色)의 요염을 드러내고 있었고, 또한 꽃들은 천진한 옥설(玉雪)향기를 뿜고 있었다. 매화불매향(梅花不賣香). ‘매화는 춥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은 퇴계가 매화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 이 문장의 뜻을 통해 퇴계는 한평생 선비로서의 기개와 청빈을 지켜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생이 들고 온 매분에서는 낯익은 천향(天香)이 풍겨오고 있음이었다. 그 향기는 퇴계가 까마득히 잊었던 추억의 내음이었다. 언제였던가. 퇴계는 서탁 위에 놓인 매분을 쳐다보면서 생각하였다. 저 매화 꽃의 천향을 맡았던 적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그 순간 퇴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올해 퇴계의 나이는 68세. 퇴계가 그 천향의 냄새를 맡았던 것은 까마득한 48세 때의 일이었으니 정확히 20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처음으로 매화의 향기와 같은 여인향기를 맡은 것은 바로 두향(杜香)으로부터였던 것이다. 그때 두향의 나이는 18세. 퇴계가 48세의 장년의 나이에서 어느덧 죽음을 바라보는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듯 두향이도 이제는 소녀의 나이에서 초로의 나이로 접어든 중년일 것이다. 퇴계는 알 수 있었다. 비록 화분에 심어진 분매이긴 하였지만 그 등걸은 기고(奇高)한 모습으로 용틀임치고 있었다. 적어도 20년은 족히 되었을 매화 등걸이었다. 매화를 기르는 데에는 가지치기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지치기에 따라서 매화의 모습이 고(古)하고, 아(雅)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 그 요령으로 말하면 등걸은 드러나야 하고, 줄기는 구부러져야하며, 가지는 성깃해야 하고, 꽃은 드문드문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매화 중의 으뜸은 단연 백매지만 백매 중에서도 최고는 육화(六花)의 엽이 모두 흰눈처럼 새하얀 단엽(單葉)이 최고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평소에 매화를 좋아하는 퇴계로서도 그 꽃은 처음 보는 최고의 빙기옥골(氷肌玉骨)이었다. 문자 그대로 흰눈과 얼음 같은 살결과 옥과 같은 뼈대를 지닌 화괴(花魁)였던 것이다. 이런 매화를 가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사람. 그것은 두향이뿐이었다. 두향이가 매화를 양매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는 것은 오늘날 두향의 묘비에 새겨진 다음과 같은 비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지 않을 것인가. “성명은 두향. 중종조 시대의 사람이며, 단양태생. 특히 거문고에 능하고 난과 매화를 사랑하였으며, 퇴계 이황을 사모하였다.” 비문에 새겨진 대로 매화를 사랑하여 양매를 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두향. 두향은 퇴계와 헤어진 20여 년 동안 오로지 임을 생각하는 상사(相思)하나로 분매를 가꾸고, 가지치고. 꽃을 피워 마침내 퇴계가 평생 동안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아취고절(雅趣高節)의 매화 한그루를 이루어낸 것이다.
  • 儒林(62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儒林(622)-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5) 유생은 황급히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방금 선생으로부터 열정의 물을 떠오라는 분부를 받고 물동이를 들고 서당 앞뜰로 나온 길이었다. 도산서당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중간의 한 칸인 완락재(玩樂齋)에 퇴계는 거처하고 있었다. 완락재 앞에는 여느 집의 대청마루와 같은 기능을 가진 암서헌(巖栖軒)이란 넓은 마루방이 있었다. ‘완락재’란 이름은 퇴계가 주자의 ‘명당실기’에 나오는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 감상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하다.’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고, 몸소 제자를 가리키던 암서헌이란 마루방의 당호도 주자의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갖지 못하였더니 바위에 깃들어 살자 조그만 효험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라는 글에서 인용하여 온 것이었다. 퇴계는 언제나 완락재에 기거하며 학문을 연구하였고 암서헌에서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지금은 휴식시간, 서당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숙소에 유하면서 바깥나들이를 삼가고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시간이었던 것이다. 완락재. 주자의 말처럼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 감상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곳’, 주자철학의 성실한 계승자이자 주자철학의 가장 소중한 해석가였던 퇴계.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의 숲이 맹자와 주자를 거쳐 마침내 해동의 이퇴계에 의해서 성리학적 이치가 완성된 바로 그곳 완락재. 이 완락재에 대해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공경을 주로 함은 의리를 길러 모으는 공력이 있네. 잃지도 억지도 기르지도 않는 이치를 차츰 통달하여 나가서 주렴계의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르게 되니, 천년 이어내린 즐거움이 이와 같았음을 알겠노라.” 퇴계의 시속에 나오는 ‘천년 이어 내린 즐거움’, 즉 천년 이어 내려온 유학의 정신을 바로 완락재에서 되새겨 퇴계는 바로 이곳에서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유생은 서당 서북편 부엌에 물동이를 놓아두고 방금 떠온 우물물을 종지에 담아 퇴계가 머무는 완락재로 다가갔다. “물을 떠왔습니다.” 퇴계는 서탁 위에 책을 놓고 안석을 벽에 세우고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놓고 가거라.” 한번 독서에 열중하면 스승은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선생님” 조금 전 노인으로부터 분매를 받아왔으므로 유생은 선뜻 물러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무슨 일인가.” “웬 낯선 노인 하나가 선생님께 드릴 물건이 있다하여 가져왔나이다.” “그게 무엇이냐.” “바로 이것이나이다.” 유생은 분매를 조심스럽게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 儒林(621)-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4)

    儒林(621)-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4)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4) “하오면” 노인은 등에 메었던 걸망을 벗어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퇴계 선생께오서 서당에 계시옵니까.” “무슨 일이오.” 유생은 우물 속에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두레박에 든 물을 물동이에 가득 채우면서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한눈에 보아도 서당 안을 드나들 수 있는 선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놈도 아닌 중인의 행색을 하고 있었으나 선생의 안부를 물을 만한 위치의 사람은 더더욱 아니어서 유생의 말투는 자연 시비조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으리께 드릴 물건이 있어서 그러나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벗은 걸망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우물가에 놓았다. 유생은 노인이 꺼낸 물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분매였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도 그 매화는 여느 매화가 아니었다. 흔히 흰눈이 내리는 엄동설한에 피는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고 하였고,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奇友),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古友)라 하였는데, 노인이 꺼내놓은 매화는 고우 중의 으뜸인 백매(白梅)였던 것이다. 유생은 매화에 문외한이었으나 퇴계 선생이 유난히 매화를 사랑하여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해 부르면서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유난히 매화를 사랑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스승께서는 서당 서동쪽에 절우사(節友社)의 단을 쌓고 솔, 대, 매화, 국화를 심고 이들과 함께 절의를 맹세하는 결사를 이루지 않았던가. 이때 스승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솔과 국화는 도연명 뜰에서 대와 함께 셋이더니 매화형(梅兄)은 어이해서 참가 못했던가. 나는 이제 넷과 함께 풍상계를 맺었으니, 곧은 절개 맑은 향기 가장 잘 알았다오.” 풍상계(風霜契). 문자 그대로 함께 바람과 서리를 견디는 결사를 맺은 스승 이퇴계. 스승은 이들 중에서 매화를 가장 사랑하여 매화를 형으로까지 부르고 있지 아니한가. “어디서 온 누가 보내는 물건이라고 여쭙는단 말이오.” 남루하기 짝이 없는 걸망에서 나온 화려한 분매를 보자 유생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졌다. “그것은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나으리께서 이 분매를 받아보시면 자연 누가 보낸 것인가 알아보실 것이나이다. 쇤네는 이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나으리께서 매화꽃을 받아보신 후 쇤네를 부르시면 들어가서 문안인사를 여쭐 것이옵고, 부르시지 않으시오면 그대로 이 우물가에서 찬물이나 몇 잔 더 마시며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 것이나이다.” “알겠네.” 유생은 선뜻 한 손에는 물동이를 다른 한 손에는 노인으로부터 받은 분재를, 들어올리며 대답하였다.
  • 儒林(62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儒林(620)-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3) 퇴계가 특히 이 돌우물을 사랑하고, 그 샘물의 맛을 ‘달고 맑다.’고 극찬하고,‘서로의 마음을 얻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맹자의 말처럼 자신의 학문이 아홉 길이나 팠으나 아직 수맥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남은 인생을 바로 이 돌우물이 위치한 도산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며 진리의 근원에 이를 때까지 여생을 거경 궁리할 것을 결심하는 단심가(丹心歌)였던 것이다. 분황(焚黃). 조선시대에 있었던 사후의식으로 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조정에서 추증된 관직의 사령장과 황색종이에 쓴 부본(副本)을 주는데, 이를 받은 사람은 추증된 선조에게 고하고 황색종이 부분을 그 자리에서 태우는 의식을 분황이라고 하였다. 퇴계는 이미 59세의 나이 때 이 분황의식을 치렀었다. 넷째형 해(瀣)가 사화에 휩쓸려 유배 도중에 장독으로 급사하게 되었으며, 훗날 조정으로부터 억울하게 죽어 사후에 벼슬을 받게 되었으므로 퇴계는 자신이 직접 분황의 제사를 올려 주었던 것이다. 그 때 퇴계는 가장 사랑하였던 형 온계의 무덤에서 조정에서부터 내려온 황색부본을 태우며 울면서 생각하였다. 이 종잇조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죽은 후에 ‘정민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추증으로 ‘대사헌감사’란 벼슬이 내려진다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퇴계가 67세 때 명종이 승하하고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여론이 분분하였음에도 끝내 이를 물리치고 서당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이미 자신에게 내려지는 벼슬이 죽은 사람에 내려지는 분황에 불가하다는 자의식 때문이며, 여생동안 진리의 원천인 수맥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한 우물을 파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남아 있는 도산서원 앞마당에 있는 돌우물,‘열정’은 퇴계의 마음을 닦는 심경(心鏡)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돌우물 곁에 내려진 두레박을 천천히 들어올려 우물 속으로 집어 던졌다. 첨벙― 바위틈을 뚫고 지표로 솟아오른 샘물의 깊이는 아득하였다. 두레박 가득 물을 담은 노인은 끈을 잡아 당겼다. 이윽고 노인은 두레박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하였다. 갈증이 해소된 듯 남은 두레박의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서당에서부터 인기척이 있었다. 갓 쓴 유생 하나가 서당 쪽으로부터 물동이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마실 물을 떠갈 요량 같았다. 우물가에서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던 노인은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며 물어 말하였다. “여기가 도산서당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퇴계 선생님이 계시오신 서당이 맞습니까.” “그렇소이다.” 유생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남루한 차림의 노인을 쳐다보면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 儒林(619)-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

    儒林(619)-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 문 안을 기웃거리던 노인은 문 위에 내걸린 ‘도산서당’이란 편액글씨를 발견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제대로 찾아와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서당이라면 분명히 글 배우는 소리가 문 안에서부터 들려올 것이고, 오가는 서생들의 인기척 소리도 들려와야 하지만 서당 앞뜨락은 왠지 빈 절간처럼 적적하고 적요하였다. 그 순간 노인은 무엇을 발견한 듯 천천히 지친 걸음을 움직였다. 마당 한구석에 돌로 쌓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앞에는 화강석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洌井” 직역을 하면 ‘맑은 우물’이란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돌우물 앞에 이름을 새긴 화강석을 세운 것도 퇴계 자신이었다. 퇴계가 10년 동안의 계당을 버리고 도산서원을 짓기로 결심하고 남쪽 기슭에 터를 점지한 것도 바로 이 돌우물 때문이 아니었던가.‘도산기’에서 퇴계가 ‘…돌우물의 물이 감미로워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퇴계가 얼마나 이 샘물에 심취되어 있었던가를 미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우물은 퇴계가 터를 확보하기 전에 이곳에서 밭을 부쳐 먹던 농부가 사용하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퇴계는 이 샘을 만나 물의 진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또한 이름모를 우물은 퇴계를 만나 자신을 알아주고 이름을 붙여주는 은인을 얻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다.’는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마음은 ‘맑은 우물(洌井)’이란 시 속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서당의 남쪽 돌우물의 물은 달고 맑네. 천년 오랜 세월은 산안개 속에 묻혀 있었으니, 이제는 언제까지나 덮어 놓지를 말게나. 돌 사이 우물물이 너무 맑고 차가워 저 혼자 있어도 어찌 측은한 생각이 들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 여기 터 잡고 엎드려 사니, 한 바가지의 물로 샘과 내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구나.” 한갓 돌우물에 불과한 열정을 두고 ‘서로 마음을 얻었다.’고 노래한 퇴계의 마음은 일찍이 맹자가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하고자 함이 있는 사람이 비유해 말하면 마치 우물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우물파기를 아홉 길이나 파내려 갔다 하더라도 샘솟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물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인 것이다.(掘井九 而不及泉 猶爲棄井也)” 맹자의 이 말은 일찍이 공자가 ‘자한(子罕)’편에서 ‘학문하는 것을 비유하건대 산을 쌓아올리는 것과 같다. 돌과 삼태기가 모자라는 데서 그만두었다면 그것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가리킨 내용을 부언하여 설명하였던 것이다 즉 우물을 깊이 파들어 가더라도 수맥(水脈)에 도달하기 전에 그친다면 그것은 우물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맹자의 가르침은 이 무렵 ‘위기지학’에 전념하고 있던 퇴계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 儒林(61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儒林(61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1568년 선조원년 춘3월. 도산서당 정문 앞에 행색이 남루한 노인 하나가 이제 막 도착하여 문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아직 초봄이라곤 하지만 한기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노인의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허리에 메고 있는 걸망에는 해질 때 갈아 신을 짚신이 대롱대롱 매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먼 길을 내쳐 걸어온 모양이었다. 정오가 지나고 어느덧 짧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도산서당은 이퇴계가 완전히 퇴거계상(退居溪上)하여 살고 있었던 은둔처였다. 단양과 풍기군수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는 고향에 ‘계상서당’을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계당시대는 10여 년간 계속되었는데, 청년 이율곡이 스승 퇴계를 만나러 와서 2박3일의 운명적인 상봉을 하였던 바로 그 곳이었다. 그러나 계당은 좁고 허술하였으므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적당치 않았으므로 퇴계는 그의 나이 57세 되던 1557년 도산 남쪽 기슭에 서당을 새로 짓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여기는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앞으로 산과 물을 굽어보고 있고 골짜기 속은 깊숙하고 넓으며 바위기슭이 선명하고 돌우물의 물이 감미로워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퇴계 스스로가 쓴 ‘도산기’에 나와 있는 묘사 그대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땅을 발견한 퇴계는 ‘그 안에서 밭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가 있어 대금을 치르고 사서 토지를 확보한 후’ 1558년 3월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는 착공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서당을 짓는 일은 퇴계 집안의 종택으로부터 서쪽으로 4㎞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용수사라는 절의 법연스님이 도맡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사이 퇴계는 잠시 명종에게 불려 한양에서 공조판서라는 중책을 제수하고 있었는데, 퇴계는 그동안에도 법연에게 서당의 설계도를 그려 보이는 등 서당의 건립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당을 맡아 짓던 법연은 1년 만에 입적하고, 뒤를 이어 역시 용수사에 있던 정일스님이 뒤를 이어 공사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유년(1561년)에 이르는 5년 동안 서당인 도산과 살림집인 농운정사 두 집이 대강 이루어져 퇴계는 마침내 평생소원이었던 자신의 서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퇴계는 온 식구들을 이끌고 정사로 이주하였으며, 그의 가문을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는 대학사(大學舍)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즐거움은 퇴계가 지은 ‘도산서당’이란 시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순임금은 그릇을 구우면서 즐겁고 편안했고, 도연명은 농사를 지으면서 즐거운 얼굴이었네. 성현의 마음을 내 어찌 알겠냐만 백발의 나이에 돌아와서 숨어 사는 즐거움을 맛보노라.” 스스로 노래하였던 대로 퇴계가 꿈에 그리던 도산서당으로 돌아와 숨어사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은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었다.
  • 儒林(617)-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53)

    儒林(617)-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53)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53) 그러고 나서 율곡은 ‘퇴계 선생을 곡하다(哭退溪先生)’란 추도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좋은 옥 정한 금처럼 순수한 정기 타고 나시어, 참된 근원은 관민(關)에서 갈려나왔다. 백성들은 위아래로 혜택 입기를 바랐건만, 자신의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을 닦으셨네. 호랑이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의 일 변했건만, 물결 돌리고 길 열으시니 저서들이 새롭구나. 남쪽 하늘 아득히 저승과 이승이 갈리니, 서해 물가에서 눈물 마르고 창자 끊어집니다.” 만사(輓詞)에 나오는 관민(關)은 각각 관중(關中)과 민중(中)을 가리키는 것으로 송나라의 유학자인 장재(張載)와 주희가 각각 여기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전의되어 장자와 주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스승 퇴계가 바로 장자와 주자의 학통을 이어받았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한 ‘백성들은 위아래로 혜택입길 바랐건만 자신의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을 닦으셨네.(民希上下同流澤 迹作山林獨善身)’라고 노래함으로써 ‘위기지학’으로서의 스승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만사는 율곡이 질풍노도의 시절 2박3일의 짧은 만남을 통해 방황의 길을 저버리고 옛 학문의 길로 다시 나아갈 때 퇴계가 내려준 잠언의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때 퇴계는 율곡에게 ‘거경궁리’란 유가적 화두를 결택해 주는 한편 ‘소자가 평생 좌우명 삼을 수 있는 잠언(箴言)을 한 말씀 내려주십시오.’하고 율곡이 청원하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잠언을 율곡에게 주었던 것이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일을 좋아하기를 경계하라.(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이 잠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퇴계는 유학의 본원을 위기지학인 ‘입언수후(立言垂後)’에 두고 있고, 율곡은 유학의 본령을 ‘위인지학’인 ‘출세행도(出世行道)’에 두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퇴계가 율곡에게 남긴 잠언은 어찌 율곡에게만 국한된 일일 것인가. 그 잠언이야말로 천고에 빛나는 영원불변의 대진리일 것이니. 퇴계가 죽자 율곡은 제문에서 ‘아아, 물어볼 데를 잃고 부모를 잃었도다. 물에 빠져 엉엉 우는 자식을 뉘라서 구해줄 것인가.’하며 슬퍼하는 한편 ‘아아, 슬프도다. 나라의 원로를 잃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것 같고, 용과 호랑이가 망했으며 경성(景星)이 빛을 거두었도다.’라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율곡에게 비친 경성, 퇴계의 상서로운 별빛은 23세 때 율곡이 지은 ‘천도책’의 명문장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이니, 퇴계야말로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참스승인 것이다.
  • 儒林(616)-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52)

    儒林(616)-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52)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52) 마치 인류가 낳은 최고의 성인이었던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연상시키는 퇴계와 율곡의 만남을 통해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가 벌인 이 이중창의 대화는 짧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를 맞는 우리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는 바로 교육.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의 운명은 청년의 교육에 달려 있다.’는 금언이 아니더라도 교육이야말로 국가의 먼 장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는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것이다. 그러한 백년지계인 교육정책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는 이즈음 퇴계와 율곡이 나눈 마지막 대화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교육의 지표를 설계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일 것이다. 즉 ‘위기주의자’로서의 퇴계와 ‘위인주의자’로서의 율곡의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우리의 교육이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명예와 권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공자가 주장하였던 ‘옛날에 배우고자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였다.(古之學者爲己)’라는 군자학에서 비롯된 ‘위기지학’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퇴계가 율곡의 간곡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결연히 고향으로 낙향하였던 것은 이러한 ‘위기지학’으로서의 학문적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태도인 것이다. 우리교육의 목표가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과 명예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서의 공명주의에서 벗어나 자기의 인격, 학식, 덕행의 향상과 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위기지학’의 원론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오늘날의 교육적 위기는 자연스럽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와 율곡이 16세기의 현실에 맞추어서 나눴던 짧은 대화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가진 통시성과 일치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위대한 철인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비교할 순 없겠지만 퇴계가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면서 대정치가였던 율곡보다 한층 더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위기주의자’로서의 면모 때문이었던 것이니, 퇴계는 그로부터 4년 뒤인 선조4년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이때 율곡도 병환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잠시 처가가 있는 해주의 야두촌으로 돌아가 야인생활을 하고 있었는데,1570년 12월 퇴계가 별세하였다는 부고가 오자 율곡은 신위를 만들어 놓고 곡을 하였다. 소대(素帶)를 차고 외실에서 거처하였으며, 동생 우를 시켜 제문을 바치도록 하는 한편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심상하였다. 비교적 자대하는 면이 있어 고집이 세고 남을 비평하기를 잘하여 여간해서는 타인을 대단하게 평가하지 않았던 율곡이었는데, 유독 퇴계만은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여 평생동안 스승으로 섬겼던 것이다. 그러한 스승 퇴계가 마침내 70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율곡은 제문에서 퇴계를 일러 ‘천지사이에 뛰어난 기질을 모아서 타고나 은연함이 옥과 같고 모습이 순박하다.’고 칭송하였으며,‘행실은 가을 물처럼 맑고 깨끗하다.’고 표현하였다. 또한 스승의 학문에 대해서는 ‘뭇 학설에 서로 다른 점을 절충하여 하나로 모으되 주자를 스승으로 하였다.’고 추모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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